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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1:20:53

사대주의

1. 개요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의견
2.1. 옹호론2.2. 비판론
3. 사례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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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adaejuui

사대주의()는 큰 나라(大)를 섬기는(事) 사상을 의미 한다. 사대주의와 모화주의를 합쳐 사대모화(事大慕華)라고도 한다.

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의견

최영: 고려 사람이 왜 남의 나라를 지성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오이까?!

정몽주: 그것은 약육강식의 천하에서 소국이 살아남는, 생존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 드라마 정도전 24화에서 나온 최영과 정몽주의 대화 중 일부

사대주의에 대한 찬반론자의 의견을 간단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2.1. 옹호론

사실 이 용어는 서구의 식민주의 프레임에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꿰어 맞추면서 "한 국가가 자율성을 포기하고 강한 국가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사상 또는 외교방침"을 개념화하기 위하여 창안되었다.

국제 관계에서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의 눈치를 봐왔다. 이건 청동기 시대에 고대 국가가 등장한 이래로 현재까지 동서양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공통으로 있어온 보편적인 일이었다.

중국진시황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인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거대권력이었다. 전근대 시기 중국은 천조국이란 명칭에 걸맞게 군사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타 동아시아 국가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이득이었지, 쓸데없이 대립관계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가 역사상 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거나 비등비등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는 중국이 분열기를 맞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한국사를 예시로 들 때, 중국 대륙의 국가가 한반도를 정복할 만한 군사력을 가진 경우는 한나라당나라,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1][2],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 대륙 국가와의 교류는 전통적으로 사대의 형식으로만 가능했으며, 형식적으로 신하를 자처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동등한 관계에서의 외교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대"는 외교의 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한족과 맞짱떴던 무수한 이민족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정복했다가도 오히려 대부분 한족에게 동화되어 밀려났지만, 한반도 국가들은 맞짱떠서 중국을 정복한 역사는 없더라도 "사대"의 형식으로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아울러 문화,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저 큰 형님이 실제로 학식도 높고, 귀한 물건도 많고, 저렇게 적당히 비위 맞춰주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베풀기도 하는 편이니 이걸 이용한 것이라 보면 된다. 중국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장건과 반초가 개척한 비단길로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서양권과 교역을 했으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수도 장안국제도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정도로 다양한 문명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국가였다. 게다가 중국은 명목상 사대의 예로 조공을 요구하기는 했으나, 천자의 체면이라는 명목하에 조공품 이상의 물건을 하사했고, 이는 조선에 있어서는 이득보는 장사였다. 오죽하면, 조선 때 사신이 명나라를 방문하자 '조선의 사신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며 사절단 교류를 좀 줄이자고 부탁하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덕을 베푼다는 유교 사상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던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조공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았다.[3] 사정이 이렇다보니 현실적인 입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마치 현재의 미국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옛날같은 시대 상황에서 별다른 의미도 없이 중국과 적대관계를 지속해 왔다면 선진문물을 도입할 수 있는 경로가 막히고 국가 발전이 사그라들어 결국은 만주처럼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대라는건 그냥 형식적이고 명분적인 치레였을 뿐이다.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은 나당전쟁의 예로 알 수 있다. 나당전쟁은 신라가 당나라 영역을 먼저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처럼 고립된 섬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4], 한반도의 경우 몽골고원 등지에서 꼬리를 물고 발흥해온 세계 최강의 전투 민족들[5]과 직접적인 전쟁을 반드시 피해야 했다. 이들 북방 유목민족의 힘은 중국 정도 되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마저도 몽골이나 만주(여진)족에게는 본토가 털렸었다. 이런 독보적인 강대국 중국이나, 혹은 이런 강대국 중국조차도 떡실신시키던 몽골족이나 만주족과 같은 전투민족들이 한반도로 침공해온다는 것은 한민족 국가의 멸망이나 다름없어 사대는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실제로도 세계사를 보면 어떤 지역의 강대국을 박살낸 유목민족은 주변 지역들도 죄다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을 깨부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한 청나라나 원나라만 봐도 리즈 시절 때에 군사적으로 약하지는 않았다. 또한 전력으로 보면 기병은 당시 전차, 장갑차, 험비나 마찬가지라 그런 걸 수만 대 혹은 수십만 대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유목민족들과 그런 유목민족들을 매수하여 이간질, 분열시키거나[6] 고전시킬 수 있는 농경 대제국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역사에서 로마 제국의 사례만 봐도 로마 같은 우수한 문물, 거대한 규모를 가진 농경 제국조차 정상적으로 어느 정도 돌아가는 농경 제국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7] 세계사적으로도 주변의 제국들에게 형식상 사대를 하는 민족들이나 나라는 많았다.

