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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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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국무총리
초대
이승만
<rowcolor=#ffffff> 임시대통령
초대 제2대
이승만 박은식
<rowcolor=#ffffff> 국무령 국무회의 주석
초대 제2대 제3대 제1-2대
이상룡 홍진 김구 이동녕
<rowcolor=#ffffff> 국무회의 주석 국무위원회 주석
제3대 제4대 제5-7대 제8-11대
송병조 양기탁 이동녕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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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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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임시대리 제4대 임시서리 제5대
신규식 노백린 김구 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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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국무령
제5-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김구 양기탁 송병조 이동녕
<rowcolor=#ffffff> 국무원 참모총장
초대
유동열
<rowcolor=#ffffff> 부주석
제1-2대 제3-4대
김규식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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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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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박은식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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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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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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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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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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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이동녕 내각
송병조 내각
양기탁 내각
이동녕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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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석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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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차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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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송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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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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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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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구
제19대
신익희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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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서리 제3대
김규식 박용만 정인과 이동휘
서리 서리 제4대 제5대
신익희 이희경 신규식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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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김규식 김구 조소앙
대한민국 외교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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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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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제3대

이동휘
제4대

노백린
제5대

유동열
제6대

이동녕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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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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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오영선
제9대

김철
제10대

박용만
제11대

김철
제12대

김구
제13대

유동열
제14대

김구
제15대

윤기섭
제16대

유동열
제17대

조성환
제18대

지청천
제19대

조성환
제20대

김원봉
제21대

조성환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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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최재형 이시영 이규홍 남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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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조 김구 송병조 김구
제17대 제18대
이시영 조완구
대한민국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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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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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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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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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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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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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하일레 셀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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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응오딘지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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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아드난 멘데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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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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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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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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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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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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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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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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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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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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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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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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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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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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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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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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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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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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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민영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svg
1964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svg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파일:독일 국기.svg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파일:차드 국기.svg
1965
다비드 다코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1965
수루-미강 아피디
파일:베냉 국기.svg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파일:세네갈 국기.svg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1965
레옹 음바
파일:가봉 국기.svg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기.svg
1965
하마니 디오리
파일:니제르 국기.svg
1965
조모 케냐타
파일:케냐 국기.svg
1965
무테사 2세
파일:우간다 국기.svg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파일:태국 국기.svg
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1968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8
천치메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1970
조만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6
임병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파일:미국 국기.svg
1979
박정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
최규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1
시리낏 끼띠야꼰
파일:태국 국기.svg
1981
푸미폰 아둔야뎃
파일:태국 국기.svg
1983
전두환(취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김규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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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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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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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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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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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국갤럽 CI_White.svg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반기문 박정희 노무현
6위 7위 8위 9위 10위
정주영 이건희 김수환 김대중 김구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노무현 박정희 김구
6위 7위 8위 9위 10위
정주영 유관순 김대중 반기문 안중근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부모님 이국종 이건희 안창호
16위 17위
문재인 김연아
※ 응답수 50명 미만인 18위부터는 공개하지 않음.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순신 세종대왕 박정희 김대중
6위 7위 8위 9위 10위
김구 부모님 정주영 안중근 유관순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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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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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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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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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회장
유진산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명예회장
김구 김규식 이승만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감찰부장
김두한
고문
신익희
별동대
김영태 조희창 문영철 김관철
김무옥 신영균 홍만길 고경주 }}}}}}}}}
<colcolor=#fff><colbgcolor=#330066>
파일:김구.jpg
출생 1876년 8월 29일[1]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2]
(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사망 1949년 6월 26일[3]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1가 경교장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묘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재임기간 제3대 임시정부 국무령
1926년 12월 10일 ~ 1927년 4월 11일
제5-8대 임시정부 국무령
1927년 8월 19일 ~ 1933년 10월 30일
제8대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1940년 3월 13일 ~ 1940년 10월 8일
제1-2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0년 10월 9일 ~ 1947년 3월 3일
서명
파일:김구 서명1.svg
링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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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30066><colcolor=#fff> 본관 구 안동 김씨[4]
부모 아버지 김순영(1848~1901)
어머니 곽낙원(1859~1939)
배우자 최여옥[5], 최준례
자녀 아들 김인, 김신
딸 김씨, 김화경, 김은경
친인척 조부 김만묵
증손자 김용만[6]
증손녀 김영
며느리 안미생[7]
사돈 안중근[8]
학력 독학
종교 개신교 (감리회)[9]
신체 180cm[10], AB형[11]
최종 당적
파일:한독당1946.png
연하(蓮下), 창암(昌巖), 창수(昌洙)
백범(白凡)[12]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파일:백범 김구 초상화.jpg
초상화

