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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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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3대 국왕
순조 | 純祖
대한제국 추존 황제
순조 숙황제 | 純祖 肅皇帝
파일:순조추정어진..jpg
순조 익선관 추정 어진
출생 1790년 7월 29일
(음력 정조 14년 6월 18일)[1]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즉위 1800년 8월 23일 (10세)
(음력 정조 24년 7월 4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834년 12월 13일 (향년 44세)[2]
(음력 순조 34년 11월 13일)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인릉(仁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800년 1월 25일 ~ 8월 23일
(음력 정조 24년 1월 1일 ~ 7월 4일)
조선 제23대 국왕
1800년 8월 23일 ~ 1834년 12월 13일
(음력 순조 즉위년 7월 4일 ~ 순조 34년 11월 13일)
서명 파일:순조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bf1400><colcolor=#ffd400,#ffd400> 본관 전주 이씨[3]
휘 홍(玜)[4]
부모 부왕 정조 선황제
모후 효의선황후
생모 현목유비 박씨
형제자매 2남 1녀 중 차남
부인 순원숙황후 (1802년 혼인)
후궁 숙의 박씨
자녀 슬하 1남 4녀 (+ 양자 1남)[5]
종교 유교 (성리학)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
사당 효성전(孝成殿)
→ 종묘 정전 14실(宗廟 正殿 14室)
묘호 순종(純宗) → 순조(純祖)
존호
[ 펼치기 · 접기 ]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
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열
(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
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
(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
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
(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
시호 조선: 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대한제국: 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청: 선각(宣恪)[6]
수렴청정 예순대왕대비 김씨 (1800년~1804년)
대리청정 왕세자 이영 (1827년~1830년)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파일:순조 어필.jpg
순조의 어필
1. 개요2. 생애3. 평가4. 묘호와 시호5. 어진6. 기타7. 가계
7.1. 조상7.2. 형제자매7.3. 배우자/자녀
8.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개요

전후의 주금(洒禁)에 매양 처음에는 잘 되다가 종말에는 흐지부지하고,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어 백성에게 유리하게 하자는 것이 도리어 백성을 소요롭게 하는 데에 돌아갔다.[7][8]

《순조실록》 1832년 9월 29일 기사
조선의 제23대 국왕.

묘호는 순조(純祖), 시호는 숙황제(肅皇帝), 휘는 홍(玜), 자는 공보(公寶).

정조의 차남이자 사실상 장남[9]으로, 모친은 박준원의 딸이자 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인 유빈 박씨이다. 대한제국 건국 당시 고종의 양조부로서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격상됐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순조/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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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정조의 무기력한 어린 아들 이미지와 병약했다는 이유로 존재감이 매우 옅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박약한 의지로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암군(暗君)으로 평가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순조는 중흥군주(영조-정조) 뒤의 수성군주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무기력함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커진다.

순조는 영조, 정조 시기부터 약화된 붕당 덕분에 꽤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자 수업 기간이 없다시피하게 너무 어린 나이(11세)에 왕위에 올랐고 본인이 이 강력한 왕권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슷하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고조할아버지 숙종은 그 어린 나이부터 직접 친정을 하며 환국으로 국정을 주도한 걸 생각해 보면 대비되는 부분.

정순왕후의 수렴과 본인 스스로의 역량으로 이를 극복하는 듯하였으나, 결국 청년기를 넘기면서부터 급격히 정치에 손을 놓았다. 이에 순조는 대신 아들 효명세자에게 지속적으로 양위 의사를 보였고 실제로 대리청정까지 맡기면서 빈말이 아님을 보였다.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가 방치한 국정을 열심히 이끌며 기대를 모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안타깝게도 단명했다. 결국 순조는 아들의 죽음 이후 사실상 국정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렇게 왕권이 유명무실해진 결과 19세기 조선을 좌지우지한 세도정치를 낳았다.

미약한 자질에 비해 재위기간은 너무나 길었기에, 그와 마찬가지로 30년 넘게 통치했던 선왕 두 명의 케이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바로 세종대왕과 중종. 세 군주 모두 30년 넘게 권좌를 유지한 수성형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극도로 큰 차이가 있다.

