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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자작 | |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대한제국 제7대 중추원 의장 민영휘 閔泳徽 | Min Yeong-hwi | |
이름 | <colbgcolor=#fff,#1f2023> 민영휘 (閔泳徽) |
본명 | 민영준 (閔泳駿) |
자 | 군팔 (君八) |
본관 | 여흥 민씨 (驪興) |
호 | 하정 (荷汀) |
출생 | 1852년 5월 15일[1] |
경기도 광주군 (현 경기도 광주시) | |
사망 | 1935년 12월 30일 (향년 83세) |
경성부 관훈동 | |
묘소 |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 |
직업 | 정치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민영휘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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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여흥 민씨가 주축이 된 친청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 시기의 최고 갑부이다. 광주군에서 민두호의 아들로 태어나 명성황후의 친척, 민씨 가문의 인물로 권력을 누렸고 본래는 친청파였으나 친일파로 변절해 국권 피탈에 앞장서 매국노가 된 인물이다. 그야말로 돈이라면 나라고 양심이고 뭐고 다 팔아넘겨 부자가 된 사람이다.
2. 생애
1852년 5월 15일 경기도 광주군 출신으로 명성황후와는 15촌이 된다. 1877년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한 뒤 검열을 지내고 주서(主書)·겸설서·정언(正言)·부수찬을 거쳐서 동지경연사·지돈령부사 등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았다. 명성황후와의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닥치는대로 재산을 불렸다.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시절이 정점이었는데, 얼마나 많이 토지와 금품을 빼앗았는지 “민영휘가 돈 긁기에 전력한 것이 동학농민전쟁의 한 원인”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이 같은 행태로 성난 백성들에 의해 집이 전소된 적도 있었지만,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렴주구에 몰두하다가 지석영으로부터 “정권을 전횡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었으며, 백성을 착취하여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하는 데 여념이 없는 자로 …… 나라에 해독을 끼친 원흉이고 백성을 좀먹은 대악(大惡)”이라고 탄핵받았다([승정원일기]고종 31년 7월 5일).
김준태, "끝없는 탐욕" 나라도 팔아먹은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이코노미스트 2022년 5월 22일자
김준태, "끝없는 탐욕" 나라도 팔아먹은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이코노미스트 2022년 5월 22일자
관리생활 초창기부터 나라를 망치던 탐관오리의 대표격으로 인식되어 임오군란 때는 가옥이 부서지기도 했다.
탐관오리 짓을 신나게 벌이다 동학농민전쟁이 터지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다른 대신들은 "외국의 힘을 빌려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다"며 대화로 풀자고 주장했고,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면 일본마저 파병할 빌미를 준다며 반대했다.[2] 하지만 그런 거 상관 안하는 민영휘는 위안스카이, 고종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청나라군 파병을 밀어붙였다. 위안스카이는 당시 청나라에 보낸 보고서에 "민영준(민영휘)은 탐욕스럽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XX"라고 디스하며 비웃었다. 조선을 집적거리고 싶어 안달이던 위안스카이조차 혀를 내둘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민영휘),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이 청군 파병이 이루어지자, 많은 대신들이 우려했던대로 일본군이 동시 상륙한다.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집어삼키고자 틈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쾌재를 부르면서 청군의 2배 병력을 파병한다. 그리고 계획대로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하여 점령하고 고종을 사로잡아버린다. 고종은 일본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이 시키는대로 도장찍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두고 청일전쟁으로 한판 붙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불러왔던 민영휘는 도망쳐 버린다...
그 후 민씨 정권이 실각하자 지석영이 그를 탄핵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진령군은 제거하고 민영휘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했다고 답했는데, 민영휘의 처분은 귀양(위리안치)으로 끝났다. 그는 탐관오리로 단죄되어 전라도 신안군에 유배되었다가 청나라로 도주한다. 그러나 이듬해 당당하게 귀국해서는 대한제국 수립에 참여했다. 유배간 죄인이 제멋대로 도망쳐서 청나라를 뒤에 업고 귀환한 것이다. 이런 그를 또 고종은 좋다고 중추원 의장 등 고위직을 주며 가까이했다.
