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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5:07:58

나당전쟁

나당전쟁
羅唐戰爭[1]
Silla–Tang War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670년 (문무왕 9년) ~ 676년 (문무왕 15년)
파일:나당 전쟁.jpg
장소

한반도 전역, 서해
요동
원인 신라와 당(唐)의 한반도 쟁패전(爭霸戰).
교전 세력 신라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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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군
백제 부흥군
보덕국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문무왕 (신라 국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유신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원술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시득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문훈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설오유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죽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천존
파일:고구려 군기.svg 안승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연무
파일:고구려 군기.svg 검모잠
[2]
지휘관

파일:tang_fel2.jpg 고종 (당나라 황제)
파일:tang_fel2.jpg 설인귀
파일:tang_fel2.jpg 고간
파일:tang_fel2.jpg 유인궤
파일:tang_fel2.jpg 유인원
파일:tang_fel2.jpg 이근행
파일:tang_fel2.jpg 연군부인 유씨[3]
파일:tang_fel2.jpg 김풍훈[4]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융
병력 병력 규모 불명 200,000명 이상[5]
피해 30,000명 87,000명
결과 신라-고구려, 백제 부흥 연합군의 승리
영향 대동강 ~ 원산만을 경계로 신라의 삼국 통일 완성
신라-당 관계 일시적 파탄

1. 개요2. 배경
2.1. 개전의 원인
2.1.1. 정치·외교적 요인2.1.2. 군사적 원인2.1.3. 비열홀 반환 문제
2.2. 신라의 전쟁 준비
2.2.1. 정치·외교 분야의 준비2.2.2. 사회·경제 분야의 준비2.2.3. 군사·기술 분야의 준비
3. 전개
3.1. 개전 : 신라의 요동 선제 공격
3.1.1. 요동 공격군의 편성과 성격
3.2. 성동격서 : 구 백제 지역 공격3.3. 고구려 부흥군의 붕괴3.4. 옛 백제 영토에서의 충돌3.5. 석문 전투3.6. 수세에 몰린 신라3.7. 임진강을 두고 대치하다3.8. 절정 : 매소성 전투3.9. 결말 : 기벌포 전투
4. 전후
4.1. 냉전4.2. 당-신라 관계 정상화
5. 의의
5.1.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이 성장?
6. 나당전쟁을 둘러싼 시각의 변화와 연구 방향
6.1. 이후의 연구
6.1.1.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견해6.1.2. 중국 학자 진인각의 견해
6.1.2.1. 반박
6.1.3. 국내 학계의 연구
6.1.3.1. 이기백의 견해와 1980년대까지의 연구6.1.3.2. 1990년대의 연구6.1.3.3. 2000년대의 연구
7. 창작물에서의 나당전쟁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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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크멘터리 전쟁사 - 나당전쟁

서기 670년 신라고구려 부흥군 연합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어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7년간 진행된 신라 사이의 전쟁. 여기서 신라가 승리해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확보했던 옛 백제 전역, 고구려 영토의 요충지를 잃어버리고 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2. 배경

삼국시대 말기 당시 신라는 주로 백제와 대립하는 관계였다. 643년 고구려김춘추의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오히려 백제와 손을 잡아 여제동맹을 결성하자, 647년에 김춘추가 왜국을 찾아가지만 역시 뚜렷한 외교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게 신라는 주변국 중 아군을 찾을 수 없어 원교근공의 전략하에 당나라에 도움을 구했다. 진덕여왕당나라에 보낸 <치당태평송>이라든가 당나라의 연호, 복식 등을 도입한 것을 보면 이미 왜국고구려와의 외교에 실패한 신라가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당시의 절박한 심경이 상당히 드러난다.

결국 이 같은 노력은 결실을 맺어, 나당연합군은 660년 동서로 협공해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년 전 백제군에 의해 참살당한 사위의 원한을 아직도 잊지 않은 태종 무열왕의자왕에게 친히 자신에게 술을 따르게 함으로서 원수를 갚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라를 기선제압하기 위해서 당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신라의 선봉장 김문영이 약속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한 것[6]을 이유로 목을 베라고 명령했는데 김유신이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도끼를 들고 당군 진영으로 달려가서 소정방에게 "지금 당장 그 명을 무르지 않으면 우리 신라는 백제보다 니네 당나라를 먼저 칠 것이다!"라고 강력히 항의하면서 겨우 무마시키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7] 이 사건은 비록 나당동맹 관계에 있지만 신라가 순순히 당나라의 뜻을 따르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당동맹은 계속되어 668년 고구려까지 쓰러지자, 당은 내친 김에 한반도 전체에 발을 뻗으려는 마각을 드러낸다.

2.1. 개전의 원인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아직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비롯한 당나라와의 여러 이익들이 상충되기 시작하면서, 신라의 불만은 점점 축적되어 갔다. 당에게 주권(군권)의 일부까지 바치다시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건만, 실익은커녕 위협까지 더 생긴 격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런 불만 속에서 663년에 당 조정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였다. 물론 실제로는 신라가 멀쩡히 존재했으니 구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와 달리 당나라의 계림대도독부로 기능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당나라에 편입시킨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위였다.

거기에 더해 이듬해인 664년과 665년에는 백제와 신라가 더이상 싸우지 않고 서로 화해하게 하는 웅령 회맹취리산 회맹을 억지로 맺게 했는데, 특히 665년의 취리산 회맹에는 이미 멸망한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현직 신라왕인 문무왕을 유인원의 참관하에 반강제로 참석시켜 맹세를 하게 했다. 그리고 이 맹세문을 <금서철계(=단서철권)>에 기록해 반으로 나눠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신라 측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였던 것은, 부여융과 문무왕이 당나라의 주선으로 회맹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국 이미 멸망하여 당나라의 통제 아래 꼭두각시로 움직이고 있었던 백제(=웅진도독부)가 신라와 동등하다는 뜻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라에게는 옛 백제 영역으로의 침투를 막고, 여차하면 백제처럼 될 수 있다는 협박과도 같았다. 문무왕은 아직 당나라와 맞설 준비가 안 되었으므로 치욕을 감내하고 그대로 따랐다.

2.1.1. 정치·외교적 요인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백제 부흥군이 진압된 후 옛 백제 지역의 대부분은 신라가 아닌 당의 지배에 귀속되었다. 당은 우선 백제 전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 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려 했으며, 이 중 옛 백제의 수도권인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했다.[8]

당군은 옛 백제 지역의 대내외적 여건이 여전히 불안한 상황인 것을 파악한다. 오랜 전란으로 기존 백제의 행정체계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인구는 이산하였으며,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신라나 왜와의 관계 등 주변 상황도 매우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당 조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백제 지역을 대고구려전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구체적인 작업을 일임받은 사람은 663년 백강 전투에서의 백제부흥군 격파에서 자신의 안목을 보여준 유인궤였다. 손인사유인원이 귀국하고 난 뒤, 유인궤는 웅진에 머물며 전후 복구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행정적 조처를 취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백제 유민을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작업과 웅진도독부의 관할 범위를 확정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특히 웅진도독부의 세력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식은 멸망한 옛 백제 부여씨 왕족을 전면에 내세워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것이었다.[9]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백제라는 나라는 실제로는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씨 왕실이 겉보기로는 여전히 남아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고, 당의 꼭두각시라고는 해도 백제인들의 자치 국가 내지 속령 비슷한 체제로 존재하게 되므로 신라는 이 지역으로는 한 발자국도 더 들어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660년 당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663년 귀국하였다.[10] 이 당시 부여융의 역할은 부여풍[백제]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부여풍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규합하는 것을 막으면서 백제 유민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비록 폐태자였지만 정상적으로 의자왕이 사망했으면 왕위를 이었을 위치인 부여융이 태자 자리와 거리가 멀었던 부여풍보다는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

백강 전투 이후 부여풍의 세력은 소멸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부여융은 당나라 입장에서 이용 가치가 남아있었다. 백제 태자였던 사람을 구 백제 영토 통치기관의 수장으로 앉히면 백제 유민들이 마치 백제가 부활한 것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이 진압되고, 그가 고구려로 도망간 뒤에도 옛 백제 지역 통치의 '도구'로서 부여융의 가치는 여전했다.

또한 당 입장에서 부여융은 동맹국인 신라의 동향에 대해서도 이용가치가 있었다. 부흥군을 진압하는 동안 신라는 구 백제 여러 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침투시켰고, 당나라는 이 점을 우려하였다. 당은 대신 부여융을 웅진도독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내세워서, 문무왕과 회맹하게 했다.

신라 측 기록에 따르면,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당의 대부 두상(杜爽)은 "백제를 평정한 후 서로 회맹하라." 는 당 고종의 칙명을 내세워 부여융과 회맹할 것을 신라에게 종용했다. 당연히 신라는 회맹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거부했지만, 임존성이 함락된 후 회맹하지 않은 것을 당 고종이 책망하자 별 수 없이 맹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664년 2월, 신라 대표인 각간 김인문과 이찬 천존(天存)이 당의 칙사 유인원과 더불어 웅진에서 부여융과 맹세했다.[12]

이로써 당은 백제부흥군과의 전쟁 기간 중 확장된 신라의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백제 왕자인 부여융을 내세워 신라와 대등한 회맹을 맺게 하여 공식적으로 신라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 회맹 당시 신라측 인사로는 문무왕 본인이 아니라 신하인 김인문과 천존이 나섰다. 문무왕 본인이 아닌 신하를 참석하게 함으로써 문무왕은 부여융에 대해서는 물론 회맹을 주재하였던 당나라 칙사보다도 상위인 모양새가 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문무왕의 기를 꺾기 위해 회맹을 다시 한 번 추진했고, 664년 문무왕을 명목상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책봉하였으며, 부여융 역시 웅진도독으로 664년 10월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665년 8월,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유인궤가 회맹문을 짓고, 유인원이 주재하는 부여융과 문무왕의 회맹이 이루어졌다. 이때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간신히 멸망시켰던 원수 백제가 5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

이 이후로, 웅진도독부는 자체적으로 곽무종(郭務悰) 등을 옛 동맹국이었던 왜국에 파견하는 등 자체의 위상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13] 먼저 자신들의 위상을 세우고 부여융이 문무왕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 회맹을 갖게 함으로써 신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 모든 그림을 뒤에서 조종한 유인궤는 복구사업을 진행하고 행정체계를 갖추면서 대 고구려전을 준비했다. 단기적으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웅진도독부 체제를 굳히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신라 입장에선 이런 행동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당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취리산에서의 회맹 등에 참여했지만, 부여융과의 회맹은 당의 괴뢰정권화 된 백제의 재건을 승인하는 의식이었기에 신라가 진심으로 따랐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당과 전쟁을 시작한 이후,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신라의 불만으로 가장 강조한 부분이 이 문제였다. 당나라의 손을 빌린 백제 재흥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대백제전 성과를 모조리 앗아가는 일일 뿐 아니라, 신라의 안보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재흥 백제국의 본체는 세계 최강의 국가 당나라의 군사력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위협이 신라의 턱밑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당장 660년 8월, 당군이 백제를 멸한 뒤에 신라까지 침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신라 조정이 긴급하게 대책 마련을 위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헛소문에 따른 한바탕의 소동으로 끝났지만, 강대한 무력을 인접하게 되면서 신라는 늘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웅진도독부가 왜와의 교섭을 시도한 사실도 신라가 몰랐을 리 없다.

