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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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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제2대 황제
열조 명황제 | 烈祖 明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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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205년
후한 영천군 허창
(現 허난성 쉬창시)
즉위 226년 6월 29일
조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239년 1월 22일 (향년 33세)
조위 하남군 낙양 낙양궁 가복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고평릉(高平陵)
재위기간 조위의 황태자
226년 6월 28일 ~ 226년 6월 29일
조위의 황제
226년 6월 29일 ~ 239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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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조(曹)
예(叡)
부모 부황 고조
모후 문소황후
형제자매 10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평원왕비, 명도황후, 명원황후
자녀 3남 2녀 (양자 3남)
원중(元仲)
작호 무덕후(武德侯) → 제공(齊公)
→ 평원왕(平原王)
묘호 열조(烈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화(太和, 227년 ~ 233년)
청룡(靑龍, 233년 ~ 237년)
경초(景初, 237년 ~ 239년)
}}}}}}}}}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초기2.3. 전성기2.4. 인사2.5. 흑화2.6. 혼란2.7. 죽음
3. 평가
3.1. 어머니 문제3.2. 황제 직할체제의 명암
3.2.1. 반론
3.3. 정신문제
4. 가족 관계5. 기타6. 미디어 믹스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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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조손자이자 조비장남으로 ()는 원중(元仲).

삼국시대 위나라의 2대 황제.[1]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명제(明帝). 실제로 재위한 군주 중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자의 묘호를 최초로 받은[2] 황제이기도 하다.

재위 초기에는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하였음에도 조비의 장남이라는 정통성으로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고, 촉한오나라의 공격을 수차례 막아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렸다. 특히나 제갈량의 북벌문서를 보면, 5차 북벌은 거의 조예가 혼자 막아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말년의 실정[3]위나라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의 강한 군사적 역량으로 최측근 조휴, 조상 등이 거듭 패전해 사마씨 가문에게 병권과 재정권을 몰아줄 수밖에 없었고, 누구 아들인지도 모르고 정통성도 희박하며, 후계자로써의 역량도 부족한 조방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은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위나라는 사실상의 창업군주 조조가 죽은 지 20년도 안 돼서 멸망의 늪으로 빠져든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요절하여 제국의 몰락을 앞당긴 황제"라고 평했다.

2. 생애

2.1. 유년기

위왕 조조의 아들인 조비문소황후 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위왕 조조는 장손이 태어나자 조예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명령했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평판을 들었으며 5~6세부터 수려한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 조조는 “나의 기반은 너에 이르러 3대째가 된다.”고 말했다.

조조는 연회가 열릴 때마다 동행하였고, 조예를 시중(侍中)ㆍ측근(近臣)들과 함께 있게 할 정도로 장손을 귀여워했다. 조예는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였으며, 법리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예는 열다섯 살 때 무덕후에 봉해졌고, 221년에는 제공, 222년에는 평원왕이 되었다.

하지만 행복한 유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 조비가 어머니 견씨를 죽이고 곽여왕을 새 황후로 세웠다. 또 주석인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처음에는 조예를 싫어해서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러자 조예는 대신들과 교류 없이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면서 숨죽이며 살았다. 조예가 즉위하기 전 얼굴을 본 사람은 시중 유엽밖에 없었으며, 유엽의 평은 '진시황과 한 효무제의 범주이지만 자질은 미약하여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오'이다.

주석인 위말전에 의하면 조비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다음 일화 때문이다. 조비와 조예가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어미 사슴과 아기 사슴이 함께 있는 것을 봤다. 조비가 어미 사슴을 활로 쏴 죽이고 조예에겐 아기 사슴을 쏴 죽이게 했다. 그런데 조예가 울면서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의 사정에 비유하여 "폐하께선 이미 어미를 쏘셨습니다. 저는 차마 그 새끼까지는 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조비는 즉시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조예를 기특하게 여겨 황태자로 세우기로 결심했다.

사실 조비는 조예 대신 경조왕 조례를 황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조비가 예상치 못한 병에 걸리자 갑작스럽게 조예를 황태자로 세운 것이다.

제갈근전에 따르면 육손조비의 뒤를 이어 새로 즉위한 조예가 선정을 펼친 덕에 위나라가 더욱 안정되어 조조 때보다도 더 정벌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손권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제갈근에게 편지를 보내 "조비가 대업을 계승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많은 상태였으며 .. (중략) .. 지금 조예는 유약하여 사람들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소. .. (중략) .. 아래 있는 자들은 이익을 다투게 될 것이고, 나이 어린 군주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니, 이로부터 패하게 되는 것이 어찌 오래 걸리겠소."[4] 라고 말했다.

연의에서는 제갈량과 마속 모두 조예를 '나이도 어린데다가 자신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건 조예가 아닌 탁고대신 사마의'라 평했다. 이 평가가 정말 아이러니한 게, 결국 둘 다 조예에게 처참히 패했다.

할아버지 조조와 천하를 다툰 손권의 입장에서 어린 조예는 햇병아리에 불과했을 것이며 조비처럼 억센 신하들을 휘어잡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비는 위왕 조조가 죽기 이미 3년 전에 세자가 되어 있었고 나이도 많았을 뿐더러 지지기반도 확실했지만, 조예는 나이도 어렸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했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태자로 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위에 올랐을 때 그 지위가 그다지 안정치 못했다. 또 조예의 풍채를 본 신하는 시중 유엽만이 유일했으며, 다른 신하들은 조예의 모습을 상상만 했을 뿐이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위나라 탁고대신(조진, 사마의, 조휴, 오질)과 여러 재상들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는데 오나라손권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지만 조예는 황제가 되자 손권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2.2. 초기

조비가 죽은 지 불과 3달 후, 손권은 조예를 우습게 보고 군대를 이끌고 강하군을 공격했다. 신하들은 모두 놀라며 군대를 보내자고 건의하였지만 조예는 “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치서시어사 순우를 보내 변방(병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순우가 도착하여 강하군에서 지나가는 현마다 징발한 군사 및 따르는 보병과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 횃불을 들자(병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것) 손권은 물러나 달아났다.

228년 봄 정월, 촉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로 귀순한 맹달은 자신을 총애하던 조비가 죽자 다시 제갈량과 내통하여 위나라를 배신하려고 했다. 이에 사마의가 신성으로 출진하여 8일 만에 도착하고 포위한 지 16일 만에 속도전으로 결착을 보았다.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가 맹달의 대장 이보와 맹달의 조카 등현을 유인하자,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였다. 맹달을 참수하여 수급을 보내오니 낙양의 번화한 길에서 머리를 불태워버렸다.[5]

이후 조예는 먼저 조비가 조예의 옆에서 정사를 보좌하도록 한 4명의 대신 중 진군을 제외하고 조휴는 회남으로, 조진을 관중으로, 사마의를 완성으로 각각 보내 한 지방의 임무를 맡기고 정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조비 시대 구품관인법으로 문벌중시 경향이 생기면서 성행하기 시작한 우아한 말투와 고상한 자태를 뽐내는 실속 없는 무리들을 모두 면직시키고[6] 다시는 등용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으며 청담론을 멀리 하고 경전을 학습하게 하였다.

또 가혹한 형벌을 느슨하게 하여 사형에 관한 법령 조문을 검토하고 많은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항상 재판이란 천하의 생명에 관한 일이오" 라고 말하며 큰 재판이 있을 때마다 방청할 만큼 법리에 관심이 많았다. 229년에는 사공 진군과 산기상시 유소 등에게 한대의 법률을 정비하여 신법률을 제정하게 하였다.

