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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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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0px 0"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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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5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5.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 번호 없음 ]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322-1호[A]
대한민국 국보 제322-2호[B]
<colbgcolor=#315288> 삼국사기
三國史記 | Samguk sagi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A]
서울특별시 중구[B]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
수량/면적 50권 9책[A]
50권 9책[B]
지정연도 2018년 2월 22일
제작시기 1145년 (인종 23)[7]
1573년(선조 6)[A]
1512년(중종 7) 추정[B]

1. 개요2. 번역본3. 가치4. 이름에 대한 이야기5. 인용 문헌
5.1. 국내 문헌5.2. 중국 문헌
6. 판본
6.1. 옥산서원본
6.1.1. 국보 제322-1호
6.2. 정덕본
6.2.1. 국보 제322-2호
6.3. 보물 제722호: 성암본6.4. 일본 궁내청
7. 논란
7.1. 신라 우선주의 서술 여부
7.1.1. 편찬 목적
7.2. 신라 우선주의가 아니다.
7.2.1. 오해 받는 이유: 사료 부족
7.3.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7.4. 여타 문제점
8. 삼국사기의 구성
8.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8.2. 본기8.3. 연표8.4. 잡지8.5. 열전8.6. 편찬자8.7. 발문
9. 북한이 보는 삼국사기10. 그 외11.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삼국사기.jpg
《삼국사기》 전권의 모습
파일:/image/032/2008/05/12/20080513.01100202000001.02M.jpg
《삼국사기》 내부의 모습

내용 전체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현존 국내 사료 중 논란의 여지 없이 가장 오래된 한국사의 공식 역사서다. 《화랑세기》의 경우 시기상으로 삼국사기보다 앞서지만 현존하는 필사본은 위작이라는 의견 또한 강한 설득력이 있어 여기서 거론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관련 사료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기도 하며, 일연의 《삼국유사》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사료이다.[10]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국가적 지원하에 1145년,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를 맡은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로, 삼국시대통일신라,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11][12] 사마천이 처음 서술하여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으로 자리잡은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서 중 김부식이 편찬한 원본은 없다. 《삼국사기》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원서는 보물 722호 성암본으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성암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 즉 '삼국'이 있지 않았던 약 260여 년 역사도 같이 다루었는데, 《삼국사기》는 신라가 아닌 고려에서 작성한 것으로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다시 나눠진 후삼국시대를 고려가 재통일한 것을 통일의 종결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13] 《삼국사기》는 고대도 고대지만 당시 고려왕조의 현실도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의 칭제건원서경천도운동을 실행했던 묘청 일파를 반대하고, 몸소 묘청 일파를 숙청한 김부식이 사직하고 집필한 사서이고, 중국 측 사서를 다수 인용해서 고구려 후기 기록의 경우에는 내정 기록은 부실한데 반해, 조공 기록은 지나치게 상세하여 이미 구한말 때부터 사대주의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중국 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다수라는 점에서 이런 비판이 나오는데, 이미 삼국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시기였으니 김부식 시대에는 이미 국내 사료가 많이 부족해진 상태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할 필요는 있다. 또한 칭제건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삼국시대에 기록되어 남아 있던 사료들 중 중국 기록과 겹치는 것은 모두 중국 사서를 참고하였는데 그 중 몇몇 삼국시대 인물들에 대한 열전은 빠져 있다.

《일본서기》와 중국의 《한서》 등의 사서들은 최대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타국을 낮추고 사신 파견도 모두 조공으로 간주하는 주관적인 기록이 매우 많은 반면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 비해 어떻게 보면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2. 번역본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열람할 수 있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답게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바 있으며, 번역본의 출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위의 링크에도 있듯이 이미 네이버 지식백과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므로 이를 참고해도 좋다. 누구든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최강의 장점.

서적으로 출판된 것 중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가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노중국 등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 학계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에는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단점은 5권[14]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한 권의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4~50,000원에 육박하는지라 전부 소장하려면 돈이 꽤 많이 깨진다는 것이다.[15]

참고로 '상고사학회 # '[16] 라는 단체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봉의고등학교영어교사 이병곤이 《삼국사기》 전체를 영어로 번역했다. 이미 해외에서 <본기>를 개별적으로 번역한 바가 있지만 전체를 번역한 것은 처음이다. 영문 제목은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관련 기사

3. 가치

비록 불분명한 부분도 있고 비판받을 부분도 존재하지만, 《삼국사기》는 한국사를 다룰 때 그 중요도가 엄청나다. 《삼국사기》는 제대로 인정받는 한민족 최고(最古)의 정사(正史)인 것이다.

《삼국사기》와는 반대로 《삼국유사》는 책 이름의 '유사'가 '남겨진 사실', '버려진 사실'이란 의미인 데서 알 수 있듯 이전의 사서[17]에서 빠진 내용들을 기록했다는 뜻으로, 《삼국사기》에서 상당수 누락시킨 설화, 불교적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그나마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기술되어 《삼국사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를 정통적인 사관에서 다루는 유일한 사서는 《삼국사기》 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충돌했던 기록이나, 율령 반포, 불교 수용 같은 중요 기록들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국왕시호[18], 이름, 가계 등도 온전히 전하고 있다. 예컨대 신라 금석문에서 보이는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모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의 경우, 우리는 법흥왕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왕의 시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랐을 것이며, 신라의 율령 반포가 법흥왕 대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19] 물론 《구삼국사》나 《신라고기》, 《백제고기》, 《삼한고기》 등 다른 사서들도 존재했으나 전부 실전된 상황이라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존재로 인해 한국사는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고대사 기록이 많으면 많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비교대상이 중동, 이집트, 중국, 그리스, 로마와 같은 인류 문명의 요람들이라 그렇지 한국은 《삼국사기》의 존재 덕분에 세계사로 넓히면 고대의 기록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 나라다. 《삼국사기》의 존재로 기원전부터의 기록이 어느정도 남아있는 한국의 고대사의 분량을 다른 나라들의 고대사와 비교해 보면 《삼국사기》의 가치가 더욱 부각된다.[20]

4. 이름에 대한 이야기

《삼국사기》의 '사기'(史記)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따른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사》라는 이름도 자주 쓰였다. 이를 들어 원래의 이름은 《삼국사》였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국사기》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라는 주장이 있다.참조기사[24]

