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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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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청해진 대사
장보고 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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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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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5대 상대등
장보고 | 張保皐[1]
파일:장보고 표준영정.jpg
1979년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 (상상화이다.)
출생
(음력)
780년대 후반 추정[2]
신라
사망
(음력)
841년 11월[3] 혹은 846년[4]
신라 청해진
재임기간
(음력)
제35대 상대등
839년 ~ 846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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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494><colcolor=#fbe673> 성씨 장(張)
별칭 아명은 궁복(弓福),[5] 궁파(弓巴)[6]
현대 호칭은 해상왕(海上王)
자녀 장씨
그 외 자녀들[7]
종교 불교
신장 장신[8]
직업 군인, 무역가
직위 청해진 대사(淸海鎭 大使)[9]
감의군사(感義軍使)[10]
진해장군(鎭海將軍)[11]
상대등(上大等)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와 당 장교 시절2.2. 신라 귀국 후 청해진 대사 시절2.3.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2.4. 사후 영향
3. 평가4. 대중매체에서5. 여담6. 관련 단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통일신라군인이자 한국사에 기록된 최초의 호족.[12]

2. 생애

2.1. 유년기와 당 장교 시절

본명은 이두로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표기되었는데 한국 고유어식으로 읽으면 ‘활보’ 가 된다. 여기에서 '-보'는 몇몇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을 특성으로 지닌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현대어에도 남아 있어서 꾀보, 먹보, 잠보 등의 어휘가 있다. 예시다. 기록에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나타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장보고가 을 잘 다루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당나라 생활 당시로부터, 본명의 활 궁(弓)자가 부수로 들어있는 베풀 장(張)자를 성으로 삼고, 복(福)을 두글자로 보고(保皐)라는 이름으로 풀어 중국식 세글자 이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13]

삼국사기》에서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문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보이며 골품은 수도인 경주의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므로 골품의 질서 안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14] 출신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장보고의 친구 정연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른 곳이 아닌 본인이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 인근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데 완도라는 지역 자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고향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을 개연성이 크며 당나라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정연이 '죽어도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청해진에 있던 장보고를 찾아왔다는 기록,[15] 문성왕장보고의 딸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대신들이 장보고가 해도(海島)인(육지가 아닌 사람)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도 그렇다. 이설도 있는데 장보고가 기병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신라 귀족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인다고 전쟁사 교양 서적을 여럿 낸 서영교는 단정하듯이 썼는데 통일신라에서 지금의 전남, 경남에 이르는 남해안 여러 섬에 목장을 다수 운영한 것은 맞지만[16]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목동 출신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증거가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한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가 장보고의 고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청해진이 있었던 지금의 완도군 장도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도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m의 장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6기의 무덤이 있고 목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장보고의 양친과 선대의 것이라는 민간 전승이 있으며 장보고는 반농반어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장도 바깥쪽 바다에서 고기잡이, 노젓기, 수영을 배우고 활과 창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번천문집》[17] 권6, 장보고⋅정년전

일찍이 동료이자 의형제인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의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18]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져 있었고 당나라는 번장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쓰기도 하는 등 이민족의 등용에 대해 꽤 개방적인 국가였다.[19] 당나라에서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들어간 장보고는 말 타고 창 쓰는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으며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20]으로 출세하기까지 한다. 무령군은 산동반도에 할거하며 당에 맞섰던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21]를 정벌하려고 만들어진 부대였는데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 진압에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모종의 일을 계기로 군을 그만두고 신라로 귀국했는데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이 있다. 장보고가 당에서 귀국흥덕왕을 만나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이름[22]을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1차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3]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연은 당에 남았는데 훗날 정연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한 후에도 장보고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장보고가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연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24] 이 시기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에 종사했고 당나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비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서는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서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에 장보고는 귀국했는데 805년 전후에 당나라로 넘어가 828년에 귀국했으니 20~30년만이었다.