1. 개요2. 일생3. 사상
3.1. 종교
3.1.1. 암살 당시
4. 외모와 신체5. 평가6. '항일 테러' 표현 혐오 논란과 반박7. 가족 관계8. 선거 이력9. 소속 정당10. 어록11. 대중매체에서
11.1. 단독 작품11.2. 담당 배우/캐릭터11.3. 대체역사 소설에서11.4. 게임에서
12. 관련 단체13. 여담14. 관련 자료15. 관련 문서1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광복 후에는 1세대 민족주의 중도 우파의 1세대 정치인으로 보수파대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몇 번이나 해산위기를 겪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낸 큰 공로가 있으며. 그 덕분에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동학군병사로서 처음 민족운동에 뛰어들었고[13], 동학전쟁의 패전 이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교육계몽운동에 투신했다.[14] 1919년에는 중화민국령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임시정부의 항일전시내각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이념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성향 때문에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는 반대하면서 단일조국을 형성하자는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알 수 없는 배후를 둔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해산될 뻔했던 위기를 모두 견뎌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내면서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행적과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유력 후보였던 만큼 압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김구는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민족주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삼의사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가장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로 꼽히는데, 의거를 실행한 윤봉길과 이봉창을 막후에서 지시한 지도자라는 명성과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독립전쟁을 이끈 '임시정부 주석'으로서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인상이 강해서 설문조사마다 삼의사(중에서도 특히 안중근 의사)보다 순위가 밀리는 경우가 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을 불러보라면 상당수는 김구를 이야기한다. 즉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서는 국민 전반에게 고루 존경받는 편이다. 그를 높이는 표현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독립 조국의 문지기가 돼 뜰을 쓸고 창을 닦아주고 싶다'는 연설이나 백범일지 등에서의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무력이 아닌 문화다(일명 문화강국론)'[15], '내 나라가 식민 지배 당한 아픔을 알기에 내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길 원치 않는다' 등 그가 남긴 명언이나 거사를 앞둔 윤봉길과의 시계 교환 등 여러 드라마틱한 일화들도 지금까지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다만 근래에는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여론도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반공주의자로서 김립 피살 사건[16]을 포함한 공산주의계를 주살한 사건과 무고한 일본인 상인을 행색이 수상하고 도검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17]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엮였다고 생각해 살해한 치하포 사건이 이유로 거론되며, 임정법통론에 회의적인 일부는 안창호 계열 국민당원 옥관빈 피살사건을 집권을 위한 정치적 행보로 임시정부를 이끈 공적 또한 지적하기도 한다. 김구를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에 반박하는 측은 김구가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활동 당시 친일파가 많았던 한민당 쪽으로부터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받은 것[18]에 불만을 가지기도 한다.

이런 논란과 격하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처지나 이념 혹은 필요에 따라서 임시정부를 해산하려고 시도하거나 떠난 후에 나중에 돌아온 것에 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낸 독립운동가였기에 그 자체로 정통성이 매우 높고 조금 과장하면 임시정부 정통성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9]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우파든 좌파든 근대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인정받는다. 이름 있는 정치인이자 비극적인 죽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광복 이후에는 반탁 운동 및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다.

2. 일생

조선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출신이다.[20] 구 안동 김씨 익원공파로, 집안은 약 300년 전 김자점 역모 사건 이후 몰락했다. 김구는 어려운 가운데도 글 공부를 했지만 과거 시험에 낙방해 떨어졌고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폐지되어 사라졌다.[21] 김구는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꿨고, 1912년(37세)에 김구(金龜)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꿨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반기를 이끌던 지도자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가 모두 이탈, 독자세력화 하면서 규모와 정통성이 공히 크게 약화된 임정을 이끌었고, 과감한 항일 활동으로 세계에 존재감을 알렸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22] 등과 대립하였으며,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23]과 라이벌 관계를 이뤘다.[24]

기타 자세한 행적은 김구/일생 문서 참조.

3. 사상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中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25][26]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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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건국[27][28]

광복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 김구는 광복개조파와 창조파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임정 시절부터 우파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었다.[29] 김구의 정치 노선은 좌우합작운동 전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는데, 좌우합작운동 전인 일제강점기 당시 김구는 김립 피살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을 굉장히 경계했고,[30] 광복 후에도 김규식, 안재홍과 같은 중도우파들과는 달리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하였다.[31]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독립한 후 남북통일정부를 공동으로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좌우합작 7원칙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며 지지하고 나섰고, 좌우합작이 결렬되자 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기도 했다. 한마디로 좌우합작운동 이후 김구는 오히려 김규식과 다를 바 없는 중도우파 비슷한 컨셉으로 활동한 것이다. 결론은 김구를 극우파 또는 중도우파로 명백하게 콕 집어서 분류할 수는 없고,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타협적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말할 순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김구는 소련을 추종해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 공산주의 활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걍 다 부정적으로 본 것. 김구는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민족을 떠나 노동자끼리 뭉친다는 식의 사회주의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면모가 보이는 부분.