기사에 따르면 ① 《고려사》나 조선 초기 김종직의 《동문수》에 실린 <진삼국사표>, ② 옥산서원본을 발간한 김거두가 쓴 발문에 있는 《삼국사》라는 표현, ③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표지에 쓰인 《삼국사》라는 제목, ④ 《조선왕조실록》에서 《삼국사》라는 명칭이 더 빈번하게 쓰였기 때문에 원래 제목이 《삼국사》가 아니였겠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서 전혀 공인받지 못한다. 《삼국사》라는 약칭이 널리 쓰인 것도 맞기는 하지만 학계에서는 가독성과 구분 편의 등을 이유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고, 일제가 《삼국사기》라는 명칭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상세히 살펴보면 ① 《삼국사》(三國史)라는 표현은 《삼국사기》라는 표현에 비해 '삼국의 역사'라는 일반명사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고, ② '삼국사'라는 명칭은 이전 시기 편찬된 《구삼국사》 혹은 《해동삼국사》와 혼동을 빚을 가능성이 있으며, ③ 사료상 《삼국사기》와 《삼국사》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동문수》(1488)와 달리 《동문선》(1478)에서는 <진삼국사표>가 아닌 <진삼국사기표>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삼국사》는 그 약칭일 것이다. 외국에서도 이 책의 서명을 《삼국사기》로 아는 사례가 이미 《삼국사기》 편찬 34년 후를 기록한 남송 대 사료에 등장한다.[25]옥산서원본과 잔존 《삼국사기》의 표지 등에 《삼국사》라고 쓰여 있다고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에 작성되었을 발문과 표지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원문을 옮겼을 《삼국사기》 본문에는 스스로 《삼국사기》라고 쓰고 있다. 옥산서원본 정덕본 그러니까 고의적인 사실 왜곡을 하려 한 것이거나, 본문을 다 잊어버리고 표지와 발문만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삼국사기》 표지와 발문[26]만 보고 본문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맞든 아니든 학계를 비판하기에는 수준 이하이다.

따라서 《삼국사》라는 명칭보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확정적이며, 거기에 더해 ①과 ②처럼 구분상의 문제로 《삼국사기》를 쓰는 것이 가독성 면에서 더 편리했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선택된 것이다. ③과 같이 공식적인 명칭과 편의상 쓰이는 약칭이 의미 전달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약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빈번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식명칭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대신 광개토왕 내지 광개토대왕이 더 널리 쓰이거나, 《선화봉사고려도경》 대신 《고려도경》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 것처럼.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삼국사기》라는 이름을 밀었다는 주장의 경우 기사에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27] 오히려 나쁜 건 모두 일제가 했다고 주장하면 되는 유사역사학계의 사고방식을 매우 잘 보여주는 기사인 셈이다.

5. 인용 문헌

《삼국사기》에는 어떤 기록을 인용했는지 중간중간 언급된다. 동일한 책도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특히 중국 사서를 기록할 때 《자치통감》-《통감》, 《신라국기》-《신라기》, 《신라고기》-《라고기》 등 축약되어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이는 사관들이 기록을 취합하면서 서로 다르게 기입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서 전거가 확인되는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

5.1. 국내 문헌

삼국을 다룬 사서이니 만큼 김부식은 1차 자료로 당시에 남아 있던 국내 사서를 다수 참고했다. 백제 멸망, 고구려 멸망, 그리고 고려-거란 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서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끌어 모았으며 중국 측 사서와 교차 검증에서 서로 내용이 다르면 되도록 한반도 국가의 사서를 우선시했다. 인용한 사서들은 《구삼국사》를 비롯한 삼국 통합 역사서와 《신집》, 최치원이나 김대문 등 신라의 당대 역사학자들의 역사서들, 김유신 등 유명인의 《행장》, 그리고 각종 금석문을 참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5.2. 중국 문헌

아무래도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기록이 상당수 소실됐던 탓에 중국 문헌도 상당수 참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용문들 대개가 중국 측 기록보다는 한국 측 기록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고구려태조대왕 본기〉에는 "《해동고기》에는 146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오는데 《후한서》에는 121년에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기록과 중국이 서로 엇갈리니 《후한서》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고, 신라 태종 무열왕의 경우에는 "우리쪽 기록에는 김용수의 아들로 나오는데 《당서》에는 진덕여왕의 아들로 기록되었으니 《당서》가 틀렸다."라고 나온다. 신라의 기이한 민족인 장인(長人)에 대해서도 "《신당서》에는 장인의 존재가 사실인거 처럼 기록했는데 우리쪽 기록을 보면 소문에 불과하다."라며 지적하고 있다. 물론 왕의 생몰년이나 계보를 따지면서 당사국의 기록을 더 중시하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흔히 알려져 잇듯이 "중국 기록을 우선시한, 소위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는 역사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심지어 주필산 전투를 기록한 대목에서는 유공권(柳公權)의 소설[29]을 언급하며 "당시 이세적을 포위한 고구려의 군세를 본 당태종이 지렸다고 나오는 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는 왜 그 내용이 빠져있냐? 쪽팔리니 빼버린 것이 틀림없다."[30]라고 대놓고 깠다.

하지만 김부식이 중국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 것은 아닌지, 산상왕의 이름인 이이모(伊夷模)와 동천왕의 이름인 위궁(位宮)을 각각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름만 잘못 기록했으면 다행이겠지만, 덕분에 사건의 연도까지 잘못 비정되어 버렸다. 《삼국지》에 나오는 고발기와 관련된 기록을 <고국천왕 본기> 원년조에 실었고, 동천왕이 태어났을 때 태조대왕처럼 사람을 볼 수 있었다는 일화를 <산상왕 본기> 원년조에 실어놓았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이 고발기가 두 명이라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국천왕을 왕계에서 누락해놓은 《후한서》와 《삼국지》의 고구려 왕계 기록이 문제의 시발점이긴 하지만.

6. 판본

현대에는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삼국사기》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후대에 새로 인쇄하거나 필사한 판본만이 현존하고 있다.

6.1. 옥산서원본


총 50권 9책 완질본. 일명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이라 불린다. 1512년(중종 7년)에 개각한 목판을 가지고 1573년(선조 6년) 8월에 찍은 것으로 경주부(慶州府)에서 꺼내 찍어 이언적을 배향하여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위상이 높은 옥산서원으로 보낸 것이다.

각주의 글자가 너무 작게 되어있는 등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이 옥산서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70년 옥산서원본이 도난 당하는 일이 있었고 이 일을 계기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2018년 2월 22일 보물 제525호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6.1.1. 국보 제322-1호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삼국시대 연구의 기본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국보 제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선조 6)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출(印出)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새긴 원판(原板)과 조선 태조 때에 개각(改刻)한 것, 중종 때 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完帙本)이자 인출상태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1573년 당시 유통경로와 더불어 사용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은 물론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6.2. 정덕본


총 50권 9책 완질본.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되어 정덕본(正德本)이라 통칭하며, 경주부간본이라고도 한다.

