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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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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 | 燕山君
파일:연산군20100529-6.jpg
연산군 묘 전경
출생 1476년 12월 2일[1]
(음력 성종 7년 11월 7일)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495년 2월 3일[A] (18세)
(음력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506년 11월 30일[4] (향년 29세)
(음력 중종 1년 11월 6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현 화개산 인근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5]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83년 3월 23일[6] ~ 1495년 2월 3일[A]
(음력 성종 14년 2월 6일 ~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조선 제10대 국왕
1495년 2월 3일[A] ~ 1506년 9월 28일[9]
(음력 1494년, 연산군 즉위년 12월 29일 ~ 연산군 12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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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융(㦕)
부모 부왕 성종
생모 폐비 윤씨
양모 정현왕후
형제자매 16남 12녀 중 장남
배우자 거창군부인 신씨 (1488년 혼인)
후궁
20명 [ 펼치기 · 접기 ]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숙의 곽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숙용 장씨, 숙용 전씨, 숙용 조씨, 숙원 최씨, 숙원 장씨, 숙원 이씨, 숙원 김씨, 나인 최전향, 나인 수근비, 나인 정금, 나인 김숙화, 여완 월하매, 여원 안씨, 장씨, 의녀 강금
자녀 10남 9녀 (10남 10녀)
종교 유교 (성리학)
봉호 연산군(燕山君)[10]
존호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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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계
3.1. 조상3.2. 배우자/자녀
4. 평가5. 여담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임금(上)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뿐이다.[11]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隱諱)한다." 하였으니, 사관(史官)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근래 사관(史官)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 기사
조선 제10대 국왕.

성종의 적장자이자 중종이복형으로, 5백 년 조선 왕조 역사에서 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하여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영영 끝까지 받지 못한 둘뿐이었던 임금 중 1명이다. 는 '융(㦕)'. 폐위되었기에 묘호시호가 없지만 생전에 받은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는 존호가 남아있다.[12]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보다는 '폐주(廢主)', '폐왕(廢王)', '폐조(廢朝)'이라고 많이 불린다.[13]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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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연산군
(燕山君)
<colbgcolor=#fff3e4,#331c00> 성종
(成宗)
<colbgcolor=#ffffe4,#323300> 덕종
(德宗)
세조
(世祖)
정희왕후
(貞熹王后)
소혜왕후
(昭惠王后)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폐비 윤씨
(廢妃 尹氏)
함안부원군 윤기견
(咸安府院君 尹起畎)
윤응
(尹應)
안동 권씨
(安東 權氏)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14]
(長興府夫人 高靈 申氏)
신평
(申枰)[15]
장흥 마씨
(長興 馬氏)

3.2. 배우자/자녀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연년생으로 8명의 자식을 얻었다.[51] 반면 연산군이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은 5남 7녀로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1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고작 3명 많았다.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인데 그 20명의 후궁들 중 정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자식들 중 거창군부인 신씨의 자식들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특히 장녀 휘신공주를 워낙 아꼈고 혜택을 많이 주고 이것저것 챙겨줬고, 아들 중에서도 신씨의 자식인 창녕대군 이성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이었던 세자 이고의 성품은 아버지 연산군과 매우 정반대였다고 한다.[52] [53] 세자 이고는 만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 연산군의 언급에 따르면 "자질이 온화하고 도량이 원대하며 어릴 때부터 높게 빼어나서 이미 성인의 도량이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훌륭한 덕망으로써 진실로 구가의 돌아감에 응할 만하고 하다" 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는 왕의 기질이 있고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았다고 한다. 어느 날 연산군이 내관에게 세자가 얼마나 성취하였나고 물었는데 이에 내관은 "세자의 기상이 꼭 성종을 닮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연산군은 내관을 향해 칼로 쳐서 내관은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54] 세자 이고가 만 7세 됐을 때에는 성품이 굳세며 침중하고 엄숙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잔치를 치르며 흥청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도중 세자 이고를 불러 흥청들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도 이들을 잘 돌보겠냐고 물었는데 뜻밖에도 이고는 연산군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55] 연산군은 이 일을 계기로 세자를 꺼렸다고 한다.(은근히 아버지와 기싸움을 하는 듯한...) 야사에서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 박원종 등이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일찍이 거창군 신씨의 친오빠이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56] 중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묻자 이에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 라고 말하여 결국 중종반정 때 신수근은 역적에 몰려 제거당했다.