이렇게 나라에 쉴새없이 x맨 짓을 하면서도, 그 나라를 팔아 재산 불리는 데에는 창조적일 정도로 재능을 보인다. 대한제국의 재정 문제가 바닥이 보이지 않을만큼 나빠지자, 고종은 전환국을 세우고 화폐를 개혁해보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영휘가 방해를 놓는다. 이유인즉, 자기가 상평통보를 만들어서 쓰고 있었는데 새 화폐가 나오면 돈이 더이상 안벌릴까봐. 당연히 민영휘 개인에게 화폐주조권이 없는데 지맘대로 위조지폐 찍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도 부족해서 새 화폐 발행도 훼방놓았다는 것.
새 화폐들이 제대로 발행되지 못한 것은, 새 것과 옛 화폐의 교환비율이 정해지지 못하였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왜 정해지지 못하였냐 하면, 옛 엽전을 스스로 만들어서 세금으로 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리대신 격인 민영준(閔泳駿)씨 같은 사람이 평양에서 활발히 엽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교환비율에 따라 자기에게 이로우면 나라에 해가 되고, 반대로 나라에 이로우면 자기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정하지를 못했습니다.
미카미 유카타, 1931, 전환국 회고록, [한국경제사문헌],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발췌
미카미 유카타, 1931, 전환국 회고록, [한국경제사문헌], 김석원,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발췌
이후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삼킬 것이 확실해지자, 재빨리 태세전환하여 일본측에 붙는다. 자신을 신임하던 고종을 용도폐기한것은 물론이다.
일본 황태자 방한 환영위원장을 자청해 맡았으며,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왕가의 시조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조선에 봉안하는 신궁봉경회의 고문을 맡았고, ‘일한합방(일본 측의 용어)’찬성 운동을 벌였던 국민동지찬성회의 고문, 정우회의 총재를 지내며 일본의 한일 강제 병탄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김준태, "끝없는 탐욕" 나라도 팔아먹은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이코노미스트 2022년 5월 22일자
김준태, "끝없는 탐욕" 나라도 팔아먹은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이코노미스트 2022년 5월 22일자
이쯤되면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간 굵직한 사건들은 다 이자의 재산 불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 이런 자를 고위직에 계속 두고 두둔했던 고종 또한 나라를 망쳤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1906년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했다. 교육 사업 등을 후원하면서 이미지 세탁을 시도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에 앞장선 공로로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자신이 모은 재물로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하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다 1935년 12월 30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민영휘의 일생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고하도록 하자. "끝없는 탐욕" 나라도 팔아먹은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3. 가족 관계
- 正妻 및 측실: 대방마마 평산신씨, 김기현(金箕賢), 중국인 나씨, 평양(平壤)마마, 연당(淵堂)마마, 해주(海州)마마 순흥안씨 안유풍(安遺豊)[3]
- 아들: 형식[4], 대식, 천식, 규식
- 손자: 병주, 병수, 병유, 병도
- 증손자: 인기[5], 욱기, 덕기[6], 웅기[7], 헌기[8], 성기[9]
- 현손자: 경현[10], 경집[11], 경주[12]
4. 여담
- 친일활동과 부정부패, 사업 등으로 긁어모은 민영휘의 재산은 당대 가치로 600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이를 1925년[13] 기준으로 놓고 보면 2023년 가치로 무려 6000억 원에 달한다! 민영휘의 말년 재산은 당시 소비자물가지수에 빗대면 2023년 가치로 4800억~7800억 원으로 추정된다.[14]
-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8·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17∼73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참여했던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한철호 교수는 2019년 11월에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여 친일파 중에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이완용도, 송병준도 아닌 민영휘를 꼽았다.# 일본에서 한일 합방 기념으로 제작한 위 합성사진을 보면 절반으로 갈라서 좌측은 일본인, 오른쪽인 조선인들이다. 이완용(2번째 줄 가운데)보다도 상석에 있는 민영휘(맨 윗줄 가장 오른쪽)를 볼 수 있다. 그 옆은 고종과 순종이다. 친일활동으로 인한 그의 위세를 알 수있다. |