적전 의식을 행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적전에서 스스로 밭을 갈았으며 관의 창고를 열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을 구제하였고 233년에는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해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여러 번 순시를 하며 과부, 고아, 아들 없는 노인을 위문하고 곡물과 흰비단을 하사했으며 조비 시대의 부세와 부역을 줄였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조예에게는 사치와 향락, 도교적인 연단법에 탐닉하는 모습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신 위기는 이런 조예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전략)구천(句踐)은 인구를 늘릴 방법을 깊이 생각하였어도 미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상방(尚方)의 금은 제품은 점점 더욱 증가하고, 공사와 부역은 끊이지 않으며, 사치스러운 기풍은 나날이 성행하고, 국고는 나날이 텅 비어 가고 있습니다. 옛날 한무제(漢武)는 신선의 도를 믿고 구하여 구름 끝 이슬과 옥가루를 함께 먹으면 장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선장(仙掌, 높이 세운 손 모양의 그릇)을 세워 구름 이슬을 얻으려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박식하고 현명하셔서 항상 그를 조소했습니다. 한 무제는 이슬을 구하려다 오히려 비난을 당했고, 폐하께서는 이슬을 구하지 않으면서 헛되이 선장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기호에는 이익이 될 것이 없는데 인력과 비용을 낭비하고 있으니, 진실로 성스러운 생각으로 마땅히 명확하게 제정해야만 합니다.[7]
오서 열전 권21 왕위이부류전 위기[8]

조예의 이런 기질은 제갈량의 북벌 당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2.3. 전성기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촉나라의 대장인 제갈량이 국경을 침입하자 천수, 남안, 안정 삼군의 관리와 민중이 위나라에 모반하고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종육전에 따르면 이렇게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자 조예는 직접 서정에 나서려고 했다. 산기시랑(散騎侍郞) 종육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려 반대했다.
대체로 책략은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조정에서 세운 계략만으로도 승리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며, 전공은 장막에서 세우는 것을 숭상합니다. 전당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가가 중앙을 지키고 있어야 사방을 그 위세로 지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대군이 서쪽으로 원정에 나선다면 비록 위세는 백 배로 강해지겠지만, 관중의 비용이 증가되어 손실을 입는 것이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또 더운 날씨에 행군을 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소중한 소재가 되겠지만, 천하의 지존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예는 친정 대신 제갈량을 물리칠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당황해서 무슨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몰랐는데, 조예가 먼저 신하들을 안심시키며 말하기를 "제갈량은 산을 거점으로 굳게 지키다가 지금은 스스로 왔으니, 이는 병서에서 말하듯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합치되오. 하물며 제갈량은 삼군(三郡: 천수, 남안, 안정)을 탐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이제 이때를 이용한다면 그를 쳐부수는 것은 필연적이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병마를 정비하고, 보병과 기병 50,000명을 동원하여 제갈량을 막아냈다. 조예는 대장군 조진을 파견하여 관우(關右 : 관중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일제히 군대를 진격하도록 했으며, 우장군 장합을 가정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몸소 장안으로 진주하여 가정에서 제갈량을 크게 격파시켰다. 제갈량이 패배하여 도주하자, 삼군이 평정을 되찾았다.

어처구니 없는 건 이때 위나라 조정 내에도 조예의 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위략에 따르면 이 당시 조예가 죽었다는 참언이 돌았고 그 소문을 들은 군신들은 놀라서 옹구왕 조식을 영접하려고 했다. 수도에서는 할머니 무선황후 변씨와 여러 공들이 모두 두려워했고 조예가 돌아오자 얼굴을 살폈다. 무선황후 변씨는 조예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발설자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에 조예가 말하기를, “세상의 말이 모두 이러하거늘 어찌하여 찾으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며 그만두게 했다. 이 당시 위나라는 국가적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소문을 내며 나라를 뒤흔드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보통 외적 침입이 일어나는 동안 내분 벌어지는 나라가 대부분 망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운도 따라줬다고 볼 수 있을 듯.

1차 북벌도 훌륭히 막아 내었지만 촉나라오나라의 동시 북벌이었던 234년 제갈량의 5차 북벌 때[9] 그 역량은 빛을 발했다.

234년 오장원 전투 때 촉나라오나라의 양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손권촉나라위나라가 접전을 벌이고 있으므로 조예는 정신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은 손쉽게 공격하여 많은 수확을 얻고자 했다. 정동장군 만총이 군대를 인솔하여 나아가 이들을 방어했다. 만총은 신성의 수비를 철거하고 적군을 수춘까지 유인하려 했는데,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예는 촉나라가 지형상 식량 보급이 불리함을 이용하여 사마의에게 절대로 싸우지 말고 무조건 지키키만 할 것을 명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 광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멀리 약양을 점거하고 끝내는 외효를 격파하였으며, 선제는 동쪽에 합비를 두고 남쪽에 양양을 지키게 하고 서쪽에는 기산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군이 이 세 성 아래에서 격파된 원인은 이 세 성 모두가 반드시 다투는 요새이기 때문이오. 설령 손권이 신성으로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니 수비를 굳게 하면 내가 장차 직접 가서 그들을 정벌할 것이지만, 내가 도착할 때면 손권은 아마도 도주했을 것이오."

조예는 위나라 대다수의 군대를 사마의에게 넘긴 뒤, 자신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직접 용주를 타서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는 배짱을 보여주고, 본인 말대로 조예가 도착하기도 전에 손권은 도주하였다. 조예가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친정한 이유는 손권의 기회주의적인 성격 상 자신이 나서면 바로 물러날 거라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때 만총의 의견대로 신성을 버렸다면 위나라는 이를 다시 되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군들의 계책보다 젊은 황제의 계책이 더 뛰어났던 것이다.

한편 이때 대신들은 대장군 사마의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사와 대치하고 있어 승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조예에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으로 가서 사마의를 후원해 줄 것을 건의하자, 조예는 “손권이 도주했다면 제갈량은 담(膽)을 이미 격파했을 것이고, 대장군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소." 라고 장담했다.

그 말대로 제갈량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사마의는 조예로부터 지원 받은 많은 병력을 바탕으로 성채를 굳게 지키기만 하고 대응하지 않았다. 때마침 제갈량이 질병으로 죽자 의 군대는 후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제갈량을 막아낸 건 사마의가 아니라 조예였던 것이다. 조예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군사작전을 친히 통솔하였으며 그의 지략을 신하들이 존경하고 탄복했다. 단순히 위나라가 강국이라서 북벌을 막아낸 것이 아니라 조예의 식견과 결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제갈량의 북벌을 훌륭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에는 적극적인 대외 정벌에 나서서 추장 가비능을 암살하고 선비족을 축출하며, 서쪽으로는 다시 삭방군을 설치하고 동쪽으로는 사마의의 요동 공손씨 정벌로 요동까지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게 된다. 요동 정벌 이전에 조예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사마의에게 병사 40,000명을 내주려고 했는데, 의론에 참여한 대신들은 모두 40,000명을 보내는 것은 너무 많으며 싸움에 소용되는 비용을 제공해주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자, 조예는 이렇게 말했다. “4,000리 멀리 적군을 토벌하러 가는데, 비록 뛰어난 계책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야 마땅하니 전쟁 비용을 계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는 40,000명을 출정시켰다.

사마의가 요동에 도착할 무렵 폭우가 계속 쏟아져 즉시 공격할 수 없게 되자 대신 가운데에는 사마의공손연을 빨리 격파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려 사마의를 귀환시키도록 하자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조예는 듣지 않고 말했다. “사마의는 위기를 만나면 변화에 대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니, 공손연을 사로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곧 공손연을 격파하니 이런 것들이 결국은 조예의 예측과 같았다.

즉 이러한 조위의 성공적인 팽창은 엄연히 조예의 뛰어난 전략적 식견과 내치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의 의미를 넘어서 촉나라가 북벌을 할 때 요동 공손씨가 후방에서 호응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의미도 가진다.

