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관료제(官僚制, bureaucracy)는 문서화된 규칙을 기초로 확립된 분업화와 계층화된 조직구조이다.관료제 하에서는 각 구성원이 계층화된 위계질서를 가지고, 업무를 세분화하여 그 업무를 한정된 관할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배정하고, 인간관계가 아닌 일정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게 된다. 그 결과 전통 및 관습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합리성과 합규칙성을 기반으로 비자의적 행동(impersonal conduct)이 최대한 억제된다. 관료제의 구성원(관료)은 신분이나 인맥이 아닌 실적에 따라 평가받으며 그 결과 조직 전체의 효율성은 증가한다. 실적은 효율성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관료제는 정부 조직과 동의어가 아니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관료제를 확립할 수 있다. 회사와 같은 영리단체도 본질적으로는 관료제적인 특성을 갖는다. 대부분의 현대 기업이나 법인 단체 등의 조직 구조는 관료제를 기반으로 자기 조직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더 나아가 자선단체나 종교단체 등의 비영리단체에서도 이런 성격이 나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 관료제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제대로 관리될 경우, 민간 기업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거나 비슷한 수준의 생산성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 역사
2.1. 어원
관료제를 뜻하는 영어인 bureaucracy의 어원은 bureau(사무실)와 -cracy(지배)로 사무실 책상 물림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막스 베버가 주장한 조직의 형태 중 가장 대표적인 것. 베버는 19세기의 대석학이자 사회과학 분야의 최종 보스. 실제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인문사회과학의 보스라는 소리를 듣는 학자다. 베버 본인은 이 체계를 "가장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조직의 형태"라고 했다. 한편, 베버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의 화신인 관료제로의 이행이 심화될수록 인간의 자유가 제한되어 인간이 기계의 톱니바퀴(cog in a machine)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관료제를 정부조직이나 기업에서 볼 수 있는 피라미드 조직으로 정의할 수 있다.2.2. 전통적 관료제
2.2.1. 중국
중국의 관료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체계적으로 발전한 행정 제도 중 하나로, 동양 정치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단순한 행정 운영 체계를 넘어, 국가 통치의 철학과 사회 질서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중국의 관료제는 유교적 이념을 중심으로 한 도덕 정치와 법적 질서가 결합된 형태로, 수천 년에 걸쳐 지속적 개혁과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기본 원칙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중국 관료제의 기원은 기원전 진(秦)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시황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면서 지방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행정 체계를 구축했으며, 귀족 중심의 세습적 정치 대신 능력 중심의 관리 선발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지방 행정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관료는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는 도구로서 국가 운영의 핵심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제도적 틀은 이후 중국 역사 전반에 걸쳐 기본적인 행정 모델로 계승되었다.
한(漢)나라 시기에 들어서 중국의 관료제는 법가적 통치 원리에 유교적 이념이 결합되며 더욱 안정된 형태를 갖추었다. 한무제는 유교를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하고, ‘덕과 예(禮)’를 중시하는 정치 원리를 행정에 반영하였다. 관료는 단순한 행정 기술자가 아니라 도덕적 품성과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로 요구되었으며, 천자(황제)의 명을 받들되 백성을 어버이처럼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이 시기부터 관리 임용에 일정한 시험적 절차가 도입되었고, 후대의 과거제(科擧制)로 발전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수(隋)와 당(唐)나라 시대는 중국 관료제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시기였다. 특히 수양제 때 확립된 과거제는 귀족 출신 여부와 상관없이 능력과 학식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과거제의 도입은 중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능력주의 사회로 전환시켰고, 정치적 안정과 행정의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나라의 행정 조직은 중앙의 3성(中書省, 門下省, 尚書省)과 6부(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부서가 분업적으로 국가 정책을 집행하였다. 이러한 체계는 후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송(宋)나라에 이르러 중국의 관료제는 더욱 세밀하고 합리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송대의 관료는 학문적 교양과 행정 능력을 모두 갖춘 문신(文臣)이 중심이었으며, 관료층은 귀족 세력 대신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과거제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관료가 사회적 엘리트로 부상했고, 관료제는 국가 운영뿐 아니라 사회문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관료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행정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형식주의와 부패 문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元)과 명(明)나라 시대의 관료제는 다소 다른 성격을 띠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한족 중심의 과거제를 부분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인종적 계급 구분을 행정에 반영하였다. 반면 명나라는 주원장이 황제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구조를 극대화하였다. 명대의 행정 조직은 내각(內閣)과 육부 체계를 유지하였으며, 황제가 모든 중요한 결정을 직접 통제하였다. 이는 관료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대신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청(淸)나라 역시 명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았지만, 만주족이 한족 관료와 협력하는 형태로 운영되었고, 과거제는 사회적 이동의 주요 통로로서 여전히 유지되었다.
2.2.2. 한국
고대 한국의 관료제는 삼국시대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추었으며, 각 왕국은 신분과 관등에 따라 관리들을 구분하여 국가를 운영하였다. 고구려에는 10여 단계의 관등이 있었고, 백제는 16관등제, 신라는 17관등제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중국의 관료제 영향을 받았지만, 혈연적 귀족 질서와 결합되어 있었다. 신라의 경우 진골 귀족이 고위 관직을 독점했으며,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관료제의 운영을 제한하였다. 즉, 능력보다는 출신 신분이 관직 승진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통일신라 시대에는 중국 당나라의 율령 체제를 본받아 관제(官制)와 행정조직을 정비하였다. 중앙에는 집사부, 병부, 창부 등 여러 부서가 설치되어 국정을 분담하였고, 지방에는 9주 5소경 체제를 구축해 중앙의 명령이 지방까지 전달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직은 여전히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행정의 전문성보다는 혈연과 권력 관계가 우선되었다.
고려시대(918~1392)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관료제는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었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중앙집권적 행정조직을 확립하였고,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하여 인재를 선발하였다. 과거제의 시행은 혈통 중심의 귀족 정치에서 능력 중심의 관료제적 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에는 중서문하성, 상서성, 어사대, 삼사 등으로 구성된 삼성육부 체제가 마련되었고, 각 기관은 행정, 감찰, 재정 등 국가의 주요 기능을 담당했다. 지방에는 주·군·현 체제가 마련되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행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문벌귀족의 세력과 음서제(蔭敍制, 고위 관료의 자제를 특혜로 등용하는 제도)가 유지되면서, 과거제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조선시대(1392~1897)는 한국 관료제가 가장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관료제 운영의 근본 원리를 유교적 도덕과 질서에서 찾았다. 조선의 관료제는 중앙의 의정부와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체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서는 행정의 세부 기능을 분담하였다. 관리의 임용은 과거제를 통해 이루어졌고, 성리학적 교양과 도덕적 품행이 중요한 선발 기준이었다. 또한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고과제도(考課制度)와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사간원 등 감찰 기관도 발달하였다.