2.2. 신라 귀국 후 청해진 대사 시절

828년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곧바로 서라벌로 가서 당시 임금이었던 흥덕왕에게 "당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당의 해적들을 막겠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고, 흥덕왕은 즉각 이를 허락한 뒤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내려 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이를 기점으로 서남해안의 상권 및 무역권을 장악한다. 장보고가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한 일대 사건인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진골 귀족들 간의 피튀기는 싸움으로 인해 왕권과 지방 통제력이 자연스레 무너지면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828년 당시 통일신라의 형편상 1만의 군사를 내어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25] 따라서 10,000명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 정부의 일부 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이지 않느냐는 추측도 있다. 만약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반대급부로 해적들을 아예 때려잡긴 했지만 앞의 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는 단순히 불법 군사 조직일 뿐이다.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을 정도. 더욱이 말이 좋아 사병이지 나라로부터 신분의 보장을 못받는 창칼잘쓰는 노비나 다를게 없었다. 이후 신라가 망하고 고려는 왕조가 세워지고 몇십년뒤 이런 식으로 세력을 형성한 호족들을 향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며 왕의 직접적 통솔을 받는 중앙군으로 편입되었다. 조선 역시 이러한 것을 기반으로 사병을 혁파했다.

그러나 10,000명의 병력이 원래 사병이라는건 학계의 통설이 아닌데, 무엇보다 이 병력을 사병이라고 적은 역사적 기록이 일절 없다는 것이 크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서의 기록에 보면 장보고가 정식으로 신라왕(흥덕왕)을 찾아가서 병력을 받아냈다는 것 밖에 나와있지 않는데[26] 그 병력이 사병이지 않냐는 것은 그냥 후대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사병을 먹이고, 입히는데는 엄청난 재원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 때 신라는 후삼국시대처럼 막장까지 치닫진 않은 상황이었다. 세금 받아 재원을 마련하는 국가인 신라가 형편상 10,000명의 군사를 내주기 어려웠다면 대체 일개 개인인 장보고가 무슨 수로 사병을 10,000명이나 거느렸다는 말인가? 서남해를 지배했다는 수달(능창)이 동원한 사병의 규모조차 겨우 500명에 불과했으며 규슈지역을 잔뜩 헤집어놓은 현춘신라구 해적함대가 2,500명[27],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병집단인 이성계의 가별초가 1,000명~2,000명에 지나지 않았다.[28] 그나마 이성계는 동북면(함경도)을 영주나 다름없이 지배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병도 아닌 후고구려군의 나주 공략시 병력이 2,500명, 후백제군의 나주 탈환전(910년)시 병력이 3,000명이다.[29] 그런데 아직 청해진을 설치하기도 전에 가지고 있던 사병의 수가 10,000명을 족히 넘었다면 장보고가 임금과도 견줄 수 있는 대호족 출신이란 말인데, 정작 사서인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고향과 아버지 및 조상에 대해 알 수 없다고 기록한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30] 오히려 삼국유사(권2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미천한 신분이라며 반대했다는 기록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현재 학계의 입장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영향으로 10,000명의 병사들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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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들을 소탕한 장보고의 함대[31]

아무튼 해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원래의 취지였던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고 나오며,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까지 발전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다. 838년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32]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일본인이 신라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 김정남(金正南), 박정장(朴正長) 등을 고용하여 배마다 배치해 동행시킬 정도로 신라의 해상 영향력이 제법 커져 있었다. 이 시기 중국 해안가에서도 신라인 집단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엔닌은 당나라 활동 중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또 장보고는 산둥 반도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건립했고 이 곳에서 신라, 일본 등에서 건너온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33] 이 적산법화원은 장영 등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맡았다고 전한다. 현대 코리아타운한인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던 셈. 적산법화원은 당무종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되어 중국에 남아 있다. 한편 장보고는 청해진과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에도 법화원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어떤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관세음보살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 사회 구성원은 거의 바다와 관계가 깊은 직업이었고, 당시 바닷사람과 관세음보살 신앙의 관계는 삼국유사 민장사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34]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들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셈.

