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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6:31:17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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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이완용(187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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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중추원 제2대 부의장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제22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李完用[1] | Ye Wan-yong
파일:이완용.jpg
출생 <colbgcolor=#fff,#1c1d1f>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
(現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558)[2]
사망 1926년 2월 11일[3] (향년 67세)
경기도 경성부 옥인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4][5]
묘소 없음[6]
본관 우봉 이씨 (牛峰 李氏)[7]
경덕(敬德)
일당(一堂)
재임기간 제22대 내각총리대신
1907년 6월 24일 ~ 1910년 8월 29일[8]
제2대 부의장
1912년 8월 9일 ~ 1926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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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부모 아버지 이석준 (생부)[9] · 이호준(李鎬俊) (양부)
어머니 신씨 (생모) · 민씨 (양모)
형제자매 친형 이면용
의붓형 이윤용
배우자 양주 조씨
자녀 장남 이승구(李升九)[10]
차남 이항구
친인척 손자 이병길(李丙吉), 이병희(李丙喜), 이병주(李丙周), 이병각, 이병철(李丙喆)
손녀 이병윤
조카 이명구
자형 조성하
족질 이봉구
족척 이병도(李丙燾)
소속 단체
[[독립협회|
파일:독립협회 검은색 글자.svg
]] (제명)[11]
작위 조선귀족 후작
약력 제2대 독립협회 회장
학부대신, 외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조선귀족 백작,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 후작, 중추원 부의장
비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파일:이완용 67세.jpg
노년의 이완용
파일:20190419_56_10157.png
1907년 이완용 내각 출범 기념 사진. 가운데 아이는 영친왕.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있는 인물이 이완용이다.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족관계5. 여담6. 관련 어록7. 대중매체에서
7.1. 영화7.2. 연극7.3. 드라마7.4. 게임7.5. 만화7.6. 소설
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구한말,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외교관.

한국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악명 높은 일제 부역자로 평가된다.

본래 고종명성황후의 친미, 친러 측근 세력인 정동파의 일원이었으나 일본 제국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이면서 친미파라는 이유로 지방 관찰사로 좌천당했고 여기에 횡령죄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후 1901년 고종에 의해 사면복귀되지만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자 몇 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5년 일본공사의 추천으로 학부대신으로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2] 공식적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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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과 본인의 영달을 위한 대세 판단력이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완용은 생전에도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갑오개혁 조차 말기인 을미개혁에 참석했고 광무개혁 당시 대신에 임명되지 못한 것을 근거로 "능력도 별 볼 일 없었던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는데 애초에 광무개혁 시기의 이완용은 친러 세력의 견제와 독립협회 활동으로 러시아 쪽에 단단히 찍힌 인사였다. 거기다 1898년 전북 관찰사 부임 겨우 닷새만에 직무 태만에 각종 횡령 의혹으로 탄핵받아 파직당하고 부칙상을 이유로 이유로 1900 ~ 4년까지 낙향한 것이 원인이었지 그의 능력으로 부족으로 인해 배제된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이후 친일 매국 행적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주도해 놓고 자기 책임이 아닌것 마냥 정세를 주도하는 것을 보면 다른 의미로 노련하고 실력은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다만 지독하게 부패한데다 정세에 따라 편을 밥 먹듯이 바꿔먹는 등, 결과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작자였다는 게 문제였다.

러일전쟁 이후 친러파가 몰락하고 미국마저도 도움이되지 않자 이완용은 자기 세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로 급전향하게 되는데, 횡령혐의로 그동안 정계에 배제되었던 이완용은 일본공사의 주선으로 학부대신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을사조약 조약 찬성을 가장 먼저 앞장서면서 이토 히로부미 눈에 띄게 된다. 이후에는 일본 공사관과 통감부의 원조를 받는 앞잡이로서 각종 고위직에 앉혀져[13] 본격적으로 매국행위를 시작하게 되는데 고종의 강제 퇴위 주도,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본인이 알아서 나서거나 제안하였으며 여기에 더해 일진회 및 여러 우익 단체[14]를 뒤에서 조종하거나 권력 다툼을 벌이는 등 그야말로 양심 없는 친일 행각을 한다. 어느정도냐면 고종에게 유약한 모습을 보이며 일본이 보기에 덜 친일적인 박제순 내각 대신 일본인 앞에서 고종 폐위를 주장하고 친일에 적극성을 띄는 이완용을 내정의 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앉혔으며, 한일 병합은 물론, 무단 통치기 당시 악명높았던 헌병보조원 제도까지 다름 아닌 이완용 스스로가 먼저 일본에 제한한 것이었다. 이는 급격하게 흘러가는 정세속에서 책임을 지거나, 타협을 하거나 소신을 지키거나, 저항을 하기 보다 그저 일본에 붙어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15]

