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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06-1호[A] 대한민국 국보 제306-2호[B] 대한민국 국보 제306-3호[C] 대한민국 국보 제306-4호[D] | |
<colbgcolor=#315288> 삼국유사 三國遺事 | Samguk yusa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A]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03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신림동, 서울대학교)[B]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대학교[C] |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D] | |
분류 | 기록유산 / 문서류 / 문서류 / 문서류[A][B]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C][D] |
수량/면적 | 3권 1책[A] 5권 2책[B] 2권 1책[C][D] |
지정연도 | 2003년 2월 3일[A] 2003년 4월 14일[B] 2018년 2월 22일[C] 2020년 8월 27일[D] |
제작시기 | 14세기 말[A] 조선 중종 7년(1512)[B] 조선시대 초기[C] 조선 태조 3년(1394)[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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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유사의 모습 |
2. 번역본
회원 가입 등을 하지 않고 볼 수 있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3. 특징
역사, 설화, 불교 관련 기록 등을 다양하게 수록하여 《삼국사기》와 더불어 중요한 한국 고대사의 양대 사료다. 초판 목판본은 전하지 않으나 현재 14세기 말 인쇄된 목판본이 국보 306호로 지정되었고, 1512년 경주에서 인쇄된 판본도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으로 나온 책으로는 《제왕운기》도 있지만, 이쪽은 역사시의 성격이 강해 보통 사서 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꼽는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면,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26]과 술이부작(述而不作)[27]의 원칙 아래 쓰인 책이다. 즉, 상식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기적 같은 기사는 거의 없고 역사기록에 충실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에서 곰이 마늘과 쑥만 먹고 버텨서 인간이 되었다는 대목은 현실적인 역사로서는 확실히 믿기 힘든 기록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받은 김부식은 이 신화를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았다.[28]
예외적으로 고주몽이나 박혁거세, 석탈해 등 삼국 건국시기 시조들의 신이한 기록들은 기록하긴 했지만[29] 삼국 건국설화 부분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그 원칙을 지킨 편이다.
반면 일연은 《장자》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스스로 불자였던 자신의 메세지를 설화에 적극적으로 담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배제한 한국 신화와 관련된 내용을 대폭 수록했다. 일연은 당시 널리 알려진 설화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품을 매개체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신화적, 설화적 기사를 넣다보니 현실적인 역사로 생각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만파식적 설화도 《삼국사기》에서는 역사 부분엔 안 쓰고 악기로서 소개할 때만 간단히 언급하며 '이런 말이 있지만 괴이해 믿을 수 없다'고 써 놓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전문을 수록해 놓았다.
《삼국유사》는 책의 구성도 〈왕력〉편을 제외하면 모두 이야기의 형식이다. 여러모로 공식적인 정사 역사서를 지향한 《삼국사기》와 달리 좀 더 제약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구성을 고른 편이다. 이야기 형식이다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실리기도 했다.
방대한 정보를 여러 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정리하여 지어낸 《삼국사기》와 달리, 일연 개인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면 내용의 양이 적고, 불교 설화가 내용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현실적인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이라도 대체로 《삼국사기》와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일 경우, 비교해보면 정확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보통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이 겹치는 사건이 있으면, 보통은 《삼국사기》가 정사이고, 《삼국유사》는 야사 정도로 본다. 《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책 이름의 '유사'도 '남겨진 사실', '버려진 사실'이란 의미이다. '사(史)'가 아니라 '사(事)'임에 주목하자. 즉 이전의 사서[30]에서 빠진 내용들을 기록했다는 뜻이므로 그 자체로 완결된 사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기존 문헌을 보완하는 역할의 책이라는 점을 제목에서부터 드러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유학자로서 불교적 관점을 상대적으로 배제했는데, 예를 들어 《삼국사기》의 〈열전〉에는 승려가 단 한 명도 없다. 이는 삼국 각국에서 불교가 얼마나 큰 기능과 역할을 했는지를 감안하면 대단히 의도적인 조치였는데, 일연은 이런 《삼국사기》의 구성에 불만을 가지고 《삼국사기》에서 모자라 보이는 부분을 보충하는 새로운 역사책을 지었다.
거꾸로 말하면,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역사를 유교적 현실주의적인 시각이 아니라 불교적인 세계관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 이미지에 그대로 대입하긴 곤란하다. 현대인이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현실주의도 기계적으로 기록한 사실이 아니라, 저자 김부식과 당시 주류사회의 성향인 유교적 합리성에 기초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삼국사기》만을 믿기는 어렵다.