세 임금 모두 똑똑한 세자(문종/인종/효명세자)는 요절하면서 왕실은 어린 계승자(단종/명종/헌종)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단명하는 바람에 방계 (선조/철종)의 인물이 즉위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10]

우선 세종대왕의 경우 순조와 비슷하게 세자기간이 매우 짧았고 피를 싫어해 옥사도 벌이지 않았지만, 황희처럼 신뢰가 있는 대신은 비리가 있어도 중용하였다. 또 세자(문종)에게 오랫동안 실권을 준 대리청정을 맡겼다.[11] 문종의 요절로 단종이 승계한 것도 효명세자의 요절로 헌종이 승계한 것과 유사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세종은 선대에 이미 소헌왕후의 장인인 심온을 숙청해 외척의 싹을 잘라놨고[12] 또 세자기간이 짧았다고는 하나 태종이 승계 후에도 사실상 상왕 통치를 3년 정도 했기 때문에 통해 세종은 국왕이지만 사실상 대리청정과 유사하게 국정 경험을 다졌던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당초 스물이 다 되어 즉위해 한국사 최대의 명군으로 남은 세종대왕과, 고작 10여살 때 임금에 올라 암군에 그친 순조를 단순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13]

중종의 경우 반정이란 이유 때문에 부득이한 측면도 있지만 순조와 비슷하게 신하들에게 꽤 휘둘렸으며,[14] 말년에는 인종에게 대리청정을 거쳐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공통 된다.[15]

중종과 순조 모두 조선이 융성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시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중종은 업적들도 있고 중종 이후로도 조선은 300년 넘게 유지되었는데, 순조는 불과 사후 76년 후인 1910년에 망국을 겪었다는 점.

중종과 순조의 시대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바로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 없었던 점이었다. 중종의 경우에는 옥사와 정치 혼란을 방기하면서 이에 실망한 많은 신하들이 사직을 하거나 과거에 들어가도 관직을 거부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란 말마따나 사림들은 이때를 노려 성리학을 고도로 발전, 학파를 형성해 문하에 제자들을 양성하며 세력을 늘렸다. 명종 초중반[16]부터 옥사가 잦아들면서, 사림들은 중앙 정계에 대한 진출이 쉽게 이루어졌고 선조 시기가 되면 사림 세력은 조선에서 주류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반면에 순조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았다. 영조 대 당시 양대 붕당이었던 노론은 삼수의 옥, 소론은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으로 당파색은 완전히 사라져서 탕평당이라는 당파로 유지되었다. 정조는 붕당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이른바 의리 탕평을 통해 벽파(청명당)가 주요 세력이 되고 남인도 다시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준론 탕평'은 깨지게 된다. 벽파는 즉시 남인을 신유박해로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몰아냈으나, 벽파도 버팀목이었던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김한록의 '팔자흉언'이라는 죄명을 씌어서 몰락하게 된다. 시파(구 탕평파)의 영수 격인 김조순은 치열한 권력투쟁보다 권력 분점과 그에 기반한 정치적 입지 유지에만 주력했다. 더불어 순조의 느슨해진 외척에 대한 경계는 기어이 세도정치의 서막이 되었다는 평가. 임상옥 등으로 대표되는 중인, 상인계급 또한 공명첩을 통해 기성질서에 편입되며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세력화에 실패하였다.

한편 좋지 못했던 결과와 별개로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당시 보여준 모습만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왕의 병환으로 고여 있던 파직, 탄핵, 유배, 국문, 해임 등의 처벌과 관직 제수 및 시상 등에 대한 수많은 업무를 일사천리로 수행했는데, 상벌은 물론이고 인사권까지 직접 주관하는 광폭행보는 왕이 살아 있는 시점에서 세자의 신분으로 해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일임에도 불구, 순조는 월권 행위라고 문제 삼거나 불쾌해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원하면서 뒤에서 힘을 바짝 실어줬다.