이런 행동은 병합후에도 이어졌으며 교육회의에서 조선인 중 홀로 조선어를 배제하자고 주장하는건 물론 3.1 운동[16]을 사실상 살해 협박이나 다름 없는 수준으로 비난하면서 한쪽으로는 조선인 보호는 거녕 총독부에 진압방법을 제안하는 등 그 행태가 독립협회에서 민권운동단체 대표였던 사람이 맞는지 의문일 정도다.[17] 거기에 권력욕과 금전욕도 상당하여 그의 일가가 조선의 금융과 토지를 차지하여 돈을 불리는데 몰두하였고 이로인해 독립까지 조선인들의 모욕의 대상이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age(1926-02-11)]년 되어가는 지금 까지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18]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관점에 따라서 이완용보다 더 악질이라 볼 수 있는 송병준[19], 윤덕영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악명을 지속적으로 얻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 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으며,[20]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자 한민족의 반역자로 평가받고 있다.[21]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유다 이스카리옷,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이완용의 유명세 때문에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들은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고, 비을사오적 매국노들은 여러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남긴 송병준, 윤덕영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국권 피탈에 관여하지 않은 민영휘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고, 심지어 당시 중화민국의 교과서에서도 등장했다. 그 중국에서도 진회오삼계 같은 급의 매국노로 보았을 정도로 이완용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이완용은 갑이나 을, 어느 파에나 투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고 이는 그 일신의 안전을 꾀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일본공사
"이완용을 정말 싫어한다. 동년배나 하급자에 대한 교만함과 천해빠진 교활함, 편협한 고압적 태도, 당나귀 같은 완고함을 보이지만 권력자에게는 비굴하다. 그러지 않아야 되지만 이런 것들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했다. “사대부(士大夫)” 또는 양반들을 위해 별도의 학교를 설립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그다. 박영효를 추방한 뒤 전하가 “칙임(勅任)”관 이상의 관리를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자 내각에 통보했을 때,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공화국의 말단관리까지도 임명한다고 임금에게 아부했던 자도 이완용이다. 그는 전형적인 소인배다."
1896년 1월 23일 윤치호 일기

이완용은 잔꾀를 부려 속임수를 쓰는 인간이다. 이완용의 형 이윤용은 비열한 인간으로 온갖 종류의 악행을 저질러 돈을 벌고 있다. 이완용은 자신의 평판을 더럽히지 않고 약탈품을 나눈다. 이완용은 이채연서재필 박사를 통해 서울에 있는 미국파의 지원을 받고 있다. 뱀 같은 이완용의 형 이윤용김홍륙의 밀접한 측근이고, 엄상궁을 통해 전하 측근이 되었다. 안경수권재형은 이완용의 관심사인 일본을 후원하고 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제거되면 일본군이 두 팔 벌려 이완용을 맞이할 것이다. 이완용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 그런 자와의 교류를 이어가지 않고 있다.
1897년 7월 14일 윤치호 일기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 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일당기사(一堂紀事) 中』[22]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자신에 일기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강직하여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극찬하지만 나중에는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좋게 말하면 기계처럼 철두철미하다는 뜻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공감 능력이 없고 오직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볼수 있다. 실제로 이완용은 민비 쪽 관계자 였기에 갑신정변을 피했고 을미개혁의 일원이었지만 여전히 실권자였던 고종에 의도에 따라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숙청시켜 실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친일파를 척결할 때 돌봐주었던 이하영을 주일공사로 파견하는 등 여전히 일본 쪽에도 선을 대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의 추천으로 1905년 9월 10일 학부대신이 되어 내각으로 복귀하게 되고 두달 뒤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서게되는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황제대신 통감부가 주도하는 내각이 만들어지자 왕으로서 권위가 없는 고종을 가장 먼저 배반하는 행동을 보였으며 하루만에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인해 주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드는 의병들을 탄압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즉, 역사적 결과를 통해 본다면 이완용은 이념이나 신념을 신경쓰지 않는 현실주의[23] 정치인이자 이기주의자였고 일본도 이를 알고 있기에 그를 꽂아준 것이다.
미국인 콜부란씨가 한성 안에 전기철도를 경영할 때에 이완용과 이윤용 등 네 사람이 서로 결연하여 외면으로 한미합자라 하였으나 (…) 육십만 환은 그 회사로 보내고 사십만 환은 네 사람이 나누어 먹은 형적도 있고 (…)
대한매일신보 1910.05.26
러시아 공사관으로 돌아왔을 때 이완용이 민상호가 있는 자리에서 내게 화를 내며 말했다. “왜 내게 영수증을 가져오지 않았소? 당신이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너무 놀라 나직히 대답했다. “학부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4,000달러의 소재를 밝혀줄 그 영수증을 방치해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감께서 가지고 계신 4,000달러의 영수증을 학부에 보내시면 됩니다.” 그러자 그 영감탱이 외부대신은 나를 경멸하는 말투로 “내 영수증! 뭐라고? 당신은 그 돈을 환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어디 당신이 할 수 있는지 봅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완용은 걸어 나갔다.