단군신화부터 시작해 《삼국유사》에 실린 여러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설화들도 대부분 당대의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되려 《삼국유사》없이는 설명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료의 절대량 자체가 모자라다는 어려움을 겪는 국내 사학계 입장에선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역사를 취미로 다루는 역덕들은 종종 이야기 속에 현실적이지 못한 신화나 전설적인 요소가 좀 들어갔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역사적 가치 자체를 모조리 부정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대 민중들이 인식하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필터링 없이 담았기에 나름대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물론 그 자체를 역사로 보긴 무리수가 있는 것이 맞다.
그래도 그덕에 《삼국사기》에는 실리지 못한 한국 고유의 기록도 제법 담겨 있는 편인데, 가령 고수전쟁 당시 수양제가 고구려의 항복 의사를 밝힌 국서를 읽을 때 어떤 사람이 수양제가 타고 있는 배 안으로 쇠뇌를 가지고 사신을 따라 들어가 수양제의 가슴에 맞혔다는 기록도 《삼국유사》가 출처다.
역설적이게도, 설화가 많은 《삼국유사》는 정사 위주인 《삼국사기》에 비해 내용의 출처를 압도적으로 충실히 밝혔다. 예를 들면 이 내용은 《개황력》이란 책이 출처라거나, 이건 양지 스님 전기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고 친절하게 써 두거나… 그러나 이러한 참고문헌들이 일연이 살아있던 고려 말에는 존재했겠지만 수백 년이 지나며 다수가 실전돼서 내용의 신뢰성을 확인할 길이 없다.
3.1. 구성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이다. 관찬사서인 《삼국사기》에 비해 체제가 정연하지 않고 역사를 사건별로 나눠 관련된 기사를 사건의 발단-결말을 기술하는 기사본말체 형식을 띠고 있으나, 대체로 기전체의 변형에 가깝다.[31] 〈왕력〉은 〈표〉, 〈기이〉는 〈본기〉, 〈흥법〉 이하의 편목은 〈열전〉에 대응된다. 〈탑상〉은 기전체의 〈지〉에 대응된다고 볼 수도 있다.- 제1권:
- 제2권:
- 〈기이〉(紀異) 제2(신라 제30대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 제3권:
- 〈흥법〉(興法) 제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 〈탑상〉(塔像) 제4(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
- 제4권:
- 〈의해〉(義解) 제5(고승들의 행적)
- 제5권:
- 〈신주〉(神呪) 제6(이승들의 전기)
- 〈감통〉(感通) 제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 〈피은〉(避隱) 제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 〈효선〉(孝善) 제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4. 의의
방대한 구비문학 자료들을 기록해 남겼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주로 썼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부분도 있고, 직접 가보기 힘든 북방 지역의 설화가 빈약하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일연은 직접 금석문과 고적 등을 참고해 방대한 내용을 책으로 남겼다. 위의 문제점들도 국가가 아닌 승려가 집필했음을 감안하면 납득이 갈 만한 수준이다. 다만 《삼국유사》 자체는 국가 공인이 맞다. 편찬 작업을 일연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했을 뿐이다.역사적 기록과 함께 건국신화와 불교 관련 설화 등을 수록했다. 또한 현재까지 남은 책 중에는 단군 신화를 기록한 최초의 책이다. 단군 신화가 나오는 부분 첫머리에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는 구절이 있다. 일연이 《고기》, 또는 《단군고기》(혹은 《단군본기》)라는 책을 보고 참고했을 수 있지만,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추측일 뿐이다. 어쨌건 남아있는 책 중에서는 최초가 맞다.
인용된 서적이 꽤 많은데, 《가락국기》라는 것도 있다. 이 덕분에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금관가야의 왕가를 체계적으로 전했지만, 가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에 《가락국기》 내용을 더 많이 인용하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다른 기록이 모자란 상황이라 제 구실을 못한다. 후백제의 역사를 서술하면서는 《이제가기》라는 책을 인용했는데, 견훤과 관련된 가문의 가내 기록이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는 또한 〈구지가〉 등 한역 고대 가요와 신라의 향가 14수도 기록되어 있어 국문학사에서도 의의가 크다. 참고로 현재 남아있는 향가에서 《삼국유사》에 수록된 것을 빼면 균여(고려 초의 고승)의 〈보현십원가〉 11수밖에 남지 않는다. 그나마 〈보현십원가〉는 고려 초에 지어진 것이라 삼국시대와 다소 거리가 있고, 주제도 《화엄경》의 이론을 염불하듯이 부를 수 있게 노래로 만든 것이라 문학적으로는 평이 낮다.
