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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4:55:25

청안군(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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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군 창산군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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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동궁 3대 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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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종의 현손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청안군 | 淸安君
파일:100b528105.png
봉호 <colbgcolor=#fff,#191919>청안군(淸安君)[1]
이름 이순달(李順達) → 이재순(李載純)[2]
덕일(德一)
시호 문충(文忠)
양부모 양아버지 영평군 이경응, 양어머니 정경부인 청도 김씨
생부모 친아버지 이휘응[3], 친어머니 안동 김씨
부인 정경부인 풍산 홍씨
자녀 1남[4]
출생 1851년 10월 24일
사망 1904년 3월 2일 (향년 52세)
1. 개요2. 초기 생애와 가계3. 양자 입적 이후4. 사망5. 여담
5.1. 오해
6. 매체에서7. 후손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관료.

사도세자의 3남[5] 은언군의 양증손자, 전계대원군의 양손자, 영평군 이경응양자,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양조카이다. 전계대원군의 종가(宗家)누동궁의 2대 봉사손이자 3대 종주이다.[6]

2. 초기 생애와 가계

1851년(철종 2년) 10월 24일,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인 음직 부사 이신휘(李愼徽)[A][8]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이순달(李順達)이었다.

조선 왕실 직계와는 200년 ~ 300년 전에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원래는 단순히 왕실의 후손이었을 뿐, 왕족은 아니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선조 이연 - 경창군 이주 - 창흥군 이수 - 고평부정 이철 - 연은군 이부 - 이기빈 - 이경 - 이유일 - 이명초 - 이도극 - 이휘응(이신휘)[A] - 청안군 이재순[10]
그러나 철종의 형인 영평군이 병이 있어 더 이상 자녀를 못낳았기 때문에[11] 1864년(고종 1년) 9월에 영평군의 양자로 입적했고 이름도 이재순으로 고쳤다.
"영평군(永平君)의 계후(繼后)에 대한 일로 유지(有旨)를 받들어 여러 파(派)를 상세히 조사한 다음 선조(宣祖)의 아홉째 왕자(王子)인 경창군(慶昌君)의 9대손 이신휘(李愼徽)[A]의 아들인 이순달(李順達)로 돈정(敦定)하였습니다. 예사(禮斜) 등의 절차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1864) 9월 21일 기미 3번째기사#

3. 양자 입적 이후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68년(고종 5년)에 왕족에게 실시하는 특별 과거인 종친정시문과(宗親庭試文科) 을과로 급제하여 같은 해 4월 11일 홍문관 부교리[13]를 거쳐 헌납(獻納)을 지냈다. 그리고 이후 부사과(副司果)[14]와 교리(校理)를 지낸 뒤 종친부정(宗親府正)을 역임했다.

그 뒤로도 고위직을 많이 맡았다. 집의(執義)를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 부호군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15]을 역임했다. 갑신정변 당시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받았다. 그 외에도 종정경(宗正卿), 이조참판(吏曹參判), 그리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16], 한성부 판윤[17], 예조[18]와 형조판서[19]을 맡았다.

1895년(고종 32년) 5월에는 시종원경 겸 시종장(侍從院卿兼侍從長)[20]으로 제수받았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한 역사적 사건과 엮인다. 이범진, 이완용 등과 함께 친일 정권을 타도하고자 고종경복궁 밖으로 옮기려다 실패한 사건, 춘생문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대부분의 가담자들과 함께 체포당했다. 태형 100대, 징역 3년의 형을 받았으나 종친이었던 까닭으로 3년의 징역을 면제받고 3년 간 향리방축[21]되는 벌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잃으면서 사면받았다. 이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을 거쳐,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등을 역임했다.

1899년(광무 3년) 5월에는 육군 부장(副將)[22]이 되고 표훈원 의정관(兼任表勳院議政官)[23]을 거쳐 군부대신 대리를 맡았다. 그 해에 법적 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이에 황제의 4대손은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예법에 따라 청안군(淸安君)으로 봉해졌다. 다만 원래도 1819년부터 대원군의 사손이 종친부 정1품인 "군"작을 세습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추존이 없었어도 양부인 영평군 이경응이 몇년 후인 1902년에 사망하면 이재순이 누동궁의 사손 자격으로 군에 봉해질 예정이었다.

4. 사망

1904년(광무 8년) 3월 2일 오전 1시에, 오랜 병고 끝에 향년 52세로[24] 별세했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25] 산 47-1번지 북한산의 지산 이말산에 처음 묻혔다가 1980년 경에 전계대원군회평군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26]이장되었다.