위의 옥산서원본과 정덕본은 모두 경주부에서 간행되었는데 이에 관한 발문이 2개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1394년(태조 3년)에 《삼국사기》를 처음 개각할 당시 경주부사 김거두가 쓴 발문이다. 여기서는 '계림에 있던 《삼국사》(三國史)의 인본(印本)이 오래돼 망가졌고 세상에는 사본(寫本)만이 돌아다니고 있다. 책을 간행하기 위해 판본을 널리 구해보았으나 쉽게 얻을 수 없어 지금이라도 복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완전히 없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렴사 심효생이 한 벌을 얻어 이것을 전 경주부사 진의귀(陳義貴)와 함께 간행하기로 하여 계유년(1393년) 7월에 착수하여 갑술년(1394년) 4월에 마쳤다.' 라고 되어 있다. 이떄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삼국사기가 다른 삼국시대에 대한 사서와는 달리 역사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로 개각한 1512년에는 경주부윤 이계복이 다시 발문을 썼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은 다른 데서는 간행된 적이 없고 오직 본부(경주부)에만 판이 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 판이 깎이고 상해 한 줄에 겨우 4~5글자만 읽을 수 있는 정도다. 다행히 성주목사 권주(權輳)가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완본을 구해주었기에 기쁘게 받아 여러 읍에 나누어 주어 새기게 한 후 돌려받아 간직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서 1394년에 한 번 개각한 판본이 120년이 지나 거의 망가져 다시 개각한 것이다. 발문에 언급된 《삼국유사》도 같이 새로 간행했는데 《삼국유사》의 경우 해당 판본이 현존하는 완질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이 있지만 국보 제322-1호인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함께 현재까지 내려오는 둘 뿐인 완질본이다.

2018년 2월 22일 보물 제723호에서 옥산서원본과 함께 국보로 승격되었다.

6.2.1. 국보 제322-2호

국보 제322-2호《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반영된 역사의식의 객관성과 민족 자아 의식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512년까지 증보된 보각판에 기초하여 찍은 인출본으로, 인출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9책의 낙장이 없는 완질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판각본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및 1394년 잔존 목판본의 조성형식과 보존상태 등도 확인할 수 있다.

6.3. 보물 제722호: 성암본

파일:삼국사기 권44∼50(三國史記 卷四十四∼五十).jpg
권 44~50권 분량으로 총 7권 1책. 성암본이라 불린다. 1981년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발견된 판본인데 고려 후기인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단 1책만 존재하고 있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부분은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과는 다른 데 대표적으로 온달이 참전한 장소인 배산(拜山)이, 성덕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4. 일본 궁내청

1981년 2월 아키히토 당시 일본 황태자의 지시로 일본 궁내청 서원부(황실도서관)의 장서를 정리하다가 《삼국사기》 정덕본을 수정, 가필한 《삼국사기》가 발견되었다. 50권 9책 완질본이다.

아키히토가 왜 저 시점에 장서 정리를 지시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60년 생인 나루히토가 막 성년이 된 해라서 고쿄 정리 차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리 과정에서 《삼국사기》 외에도 한국, 중국, 일본, 심지어 유럽 국가들의 역사서들이 추가로 발견되는 성과도 있었다. 대부분은 일본 제국 시기에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궁내청본이 언제 일본으로 넘어갔는지는 불분명하나, 1981년 이전에 서원부를 정리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이전 메이지 유신 때인 1870년이다.

일본에서는 이 《삼국사기》 발견 이후 보존을 위해 영인을 하고 나서 보존처리 후에 다시 황실 도서관인 서원부에 보존하고 있다. 영인본은 2020년 현재 공개 여부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다.

7. 논란

KBS 역사스페셜 -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 800년논쟁 《삼국사기》의 진실은

7.1. 신라 우선주의 서술 여부

일제강점기신채호가 《삼국사기》와 그 저자인 김부식을 전격적으로 비난한 이후 이 주장에 동의하여 그를 디스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삼국사기》는 누가 보아도 질과 양을 볼 때 철저히 신라 위주로 기술되었다는 것. 북한 또한 《삼국사기》가 신라 우선주의로 쓰였다고 본다.

또한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나라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는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44]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있는 《구삼국사[45][46]가 유실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47]

7.1.1. 편찬 목적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본다면 일단 《삼국사기》를 어떤 시점으로 봐도, 고려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신라의 지분이 가장 크며[48] 《삼국사기》는 당장 《삼국사기》를 쓰는 사람들의 현 소속국가였던 고려의 시점에서 역사를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위치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던 국가인 삼한을 한때 아우른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고려는 흉악무도한 후백제를 물리치며 그것을 이어받은 정통성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의함과 같은 것은 비록 부득이하여 한 일이지만 역시 가상한 것이며, 오히려 만약 힘써 죽기로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기에 이르렀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여쭈어 기다리지 않고 미리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해 바쳐 왔으니, 그의 우리 조정에 대한 공로와 백성들에 대한 은덕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나라에 바치매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고 했거니와,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종결부의 사론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돌아갈 바를 몰랐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거니와, 그 가운데 심한 자는 궁예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이면서도 반란하여 주종의 나라를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을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모반의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난을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노하고 임금과 신하 베기를 마치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으니, 실로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당했고 견훤은 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들인지라 다른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비록 항우이밀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서도 한나라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이들이야 어찌 우리 태조를 상대해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이들이었을 뿐이다.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말미의 사론

김부식은 김부를 오월의 전씨에 비교하여 공덕이 월등히 크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오월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병으로서 술직[49] 하니 그 군신의 직분이 정하여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은즉, 태봉은 신라의 반적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던 것이다. 비록 태봉이 이미 무너지고 고려의 국운이 날로 창성했다 하나 신라가 고려에 대해 일찍이 무릎꿇고 칭번한 적이 없었거늘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토지를 바치며 북면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겠는가. … 뒷날 비록 부귀하고 외손이 번성하였으나 어찌 나라가 망하고 자신을 잃는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 경순왕과 같은 자는 이미 큰 절의를 잃었으므로 그 나머지는 취할 바가 없는데, 김부식이 전씨에 견주어 경순왕의 우월함을 비교하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동국통감》 권12 고려 태조 18년 사론