오히려 한반도로서는 차라리 어느 정도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농경 문화권인 중국과 연대하는 것이 여진이나 몽골 같은 유목+목축 민족들의 약탈과 전쟁에 대처하는 데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세 후반 이후로 갑툭튀하여 동아시아 전 해안을 휩쓸었던 왜구에 대한 대처도 그렇고. 현실적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침략에서 송나라가 고려를 도와준 일은 없었지만[8], 명나라 같은 경우 이만주 항목에서 보듯 여진족을 공동으로 대처한 경우도 있었고 조선이 왜구를 토벌했다는 명목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명나라에서 이를 치하해 하사한 경우도 있었다.[9]

바다 위에서 대륙과 떨어졌다는 지리 조건 덕택에 강대국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비틀어 만든 사대주의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역사를 폄하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사학자들은 중국과 조선 사이의 불균형한 역학관계와 조선 중후기 조선이 보였던 찌질한 모습들을 들추어 이를 한국사 전반의 특징으로 연관시켰고, 이를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조선통치의 지침서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근대 한국민속학에 상당한 학술 성과를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대표 식민사학자인 다카하시 도루는 3.1 운동마저도 중국 사대주의에서 미국 사대주의로 전환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0] 그들이 조선멸시의 전제로 삼은 일본의 자주 독립이 실제로는 지정학 여건의 우위에 말미암은 것임을 고려하지 않았다.[11]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도 구한말에 더 이상 중국이 최고가 아님을 깨닫고, 내셔널리즘의 성장과 함께 일제의 간섭과 식민통치에 맞서 자주성을 강조하다보니 자주성과 맞지 않던 과거 한반도 국가의 사대는 외세 의존으로 폄하하고 비난했다.[12]

사대주의에서 가치경도적인 수사를 제외하고 추려 보면, 패권국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대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 각국의 국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고, 초강대국이 세계 질서를 다스리는 국제 현실에서 모든 국가가 생존 및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용해야 할 전략인 셈이다.

또한 조선인들이 명나라를 따르고 찬양한 것은 그저 그 나라를 찬양한 게 아니라, 당대 중국의 문명이 이미 조선을 앞서갔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진 문물 등을 다시 조선이 중국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조선에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 때 만든 칠정산도 중국의 수시력과 중국을 통해 들어온 아랍의 회회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훈민정음 또한 중국의 언어학 서적과 음운 관련 서적을 연구하여 창제된 것이다.

소중화주의도 옛 중화 문물이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에는 일견 답답해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현대 한국인들도 그 때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면 당대 조선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일본 및 서구권을 무너뜨리고 지구상에 오직 한국만이 유일한 민주 국가로 남았다고 가정해 보자. 살아남은 한국인들이 독재 국가인 중국, 러시아와 다르게 자신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계승한 유일한 국가라며 자부심을 보이는 게 이상할까? 이와 비슷하게, 서양에서도 로마 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유럽 민족들이 로마 멸망 후에는 너도 나도 로마의 후계국을 자처했다.

또한 사대주의관련으로 조선을 비난하는 이들이 간과하는것이 후기 조선이 명나라를 마냥 칭송한것만은 절대 아니라는것이다. 대표적으로 명나라만력제에 대해 조선이 만동묘를 지으며 제사 지내준것과는 별개로 조선 역시 만력제가 암군인건 인지하고 이점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천계제는 원망할 수 없으나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점은 절대로 본받지 말아야한다고 경고하는 기록이 있다.("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13]

또한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해 지조와 절개있는자들이 떠나가서 그렇다고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도 존재한다.[14]

2.2. 비판론

사대주의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기여했다.