또한 광복 이후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시정부의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당시 중국에서 임정에 합류한 사회주의 세력과 별개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국내 사회주의 세력들은 그들과 접점이 닿지 않는 임정봉대에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구는 이들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 세력과 합작해 배척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당대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임시정부의 법통만을 내세우는 김구를 극딜하기도 했다.
법통(法統)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허헌[32]

한편, 이승만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동시에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33] 물론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탄핵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이 민국 연호는 단군기원과 함께,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3.1. 종교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 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 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위키백과에서는 김구의 종교를 동학 - 불교(법명: 원종) - 개신교(감리회)로 나열하여 개종을 2번이나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외에도 임종 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고, 광복 직후 전재동포 구호 사업으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원불교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교류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불교의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한 기록이 있는 등,[34] 국민지도자로서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고자 했다.

백범이 생애 대부분을 개신교인으로 살았던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2004)에는 사망 전 천주교 영세를 받은 내용은 없으나,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한 사건은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17세까지는 한학을 배웠으나 황해도 출신에 잔반이라 당연히(?) 과거에 떨어지고 백범의 아버님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학 공부를 공부했는데, 관상학 책 ≪마의상서≫를 석달 정도 볼 정도로 매우 심취했으나 자신의 관상에 부(富)나 귀(貴)는 하나도 없고, 천(賤)하고 빈(貧), 흉(凶)만 찾아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은 게 마음 좋음만 못하다는 격언을 떠올리고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란 결심을 했고, 병서를 보기 시작해서 ≪손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으면서 1년여간 마을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 19세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 접주[35]가 되어 700여 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동학 운동 이후 도피 중에 유학자 후조 고능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년여간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을 수계받고 출가하기도 했다. 김구가 개신교인 감리교에 귀의한 것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고, 약혼자가 급사한 1903년경인데, 1896년 수감생활 중에 신문과 도서로 서양문물에 관심이 생긴 영향도 있었다. 1902년경 동학 접주 시절 종사였던 우종서를 만나 개신교를 소개 받았고, 1903년 11월 감리회 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1903년 말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36]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결혼할 뻔하다가 무산되고 11세 연하 최준례와 결혼하는데 이때 혼인 예식은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주례하여 개신교식으로 치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반 이후부터의 삶 대부분은 개신교인이었다. 백범 김구의 개신교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개신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37]

3.1.1. 암살 당시

김구는 암살 사건 당일 절명을 전후하여 천주교식 세례성사종부성사를 받기도 했다. 위키에서는 마지막 종교를 감리회로 서술했는데 이는 그가 당시 의식불명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며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세례성사를 주는 것이 천주교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며 생전에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김구는 당시 며느리 안미생과 명동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했다고 하며, 1946년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서울 명동성모병원장 박병래 신부는 곧바로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하고,[38] 사망이 확인된 뒤에는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39]

그런데 당일 김구의 수행비서 선우진이 암살범 안두희를 김구의 방으로 안내한 것이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안내 후 2~3분이 채 못 되어 3층에서 총소리가 울렸으며, 총소리에 놀라 당시 비서였던 이풍식, 이국태가 뛰어 올라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 사람인 박동엽(독립운동가이자 대광고 교장)과 경비원 2명이 따라 올라갔을 때는 12시 40분경이었는데 김구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따라서 영세 당시 김구가 생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김구에게 암살 당일 세례를 준 것이 본인의 진의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백범이 과거 입교 의사를 밝혔다"는 관련자의 증언 뿐이다.

김구가 받은 세례는 임종세례이자 조건부세례인데,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며 이때 영세자의 의식을 확인할 수 없거나 의사의 사망선고가 있었더라도 "영세자가 영세를 원하였던 것이 분명하고 아직 완전히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조건으로" 세례를 준다. 즉 세례가 유효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40] 이와 관련하여 과연 김구가 생전에 천주교 영세를 원했느냐가 문제되는데, 김구가 명동성모병원 입원시 천주교 입교를 언약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증언을 교차 검증할 자료는 없고, 그가 생전에 성당에 출석했다는 자료도 없다. 노기남 대주교의 기념 화보집에 한국 천주교회 주요 행사에 김구가 배석한 모습이 등장한 사진이 있는 것을 보면 천주교계와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친분과 개종은 분명 다른 문제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로 현재도 정치인들은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3대 종교지도자들(불교, 원불교, 천주교)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려 한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1940년대 한국 정계의 중심이였고 그런 그가 천주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과 그가 천주교 입교의지가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다. 다만, 암살 사건 직후 다른 곳도 아닌 명동성당에 곧바로 피살 소식이 알려지고, 천주교 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백범의 주거지에 찾아가 사후 예식을 순조롭게 거행한 것을 보면, 백범의 생전 입교 의사표시나 이에 대한 유족들의 용인이 아예 없었다고 성급히 단정하기는 또 어려운 측면도 있다.