조선의 관료제는 능력주의적 요소를 갖추었으나, 동시에 신분제의 한계 속에 존재했다. 양반 계층만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관료제는 사실상 양반층의 지배체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유교적 윤리와 학문을 중시한 조선의 관료제는 행정의 도덕성과 문서 행정의 체계화를 이끌었으며, 정치적 안정과 사회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3. 일본
일본 관료제의 기원은 7세기 중엽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중국 당나라의 율령 체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율령제(律令制)다. 이 제도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 국가 체제였으며, 정치·행정·사법이 모두 천황의 권한 아래 통합되었다. 중앙정부는 이부(吏部), 병부(兵部), 민부(民部) 등 여섯 부(六省)로 구성되었고, 지방에는 국사(國司)와 군사(郡司)가 파견되어 중앙의 명령을 집행하였다. 관리들은 관등제(官等制)에 따라 엄격하게 서열화되었고, 귀족 출신들이 주로 관직을 독점했다. 즉, 이 시기의 관료제는 중국식 합리 행정의 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귀족적 신분제에 기반한 귀족 관료 체제였다.평안시대(794~1185)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관료제는 점차 형식화되고 귀족화되었다. 율령제의 제도적 틀은 유지되었으나,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무사 세력이 성장하였다.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씨(藤原氏)는 섭관정치(攝關政治)를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으며, 관료제는 점차 혈연적·가문 중심의 구조로 변질되었다. 행정의 전문성보다는 정치적 인맥이 중시되었고, 관직은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관료제는 제도적 안정성은 있었지만, 행정 효율성 면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가마쿠라 막부(1185~1333)가 성립하면서 일본의 정치 중심은 귀족에서 무사 계급으로 이동하였다. 무사 정권은 군사적 통치를 기반으로 하였지만, 기존의 귀족 관료제와 병존하였다. 막부는 전국의 무사를 통제하기 위해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를 임명하였고, 이들은 일종의 지방 행정관으로서 세금 징수와 치안을 담당했다. 이 체계는 중앙과 지방의 이중 권력 구조를 낳았으며, 전통적인 관료제는 여전히 교토의 조정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즉, 무사 정권기 일본의 관료제는 귀족적 제도와 군사적 행정이 공존하는 혼합 구조를 보였다.
에도시대(1603~1868)는 일본 관료제가 독자적 형태로 완성된 시기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전국의 다이묘(大名)를 통제하기 위해 복잡하고 정교한 행정 시스템을 마련했다. 막부의 최고 행정기관은 로주(老中)와 와카도시요리(若年寄)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했다. 또한 전국에는 막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번(藩)이 존재했으며, 각 번의 번사(藩士)는 중앙과 유사한 관료 구조를 갖추었다. 이 시기의 관료들은 무사 계급이었지만 행정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을 중시했고, 서류 행정과 기록 관리가 철저했다. 에도시대의 관료제는 서구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행정과는 다르지만, 질서와 규율을 강조한 점에서 고도로 체계적인 전근대 관료제였다.
2.2.4. 인도
고대 인도의 관료제는 기원전 4세기경 마우리아 왕조(BC 321~185)의 아쇼카 대왕 시대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으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갖춘 국가였다. 당시 재상(마하마트라, Mahamatra)를 비롯한 관료들이 왕을 보좌하며 정치·군사·재정·사법을 담당하였다. 인도의 고대 정치서인 《아르타샤스트라(Arthashastra)》에는 이 시기의 행정 제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인 행정 지침서 중 하나로 평가된다. 《아르타샤스트라》는 국왕의 통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관료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였으며, 재정 관리, 세금 징수, 농업, 상업, 외교, 군사 등 모든 국가 기능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관료들은 엄격한 감찰 제도 아래 관리되었고, 부패에 대한 처벌도 매우 강했다. 이 시기의 관료제는 왕권 중심이면서도 합리적이고 규칙적인 행정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마우리아 왕조 이후, 굽타 왕조(4~6세기) 시대에도 행정 조직이 유지되었지만, 점차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지방 영주나 봉건 세력이 행정권을 나누어 가지면서, 관료제는 분권화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굽타 왕조는 여전히 재정과 군사, 법률 분야에서 관료제를 유지하였고, 특히 세금 징수와 토지 관리 분야에서는 효율적인 제도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부터 인도의 관료제는 지역적 다양성과 자율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인도 행정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진출한 13세기 이후, 델리 술탄국과 무굴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인도의 관료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델리 술탄국은 중앙집권적 군사 행정을 도입하였고, 관료들은 군사적 충성과 행정 능력을 겸비해야 했다. 무굴 제국(1526~1857)에 이르러 인도의 관료제는 그 정점을 맞이했다.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이슬람식 행정제도를 도입하였으며,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정교한 관료 체계를 운영하였다. 아크바르 대제는 ‘만삽다리 제도(Mansabdari System)’라는 독특한 관료·군사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에서 관리들은 계급(만삽)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으며, 군사와 행정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모든 관료는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도록 조직되었고, 토지세 수입을 통해 급여를 받았다. 이를 통해 무굴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고, 인도 관료제의 체계성과 효율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2.2.5. 이슬람 세계
이슬람 제국의 관료제는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결합된 체계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행정 구조로, 유럽의 세속적 관료제와는 다른 원리 위에서 발전하였다. 이슬람 제국의 행정은 신의 법인 샤리아(Sharia)를 기반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종교 규범을 넘어 국가의 통치 원리이자 사회질서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이슬람의 관료제는 종교적 정당성과 행정적 효율성이 결합된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초기 이슬람 공동체인 무함마드 시대의 메디나에서는 아직 정식 관료제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공동체 구성원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세금을 관리하며 군사활동을 조정하는 행정적 기능이 점차 나타났다. 무함마드의 사후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에는 행정조직이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칼리프는 정치적 지도자이자 종교적 최고 권위자로서, 신의 대리인이라는 정당성을 바탕으로 통치를 수행하였다. 그 아래에는 각 지역을 담당하는 총독(와리, wali)이 임명되었고, 재정, 군사, 사법 등 여러 분야의 업무가 분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행정이 비교적 단순했으나, 제국의 영토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더 정교한 관료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661~750)에 들어서면서 관료제는 제도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중앙정부가 강화되었고,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행정 모델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부족 중심 정치체계를 탈피하여 서기관 제도(디완, Diwan)를 확립하였다. 디완은 재정, 군사, 우편, 세무 등 국가 운영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로, 관료들은 문해력과 행정 능력을 갖춘 엘리트 계층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비이슬람 출신으로, 페르시아인이나 시리아의 기독교인처럼 기존 제국의 행정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이는 이슬람 제국이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행정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아바스 왕조(750~1258)는 이슬람 관료제가 가장 정교하게 발전한 시기로 평가된다. 수도 바그다드는 세계적인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행정 체계는 세분화되어 각 부문이 전문적으로 운영되었다. 칼리프 아래에는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이 존재했으며, 디완 체계는 재정(Diwan al-Kharaj), 군사(Diwan al-Jund), 통신(Diwan al-Barid), 사법(Diwan al-Qada) 등으로 분화되었다. 관료 선발에서는 혈통보다 실무 능력과 학문적 자격이 중시되었고, 특히 아랍어 문서 작성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법학자(울라마)와 행정관의 역할이 구분되었지만, 둘 다 이슬람 법의 권위 아래에서 협력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체계 덕분에 아바스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으며, 행정의 합리화가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
이슬람 관료제의 또 다른 특징은 행정과 종교의 통합성이다. 서구의 세속적 관료제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지만, 이슬람 제국에서는 두 영역이 상호보완적이었다. 칼리프는 신의 율법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관료들은 이를 행정적으로 구현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행정의 모든 과정은 종교적 도덕과 규범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관료의 부패나 비리는 단순한 행정적 문제가 아니라 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관료제의 도덕적 기초를 강화하는 한편, 권력 집중의 문제를 일정 부분 억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슬람 제국이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면서 관료제도 지역적으로 다양화되었다. 파티마 왕조,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 등 각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상황에 맞게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관료제는 이슬람 행정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복잡한 관리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관료는 대부분 국립학교인 엔데룬(Enderun)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국가 정책을 집행하는 핵심 인력이었다.
