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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복의 예시[1] |
1. 개요
官服'군(軍)이나 관(官)에서 지급한 제복(制服)이나 정복(正服)', '벼슬아치가 입던 정복(正服)', '옛날 벼슬아치들의 의복(衣服)'이다.
일반적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대한민국,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 고대부터 근대 왕정시대까지 관리들이 정무를 볼 때 입었던 의복을 말할 때 쓰인다.
요즈음에는 관복이 거의 사라졌으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나 장관과 차관이나 총리, 고위관료나 공무원, 판사와 검사, 청와대 비서진, 국가정보원 고위관료들을 관복을 입은 관료에 비유하기도 한다.[2]
2. 구성
대중에 흔히 알려져 있는 조선 후기의 흑단령의 구성.(머리에서 부터 발 까지.)3. 세계 각국의 관복 역사
대한민국은 삼국시대 때까지 각자 고유의 관복을 입었으나, 신라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넘어가서 당태종과 만나 회담할 때 관복인 복두와 단령을 도입하여 문무백관의 정복으로 삼은 이후, 고려 ~ 조선시대 때까지 복두→사모가 갖추어진 중국식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하여 입었다. 자세한 내용은 단령 문서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중국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자국 내 최초의 국가인 상나라 때부터 관복과 비슷한 복식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공식적인 관복이 확인되는 것은 전국의 도량형과 문물이 통일화된 진나라 때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수많은 왕조가 명멸하면서 많은 스타일의 관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가장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의 관복은 원래 만주족의 예복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은 마찬가지로 당나라에서 복두와 단령을 들여와 관복으로 삼았으나, 이후 일본 국내실정에 맞게 개조되어 소쿠타이(束帶)라는 관복을 제정하여 입게 되었다. 머리에 쓰는 관모는 복두였다가 형태가 변형되어 칸무리(冠)를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베트남은 중국에서 관복 복식을 들여왔으며 대체적으로 중국과 유사한 관복을 입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관복에 금실을 수놓는등 디자인이 기존 관복에 비해 굉장히 화려해졌다.
한편 서구권에서는 법복과 군복은 있었지만, 19세기까지는 관료들이 일괄적으로 통일된 제복을 갖춰입는 경우는 찾기 힘들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정장을 차려입는 정도였다. 예외가 있다면 유럽과는 문화적으로 조금 거리가 있던 러시아 제국으로, 여기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시기부터 모든 문관 관료가 입어야 하는 제복을 지정했다. 다른 나라들은 19세기 중반에 와서야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에서 관료들이 군복 스타일의 제복을 입는 문화가 생겨났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일반 공무원들도 육군 정복과 유사한 제복이 규정되어 공식 행사에서는 제복을 입었다.참조 이 유행의 첫 스타트를 끊은 곳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정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본래 군인 출신이다보니 자기 궁정의 관료들이 제멋대로 옷입는 꼴을 참아주지를 못하고 통일된 궁정 예복을 지정하였다. 그런데 이게 멋있어 보였는지 다른 나라들도 모두 따라하기 시작해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당시의 기록 사진들을 보면 외교관이나 장관들도 군복같은 견장 달린 제복을 입고 스몰 소드를 허리에 찬 모습이 자주 보인다. 러시아의 경우는 21세기 현재도 실제로 입는 경우는 드물지만 공무원도 육군 정복과 유사한 정복과 계급장이 규정되어 있다.[3] 영국도 현재 가장 공식적인 외교 행사에 한해서 외교관들이 제복을 입는 전통이 남아있다.
4. 한국 관복의 변천사
삼국시대에는 고유의 관복을 입었는데 전통적으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단령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주로 재상들이나 최고 고관들은 흑홍관복이나 보라색 관복을 입었고, 그 밑의 고관들은 빨간색 관복을 입었으며, 하급 관료들은 파란색 관복을 입었던 전통이 있었다. 왕족의 경우는 보라색 관복이나 흑홍관복을 입었다.
진덕여왕 때 단령이 생기고 신라부터 단령을 입기 시작했는데 재상이나 최고 고관들은 흑홍단령이나 보라색 단령을 입었고, 그 밑의 고관들은 홍단령을 입었으며 그 밑의 중간관료들은 청단령을 입었으며, 하급관료들은 흑녹단령을 입었다.
발해 역시 당나라 체제를 일부 수용한 뒤로 그렇게 했다. 사모 역시 삼국식 문라건 형태에서 복두로 바뀐다.
후삼국시대 때도 역시 그 전통은 이어져서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 모두 재상들이나 최고 고관들은 흑홍단령을, 그 밑의 고관들은 홍단령을, 그 밑의 하급관료들은 청단령을 입었다.
삼국시대의 전통이 고려 건국 후에도 이어졌으며, 후삼국통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광종 이후 고려 관복은 다시 변화하는데 송나라식 체제를 받아들여서 이후 1품에서 3품은 흑홍단령이나 보라색 단령을 입었고, 4품에서 6품은 홍단령을 입었으며, 7품에서 9품은 흑녹단령을 입었다. 여전히 고려 때도 삼국 시대 때의 관복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나라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 관복은 다시 변화하는데 원나라식 관복을 입었으며 발립을 쓰게 된다.[4] 참고하자면 고려는 충렬왕 즉위년에 변발을 결정했고 충렬왕 4년에 원나라 복식을 채택했다. 물론 하급관리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변발을 굳이 하진 않았다.
공민왕 이후에 송나라식 관복을 다시 착용하다가 우왕 때에 명나라식 관복을 하사받는데 대신 삼국 때의 전통은 크게 유지되어 1품에서 3품은 흑홍단령, 4품에서 6품은 홍단령, 7품에서 9품은 청단령을 입는다.