7시 쯤 알렌 박사를 방문했다. 알렌 박사의 영수증이 논란의 핵심문제가 되어 이완용과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그에게 말하자 천만 뜻밖에도 알렌 박사는 그 돈은 이완용 자신(!)의 돈이라는 것을 밝힌 쪽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알렌은 이완용의 “선언”이 순전한 사기임을 알고 씁쓸해 했다. 그런데 좀 그럴듯한 말로 이완용이 전하를 설득해 그에게 4,000달러를 주도록 했는지, 아니면 학부대신이 되면서 그가 영수증을 없애야 했는지, 둘 다 매우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1896년 2월 28일 윤치호 일기

지난밤에 허치슨(Hutchison)[24]이 이완용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ʻʻ이완용은 돈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비열합니다. 몇 달 동안 이완용의 아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지만, 그 사람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30달러 가량 새해선물을 주었지만, 이완용은 호두 백 개를 보답으로 주더군요. 그 사람의 아량을 되새기기 위해서 그 호두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지요.ʼʼ
1897년 11월 11일 윤치호 일기

외국인 거류지에서 감리서까지의 큰 도로를 포함한 가치있는 땅은 모두 이완용과 팽한주 같은 도둑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완용과 팽한주는 몇 년 전 이완용이 외부대신이었을 때, 정부가 공공 부지로 몰수할 것이라고 땅주인을 협박하여 헐값에 사들였다. 그 뒤 그 악당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 미터 단위로 그 땅을 중국인에게 팔아넘겼다. 감리서 앞 도로에서 조선인 거주자는 점점 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악당들을 강압해서 감리서 부근 땅을 적정한 가격에 정부에 팔게 하고, 그 뒤 정부가 그 땅을 조선인에게만 파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희망은 전혀 없다![25]
1900년 12월 18일 윤치호 일기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동양 최고의 정치인이 됐을것이다.(則爲東洋第一流政治家 一堂若無甚愛財)
『일당기사(一堂紀事) 中』
그렇다고 성실한 현실주의 정치인도 아닌데, 같은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이완용을 의도가 순수하지 못할 뿐더러 강자에게 빌붙는 부패한 인물로 봤으며 이때문에 단순히 싫어하다 못해 극도로 혐오하였다. 어느정도냐면 자신의 일기에 이완용 언급되면 대부분 험담이며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함께 뱀으로 묘사될 정도다. 그리고 실제로 이완용은 을사조약 이전부터 제멋대로 이권을 팔아버리거나 나라돈을 횡령한 정황이 있는데 이미 학부대신으로 있었던 1895년 해외 위탁금을 착복한 일이나 지방 관찰사로 좌천되었을 때도 직무 태만 뿐만 아니라 지방민을 착복하여 20만냥을 챙겼다는 횡령혐의로 낙향/독립협회에서 제명된다. 또한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에게 내주면서 1만5천달러를 받았다던가 미국인 콜브란이 전차회사를 설립할 때 옥새를 위조해 고종의 내탕금 40만원(현시가 80억원)을 횡령하는 의혹을 받는 등 끊임없는 횡령 스캔들에 휘말린다. 웃기게도 이런 돈에 대한 문제는 일제 상대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교육세 납부고지서가 오자 버티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지쳐버린 경성부 측에서 감액 통보하고 나서야 납부하여 학교평의회를 분노게 하였다.# 나라 팔아서 일가 전체가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다만 이런 부패함과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26]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27]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28]
파일:external/t1.daumcdn.net/20160807164403694gdad.jpg 파일:external/t1.daumcdn.net/20160807164403839gbwr.jpg
옥인동의 이완용 자택(1909년) 출처 이완용 사망 당시의 자택 모습 출처[29]
하지만 이완용 본인은 청렴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에 어디까지나 돈을 모으고자 하는 개인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0] 당장 본격적인 매국을 시작하고 만인의 적이 되었을 때는 대놓고 자신과 자신 일가의 치부에 상당히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현대에 눈으로 볼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가회동 백인제 가옥인데 그의 외조카인 한상룡이 1906년 부터 7년에 걸쳐 지은거다[31] 이런 이완용만큼이나 친일 행위로 많은 재산을 치부한 사람들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휘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 뿐이였다. 민영휘는 원래 친청파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됐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은 윤덕영이였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면 300억 원에 달한다.[32] 게다가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당시에는 굉장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 그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33]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다임러[34]와 오버랜드[35]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울즐리[36]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외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 쉐보레 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대중형 수입차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조선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다.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이완용 생전인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총리 대신 이완용씨는 전라도 김제 만경 등지에 민유전토를 광점 매석하는데 장차 외인에게 전매하여 대이익을 회수할 계획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08. 12. 15