이슬람 제국의 관료제는 종교적 이념을 행정적 현실에 접목시킨 독창적 체계였다. 유럽의 관료제가 법률과 합리성에 기초했다면, 이슬람 관료제는 신의 계시와 종교적 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지녔다. 도덕성과 통합성 면에서는 강점을 보였지만, 세속 행정의 자율성이 부족하여 근대 이후의 행정 개혁에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관료제는 세계 역사에서 종교적 가치와 정치적 통치가 결합된 대표적인 행정 모델로서, 후대의 제국들과 현대 이슬람 국가들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2.6. 러시아
러시아의 관료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 속에서 발전해온 제도로, 서유럽의 합리적·법적 행정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을 지녀왔다.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소련 시기를 거쳐 현대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관료제는 언제나 권력 유지와 국가 통제를 위한 핵심 도구로 기능해왔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정 전통은 “국가가 사회 위에 군림한다”는 역사적 특징을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러시아 관료제의 기원은 15세기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에 형성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이반 3세(‘대공’ 이반 대제)는 주변 공국들을 병합하며 국가의 규모를 확대하였고, 귀족(보야르, boyar)을 견제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했다. 행정 조직은 점차 단순한 봉건적 지배를 넘어 문서와 규칙에 기반한 중앙 행정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관료는 여전히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행정은 개인적 충성과 혈연 관계에 크게 의존했다.
러시아 관료제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16세기 이반 4세(이반 뇌제)의 통치기였다. 그는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오프리치니나(oprichnina)’ 체제를 통해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는 관리 집단을 양성하였다. 이 제도는 귀족 중심의 봉건 행정을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반 4세의 관료제는 합리적 행정보다는 공포와 감시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체제였으며, 관료는 독립적 행정가라기보다 황제의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도구였다.
17세기 말1725)가 러시아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관료제는 서구식 행정 제도로 개편되었다. 표트르는 서유럽의 행정 모델을 도입하여 국가 조직을 정비하고, 귀족의 세습적 특권을 제한하며, 능력에 따른 관직 승진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1722년 “관등표(Table of Ranks)”를 제정하여 모든 관리와 군인을 14등급으로 나누고, 성과에 따라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는 귀족이 아니라도 국가에 봉사하면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능력주의 관료제’로 평가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위계적 구조였으며, 행정의 자율성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세(1762~1796)의 시대에는 행정조직이 더욱 세분화되고, 지방 행정이 정비되었다.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각 지방에 총독이 파견되었고, 중앙에는 각 분야별 부처(콜레기움, collegium)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관료제 역시 법적 합리성보다는 황제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관직 매매와 부패가 만연했다. 러시아의 관료들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기보다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하급 통치자였고, ‘국가를 위해 일하지만 사회와는 분리된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19세기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가 시행한 개혁은 러시아 관료제의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농노제 폐지(1861)와 지방자치제도(젬스트보, zemstvo)의 도입은 행정 권한의 일부를 지방으로 이양하였고, 일정한 자치 행정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관료들은 여전히 광범위한 권한을 유지했으며, 지방자치 역시 관료의 통제 아래 운영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 관료제는 근대적 행정 절차를 갖추었지만, 지나치게 경직되고 위계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관료는 ‘국민의 봉사자’가 아니라 ‘국가의 관리’로 여겨졌고, 국가와 국민 사이에는 깊은 거리감이 존재했다.
2.2.7. 유럽
초기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년경~기원전 27년)은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였다. 행정은 정무관(마기스트라투스, magistratus)이라 불리는 선출직 관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임기 동안 국가의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집정관(consul), 법무관(praetor), 재무관(quaestor), 검열관(censor)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관리들은 직업적 관료가 아니라 귀족 계급인 파트리키(patricii) 출신으로, 명예직의 성격이 강했다. 행정 경험이나 전문성보다는 정치적 영향력과 가문이 임명 기준이었으며, 따라서 행정은 개인적 관계와 신분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을 넘어 지중해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러한 귀족 중심의 정치 체계는 점점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방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행정 기구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각 지방에는 총독(proconsul, propraetor)이 파견되어 군사, 재정, 사법을 겸임하며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본국의 지시를 받았지만, 광대한 지역에서 사실상 자율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지방 행정 체계는 중앙집권적 통치보다는 관리의 개인적 재량에 의존한 형태였으나, 점차 로마의 법과 제도에 의해 통제되며 체계화되었다.
로마의 행정체계가 진정한 의미의 관료제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은 제정(帝政) 이후,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년~서기 14년)의 통치기부터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황제가 독점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행정 조직을 재편하였고, 황제를 직접 보좌하는 전문 관리 집단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Praefectus Praetorio, 근위대장),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에(Praefectus Annonae, 식량 관리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수도 행정관) 등이 있다. 이들은 군사, 치안, 재정, 식량 공급 등 제국 운영의 핵심 업무를 담당하였다.
로마의 행정조직은 합리성, 전문성을 갖춘 체계로 발전하였다. 황제는 능력 있는 자유민이나 해방 노예(리베르티니, libertini)를 행정 실무에 등용하였으며, 이들은 황실의 관료로서 직업적 성격을 띠었다. 해방 노예 출신 관리들은 귀족 출신 관리보다 행정에 전문적이었고, 황제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로마는 서류 행정과 회계 기록이 매우 발달했는데, 이는 제국의 재정 관리와 조세 징수, 인구 조사 등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문서 중심 행정은 이후 유럽의 관료제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로마 후기에 이르러,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3세기 말~4세기 초)와 콘스탄티누스(4세기)의 개혁 이후 제국의 관료제는 방대하고 복잡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제국은 여러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에는 황제가 임명한 관리들이 배치되었다. 중앙정부에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고위 관료 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명확한 직제와 서열을 갖추었다. 행정은 군사, 재정, 사법이 분리되어 운영되었고, 관료들은 서열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다. 이 시기의 로마 관료제는 권력 집중과 행정 전문화를 모두 달성했으나, 동시에 지나친 관료 비대화로 인해 비효율성과 부패 문제도 심화되었다.