백범이 암살 사건 직후 천주교 임종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나, 이때에는 총격으로 의식불명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세례를 주는 것이 천주교의 종교적 전통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다만 그러한 전통은 그런 방식으로 영세한 사람을 천주교회 밖에서 볼 때에도 사회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로 분류할 수 있는지와는 별개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백범의 천주교 개종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보아 본 문서에서도 위키백과와 같이 그의 최종 종교를 감리회로 기술한다.

4. 외모와 신체

흔히 알려진 말년의 한복 입은 온화한 지식인의 이미지와 앞으로의 조국의 길을 군사, 경제적 강국이 아닌 문화적 강국으로 제시하는 모습 탓에 지식인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생전의 활동은 투사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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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보다 1살 연상의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 국내정진군 OSS(현 CIA)소속 도노번 미 육군 소장 옆에 서도 꿀리지 않는 큰 체격을 자랑한다.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왼쪽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학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키 또한 생각보다 큰 편이다. 키가 180cm 전후로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위에 나오는 김구는 70대였다. 칠순임에도 불구하고 백범은 180cm에 달하는 신장이었다. 이로 보아 20~30대 때의 김구는 못해도 182cm[42]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지금만 하더라도 한국인 180cm 이상이면 상위 11%에 속할 정도로 큰 키인데, 김구는 21세기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사람이다. 이 정도면 당시로서는 정말로 거인 수준.[43] 심지어 서양인들 중에도 그 당시나 지금이나 180cm 이상인 경우가 의외로 그닥 많지 않다. 게다가 동학운동 당시 거친 농민군 사이에서 소년이었음에도 접주 역할을 했다는 점, 치하포 사건 당시 칼을 숨겨놓은 성인 남성을 제압하여 살해했을 정도였음을 보면 키만큼 완력도 세고 좋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온화한 노년의 모습과 달리 중년 시절의 사진을 보면 같은 김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굳세고 단단한 강골의 이미지를 가진 얼굴이었다.

이승만과 비교하면 김구가 머리 반 개는 더 큰 위의 짤이 약간 퍼져있는 편인데 이는 구도상의 왜곡 문제로 실제로는 저 정도 차이까지는 아니다. 위 짤에서는 이승만의 키가 거의 김구의 눈 언저리지만 같이 찍은 다른 정면 사진을 보면 이마에는 닿아았다. 손기정과 찍은 사진을 봐도 대충 이마 언저리인데 손기정과 이승만의 키가 같다.

이승만의 키는 약 170cm 정도로 알려졌는데, 사진 속 이승만과 비교해 보면 김구는 180cm를 훌쩍 넘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언급하였듯 살짝 왜곡된 구도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작을 것이다. 위에 업로드된 다른 사진인 지청천의 키는 178cm라고 하니 대략 180cm 정도인 게 맞아 보인다. 180cm 정도의 키는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지만 일제강점기 20대 한국 남성 평균 키는 약 163cm였다. 현재 20대 남성 평균키가 174cm이니 현대와 비교하면 190cm 정도는 되는 거구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투쟁 활동은 이러한 큰 체격이 뒷받침해준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저 사진은 김구가 나이 70세가 다 되어 찍은 사진으로, 젊을 땐 더 컸을 것이다.

또한 원래부터 큰 키에 다리도 긴 편인데다 티가 별로 나진 않지만 어깨깡패라서 덩치가 키 큰 것 때문에 더욱 커보인다.

복장 자체의 경우 노년기의 동그란 안경에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 잘 알려져 있지만 양복 차림의 모습도 많이 남아 있다. 초창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을 보면 안경을 쓰지 않고 카이저 수염을 기른 모습도 있다.

노년기의 이미지와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김구 역의 연기자들이 대부분 굵고 무게감 있는 톤으로 목소리 연기를 하다 보니 실제 김구의 목소리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이나 대화할 때의 육성을 들어보면 톤이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느릿느릿 차분하게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면서 논리와 감성에 모두 호소하는 연설 스타일. 1946년 광복 1주년 행사 때의 서울 중앙청 연설 영상, 연설 영상 2. 연설 영상 3

5.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구/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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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항일 테러' 표현 혐오 논란과 반박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해프닝이다.
김구는 일본 상인을 살해하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중략)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후략)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29쪽

