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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3633><colcolor=#fff> | |||
<nopad> 권오창(1948)|권오창,정부표준영정 54호, 1994년[1] | |||
출생 | 1342년[2] 10월 6일 (음력 충혜왕 복위 3년 8월 28일) | ||
경상도 봉화군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3] | |||
사망 | 1398년 10월 6일 (향년 56세) (음력 태조 7년 8월 26일) | ||
한성부 송연방 남은 사저 (現 서울특별시) | |||
피살 | |||
묘소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266[가묘][사당] | ||
복권 | 1871년 5월 5일 (음력 고종 8년 3월 1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263633><colcolor=#fff> 봉호 | 봉화백(奉化伯)
| |
시호 | 문헌(文憲)1871년(고종 8) | ||
본관 | 봉화 정씨 | ||
자 | 종지(宗之) | ||
호 | 삼봉(三峯) | ||
공훈 | 중흥공신(中興功臣, 일명 흥국사 9공신, 1389) 개국공신 1등(1392) | ||
최종관등 | 숭록대부(崇祿大夫) | ||
학력 | 최림의 문하 (1351년) 이제현의 문하 (1350년대) 이색의 문하 (1350년대) 사마 성균시 급제 (1360년) 문과 임인방 동진사시 급제 (1362년) | ||
저서 | 《삼봉집》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의론(經濟議論)》 《불씨잡변》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리편》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진맥도결(診脈圖結)》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 《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 《진법》 | ||
경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부모 | 부: 정운경 (鄭云敬, 1305 - 1366) 모: 영주 우씨 (1307 - 1366) | ||
형제자매 | 남동생: 정도존 (鄭道尊, 1345년 - 1398년) 남동생: 정도복 (鄭道復, 1351년 - 1435년) | ||
배우자 | 경주 최씨 (? - ?) | ||
자녀 | 장남: 정진 (鄭津, 1361 - 1427) 차남: 정영 (鄭泳, ? - 1398) 삼남: 정유 (鄭游, ? - 1398) 사남: 정담 (鄭湛, ? - 139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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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백성이 인군을 버리고 따르는 데에 있어서는 털끝만 한 여지도 용납되지 않는다."[6]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하민지약야 불가이력겁지야 지우야 불가이지기지야)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득기심즉복지 부득기심즉거지 거취지간 불용호발언)
《조선경국전》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하민지약야 불가이력겁지야 지우야 불가이지기지야)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득기심즉복지 부득기심즉거지 거취지간 불용호발언)
《조선경국전》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삼봉집》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 사상가, 혁명가.《삼봉집》
주군인 태조 이성계를 도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한 조선 건국 작업에 참여한 개국공신 중 한 명이었다.[7] 조선에서 그의 직위는 종1품 판삼사사에 머물렀으나 그를 등용한 주군이자 강력한 뒷배인 이성계의 지지하에 권력을 지닌 조준, 남은 같은 총신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표전문 사건으로 명나라 홍무제의 노여움을 사 조선과 명나라 양국간의 외교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사병 혁파를 시행하였고, 이후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대표 저서로는 《불씨잡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다만 불심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가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못했던 것을 보면, 불교 자체보다도 당시 고려 사회를 타락시킨 부패한 불교 세력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향리 집안 출신이다. 고향은 경상도 봉화군 혹은 양광도 단양군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의 본관인 봉화 정씨는 봉화 지방에서 호장을 세습해 온 호족 세력으로 정도전은 이런 연고로 인해 봉화백으로 작위를 받았다. 다만,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라서 출신 성분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 붙고는 했다.1351년 11세때 영주의 유명한 선비 진중길의 사위 최림의 문하에서 기초학문을 배웠는데, 이때 최림에게 시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8] 신사년 십운과(十韻科)에 합격한 이후 최림은 병부원외랑을 지냈으며 1356년 원나라 요하에 하정사로 가다가 도둑을 만나서 죽었다. 정황상 최림이 죽고 나서 정도전은 이제현의 문하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부친 정운경(鄭云敬)이 1350년대 중앙 관료가 되어 벼슬을 시작하자 정도전도 개경에서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이색과 교류하면서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 하륜 등 유학자들과 함께 유학을 공부했다.
1360년 공민왕 9년 성균시에 급제했으며, 1362년 공민왕 11년 고려문과 임인방(壬寅榜) 동진사(同進士)에 선발인원 33명 중 22등이자 12위로 급제했다.
2.2. 짧은 관직 생활과 낙향
젊은 시절에 신진사대부로서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과거 급제 후 젊은 신진파로서 공민왕의 총애를 받기도 했으나 공민왕 시해 이후 귀양을 가게 된다.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몰락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을 비판하고 원나라와는 단교하며 명나라와 친해지자는 주장을 펴고 있었는데 결국 권문세족의 눈 밖에 나 관리 자리를 잃고 낙향하게 된다. 우왕 때 실세이자 친원파 세족이던 이인임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고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정의롭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복직되지 못한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9] 이 때 같이 이인임을 공격하던 동류들은 처형당하지 않는 한은 대개 복직되었고 심하게는 염흥방처럼 변절해서 권신들에게 줄을 서는 무리들도 있었다.이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후진들을 양성했지만 그 때마다 그를 싫어하는 반대 세력에 의해 학당이 강제로 박살나는 수모를 당한다.[10] 이 때문에 정도전은 유랑을 다니고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나라를 뒤엎고 싶어했다. 그러던 와중에 정도전은 황산대첩으로 고려의 영웅이 된 북방의 이성계를 찾아갔다. 여담으로 정도전이 왕 될 생각도 없는 이성계를 부추겼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행보를 보면 이성계는 정도전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야심이 있었다고 볼법한 행보도 있다. 왜냐하면 정도전이 이성계를 처음 만난 1383년보다 앞선 1380년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성계가 자기 가문이 처음 세워졌던 곳인 전주로 가서 자기 가문의 사람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이면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기 때문.[11] 대풍가 내용 자체는 금의환향해서 기분이 좋고 앞으로 휘하 사람들 잘 뽑고 지내자는 내용에 지나지 않으나, 그 배경이 한고조가 천하를 제패하고 나서 고향인 패현(沛縣)에서 친척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이며 부른 상징성이 있는 노래라 이성계의 위치에서 함부로 불렀다가는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신중치 못한 행위였다. 마침 이성계도 황산대첩에서 이기고 나서 자기 가문이 처음 세워졌던 곳인 전주로 가서 자기 가문의 사람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이면서 읊은지라 더더욱 의심받기 좋았다.
다만 당장 후술되어있듯 이성계는 당시 역성혁명을 할만한 힘이 없었는데, 이성계가 한 개 도에 가까운 지역을 영지로 삼는 대영주라 할지라도 아직 고려 조정에는 이인임, 최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말선초가 막장이었다고 해도 공민왕 당시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는 수도와 서북 지역이 털린 상황에서도 20만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비록 회군했지만 제1차 요동정벌에 5만의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있었다. 심지어 육지가 아닌 바다로 단절되어 있다지만 2만이 약간 못 되는 병력을 대마도 정벌에 보내기도 했다.[12] 동북면, 삭방도, 함길도, 함경도라 불리는 도급 지역 하나의 역량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것이었다. 선친인 이자춘부터 이성계 일가는 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고 있었고 자체의 힘만으로는 마음 내키는대로 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왕권을 노렸던 것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전후해서였고, 노골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은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조민수까지 제거하고 난 1390년 뒤부터였다. 고로 아래 정도전의 졸기에 나온 내용은 정도전이 남의 힘으로 역성혁명을 하기 위해 물주를 찾아가 본 것이었고, 이성계도 넌지시 정도전의 인물됨을 본 탐색전이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후 이성계의 측근 당여가 된 것은 확실하나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명확치 않으며 일설에는 정몽주가 소개해서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것도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기에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의 정확한 시기는 알 방법이 없다.
임금(태조 이성계)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태조실록_1383年. 정도전 졸기에서
실록에 나온 이 대화는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그대로 나왔다. 대사 자체는 6분부터"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태조실록_1383年. 정도전 졸기에서
2.3. 위화도 회군 이후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정몽주와의 정치싸움에 밀려 1391년 9월 20일 유배를 가서 1392년 7월 6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전 정도전이 공을 들인 일은 불교를 배척하여 불교와 가까운 이색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1392년 4월 4일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고도 정도전은 유배지에 있었기에 조선건국에 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조선은 1392년 7월 17일에 건국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간의 공이 있어 조선 개국후 개국공신에 등용된다. [13]
2.4. 조선 건국 이후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뢰를 받으며, 이제 막 세워진 나라의 정비를 갖추는 과정에 참여해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담당했다. 단, 정도전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다. 조선 건국 이후 재상의 자리는 배극렴과 조준이 차지하였고, 조준의 권력은 정도전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였다.실제로 현대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조선 건국 과정에 조준의 역할은 정도전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낮지 않았다. 다만 조준은 앞에 나서는걸 꺼리고 묵묵히 일하는 성향이었고 정도전은 이들보다 자리가 낮았지만 주군인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밀어붙이자 비록 처음에는 천도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성계의 의중에 따라 천도 계획에 찬동하기로 하고, 한양 천도가 확정된 후에는 새로운 수도 건설을 실행했다. 궁과 도성의 배치, 설계부터 완공까지 건설을 맡았으며, 경복궁의 전각이나 문 등의 이름은 대부분 정도전이 정했다.[14] 국정 제도 전반을 개혁했으며 삼군부를 설치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장악해 나갔다.
