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왕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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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0대 국왕 장수왕 | 長壽王 | |||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전경 | |||
출생 (음력) | <colbgcolor=#fff,#1c1d1f>394년 | ||
고구려 국내성 (現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 | |||
사망 (음력) | 491년 12월[1] (향년 97세) | ||
고구려 안학궁 (現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 |||
능묘 | 장군총(將軍塚) (추정) | ||
재위기간 (음력) | 고구려 왕태자 | ||
409년 4월 ~ 412년 10월 (3년 6개월) | |||
고구려 제20대 국왕 | |||
412년 10월[2] ~ 491년 12월 (79년 2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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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고(高) | ||
휘 | 거련(巨連, 巨璉) / 연(璉) / 신련(臣連)[4] | ||
부모 | 부왕 광개토태왕 모후 미상 | ||
형제자매 | ?남 중 장남[5] | ||
왕후 | 고조다의 모후 | ||
자녀 | 태자 고조다, 왕자 고공?[6], 왕녀 1명 | ||
태손 | 고나운 | ||
종교 | 불교 | ||
시호 |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북위: 강(康) | ||
연호 | 연수(延壽)(?), 연가(延嘉)(?)[7], 건흥(建興)(?)[8] | ||
작위 |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려왕 낙랑공[9], 동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주이군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10], 유송 | }}}}}}}}} |
충주 고구려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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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0대 태왕.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태왕들 중 한 명으로, 39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412년 10월 제20대 태왕으로 즉위하고 491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승하하며 79년 2개월의 기나긴 재위를 마쳤다. 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2. 시호와 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긴 장'(長), '목숨 수'(壽). 말 그대로 '긴 수명'이라는 뜻이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했고,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휘는 거련(巨連)으로, 단순 한자 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라는 뜻이다. 아마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인 듯 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허나 그때는 순우리말 이름을 여러 한자로 음차했기에 풀어 읽어서 '크게 잇는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11]
북위에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주기도 했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장수왕/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 한다. 고구려의 경우를 장수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 때 한 번 망했다 친 뒤 3대로 빗댄다면 큰할아버지·할아버지인 소수림왕-고국양왕이 1세대로 전연과 백제에게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고, 2세대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으로서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녔다면 3세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하고 이들이 남긴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넓어진 영토, 점점 강해지는 남북조 국가들, 고구려의 빈틈을 시시각각 찾는 백제와 신라, 가야, 왜를 사방에 두고 고구려의 위상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전성기를 연 장수왕은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12][13]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국내성 주변에서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남벌을 천명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14]
다만 광개토대왕 때 신하국으로 굴복시킨 신라와의 관계를 형제 관계로 재조정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 눌지왕이 반기를 들어 상황을 엎어버리는 바람에 신라가 완전히 세력권 밖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고구려의 강역이 청주와 세종을 지나 대전까지도 뻗어 있었는데도 신라는 소백산맥을 방패삼아 다름 아닌 신라 땅에 주둔한 고구려군에게 직접 배워온 각종 군사 지식을 활용하여 고구려에게 꽤 날카롭게 반격했는데, 도리어 장수왕 측에서 경계했을 백제가 취약하게 무너졌다.
한편으로는 요동을 놓고 조상들의 원수이던 모용선비의 후예인 북연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황제인 풍홍도 죽이는 등 요동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졌고, 중원의 남북조 국가들에게 양면외교를 시행하며 형식상의 조공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외교로 남북조, 유연과 함께 4강 체제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장수왕은 큰할아버지 소수림왕 시기부터 천천히 시작해 아버지 광개토대 때까지 오면서 만들어진 전성기의 고구려를 편하게 운영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했다. 하지만 탁월한 본인의 국정능력과 외교술을 활용하여 강력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왕권 강화, 밖으로는 주변국 장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조상들의 두 원수인 북연 황제와 백제 왕을 처단하였다. 본인도 장수하면서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을 향유한 왕이었다. 신라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아쉬움 외엔 모든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장수왕이 받은 중국 왕조들의 시호들과 지위들,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접들은 역대 한국사 군주들 중에서 당연히 최상위라고 할 만했다.