장보고는 교관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장보고가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이란 인물이 매물사[35]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훈의 일정은 적산법화원[36]에 들러 장보고를 대리해 이를 관리하던 장영 등을 위로하고, 7개월 반 동안 중국 동해안의 주요 항구 유산포, 해주, 초주, 양주 등을 들러 무역 활동을 한 뒤 다시 적산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적산포는 장보고 무역선의 중국 측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동쪽의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장보고가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 했을 정도였기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규슈다자이후[37]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3.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국도(國都)에 들어가 반란자를 베고, 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번천문집》 권6, 장보고⋅정년전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년)
이렇게 청해진이라는 신라 중앙과는 유리된 특수한 환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경험이 쌓인 정예병력들과 막대한 재력을 다시 군사력에 투자하며 힘을 기르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기에 이르며, 더이상 중앙조정에서도 무시가 힘든 독립 군벌이 된 상황이었다. 결국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온 김우징을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군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삼국사기 및 신당서에는 바로 이 즈음에 정년이 당에서 귀국해서 장보고를 찾아온 것을 장보고가 맞이하여 잔치를 열고 있는 중에 서라벌에서 반란[38]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보고는 '네가 아니면 이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다.'며 정년에게 5,000명을 맡겨[39]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고 한다. 3월에 지금의 남원시인 남원경까지 쳐들어갔다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이후 5개월이 지난 838년 12월에 다시 출격해 달벌(대구광역시)에서 이찬 김흔,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부군 10만을 상대로 한 달벌대전에서도 대승을 거둬 병력의 절반 이상을 괴멸시키는 기염을 토했고, 이 소식을 듣고 별궁으로 도망친 민애왕을 추격해 시해하고는 우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길 의로움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난 비록 평범하고 미천하지만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신무왕의 부탁을 받은 장보고의 답변. 이후 그는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휘두른다.

그렇게 옹립된 신무왕 김우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40] 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신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 본인의 딸과 혼인하겠다는, 다시 말해 사돈이 되겠다는 것을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버젓이 실려 있다. 이는 신무왕으로서는 장보고와 사돈관계가 되어 연결을 단단히 함으로써 장보고라는 거대 세력의 힘을 앞세워 왕권을 높일수 있었고 장보고 또한 왕가 일원이 되고 왕가를 우군으로 삼아 청해진을 중심으로 친청해진 정책을 요구할 수 있었기에 윈-윈 약속이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기대와는 무색하게 그 신무왕이 약속을 지키기 전에 금방 승하하여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후임인 문성왕에게 앞서 신무왕과 했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8년(서기 846년)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이 무렵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원래 문성왕도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 장보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41]로 단념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미묘하게 다른데, 삼국사기상으로는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고, 삼국유사상으로는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고 했다고 한다. 즉 삼국유사의 장보고는 반란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세력을 일으키기 전에 신라 조정은 염장을 장보고에 보냈고, 염장은 장보고에게 가서 '제가 왕에게 원망이 있는데 당신에게 의지해 살려고 도망쳐 왔다.'고 전하게 했다. 장보고는 처음에는 '너희들 때문에 내 딸이 왕비가 못 됐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와?' 하며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염장은 '그건 백관들이 간언한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거든요?'라며 기어이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평소에 협객을 아꼈던 탓에 염장을 협객이라며 반겼지만, 그날 염장을 환영하기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장보고가 잔뜩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취해 있던 그의 목을 베어 암살해버렸다고 한다.[42] 이렇게 장보고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보고의 최후와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제11권 닌묘 덴노(仁明天皇) 조에서도 어느 정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장보고 사후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살짝 다른 부분인데[43], 상황을 보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보고 암살 사건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살짝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장보고가 죽은 후 장보고 휘하의 세력은 염장이 대신 차지하려 한 듯 보인다. 속일본후기의 해당 기록에서도 장보고의 부하가 일본에 가지고 간 물건들을 다시 찾아가려고 하는 상황을 다룬 기사다.

장보고의 사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에 기술된 기록과 일본 측이 작성한 기록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장보고의 사망 시점에 관해서도 계속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라 측 기록을 참고해 적었을 《삼국사기》에는 846년(문성왕 8년)에 암살당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841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어 삼국사기에서 나온 시기보다 5년 앞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당사국인 신라의 기록을 참고했을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높다고 볼 여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장보고 관련 기록 중 하나인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44]에 속일본후기의 기록과 아귀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고 일본 측의 기록이라고 해도 당대에 지어진 것이어서 신뢰도가 높다고 볼 여지도 있다는 점이 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다.[45]