조선 개국 후 이렇게 거칠 것 없이 잘 나가던 정도전에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명나라였다. 표전문 사건 등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특히 사건의 중심 인물이 된 정도전에게는 여러모로 타격이 컸다. 그러자 정도전은 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첫째는 정도전이 정말로 요동 정벌을 추진하고자 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왕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요동정벌은 명나라와의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개국한 조선의 정당성을 근간부터 갉아먹는 내로남불로 읽혀질 가능성이 컸다. 당장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조선 건국의 개국공신인 조준을 비롯한 다른 개국공신들이나 왕족들도 반대가 심했다. 다음은 요동 정벌에 대한 다른 공신들의 반응 및 정도전과 조준이 요동 공략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 받은 부분이다. 조준의 반대 부분도 당시 조선의 사정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부분이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정도전은 이 일이 있은 지 17일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태조 7년 8월 9일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태조 7년 8월 9일
게다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이성계가 말자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선택해 밀어붙이자 이성계의 뜻대로 따른것은 적장자가 세자가 되는 성리학 근본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는 여지껏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라며 불교 등 성리학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강경 탄압해왔던 정도전 스스로의 행적과 모순이 되는 내로남불이었고,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과 그 지지 세력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에서도 급진적인 개혁 성향과 강한 권력을 독점한 정도전에게 반감이 생기게 되었다. 조준 등 조정의 중신들도 하나둘씩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또한 사병이 전부 혁파되지 못한채 남아 있었다.[16] 그리고 명나라와의 외교 서한에 대한 표전 문제가 발생해 정도전을 소환하라는 위기까지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은 정도전이 다른 공신 출신의 재상들에게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17]
2.5. 최후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정적인 이방원에게 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최후는 매우 비굴한데 이방원에게 "예전에 정안군(태종 이방원)께서 저를 살려주셨으니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빌자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도 그리 부족하냐? 어째서 이 지경으로 악행을 저지르느냐?"라고 일축하며 베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의 죄목은 반역을 꾸몄다는 역모죄가 아닌 종친들을 이간질시키고 해하려 했다는 종친모해죄였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끌려가기 전에 '침실 안에서 단검을 쥐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실록 기록에서는 '단검을 쥐었어도 소심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고 하고 '곧 이방원의 종자 소근의 호통을 듣고 단검을 버린 뒤 끌려나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으로 이어지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람이 단검을 왜 쥐고 있었는지는 의문. 이 기록도 정도전이 끝까지 저항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으며 최후의 비굴한 모습은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정도전 등이 있는)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되었다. 정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볼록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이방원)은 그 사람이 정도전인줄을 알고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도전이 침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마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태조 즉위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하지만 실록에는 바로 뒤에 분위기가 다른 장면을 실어 놓았는데 아들 정담[18]이 "오늘은 정안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거늘, 또 이 쪽을 배반하고 저 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에서도 비굴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이 시는 정도전의 절명시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참고. 현재 시중에 나온 <삼봉집> 단행본에는 '자조'가 맨 마지막에 실려 있지만 실제 <삼봉집>의 편제에는 '자조'가 맨 마지막이 아닌 <삼봉집> 시편 중간에 실려 있다는 것. <정도전>이 참고한 <건국의 정치>에서는 정도전의 '자조'를 절명시가 아니라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올 때 즈음 지었던 시로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대로라면 자조는 정도전의 절명시가 아니라 "고려를 부흥하기 위해 학문에 힘써 왔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나라를 뒤집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식의 자조가 되는 셈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송정' 이성계의 잠저 시절의 호 '송헌(松軒)'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시간이 촉박한 쿠데타 때 정도전에게 이렇게 시까지 남길 시간이 있었을지도 의문. 단, 정도전의 절명시 '자조'는 실록에 없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있는 기록이다."배가 볼록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이방원)은 그 사람이 정도전인줄을 알고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도전이 침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마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태조 즉위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양가공)
서책 속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네.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송정에 한 번 취하니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자조(自嘲)》[19]
여기서 '송정(松亭)'을 남은의 첩이 있던 곳이자 한양의 지명인 '송현방'의 정자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송현방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한국일보 사옥 주변.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일대다. 정도전이 최후를 맞은 곳이며 여기서 '操存省察(조존성찰)'은 '맹자와 주자가 이야기한 성리학의 수양 방법'을 의미한다. 어쨌든 비록 '자조'가 절명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 때문에 실록 속의 비굴한 최후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비하된 감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태조실록>에서 왕자의 난 부분은 다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기도 하다. <삼봉집>의 부록 <사실>의 주석에 의하면 정도전이 죽을 무렵에 "남산에 가서 돌을 깨니 정(釘)이 남아나지 않는구나(南山往伐石釘無餘)"라는 노래가 돌았다고 한다. 여기서 '남'은 남은을 뜻하고 '정(釘)'은 '정(鄭)'과 읽는 음이 같아 정도전을 뜻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도전과 남은이 같은 날에 살해되었다는 말하자면 사망 플래그가 당대에도 돌았다는 이야기. 다만, 사망 플래그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다소 있다. 만약 이것이 사망 플래그였다면 정도전이 방비함에 허술하지 않았을 것이고 가장 정적들을 급히 처리하고자 했을 것인데 당대에도 사망 플래그가 돌았다기에는 너무나 허술하게 죽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위의 노래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의 반대파 측에서 정도전과 남은의 몰락을 암시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민가에 퍼뜨렸을 가능성도 존재한다.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양가공)
서책 속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네.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송정에 한 번 취하니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자조(自嘲)》[19]
정도전의 자는 종지, 호는 삼봉이며, 본관은 안동 봉화이니, 형부 상서 정운경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경자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상제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니, 도전이 도면을 상고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예문 응교로 옮겨서 성균 사예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하여, 을묘년에 북원의 사자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으로 폄직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으로 삼아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과 지공거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가 되어 상명·태일 등 여러 산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으로 옮겨서 《진맥도결》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으로써 충의군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에 승진되고, 윤이·이초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로써 수도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로서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가 되어 《진도》·《수수도》·《경국전》·《경제문감》을 제작하고, 또 악가를 지었으니, 몽금척·수보록·문덕·납씨·정동방 등의 곡이 있었다.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를 수찬하였다. 봉화백으로 봉해지고, 관등은 특별히 숭록대부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 강경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하여 주와 군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20]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한 《고려국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 우연(禹延)의 장인인 김진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이었는데, 우현보의 자손이 김진의 인척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황거정 등을 사주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2번째기사
정도전의 출신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방원 세력이 정도전의 출신을 문제삼고 왕자의 난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종의 자식으로 교묘하게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실록의 왜곡을 지적하는 이들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행장에는 외조부의 이름을 영천 우씨 우연(禹淵)으로 적었지만 실록에서는 단양 우씨 우연(禹延)으로 적어 한자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관련기사[21]“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으로 폄직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으로 삼아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과 지공거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가 되어 상명·태일 등 여러 산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으로 옮겨서 《진맥도결》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으로써 충의군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에 승진되고, 윤이·이초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로써 수도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로서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가 되어 《진도》·《수수도》·《경국전》·《경제문감》을 제작하고, 또 악가를 지었으니, 몽금척·수보록·문덕·납씨·정동방 등의 곡이 있었다.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를 수찬하였다. 봉화백으로 봉해지고, 관등은 특별히 숭록대부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 강경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하여 주와 군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20]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한 《고려국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 우연(禹延)의 장인인 김진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이었는데, 우현보의 자손이 김진의 인척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황거정 등을 사주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2번째기사
정도전은 신원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흘러오면서 무덤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가묘를 만들어 제사지내고 있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시 사리원이며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22]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곳에는 오래된 무덤 몇 기가 있었는데 그 중 정도전의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꾼들이 여러 번 도굴한 탓에 유물이 적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질이 우수한 백자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목관에서 머리만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몸통이 없는걸로 보아 애초에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보였다.[23] 무덤의 규모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초라했지만 부장품의 질, 남아있는 인골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참수당한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굴꾼들이 가져갔는지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결정적인 증거인 지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배하고 찾아다녔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정황상 유골이 자신들의 조상일 가능성은 높아도 물증이 없었지만 문중에서는 일단 정도전이 아니라고 해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라면서 삼봉사 뒤편에 일단 가매장했다. 언젠가 정도전의 것으로 확정이 되면 정식으로 매장하려는 듯. 그래서 삼봉의 가묘는 양재동[24]에 있는게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에 있는데 산대마을은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 정씨 집성촌이다.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와 정도전 기념관도 이 곳에 있다.
3. 평가
냉철한 지성과 강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혁명적 사상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감정적이고 덜렁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나이가 들어 문득 불쌍해 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이 있어 감정 표현에 솔직한 인물임이 드러난다. 또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했는데 말을 몰고 가는 하인이 "대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오셨습니다"라고 지적하자 정도전은 "상관없다. 이렇게 말을 타고 가면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오른쪽 신발만 볼 것이고,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왼쪽 신발만 볼 테니까."라고 웃으며 그대로 짝짝이로 신발을 신은 채로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공양왕 시절에는 반(反) 이성계파 인사였던 우현보를 탄핵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이성계 일파의 참모진들 외에는 기밀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실수로 주변 사람들에게 흘리는 바람에 반이성계파 대간들이 이를 두고 정도전을 집중적으로 탄핵했고 결국 공신녹권 박탈에 유배까지 당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권신들과 감정적 대립 역시 심했고, 그가 우왕 대 복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른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 둘 현실과 타협했지만 혼자 끝까지 버틸 정도로 고집도 질겼던 모양.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로를 훈시하던 오만함이,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후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이 자리잡게 된다.
