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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3:00:28

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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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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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8대 국왕
신대왕 | 新大王
파일:산성하 전창 36호분 도면.jpg
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산성하 전창 36호를 그린 도면.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89년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179년 12월 (향년 90세)
고구려 국내성
능묘 고국곡(故國谷)[1]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8대 국왕
165년 10월 ~ 179년 12월 (14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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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고남무
왕자 고발기[5], 고발기[6], 고연우[7], 고계수[8]
시호 신대왕(新大王) }}}}}}}}}
"크도다! 신대왕의 덕택이!"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신대왕이 선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면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기뻐서 손뼉을 치며 외친 말.

1. 개요2. 생애3. 신대왕의 계보 문제4. 기타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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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8대 왕.

휘는 백고 혹은 백구였으며, 왕호 자체가 새로운 군주이다. 제6대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이복동생으로, 정사 《삼국지》에는 태조대왕 궁의 서자로, 《후한서》에는 태조대왕 궁의 손자이자 차대왕 수성의 아들로 나온다.

삼국사기》에 있는 외모 및 성격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호로 보거나 삼국사기의 평가로 보거나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임을 알 수 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제7대 차대왕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등 폭정을 일삼자 연나부[9] 출신의 명림답부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고백고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신대왕이었다고 한다. 차대왕 시절 태조대왕 때부터 시작된 정복 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했고 후한부여와의 쟁패에서 패배한 일도 없던 걸 보면, 차대왕이 무능해서 폐위된 게 아니라 이런 군주들이 흔히 그렇듯 군사적 능력은 만렙인데 정치력이나 친화력이 영 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중국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승하하고 차대왕이 즉위한 시점은 《삼국사기》의 146년보다 25년 이른 121년이다. 이에 따르면 차대왕의 재위기간은 121년부터 165년까지 총 45년이 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대왕 세력이 어떤 이유로 차대왕의 재위 기간 중 약 24년을 태조대왕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차대왕과 신대왕의 실제 출생 년도가 기록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
'을사년(165년) 국조왕(태조대왕)의 나이가 119세였는데, 두 선왕(태조대왕·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시해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차대왕의 치세때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나서 백고를 안심시킨 후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친척 형이었던 차대왕에게 미움을 산 듯하다.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욕심내자 백고(신대왕)가 은근히 간접적인 디스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반대파에게 가혹한 차대왕이 이걸 그대로 넘어갈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걸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나이가 《삼국사기》에서는 77세로 나오며, 친척 형인 차대왕처럼 매우 많은 나이에 옹립되었다.
신대왕이 사면령을 반포하다.
"과인은 외람되게도 왕의 친족으로 태어났지만 본디 임금으로서의 덕망이 없었다. 지난날 태조대왕께서 형제 사이에 우애있는 정치를 부탁했으나, 차대왕이 자손을 위해 물려준 계책을 자못 망가뜨렸다. 과인은 피해를 입을까 두렵고 안전하기가 어려워 여러 신료와 백성들을 떠나 멀리 도망쳐 숨었는데, 차대왕이 사망했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기에 이르니 다만 마음이 꺾여 매우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즉위하라고 권할 줄 생각했겠는가? 그릇되게도 보잘것 없는 몸으로 숭고한 자리에 있게 되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이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덕을 베풀어 멀리 이르도록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나라 안에 대사면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조-

신대왕 시기, 정치의 대부분은 국상에 오른 명림답부가 처리했는데, 왕은 명림답부를 신뢰했으며 그가 명재상이라 신대왕의 치세는 대체로 평안했던 것으로 사서는 기록한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의 고구려는 신대왕의 친정 체제로 돌입했으나 기록에는 특별한 정치적인 치적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도 당시 고구려의 좌보와 우보를 합쳐, 최고 관직인 국상을 만든 걸 보면 후대에 미친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재위 도중 후한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는데 그것이 좌원 전투이다. 명림답부가 죽은 이후 신대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승하했고, 이후 장남인 고남무가 왕위를 계승했다. 기록에 나오는 아들이 4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이 왕이 되었으나 동생인 연우가 제10대 이 되는 바람에 형인 발기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형제 간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이 벌어졌다.[10]