이런 가운데 신라 조정은 자국의 위상과 당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주대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당나라 장수의 주재 아래 회맹하였으니, 이는 당나라에게 신라도 백제와 같은 성격의 존재로 규정되고, 또 백제처럼 될 수 있음도 의미하는 일이었다.

간단히 정리해서, 나당전쟁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것이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이다. 이는 671년 설인귀가 보낸 서한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한 것으로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에 남아있다. 이 문서에서 신라가 불만으로 제기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신라는 당이 영토분할 약정을 위반한 점, 백제·고구려 평정에 신라의 공이 컸다는 점, 부여융과의 취리산 회맹은 부당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라는 <답설인귀서>를 보낸 직후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문무왕의 답서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접수하겠다는 것을 당에게 통보하는 성격의 편지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p.331)

당은 신라와 협약을 맺었던 648년 당시에는 기미정책(羈靡政策)의 대상으로 고구려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50년대 이후 대외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수정했다. (최현화, <7세기 중엽 당의 한반도 지배전략>, 《역사와 현실》 61, 2006) 당이 비록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정에서 신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로 당은 여전히 신라를 '연합' 이 아니라 '군대를 이용'했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결국 신라는 당의 지배체제 속에 포함됨으로서, 신라가 멸망시킨 나라들과 형식상으로는 별 차이도 없는 동등한 위치가 되고 말았다. 신라는 삼국통일과정에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실익도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쌍방의 공동이익이 없는데 나당동맹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아버리기 위한 전쟁이라는 적극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박현숙, 앞의 논문, pp.242~243)

2.1.2. 군사적 원인

군령권은 실질적인 군대의 운용 및 통솔과 직결되는 군에 대한 지휘·명령·감독권이다. 이러한 군에 대한 군령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 군사통수권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나당동맹이 결성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이 진행되면서, 당나라는 스스로 상국이라는 자부심에 입각해 신라 국왕의 군령권을 심하게 훼손했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또 칙명으로 임금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중략)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원정에 앞서 당은 신라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하고,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보면 신라 왕이 당나라의 1개 행군총관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행군의 병력은 모두 신라군으로 구성되어 신라 왕이 신라군을 그대로 지휘·통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원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당군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신라 왕의 군령권이 약화된 것이었다. 당군에 의한 신라 왕의 군령권 행사 제한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지휘·통솔권의 문제였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혹은 영(永)이라고 한다.】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9월 23일,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보내 그들을 쳐서 쫓아내었다.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하고 우리 병사와 함께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첫 번째 기록을 보면 소정방이 김유신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신라군의 김문영을 임의로 처벌하려고 했다. 결국 김유신의 반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당군은 신라군보다 우위에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이후에 점차 강화되어 나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례를 보면, 웅진도독부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과 신라군이 모두 당의 장군에 의해서 지휘되며 통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당군은 백제 주둔 신라군에 지휘·통솔권을 일부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장수의 임명권에 관한 부분이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장에 가도록 하였다. 임금이 곧장 지경을 파진찬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조칙을 내려 대아찬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자, 왕은 일원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해당 기사를 보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이 신라의 지경과 개원, 그리고 일원을 당의 장수로 임명하여 전장에 투입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신라 왕은 단순히 이를 수용하고 인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신라가 모든 장군에 대한 임명권을 당나라에게 넘겨준 것은 아닐 테지만, 최소한 당은 원하는 인물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해 신라 왕에게 통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목전의 고구려 원정이 계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군통수권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병력 징발권의 문제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가도록 하고, 또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당 고종은 백제 진장인 유인원으로 하여금 비열도를 따라 신라의 군사를 징발케 하였다. 이는 신라의 병력 징발을 신라군에게 위임하는것이 아니라, 당군이 직접 징발·편성하여 당군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당은 장군 임명에서 나아가 병력 편성까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장군 임명 때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전 병력을 당군이 장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군이 신라의 백성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서 그 의미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넷째로, 군사작전권에 관한 문제이다.
유신 등은 병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 (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 (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유신(庾信)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果瓜川)을 건넜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힐차양(肹次壤)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당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신라군의 식량 수송이나 행군 독려시에는 철저히 조서나 서신을 보내어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뒤의 기사들을 보면 나당 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보 공유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신라군은 당군의 연락하에 철수한 것이 아니라, 매번 당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철수할 만큼 작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심지어 신라 왕이 직접 참전했음에도 당은 신라에게 정보 전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군사작전권도 오로지 당군에게만 있었으며, 신라는 이를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했다.

백제 원정 후 신라는 웅진도독부 신라인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을 일부 이양해야 했고, 고구려 원정에서는 장군임명권과 병력징발권까지 당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상황을 지켜보기에 이르렀으며, 정보 전달이나 작전계획은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 통보 내지는 미통보로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나당 연합군은 점차 평등관계에서 종속관계로 이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을 거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 대가로 영토를 얻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왕권과 신라군의 입지가 강화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왕권의 추락과 신라군의 사기저하가 일어나면서 내부적으로 당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2.1.3. 비열홀 반환 문제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비열홀은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일대이다. 진흥왕 17년인 556년에 비열홀주가 설치되었다가 나중에 폐치되었고, 다시 복치되었다가 폐치되기를 반복했다. 위의 기록은 설인귀에 대해 문무왕이 답신을 보낸 <답설인귀서>의 내용으로, 신라가 비열성의 처리 과정에서 당나라의 행동에 대해 불평하는 모습이다. 문무왕은 비열성이 원래 신라의 땅이었는데, 고구려에게 빼앗긴 지 30여 년 만에 되찾아, 백성을 이주시키고 수비를 하였는데 이를 당이 도로 고구려에게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라가 비열홀주를 되찾은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무왕 8년인 668년의 비열홀주 설치에 대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이전 30년간 고구려가 비열홀을 지배했다는 말을 소급해서 30년 전으로 가 보면 선덕여왕 시기 637년의 우수주 설치가 나타나는데, 이 우수주(춘천)의 설치는 비열홀의 상실에 따른 통치 지역의 개편이었다. 고구려 원정 과정에서 보면 비열홀의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을 경유해서 가거나 혹은 이 지역에서 병력을 진발하는 등 상당한 요충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슬라(何瑟羅) 또는 하서량(河西良)로 고구려가 이름을 붙인 강릉 역시 선덕여왕 때 빼앗긴 것으로 추정되므로 비슷한 시기 고수전쟁 당시 상실한 영토의 회복을 위한 고구려의 반격으로 영동일대가 상실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영동에 설치된 신라판 광역시쯤 되는 하서소경이 태종 무열왕 때 소경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기록상으로도 영동 실함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때이다. 촉한시대 경조윤·우부풍·좌빙익·홍농군·하남군·하내군·하동군 총 7곳을 담당하는 사례교위부와 그곳의 수장인 사례교위 같은 취급을 받은 것.

이렇듯 668년 고구려 멸망을 전후로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던 비열홀을 신라가 재빨리 확보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다시 고구려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이때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안동도호부의 관할로 귀속되었다고 보는 게 옳은 해석이다. 하지만 669년 무렵의 기록을 보면 신라가 비열홀 등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진휼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는 당나라가 비열홀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와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왜 당나라의 명령을 거부하고 비열홀에 집착하였을까? 안변은 평양·서울과 더불어 트라이앵글을 이룬다. 당이 평양과 안변 지역을 장악할 경우 신라는 서울 지역을 지키기 어려워지고, 반대로 신라가 서울과 안변 지역을 장악할 경우 평양 지역을 압박하는 데 유리해진다. 이렇듯 비열홀(안변)은 신라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견제하고, 한강 하류 지역을 방어하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사전략적 핵심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비열홀은 평양 일대와 한강 하류 일대를 견제할 수 있고,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14]

게다가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되찾은 비열홀 지역이 문무왕에게 주는 위신의 문제도 있다. 이미 전쟁의 성과에 대한 불만이 축적되는 상태에서 신라가 당에 굴복하여, 비열홀에서까지 물러난다면 문무왕의 위상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2.2. 신라의 전쟁 준비

전쟁을 준비하는 태도는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신라는 이미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신라군을 백제군 복장으로 변장시켜 당군과 싸우게 하자는 강경한 제안이 무열왕 면전에서 나오고, 김유신이 여기에 찬성할 정도로 이미 나당전쟁의 불씨를 초기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친왜적인 부여풍 등의 백제 부흥군, 한반도에 파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바다 건너 왜국, 그리고 고구려라는 나당 공동의 적이 남아있었던 시기라 나당간의 직접 충돌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나당간의 군사적 충돌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으로 670년 3월,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군이 합동으로 압록강 이북의 오골성 방면으로 진격, 4월 4일 말갈병을 박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은 가장 늦게 잡아도 이 시기에는 벌어졌으므로, 전쟁 준비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신라는 669년 5월, 당나라에 급찬 지진산(祗珍山) 등을 당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사죄사로 각간 김흠순파진찬 김양도를 파견하였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이자 오랫동안 전장에서 공을 세운 최고위 귀족 중 한 명이었고, 김양도 역시 파진찬으로 고위 귀족이었다. 신라 조정이 이런 고위 귀족들을 보내어 '사죄'할 건이 무엇일까?
10년(670) 봄 정월에 고종이 흠순(欽純)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황제가 책망하고 성내면서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이 기사에서 말하는 '사자를 재차 억류' 하게 한 사건과 처음 김흠순 등이 '사죄사'로 가게 된 건이 같은 종류의 사건인지 별개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라는 기록이 있고, 또 이 이야기가 당나라에 보고되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이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의 공격은 669년 중반쯤에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실하고, 670년 3월에 이루어진 신라와 고구려 유민군의 요동 공격 역시 이 무렵에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의 동생이자 문무왕의 외숙인 각간 김흠순, 고위귀족 파진찬 김양도를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는 '사죄사'로 파견해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은, 당나라가 일단 웅진도독부를 두어 지배하고 있던 구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군의 공격 말고는 따로 떠올리기 어렵다. 아마 백제 지역 공략을 위한 탐색전을 벌였는데, 당이 항의하자 이를 일시적으로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달리 말하면 당의 신속한 반격을 늦추기 위해, 김흠순과 김양도가 669년 5월에 사죄사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69년에 있었던 174개 목장 분배 기사를 이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174개 목장의 구체적 위치가 기록에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무려 174개나 되는 목장을 한꺼번에 여러 신하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은 군공 포상으로서 새로 확보된 지역은 당나라에게서 빼앗은 구 백제 영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669년에 구 백제 영역의 상당 부분을 신라가 새로 점령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15]

그렇다면 나당전쟁의 실질적인 개전 시점은 669년 5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일에 나선 김흠순과 김양도 등이, 자신들이 무사 귀환을 장담할 수 없음을 모르고 당나라로 떠났을 거라고는 보기 힘들다.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식으로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처럼 여긴 그들의 결연한 태도가 신라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결국 670년 당은 김흠순은 돌려보내지만 김양도는 감옥에 가뒀는데 김양도는 곧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당나라는 김양도를 죽게 한 이유로 '문무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나당전쟁의 개전 시점은 가장 늦어도 670년 3월에서, 빠르면 669년 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니, 고구려가 멸망하고 670년에 신라가 당을 분명하게 선제 타격하기 전까지의 시간, 즉 669년의 움직임에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 신라는 그 시기 대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2.2.1. 정치·외교 분야의 준비

669년 정월, 당나라의 승려 법안(法安)은 신라에 자석을 요청했고, 앞서 말한대로 신라는 이에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자석은 당시에는 지혈제로서 사용되었으며, 베이거나 창이 찔린 금창 치료에 사용되었다. (이현숙, <7세기 통일전쟁과 전염병>, 《역사와 현실》 47, 2003)

그런데 중국은 자석 산지가 따로 있을 만큼 자석에 대한 공급이 원활하던 나라다. 그리고 법안은 670년 무렵에 다른 당나라의 관리들과 함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킨 검모잠에게 살해당했던 인물로, 당시 각국의 승려들이 정보전달이나 정보수집 역할을 한 점에서 볼 때 당나라의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높다.[16] 당이 자석을 요구하고 신라가 헌상을 한 일은 기본적으로는 외교의 일환이지만, 한편으로는 정보 수집을 위한 나당간의 탐색전이라 볼 여지가 충분하다.