사실 이는 정치적 파벌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조도 정치적인 의도나 아들이 못미더워서 갈구기 위해 대리청정을 실시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아들에게 전적으로 믿고 맡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던 선조가 자신의 정신질환을 알면서도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고 질시, 박대한 것과, 영조가 대리청정 과정에서 사도세자를 심각하게 핍박한 사례 등을 감안할 때, 순조-효명세자 대리청정은 그 자체로는 세종-문종 간 대리청정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의 왕사에서 왕과 세자가 권한을 분담했던 경우 중에서는 꽤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17]

총평하자면 군주로서 완벽한 낙제점. 능력도 의지도 심각하게 박약한, 그야말로 만력제가 전통적 관점에 따라 받는 평가가 이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이에게 일을 떠넘겨서라도 해결할 정도의 의지는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는 군주로서도 약간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관점에서도 후계 정책이 개판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와 확실히 다르다.[18]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영조의 완벽한 안티테제였다. 왕으로서 정무감각이나 의지, 비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인간적인 아버지로서의 모습이나 후계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군주로서도 대척점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조는 노련한 정치술로 신하들을 교활하게 휘어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왕으로서 무조건 주도권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고 그를 위한 능력 함양을 후계자들에게 강요할 정도로 그 신념이 강박적이었다. 반대로 순조는 비전도 의지도 능력도 없이 어린 나이에 백지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수십 년간 조정 전체의 정체를 불러 올 정도로 유약하고 무능했으며 무력했다.

영조는 인물평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뛰어난 정무감각 및 애민정신과 별개로 극한의 오만과 독선, 나르시시즘에 빠진 일종의 성격장애 보유자였다. 사도세자가 그 지경에 이르도록 정신적 학대를 당한 것도 사도세자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도세자가 가진 기질과 자질이, 영조가 원하는 극도로 편협한 군주로서의 인재상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영조가 정치적으로 뛰어난 군주라는 평가가 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시간이 갈수록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순수하게 인간적이고 도덕덕인 측면 이외에도 영조의 이런 태도와 행보가 본질적으로 군주로서의 후계정책으로, 즉 완전히 사적인 것이 아니고 국가의 미래가 달린 공적인 일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군주로서의 평가에도 조금이나마 의문부호가 따라붙는 상황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해도 후계정책은 나라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사다. 왕이 되어야 할 이가 신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능력이 있어야 나라가 유지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조는 원래 후계정책만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군주가 되는 것이 상수였다. 영조가 이미 사도세자를 학대해서 세자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겨 버린 시점에서 이미 영조의 직후 후계자는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왕이 되기 VS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기라는 정신 나간 경우의 수 중 하나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에 풍찬노숙하며 전쟁을 지휘한 광해군조차 어렸을 때도 아니고 장성한 뒤인 전후에 궁중 암투를 견디지 못하고 암군으로 타락해 버렸음을 생각해 보자. 10대 초반의 나이에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도 멀쩡한 인간으로 자라난다? 정조가 그걸 해 버리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영조 이후 후계 구도가 결과적으로 멀쩡했던 것이지 영조의 후계 정책이 자살행위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19]

반대로 순조는 딱 후계정책 하나에서만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자와의 관계만큼은 세종에 필적할 정도다.[20] 그런데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군주로서의 자질에서 후계정책도 사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군주들 대부분이 후계정책을 실제로 망쳤거나 적어도 큰 위기를 불러 왔다. 선조와 광해군이 그랬고 인조와 소현세자/효종이 그랬으며, 숙종과 경종/영조의 경우도 문제가 많았고 영조와 사도세자/정조는 결과론을 제외하면 끝판왕일 정도다. 그리고 그중 선조-광해군의 사례는 사후 극복에 끝내 실패해서 실제 결과적으로도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후계정책의 중요성이 생각보다 중요하고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는 증거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왕의 나태함 때문이기는 해도 효명세자에 대한 순조의 무조건적인 신임과 지지는, 작게는 순조가 자신의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마련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리고 크게는 후계자가 문제없이 자신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높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순조는 운명적으로도 영조와 대척점에 서 있었으니, 자기 손으로 후계 구도를 망칠 짓을 다 하고 다닌 영조가 그러고도 흔들리지 않는 세손을 둔 덕에 후계구도를 망친 왕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과 반대로, 후계 정책에 있어서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언행만을 보인 순조는 세자의 요절이라는 초특급 억까로 인해 그나마 역사에 남길 수 있었던 긍정적 행보가 사실상 허사로 돌아가는 장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4. 묘호와 시호


