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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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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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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대한제국 의학교장
지석영
池錫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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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충주 지씨[1]
출생 1855년(철종 6) 5월 15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2]
사망 1935년 2월 1일 (향년 79세)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 자택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공윤(公胤, 公允)
아호 송촌(松村)
1. 개요2. 생애3. 종두법 소개4. 지석영을 한의사로 정의할 수 있는가에 관한 논쟁5. 대중매체6. 기타

1. 개요

조선대한제국의 (한)의사[3], 토포사(討捕使) 문관, 정치인, 교육자, 저술가.

조선 말기 서화가 및 사진작가로 명성이 있었던 지운영은 그의 셋째 형이며, 독립유공자 지청천은 그의 친척 조카이다.[4]

2. 생애

1855년 5월 15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의 중인 가문에서 아버지 지익룡(池翼龍 1812~91)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용철(李容哲)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지익룡은 그가 1883년(고종 20) 문과에 급제한 뒤, 1884년 정3품 조사위장(曹司衛將), 1885년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1886년 관료로서 80세를 채웠다는 이유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문관의 품계),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박영선에게 한문한의학을 배웠다. 1876년 일본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박영선이 동행하였는데 이 때 박영선은 일본에서 시행 중인 종두법을 접하게 되었고 서양 의학의 우두를 통해 종두법을 소개한 <종두귀감>이라는 을 가져와서 제자에게 소개하였는데 그 중 1명이 지석영이다. 이후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현대식 병원인 제생의원[5]에서 해군 군의관인 마쓰마에와 도쓰카에게 70일 동안 종두법을 배웠다. 부산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6]와 종두침 2개를 얻고 서울로 가는 길에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어린 처남에게 처음 종두법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88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우두 제조법을 배워서 서울에 종두장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종두 접종을 시작하였다.

1883년(고종 20) 식년시 문과에 을과 6위로 급제하여# 1887년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시련이 닥치는데 국가의 각 분야 실정을 지적하다 조정의 미움을 받아 5년간 전라도 강진 신지도로 유배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우두법 보급에 힘썼을 뿐 아니라 지적인 도약을 이루어냈다. 1891년 서양 의학에 의거한 위생학서이자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을 한글로 간행한 것이다.

복직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는 개화파 지식인의 일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 1894년 갑오개혁 때는 개화파 지식인의 일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고,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로 임명되어 동학군 토벌을 하였다. 지석영 본인이 아군이라 표현한 일본군과 함께 하동 송림강 근방에서 동학혁명군 3천여 명을 물에 빠져 죽게 하였다.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그가 두각을 보인 것은 대한제국 시기였는데 그는 의학교에 복귀하여 천연두 퇴치에 노력하였다.

지석영의 근대 의료 수용에 대한 열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1898년 관립 '의학교' 설립을 청원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내부(內部, 옛 내무부, 현 행안부에 해당) 산하의 관립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와 '내부병원'이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가타 고안이 그랬던 것처럼 관립 '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석영은 1899년 3월 28일부터 일제가 관립 '의학교'와 '내부병원'을 '대한의원'으로 통폐합한 1907년 3월 15일까지 8년 동안 교장으로서 관립 '의학교'를 이끌며 근대식 의사 36명을 배출했다. 관립 '의학교'는 일제강점기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고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관립 '의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글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08년 2월 국문학자 주시경 등과 함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되어 한글 표기법을 정립하였으며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여 한자의 해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래도 평생의 과업은 놓을 수 없었던지 1914년 계동에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 진료소를 차려 80년의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외활동이 거의 없이 진료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논란이 불거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06년 민영환의 추도사를 읽기도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고 불과 15일 뒤에는 이재명 의사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기에 이토 추도사는 강제로 읽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3. 종두법 소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감염병은 천연두이다. 오죽했으면 우리 조상들은 '마마'라는 극존칭어를 붙이고 '배송굿'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에드워드 제너가 1798년 우두법을 체계화한 것은 의학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단지 의학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정작 기본원리나 발견과정 자체에서는 근대적인 면모를 찾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여겨졌고,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서구문물 수용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조선에서 예방접종을 시도해왔다고 알려진 것은 우두 접종이 아니라 천연두 걸린 사람의 딱지나 고름을 가루로 만들어서 접촉하게 하는 인두법이다. 인두법은 효과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천연두에 걸릴 위험이 높았다. 또한 그 시절까지 천연두와 홍역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비슷한 증상이 보이면 '마마신'의 수작이라고 여겼다.

당시 천연두의 어마어마한 사망률[7]은 질환을 신처럼 모시고 추앙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마마신께서 일단 들어오시면(=천연두에 걸리면) 그저 굽신굽신 비위 맞춰서 곱게 나가시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마마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환자가 있는 집안은 제사도 못 지냈다. 마마신님께서는 질투가 많아 자기 말고 다른 귀신이 들어옴을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천연두의 주치료방법은 무당의 굿이었다.