김부식은, 신라와 고려의 관계를 중국의 제후왕과 중앙 왕조의 고사에 비유하며, '신라 왕은 고려 태조에게 토벌당하기 전에 순순히 나라를 바친 겸손한 제후왕'이란 고려 중심적 서술을 하여 신라 왕조를 고려 왕조에 비해 격하시키고 있다. 반면, 조선 왕조의 서술자는 '고려 왕조야 말로 근본없는 태봉의 후신인 수준인데, 김부식이 고려 왕조 띄워주려고 근본력 넘치는 신라 왕조를 격하하는 역사 날조 시도하고 있네!' 라는 식으로 김부식의 고려 중심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시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후백제견훤조>는 기이편의 마지막 항목인 <가락국기조> 바로 앞에 자리한다. 《삼국유사》에서 기이편이란 단군조선에서 출발하여 고려 왕조 성립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흥법편 이하 불교 신앙의 홍포와 신이한 이적에서 오는 감동의 공유를 위한 시공간적 배경 설정과도 같은 것이다. 즉 고려 태조에게 귀부한 경순왕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하여 시간 순서에 따른 기록은 완결되는 것이고, 아울러 사실상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대왕조> 이후에 <남부여전백제조>, <무왕조>, <후백제견훤조>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일단 시간 순서에 따른 기이편의 서술 체계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후백제 및 견훤 관련 자료의 분석에는 <김부대왕조> 이후 네 항목에 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때 <가락국기조>는 자료명 자체가 제목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일연 이후의 추가로 보는 시각이 있음을 환기하게 된다. 이러한 지적은 그에 대한 동의 여하와는 상관없이 본 문제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후백제견훤조는 기실 ‘삼국사본전’ 곧 《삼국사기》 견훤전에 주요한 바탕을 두고 있되, 《고기》(古記) 등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본의가 있었던 것이므로, 가락국기조의 맥락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왕조 자체가 고기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며, 남부여 전백제조 역시 고기 계통 정보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후백제 견훤조를 위시한 네 조목의 편록은 유사를 자처한 《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삼국의 ‘본사(本史)’로 간주한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고기류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안 했던 것이다. 덧붙여 《삼국사기》에 가장 자료량이 풍부한 김유신전 역시 고기로 불린 그의 행록을 크게 절삭한 것인데, 그 절삭된 부분이 바로 《삼국유사》의 김유신조나 가락국기조 등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김유신 설화는 그 서술 목적이 《삼국사기》의 열전과는 다르며 지배이념의 구현보다는 그 인물의 신이한 행각이라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표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기에서 무왕은 용의 아들이며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대비된다. 비록 이들의 출생담은 건국 신화적 요건을 갖춘 야래자신화(夜來者神話)로 파악되고, 이 ‘야래자신화’는 온조 등 백제 건국 주체 집단의 동명 신화가 하늘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였던 것과는 달리 물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로서 마한의 신화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하나, 둘 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몰라도 적어도 신성한 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남부여전백제조 말미에 고기의 전승으로 파악되는 이른바 용바위 전승은 사비하(백마강/백강)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아 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는지라 그로 인해 용바위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이 행위가 백제의 멸망을 예비하는 조건으로 이해된 것처럼, 역시 부정적 예조(預兆)일 뿐이다. 요컨대 김부대왕조를 끝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기이편의 구성에서 경순왕조 뒤에 있는 전-후백제사의 세 조목은 고기의 편린에 자저자의 강조점이 있되, 그것은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또한, 고구려사의 전말도 전혀 배려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사안이며 여기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시기의 좀 배웠던 사람들의 주류시각과 고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생각건대 저 구려는 오늘날 발해로 되었는데, 비로소 근래 와서 계속 과거에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곧 외방이 착함을 사모하는 정성을 기록하시고 대국의 공평한 덕화를 드러내심이나 …
최치원.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

… 구려가 이윽고 미친 회오리바람이 잦아지자 간신히 불탄 나머지를 거두어 따로 고을들을 취합할 것을 도모하더니 문득 나라 이름을 도적질하였으니 곧 예전의 구려임을 알 것이요 이가 오늘의 발해인 것입니다. … 최치원이 요행히도 천박한 재주를 가지고 … 실로 지극한 공정함을 만나 이전의 치욕을 씻었으니 변화됨은 한 번 돌보아주심에 깊이 힘입었고 그 광영은 멀리 삼한에 퍼졌습니다.
최치원.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피건대, 구려가 아직 멸망되기 전에는 본래 사마귀만한 부락이었던 것이 말갈의 부류가 번창해지자 그 가운데 속말이라는 작은 번속이 있어 일찍이 구려를 따라 내지로 옮겨왔는데 그 수령 걸사비우대조영 등이…[50]
최치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 것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 지방에 거하면서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남지방에 거하면서 백제라 했으며, 박씨․석씨․김씨가 동남지방에 거하면서 신라라 한 바 이것이 삼국이다. 이 삼국에는 마땅히 삼국에 대한 사서가 있어야 할 텐데, 고려가 이것을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다음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했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하는 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거늘,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유득공. 《발해고

이 사료들까지 본다면 신라가 나라가 망하고 있던 시기에도 통일 전쟁 시기부터 표방해온 삼한일통에 대해 얼마나 집작하고 있는지[51], 또한, 건국 초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북벌정책이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종료되고 신라말의 삼한일통 의식이 고려의 주류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가 있다.

7.2. 신라 우선주의가 아니다.

KBS 역사스페셜 - 김부식은 왜 삼국사기를 썼나

7.2.1. 오해 받는 이유: 사료 부족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고구려와 백제의 직관(職官)이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서 고기(古記)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한다.'고 서술했다.[54]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제례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古記)와 중국 역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제사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사라져서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제도는 고찰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중국의 역대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제33권 잡지 제2 - 의복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기록이 모호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 - 관직
게다가 아래 구성에서 보듯, 삼국통일까지의 시점을 따지면 고구려 10권, 신라 6권, 백제 6권으로 고구려본기의 권수가 가장 많다.' 따라서 양적인 문제를 근거 없이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7세기 이전 파트는 적어도 500여 년 전 일이었는데도[55] 당시에도 자료가 너무 없어서 중간 저자인 김부식조차도 "마한은 온조왕때 망했다며? 100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또 나오는거냐?"라고 의아해 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구이신왕처럼 재위, 사망만 다루는 것을 넘어 사반왕처럼 아예 통으로 날려 먹은 파트도 존재한다.
70년(서기 122), 임금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백제, 고구려쪽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과정에 대부분 기록이 불에 타거나 약탈로 없어졌을 것이다. 신라의 기록 역시 견훤서라벌 약탈과 여요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56]