또 앞서 말한 대로 사죄사를 669년 5월 신라가 당에 보낸 것은, 4월 경에는 신라군의 일부가 백제 고지로 들어가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신라는 당의 신속한 반격과 대응을 늦추기 위해, 또 급격한 정세 변화에서 신라인 자신들의 충격도 완화하기 위해 사죄사를 파견해 당나라를 안심하게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668년 급찬 김동암이 왜국에 간 일도 주목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던 시점이므로, 신라가 벌써 이 무렵부터 향후 당나라의 충돌에 대비하여 왜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타진과 왜와의 화해, 국교 재개 등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나당전쟁 직전 당 외에는 우방이 없던 신라가, 왜와 외교창구를 열어 후방의 염려를 줄인 후에 나당전쟁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슬피 고하기를,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이니, 대국에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리를 잃어서 멸망을 당하였지만, 지금 신 등이 나라의 귀족(貴族) 안승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번병(藩屛)이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정착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문무왕 10년(670)

669년 2월에는 신라에 호재가 생기는데, 검모잠과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보장왕의 뒤를 잇는 고구려왕으로 추대된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000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라가 원병을 보내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는다면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 문무왕은 고구려는 역사가 깊은 나라인데 연남건 형제 때문에 망했고, 고구려인들에게는 임금이 필요하다면서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군 세력에 군량미 등 전쟁물자를 보내주었다.

안승의 혈통에 대해서 기록의 차이가 있지만 일단 고구려 부흥 세력에 의해 고구려왕으로 추대될 만큼 고구려의 정통성을 대표할 만한 혈통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안승을 이용해 나당전쟁 기간 동안 옛 고구려 영토 각지의 고구려 부흥군과 순조롭게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당군은 옛 백제 고토(웅진도독부)와 북쪽 고구려 고토(안동도호부)에 모두 있으므로 신라는 나당전쟁이 시작되면 양면전선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는데 고구려 부흥군이 북쪽을 맡아주면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었다. 물론 검모잠안승이 이끄는 고구려인들도 그저 신라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협조한 것만은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은 고구려 부활이었을 것이므로 윈윈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17] 나당전쟁의 본격적인 개전이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이 함께 요동을 공격한 것이므로, 이미 이 669년 시점부터 비밀리에 연대하고 대당 개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당나라 역시 신라의 주요 귀족들에 대한 회유를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했다. 우선 당대 신라 최고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유신에 대한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660년 백제 멸망 직후에 당고종은 김유신에게 군공을 치하하며 구 백제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려고 했지만 김유신은 이를 거절했다. 또한 665년과 668년에도 작호와 식읍을 하사하고, 김유신이 직접 당나라에 조회하러 오라 했지만 김유신은 가지 않았다. 이외에도 당나라에 일부 회유되어 첩자로 활동한 귀족도 있었는데, 문무왕은 이들을 조기에 적발해서 단호하게 숙청해 뿌리를 뽑았다. 662년에 진주와 진흠, 668년에 박도유, 670년에 수세, 673년에 대토가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2.2.2. 사회·경제 분야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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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文武王)
문무왕 대에는 재위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되는 사면조치가 진행되었다. 대사면이 활발했던 이유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축하하기 위한 조치일 뿐만 아니라, 그만큼 사면해야할 범법자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669년의 대사면에 관해서는 사면 대상과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문무왕은 신하들에게 교서를 내리면서, 범죄자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 포괄하여 사면했다. 참고로 이 교서는 한국 역사상 내용이 기록된 교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서쪽에서 침입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이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따로 떨어져 멀리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중한 신분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조회하고 병사를 요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전쟁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쌓인 깊은 원한을 갚고,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다.

선왕께서 비록 백제를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미처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는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모두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영혼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울어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생하며 아직 새로이 시작할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니,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총장(總章) 2년(서기 669)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의 이하로써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석방하고, 이전에 사면을 받은 이후에 또 죄를 범하여 벼슬을 빼앗긴 사람도 모두 그 전과 같게 하라. 도적질한 자는 다만 그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들 중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빌려 쓴 사람으로서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들은 이자와 원금을 반드시 갚지 않아도 되게 하고,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들은 곡식이 익을 때에 단지 빌린 만큼만 갚고 그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되도록 하리라. 이달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5역의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범죄자와, 손해배상을 해야할 자들을 모두 사면하였으며, 백성 가운데 부유층에 곡식을 빌어 그 이자 부담 때문에 노비로 전락할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였다. 이 같은 사면은 신라 사회의 경제적 피폐화에 따른 민간 신분층의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중에서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신라의 포로가 되었을 고구려 장정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장기간의 전쟁으로 생활고에 시달려 범죄를 저지른 신라 장정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훈, 《나당전쟁연구》pp.77)

고대의 전쟁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효율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무열·문무왕 어간에 군사 총동원체제를 운영하면서, 군사 참여층은 중앙과 지방을 포함한 전국의 민으로 확대되었는데, 훈련된 적군의 포로나 사면된 장정들이 있다면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병력자원으로 충당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름 5월에는 천정(泉井), 비열홀(比列忽), 각련(各連)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는 등 문무왕은 나름대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려고 했다.

2.2.3. 군사·기술 분야의 준비

나당전쟁을 준비하며 신라의 첩보 활동이나 정보 수집 능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669년 5월 지진산을 보내 당나라에 자석을 바치고, 그 해 겨울 복한(福漢)을 당나라로 보내 목재를 바친 것도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나라 역시 신라의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을 당으로 데리고 가는 등, 669년에는 나당간의 본격적인 정보 수집과 군사기술 획득을 위한 첩보전이 활발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노 제작 기술자인 구진천이 당으로 갔던 것은 신라의 가 우수한 성능을 가졌기 때문이며, 이러한 노의 성능 개량은 문무왕대에 무기 발전 정책을 추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병부에 노사지(弩舍知)와 노당(弩幢)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노에 대한 생산과 관리를 전담시킬 정도로 적극적으로 배려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구진천은 조국 신라를 위해 끝까지 비법을 숨겼다. 처음에는 신라의 자재를 쓰면 잘 될 것이라며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는 나무바다를 건너는 도중 습기를 너무 많이 먹어 성능이 형편없게 나왔다고 끝까지 버텼다. 이에 노한 당나라에서 온갖 협박을 가했지만 끝까지 신라 쇠뇌의 기술을 유출하지 않았다. #[18]

또한, 위에서 서술한것처럼 이 시기에는 174개의 목장을 재분배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기병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70~680년대 신라의 급진적인 기병 증설은 669년 목장 재분배와 이를 받은 진골 귀족들의 참여를 상정해 볼 수 있다.[19]

언급한 사항들과 위의 표를 참조하여 보면, 신라는 늦어도 668년 하반기부터는 이미 당나라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여 일본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고, 669년은 전쟁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전쟁 대비를 했으며, 670년 초에는 요동을 목표로 선제 공격에 나섰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신라는 이러한 철저한 전쟁준비를 바탕으로 하여, 전격적인 요동 선제 공격과 백제 고지에 대한 타격을 감행, 나당전쟁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

3. 전개

3.1. 개전 : 신라의 요동 선제 공격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신라는 당의 야욕과 하대에 더는 참지않고 맞서기 시작했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세력의 고연무(高延武)가 지휘하는 연합군 20,000명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오골성을 선제 공격했는데, 이 시점이 바로 나당전쟁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물론 양면전쟁 위험과 원격지 요동을 오랫동안 점령할 순 없었고 몇 달간의 일시적 점유였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신라는 나당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북쪽에서 시간을 번 동안 671년까지 당군이 지키던 백제 고지를 대부분 영토화하였다.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20]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오골성(랴오닝성 봉황성)까지는 약 1,850리(740km), 서울에서 오골성까지는 약 1,000리(400km)이다. 당시의 1일 행군 속도는 30리(12km)~60리(24km)였다.(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장거리에다 대규모의 행군이었으므로 1일 평균 30여리로 행군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 부대가 경주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62일, 한강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더라도 33여일이 소요된다. 물론 이는 당시의 행군로[21]나 보급 여건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수치로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즉, 최소 1~2달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3월에 압록강을 건너는 부대는 670년 1월경에는 주둔지를 출발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대편성과 계획은 669년 말기에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는 부분은 신라 조정에서 설오유 부대 등을 의도적으로 겨울 혹한기에 이동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도적으로 설오유 부대를 강행군시켰다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1월경에 출발했고, 3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4월에 교전을 치루었다면 작전 수행기간만 3개월 이상이 된다. 혹한기에 장거리 행군을 하고, 교전에서 승리를 했으며, 물러났을 시기에도 패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전략상 후퇴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볼 때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 부대는 그 숫자는 비교적 적지만 신라에서 엄선한 정예군으로 사기가 높았으며, 분명 뚜렷한 부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케우치 히로시 등은 20,000명이라는 적은 부대가 신라 본토에서 황해도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까지 침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노태돈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실제로 압록강이라고 명확히 기록된 것을 '신라 주제에 요동까지 어떠케 감?'이라는 식의 착오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케우치 히로시가 2만을 적은 부대라고 했지만 사실 2만은 전근대 시대에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삼국지연의》나 여러 소설 등의 영향 그리고 나당전쟁 50여년전 수나라가 백만 대군으로 쳐들어간것으로 인한 영향으로 수십만, 100만 대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2만을 적은 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세계적인 강대국인 당나라조차 중국 본토와 먼 곳에 원정을 보낼 때는 3만~5만명 선에서 병력을 맞춰 보낸 만큼[22] 2만은 적은 수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설오유 부대의 작전이 매우 신속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2만의 군세는 (후술하겠지만) 기병으로(또는 기병의 비율이 매우 높게) 편성됐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기병, 보병 혼성 편제로 2만이어도 엄청난데 기병 전력만 2만이면 이는 적다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군세이다.

이에 대해 669년 9월, 대륙 반대편의 당나라 서쪽 토번이 강성해져서 한반도 주둔 당군이 토번 전역으로 철수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건은 토번이 당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토번이 토욕혼을 압박한 사례였고, 토번이 본격적으로 당을 압박한 것은 670년 4월이므로, 안동도호부신성으로 옮긴 것과 병력 철수 등은 고구려 유민과 관련이 깊다고 노태돈은 주장하였다. 평양 주둔 당군이 고구려 유민 강제 이주에 동원됨에 따라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과 군사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군대가 평양 주변을 지나고 압록강을 넘어 당군과 충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평양 일대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공백상태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되는 개돈양은 위치를 알기가 어렵고, 비정되고 있는 지역도 없다. 다만 오골성 주변이므로 압록강 이북 지역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皆敦壤이 아니라, '모두(皆) 돈양(敦壤)에 이르러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만약 개돈양을 돈성, 즉 신성이라고 한다면,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는 669년 신성으로 이동한 안동도호부를 목표로 이동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들이 압록강 유역으로 진군했다면, 평양 부근에 있는 안동도호부 세력을 지나갔다는 것이 된다. 비록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이 시점에서 공터는 물론 아니다. 이 때 설오유 등이 취할 수 있는 루트는 크게 3가지다.