처음 올린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성효대왕(成孝大王). 이후 철종 때 묘호가 순조(純祖)로 개정되었고, 대한제국 고종 때 양할아버지 및 2대조로서 황제로 격상(추존)되면서 시호가 숙황제(肅皇帝)로 개정되어 최종적으로 '순조 숙황제'가 되었다.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21]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서학(천주교(가톨릭))을 탄압해 외세를 물리쳤다는 이유로 철종 8년(1857)에 순조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묘호도 원래는 영종·정종으로, 영조는 고종 때 여러 공이 많다는 이유로, 정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선포하면서 자신의 3대조라는 이유로 묘호를 황제로 재추존해 바꾸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이지만 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통(王統)을 이었으므로, 양아버지를 높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 역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文祖翼皇帝)의 양아들로 들어갔기에, 순조는 여러모로 인조 이래 효현숙종(삼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유일한 직계(직통) 계승자로서 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5. 어진

파일:순조어진1.jpg 파일:순조어진2.jpg 파일:순조어진3.jpg
<colbgcolor=#bf1400>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반소된 순조의 어진들
일제강점기 당시 순조의 어진은 원유관본 2점, 익선관본 대본, 소본 각각 1점으로 총 4점이 전해져오고 있었지만 1954년 12월에 발생한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인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순조 어진의 경우도 다른 어진들과 동일하게 돌돌 말려진 상태에서 화마에 휩싸였으며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은 탓에 위 어진들을 자세히 보면 표제의 붉은 부분이나 색소 등이 다른 곳으로 번진 걸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어진이 얼굴을 포함해서 반 이상이 타버리는 바람에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불운은 아예 없어져버린 아버지부터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왼쪽 어진은 이후에 모사된 고종 황제의 어진과 유사하게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형태로 1830년 당시 41세였던 순조를 모사한 것이다. 표제 바로 앞에는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된 직후 부가된 붉은 비단이 보인다. 가운데 어진은 경운궁 내 선원전의 화재의 영향으로 1900년에 왼쪽 어진을 그대로 모사한 이모본이다. 전체적으로 큰 차이점은 없지만 강사포의 색상이 더 붉게 표현되었고 음영도 강하게 처리되어 있다. 얼굴 부분이 완전히 없어진 왼쪽 어진과는 달리[22] 이 어진은 그나마 구레나룻 부분만큼은 남아있다.

오른쪽 어진은 훼손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해 화문석의 일부만 남아있으며 표제도 중간중간이 타버려서 일부만 판독할 수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표제부분과 1935년에 작성된 관련 서류를 검토한 결과 이 어진은 순조의 익선관본 대본이라는 것을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

가운데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 어진들은 훼손 상태가 심각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왔다가 2019년 하반기에야 부분적으로 공개되었다.
파일:순조추정어진..jpg
<colbgcolor=#bf1400> 순조 추정 어진
위 어진은 반신상의 어진으로 순조의 익선관본 소본으로 추정되는 어진이다. 신원미상의 어진으로 남은 까닭은 당연히 대화재의 영향으로 표제가 타버린 탓이다. 그나마 입 부분만 겨우 알 수 있으며 만약 이 어진이 순조의 어진이라면 아직 수염이 많지 않은 얼굴로 미루어 보아 채 스무 살도 안 된 1808년경에 모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위 어진이 순조의 어진으로 최종판정된다면 순조의 어진은 다른 조선왕들과는 달리 추존왕인 원종과 함께 유이하게 결본(缺本)이 없는 어진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했듯 대화재 직전까지 순조의 어진 수는 총 4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진들이 다 남았기는 한데 그 어진 속 얼굴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파일:c87fnvr.jpg 파일:순조 숙황제 어진 열성어진본.jpg
<colbgcolor=#bf1400>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colbgcolor=#bf1400>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서 실린 초상화가 있다. 그러나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는 대체로 실제 외모와 괴리가 크다.