신대왕은 자식복이 영 애매한데, 슬하에 네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차남 발기는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나 적국(후한)으로 망명했고 아예 군대까지 이끌고 왔으며 3남 산상왕 연우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래도 장남인 고국천왕 남무가 명군이었고, 막내인 고계수도 개념인이라 자식농사를 완전히 말아먹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식이 한 명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차남인 고발기 말고도 숨겨진 리얼 첫째 고발기가 더 있었다는데[11], 이 녀석도 동생처럼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자 후한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의 동생 발기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여러 기록들을 대조해 보면 숨겨진 첫째 고발기는 기록상의 오류로 추정된다. 왕위 계승 실패 후 적국 망명 스탭을 똑같이 밟은 "동명이인"의 형제가 존재할 리가 없다. 또 한 번 《삼국지》의 병크가

3. 신대왕의 계보 문제

태조대왕, 차대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초기 왕계 문제의 중심에 놓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기년을 인상한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고고학적 건국 연대가 사서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에 세 임금의 나이와 세대 문제에 대해 설이 분분하기 때문이다.[12]

신대왕의 계보 문제는 고재사태조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3년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시해되는데, 유리명왕의 아들 고재사는 자신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7살 아들인 태조대왕을 왕위에 올리고 아내인 부여태후가 섭정을 하였다.[13] 121년 동생/서자인 차대왕이 태조대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았고, 148년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적자 또는 원자인 고막근을 죽이고 막근의 동생 막덕이 자살하며 차대왕의 아들 고추안이 태자가 되었다. 165년 차대왕이 시해되고 태조대왕의 동생/서자/손자인 신대왕이 즉위하고 신대왕은 179년 사망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나이는 모두 정상이 아니다. 태조대왕은 47년생, 차대왕은 71년생, 신대왕은 89년생인데,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수명을 배제하더라도 셋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많다. 셋의 아버지로 기록된 고재사가 태조대왕 즉위 당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사했음을 생각해보면, 차대왕은 몰라도 신대왕은 결코 재사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신채호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더 현실적이라 보고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서자라고 주장했으며, 고재사도 유리명왕의 아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많아서 아예 유리왕의 계보가 아닐 거라는 가설도 있다.

태조대왕의 실제 즉위 년도 문제도 있다. 태조대왕이 53년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학계에서는 98년 책성 순수 기사에서 중국이 당시 태조대왕을 "장성"이라 표현한 점을 들어 사실 태조대왕이 70년대~80년대 초 태생이며 실제 즉위 년도가 80년대~90년대 초라는 가설이 있다. 이 경우 모본왕부터 태조대왕까지 30~40년이라는 공위기가 생긴다.[14] 또 77년 10월,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쳤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부여인이라는 점을 들어[15] 실제로는 부여인인 태후가 이때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걸 은유했다는 가설도 있다. 이 경우 태조대왕은 70년생이 되므로 98년 중국이 "장성"이라 표현한 것이 맞아떨어지며(28세), 24년의 공위기가 생긴다. 즉위년 인하 가설을 사실로 가정할 경우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전부 실제 나이를 수십 년은 인하해야 하며, 태조대왕을 배제해도 신대왕의 생년은 수십 년의 인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16]

현재 신대왕의 가계에 대한 학계의 정설은 노태돈 교수의 지적대로 태조대왕의 방계 친척 동생이라는 것이다.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면 설령 적자가 아닌 서자일지라도 훗날 고구려인들이 굳이 아들을 동생으로 고칠 이유가 없고,[1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의 후반부와 -차대왕조-의 기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차대왕을 깎아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들인 후대 고구려 왕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친동생으로 삽입하고 태조대왕의 사망년도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늦추며 -태조대왕조-의 후반부에 장장 23년에 걸쳐 차대왕의 찬탈을 서술함으로써 차대왕을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보다 수백 년 앞선 중국측 기록인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승하하고 뒤이어 수성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여러모로 《삼국사기》의 기년은 정확도가 의심된다. 다만 신대왕 이후 고구려 왕들이 동명성왕 주몽을 선조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이상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아닌 방계 친척 동생이더라도 촌수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사서에 따라 태조왕통의 계보를 잇게 되면 제1대 동명성왕 - 제2대 유리명왕 - 고재사 - 제6대 태조대왕인데, 방계인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친척 동생이고 주몽의 후손이라면 태조대왕의 6촌 동생이 된다. 현대 한국에서도 4촌인데 40살 가까이 차이 나는 경우가 있는 만큼 6촌 형제 사이인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가 40살인 경우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18][19]

