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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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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 | 燕山君
파일:연산군20100529-6.jpg
연산군묘 전경
출생 1476년 12월 2일[1]
(음력 성종 7년 11월 7일)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495년 2월 3일[A] (18세)
(음력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506년 11월 30일[4] (향년 29세)
(음력 중종 1년 11월 6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현 화개산 인근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5]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83년 3월 23일[6] ~ 1495년 2월 3일[A]
(음력 성종 14년 2월 6일 ~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조선 제10대 국왕
1495년 2월 3일[A] ~ 1506년 9월 28일[9]
(음력 1494년, 연산군 즉위년 12월 29일 ~ 연산군 12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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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융(㦕)
부모 부왕 성종
생모 폐비 윤씨
양모 정현왕후
형제자매 16남 12녀 중 장남
왕비 거창군부인
후궁
20명 [ 펼치기 · 접기 ]
숙의 이씨, 숙의 윤씨, 숙의 곽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숙용 장씨, 숙용 전씨, 숙용 조씨, 숙원 최씨, 숙원 장씨, 숙원 이씨, 숙원 김씨, 나인 최전향, 나인 수근비, 나인 정금, 나인 김숙화, 여완 월하매, 여원 안씨, 장씨, 의녀 강금
자녀 10남 9녀 (10남 10녀)
종교 유교 (성리학)
봉호 연산군(燕山君)[10]
존호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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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계
3.1. 친가(전주 이씨)3.2. 배우자/자녀
4. 기타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임금(上)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뿐이다.[11]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隱諱)한다.’ 하였으니, 사관(史官)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근래 사관(史官)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 기사
조선 제10대 국왕.

성종의 적장자이자 중종의 이복형으로, 5백 년 조선 왕조 역사에서 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하여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영영 끝까지 받지 못한 둘뿐이었던 임금 중 1명이다. 는 '융(㦕)'. 폐위되었기에 묘호시호가 없지만 생전에 받은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는 존호가 남아있다.[12]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보다는 '폐주(廢主)', '폐왕(廢王)', '폐조(廢朝)'이라고 많이 불린다.[13]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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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계

3.1. 친가(전주 이씨)

3.2. 배우자/자녀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연년생으로 8명의 자식을 얻었다.[49] 반면 연산군이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은 5남 7녀로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1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고작 3명 많았다.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인데 그 20명의 후궁들 중 정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자식들 중 거창군부인 신씨의 자식들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특히 장녀 휘신공주를 워낙 아꼈고 혜택을 많이 주고 이것저것 챙겨주었다고...)[50]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이었던 세자 이고의 성품은 아버지 연산군과 매우 정반대였다고 한다.[51] [52] 세자 이고는 만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 연산군의 언급에 따르면 "자질이 온화하고 도량이 원대하며 어릴 때부터 높게 빼어나서 이미 성인의 도량이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훌륭한 덕망으로써 진실로 구가의 돌아감에 응할만하고 하다" 라고 기록되있다. 또한 왕의 기질이 있고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았다고 한다. 연산군이 내관에게 세자가 얼마나 성취하였나고 묻자 내관은 "세자의 기상이 꼭 성종을 닮았다"고 말하였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연산군은 내관을 향해 칼로 쳐서 내관은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53] 반정이 일어나기 전 박원종 등이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일찍이 거창군 신씨의 친오빠이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54] 중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묻자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 라고 말했는데 결국 중종반정 때 신수근은 역적에 몰려 제거당했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 이고가 만 7세 됐을 때에는 성품이 굳세며 침중하고 엄숙하였는데 어느 날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잔치를 치르며 흥청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도중 세자 이고를 불러 흥청들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도 이들을 잘 돌보겠냐고 물었는데 뜻밖에도 이고는 연산군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55] 연산군은 이 일을 계기로 세자를 꺼렸다고 한다.(은근히 아버지와 기싸움을 하는 듯한...)