사실 이완용은 재산 중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였고[37]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 그는 토지를 사정 받은 뒤 5년 내에 매각하는 방법으로 부동산의 98~99%를 해방 전 팔아 치워 현금화 했다. 예를 들어 전북 지방의 땅을 사정 받은 뒤, 해당 지역에 일본인 지주들이 대거 진출해 땅값이 오르면 대부분 되파는 식이다. 좋게 말하면 당시 식민지배의 충격의 여파를 이용한 투자의 귀재지만 이붓형과 조카가 한성은행 [38]은행장으로서 정경유착을 하고 브로커 역할을 한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이완용이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병탄 이전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럼에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문이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 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테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테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오늘날 교육부장관) 재임 시절 공교육에 일본어 수업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수업시수가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4. 가족관계

파일:이완용 일가.jpg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39]


본인의 평판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42]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조롱성 루머가 돌았다. 이 내용은 매천야록에도 기재되어 있어서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당 기사 이승구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에 있었는데 해방 직후 이완용의 친일행각에 성난 마을 주민들이 이승구의 묘에 불을 지르고 묘비를 파괴하는 등 훼손했고, 무덤까지 파헤치려 했으나 강회를 두껍게 만들어 실패했다고 한다. 이후 이 무덤이 있던 자리는 '원수의 아들의 묘가 있다'고 해서 원수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가 2006년이 되어서야 묘가 다시 발견되었다. 관련 기사

양부에게는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양 이복형[43]인 의붓형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그런 새끼가 나라를 팔아먹어!?

5. 여담

파일:낙서.jpg
파일:Yamagata_Aritomo.jpg* 이 사진이 이완용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 사진의 인물은 일본의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완용의 사진이 아니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32912494.png
이완용의 친필.

6. 관련 어록

구문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82]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이완용 사망에 대한 기사.#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아야지.
1926년 2월 13일[83]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84]
1896년 7월, 독립협회 강연 중. 그러나 정작 한국을 남의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다.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송태조 조광윤에게 바치는 영일시를 인용해 일본을 찬양한 구절
이토 히로부미: 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단비가 처음 내려 만사람을 적셔주고
모리 타이라이: 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지니
소네 아라스케: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부상[85]근역[86]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이완용: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두 땅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190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일합방의 주역들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모리 타이라이,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승전결 한 줄씩 돌아가며 지은 합작시[87] 한일합방 사이퍼
아아,[88]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1919년 4월 3.1 운동 당시 발표문.#

7. 대중매체에서

행적의 질이 매우 나쁜 인물이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매우 안 좋은 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7.1. 영화