광개토대왕릉비 문제도 있다. 광개토대왕추모왕의 17세손이라 기록되었기 때문.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라 고려 중기에 편찬한 삼국사기보다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삼국사기에 나온 계보대로라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12대손)이 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맞춰 최대한 대수를 늘린 가정은 다음과 같다.[20]

여율이 실재했더라도 도절태자, 해명태자보다는 연하였을 텐데 도절태자는 1년에 사망해서 4년생인 대무신왕은 아들이 될 수 없고, 해명태자는 9년에 사망했고 대무신왕과 16살 차이지만 다름 아닌 유리명왕에게 죽어서 해명태자의 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여율이 실재했다면 대무신왕과 최대 15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아들도 동생도 될 수 있는 애매한 나이 차이지만, 여율을 인정할 경우 12~18년 재위한 것이 되는데(구려후 추 참조) 14년 대무신왕이 태자가 되고 18년 즉위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어느 쪽이든 생전 후계자로 확정할 정도의 관계는 맞았던 것 같다. 아니면 기록에 나오는 유리명왕의 정실은 왕후 송씨, 후처 화희, (나중에 이혼하지만) 후처 치희로 셋인데 무령왕의 어머니가 동성왕의 어머니보다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즉위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21] 여율이 해명태자보다 연상이지만 어머니의 지위가 낮아서 밀렸을 수도 있다.[22]

여율과 대무신왕의 관계가 어쨌든 중요한 건 재사의 항렬이다. 재사는 차대왕, 신대왕과 달리 가계에서 유리명왕만 강조되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니라 친척 조카일 수도 있다. 사서에 나오는 유리명왕의 아들은 도절태자, 해명태자, 대무신왕, 여진, 민중왕, 재사로 6명이다.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이 어려 대무신왕 다음 즉위한 민중왕모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민중왕은 대무신왕 사후 모본왕 대신 즉위한 입장이라 아들이 없었다는 보장은 없다. 재사가 유리명왕의 '후손'인데 '아들'로 소급 처리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23]

재사,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모두 유리명왕의 후손임이 강조되는 걸 고려하면 신대왕이 태조대왕과 항렬이 같아도 유리명왕 대에서 갈라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먼 친척 동생이었을 수도 있다. 재사가 유리명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나 증손자라면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6/8촌 형제가 되는데, 현대에도 이 정도면 충분히 40살 차이가 난다. 다만 태조대왕을 70년생이라 간주할 경우 재사가 늦둥이로 태조대왕이 재사가 60대일 때 낳았다면 유리명왕의 손자인 건 불가능하지 않으나 이 경우 112년생으로 인하한 신대왕이 유리명왕의 손자가 되기는 힘들기 때문에 태조대왕의 세대를 1~2대 인하해야 한다.[24]

신대왕이 차대왕의 아래 항렬은 맞지만 아들이 아니라 조카일 수도 있다. 121년 태조대왕이 죽자 차대왕이 즉위하는데, 148년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적자 또는 원자인 고막근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인 고추안을 태자로 삼았으며 이에 막근의 동생 막덕이 자살했다. 즉 태조대왕은 적자들이 있었으며 적자라고 따로 명시된 점에서 태조대왕이 서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 아닌 서자라도 막근과 막덕을 죽이는 건 자연스럽다는 소리다.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서자 또는 손자(차대왕의 아들)로 기록된 걸 고려하면 태조대왕의 적통인 막근&막덕 계통이 몰락하면서 태조대왕의 다른 서자인 ?-신대왕 계통이 차대왕계 다음 서열이 되었고,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고추가를 비롯한 차대왕의 직계를 배제하면서 신대왕이 즉위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에서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아들이나 손자가 아니라 재사의 아들이라 기록한 걸 고려하면 재사의 증손자이자 차대왕의 5촌 조카일 수도 있다. 태조대왕의 적자인 막근과 막덕은 차대왕에게 숙청당해서 차대왕 사망 당시 태조대왕의 적통은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차대왕을 시해한 상황에서 고추가를 비롯한 차대왕의 직계를 내세울 수는 없으니 태조대왕 형제의 후손인 신대왕을 내세웠다는 것이다.[25]

