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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7:06:03

이천 서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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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川 徐氏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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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8080><colbgcolor=#008080> 관향 경기도 이천시
시조 서신일(徐神逸)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군위군
경기도 안성시·연천군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김제시·순창군·임실군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전라남도 곡성군·광양시·나주시·담양군
전라남도 무안군·보성군·여수시·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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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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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평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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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박천군
함경남도 고원군·단천군·영흥군·홍원군
인구 199,792명(2015년)
링크 이천 서씨 대종회
서씨일가연합회

1. 개요2. 역사
2.1. 시조 및 성씨의 기원에 대한 자료들
2.1.1. 14~15세기 : 서신일 시조설의 확립2.1.2. 16~17세기 : 서신일 시조설의 확장2.1.3. 18~19세기
2.1.3.1. 외부로부터 등장한 '서씨 동일 기원설'·'기자 및 준왕 후계설'2.1.3.2. 『문헌비고』 계통의 기록(1790?)2.1.3.3. 역설: 이천 서씨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주장
2.1.4. 번외: 20세기 부여 서씨의 '서씨 동일 기원설'로부터의 후퇴와 반발
3. 집성촌
3.1. 경기3.2. 전라·제주3.3. 대구·경상3.4. 북한
4.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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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천 서씨는 경기도 이천시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9세기의 인물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받들며, 이후 서눌, 서희, 서필의 3대에 걸쳐 재상을 연달아 배출하며 기반을 확립했고 고려 중기까지 성세를 누렸다.

조선 후기 이후, 특히 1790년 무렵의 『증정문헌비고』에 정리되기를 거쳐 1908년 간행, 확산된 『증보문헌비고』에 그런 주장이 수록된 것을 계기로, 이천 서씨가 국내 서씨들의 대종(大宗)이라는 인식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다른 서씨가 이천 서씨와 동계라는 주장은 뜬금없이 18세기 이후 달성 서씨/대구 서씨 계통의 문헌에서야 기자 및 준왕 후계설과 함께 등장하지만, 자기 집안 족보인 1845년 『이천 서씨 을사보』 발문에서조차 달성 서씨 측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며, 부여 서씨 측에서는 한때 그런 주장에 동조하다가 1925년 『부여 서씨 을축보』에서는 강경한 비판 입장으로 선회하는 등 문헌학적으로 볼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많다.

2. 역사

일관적으로 언급되는 시조는 9세기의 인물로 정리되는 서신일(徐神逸)이다. 이 인물이 화살에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집에 숨겨줬더니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자기 아들을 구해줘서 고맙다며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고관대작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서신일이 나이 여든에 아들 서필을 낳았고, 이 서필부터 서희, 서눌까지 3대가 재상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이 전승은 이제현의 『역옹패설』을 거쳐 『고려사』 등에 수록되어 있다.

다만 이후에는 가문의 출발점에 대해 온갖 주장이 난무한 집안이다.[1] 때문에 이천 서씨 일각에서 이천 서씨는 한국 모든 서씨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천 서씨 측의 초대 전승은 스스로의 족보 내부에서도 충돌이 많아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별도의 단락 참고.

한편 『고려사』 지리지 이천군조에서는 왕건이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러 갈 때 현지 사람 서목(徐穆)의 도움을 받아 강을 무사히 건너는 일이 있어 이 지역 이름이 이천(利川)으로 고쳐졌다고 하여 아예 이천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이 가문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서목은 『이천 서씨 갑진보』에서 서신일의 형제인 서신통(徐神通)의 아들로 나타나며, '이천'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래 『주역』에 몇 차례 등장하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문구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붙곤 했다.