7.2. 연극

7.3. 드라마

7.4. 게임

7.5. 만화

7.6. 소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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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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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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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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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을미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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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내부대신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 박영효 박정양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엄세영 김가진 정병하
신기선 이범진
군부대신 조희연 안경수 조희연
법부대신 서광범 서광범 장석주
탁지부대신 어윤중 심상훈 어윤중
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 김윤식
학부대신 박정양 이완용 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


[1] 창씨개명으로 등록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성인 '이(李)'를 리노이에(李家)로 바꾸었다. 또 이름인 '완용(完用)'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었다.[2]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558. 원주민의 구증을 토대로 밝혀진 주소다. 이 지역에 판교신도시가 지어졌는데, 이 와중에 이완용 생가 터가 아파트랑 학교파묻혔다. 집 터에는 중학교가 들어선다는 내용으로 보아 백현마을8단지아파트와 신백현중학교 사이로 추정된다. 과거 푯돌을 세우려고 추진하기도 했다. 2023년에 실제로 푯돌을 세웠다가 며칠만에 다시 철거했다.[3] 13시 20분[4]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5]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암살 미수 이후 폐에 상처를 입어 매년 겨울철만 되면 폐렴천식 등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1926년에는 호전되는 듯이 보여 1월 12일 총독부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서 다소 무리를 했었고 부축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이후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다.[6]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9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화장했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으며 위치는 육군부사관학교에서 매우 가깝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다만 이 글은 오히려 보존하는 게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후손들에게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내버려뒀을 가능성도 있다.[7] 우봉 이씨 23세손 ○용(○用) 항렬.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였으나 감찰공파(監察公派) 집안으로 양자를 갔다. 2002년판 우봉이씨세보 중에 인권(仁卷, 1권) 821(八二一)쪽에 이름이 있다.[8] 임기 중 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박제순이 임시로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되었고, 이완용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내각총리대신으로 복귀했다.[9] 이명은 이호석(李鎬奭)[10] 계몽운동에 참가했고, 경술국치 이전에 사망하였다.[11] 1898년 7월 11일 제명되었다.[12] 대부분 을사오적이 누군지 물어보면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아는 경우가 많다.[13] 본인 뿐만 아니라 이완용 가문 자체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였다.궁내부대신 이윤용은 형, 탁지부대신 임선준은 사돈, 승녕부총관(황제의 비서실장) 조민희는 처남, 승녕부시종은 차남 이항구였다. 이 때문에 이완용 내각은 가족정부라고 비꼬아지고는 했다.[14] 이들은 일본이 내세우는 아시아주의를 굳게 믿고 내각과 의회가 유지되는 합병을 하거나 일본 주도로 실력을 키워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합병이후 집회취제령으로 전부 토사구팽 당했다. 특히 일진회 회장이었던 이용구는 자신이 조국을 파는데 일조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폐인이되어 사망했다.[15] 적어도 필리프 페탱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기가 생각하던 프랑스를 만들고자 했기에 동정여론이라도 있었지만 이완용은 밖에서는 동포를 운운하고 뒤에서는 조선을 일본화 하고자 하는 지배자와 구 권력층인 조선귀족의 비위를 맞추다 못해 권력투쟁까지 했다.[16] 당시 격문을 보면 알수 있듯이 이완용이 제안한 현병통치와 헌병보조원의 폭정이 3.1운동 원인중 하나였다.