오골성평양성을 연결하는 구간은 안동도호부의 주요 간선도로로서, 고려시대에는 북계서로라고 불렀으며, 여요전쟁 때는 거란군의 공격 루트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교통로가 통일신라의 교통로를 계승하면서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설오유와 고연무의 연합군은 북계동로를 이용, 평양을 조금 우회하고 대규모 전투를 회피하면서 빠르게 북상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3.1.1. 요동 공격군의 편성과 성격

설오유 부대는 정병 10,000여 명으로, 고연무 부대의 10,000여 명의 병사와 연합으로 요동 공략 작전에 나섰다. 설오유와 고연무의 부대를 '정병'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들은 이미 군사적 경험이 있었던 자들로 여겨진다. 이들은 요동에서 4월 4일 당나라 소속의 말갈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맞서 싸워' 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야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당군이 계속 이르자 물러나서 백성을 지켰고, 이는 수성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설오유 부대는 야전과 수성전을 모두 수행했고, 이들은 기병·보병 혼성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휘관 설오유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통일전쟁기에 접어들어, 신라의 인물 중에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물은 왕, 왕족, 진골 및 유력 귀족 외에는 없었다. 특히 유독 설오유만 설씨라는 성씨에 비교적 낮은 사찬의 직위로 10,000명에 이끄는 독립 원정군을 이끌고 있었다. 나당전쟁 시기 신라 관인의 활동 중에,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직접 병력을 지휘한 예는 670년의 설오유와 676년의 시득이다.[23]
또한 당시 신라의 병력 동원능력에서 군사 1만여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원정군을 이끈 지휘관이 진골이 아니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테면, 670년 7월 구 백제 공략전에서 장군 대다수는 진골 귀족이었다.
설오유 부대는 또한 진골 귀족의 책임자도 없었다. 672년의 석문 전투 등의 사례에서도 나타나지만, 나당전쟁 시기 독립 작전을 수행하는 원정군이나 방어군에는 기본적으로 진골귀족이 책임자로 임명되고, 실무 담당자로 사찬급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설오유가 대규모 원정군의 총책임자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이는 설오유 부대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오유 부대가 정병이라는 표현이 있고, 실제로 이들은 작전지속기간이 3개월 이상으로 비교적 길었으며, 30일 이상의 원거리 행군과 도하작전을 실시했고, 혹한기에 부대이동을 강행했다. 또한 행군간 및 전투 후 이탈자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또한 적극적으로 당군과 교전했다. 사서에서는 설오유 부대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신라가 끌고 온 사람들이 신라의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전투가 가능한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시기라면 고구려의 유력층은 다수 당나라로 압송된 상태였지만, 668년의 기록을 보면, 11월 5일 문무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000여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는 말이 나오고, 671년의 <답설인귀서>에서 나타나는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 또한 가지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본다면 신라가 끌고 온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전투가 가능한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주장한 이정빈 등은, 신라는 이들을 억류 관리하기보다는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고, 670년 3월의 설오유 부대와 고연무 부대의 요동 진출에는 고구려 포로들의 역할이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본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대전쟁 중이었고, 작전 내용도 일찍이 신라가 겪지 못한 환경의 전장에서 싸우고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분을 초월해 전문가인 설오유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예로, 진골과 장군참모장교는 엄연히 다르긴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경우, 전쟁대학을 나온 장군참모장교가 아니면 장군 진급이 불가능했지만 전쟁 특유의 혼란과 능력 중시로 인해 장군참모장교가 아닌 장교들이 장군으로 진급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3.2. 성동격서 : 구 백제 지역 공격

670년 3월, 설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에, 신라군의 주력은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던 옛 백제 땅으로 대규모 진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무왕은 본격적인 진격에 앞서 다시 한 번 당나라가 신라의 행동을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외교기만책을 시도한다.
가을(670) 7월, 임금은 백제의 잔당이 배반할까 염려하여 대아찬 유돈(儒敦)을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이에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임금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사마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보내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백제를 토벌하였다. 품일ㆍ문충ㆍ중신ㆍ의관(義官)ㆍ천관(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기도록 하였다. 천존과 죽지 등은 7곳의 성을 빼앗고 2,000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곳의 성을 빼앗고 적병을 쳐서 7,000명의 목을 베고 말과 병장기를 매우 많이 획득하였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기록을 보면 신라가 먼저 웅진도독부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또한 '<답설인귀서>'의 기록을 보면, 670년 6월 고구려(부흥세력)가 당에 반역을 꾀하였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먼저 웅진도독부에 알리고 고구려 부흥군을 같이 진압하자고 말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만 본다면 신라가 웅진도독부와 협력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이미 그전 3월에 요동으로 신라군이 진격을 했고, 또한 백제 80여개 성을 전격적으로 함락하는 것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백제 고지 점령은 신라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답설인귀서>에는 신라가 671년 7월 시점까지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가능한 회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의 움직임은 신라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작전이 아니었으며, 신라가 웅진도독부에 공동출병 교섭을 시도한 것은 당에 대한 공격 의지를 일시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허위 전략이라는 시각이 있다.(이케우치 히로시)

노태돈은 신라의 대 요동 작전이 평양 지역의 당군을 소탕하고, 압록강 이북으로 진격하여 당으로 하여금 우선 요동 방면의 안전 확보에 주력하게 하여, 백제 고지에 대한 신라군의 작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양동작전이라고 주장하였다. 당나라의 고간, 이근행 등은 670년 4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합하기 위해 편성되었지만, 671년 요동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하고, 한참이 지난 9월이 되어서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의 요동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군의 한반도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노태돈이 언급한 바대로, 설오유 부대의 대 요동 공략 작전은 당군 본대의 한반도 진군 시기를 늦추는 데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이상의 여러 주장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정규군은 백제 옛 땅과 고구려 옛 땅 남부에 투입되어 영토를 확보하고, 설오유 부대는 요동으로 진격하여, 견제작전을 수행함으로서 당나라가 백제 고지에 대한 병력 지원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즉 최소한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백성으로 후퇴한 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671년 신라가 백제 고지의 중심지인 부여군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서, 설오유 부대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 그해 7월 옛 백제 옛 땅을 정복해 나갔다. 이는 곧 당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했다.

3.3. 고구려 부흥군의 붕괴

신라와 힘을 합쳐 나당전쟁을 개전한 고구려 부흥군은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나라의 토벌군이 다가오자 이에 대비해야 했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실질적으로 부흥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해 온 검모잠과, 도중에 합류해 고구려 왕가의 정통성을 가진 안승 두 부흥군 지도자간에 의견이 맞지 않았는지 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검모잠은 지금의 황해도인 한성의 유력세력으로 이곳을 기반으로 당군을 막고자 했던 것 같지만 안승은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정황상 겁을 먹고 신라로 도주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국 670년 6월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다. 이전에 백제부흥운동 때 일어났던 부흥군의 내분이 거의 비슷하게 다시 재현된 것이다.

문무왕은 안승을 받아들여 지금의 익산시인 금마저에 정착하게 했다. 안승뿐만 아니라 많은 고구려인이 호남으로 이주한 것 같은데 이후 670년 8월 1일에는 금마저의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해 형식적으로 고구려를 신라의 신하국으로 삼았고, 이후 안승의 고구려인 집단은 신문왕 시대까지 고구려의 관직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등 자치를 하게 되었다. 아무튼 결국 고구려 부흥군은 어이없이 내분으로 소멸해버렸고, 당군이 남하해 본격적인 신라군과의 충돌이 67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3.4. 옛 백제 영토에서의 충돌

신라군이 요동과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전면전이 확실시되자 예상대로 당에서도 격노하며 반응을 해왔다. <답설인귀서>에 따르면 신라 사신 김흠순이 당에 갔다가 신라로 귀국했는데 김흠순이 말하길 당이 앞으로 신라와의 국경 설정을 다시 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 작성된 지도에서는 신라가 지배하기 시작한 옛 백제 땅을 모두 웅진도독부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도 취리산 회맹을 뒤엎고 신라를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했고, 신라 내부에서도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해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병합하자는 것으로 여론이 모였다. 직후 위에서 언급했듯 670년 7월 웅진도독부의 백제인 사마 예군을 붙잡아 가두고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으며 그곳의 백성들을 신라 내지로 옮기는 대승리를 거뒀다. 670년 9월에는 나름대로 신라의 입장을 적어 당나라에 사신단을 보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는지 바다에서 표류해 당에 도달하지 못했고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반역한다고 당나라에 보고해(<답설인귀서>), 당 조정은 670년에 설인귀를 계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정복할 것을 명령했다(《구당서》 <설인귀전>).

671년 1월에 문무왕은 당주(幢主) 부과(夫果)에게 백제(웅진도독부) 변방의 를 짓밟게 해 마침내 신라군과 당군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취도 열전>) 이 전투의 승패는 기록에 없지만 부과가 용감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싸워 전사했다는 것으로 봐선 신라군이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웅진도독부에는 말갈인 군대가 도착하게 되는데 아마도 당측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당나라의 본토 군대를 보내기 전에 미리 요동 지역의 말갈군을 해로를 통해 보낸 것으로 보인다(이상훈). 말갈군이 671년 1월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고 있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이때 신라군이 병사를 내어 격파하고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신라군은 당나라 본토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바다를 넘어오는 군대를 막기 위해 대아찬 진공 등을 보내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이렇게 두 나라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는데 671년 6월 석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고 백제계 당나라 장군 2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6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당나라의 1개 행군이 10,000~12,500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황해를 건너온 설인귀의 계림도행군은 이 석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방어는 몰라도 공세는 더 이상 힘든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군은 장군 죽지를 보내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는 등 당군의 보급을 방해하고, 군량미를 소모하는 전략을 계속했다.

같은 해 7월 26일, 대당총관 설인귀는 임윤법사(琳潤法師)에게 편지를 맡겨서 문무왕에게 책망하는 글을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외교적으로는 주한대사, 군사적으로는 인민해방군 사령관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압박하는 글을 보낸 꼴이다. 이에 신라에서는 강수가 '<답설인귀서>'를 써보내면서 명분을 세웠다.[24] <답설인귀서>를 보낸 직후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데, 소부리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을 말한다. 신라군이 당군을 몰아내고 옛 백제 영토를 많이 점령했다는 뜻이다.

10월에는 황해를 건너오던 당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쳐부수고 당의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100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삼국유사》에도 같은 시기의 사건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문무왕조>에 의하면 671년에 당나라 장수 조헌이 50,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명랑이 일종의 도술인 '문두루 비법'을 사용해 배를 침몰시켰다고 쓰고 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지만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당시 태풍에 카미카제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실제로 폭풍으로 좌초한 일화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 <현령곽군묘지명(縣令郭君墓誌銘)>[25]에 따르면 곽행절(郭行節)이 나당전쟁에 참전했다가 671년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익사했다고 되어있어 실제로 폭풍이 불었던 것 같다.