1845년 『이천 서씨 을사보』 발문에 따르면, 이천 서씨는 서필 이후 대략 17세기 후반이나 18세기 전반 무렵까지 3대의 태사와 8대의 평장사(平章事)를 내며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3대의 태사'란 서필 - 서희 - 서눌을 의미하므로, 그 뒤로 8대의 평장사, 곧 재상이 나왔다는 것이 된다. 다만 『을사보』의 서술은 19세기 중반 당대까지를 아우르는 것으로, 이는 '3대의 태사 이후 8대가 연속으로 재상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3대의 태사 이후, (이 시점에서 30대를 자칭한) 『을사보』의 시대까지, 『을사보』 직전의 100여 년을 제외한 시대 동안 8차례에 걸쳐 재상을 배출했다'는 의미로 풀린다. 곧 20여 대 가운데 8대가 재상을 배출했다는 의미로, 이들 사이에 연속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서균(徐鈞)의 묘지명에 따르면 서희의 일가인 서유걸(徐惟傑)이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1090년대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병부상서 등을 역임하여 평장사로 불린 서정(徐靖)이 서유걸의 아들이자 조산대부(朝散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복양공(濮陽公) 서균(徐鈞)의 아버지였으며,[2] 그 서균의 아들으로 서원(徐元)과 이후 서술하는 서공(徐恭) 등이 있었다. 또한 서공의 묘지명에 따르면 서유걸은 서희의 아들이었으므로 서신일 - 서필 - 서희 - 서눌 - 서유걸 - 서정 - 서균 - 서공의 계보가 확인된다. 서균의 지위가 선후대에 비해 다소 낮기는 하나 『을사보』의 증언과 같이 그 전후에는 모두 재상급의 반열에 올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명문가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그 밖에도 1108년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임명된 서보(徐甫) 등 서씨 관료들이 꾸준히 확인되지만, 아쉽게도 독자적인 열전이 없어 정사서를 통해서는 이전의 서씨와 명확한 가족 관계를 갖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이후에는 12세기 중엽,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서눌 다음으로 이천의 서씨 유명인사로 언급하는 서희의 현손, 곧 서눌의 5세손이라는 서공이 확인된다. 이 서공에 대해서는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 자리에 있었고 무신들도 잘 대해 정중부무신정변 때에도 화를 피했다고 하나, 무신정변 이듬해인 1171년에 평장사로 죽어 무신정권에 적극적으로 합류하지는 못한 듯 서씨 유력인사에 대한 기록이 드물어진다.[3] 19세기 말의 『만가보』에 따르면 이 때까지의 직계 계보는 서신일 - 서필 - 서희 - 서눌 - 서유걸 - 서정 - 서균 이후 감무를 맡은 서린(徐鱗) - 중랑장을 맡은 서수(徐秀)를 거쳐 서희준(徐希俊) - 서운(徐暈)으로 이어지는데, 감무는 이후의 현령(정7품 정도)에 비견되는 하급 지방관이고 중랑장은 정5품 무관으로 객관적으로 낮은 관직은 아니지만 재상의 반열에 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서희준과 서운 대에는 관직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4] 곧 족보에서조차도 서신일 직계 서씨의 세력이 이전보다는 약해졌음이 보이는 것이다.

1270년 상장군(上將軍)으로 보이는 서균한(徐均漢)이 있어 무신정권 아래서 이름을 떨친 서씨도 있었던 듯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후 이천 서씨의 유력 인사를 충선왕 대의 서원(徐遠)으로 연결하여 서균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이 인물 또한 이천 서씨 인물인지는 불명확하다.[5] 한편 이 서원은 1293년 남해현령으로서 뇌물을 받은(...) 기록이나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죽주지주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고려사』·『동국여지지』 등에서 확인되어 존재가 교차검증된다. 이 서원의 아들이 서선(徐選)이라고 하는데 조선 초 이천 서씨로 현달한 인물상을 대표하는 인사로 언급된다.[6]

이후 서선의 아들 서달(徐達)과 예조판서·이성군(利城君)에 오른 서유(徐愈),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세조에 맞선 서강(徐岡) 등이 15세기까지 이름을 알렸던 반면, 조선 왕조의 건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은거했다는 서견(徐甄)이 17세기까지도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이름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서씨(徐氏)로서 현달한 관원은 모두 목(穆)의 후손'이라고 하여, 15세기~16세기 전반 동안 이름을 알린 서선·서달·서강 및, 서선과 연결되는 서원은 서목계였던 듯하다.[7] 반면 앞서 언급한 서린 이후의 계보는 『만가보』에서 서견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서유는 이천 출신이라고는 하였으나 부친의 집안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름난 집안 출신은 아니었던 듯하다.[8]