또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 전설, 민담 등 백성들의 관점을 통하여 당시 지배층이나 사회 변화에 대한 피지배층의 시각과 민심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집필이다. 젊은 시절부터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듣고 자료를 수집해서 그의 나이 일흔 살에 쓰기 시작한 책이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처럼 정치적 외압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임금부터 일반 평민의 생각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는 책이다.
13세기 고려는 무신정권의 폭정에 이어 몽골의 침략이 30년 동안 이어지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다. 찬란했던 천 년 신라의 영화도, 높게 뻗어가던 고려인의 기개도 옛일이 되어 버렸다. 외세의 침입으로 국토는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수탈의 고통에 시달렸다. 끈질긴 저항이 이어졌지만, 그로 인한 중생들의 아픔이 너무나 컸다.
일연은 그처럼 엄혹했던 시절을 백성과 함께 했고, 그들에게 잃어버린 민족적 자부심과 문화적 긍지를 일깨워줄 필요성을 느꼈다. 승려라는 신분으로 젊은 날 전국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던 일연은 각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수집했고, 그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의 뿌리와 자부심,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불교적 이상세계를 담은 역사적 사건과 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던 감동적인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을 일연은 방대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써 내려갔다. 민족공동체의 정신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집결하고, 흔들리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다잡아서 새로 세울 수 있는 역사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볼 수 있다.
5. 비판
5.1. 사대주의
이 책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 이후에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비해 자주적인 내용을 많이 실었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오히려 원 간섭기에 쓰인 사서인지라 사대적인 내용은 《삼국사기》보다 훨씬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고 본다.신채호 또한 《삼국사기》의 아류[32]라고 비판했다. 그 밖에도 신채호는 《삼국유사》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을 중국의 제석(帝釋) 등으로 묘사한 것과 불교사상에 의거해 여성을 짐승의 화신이라 비하한 것, 그리고 신수두→ 진단, 환국(桓國)→ 환인(桓因) 등 우리 고래의 사서에 기록된 우리 전통의 문구들을 불교 용어로 바꾸거나, 단군이 1048년을 살았느니, 1908세까지 수(壽)를 누렸느니 라고 기록한 것들에 대해 매우 비판했다. 단군(壇君)은 결코 허상이 아닌 한국사에 있어서 실재했던 인물인데, 승려인 일연이 단군을 종교적으로 막연한 숭배대상이나 또는 신화적 허구의 대상으로 추락시켰다는 것이다.[33]
고려에 와서는 작자를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이다. 전하고 전하지 않은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양인의 저작이 단지 우수해서 이것만 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수도를 두고 북쪽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일파가 되고, 사대를 국시로 삼아 압록강 이내에서 편안하게 지내자는 유교도가 다른 일파가 되어 대치한 지가 수백년이 흘렀다. 불자인 묘청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학자인 김부식에게 패망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근본을 두고 삼국사기를 지었다. 따라서 동북의 양 부여를 빼어버림으로써 조선 문화가 태어난 뿌리를 먼지 땅에 묻고 발해를 버림으로써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에 던졌다. 이두문과 한자번역의 구별에 어두워 한 사람이 수 명이 되고 한 땅이 수 개의 땅으로 변하는 등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경우가 많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미기에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홀필렬의 위풍이 전국을 진경하여 황경과 제경 등의 명사가 철폐되고, 해동천자의 팔관악부가 금지되었으며, 유래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에 관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금지하여 유일하게 사대사상을 고취하는 《삼국사기》와 그 아류인 《삼국유사》만이 전할 수밖에 없었다.
ㅡ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中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수도를 두고 북쪽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일파가 되고, 사대를 국시로 삼아 압록강 이내에서 편안하게 지내자는 유교도가 다른 일파가 되어 대치한 지가 수백년이 흘렀다. 불자인 묘청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학자인 김부식에게 패망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근본을 두고 삼국사기를 지었다. 따라서 동북의 양 부여를 빼어버림으로써 조선 문화가 태어난 뿌리를 먼지 땅에 묻고 발해를 버림으로써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에 던졌다. 이두문과 한자번역의 구별에 어두워 한 사람이 수 명이 되고 한 땅이 수 개의 땅으로 변하는 등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경우가 많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미기에 고려가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홀필렬의 위풍이 전국을 진경하여 황경과 제경 등의 명사가 철폐되고, 해동천자의 팔관악부가 금지되었으며, 유래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에 관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금지하여 유일하게 사대사상을 고취하는 《삼국사기》와 그 아류인 《삼국유사》만이 전할 수밖에 없었다.
