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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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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2434><colcolor=#fff>
파일:이용익 선생.jpg
아명 <colbgcolor=#fff,#1f2023>이체동(李體童)
자 / 호 공필(公弼) / 석현(石峴)
출생 1854년 1월 6일
함경도 명천현 상가사 이향리[1][2]#
(現 함경북도 화대군 석현리)
사망 1907년 (향년 53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본관 전주 이씨(全州 李氏)[3]
가족 아들 이현재(李賢在)[4]
손자 이종호(李鍾浩)[5]
약력 대한제국 군부대신
대한제국 탁지부대신
대한제국 내장원
보성전문학교 초대 교주(校主)
시호 충숙(忠肅)
상훈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추서)

1. 개요2. 집안3. 생애4. 대중매체에서5. 여담6. 참고문헌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 시대의 관료, 교육가. 본관전주(全州)이며, 이성계의 이복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이다.[6] 아명은 이체동(李體童), 자는 공필(公弼), 아호는 석현(石峴),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내장원경(內藏院卿)과 국가재정의 총책임자인 탁지부대신(현 기획재정부장관), 그리고 국방과 군을 책임지는 군부대신(현 국방부장관)을 맡았었다.

대한제국 시기 관료로서 몇 안되는 충직하고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과 매관매직을 일삼은 조선(대한제국)의 군주 고종의 창고지기라는 평이 엇갈린다. 고종은 과거제를 비롯 각종 수단으로 개인재산을 불렸다. 그렇게 모은 재산의 관리 관청인 내장원(왕 개인재산)과 탁지부(지금의 기획재정부) 모두 이용익이 관리했다.

보부상으로 활동하다 임오군란명성황후를 구출시킨 공로로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조정에서 대표적인 친러파가 되어 동시에 일본을 견제했고, 이에 당시 친러였던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국정에 여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후 정점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에 빌붙어 출세한 인물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없으며, 을사늑약 체결 당시 늑약에 반대하여 투옥되었고, 이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에 1907년 피살되었기 때문에 민족사적 관점에서 평가절하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그는 축적한 부를 개인적 영달에 쓰지 않고 학교들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힘썼다. 고종 황제가 직접 하사한 '널리 사람다움(인간성, 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을 교명으로 삼아 민족 최초의 근대적 사립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훗날 후신이 되는 고려대학교의 설립자로 평가받는다.

2. 집안

1854년 1월 6일 함경도 명천현 상가사 이향리(현 함경북도 화대군 석현리)에서 종5품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낸 아버지 이병효(李秉斅, 1816 ~ 1875.2.25.)[7]와 어머니 강릉 유씨[8]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병효는 1837년(헌종 3) 식년 생원시에 2등 4위로 입격한 뒤 1864년(고종 1) 종9품 안릉(安陵:효공왕후의 능)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865년 종6품으로 품계가 올랐고, 종6품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다. 1869년 종6품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종5품 의금부 도사(都事)·서부 령(西部令), 1872년 종5품 희릉 령(令)·후릉(厚陵:정종정안왕후의 쌍릉) 령(令), 1874년 종6품 고산현감(高山縣監)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조부 이광집(李光集)[9]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들은 사후 이용익이 1890년 종2품 공조 참판을 역임한 뒤에 각각 종2품 이조 참판과 정3품 승정원 좌승지추증되었으며, 1902년 의정부 찬정(贊政)에 오르자 또한 각각 의정부 찬정 및 의정부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벼슬 없이 별세한 증조부 이수춘(李壽春)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정3품 사복시 정(司僕寺正)과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추증되었다.

또한 형 이연익(李然益, 1838.4.9. ~ 1866.2.30.)의 장남인 이윤재(李允在, 1862년생)는 1887년(고종 24) 함경도 도과(道科) 문과에 을과 1위, 즉 아원(亞元)으로 급제한 뒤 그해 정7품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및 종9품 권지(權知)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890년 종6품 부사과(副司果)·홍문관 부수찬(副修撰)·장련 현감(長連縣監),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사간원 정언(正言), 광무국 방판(鑛務局幇辦), 1891년 종6품 송화현감(松禾縣監), 1895년 종4품 초산군수(楚山郡守), 1896년 풍덕군수(豊德郡守), 1897년 영흥군수(永興郡守) 등을 역임했고, 1901년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1903년에는 함경북도관찰사(咸鏡北道觀察使)에 임명되고 이후 함경북도 재판소 판사(咸鏡北道裁判所判事) 및 함경북도 각광 감리(咸鏡南北道各礦監理) 등을 겸임했다.[10]

