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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80호 | |
<colbgcolor=#315288> 김정희 필 세한도 金正喜 筆 歲寒圖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산수화 / 산수화 |
수량/면적 | 1축 |
지정연도 | 1974년 12월 31일 |
제작시기 | 조선 헌종 10년(1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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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김정희.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中 출처
김정희.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中 출처
세한도의 크기는 23 X 69.2 cm이다.[1]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2]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인 120권 79책짜리 황조경세문편을 구해와 유배지 제주도까지 가져다 준 것에 감명해 그렸다고 전한다. 이 때 추사 김정희는 소나무와 잣나무를[3][4] 보고 "가장 추울 때도 너희들은 우뚝 서있구나."라면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
논어 자한편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은 논어 자한편에서 따왔는데,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라야 비로소 그 지조의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시절이 좋을 때나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나 한결같이 인격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추사의 다짐은 이처럼 여러 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논어 자한편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민씨 일가로 넘어갔다가 경성제국대학의 중국철학 교수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매니아(...)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5]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은 지 석 달이 지나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운명처럼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2. 문학적 가치
원근법도 맞지 않아서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는 그림이지만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6]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하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이다.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청나라에 가져가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를 비롯한 청나라 문인 16명에게 제찬[7]을 받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온 후 문인 3명에게 또 제찬을 받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한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었다.
우선[8]이 김추사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보여주었다. 우선을 격려한 것이며 또한 자신에게 준 것이기도 하다. 그 뒤에 아울러 세상을 등져도 번민이 없다는 생각으로 추사옹의 뜻을 엿보다.
을사년(1845) 초봄 양호 장악진이 쓰다.
청의 문인, 장악진의 제찬.
을사년(1845) 초봄 양호 장악진이 쓰다.
청의 문인, 장악진의 제찬.
추사라는 이름 일찍 들어는 보았으나 아쉽도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네.
우여곡절 끝에 가시에 상처를 입고,
몸은 곤궁하나 도는 변함이 없네.
푸르름이 동심(冬心)을 품고,
꿋꿋이 서리와 눈에 굽히지 않네.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먼저 이 시로 인사하노라.
청의 문인, 조무견의 제찬.
한번도 만나지 못했네.
우여곡절 끝에 가시에 상처를 입고,
몸은 곤궁하나 도는 변함이 없네.
푸르름이 동심(冬心)을 품고,
꿋꿋이 서리와 눈에 굽히지 않네.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먼저 이 시로 인사하노라.
청의 문인, 조무견의 제찬.
3. 2차 창작
세한도의 숨겨진 내면적 의미 때문에 몇몇 시인들은 이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시를 지었는데 대표적인 시가 도종환의 세한도이다. 세한도(시) 문서 참조.제주도 유배지 앞에 있는 기념관 추사관의 디자인도 세한도를 모티브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그 볼품없는 모양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원성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4. 기이한 역사
그렇게 일본에서 손재형은 세한도를 받았으나, 이후 정치에 투신[9]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재산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세한도를 내놓았고, 해당 그림을 개성 출신의 갑부였던 손세기(1903~1983)가 인수했다. 이후 그림은 손세기의 아들인 손창근(1929~2024)이 소장하고 있었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사실 손재형에서 손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이 다른데, 손재형의 셋째 아들인 손흥 진도고등학교 이사장에 따르면, "정확히는 담보를 맡기고 선거 끝나면 되찾아오려고 했는데 낙선을 해버렸고, 뒤늦게 찾아갔지만 이미 일곱 사람 손을 거쳐서 저 멀리 가 버리면서 아버지(손재형)은 상심이 커서 골동품에 대한 애착을 끊었다."라고 밝혔다. 손재형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을 한 적은 없지만 1960년 지방선거에서 진도 지역에 출마한 인물 중에 손재형이 있는지는 살펴봐야 한다.
한편 손재형의 그림을 인수해 가장 최근까지 소유했던 손세기-손창근 부자는 많은 부를 축적한 것을 사회에 나눈 것으로 유명한데, 부친 손세기는 1974년 서강대학교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고, 아들 손창근[10]도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억대의 재산을 국립중앙박물관과 KAIST 등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후 2018년 부친과 본인이 수집했던 컬렉션 304점을 기증[11]했는데, 당시 세한도는 '기탁' 형식으로 남겨두었다가 2년 뒤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12]
- 관련 기사
한편, 세한도를 소장하고 있었던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의 아들(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은 전쟁 이후 남았던 부친이 소유했던 추사 김정희 자료들을 추사가 말년을 보낸 과천시에 기증했다.
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김정희필 세한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정희필 세한도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미술오천년: 세한도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완당세한도
- 한국 미의 재발견 - 회화: 김정희 〈세한도〉
- 네이버캐스트 - 한국미술 산책: 세한도
- 두산백과: 완당 세한도
6.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1] 그림과 함께 청나라의 문인 및 김정희 제자와 손재형이 받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정인보 등의 글월과 함께 두루말이로 표구되어 총길이는 10 m에 달한다.[2] 1804-1865.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청나라에 오갔고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3] 원래는 측백나무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 조선에서는 잣나무를 가리키는 한자가 되었다. 정약용도 이를 지적했다.[4] 참고로 김정희가 세한도에 그려넣은 소나무는 현재 대정향교 명륜당 뒤편에 남아 있는 소나무가 모델이라고 한다. #[5] 원간본만 1만 권에 달했고 장서 총 3만여 권을 보유했었다고 한다[6]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7] 일종의 감상평[8] 이상적의 호(呼).[9] 인물 문서에도 나오지만, 손재형은 1958년(제4대 국회)과 1971년(제8대 국회)에 당선되어서 국회의원을 지냈다.[10] 그 밖에도 1천억 원 상당의 임야를 국가에 기부했다든지 현금 1억 원을 "갑자기 1억원이 생겼으니 통장 번호를 부르시오"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부했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있다.#[11] 원래는 2005년과 2010년 '기탁' 형식으로 있던 유물들이었다.[12] 때문에 손창근은 이 기증 건으로 인해서 2020년 12월 9일 청와대에 초대되었고, '금관문화훈장'이 수훈되었다. 여담으로 손창근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는지 억대의 재산을 사회 곳곳에 기증할 때도, 평생 모은 컬렉션을 기증할 때도 아무도 모르게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