2008년 뉴라이트 성향의 교과서포럼에서 출판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44]에는 '일본에 대한 테러 활동을 수행하였다'고 서술되었는데 이 내용이 알려지자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다니!"라면서 여론이 폭발, 해당 교과서를 집필한 뉴라이트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외수진중권 등 일부 지식인들도 이 교과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이 형편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론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하포 사건은 이미 민간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에 대한 살해로 역사적 교차 검증이 끝난 상태이다.[45] 김구 관련 재판 문서나 외교 문서에는 스치다의 신분이 모두 ‘상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내 역사학자들 대부분의 연구결과이다. 당시 일본 기록이 신빙성이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 김구에 대한 처벌을 강력하게 원했던 총독부 입장에서는 오히려 김구의 주장처럼 일본 군인임을 적시하는 것이 재판을 위해서 더 유리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테러 대신 '항일 의열 투쟁', '무장 독립운동'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의열활동과 테러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테러가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의열투쟁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중요인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이전부터 다른 논문이나 책, 교과서에서 해왔던 것이다. 다른 서술도 아닌 백범일지에 이 표현이 나온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下, 돌베게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비밀리에 결사 조직하여 이봉창윤봉길 항일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를 만나 한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 윤희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원래 김구 선생이 1932년에 주도한 일련의 대(對)일본 폭탄테러 활동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쓴 책이다.
— 도왜실기 - 범우문고 86, 출판사 서문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테러 활동을 많이 한 남화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윤봉길6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독립군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더더욱 불안에 떨었습니다.
— (어린이용) 헐레벌떡 어제 오늘 근대 이야기 딱 22장면, 한정영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에서 벌이는 테러의 방법을 써서라도 침체된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자 했다.
— 한국사 이야기 21 - 해방 그 날이 오면, 이이화
목숨을 걸었던 윤봉길의 폭탄 테러는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 초등학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국사 100장면, 오주영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 대한민국 사(史)2, 한홍구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중딩고딩을 위한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김슬옹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위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김구의 항일활동을 테러 활동이라고 기술한 것은 위의 수많은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 금성출판사 교과서 뿐만 아니라 진보자유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많은 저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며 오히려 그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그런데 이외수진중권과 같은 지식인들이나 언론들이 저렇게 언급한 매체들을 비판한 적은 별로 없다.

결국 진영논리가 어느정도 겹쳐진 결과라는 것. 사실 김구의 요인 암살 행위 자체는 사전적 의미의 테러 행위가 맞고, 사회적 의미에서 따지자면 광복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와 광복 이후 국내 정치인을 상대로 한 테러에 대한 관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광복 이전에 김산과 같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죽어가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싫어했는데#, 여기서 조봉암이 말한 테러리스트란 비난엔 "어떻게 동포를 살해하느냐"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김구의 경우에도 일본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에도 우익 진영에 몸담아 좌익, 우익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벌였으며, 자신과 정치적인 입장이 같지 않는 인물을 대상으로도 백색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단, 진보진영 측에서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백의사의 활동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좌익보다 우익인사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 자세한건 백의사 항목 참조. 물론 우익 진영내에서도 배신자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테러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마냥 이상할건 없다. 당장 안창호계 온건 우파 국민당원이던 옥관빈 역시 비슷한 이유로 피살당했다. 다만 그런 것을 다 떠나 김구가 백의사와 접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 이들을 지휘하고 지시를 내렸다는 명확한 근거는 별로 없다.

이 논란은 학술적으로 연구된 김구라는 인물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거두로서 존중받는 대중적 김구 사이의 이미지 괴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전이나 연구자료는 그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의 위상은 그러한 용어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고[46][47] 이 간극이 이슈화 되면서 용어 사용 논쟁으로 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7. 가족 관계

생전에 부인 최준례와의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지만 딸인 장녀(이름 미상), 김화경, 김은경은 둘 다 유년기에 요절해 사망했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 둘은 딸들에 비해 오래 살았지만, 장남 김인도 1945년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자녀들 중 그의 만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차남 김신은 김구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크게 활약했고 이후로도 6대 공군참모총장[48]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에 기여를 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에 협조를 한 전적이 있어 분명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 다만 당시 나라가 워낙 시궁창이었고 5.16이 사상자가 없었단 점에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반대하지 않긴 했다. 이 때문에 현재 김구의 자손은 장남 김인이 남긴 유일한 딸이자 김구의 장손녀인 김효자 쪽을 제외하면 전부 김신의 가계다. 구체적인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49]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1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한독당1946.png
13 (6.7%) 낙선 (2위) [54]
제1대 부통령 선거 62 (31.5%)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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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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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당선
한국독립당 김구
무소속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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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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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신민회|
신민회
]]
1907 - 1911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11 - 1918 105인 사건으로 인한 정당 해산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
1918 - 1923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23 - 1930 자진 정당 해산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
1930 - 193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5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
]]
1935 - 1940 창당

[[한국독립당(1940년)|
한국독립당
]]
1940 - 1945 합당[55]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탈당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
1945 - 1946 창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946 합당[56]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6 탈당

파일:한독당1946.png
1946 - 1949 입당
피살[57]

10. 어록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소련식 민주주의가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그르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남북의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원할 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58]

11. 대중매체에서

1950년대만 해도 이승만 정부였기에 김구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작품은 금기시됐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퇴진한 후부터 활발해졌다.

11.1. 단독 작품

11.2. 담당 배우/캐릭터

(박암이 김구 역으로 출연한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파일:external/file2.instiz.net/b0e5655c95107d783baaca255ccceb41.jpg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백범을 맡을 당시의 이영후)

- 이하 참고 자료: 《한국 TV 드라마의 성격 분장에 관한 연구》 - 김봉천 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 2001. p60~61.