3. 생애

이용익의 생애[11]
1854 함북 명천 출생
1882 선공감가감역 - 첫 벼슬길 입성
1897 탁지부 전환국장 - 광산관리 책임
1899 전환국장 및 내장원경 겸직
1902 조정 재정권 장악, 철도 부설 사업
1904 탁지부 대신, 조선 중립화 선언 추진
일본 억류 중 교육구국 의지 다짐
1905 보성전문학교 개교, 육군 부장
망명 - 중국 → 프랑스 → 러시아
1907 사망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고종 황제가 충숙(忠肅) 시호 내림
이처럼 양반 집안에서 자라난 이용익은 보부상(북청 물장수) 출신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지리적 이점 덕분에 러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보부상 활동 중 왕실의 외척 민영익과 알게 되었다. 빠른 걷는 속도를 지녀 임오군란장호원에 피신을 한 명성황후고종간 정보통 역할을 했다. 또한 단천에서 숨겨진 금광을 발견해 왕실의 재정에 기여하면서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왕실로부터 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종3품 단천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탁지부[12]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탁지부 대신이 된 후 같은 해인 1902년에 항일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준·민영환·이상재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였다. 조정에서 이용익은 친러, 반일 라인으로 활동했다. 일본대한제국 침략 방지에 힘썼다. 러일전쟁 때는 이용익이 주도하여 '대한제국 중립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를 견제하며 러시아를 적극 끌어들인 친러파에 속했기에, 러시아에 반감을 갖고 있던 독립협회로부터는 맹공을 받았다.

독립협회에 의해서 고등 재판소에 고발당하기도 했는데, 죄목 중 하나가 화폐를 잘못 주조한 것이다. 화폐정리사업과 관련된 일로 잘못된 동전을 풀었던 일이다. 재정을 담당하던 당시 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 일이라는 항변이 있지만, 이와 같은 정책적 실책 때문에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용익에 대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또한 고종의 군비증강정책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육군 양성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해군 양성을 주장한 을사오적 이근택과 매우 사이가 나빠 서로 암살자까지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만 해도 이용익과 이근택은 같은 친러파였지만 을사조약 이후 이용익은 계속해서 친러, 반일을 했고, 이근택은 친러에서 친일로 갈아타며 매국노가 되었다.

이후 일본 제국 수뇌부는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던 이용익 제거가 시급하다고 판단해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시킨다. 당시 이용익의 납치를 위해 일제 천황이 직접 서명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이용익은 일제에게 '요주의 인물'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해지자 일제는 국제 여론을 이용해 이용익을 귀국시켰다.

귀국 후 이용익은 1905년에 민족 최초의 사립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13]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보성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참정대신 한규설과 함께 공개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져서 투옥되었다. 석방 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의 죽음이 당시 대한제국 황실에 알려진 뒤 황실은 그의 시호로 '충숙(忠肅)'을 하사하였다.

이용익의 사후, 그의 정적이자 그를 모함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상당수가 일본의 조선 강제 합병에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재물을 받았다. 반면 이용익의 가문은 일제에 의해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호는 조부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교주(校主)를 역임하고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용익에게는 군사정권 시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는데, 학계에서는 그의 공에 비해 훈장의 지위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4][15] 때문에 그의 업적을 재평가하여 그의 손자 이종호처럼 건국훈장이 추서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4. 대중매체에서

5. 여담


파일:678775575.png
파일:이용익 선생 흉상.jpg
파일:이용익 초상화.jpg
이용익의 초상화[20]

6. 참고문헌

7. 둘러보기

수구파
守舊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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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873 ~ 1882)
사대당 (친청파)
김병시 김보현 남정철 명성황후 민겸호
민승호 민영소 민영익 민영휘 민태호
송병준 이완용 조병세 조병식 흥인군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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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소 민영익 민영휘 민종묵 박제순
송병준 조병세 조병식 조영하 홍종우
대한제국
(1897 ~ 1910)
친청파 (사대당) 친러파
남정철 민영소 김병시 민병석 이근택
조병세 홍종우 이범진 이용익 조병식
일제강점기 조선
(1910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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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개화파
溫乾開化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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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고종
( ~ 1897)
김가진 김기수 김윤식 김홍집 민영익
박정양 신기선 조희연 어윤중 장석주
대한제국
(1897 ~ 1910)
<rowcolor=#000> 친일파 (개화당) 친청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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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윤웅렬* 이두황 민영익 박제순
이지용 이진호 장석주 성기운 신기선
조민희 조중응 조희연 심순택 이용직
* 급진개화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의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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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투명 1x10.png파일:고려대학교 심볼.svg파일:투명 1x10.png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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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교주(校主)[1]
초대