중세 초기 유럽은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봉건적 분권 체제가 지배하였다. 권력은 각 지역 영주에게 분산되었으며, 행정은 귀족과 성직자에 의해 수행되었다. 당시에는 중앙정부의 전문 행정조직이 존재하지 않았고, 왕권조차 귀족의 협력 없이는 국가를 통치하기 어려웠다. 교회가 사회의 유일한 지식층으로서 행정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성직자가 문서 관리나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관료제의 초기 형태는 종교 권력과 결합된 비공식적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 이후 봉건제의 해체와 함께 중앙집권화의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특히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등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통일된 법과 세제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왕에게 충성하는 전문 관리 집단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귀족적 혈통보다는 행정 능력과 문해력에 의해 선발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왕실 재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늘어났고,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서기관과 재무관이 행정체계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귀족적 봉사에서 능력 기반의 직업 관료로 이행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14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점차 상비군과 상비 행정기구가 등장하면서 관료제의 형태가 뚜렷해졌다. 특히 절대왕정이 확립된 16세기에서 17세기에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었고, 국왕의 권력을 집행하는 관료들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기에는 왕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국무회의와 재정기관 등에서 전문 관리들이 정책을 집행하였다. 관료들은 왕의 신하이자 국가의 하급 행정가로서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신분보다는 능력이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다만 여전히 관직은 매매나 특권을 통해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고, 행정의 합리성보다는 개인적 충성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되었다.
전근대 유럽의 관료제는 합리적 제도라기보다는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기능했다. 국왕은 관료를 통해 지방을 통제하고 세금을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였다. 행정의 중심은 여전히 왕의 의지였고, 관료들은 법적 규범보다는 왕명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 속에서도 관료제의 기본 요소—즉, 행정의 전문화, 분업화, 문서화—가 점차 발전하였다. 문서 행정이 확립되면서 기록 관리와 문서 보존이 체계화되었고, 행정 절차가 규칙에 따라 수행되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적 합리 행정의 전조로 평가된다.
2.2.8. 영국
중세 초기 영국의 관료제는 왕의 사유 행정에 가까운 체계였다. 노르만 왕조(1066~1154) 이후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행정 조직이 정비되었다. 윌리엄 1세는 영국 전역의 토지를 조사하여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을 작성하게 했는데, 이는 행정 문서화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 시기 관료는 대부분 성직자 출신으로, 왕의 개인 집사이자 서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행정은 왕실 재정 관리(Exchequer)와 문서 관리(Chancery)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체계는 훗날 영국 내각제의 기초가 되었다.13세기 이후 마그나 카르타(1215)의 체결과 함께 왕권이 제약을 받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행정은 점차 의회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14세기 이후 의회가 재정 통제권을 확보하면서, 행정 권력은 더 이상 왕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당시의 관료들은 여전히 귀족 출신이거나 왕의 측근이었지만, 점차 법률 지식과 행정 기술을 갖춘 관리들이 등장하였다. 행정의 문서화, 회계 관리, 기록 보존 등 합리적 행정 절차가 확립되면서 영국 관료제는 ‘법에 의한 통치(rule of law)’를 실현하는 도구로 발전하였다.
근대 초기, 즉 튜더 왕조(1485~1603) 시기는 영국 관료제의 구조적 발전기에 해당한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는 봉건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능력 있는 신흥 중산층 인재를 행정에 기용하였다. 특히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왕권이 강화되고 교회의 재산이 국유화되면서, 행정 업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국왕을 보좌하는 각종 위원회와 사무국이 생겨났고, 내무·외무·재무 등 분야별 행정기구가 분화되었다. 그러나 관료직은 여전히 국왕의 명령에 종속된 정치적 직책이었으며, 직업적 전문성보다는 개인적 충성과 신분이 중요시되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1688)을 거치면서 영국은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료제는 왕의 개인 조직에서 국가의 공적 행정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행정은 국왕이 아닌 내각과 의회에 책임을 지는 체계로 발전하였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법적 책임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명예혁명 이후 제정된 권리장전(Bill of Rights, 1689)은 “국가의 재정과 행정은 의회의 동의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행정의 합법성과 책임성을 제도화하였다.
2.3. 농경 사회식 관료제의 붕괴와 산업사회를 위한 새로운 관료제의 등장
2.3.1. 막스 베버의 근대 관료제 모델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료제 모델은 근대 사회의 행정조직이 어떻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적 틀이다. 베버는 관료제를 단순한 행정 구조로 보지 않고, **근대 합리주의(rationalism)**의 결정체이자 법적 합리성에 기반한 지배 형태로 이해했다. 그는 관료제가 인간의 감정이나 전통, 개인적 권위가 아니라 법과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조직임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사회가 효율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베버는 사회의 지배 형태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전통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 그리고 합리적-법적 지배이다.
전통적 지배는 관습과 혈통, 종교적 권위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배 형태로, 봉건 영주나 군주의 통치가 그 예이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지도자의 개인적 매력과 능력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는 형태로, 혁명가나 종교적 지도자의 권위가 이에 해당한다.
합리적-법적 지배는 법과 제도, 규칙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배로, 개인이 아니라 직무와 법적 권한이 중심이 된다.
베버는 근대 사회의 핵심이 바로 이 합리적-법적 지배라고 보았으며, 이를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조직 형태가 바로 **관료제(bureaucracy)**라고 주장했다.
2.3.2. 전통적 관료제의 붕괴
전 세계의 전통적 관료제들이 동시에 붕괴하고 근대적 관료제로 대체된 것은 단순한 정치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 근대화의 충격, 곧 산업화와 세계경제의 형성, 그리고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 확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각 문명권에서 관료제는 오랜 세월 동안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기구였다. 중국의 문관제, 이슬람 제국의 디완 체계, 인도의 만삽다르 제도, 유럽의 절대왕정 관료제 모두 일정한 합리성과 안정성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전통 관료제는 공통적으로 폐쇄적이고 정태적인 구조, 농업경제에 기반한 행정, 지배자의 명령에 의존하는 권위적 통치라는 특징을 공유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장기적 평화와 자급적 생산 체제 속에서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18세기 이후 세계가 산업과 교역, 기술, 인구 이동을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하자 그 틀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 기반의 변화였다. 농경사회에서 관료제의 임무는 주로 토지세 징수, 인구 조사, 치안 유지, 제의(祭儀) 관리 등이었다. 생산수단이 일정하고 이동성이 낮은 사회에서는 복잡한 행정 체계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전통적 관료들은 행정 기술보다 정치적 충성이나 도덕적 권위를 통해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경제의 중심은 토지에서 자본, 노동, 기계로 옮겨갔고, 생산과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국가의 행정 수요는 질적으로 달라졌다. 세금 구조는 단순한 토지세에서 산업세·무역세로 바뀌었고, 교통·통신·보건·교육 등 새로운 영역에서 전문적 행정 관리가 필요해졌다. 기존의 도덕적 관료나 문인 엘리트로는 이런 새로운 행정 수요를 처리할 수 없었고, 이는 모든 문명권에서 전통적 관료제가 기능적으로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원인은 지식과 기술의 변화였다. 근대 과학혁명과 계몽사상은 세계 인식을 신과 전통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전환시켰다. 과거의 관료는 하늘의 뜻, 종교적 율법, 유교적 도덕 등 초월적 권위에 의존했지만, 근대 행정은 객관적 데이터, 통계, 법률, 기술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작동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관료의 ‘태도’가 바뀐 것이 아니라, 행정 자체의 정당성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중국의 과거제는 오랜 세월 동안 문학적 교양과 도덕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았고, 이슬람 세계의 행정은 율법학자의 해석에 의존했으며, 인도의 무굴 관료제는 신분적 계급 질서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근대적 법학, 경제학, 통계학이 행정의 핵심 지식으로 부상하면서, 이러한 도덕·전통 중심의 엘리트 구조는 실질적 통치 능력을 잃게 되었다.