그렇지만 『을사보』가 작성되던 19세기 중반 시점에는 '100여 년에 걸쳐 높은 벼슬아치나 유명한 선비가 이천 서씨 문중에서는 하나도 나지 안했으니'라고 하여,[9] 조선 중기를 넘어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가세를 떨치지 못한 것에 많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2.1. 시조 및 성씨의 기원에 대한 자료들

이천 서씨의 선대에 대한 기록은 1342년 『역옹패설』까지 소급되는데, 사실 이 정도면 한국의 계보 중에서도 굉장히 시대가 빠른 것이다. 『삼국사기』가 1145년, 『삼국유사』가 1280년대(일부 편목은 1310년대까지 추정)에 편찬된 것을 고려하면 이보다 빠르게 성씨의 기원을 논한 경우는 상기한 삼국시대에 대한 저술에 쓰인 삼국 및 가야의 왕족 및 유력 씨족을 제외하면 손에 꼽을 정도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등장하는 서씨'라고 해서 '한국 모든 서씨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게다가 이런 '대종(大宗)' 인식의 등장은 결국 '종갓집의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다'는 관념에 기반을 두어야 설득력을 지니기에 부여 서씨의 백제 기원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천 서씨의 기자준왕 후계설이 등장하는 것과 거의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이런 설은 18세기 중반 이후, 그것도 뜬금없이 달성 서씨의 족보 자료에서부터 보인다.

그에 더해 그 등장 시기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기자조선설을 배척하는 현대의 입장에서 그런 주장을 그대로 따를 수 없으며, 그 주장과 거기서 아예 2000년 더 올라가는 막연한 주장인 단군조선 기원설을 제외하면 9세기의 인물로 추정되는 서신일이나 그로부터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시대 정도에 이천 서씨의 시조가 설정되는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집안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7세기의 부여융 때이고 시조는 아예 기원전까지 올라간다는 부여 서씨와의 명분 싸움에서 밀려 본인들이 주장하는 대종(大宗) 자리를 내주어야 할 판이다. 물론 후술하듯이 사실 부여 서씨 측의 전승이야말로 근거가 부족한 정도를 넘어 공인된 역사적 문건들과 대놓고 충돌하기 때문에 정말 서로의 족보를 다 파헤칠 작정으로 달려들면 밀릴 것까지는 없으나, 과연 그것이 족보 좋아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는...

어쨌든, 이천 서씨 측의 조상에 대한 주장을 자료별로 정리하면 아래 단락들과 같고, 그 가운데 대략적인 내용만을 간추리면 바로 아래 요약문과 같다.

2.1.1. 14~15세기 : 서신일 시조설의 확립

2.1.2. 16~17세기 : 서신일 시조설의 확장

큰 맥락에서 이야기를 갈아엎는다고까지 할 주장은 보이지 않으나, 이 무렵의 내용부터 점차 고증과 어긋나는 내용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2.1.3. 18~19세기

2.1.3.1. 외부로부터 등장한 '서씨 동일 기원설'·'기자 및 준왕 후계설'
이렇게 이천 서씨 측에서 소소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더해가던 상황은, 뜬금없이 이천 서씨 내부가 아닌 달성 서씨대구 서씨[10]의 주장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주장은 18세기 후반에 큰 인기를 끌어, 한때 부여 서씨까지도 이에 동조했다. 부여 서씨는 1663~1664년 동안 정리된 『계해초보(癸亥草譜)』의 서문에 따르면, "백제의 후예는 실로 부여의 서(徐)(씨)(百濟之後實爲扶餘之徐)"라고 하면서, 부여융이 당 황실로부터 서(徐)씨 성을 받아 백제의 부여씨가 부여 서씨로 이어졌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계해초보』에서는 위의 문장 뒤에 "그러나 오래되어 세대(世代)를 고찰할 수 없다(而久遠世代無可攷矣)"라고 해서 부여융과 부여 서씨 사이를 연결해 줄 중간 세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태도를 내세웠는데, 이때에 들어 태도가 바뀌게 된 것이었다.