명청교체기 이후에는 청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이 곧 명나라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정신승리스러운 소중화사상이 대두되었다. 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조선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소중화사상의 정서는 명청교체 이후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5] 조선의 소중화라는 개념은 왕조는 멸망했지만 중화 문화가 여전히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보다 대국이니 중화를 여전히 섬기는 우리가 바로 사실상의 작은 중화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소중화주의는 자국우월주의적 면모를 보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소인배 나라, 오랑캐 나라, 정신적으로 작은 나라인 청이 정신적으로 위대한 대인배의 나라 소중화 조선에 사대하는 것이 유교원리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청나라 오랑캐들은 무식하면서 힘만 센 야만인들이므로 일단 겉으로만 청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당시의 사상으로 보면, 청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결코 대국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잡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현실적으로는 조선의 20배가 넘는 인구를 갖고 있고 압도적으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더라도,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관념 상에서는 '작은 나라'인 청이 사대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청 건국 이후에도 조선은 '사대주의의 논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사대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규정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사대하는 우스운 지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경우 역사적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화하면서 청나라와의 교역, 교류를 방해하였다.

조선의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질된 것은 조선의 멸망을 가속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송나라나 원나라를 통해 어느 정도는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이전에 비해 후기에 들어서는 중국을 제외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고, 명나라를 통한 제한적인 문물만 받아들이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건국되면서는 망한 명나라 그 시절에 기준이 고정돼버려서, 청을 통해 발전된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사상(북학파)이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뒤떨어진 조선을 발전시킬 방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년(연도의 착오가 아니다!) 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명나라 황제는 만력제로, 사대주의에 입각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다. 193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일제 자체가 중일전쟁과 세계대전의 화마로 뛰어들며 노골적인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민족말살정책이란 지극히 폭압적인 방향으로 더 악화되고, 그나마 남아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중화민국에서 장제스국부군 지원아래 싸우고 있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건 단순한 전통의 발로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미묘하고도 첨예한 정치적 메세지가 담긴 행위로 해석하는게 더 자연스럽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사대'라는 개념은 일단 유교의 기본 관념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식은 부모를 섬기고, 제자는 스승을 섬기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시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충과 효라는 것도 작은 것(신하, 자식)이 큰 것(왕, 부모)을 섬긴다는 사대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사대를 하지 않는 것'은 불효, 불충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3. 사례

3.1. 사대주의의 사례

3.1.1. 고구려

3.1.2. 백제

3.1.3. 신라

3.1.4. 발해

3.1.5. 고려

왕건이 조공하니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장흥(長興) 연간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 태조)이 고씨(高氏)의 왕위(王位)를 잇고는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건을 현토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삼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임명하고,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 송사 > 『송사』권487 열전246 > 왕건이 조공하니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갑인일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왕건(王建, 태조)을 검교태보(檢校太保)로 삼고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 구오대사 > 『구오대사』권43 당서(唐書)19 명종(明宗)9 >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 광종은 연호를 광덕(光德), 준풍(峻豊)으로 삼고 칭제건원 하였지만 송나라거란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결국 뜻을 거둔 채 칭제건원을 취소하였고 송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하고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하였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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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조선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6일 양력 4번째 기사

우리나라의 강토한나라당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나라명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립과 자주는 이미 여러 나라가 공인하였으니 당당한 존호(尊號)에 거하는 것은 응당 실행해야 할 큰 법도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조선후기에는 북방의 반농반목의 기마민족인 청나라한족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점거하자 소중화사상적인 태도가 생겨났는데 고종때에는 유럽이 고대 로마에서 이어진것과 같이 조선은 그 정신적 문화의 계통이 중화문명에서 이어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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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현대