연산군의 아들 중에서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 공신들에 의해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다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4인이며 이들 이외의 연산군의 아들들도 추가로 사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사받은 4인의 아들 이외에는 대체로 영아 시절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반정 공신들의 조치 역시 당시에는 엄연한 불법인데 조선의 법도는 설령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딸들은 여자라 왕위에 위협되지 않아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딸들은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 중 하나로 부인을 내쫓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56]

4. 기타

특진관 예조 판성 유지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그릇을 옮기고", "호조 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67]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복은 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비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을 퍼뜨려 주라' 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를 쏘아서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경회루 주위도 화려하게 꾸몄다. 경회루 연못에 관사의 배 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처럼 만들고 채붕을 만들었으며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상징하여 연못 가운데는 만세산, 왼쪽엔 영충산, 오른쪽엔 진사산을 만들어 세 산이 높직이 치솟았다. 그 위에는 전우(신령과 부처를 모셔놓은 집), 사관(절과 도교의 사원), 인물의 모양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으며 영충산에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의 바라던 것이 뜻대로 이루어 조정에 드날리며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 희락하는 모양을 상징하여 이렇듯 조정에 있는 선비들의 득의 양양한 모양을 만들고, 진사산에는 소인이 먼 지방에 쫓겨나 의복이 남루하고 용모가 초췌하여 초가집에서 궁하게 살며 굶주려 쓰러져 있고 처자가 매달려 울부짖는 모양을 상징하여 이렇듯 귀양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만세산 위에는 봉래궁 일궁 월궁 예주궁 벽운궁을 만들어 모두 금은 채단으로 꾸며 찬란한 금빛이 햇볕에 빛났다. 반면 만세산 밑에는 푸른 난새, 자주빛 봉황새, 연꽃, 모란, 고소대, 봉래산, 황금까마귀, 옥토끼, 은붕어, 황금용 등의 여러 종류 관등을 좌 우보로 나누어 달아 천태 만상으로 기교를 다하여 금은 주취로 꾸몄다. 또한 채색 비단 천을 오려 백화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만상이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채색 비단을 오려 연꽃도 만들고 산호수도 만들어 연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이 외에도 수백명이 탈 수 있는 황룡주(황금빛의 용이 달린 배)를 연못 위에 띄어 휘황하게 비춰 놓았으며 연산군은 미복으로 잠행하여 배에 올라 타 만세산을 구경하였고 주위에 부용향[76] 수백 다발을 태우고 납거1천 자루를 늘어 세워 밤이 낮처럼 밝았으며 흥청 수백명이 풍악을 연주하였다. 경회루 누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 운평 등 3000여명의 여인들을 모아놓으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 면창 증상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있었으나 [86] 전과 비해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가고 있었다. 그 후 재위 중반 넘어가면서부터 재위 말기까지 증상이 어떠하다고 연산군 본인과 신하들이 피부질환에 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기에 치료하여 완치된 것으로 보인다.[87] 사관이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했으나 뒤늦게 치료의 효과가 나타났거나 서서히 자연스럽게 가라앉은 것으로 추측. 연산군의 얼굴에 종기(부스럼)가 떠나지 않았다는 내용은 세자 때의 기록이며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병으로 인한 흉터나 자국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에 대한 얘기는 실록이나 야사에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덕형[88]이 기록한 수필집 죽창한화를 보면 연산군 피부병은 완전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전라도에 머문 이덕형이 97세인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한테서 연산군 외모 묘사를 듣고 자세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어린시절 노인은 당시 한양에서 재위 끝무렵 연산군의 얼굴을 직접 봤으며 그 해 가을에 반정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노인은 연산군이 키가 컸으며 빛은 희고 수염이 적으며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고만 묘사하였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의 피부병 치료가 제대로 안됐다면 분명 노인은 빛은 희나 용안이 얽었다 또는 곰보 자국과 종기와 흉터(자국)이 있었다고 언급했을 것이다.[89]그러나 이에 대한 얘기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기에 연산군의 피부병은 제대로 치료되었으며 만성적인 피부병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90]
즉위 초 연산군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재위 중반~ 후반에 들어서는 눈병 외에는 다른 병상은 없었고 사소하고 가벼운 증상들만 있었는데 금방 호전되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앞서 언급했었는데 그동안 연산군은 대간들로 인한 스트레스 영향으로 금방 완쾌되지 않았고 완쾌 됐어도 다시 또 재발하는 등 이러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신하들을 억누르고 나서부터는 신하들의 족쇄로부터 자유를 찾았는지 몰라도 확실히 초기 때와 달리 활기차고 연산군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운평과 흥청들의 외모를 항상 중요시여겨 부스럼같은 피부질환이 있으면 곧 치료하게 하였다.