ㅡ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中
5.2. 불교 편향적인 저술
저자가 승려라 불교에 편향적이고, 도교와 유교를 낮게 보는 내용이 많다.[34]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를 '수나라 장군의 환생인 연개소문이 불교를 배척하고 도교를 들여왔기 때문'[35]이라고 설명했다. 일연 본인도 관련 기록들에 서로 상충하는 점이 있다고 적긴 했지만…[36]또한 〈흥법〉편에서 아도화상의 전기를 소개하는 내용 중 승려 담시의 전기를 소개하면서
"북위의 최호와 구겸지가 도교를 숭상하고 폐불정책을 밀어붙이다 병에 걸리고 북위의 왕 태무제(탁발도)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둘을 처형했다."
라고 적었다. 그런데 정작 한족 명문가 출신인 최호가 죽은 이유는 중화사상(화이론)에 입각해 선비족 출신인 북위 탁발씨(원씨) 황실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신천사도의 창시자인 구겸지는 최호와 손잡고 북위 황실에 도교를 널리 퍼뜨리긴 했지만, 불교를 싫어하던 최호가 폐불정책을 밀어붙이자 최호를 꾸짖으며 불교를 옹호한 사람이었다.[37] 그리고 태무제 역시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죽을 때까지 불교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38] 북위에서 불교가 다시 흥성한 때는 태무제의 뒤를 이은 남안은왕 탁발여 시기로, 그가 호불 성향의 군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중국 불교가 국가 권력과 야합하는 경향을 더욱 가속하여 결과적으로는 중국 불교가 권력과의 야합으로 부패하는 것을 부추켜 긍정적인 발전에 악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삼국유사》 내용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설화들도 불교와 고승들과 관해 불교를 옹호하는 신이담으로 국한되었으며, 일연 본인이 직접 답사하지 못한 북방계 설화나 구전되던 무가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저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교적 시각에 입각해 불교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저술하면서 불교 내용을 전부 제외시킨 《삼국사기》와 달리, 불교에 관해 상세히 수록한 《삼국유사》가 존재했기에 불교를 뗄레야 떼 놓을 수 없는 삼국의 역사가 보다 충실해졌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가야 한다.
6. 기타
- 피휘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심지어 단군조선 대목에서는 요순시대의 '요' 임금(제요 도당씨)을 고려 제3대 정종(왕요)에 피휘하여 '고' 임금으로, 주나라 무왕은 고려 제2대 혜종(왕무)에 피휘하여 '호왕'이라고 기록했다. 그 유명한 '여요동시'를 '여고동시'라고 쓴 대목이다. 이는 그야말로 고려의 자주성이 드러나는 표현으로 자국 왕명의 피휘를 위해 중국의 유교 성인이자 천자의 이름을 건드린 것이다.[39] 물론 조선시대 간행본들은 이를 철저하게 지키지 않아 판본별로 시대상을 파악할 수도 있다.
- 《삼국유사》에서도 오늘날의 용법과 마찬가지로 단군 조선을 '고조선'(古朝鮮)이라고 칭했다. 물론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던 시기는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기 전이라서 근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한 오늘날의 용법과 그 의미는 다르며, '오래 전의 조선'이라는 의미로서 위만조선보다 옛날임을 나타낸 것이다.
- 신라의 역사서이자 현재는 소실된 《국사》라는 사료를 인용했다.
- 〈김현감호〉가 처음 기록된 책이다.
- 《삼국유사》가 일제강점기에 조작되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환빠들도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다. 이들은 《삼국유사》 중 환인(桓因)이라는 글자가 환국(桓囯, 國의 약자)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근거로 든 1512년 정덕본에서 국(國) 자는 모두 정자로 기재되어 있기에 저 부분만 약자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1452년 이선제가 《삼국유사》를 읽고 올린 상소문[40]에도 환인(桓因)으로 적혀 있다. 즉 인(因)의 오자인 것이다. 애초에 '환인'의 주석에는 '謂帝釋也'(제석을 이른다)라고 적혀 있다.