《동국통감》의 평가는 오랜 수명을 누려 나라와 군사를 부강시킨 훌륭한 왕으로 좋게 평가했다.
"장수(長壽)는 더욱 오랜 수명을 누리어 나라와 군사가 부강(富强)하였습니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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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위에 답례 사절을 파견하다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 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五年夏九月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하려다가 중단하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 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九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八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八年秋四月 남제가 왕을 책봉하다
六十八年秋四月 남제에 보냈던 사절이 북위에게 붙잡히다
六十九年 남제에 조공하다
七十二年秋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三年秋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三年秋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四年秋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五年秋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六年秋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六年秋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六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七年秋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七年秋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七年秋九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七十七年秋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八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八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九年秋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九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七十九年秋十二月 장수왕이 승하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의 거의 전부다.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북위에 대한 조공 기록만 43회로,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 기록이다. 덕분에 일부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공왕'이라는 별명도 있다.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정책이 드러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그보다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해진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글자수라도 채우기 위해 중국 사서의 내용을 옮겨 적어야 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건 《삼국사기》가 거의 500년쯤 뒤에 쓰여진 책이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는 고구려 후기와 관련된 사료의 대다수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 기록이 부족하면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당연히 중국측 사서의 기록을 모아서 내용을 채웠다. 당연히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장수왕 관련 기사야, 조공으로 기록된 외교 기사만 있을 수 밖에 없다.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대까지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다. 《신집》은 소수림왕 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인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 대까지가 상세하다.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덕분에 기록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 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관련된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측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흔적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
6. 장수
시호인 '장수'(長壽)라는 뜻처럼 매우 오래 산 임금이다.
고대인 기준으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한 아버지 광개토태왕과 무척 대비되는 부분이다.[15] 동시대 인물인 모두루도 '하늘이 이 나라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태왕께서 승하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6] 의학이 매우 발달한 21세기 현재에도 97세까지 생존하기는 무척 어려우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 수명, 전제군주제의 임금으로서 겪었을 업무 강도까지 고려하면 정말 오래 장수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157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금관가야의 수로왕, 11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태조대왕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적 모순점이 많고 신화적 기록이 가미되었거나, 혹은 다른 숨겨진 인물의 재위 기록이 섞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로왕이나 태조대왕과는 다르게[17][18] 장수왕은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실증적 재위 기록이 중국 사서에도 존재한다. 게다가 저 두 왕은 수명이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장수왕은 현실에서도 간혹 그 나이까지 장수하는 경우가 있기에 일말의 의혹 없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장수했고,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현대 기준으로 봐도 경이로운 건강인데, 오랜 재위와 건강으로 왕세자 놀리기가 거의 밈 취급을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도 장수왕과 비교하면 1년 단명했고 9년 짧게 재위했다. 게다가 장수왕은 남성이라는 수명적 핸디캡을 안은데다가 현대 의학의 도움조차 없이 저런 수명을 누렸으니 더더욱 복 받은 건강을 누린 셈이다.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 길다. 연령이 검증된 인물들 기준으로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 왕은 물론이고, 고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한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수왕보다 오래 산 지도자는 아직까지 없다.[19] 원래 후계자였던 태자 고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20] 손자인 문자명왕이 장수왕에게 보위를 이어받아야 했다.[21]
고대~중세 기준으로는 건강하게 잘 산 사람도 50~60대를 넘기기 쉽지 않다. 80세를 넘긴 조선 영조 시대의 신하들의 일대기를 보면 영조보다 늦게 태어나서 일찍 죽은 신하들이 적지 않은데, 근세에 해당하는 영조 시대보다도 훨씬 열악하던 완전한 고대 시절에 97세를 산 장수왕의 치세에는 신하들이 3대를 넘어 4대를 거쳐 장수왕을 섬겼을 수도 있다. 10~20대에 자녀를 보고 30~40대에 할아버지가 되는 일도 흔하던 고대 시절 기준으로 장수왕은 이미 죽음을 초월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사실 고구려 왕들은 집안 자체가 장수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장수왕을 제외하더라도 장수한 왕들이 많다.[22] 태조대왕, 신대왕, 차대왕 같이 믿기 힘든 긴 수명 때문에 신화적 가미 또는 기록 조작설이 의심되는 왕들을 제외하더라도[23], 미천왕, 고국원왕, 문자명왕 등 실질적 재위 기록의 교차 검증이 가능한 후대 왕들도 3~40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 안장왕, 안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등도 환갑쯤은 가뿐히 넘겼던 것을 보면 고구려 왕가 자체가 장수하는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람의 수명은 유전자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기 때문이다. 군주의 수명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요소이고 군주는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의 군주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의의를 갖는다.[24] 거기다가 장수왕은 이렇게 70년 넘게 재위했음에도 명군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오래 산 것도 모자라 그 기간 동안 명군의 행적만 보였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복 받은 일이다. 더불어 그의 이름값으로 인해 다른 장수하는 군주들에게도 그런 별명이 붙고 있다.