이용익
2대

이종호
3대

손병희
<nopad>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2]
<nopad>
1932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초대

김성수
1-4대

이활
5-8대

김상만
9대

김용식
10대

채문식
11·12대

김병관
13대

현승종
14·15대

김정배
16-19대

김재호

[1] 학교의 주인 또는 경영자를 지칭하는 말[2] 1921년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설립.
}}}}}}}}} ||


[1] 1895년 경성부 명천군 상가사 이향리 → 1896년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 이향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 석현동 → 1949년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 석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함경북도 화대군 자가리에 편입 → 1954년 함경북도 화대군 석현리로 분리[2] 인근의 판령리, 연덕리, 조당리, 자가리와 함께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다.[3] 시조 38세손, 완풍대군 16세손.#. 100여 년 전 인물인 정조와 같은 항렬이다.[4] 이용익의 형인 이연익(李然益)의 둘째 아들로 이용익의 양자로 들어왔다.[5] 생몰년도 1885년~1932년. 교육자, 사업가, 독립유공자.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의 2대 교주(校主)를 맡았었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군사정권기의 혼란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다가 2004년 11월 추서 42년만에 후손들에게 전해졌다.#[6] 이원계의 맏아들인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5대손이다.[7] 초명은 이학신(李學新)으로, 1868년(고종 5) 6월 14일 이병효(李秉斅)로 개명했다.[8] 1818년 2월 생으로, 유시권(劉時權)의 딸이다.[9] 이후 이광휘(李光輝)로 개명했다.[10] 당초 이용익의 출신 성분을 두고 일각에서는 아비가 누군지 모른다는 설에서부터 말장수 자식이라는 설, 북방의 천민 출신이라는 설을 주장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또다른 쪽에서는 대대로 명문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위 사실로 보아 명문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편이 훨씬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일단 조카 이윤재의 경우, 숙부 이용익이 정3품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를 역임하면서 한창 잘나가던 188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므로 숙부의 입김이 없으리라고는 말하기 어렵기에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아버지 이병효가 생원시에 입격하고 종5품 의금부 도사와 종6품 고산현감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이용익이 활동하던 시기도 아니었고, 생원시 입격이나 이병효가 지낸 관직들은 일개 말장수나 마의(馬醫)가 오를 수 있는 경지들이 아니므로, 이용익의 출신 성분은 본래 양반가였음이 훨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11] 출처[12]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에 존재했던 관청. 탁지에 관한 업무, 즉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재무부)에 해당된다.[13] 해방 후인 1946년 8월 15일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미(美) 군정청령(領) 의거 승인. 때문에 고대에선 일제 시절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해방 이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개편한 인촌 김성수도 기념하고 있지만, 그 효시가 되는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로서의 이용익 또한 기념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홈페이지 <고대역사>. 실제 설립자 이용익의 흉상이 고대 교정 내에 있다.[14] 조익순, 이원창,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 서울:해남 출판사, 2002. 등.[15] 군사정권 시기 반공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 때문에, 친러파의 입장이었던 이용익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해당 입장의 논지이다.[16] 당시 기사 #[17] 서울에서 전주까지는 고속도로를 타도 200km가 넘고 당시 열악한 도로 사정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믿기지가 않는 수준이다. 걸어서 하는 전국일주의 경우가 보통 하루 40km를 걷고 70~80km를 걸으면 일반인은 버티지도 못하는 강행군이다.[18] 사진에서 '알네ᄇᆡᆨᄭᅳ 법국 교사 셔울 ᄃᆡ한'을 현대 한글 표기로 바꾸면 '알레베크 프랑스 교사 서울 대한'이다.[19] 한편 그가 세운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서 키운 의암 손병희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건물 앞에 흉상이 세워져 있다.[20]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출처[21] '교육구국'은 그가 설립한 보성전문학교의 교훈이자 설립 이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