이 경우 신대왕의 가계에 유리명왕과 재사를 강조한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각각 1대가 아니라 2~3대인데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경우 신대왕이 너무 방계가 되기 때문에 나이 오류를 감수하고 재사의 아들이자 유리명왕의 손자로 인상했다는 것이다. 왕의 손자나 증손자보다 왕의 아들이 더 정통성이 있으니까.[26] 고구려 초기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처럼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소수림왕 대에 가서야 수백 년간 구전으로 내려온 가계를 정리한 걸로 보는데, 이 과정에서 존재감이 약한 왕족 한두 세대가 실전되었을 수도 있고 신대왕의 직계 후손이었던 소수림왕이 신대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사와 신대왕의 세대를 인상해 나이 오류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27]

이는 태조대왕도 마찬가지로 태조대왕이 유리명왕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자나 고손자일 경우 모본왕과 5~7촌지간까지 벌어진다.[28] 모본왕이 죽고 태조대왕이 즉위할 때까지 24년의 공백이 있었다 가정하고 그사이 이름 불명의 왕이 있었다면 재사보다 모본왕과 촌수가 가까웠을 것이므로 그 왕을 기준으로 하면 촌수가 더 가까울 수는 있지만, 그 왕의 직계가 아니라는 시점에서 방계임은 달라지지 않는다.[29] 아무리 태조대왕이 신대왕의 직계가 아니라지만 '태조'의 칭호를 가진 사람이고 모본왕이 시해당하고 대신 즉위한 왕이 너무 방계인 건 고구려 고씨 왕조의 정통성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30] 재사의 정통성 또한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에 재사까지 조작했다고 볼 수 있다.

17세손이 세대수가 아니라 단순히 왕계를 표기한 것이라는 가설도 있는데, 이 경우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관계가 동생이든 아들이든 손자든 상관없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19대 왕이기 때문에 17세손이라는 기록과는 또 맞지 않다. 폐위당한 왕들을 빼면 당대 고구려에서 폐위당한 왕들은 모본왕, 차대왕, 봉상왕으로 셋이라 16대가 되며 모본왕과 태조대왕의 53~77년 사이에 기록에 안 남은 왕이 한 명 있었고 그가 폐위가 아니라 자연사했을 경우 17명이 된다. 아니면 여율이거나.

신대왕의 정확한 가계가 무엇이든, 후대 고구려/왕조가 수명의 비현실성을 감수하고 유리명왕-고재사-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으로 족보를 편찬하게 만들 정도로 모본왕 사후(53년)부터 신대왕 즉위(165년)까지 벌어진 고구려 왕실의 혼란스러운 즉위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4. 기타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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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대왕 본기>
一年冬十月 신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행하고 명림답부국상으로 삼다.
三年秋九月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三年冬十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다.
五年 현도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정벌하다.
八年冬十一月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후한의 군대를 물리치다.
十二年春一月 신하들이 태자 책립을 건의하다.
十二年春三月 남무를 태자로 삼다.
十四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秋九月 국상 명림답부가 죽다.
十五年冬十二月 신대왕이 승하하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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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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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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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 왕실
 
 
 
 
 
 
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대무신왕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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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진
 
 
 
고호동 5대
모본왕
고재사
 
 
고익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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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고국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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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왕
고계수
 
 
고박위거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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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서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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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봉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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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
 
 
 
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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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고강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고익
 
 
 
 
 
고조다 고승우 공주 고승천
 
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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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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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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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왕
 
 
 