연산군의 아들 중에서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 공신들에 의해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다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4인이며 이들 이외의 연산군의 아들들도 추가로 사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사받은 4인의 아들 이외에는 대체로 영아 시절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반정 공신들의 조치 역시 당시에는 엄연한 불법인데 조선의 법도는 설령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딸들은 여자라 왕위에 위협되지 않아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딸들은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 중 하나로 부인을 내쫓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57]

자식들을 아끼던 면모가 기록에 남아있다. 아들 중에선 정실 부인이었던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인 창녕대군 이성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승지 김감이 창녕대군의 보양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김감에게 쌀 15섬을 주었고 이후에 임사홍이 왕의 총애를 굳히기 위해 김감의 집에서 자라고 있던 창녕대군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에는 정미수가 창녕대군을 보양하고 있었는데 이에 연산군은 정미수의 집 값을 시가보다 더 주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창녕대군과 휘신공주에게 각각 노비 2구를 내렸고 나중에는 창녕대군에게 노비 100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창녕대군의 논과 밭을 휘신공주 예에 따라 세금을 면제하고 창녕대군 노비들의 잡역을 면제해주었다.

특히 딸바보였는데 연산군은 장녹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영수[58]를 매우 사랑했다고 실록에 언급돼 있으며, 영수와 후궁 정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함금에게 집 1좌와 노비 15구 밭 5결을 하사했다. 또한 영수를 아끼고 사랑하여 영수의 주변인들에게 상으로 물품을 내리는 일이 매우 융성했고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영수가 염질이 걸려 의원 박계원이 치료하자 연산군은 그에게 1자급을 더하게 하고 은대를 내렸으며 영수가 천연두도 걸렸을 때 구수영의 집에 있으면서 천연두가 나아지자 구수영에게 쌀 50석과 안장을 갖춘 말 한필을 내렸다. 이 외에도 영수의 유모 아들인 종이를 동평관의 고직으로 영원히 정하라고 명하여 지평 권주가 부당함을 아뢴 적도 있었다.

연산군이 가장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자식인 휘신공주는 당시 16살[59]이자 세자였던 연산군과 그와 동갑내기인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이자 장녀이며 성종이 생전에 본 첫 손주였다. 13세 때 구수영[60]의 아들이자 1살 연하인 구문경과 혼인하였다. 연산군은 휘신공주가 집을 떠날 날짜가 가까워지자 휘신공주에게 줄 논과 밭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시집간 휘신공주를 위해 벼 8천 섬을 호조에서 마련하도록 하며 콩100개, 수주 50필, 쌀100석을 하사하였고 혼인한 휘신공주가 나가 살 집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혼인한 휘신공주가 나가 살 집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이에 한 신하가 근년에 들어 가뭄이 심해 잠깐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근년의 흉년이 맘에 걸렸던 것인지 이후에 한 신하가 한양에서는 한성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호소할 데 없는 고독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구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전과 다르게 연산군은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방도는 마땅히 거행해야 한다"라며 곧 시행하도록 하였다. 휘신공주의 집이 완성되고 얼마 후 연산군은 휘신공주의 집을 넓히기 위해 몇몇 신하들을 보내어 휘신공주의 집 근방에 더 헐 곳을 살펴보게 하였고 이에 신하들이 집 수십 채를 헐어야 된다고 하자 해당 관사에서 값을 주고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한 신하가 휘신공주의 집 담장 밖 인가 철거의 부당함을 아뢰었는데 연산군은 일이 되어 가는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후 휘신공주의 집을 지었던 장인들에게 상으로 베 358필을 주었으며 얼마 후에는 관평인 평시서의 위치가 휘신공주의 집을 압박한다는 이유로 그 터를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는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휘신공주에 대한 연산군의 특혜는 이뿐만이 아니었는데 죄인 임희재의 집과 윤필상의 첩의 집을 공주에게 주었고 휘신공주의 두 집이 금표 안에 들어간 고로 면포, 정포 5천 필을 내리기도 했으며 연산군이 무과를 시험 보인 후 환궁할 때 휘신공주의 집에 들러 휘신공주에게 쌀 150석, 면포 정포 각 750필, 말 1필을 내렸다.