세 번째 요인은 서구 제국주의의 확산과 세계체제의 형성이었다. 산업화의 선도국이 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은 근대적 관료제를 통해 강력한 국가 능력을 확보했고,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식민 행정은 기존의 전통 관료제를 해체하고 서구식 행정 절차, 공문서 체계, 근대 법률 제도를 강제로 이식했다. 인도의 경우 영국 식민 행정이 기존 무굴 제도의 잔재를 대체하면서 ‘인도제국행정서비스(ICS)’라는 근대적 관료제가 만들어졌고, 이슬람 세계 역시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을 통해 서구식 내각제·행정조직을 도입했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서 ‘양무운동’과 ‘신정(新政)’을 실시하며 근대식 관료와 군사학교를 세웠고,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의 행정제도를 국가 운영의 중심으로 받아들였다. 즉, 전통 관료제가 무너진 것은 단지 내부적 부패나 비효율 때문만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 행정이 세계적 표준으로 강제된 구조적 변화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가치와 통치 정당성의 변화도 결정적이었다. 전통 관료제는 ‘신의 뜻’, ‘천명(天命)’, ‘왕권’과 같은 초월적 권위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근대 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은 국민의 동의와 법적 절차에 의해 부여되기 시작했다. 국민국가의 탄생은 관료에게 도덕적 충성보다 법적 책임과 행정적 전문성을 요구했다. 이제 관리의 권력은 신분이나 왕의 은총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 부여된 공적 권한이 되었다. 이 변화는 전통 관료제의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결국 전 세계의 전통적 관료제들은 산업화·근대화·식민화라는 세 가지 거대한 세계사적 충격 앞에서 일제히 붕괴했다. 각 문명권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대응했지만, 공통된 방향은 하나였다 — 행정을 개인적·도덕적 지배가 아닌 법적·합리적 제도로 바꾸는 것.
2.4. 현대식 관료제로의 발전
2.4.1. 베버의 관료제의 한계
막스 베버의 관료제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 근대 행정의 이상형이지만, 동시에 인간적 가치와 민주적 원리를 약화시키는 한계를 지닌다. 규칙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 체계는 행정의 공정성을 높였지만 구성원을 기계적 존재로 만들며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했다. 또한 법과 규칙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리고, 행정을 경직된 형식주의로 만들었다. 전문성과 위계 구조가 강화되면서 관료 집단은 독자적인 권력층으로 성장해 민주적 통제를 약화시켰고, 행정은 공공의 이익보다 조직의 안정과 생존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결국 베버적 관료제는 합리성을 통해 질서를 구축했으나, 그 합리성이 오히려 비인간화와 비효율, 권력의 독점이라는 새로운 비합리성을 낳는 역설을 내포하게 되었다.2.4.2. 20세기 탈산업사회 모델의 영향
20세기 후반 들어 탈산업사회(또는 후기산업사회)라는 사회변화 모델이 대두됨에 따라 산업사회의 핵심적 구성원리인 관료제는 많은 학문적 관심을 받았다. 전술한 막스 베버 이후 베버의 그늘을 벗어나 팀제 조직이나 매트릭스형 조직등 탈관료제 모형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지만 대규모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서는 아직 막스 베버의 관료제를 대체할 만한 조직모델이 없는 형편. 베버가 괜히 사회과학의 본좌 소리를 듣는게 아니다.덕택에 시스템 엔지니어링도 이 관료제의 체제에서 따온 개념들이 많다. Top-Down 접근방식이나 이를 토대로 한 WBS(Work Break-down Structure) 등이 있다.
2.4.3. 20세기 일본식 관료제의 영향
서구는 20세기 중후반 일본의 성장을 보며 그 원인을 찾고자 했는데, 그들이 보기에 일본의 관료제가 여타 모델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조직은 고용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높은 충성심'과 '관리자-피관리자간의 긴밀한 관계' 등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 학자들은 이런 일본 모델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윌리엄 오우치의 <Z이론>)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가 정체에 빠지며 서구에선 일본 관료제의 부정부패, 능력보단 인맥,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점이 노동자의 향상심을 해칠 수도 있다는 점 등의 단점이 더 부각되었다. 그 외 일본식 모델의 장단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앤서니 기든스 저 <현대 사회학>을 참고할 것.2.4.4. 이후 다양한 모델의 제시
일본 모델은 관료제에서 유의해야할 점을 상기시켜주었고, 이를 정반합시켜 새로운 이론들이 경영 관행 등에서 나타나게 되었다.1970년대 경제위기와 복지비용 증가 속에서 정부의 비효율이 문제로 지적되자,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가 등장했다. 이 흐름은 시장의 경쟁 원리와 성과 중심의 경영기법을 행정에 도입해, 공공부문을 민간기업처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성과주의와 비용 절감에 치우친 나머지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이 약화되자, 1990년대 이후에는 이를 보완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개념이 부상했다. 거버넌스는 정부 단독의 통치가 아니라 시민, 기업, 지방정부 등 다양한 주체가 협력하는 수평적 행정을 지향하며, 관료제의 위계적 구조를 네트워크형으로 전환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 행정(e-government)**과 스마트 거버넌스가 확산되면서, 정부는 국민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행정의 투명성과 참여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 관료제는 법과 규칙에 따른 통제 중심의 체계에서, 협력·성과·참여를 중시하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체계로 이행하고 있으며, 효율성과 인간성, 합리성과 민주성을 조화시키려는 지속적인 시도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또 관료제를 보완 또는 대체할 새로운 조직 이론으론 팀제, 탈관료제(Adhocracy), 민간위탁 등이 제시되었고, 알다시피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곳도 제법 많다. 또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간 교류를 통해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주는 융합분야도 관심사이다. 이 외에도 네트워크 기반 조직 구조, 유기적 구조, 네오 베버리안 모델 등 다양한 대안 모델들이 제시되었다. #
3. 특징
3.1. 장점
- 관리직들이 합리적이고 성과 지향적이라는 전제하에, 조직내 모든 권한과 책임이 위계적으로 돌아가므로 많은 양의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 가능하다. 기업에서 사장이나 임원들이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더라도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한다.