다만 주변사람과 충돌하고 과격하며 타협을 모르는 면모는 이후로도 여전했으며, 한번 가진 은원은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히 갚는 면모도 있었다. 삼국지의 법정과 어느정도 유사한 점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프로 어그로꾼 성질이 매우 다분한 인물이었다.[25] 법정과 다른 점은 법정은 책략을 내는 책사였지만, 정도전은 책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도전은 정치력과 처세술이 너무 떨어졌으며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기질 때문에 정치적 수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졸기에서도 처음에는 스승과 동문들 간의 사이가 두터웠으나 나중에 원수 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 개국에 반대한 이색과 그 동문들은 작정하고 작살냈다.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인 이숭인 및 정몽주와는 나중에 원수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이숭인은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보낸 사람에 의해 맞아 죽었다. 동문 후배인 하륜은 "술수하는 자 따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까기도 했다.[26] 또 확실히 입증이 되지도 않은 자기 집안의 속설을[27] 유언비어화시켜서 승진을 막고 평소 자신을 음해하고 조롱하며 모욕감을 준 우현보의 집안을 작살냈다.[28] 가장 압권은 스승 이색이 조선 개국 이후 유배를 갔을 때인데 정도전이 외딴 섬인 자연도로 보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경기 계정사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이색을 육지로 유배 보내준게 태조였다. 이 때문에 많은 반감을 샀으며 1차 왕자의 난 때 이 성격으로 미움받아 죽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지인 남은이 말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러한 숙청들을 단순히 개인적인 앙금으로만 치부하는데에는 문제가 있다. 도덕 문제는 둘째치고, 우현보의 집안은 이성계를 위시한 역성혁명파의 대표적 반대파 중 하나였고 이색과 그 동문들 또한 혁명파와 적대적이였다. 고려를 없애고 조선을 세웠다 하나 아직 고려를 지지하는 세력이 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순히 개인적 앙금만으로 숙청했다 보는건 극단적인 견해이다. 물론 숙청의 정도에 정도전 개인의 감정이 어느 정도는 들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조선 건국 이후 권력을 쥐게 된 이후에 다소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같은 사신단으로 갔던 이들 가운데 홀로 명나라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이유로 권근을 탄핵한 것. 아마 권근이 이방원 측 사람이었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취한 행동으로 보이는데, 애초에 표전문 사태로 인해 정도전 본인이 명나라로 가야했던 것을 권근이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나라로 갔던 것인지라 되려 이성계한테도 한 소리 듣고 각하당했다.# 사병 혁파는 조선의 안정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 없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완성이 불가한 것은 물론, 나이 어린 이방석이 세자가 되며 더욱 시급한 일이 되었다. 어리고 세력없는 세자에게 사병과 세력을 갖춘 형제들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에 왕자들의 사병과 권한을 빼앗았으나 그 과정이 치밀하지 못하여 결국 이방원이 외가의 사병을 통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니, 그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대로 공신과 종친을 장악하지도 못했으면서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고 비판하지만, 애초에 정도전 혼자서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을 끌고나가는 마당에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29]
요동정벌론의 경우는 명나라와 정말로 전면전을 추진했다기보다는 명나라에게 보내는 경고성 제스처에다가 덤으로 이를 명분삼아 군제 개혁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데, 조준과 해당 문제로 대립한 행적으로 인해 요동 정벌론이 사병 혁파를 위한 위장이었는지, 아니면 진실로 요동 정벌을 추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이뤄지고 있다.
정도전은 왕이 현명한 재상을 통해 나라를 통치해야 함을 주장하였으나, 왕을 제멋대로 흔들거나 하극상을 벌여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유학자이자 고려의 타락을 보다 못한 정도전이 이를 주장할 리가 없는 것이며, 고려 도당에서 정치에 잔뼈가 굵고 말 그대로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할 권력을 쥔 태조 이성계를 상대로 이것이 가능할 리도 없다. 정도전이 단독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개국 초기의 조선에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따름이다. 이 시기에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워버린 권신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이 밀실에서 정책을 논의하고 그대로 추진해 버리기도 했으며 한양 천도, 세자 책봉 등을 대신들이 반대하더라도 태조가 자신의 뜻대로 그냥 추진해버리기도 하였다.
이것을 그저 정도전이 권력욕에 함몰되어 그랬다는 식으로 판단하면 매우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고 나라 전체적으로 다방면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대표격의 인물이 여러 부처를 어우르며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여러모로 간편하다. 이성계는 무력과 권력의 구심점으로 기능하였으나 나라를 경영하는 것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정도전은 여러 직위에 임명되고 해임되기를 반복하며 개혁을 추진하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준과 결별하게 되었으며 여러 마찰을 빚은 것은 명백한 정도전의 크나큰 실책이자 패착이었다.[30] 굽힐 줄 모르고, 사람을 다스릴 줄 모르며, 주변 관리에 서툰 특성은 꾸준하다. 인간됨이라고 한다면 이런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도전이 스스로 정치력과 처세술이 너무 낮다는것과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대인관계가 엉망이라는걸 증명하는 꼴이었다.
정도전은 집권 기간 동안 과격한 행보를 보였다. 모든 대신들을 총괄하고 국정을 이끄는 위치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한 법이다. 바로 그 과격함, 선천적인 타협을 모르는 기질, 이상주의적인 사상이 정도전을 역성혁명과 개혁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무탈히 정국을 꾸려나가는 것에는 타협할 때는 타협하고, 굽힐 때는 굽히는 능란한 정치가의 모습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그의 기질과 당시 혼란했던 정국은 상극이었다. 고려는 망했지만 구세력 상당수는 살아남았고,[31]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은 컸다. 그 상황에서 명나라까지 딴지를 걸어왔다. 더구나 자신을 지지해주던 왕은 노쇠해지고 세자는 어린데 정도전 자신도 나이 60에 가까워져 개혁의 진행에 조바심을 느꼈을 것이다.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반대파는 기세등등해지는 이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낀 정도전이 점점 과격한 행보를 보인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워낙 문(文) 쪽으로만 치우쳤는지 체구는 뚱뚱했다고 한다. 배가 불룩 나왔다고 하는 묘사가 사서에 있을 정도. 이 점은 본인도 "농부에게 답하다"라는 글에서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라고 자신의 외모를 묘사했다. 또한 정도전의 후배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이었던 권근은 정도전의 용모를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하고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이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라고 묘사했다. 실록에서도 주원장이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자 "배 불러오는 병에 걸려서 안됩니다"라고 하고 정도전이 죽을 때 이웃집으로 도망치자 그 집 주인이 '배 불룩한 사람이 저희 집에 숨었습니다'라고 이방원에게 고발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이방원 집권 이후 이미지 왜곡을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이로 미뤄 보면 정도전은 꽤 풍채가 좋은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등이 펴졌다"는 권근의 묘사를 보면 보기 싫은 비만형은 아니었던 듯.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의하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 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32]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개국 이후 직접 병서를 지어 군사훈련에 어느정도 관여했다는 점도 그것 정도야 문서로 된 자료가 당연히 많고 부르기만 하면 올 수 있는 무관들은 많으니 관심만 있다면 아무나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이 몸담았던 고려시기에는 문관의 밑에 무관들이 모여 군사적인 실무를 수행했다. 이 작업에는 왕자들도 참가했다.
이성계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수어지교였던 듯. 정도전이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이 있다면 뒷배인 태조가 밀어줬으며, 정도전은 그 보답으로 태조를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왕이 된 후에도 정도전에게 스스로를 '송헌거사'라고 칭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었고, 한양 천도 후 연회 자리에서 정도전이 태조의 무공을 찬양하며 지은 '무공곡(武功曲)'과 더불어 태조의 문덕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문덕곡(文德曲)'이 연주되자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이거 니가 지은 노래니까 당장 일어나서 춤 좀 춰봐"라고 명했고 정도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이성계는 웃옷을 벗기고 춤을 추게 하며 흥겹게 놀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용의 눈물에도 재현되어 있다. 다만 정도전이 웃옷을 벗지는 않고 곱사춤만 추는 정도로 표현되었다.해당 장면 또한 이성계가 묏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 정도전도 이를 수행했는데 정도전은 노년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는 이성계에게 "오늘날 묏자리를 잡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니 슬픔을 금치 못하겠나이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도전의 죽음을 전해들은 이성계는 "나의 원훈을 죽였구나"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방원의 정도전 숙청은 애시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가족은 대부분 해를 입지 않았으며[33] 설사 노비 등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몇 년 후 대부분 복권되었다. 정도전은 삼형제의 맏이었는데 무인정사 당시 둘째 정도복은 한성판윤[34]으로 있었다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로 낙향했다. 셋째 정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다. 정도전에게는 경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최습의 딸인 경숙택주 최씨라는 아내와 아들이 4명이 있었고 정진, 정영, 정유, 정담이라고 하지만 아들이 3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둘째, 셋째, 막내아들인 정영, 정유, 정담도 아버지, 삼촌과 함께 무인정사 때 이방원과 싸우다 전사한다. 살아남은 한 명의 아들은 바로 맏아들인 정진(鄭津, 1361~1427)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전라도 수군(水軍)의 일개 병사로 신분이 강등되어 수병 생활을 9년간 하게 되었으며[35] 아내 최씨 역시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이방원은 정진을 판나주목사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복권시킨건 물론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시행했다. 태종이 정책 시행이야 그렇다 쳐도 왜 정적의 아들인 그를 아무 대가도 없이 복권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모해죄로 몰았으며 정적으로만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 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이화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 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으며 애당초 본인부터가 정적에 관대한 면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36] 정도전의 장남 정진에 의하면 정도전은 스스로 시문을 쓰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게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듣고 작성한 원고가 마음에 안 들면 원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진이 <삼봉집>을 간행할 때 아버지가 직접 저술한 원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정도전의 시문을 모아서 아버지의 문집을 편찬했다고 한다.