연산군이 휘신공주를 엄청 아끼느라 공주로 인해 운 좋게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었는데, 가령 갑자사화 때 처형된 임희재의 부인이자 사위 구문경의 누이인 구순복은 남편의 죄로 인해 연좌되어 노비가 될 뻔하다가 연산군이 공주의 뜻을 고려해 연좌시키지 않고 놓아줬다. 반면 공주에 대한 각별한 총애로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성종 때 강학손이라는 자가 불법으로 직권을 남용하여 재물을 탐하는 죄로 벌을 받아 금고형에 수십 년 동안 처해있어 사람을 시켜 장안을 삭제하려고 했는데 이때 연산군이 본인이 어린 시절 강학손 아비인 강희맹의 집에서 자랐으므로 그 공이 작지 않아 옛 허물을 씻으려 하고자 삼정승을 불러서 이 문제에 관해서 의논하여 자신에게 아뢰도록 하였는데 이에 사관은 임금이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은 강학손이 휘신공주에게 넉넉히 뇌물을 줬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외에도 휘신공주 유모의 남편 이팽동이 공주를 믿고 교만하고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여 문제되었으며 공주의 논밭에 세금이 면제되고 공주의 노비들은 잡역에서 면제되는 폐단까지 발생하였다.

4. 평가

현대 한국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한국사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그래도 즉위 초기에는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갔다는 평가도 있었고,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는 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삼사의 행동에 더 큰 문제가 있었으며, 연산군은 그저 이 기회를 제대로 포착했을 뿐이다.[61] 설령 연산군이 아닌 다른 국왕의 치세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더라도 큰 옥사가 터질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기에 무오사화까지는 연산군을 폐위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기간에 보인 옥사의 잔혹성과 규모는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오죽하면 사관이 "성품이 포악하고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다. 예로부터 난폭한 임금이 많았으나 연산군만큼 심한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갑자사화 이후로는 대중들의 인식에 부합하는 폭군 그 자체였다. 사실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 기간 중에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던 시기가 더 길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2년 남짓한 사이에 벌인 폭정만으로도 폐위되었을 만큼 너무나 심했다는 것.

교과서나 학습 만화에선 간단하고 외우기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극에선 극적 연출을 위해 갑자사화를 "연산군이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뒤 복수하기 위해서 갑자사화를 벌리고, 이후 타락해서 폭주하였다."라고 해석하지만 생애 문서를 보면 알듯이 연산군은 실제로는 어머니의 죽음을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에 와선 사학계에서 연산군의 갑자사화는 어머니의 죽음 뿐만 아니라 권력 강화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연산군이 마냥 멍청하고 복수만 바란 폭군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꿈꾸며 계획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갑자사화부터의 연산군의 행적을 옹호하거나 변호를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연산군은 폐위된 뒤 조선 군주 체제에 폭군의 절대적 기준을 세운 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흑화한 뒤에 행한 패악질들은 '성군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설령 그것이 해당 임금의 입장에서는 자잘하고 미미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고 해도 반드시 금해야 할 금기로 치부되어 막았으니[62] 후대의 왕들에게 반면교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일단 왕으로서의 권한으로 일을 해보려고 하면 연산군을 사례로 들어 신하들이 공격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당했고 그럴수록 신하들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왕이 신권을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하면 이건 연산군이나 했던 일이라고 반항하는데 뭐라 반박하기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연산군으로 인해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가 되었다. 사실상 조선이 본격적으로 군약신강 체제의 국가로 전락하는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5. 여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연산군/여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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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매체

잊을 만하면 그를 다루는 작품이 나와 재탕, 삼탕 이상을 자주 하는 사극주인공이다.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다가 개인사 뿐만이 아니라 가족사를 비롯해 워낙 인생이 드라마틱해서 대중매체에서 유난히 많이 다뤄지는 것 같다. 비단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주연이든 조연이든 최종 보스 수준으로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다.