2.4. 사후 영향

한편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 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없어지진 않았더라도 장보고 암살 당시 상당히 혼란에 빠졌던 것은 일본 측 기록 속일본후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으며, 그 외에 장보고가 죽은 뒤에도 자손들이 그 곳에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46]
13년(서기 851년)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끝내 851년 신라 조정에서는 청해진을 아예 완전히 없애버렸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을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청해진은 사라졌지만 장보고가 남긴 영향은 그대로 남았다. 학계에서는 장보고와 청해진이 후대 한국사에 남긴 영향으로 선종의 국내 확산과 중국 도자기 기술의 도입을 들고 있다. 우선 장보고가 교역했던 중국 저장 성 월주(越州) 지역의 자기인 월주요(越州窯)가 신라 시대 국내에서 제작된 흔적인 가마 터가 청해진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전남 서남해 강진, 해남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월주요 가마 터가 발견된 것에 대해 당시 중국 월주요의 제작 기술을 신라 국내에 도입해서 그것을 자체생산해 다시 수출하는 시스템을 구상한 것이 장보고였다는 설명이 따른다. 이때 국내에 도입된 월주요 기술이 훗날 고려청자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또 장보고 사후에도 서남해 지역은 당으로 가는 승려들의 출발지이자 도착 지점으로 쓰였는데, 서남해 지역에서 선종이 유행하게 된 것도 당시 장보고가 해적들을 평정하여 선종 승려들이 당으로 유학하러 가는 항로를 보호해줌으로써 선종 사상의 자유로운 전파와 세력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훗날 신라 말기에 일어난 호족들이 대부분 선종 승려들로부터 사상적인 배경을 얻었고 끝내는 호족 정권에 의해 신라가 무너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장보고는 후대의 한국 역사의 흐름에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공헌한 셈이다.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며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왕건이 바로 이러한 호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며, 심지어 그의 가문 역시 장보고와 같이 해상무역에 영향력을 가졌었다.

장보고는 다른 형태로도 신라의 멸망에 확실히 기여하게 된다. 청해진과 장보고 집단에게 상당한 트라우마가 생긴 후기 신라 왕실이 지방 기병군단 10정과 별도로 아예 서남해를 통할하는 방수군을 창설하게 되는데, 이 방수군 장교 집단만큼은 가급적 신라 왕실에 그 눌지 마립간 때부터 수백 년 넘게 정예병과 왕실 근위병을 제공해온 추풍령 및 조령 지역(충북 동부~경북 북부 일대) 출신들로 채웠다. 본디는 서남해 일대를 충성심 높은 원신라인들이 주축이 된 특별 부대들로 제어하고 혹시 있을 백제부흥운동도 막으려는 깊은 계산이었다. 그러나 훗날 출신과 능력을 인정받아 불과 20대에 서남해 방수군의 비장이 된 견훤이 다른 마음을 먹게 되면서 서남해 방수군은 엉뚱하게도 원신라 지역 출신 정예병들을 백제 부흥군으로 대거 끌어들이는 도관 역할을 하게 되고 만다. 장보고 집단을 제어하려고 창설한 서남해 방수군이 거꾸로 장보고 집단의 역할을 계승하게 되고 만 것. 게다가 이 청해진의 주민들을 사민한 벽골(김제) 역시 견훤이 북상하여 정도한 완산에서 매우 가까웠고, 견훤이 내건 반신라 기치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동인이 충분했다. 견훤 또한 장보고처럼 휘하 군세를 이끌고 서라벌을 함락하게 되는데 이때는 장보고 때마냥 왕위 교체만으로 일이 끝나지 않았다.

3. 평가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 군주
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47] 하버드-옌징 연구소 소장.[48]

당대에도 한중일 삼국에 영웅으로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자신의 문집 《번천문집》 중에서 따로 장보고와 정연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신당서》 편찬자 중 한 명인 송기 역시 당나라에는 곽자의와 장보고가 있었다는 식으로 자타공인 중국의 충신이자 명장곽자의와 비교하면서까지 장보고를 높이 띄워주었다.