당시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자료들조차도 그 양이 매우 부족해서 신라 편향적이라고 욕을 먹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박혁거세부터 진평왕까지의 일을 기록한 책은 단 4권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고려의 승리에서 비롯되는 후백제 관련 자료의 한계는 7세기 이후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승리한 신라인의 관점에 충실한 형태로 재편되었던 사정과 다르지 않고, 또한 멸망한 나라의 사서는 업데이트나 보존을 위한 노력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사실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본기도 기록의 양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기록의 밀도가 높아서 실감이 안 날 뿐이지, 효소왕~혜공왕 시기 기록과 효공왕~신덕왕 시기 기록은 각 연도별 사건들이 미천왕 이후 고구려본기급으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쉬운 점은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전대 왕조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에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 왕조들은 건국 후 바로 전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전례가 있어 왔던건데 고려는 그러지 않았다. 고려는 초창기부터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나라였고 후백제와의 전쟁으로 왕건이 도망다닐 정도로 고생한데다 그 다음으로 일어난 왕위쟁탈전이 끝나자 곧이어 일어난 고려-거란 전쟁, 그리고 천추태후 등의 실정과 그로 인해 벌어진 권력 투쟁인 계속된 전쟁으로 고려 초는 혼란기가 적지 않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사료 자체가 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요전쟁만 해도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면서 적지 않은 역사 자료가 파괴되었다. 또 전조의 정사 편찬은 본래 중국의 관습인데, 고려 초는 근친혼이 성행하는 등 아직 중국식 문화가 후대에 비하면 덜 유입된 시대이기 때문에 필요성 또한 적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17대 왕인 인종대에 와서야 《삼국사기》를 집필하는데 이를 근거했을 당시의 자료가 시기상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한 지 500여 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고 이들의 기록을 상당수 가졌을 발해통일신라도 멸망한 지 무려 200년은 된 시점인데다가 발해 유적은 대부분 고려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구하는게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 내에서 직접 구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당연히 고구려나 백제가 신라보다 먼저 망했고 신라가 수백 년은 더 오래 간데다 더 최근까지 존속하였기에 신라인들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어 있는 것이 많았고, 혹은 그것을 토대로 고려에서 재정리한 것이었다. 또한, 북방의 대륙에 위치한 국가였던 고조선고구려, 발해의 기록이 중국왕조에 의해 훼손되고 백제삼한의 기록이 신라에 의해 훼손되면서 기록이 부실해 짜깁기식으로 기록을 편집한 채로 편찬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비슷한 내용의 옛 기록들을 찾아보았으나 인용할만한 기록이 거의 없어 기술을 포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1100년대 중기에는 이미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여러 국가가 수백 여 년 동안 기록하여 남긴 역사 사료들을 모두 긁어모아 재정립해도 단 아홉 권에 그칠 정도로 이미 이전대의 역사 사료들이 상당수 사멸한 상태였고[57] 이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비중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부식도 나름대로 고구려와 백제 관련 자료를 박박 긁어모아서 찾아보려 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등 오히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수 밖에 없다.

혹자는 김유신 열전을 언급하며 신라 우선주의라고 매몰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열전'에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또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아무리 당시에 기록이 적어졌다 하더라도 두 국가를 합쳐서 11명밖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편향적이며 신라의 시각과 신라 편향적인 자세에서 글을 쓴 것은 도저히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받을 만한 거리라는 것. 하지만 삼국사기를 좀 더 들여다본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유신의 기록마저 부족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행록을 그대로 베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유신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꼴 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또한 그를 알고 있다"고 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도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그런 사람에 대한 기록도 부족할 지경이었으니 다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풍부히 남아있을 리는 만무했다.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그래서 김유신 열전 초반부에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58]에 따라서 작성된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동떨어진 전설들이 등장하며[59], 당시 허구헌날 백제에게 개털렸다는 신라본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다고 나와 와있는 등 앞뒤 기록이 안 맞는 경우가 발생했다. 한마디로 김유신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의 주역의 자료도 빈약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60] 연개소문도 관련된 자료의 부재로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거의 그대로 복붙해버렸다. 그 때문에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李)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린 웃지 못할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대의 삼국유사가 이걸 그대로 베끼는 바람에(...) 오랫동안 연개소문은 천개소문으로 알려졌다. 이런 쌍사의 삽질 덕분에 한때 교과서 등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남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61] 그 외에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온달도미 단 두 명뿐이다.
而史失其姓名, 與揚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하지만 역사(史)에서 그 성명(姓名)을 잃어버리니 양자(楊子)가 말한 것처럼, '제로대신(齊魯大臣)[62]은 역사(史)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심히 애석하다.
《삼국사기》 제21권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상
또한 고구려명장 중 한 명인 안시성주는 김부식이 그렇게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한탄스럽다는 평을 위와 같이 남겼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기록도 사라진 판에 다른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열전 중에서는 이름만 언급되어 있고 행적이 없다고만 적힌 인물들도 있다. 사실 당대 최고 명문장가였던 설총도 당시 기준으로도 남아있는 글이 거의 없어서[63] 어떻게든 박박 긁어모아도 삼국사기에 실을 수 있던 글이 화왕계 하나밖에 없던 판이었으니 설총보다 명성이 떨어지던 나머지 문장가들은 뭐...
박인범(朴仁範), 원걸(元傑), 거인(巨仁),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전기를 만들 수 없다.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 -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
[64]

굳이 쓰지 않아도 됐을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남긴 행적만 봐도 김부식이 열전을 편향적으로 쓴 게 아니라, 박박 긁어모아서 쓴 게 현재의 삼국사기였다는 것이다. 개별열전은 구체적인 일생이 담겨있어야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예로 거인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진성여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으로 몰려 옥고를 치뤘다가 전해지는 행적의 전부로 왕(王)이라는 성씨도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그 외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동일하다. 즉 위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만 거인에 대한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열전을 만들 분량이 나오지 않아 열전을 만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제작자들이 최선을 다해 사료들을 모아서 삼국사기를 제작했으나, 사료부족으로 인해 9책 50권 분량의 삼국사기 내용은 적은 편이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 후삼국 통일까지 거의 1천년을 다루지만, 고작 90년을 기록하고 65권 분량의 정사 삼국지보다 내용이 적으며,[65] 137권 75책 분량 고려사와 비교하면 12% 수준이고, 1,894권 888책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 1% 수준이다. 그나마도 이건 일제에 의해 편찬되어서 사실상 조선왕조실록으로 취습 안 하는 고종, 순종 실록은 제외하고, 철종실록까지 비교했는데도 이렇다.