사실 『대구 서씨 임오보』(1702)의 첫 머리에서 "서씨의 족보는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徐氏之譜, 不傳於世)."라고 한 것을 곱씹어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곧 1702년 당시까지 족보가 없었다고 스스로 말한 대구 서씨 집안이 "우리 조상 잘 모르겠긴 한데 아마 이천 서씨 참고하면 될 거 같은데?"라고 나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고려사』 기준 이천 서씨의 최초의 서신일 시조설은 사슴 이야기만 좀 설화적이라고 하고 넘어가면 그대로 사실이라고 하는 데 거의 문제가 없고, 대구 서씨 측과 비교하면 3세기하고도 반은 빠른 14세기부터 확실한 문헌 증거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계보 의식을 빠르게 확립한 집안이다. 곧 이천 서씨는 대구 서씨에게 결핍을 메워줄 수 있는 아주 확실한 대상이었던 것으로, 이때 만들어진 '동일 기원설'이 정말 순수하고 목적성이 없는 것이었을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이런 이면의 목적은 『부여 서씨 경진보』(1760)에서도 보이는데, 곧 '서씨 동일 기원설'을 언급하면서 그 대종(大宗)은 부여 서씨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향후의 과제라고 하여 내비친 것이다. 이런 기대가 깨어진 1925년의 시점에서 부여 서씨가 이천 서씨의 대종(大宗) 주장에 대해 강한 적대적 태도로 돌아선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족보 연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서씨의 문제만이 아니라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상의 연원을 엄청나게 올려잡는 한때의 풍조로 말미암아 본관을 달리해도 성만 같으면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조상동원설(祖上同源說)이 난무했다. 심지어 다른 성씨까지도 같은 형제로 갈라졌다는 설까지 나타났다. 따라서 이 무렵 갑작스럽게 제시된 '서씨 동일 기원설'에 대해서는 치밀한 검토가 필요한데, 서씨의 경우 이런 주장이 굉장히 허술할 뿐만 아니라 『이천 서씨 을사보』가 이에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검증하기 굉장히 쉬운 축에 속한다.
2.1.3.2. 『문헌비고』 계통의 기록(1790?)
이로부터 시작된 일은 다시 한 번 눈덩이 구르듯 커져, 국가에서 편찬한 문헌인 『문헌비고』 계통의 기록에도 실리게 된다. 이 문헌의 최종 형태인 1908년의 『증보문헌비고』는 1929년의 『조선씨족통보』 등을 거쳐 근현대의 족보 편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일각에서 서씨의 기원과 관련해 최대한 확대 해석하는 조목이나, 여러 모로 해석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앞서 언급했듯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서씨의 기원이 모두 (이천 서씨로) 하나라는 주장은 이천 서씨도 아닌 달성 서씨가 유달리 내세운 주장이며, 각각 성씨의 조목 중에 이천 서씨에서 분적해 나왔음을 분명히 한 집안은 앞서 언급했듯 평당 서씨 하나이다. 반면 부여 서씨 측은 오히려 백제 때부터 자신들의 성씨가 시작되었으니 자신들이 담론의 주도권을 내세워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런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아래에서 언급하듯 『증보문헌비고』의 이천 서씨조에서는 서신일에 앞서는 서두라 시조설이 등록되어 있다. 만일 이천 서씨 측에서 다른 집안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면 서두라 시조설이 서씨 전체 조목에 실려 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음은, 서씨 전체 조목에 서씨들의 의견 가운데 이천 서씨의 의견조차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실제로도 『을사보』에서는 기자 및 준왕 후계설과 같은 『문헌비고』 계통의 기록을 반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이천 서씨 족보에 다른 집안이 끼는 데 이천 서씨가 동의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12]
다른 한편, ②의 단군조선 기원설과 같이 이전까지의 문헌에서 출처를 찾을 수 없는 설 또한 기재되었다. 하필 서씨 전체 조목에 있어 그나마 이전까지의 흐름으로 보아 달성 서씨의 주장이 아닐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서씨 동일 기원설'과도 달리 이 주장은 정말 출처를 알 수 없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유독 중화 서씨에서 여수기 후손설을 내세우는 상황인데, 만일 일단 써 있으니까 다 믿을 만하다고 각 집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천 서씨는 중화 서씨에게 종가 자리를 내줘야 할 판. 어쨌든 기자조선설처럼 민족 문제까지 건드리는 것은 아니나 단군조선 기원설 또한 갑자기 4000 수백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추가하며 내 말을 믿으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라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말의 정부 문건에 '서씨 동일 기원설'이 등록되는 데 대해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때 대구 서씨 측에서 굉장히 관료계에서 큰 입김을 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1775년 『대구 서씨 을미보』를 작성한 서명응의 형은 소론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서명선이고, 서명응 본인과 서명응의 아들 서호수(徐浩修)는 유명한 정조 대의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서호수의 아들 서유구도 『임원경제지』라는 방대한 저작을 남긴 이름난 학자로 한국사에 관심이 많다면 스쳐는 지나갔을 법한 정도의 이름이다.