2.4. 인사

아버지 조비와 달리 간언한 인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을 꺾어버리거나 죽이지 않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곧은 소리를 좋게 생각하였다. 또 예를 가지고 대신들을 우대하였다.

조예는 공적을 세운 자나 유능한 자를 선발하였으며 우아한 말투와 고상한 자태를 뽐내는 실속 없는 무리들을 증오하였는데 이는 위지 노육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육이 "명성은 특별한 사람을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평범한 선비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평범한 선비는 가르침을 존경하고 선을 흠모한 연후에 유명하게 되므로 그들을 증오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신하는 특별한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충분하지 못하며, 또 명성에 따라서 평범한 인물을 살피는 것을 하지않고 있습니다. 단지 그 후의 일을 당연히 조사해야 됩니다.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탄핵하거나 상주함에 있어서 말로써 하고, 그 말의 허실에 대하여 명확하게 조사를 할 경우에는 공적을 갖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법은 폐지되었고 비난과 칭찬의 평판에 따라서 나아가고 물러남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위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고, 허실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것입니다." 라 상소하자 즉시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진실과 허위를 바꾸지 않고, 실속없는 허황된 무리들을(필궤, 하안, 이승, 정밀, 환범 등등) 모두 면직시키고 다시는 등용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들은 조예가 죽은 후에 조상의 도움으로 출세하게 되고 이후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의의 손에 제거된다.

2.5. 흑화

그런데 여태껏 잘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느 시점부터 정신줄을 천국에 고이 모셔놓고 왔는지, 지름신이 들려 심시티하렘짓에 푹 빠져 사치를 일삼기 시작했다. 조예가 사망할 당시 나이가 겨우 34~36세로 당대 기준으로도 일찍 사망한지라 말년이라고 해서 흔히들 생각하는 노인도 아니었다.

명제기에 따르면 235년 3월 문덕곽황후를 장사지내는데, 이때 조예는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켜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후궁도 늘렸다. 당연히 이에 대해 간언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잔잠, 고당륭, 노육, 진군, 양부 등이 상소문을 많이 올렸다고 한다. 어쩔 때는 한 달에 수천 개나 되는 상소가 오기도 했는데, 조예는 이를 일일이 다 읽으면서 늘 좋은 충고를 잘 들었다며 제대로 답장도 전했다. 하지만 앞에서는 이렇게 그 어떤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너그러이 받아들여 대답도 잘 해놓고 뒤에서는 싹 무시했다. 정사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후궁을 많이 거느렸다고 해도 일국의 황제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예는 궁궐 안에 있는 여자들을 총애하는 데 빠져 있어서 최고위 후궁부터 청소하는 궁녀까지 무릇 수천 명이나 되었다, 당연히 문제가 안될리가. 조예는 여자 가운데 문서를 읽을 줄 아는 사람 6명을 뽑아서 여자 상서로 삼았고 밖에서 오는 상주문을 살펴 상주문이 윗사람 마음에 안 들면 마땅히 처리하여 내려보내는 처당(處當)과 상주한 내용이 가하다는 그림으로 표시하는 화가(畵可)로 표시하게 했다. 즉 상소문은 여비서들에게 맡기고 놀아버렸다는 소리.

이에 고유가 황제의 마음에 정말 드는 미녀들 최소한만 추리고 나머지는 내보내라고 했지만 조예는 대답이 훌륭하다고만 하고 듣지 않았다. 또 수렵(사냥)에 대한 법률이 엄격해 금지구역의 사슴을 죽이면 사형에 처했는데 사슴이 불어나 새순을 먹어치우니 곳곳에서 피해가 생겨 헤아릴 수가 없으며, 예를 들어 형양 인근 수백 리는 1년 내내 수확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조예가 들었다는 말은 없다. 양부의 경우엔 계속 간언하다가 황제가 예법을 어긴것도 지적하고 후궁을 줄이라고 간언하려다 자세한 후궁 숫자를 들으려고 궁정관리인 어부의 관리를 불렀다가 기밀이라고 하자 바로 곤장 100대를 치고 꾸짖으니 조예가 양부를 꺼렸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237년 태자사인 장무는 지금 군대를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부세로 감당이 안 되어서 힘들어 죽겠는데 궁에 들이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은 여자는 왜 가지려 하시느냐면서 지금 황후의 거처인 초방[10]의 모후(母後)들에게도 제멋대로 상을 내려주고 안밖으로 바꾸어가며 이끌어주니 그런 비용이 군비의 절반이나 된다고 깠으나 역시나 조예는 듣기만 했을 뿐 실천하지 않았다.[11]

그가 사치를 부렸다는 궁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자.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235년 3월, 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조예는 이때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昭陽殿)과 태극전(太極殿)을 만들었으며, 총장관(總章觀)을 지었다. 총장관은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었는데 백성들은 이 노역을 하느라고 농업과 잠업(누에치기) 적기를 놓쳤으며, 강직한 신하 양부(楊阜)와 고당륭(高堂隆) 등이 각각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하게 진언했는데 조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군이 궁궐공사 등 토목 사업의 규모에 대해서 간했지만 경비만 조금 줄인 수준이었다. 위략에 따르면 조정에서 태자사인 장무의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중에는 '장병(將士)의 부모와 처자들의 굶주린 자를 후하게 하사하고, 백성의 병환을 물어서 그 악함을 없애고, 곳간을 채우고, 갑옷과 병기를 보수하고, 공경함으로서 천하에 임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있다. 즉 장병의 부모, 처자들이 굶주릴 정도였다는 것. 같은해, 조예는 맹진항이 보이는 전망대를 지으려다가 신비의 간언으로 그만둔 적도 있다.

부역이 심해지니 장제왕기가 부역을 그쳐달라고 상소했지만 조예는 모두 듣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예는 그 어떤 간언도 용납하는 대신 거의 따르지를 않았다. 결정적으로 같은 해 7월에는 낙양의 숭양전이 불에 타 버렸는데 자치통감과 위서 고당륭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조예: (숭양전이 불탄) 이것은 어떤 허물이오? 예법에는 어찌 기도하여 재앙을 없애는 방법이 있소?
고당륭: 《역전(易傳)》에서 말하기를, '위가 절검하지 않고 아래가 절검하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불이 나서 그들의 집을 태운다'고 했고, 또 '군왕이 누대를 높이면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힘써서 궁실을 장식하면서 백성들이 텅 비게 되고 고갈되어 있는 걸 알지 못한 것이니 하늘이 그것에 대응하여 가뭄(旱)를 주고, 우뚝 솟은 궁전에 화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하늘이 감계를 내리는 것은 폐하를 꾸짖고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인도(人道)를 더하고 숭상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만 합니다.

즉, 3~4월에는 백성들은 부역에 동원되느라고 농사시기를 놓쳤고 장병들의 처자들에게 줄 식량이 없었으며 7월 이후에는 백성들이 텅 비고 고갈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들어 가뭄이 들게 했다는 것으로 당시 가뭄으로 인한 재해[12]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영서의 진서에 따르면 이해 정월에는 수도에 홍역까지 돌았다고 한다. 전염병에 농사 시기를 놓친 데다가 가뭄의 재앙까지 들었으니 기근이 들고 흉년이 되는 건 당연지사, 결국 장안에 있던 사마의가 흉년이 들자 양곡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내게 된다.