7.3.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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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여타 문제점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구려의 영웅 안시성주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삼국사기 사관이 이름을 알지 못해 한탄할 정도였고, 김유신의 경우에도 기록 부족으로 가문의 행록을 줄이고 줄여서 열전에 올릴 판이었다. 한마디로 열전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교훈과 더불어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유명한 재상들을 빼서 수록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무척이나 부족하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측 사서를 그대로 옮겨와 성이 강제개명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을지문덕장보고의 경우에는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臯)의 용맹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재상들의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는 거의 없다. 또한 고구려의 기록을 인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집동명성왕부터 고국원왕 대까지의 일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을파소명림답부처럼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그 시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록 부족으로 재상들의 이름이 빠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물며 역사서 편찬 기록이 거의 없는[71] 백제는 더욱 그 기록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史記(사기)'의 총권수는 50권으로, 1권의 분량이라야 몇 장이 되지 못하고 옛날 舊版(구판)의 粧冊(장책)으로는 통히 9책 내지 10책을 넘지 못하고, 근래 新活字版(신활자판)의 책자로는 1책 내지 2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책이다. 三國(삼국)의 歷年(역년)이 오래고 그간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史記(사기)'의 內容(내용)·卷帙(권질)이 이와 같이 빈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도대체 史料(사료)가 부족했던 까닭이다. 돌아보건대, 三國(삼국)은 일찍이 각자의 역사를 기록 또는 편찬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는 國初(국초)로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일찍이 『留記(유기)』 백권의 史書(사서)가 있었던바, 嬰陽王(영양왕) 11년(서기 600년)에 太學博士(태학박사) 李文眞(이문진)으로 하여금 『留記(유기)』를 刪修(산수)하여 新集(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고, 백제는 近肖古王(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에 博士(박사) 高興(고흥)을 얻어 國史(국사)를 닦게 하여 백제의 書記(서기)가 있게 되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 중에 인용된 「百濟本記(백제본기)」·「百濟紀(백제기)」·「百濟新撰(백제신찬)」 등도 모두 百濟人(백제인)의 손에 된 史書(사서)일 것이다. 신라는 眞興王(진흥왕) 6년(서기 545년)에 大阿湌(대아찬) 居柒夫(거칠부) 등을 명하여 國史(국사)를 編修(편수)케 한 일이 있거니와, 이후에도 누차의 修史(수사)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三國(삼국)의 史籍(사적)은 兵亂(병란)에 이미 湮滅(인멸)된 지 오래되어 金富軾(김부식) 당시에는 제2차 내지 제3차적 史料(사료)인 古記類(고기류)가 存傳(존전)하여, 그것과 또 中國史書(중국사서) 중에 실린 記事(기사)를 採取(채취)하여 편찬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병도 삼국사기 해제. 서문.
앞서 예시로 언급된 고려사의 경우 조선이 건국한 직후 편찬을 준비했고 그 결과 상세한 기록들이 소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역사책에 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삼국통일전쟁이 끝나고 500여 년, 통일신라가 멸망하고도 200여 년이 지난 후에나 작성된 역사책이니 소실된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8. 삼국사기의 구성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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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4a2d5b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 소지 지대로 · 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8권 「신라 8권 (新羅 八)」 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

총 50권 9책으로, '권'은 내용 구성상의 단락을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책 한 권을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현대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말하자면 목차가 50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총 아홉 권의 책인 셈.

8.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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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본기

본래 본기는 기전체 역사서에서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 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을 쓰는 것인데, 김부식은 한국사가 중국사에 못지 않다는 점과 셋 중 어느 한 나라만이 아닌 대등하게 계승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3개국 모두를 본기에 편입해 썼다. 상술된 대로 고려사에서는 본기가 아예 없고 모든 고려왕을 세가에 넣었다는 점에서 대조된다.

8.3. 연표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

8.4. 잡지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한 사회사 기록.

8.5. 열전

역사에 이름을 남겨 모범, 반면교사가 되는 여러 인물에 대한 기록. 마지막 10권은 역적을 다룬 반역열전에 준하게 구성하고, 나머지 앞의 인물들은 인물의 중요성을 칭찬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본기와 다르게 열전은 당대 전해져오는 내용을 가공없이 기록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 예로 가야의 경우에도 본기에는 금관국, 반파국, 안라국등 다양한 국가들을 가라혹은 가야로 일괄적으로 통칭하고 있으나 열전에는 해당 국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포상팔국의 난의 경우에도 본기에는 “가라국 왕자가 도움을 요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열전인 물계자전에는 “아라국이서 도움을 요청했다.”라고 명시해놓았다. 김유신열전은 아예 후손이 쓴 열전을 허무맹랑한 것을 제외하고 축약해서 옮겨 놓았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8.6. 편찬자

8.7. 발문

사기와는 다르게 삼국은 제후를 봉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가 없다. 고대 삼국은 자국만의 작위를 쓰고 왕작, 공작, 후작오등작을 봉하는 등 각국 국왕이 자국 내에서 천자로서 군림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짜 주나라 마냥 땅을 떼준 게 아니라 '제후 칭호'를 봉한 것이다. 삼국은 부족 연합체, 소국 연합체에서 조금씩 진화해 군현제 국가로 성장했지 봉건제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다.[75]

9. 북한이 보는 삼국사기

북한교과서조선력사에서는 지금의 한국 사학계와 달리 신라 사관을 토대로 신라에게 우호적으로 쓰인 책으로 비판되고 있지만 역사적 가치는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왕조사로 서술된 책으로서 신라중심으로 세나라력사를 서술하고 외국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리용한 것[76], 신라의 사대외교를 긍정한것, 삼국이전 즉 고대사자료들을 전혀 서술하지 않은것 등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옛 력사책가운데서 제일 오래된것으로서 삼국시기 력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된다.
- 조선력사 -

10. 그 외

2013년도 도쿄대학 본고사 국어(일본어)의 고문(古文) 파트에서 삼국사기가 지문으로 등장하였다. 중국고전의 출제가 대부분인 해당 파트에서 중국 외의 고전이 나온 건 이례적.[77]