- 합리적이지 않을 경우 (권위주의에 빠져있다든지, 미신에 빠져있다든지, 업무에 관심이 없고 게으르다든지, 무식해서 결정을 할 능력 자체가 없다든지) 기성 조직에서 보이는 멍청한 결정들을 일으켜 한계에 봉착한다. 명 4대 암군을 겪은 명나라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명 4대 암군이 재위한 약 100년의 세월을 버텨낸 것도 관료제의 힘이긴 하지만.
- 성과 지향이 아니라 다른 이익을 추구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가령, 최고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중시할 경우 독재화된다. 대부분의 독재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대명제에 의해 한계에 봉착한다. 중간관리직이 사리사욕을 중시할 경우 부패한다. 높은 사람들이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하면 성과는 사라진다.
- 군대의 경우, 군대의 관료인 참모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 100만명 단위의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전문화된 업무 체계로 효율성이 극대화 됨. 관료제는 오너 - 임원 - 중간관리직 - 실무자의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된다. 그렇기에 분야에 따라 전문 인원을 배치할 수 있다. 이는 포디즘에 의거한 분업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관료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조직은 구성원들이 각자 모든 일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과 포디즘의 등장 이전의 자급자족식 생산을 생각하면 된다. 반면 관료제는 특정 구성원이 특정한 업무만을 해 내면 된다. 산업혁명과 포디즘 이후 분업화된 컨베이어 벨트같은 예.
- 구성원들이 자기 분야에 전념하여 전문화되고 숙련된 기술을 획득할 수 있음. 역시나 분업의 장점 중 하나다. 일례로 기업 구성도를 보면생산 기업일 경우 생산직(공장, 실무진)과 연구직(연구소, 개발진) 그리고 사무직(본사, 경영진)이 보통 나뉘게 되는데, 생산직은 생산 숙련도만 키우면 되고 연구직은 연구만 잘 하면 된다. 사무직은 경영이나 영업만 잘 하면 된다. 이 체제가 관료제가 아니라면 각 구성원이 생산직에 종사했다가 뜬금없이 영업을 뛰어야 하기도 하고 경영진이 연구를 해야 하는 등 다른 업무에도 신경을 써야 하게 된다. 경영, 생산, 연구 등 다방면의 능력을 일정 수준 이상 고루 갖추는 것보다 그 중 하나 자신에게 특화된 업무의 능력을 첨단화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직급이 높아질수록 자신에게 상관없는 분야에 대해 학습할 필요는 생기기 마련. 적어도 생산직 수장 공장장은 연구직이나 사무직의 업무를 세부사항까지는 이해하지 못해도 일정 수준은 이해할 수 있어야 조직에서 원하는 생산을 할 수 있다. 반면 연구소 소장 역시 생산직의 상황이나 사무직의 요구사항을 이해할 수 있어야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연구할 수 있다. 사무직 특히 사장과 같은 고위 경영진은 생산직과 연구직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조직을 경영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나, 적어도 상위직급 정도 되면 자신의 분야가 아니더라도 일정부분 이해할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다 - '해고~강등, 강임'이 안 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하급자에게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하는 등 중간관리직으로서는 실격인 사람이 실무자에서 중간관리직으로 한 번 승진되었다면, 중간관리직으로 업무를 수행하면서 전혀 업무에 맞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동법상 해고도 안 되고 중간관리직 자리를 줘야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사장, 국장 등 관리직 자리를 맡게 된다.
- 아무리 전문화된 업무 체계를 유지하려 해도, 고위직에서는 '전문가 부하'와 '두루두루 다 다루는 비전문가 상사'가 업무를 함께 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장관 밑에 '행정직 출신 실장, 기계직 출신 실장, 전산직 출신 실장'이 골고루 있다고 가정할 경우, 장관은 3가지 업무를 모두 알 수는 없다. 이 때 비전문가 상사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인지하고 권한 부여 (empowerment)를 해 주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아는 게 없으니 상사가 주도적으로 전문적 업무를 시킬 수는 없는데, 무능력이 드러나는 것은 부끄러우니 무조건 전문가 부하가 하는 말은 묵살해버리고, 이전까지의 관행대로만 하자고 우기게 된다.
- 규정과 절차에 의거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체계. 관료제는 위계질서와 문서절차(결재)를 중시한다. 흔히 정치, 기업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결재란'이라고 되어 있고 '과장, 부장, 사장' 등의 직책명과 사인란이 있는 서류가 흔히 나온다. 이는 기획 수립자, 문서 제작자가 과장, 부장, 사장에게 그 계획이나 문서의 결재(승낙, 인정)를 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재의 절차 역시 하부 실무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실무진이 작성한 서류를 중간 관리자가 확인 후 결재하고, 그 서류들을 모아 또 상위 임원에게 결재를 받고, 상위임원 역시 자기가 결재한 서류를 모아 보스에게 결재를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이 과정에서 도중에 결재를 받지 못하는 기획이나 서류는 폐기되거나 하부에 환송되어 보수절차를 거친 후 재결재를 받게 된다.
이는 조직의 위계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때문에 중간 과정은 조직에서 공식적으로 수립한 과정과 절차에 의거하여 시행되게 되며 의사소통도 이에 기반하여 실시된다. - 비선실세가 설치고 다니는데 하급자가 감사를 통해 상급자의 모가지를 날릴 수 없으면 문제가 생긴다. 망하기 직전까지 조직의 위계질서는 지켜지지만, 그 대가로 조직 자체가 붕괴하게 된다.
- 하급자가 조직 목적을 훼손하고 사리사욕을 챙기려 할 때 제지할 수 있다. 하급자가 공명심에 빠져 조직 전체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구성원 개인은 관료제 전체를 보면 부품에 불과하며 위계질서에 의거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함부로 곡해할 수 없다. 결재를 받지 못한 행동을 하려 들면 권위가 없어서 시행할 수 없다. 이런 요소들을 배제하면서 조직 전체의 목표를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대처할 수 있다.
- 지침이 명료한 가이드라인으로 구성되어 이해하기 쉬움.
- 정성적인 평가가 기준이 될 경우 지침을 지키느냐 마느냐는 필요없어지고 상급자의 말을 잘 듣는 딸랑이냐가 중요해진다. 딸랑이가 아닌 사람들은 괘씸죄를 적용받고 승진에서 밀려난다.
- 공식적 규칙의 적용이 예외 없이 공평무사하게 적용되어 평등권을 확보.
- 비교 대상이 귀족정, 신정 등일 경우 관료제가 훨씬 효율적이다. 관료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근대 관료제 이후에 제시된 조직 모델과 비교할 때나 그렇다는 것이다. 전근대에는 혈통의 특권, 고위층과의 인맥 등이 출세를 결정짓고, 종교적 관념이나 고위층의 체면만 생각해서 의사결정을 하였다.