11.3. 대체역사 소설에서

11.4. 게임에서

12. 관련 단체

13. 여담

14. 관련 자료

15. 관련 문서

1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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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김순영 · 어머니 곽낙원 · 아들 김신 · 손자 김양 · 증손자 김용만
역대 선거 제1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동학 농민 혁명 · 치하포 사건 · 105인 사건 · 3.1 운동 · 김립 피살 사건 · 옥관빈 피살사건 · 사쿠라다몬 의거 · 훙커우 공원 의거 · 8.15 광복 · 신탁통치 오보사건 · 남북연석회의 · 백범 김구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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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피 묻은 적삼 · 경교장 · 묘소/기념관 · 대장 김창수 · 드라마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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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안중근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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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안봉생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안태진의 차남
안장근의 장남
안춘생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안태진의 차남
안장근의 차남
조순옥 건국훈장 애국장 (1962) 안춘생의 처
안명근 건국훈장 독립장 (1990) 안태현의 장남
최익형 건국훈장 독립장 (1977) 안태현의 장녀 안익근의 남편
조마리아 건국훈장 애족장 (2008) 안태훈의 처
안중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안태훈의 장남
안정근 건국훈장 독립장 (1987) 안태훈의 차남
안원생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안정근의 장남
안미생 건국포장 (2022) 안정근의 차녀
김인 건국포장 (1977)
건국훈장 애국장 (1990)
김구의 장남,
안미생의 남편
안공근 건국훈장 독립장 (1995) 안태훈의 3남
안낙생 건국훈장 애족장 (1995) 안공근의 차남
안성근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안태건의 3남
안경근 건국훈장 독립장 (1977) 안태민의 장남
김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안미생의 남편
김인의 부친
※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는 안태옥, 안태진, 안태현, 안태훈, 안태건, 안태민, 안태순 등 7남 및 4녀를 두었다.
}}}}}}}}} ||