11. 같이보기


[A] 옥산서원[B] 정덕본[A] [B] [A] [B] [7] 이 판본은 실전되었다.[A] [B] [10] 북한 같은 경우 알려진 정보가 적어 소장중인 사서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남한에 비해 소장하고 있는 역사적 유물이 빈약한 편이고, 소장하고 있는 유물조차도 얼마나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북한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민간에 남은 자료가 보존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때문에 남한에도 없는 새로운 비공개 고서가 발견될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11] 궁예태봉이나 견훤후백제는 나라로서 따로 <본기>가 있는 건 아니고 건국군주 두 사람 개인의 <열전>으로 실었다. 존속 기간이 짧아서 길게 쓸 기록도 별로 없었다.[12] 그 외에 동시대에 존재한 가야부여, 탐라, 발해 등은 삼국과 연관된 부분에서 타자로서 간접적으로 여러 번 등장하긴 하나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현대인들 중에서는 가야 등의 역사를 같이 쓰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이 종합적인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당장 편찬자 본인들이 소속된 조국인 고려 왕조가 정통성을 얻는 배경을 기록하는 데 있는 관찬 사서였으므로 고려 왕조 성립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가장 중요한 3국만을 서술한 것이다. 책 제목부터 세 나라만 다루는 책이라서《 '삼국'사기》다.[13] 사서에 따라서는 《동국통감》처럼 삼국시대통일신라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사서마다 달랐다.[14] 번역본 1권+색인 1권+감교 1권+주석 2권[15] 교양서 수준에서 읽는다면 이강래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번역한 《삼국사기》1, 2(한길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구려&백제본기>, <잡지&열전>으로 분리해서 번역하였음-도 나쁘지 않다.[16]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학회 가운데 학회명에 '상고사'가 들어가는 학회는 '대한상고사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가 있으며, '상고사학회'는 없다. 따라서 이 '상고사학회'는 앞의 두 학회와 다른 유사 학회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사단법인이며, 이중재라는 개인이 주도적으로 운용하던 곳이다. 해당인은 2011년 세상을 떠났다.[17]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를 가리킨다고 추측한다.[18] 물론 고구려의 경우에는 광개토대왕처럼 실제 시호를 극단적으로 줄여버리긴 했지만 이건 당대 기록이 그런 것이니 《삼국사기》 편찬자들만 탓할 건 아니다.[19]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이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발굴을 통해 최소한 법흥왕 시기에 성문화된 법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0] 물론 신라와 백제의 경우 초기 기년이 앞당겨졌을 개연성이 높아 실질적인 역사의 시작은 기원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보수적으로 접근해도 3세기 이전임은 분명하고, 이 역시 굉장히 빠른 편이다. 더군다나 고구려의 경우, 다소 기록의 왜곡 정황이 포착되나 그 원류가 기원전에 형성되었음은 분명하다.[21] 4세기의 일본 기록이 공백인 이유는 기록 부족도 이유가 될 수 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서기》가 편찬될 시기에 천황가의 신성성을 강조하려고 실제 연도에서 120년 전으로 연도를 끌어올리는 등 연대조작을 가했기 때문이다.[22] 한국사로 비교하면 삼국이 아닌 고조선, 부여, 가야, 발해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나마 불가리아는 당대에 제작된 금석문이 남아 있다.[23] 메소아메리카 국가들은 고대로부터 문자가 쓰여 왔고 자체적으로 종이도 만들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기록물이 존재했지만 전란과 식민지배 시기를 거치면서 대다수가 소실되어서 남아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 실정이다. 잉카의 경우에는 기원전부터 문명이 존재했지만 자체적인 문자가 없어 말 그대로 구전되어 오는 설화나 유적들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24] 참고로 이 기사를 쓴 박정학 한배달 대표는 역시나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이유립의 제자로 언급되는 등 유사역사학계 인물이다.[25] "淳熙三國史記 : 元年五月二十九日, 明州進士沈忞, 上海東三國史記五十卷, 賜銀幣百付祕閣"(《옥해》 권 16, <지리> -이역도서-) ; "三國史記 : 【書目】五十卷, 高麗金富軾撰, 首載新羅, 次高句麗, 次百濟, 有紀表. 海東三國通曆十二卷, 高麗高得相撰, 係以中朝歷代正朔"(동일 출처).[26] 현대로 치면 출판사에서 쓰는 추천사 정도?.[27] 기껏해야 참고 도서에 이마니시 류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면서 과거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하든 참고 문헌에 인용해야 된다는 것은 학계에서의 기초 중의 기초, 상식 중의 상식이다.[28] 추정[29] 실제 해당 내용이 나온 책은 유속이 쓴 《수당가화》(隋唐嘉話)로 《삼국사기》 편찬자가 잠깐 헷갈린 듯 하다.[30] 柳公權小說曰 駐蹕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曰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 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31] 정확히 《위서》라고 언급되진 않았지만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은 《위서》의 본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A1] 별도의 언급은 없으나 《수서》의 내용을 거의 붙복했다.[A1] [A2] 별도의 언급은 없으나 《당서》의 기록을 상당수 참조했다.[A1] [A1] [A2] [A2] [A1] [A2] [A2] [A2] [43] 당태종의 넷째 아들로 배움을 즐겨해 이세민이 상당히 총애했다.[44] 3경 체제라고는 하지만, 고대 국가에서 수도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지방 유력자들은 끊임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5소경을 세웠다느니 해도 결국에는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판치는 신라 말의 상황이나 무신정변 이후 서경, 동경을 비롯한 각지에서 삼국을 계승한다는 분립적인 상황은 수도와 지방의 위상 차이와 별개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립 의식은 대체적으로 여몽전쟁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시기 사라진 것으로 본다.[45] 현재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통해서 일부만 전해지는 《구삼국사》의 경우 편찬 시기가 고려 초기로 보여지는 만큼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당장 '고려'라는 국호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선택된 것이었다.[46] 혹자는 고구려 관련 기록이 더 많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구삼국사》 <동명왕편>에 실린 내용과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를 보면 《삼국사기》 내용이 더 많다. 《구삼국사》항목을 참조.[47] 숙종 때 편찬된 《대각국사문집》에서 《구삼국사》로 추정되는 《해동삼국사》라는 책을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까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단 《해동삼국사》가 《삼국사기》인지 《구삼국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구삼국사》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대각국사문집》에서 인용된 부분은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는 전쟁을 벌였다하면 수도가 함락되고 문화재와 사료가 대량분실될 정도로 전란이 잦은 나라였기 때문에 사라졌을 확률이 꽤 높다. 고려 왕조의 가장 중요한 사료였던 《고려왕조실록》의 초기 기록조차도 거란의 2차 침입 도중 개경이 함락당했을 때 불타버렸을 정도였다. 이규보의 시대에도 이미 몽골한테 죄다 털리던 중이었고, 이후로도 왜구, 홍건적이라는 2단 콤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삼국사기》도 사라질 뻔한 걸 조선 초기에 발견해서 다시 찍어냈다는 걸 감안하면 《구삼국사》가 《삼국사기》때문에 의도적으로 사라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48] 《삼국사기》 편찬 당시인 고려 중기까지의 영토와 인구는 아무리 잘 봐줘도 통일신라가 약 90%, 발해가 약 10%다. 7세기 삼국시대로 비교해봐도 신라의 영토가 60% 수준이다. 단, 삼국시대 전성기 최대 강역을 따졌을 때는 고구려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다만, 전성기 시절까지 따지면 너무 오래 전이다...[49] 중국에서, 제후가 조회에 나아가 천자에게 직무의 상황을 아뢰던 일. -네이버 국어사전-[50] 이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긍정하는 쪽에서는 '표'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당나라 조정에 보낸 공식적인 문서이므로 개인적인 편지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본다. 