그렇게 관료계에서 대구 서씨가 기염을 토하던 상황에서 후술하듯 1845년까지도 이천 서씨 측의 족보에는 반영되지 않았던 '서씨 동일 기원설' 및 '이천 서씨 기자 및 준왕 후계설'은 난데없이 1760년대 이천 서씨가 아닌 부여 서씨·대구 서씨 측의 문헌에 보이게 되는데, 기실 그 주장은 '다른 집안도 다 그렇던데?'라는 말을 반복할 뿐 논리적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은 마땅한 것 자체가 없었다. 그럼에도 끝내 이런 주장이 국가에서 편찬한 문헌인 『증정문헌비고』에도 실리는 판이 되자 『증정문헌비고』에서는 대놓고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라고 깠고, 그러면서도 정작 이천 서씨 측 일각에서 내세운 서두라 시조설은 단군조선 기원설까지 기록되는 판에서조차도 언급되지 못했다. 곧 이천 서씨의 주장이 곧이곧대로 반영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부여 서씨 측의 주도권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여 서씨 또한 의견을 반영한 후보에서 배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천 서씨와 부여 서씨를 제외하고 그런 주장을 내세울 만한 집안이 어딜지는...

정작 오늘날에는 대구 서씨와 달성 서씨는 일단 두 집안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부터 머리를 싸매야 할 판이라 서씨 전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서지 않고, 어쩌다가 비행기를 탄 이천 서씨 일각에서만 이 문제로 큰 소리를 내고 있음을 고려하면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2.1.3.3. 역설: 이천 서씨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주장

이처럼 정작 18~19세기 동안 편찬된 이천 서씨의 족보에서는 '기자 및 준왕 후계설', '서씨 동일 기원설'과 같이 18세기 동안 등장한 이전에 근거를 찾기 힘든 주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을사보』에서 서신일로부터 '일어났다'거나 '뿌리를 두었다'고 한 언사만큼 명백하게 선을 그은 문장도 찾기 힘들다. 되레 『을사보』 편찬 시점으로부터 대략 100여 년 동안 이천 서씨 문중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 없다며 불안해 하면서도 자기 집안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고 냉정한 문장을 스스로의 손으로 써내면서, 그런 노력을 다함으로써 문중이 다시 번창하기를 바랐음은 만감을 교차하게 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2.1.4. 번외: 20세기 부여 서씨의 '서씨 동일 기원설'로부터의 후퇴와 반발

1790년 무렵 작성된 『증정문헌비고』의 내용은 1908년 『증보문헌비고』가 완성되고, 또 그것이 근대의 인쇄술과 만나 퍼져 나가면서 오늘날 적지 않은 족보가 깊이 뿌리 박은 토양이 되었다. 이천 서씨 측의 태도 또한, 『을사보』와는 달리 20세기에 들어서는 바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퍼져 나가자 굉장히 당황하고 분개한 것이 부여 서씨였다. 1925년 편찬된 『부여 서씨 을축보』에는 「보계변(譜系辨)」이라는 편목이 실려, 다음과 같이 '이천 서씨 대종(大宗)설'을 강경하게 비판하였다.

사실 현재로서는 부여 서씨 측의 주장 또한 반박할 거리가 많을 뿐더러[16] 다른 근거 또한 아직 전근대의 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천 서씨 측을 찌르고 들어가는 부여 서씨 측의 칼 끝은 충분히 날카로우며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는 성리학 왕조인 조선이 망하고도 한 번 반 강산이 변한 1925년에 벌어지고 있었던 일을 개탄한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이천 서씨 대종설'이라는 것의 역사적 위치가 어떠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결국 1925년 『부여 서씨 을축보』는 1760년 『경진보』의 입장을 버리고 『계해초보』의 입장으로 회귀해, 아예 "그(부여융) 뒤의 계보는 사라져 상서공(尙書公, 서존)부터는 증빙할 수 없으며, 몇 대조인지(도) 알지 못한다(其後系失, 無徵於尙書公, 不知爲幾世祖)"라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부여융과 서존 사이에 어떤 인물도 두지 않고 서신일보다 더 전 시대는 상세히 쓰면서도 서신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보계변」의 강경한 입장을 고려하면 이는 의도적인 조치일 것이다.