거기다 김부식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을 평하는 과정에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용기도 드높고 뛰어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김유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을 했으며,# 장보고 열전은 일종의 '반역자 열전'인 열전 9권이 아니라 '명장 열전'인 열전 4권에 실었다. 즉 장보고는 오래 전부터 아주 훌륭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49]

장보고가 충신으로 발돋움할 수 있던 것은 실은 고려 왕조가 아닌 조선 왕조의 공이 컸다. 고려 왕조는 장보고를 상당한 무골이자 삼각 무역을 주도한 인물로 치켜세우며 명장 열전에까지 포함시키는 등 호평을 내렸지만 그를 충신이라고 하지는 않았다.[50] 반면 조선동국사략동국통감의 기록에서는 장보고가 반란을 진압하고 해적들을 소탕한 충신이라고까지 치켜세우고 있다.[51] 이것은 신무왕을 반역자라고 평했던 삼국사기의 평이 결정타인데, 고려 왕조의 경우는 실은 청해진보단 혈구진 문제가 컸다. 혈구진을 설치한 게 문성왕과 김양이기 때문. 정작 조선 왕조의 경우는 혈구진이 있는 강화 지역이 아닌 전라도 전주를 발상지로 삼아 일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결국 기존의 기록을 고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이자 국학자였던 안정복동국통감에 실린 최보의 사론을 빌어, 저서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데다,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맞겠다.'고 약속해 놓고 입 싹 닦았으니 당연히 열 받지 않겠냐.'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데 일조한 공신인 만큼 죄를 지었어도 공을 감안하면 죽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함부로 죽였다고 장보고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데 일조했던 김양이 장보고가 죽을 때 한 마디 변호하는 말도 해 주지 않았다며 장보고가 자기와 세력이나 공적이 대등한 것을 내심 꺼려서 그런 것 아니냐고, 어떻게 해석하면 장보고의 죽음에 김양이 배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52]

물론 현재까지는 그 직접적인 배후가 염장이라고 보는 사람이 더 많은 편이다. 다만 서로 이해 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던 서남계 호족이자 지방 세력가인 염장과 그 부하들과 경주 귀족인 김양과 그 귀족들이 모종의 결탁으로 죽였다는 카더라도 있다.[53] 염장은 청해진을 장악하기 위해서였고, 김양은 신라 고유의 골품제를 사수해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1년도 못 돼서 승하한 신무왕조차 사실은 김양에 의해 시해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신무왕은 정황상 종기로 인해 승하했을 개연성이 높고 김양이 장보고를 암살했다는 것도 암살 사건 직후 시중 지위에서 해임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관련이 없을 가능성도 꽤 있다.[54]

동국통감의 시각을 이어받아 신라를 대표할 대표적인 인물이자 최후의 인물로 장보고와 신무왕을 부각시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시각대로 장보고를 신라 안정의 위협으로 보는 시각도 꽤 있는 편이다.[55] 대체로 고려 왕조의 경우는 전 왕조의 인물들에 대해서 전 왕조와 차별화를 위해 크게 높은 평을 하지 않고 조선의 경우는 고려와 비교하면 고려 이전 왕조에 대해 나름 자유로운 평을 할 수 있기에 그런 평을 내렸던 것이다.[56] 아무래도 장보고처럼 인적 자원을 모은 세력은 고려 광종 시절 노비안검법으로 매우 큰 타격을 받은게 컸다. 하지만 정작 고려 태조부터 호족에 고려가 신무왕을 반역자라 비판하고 장보고를 나라를 위협하는 권신이라 비판하기엔 고려 태조부터 고려 숙종이 반역 문제에 자유로운지 의문이다.

환빠류의 고구려 정통론자들은 장보고가 고구려계이자 산동 지방을 장악했던 이정기의 후손인 이사도의 거사를 망친 김춘추급의 친당파라고 까기도 했다. 사실 그 이사도 또한 그다지 유민의식은 없었고 그냥 자신의 영역을 지키다 당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저 반란을 일으켰던 것 뿐이다. 애초에 그때 장보고는 그렇게 계급이 높은 장교도 아니었으니 반란진압의 주동자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 프레임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 역시 무열왕계에게 큰 타격을 입혀 무열왕이라고 불리는 김춘추 민족반역자설 프레임에 빌미를 제공한 헌덕왕인게 매우 컸다.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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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영화