- 종종 삼국유사 권제3 흥법 제3 원종흥법염촉멸신조 이차돈의 순교 대목에서 "비가 내리는 데 이어 곧은 나무가 부러져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울부짖었다." 하는 기록을 인용해 삼국시대 한반도에 원숭이가 자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1] 그러나 삼국유사는 13세기에 쓰여진데다가 단군 신화같이 실제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려운 각종 설화등도 기록한지라 해당 내용을 원숭이가 자생했다는 근거로는 부족하다. 만약 정말로 원숭이가 한반도에 자생했다면 삼국사기[42]나 고려사 등 정사에는 원숭이가 자생했다고 볼 만한 기록이 전무한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으로 원숭이가 자생했다면 인간이 원숭이를 사냥했다거나 서식지를 파괴했다는 식의 원숭이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삼국유사의 해당 구절 외에는 일절 찾아 볼 수 없다.[43] 그리고 있었다고 가정해도 이후로 원숭이가 어떻게 멸종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44]
- 2013년에 군위군이 경북대와 계약하여 '삼국유사 건강체조'를 만들었다. 지역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산물이지만 의외로 체조로는 상당히 괜찮다.
7. 외부 링크
8. 국보 제306호[A]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충렬왕 7년(1281)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삼국유사》권제3~5권까지의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인데, 푸른 비단의 표지 위에는 큰 글자로 '삼국유사 (三國遺事)'라 씌어 있고, 작은 글자로 '을해(乙亥) 석주(昔珠)'라고 적혀 있다. 본문은 책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내용이 손상된 경우는 보사(補寫)되어 있다. 앞부분 6장이 결락된 권제3은 50장, 권제4는 31장, 끝의 4장이 결락된 권제5는 26장으로 모두 합하여 107장이다.
한편, 고려 왕들의 이름에 대한 피휘(避諱: 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 대상자, 이를테면 '융(隆, 태조의 아버지)'을 '풍(豊)'으로 대치한 것과 '무(武, 혜종의 이름)'를 한획 생략한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의 대상자에 피휘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내용 면에서는 정덕본의 여러 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 7년(1512)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 보다 앞서 14세기말(조선초)에 간행된 현존본 《삼국유사》 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조선 초기 서지학 연구는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책은 《삼국유사》권제3~5권까지의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인데, 푸른 비단의 표지 위에는 큰 글자로 '삼국유사 (三國遺事)'라 씌어 있고, 작은 글자로 '을해(乙亥) 석주(昔珠)'라고 적혀 있다. 본문은 책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내용이 손상된 경우는 보사(補寫)되어 있다. 앞부분 6장이 결락된 권제3은 50장, 권제4는 31장, 끝의 4장이 결락된 권제5는 26장으로 모두 합하여 107장이다.
한편, 고려 왕들의 이름에 대한 피휘(避諱: 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 대상자, 이를테면 '융(隆, 태조의 아버지)'을 '풍(豊)'으로 대치한 것과 '무(武, 혜종의 이름)'를 한획 생략한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의 대상자에 피휘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내용 면에서는 정덕본의 여러 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 7년(1512)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 보다 앞서 14세기말(조선초)에 간행된 현존본 《삼국유사》 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조선 초기 서지학 연구는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9. 국보 제306-2호[B]
현존하는 《삼국유사》 완질본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되어 정덕본(正德本)이라 통칭한다.
《삼국사기》 정덕본과 같은 시기에 개각이 되었으며 경주부윤 이계복이 발문을 썼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은 다른 데서는 간행된 적이 없고, 오직 본부(경주부)에만 판이 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 판이 깎이고 상해 한 줄에 겨우 4~5글자만 읽을 수 있는 정도다. 다행히 성주목사 권주(權輳)가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완본을 구해주었기에 기쁘게 받아 여러 읍에 나누어 주어 새기게 한 뒤 돌려받아 간직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고려말의 승려 일연(一然)이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지은 삼국시대의 역사서이다. 체재는 5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왕력〉은 삼국과 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고, 〈기이〉는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첫 머리에 이 편을 설정하게 된 이유를 밝힌 서문이 있다. 또 〈흥법〉에는 삼국 불교의 수용 과정과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하여 신라 고승들의 전기, 〈신주〉에는 신라 밀교(密敎) 승려들의 신비한 행적, 〈감통〉에는 불교 신앙의 신비한 감응(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불교 설화에 관한 서적이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현재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고, 향가를 비롯한 고대 언어 관련 자료들과 고대 불교미술 관련 내용들이 많이 실려 있으며, 또 화랑도와 관련된 기사들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대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서이다.