[1] 음력 7월 11일[2] 대한민국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에 해당한다.[3] 음력 6월 1일[4] 익원공파 25세손 ○회(○會) 항렬.
(족보(1)족보(2)족보(3))
[5] 혼인 전에 사망.[6] 차남 김신의 손자이자 손자 김양의 아들,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7] 장남 김인의 아내이며 안중근의 조카다.[8] 상술했듯이 장남 김인의 아내 안미생의 큰아버지가 안중근이다.[9] 천도교 (동학)불교 (법명: 원종)개신교 (감리회)
과거 제도의 부정부패를 알게된 이후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1893년(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면서 동학에 입문해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하던 도중 탈옥하여 충남 마곡사에 은신하면서 불교에 귀의해 법명 원종(圓宗)을 수계(임명)받아 승려 생활을 하였고 1903년(28세 때) 무렵 부친 김순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여 여옥의 모친을 전도하기도 하였다. 김구는 감리회 신자로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0] 180cm 내외로 추정되며, 175cm로 알려진 조소앙보다 좀더 컸으며 178cm인 지청천 장군, 179cm인 여운형보다 미세히 컸다.#[11]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의 혈흔을 통해 확인되었다.#[12] 하얀 호랑이가 아니다(1음절이라 한자어 느낌이 나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범'은 고유어이다). 어감자체도 그런 느낌이 들고 김구의 별명 중에 호랑이와 관련된 게 있어 오해하기 충분하지만 실제 뜻은 조선 시대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던 백정 및 범부, 즉 일반 백성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아무리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로 만들 수 있다는 김구의 신념이 담겨있다.관련 기사[13] 안중근 의사의 집안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동학전쟁 당시였다.[14] 김구는 본래 양반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양반출신임에도 동학군에 투신했던 것부터 이미 조선에서는 깨어있는 축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김구 연구자 도진순 교수에 따르면 백범일지에서 단순 윤문이 아닌 이광수의 완전한 창작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분이 이 문화강국론이라고 한다. 일제의 "아름다운 나라" 담론의 영향이 짙다는 분석도 있다. 본인 저서에 넣어뒀다는건 김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소리로도 볼 수 있겠지만.[16] 단 김립 피살 사건은 자금의 부정사용 논란 의혹이 있다.[17] 조선은 건국초부터 국민들의 무장을 감시하는 경향이 컸기에 일반인이 도검을 소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폐도령 이전까지 도검을 차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을미사변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이 도검을 차고 있는 것은 일본인 시각에서는 이상한게 아니다. 문제는 조선인들에게는 의심을 증폭받을 수 밖에 없는 행위였다.[18] 단 김구는 받은 정치자금으로 광주 등에 '전재민촌' 같은 빈민을 위한 집을 수십 채 짓는 등 상당수 공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19] 삼의사의 의거를 지원하고 장제스와 협상하여 연합국에게서 독립을 약속받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20] 독립유공자 강홍모도 이 마을 출신이다.[21] 나라가 부패해 그렇다고 울분을 토했다는데 믿거나말거나. 사실 당시 조선이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건 사실이지만, 과거 시험 자체가 작금의 고시에 비유해도 좋을 만큼 세도가의 자제들도 꽤나 붙기 어려운 시험이었다.[22] 분단을 막으려 노구를 이끌고 1948년 평양 개최 '민족통일연석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당시 김일성한테 냉대만 받고 돌아오기도 했다.[23] 김구는 1940년대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기 대부분을 미주에서 보냈으며 임시정부 대통령직 태만, 세금 유용 혐의로 1925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하지만 탄핵 이후에도 임정에서 외교 관련 직위를 유지하며 김구와 연대 관계를 이뤘다.[24] 사실 김구와 이승만 둘이 대립하던 시기는 장덕수 암살 이후부터 김구 암살까지의 짧은 기간에 국한돼 있다. 임정에서 시작해 광복 직후의 시기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건 사적으로건 상당히 절친한 연대 관계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임정 현상유지론을 고수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반공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노선과 성향이 일치했고, 사적으로는 한 살 차이라 김구가 이승만을 "형님", "우남이형"이라고 불렀을 정도.[25] 단, 도진순 교수에 따르면 이 단락은 이광수의 창작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여담으로 이광수가 백범일지에 참가하게 된 연유에 대해 김구의 차남인 김신은 "춘원(이광수)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백범일지의)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라고 1986년 신동아 8월호에서 밝혔다.[26]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류가 2010년대를 거치며 아시아권을 넘어 2020년대에는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 드라마 킹덤, 오징어 게임선진국들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큰 호평을 받고 인기를 끌자 인용되는 일이 부쩍 늘었다.[27] "권력이나 정치이념, 자신의 이익만을 좇기 위해 암투를 벌이기보다 나라와 후세를 위해 진정으로 민족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세우자" #[28] 사진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여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걸려있었다. 특유의 심하게 떨리는 글씨체가 잘 드러나있다. 1938년 이운환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몸속을 비집고 들어갔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이후부터 그 후유증으로 심한 수전증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글씨체를 '떨림체'라고 말했으나, 본인은 '총알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본을 기념품으로 판매 중[29]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파라는건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거라 지금으로 보면 상당수 좌파 계열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범위의 개념이긴 하다. 작금의 민주당계 정당이나 해외의 상당수 리버럴계 정당들도 이 기준에선 최소 중도~중도우파.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저서에서 자긴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썼다.[30] 김립을 비롯하여 자금 부정 의혹이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임정 시절에 김구가 몰두했던 작업 중 하나가 다름아닌 다른 좌익 운동가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31] 멀리 갈 것도 없이 김구는 지청천, 김규식 등과 함께 우익계열 민족주의자 세력인 한독당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넓게 보면 범 우익계열 통합집단이지만, 그 실체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의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세력이었다.