《순조실록》에서 순조의 용모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상(上)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莊大)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溫和)하게 덕(德)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순조실록》, 순조대왕 묘지문(誌文).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순조는 체격이 풍만하고 푸근한 인상의 외모인 것 같다. 또한 기록을 보면 정조와 닮은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23]

6. 기타

7. 가계

7.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순조
(純祖)
<colbgcolor=#fff3e4,#331c00> 정조
(正祖)
<colbgcolor=#ffffe4,#323300> 장조
(莊祖)
영조
(英祖)
소유영빈 이씨
(昭裕暎嬪 李氏)
헌경왕후
(獻敬王后)
영풍부원군
홍봉한
(永豊府院君 洪鳳漢)
한산부부인
이씨
(韓山府夫人 李氏)
현목유비
박씨

(顯穆綏嬪 朴氏)
증 영의정
박준원
(贈 領議政 朴準源)
박사석
(朴師錫)
기계 유씨
(杞溪 兪氏)
원주 원씨
(原州 元氏)
원경유[33]
(元景游)
해평 윤씨
(海平 尹氏)

7.2. 형제자매

7.3. 배우자/자녀

8. 대중매체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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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성황제
제26대
고종 태황제
 
 
 
 
제27대
순종 효황제
[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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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현효대왕 도정궁 사손
 
 
진종 소황제 장조 의황제
 
 
 
 
정조 선황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순조 숙황제 상계군 전계대원군 남연군 풍계군 진안군
 
 
 
 
 
 
 
 
 
 
 
문조
익황제
철종
장황제
익평군 회평군 영평군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헌의대원왕† 완평군 완성군
 
 
 
 
 
 
 
 
 
 
 
 
 
 
헌종
성황제
고종
태황제
덕안군† 경은군 청안군 완림군† 완순군 완영군† 흥친왕 완은군† 인양군† 의양군 예양정 완창군
 
 
 
 
 
 
 