그래도 조예의 궁궐벽은 멈추지 않았다. 조예는 숭화전(崇華殿)을 재건하게 하고, 구룡전(九龍殿)으로 명칭을 바꾸게 했다. 물을 끌어다가 옥으로 만든 우물과 비단으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고 두꺼비상을 만들어 물을 받아들이고 옥으로 만든 신룡으로 물을 토해내게 했다. 마균을 시켜다가 지남거와 사남거를 만들게 하고 1백 가지 물로 돌아가는 장난감을 만들도록 했다. 고당륭이 간했지만 또 듣지 않았다. 왕숙은 지금 궁궐 짓느라 노역하는 자가 3~4만 명인데 힘센 사람 1만 명으로 줄이고 교대 근무를 하며 나머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돌려보내자고 간언했다. 또한 관리를 처벌해 사형에 처할 때는 갑자기 처형하지 말고 형리를 보내 알리자고도 하였다. 물론 이것도 조예가 들었긴 했지만 실천했다는 얘기는 없다.

통화 체계의 혼란은 없었지만, 눈에 띌 정도의 재정적 붕괴나 농사 시기를 놓치게 만드는 부역, 조예의 도가 지나친 사치에 들어가는 세금 등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조조 이래로 3대에 걸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던 건 분명하다. 조조는 전쟁 문제로 인한 징집과 토목공사 때문에 백성들을 가혹하게 부렸고, 조비는 사냥 등으로 백성들을 고생시켰다고 나온다.

조예 후반기 치세의 문제는 황후가 죽고 장마가 들어 기주에선 사람과 재물이 떠내려가는 물난리가 나자 보다 못한 고당륭이 올린 상소에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전략)...지금 천하는 빈곤하고 황폐하며, 백성들은 1석도 비축한 것이 없고, 나라에는 1년을 버틸 만큼 비축한 것이 없건만, 밖으로는 강한 적이 있어 폐하의 군대가 국경에서 싸우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토목 공사가 한창이라 주와 군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란하오니, 이러다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신하와 백성들이 명을 받들어 맞서 싸우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또한 지금 장수와 병사들의 봉록이 눈에 띄게 깎이어 예전과 비교하면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후략)

이때 일화 하나를 들자면 도교에 심취해 이슬을 받아 먹겠다고 구리로 된 크고 아름다운 신선 모양의 동상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다가 이게 자빠지는 바람에 부역하던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한다. 결국 부숴가며 옮긴 뒤에 동인을 두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동상이 들고 있던 승로반이라는 쟁반에 맺히는 이슬에 옥가루를 태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슬 받아 먹어봤자 남는 건 체내 중금속뿐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조예를 묘사할 때 양부를 포함한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를 말리려고 하다가 파면당하거나 목이 달아나는 묘사가 나오는데, 정사에서 이 사람들은 딱히 처벌을 당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처벌하자고 했으나 조예가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간언한 고위 대신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이어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예는 성질이 대단히 급하여 궁궐 짓는 기한이 늦어지면 곧바로 담당자를 불렀는데 담당자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바로 죽여버렸다고 한다. 또 위에서 썼던 것처럼 조예는 사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가혹한 법령을 느슨하게 하고 사형에 처하는 죄를 줄였다는 본전의 기록과는 전혀 대조되는 얘기도 있다. 명제기 주석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적발하고 들어내는 걸 좋아해, 경미한 일로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는데, 진랑이 이에 대해서 아무런 간언을 하지 않아 조예가 총애했다고 한다. 이게 진짜라면 그 할아버지 조조나 아버지 조비와 마찬가지로 조예에게도 잔인한 면이 있었던 것. 또 조조나 조비 때부터 문제가 되었던 남의 아내 강탈해다가 딴 사람 주기도 시정되지 않았다.

235년,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자 곽여왕은 우려하다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으며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라는 화를 만났으며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가 얼굴을 덮었다고 했다.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장례식을 문소황후의 장례식과 똑같이 치르도록 명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가 새어머니인 곽여왕을 죽인다. 조예는 곽여왕에게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생모 견씨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조비)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분노한 조예는 곽여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그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게 하였고 그 입에 엄청난 양의 쌀겨를 들이부은 다음 땅에 묻었다고 한다.[13]

236년에는 고당륭이 궁궐을 자꾸 짓고 사치하는 조예에게 '병사들과 백성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군국(軍國)에 있는 비용과 후궁들 거느리는 비용이 비슷하다고 했다면서 백성들은 명령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모두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으며 궁실을 지나치게 성대하게 지었는데 (작년같이) 하늘의 노여움을 거듭 나타내게 하지 말라'고 했다. 조예는 옳은 말을 하는 고당륭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노육이 나서서 조예의 화를 풀었다. 하도 많이 간언을 하다 보니 조예가 고당륭을 두려워했을 정도다. 고당륭은 죽을 때까지 황제에 대한 충언을 멈추지 않았고 '천하는 천하 사람들의 천하지 폐하만의 천하가 아닙니다'는 마지막 충언을 올렸지만 조예는 역시 조서를 내려 그를 위로할 뿐 듣지 않았다.

심지어 죽기 직전인 자치통감 237년 기록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도 슬슬 그만두려 했는지 방림원이라는 정원 모퉁이에 산을 만들고 공경(公卿)들과 많은 관료들에게 모두 흙을 짊어지게 하고, 소나무, 대나무, 잡목, 예쁜 꽃을 심고 산새와 여러 짐승을 잡아 가두어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즉 공경이라는 높은 관료들을 부역에 써먹은 격이니 이때쯤 정말로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238년, 사마의를 공손연 토벌에 보낸 조예는 자신의 황후인 명도황후 모씨를 자결시키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명원황후 곽씨를 두 번째 황후로 삼는다.

2.6. 혼란

조예의 죽음을 전후한 상황은 혼란스럽다. 사서들을 종합해 보면 윤곽은 그려볼 수 있지만 앞뒤가 안 맞는다. 사서마다 제각기 입장이 다르고, 상황도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사실 이건 본질적으로 조예의 후계구도가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조씨 가문의 잡음은 조조 때부터 있었던 일이었다. 조비의 후계자 공인을 조조 사망 몇 년 전에 가서야 했던 탓에 조비가 호족들에게 상당 부분 양보를 해야 했고, 조예의 황태자 책봉도 조비가 지나치게 늦춘 탓에 사망 직전에나 이루어져 조예는 정통성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14]

하지만 조예의 후계구도는 그래도 장성한 아들이라도 있었던 조조, 조비와 달리 훨씬 더, 실로 끔찍하리만큼 엉망진창이다. 원래 조예는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딸 하나(조숙)를 제외하면 다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조예는 원래 아내 평원왕비 우씨가 있었는데 황제가 될 때 버리고 명도황후 모씨를 황후로 삼았고, 이후 그녀마저 죽이고 또다시 황후를 명원황후 곽씨로 갈아치운다. 이 사건이 꽤나 엽기적인데 후궁 및 궁녀들과 함께 놀면서 ‘이걸 황후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다음 날 황후가 ‘어제 재미있게 놀았나 보죠?’ 하고 갈구자, 조예는 측근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여겨 측근 십여 명을 죽인다. 그리고 황후에게는 자살을 명령했다. 아버지로 인한 가정폭력 피해자가 아버지처럼 가정폭력 가해자로 변모해버린 것.

친아들이 모두 일찍 죽었다지만 당시 조예는 삼십대였기 때문에 충분히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조예는 갑자기 뜬금없이 아이를, 젖먹이도 아니고 어린이 둘을 어디선가 데리고 와서는 선언한다. “얘들은 이제부터 내 양아들이오.”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이는 건 흔한 일이라지만 조예는 삼십대였고,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지 알 수 없어서 조씨가 맞는지도 보장할 수 없었다. 조예가 납득 가게 해명을 했다면 문제가 안 되었을 텐데, 이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해버려서 논란을 키우게 된다.