5. 대중매체

잊을 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주인공.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다가 개인사 뿐만이 아니라 가족사를 비롯해 워낙 인생이 드라마틱해서 대중매체에서 유난히 많이 다뤄지는 것 같다.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최종 보스급으로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다.

이대근, 정진영 등을 빼고는 20~30대 배우가 대부분 담당하였으나[93] 이상하게 연산군은 40대 배우가 많이 담당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한국 영화 역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왕의 남자>의 정진영의 잔상인 듯하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주로 30대 중후반 배우들이 연산군을 많이 연기하게 된다. 그만큼 대사량이 많고 감정선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 연기력이 웬만큼 절륜하지 않는 이상 연기하기 굉장히 힘든 배역이기도 하다.[94]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연산군을 많이 다룬 작가 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 등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80327123202.897.0.jpg
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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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1월 23일.[2] 조선 역사상 최초로 중궁인 교태전에서 태어난 왕이다. 연산군 이전에도 궁궐에서 태어난 왕이 둘(단종, 성종) 있으나 이들은 세자빈의 거처, 동궁인 자선당에서 태어났다.[A] 율리우스력 1월 25일.[4] 율리우스력 11월 20일.[5] 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6] 율리우스력 3월 14일.[A] [A] [9] 율리우스력 9월 18일.[10] 실제로 연산군은 원자 - 왕세자였기 때문에 즉위 이전에 받은 봉호는 없으며, 중종반정으로 폐위 이후에 받았다. 봉호는 구 연기군(燕岐郡)(현 세종특별자치시)의 별호인 연산()에서 따왔다.[11]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이 두려워하던 역사에 영원히 폭군으로 남게 되었다.[12] 물론 이마저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면서 삭탈되었다.[13]버려진 군주, 혹은 버려진 왕, 또는 버림받은 왕이란 의미이다. 조선 왕사에서 연산군이 지닌 위치를 보여주는 호칭이다.[14] 신수근의 동생으로 성격이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낀 대목이 부분부분 등장하는데 '신씨가 왕대비와 선릉에 친히 제사를 하러 갔다고 연산군이 교외나 제천정에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신씨가 친잠례를 했다는 이유로 교서를 반포한 적도 있으며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갑자사화 때 연산군을 거스르고도 뒤탈이 없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인데 연산군이 손에 검을 들고 자순대비에게로 찾아가 얼른 밖으로 나오라며 협박을 하자 신씨가 막아 자순대비를 구원하였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보내졌는데 신씨는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죽자 교동수직장 김양필, 군관 구세장은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이 죽고 난 뒤 그의 신주는 신씨가 직접 모셨고 원래 연산군의 무덤은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지만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는데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태지] 명 홍치 4년(1491년) 9월 2일 해시에 태어난(皇明弘治肆年玖月貳日亥時生)/세자빈의 딸 수억아기씨의 태를(世子嬪女壽億阿只氏胎)/홍치 6년(1493년) 7월 5일 유시에 묻음(弘治陸年柒月伍日酉時藏)[16] 큰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 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17] (중력)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 묘지문》[18]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원손(元孫)을 탄생(誕生)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5년 2월 23일 임오 5번째기사》. 국기일(國忌日)이었는데,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후략) - 《성종실록, 성종 25년 3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19]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태지2] 명 홍치 10년(1497년) 12월 19일 자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年十二月十九日子時生)/원자 금돌이 아기씨의 태를(元子金石乙伊阿只氏胎)/홍치 14년(1501년) 7월 초2일 미시에 묻음(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21] 반정 당시 세자 이고는 8살이었는데,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며 참여하지 않아 결국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고 한다.