이대근, 정진영 등을 빼고는 20~30대 배우가 대부분 담당하였으나[63] 이상하게 연산군은 40대 배우가 많이 담당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한국 영화 역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왕의 남자>의 정진영의 잔상인 듯 하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주로 30대 중후반 배우들이 연산군을 많이 연기하게 된다. 그만큼 대사량이 많고 감정선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 연기력이 웬만큼 절륜하지 않는 이상 연기하기 굉장히 힘든 배역이기도 하다.[64]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연산군을 많이 다룬 작가 하면 단연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 등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80327123202.897.0.jpg
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웹툰판에선 현대에 넘어와서 배우 생활을 하기도 했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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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1월 23일.[2] 조선 역사상 최초로 중궁인 교태전에서 태어난 왕이다. 연산군 이전에도 궁궐에서 태어난 왕이 둘(단종, 성종) 있으나 이들은 세자빈의 거처, 동궁인 자선당에서 태어났다.[A] 율리우스력 1월 25일.[4] 율리우스력 11월 20일.[5] 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6] 율리우스력 3월 14일.[A] [A] [9] 율리우스력 9월 18일.[10] 실제로 연산군은 원자 - 왕세자였기 때문에 즉위 이전에 받은 봉호는 없으며, 중종반정으로 폐위 이후에 받았다. 봉호는 구 연기군(燕岐郡)(현 세종특별자치시)의 별호인 연산()에서 따왔다.[11] 연산군은 끝내 자신이 두려워하던 역사에 영원히 폭군으로 남게 되었다.[12] 물론 이마저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면서 삭탈되었다.[13]버려진 군주, 혹은 버려진 왕, 또는 버림받은 왕이란 의미이다. 조선 왕사에서 연산군이 지닌 위치를 보여주는 호칭이다.[14] 신숙주의 친사촌동생이다.[15]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의 남동생이다.[16] 신수근의 동생으로 성격이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낀 대목이 부분부분 등장하는데 "신씨가 왕대비와 선릉에 친히 제사를 하러 갔다고 연산군이 교외나 제천정에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신씨가 친잠례를 했다는 이유로 교서를 반포한 적도 있으며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갑자사화연산군을 거스르고도 뒤탈이 없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인데 연산군이 손에 검을 들고 자순대비에게로 찾아가 얼른 밖으로 나오라며 협박을 하자 신씨가 막아 자순대비를 구원하였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보내졌는데 신씨는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죽자 교동수직장 김양필, 군관 구세장은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이 죽고 난 뒤 그의 신주는 신씨가 직접 모셨고 원래 연산군의 무덤은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지만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는데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태지] 명 홍치 4년(1491년) 9월 2일 해시에 태어난(皇明弘治肆年玖月貳日亥時生)/세자빈의 딸 수억아기씨의 태를(世子嬪女壽億阿只氏胎)/홍치 6년(1493년) 7월 5일 유시에 묻음(弘治陸年柒月伍日酉時藏)[18] 큰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 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 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19] (중력)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 묘지문》[20]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원손(元孫)을 탄생(誕生)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5년 2월 23일 임오 5번째기사》. 국기일(國忌日)이었는데,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후략) - 《성종실록, 성종 25년 3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21]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태지2] 명 홍치 10년(1497년) 12월 19일 자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年十二月十九日子時生)/원자 금돌이 아기씨의 태를(元子金石乙伊阿只氏胎)/홍치 14년(1501년) 7월 초2일 미시에 묻음(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23] 반정 당시 세자 이고는 8살이었는데,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며 참여하지 않아 결국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고 한다.