그 두 아이의 이름은 조방조순이었다. 이후로도 조예는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기에 조예의 후계자는 이 둘밖에 없었다. 조예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고작 일고여덟 살 된 근본을 알 수 없는 꼬마들 중 조방을 제왕, 조순을 진왕으로 삼아 자식처럼 기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둘 중에서도 조예는 나이가 더 어린 조방을 후계자로 점찍는 병크를 보인다.

한편 이 시기에 조예 주위에는 비서 역할을 하던 유방, 손자가 국사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가 만기를 친재하며 여러 번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나 핵심적인 기밀 공작은 모두 두 사람에 의해 관장되었다. 매번 중대사가 있으면 조신들이 모여 상의하기는 했으나 늘 두 사람이 시비를 판정하여 최종방안을 마련한 뒤 이를 건의해 실시토록 했다. [15] 장제가 이 기밀 독점의 폐단을 건의하고 유방과 손자를 쓰지 말라고 했지만 당연히 조예는 듣지 않았다(...).

또 조예의 사치가 심해지자, 고당륭 같은 대신들이 여러 간언을 했었는데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간언이 있다.
황초 연간에 하늘이 징조를 보여 경계했는데 이상한 새들이 집에서 생장하니 부리와 발톱, 가슴 등이 온통 붉었습니다. 이는 위나라에 중대한 재해가 있을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마땅히 소장(蕭牆, 문 안의 작은 담)에 있는 응양지신(鷹揚之臣, 찬탈야심을 가진 신하)를 방비해야 합니다. 여러 친왕을 선발해 각자 봉국 내에서 군사를 양성해 친히 통솔케 한 뒤 이들을 각지로 보내 기치의 형세를 이룸으로써 황기를 진무하여 황실을 보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16]
자치통감 237년 10월.[17]

그러나 조예는 이런 황족 부흥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응양지신, 찬탈 야심을 가진 신하가 언급되는데, 직접 사마씨를 거론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 찬탈의 야심이 표면화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238년 12월 8일. 조예는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앓아눕는다. 그리고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이 시작된다.

12월 24일 조예는 아끼던 후궁 곽씨를 황후로 세운다. 이전의 황후 모씨가 위에서 언급한 엽기적인 사건으로 사망한 후 1년이 넘도록 비어 있었던 황후 자리를 다시 채워넣은 것이다. 그런데 곽씨는 본래 위세 있는 집안의 여식이었지만 고향에서 반란이 일어난 탓에 노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 처지로, 곽씨 집안은 살아남기 위해서 황실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자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조예가 갑작스레 곽씨를 황후로 세운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동시에 조예는 숙부인 연왕 조우를 대장군에 임명한다. 그리고 영군장군 하후헌, 무위장군 조상, 둔기교위 조조(曹肇)(조휴의 아들), 효기장군 진랑과 함께 젊은 친족들에게 그를 도와 조방을 보정하게 하도록 한다. 조예는 어릴 때부터 연왕 조우와 매우 친해 후사를 그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단 조예는 조우를 집권시킨다. 여기까진 확실하다. 지금까지 조예가 안배해 온 황실 보호 체제가 마침내 빛을 발할 때였다. 비록 후계자의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렇게 친족들을 전진 배치하고 특히 조우를 대장군이자 탁고대신으로 삼아서 그런 문제점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체제 하에서 가장 큰 위협은 지금 요동에서 돌아오고 있는 사마의였다. 군사 40,000명을 거느린, 위나라에서 제일가는 군사 지휘관인 바로 그 사마의 말이다. 조우는 위략에 따르면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예가 위독하자 사마의에게 황제의 명령을 보내, '수도로 돌아오지 말고' 관중(장안)에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사마의에게 알려 하내를 거쳐 지름길로 서쪽으로 관중으로 돌아오라고 전했다고 한다. 사마의가 수도로 돌아와 한바탕 뒤엎어버릴까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사마의는 자신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당대에 이미 조씨 황실의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차피 틀린 판단도 아니었고 말이다.

실제로 이전에 조예는 사직을 걱정하며 진교에게 사마의의 충심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황제가 일찍이 (사직을 걱정하며) 진교에게 물었다.
"사마공[18]의 충정을 보면 사직을 지킬 신하라고 할 수 있겠소?"
진교가 대답하였다. “조정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으나 사직을 맡길 만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치통감 232년[19][20]

어쨌거나 세어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조예는 사마의를 총애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권력을 쥐게 된 사마의에 대한 의심, 걱정이 있었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공손연 토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예는 결국 사마의를 믿어주기로 하고 그를 밀어준다.

실제로 공손연의 난에서 조예는 장안에 있던 사마의를 불러들여 군사 40,000명을 이끌고 가 요동을 정벌케 했고 논의하던 대신들 중 일부가 군사 40,000명은 너무 많고 군비를 대기도 어렵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4,000리 밖의 적을 정벌하는 데는 설령 기병(奇)을 쓴다 해도 반드시 힘에 기대야 하는 만큼 소소하게 군비를 따져서는 안 된다 했으며 조정대신들이 군사들이 계속해 큰 장마비를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파(罷)병할 것을 건의해으나 반대하며 사마의는 곤경에 처하면 임기응변할 줄 아는 사람이며 공손연을 산 채로 잡을 날을 손가락을 꼽으며 가히 기대할 만하다고 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이 있다. 이게 당연한게 아니다, 먼 곳으로 출정하는 권세 있는 장수에게 대군을 내준다? 그것도 주변 반대도 물리치고? 또 제갈량의 5차 북벌에서는 오와의 전투에서 사마의에게 군사 대부분을 내주고 자신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이동한다. 물론 조예가 손권은 기회주의자로 보고 제갈량이야말로 진정 위협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해서였겠지만 파격적인 조치임에는 분명하다.

어쨌거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사마의에게 이런 명령이 내려져 명령을 전달하러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12월 27일, 조예는 갑자기 대장군 조우의 관직을 빼앗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사서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하후헌과 조조와 사이가 나쁜 유방과 손자가 조예를 이간질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성격이 공손했던 조우는 대장군직을 정중히 사양했다. 조예는 유방과 손자를 자신이 몸져 누워있는 내전으로 불러 연왕이 왜 사양했는지 물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연왕이 실로 이같은 대업을 맡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예는 후사 걱정으로 누가 중임을 맡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당시 황제 옆에는 조상만이 있었다. 이에 유방과 손자가 조상을 추천하면서 사마의를 불러 공동으로 보정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한다. 조예는 조상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미심쩍어 했고 조상이 긴장하여 땀을 비오듯 흘리며 대답을 못했다. 마침 유방이 곧바로 조상의 발을 밟고는 귓속말로 죽음으로서 사직을 보호하겠다라고 말하라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었고 조상은 그대로 말한다. 이렇게 조우를 쫓아내고 조상과 사마의가 집권시키기 위해 이미 내렸던 명령을 중도에 고치고 칙명으로 전의 결정을 정지시켰다.

이에 유방과 손자가 다시 황제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이해득실을 설명하자 황제가 또 그들의 말을 따랐다. 뒤에 다시 유방이 황제를 찾아가 재촉하여 말했다. 친필로 쓰라고 하지만 이미 조예는 붓을 잡을 힘도 없었다. 그러자 유방이 어탑 가까이 다가가서 황제의 손을 잡고 강제로 써 내려갔다. 이어 유방이 손에 조서를 들고 밖으로 나와 큰 소리로 연왕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게 하라는 조명이 내려졌고 연왕 등은 궁중에 머물 수 없다 하여 조우 등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출궁했다. 갑신일에 조상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조예는 조상의 재주가 시원치 않은 것을 꺼려 다시 손례를 대장군장사로 삼아 보좌케 했다고 한다.