5. 여담

5.1. 오해

파일:46580b3b35893.jpg
<colbgcolor=#29176e> 완은군 이재선으로 잘못 알려진 청안군 이재순의 사진
한 때 청안군의 사진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인 완은군 이재선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졌다. 아마 당시 외국인들이 청안군의 이름 이재순의 'Sun'과 'Soon'을 혼동해서 표기했고 이 와중에 'Sun'을 '순'이 아닌 '선'으로 잘못 읽어 이런 오해가 빚어진 것 같다.
파일:46580b50029ea.jpg
파일:46580b66279d5.jpg
<colbgcolor=#29176e> 청안군 이재순의 다른 사진들, 왼쪽은 김윤식 사진과 같이 소개된 사진이고, 오른쪽은 손자들과 찍은 사진이다.[31]
하지만 다른 사진들을 보면 확실하게 'Soon'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맨 윗 사진 설명문에는 1890년에 촬영했다고 나와있는데 완은군 이재선은 1881년(고종 18년)에 안기영의 난으로 사사당했기에 사진을 찍을래야 찍을 수 없다.

그리고 밑에서 첫 번째 사진에 해당 인물에 대한 설명이 'Cousin of King' 으로 나와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재선은 저 사진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비록 친형제가 아니라 해도 엄연히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를 'Cousin' 으로 쓰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 그리고 'Cousin'은 4촌 외에도, 같은 항렬형제면 촌수와 상관없이 지칭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족보고종8촌인 청안군 이재순은 'cousin'에 해당한다.

6. 매체에서

7. 후손

입양 릴레이

양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친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8대손 이재철의 아들 이한용(李漢鎔)[32]을 입양했지만 1890년 16세로 사망했다. 요절했기에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풍선군의 양자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해승을 데려와 입적시켰다.[33] 그래서 영평군 - 청안군 - 풍선군 - 청풍군까지는 전부 입양 관계인 셈.

청풍군 이해승의 자녀들부터는 진짜 친자식들이다.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지만 아들 둘은 해방 전에 자신보다 먼저 죽었고 그 자신도 1950년 6.25 전쟁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바로 그랜드힐튼 서울의 이우영 명예 회장. 즉 청안군의 후손이 현재 그랜드힐튼 서울 오너 일가이다.

8. 둘러보기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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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1차 시도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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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호는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에서 유래했다.[2]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 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였다.[3]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4] 양자이다.[5] 서장남이다.[6] 위 틀에 나와있는 대수(代數)와 차이가 나는데 누동궁의 종주 자체는 전계대원군부터고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은 영평군 이경응부터다. 그래서 1대 씩 차이가 난다.[A] 1868년에 이휘응(李徽應)으로 개명했다.[8] 후일 판서로 추증받았다.[A] [10] 참고로 연은군부터 청안군까지는 쭉 장자로 이어져 내려왔다. 즉, 청안군은 연은군의 종손이 될 뻔 했었다. 그러나 후술하듯, 청안군이 영평군의 아들로 입적하면서 연은군 가계에서 떨어져 나왔고, 청안군말고 다른 적자가 없던(서자는 있었다.) 이휘응은 조카(동생 이선응의 아들) 이재기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11] 부인을 둘을 두었지만 첫 부인은 후손없이 요절. 두 번째 부인도 하나만 두었고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했다.[A] [13] 弘文館副校理, 조선 시대 홍문관에 두었던 종5품 관직.[14] 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6품 서반 무관직.[15]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총장 급. 단 성균관의 당시 위상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급이었다.[16]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급.[17]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급.[18]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급[19] 지금의 법무부장관[20] 임금을 호위하는 직책이다.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 급.[21] 鄕里放逐.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 유배보다는 가볍다.[22] 정2품 지금의 참모총장 급.[23] 표훈원은 포장 · 외국훈장의 수령, 패용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다.[24] 세는나이 54세.[25] 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26] 현재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27] 이 때는 동영상과 영화를 활동사진으로 불렀다.[28] 주식회사인데 왜 합자회사라는 명칭이 붙었냐면, 이때가 경영학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던 개화기이다보니, 실제 기업의 형태와는 무관하게 기업인들이 간지가 난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주식회사니, 유한회사니 하는 식으로 회사명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런 꼬락서니를 못마땅하게 여긴 안국선(금수회의록의 저자)이 이런 실태를 지적하고, 기업의 형태에 따른 명칭을 정리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29] 지금 관점에서는 썩 크지 않을지 몰라도 조선시대이다![30] 저 당시는 고종 재위기라 저기서 말하는 황제는 고종인데, 후술하겠지만 고종과 청안군은 족보8촌 형제 관계로, 삼촌이라 쓴 것은 오류이다.[31]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이재순은 친손자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손자들'과 찍었을까? 여기에 나오는 손자들은 양손자인 청풍군 이해승과 그의 친생가 형제이다.[32] 1907년 풍선군(豊善君)으로 추증. 청안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는 23촌이다.[33] 1908년 청풍군(淸豊君)으로 책봉. 근데 눈여겨 볼 건 이미 이 전에 이해승의 직계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입양이 되었단 점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월산대군의 후손. 그래서 청안군과는 실제 혈통 상으로 32촌, 풍선군과는 33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