3.2. 반사대주의의 사례

3.2.1. 고구려

3.2.2. 백제

3.2.3. 신라

3.2.4. 발해

3.2.5. 고려

3.2.6. 조선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외왕내제를 완전히 행하지는 않았으나 건국초부터 멸망할 때까지 황제국에서만 쓰는 묘호를 계속 사용하거나[34] 왕비 사후에 시호 뒤에 왕후를 붙여 추존하고[35] 황제국의 용어인 붕어[36], 성상(聖上)[37], 금상(今上)[38], 공주, 후궁[39] 같은 황실 용어를 쓰는 등 일부에서는 황제국의 예법들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시절에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칭제건원을 함에 따라 완전한 황제국이 되게 된다.
3.2.6.1. 국왕
유교 예법상 제후국은 천자의 칭호인 묘호를 올릴 수 없다. 시호도 스스로 올릴 수 없는데 이는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가 주는 시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40][41] 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를 모두 무시했다. 태조(太祖) 포함 태조의 사대조에게도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인 시호를 올렸다. 이후 광해군과 연산군 처럼 반정으로 폐위된 군주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군주들은 전부 묘호를 받았다. 또한 조선에서 신하가 왕을 부르는 명칭엔 주상, 금상, 성상, 군상(君上) 등이 있었는데 뜻은 황제를 부를 때와 비슷하다.

주상(主上) - 조선에서 신하들이 조선 왕에게 주상 전하라고 호칭해서 주상이란 용어를 왕한테만 사용하는 용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주상 또한 금상, 성상처럼 황제에게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 예로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主上)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워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촉서 법정전
소정방이 정지절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도적을 토벌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마침내 스스로 지키면서 앉아서 스스로 곤혹스럽게 지치고 있으니 만약에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나약하고 겁을 먹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공로를 세웁니까? 또한 주상(당 고종)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금 군부를 파견하여서 그 호령을 오로지할 수가 있겠으며...
자치통감 당기 16 고종 현경 원년(656)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한탁주)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여진주(女眞主아골타)가 무리를 모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하는 말이 비로소 너희들과 기병(起兵)하니 글단(契丹/거란,계단)이 잔인함이 오래 되어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지금 주상(主上/요 천조제)이 친정하니, 어찌 하겠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싸우지 않는다면, 능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만약 나의 일족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항복하고 영접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하라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국역
지금 주상(主上/ 금 애종)이 채주(蔡州)에서 수위(受圍/포위를 받음)하니, 공창(鞏昌)으로 천도(遷都)를 의(擬/헤아림)하는 것이다.
금사 곽하마(郭蝦蟆) 열전 국역
왕년에 우리 주상(主上고종)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에 복을 입을 때에, 은혜와 의리를 작량하여 재단해서 단연코 이를 기년복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요, 그 주장은 이천(伊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실천은 우리 주상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니, 참으로 만세의 바꿀 수 없는 전범(典範)인 것이다
수당집 제4권 왕석천(王錫闡)과 혜사기(惠士奇)의절기설(絶朞說)을 논박함
세상에 만약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 같은 임금이 있다면 이와 같은 것들을 어찌 그냥 놓아두고 섬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상(主上)의 위(位)가 아직 바뀌지 않았으며 인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각국 공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조약을 맺은 문서가 다행히 폐하의 윤허와 참정의 인가(認可)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믿는 것은 다만 역신들이 강제로 조인한 헛조약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서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외부 장관(外部長官)을 갈아 세워 일본 공관(公館)에 조회(照會)하여 거짓 맹약의 문서를 없애 버리도록 하고, 또 각국 공관에도 급히 공문을 통해 모두 회합한 다음, 일본이 강국임을 믿고 약소국을 겁박한 죄를 성명(聲名)할 것입니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를 금상황제(今上皇帝)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다 21세기 일본에서도 천황을 지칭할때는 금상(今上)을 쓴다.

성상(聖上) - 집권 중인 황제나 왕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조선을 모함할 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과 왕에게 성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또 태조·세조·열조(列祖)의 성상(聖上)을 참칭(僭稱)하여 감히 천조의 칭조(稱祖)·존상(尊上)과 같이하였으니, 저들이 2백년 간 공순(恭順)한 의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9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해당기사

이렇게 조선에서도 황제에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고 묘호도 사용하여 황제국을 미약하게나마 표방했다.

게다가 왕의 무덤을 묘(墓)나 원(園)이 아니라 능(陵)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였는데 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했다.