현재 21세기 기준으로 군주제인 국가들의 왕족들도 재위 및 생존에 있어서 장수왕의 기록을 깨기는 어려워보이며, 재위 및 생존에 있어서 장수왕의 기록을 깨는 국왕은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워보인다.
7. 여담
요양 고씨가 그린 장수왕의 영정.[25]
8. 대중매체에서
고구려 왕조에서 아버지 광개토대왕 다음가는 업적과 유명세를 자랑하고 상당히 오래 재위하여 고구려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의외로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데 수명과 재위기간에 비해 기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 듯 하다. 장수왕 본인이 부왕 때 미친듯이 팽창하던 국가의 왕자로 태어나 즉위한 뒤 대내외로 패권을 휘둘렀던 사기캐라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차라리 이 무서운 인물을 대해야 했던 백제나 신라의 입장에서 극강의 최종 보스 역할이면 모를까. 그래서 앞으로도 장수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아이러니하게도 38세에 사망했지만 대중매체에서 죄다 늙은 모습으로 나오는 아버지 광개토대왕과는 달리 장수왕 본인은 97세까지 장수했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죄다 젊은 모습으로 나온다.
- 2007년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는 기하의 소생으로 나오며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다보니 아역으로만 출연했다. 배역은 정윤석. 당시 이름은 아직이인데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해서 수지니가 아직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구려 영웅으로 등장한다.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쓰는데 모델링이 영 괴악해서 대머리처럼 보이며 투구뿔도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으로 착각해 헤이하치 컷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작 초상화는 중세 프랑스 왕족을 연상시키는 머리스타일에 곱상한 얼굴이다. 전차를 몰고 활을 쏘는 영웅 유닛으로 현혹술을 통해 적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덧붙여 다른 나라는 왕이 현혹술을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만 유일하게 태자가 현혹술을 쓰고 있다. 목소리가 나카오 류세이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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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에서는 491년 12월에 사망했다고 했지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위서》 권108-3 지12 예지3 태화15년조에 장수왕 부음을 알리는 사절이 도착한 다음, 이해 12월에 거애 조서를 내렸다고 한 기록이 있어 장수왕의 정확한 사망 시점은 12월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2] 당대 고구려인들에 의해 작성된 광개토대왕비에서는 412년 10월에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를 토대로 즉위년을 계산하면 413년 10월이 된다.[3] 요양 고씨에서는 시조를 장수왕이라 기록하고 있다.#[4] 《삼국유사》 기록.[5] 장수왕 재위 54년에 북위에서 혼인을 요청하자 장수왕이 딸은 이미 출가했다면서 동생의 딸을 대신 보내려고 했다가 중단되었다는 기록을 봤을 때, 장수왕은 동생이 1명 이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자명왕의 종숙으로 기록된 고승우의 아버지가 그 중 한 명이다. #[6] 〈충주 고구려비〉 기록. 고조다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7] 국보 119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연가'라는 연호가 안원왕, 영양왕 혹은 장수왕의 연호로 추정된다.[8]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불상인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쓰인 '건흥'이 바로 장수왕의 연호로 추정되기도 한다.[9] 使持節 都督營州諸軍事 征東將軍 高麗王 樂浪公[10] 使持節 散騎常侍 都督平營二州諸軍事 征東大將軍 高麗王 樂浪公. 중국 사서에는 송무제 유유의 치세때 기존 작호의 정동장군에서 "진동대장군을 더했다"고 했지만 진(鎭)+방위 장군호는 정(征)+방위 장군호보다 낮으므로, 정동장군을 정동대장군으로 격상한 것에 대한 오기로 본다. #[11] 다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고 한자식 이름과 고유어 이름이 혼용되던 때였다. 