4.3. 애니메이션

4.4. 소설

4.5. 게임

5. 여담

6. 관련 단체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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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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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보고의 한자명은 조금씩 다른데, 중국 측 사료인 《신당서》에서의 기록은 張保皐. 한국 기록은 으레 중국 기록의 표기대로 간다. 일본 측 사료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의 기록은 張寶高. 여하튼 모두 Po-k에 가까운 발음을 쓰려고 한 듯하다.[2] 장보고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 즈음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3]속일본후기》의 기록.[4]삼국사기》의 기록.[5]삼국사기》의 기록. 장(張)과 보고(保皐)라는 이름도 궁(弓)과 복(福)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6]삼국유사》의 기록. 사복불언 설화에서는 복(卜, 伏)과 파(巴)는 어린아이를 뜻한다고 적혀있다.[7] 《속일본후기》 제11권 닌묘 덴노(仁明天皇) 조에서 장보고의 자손들이 언급되는 걸 보면 문성왕의 차비가 될 뻔했던 딸 외에 자녀들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 기골이 장대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당시 신라인들의 평균키인 160cm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장보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국보 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은 등신상(等身像)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좌상의 앉은 키가 78cm인데 현대인의 '앉은 키 / 키'의 통계에 의할 때 이에 해당하는 키는 146c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9] 흥덕왕 시기 제수.[10] 신무왕 시기 제수.[11] 문성왕 시기 제수.[12] <역사저널 그날>에서 고려사 전공 이익주 교수가 한 말.[13]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식 한자 성과 이름을 쓰는 계층은 극히 한정적이었다.[14] 다만 지방 유력가인 호족들을 골품에 준해서 취급해준 사례(ex: 왕륭)가 있긴 한데, 어차피 장보고의 가문은 매우 한미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의미는 없다.[15] 물론 여기서 정연이 말한 '고향'은 완도 청해진이라는 세부지명이라기보다는 신라라는 나라 자체를 지칭한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할 때 대화한 상대가 당에 사는 풍원규였다.[16] 입당구법순례행기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7] 당의 시인인 두목이 쓴 책. 장보고에 대한 당대의 기록으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신라본기에서의 장보고 기록은 신라 측 기록을 인용한 것과 달리, 장보고 열전은 번천문집의 기술을 옮겨놓았다. 그래서 열전의 내용을 보면 '본기와는 다르다.'고 언급된 부분이 등장한다.[18]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당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갔다는 이야기는 2002년 서울무비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청해진 호랑이>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사실 신라의 살인적인 신분 제도를 생각하면 골품도 없는 그가 출세할 길은 당나라에라도 가서 군인이 되는 것 외엔 전무했다.[19] 절도사 가운데 이민족 출신으로 출세한 사람이 꽤 많다. 대표적으로 고선지, 부몽영찰, 이정기, 복고회은, 가서한, 안녹산. 특히 안녹산은 본래 이란계 민족들 중 하나인 소그드인 출신이다. 본명이 알렉산더인 유럽계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고 진짜 본명은 북인도인이나 이란인에게서 흔한 이름인 '로우샨'의 소그드어식인 '로흐샨'이다.[20] 일종의 장교. 하서절도사 휘하의 관직으로 1천에서 5천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이었다. 현재의 군 체계에 비유하자면 연대에서 여단급 병력을 지휘한 셈이다.[21] 이정기의 손자로 당시 그의 세력은 허난 성허베이 성을 연결하는 산둥성 지역을 장악해 강력한 지방 군벌로 성장한 상태였다.[22] '바다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의미.[23] 장보고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위인전이 이 설을 따랐다.[24] 해신에서는 장보고가 때려잡은 옛 고구려 유민 출신 군벌 이사도가 자기는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아 결국 당나라 장수 일을 때려치는 계기가 된다. 원작이 된 최인호의 동명 소설에서는 이정기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신라인으로서 고구려 유민과 싸운다는 설정 때문에 해신 방영 당시에는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고구려 죽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기도 했다.[25] 김헌창의 난이나 나중에 김우징의 쿠데타 때 병력을 보면 밑천 긁으면 가능하겠지만 쉽게 대뜸 내어줄 정도는 아니다.[26] 대왕이 장보고에게 1만 명을 주었다.(大王與保臯萬人)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27] 사료상 기록으로 현춘의 해적함대는 왕명에 의해 조직된 것이므로 사병이 아니라 그냥 신라 해군이었을 가능성도 많다. 