왕의 죽음에 훙(薨)과 붕(崩),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붕(崩)과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는 천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은 훙을 써야 맞지만 훙이 주로 쓰이긴 하나 붕과 안가, 빈천, 승하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에서 왕의 명령서를 성지(聖旨)라고도 했는데,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리키는 말인데도 조선에서 성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42]
허적이 아뢰기를 ‘전후의 성지(聖旨)가 간절하신데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 6월 21일 경오 3번째기사 해당기사

연호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썼지만, 의외로 '우리 전하 즉위 XX년', '금상전하 즉위 XX년' '상(上)[43]의 XX년' 식의 변칙 연호도 꽤 많이 보인다. 사실 이건 중국에서 한 무제 때 처음 연호를 제정하기 전에는 천자의 재위년 수를 적어서 연도를 표기했는데 조선의 관행은 이것과 유사하다.
3.2.6.2. 왕실 예법
또한 왕비의 경우, 황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인 중궁(中宮)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시호에는 생전에 쓰던 비(妃)가 아닌, 제후국에서 쓸 수 없는 후(后)를 붙여 왕후라는 시호를 사용했다.

조선에선 왕과 왕세자의 첩을 후궁이라고 하였는데 후궁이란 원래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도록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었을 때, 청나라에서 왕비 책봉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가 제후국에서 후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청나라 사람이 주문(奏文) 가운데서 ‘후궁(後宮)’ 두 글자는 제후(諸侯)는 쓰지 못한다고 하며, 또 ‘현(玄)’ 자(字)가 있는데 그것은 휘(諱)하는 바를 범하였다고[44] 매우 꾸짖으면서 속금(贖金)의 벌(罰)까지 있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12월 19일 신사 2번째기사 해당기사

조선에서는 왕세자에게 동궁(東宮) 춘궁(春宮), 춘저 (春邸), 이극(貳極), 원량 (元良) 저궁(儲宮), 저군(儲君), 저사(儲嗣) 저부(儲副) 저위(儲位)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중국 왕조에서도 황태자에게 동궁, 춘궁, 춘저, 이극, 원량, 저궁, 저군, 저사, 저부, 저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라'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중국에서는 황태자에게만 동궁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세자에게는 동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약로는 말하기를, ‘삼가 《주례》를 상고하건대 공(公)은 환규(桓圭) 9촌(寸)이요, 후(候)는 신규(信圭), 백(伯)은 궁규(躬圭)인데 모두 7촌이며, 자남(子男)의 곡벽·포벽은 모두 경(經)이 5촌이며 명(明)나라의 규제(圭制)는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 황태자(皇太子)에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9촌의 규를 사용하였으나 특별히 분수(分數)의 구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26년 12월 19일 무자 1번째 기사해당기사

또 왕의 적녀를 공주로 봉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만을 공주로 봉하지, 친왕(親王)의 딸은 군주(郡主)로, 군왕(郡王)의 딸은 현주(縣主)로 봉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등체강의 원칙에 따라 친왕대우(황제-태자-친왕 순)인 조선국왕의 적녀는 친왕(親王)의 딸인 군주(郡主)로 봉하는 것이 맞다.

조선에선 왕의 사위에게 의빈과 부마(駙馬)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사실 부마의 칭호는 황제의 사위를 뜻하는 용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맹사성이 "부마의 명칭은 제후국에서는 쓸 것이 아니온데, 단지 전조(前朝)의 구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치지 않은 것이오니, 의당 그 칭호는 고쳐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2일 정축 3번째기사해당기사
3.2.6.3. 의복
왕의 곤룡포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인 오조룡(五爪龍)을 사용하였다. 당장 중국의 제후왕 곤룡포에는 사조룡을 사용하였다.