정진은 이후 여러 지역의 목민관을 역임하였고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세종 대에 형조판서까지 역임하는 등 높은 지위에 올랐다. 개인적인 인품이나 평가도 좋았으며 그가 졸했을 때 세종이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리기도 했다. 정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용인현령을 지낸 정래이고 둘째는 직산현감을 역임한 정속이다. 이 중 정속의 아들이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시기에는 우의정, 성종 시기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삼봉집》에<경제문감>·<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을 추가하여 1464년 목판본으로 중간했으며 이 때 정도전이 찬정한 책을 성종과 세자에게 바치기도 했다. 정문형은 연산군 때 또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대간이 벌떼같이 항의해서 결국 파직됐다. 그러나 이건 정문형 개인이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대간에 의한 새 임금 길들이기 성격이 더 강했다. 연산군도 이에 불만을 가져서 대간들의 공격에 쩔쩔매는 대신들에게 "지금 의논하는걸 보니 정문형이 어떤지는 말도 하지 않고 대간들의 말만 나오고 있다. 내 말은 우습게 여기고 대간들은 두려운건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37] 대간들이 정문형을 반대할 때도 '역적 정도전의 후손이라서 안된다'라는 식의 논리는 꺼내지 않았으며 "벼슬살이 오래 하는 동안 딱히 칭찬할만한 일이 없습니다"라며 매우 궁색한 논리를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이미 정문형의 할아버지인 정진을 왕명으로 복권시켰고 고위 관료까지 역임시켰는데 이제 와서 정도전을 들먹이며 정문형의 벼슬 제수를 막을 수는 없다. 자칫하면 정도전 가문을 복권시키고 후손들을 우대한 선왕들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연산군에게 딴지를 걸고 싶던 대간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를 보면 정도전 개인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역적이 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이 멸족하지 않고 오히려 사대부로서 영달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가문을 이어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으며 오늘날까지도 봉화 정씨는 계속 맥을 이어오고 있다.[38]
벼슬살이 오래 하는 동안 딱히 칭찬할만한 일이 없었다는 대간들의 말답게 정문형은 자기 증조부와는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증조부는 백성을 위한 개혁안과 여러 정책을 내놓았으나 정문형은 세조 시대의 청백리라는 것을 빼면 백성을 위한 개혁안을 내놓지도 않았고 업적 같은 것도 전혀 없어 남긴 것이 없었다. 증조부는 정통성이 부족한 세자 이방석을 배신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정안대군에게 죽음을 맞이했으나 정문형은 정통성 만렙의 왕 단종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붙어 훈구파가 되어 승승장구하며 잘먹고 잘살았다. 그런데 정도전의 친구이자 라이벌이며 조선을 세우는데 반대하고 이방원에게 죽임당한 정몽주의 손자 정보는 자기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 이방원의 적통 단종을 죽는 날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인 사육신을 옹호하다가 세조의 분노를 사서 끌려가는 정보를 보며 그 옛날 이방석을 지키려고 했던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도전의 후손들은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의 후손들을 섬기며 잘 살았으나 정작 정도전 본인은 조선이 끝나기 직전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이미 그와 같이 죽었던 남은은 세종 때 일치감치 복권되었고 심효생도 숙종 때 의안대군이 추숭되면서 복권하게 되었건만 정도전만은 여러 번 복권 논의가 되었어도 신원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국가의 공식 입장이었던거고 민간에서는 의견이 갈렸는데 '선유(先儒)'로 존경하는 사대부들도 나타나는 등 15세기 중반부터 이미 역사적으로는 어느 정도 복권이 된 상태였고 정도전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삼봉집>의 간행도 딱히 금지되지 않았다. 태종 즉위 이후 공신들부터가 이미 태종의 지나친 정도전 죽이기[39]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태종 면전에서 표한 바 있는데 그 공신들은 태종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주역들인 조영무, 조온[40] 같은 이들이다. 공신들은 태종에게 "정도전, 남은이 이숭인 등을 죽인 것은 비록 임금을 속인 행위이나 어디까지나 사직을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하였다. 조영무는 대놓고 "정도전이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용서할만 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태종도 정도전을 죽인 직후에는 함부로 정도전을 폄하하지 못했고 오히려 양정(兩鄭)이라고 해서 정몽주와 동급으로 두었다. 본격적으로 정도전의 명예를 폄하하던 것은 그 이후인데 공신으로서의 화상과 녹권 등 박탈, 이숭인 등을 장살한 건을 이용했다.
문집의 서문을 써 주는 것 자체가 절친한 벗의 글을 모은 것이니 친구로서 몇 자 덧붙인다거나 제자이거나 후손이거나 개인적으로 존경한다거나 해서 자신의 변변찮은 글이나마 더하겠다거나 하는 등 문집의 저자와 자신이 대단히 가까운 사이라고 강조하는 것인데, 처음 <삼봉집>을 교정하고 서문을 쓴 이는 다름아닌 정도전의 정적이었던 권근이다.[41] 권근은 <불씨잡변>을 비롯해 정도전의 저작 상당수의 서문을 쓴 사람으로 이숭인과 정도전의 벗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문집 <삼봉집>을 재편찬하고 서문을 쓴 이는 세조 때의 재상이자 권력자 중 1명이었던 신숙주였다. 신숙주가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과 친했기 때문에 정문형이 <삼봉집>을 중간할 때 도움을 주면서 서문을 쓴 것. 신숙주는 <삼봉집>에서 "당시 영웅호걸이 난립했지만 선생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고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도 정도전을 최고의 선비로 평가했다. 광해군 때의 허균의 경우 정도전을 현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내용이 들어간 탄핵하는 상소를 받았다. 이 때 정도전이 지은 시를 동인시문에 가장 앞에 놓았다고 하는 내용도 상소에 포함되었는데 허균은 그저 국초의 인물이어서 시집에 넣었다고 변명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아서 허균이 정도전을 좋게 평가했거나 시집에 넣을만한 시를 썼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조선 후기의 영조와 정조도 정도전을 높이 평가했다.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단죄된 인물이었다면 문집이 편찬되는 것은 물론 조정의 중신들이 대놓고 서문을 써주거나 문집이 출간되는 등의 행동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도전의 위치는 완전한 역적도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폄하되고 있는 미묘한 상태였다는 얘기. 그러나 정도전은 유학 국가의 시스템을 건설한 사람이면서도 고려 왕조를 쓰러뜨림으로써 유학의 제일 원칙인 충성을 저버린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평가 면에서도 조선 초기의 많은 흑역사들을 모조리 뒤집어쓰고 말았고 그 행적에 대해서도 많은 사대부들이 정도전은 주군을 배신하고 나라를 멸망시킨 간적이라는 이중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특히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는 정도전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반면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성리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과 무관하게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정몽주가 태종 때 복권되고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된 것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정도전은 성리학 이상 국가를 만드는데에 노력하였으나 도리어 그 행동으로 인해 결국 그 국가에서 버림받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평가의 다른 해석으로 태종을 비롯한 조선 왕실은 정도전을 폄하하더라도 일종의 '한계선'을 지켰다는 해석도 있다. 어찌되었든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는데 공이 있는 개국공신이고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와 함께 해왔다. 여기서 한계선을 잘못 넘으면 태조의 정통성 및 조선 건국의 당위성마저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도전을 잘못 옹호했다가는 반대로 정도전을 척살한 태종의 정통성이 깨지게 된다. 그래서 정도전만을 폄하하고 후손이나 일부 공적은 인정해주는 등 다소 어정쩡한 평가를 내린 게 그 결과라는 의미다. 정도전을 굳이 '역모죄'로 끝까지 몰지 않고 '종친모해죄'로 꼽은 점도 이와 연관된다. 복권 움직임은 정조 말년부터 <삼봉집>을 다시 간행하면서 나타났지만 정도전이 공식적으로 복권되고 명예를 회복한 것은 흥선대원군 섭정기에야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정도전을 사면하면서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후손들을 예우하였다.
3.1. 정치 사상
정도전은 왕권(王權)을 견제하는 신권(臣權) 중심 정치 질서를 구상해 민본 정치의 기틀을 닦았다는게 대체적 평가다. 조선 3대 임금 자리에 오르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비극적 생애도 정도전의 미래 구상을 신권 중심으로 파악하는데 이바지했다. 전제적 왕권을 구축하려 한 야심가 이방원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42] 결국 숙청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43] 정도전의 계획을 알기 쉽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은 인사권을 갖는다.
- 재상이 의정부를 통해 6조를 관할한다(의정부 서사제). 6조의 의견이 의정부를 통해 임금에게 전달되므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된다.
- 권한이 강화된 재상은 사헌부의 제재를 받는다.
이 경우 재상은 유학자인 동시에 현실정치 및 경제 감각도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할 것을 전제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 시스템은 주공단이나 제갈량, 관중 등 먼치킨 재상이 권력이 강화되고, 그러면서도 결코 왕의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는 일종의 경영대리인과 비슷한 시스템이었다. 이는 곧 혈통과 봉토에 기반을 둔 권문세족들과 달리 실력 즉 학문적 소양을 갖춘 사(士) 계층이 관료로 등장하는 것이다. 왕의 폭정을 제어할 수 없을 때 반정이 일어났다는 걸 고려해볼 때 재상이라는 더 취약한 대상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44] 유교적으로 보면 이는 역성혁명과 충(忠)에 대한 조화이기도 한데, 맹자는 충을 강조하는 동시에 왕이 천명을 거스르면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상적으로 봐도 진보적인 부분이 있다. 애초에 재상중심주의론 자체가 어느 정도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45], 그 외 모든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모든 농민에게 균등하게 무상분배[46] 민본주의 정치를 이상적으로 삼았던 인물이니만큼 그와 관련한 글들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노비 해방이나 토지 분배 등은 지방 호족이나 향리층 및 관인층의 반발이 극심해 이성계의 힘만으로도 추진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고 개혁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받지 못했다. 윤소종, 조준 같은 강경 개혁파들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윤소종은 강경 개혁파 선봉장이었으나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인 전력이 있었고 귀족 출신이면서도 이성계를 따라 개혁에 앞장 섰던 조준도 그보다는 온건하며 현실적인 고려를 담은 방안을 마련했다.