근대 이전에는 사략함대와 해군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28] 이성계는 1361년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친병 1,500명을 동원했고, 1362년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친병 2,000명을 동원했으며, 1364년에는 기황후가 보낸 최유의 병력 10,000명을 토벌하는데 친병 1,000명을, 1370년 제1차 요동정벌때는 친병 1,600명을 동원했다. 이는 전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른 수 많은 전투 중 한번도 사병을 2,000명 이상 동원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별초의 병력을 1,000~2,000명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참고로 조사의의 난 때는 반란군이 10,000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이성계는 일개 고려의 지방호족이 아니라 조선의 태상왕이라 사병이 아닌 군대를 동원할 권력이 있었다.[29] 후백제와 고려의 병력은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점점 늘어나 920년 이후에는 만 단위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도 했다.[30] 장보고와 정연은 모두 신라 사람이지만,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31] 1975년에 박광진이 그린 장보고의 해상 활동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물론 그림 속의 갑주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을 참고한 것으로 고증에 맞지 않다. 사실 조선 갑옷이라고 보기에도 틀린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70~80년대 그려진 소위 민족기록화라는 것들이 대체로 고증이 엉망이다.[32] 천태종 승려로, 일본에서는 지가쿠 다이시(慈覺大師)로 더 잘 알려져있다고 한다.[33] 대표적으로 엔닌이 있다.[34]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가 《동방견문록》, 《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생각한다는 책인데, 어디까지나 일본과 라이샤워 교수 본인의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고, 한국에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대신에 《왕오천축국전》 또는 《표해록》을 넣는 견해도 있다.[35] 교관 선단의 우두머리.[36] 지금도 중국 산동성의 장보고와 관련된 유명 관광지이다.[37] 고대 일본에서는 제2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후쿠오카 근교의 관광지로 유명하다.[38] 김명이 희강왕을 주살하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것을 가리킨다.[39] 청해진을 창설할 때 군사가 10,000명이었다고 했으니 거의 자기 병력의 절반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40] 이런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 같은 직책들은 장보고 이전 신라에는 없었던 관직이다. 낮은 신분 출신 장보고에게 골품제의 규정을 초월하는 포상을 내린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삼국사절요에서는 삼국사에 의하면 장보고를 상신 즉 상대등에 임명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무왕 초기에는 상대등 혹은 그에 가까운 직위를 장보고에게 내렸는데 이후 다른 명예직으로 돌리면서 골품제에 따른 논공행상을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41] 첫째 왕비로 들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둘째 왕비로 들이겠다고 하는데도 반대했다.[42] 이와 유사한 경위로 최후를 맞은 인물로는 훗날 고려무신정권을 열어젖힌 이의방이 있다.[43] 물 건너가 소식으로 전해진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정사보다 낮을 수도 있지만, 반면 《속일본후기》는 장보고가 죽고 불과 몇십 년도 지나지 않은 9세기에 편찬된 기록인 만큼 먼 훗날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다.[44] 845년 7월 9일, 엔닌은 중국에서 청해진 병마사 직위에 있던 최훈과 만났는데 이 때 최훈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유와 관련해 "신라의 국난을 피해서."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직접 최훈과 만나서 그에게 직접 듣고 이를 적었을 테니 청해진 병마사가 나라에서 뛰쳐 나올 정도로 신라 내에서 큰 변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청해진 병마사가 도주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사실상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중앙 관군에 의해 진압된 것 밖에는 생각할 게 없는데 이를 근거로 841년에 청해진에서 반란이 터졌고 이 때 장보고가 암살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45] 실제로 예전 고구려의 경우이긴 하지만 안장왕의 암살과 안원왕 이후 벌어진 고구려 왕실의 혼란상이 《일본서기》에 전해오는데 학계에선 안원왕 이후 고구려의 왕권이 떨어지고 혼란이 가중되는 듯한 정황 탓에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46] 속일본후기 권11, 인명 천황 조와 9년(842) 1월 10일[47] 현재도 널리 쓰이는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든 인물이다.