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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8:04:38

선우(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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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 선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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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태원(太原)
시조 선우정 (鮮于靖)
중시조 선우협 (鮮于浹)
집성촌 평안남도 대동군
평안북도 창성군
평안북도 태천군
충청남도 공주시
인구 1,103가구 3,560명(2000년)
3,588명(2015년) | 국내 135위

1. 대한민국의 성씨
1.1. 개요1.2. 같이보기
2. 중국의 성씨3. 인물
3.1. 실존 인물
3.1.1. 선우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3.2. 가상 인물

[clearfix]

1. 대한민국의 성씨

1.1. 개요

鮮于. 본관은 태원(太原) 단본이다. 태원이 어딘지에 대해서는 중국 산시성(산서성) 타이위안시, 한국평양시, 충청북도 충주시의 세 가지 설이 있다.[1]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기자조선을 창건했던 상나라의 왕족 기자[2]의 48대손 우평(友平)이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 건마국[3]의 초대 왕이었던 기자의 40대손 준왕의 후손 기자의 47대손 마한 8대 원왕(元王) 훈(勳)에겐 아들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3형제가 있었는데, 우성은 백제로 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우평은 고구려로 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은 신라로 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에 의하면 내용이 조금 달라 기자의 아들 선우송(鮮于松)이 시조가 된다. 기자의 맏아들인 2대 장혜왕(莊惠王) 송(松)은 즉위하면서 동생인 중(仲)을 우산국에 봉하였는데, 이에 기자가 식읍(食邑)을 하사받았던 땅인 태원(太原)을 본관으로, 조선의 선(鮮) 자와 우산국의 우(于) 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즉 기자의 아들 때부터 이미 선우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족보들에도 등장한 인물과 동일인인 기자의 47대손 마한 8대 원왕 선우훈(鮮于勳)의 아들인 기자의 48대손 선우량(鮮于諒)은 백제에게 마한이 멸망당하자 평안남도 용강군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성을 쌓고 황룡국(黃龍國)을 건국했다. 그러다 선우량의 10세손 선우병(鮮于柄) 대에 고구려에게 황룡국이 멸망하여 선우씨는 서민(庶民)이 되었다 한다. 황룡국은 고구려 해명태자의 일화에 등장하는 나라이다. 이에 대한 고찰. 그 이후로는 세계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고려 고종중서문하성의 관리인 종7품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선우정(鮮于靖)을 1세조로 한다. 즉 분명한 세계가 이어지는 사실상의 시조는 선우정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선우씨의 역사상 기록으로는 238년 삼국시대(중국) 위(삼국시대)의 황제 조예에 의해 낙랑태수에 임명되어 대방태수에 임명된 유흔과 함께 몰래 바다를 건너 동연낙랑군을 점령한 선우사(鮮于嗣)의 기록이 있다.[4]

고구려 초기 기록에 우(于)씨 왕후로 우소(于素)의 딸이자 고국천왕산상왕왕후 우씨와 우수(于漱)의 딸이자 서천왕왕후 우씨(서천왕)의 2명이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우씨가 선우씨의 축약형이란 가설이 있다. 실제로 이후에도 1자 성으로 쓸 때는 그렇게 축약했던 용례가 있기 때문. 다만 아직 성씨의 사용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실제로 우가 이름의 일부가 아닌 성씨였다는 가정 하에서 그러하다.

집성촌은 대부분 관서 지방에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당시 1,226가구 중 770가구가 평안북도에, 258가구가 평안남도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으므로 현재 남한 지역에 있는 선우씨는 대다수가 관서 지방에서 남하해 온 사람들과 그 후손이다. 2015년 기준 3,588명으로 집계되었다. 남한에는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일대에 있는 집성촌이[5] 가장 크며 강원도 춘천시 일대에도 소수[6] 있다.

오래전에는 선우씨를 서울토박이의 대표적 성씨라고들 하는데 이는 틀린말이며 앞서 말했듯이 선우씨의 최대 집성촌 중 하나가 당시 부유층이 많이 사는 제2의 도시인 평양인 탓에 이를 피해 피난온 사람들이 대부분 서울에 정착하면서 생긴 오해다. 이는 서울에 사는 다른 비슷한 인구의 성씨들에 비해 선우씨만 유독 많을 뿐이다.

이 성씨를 쓰는 유명인 중에 선우은숙, 선우재덕이라는 연기자, 선우정아라는 가수가 있기 때문에, 복성 중에서는 남궁, 황보씨와 함께 그나마 어느 정도 일반인에게도 알려진 편이다.

가장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는 Sunwoo이다. 2011년 외교부 여권 통계에 따르면 Sunwoo가 약 75%, Seonwoo가 약 19%, Seonu가 약 3%, Sonu가 약 2%, Sunoo 등 다른 표기는 1% 미만이다. 참고로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Seonu,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Sŏnu이다.

성을 제외한 이름을 외자로 쓰는 경우 같은 복성인 황보씨처럼 한자가 다른 선(宣)씨와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선우진 같은 경우 '선우 진' 인지 '선 우진'인지 혼동할 수 있다.