황제의 곤룡포에 칠조룡을 사용하고 왕의 곤룡포에 오조룡을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천장의 장식만 그러한 것이고, 대한제국 황제의 황룡포를 보면 명나라의 황제와 같은 오조룡이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 초상화나 채용신의 고종 어진의 용보를 보면 오조룡의 용보를 사용하였다 .
3.2.6.4. 제사
조선 초기엔 제후는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태조 이성계환구단의 명칭을 원단으로 고치고 명나라 몰래 천제(天祭)를 지내다가 세조 대에 이르러 다시 환구단으로 고치고 제사를 지내며 소격서를 설치해 도교식 천제도 지내다가 중종 시기에 전부 없어졌다. 하지만 제도만 없앴고 환구단(원구단)의 명칭을 남단으로 개칭하여 고종때 정식으로 환구단을 다시세우기 전까지 계속 천제를 지냈다. 이 때문에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천자의 나라에서만 가능한 천제를 지낼수는 없다는 사대부의 공격을 계속 받았다. 용산에 원조 환구단 있었다? 아시아경제
3.2.6.5. 기타
그리고 조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조선에 조공을 바칠 때 조선의 임금을 가리켜 황제 폐하라 부르기도 했다. 사실 사대주의적 논리에서 책봉을 받은 국가는 원칙상 제후국이므로 스스로 다른 세력들에게 황제국 처럼 조공을 받고 그들로 부터 황제 폐하라고 불리며 독단적으로 책봉을 해주면 안된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과 막부의 쇼군들에게도 비롯 형식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상국(上國), 금상황제(今上皇帝), 폐하(陛下)라고 불렸다. 실록1, 실록2, 실록3, 실록4, 실록5 그렇게 조선 초중기에 일본에서 남북조시대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쌩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몇몇 다이묘들도 이렇게 하기도 했다.[45]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명분 상의 이유로 외왕내제를 하지 못하던 터라서 한동안은 주변국들이 이렇게해도 모른 체하거나, 주의를 주는 척만 했다. 어차피 실무적 측면에서는 '나는 천자요'라고만 안 했을 뿐, 할 건 다했지만.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에 주위의 민족을 외부로 조선을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자 영조 때에 황제 칭호를 쓰자는 상소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46]