 
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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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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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성하 전창 36호 추정[2] 정사 《삼국지》[3] 《후한서》[4] 《삼국사기》[5] 장남. 그러나 기록상 모순이 보여 실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3남.[7] 4남.[8] 5남.[9] =절노부=연내부=제나부=북부[10] 장자계승 원칙은 선왕의 장자가 임금이 되는 것이 원칙으로서 사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방계라는 점에선 똑같은 그 밑의 동생 누가 계승하더라도 장자계승 원칙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로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형이 기분 좋을 리가 없어 분란이 발생한 것이다.[11] 이렇게 되면 고국천왕 고남무가 첫째가 아니라 둘째가 되며 형도 발기, 첫째 동생도 발기... 발기 패밀리가 된다.[12] 백제는 2세기 후반 임진강 유역에 고구려 적석총 세력이 정착했다 3세기 중후반 한강 위례성으로 남하해 토돈분구묘제 토착 세력과 연합해 한성백제를 건국했고 사로국은 한 특정 세력으로 위계체제가 편성되는 게 2세기 후반이다. 그런데 둘 다 기원전 1세기에 건국했다고 조작했다.[13]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왕위를 고사했으면서 고작 7살 아들을 앉힌 걸 보면 실제 이유는 따로 있던 걸로 보인다. 순치제의 즉위 과정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14] 당시 고구려가 아직 5부 체제였다는 점을 들어 아예 왕이 없었거나, 모본왕의 태자 고익이 왕이었는데 잘렸을 수도 있다.[15] 부여태후라는 명칭은 부여씨라는 뜻이 아니라 부여인이라는 뜻이다.[16] 삼국사기 기록대로 차대왕이 23세, 신대왕이 42세 연하가 맞을 경우 차대왕은 93~100년대 후반생이며 신대왕은 112~120년대 중반생이 된다.[17] 다만 백제/왕조가 후기까지 동생을 아들로 오기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개로왕-문주왕, 동성왕-무령왕, 위덕왕-혜왕. 다만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다) 고구려가 아들을 동생으로 오기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이 때문에 백제 후기의 왕계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가 더 정확하다.[18] 신라의 소지 마립간내물 마립간의 장남 눌지 마립간의 장손이자 내물 마립간의 장증손이었으나, 내물 마립간의 차남인 복호의 손자 즉 6촌 형인 지증왕의 자식뻘일 정도로 나이 차가 많이 났다.[19] 친척 동생 설을 채택할 경우 신대왕의 3남인 산상왕에 대하여 태조대왕의 증손자라고 서술한 중국 측의 기록이 충돌하는 건 여기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제와 고려의 경우에서 그랬듯 중국 측이 기년 파악은 정확해도 계보도는 엉성하고 틀린 경우가 잦아서 그것만 신뢰하기엔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20] 여율위서북사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왕으로 주몽의 아들 또는 손자(여달의 아들)이자 막래의 아버지로 기록된 인물인데, 여율이 유리명왕의 막내아들인 고여진이며 12년 왕망이 죽인 구려후 추가 유리명왕이고 18년에 죽은 게 여율이라는 가설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유리명왕이 고여진과 동년에 죽었다고 나오기 때문.[21] 동성왕은 진씨가 꼭두각시로 삼으려고 일부러 성인인 무령왕이 아닌 어린 동성왕을 즉위시킨 거지만, 무령왕의 생부가 개로왕이든 부여곤지든 무령왕의 어머니가 동성왕의 어머니보다 지위가 낮았던 건 맞다고 본다.[22] 대무신왕이 왕후가 된 지 1년 만에 요절한 송씨의 아들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송씨의 아들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화희에게 모욕당해 유리명왕과 이혼한 치희의 아들일 수도 있다. 여율을 송씨의 아들로 가정할 경우 기원전 17년생으로 21살 차이가 나며, 화희나 치희의 아들일 경우 최대 20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다만 여율이 치희의 아들이었으면 중국인의 자식이라고 위사나 북서에 기록될 만하므로 여율은 치희의 아들이 아니고 반대로 도절이나 해명이 치희의 아들일 수도 있다. 도절, 해명, 여율 모두 어머니가 달랐을 수도 있다.