672년 1월에 신라군은 백제(웅진도독부) 고성성(古省城)을 점령했다. 2월에는 신라군이 사비성 근처의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가림성은 부여풍이 부흥운동을 할 때도 함락하기 어렵다고 당군이 공격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나당전쟁 개전 초반부터 가림성 주변의 논밭을 짓밟는 등 충돌이 계속된 곳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신라와 웅진도독부 백제의 기록상 마지막 전투다. 일단 가림성 전투에서 백제인들이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더 싸웠다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어떤 식으로 전황이 전개됐는지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이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지배하던 옛 백제 영토를 신라가 완전히 장악한 시점은 학자에 따라 672년설과, 나당전쟁이 완전히 끝난 676년설로 나뉜다.

3.5. 석문 전투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육군은 황해를 건너온 설인귀의 계림도행군보다 먼저 출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요동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고구려 부흥군의 저항 때문이었다. 고구려 부흥군은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있지는 않지만 1년 이상 꽤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운 것 같은데, 671년 7월에는 고구려-당 전쟁의 철옹성이었던 안시성이 고간에 의해 함락되었다. 곧이어 671년 9월, 북쪽에서는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남하하는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4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에 당도해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으며 대방(현재의 황해도 지역)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근행은 요동에 남아 고구려 부흥군 토벌을 계속했다.[26]

672년 7월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고간의 군대에 이근행의 군대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40,000명의 당군이 모여 남침을 시작했다. 8월에 당군은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말갈군과 함께 백수성(황해도 배천군) 근처에 주둔했다. 당군이 진영을 설치한 곳은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석문(石門) 들판으로 보인다.

이에 백수성에 주둔했던 고구려 부흥군과, 이를 도우러 문무왕이 보낸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인근 평야에서 당군과 맞붙었다. 여기서 신라군은 고간의 유인계에 넘어가 장군 의복, 대아찬 효선을 포함해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초전에서 신라군 장창당이 당 기병 3,000명을 격퇴하자 다른 부대들이 공에 눈이 멀어 후퇴하는 당군을 무질서하게 추격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당군의 역습을 당해 궤멸당한 것이다. 이를 석문 전투라고 한다(672. 8). 여기서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이 전투에서 옥쇄하려다 부관의 만류로 다음을 기약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세속오계를 어겼다며 김원술과의 의절을 선언했다. 한 차례 승리 후 들떠 지나치게 북진 추격하다 역습으로 전선이 후퇴했다는 점에서 훗날 6.25 전쟁1.4 후퇴와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석문 전투의 패배에 신라 전체가 충격을 받았으며, 문무왕은 중신회의를 소집해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고, 이때 참석한 김유신에게 이렇게 크게 패배했으니 어찌하면 좋겠냐 묻자 김유신은 당군의 계략을 알 수 없으니 당분간 수비를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많은 병력을 상실하여 회전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된 문무왕은 이후로 축성과 수성전에 치중하며 한편으로는 실제로 기습공격을 하면서도 당나라에는 사죄하는 서신 등을 보내는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3.6. 수세에 몰린 신라

672년 12월에는 백수산(白水山) 전투에서 당의 고간이 고구려 부흥군과 싸워 이겼다. 신라는 군대를 보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했으나 역으로 고간에게 패하여 신라군 2,000명이 죽거나 사로잡히고 말았으며, 673년 5월 이근행이 호로하(瓠濾河)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포로로 잡으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삼국사기》, 《신당서》 <동이전>). 《신당서》에서는 이 호로하 전투에서 죽거나 붙잡힌 고구려인이 10,000명에 달하며 '이로부터 무려 4년 만에 평정되었다'라고 따로 쓰고 있어서, 이 호로하 전투를 기점으로 당군은 고구려 부흥군을 사실상 제압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673년 7월 1일, 문무왕은 물론이거니와 신라 백성들 모두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유신이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과 신라 백성들은 김유신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신라는 당과의 싸움에서 열세인 데다 정신적 지주까지 상실하자 급격히 이탈하는 사람이 늘었다. 특히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나라에 붙으려 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그의 처자들은 천민이 되었다.

673년 8월에 신라는 충청북도 제천의 사열산성, 9월 충북 충주의 국원성, 경상북도 경주의 북형산성, 경북 의성의 소문성, 경북 고령의 이산성, 강원도 춘천의 주양성, 지금의 남한산성 자리의 주장성, 경상남도 거창의 만흥사산성, 경남 양산의 골쟁현성 등 꾸준히 성들을 증축하고 보강해, 수성전에 만전을 기했다. 신라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성을 쌓은 것은 장수왕의 침공 위협이 컸던 축성덕후 자비 마립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한편으로는 대아찬 철천에게 명해 전함 100척을 주어 서해를 지키게 했다.

이때부터 당의 공격이 다시 개시되었는데 여기서 신라는 당군과 아홉 차례를 싸웠고, 모두 승리해 당군 2,000여 명의 수급을 베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세는 신라군에게 불리해졌는데 당군이 계속 남하했고, 673년 겨울에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이 거란족과 말갈족으로 이뤄진 당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동자성은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로 한강 근처까지 당군이 내려온 것이다. 당군은 황해도 지역을 꽤 많이 차지하고 있었고, 신라군은 임진강한강선에서 방어했다.

3.7. 임진강을 두고 대치하다

674년은 임진강선을 중심으로 대치가 장기화되어 양국 간에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무왕은 부흥군의 소멸로 오갈 곳 없는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했다. 이에 격노한 당 고종은 형 문무왕이 멀쩡히 있는데도 당시 당나라에 있었던 동생 김인문을 문무왕 대신 명목상의 신라왕으로 책봉해 신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중간에 끼인 김인문은 일단은 간곡히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졌는데 실제론 문무왕이 신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김인문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또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필, 이근행에게 보좌하게 해 신라를 공격하게 했는데 이 군대는 675년에야 도착했다. 674년 동안 신라는 여러 차례 군을 사열하고 육진병법(六陳兵法)을 연마하는 등 전쟁 대비를 철저히 했다.

675년 2월, 유인궤의 당군이 도착해 신라의 칠중성을 깨뜨리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유인궤의 칠중성 공략은 당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군공으로 여겼는지 유인궤는 귀환했을 때 작위가 공작으로 올랐고, 재상급 지위인 좌복야에 임명되었다. 이후 칠중성은 이근행이 방어했으나 매소성 전투 전후의 기록을 보면 곧 신라군이 탈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분이 안 풀린 당 고종은 이근행에게 다시 신라를 공격하게 했고, 이에 문무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고 사죄했는데 그제서야 약간 분이 풀린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주고 군사를 물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문무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군을 공격하여 물리친 다음 백제 전토를 수복하였고, 옛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백제 땅을 상실한 당은 다시 격노하여 신라로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다. 이 정도면 문무왕은 가히 화전양면 전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3.8. 절정 : 매소성 전투

675년 9월에 설인귀가 당나라에 와있던 신라 유학생 김풍훈이 문무왕 즉위 초에 처형된 대당장군 김진주의 아들로 신라에 원한관계가 있는 것을 이용해 그를 향도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신라의 문훈 등이 반격을 가해 당군 1,400명의 수급을 확보하고, 전함 40여 척, 군마 1,000필을 탈취했다(천성 전투). 이상훈 교수는 설인귀가 한강 하구를 공략하고, 이근행은 매소성에서 임진강 이남, 한강 이북의 여러 거점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 접수해 전선을 임진강에서 한강선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당군의 전략이었다고 보았다.[27]

같은 달, 이근행이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매소성을 거점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쳐들어왔는데 신라군이 이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군마 30,380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신라군의 병력은 알려진 바가 없고, 당군의 병력이 20만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요즘에는 신빙성이 의심을 받고 있다. 매소성 전투의 근래 수정적인 관점에서는 중국측의 기록에 따라 당군을 대략 40,000명 전후로 보고, 여기서 나온 20만은 8년간의 나당전쟁 기간 동안 투입된 모든 당군의 총합을 의미하며, 신라인들이 나당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인 매소성 전투를 기록할 때 상징적으로 20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았다.[28] 어쨌건 군마 30,380필이라는 기록을 볼 때 당군의 숫자가 20만까지는 아니라도 나당전쟁 후반의 분수령이 될 만큼 상당했음은 분명하다. 한편 매소성 전투의 진행에 관해서는 또다른 이견이 존재하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른 전투와는 달리 당군의 수급을 취한 기록이 없고, 전리품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교전을 통해 당-말갈군의 주력을 궤멸시킨 전투라기보다는 기습 작전을 통한 보조 전력의 손실이라고 보는 것이다.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 본대를 이기자 놀란 당에서는 다시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공했고, 신라군은 맞서 싸우며 각지로 쳐들어온 당군을 계속 막아야 했는데 이때 당군에게 고전하며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특히 당나라 휘하 말갈군이 아달성(강원도 이천군)에 침입해 노략질하였고 이에 장수 소나(신라)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 말갈군은 기세를 몰아 적목성(강원도 회양군)까지 점령했다. 또다른 당군은 거란병, 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는데 신라군이 막아냈으나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했고, 석현성에서도 당군의 침입으로 현령 선백(仙伯),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다. 이러한 피해에도 신라군은 당군과 18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기는데 성공하여 당군 6,047명의 목을 베고 말 200필을 획득했다.

매소성 전투는 9월 29일 치뤄졌으나 그해 당군은 칠중, 적목, 석현성을 공격했고, 이후로도 크고 작은 전투가 18차례나 벌어진 것을 감안할 때, 당군의 전투력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군이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후 당군의 공격 지점들을 보면 중국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원도 북부 쪽으로 빙 돌아가는 루트였다. 따라서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있었다기보다는 천성 전투에서 당군의 보급선단이 궤멸된 후, 매소성에서 당군의 전진을 막았고, 그 결과 보급이 끊긴 당군이 퇴각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당군이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많은 물자를 버리고 갔고, 그것을 신라군이 노획했기 때문에 전리품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676년 7월의 도림성(강원도 통천군) 전투에서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했는데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육상에서의 나당전쟁은 끝이 난다.

3.9. 결말 : 기벌포 전투

676년 3월부터 당나라는 대륙 반대편 서쪽에서 토번군에게 국경선 안쪽까지 공격받기 시작해 매소성 전투의 패전을 기점으로 신라 전선에서의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고, 옛 백제 영토를 지배하던 웅진도독부를 옛 백제와 전혀 관련 없는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기겠다는 결정을 하고 철수를 시작했다.[29] 676년 11월, 신라군은 바다를 건너 철수하려는 당군을 소부리주의 기벌포에서 공격했는데 설인귀의 당 수군에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 승리했고, 당군 4,000여 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당나라는 사실상 패전한터라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구 백제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도 이 때 요동으로 철수시켜 7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4. 전후

당고종은 단순히 나당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는 것을 넘어 해동 3국 중 2국이 멸망한 이 상황에 신라까지 무너뜨려 한반도 전역 정벌을 이루겠다는 미련이 계속 남아있었다.[30] 《구당서》 <장문관 열전>에 의하면 이후에도 신라를 다시 공격하자는 논의가 당나라에서 있었는데, 와병중이던 시중 장문관이 나서서 양면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하자 고종이 결국 장문관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후 683년 고종의 사망, 후계자 문제 혼란, 측천무후의 즉위로 인한 무주의 건국 등 당나라 내부 사정이 어수선해지면서 결국 신라 재공격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4.1. 냉전

신라와 당은 크게 전쟁을 벌여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676년 이후에도 수십년간 거의 단교에 가까울 정도로 교류가 줄어들었다. 당은 이 전쟁으로 신라가 획득한 옛 고구려, 백제 영토에 대해 신라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명목상 고구려 고씨, 백제 부여씨 왕실 유족을 당나라 수도 장안에 거주시키며 이들을 '고려 조선왕',[31] '백제 대방왕'으로 대우하였다. 정신승리 나당전쟁이 끝나고 거의 50여년이 지난 725년 11월, 당 현종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때도 일본, 신라, 말갈인 사신 외에 고구려, 백제 왕가의 유족을 굳이 왕으로서 참여시켜서 마치 고구려와 백제가 (당의 속국으로) 아직 존재한다는 퍼포먼스를 해 신라를 압박했다. 물론 8세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를 가진 국가로서 존재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나 일본 등과 달리 내번(內蕃) 자격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자세히 본다면 이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해 사라진 것을 당나라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이들은 당나라가 통일신라를 재공격했을 때 꼭두각시로 사용하기 위해 아직 데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725년까지도 당나라는 한반도 재침공 계획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한다. 물론 이 시기에 고구려 고토에는 발해가 세워진 이후였는데 이 시기의 당은 신라는 물론 신생국 발해와도 사이가 나빴으므로 신라의 삼한일통과 국가로서의 발해를 모두 승인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로도 볼 수 있다.