반면 부정하는 쪽에서는 발해를 디스하려는 내용일 뿐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51] 고구려에서도 묘지명에 스스로 요동 삼한인이라고 하였고 당에서도 고구려의 장군들에게 마한 추장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삼국이 정립된 이후에는 서로간에 동질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2] 4세기경까지 고구려본기는 신집5권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53] 자세한 내용은 서의식의 『신라의 정치구조와 신분편제』,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을 참고[54] 관련 내용은 윤종일의 「김부식의 역사인식 연구」라는 논문을 참고[55] 오늘날로 치면 조선 초~중반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셈이다.[56] 거란 2차 침입때 현종은 몸만 급히 피신해야했고, 개경은 궁궐을 비롯하여 대부분 불에 타거나 약탈 당했다. 현종 입장에선 몸만 피하기도 바쁜 와중에 신라 역사서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신라 뿐 아니라 고려 초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로 굉장히 부실한데 당장 선조들의 실록조차 불에 타서 7대실록을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고려 초기 역사가 훨씬 전대의 7세기 삼국시대보다도 부실한 결정적인 이유다. 7세기 삼국시대는 중국과 일본에 참고할 자료라도 많기 때문.[57] 그 때문에 편찬 시기가 빨라 백제의 기록이 좀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가 비록 일본발 구라가 잔뜩 섞여 있지만 어쨌든 실제 역사에 과장을 덧입힌 내용이기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 등 한국 사료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어떻게든 과장 속의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숙지할 고대 사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58] 군자는 괴상한 것(무속신앙, 전설등)을 기입하지 않으며, 없는 사실을 지어서 작성하지 않는다.[59] 물론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에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는 법 없냐!"라며 쓰긴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술이부작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60] 그런데 2019년에 중국에서 비교적 최근에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당이 백제 정벌군 편성 직전인 659년부터 이미 소정방에게 당나라 내부에서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수여했음이 밝혀지면서 당나라는 이 때부터 백제와 함께 신라까지 기습할 준비를 해왔음을 증명하는 당대의 자료가 나타났다. 기존 문헌 중에는 오직 김유신 열전과 삼국유사에만 존재하던 당의 은밀한 신라 침공 계획과 김유신의 간파, 대비 기사와도 일맥상통함이 밝혀졌다.(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열전의 이 부분은 후손들이 김유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나당전쟁예언한 것처럼 첨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던 대표적인 부분이었고,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김유신의 소정방 신라침공 야욕 간파 기록은 굉장히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이고 일연 본인조차 일단 쓰고도 바로 밑에 주석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임을 보충설명해두었을 정도라서 학계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김유신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설명하는 이 발견을 통해서 물론 삼국유사 기록처럼 김유신이 소정방을 암살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실제로 어떤 모종의 대립이 있었는데 설화적으로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발견은 근래 김유신 열전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유행이 일던 추세와 반대로, 김유신 열전의 정확성이 검증된 사례가 되었다.[61] 《삼국사기》와 더불어 양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지나치게 불교 중심적이어서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래저래 연개소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62]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들을 뜻한다.[63] 김부식은 이에 대해 "또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적어도 설총이 글을 쓴 비문이 당시에는 더러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고 시간이 지나며 이들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64] 그나마 이들 대부분은 생존 시기와 대략적인 행적은 알려져 있고 작품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원걸은 이 구절을 제외하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65] 특히 열전 쪽은 정사 삼국지가 압도한다.[66] 《삼국사기》가 12세기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3세기의 인물. 거의 천 년이 앞선다. 게다가 삼국지는 위진 시대에 한국과 교류한 중국 국가들의 분명한 당대 기록이다.[67] 여기서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어느 정도 자치력이 있는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고고학적 사실이 거론되는데, 그 정도 자치력이 있는 마한 소국들은 충청도에는 4세기까지도 존속했고 심지어 경기도에도 3세기까지는 자치력을 보유한 소국들이 있었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372년 근초고왕의 정복 이후 적어도 독자적 국호나 칭호조차 주장하지 못하고 백제의 산하로 들어갔기에 이는 거꾸로《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연대적, 기사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증거일 뿐 배치되는 사례는 아니다.[68]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에서 나온 책이다.) 고려인들은 고려는 주몽이 세우고 내려오다 중간에 왕씨로 바뀌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 몽골 침략 후 쿠빌라이 칸마저 당태종도 제압하지 못했던 그 고구려가 자기한테 친히 항복했다고 기뻐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69] 이는 현대가 되어 고대 사료를 싹싹 긁어모은 현재에도 큰 차이가 없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것이 신라의 민정문서이지만 이 또한 1930년대 일본의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그릇 보존을 위해 끼워넣은 종이를 복원한 것이며, 그 이외에는 말 그대로 '제도'를 기술한 것이 아닌 단편적인 사료를 긁어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신라의 정전제(721)가 국가가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한 것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는 사료는 전혀 없으며, 대체로 민정문서의 '연수유답'을 그것이라고 보지만 이 또한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 온전히 합의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없다.[70] 지금이야 듣보잡 전쟁이지만 당시 전한에서는 나라의 반이 연관된 엄청난 전쟁이었고 이후에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71]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책이 역사책인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72]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조회해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필사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살아있던 시기에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호(虎)라고 썼을 수도 있다.(대표적으로 <삼국유사>)[73]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는 호왕이라고 기록했다.[74] 수원 최씨 가문 출신. 한남군 공작 최사위의 고손자.[75] 사실 엄밀히 말하면 신라가 보덕국이나 탐라국에 책봉관계 비슷한 관계를 맺기는 했다. 특히 보덕국은 정말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에게 중국 주나라마냥 금마저 땅을 떼주고 책봉의 절차를 밟았으며 봉건제와 같이 보덕국 내에서 자치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는 고구려 왕가의 정통성을 신라에 흡수해 삼국통일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퍼포먼스로서 상당히 예외적이고 단기적인 사례고 기록도 상세하진 못해서 그냥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 몇 줄의 단편적인 기사만 남겼다.[76] 그러나 김부식은 타국 자료를 인용하기는 했지만 타국 자료와 자국 자료가 충돌하면 꼭 "(기록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 기록이 옳은 것 같다."라는 식으로 기술했다.[77] 제 45권 「열전」 제 05 溫達(온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