[17] 사실 만민공동회에서 대통령제나 공화정 같은 급진적 주장은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한 것이고 헌의 6조도 이완용이 낙향 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 당시 이완용은 외교관으로서 해외에 이권 판매를 하는 것을 주로 했고 착복까지 하여 제명된 것을 보면 민권향상 보다 지도층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행동했던 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18] 구글매국노 이미지 검색을 하면 대부분의 사진이 이완용 관련사진일 정도이다(...). (캡쳐 이미지) 때문에 이씨를 제외한 다른 성씨에서는 완용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소수 있지만 그래도 하필 이름이 완용이라서 거북하다며 개명을 신청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씨 문중 중 완용이라는 이름을 쓰는 바람에 동명이인인 이완용이 되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19] 이완용이 본격적인 매국노선을 탈 때의 라이벌로 일진회로 친일경쟁을 한것으로 유명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었으며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 ·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왜냐하면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서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 쪽을 더 이용해 먹었다. 더구나 이쪽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더욱 지독한 셈이다.[20] 특히 이지용과 박제순의 경우(다만 박제순은 을사조약 한정.) 어느정도 정상짐착의 여지가 존재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이완용의 후손들처럼 폐를 끼치는 일이 별로 없거나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는 정반대다.[21] 그도 그럴 것이, 이완용은 '국권피탈 3조약에 모두 찬성한 것을 넘어 체결에 직접적으로 참여 + 강제병합 후에도 일제의 학정에 아이디어를 제공 + 35년(을사조약 직후까지 포함한 40년) 동안 동포들을 지옥에 집어넣었음 + 그럼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죗값과 비교하면 매우 편하게 죽음' 때문에 영원히 한국인들의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22] 1927년 이완용 1주기를 기리기 위해 처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출판한 이완용 평전 내용이다. 물론 김명수도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인물이다.[23] 다만 현실주의자 자체가 매국노 성향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로 서재필은 합리주의, 엘리트주의, 친미, 친일인사인데다 아예 일가가 갑신정변으로 몰살당했다. 이 때문에 무지몽매한 조선 대중과 왕을 대놓고 경멸했는데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했다. 무엇보다 본인도 이완용의 선을 넘은 매국에 분개했다.[24] 관립외국어학교의 분교인 영어학교의 영국인 교사다. 한국 내에서 운동회를 최초로 연 사람이기도 하다.[25] 실제 동시기에 땅을 부당하게 빼앗은 것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나온바 있다.#[26]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27]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때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런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28] 이런 물림상 문화는 전근대 중국과 일본에도 존재해서 중국 황제와 일본 천황의 점심상, 저녁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식사가 차려졌었다. 특히 청나라 황제의 수라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 그 자체여서 환관과 궁녀들까지 다 먹고도 남을 정도였고, 메이지 덴노는 점심 때 양식을 즐겨서 시종들도 양식을 먹을 수 있으니 양식 점심이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현대 일본 황실에는 사라진 문화다. 지금은 그냥 가족끼리(천황 가족, 상황 가족, 황사 가족, 친왕 가족 모두 따로) 그 끼니에 먹을 양만 차려서 각자 먹고 있다.[29] 당시엔 사치품이자 지위의 상징인 자동차들이 줄줄이 서 있는 것을 보아, 지위나 재산 등을 가늠할 수 있다.[30] 오일 머니 같은 불로소득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검약은 곧 재산의 치부의 기본이다. 자수성가한 재벌 1세들 중에는 검약한 사람들이 많았다.[31] 당시 기준으로도 화려해서 데라우치 총독 외 새로 총독이 부임할때마다 이곳에서 연회를 벌였고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 2세가 조선에 방문했을 때도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 그의 재정 사정이 어려워져 소유권이 넘어갔고 후에 백인제가 이를 매입한거다.[32] 1910년 기준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던 이회영 일가가 만주로 떠났을 때 처분한 전 재산이 2023년 가치로 78억 원 남짓이었고, 1933년 기준 매국노 부호의 대명사인 윤덕영의 재산이 2023년 가치로 67억 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완용이 얼마나 갑부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이회영은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값을 받지 못한 것이었으니 이회영의 실제 재산 수준은 이완용보다도 높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민영휘의 재산은 이완용 재산의 20배 가량인 6000만 원이었고,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4800억~7800억 원에 달했다.[33] 이때의 어차가 한국 최초의 어차는 아니다. 이미 몇 년 전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 시범 용도로 왕실에 들여온 포드 A형 차량이 최초였는데 생긴 게 지금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초기의 자동차인지라 진동이나 소음이 심해 고종도 당시엔 한두 번만 타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 영사관에서 쓰던 르노 자동차를 왕실에서 들여 운행하기도 했다.