3.2. 단점
이 문단을 읽기 전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관료제는 나쁜 것' 이라는 식으로 단순 매도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점이 더 큰 제도였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조직이 관료제를 채택하고 그 이론 하에서 운영되지도 않았을 것이다.[1] 다만, 장점 대비 단점도 상당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제시되는 것. 비판적 의견도 어디까지나 관료제를 보완하자는 입장이지 관료제 자체를 철폐하자는 것이 아니다.관료제가 왜 문제점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다.
* 경직성: Merton 모형. 여기서는 최고관리자의 지나친 통제가 관료제의 병폐를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 분할성: Selznik 모형. 여기서는 권한의 위임 및 전문화가 이해관계의 분열, 훈련된 무능 등을 초래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 무사안일성: Gouldner 모형. 여기서는 관료들의 규칙에 의거한 소극적 행동이 병리현상을 초래한다는 점을 다룬다.
* 분할성: Selznik 모형. 여기서는 권한의 위임 및 전문화가 이해관계의 분열, 훈련된 무능 등을 초래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 무사안일성: Gouldner 모형. 여기서는 관료들의 규칙에 의거한 소극적 행동이 병리현상을 초래한다는 점을 다룬다.
막스 베버 역시 관료제의 한계점을 의식하였고, "쇠우리"(Iron Cage)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여, 본래의 개신교적 윤리라는 색채를 잃어버린 관료제가 껍데기만 남은 채로 굴러가게 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개신교 윤리를 간직한 "관료"(bureaucrat)에 대해 베버가 그렸던 모습을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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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위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관료제적 조직은 비효율성을 초래하게 되며, 이런 조직들로 굴러가는 현대사회는 곧 쇠우리와도 같다는 뜻이 되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만약 우리가 어떤 관료제적 조직에 무언가를 요구할 경우, "예산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인원이 없습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선례가 없습니다" 의 다섯 가지 답변 중 하나를 듣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외에 관료제의 역기능에 관련된 개념들에 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레드 테이프(Red Tape): 번문욕례, 서면주의, 서식주의, 문서만능주의 등으로도 불린다. 규정된 절차를 글자 그대로 따를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 하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소요하여 원활한 업무수행 및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공식화된 규칙을 강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스페인 행정부에서 중요한 행정서류는 특별히 붉은 끈으로 묶어놓는 관습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 보수주의: 변화에 대해 저항하는 것. 조직혁신을 함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 지식정보 사회 속에서 이것은 매우 치명적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팀제 운영이나 아메바형 조직 등이 대안으로 언급되고 있다. 관료제 사회에서 개혁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자신이 속한 조직을 살깎는 일이라면 아무도 좋아할 리가 없다.
- 할거주의: 부서 이기주의라고도 한다. 자기 소속기관, 국, 과만을 생각하고 타 기관이나 국, 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는 현상이다. 즉, 종적으로 협력할 수는 있는데 횡적으로는 협력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러한 부분은 조직의 조정(coordinating)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심해지면 서로간에 처리해야 할 업무를 이리저리 떠넘기기도 한다. 떠넘기기만 하면 다행이지 심하면 싸움까지도 한다. 매트릭스형 조직구조가 하나의 대안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너무 복잡해서 혼란만 키울 수도 있다. 이의 대표적 사례는 역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있겠다. 군대는 결국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조화롭게 움직여야 하는데 일본군 육해군은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여 합동작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훈련된 무능(trained incapacity): 관료제적 시스템으로 인해 자기 담당분야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지만 타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조망하지 못하는 현상이다.[2]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서 간의 보직순환이 필수적이나, 이것 역시 지나치면 전문인(specialist)을 확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훈련된 무능은 인적자원의 범용성과 전문성 사이에서의 상충관계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관피아와는 약간 다르다. 일례로 재경부 차관출신이 은행권에 들어가게 되면 그건 관피아로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은행업과 거의 관련없는 해수부나 통일부차관 출신이 은행권에 들어가게 되면 그건 관피아가 아니라 낙하산 인사다. 관피아는 종전 행정부에서 일하던 고급공무원 등이 관련업종 고위직으로 영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실무능력 자체는 유관업종이기에 있다는 소리다.
어느 조직의 어느 부서라도 일정 직책 이상 올라가면 조직 전체를 조망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런데 단순히 담당분야내부의 승진 요건만을 충족해 승진하다 보면 다른 업무는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경영진에서 생산여건을 무시하고 연구를 진행해 결국 제품이 시망인 경우도 허다하고, 연구직이 생산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연구 제품을 내 놓다가 불량률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경우도 많으며, 반대로 생산직이 연구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제품을 요상한 방향으로 생산하는 경우도 많다. 만일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잘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거의 없거나 피해가 많이 줄어들 것이다.
- 복지부동: No Action Talks Only (NATO)라고도 부른다. 관료들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며 가치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딱 상부에서 지시받은 만큼만 일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관료제 하에서는 책임소재가 명확하여 신상필벌이 확실하다는 장점이 이렇게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관료제의 무사안일주의의 한 사례이다. 그나마 평시에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정도로 끝나지만 비상시에는 큰 문제가 되기 십상이다. '이 문제는 제 소관, 관할, 업무범위내가 아니라서요'가 이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문장. 관료제에서의 높으신 분들이 유능해야 하는 이유로, 특히 비상시에는 높으신 분들, 즉 컨트롤 타워가 확실히 교통정리를 해 주어야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당시 관료제가 가장 발달한 국가였으나 그 컨트롤 타워인 황제가 30년 간 파업을 하여 망가진 명나라가 있다.
- 형식주의: 이와 관련된 항목으로 전시행정 항목도 함께 참고바람. 어떤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를 망각하고 관료제적 형식이라는 수단이 최종적 목표를 대치해 버리는 것.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열심히 일처리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 고객이나 정책의 수혜자의 입장에선 싫은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 독일의 정치학자 로베르트 미헬스(R.Michels)가 제안한 개념이다. 이 사람은 결국 파시스트가 된다. 어떤 조직이든 소수의 수뇌부가 권력을 잡고, 그것을 지키게 되며, 이로 인해 조직의 민주화가 훼손된다는 주장. 미헬스는 이와 같은 권력의 집권화가 궁극적으로 대규모 조직에서의 민주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본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이후 엘리트주의와 다원주의의 치열한 대결로 이어졌다. 현재의 상황은 다원주의가 엘리트 주의를 상당부분 인정한 가운데 소수 엘리트의 독점적 지배에 대해서만 대항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 개념에 대한 강력한 반례 중 하나가 바로 위키위키 시스템. 그런데 이것도 사실 보면, 시스템 유지자와 서버 유지자가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므로(즉 운영진) 완벽한 반례라고 보기는 어렵다. 작성 금지나 동결 처리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
저술가 강신주는 이것이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라 평가하고, 직접민주제를 지향하는 정책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3.2.1.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
군대의 부서들 중 자기 부서를 확장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기관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 독일의 한 참모장교.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 제프리 메가기
― 독일의 한 참모장교.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 제프리 메가기
예를 들어 직원A가 자신의 업무가 과중하다가 생각하여 인원의 충원을 요구한다. 여기까지는 합리적이다. 그런데, 이 직원 A는 자신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는 동료가 아니라 하급자를 원한다(개념1). 그래서 직원 B가 고용된다. 직원 B는 A가 다 하지 못한 업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동료가 아닌 하급직원이 충원되었기 때문에 동료였다면 필요없는 업무가 새로 발생한다. 관리업무, 명령 업무, 보고 업무, 감시 업무 등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2명으로 끝날 수 있는 인원 충원은 3명째로 접어드는데, 이 직원 C는 직원 B의 하급자이다. 이걸로 A가 B와 C를 관리하는 업무와 B가 C를 관리하는 업무, 그리고 A-B-C사이의 보고 및 감독 업무가 새로 등장하였다. 이하 반복.