[태지3] 명 홍치 13년(1500년) 5월 20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三年五月二十日未時生)/대군 인수아기씨의 태를(大君麟壽阿只氏胎)/홍치 17년(1504년) 정월 29일 인시에 묻음(弘治十七年正月二十九日寅時藏)[태지4] 명 홍치 14년(1501년) 5월 14일 오시에 태어난 대군 인수(仁壽) 아기씨의 태를 홍치 14년(1501년) 9월 12일 축시에 묻다. - 《대군인수(仁壽)아기씨태지》[26]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인수)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27]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 《연산군부인 신씨의 묘지명》에 신씨가 아기 때 죽은 자식들도 포함하여 4남 3녀를 낳았다고 적혀있고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 신씨는 만삭이었는데 연산군이 이를 걱정하여 신씨에게 곡애를 못하게 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부친상의 충격으로 여덟 번째 왕손은 유산된 것으로 보인다.[태지5] 명 홍치11년(1498년) 11월 27일 진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一年十一月二十七日辰時生)/왕자 강수아기씨의 태를(王子康壽阿只氏胎)/홍치 12년(1499년) 3월 17일 자시에 묻음(弘治十二年三月十七日子時藏)[29] 양평군 이인의 이름은 중종 8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만손'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 스스로 양평군을 자처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남학동에서 성장하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자신의 종인 '보동'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 자신을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어릴 적부터 키웠던 '이손'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만손의 사건은 자작극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평군의 신체적인 특징과 만손의 특징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만손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만손은 처형되었다.[30] 장녹수는 성관계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사노비 여종 출신으로서,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의 마음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총애를 받았다면서도 의외로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딸인 이영수 한 명뿐이었다.[태지6] 왕녀 영수의 태를(王女靈壽胎)/홍치 15년(1502년) 11월 12일 양주군 봉접면에 묻고(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棒接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32] (전략)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라고 했다. 왕이 이를 매우 사랑했는데,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12월 8일 병오 1번째 기사[33]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34] (전략) 이것은 전 숙원(田淑媛)의 딸이 몽선의 집에 피접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대내에 아뢰게 되어 이런 명이 있었다. (후략)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0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B] 숙용 전씨의 딸 = 이정수(李貞壽)일 가능성이 높다. 이정수(李貞壽)가 연산 11년(1505년) 3월 11일에 태어나고 약 한 달 뒤인 4월 18일에 숙원이었던 전씨가 이유 없이 숙용으로 진급하였는데 딸을 낳고 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추측된다.[36] "폐주(廢主) 가 괴던 장녹수(張綠水)에게서 태어난 이영수(李靈壽)와 정금(鄭今)에게서 태어난 이함금(李咸今)에게 가사(家舍) 1좌(坐)와 노비(奴婢) 각각 15구(口)와 전(田) 각각 5결(結)을 내리고, 모두 선원록(璿源錄)에 올리소서." -《중종실록, 중종 12년 9월 1일 갑술 2번째기사》[C] 이함금(李咸今) = 신거홍의 처일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왕녀들 중 중종시대에도 생존 기록이 있는 사람은 휘신공주, 이영수, 이함금 뿐인데 휘신공주는 이미 중종반정 전에 혼인을 하였고 이영수(李靈壽)는 권한의 처가 되었기 때문이다.[태지7] 홍치 12년(1499년) 기미에 태어난(弘治十二年己未生)/옹주 복억의 태를(翁主福億胎)/홍치 12년 기미 5월 9일 삼천군 삼척면에 묻고(弘治十二年己未五月九日藏于三陟郡三陟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태지8] 명 홍치 14년(1501년) 2월 초 4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四年二月初四日未時生)/왕자 돈수아기씨의 태를(王子敦壽阿己氏)/홍치 19년(1506년)음력 9월 2일[83] 해시에 묻음(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태지9] ‘홍치(弘治) 14년(1501, 신유) 출생. 왕녀 복합의 태를 홍치 14년(1501, 신유) 6월 17일에 황주군 인교면에 묻음. 소화 4년(1929)에 옮겨 묻음(弘治十四年辛酉生 王女福合胎 弘治十四年辛酉六月十七日 藏于黃州郡仁橋面 昭和四年 月 日移藏).’ - 《연산군의 딸 왕녀 복합(王女 福合, 1501~?)의 태지석》[41]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D] 1. 대군 이인수가 죽었을 때,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총수 아기의 산소 자리를 잘 알아보지 못해 두 아이가 연달아 죽었다는 점 2. 대군 이인수에게는 대군이라 칭하지만 이 둘에겐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궁 소생으로 보인다.