[34] 현행 재규어의 고급 브랜드. 2000년대 동그란 눈의 재규어 XJ때만 해도 8기통 모델 중 다임러라는 최고급 에디션이 남아있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 AG와는 관련이 없는 별개의 브랜드이며, 당시엔 벤츠 S600 급은 되는 최고급 차량이었다.[35] 크라이슬러에게 인수된 브랜드.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스페셜 버전 중 하나도 이름이 오버랜드다.[36] 1975년에 해체된 영국 브랜드[37] 한일 신협약 때 10만 원, 합병 때 15만 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38] 이 시기 한성은행은 조선귀족들이 받은 은사공채 상당수를 예금하고 친일파들이 대주주로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 팔아 받은 돈을 자본삼아 돈을 굴린것이며 이완용의 친인척들이 이를 관리한거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조선귀족 은행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3.1운동 당시 예금이 대거 빠져나간다.[39] 가운데에 검은 양복을 입은 자가 이완용이며, 나머지는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병주(셋째 손자), 이병길(첫째 손자), 이항구(둘째 아들), 이병희(둘째 손자), 이병철(넷째 손자)이다.[40]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조부 이완용, 생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41] 이병철(李丙喆). 형제들도 모두 항렬자 丙을 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李秉喆)과는 동명이인이다. 한자도 다르다.[42] 협성회 등 구한말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1905년 26세에 사망했다.[43] 이완용의 양아버지 이호준의 아들.[44] 출처: 변은진. (2011).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낙서' 연구. Han'guk Munhwa (Seoul, Korea), (55), 309-344.[45] 중종 초기 정막개의 고변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인물.[46] 김일경과 함께 역적 취급을 받았지만 김일경만 복권되었고 목호룡은 빠졌다. 다만 김일경은 양반이고 목호룡은 풍수지리를 보던 중인 출신이라...[47]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48]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다.[49] 이는 최근 인터넷 상에서 악질적으로 창궐하는 전라도 관련 지역드립에 이용되기도 한다. 실제 이완용은 경기도출신이다.[50] 애초에 경주 이씨인 이병철은 우봉 이씨인 이완용과 본관부터가 다르다. 이병철이 삼성 경영진들을 상대로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 운운했다는 썰. 당연히 사실무근인 루머에 불과하며, 당장 현재 삼성의 요직에도 전라도 출신들이 적지 않다.[51] 비슷하게 노재봉 전 국무총리도 아버지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다만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아버지가 경술국적 민병석인 것은 사실이다.[52] 그나마도 이완용이 입양되기 전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완용은 참판공파(參判公派)인데다가 이병도와 이완용 간의 촌수는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53] 흔히 말하는 사돈의 팔촌이 예의상으로 따지는 친척 관계 중 가장 먼데 그보다도 훨씬 먼 사이다.[54] 예를 들어 박물관에 멀쩡히 전시 중이던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워없앤다든지. 이장할 때 나왔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55] 고대 신화도 아니고 근대 실존 인물의 이야기이니 과학적인 시선으로 보면, 매우 위험하다. 번개는 높이 솟은 물체에 집중적으로 내리치며 내리친 뒤 지면으로 퍼지기 때문에 신체와 바닥에 모두 접촉한 도체가 있다면 감전사했을 것이고 마른 하늘이라지만 번개가 이미 내리친 곳은 플라즈마화돼서 전도성이 더 좋다.[56] 물론 우페이푸 역시 그저 당대의 평범한 군벌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도 최소한 항일 의식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는 한다.[57] 국경을 넘나들던 친일파 - 이완용과 근대 중국의 매국노 담론(1905~1945)[58] 북송시대 대신으로 금나라 병사가 개봉을 포위하자 화전을 주장하고 강왕과 함께 금나라로 인질로 갔다가 장초국 괴뢰황제로 세워진 인물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라를 주도적으로 팔아먹은 이완용과 나란히 놓기엔 애매한 부분이 제법 있는 인물이며, 황제가 되려는 것을 거부했다가 금나라가 도시의 사람들 죽인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된 것 인데다, 그마저도 도중에 도망쳤다.[59] 원래 매국노가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까이는 일이 많다. 당장 그 유명한 을사오적만 해도 적극 찬성한 대신은 먼저 찬성한 이완용 그리고 이지용 둘 뿐이고 며칠 동안 저항하다 한 것인데 앞뒤 맥락이 다 무시되고 졸지에 일제 앞잪이로만 본다. 물론 녹봉 받아가면서 결국 동의한 건 문제가 있지만 앞의 나름 저항한게 대놓고 없던 일이 되는 건 김석원이지용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60] 장방창이 처형당한 이유는 황제의 후궁을 취해서라 매국노와 관계없다.[61] 당대 중국에서 일본 관련해서 조선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었지만.