원 간섭기를 살아온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주성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다만 이건 정도전 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 신진 사대부라면 드물지 않은 부분이긴 했다. 사대부들이 따르던 명나라조차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지성사대의 예로서 섬기기는 했으나, 주원장이 고의적으로 조선과 외교적인 마찰을 벌이고 노골적으로 정도전을 중국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점점 틀어지게 된다. 주원장은 사병 혁파 같은 조선의 군제 개혁이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그 중심에 선 정도전을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그래서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 정도전파는 억류하거나 죽였고 이방원파는 친근히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침략을 대비해 전시 태세에 들어갔을 정도였고 정도전은 요동을 선제 공격할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국 관계가 삐걱거렸는데 주원장은 조선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이 얘기를 듣고 왕을 상징하는 금인과 고명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주원장이 금인과 고명을 보내줄 때까지 '조선 국왕' 호칭을 쓸 수 없었고[47][48] 고려 태조 시절부터 쓰던 임시 칭호인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써야 했다. 결국 양국 관계는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3.2. 왕권/신권 관련 시각차
정도전은 신권 중심 정치, 입헌군주제와 가까운 정치를 추구했다는게 일반적인 학설로 이어져 왔으나, 일각에서는 정도전이 오히려 왕의 절대 권력을 지지했다는 설도 제기해 그에 따른 찬반양론도 나왔다.일단 절대 왕권을 지지했다는 쪽에서는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서 보이듯 그는 왕이 강력한 인사권을 쥐고[49] 그것을 토대로 신하들이 왕에게 아첨을 하지 않고 좋은 조언을 해주는 역할로 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50] 즉, 정도전이 주장한 정치체계는 신권 중심의 입헌군주제 비슷한 것이 아닌 강력한 인사권을 쥔 현명한 왕이 능력 있는 신하들을 고루고루 등용시키고 그 신하들의 조언과 함께 왕이 나라를 가꾸는 정치로, 결국 재상 중심보다도 왕의 현명함이 중요하다는 주장.[51][52]
허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웹사이트의 기사 <정도전의 재상론>의 집필자는 <조선경국전>을 인용해서 "군주는 재주의 혼명강약(昏明強弱)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항상 궁중의 비밀, 빈첩(嬪妾)들의 시중, 내시(內侍)들의 집무, 가마와 말과 의복의 장식, 음식의 제공에 이르기까지 오직 총재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재상’이라는 단어도 결국 총재가 어리석은 군주를 보상(輔相)하고, 백관과 만민을 그들의 마땅한 바를 잃지 않게 하는 것[宰]에서 파생한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재상은 "어리석은 군주"를 지도 및 견제하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53]
즉, 위의 "정도전은 정말로 재상 중심의 조선을 꿈꿨는가?"에서 제시한 설은 왕이 "현명하다"는 것을 전제로 서술하고 있으며, 연산군과 같은 "어리석은" 왕이 있다면 견제할 수 있도록 재상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실제로 연산군이 대신들이 주도한 반정인 중종반정에서 폐위된 이후 왕이 멋대로 대신을 등용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할 때 대신들이 “걸주(桀紂)가 되면 안된다”고 청한다.[54] <맹자>에서도 "걸주"에 관한 말을 보면 알겠지만, 걸주와 같은 어리석은 군주는 "악독한 필부"이며, 마땅히 "주살"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정도전의 총재론은 <조선경국전>에는 있지만 <경국대전>에는 실리지 못했다.[55]
애초에 상기했듯 이 시절은 전제군주정이 철칙인 시절이고 재상의 역할을 강조하는 정도만으로도 왕당파 견제 세력들의 무수한 딴지를 감내해야 했던 정치 상황을 감안한다면 왕의 역할을 강조하는 얘기랑 재상의 역할을 강조하는 얘기가 동시에 나오는 것도 크게 모순될 것은 아니다. 극초기의 입헌군주제 모습 정도로 간주해도 될 듯하다.[56]
3.3. 토지 개혁?
사실 정도전은 토지 개혁에서 별로 활약을 한적이 없으며 토지 개혁을 주도하고 뚜렷한 공적을 세워서 활약을 한건 과전법을 제시한 조선의 또다른 개국공신 조준이다.정도전은 고려말 전제개혁이 한일이 없다고 본인이 의사를 표출했으나, 조선 건국후 지은 조선경국전에는 당시의 상황을 적고 비판하였다.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強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토지개혁 문제에서 정도전의 주장은 민본적이었는데,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경작을 담당하는 백성들 개인에게 나누어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또는 계민수전(計民授田) 방식을 추구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던 이색 등의 고려파 사대부와 왕실 인척, 귀족 등 권세가들의 방해와 반대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전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준이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과전법을 제시하였고, 이성계 일파는 조준을 지지하였다.[57]부전(賦典) <조선경국전>
그러나 정도전이 생각했던 무상으로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등•분배하는 계민수전(計民授田)과는 달리 조준의 과전법(科田法)은 모든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주는 것이 아닌 전직 및 현직 관료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부전(賦典)》에 그 실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과전법'에 대해서 문제는 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개혁이었다고 자평했다.부전(賦典) <조선경국전>
3.4. 철학 사상
비록 역성혁명을 일으켜 보수적 성리학과 괴리되는 정치현실을 만들어냈으나, 성리학에 대한 이상과 믿음이 강했던 그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사적으로 용인되거나 학문적으로 타협되던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58] 《불씨잡변》은 그러한 정도전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이다. 그밖에도 성리학 관련 저서들을 집필했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태종 및 세종대에 공민왕 이후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개수되기도 했다.각종 필화사건이 난무하고 일원화된 사상적 압제가 통상화된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성에 있어, 정도전의 그림자가 언뜻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려조에는 승려 신분이었던 신돈의 경우, '공자는 만세의 스승'이라고 공인하면서 성균관을 재건했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한 유연성에서 별 다른 경직성이 보이지 않으나, 정도전은 불교는 물론이고 풍수지리 같은 것도 술수라며 믿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해 지독히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만 정도전이 단순히 교조주의 일변도여서 다른 사상을 배척한 것만은 아니다. 우선 그가 불교를 비판한 것은 불교의 폐단이 극대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교의 폐단이라기보다는 타락한 종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고려 말은 사찰의 난립과 횡포로 인해 국고는 국고대로 탕진되고, 민생은 더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기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왕조는 불교와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쓰인 것이 《불씨잡변》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는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불씨잡변》 중 '불씨지옥의 변'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옛날에 어떤 중이 나에게 묻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이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답하여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아울러 써서 그 설에 미혹되는 세상 사람들이 분변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도전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유교는 뜬구름 잡는 개소리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교는 현실참여형 정치사상이고, 그렇기에 특히 사후세계같은 것을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다. 왜냐면 이러한 사후세계관이 결국에는 거지 같은 현실을 바꾸려는 민중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건 곧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혹세무민이었고, 그래서 비판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아울러 써서 그 설에 미혹되는 세상 사람들이 분변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런 이유로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유학자들에게 극딜을 당하기도 했다. 유학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 불교 시즌 2였으니까. 다만 제사 문제만 없었다면 천주교는 그럭저럭 조선에 융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59] 표면적으론 불교를 극딜했던 조선의 선비들이지만 그들도 죽을 때가 되면 불교의 승려들을 찾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의 종교에 대한 수요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60]
하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이 전반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공박하는 대상은 단순하게 세속화된 불교의 통시적인 폐단 정도가 아니라 연기론이나 윤회론같은 불교의 핵심적인 이론이다. 유학자로서 사물의 생멸과 무궁한 변화를 전제하는 불교의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 비판에 있어 철학적인 사유의 한계가 다분하고 무엇보다 중국 당나라 시대 유학자인 한유의 배불론에서의 논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유학의 관점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같은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고, 또한 현대의 회의주의적인 관점으로도 불씨잡변과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비판할 수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목은 이색의 불교 비판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비교하자면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비판이 아닌 폭력에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61]
정도전 사상의 독창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정도전이 조선의 정치 체제 구상을 밝힌《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같은 저술은《주례정의(周禮訂義)》,《산당고색(山堂考索)》,《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등 중국의 주자학과 사공학(事功學)[62] 계열의 저작을 상당 부분 그대로 옮겨썼다는 것이다. 도현철 연세대 교수는 "정도전은 인용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처럼 기술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4. 기타
- 《정감록》의 저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정감록》은 영&정조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지만, 정도전이 경복궁의 위치를 잡는 등의 일로 인해 민중들에게는 풍수도참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졌고 조선 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패배자였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들이 종합적으로 엮여서 그를 정감록의 저자로 내세우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상이 철저한 성리학 국가 건설이었으며, 한양 천도 때 하륜과 대립했을 때 한 말인 술수하는 자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봐도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록에서 실제로도 정도전 본인이 직접 "신은 술수 따위는 배우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단지 그런 거 치고는 또 본인 산문집인 금남잡제에 실려있는 사이매문이란 글을 보면 민초들이 믿던 이매 같은 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도 했던 듯 하다. 글 제목 자체가 이매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란 뜻이기도 하고. 이 글은 주변에 도깨비가 모여들어 정신이 사납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도깨비가 유배 간 곳의 민초들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쓰였다는 말이 더 많기 때문에 이 경우엔 그냥 비유적인 용도로 가져다 쓴 쪽에 가까울 것이다.[63]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
- 조선 건국 후 한양의 주요 건물의 위치를 설계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경복궁의 경우 정도전은 북악산 남쪽을, 무학대사는 북악산 서쪽을 주장했는데, 무학대사는 북악산 남쪽에 경복궁을 지으면 정룡(장자)이 쇠하고 방룡(장자 이외의 아들)이 흥하기 때문에 정도전과 대치했다고 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북악산 남쪽으로 한 이유는 태조의 뜻대로 막내 방석(방룡에 해당)을 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단 야사는 어디까지나 야사다. 정도전은 풍수지리를 '음양, 술수의 학'으로 배격했던 철저한 성리학자였음을 기억하자.