완효헌친왕† 순종
효황제
의친왕 영친왕 풍선군† 영선군 경원군
 
 
청풍군 창산군
<rowcolor=#b22222,#fff>※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정식 봉호를 받은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영친왕은 이은의 황태자 책봉과 더불어 폐기된 작호로, 황태자 자격으로 받은 '의민황태자'라는 시호가 있으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은 사시(私諡)이므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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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할머니 혜경궁 홍씨와 음력 생일(일자)이 똑같은데, 당시 실록을 보면 이런 경우가 조선 왕조에서 유일했던 것 같다. 즉 정조 입장에선 자신의 친어머니와 아들이자 세자의 생일이 같았던 것. 1791년 6월 18일에는 혜경궁의 생일과 순조의 첫 돌을 맞아 잔치도 크게 열고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2] 지금 기준으로야 요절이라 볼수 있어도 당시 평균수명은 50대 남짓 했고, 역대 조선왕 수명은 그보다 짧은 40세 전후였음을 감안하면 44세에 승하한 순조는 그래도 평균 정도는 살았다. 단, 원래도 후계 안정이 국가의 안정에 직결되던 왕정이라 왕의 자녀생산을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인 데다, 순조 본인이 11살의 어린 나이에 부왕인 정조를 잃은 탓에 이쪽으로 꽤 신경을 써서 이르게 죽었음에도 손자까지 보았다.[3] 시조 38세, 태조 17대손[4] 발음은 《열성어휘》(c.1898)에 따르면 ‘공’이지만,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00년에 아버지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면서 음이 홍(洪)이라고 밝혔다. 뜻은 아름다운 옥이다.[5] 헌종 사후 철종을 아내인 순원왕후가 양자로 들였다.[6] 1899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7] 금주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집행을 철저히 할 것을 명하며 한 말[8] 前後酒禁,每患始勤終惰,有名無實,所欲便民者,反歸於擾民。[9] 첫째였던 문효세자는 유년기에 병사했다.[10] 세조는 방계에 해당하지 않고 굳이 끼워맞춘다고 해도 그가 아닌 그의 손자인 성종이 방계 승통에 그나마 가깝다.[11] 세종의 사례는 대리청정의 첫 선례로, 조선 초기의 정치 혼란으로 인한 상왕제를 사실상 끝냈다는 점과 후대에 이어지는 전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순조는 하늘도 무심하게 효명세자가 단명해버린다.[12] 물론 심온과 그 가족들 입장에선 말 그대로 단지 세자의 장인이란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죽은 거라 현대 기준으로 보면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순 없다. 당장 외척으로 준동 안 하고 조용히 산 사람들도 많기 때문. 거기다 이미 태종 본인도 자신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가문인 청주 한씨 가문은 봐준 상황이었다. 소헌왕후와 달리 신의왕후는 이미 한참전에 사망했기에 외척으로서의 권위가 없다시피 했다지만 다르게 말하면 단지 구심점인 왕비가 살아있어 미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숙청이 된 것이니 더욱 그렇다. 이미 정치적으로 막장이 된 시점 케이스이지만 저 사람이 가짜라는 것만 알리고 조용히 강화도에서 하인으로 살기로 한 철종의 진짜 외숙부 건도 있고. 그리고 결국 역설적이게도 외척이 아닌 태종의 둘째 손자이자 종친인 세조에 의해 외척이 발현되기 시작한 걸 생각하면 심온의 숙청은 세도정치 같은 경우를 우려한 것이라곤 하나 너무나 먼 미래만 내다본 것에 가깝다는 비판이 유효하다는 것도 한몫한다.[13] 어찌보면 이쪽도 전제군주제의 피해자인 셈이기도 하다. 효의왕후에게 아들이 있거나 의빈 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가 요절하지 않았으면 순조는 왕위 계승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정순왕후 사망 이후에 유일한 왕실 최고 어른이 된 순조의 적모 효의왕후는 본인의 친정 가문인 청풍 김씨를 안동 김씨에 대항할 세력으로 끌어들여 키운다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만 지내며 순조가 절대 권력을 안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였는데 순조의 성격과 행적을 생각하면 결과론적으론 효의왕후가 본인의 가문을 끌어들이지 않고 조용히 사는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할 수 있는 행적은 의도치않게 독으로 작용했다.[14] 중종의 경우 조광조의 사례에서 보듯 우회적으로 정국을 주도한 면모도 있었다. 반면 김조순을 비롯한 순조를 모신 신하들의 경우, 무리한 욕심 없는 처신이라는 측면에서는 중종 때 신하들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15] 물론 중종의 경우에는 죽기 하루 전날 인종에게 승계하였으니 실질적으로는 상왕제라 보기 어렵다.[16] 문정왕후의 숙청극은 보통 명종 5년 구수담옥사를 기점으로 이미 명종친정 3년 전에는 완화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즉, 적어도 명종친정기 만큼은 사실상 규모있는 옥사는 없었던 셈이다.[17] 한편으로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했을 당시 관리들의 처벌과 상벌도 주로 시행했다는 점에서 당시 순조가 얼마나 국정을 손을 놨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효명세자가 인사권도 담당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순조가 처리를 해주지 않아 생긴 인사적체 문제가 상당했다는 뜻이다. 특히 전조 고려가 무신정변 이후 달리 원종, 공민왕 이후 왕들이 자기 정치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것과 비교해, 조선은 충분히 자기 의지만 있으면 왕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기에 순조의 직무 태만 자체에 대해서는 더더욱 어떤 변론 여지도 없고, 순조의 평가는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18] 여담으로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만력제에 대한 전통적 평가와 현대 수정주의적 평가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후계 참사를 만력제의 가장 심각한 실책으로 보느냐 아니냐다. 