[62] 서양에서 독재국가에 대해 언급할 때 '~의 북한'이라는 언급이 많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63]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 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64] 역시 일제강점기 때의 악질 친일파 중 하나이다.[65]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 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66]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일, 12일, 13일 기사[67] 하지만 당연히 그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의 책임도 존재한다.[68] 이하영도 친일파지만 그리 유명하거나 심하진 않아 현재에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뒤바뀌어 여자에게 많이 쓰인다.[69] 그도 그럴것이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이름 하나 때문에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우려가 크며 입시취업에서도 이름 하나 때문에 광탈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이름 잘못 지어서 인생이 완전히 망하게 된다.[70] 실제로 독립유공자김완용(1918~2013)이라는 사람이 있다. #[71] 이 사례는 2024년 8월 18일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뤘던 적이 있다.[72] 이병길의 아들로, 1970년대 초에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했는데 이 무렵에 이완용 명의였던 땅 30만 평을 당시 박정희 정부에 압류당한 바가 있다. 이후 1975년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가 극동건설 캐나다 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건설 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73] 다만 이윤형도 토지 반환 소송에 대해 양심의 가책은 느꼈는지 "국민이 반대한다면 포기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74] 이와 비슷하게 송병준의 증손자 송준호(송병준 재산 찾기 소송을 벌인 송돈호의 이복형)도 폐인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한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75] "이완용은 죽기 전에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유언이 있었다 하는데, 죽은 지 며칠 후인 16일 그의 유언에 의해 사회 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사이토 총독에게 전달되었다." - 역사비평(계간 22호, 1993년 가을)에 실린 임대식의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 164쪽. 을 참조.[76] 이완용의 행적을 살펴보면 저런 유언을 남기고도 남은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사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일제의 앞잡이이자 사냥개로 살았다.[77] 그래서 "단, 나무위키 문서에 대한 훼손 및 조작 사건이 나무위키:편집지침/등재 기준10.1.1 단독문서를 위한 등재기준을 만족하는 경우, 훼손되거나 조작된 문서에 훼손 및 조작 사실을 명시하여 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를 적용.[78] 예를들어 한미자유무역협정 관련등으로 친미=친일 주장 시.[79] 2008년에 문화재청이 직지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현판을 썼다는 이유로 논란이 된 바 있었다.[80] 쉽게 예시를 들자면 두메산골 사는 김 아무개의 잘 쓴 서예와 독립운동가 윤봉길의 대충 휘갈긴 낙서 중 어느 것이 더 값비쌀지 생각해보자.[81] 이완용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경우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일단 경매에 나왔다 하면 대한민국 원화 기준 억 단위는 가볍게 찍는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는 고작 30~40만 원이다.[82] 이완용이 죽어서 염라국에 갔으니, 이승에서 한 짓을 빗대 저승에서도 염라국을 팔아먹을 것 같다는 뜻이다. 이완용의 기회주의적 행보를 고려하면, 심히 뼈 때리는 발언이다.[83] 이완용의 사망 2일 후.[84] 당시 폴란드는 3차 폴란드 분할로 인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식민지 신세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23년뒤인 1919년 폴란드는 독립을 이루었다.[85] 원래는 중국 전설에서 동쪽 바다에 있다는 나라를 뜻하며 일본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86] 무궁화나무가 피는 땅이라는 뜻으로 조선을 뜻한다.[87]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완용의 친필로 이 시문을 새긴 비석이 덕수궁 함녕전 후정(後庭)에 세워져 있었으나 해방 후 철거되었다. 시 내용은 함녕전시첩(咸寧殿試帖)에 실려 있다.[88] 嗚呼[89] 본명은 강인기.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용검 역,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진안대군 역,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중봉 조헌 역.[90] 게임 캐릭터와 플레이어 배우 모두 김민교.[91] 옆에는 같은 친일파인 심영이 누워서 절규하고 있다.[92] 고자가 되기 전에는 맞을 때마다 사과하더니 고자가 된 후에는 일본 순사들도 그를 적대한다. 하지만 출동만 하고 잡지는 못하고 권총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지나가던 순사를 이유없이 때렸던 전과 달리 일단 도시 전체에서 난동을 부려 출동한 것이기 때문.[93] 자세히 보면 튕겨냐는게 탄두가 아니라 탄피다. 그것도 소총탄[94] 사족으로 여기에는 이지용도 등장한다.[95] 무려 각시탈로 변신한 상황인데도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