1.2. 같이보기

2. 중국의 성씨

鮮于. 한국의 선우씨와 한자 또한 같다. 연원은 유목민족계와 중국계의 2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후대의 기록을 봐서는 기자의 후예라는 쪽이 정설화된 듯 하다.

가장 오래 전에 기록된 연원으로는 춘추전국시대 유목민족인 백적(白狄)족의 선우부(鮮虞部)가 중국에 정착하면서 중산(中山)을 건국하였는데 여기서 선우(鮮虞/鮮于)씨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천판(陳槃, 진반)이 1968년에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표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表譔異)라는 책에는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씨(鮮于氏)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7] 기자는 조선에 봉해졌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해졌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라는 기록이 있다.

다른 기록으로는 톈진시에서 발굴된 후한 대의 관리 백겸(伯謙) 선우황(鮮于璜)의 비문인 선우황비(鮮于璜碑)에 선우씨의 유래가 적혀있다. 선우황은 특별한 업적은 없으나 비문이 유명하다. 선우황비는 선우황의 손자가 선우황이 죽은 지 40년 뒤인 165년에 세운 것인데 내용은 대충 "이름은 황(璜)이며, 자는 백겸(伯謙)인데, 그 조상은 은(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 독우(督郵) 선우식(鮮于式)의 손자이며, 주종사(州從事) 선우웅(鮮于雄)의 아들이다. 안문태수(雁門太守)를 지냈고 125년에 죽었다."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 이학근)에 의하면 중산의 땅으로 판명된 허베이성 스자좡시 정딩(正定)현 신청푸(新城鋪) 유적에서는 명문이 있는 상나라 청동기가, 가오청(藁城)구 시타이(西臺) 유적에서는 상나라 청동기와 옥기가 세트로 확인되었으며 그 외에도 27곳의 상나라 유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비문 기록에다 유물까지 나왔기 때문에 종합하면 한국의 선우씨가 중국의 선우씨와 어떤 관계인지는 불분명하나 적어도 중국의 선우씨가 상나라 및 그 왕족인 기자, 춘추전국시대의 중산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중산은 진(통일왕조)에 의해 망했는데 그 왕족들은 산시성(산서성)(山西) 타이위안(太原)으로 이주되었고, 진이 망하자 다시 현 후난성(湖南), 후베이성(湖北), 장시성(江西)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성을 이(易)씨로 바꿨다고 한다.

그 외의 기록으로는 오호십육국시대 철륵족의 지도자였던 적진(翟眞)의 부장 선우걸(鮮于乞)[8]은 적진을 암살하고 조(趙)를 건국했다. 이를 선우조(鮮于趙)라 한다. 하지만 선우걸이 적진의 아들인 적성(翟成)에게 피살당하여 선우조는 곧바로 망했다. 선우조는 존속 기간이 너무 짧아 국가로 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선비족 등의 이민족도 일부 선우씨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남북조시대 북위 효문제의 한화 정책 때 대부분 우(于)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3. 인물

3.1. 실존 인물


3.1.1. 선우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3.2. 가상 인물

보기 드문 성씨긴 하나 어감이 특이한 데다 복성이라는 유니크함이 있어서인지 창작물에 은근히 쓰이는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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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선우씨의 기원으로 기록된 상나라 왕족이 통치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중산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산서성 태원으로 옮겨졌다는 정사 기록이 있다.[2] 현재 역사학계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반박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설로 통했었다.[3] 현대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준왕 집단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가 마한 소국들 중 목지국이 아닌 건마국이라는게 증명되었다.[4] 중국측 기록에도 선우씨는 기자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는 한편, 선우씨의 동래에 대해 정사와 교차검증을 시켜주는 이 기사 또한 있기 때문에 선우씨는 정말로 기자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선우사는 현 평양 일대를 지배한 낙랑태수를 역임했으며 이후의 선우씨도 주로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 반면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성씨들은 반드시 준왕을 매개로 해야 하는데 애초에 기자가 고조선에 동래했다는 고고학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준왕이 과연 기자의 후예인지도 증명되지 않았다. 고조선 왕실 기자 후예설에 대해서는 현재 고조선 측에서 직접 입장을 나타낸 사료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현 사학계에선 중국 측에서 쉬운 이해를 위해 이민족도 중국인의 후예라 마음대로 적었거나 중원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 고조선 왕실에서 자칭했다는 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5] 다만 이 집성촌도 6.25 이후 피난민에 의해 생긴 집성촌이다.[6] 대표적으로 학원강사 선우빈이 있다.[7] 자성은 상나라의 왕성이었으므로 선우씨는 상나라 왕족(기자)의 후예라는 뜻이다. 현대와 달리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었으며, 그때의 관념에 따라 종합하면 자성 선우씨(子姓鮮于氏)가 된다.[8] 한족인지 철륵족인지 불분명하다.[9] 선우휘와 5촌사이.[10] 선우중호의 아버지.[11] 선우종원의 아들.[12] 선우재덕과 5촌사이.[13] 본명은 정유진.[14] 본명은 정연례.[15] 본명은 길은정.[16] 비디오 더빙판 한정. SBS판에서는 윈디 그린으로 나온다.[17] 원래는 강씨인데 새아버지 성으로 바뀌었다.[18] 권타로라는 이름으로도 나올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