4.1. 조선 시대
- 초기
| 위 사진은 서대와 잡색단령을 갖춰 입은 정1품 관원의 관복이다 |
조선 초에는 태조~세종 28년 이전까지 색상 구분없이 아무 색이나 잡색 단령을 입었다.
세종 28년 부터 아청색의 흑단령을 상복으로 착용하고 업무를 볼때는 여전히 잡색으로 입었다.
단종대부터 대사관 양성지의 건의에 의하여 예복용 시복에 흉배가 도입된다. 하지만 그 때는 정3품 상계의 당상관부터 흉배를 착용했다. 집무용 상복에는 흉배를 달지않는다.
사모가 개량되었는데, 여전히 예복용 시복은 1품부터 3품까지만 흉배를 착용했고 연산군 후반기부터 정3품의 하계부터 종9품의 당하관들까지 모두 예복용 시복에 흉배를 달게 되었다 .문양은 기러기, 돼지, 거위 등으로 학이나 호랑이 문양만 있었던 예전 흉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 시기 부터 중국(명나라) 와는 다른 흉배 문화가 형성되었다. 집무용 상복에는 흉배를 달지 않는다.
- 중기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흑단령(黑團領)은 상복(常服)이라고도 하고 시복(時服)이라고도 하는데, 비록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알성할 때에 이른바 유생들의 상복과 중국 사신이 올 때의 이른바 백관의 상복은 분명 흑단령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2년 5월 19일 기사
"《오례의(五禮儀)》의 흑단령(黑團領)은 상복(常服)이라고도 하고 시복(時服)이라고도 하는데, 비록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알성할 때에 이른바 유생들의 상복과 중국 사신이 올 때의 이른바 백관의 상복은 분명 흑단령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2년 5월 19일 기사
- 후기
-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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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말기의 관복.소례복과 통상복을 볼 수 있다. |
1894년 갑오의제개혁에서는 기존의 흑단령이 대례복으로 규정 되면서,흉배가 없는 흑단령은 소례복으로 불리며,소매가 좁은 두루마기 형태의 흑단령 형태가 되고,품대 대신 삼태만 있는 속대라는 띠를 찬다.[6]
1894년에 제정 된 통상복은 두루마기 위에 답호를 입고 사모를 쓴 모습으로,평상시 업무를 볼 때 하는 복장으로,시복의 뒤를 이어 받는다.
1900년 문관대례복제식을 반포하며 연미복 형태의 서양식 대례복이 공식적으로 제정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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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의 문관이자,독립운동가인 김가진의 초상 속 대례복 |
바이콘과 연미복 형태의 대례복은 무궁화 모양의 골드웍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있고,검은색 바탕에 포인트 컬러로 하늘색을 소매와 칼라에 넣었다.
5. 기타
- 급급여율령과 마찬가지로, 무속에서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과거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가 권력과 관료제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조선시대 정약용과 관련된 야사 중에도 관복과 관련된 것이 있다. 정약용이 남산골 회현방에서 기거할 때 귀신나온 집을 싸게 샀는데, 유학자이자 실학자였던 정약용은 괴력난신을 그다지 믿지 않았는지라 괘념치 않고 싸게 집을 샀다.[8] 그러나 아무래도 찝찝했던지 평소 정약용네 집안일을 봐 주는 사람 한 명이 "벼슬길에 오른 벗들과 관복을 입고 하룻밤을 지새우십시오"라고 정약용에게 권했다. 그리하여 윤영희나 이주신 등 남인 계열 친구들과 함께 관복을 차려입고 귀신나오는 집에서 밤을 지샜고, 동트는 새벽녘 전 깊은 밤에 귀곡성이 울리더니 귀신이 도망갔다고 한다.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이주신이 고함을 지르며 "괴이한 것, 썩 물러가지 못할까!"하고 박력있게 소리지른다.
[1] 초상화 속 인물은 정조 때의 명재상인 채제공이다.[2] 곁다리로, 이런 관념 때문에 무속인들이 방(부적이라든가 이렇게저렇게 하라는 처방)을 쓸 때 "군복 입은 사람이나 경찰, 아니면 공무원 아는 사람들 있으면 불러다 하룻밤을 그 곳에서 지새워라"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 관복 입은 신료들을 귀신이 두려워한다고 여긴 관념이 현대까지 전해져오는 것. 급급여율령도 비슷한 관념이다.[3] 나탈리야 포클론스카야 항목을 보면 러시아 검사 제복을 볼 수 있다.[4] 발립이란 원나라 황실이나 조정에서 쓰인 관모였는데 동그랗게 양옆을 두르는 챙이있는 바가지모양의 모자를 생각하면 편하다.[5] 다음해 8월 수구파의 반발 때문에 조복과 제복의 제도를 회복하였다.[6] 1908년 국민예복의정회에서 건의한 남성의 통상예복으로 고름 대신 단추가 달린 흑단령이 제시 되었는데,소례복과 형태가 일치한다.[7] 그 이외에도 양장 형태의 소레복, 통상복도 제정 되었다.[8] 이 야사를 작중에 써먹은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정약용에게 은혜를 입은 천 서방이 중간에 거래를 해 주면서, 거간꾼이 처음에는 후려치려고 20만 냥을 불렀는데 1만 냥까지 깎은 것으로 각색되었다. 여담으로 사실 정조 시대 기와집 가격은 비싸도 300냥 정도였다. 쌀 한 말이 5~6냥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현재 시세로 수천만 원짜리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