고종 시기에 있던 갑오개혁, 을미개혁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후국 용어인 '전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국 용어인 '폐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47] 다만 이 때는 아직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한 건 아니라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는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면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개국기원(開國紀元)' 연호를 도입, 1894년을 개국 503년이라 칭했다.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도입하여 '건양(建陽)'[48]이라는 연호를 선포하였고, 이듬해(1897)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이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다시 개원하였다. 가끔 고종이나 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 황제'나 '융희 황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외의 사례들로는 아래와 같은 사례들이 있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진시황진나라사마염서진은 한반도에 관심을 돌리기조차 전에 분열돼버렸고,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다가 자국 내부 문제와 겹쳐서 39년만에 망해버렸고, 송나라는 문치주의와 약한 군사력, 요나라금나라라는 강력한 이웃 국가들 때문에 내내 강대국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철령 이북의 땅을 주장하며 몽니를 부렸으나, 태종 이방원과 영락제 주체의 인연으로 양국의 관계가 원만해진 이후로는 한번도 조선을 침략하려 시도한 적이 없다. 조선 중후반기의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명나라와 전쟁하는 동안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부족해진 식량과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급하게 자원확보가 필요해서 조선과 전쟁을 한 것이었다.[2] 이는 의외로 간단한 문제인데, 당시 중국에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바로 서쪽과 남쪽으로의 확장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당의 위치를 넘볼 수 있었던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나당전쟁에서 방어에 성공해 한반도를 확보하고 잠깐 대립각을 세웠지만 신라가 고구려처럼 북방세력과 연결해 당나라의 패권을 위협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당나라도 더 이상 원정을 할 형편이 못 되어 정세가 고착화되었다. 고려 이후부터는 한반도가 중국 대륙의 패권을 넘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졌다. 거기다가 중국 입장에서도 한반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것은 보급로 문제나 당시 항해 기술 등의 문제로 중국에서도 상당히 국력을 소모하는 일인데다가, 한반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이득에 비해 한반도 공략한답시고 군사를 내보냈다가 토번이나 몽골 등의 이민족들에게 본토를 위협받는 리스크가 훨씬 컸다. 그러다보니 주권과 독립국으로써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적당히 말 잘 들으면 굳이 한반도의 정세에 터치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3]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 본래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정말로 조공으로 삥을 뜯고 있었고 한나라 이후에 등장한 왕조부터 유교 사상이 점점 성장함에 따라 조공 무역이 점차 이익이 되어갔다.[4] 그러나 일본도 실제로는 스스로 중화질서로 편입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했다. 나라 시대 때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하며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점과, 감합무역 등의 방식으로 중국과 교류를 했던 점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립된 섬나라여서 외적 침입의 위험이 적었던 일본이지만, 역설적으로 고립된 섬나라였기 때문에 중화 문물의 유입이 비교적 늦고 지진 등의 자연재해도 잦았기에 중화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더더욱 간절하게 여겼다.[5] 흉노, 선비족, 거란, 여진족, 몽골 등은 모두 당대 최강의 무력집단들이었다.[6] 물론 돈지랄이기는 하지만 재력과 외교술을 동원하는 것도 엄연한 국가의 능력이다.[7] 유목 제국이든 농경 제국이든 리즈 시절 때를 보면 굳이 그런 막강한 상대와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그런 넓은 영토를 아무 이유 없이 갖게 된 것도 아니라 화약 무기가 퍼지기 전까지는 "훨씬 우수한 문물로 대제국을 지배하는 이웃 민족을 쓰러뜨린다." 이런 것들은 이웃이 자멸 혹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 등에 의한 것들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농경민족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보다 군사적 효율이 좋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 정착해서 별다른 전쟁 없이 풍족한 자원을 향유할 수 있던 농경민족과 달리, 유목민족은 유목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지역을 이동하며 다녀야 하는데다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끊임없이 약탈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8] 이 당시 송나라도 거란과 몽골 눈치를 보느라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9] 명사 조선전 정통 9년, 10년 및 가정 35년 등 항목 참고.[10] 3.1 운동이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 발언에 영향받은 것을 이런 식으로 비틀어 놓았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3.1 운동의 내부 요인을 무시하고 외부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이 상당하다.[11] 섬나라라는 지리 조건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데 상당한 이득이다. 국경을 접한 국가보다는 바다를 끼고 한 발자국 떨어진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섬나라라는 지리 이점 등의 요인들이 일본을 중화중심의 사대질서에서 한 발자국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12] 북한의 역사관이 이러한 일제 식민사관을 답습하고 있다.#[13] 사실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아 명나라를 망친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섬기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히려 조선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는 참사를 초래했으니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들 입장에서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당연히 만력제를 안좋게 볼 수 밖에 없다.