- 경복궁 동십자각 너머에 거주하였는데 이는 주한 미대사관 뒤이고 오늘의 종로구청 자리이다. 그래서 종로구청 민원실 앞에 정도전 집터임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 있고, 종로구청 주변 도로 이름도 정도전의 호에서 따온 '삼봉로'.
- 남한강의 명승지인 도담삼봉과 연관된 설화가 있다. 설화에 의하면 도담삼봉은 정선에 있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거라 정선군에 세금을 내라 했는데, 소년이었던 정도전이 도담삼봉을 우리가 갖고 싶어서 갖고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를 보니 정선군에서 도로 가지고 가라고 말하여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 소련에는 정도전과 매우 흡사한 인생 역정을 걸었던 인물로 레프 트로츠키가 있었다. 건국자(이성계, 레닌)를 도운 2인자, 건국자의 후계자(이방원, 스탈린)에 의해 숙청됐다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65][66]
-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 정도전을 존경했다 한다. 제자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 #
- 정도전에 대한 연구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상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1935년 '삼봉인물고(三奉人物考)'라는 최초의 정도전 연구로 조선에서 평가절하되던 정도전을 재평가했으며, 이를 이어받은 이상백의 제자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명예교수 역시 '정도전 사상의 연구'라는 학위 논문 등 여러 저술들을 통해 오늘날 정도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5. 대중매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즈카즈가 정도전을 재평가하면서 그의 한국인 경성제대 제자들이 태조 태종을 비판하는 논조를 펴트려 대중의 평가는 높은편이니, 스에마쓰 야즈카즈의 식민사관은 지금도 유효하다하겠다. 다만 창작물 내용에 따라서는 신원되기 전의 평가인 음흉하고 간사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5.1. 드라마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흥기[67]가 연기했다. 《용의 눈물》의 원작인 박종화의 <세종대왕>에서는 소인배 스타일로 등장했는데 《용의 눈물》에서는 고증을 통해 혁명가로 재조명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비굴한 최후와는 달리 영웅적인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이방원에게 "이제 편히 쉬게 해 주게. 조카"라고 말한 후 절명시인 <자조>를 읊조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 이 장면에서는 특히 NG가 많이 났었다고 한다. 김흥기의 대사나 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인은 다름아닌 소음공해 때문이다. 하필이면 대사를 하는 타이밍에 비행기가 날아가기도 하고 어디선가 자꾸 우렁차게 울어대는 염소 때문에 계속 NG가 나자 김흥기도 결국 대사를 하다 말고 "저 염소X끼!"하면서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음공해 이외에도 어디선가 파리가 날아들기도 해서 NG가 많이 나자 나중에는 "비행기가 떴구나"라는 말을 사극체 그대로 드립치기도 했다. 종영 이후 특집 편의 NG 기록을 보면 정말 죽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 정도전(용의 눈물) 문서 참조.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작중 주요 인물이자 세종의 스승인 이수의 스승으로 설정되어 몇 번 언급된다. 황희가 이수를 두고 "스승을 죽인 제자의 아버지에 대한 분풀이로 제자에게 세상에 대한 분기나 심는 식의 훈육을 한 것도 정치라면 정치다. 아주 질낮은 정치"라는 식의 평을 한다든지, 성균관 유생 시절의 정인지가 작중 설정상 금서로 지정되어 있는 <삼봉집>을 공부하는 비밀 독서모임에 참여하며 이수에게 자문을 구한다든지 하는 식. 작중 정인지와 최만리를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이 세자 앞에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며 부왕을 비판하다가 심기가 뒤틀린 세자에게 "어린 서출 따위를 국본으로 세워 전횡을 일삼으려 드니 칼을 맞은 것 아닌가"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드라마의 또다른 중심축인 비밀결사 밀본을 만든 인물이며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도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며 사대부의 나라이고 정도전의 나라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정도전의 사상과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기획 의도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작중 밀본의 주장대로라면 여기서의 정도전은 "사대부 중심의 나라"를 부르짖는 귀족주의자. 정도전의 후손들은 당장 아들 대부터 복권되어 영달을 누렸는데 정도전의 생질이 숨어살며 비밀결사를 만든다는 것 등 퓨전 사극의 한계로 가장 기본적인 고증에 문제가 많았다. 이 드라마를 보면 정기준이나 밀본이 정도전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들의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작중에서 이도가 "삼봉이라면 나를 이해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들이 정도전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역사상 세종은 정도전에 대해 이렇다할 언급이나 평가를 내린 적은 없지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으며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상 중심 체제를 구현한 세종의 정치 이념이나 사상 등을 보면 궁극적으로 정도전의 민본주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68] 굳이 학맥을 따지자면 정몽주의 학통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정설이긴 하지만.17화에서는 세종이 정도전의 제자인 혜강에게 "삼봉은 자신의 문집에서 요순 시절에는 언관이 없어도 언로가 안 막혔는데 한자를 아는 관료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언로가 막혔다고 까고 있는거 모름?"이라며 삼봉의 주장을 한글 창제 논리를 옹호하는데 쓸 정도. 정도전(용비어천가 시리즈) 문서 참조.
- 2012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배우 백승현이 연기했다. 제30화가 되어서야 등장했는데 연기 톤부터 하는 행동까지 전형적인 간신배. 신덕왕후 편에 붙어서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고 이방원을 죽이려 모략을 꾸미는게 주된 역할. 정몽주의 죽음도 이방원의 결단이 아니라 이방원이 자신을 죽이려는 정도전의 낚시질에 걸려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역사를 아는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차곡차곡 사망플래그 적립 중. 그러나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하여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도 전에 끝나서 최후는 그려지지 않았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조재현[69]이 연기했다. 드라마 자체야 '간만에 등장하는 제대로 된 명품 정통 사극'이라며 대호평을 받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조재현의 연기에 대해서는 초반에 호불호가 다소 엇갈리기도 했다. 다만, 작품이 초반부를 벗어나 중반을 넘어간 이후로 김흥기의 정도전과는 차별화되는 꾸준히 정치력을 쌓아 '정치 9단'에 이르는 정도전의 모습을 무척이나 잘 표현했다는 호평이 많아졌다. 정도전(정도전) 문서 참조.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김명민[70]이 연기했다. KBS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민본, 계민수전, 재상총재 등의 키워드를 이상으로 삼은, '조선의 설계자'라는 위상을 갖고 꽤나 이상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 드라마인데 결국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정도전의 이상은 역시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과 똑같은 것이었고 밀본은 창시자의 뜻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배신한 놈들임이 확정되었다. 정도전(용비어천가 시리즈) 문서 참조.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이광기[71]가 연기했다. 백성을 생각하며 역성혁명을 꿈꾸는 혁명가로 묘사되는 것은 이전과 유사하지만, 이전에 비해 상당히 냉정하고 건조한 인물로 묘사되어, 정몽주나 이성계와의 관계 또한 상당히 딱딱하게 묘사된다. 이방원과 대립하는 계기도 정도전이나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방원의 정몽주 참살을 기점으로 묘사했지만, 본작에서는 오히려 정몽주 참살 이후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며 고마워하고, 둘이 대립하는 계기는 신덕왕후의 갈라치기와 정도전의 요동 정벌론이다. 정도전(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5.2. 영화
- 2014년 개봉한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는 배우 안내상이 연기했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을 부정적으로 왜곡한 영화 내용상 정도전의 행보(새 왕조의 개국공신, 이성계의 파트너)와는 아무 짝에도 상관 없이 별볼일 없는 로판사극 속 양산형 간신배 1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언가로 등장했다. 왜곡 수준이 정도전 문중에서 고소를 검토해도 이상없는 수준.[72]
5.3. 소설
- <킹방원 메이커>의 주인공이 빙의한 대상으로 등장하는데 본인이 살기 위해 이방원 라인으로 급선회를 하고서 편히 살려고 했지만 착각계 소설의 특징에 힘입어 조선 연방의 결성과 대항해시대의 개막을 행하며 단종까지 섬기며 120세의 천수를 누린다. 특히 말년에 은퇴 청원을 여러 차례 하던 황희한테 나보다 어리면서 벌써 은퇴를 하려고 드냐며 갈구는 것이 백미.
5.4. 만화
- 만화가 윤승운이 쓴 <겨레의 인걸 100인>이라는 역사 학습만화 2편에 정도전이 나오는데, 저자는 출생년도를 알 수가 없다고 적어 놓았다. 이유는 이방원이 정도전을 역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비단 이 서적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대다수의 서적들도 정도전의 출생년도를 불명을 뜻하는 ? 표시로 쳐 놓거나, 1337년으로 나온 서적도 있었고, 1342년으로 나온 서적도 있었는 등 혼동이 상당히 잦았고, 또한 이방원 한 사람 때문에 취급도 저런 식으로 박했었다. 물론 지금은 명예도 회복했고 출생년도도 1342년 생이라고 정확히 알려져 있으니 더 이상은 혼동할 일이 없게 되었다.
5.5. 게임
- 일본의 모바일 게임 <크래시 피버>에서 TS되어 등장했다. 당시 방영한 드라마의 영향을 받았다.