[32] 다만 당시의 임정 법통 논란은 임시정부만을 독립국가 수립의 주체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독립운동 세력과 공동으로 할 것이냐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임시정부 법통 논란은 건국절 논란과 연관이 깊지만 광복 이후의 임정 법통 논쟁은 "통일정부 수립의 주체"와 관련이 깊었다. 즉 당시의 임정법통 회의론은 임시정부를 깎아 내리려는 것보다는 임시정부 이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발언권과 참여 기회를 주자는 것에 더 가깝다.[33] 중화민국 정부는 이른바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중화민국의 수립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였다.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똑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을 원년으로 잡아 민국 연호를 썼다. 따라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썼다.[34] 원불교 역시 불법에 바탕한 종교로 초창기에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그러하듯이 종단으로써는 불교와 별개로 운영되는데 그 구분이 명확해진 것 자체가 한참 뒤의 일이다.[35] 接主, 교주에 이어서 교리를 전파하는 전도사의 개념.[36] 최기영 "백범 김구의 애국 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37] 조동걸,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38] 세례명은 베드로. 당시 10시에 명동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마친 서울감목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도 급히 경교장에 도착하였다.[39]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515쪽)[40] 심지어 신체 상태가 온전하다면 사산된 태아에게도 조건부 세례를 주는 종교가 천주교다. 물론 이때 그 세례가 유효하게 효력이 발생하였는지 여부는 하느님만 안다고 한다.[41] 2000년 개봉한 한국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이런 이미지가 돋보인다.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급진적인 무장투쟁에 반대하던 안창호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의열단의 주인공을 후원하던 김구와 의견 대립을 보이는 장면이 한 차례 나온다.[42] 대략 40세 이후로는 키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70대에 도달하면 줄어들기 이전의 키에서 2cm 정도 줄어든다고 봐야한다.[43] 현대의 190cm가 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된다.[44] 이 교과서는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식 교과서는 아니다.[45] 양윤모. "백범 김구의 '치하포사건' 관련기록 검토." 古文書硏究 22.- (2003): 271-296., 275쪽.[46] 대중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국가간)무장투쟁'이지 단순한 '테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사전적인 정의로 따졌을 때 독립군으로 전쟁한 거 아니면 다 테러고, 그런 의미에서 김구는 폭탄테러, 암살 등을 주력으로 활동한 아주 전형적인 테러리스트 맞다. 심지어는 독립운동가 본인들도 테러임을 잘 알고 있었다.[47] 다만 70년대 이후 특히 9.11 이후 테러라는 단어의 어감과 그 당시 어감이 같지는 않다.[48] 빨간 마후라로 유명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주역[49]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김구 문서의 가족 관계 부분을 참고했다.[50] 안미생과 김효자가 본가와 연을 끊은 이유 중 추측되는 이유가 60년대 말 안미생이 미국에서 재혼해 따로 1남 1녀의 후사를 두었기 때문. 김신의 유언에 따라 딸 김미와 사위 김호연이 몇년간 수소문하여 2024년 미국 뉴욕에 생존한 안미생의 가족을 찾아 안미생의 훈장을 전달함[51] 안미생은 1948년, 김효자는 1960년대 초 미국으로 떠난 후 집안과 연락을 끊었다.[52] 김효자는 60년대-70년대 사이 미국인과 현지에서 혼인하여 가계를 이었으며 현재 생존.[53] 김효자 본인이 고령으로 비행기를 탈수 없기에 대신 딸 부부를 보내 안미생의 건국훈장을 백범기념관에 기증함[54]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55]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신설 합당[56]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설 합당[57] 백범 김구 암살사건.[58]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한류를 통해 문화의 힘도 세상에 알리게 되면서 '남의 침략을 막을만한 강력(국방력)'이 가장 이루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59] 모 토크쇼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백범을 맡았을 때 박암 선생의 아성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고. 정작 이영후가 MBC에 처음 가서 고위 임원과 만나는 순간 '김구로구먼!' 소리를 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만큼 이영후에게 안성맞춤인 배역이었다.[60] 가수 조관우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61] 해당 역할은 캐스팅 과정에서 탤런트 이종원이 맡을 뻔했으나, 사극인 데다 연기력 부족으로 포기했다. 김상중 입장에선 아이러니하게도 첫 TV 출연이 앞서 말한 작품에서 윤봉길 역이였다.[62] 2006년 영화 타짜에서 너구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원로 연극배우인 조상건의 최초의 외도가 바로 그 작품이다.[63] 실제로도 의열단과 임정은 서로 다른 노선을 택해서 서로 디스하기 바빴지만, 김구는 의열단의 고문을 맞기도 하는등 독립을 위해 서로 최선을 다해 협력 했었다.[64] 예조프 역할인 다른 인물도 한명 더 있는데 바로 염동진, 이쪽은 아예 진짜 니콜라이 예조프와 서로 친하게 이야기 까지 나눴다.[65] 실제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전까지는 이승만을 형이라 부르는 등 이승만을 충직하게 따르는 편이었다.[66] 원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진영 인사는 이승만뿐이며 이마저도 구색 맞추기 수준인데 단독 초상화 없이 김일성, 영친왕, 의친왕과 같은 김정일 비스무리하게 생긴 공용 초상화 돌려쓰는 처지이다.[67] 여기 세계관의 미국은 대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협상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켰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뉴딜의 부재로 대공황 극복에 실패했고 생디칼리스트 잭 리드의 미노조연맹 CSA, 권위주의 포퓰리스트 휴이 롱의 미연합국, 쿠데타를 일으킨 더글라스 맥아더의 미합중국과 이에 반발하는 미태평양합중국, 이때다 싶어서 독립한 하와이와 캐나다에 의해 괴뢰화된 뉴잉글랜드로 연방이 갈가리 찢기고 개판이 된다.[68] 이후 이승만은 부질없는 미국 설득을 계속하며 미주한인사회를 이끌다가 미국 내전 이후 하와이에서 살해된다.[69] 김구 루트도 태평양 전쟁 시점까지 세력 없이 뻐기면 영국이 높은 확률로 연합국에 초대해주기 때문에 연합국 가입이 어렵지 않다.[7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의 주류 구성원을 차지하는 민족도 조선족으로 표기하고, 이는 양국을 소수민족으로 간주하기 위한 것이다.[71] 위키피디아는 특정 국가의 관영 매체가 아니며, 그 나라의 공식적인 입장 또는 주장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언어로 된 위키피디아를 그 언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편집할 수 있다. 현재는 누군가에 의해 조선민족(朝鲜民族)으로 변경된 상태다.[72] 사실 과거에는 이런 형태의 안경을 로이드 안경이라고 불렀다.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해럴드 로이드가 자신의 작품에서 시그니처로 쓰던 동그란 뿔테 안경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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