[14] 상이 이르기를,"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pa_12208023_002[15]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16] 이런 행동은 나당전쟁에서의 신라와 비슷하다. 그만큼 사대라는 행위는 단순 겉치레일 뿐이라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17]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논했던 고구려가 왜 이러냐고 할 수 있지만, 독자 연호를 채택하며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고구려는 당시 광개토대왕부터 문자명왕으로 이르기까지 국력 최전성기였고,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라는 분열기로 국력이 약해진 특수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영양왕 시기의 고구려는 최전성기에서 내려와 있었던 반면 수문제당태종수나라당나라는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여 한창 국력이 상승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시기에도 북조에 대한 형식적인 사대는 지속하였으며 일단 중국을 대하는 자세 자체는 기본적으로 사대였다. '태왕'이라는 독자 칭호와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는 동시에 외왕내제를 하는 형식이었다.[18] 심지어 자주성의 사례로 손꼽히는 묘호의 사용도 어떤 면에서는 사대주의적 성격도 지닌다는 양면성이 있는데 이는 묘호를 내리는 관습 자체가 원래 중국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묘호를 사용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자주성도 내포하지만 동시에 선진적인 중국의 관습을 국내 왕실에서도 적용한다는 점으로 사대주의적인 성격 또한 가진다.[19] 다만 대외적으로만 내세우지 않았을 뿐 내부 신민들에게는 그냥 계속 황제로 군림했다. 전형적인 외왕내제를 칭한 것이다.[20]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모화의 의미에 딱 들어맞는다.[21] 이성계제2차 요동정벌 4불가론중 하나와 유사하다.[22]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의 오등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 예로 봉화백 정도전, 청해백 이지란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경우도 원래의 작위는 정안대군이 아닌 정안공이였다.[23] 다만 선조는 명나라의 책봉과 별개로 광해군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다. 또한 결국엔 광해군이 세자로서 왕위에 오르긴 했다.[24] 보통 황제가 죽으면 연호사용이 거기서 끊나지만 숭정제는 이미 죽었는데도 진정한 천자라며 계속 숭정연호를 쓰니 이 연호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호였다.[25]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유래한 말로 황하의 물이 만 번을 꺾여도 결국 동쪽인 조선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으로 자신이 숭정제의 친필을 얻어 바위에 새긴 충청도 괴산의 화양리에 만력제숭정제의 사당을 지으라고 하여 후학들에 의해 건립되었다.[26] 華人이 稱之曰小中華라하니 玆豈非箕子之遺化耶리오 嗟爾小子는 宜其觀感而興起哉인저[27] 근데 그래서 막상 서양각국이 청나라에게 조선과의 통상 허락을 요구하면 조선은 내지가 아닌 속방이라 청나라는 권한이 없고 조선이 결정할일이라고 답변했다. 괜히 쇄국정책에 흠집내려고 하지 말고 우연히 떠내려온 난파선 같으면 밥은 주고 치료는 해줄태니 얼씬대지 말고 꺼지란 소리다. 즉, 골치아픈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듯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방안이 기존 조청 사대관계의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28]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에서 먼저 간접적인 삼한일통 의식을 내비쳤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광개토대왕비를 같이 참고.[29] 만약 태조대왕의 '태조'가 묘호라면 최초 사용 국가는 고구려가 된다.[30] 다만 후대의 고려, 조선과 달리 사후 모든 국왕들에게 묘호를 일관적으로 주지는 않는 과도기적 특성을 보였다.[31] 다른 나라의 이상한 법률[32] 대표적인 인물로 윤언이, 정지상이 있다.[33] 사대주의적인 조선에서는 이것을 비판하였고 고려사 저술도 세가로 한다.[34]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모든 임금에게 일괄적으로 묘호를 올린 나라이다. 고려도 묘호를 올리긴 했으나 원간섭기에 묘호 사용이 중단된 이래로 멸망할 때까지 묘호는 다시 쓰이지 않았다.[35] 후后라는 글자는 황후皇后, 태후太后 등과 같이 원칙적으론 황제국에서나 쓰는 표현이다.[36] 승하 등 기타 용어들과 혼용됨[37] 또다른 황제국 용어인 주상主上과 혼용됨[38] 현재 재위중인 임금[39] 숙종 시기, 청나라에 보내는 문서에 후궁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제후국 주제에 참람하다는투로 책망받은 사례가 있다.[40] 그래서 원 간섭기고려가 독자 묘호·시호가 없었던 것이다. 묘호는 고려 말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경효대왕 때 회복한다.[41] 그래서 당이 기록한 발해의 연호와 시호는 사개(私改), 사사로이 바꾸다. 사시(私諡), 사사로히 시호를 올리다.로 적었다. 당 입장에선 제후국인 발해가 천자의 연호를 쓰고 시호를 천자에게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올렸기 때문이다.[42] 실제로 고려사 충렬왕 원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 황제가 내린 조서에 고려는 이제 왕위 후계자는 태자가 아니라 세자라 하고 국왕의 명령을 예전에는 성지(聖旨)라 하였으나 이제는 선지(宣旨)라 하니 관직의 명칭도 우리 조정(원나라)과 같은 것은 고쳐야 한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해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만을 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당 기사[43] 임금을 뜻한다.[44]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말한 것이다.[45]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쇼군이나, 조정천황도 씹고선 중국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46] 이상 모든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문서로.[47] 고종실록 1894년 12월 17일(기미) 1번째 기사[48]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49]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征伐), 《만주연구》17(2014)[50]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76-2(2020)[51] 미군 주둔으로 국방비를 일부 절약하여 다른 분야를 투자,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런 사례는 해외에서도 존재한다.[52] 명 멸망 이후 조선은 자신들이 명의 중화사상을 잇는 적통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