진심으로 조우가 대장군을 거절했다면 울면서 출궁했을 리 없다. 결국 죽기 전 조예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손자, 유방에게 밀려버렸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실제 다른 기록을 조합하면 조우와 손자, 유방파의 대결을 보이는 기록이 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는 조조와 상의하기 위해 궐 밖에 나갔고, 이때 조상만 황제 곁에 남게 되었는데 이때 조예의 측근인 유방은 이것을 알고 손자와 불러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본래 조우를 필두로 해 진랑 등과 같은 황족 세력과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조우 세력을 제거하려고 몰래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조우가 황제 곁에 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즉, 조우가 탁고대신이 되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리라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조상과는 또 사이가 괜찮았던 모양으로[21] 유방손자는 이들이 없는 틈을 타 조예에게 조우, 진랑, 조조를 헐뜯는다. 우선 선제(조비)는 번왕(籓王)은 정사를 보필할 수 없다고 했고 게다가 조예의 병이 심해지자 조조와 진랑 등이 곧바로 입궁해 궐내의 재인(才人)을 데리고 놀고 병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말로 희롱했으며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고 조우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남면[22]하고는 조신들은 전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옛날 조고처럼 국권을 훔치려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조예는 매우 화가 나 조우 대신 조상과 사마의를 집권자로 임명하려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조휴의 아들 조조가 다시 입궐해 눈물로 호소하자 조예는 조우의 관직 박탈을 취소하고 다시 조상과 사마의를 임명하려던 명령을 취소했다. 조조가 다시 조예 곁을 떠나자 이번엔 또 다시 유방과 손자가 호소했고 조예는 또다시 조우의 관직 박탈 취소를 취소한다. 심지어 조예가 스스로 칙서를 쓸 힘조차 없다고 하자 유방은 조예의 손에 붓을 쥐어준 후 그 손을 잡고 스스로 글씨를 써서는 자기가 옥새를 찍고 황명을 내린다. 결국 조우, 하후헌, 조조, 진랑은 모두 벼슬을 면직당해 박탈당한 후 울면서 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로써 조우파와 유방, 손자는 병들어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황제 옆에서 각자 자파를 위해 설득했음을 알 수 있다.

세어에 따르면 조조의 동생 조찬은 이때 대장군의 사마로 있었다. 조예는 더 이상 연왕 조우에 뜻을 두지 않았고 때마침 조우와 함께 조조가 궁 밖으로 나가자 조찬이 형을 보고 놀라 조예가 몹시 불안한 상태인데 왜 두 사람이 나오느냐며 마땅히 궁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유방과 손자가 칙명을 내려 궁궐을 닫아 조조 등을 못 들어오게 하고, 연왕 조우를 면직시켰다. 조조가 다음 날 아침 궁문에 이르렀으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일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두려운 생각이 든 조조는 제 발로 정위(延尉)를 찾아가 큰일을 처리하는 데 잘못이 있었으므로 처벌해 달라고 했다. 하후헌은 아직 궁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조예를 찾아가 사태를 반전시켜 보려 했으나 조예는 하후헌에게 벌써 사신을 보냈으니 나가라고 했고 그도 역시 면직되었다. 조우파의 마지막 반전도 실패한 것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공손연의 난을 진압한 사마의는 궐 밖에 있었다. 당시 사마의는 급현에 있었는데 조예(그리고 그 배후의 유방과 손자)가 급히 급사 벽사[23]를 부른 후 그에게 명하여 친필 조서를 들고가 태위 사마의를 부르게 했다. 또 앞서 설명했듯이 연왕 조우가 내린 사마의는 관중으로 가라는 명령[24]도 도착했다. 이렇게 되자 사마의는 단시간 내에 앞뒤로 서로 상반된 2개의 조서를 받게 되었다. 이에 눈치 빠른 사마의는 낙양에 변고가 있음을 직감하고 급히 말을 몰아 귀경했다.

이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239년 정월에 사마의가 낙양에 도착해 입궁하여 조예를 만났다. 자치통감과 명제기, 그리고 그 주석 위략에서 조예는 자신이 후사를 그대에게 부탁하고자 하니 그대는 조상과 함께 나의 어린 아들을 보좌해 주길 바란다. 죽는 것은 가히 받아들일 수 있으나 나는 그대를 기다리느라 죽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그대를 보니 더이상 한이 없다고 말했다. 위략에 따르면 조예는 제왕 조방과 진왕 조순을 불러오게 하여, 사마의에게 만나게 한 뒤에, 조방을 가리키며 사마의에게 이 아이가 차기 황제니 그대가 잘 이끌어 주고 착오가 없도록 하라고 했다. 조예는 어린 조방에게 사마의를 안아주라고 지시했으며 조방은 타박타박 걸어 나와 사마의의 목을 끌어안았다.[25] 당시 조방은 신년을 맞이해 막 여덟 살이 되었고. 진왕 조순도 아홉 살에 불과했다. 사마의는 선제께서 신께 폐하를 부탁한 것을 보지 못하셨느냐며 그를 안심시켰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날 제왕을 황태자로 삼은 뒤 바로 조예는 죽는다.

사실 사마의에 대한 신뢰는 조예뿐 아니라 조정 대신들에게도 형성되어 있었다. 조비의 탁고를 받아 조예를 보좌해왔으며 당시로선 조조에서 조방까지 4대를 거쳐 충성하던 사마의였으니 황실에 칼을 겨눌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후 사마의의 거짓 칭병 때 속았던 이승마저도 '폐하도 의지하시는 사마공께서 편찮으시다니' 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조예가 죽기 직전 사마의에게 한 말도 사실 단순히 사마의를 무조건 신뢰했다고 보기 어려운 게 죽기 직전 조우, 유방, 손자에 휘둘리면서, 신뢰했던 사마의조차 다른 마음을 품을까 무서워졌고 그래서 진심으로 인간적인 호소로써 뒤탈을 막으려는 자기 자식을 부탁하는 발악일 수 있다. 위에서 여태까지 서술해 온 것처럼 조우 체제를 선택했었다면 사마의는 경계대상에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었고 실제로 사마의는 조우의 명령으로 장안으로 가라는 명령도 받은 바 있다. 결국 사마의에게 한 말은 '그러니까 내 아들 잘 보필해 달라'는 얘기고 사실 조예가 조방의 후계에 매우 집착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는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말고도 조방을 잘 부탁한다며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것에도 무시못할 방점이 찍혀야 한다. 일단 결국 사마의에게 직접 탁고를 맡기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아 죽기 직전 조예는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은 조우 일파보단 사마의를 더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조예는 친밀했던 조우를 결국 믿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조상과 사마의 역시 임명하려다 한번 취소했다 다시 임명했다. 황제로서 훌륭하게 촉, 오의 공격에 맞서던 조예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은 안타깝기도 한 부분이다. 그러나 조예가 이렇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조우의 본심이 진짜로 황제의 자리를 노렸건 어찌되었든 간에 유방과 손자가 말한 조우에 대한 간언, 이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조우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조조의 아들로 자기 숙부라서 정통성이 충분하다. 반면 조예의 후계자인 조방과 조순 형제는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꼬맹이들이었다. 차라리 조예가 숙부인 조우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면 위나라는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예는 이미 조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했고,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알 수 없다. 진짜로 미친 건지...

당시 조예의 목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었다. 만일 조예가 이십 년쯤 더 살고 제 수명에 죽었더라면, 그래서 조방이 그 기간 동안 후계자로서 공인받으며 성인이 되었다면 정통성 부족도 어느 정도는 극복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조우를 위시한 여러 황족과 친족들을 통해 실질적인 보위 세력도 구축해 줄 수 있었을 테고,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조예 자신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고 조방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다. 이렇게 되니 본래는 황실의 보위세력으로 삼으려 했던 조우가 오히려 조방의 황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 조상이나 조조(조휴의 아들) 등과는 달리 지나치게 가까운 황족으로 엄연히 황위계승권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조우를 배제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 된다.