4. 지석영을 한의사로 정의할 수 있는가에 관한 논쟁

한의계에서는 지석영을 한의사로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지석영에게 의술을 가르쳐준 스승이 지석영의 부친의 친구인 박영선[8] 선생이었고, 일제강점기에 부여된 지석영의 면허가 '의생'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석영은 전통의사(현재의 한의사)들의 학술단체인 서 의학연구회[9]에서 회장을 지낸 경력이 있으므로, 그가 한의학자로서 소양을 갖췄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스승인 박영선은 일본에 수신사로 갈 정도로 명망과 실력이 있는 유의였고, 지석영의 부탁으로 일본의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해 주기도 하였다. 지석영이 활동하던 19세기 말에는 한중일을 막론하고 전통의사(한의사)들이 서양의학의 생리와 병리지식을 흡수하는 경향이 나타났고[10], 지석영도 전통의사로서 종두법을 비롯한 서양의학을 익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반면 지석영이 한의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기도 한다. 모든 한의사가 의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의생이 한의사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논리오류라는 것이다. 당시에 의생 등록신청을 할 수 있는 기준은 '(1) 의업에 종사한 지 2년이 경과한 자' 혹은 '(2) 3년 이상 한의학을 공부한 자'로서 한의사만이 의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고, 의생이 모두 한의사였다는 논리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박은 시대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의생 규칙의 '의업'이라는 단어만을 해석한 오류이다. 1910년대에는 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배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11] 의업이라 함은 전통의학(한의학)을 말했고, 의생의 100%가 오늘날의 한의사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지석영은 현재 대한한의사협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선의생회(전조선의생회)'의 회장(의생 면허 6번, 참고로 의생 면허 7번은 박일근)까지 역임한 당대 의생의 대표격이다. 실제 해방 후 국민 의료법이 조선 의료령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본법 시행 당시에 현존한 의생은 이를 한의사로 개칭한다'고 하였고, 의생의 명칭은 한의사로 바뀌었다.

물론 그가 근대 의학을 교육하던 대한의원 의육부의 학감, 학생감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맡은 직책은 행정직에 가까웠고 실제 서양 의학을 가르치던 교원들은 거의 전부가 일본인이었다. 당대 조선인 중 서의(西醫)라고 할만한 사람은 없는 수준이었기에, 서양 의학에 조예가 깊고 명성이 있었던 지석영이 직책을 맡음은 (그의 정체성이 한의와 서의 중 어디에 가깝냐와는 별도로) 자연스러웠다.

또한 대부분 백과사전에서 지석영을 한의사가 아닌 의사로 설명하는데, 한의사라는 법률용어가 광복 이후에 생겼으니, 개화기~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을 한의사라고 부르기는 당연히 어렵다는 것이다. 허준을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의 의사 또는 의학자라고 하지 한의사라고 표현하지 않음과 마찬가지이다. 한의사라는 용어가 생기고, 의사와 한의사(혹은 양방과 한방)라는 의료이원화 체계가 형성되기 전의 시대에 의사라는 명칭은 당연히 현재의 한의사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즉, 백과사전에서는 의사와 한의사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의사라고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지석영은 의사-한의사의 이원적 분류체계의 교집합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김이 정확하고, 굳이 따지자면 의학과 관련이 있는 오늘날의 한의사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5. 대중매체

6. 기타


[1] 경력공파 31세손 ○영(○永) 항렬.()[2] #[3] 이전 판본에는 한의사라 적혀 있었으나, 당시에는 한의사라는 자격 내지는 호칭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었는지라 부적당한 표현이다. 세종대왕을 조선의 왕이라 하지 대통령이라 할 수는 없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라 하지 해군참모총장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국내에서 의료인이 법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대한제국에서 근대 의학을 수련한 사람들에게 '의사인허장'을 발급하게 된 때이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2년 의료법 개정으로 한의사 면허를 신설하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의사'만 있었지 한의사는 없었다. 무면허로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은 그냥 무면허의 의사, 혹은 일제강점기의 제도에 따라 의생, 혹은 침사, 구사, 접골사 등으로 불렸다. 사실 유명해진 계기부터가 근대의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종두법인지라 지석영을 한방계의 대표적인 위인으로 내세우기에는 낯뜨거운 면이 있다.[4] 정확하게는 9촌 삼종질(三從姪)[5]부산의료원. 제생의원은 개항과 함께 조선 땅에 처음 상륙한 서양식 현대 의료 기관으로, 조선인 환자도 받고 우두 접종을 독려하는 등 일정부분 한국 의료계에 역할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일제의 미래 전진 기지 확보를 위한 수단이었기에 나중에 육군이 상륙하자 모두 병참 기지로 바뀌었고 병원 건물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6] 우두에 걸린 소에서 뽑은 물질. 이것을 사람 몸에 넣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종두법'이다.[7] 세계보건기구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세기에만 천연두 사망자가 약 5억 명에 달했다.[8] 다만 지석영과 박선영은 의과 급제자가 아닌 대과 급제자였다. 즉, 유학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의술을 공부한 유의(儒醫)라고 할 수 있다.[9]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의 협회 연혁에는 1910년 동서의학연구회 설립을 한의계의 역사로 서술하였다.[10] 중국의 당종해(唐宗海) 등 중서회통학파가 대표적이다.[11] 이들은 별도의 의사 규칙으로 의사 면허를 교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