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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光陵광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조선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으로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릉 능역에 들어갔을 때 능역 왼쪽에 있는 무덤이 세조의 능이고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2. 역사
1915년에 촬영된 광릉의 모습. 비각 앞(정자각 우측)에 수복방(왕릉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이 보이는데 이후 소실되어서 없는 채로 있다가 2017년에 복원하였다. 정자각 좌측에도 수라간이 있었는데 역시 소실되었다가 2017년에 복원하였다.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조성할 때 죽을 때 빨리 썩어야 하니 석곽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자신에게 큰 돈을 쓰지 말고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는 뜻에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정확히는 석실 형태의 석곽을 만든 후 안에 관을 집어넣는 이전의 조선왕릉과 달리 세조는 회곽묘 형태로 관이 들어갈 구덩이만 석회로 다진 회곽에 안장했는데 역설적으로 석회가 주성분인 삼물[1]이 돌처럼 굳어 방수 기능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회곽에 안치된 시신은 석곽에서보다 천천히 썩으며 그걸 넘어서 사실상 안 썩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서 미라가 대거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에는 왕릉 건축과 조성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백성들의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는데 세조가 부역 인원과 조성 비용을 절반 이상 감축하게 한 것이며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시신이 빨리 흙이 되어야 좋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렇게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이 조성되었고 덕분에 왕릉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조는 물론 조선 장례 문화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후의 왕릉 조성에도 큰 모범이 되었다. 조선의 관혼상제 예법을 적시한 주자가례에도 장례 방식이 회곽묘로 되어있으나, 정작 회곽 묘의 원산인 중국에선 회곽묘가 흔하지 않다. 반면 조선은 사대부의 상당수가 회곽묘다. 1483년 그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원래는 정창손의 조부인 정흠지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시켰다.
원래 정해진 능호(陵號)는 지금의 이름인 광릉이 아닌, 태릉(泰陵)이었다.[2] 그러다 예종이 태릉을 제시했는데 신숙주가 재논의 과정에서 태릉은 암군이자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은 당 현종의 능호와 똑같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결국 광릉(光陵)으로 정해진다.[3] 이 태릉(泰陵)이란 능호는 나중에 문정왕후의 능호가 된다.
3. 형식
하늘에서 바라본 광릉의 모습. 왼쪽이 세조릉, 오른쪽이 정희왕후릉. 하나의 정자각을 사이에 두고 완벽한 V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왕릉의 형식 중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효시이다.[4] 즉, 하나의 정자각을 가운데에 두고, 정자각 뒤편의 2개의 언덕에 각각 능을 구성하는 형식으로서 보통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좌측이 왕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무덤이다. 이 법도를 벗어난 무덤으로는 조선 왕조의 추존 왕인 덕종과 소혜왕후가 묻혀 있는 경릉(敬陵)이 있다.
4. 외부 링크
5. 같이보기
[1] 三物. 석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2 : 1 : 1로 섞은 것[2] 사실 경릉(景陵)·창릉(昌陵)·정릉(靖陵)이 능호 후보였어서 태릉 또한 후보에 없었다.[3] 정작 이 광릉이라는 능호를 공유하는 당 목종도 암군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4]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현릉(顯陵) 역시 동원이강릉인데, 광릉은 정희왕후가 승하한 후인 1483년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었고, 현릉은 처음에는 문종만 묻혀 있는 단릉이었다가 중종 대인 1512년에 현덕왕후를 같이 모심으로써 동원이강릉으로 조성이 되었다. 즉, 광릉이 현릉보다 조성된 시점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