3.2.2. 피터의 원리(Peter's Principle)
목표달성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이 주어지는 시스템 내에서, 그 조직 구성원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경쟁력을 잃을 때까지 더 많은 권한을 부여받는다는 주장. 간략히 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가 된다. 예를 들어 A는 사원으로서 유능한 사람이고, 따라서 대리로 승진한다. 대리에서도 일을 잘 해서 과장으로, 더 나아가 부장을 거쳐 이사까지 승진한다. 그러나 A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과장일 때까지는 유능했던 사람이지만 부장으로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였고, 이사로서는 무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A는 결국 '무능한 이사'에서 승진이 멈춘다. 이 때 A의 승진이 과장에서 멈추면 가장 효율적이고 부장에서 멈춰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능력있으면 승진시킨다는 구조는 A를 임원까지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반복하면 모든 직책은 직책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지 못해서 더 이상 승진할 수 없는 이들만으로 메워지게 된다.이는 1969년 L.J.Peter 박사의 논문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결국 실질적인 업무는 아직 자신의 무능 수준에 이르지 않은 하급자들에 의해 달성되며, 오히려 상급자들이 일을 망치지 않도록 하급자들이 상급자들을 "관리"한다고 본다. 거꾸로, 너무 잘난 하급자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을 위협할 능력있는 하급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상급자들의 농간으로 일찍 도태될 수 있다.
피터의 원리에 대해 "승진으로 무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승진으로 새롭게 요구되는 직무 역량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관료제 조직 혹은 국가에서는 하급자에게는 실무적 역량을, 상급자에게는 사내 정치 혹은 조직에 대한 비전같은 정무적 역량을 요구한다. 이처럼 실무자로서 유능했던 사람이 관리자로서 무능한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해결책으로는 "승진하거나 물러나거나" 정책을 펴는 방법이 있다. 이건 군대의 장교 인사행정에서도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장교들은 계급마다 정년이 따로 있다. 아울러 연공서열에 근거한 승진제를 폐지하는 것, 도급계약을 맺어 해결하는 것, 승진 대상자를 새 직무에 충분히 훈련시킨 후 승진시키는 것 등이 있다.
3.2.3. 딜버트의 원리(The Dilbert Principle)
1990년대의 만화 < 딜버트 > 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피터의 원리와 유사한 주제를 다룬다. 조직은 무능력한 개인을 일선 실무직에서 빼냄으로써 현장에서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대신 그들이 별볼일 없는 일들밖에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요지다. 무능력한 상사 문서와 뛰어난 아랫사람 항목도 같이 참고할 것.공산주의 유머 항목에서 이와 같은 단점들을 과장, 희화화시킨 각종 블랙 조크들을 감상할 수 있다.
3.3. 관료제를 위한 변론
위와 같이 관료제를 너무 까기만 하니깐 1980년대 이후 Kaufman, Milward & Rainey, Meier 등은 관료제를 옹호하는 논문을 써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된 논거는 관료제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관료제 역시 문제점이 있으나 실제보다 더 많이 비판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유로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 정치인들의 삽질도 관료들에게 넘기면 국민들은 이에 속아 관료들만 욕한다는 것이다.- 관료제의 비능률성: 관료제에 대한 첫번째 비판은 바로 비효율성이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관료제가 꼭 효율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사기업과 달리 정부는 효율성 외에 민주성과 합법성 등의 가치도 추구해야 한다. 또한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사기업의 경우 이윤으로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으나 국가의 경우 효율성을 평가할 근거가 마땅치않다. 넷플릭스 같은 기업은 인사, 재정 등의 규정을 최소한으로 만들고 최고의 인재를 뽑아 상황에 따른 최선의 결정에 맡긴다는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세금은 절대 그런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3]
- 국민들의 이유없는 불신: 관료제를 변론하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국민들은 관료제 전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나 자신이 경험한 행정기관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 관료라고 하면 불친절, 부조리의 대명사이나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는 동사무소나 구청의 시스템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민원이 있어 관공서에 들리면 아마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억지 미소라도 지으며 인사할 것이다. 즉 국민들이 관료제에 대해 가지는 불신은 대부분 근거가 없거나, 정치인들에 의해 조장되었다라고 보는 것이 관료제를 변론하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4. 기타
- 문명 5에서는 뜬금없이 불가사의 건립시 15%의 생산력 보너스를 주는 정책으로 설정되어 있다. 문명의 관료제는 Bureaucracy가 아니라 Aristocracy이긴 하지만. 일본어판에서는 귀족제로 번역되어 있으며 사실 이쪽이 더 맞는 번역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책 효과가 뜬금 없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불가사의 건립이라고 하는 건 거대한 노동력을 오랜 기간 집약시켜야 하니까 귀족제나 관료제가 필요하다고 보면 마냥 뜬금 없는 건 아니다.
직업적인 관리. 또는 직업적인 관리들의 집단. 특히, 정치에 영향력이 있는 고급 관리.
국가 기관에서 일을 하는 공무원. 특히 정치에 영향력을 가지는 고급 관리의 무리.
같은 관직에 있는 동료
국가 기관에서 일을 하는 공무원. 특히 정치에 영향력을 가지는 고급 관리의 무리.
같은 관직에 있는 동료
- 관료의 국어사전상 정의는 위와 같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5급 이상의 공무원을 관료로 본다. 하지만 '관료'(bureaucrat)와 '관료제'(bureaucracy)의 뜻은 전혀 다르다. 관료제는 공무원, 공공기관, 사기업, 심지어 동네 편의점의 점장과 알바 1:1 사이에서도 생길 수 있는 반면, 관료는 적어도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이 되어야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관련 문서
[1] 체스터튼의 울타리(Chesterton Fence) 비유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2]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을 예시로 들면, 정규직보다 대우가 낮아서 똑같은 할당량으로 일을 해도 불만이 많아서 자신의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지는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3] 누구는 능력 없으면 없어져야지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은 늙고 지식과 경험은 쓸모 없어진다. 그런 인간은 쓸모 없다고 방치하면 약자는 아사 혹은 병사 할 거고 그럼 사회 불안이 야기되어 결국 공동체 붕괴를 낳는다. 비효율적이라 욕하지만 쓸데 없어도 들어주고 적자 상황에서도 전기 수도 등을 공급하는 건 결국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