신라 역시 이에 대항해 나당전쟁 이후로도 한때는 적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반당이란 뜻이 일치하는 일본과 사신을 역대 최대로 활발하게 주고받으면서 후방을 다졌고, 내부적으로도 군사 제도를 개혁하며 군비를 강화하는 등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나라와 약간의 교류는 있었지만 이 역시 당나라의 요구를 신라가 대놓고 거절하는 등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4.2. 당-신라 관계 정상화

그래서 당나라가 옛 고구려, 백제 영토를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한 것은 성덕왕 시기였다. 언제까지나 초강대국 당나라와 척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성덕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문무왕 14회, 신문왕 1회, 효소왕 1회, 성덕왕 46회다. 전쟁으로 거의 끊겼던 관계를 성덕왕 때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714년에는 통문박사라는 대당 외교 문서 담당 기관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신문왕 때 설립한 국학의 내실을 보강하기 위해 당나라의 국학 문화를 수용했다. 그리고 730년대 흑수말갈대문예 문제로 동아시아 정세가 다시 시끄러워지자 당나라도 더 이상 신라를 마냥 적대하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나당전쟁 후 60여년이 지난 735년에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치 지난 세기 북방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방의 신라와 손을 잡은 것처럼 북방의 발해 견제 차원에서 다시금 신라의 효용성이 드러난 것이다. 신라 역시 그동안 대동강 이남 ~ 임진강 이북 지역, 즉 개성을 포함한 패서 지역은 물론 신라가 실질적으로 영향력 아래 두고 있긴 했으나, 당나라와의 이런 대립 탓에 대놓고 직접 지배까진 하진 못하고 있었다. 무려 60년 동안인 이 세월 동안 옛 고구려의 핵심 지역 고구려 유민들은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살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발해 건국기에 백산말갈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또 다시 아무 장애 없이 해당 지역에 유입될 수 있었다.

735년부터 신라는 당나라와의 영토 분쟁 구실이 사라진 이후에도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임진강에서부터 점점 전진해갔지만, 곧바로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재하려 하진 않았다. 때문에 끝내 재령강 이동 지역, 즉 황해도 동부 14개 군현만 편재했을 뿐 재령강 이서 지역은 군현을 편재하지 못했다. 헌덕왕 때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을 편재했다는 과거의 오해가 있었으나 이는 태봉 시대에 궁예가 편재한 군현이었음이 규명되어 있다. 패서 지역을 포괄한 한산주가 지나치게 담당 영역이 넓었고, 패서 지역만은 유독 신라 관헌의 수가 적었고 직급수도 낮은 편이었으며 상당 부분 다른 지역보다 자치가 허용되었음은 '전덕재,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그 성격. 2013년 발간' 논문에서 규명된 사항이며, 그리고 신라의 관헌 설치나 개입 정도도 당나라와의 관계 탓에 시기가 상당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32] 신라가 패서에 26개 군현을 설치 완료한 시기는 헌덕왕 시기(강봉용,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라는 연구가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과거의 연구로서, 현재는 신라가 헌덕왕 때까지도 재령강 이동 지역에 14개 군현을 설치한 것에 그쳤고,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까지 편재를 완료해서 직접 지배를 관철한 건 태봉이었음이 규명되어 있다.(전덕재,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2016년)(전덕재, 태봉의 지방제도에 대한 고찰, 2022년 발간 경주문화원 발간 경주문화 제27호)

이렇게 당과 신라의 미묘한 관계 탓에 꽤 오랫동안 독자성을 유지한 패서 고구려 유민들이 끝내 고려의 주축이 되어 신라가 실패한 삼한일통을 완성하면서 한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것이다.

5. 의의

삼국통일전쟁은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전쟁 중 하나다.[33] 이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바로 나당전쟁이다. 나당전쟁은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669년~676년 동안 7년에 걸쳐 벌인 전쟁이었다. 결과적으로 신라가 당나라를 꺾음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지만 만일 당나라가 신라마저 정복하고 한반도 전역이 중화권 역사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면 한민족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한반도를 통치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수 있다.

당나라의 한반도 정복 계획과 신라의 삼국통일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쟁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당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은 동아시아 역사상 최강국가 중 하나였지만, 신라는 이제 막 삼한을 통합하기 직전의 국가였다. 그러나 전장이 신라의 본토 한반도라는 점은 신라의 강점이었다. 전성기에 이른 당나라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는 신라군은 수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훨씬 열세에 있었지만 문무왕과 신라군 수뇌부의 뛰어난 지략 및 전략, 전술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당군을 격퇴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동강원산 이남 통합은 이 시기에 사실상 이루어졌다. 당나라가 옛 고구려수도 평양성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나당전쟁 결과 요동으로 축출함으로써 당나라의 통치력을 한반도 밖으로 쫓아내는데, 사실 대동강임진강 사이의 패서 지역은 신라 하대에 북상하기 전까지는 고구려계 소영주, 호족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평가가 지배적이다.[34][35] 즉, 신라가 직접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세력이 차지하지도 못하는 완충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이 지역(패강)에 신라의 직접 통치력이 미치게 되는 건 선덕왕 부터의 일이며, 헌덕왕 때에는 오늘날 황해도의 동쪽 절반인 재령강 이동강까지 군현 설치 및 축성 사업이 완료되었다.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서도 정상권의 강대국이었던 최전성기의 당나라와의 7년간에 걸친 총력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신라의 삼국통일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한민족 역사의 다른 전쟁들에 비해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나당전쟁은 자력으로 대당제국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저지하고, 쫒아냈다는 데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한국인들은 신라가 승전했기에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가기 쉬우나, 나당전쟁은 오늘날로 치면 중견국이 어떤 나라의 지원군이나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강대국과 1대 1로 싸워 물리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차를 지혜롭게 극복한 위대한 승리였다.[36][37][38]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 지역을 넘겨주어야 했고, 698년 발해가 세워지면서 만주 일대까지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열세인 국력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건 고구려 원정 때보다 더욱 길어진 보급선, 고구려 원정 당시 한반도 내에서 군량지원을 책임지던 신라의 역할인 내응세력 부재, 이를 보완하려던 당나라 수군의 연이은 패전, 신라군과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 토번의 공격이었다. 그리고 신라와 당은 과거 고구려에 대한 것처럼 서로를 명백하게 멸망시켜야 할 적국으로 인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지속할 당위성이 오래갈 수가 없어 사그라든 것도 있다.

이후 당 고종이 병상에 누워있다가 사망하면서 당이 내부적으로 국정이 혼란해진 데다가, 앞서 언급한 토번의 준동이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티베트의 불세출의 명장 가르친링이 등장해 당나라 장수들을 갖고 놀기 시작한 게 이때쯤이었다. 게다가 나당전쟁 기간 중 당과 토번의 충돌은 670년 대비천 전투 한 번뿐이어서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던 것에 반해 다시 당과 토번이 격돌한 것은 나당전쟁 종전 2년 후인 678년부터였으며 이때부터는 당과 토번 간에 벌어지는 격전의 횟수가 증가하여 당에 가해지는 압박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옛 고구려의 땅에선 고구려의 유민들, 거란, 말갈족들이 당의 통치에 불만을 품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연이어 돌궐 제2제국이 무서운 속도로 몽골 초원을 장악하고, 당 본토를 공격했기 때문에 당 입장에선 신라를 발해의 견제책으로서 끌여들여야 할 이유도 있었다.

결국 당은 오히려 신라의 대동강 이남 지배권을 인정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이는 그전까지 당이 계림도독부 설치 명령 이후 신라를 대놓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당 - 신라와 발해 간 전쟁이 벌어졌으나 영주 말갈족을 끌어들인 발해는 요동을 제외한 옛 고구려 고토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다 발해 역시 3대 문왕 때 당과 국교를 맺으면서 비로소 한반도당나라 간의 긴장 상황은 종결되었다.

이후 신라당나라는 다시 서로 어느 정도 친밀해졌으며, 신라방과 같은 당 내에서의 거점도 여럿 형성되는 등 관계는 우호적으로 급반전했다.

5.1.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이 성장?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결론만 말하면 나당 전쟁이 아니라 고구려-당 전쟁 때문이다. 토번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된 것은 617년 ~ 649년에(추정) 재위했던 손첸감포라는 희대의 명군이 즉위한 때부터였다. 즉 나당전쟁이 아니라 수나라 때 부터 수십 년간 지속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토번의 세력이 강력해지는 것을 견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고, 나당전쟁 시기에는 이미 토번이 강력해진 상태였다.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이 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첸 감포에 의해 토번의 국력이 급격히 팽창하여 당 제국과 서역교역로를 두고 패권을 다투면서 당 제국의 한반도에 대한 중요도가 급감하게 되었다.[39]

당시 당 제국은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강성해진 토번이 가로막고 훼방을 놓아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토번은 당 제국의 종속국이었던 토욕혼을 정복하고, 가르친링의 지휘 아래 대비천 전투(670. 7)에서 10만의 당군을 궤멸시키며 지휘관들인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을 사로잡는 등 당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후 696년 3월에 토번은 당의 수도 장안에서 320km 떨어진 소라한산(素羅汗山) 전투에서 당의 대군을 또다시 격파했다. 이때문에 당나라는 대패의 책임을 물어 사령관 왕효걸의 작위를 박탈하여 평민으로 격하하고 부관 누사덕은 강등시켰다. 이는 신라와의 갈등[40]과 달리 토번 제국이 아예 당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실질적인 위험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수도 장안에서 훨씬 가까운 것도 토번이었기 때문에 토번 전선이 훨씬 위급하기도 했다.[41]

물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일이고, 나당전쟁 때문에 대토번 서역 전선에 투입할 당군의 병력이 줄어들었으니 토번에게 나당전쟁은 과정상에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42] 역으로 신라 역시도 토번 전선에 당군이 투입되어 이득을 보았다.[43]

여담으로 설인귀는 대비천 전투에서 대군이 궤멸당한 대패의 책임을 추궁당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간신히 용서를 받고 참전한 것이 나당전쟁이었다.