6. 관련 문서
[1] 문헌사에 소장되어 있다. 공식적으론 흥선대원군 섭정 때 복권되기 전까지 450년 넘게 역적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당대에 그려져 전해지는 정도전의 초상화는 없다.[2] 이전에는 1337년생 설과 1342년생 설이 있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1342년생 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3] 봉화군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행정구역의 변화로 출생지로 여겨지는 지역이 현재 영주시 관내로 들어간 상태이므로 영주시에서는 정도전의 고향은 영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생지가 외가인 양광도 단양(현 충청북도 단양군)이라는 말도 있으며 단양군 역시 정도전의 고향은 단양이라고 주장한다. 단양의 도담삼봉도 정도전으로부터 유래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만 해도 데릴사위제 풍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사람을 실제 출생지와 상관없이 본관 지역의 사람으로 취급했으므로 이러한 혼란이 자주 일어난다. 따라서 실제 태어난 곳은 외가라고 해도 정도전의 경우도 친가가 있던 봉화를 고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또 다른 설에는 아이를 낳으러 단양으로 가는 도중에 산통이 와서 낳았기 때문에 이름이 길 '도(道)'와 전할 '전(傳)'이 되었다고도 한다. 물론 영주시 측에서는 이런 설들을 모두 부정하며 실제 출생지 여부를 놓고 영주와 단양 두 지역간의 갈등요소가 되고 있다.[가묘] 해당 묘는 가묘이다. 태종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죽일 때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사당] 인근에 정도전을 기리는 사당인 '문헌사(文憲祠)'가 있다. 지번 주소는 은산리 183(도로명: 은산길 80-15).[6] 출처 맹자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7]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다만 졸기에는 이어서 "그렇지만 임금이 그의 청을 다 들어주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이방원은 "조선 개국의 공은 모두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도전을 깎아내렸다. 아무튼 정도전의 저 발언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오만방자한 발언으로 보일 여지가 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인이 조선을 위해 공을 세웠다지만 그래봤자 한낱 신하에 불과한데다, 정도전 자신을 고용하고 이끌어 준건 바로 다름아닌 주군인 이성계다. 실제 아무런 힘도, 기반도 없는 정도전은 자신의 주군인 이성계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성계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성계 앞에서는 신하들이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의견을 말했다고 하는데 그런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은 달랐다고 한다. 또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 보다는 조준과 남은, 특히 조준의 역할과 공이 더 컸다. 실제로 개국공신 서열에서도 조준이 정도전보다 앞서며, 관직도 조준이 높았다. 하지만 조선 개국 이후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을 얻은 정도전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현대에 와서 정도전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조준 등 다른 공신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된다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정도전은 본인을 장자방이라고 빗대었지만 정작 정도전의 실제 행적을 보면 정도전은 장자방 노릇을 한적이 없다. 실제 정도전은 책사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책사였던 장량처럼 계책과 책략을 낸적이 없다. 애초에 정도전은 정치력과 처세술이 너무 낮았고 허술한면이 많은데다가 주변을 적으로 만드는 기질 때문에 책사 노릇을 할수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정도전이 스스로를 장자방이라고 표현한건 사실상 술에 취해서 본분을 망각하고 내뱉은 헛소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8] 최림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술을 좋아하며 시를 읊고 절간에 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는" 술고래로 유명한 인물이었다.[9] 이 때 그가 받은 처분이 경외종편(京外從便)이라는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뭘 해도 되나 도성 출입은 금하는 것으로 정치 활동을 목표로 하는 사대부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으니 형식적 유배에서는 풀려났으나 여전히 실질적으론 유배와 마찬가지인 치명적인 것이었다.[10] 삼봉재(三峰齋)라고 명명한 학당을 세우자 인근에서 그의 소문을 들은 학자와 선비들이 찾아와 몰려들었으나 그 때마다 정도전과 그의 강의를 불순하게 여긴 인근 권문세족의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강제로 헐어버렸다고 한다. 무려 세 번이나 그랬다고.[11] 이 때 그 자리에 있던 종사관 정몽주는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고려의 운명을 예감한 절망적인 심정을 담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라는 우국시를 남기기도 하였다.[12] 한참 뒤 세조 시기에도 정군 보인 체제로 만들어서 15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13] 정도전은 이후 벌어진 왕씨 몰살의 주동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씨 몰살에는 이성계도 적극 나섰다.[14] 경복궁을 실제로 설계한 것은 김사행이다.[15] 정도전이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 명분이 요동정벌이다.[16] 사병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키자고 밀어붙이면 사병을 가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다른 공신들이 정도전을 곱게 볼리 없다.[17] 정도전은 실권을 가진 부총리 급인 문하시랑찬성사를 지냈고, 좌시중(후에 좌정승)은 조준이 지냈다. 즉, 정도전은 권력을 가지는 자리에는 오를 수 있어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운 인물이라는 말이다.[18] 정담은 아버지가 죽을 때 자결했다.[19] "스스로를(自) 비웃다.(嘲)"라는 뜻이다. 자조적(自嘲的)이라는 표현또한 같은 한자를 쓴다.[20] 즉, 자기가 장량이고 한고조는 이성계니 자기가 이성계를 쓴 것이라는, 사내의 포부를 밝힌 혹은 술에 취해 생각없이 내뱉은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다.[73] 다만 졸기에는 "그렇지만 임금이 그의 청을 다 들어주지는 않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조선 개국 이후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을 얻은 정도전이 권력을 잡게 된건 맞지만, 현대에 와서 정도전의 행보가 재발굴되면서 역설적으로 조준, 남은 등 다른 공신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그와 대립한 이방원은 정도전 사후 실록 위조 논란도 있을 정도로 그의 공을 철저하게 깎아내렸기에 정도전은 조선 후기까지 역적으로 낙인 찍혀 있었는데, 이렇게 보면 정도전은 참 시기에 따라 평도 나뉘는 풍파가 많은 인물이긴 했다.[21] 후손들은 부정하지만 현대인들은 모계 노비 혈통이라는 것과 그가 혁명가의 길을 간 것이 드라마틱하기에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22]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역 인근 국립외교원 우면산 기슭.[23]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 당시 찍은 사진이 있다.[24] 다만 정도전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는 서초구에서 '삼봉 정도전 산소터'라는 표석을 세워 두웠다. 양재고등학교 바로 옆에 있다.[25] 경복흥, 이인임 같은 조정의 권신들과 대립하다가 유배당했는데 거기서 또 악에 받힌 소리를 하고 떠나서 곤장을 맞을 뻔하기도 한다.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가서도 그랬다가 반성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삼각산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칠 때도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인간을 매우 까는데 같이 까던 승려도 "석가모니나 저놈이나 다를 게 뭐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젊은 시절 성격 문제로 정치 일선에 물러나는 바람에 안정적으로 관료 생활을 했던 라이벌 정몽주나 조준과 달리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나갈 정치력을 기르지 못했다.[26] 하륜은 풍수지리에도 능했다.[27] 정도전의 모계 혈통이 우현보 집안의 노비 혈통이라는 것.[28] 우현보의 다섯 아들 중에서 세 명을 곤장형으로 황천으로 보내버렸다. 덕분에 현대에도 우가는 정가와 혼인 하지말라고 가르친다.[29] 다만 문제는 사병 혁파의 당위성이 아니라 누가 사병 혁파를 지휘했는지이다. 사실상 사병 혁파를 실패한 원인 자체가 정도전이 주도했기 때문인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정도전 사후 태종이 다시 사병을 혁파하려 했을 때는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노리고 한 짓이라는게 뻔한데 왕자들이 그리 쉽게 자기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사병을 내줄 리가 없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 아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말이 나왔고(물론 이는 이방원 일파의 프로파간다이기도 했을 테지만) 또, 이게 실제로 어느정도 먹혔을 정도니 반발이 어느 정도였을 지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30] 사적으로 그리 친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서만 동지 관계였던 정도전과 조준은 요동 정벌 문제를 두고 그 관계가 완전히 파탄나 버렸다. 정도전 본인 뿐 아니라 남은 역시도 조준을 대놓고 씹을 정도로 갈등을 겪었는데, 조준이 좌정승으로서 조정에서 정도전과 동급 내지 정도전을 능가하는 입지와 실력을 지닌(당시 조정의 영수는 정도전이 아니라 조준이었다.)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준과 갈라선 것은 정도전의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31] 이색, 정몽주 계열 포함.[32] 이숭인은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일 유배를 가서 정도전이 보낸 이한테 장살당한다.[33] 정도전은 역모죄가 아닌 종친모해죄로 잡혀 죽었다. 그래서 후손이 남을 수 있었던 것. 태종 역시 정도전을 그리 쉽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정몽주를 대하던 자기 아버지처럼 우유부단하지는 않았다.[34] 한성부를 관할하는 판윤이라는 말로써 요즘으로 치면 대략 서울특별시장 겸 서울고등법원장 겸 서울고등검찰청장 겸 서울경찰청장 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생각보다 실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35] 조선시대 수군은 천역에 속했다.[36] 태종이 정적에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종친들 때문이다. 당시 종친들은 사병 혁파 문제 때문에 정도전과 척을 진 뒤 이방원을 크게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원은 굳이 정적을 죽이지 않고도 적당히만 눌러놓는다면 종친들의 지지라는 뒷배경을 바탕으로 충분히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다. 때문에 태종은 후에도 죽이는 방식의 숙청은 외척들 중심으로 진행했을 뿐 정치적인 문제의 정적 숙청은 귀양을 보내고 찾지 않거나 낙향하도록 압박하는 식으로 처리했다.[37] 연산군일기 13권, 연산 2년 3월 29일 정미 3번째기사[38] 나꼼수로 유명한 전 국회의원 정봉주가 대표적인 정도전의 후손이다.[39] 직접 문제시된 부분은 이숭인 등을 장살한 혐의[40] 조인벽의 아들로, 조선 건국의 개국공신이자 1차 왕자의 난의 정사공신이다. 계모가 이성계의 동복누나인 정화공주다.[41] 권근은 조준과 함께 태종에게 정도전의 장남 정진의 복권도 건의했다. 이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을지언정 원수진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42] 명과의 갈등으로 인한 외교적 노선 갈등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실제 이방원은 철혈군주 이미지와는 달리 명에 대해선 사대의 예를 극진히 했다.[43] 역사학계에서 정도전의 생각은 왕권과 신권 사이의 조화 또는 견제와 균형으로 이해한다.