규장각 소장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목판본으로,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부른다. 현전하는 완질본 중에서는 간행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일한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 소장본은 결장(落張)이 없는 유일(唯一)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 중에서도 인출 시기(印出時期)가 가장 빠른 판본으로 평가된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왕력〉은 삼국과 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고, 〈기이〉는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첫 머리에 이 편을 설정하게 된 이유를 밝힌 서문이 있다. 또 〈흥법〉에는 삼국 불교의 수용 과정과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하여 신라 고승들의 전기, 〈신주〉에는 신라 밀교(密敎) 승려들의 신비한 행적, 〈감통〉에는 불교 신앙의 신비한 감응(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불교 설화에 관한 서적이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현재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고, 향가를 비롯한 고대 언어 관련 자료들과 고대 불교미술 관련 내용들이 많이 실려 있으며, 또 화랑도와 관련된 기사들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대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서이다.
규장각 소장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목판본으로,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부른다. 현전하는 완질본 중에서는 간행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일한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 소장본은 결장(落張)이 없는 유일(唯一)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 중에서도 인출 시기(印出時期)가 가장 빠른 판본으로 평가된다.
10. 국보 제306-3호[C]
《삼국유사》는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년(충렬왕 7)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국보 제306-3호 《삼국유사》는 조선 초기 판본으로, 신라·고구려·백제·가야 및 통일신라·후고구려(고려 포함)·후백제의 간략 연표인 〈왕력〉(王曆)과 함께 고조선~후삼국의 역사·문화적인 사실을 기술한 〈기이〉(紀異)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총 5권 중 권1~2권만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본으로서 결장(缺張)이 없는 완전한 인출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국보 제306-3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에 간행된《삼국유사》(壬申本) 중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를 보완하고 현존하지 않는 인용 문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미 지정된 국보 제306호(개인소장)와 제306-2호(서울대 규장각 소장)와 비교해보아도 대등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므로 2018년 2월 22일 보물(보물 제1866호)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국보 제306-3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에 간행된《삼국유사》(壬申本) 중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를 보완하고 현존하지 않는 인용 문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미 지정된 국보 제306호(개인소장)와 제306-2호(서울대 규장각 소장)와 비교해보아도 대등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므로 2018년 2월 22일 보물(보물 제1866호)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11. 국보 제306-4호[D]
삼국유사 권 5 |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는 부산 범어사 소장본으로 총 1책이며, 전체 5권 중 권4~5만 남아 있는 서책이다. 범어사 초대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吳惺月, 1865~1943)의 옛 소장본으로 1907년경 범어사에 기증된 것으로 전해진다. 표지는 후대에 개장(改粧)되었으나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삼국유사》는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년(충렬왕 7년) 편찬한 책으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의 역사‧문화에 관한 설화 등을 종합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처음 간행한 시기나 간행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아 일연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 간행했다는 설,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경의 무극(無極) 간행설, 그리고 1394년(태조 3년) 경 경주부사 김거두(金居斗)가《삼국사기》를 중간(重刊)하면서 함께 간행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려시대 판본은 알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1394년 경 판각된 조선 초기 판본이다.
지금까지 같은 계열의 판본으로 알려진 2종의 지정본(국보 제306호, 국보 제306-3호)과 같이 범어사 소장본은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지만 1394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印出)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 지정본에서 누락된 제28~30장을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1512년(중종 7) 간행본의 오탈자를 확인할 수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에 대한 교감(校勘)과 원판(原板)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 역사적ㆍ학술적 중요성이 크다.
아울러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권4~5는 서체, 규격, 행간(行間) 등에 있어 후대에 간행된 1512년 판본과 밀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부터 판본학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묵서된 음독 구결(音讀口訣)과 한글 현토(懸吐)가 있어 구결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는 점 등 우리나라 고대 언어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는 현존하는 동종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빠른 인출본이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기타 지정본의 훼손되거나 결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 우리 고대의 종교・역사・지리・문학・언어・민속・사상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사료의 집합체라는 인류문화사적 의의를 감안한다면 국보로 지정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유사》는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년(충렬왕 7년) 편찬한 책으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의 역사‧문화에 관한 설화 등을 종합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처음 간행한 시기나 간행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아 일연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 간행했다는 설,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경의 무극(無極) 간행설, 그리고 1394년(태조 3년) 경 경주부사 김거두(金居斗)가《삼국사기》를 중간(重刊)하면서 함께 간행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려시대 판본은 알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1394년 경 판각된 조선 초기 판본이다.