6. 나당전쟁을 둘러싼 시각의 변화와 연구 방향

6.1. 이후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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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과 삼국사기(三國史記)

나당전쟁 관련 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장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2세기에 간행된 《삼국사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후 15세기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18세기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 - 고려 정통론에 입각해 역사가 쓰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실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나섰다. 한백겸은 신라가 한반도 동남쪽에 안주하여 서북 일대를 포기했다고 봤으며,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회의하였고(남북국시대), 김정호는 아예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김영하,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시각》) 이후 일제 시기의 선학들은 나당전쟁 그 자체에 무관심했는데,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통일전쟁의 끝맺음인 당나라 격퇴도 자연스레 애써 외면하고 의미를 축소했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가 삼국의 전 영토를 아우르지 못한 데다가, 698년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다만 신라의 삼국통일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당전쟁 그 자체에 대한 연구나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편이다. 이는 삼국통일전쟁 항목을 참고하라.

6.1.1.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견해

근대 이후 나당전쟁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이는 일제시기 일본의 학자,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였다. 쓰다 소우키치는 와세다대학에서 이병도를 지도한 사람이며, 이케우치 히로시는 1920년부터 광해군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케우치 히로시의 이러한 의도는 일제의 식민사관인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일환으로,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사움에 시달렸다는 식의 이야기로 연결될 수도 있고 거기에 맞춰 만주사 쪽에 연결하여 편협하게 추켜세워 올린 것에 가깝다.

쓰다 소우키치는 백제, 고구려 고지는 당 본토에서 거리가 멀어 교통이 불편하고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허점을 신라가 이용해 병탄했다고 보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매소성 전투는 신빙할 수 없다고 했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나당전쟁을 신라와 당이라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라의 욕심으로 당이 정벌을 단행한 것으로 인식했다. 즉 검모잠의 '반란'을 지원하던 신라가 당이 차지하고 있던 백제 고지를 '침략' 했기 때문에, 당이 이에 대한 조치로서 신라를 '정벌' 하게 되었으며, 이후 안동도호부요동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는 '방기'되었다는 것이다.

6.1.2. 중국 학자 진인각의 견해

중국 학자 진인각(陳寅恪)은 토번(吐蕃)의 발호로 인해 서북지역이 위급해지자 당이 동북지역을 경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동북지역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반도를 방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토번 전선을 중요시하고 한반도 전선이 이에 좌우되었다고 보는 해석이, 한국사 자체가 대륙세력 중국의 남진과 해양세력 일본의 북진 사이에서 부수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일본 식민사관과 죽이 잘 맞았기 때문에 이러한 쓰다 소우키치-이케우치 히로시-진인각의 견해는 이후 일본과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 자리 매김했고, 서구 학계에서도 대체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나당전쟁을 이해했다. (Denis Twichett <kao-tsung and the empress Wu>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3,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pp.284~285). 국외 학계의 입장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가 백제 고지를 '침략'하자 당이 신라를 정벌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토번의 발호로 인해 당이 신라를 방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소위 한반도 방기론적인 입장이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
6.1.2.1. 반박
근본적으로 이런 한반도 방기론의 기저에는 일본 제국주의식민사관적인 입장이 어느 정도 깔려 있다.

일본의 쓰다 소우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는 대표적인 만선사학자로서, 고구려부흥운동은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한편, 신라의 당에 대한 활동은 상당히 축소 혹은 왜곡했다. (《나당전쟁연구》, 이상훈, pp.15).

만선사관에서는 만주사와 조선사가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사가 규정적, 중심적이고, 조선사는 그에 대해 부속적, 종속적 지위를 가진다. 즉, 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중간지점에 완성되지 않은 지역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미숙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고, 대륙의 중국과 해양의 일본이라는 두 강국 사이에 끼어 있어서 강고한 독립국을 만들 수 없으며, 항상 강국의 눈치를 보는 사대주의를 통해 국가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박찬흥, 《滿鮮史觀에서의 한국고대사 인식 연구》). 따라서 한국 고대국가의 역사는 만주 세력의 남진과 해양의 일본 세력의 북진 속에서 부수적으로 존재한 역사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를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서술함으로서 한국의 자주성, 주체성을 없애고자 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신라 통일론에서는 신라의 자주성보다 타율성이 강조된다.(김영하,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시각》 中)

중국 학자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따라 한국사를 인식한 것은 근대 중화주의의 강화와 더불어 일어난 특이한 변화 중의 하나이다. 왕동령(王桐齡)은 한, 당의 정벌을 강조하여 중국 세력의 남진 구도로 파악함으로서, 임나를 거점으로 하는 일본 세력의 북진과 아울러 중일병진 구도라는 근대 중국의 한국사 인식 체계를 수립했다. 황옌페이(黃炎培)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없이 그대로 수용했는데, 이는 중화사관과 전혀 모순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상호 상승작용하면서 결합되었다고 한다. (유용태, 《중국인의 '남조선 한성': 20세기 중화주의》 《환호속의 경종 : 동아시아 역사인식과 역사 교육의 성찰》, 휴머니스트, 2006, pp.167~168). 양자는 상호간에 논리적 친화관계를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 서로 차용하면서 상호 전화될 수 있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진인각은 1920년대의 이러한 왕동령, 황옌페이의 역사 인식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그들의 사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당전쟁을 바라보는 중•일 학계의 관점은 신라와 당 사이에 발생한 전투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전쟁의 개시 및 종결의 배경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만선사관에 따르면 '반도'의 신라는 '만주'의 고구려보다 열세여야 하고, 중국의 중화사관에 따르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이라는 세계제국으로 인해 반도의 소국이 '정벌' 당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중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보다 '열등'한 신라가 당시 최강대국 당에게 승리한다는 것을 상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당전쟁 이후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이동하고, 당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은 신라의 역할보다는 토번의 발호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설명해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나당전쟁사 연구》, 이상훈,pp.17)

국외연구 중 당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원인으로 신라의 역량 강화를 언급한 연구도 있으나 소수의 견해에 불과하며, 대부분 고구려 유민의 저항, 보급로의 제한, 병력의 부족 등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한승(韓昇)은 한반도를 장기간 직접 점령 통치하는 것의 의미가 퇴색되고, 내외의 제약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후퇴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왕소보(王小甫)는 당이 원래부터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었다고 했다. 다만 오해는 말하야할 것이 왕소보 베이징대 교수 같은 경우는 중국 내에서 학파로 따지면 소장파이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포함시키려는 시도와는 거꾸로 가고, 동북아역사재단이 낸 '《8세기 동아시아 역사상》'에서는 당과 신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야말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있어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방기론은 그저 자신들이 신라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수주의적 역사 왜곡일 뿐이며, 그 논법대로라면 실제로 일본에게 원폭을 투하해서 항복을 받아낸 것은 미국이지, 중국이 아니므로 중국은 전승절(중국)같은 행사나 열면서 중일전쟁에서 승전했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 방기론 자체는 누군가로 인해 주장될 수는 있겠지만, 중국인이 한반도 방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그저 자승자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6.1.3. 국내 학계의 연구

6.1.3.1. 이기백의 견해와 1980년대까지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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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그러나 국내 학계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이기백은 신라가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의 축출을 꾀하였고, 백제 고지로 군대를 출동시켜 부여융의 백제군과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했으며, 매소성 전투를 위시한 한강 유역의 전투에서 당군 축출에 성공했는데, 이같이 신라가 당의 침략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였다는 사실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이병도는 검모잠 세력이 당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신라군과 합세하여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에 요동에 있던 당군이 한반도에 남하해 고구려의 남계와 신라의 북계에서 나려 연합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전투를 통해 드디어 676년 요동으로 철수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결국 당 세력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학자 존 C. 재미슨(John C.Jamieson)은 《삼국사기》가 중국 자료를 편입시켜놓은 것이 많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실망스러운 점이 적지 않지만 당 태종당 고종 기간만은 《삼국사기》가 공헌한 바가 크다고 했다.[44] 재미슨은 특히 나당전쟁에 투입된 당의 장수들을 분석하면서 당시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관해 중국측 기록은 되려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 학계는 나당전쟁에 관해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국외 연구는 주로 《삼국사기》를 제외하거나,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중국측 사료만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1950년대부터 한국적 주체성 찾기가 일어나기 시작해 1960년대에 민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민족의 우수성을 역사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사회기조(김주현,<1960년대'한국적인 것'의 담론 지형과 신세대 의식> 《상허학보》 16, 2006, p.391)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은 비록 영토적 한계가 있지만 민족[45] 생존을 위한 항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신라는 외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했고, 또 자율적으로 그들을 축출시켰으므로 자력에 의해서 통일을 완수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6.1.3.2. 1990년대의 연구
1990년대를 전후하여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민덕식은 나당전쟁의 원인을 개괄하고 최대 격전장소였던 매소성의 위치 비정을 중심으로 검토하였으며, 허중권은 나당전쟁의 전투 양상을 계량화하기도 했다. 이호영이 일련의 연구들을 집성하여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 硏究》를 펴냄으로써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전체적인 체계가 잡히게 되었다. 안국승은 매소성을 경기도 연천의 대전리 산성으로 비전하였으며, 노태돈은 오골성 전투가 요동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명확히 하고 나당전쟁의 개전 시점을 669년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인한은 《나당전쟁사》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6.1.3.3. 2000년대의 연구
이후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2000년대 들어 국내 학자 서영교와 중국 학자 배근흥(拜根興)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먼저 서영교는 나당전쟁의 전개가 서역(西域)의 전황과 맞물려 돌려갔다고 파악하여, 한반도에 국한된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669년 토번이 천산남로(天山南路)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의 주력군이 서역으로 투입되었고, 이에 670년 3월 신라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675년 9월 매소성에 주둔하던 말갈족 출신 이근행(李謹行)이 말갈병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동하자 이듬해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즉 당대 동아시아의 '약소국' 신라는 서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당군 주력이 서역으로 이동하자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고, 이후 당군 주력이 이근행을 따라 서역으로 이동하여 나당전쟁이 종결되었으므로, 종전은 매소성 전투 승리의 산물이 아니며 국제적 상황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배근흥은 나당전쟁 연구상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양한 중국 측 자료의 소개와 정리로 나당전쟁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배근흥은 675년의 매소성 전투는 그 전투기록이 불완전한 점에서 볼 때 신라가 승리한 전투가 아니며, 이때는 당의 서북 변경이 위험해졌기 때문에 매소성 전투는 당군이 철수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676년 설인귀는 상주(象州)로 유배중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기벌포 해전도 국내 학계의 입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즉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의 중점은 매소성 전투나 기벌포 전투가 아니라 그 이전의 상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배근흥은 나당전쟁 연구상의 문제점을 다시 언급하면서, 나당전쟁의 결과는 신라가 다시 당에 신속(臣屬)하여 나당 간의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나당 모두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는 당라 종번(唐羅 宗蕃)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노태돈은 삼국통일전쟁을 다루면서 나당전쟁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소위 '한반도 방기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즉 나당전쟁은 669년 4월경에 시작되었으며, 670년 3월에 신라군이 요동에 진출하므로 토번은 나당전쟁의 개전과 구체적인 관계가 없음을 지적하고, 나당전쟁의 개전은 별다른 제3의 변수가 없는 가운데, 일차적으로 신라의 정세 판단과 전쟁의지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최근에는 국외 학계에서도 나당전쟁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객관적인 논의도 진행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렇듯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다.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문제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였고, 이에 나당전쟁에 대한 이해도 풍부해졌다. 그러나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들의 입장 차이는 각국의 이해관계 혹은 연구자들의 성향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나당전쟁의 개시, 종결의 국제 관계와 민족주의 측면적 의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이상훈은 '전쟁 자체'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고 지적하였다.

