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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79호 |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초기 |
1. 개요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신라시대에 제작되어 706년(성덕왕 5년)에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1]에 봉안되었던 황금 불상.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과 함께.
높이 12.2cm.
순황금으로 제작된 신라시대 금제 불상으로, 1942년 경주시 구황동의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출토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안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 사리 용기, 금동제 굽다리 접시, 은제 굽다리 접시, 유리구슬 등이 함께 들어 있었는데, 사리함 뚜껑 안쪽에 눌러 쓴 기록에 의하면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은 692년에, 이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은 10여년 뒤인 706년에 봉안한 것이다. 706년에 이 불상을 추가로 넣을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 1권도 같이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2023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모습 |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79호
1942년 착수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수리 공사시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원만하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가슴을 크게 열었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내의를 걸쳐 입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원만하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가슴을 크게 열었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내의를 걸쳐 입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