지금까지 같은 계열의 판본으로 알려진 2종의 지정본(국보 제306호, 국보 제306-3호)과 같이 범어사 소장본은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지만 1394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印出)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 지정본에서 누락된 제28~30장을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1512년(중종 7) 간행본의 오탈자를 확인할 수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에 대한 교감(校勘)과 원판(原板)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 역사적ㆍ학술적 중요성이 크다.
아울러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권4~5는 서체, 규격, 행간(行間) 등에 있어 후대에 간행된 1512년 판본과 밀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부터 판본학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묵서된 음독 구결(音讀口訣)과 한글 현토(懸吐)가 있어 구결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는 점 등 우리나라 고대 언어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는 현존하는 동종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빠른 인출본이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기타 지정본의 훼손되거나 결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 우리 고대의 종교・역사・지리・문학・언어・민속・사상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사료의 집합체라는 인류문화사적 의의를 감안한다면 국보로 지정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12. 보물 제419-2호[49]
보물 제419-2호 《삼국유사》 권2는 권2(〈기이〉)만 있는 잔본 1책으로, 본문 49장 가운데 17~20장의 4장은 영인하여 보완하였는데, 표지는 후대의 개장으로 만자 문양이며 장정은 5침의 홍사로 맨 선장본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앞 표지 이면 중앙에 "황마중양월매득 니산남씨가장"이란 묵서가 있고 , 그 옆에는 "황마이양월매득 개일장"이란 부기가 있으며 뒤 표지 이면에는 "니산장"이란 묵서가 있어, 무오년 2월에 남씨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보면 전체 49장 중 24장은 광곽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1cm 이상 길고, 변란은 정덕본이 쌍변과 단변이 혼재되어 있는데 반하여 모두가 쌍변이다. 내용 면에서는 고려 왕들의 이름자를 피해 쓰는 벽휘가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간행본임을 알 수 있으며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의 오류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게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가장 귀중한 사서 중의 하나이다.
앞 표지 이면 중앙에 "황마중양월매득 니산남씨가장"이란 묵서가 있고 , 그 옆에는 "황마이양월매득 개일장"이란 부기가 있으며 뒤 표지 이면에는 "니산장"이란 묵서가 있어, 무오년 2월에 남씨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보면 전체 49장 중 24장은 광곽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1cm 이상 길고, 변란은 정덕본이 쌍변과 단변이 혼재되어 있는데 반하여 모두가 쌍변이다. 내용 면에서는 고려 왕들의 이름자를 피해 쓰는 벽휘가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간행본임을 알 수 있으며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의 오류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게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가장 귀중한 사서 중의 하나이다.
13. 보물 제419-4호[50]
보물 제419-4호 《삼국유사》 권3~5는 《삼국유사》의 권제3~권제5까지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3의 첫부분 10장, 권5의 18장 후면부터 31장(발문)까지 모두 23장이 결락되었다. 표지는 개장한 것으로 홍사를 이용한 오침안장이며, 고 육당 최남선의 소장이었다가 후에 고려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에 경주에서 간행한 책판에서 인출한 것인데 국내에 현존하는 정덕본 《삼국유사》 가운데서 규장각본과 함께 비교적 초기에 인출한 선본에 속하며, 중종임신본의 서지적인 특징 및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덕본 중에서는 유일하게 구결로 현토되어 있어서 독해에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에 경주에서 간행한 책판에서 인출한 것인데 국내에 현존하는 정덕본 《삼국유사》 가운데서 규장각본과 함께 비교적 초기에 인출한 선본에 속하며, 중종임신본의 서지적인 특징 및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덕본 중에서는 유일하게 구결로 현토되어 있어서 독해에 도움을 준다.