[태지3] 명 홍치 13년(1500년) 5월 20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三年五月二十日未時生)/대군 인수아기씨의 태를(大君麟壽阿只氏胎)/홍치 17년(1504년) 정월 29일 인시에 묻음(弘治十七年正月二十九日寅時藏)[태지4] 명 홍치 14년(1501년) 5월 14일 오시에 태어난 대군 인수(仁壽) 아기씨의 태를 홍치 14년(1501년) 9월 12일 축시에 묻다. - 《대군인수(仁壽)아기씨태지》[24]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인수)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25]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 《연산군부인 신씨의 묘지명》에 신씨가 아기 때 죽은 자식들도 포함하여 4남 3녀를 낳았다고 적혀있고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 신씨는 만삭이었는데 연산군이 이를 걱정하여 신씨에게 곡애를 못하게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부친상의 충격으로 여덟번째 왕손은 유산 된 것으로 보인다.[태지5] 명 홍치11년(1498년) 11월 27일 진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一年十一月二十七日辰時生)/왕자 강수아기씨의 태를(王子康壽阿只氏胎)/홍치 12년(1499년) 3월 17일 자시에 묻음(弘治十二年三月十七日子時藏)[27] 양평군 이인의 이름은 중종 8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만손'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 스스로 양평군을 자처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남학동에서 성장하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자신의 종인 '보동'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 자신을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어릴 적부터 키웠던 '이손'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만손의 사건은 자작극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평군의 신체적인 특징과 만손의 특징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만손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만손은 처형되었다.[28] 장녹수는 성관계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사노비 여종 출신으로서,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의 마음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총애를 받았다면서도 의외로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딸인 이영수 한 명뿐이었다.[태지6] 왕녀 영수의 태를(王女靈壽胎)/홍치 15년(1502년) 11월 12일 양주군 봉접면에 묻고(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棒接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30] (전략)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라고 했다. 왕이 이를 매우 사랑했는데,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12월 8일 병오 1번째 기사[31]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32] (전략) 이것은 전 숙원(田淑媛)의 딸이 몽선의 집에 피접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대내에 아뢰게 되어 이런 명이 있었다. (후략)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0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B] 숙용 전씨의 딸 = 이정수(李貞壽)일 가능성이 높다. 이정수(李貞壽)가 연산 11년(1505년) 3월 11일에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4월 18일에 숙원이었던 전씨가 이유없이 숙용으로 진급하였는데 딸을 낳고 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추측된다.[34] "폐주(廢主) 가 괴던 장녹수(張綠水)에게서 태어난 이영수(李靈壽)와 정금(鄭今)에게서 태어난 이함금(李咸今)에게 가사(家舍) 1좌(坐)와 노비(奴婢) 각각 15구(口)와 전(田) 각각 5결(結)을 내리고, 모두 선원록(璿源錄)에 올리소서." -《중종실록, 중종 12년 9월 1일 갑술 2번째기사》[C] 이함금(李咸今) = 신거홍의 처일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왕녀들 중 중종시대에도 생존기록이 있는 사람은 휘신공주, 이영수, 이함금 뿐인데 휘신공주는 이미 중종반정 전에 혼인을 하였고 이영수(李靈壽)는 권한의 처가 되었기 때문이다.[태지7] 홍치 12년(1499년) 기미에 태어난(弘治十二年己未生)/옹주 복억의 태를(翁主福億胎)/홍치 12년 기미 5월 9일 삼천군 삼척면에 묻고(弘治十二年己未五月九日藏于三陟郡三陟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태지8] 명 홍치 14년(1501년) 2월 초 4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四年二月初四日未時生)/왕자 돈수아기씨의 태를(王子敦壽阿己氏)/홍치 19년(1506년)음력 9월 2일[111] 해시에 묻음(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태지9] ‘홍치(弘治) 14년(1501, 신유) 출생. 왕녀 복합의 태를 홍치 14년(1501, 신유) 6월 17일에 황주군 인교면에 묻음. 소화 4년(1929)에 옮겨 묻음(弘治十四年辛酉生 王女福合胎 弘治十四年辛酉六月十七日 藏于黃州郡仁橋面 昭和四年 月 日移藏).’ - 《연산군의 딸 왕녀 복합(王女 福合, 1501~?)