[D] [태지10] 명 홍치 18년(1505년) 3월 11일 유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八年三月十一日酉時生)/왕녀 정수 아기씨의 태를(王女貞壽阿只氏胎)/홍치 18년 5월(弘治十八年五月十)/7일 묘시에 묻음(七日卯時藏)[B] [태지11] 명 정덕원년(1506년) 3월 17일 인시에 태어난(皇明正德元年三月十七日寅時生)/왕자 태수아기씨 태를(王子泰壽阿只氏胎)/정덕원년 6월 18일 자시에 묻음(正德元年六月十八日子時藏)[47] 1506년 연산군의 아들들이 모두 사사 당했을 당시, 이태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를 보아 중종반정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48]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C] [50]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서녀는 신거홍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51] 거창군부인 신씨가 친상을 입을 당시에 8번째 자식의 해산이 잘못된 것으로 추정되어 정상적인 통계는 7명이다.[52] 사실 연산군도 세자 시절~즉위 초중반까지는 매우 정상적이었으며 재능이 뛰어나다고 언급돼 있으며 영특하다고 기록돼 있다. 다만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으며 학문에는 재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시절 연산군은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해 온갖 핑계를 대며 자주 빼먹기 일수여서 성종에게 잦은 꾸중을 들었으며 또한 문리를 통하지 못하여 학문의 진도를 한 단계씩 늦추면서 배워나갔다고 한다.[53] 그러나 의아하게도 즉위 이후에는 신하들과 논쟁할 때 또는 반박할 때 여러 경서와 경전을 적절히 잘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를 볼 때 머리가 성인이 되어서 늦게 트이는 케이스였던 것으로 보인다.[54] 평소에 아버지 성종을 혐오했던 연산군은 내관의 발언에 잠시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55] 이고는 아비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고 먹금한 것으로 보인다.[56] 단경왕후[57] 사실 조선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58] 1502년 출생.[59] 만으로 14세.[60]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사위[61]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던 조의제문이나 김일손의 사초 기록 시도는, 당시 국왕이었던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에 대해 허위사실까지 가미해가면서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시도한 행위이기 때문에 비단 연산군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른 왕이라도 묵과하기가 힘들 정도의 내용이었다. 왕의 가까운 직계 조상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현 국왕의 정통성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62] 왕들이 이런 것을 취미로 즐기려고 시도하면 신하들이 득달같이 "전하께서도 연산군이 되려 하시옵니까?"라는 식으로 반발하고 나서기 때문에 불가능했다.[63] 본래 연산군은 19살에 즉위해서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인 만큼 20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연령 고증에 부합하는 편이다.[64] 무엇보다 외워야 하는 대사의 양이 장난 아니게 많은 배역으로 악명이 높다. 왕과 나에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정태우는 예능 놀러와에서 보통 군주들은 근엄한 이미지 때문에 대사의 양이 많지 않아 연기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으나 연산군은 왕 치고는 말이 많은 인물이라 그만큼 대사가 많아 연기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고, 왕과 비안재모는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연산군이라는 배역 때문에 하루하루가 대사와의 전쟁이라고 그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청난 양의 대사 때문에 타 출연진들보다 미리 대본을 먼저 받아 대본 외우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하는가 하면 심지어 SBS 시트콤 행진 촬영 현장에서도 왕과 비의 대본 외우기도 따로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65]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라는 말이 있다.[66]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67]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로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68] 역대 최연소 성인 연산군이었지만 고증에 가장 부합하는 나이였으며 연기력도 손색없이 해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연해 성인 역을 수행해 1994년 KBS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다.[69]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충녕대군 이미지가 남아있던 터라 미스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최악의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70]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경우 자기 복제가 심한 정하연 작가 특성상 전작이었던 <장녹수>의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던 연산군과 겹치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다. 