[48] 그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영어번역하면서 여기에서 등장하는 재당 신라인들의 역할에 주목했고, 자신의 논문에서 엔닌의 구법행을 도왔던 재당 신라인의 수장 장보고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에서 흔히 장보고를 부르는 수식어인 '해상왕'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49]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순신박정희가 띄웠으며 원균은 과하게 폄하되었다는 설이 있다. 박정희는 이순신을 어느 정도 띄웠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원래 띄워져 있었던 인물이다. 특히 이미 조선시대부터 충무공으로 시호가 내려졌으니 그 영웅성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그리고 원균은...말을 말자.[50] 그래도 장보고의 기록이 남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장보고를 대놓고 반역자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삼국사기의 장보고 열전 사론에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신경 썼다'라고 나와 있다.[51] 신무왕의 재평가도 동국사략동국통감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미 신라 하대기 최고의 성군으로 꼽았다.[52] 장보고 사후 문성왕은 김양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53] 드라마 해신에서는 이 설을 반영해서 신무왕은 물론 장보고마저 김양의 부추김을 받은 염장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 김양은 장보고가 죽자 군사를 풀어 청해진을 없애고 염장도 잔인하게 죽여버린다.[54] 더욱이 부각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유독 문성왕 때 반란이 들끓었는데 이것조차 반란을 빌미로 한 문성왕의 숙청극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55] 장보고를 호족의 선구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시기상으로만 보면 장보고가 죽은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방 통제력이 무너지면서 각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던 이들이 성주, 장군 등으로 스스로를 칭하며 독자적 루트를 밟았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 말도 틀린 평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56]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고려에서도 장보고를 명장으로 평하는 등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57] TNS미디어코리아측 조사는 닐슨보다 높다.평균 시청률이 30.8%, 마지막회 시청률이 31.9%.[58] 왕위계승분쟁이 시작된 이후 습관처럼 말한다. 결국 지키지 못하지만.[59] 실제로 유령섬 에피소드에서 장로가 전설의 제독의 초상화를 보여주는데 바로 장보고의 초상화였다.[60] 이 주인공은 무열왕계 후손이다.[61] 주인공은 이 자객에게 한번 패배한 적이 있고, 이 때 재대결하여 승리하지만 민애왕도 이미 죽었고 주인공 자신도 사적인 감정은 넘었기에 자객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준다.[62]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된다.[63] 범선 시대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음은 사망플래그나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유령선 전설은 대부분 이것 때문에 생겼다.[64] 가끔 공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공개 유물이다.[65] 원래 가키자키(蠣崎) 가문이었다가 5대 마츠마에 요시히로 때 마츠마에로 바꾸었다.[66] 신무왕 또는 문성왕의 둘째 왕비가 될 뻔했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기사를 끝으로 사서에서 사라진다.[67] 헌안왕과 장보고의 딸 사이에서 궁예가 태어났지만 846년 장보고가 반역 죄목으로 염장에게 암살당한 후 가세가 기울어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68] 모든 역사 기록에서 궁예의 사망 시점을 918년으로 잡고 있는데 845년생이 맞다면 73세가 되므로 그렇게 나이가 많아지는 편도 아니다.[69] 둘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문성왕의 차비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신무왕의 이복동생이었던 김의정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70] 수도에만 있는 게 아닌 소경에도 거주시켰다.[71] 신라 본토 2주, 가야 구지 1주 출신.[72] 고구려, 백제 구지 각 3주 출신.[73] 물론 옛 백제의 중심권역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정체성이 더 유지되었기에 후백제가 등장할 수 있었긴 하나 장보고의 고향은 백제 영토에서도 변방의 섬에 해당했다.[74] 실제로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려 했을 때도 수도의 귀족들은 미천한 외지인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해도인(海島人)이라고 깠지, 백제계라고 뭐라 하진 않았다.[75] 그보다 이전에는 특수작전용 소형 잠수정들 (코스모스급 잠수정, 돌고래급 잠수정)만이 있었다.[76] 이전에 있었던 돌고래급 잠수정같은 소형 잠수정 제외[77] 고려 시대의 승려라고 한다.[78] 출처 : 윤용혁 <삼별초 - 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79]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80] 신라의 원효 또한 일본, 중국, 인도에서 높은 평가를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으나 기념하는 기념관이 남아있는 인물은 장보고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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