그렇다면 조방을 위해 조우를 대체할 누군가를 붙여주어야 했다. 조예의 결정은 조상과 사마의였다. 하지만 조상 혼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지나치게 젊었고, 딱히 실적을 쌓은 것도 없었고, 지위도 부족했고, 군사 재능도 없었다. 그래서 조상은 군부 명망 1인자 + 대호족 사마의를 끌어들인다. 그에게 없는 것들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인물을 말이다. 동시에 조예의 입장에서도 조우를 믿지 못하게 된 이상 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사마의는 조상과 탁고를 받아 위나라의 보정대신으로서 전권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조예는 결국 선제 조비가 그랬듯이 주변의 황족, 친족들을 믿지 못했으며 그 동안 신뢰하며 전권을 내준 사마의에게 보정을 맡긴다.[26] 그러나 후일 조예의 믿음과는 달리 그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사마의의 쿠데타인 고평릉 사변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당태종사마의에 대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후계자를 맡겼는데 뒤통수를 쳤으니 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다."라고 사마의를 깠다.

2.7. 죽음

238년 12월 조예는 예상치 못한 병으로 병상에 있었고 239년 1월에 36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하지만 후술했듯이 조예가 36세라면 조비의 아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배송지의 주장에 의하면 조예는 205년생(건안 10년)이며 죽을 때는 34세였지만 35세도 가능하다. 이는 당시 역법 개정으로 전년 12월을 다음 해 1월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배송지는 이 시점을 238년 12월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34세이지만 239년으로 보면 35세도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즉 205년생이 맞고 239년에 죽은 것으로 보면 35세가 맞는다.

3. 평가

위서를 쓴 왕침은 조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명제는 용모가 빼어나며 위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명제는 황태자의 신분이었을 때부터 조정의 신하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며, 정치 문제에도 무관심하고, 오직 생각을 깊이 하고 서적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나 즉위하고부터는 대신을 예우하고 공적을 세운 자나 유능한 자를 선발하며 진실과 허위를 바꾸지 않고, 경박함이나 참언의 시초를 끊으려고 노력하였다. 또 군대를 출동시키거나 논의를 통해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지략이 있는 신하, 장군, 대신들이 모두 명제의 계략에 따랐다.

명제는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탁월해 옆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신상, 성격과 행위, 과거의 행동 또 그 부형자제의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한번 보고를 들으면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특히 굴욕을 가슴에 담아 참아 내고, 직언을 잘 받아들이며, 신분이 낮은 관리나 백성들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한 달에 수천 봉서가 이르렀는데, 문장이 비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다음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평이다.
명제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에 임하여 행동하며,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지극한 기개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는 분열되었으나, 명제는 선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생각하거나, 왕업의 기틀을 다지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무제를 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관점으로서 헤아리면 이는 아마도 중대한 결함일 것인저!

다음은 역사가 손성의 평이다.
위 명제는 타고난 모습이 빼어났으며, 일어서면 머리카락이 땅에까지 늘어졌고, 말더듬이여서 말은 적게 하였지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강하였고, 결단 내리기를 좋아하였다. 처음에 여러 공들이 유조를 받아 보도하였는데, 황제는 이들 모두에게 한 지방의 임무를 주어서 이를 처리하게 하였으며, 정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게 하였다. 예를 가지고 대신들을 우대하였으며,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곧은 소리를 좋게 생각하였다. 비록 면전에서 지극한 간언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꺾어버리거나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임금이 갖고 있는 도량이 이처럼 위대하였다. 그러나 덕을 세우고 기풍을 내려줄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유성(조씨들을 키우는것)의 기초를 굳게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결국 대권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기에 이르렀고, 사직을 지킬 수 없었으니 슬픈 일이다!

조예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은 보다시피 후한 편이다. 특히 손성이라는 인물은 모두까기 인형이라서 일단 까고 보는 인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우선 알아두자면, 왕조시대 역사가들의 군주에 대한 평가 기준은 현대 사학과 다르다. 몇 대에 걸쳐 결과가 나오는 거시적 관점의 평가가 아니라 그 군주의 재임 당시 군주가 보여준 인간성, 품행 도량 및 행보가 얼마나 고결한가 혹은 결단력이 있는지로 평가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예는 옛 역사가들에게 호평을 받을 군주였다. 아버지인 조비는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고 자신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을 마구 죽이거나 꺾는 인물이었다. 조예는 본인의 능력 및 결단력 등은 뛰어난 부분이 있고, 말년의 흑화도 신하들을 죽여대는 건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모를까 신하들 입장에서는 싫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조예는 어지러운 시기에 탁월한 결단력과 리더쉽을 보여줬지만, 정작 평화로운 시기에는 나태하고 사치스러웠다. 확실히 능력은 뛰어난 부분이 있었으며 도량과 결단력 등은 영웅적인 면이 있었고 이게 외침이 빈번하던 시기에 두각을 드러냈지만, 자기관리 면에서는 엄격함이 부족했고 방종한 부분이 있어 주된 외침이 대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에는 이런 부분이 눈에 띄게 된다.

즉위 초기에는 내치 부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면모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예의 내치 능력이 무능한 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발생한 권력적 긴장과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개인적, 나라적 긴장 상태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외침도 성공적으로 막고 개인적 왕권과 위신도 어느 정도 반석에 오른 이후에는 긴장 상태가 풀려서 방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보통 평화로운 시기에는 무난한 군주가 될 법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오는 등의 불운한 시기를 맞으면 아니올시다인 불우한 군주들이 많은데, 조예는 반대로 어려운 시기에는 영웅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물음표가 나오는 정반대의 군주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조예의 사치스러운 면모는 대다수가 제갈량의 사망 이후 두드러지며 또 여러차례 북벌을 막아내면서 조예의 개인적 왕권이 반석에 올랐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기 때문에 결국 외침의 종료 및 개인의 위신 상승이 조예의 나태한 면모를 부각시켰을 것이라는 관점에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조예는 제갈량 사후에도 선비족을 축출하고 요동공손연을 정벌하는 등 여전히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였다. 조예는 제갈량 사후에도 촉한의 공세 때 후방에서 호응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위협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제갈량이 죽자 조예가 외부 침입이라는 요소에 대해 마음을 놓게 되었다면, 이러한 행위들은 어떤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

또 이 관점을 따르면 결국 조예의 초창기 성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발생한 권력적 긴장 상태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나온 것이지, 이런 요소들이 없었다면 초창기부터 조예는 사치스럽고 나태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조예가 초창기에 이룩한 것들을 폄하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아버지의 지지를 받지 못해 불안한 입지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잘 이끌어낸 건 엄연히 조예 본인의 능력이다.