[A] 개인 소장본 '《삼국유사》 권3~5 (三國遺事 卷三~五)'[B]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삼국유사》'[C] 연세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삼국유사》 권1~2 (三國遺事 卷一~二)'[D] 부산 범어사 소장본 '《삼국유사》 권4~5 (三國遺事 卷四~五)'[A] [B] [C] [D] [A] [B] [C] [D] [A] [B] [C] [D] [A] [B] [C] [D] [A] [B] [C] [D] [25] 편찬 시기에 약간 논란이 있다.[26] 군자는 괴이쩍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27] 있는 것을 적을 뿐,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28]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김알지 설화처럼 중요한 설화들은 기록했다. 다만 이때도 “전설이라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중요하니 일단은 기록한다”는 등의 각주를 달아놓았다.[29] 이 부분 때문에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저자들 중 저술의 총관을 맡았던 김부식이 공자께서 금한 괴력난신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는 비유교적이다!!"라며 춘추필법의 전통에 따라 비판했다.[30]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를 가리킨다고 추측한다.[31] 국내 역사학/민속학 논자마다 삼국유사의 자유로운 야사 중심의 사체에 관한 견해가 갈린다.[32] 한자 원문으로는 '부용(附庸)'이라고 했다. 남의 힘에 기대어 따로 서지 못하고 큰 것에 기댄다는 뜻이다.[33] 원문1: 제석(帝釋)이니 웅(雄)이니 천부(天符)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佛典)에서 나온 명사이며, 또는 삼국사(三國史)의 초반의 사회에서는 여성을 매우 존시(尊視)하였는데 여기서는 남자는 신의 화신이요.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비시(卑視)하였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오. 불교의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손에 의해 점철된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문2: 고기(古記)에 단군이 수(壽) 1049, 1908세(歲)등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震壇)으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써 불전의 구어(句語)로 조선 고사를 환배(換拜)하는 불교도들이 모략한 것으로 ~후략~[34] 도교는 이미 불교와 앙숙으로 불교에선 노장사상과 도교와 분리를 주장했다. 유교 역시 노장사상과 도교와 분리론을 주장하고, 불교는 도교의 선신들을 부정하며 도가와 관계가 일절 없다고 말하는 등, 유불선 3교의 관계는 생각보다 앙숙이있다.[35]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寶藏奉老 普德移庵)" 제3권 〈흥법〉 제3에 있다.[36] 한편 삼국시대를 다룰 때 《삼국유사》와 함께 중요하게 여겨지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거의 그대로 복사 + 붙여넣기를 했다. 그 탓에 《삼국사기》에서 당 고조의 휘인 이연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적었고, 그래서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통용되는 오류가 생겼다.[37] 출처: 구보 노리타다 저, 《도교의 신과 신선이야기》.[38] 특히나 태무제는 이른바 삼무일종법난이라 불리는 중국의 법난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법난을 일으켰는데 후대의 중국 황제들은 불교를 탄압하더라도 승려를 학살하지는 않았지만 태무제는 승려를 학살하기까지 했는데 그는 446년 폐불 조서를 반포하며 '불교 형상과 경전은 모두 불태우고 승려는 늙고 젊음에 상관없이 다 죽이고, 묻어버린다.'라고 했다.[39] 고려 성리학의 선구자인 이제현도 이 피휘를 지켰다. 명과의 사대관계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유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40] 즉 정덕본 이전의 판본을 읽고 적은 것[41] 관련글.[42]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국가적 지원하에 1145년,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를 맡은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로 개인이 쓴 야사인 삼국유사보다 신뢰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43] 시베리아호랑이처럼 자생이 확실한 동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남아있다.[44] 기후변화로 멸종했다기에는 일본원숭이의 경우 일본 북쪽의 도호쿠 지방에서도 살며 위도가 더 낮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충분히 자생할 수 있고 실제로 한반도 남부에서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원숭이가 1년 넘게 생존하다 붙잡힌 적도 있다. 맹수들 때문에 멸종했다기에는 오히려 원숭이들의 주 서식지는 사자, 호랑이, 표범 등 위협적인 천적이 비교적 많이 서식하는 동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지역이다. 환경파괴로 멸종했다기에는 인도에서는 도시에도 적응하며 살아가는 히말라야원숭이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적응력이 강한 원숭이들이 환경파괴로 사냥할 동물이 줄어들면 살아갈 수 없어 환경파괴에는 더 취약한 시베리아호랑이 등의 대형맹수들도 어찌저찌 극소수는 일제시대까지 살아남은 마당에 이런 맹수들보다 더 빨리 멸종했다는것은 납득하기 힘들다.[A] [B] [C] [D] [49]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본[50]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