[23] 모본왕대무신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고재사의 항렬이 모본왕과 같을 경우 태조대왕은 모본왕의 조카뻘이 되며, 태조대왕의 즉위 년도를 모본왕 사후 24~40년 정도 인하해도 자연스럽다. 또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가능한 한 선왕의 아래 항렬의 즉위를 권장한 걸 고려하면 태조대왕이 7살에 즉위한 명분이 될 수 있다.[24] 15~16세부터 성인으로 간주해 10대 후반에 결혼하던 고구려의 풍습상 20 정도면 아버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태조왕을 유리명왕의 고손자로 잡고 태조왕의 증조부를 대무신왕보다 연하라 가정해도 빡빡하게 계산하면 가능하기는 하다. 또 대무신왕이 유리명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고 할머니가 왕후 송씨라면 기원전 11~10년까지 태조왕의 증조부를 인상시킬 수 있다.[25] 165년 당시 신대왕의 나이는 40대~53세로 태조대왕보다 42살 연하임에도 나이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더 윗세대를 즉위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26] 조선시대도 왕의 5대손부터 일반 양반으로 취급함을 고려하면 왕의 증손자는 왕족의 말석에 가깝다. 물론 조선 후기처럼 직계가 아슬아슬하다면 헌종의 7촌 숙부인 철종이나 철종의 족보상 7촌 조카인 고종처럼 왕위에 가까워지기도 했다.(고종의 조부 남연군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였다)[27] 견훤진흥왕의 5대손으로 기록되었지만 수세대가 누락된 걸로 추정되는 것처럼 세대의 구전 과정에서 존재감이 약한 조상 몇 명이 잊히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백제 부여씨도 주몽과 온조 사이 선조들의 이름을 꽉꽉 채워넣을 수 있음에도 주몽-온조왕-초고왕으로 중간이 허술한 걸 보면(온조왕과 초고왕 사이인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은 비류-고이왕계로 추정된다) 전승 실전이 심했던 모양이다. 근초고왕까지는 그렇다 쳐도 말기에도 정체불명의 무왕 사례가 있다.[28] 아무리 전근대 유교 문화권에서 8촌까지 한 집안으로 간주한다지만 그렇다고 7촌이 계승권자로서 가까운 건 아니다.[29] 이 경우 대무신왕의 다른 후손이나 민중왕, 도절태자, 해명태자, 여진의 후손을 고려할 수 있다. 도절과 해명은 요절한 데다 유리명왕이 죽음에 개입한 걸로 추정되기에 배제하고 대무신왕, 민중왕, 여진 계통이 더 유력시된다. 재사는 이들의 직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보다 서열이 낮았던 걸로 보이며, 공위기 끝에 이들이 몰락하거나 밀려나 재사가 최종승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30] 고구려는 중기부터 부자상속이 일반화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초기 고구려가 먼 방계의 즉위 어쩌고를 써줄 필요가 없다.[31] 기리영 전투의 결과로 임진강 유역이 완전히 대방군영역으로 확정된 게 원인으로 추정된다. 임진강 유역 다른 마한 소국들처럼 그냥 위나라 군현 에게 복종하기로 했다면 옮겨올 이유가 없으나, 백제국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낙랑 혹은 대방 출신 조선인들에 의해 충주 금릉동 마한 소국이 건국된 것도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한편 삼국사기상 기사로는 고이왕이 포로를 반환하고 사죄했다고 되어 있으나 고고학적 하남위례성 천도 시점보다 전인데다가 그 당시에 백제 군주가 고이왕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기년은 246년 직후가 맞지만 당시 군주는 개루왕 혹은 초고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2]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부여인' 해씨(解氏)가 이때 온조-초고왕계와 함께 남하한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데, 해씨는 부여의 왕성(王姓)에서 유래된 고씨와 부여씨의 종가지만 백제 해씨는 고고학적으로도 위치상으로도 부여에서 남하한 게 아니라 고구려에서 남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부여인'이라 서술된 점과 해씨라는 성을 고려할 때 백제 해씨는 졸본부여와 연관이 있었으며, 온조-초고왕계가 소서노의 후손이 맞다면 소서노를 매개로 한 인연이 있어 같이 남하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33] 사실 고구려 고씨가 해씨의 한자식 표기라는 점과, 부여가 멸망한 뒤 부여 왕족이 해씨가 아닌 여(餘)/서(徐)씨를 썼고 이게 백제 부여씨의 1자 축약 표기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부여 왕가의 분가인 고구려 왕가와 고구려 왕가의 분가인 백제 왕가와 대성팔족 해씨가 본질적으로 전부 성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