사실 앞서 언급했듯 대구/달성 서씨 측에서 유독 이천 서씨와의 동계설을 내세운 데 대해 선대 족보의 '결핍'이라는 문제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이천 서씨 측의 주장과 비교해도 그런 '결핍'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서신일보다도 더 빠른 시대에 시조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부여 서씨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 자체가 없었다. 또한 애초에 부여융에 대한 주장이 본인들의 계보 의식에 필수불가결하며 특이한 것뿐이지, 부여 서씨 측에서 진정한 시조로 보는 것은 당연히 부여융 집안의 시조인 온조왕이다. 그런데 근대 역사학에 의해 박살나기 이전, 20세기까지도 기자 및 준왕 후계설을 내세우던 이천 서씨(정확히는 '서씨 동일 기원설') 측과 부여 서씨 측이 동계라고 하면, 부여 서씨의 시조 온조왕은 준왕이 세운 마한을 멸망시켰으므로 종갓집 왕조를 속임수를 총동원해 짓밟아버린 전통 유교 관점에서 극악무도한 존재가 된다(...). 잠시 오월동주했으나 근본적으로 여러 모로 서로의 주장이 상극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간극이 결국 부여 서씨의 의도가 좌절로 돌아간 시점 이후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오면서 「보계변」의 목소리로 터져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3. 집성촌

이천 서씨는 타 지역에 많이 세거하는 편이다.[17]