670년대 토번의 발호로 인해 당의 군사전략의 중심이 동북에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이에 따라 676년 이후 한반도에서 더 이상 당과의 교전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켜 신라의 승리만을 강조하는 견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편 나당 간의 '전쟁 자체' 에 대해 아무런 고려없이, 단순히 당군의 이동 유무에 따라 전쟁이 시작되고 종결되었다는 견해도 수긍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국제 관계의 측면을 중시하다보면 전쟁의 동인과 추이에 대해 외부적 요인에만 치중하는 이해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태돈, 《삼국통일전쟁》, p.3~4)

따라서, 나당전쟁의 연구는 토번의 발호라는 외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나당전쟁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야 좀 더 진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실제로 과거 학계에서 연구하였던 나당전쟁은 바라보는 시각을 한반도에 국한하였으며 학계의 시각은 자주적인 승리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다. 이는 세계사 속의 흐름을 바라보며 이해하는 근래의 역사관에선 한계가 명백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로 세계사의 흐름을 통해 보는 배경 이해가 두각되는 까닭이다. 과거 나당전쟁 관련 교육은 당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토번 제국의 행보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전무했다. 그러나 실제로 당 제국이 토번과 기나긴 세월을 두고 대립하면서 군사 전략안들을 서쪽 토번을 향해 크게 집중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토번은 당 태종에게 당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사자를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대군을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였고, 겸사겸사 백란 등의 강족의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현 쓰촨성 쑹판현)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토번의 준동에 격노한 당 제국에게 격돌하는등 군사적 갈등이 번번하였다.[46]

이후 당 황실에서는 문성공주를 평화사절로 시집보내기도 했지만, 당제국과 토번은 이후로도 기나긴 기간 동안 화친과 전쟁을 계속 반복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상훈 측이 주장하는 토번의 발호라는 외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나당 간의 전쟁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야 좀 더 진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강화시키는 근거이기도 하다.

7. 창작물에서의 나당전쟁

한국사에서 꽤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면서 한국사 최대의 위기 중 하나였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나당전쟁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창작물은 거의 없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의 일화를 다룬 유치진희곡 '원술랑'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그나마 나당전쟁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중에서는 유명한 정도다.

삼국통일전쟁기 자체는 한국 사극이나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에서 적지 않은 빈도로 다뤄진 시기이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까지는 다루더라도 신라와 당의 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매체는 거의 없다. 그냥 일종의 마무리, 후일담 형식으로 간략히 묘사되는 편이다.

8. 같이보기


[1] 중국, 일본 학계에서는 당라전쟁(唐羅戰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2] 고구려부흥운동 중 내분으로 안승에 의해 살해되었다.[3] 이근행의 부인으로, 고구려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직접 갑옷을 입고 수성전을 지휘했다.[4] 본래 신라인으로, 아버지 김진주가 죄를 짓고 처형된 데 불만을 품고 당군의 향도가 되었다.[5] 부분적인 기록들의 합산만으로 최소한 20만 이상이며, 전쟁 기간 중 당군의 총병력은 미상이다.[6] 황산벌 전투에서 보여줬듯이 백제군의 결사대 5,000명의 저항이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7]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묘사된다.[8] 그러나 5도독부는 계림대도독부이북 5도처럼 명목상 설치했을 뿐 실질적으로 당나라가 통치하는 것은 웅진도독부 뿐이었고, 나머지 덕안 등은 백제 잔존 세력이 존재하다가 일찍이 신라가 차지했다.[9] 이렇게 전 왕조 왕족의 상징성을 이용해 백성을 회유하는 방식의 정책은 신라가 고안승을 우대한 것, 고려경순왕을 우대한 것, 일제가 조선 왕실을 우대한 것, 맥아더가 일본 천황을 존속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10] 이 때 신라의 왕은 문무왕으로, 일전에 문무왕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부여융에게 침을 뱉은 적이 있었다.[백제] 부흥군과 왜국이 내세웠던 다른 왕자[12] 이 시기에 유인원은 백제에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다른 사람, 이를테면 유인궤가 유인원으로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 당시 왜국은 백강 전투까지는 백제부흥군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부흥군이 궤멸한 뒤로는 한반도 개입을 그만두고 방어용 성을 대거 축조하며, 신라에 사신단을 자주 보내는 등 태세를 수비로 전환한 상태였다.[14] 이상훈, 《나당전쟁연구》pp.77[15] 그러나 전쟁을 원해 편제를 개편하는건 흔히 있는 일이기에 아닐 수도 있다.[16] 이상훈, 《나당전쟁사연구》, 주류성, 2012, 80p[17] 첫 의도는 서로 윈윈하는 관계였지만 석문 전투 패전 등 나당전쟁 초기 당군의 대공세로 당군이 임진강 유역까지 밀어부치면서 고구려 부흥군의 목표는 좌절되었고, 고구려 부흥은 약 30여년이 지난 후 머나먼 동만주에서 발해 건국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당의 견제 탓에 고려라는 국호는 쓰지 못하였다. 적어도 국호 기준으로 하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901년 전에는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그마저도 신라는 발해라는 명칭 자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말갈 내지는 북국이라고 내내 비하했다. 그나마 발해로 이름 붙은 건 대조영의 진국과 당나라측의 오랜 밀고 당기기 끝에 성사된 타협의 결과였다.[18] 결국 중국의 경우, 기록상에 사거리가 1,000보 가는 노에 대한 첫 기록은 송나라 시대의 상노(床弩)였다.[19] 서영교,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 《역사와 현실》[20] 원문에 3글자 빠져 있음.[21] 신라의 교통로에 대해서는 서영일,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1999 참조[22] 고구려에 수, 당이 보냈던 수십만에서 백만 단위의 군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행정과 체제가 발달하고 고도로 밀집화된 관료제를 가지고 있던, 그리고 인구가 세계의 과반을 넘던 중국조차 정말 온 나라를 쥐어짜내야 나오는 병력이었다.[23] 다만 기벌포 전투를 지휘한 사찬 시득은 진골인 대아찬 철천의 휘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이 추측이 정확하다면 사찬의 신분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지휘한 분명한 사례는 설오유 뿐이다.[24] 이 '<답설인귀서>'는 전문이 기록에 남아있어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답설인귀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대답하며 '신라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문서'이므로 몇 가지 거짓말이 들어있다. 예를 들면 문무왕은 설인귀의 당군이 바다를 건너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월부터 당군이 황해를 건너올 것을 대비해 옹포에 병력을 배치시키기도 했다.[25] 중국 낙양의 낙양고대예술관에 소장된 금석문.[26]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2012, 111p[27]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2012, 218p[28]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2012, 212p[29]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2012, 218p[30] 중국 입장에서도 한사군 시기와 더불어 중국이 한반도를 정복해 직할령으로 삼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31] 여기서 조선은 후대의 이성계가 세우는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과,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주변 일대의 지명처럼 사용된 것이다.[32] 신형식 저서 신라통사 참조. 2004년 발간.[33]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34]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681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정천군(강원도 덕원, 현 원산시의 일부)을 점령했다고 나오는데, 고구려 본국은 668년에 이미 망했으므로 여기서의 고구려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이거나 왕실 몰락에 관계없이 일대에 남아있던 고구려 잔존 세력으로 본다.[35] 사실 신라 하대의 황해도 개척 이후에도 이 일대에는 느슨한 행정망을 구축하고 고구려계 호족들이 상당한 자치를 누렸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개성 왕씨도 이런 고구려계 호족 중 하나인 것으로 추측된다.[36] 나당전쟁 무렵 당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아시아권뿐 아니라 세계적인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강대국을 상대로 신라는 어떤 외국의 도움도 없이 혼자 싸워서 결국 물리쳤으니,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후 후대의 고려와 함께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대접받았다.[37] 나당전쟁보다 약 900년 후의 임진왜란 무렵, 조선 왕조가 세계 최강대국인 명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도 일본군을 상대로 쩔쩔맸던 일을 떠올린다면 외국의 지원군이 단 1명도 없이 혼자서 초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친 신라의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라는 나당전쟁보다 수백 년 전부터 치열하게 계속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 분위기가 호전적이었고 오랜 전투 경험이 있는 노련한 군인들을 보유했던 반면, 조선은 건국 초기 이후로 계속 평화가 이어져 병사들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38] 굳이 현대사와 연결시키자면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에티오피아10년 간의 항쟁 끝에 소련군을 물리친 아프가니스탄 정도라고 할 수 있다.[39] 엄밀히 말하면 한반도에 대한 중요도나 토번에 대한 것 둘다 모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이 당의 지배권을 이탈해서 옛 영토로 이동, 발해를 건국했기 때문. 이들은 당의 통치하에 있었다가 탈출했기 때문에 당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옛 고구려 영토들을 계속 잠식해나갔다. 게다가 한동안 당의 통치하에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던 요동에서 돌궐, 거란의 무리들이 발해와 연합하여 요동 지역에서 자립, 준동하였다. 결국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애써 당나라 중심으로 질서를 잡은 요동 지역은 다시 개판이 되었다. 급 성장한 토번이 버거운 상황에서 당은 신라를 동맹으로 두어 발해를 견제하고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우군으로 만드는 것이 나았지 적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다.[40] 신라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수동적인 전쟁이었지 토번처럼 당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의도는 아예 없었다.[41] 나당전쟁이 당의 영토 확장을 위한 공세였다면 토번-당전쟁은 당 제국이 토번에 의해 대대적으로 공격당하는 위급 상황이었다. 당연히 후자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교역로 문제도 겹쳐있었기에 결과적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신라와 대립하는 한반도/만주 쪽은 토번이 준동한 서역에 비해 전략적인 중요도가 아주 크게 떨어졌다.[42] 예를 들어 유인궤는 나당전쟁 당시 신라 전선에 있다가, 676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륙 반대편 서역 전선에 투입되었다. 즉, 만약 당이 토번하고만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토번은 좀 더 많고 강한 당군을 상대해야 했을테니 나당전쟁과 토번이 간접적인 관련이 없진 않다.[43] 이에 멍청하게 이중전선을 형성한 당나라가 바보인 것으로 보는 의견과 함께 신라와 토번의 위험성 중 신라의 위험성이 보잘 것 없고 당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의사가 없는 수동적인 방어자세임을 꿰뚫어본 당이 이후 신라와의 대립관계를 청산하여 이중전선을 바로 하나의 전선으로 축소해 버리고 토번과의 전쟁에 집중해버렸기에 마냥 멍청하다고 비하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신라는 나당전쟁 승전 후 당 제국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또 엄청난 놈이 하나 북쪽에서 등장하는 바람에 직접 국경을 맞대지도 않았고…[44] 가령 을지문덕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부분을 보면, "범상치 않았다." 라는 이야기를 빼고, 전부 수나라쪽의 우중문, 우문술 기록에서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가져다 적은 것이다.[45] 단, 여기서 민족이란 삼국의 민족이 아니라 신라 민족을 의미한다[46] 당 제국이 이겼다는 증거도 존재하지만 토번군의 사상자 1,000명, 당군 사상자 20,000명이라는 기록이 있는 등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당 제국이 토번의 강성함을 실감하였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