만력제의 만력태정을 30년 파업이라는 이름 하에 만력제의 가장 심각한 병폐로 보는 전통 시각과 다르게, 수정주의적 시각은 만력태정의 본질을 태업이 아닌, 황제가 말 잘 듣는 비선 조직, 즉 환관만을 대동해 정사를 처리하는 편법 정치를 행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시각에서 만력제의 진짜 문제는, 비정상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뒤 그 시스템이 이어지든 바로잡히든 다음 대 군주의 충분한 능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졸렬한 후계 정책으로 인해 태창제도 요절하고 천계제는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며, 그마저도 오래 살지 못해 숭정제라는 진짜 멍청이가 제위에 올라 결국 명나라가 망했다는 데에 있다.[19] 다만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지점이자 영조 입장에서 나름의 변명거리(?)를 짚고 넘어가자면 영조는 적어도 정조에게는 일관되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냈다는 점이다. 영조는 10살 남짓의 정조가 자신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변하자 크게 칭찬하며 300년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 당시는 사도세자가 살아 있던 시기였다. 그만큼이나 영조는 정조에 대해 과할 정도의 신뢰를 보였고, 정조가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당한 뒤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 이런 영조의 굳건한 사랑과 신뢰가 있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기는 하다.[20] 차이가 있다면 세종-문종의 대리청정은 왕이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 건강이 따르지 않는 와중에도 무리해서 일을 하다 보니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생김에 따라 세자에게 밀어준 것이라면, 순조-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왕이 왕으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일도 미뤄 놓다가 세자가 자질이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짬을 때린(...) 형국에 가깝다는 것이다.[21] 원래 묘호였던 순종(純宗)은 조선 및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이척이 승하하면서 받게 되었다.[22] 정확히는 턱 일부분과 인중 수염 팔자주름 입술이 아주 약간 남아있다.[23] 실제로 정조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는 높은 코와 펑퍼짐한 눈자위에 네모난 입과 겹진 턱을 가졌으며 체격 또한 풍만했다고 한다.[24] 이는 최근에 등장한 평가가 아니라 이동원 전 외교부 장관 등도 일찌감치 제기했던 주장이다. 이동원 장관의 경우 회고록에서 로드암허스트호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25]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 6월 20일[26] 정조 16년 6월 18일[27] 정조가 의빈 성씨와 일화가 유명하지만 의빈과의 이야기는 주로 정조가 의빈 사후 제문을 짓거나 하면서 이야깃거리가 많아진 것이지 유빈 박씨와 순조, 숙선옹주 또한 정조에게 많은 총애를 입었다. 정조는 숙선옹주가 마마에 걸리자 원자인 순조를 데리고 함께 피신하고, 숙선옹주의 마마가 낫자 직접 시를 짓기도 했으며 유빈 박씨에게도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처소를 내려주며 잘 지냈다. 흔히 드라마의 영향으로 정조가 의빈 사후 그녀만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의무로 대했다는 커뮤니티의 주장은 실제 사료에 기록된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28]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보기에는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 아래에 모든 존재는 그냥 백성이라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제 시각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순조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시사한다.[29] 아마도 얘기하고 싶던 것은 정조가 노비제에 부정적이었고 이를 공노비 혁파라는 방식으로 계승하는 척을 했다는 식인 것으로 보인다. 사노비를 혁파하자니 사대부들을 비롯한 노비를 가진 자들이 반대할 테니 꼼수로 공노비도 노비니까 공노비를 혁파하자는 식으로 어차피 공노비는 국가 소유이니 그 국가를 이끌고 있는 자신이 결정하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문제다.[30] 밤에는 궁궐 문을 모두 닫아 들어오고 나갈 수 없는데, 비공식적으로 궐 밖에 나가서 면을 사오라는 표현.[31] 드라마 상도에서는 상인 임상옥의 행적을 유심히 기억했다 홍경래의 난 이후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태천이라는 고을의 현감으로 임명한다. 상인 신분인 임상옥에게 종6품의 관직을 내리고, 임상옥이 기대에 부응하자 곽산의 군수(종4품)로 임명하더니 종국엔 구성의 부사(종3품)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상으로는 순조가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히 여긴 진보적인 인물로 비춰질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순조가 임명을 했다기 보다는 상인으로써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운 임상옥을 여러 관료들이 천거하여 임명한 정도로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32] 아내인 순원왕후는 더 처참해서, 순조 생전에 2남 2녀의 자녀를 먼저 떠나보냈고 순조 사후 마지막 남은 막내딸은 물론, 손자마저도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33] 숙경공주의 양손자이다.[34] 홍경래의 난이 종료된 1812년부터 등장했다. 당시 순조의 나이는 2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