* 당대의 야사들을 모은 매천야록에 따르면 민영환이 자결한 직후, 민영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자 한 향병(鄕兵)이 "당신의 성도 민씨가 아니오?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살아있는가?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라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이에 민영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현대로 비유하면 일개 병사가 고위층 인사에게 손가락질하며 독설을 퍼부었는데도 대응하지도 못하고 도망간 격이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나 이미 당시에 민영휘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이 매우 나빴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 민영휘의 후손이 21세기에도 '주식회사남이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저 그런 강원도 관광지 중 하나였던 남이섬이 겨울연가 드라마 1편으로 그야말로 대박이 났었는데 2015년 인터넷발 남이섬과 관련된 소문이 돌아서 남이섬 측의 반발이 일어났다. 친일파가 친일 행각 및 수탈로 마련한 자금으로 남이섬을 구입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고 그 돈으로 후손은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주식회사남이섬은 한 언론사를 상대로 친일 문구를 빼라는 소송을 걸기에 이르렀는데 결과는 원고 승소하였다. 이는 법원이 공식적으로 친일 행각과는 관련이 없음을 법적으로 확인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법원의 이유인즉슨 민영휘가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고 친일파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손자인 민병도가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남이섬 자체는 1965년에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였던 민병도가 퇴직금 등을 모아 사적으로 구입한 섬을 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지, 남이섬을 증여 혹은 상속받지 않았기에 친일 행적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판결이다. 구입 당시의 금액 자체도 2018년 기준 약 6억원으로 25년간 금융업에 종사한 민병도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이었으므로 자금의 출처도 확인되었으며 민씨 후손들이 미국 LA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모두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민영휘의 후손들에 의해 운영되는 휘문고등학교인만큼, 휘문 중고교에서는 기울어가는 나라 속에서 국력을 양성하고자 학교를 세운 애국자마냥 포장되어 있으며 동상이 세워져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가히 조병갑 급으로 만악의 근원인 그의 실체를 안다면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일. 그러나 휘문중고교 내의 학생들도 민영휘의 악행을 모르지 않으며 교내 역사 선생님들 조차 민영휘의 친일 행각에 대한 언급을 딱히 꺼리지 않는다.
- 2022년 3월 31일 YTN #보도에 의하면 민영휘 가옥은 등록문화재가 되었는데, 시민단체가 "하다못해 친일파 사적이란 것만이라도 안내판에 적어라"고 요구한 것조차 관할 자치단체가 거부했다고 한다.
- 민영휘의 증손 민헌기는 1970~1979년까지 대통령 주치의를 역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민헌기의 전임이자 초대 대통령 주치의는 민영휘에 탄핵을 주장한 지석영의 종손 지홍찬이며, 민헌기의 후임의 이름은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한 또 다른 여흥 민씨 일가의 시초와 동명이인[17]인 민병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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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파 守舊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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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과 동갑이나 생일은 민영휘가 4달 정도 빠르다.[2] 동학 농민 혁명 문서에 보면 고종이 어떤 과정으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는지 서술되어 있다.[3] 풍문여고 설립자라고 하며, 참고로 대식, 천식, 규식 모두 그녀의 소생이라고 한다.[4] 양자이면서 적자이다. 민영휘의 정실인 평산 신씨의 소생은 연안 이씨 이유익에게 시집가서 민영휘의 외손자 2명을 낳은 딸 민윤식(閔潤植) 하나밖에 없었므로 민형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5] 1962~. 휘문의숙 이사장 역임[6] 1915~1980. 前 풍문학원 이사장.[7] 1943~. 남이섬 회장[8] 1928~2021.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 서울대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주임교수, 대한내과학회 회장,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원로회원, 아내는 이병도의 둘째딸.[9] 1918~1986.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에 있는 건축물 春川閔聖基家屋의 존재가 민영휘의 묘소 관리를 위한 묘막이라는 것과 돌림자를 고려하면 증손자대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10] 1933~2015. 민덕기의 아들로 민덕기와 민경현은 풍문여자고등학교(풍문고등학교) 이사장직을 차례대로 역임하였다. 현재 풍문고등학교의 이사장은 부인 염여정이다.[11] 1958~. 민헌기의 아들로 LG하우시스 대표를 역임하였다.[12] 1961~. 민헌기의 아들이자 민경집의 동생으로 3초의마법 대표이다.[13] 이완용의 재산이 1925년 기준 최소 300만 원, 2023년 가치로 약 300억 원에 달한다.[14] 참고로 민영휘의 말년인 1920년대~30년대 중반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아주 큰 변동은 없었다. 1936년 대비 격차가 컸던 게 1920년(1.3배), 1931~1933년(80% 미만) 네 해 정도가 전부일 정도.[15] 차남 민복기가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이와 동시에 매국노 집안 중 유일무이하게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고스란히 유지한 집안이기도 하다.[16] 매국노/조선귀족 후손이 기득권층이 된 경우는 이들 집안 외에도 이종찬, 이순용도 있지만 둘 다 본인만 기득권층이었고, 그것도 후자는 독립운동가였기에 논외로 쳐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17] 정확히는 이름에 쓰인 가운데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