3.1. 경기

3.2. 전라·제주

3.3. 대구·경상

3.4. 북한

4. 인물


[1] 사실 이 말도 그 자체로 촌극에 가까운데, 아래 언급하는 거의 대부분의 자료가 '이천 서씨 시조가 서신일'이라는 서술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현재 확인되기로는 빨라도 조선 후기부터 그 위에 대해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 주장이 추가되다 보니 '시조'의 말뜻조차 흐려진 채 '시조는 서신일인데 그 위에 더 있다'는 식의 서술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2]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서정이 서눌의 조카라고 하여서 맞추어 보면 서유걸과 서정이 형제가 되는 셈이나 잘못으로 보이며, 묘지명이 알려지기 전까지 족보 사이에도 이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는지 『부여 서씨 을축보』 「보계변」에서 공격당한 부분이기도 했다.[3] 동시대에 예부상서에 오른 서순(徐醇/徐淳)은 정중부 등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역시 열전이 없어 이천 서씨로 보이는 서공의 가족 또는 친척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일단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서순(徐淳)으로 쓰여 서정의 손자로 전하고 있는데 이 경우 서순이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서균의 4남~6남 중 한 명으로 서공의 동생이 된다.[4] 다만 어째서인지 『만가보』에는 서린과 같은 대에 평장사에 오른 서공에 대한 언급이 없다.[5] 의외로 『부여 서씨 을축보』 기준 부여 서씨의 5대째로 기록된 서희팔(徐希八)이 무신정권기 문관인 이순목(李淳牧)과 혼맥을 맺어 성장하려 했던 모습이 보인다. 이렇듯 이 때의 서씨라고 해서 이를 이천 서씨로 단언할 수 없다.[6] 그런데 서선은 1433년에야 죽어 1293년 활동 기록이 보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선왕 대 사람이라고 한 서원의 아들이라고 보기는 이상하다는 문제가 남는다. 후술하듯 조선 초 서씨 계보는 중앙에서 편찬한 문헌과 족보 사이에 차이가 유독 심한 구간이기도 하다.[7]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서선이 서순의 7세손이었다고 하였으나 계보를 그렇게 연결한다면 서원·서선·서달은 서목계가 아니게 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한 '현달한 관원 모두'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8] 『만가보』에서는 서견 아래 5대째를 서강(徐崗)이라고 썼는데 그 행적으로 보아 서강(徐岡)과 동일인물이지만, 1412년 『태종실록』에도 보이는 서견이 실록에서만 1442~1461년 보이는 서강의 5대조라고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서강의 조부인 서진(徐晉)이 태종 대의 인물이라고 했으므로 대략 서견 대와 서진 대가 병렬되거나 대수에 큰 차이가 없는 계보를 선후 관계를 갖는 것으로 잘못 결합했을 것이다. 또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서유가 서희의 8세손이었다고 하였지만, 942년생인 서희와 1356년생인 서유 사이에 413년 차이가 나므로 8대 동안 평균 세대 차이가 51.75년이 되며, 중간의 계보가 다를 수는 있어도 서희의 5세손인 서공이 1171년 죽은 점을 참고하면 그 뒤로 3대 동안의 거리가 대략 180여 년에 준하게 되므로 그 동안의 세대 차이가 60년 넘게 벌어진다. 이는 자연적인 계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9] 링크한 곳에서는 단순히 '이후'라고만 번역하여 마치 '3대의 태사와 8대의 평장사' 직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읽히나 원문은 '邇'로 '근래에'라는 의미이다. 이로부터 100여 년 동안, 곧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상황을 말함을 알 수 있다.[10] 두 성관의 관계는 '동네도 비슷하고 인식도 비슷하고 하니 일단 대충 옆동네에서 갈라진 집안 아닐까' 정도인데, 실제로는 조선 후기에 같은 인물이 족보마다 다르게 기재되는 등 대강 같은 집안인 듯하면서도 인식은 굉장히 복잡했고 아예 족보를 정리하는 방법 자체가 여러 차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족보를 인용하는 데 비교적 소극적인 학계의 연구 논문들 사이에서도 논의된 바 있다.[11] 또는 공자의 '군자삼변(君子三變)'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 있는데,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내용 등이 언급됨에 근거해 일단 이렇게 풀었다.[12] 애초에 족보 자체가 '우리 집안의 단결'이라는 인력으로도 작용하지만, '다른 집안과는 격이 다른 전통 있는 집안이다'라는 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냥 '족보'라는 표현 대신에, '양반집 족보'라고 쓰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전까지는 그러지 않던 다른 집안이 '우리 집안도 이천 서씨 분파 하겠다'는 주장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며, 당장 『을사보』의 방향이 그랬다.[13] 예컨대 신라의 전시 편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되는 『삼국사기』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조에 따르면 대장군 김유신은 대당(大幢)·귀당(貴幢)·서당(誓幢)·낭당(郎幢)·계금당(罽衿幢) 등 5개 부대와 상주(上州)·하주(下州)·남천주(南川州)·수약주(首若州)·하서주(河西州) 5개 주(州) 병력을 이끄는, 명시된 것만 22명의 총관(摠管)과 1명의 대감(大監)을 이끄는 문자 그대로 전국 단위 군대의 사령관이었다.[14] 링크한 원문에서 이 부분의 끝 글자는 '李'이나 그대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의) 말'을 뜻하는 '季'의 착오이거나 오자를 그대로 기재한 듯하다.[15]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서아성(徐阿城)이라고 했으나 「보계변」 그대로 쓴다.[16]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사서에서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 부여융 묘지명을 비롯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부여융과 백제의 부여씨 일족이 당나라에서도 부여씨로 살았고, 특히 부여융은 죽을 때까지 당나라에서 머물렀음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전통 시대에 유통된 부여융에 대한 당나라에서의 사성(賜姓)설은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더 자세한 내용은 부여 서씨 항목 참고.[17] 이천 인근에도 집성촌이 있긴 하다.[18] 독립유공자 서용하가 이 마을 출신이다.[19] 교리공파 집성촌이다.[20] 독립유공자 서종채가 이 마을 출신이다.[21] 독립유공자 서경식이 이 마을 출신이다.[22] 독립유공자 서상룡, 야구선수 서건창이 이 마을 출신이다.[23] 독립유공자 서기표가 이 마을 출신이다.[24] 독립유공자 서진구가 이 마을 출신이다.[25] 서성환 태평양 창업주가 이 마을 출신이다.[26] 독립유공자 서봉화가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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