[44] 송재혁의 연구가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만 본 것이라면 재고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왕권과 신권이라는 분석틀로만 정치사를 이해한다면 즉위 초기에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고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치사를 해석할 수 없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민현구의 논문에서도 확인되지만 이 부분은 왕권과 신권이라는 분석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즉위 초에 자신의 통치 영역을 넓혀가려는 신임 국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개혁적 결과로 나타난 것이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뒤에는 변화된 상황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45] 물론 선거가 전제되지 않기에 오늘날 입헌군주제와는 차이가 있지만, 정도전이 살던 시대엔 전제군주제가 기본이었던걸 감안하면 극초기의 입헌군주제 모델이라도 제시한 셈이니 확실히 앞서나간건 맞다. 당장 그 영국도 명예혁명은 이때로부터 약 300년 후에 일어난다. 마그나 카르타로 한정해도 시기가 그리 크게 뒤쳐지지 않는다. 참고로 조선에서 대외적으로 공화정을 거의 최초로 떠든 사람은 정여립이다.[46] 오해하면 안되는 것은 국가에 있는 모든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정도전이 이러한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주장하였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개국공신들에게 내리는 공신전(功臣田)을 생각하면 자가당착이다. 다만 조선 개국 반대파들의 사유지들을 이렇게 분배해주었을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양왕 때에 조선 개국자들이 한 토지 개혁의 문제였던 대부분의 토지에서 들어오는 토지세를 관리로 일하는 대가로 똑같이 지급하였기에 실질적인 변화가 없는 것이였다. 그동안 불법적으로 중첩된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자 척결, 그러나 조선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 제도가 사라졌다. 이렇게 되니 관료로써 받는 봉급으로는 생활 유지가 어렵게 되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화되었다. 정도전과 같은 유교 근본주의자에게 토지는 국가의 것이었고 토지 거래는 제한의 대상(한전제)이었다. 정도전은 토지의 소유권과 수조권 모두를 개혁하고 국가 외에는 소작을 포함해서 세금을 못 걷고 토지의 지급과 매매를 국가가 완전히 통제하는 제도를 원했다.[47] 당시 한창 강성하던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이 명나라가 만만히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금인과 고명 다 무시하고 조선 국왕을 자처해도 상관은 없다. 한국사에서 이걸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바로 발해다.[48] 고구려의 경우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초창기에는 이런 예법이 확립되지 않았던 데다가 오호십육국시대라 중국이 고구려에 신경을 못 썼고, 예법이 확립되고 중국 왕조가 2~3개로 좁혀진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는 중국 왕조 측에서 고구려를 두려워한 나머지 앞다투어 먼저 책봉해주려고 바빴다. 자세한 것은 장수왕 문서 참조.[49] 재상에 대한 인사권이 중요한 내용이다. 왕은 재상을 등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재상은 그 자체로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50] <경제문감> 78쪽 상업(재상이 하는 일)에서 신하가 군주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재주와 능력을 다하는 것은 그 군주를 돕는(顯比) 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등용하고 등용하지 않는 것은 군주에게 달려있을 따름이다.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어 보좌해서는 안 된다. 라고 그가 직접 말했다. 원문은 『經濟文鑑』 「相業」 顯比; 臣之於君 竭其忠誠 致其才力 乃顯比其君之道也 用之與否 在君而已 不可阿諛逢迎 求其比也[51] 법 자체만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있는 것(『朝鮮經國典』 「憲典」 捕亡斷獄; 法非徒善 惟在得人). 성인의 법은 사람이 있어야만 시행된다(『朝鮮經國典』 「憲典」 總序; 聖人之法 待人而後行)[52] 출처: 정도전은 정말로 재상 중심의 조선을 꿈꿨는가?, 「鄭道傳의 역사인식과 군주론의 기반: 『經濟文鑑』 의 분석을 중심으로」, 김인호, 2005, 『한국사연구』, 131, 257-284., 「『 經濟文鑑 』의 引用典據로 본 鄭道傳의 政治思想」, 도현철, 2000, 『역사학보』, 165, 69-102.[53] 출처: 정도전의 재상론[54] 걸주에 관한 내용은 걸왕과 주왕 문서 참조.[55] 출처: 영조실록 52권 기사: 장령 이제담이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는 마음으로 신하들을 경시하지 말 것을 청하다[56] 굳이 따지면, 현대의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개념이다. 이원집정부제도 상황에 따라 대통령이 실권자가 되거나 반대로 수상이 실권을 가지거나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데 정도전의 주장은 이런 체제의 군주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57] 이마저도 창왕 폐위 전까지는 구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창왕이 폐위된 이후 간신히 통과되었다. 정몽주는 창왕 재위 당시에 과전법이 제시되었을 때,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결국 창왕을 폐위시키는데 동참하고, 결국 과전법이 통과된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봐야할 것이다.[58] 사실 성리학 자체가 당시 유학을 체계화시키기 위해 도교와 불교 사상을 결합하여 태어난 사상이다.[59] 천주교 전래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서 교황청 역시 타협의 여지가 없이 반대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삼국 모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에 교조화되었던 유교의 세가 약해지고, 교황청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타 종교나 각국의 전통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에서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즉, 대중들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신분제와의 충돌 문제 때문에 천주교가 박해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천주교가 평등을 외쳤다 한들 그것은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이었지, 전근대의 신분 차별(조선으로 치면 반상의 구별)이나 남녀 차별까지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60] 유교 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이었지만, 중전이나 대비를 포함한 내명부의 여인들 중에는 불자들이 제법 많았다. 조선에서 불교에 대한 탄압은 종교적 탄압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탄압의 측면이 강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유교가 교조화되던 시기에도 불교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조선 전기보다 덜했다.[61] 또한 이러한 점이 프랑스의 자크 르네 에베르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종교에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좌파 성향이며 숙청당했다는 것 또한 비슷하다.[62] 정치적 실제 효과를 중시하는 학문.[63] 최영을 번개의 신 토르에 비유한 사람이 정말로 토르가 있다고 믿지는 않듯이.[64] 정도전이 40살 가량 많다.[65] "다만 정도전이 구상한 조선의 체제는 일부 현실적인 수정만 있었을 뿐 태종과 세종에 의해 완성이 된 반면, 트로츠키가 주장한 트로츠키주의는 철저하게 배격되고 결국 범슬라브주의의 부활이라는 방식으로 흑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실상은 중공업 우선주의를 비롯한 트로츠키의 구상 대부분도 스탈린에 의해 실현되었다는 해석이 주류이다. 당장 소련 체제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도 스노볼이 구상한 풍차 건설 계획을 나폴레옹이 채택하는 모습을 묘사한바 있고, 트로츠키가 원했던 혁명의 수출 역시 2차대전 후 동구권의 성립이라는 다른 과정을 거쳐서나마 이루어졌던 것.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 이후의 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아예 트로츠키의 구상(영구혁명론)과 스탈린의 구상(일국사회주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지적까지 제기될 정도이다. 이 점에서는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 집권 이후 소련에서 철저히 배격된 것은 트로츠키의 구상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이름이다. 중공업화를 비롯한 트로츠키의 구상이 스탈린을 통해 약간 수정된 과정을 거쳐서나마 실현된 것과는 별개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이름 자체는 소련 및 동구권 내에서 (이념적 지향을 따지기 이전에) '주류 노선에 따르지 않는 종파주의자'를 매도하는 일종의 욕설로 완전히 자리잡을 정도로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를 찾아본다면 조선 왕조 대부분의 기간동안 공식적으로 복권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역적으로 낙인찍혀 금기시된것도 아니고, 그 공적에 대한 인정도 어느정도 받았던 '애매한' 입장에 있던 정도전과 그렇지 못했던 트로츠키의 차이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66] 정도전과 트로츠키를 비교한다면 또 흥미로운 점이, 정도전의 공식적인 복권과 명예회복이 결국 조선 말기(멸망 직전)인 흥선대원군 섭정기에 이루어진것과 비슷하게 소련 초기 스탈린 집권과정에서 숙청당한 고참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공식적인 복권도 소련 말기(멸망 직전)인 1988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만, 이 때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등의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은 모두 복권되었지만 트로츠키만은 복권되지 못했다.말하자면 멸망 직전의 흔들거리는 국가에서 분위기 쇄신을 위한 일종의 '역사 정리 작업'을 하여 건국 초기의 빚을 갚으려 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정도전의 경우 아무리 큰 꿈과 야망을 가졌어도 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의 권위 자체, 그리고 이씨 왕조의 왕통에 도전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던데 비해 트로츠키의 경우 스탈린과 최고지도자 지위를 두고 다퉜던 것은 둘째치더라도 서기장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로 하는 소련의 권력 전통이 가지는 정통성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는 복권될 수 없었던 점을 차이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67] 단순히 배역만 자주 맡은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그의 사상에 대해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용의 눈물》이 방영되었던 1997년에 김흥기가 국민대학교에서 정도전의 정치 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을 정도. # 태종으로 출연했던 배우 유동근의 회상에 의하면 "촬영장에 올 때마다 항상 극에 대한 고증을 해 온 선배로 후배들이 역사 공부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점은 사극 작가들이나 배우들이 본받을 점이다.[68] 본격적으로 조선이 왕과 권신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부터이다.[69] 2018년 배우 조재현의 미투 사건 연루로 인해 자료화면 사용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실제로 2020년 방송된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 정도전에 대해 다룰 때 자료화면으로 대부분 KBS 드라마 <정도전>의 장면을 사용했지만 정도전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만은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나오는 김명민의 정도전을 자료화면으로 사용했다.[70]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주인공 이순신 역. 10년만에 사극 복귀작이 되었다.[71]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정도전과 대립한 하륜 역.[72] 애초에 이런 판타지 영화에 사료 고증을 기대하는 게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감독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