자칫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유동근 복제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안재모의 절륜한 연기 덕분에 이 둘의 연산군은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덕분에 전혀 복제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훗날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선배 유동근의 뒤를 이어 태종 이방원(정도전)역을 맡아, 선배의 연기와 겹치지 않는 자신만의 재해석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71] 오죽하면 최측근인 임사홍김자원마저도 인수대비는 오래 살지 못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릴 정도. 하지만 연산군 본인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죽기 전에 정말 못 볼 꼴을 다 보면서 죽게 된다. 심지어 죽고 나서도 빈전에 올리는 술에다가 가래침까지 내뱉는 건 덤.[72] 이후 연산군은 연산군 자신이 김자원을 죽였다는 사실을 듣고 크게 자책한다.[73]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남색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관계가 부각되는 게 특징.[74] 과거에 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MBC 예능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해서 "본래 사극 속 왕은 말 수가 없고 근엄해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말 수가 많았던 왕'이라 그만큼 대사량이 많아 연기하기 많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본인은 이 연산군 연기를 통해 그동안 남아있던 단종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되어 연산군 배역에 애착이 많이 가는 듯.[75] 참고로 정태우는 1995년 KBS 역사다큐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어린 시절의 연산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라이벌은 일종의 역사 다큐 형식이고 대사도 없어서 실질적으로는《왕과 나》가 첫 연산군 연기 도전이다.[76] 장녹수는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봤다.[77] 작중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기는 간신배 김자원의 협잡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안양군을 옹립하자'는 벽보가 나돌자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 옹립한다고?"라며 연산군이 분노했던 장면이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성대군을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다. 사실 "아래가 위를 능멸하는 짓거리"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군주권 지상론자 연산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왕의 정실인 중전 소생의 '적자'인 진성대군과 후궁 소생의 '서출'인 안양군은 애초부터 신분상의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이라는 발언은 다르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천한 후궁 소생의 서자를 엄연한 정실 소생에 적통인 나와 비교해? 그것도 모자라서 그따위 천한 서출을 만인지상의 군주에 앉히겠다고? 이것들이 임금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진성대군을 인정한 게 아니라 그냥 윗전은 윗전, 아랫것은 아랫것 이런 뿌리박힌 신분주의에서 기원한 오만.[78] 실제로 폐비 윤씨가 사사당하고 나서 성종은 폐비의 폐자도 꺼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며 그 때문에 연산군은 한동안 계모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알고 있었다. 갓 태어났을 때도 오랫동안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79] 영화 결말부에서 중종반정 때 도망가던 중 임숭재의 함정으로 돼지 우리에 빠졌는데 임숭재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 채로 기어코 암퇘지와 수간을 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유자광은 "마지막 성은은 돼지가 입었구만?"하고 질색한다.[80] 김지석은 이 연기로 2017년 제10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와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81] 연산군의 시대는 1부 한정, 2부는 선조의 재위기였던 16세기 후반, 3부는 17세기 후반의 시대를 다룬다.[82] 처용무를 추면서 즐겁다고 노래하지만, 속으로는 불안감을 달랠 수 없다고 독백하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이걸 본 신천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악행을 저질렀으니 괴롭기도 하겠지 하며 나름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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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양력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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