의 태지석》[39]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D] 1. 대군 이인수가 죽었을 때,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총수 아기의 산소 자리를 잘 알아보지 못해 두 아이가 연달아 죽었다는 점 2. 대군 이인수에게는 대군이라 칭하지만 이 둘에겐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궁 소생으로 보인다.[D] [태지10] 명 홍치 18년(1505년) 3월 11일 유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八年三月十一日酉時生)/왕녀 정수 아기씨의 태를(王女貞壽阿只氏胎)/홍치 18년 5월(弘治十八年五月十)/7일 묘시에 묻음(七日卯時藏)[B] [태지11] 명 정덕원년(1506년) 3월 17일 인시에 태어난(皇明正德元年三月十七日寅時生)/왕자 태수아기씨 태를(王子泰壽阿只氏胎)/정덕원년 6월 18일 자시에 묻음(正德元年六月十八日子時藏)[45] 1506년 연산군의 아들들이 모두 사사 당했을 당시, 이태수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는데 이를 보아 중종반정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46]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C] [48]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서녀는 신거홍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49] 거창군부인 신씨가 친상을 입을 당시에 8번째 자식의 해산이 잘못된 것으로 추정되어 정상적인 통계는 7명이다.[50] 아들중에서는 창녕대군 이성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51] 사실 연산군도 세자시절~즉위 초중반까지는 매우 정상적이였으며 재능이 뛰어나다고 언급되있으며 영특하다고 기록되있다. 다만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으며 학문에는 재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시절 연산군은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해 온갖 핑계를 대며 자주 빼먹기 일수여서 성종에게 잦은 꾸중을 들었으며 또한 문리를 통하지 못하여 학문의 진도를 한 단계씩 늦추면서 배워나갔다고 한다.[52] 그러나 의아하게도 즉위 이후에는 신하들과 논쟁할 때 또는 반박할 때 여러 경서와 경전을 적절히 잘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를 볼 때 머리가 성인되어서 늦게 트이는 케이스였던 것으로 보인다.[53] 평소에 아버지 성종을 혐오했던 연산군은 내관의 발언에 잠시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54] 단경왕후[55] 이고는 아비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고 먹금한 것으로 보인다.[56] 사실 조선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57]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던 조의제문이나 김일손의 사초 기록 시도는, 당시 국왕이었던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에 대해 허위사실까지 가미해가면서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시도한 행위이기 때문에 비단 연산군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른 왕이라도 묵과하기가 힘들 정도의 내용이었다. 왕의 가까운 직계조상의 정통성을 부정하는건 현 국왕의 정통성도 부정하는 것이다.[58] 왕들이 이런 것을 취미로 즐기려고 시도하면 신하들이 득달같이 "전하도 연산군이 되시려고 그러세요?"라는 식으로 반발하고 나서기 때문에 불가능했다.[59] 1502년 출생[60] 참고로 휘신공주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보다 3살 어리다.[61]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사위[62] 그러나 아무래도 근년의 흉년이 맘에 걸렸던 것인지 이후에 한 신하가 한양에서는 한성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호소할 데 없는 고독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구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전과 다르게 연산군은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방도는 마땅히 거행해야 한다며 곧 시행하도록 하였다.[63] 불법으로 뇌물을 받거나 직권을 남용하여 재물을 탐하는 죄[64] 당시에는 음력을 사용하였는데 고종 때부터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년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하며 이로써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65] 이융은 연산군의 본명이다.[66] 죽은 사람을 땅에 묻거나 황장하기 전에 궤연 앞에 치는 하얀 포장.[67] 여자 귀신[68] 참고로 정창손은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69] 그러나 정창손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그냥 냅두라고 하였다.[70] 일각에서는 영의정 정창손과 사이가 안좋아서 귀신도 내쫓을 겸 화포로 정창손도 같이 내쫓자는 본심이 있기에 제안을 했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71] 광증[72] 연산군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혹시나 궁 밖 바깥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하였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궁 밖 사람들이 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73] 궁 밖 사람들이 몰래 엿보는 광경을 들켰을 때는 곤장을 때리고 그 일대의 집을 허물었다고 한다.