당시 고구려의 한문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었고, 특히 소수림왕대의 대대적인 개혁의 효과 중 하나였는지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광개토대왕대부터는(소수림왕의 다음 왕이자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동생이므로 세대가 다르진 않다) 모든 왕들이 한자의 뜻도 고려한 듯한 이름을 갖고 있다. 璉이라는 한자도 부수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좋은 뜻을 갖고 있다.[12] 우리역사넷[13] 장수왕의 외교정책: 고구려 “자주외교”의 두 얼굴[14]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평양 천도는 훗날 북방계 귀족(기존 국내성계로 대표되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 및 남방계 귀족(평양계로 대표되는 한반도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 사이에 앙금이 생겨 이내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결국은 연개소문의 쿠데타 및 집권과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씨앗이 되고 만다. 물론,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거점화 및 수도방어면에서 국내성보다 더 수월하다는 군사적 이점을 보고 추진한 것이므로 그러한 파생된 문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하늘이 기뻐하지 않아 왕이 일찍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으로 볼때 당대인의 시각에서도 광개토태왕은 일찍 죽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전근대 시대에 평균 수명이 낮았기는 하지만, 그건 유아기 사망률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고, 성인까지 성장했다면 4~50대까지는 사는게 보통이었다.[16] 괄호 안은 실제 기록은 아니며 문맥으로 판단한 사항이다.[17] 태조대왕은 121년 사망이 정설이며 53년이 아니라 77년에 즉위했다는 가설도 있다. 태조대왕은 6살에 즉위했기 때문에 77년 즉위가 맞을 경우 50세에 사망했으며, 오히려 24세 연하로 70세 추정의 차대왕과 42세 연하로 66세 추정의 신대왕이 장수했다고 보는 게 맞다. 초기 고구려의 왕은 오히려 30~40대 사망이 많은 편이고 장수왕 직계 중에서 장수가 명확한 사람은 신대왕과 고국원왕(60~70대. 심지어 전사했다)이라 장수왕의 장수는 이 둘의 영향으로 보인다. 오히려 장수왕 대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왕들의 장수만세가 시작된 걸 보면 장수왕이 후대 고구려 왕들에게 장수 유전자를 제대로 발현시켜 넘겨줬을 가능성이 높다.[18]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수로왕의 실제 재위기간은 3세기 중후반~4세기 극초반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장수한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19] 수명이 정확히 알려진 한국사의 정치 지도자 중 장수왕 다음으로 장수한 사람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 대통령이다(92세).[20] 이렇게 쓰면 고조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 같이 보이겠지만 현실은 고조다도 아무리 못해도 70살은 넘기고 죽었다. 즉 조다도 충분히 오래 살았는데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살았다(...).[21] 심지어 이 문자명왕조차 즉위 당시 50대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망 시점엔 80대로 상당히 장수했다.[22] 물론 광개토대왕처럼 요절한 경우도 없진 않지만, 이쪽은 워낙 많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건강이 쉽게 나빠진 경우이므로 예외로 쳐야 한다.[23] 그래도 20년쯤 뻥튀기되었어도 90세에 죽었다고 봐야 하는 태조대왕 등을 볼 때 장수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24] 민족문제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랫동안 재위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가 붕어하자 큰 혼란이 벌어졌던걸 보면..[25] 중국 하얼빈시 요양 고씨 집성촌에 보관되고 있다.# 이 영정을 그릴 때 요양 고씨 연장자 두 사람의 골상을 토대로 하얼빈 화가가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