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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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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직 중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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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6대 부의장 이진호 李軫鎬|Yi Chinho | |||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재임 시절 | |||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창씨명 | 리노이에 신코 李家軫鎬 | ||
출생 | 1867년 (고종 4) 8월 7일 |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46년 9월 3일 (향년 79세) | ||
재임 기간 | 초대 경상북도장관 | ||
1910년 10월 1일 ~ 1916년 3월 28일 | |||
제3대 전라북도장관 | |||
1916년 3월 28일 ~ 1919년 3월 2일 | |||
초대 전라북도지사 | |||
1919년 3월 30일 ~ 1921년 8월 5일 | |||
제6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
1941년 5월 12일 ~ 1943년 10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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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성재 (星齋) | ||
학력 | 연무공원 (졸업) | ||
직업 | 군인, 관료, 정치인 | ||
주요 경력 | 조선군 훈련대 간부 경상북도장관 전라북도장관 전라북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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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은의 망극은 물론이어니와 이것은 다만 자기 1인의 광영이 아니라 일반 조선인의 광영이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일찍부터 동양의 사정을 우려하여 일본에 의뢰해야 함을 꿰뚫어 보아 조선의 영원한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분기한 사람."
「조선공로자명감」(1935)
구한말의 개화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867년생. 본관은 전의이고, 호는 성재이다.「조선공로자명감」(1935)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관료로 군사교관 다이의 신임을 받아 친미파 관료로 활동했다. 친일 내각이 수립된 직후에는 훈련대장으로써 임최수, 이도철, 이범진 등의 정동파 관료들과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다 변절해 어윤중에게 밀고했고, 이후부터는 친일파로 전향했다.
아관파천 직후, 반역자로 낙인 찍혀 일본으로 망명했고, 몇년간 위장하며 일본에서 지내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귀국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상북도장관, 전라북도지사 등을 재임했고, 194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귀족회 의원을 역임했다.
2. 일생
1867년(고종 4) 8월 7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 이씨이고 아호는 성재.2.1. 관직 생활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통역관 양성소에서 영어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1888년 군사 학교인 연무공원을 졸업하고, 무관으로 근무했다. 영어에 능숙해 연무공원 미국인 교관 다이(Dye)의 신임을 얻었고, 친미파 관료로 평가받았다.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교도중대[1]를 이끌고 난 진압에 참전한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다시 친일파 정권이 성립하자 1895년 다이와 임최수, 이도철, 청안군 이재순 등이 친일 내각을 전복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고, 이진호도 이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변심해 이 계획을 탁지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며 춘생문 사건을 실패로 끝냈고, 이때부터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석달 후, 이범진과 이완용, 이윤용에 의해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 구연수 등의 친일파들과 일본 대사관을 거쳐 일본으로 피신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왕명으로 이진호를 비롯해 유길준, 조희연,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5일 유길준, 이진호 등에 대한 참수명령을 내려졌다.
망명 이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했던 우범선이 암살당했고 이후에도 일본으로 망명한 이진호와 유길준, 박영효 등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그래서 그는 변장하며 일본 도쿄 내에서도 조선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은신해 생활했다.
이후에도 고종은 망명한 친일파 인사들을 조선으로 송환해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1904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2]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일본은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지키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일본 공사관에 이진호 등을 비롯한 14인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또다시 거절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직후 귀국해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 등에 임명되었다.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했다.1910년대에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에 임명되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박중양 등이 이를 반대하며 만세 운동에 반대하던 지식인들과 관료, 지방의 지주들과 함께 자제단을 구성하자, 그도 전라북도에 전북자성회를 조직하고, 전남자성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거나 집에 돌아갈 것을 권고하며 만세 시위와 독립 운동 확산을 막았다.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 조선중앙위생회 위원 등을 거쳐 1924년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원래 총독부 부서의 국장은 일본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고, 학무부국장을 재임한 사례도 이진호와 엄창섭 이렇게 두 차례 밖에 없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는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지냈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을 재임했고, 1943년 10월에는 윤덕영 사후 공석이었던 조선 쿼터의 귀족원 의원까지 올랐다. 말년에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3. 사망
8.15 광복 이후인 1946년, 79세로 사망했다.그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8년에 이진호 소유의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3. 여담
4. 언사
"천은의 망극은 물론이어니와 이것은 다만 자기 1인의 광영이 아니라 일반 조선인의 광영이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취임할 때 이진호.
"신교육 제도가 점차 정비되고, 또한 학교가 보급되며 (...), 시대 밑 민도에 적합하게 조직적으로 교육의 진보와 보급을 이룬 것은 1910년 일한병합 후의 일이다"
"1906년에 우리 조선반도는 일한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장치로 되고, 여기에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등박문 공이 처음 통감의 직임에 취임하자마자 예의 조선 정치의 개혁을 꾀하여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력하였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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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대는 일본군의 특수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2] 차례로 이진호, 영선군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장석주), 이범래,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