[74] 흔히 대비에게 박치기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얘기는 야사이다.[75] 참고로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76] 목련으로 만든 향[77] 칡 섬유로 짠 베[78] 삼실로 짠 천[79] 생원·진사에 합격된 때에 입던 예복[80] 황교익은 한국은 장어를 약재로만 쓰였고 식용으로 안 쓰다가 일본의 영향으로 식재료 활용을 했다고 우겼는데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단번에 반박이 가능했다. 다만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먹었다는 기록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록으로 제시되는 <식요찬요>는 세종 대에 쓰여진 책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연산군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그리고 <식요찬요>에서 등장하는 장어요리는 죽과 된장구이 정도이고 백숙은 언급되지 않았다. 여러 모로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대목.# 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황교익의 궤변은 한방에 논파된다. 세종 대에 장어를 요리로 먹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고부동하니까.[81] 이 품종은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다.[82] 여담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못생겨서 연산군이 잘생겼다라고 기록에 쓰라는 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 무근이다.[83] 연산군과 중종이 키가 작았다거나 중키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둘 다 키가 컸다는 기록 뿐이며 키가 작거나 중키였다는 묘사는 야사나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으며 온라인상에서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84] 본문에서 뜻하는 양기는 심신의 기력을 뜻한다.[85] 부스럼[86] 아직 치료를 진행하고 있는 시기일 수도 있다.[87] 초기때는 면창 증상 언급이 잦았다.[88]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89] 다른 외모 기록에도 연산군 얼굴에 곰보나 종기 흉터자국이 있었다는 얘기는 언급되지 않았다.[90] 보통 미디어에서 연산군의 피부병 얘기가 나올 때 피부병을 치료한 이에 대한 얘기는 언급이 없고 일생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여드름이 많았다 식으로만 알려져있다. 또한 연산군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인 중종은 얼굴과 몸에 아토피 피부 질환이 있었으며 세조 또한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었다 이 외에도 태종, 세종, 문종, 성종, 광해군, 정조는 종기 질환을 숙종, 현종, 헌종은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다. 이렇듯 수많은 조선 임금들은 유전처럼 피부병을 앓았었다.[91] 실제 연산군 얼굴에는 반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체 없다.[92] 이 시기의 세계관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순조나폴레옹을 알 정도. 허나 겉으로만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었다.[93] 본래 연산군은 19살에 즉위해서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인 만큼 20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연령 고증에 부합하는 편이다.[94] 무엇보다 외워야하는 대사의 양이 장난 아니게 많은 배역으로 악명이 높다. 왕과 나에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정태우는 예능 놀러와에서 보통 왕들은 근엄한 이미지때문에 대사의 양이 많지 않아 연기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으나 연산군은 왕 치고는 말이 많은 인물이라 그만큼 대사가 많아 연기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고, 왕과 비안재모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연산군이라는 배역때문에 하루하루가 대사와의 전쟁이라고 그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청난 양의 대사때문에 타 출연진보다 미리 대본을 먼저받아 대본외우는 연습을 해야하는가 하면, 심지어 SBS 시트콤 행진 촬영현장에서도 왕과 비의 대본외우기를 해야할 정도였다고 한다.[95]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라는 말이 있다.[96]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97]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로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98] 역대 최연소 성인 연산군이었지만 고증에 가장 부합하는 나이였으며 연기력도 손색없이 해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연해 성인 역을 수행해 1994년 KBS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다.[99]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충녕대군 이미지가 남아있던터라 미스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최악의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100]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경우 자기 복제가 심한 정하연 작가 특성상 전작이었던 <장녹수>의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던 연산군과 겹치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다. 자칫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유동근 복제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안재모의 절륜한 연기 덕분에 이 둘의 연산군은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덕분에 전혀 복제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훗날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선배 유동근의 뒤를 이어 태종 이방원(정도전)역을 맡아, 선배의 연기와 겹치지 않는 자신만의 재해석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101] 오죽하면 최측근인 임사홍김자원마저도 인수대비는 오래 살지 못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릴 정도. 하지만 연산군 본인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죽기 전에 정말 못볼 꼴을 다보면서 죽게 된다. 심지어 죽고 나서도 빈전에 올리는 술에다가 가래침까지 내뱉는 건 덤.[102]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남색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 관계가 부각되는게 특징.[103] 과거에 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MBC 예능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해서 "본래 사극 속 왕은 말 수가 없고 근엄해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말 수가 많았던 왕'이라 그만큼 대사량이 많아 연기하기 많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본인은 이 연산군 연기를 통해 그동안 남아있던 단종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되어 연산군 배역에 애착이 많이 가는 듯.[104] 참고로 정태우는 1995년 KBS 역사다큐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어린 시절의 연산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라이벌은 일종의 역사 다큐 형식이고 대사도 없어서 실질적으로는《왕과 나》가 첫 연산군 연기 도전이다.[105] 장녹수는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봤다.[106] 작중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기는 간신배 김자원의 협잡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안양군을 옹립하자'는 벽보가 나돌자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 옹립한다고?"라며 연산군이 분노했던 장면이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성대군을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다. 사실 "아래가 위를 능멸하는 짓거리"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군주권 지상론자 연산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왕의 정실인 중전 소생의 '적자'인 진성대군과 후궁 소생의 '서출'인 안양군은 애초부터 신분상의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이라는 발언은 다르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천한 후궁 소생의 서자를 엄연한 정실 소생에 적통인 나와 비교해? 그것도 모자라서 그따위 천한 서출을 만인지상의 군주에 앉히겠다고? 이것들이 임금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진성대군을 인정한 게 아니라 그냥 윗전은 윗전, 아랫것은 아랫것 이런 뿌리박힌 신분주의에서 기원한 오만.[107] 실제로 폐비 윤씨가 사사당하고 나서 성종은 폐비의 폐자도 꺼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며 그 때문에 연산군은 한동안 계모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알고 있었다. 갓 태어났을 때도 오랫동안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108] 영화 결말부에서 중종반정 때 도망가던 중 임숭재의 함정으로 돼지 우리에 빠졌는데 임숭재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채로 기어코 암퇘지와 수간을 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유자광은 "마지막 성은은 돼지가 입었구만?"하고 질색한다.[109] 김지석은 이 연기로 2017년 제10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와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110] 연산군의 시대는 1부 한정, 2부는 선조의 재위기였던 16세기 후반, 3부는 17세기 후반의 시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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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양력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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