조예가 평화로운 시기에 조비의 사랑을 받으며 태자 시절부터 단단한 입지를 다지고 더 많은 나이로 즉위했을 경우, 지금의 기록보다 더 나은 군주가 되었을지 처음부터 사치스럽고 나태했을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만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 부분에서 언급되었듯이 조예의 말년의 사치는 무리한 궁궐 수축 행위로 대표되는데, 이러한 궁궐 수축행위는 제갈량의 사망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예가 제갈량이 죽자 궁궐을 지으며 사치를 벌이기 시작했다는 관점으로는 제갈량이 죽기 이전부터 궁궐을 짓기 시작한 조예의 행위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조예의 궁궐 수축행위를 단순한 사치로 봐야 하는지, 혹은 그 사치라는 것이 외침의 종료라는 요인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에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대신 위기가 이미 제갈량의 북벌 당시부터 사치와 향락을 경계하라는 간언을 올린것으로 봐서 그 이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제갈량이 죽은 이후 더 심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예는 결단력과 식견이 뛰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고 도량이 커서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이거나 꺾어버리지 아니하였다. 들뜨고 거짓된 실속없는 무리들을 싫어하여 이들을 기용하지 않고 유능한 자들을 기용하였고 예를 가지고 대신들과 공을 세운 자들을 우대하였다. 또한 백성 및 하급관리들에게 지극한 군주의 덕을 보여준 명군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타락해 궁궐공사 등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거기다 조비 때부터 시작된 조씨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답습해 뛰어나지 않은 친황세력에게 정사를 맡기고 사마의에게 깊게 의지하여 결국 나라를 넘겨주는 원인을 제공한 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조비는 죽을 때 탁고대신들에게 조진 - 사마의로 이어지는 양대 구도로 최소한의 견제 장치라도 마련하여 조예에게 넘겨준 것에 비해, 사마씨 천하를 후대에 남겨준 조예는 이 부분에 대해선 더 할 말이 없는 셈.

3.1. 어머니 문제

서진 시대 때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조예의 어머니인 문소황후 견씨는 221년 조비가 곽여왕 및 다른 여인들을 총애하자 이를 원망하였다는 이유로 조비에게 사사되었다고 기록했지만, 당대 위나라의 사서인 위략은 이 부분을 정사 삼국지와 다르게 서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제(조예)가 즉위하고 나서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추모하고 슬퍼하자 태후(곽여왕)는 우려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거짓으로 모함하는 말)에 의한 화를 만났고,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음을 설명하니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빈장을 모두 문소황후의 고사와 똑같이 하라고 명령했다. -위략

즉 위략에 따르면 문소황후곽여왕의 참소로 인해 죽었지만 조예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완벽히는 알지 못했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서 죽었다고 혼자 생각하며 지내다가 곽여왕이 죽은 후에야 처음으로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정사 삼국지위략 중 어떤 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치통감은 위략의 기록을 채택해 곽여왕문소황후를 참소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위략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은 아니고 조예가 곽여왕에게 문소황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으니 곽여왕은 우려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부분은 자치통감이 한진춘추의 유사한 내용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초에, 문소황후가 주살된 건, 곽여왕이 총애받아서였고, 초빈할 때는,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고, 쌀겨로 입을 막게 하고는, 마침내 곽여왕을 황후로 세워, 명제를 기르게 했다. 황제가 이를 알고는, 속으로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문소황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명제가 노하여, 마침내 그녀를 핍박하여 죽이고는, 칙서로 초빈을 문소황후의 고사처럼 치르게 하였다. -한진춘추

즉 위략의 내용은 조예가 곽여왕 사후에야 진실을 알았기 때문에 빈장을 간소화하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지었다는 것이고, 한진춘추의 내용은 곽여왕이 죽기 이전에 조예가 이미 진실을 알고 곽여왕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빈장까지 간소화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두 기록을 섞어서 조예가 곽여왕이 죽기 이전에 진실을 알고 곽여왕에게 상황을 물으니 곽여왕은 우려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했고, 빈장 관련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자치통감에는 두 사서의 기록이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기록에서 더 믿을 만한 부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치통감이 두 사서 모두에 있는 빈장 관련 이야기를 왜 덜어냈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를 거짓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정사에는 조예가 곽여왕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없지만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새로 황후로 삼은 곽여왕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예를 그녀의 아들로 삼아 양육하도록 했다. 조예는 어머니인 문소황후 견씨가 온 정성을 다해 자신을 양육했기 때문에 내심 불편했지만 할 수 없이 곽여왕을 섬기고, 곽여왕 또한 자식이 없었으니 조예를 자애롭게 보살폈다.

결국 위략에 따르면 곽여왕문소황후를 참소해서 죽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비가 조예를 키우도록 명령하니 조예를 자애롭게 보살피며 연기를 했고, 조예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곽여왕과 오랜 기간 잘 지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자신이 섬겨온 새어머니가 사실은 자신의 친어머니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예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조예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처음으로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기록에서도 추측 가능하다. 명제기에 의하면 235년 3월 곽여왕을 장사 지내고 이때 조예는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 등을 새로 지으며 심시티에 몰두하기 시작한 기록이 나온다. 궁궐 수축 이외에도 여러 역사서에서 확인되는 조예의 기행들은 이 시점 직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궁궐을 크게 고친 것이 조예의 말년의 사치의 시작점이었고 조예의 심중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232년 아끼는 딸과 아들이 죽자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고 이때도 허창궁을 고치며 경복전 등을 짓는 유사한 행위를 한다. 이것은 조예가 궁궐을 수축한 이유가 생모와 자식들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사람이 망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232년에는 궁궐을 수축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235년 이후로는 다른 기행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3.2. 황제 직할체제의 명암

조예는 3공을 임명하지 않고 중서감, 중서령을 임용해 천자 독재제 강화를 도모하였다. 중서성의 직무는 본래 칙명이나 중요한 법령 기초에 참여하는 황제의 비서였으나 사무의 성질상 상서성을 대체해 황제의 독재의사를 보좌해 군국의 대사에 참여하는 추요직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교사라는 관은 관계 질서위에서는 아무런 권력을 가질 수 없었으나 실제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해 관계안에서 비난의 여론이 높았다.[27] 이는 조예 사후에도 지적되었던 문제로, 정욱의 손자인 정효가 교사를 비판해서야 없어지는데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나 없어졌다. 이렇게 직할 체제를 세웠을 때 황제의 힘은 강했으나 조예가 아프자 바로 국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예의 정치적 실책은 황권과 호족 세력의 세력 균형이 조예 대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본래 위나라 자체가 군웅할거 시대 당시에는 군웅, 현대로는 군벌이었던 조조가 무력으로 영천, 여남의 지방 호족 세력을 포섭해서 만든 정권이다. 이들은 한나라 때 청류파라고 자처하며 환관과 외척으로 이루어진 탁류파들과 대립관계였는데 조조는 환관의 손자였기 때문에 탁류파 출신이나 할아버지 조등이 발군의 정치감각으로 탁류와 청류 양쪽의 존중과 지지를 받았던 엄청난 거물이라 문제가 되진 않았다.

조조한나라가 외척과 환관으로 무너지는 것을 본 군벌이었고 청류파들과 함께 위나라를 만든 만큼 환관과 외척을 배제했다. 하지만 환관과 외척은 황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통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존재라 권력을 행사해도 제위까지 노리지는 않지만 호족들은 그렇지 않았다.[28] 그러나 조조는 정치적, 군사적 능력에서 호족들을 압도했고, 친족인 하후씨와 조씨 중에 유능한 장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조 생전에는 호족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비는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장남으로서의 '정통성'으로 후계자가 되었고 위왕이 된 뒤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서, 조조만한 권위가 없었다[29]. 형주 공방전이릉대전으로 이어지는 촉나라오나라의 분쟁으로 양쪽이 약해져 있을 때 군공이라도 크게 올렸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조비는 그 쉬운 이지선다에서 오답만 족족 골라가면서(...) 스스로 그 권위를 깎아먹는 병크를 터뜨리고 만다. 그 때문에 조비는 호족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 했고 호족들을 위한 정책인 구품관인법이 만들어져 영천 호족과 여남 호족은 문벌귀족이 된다.

게다가 조창, 조식 등 형제들을 경계하여 통치 구도에서 축출해버리면서 유사 상황에서 조씨 사직을 지킬 방패는 더욱 얇아졌다.[30] 이들은 빈객들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금지되고, 수도에 상경하는 것도 금지되어 철저하게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 정책은 조예 시대에도 답습되었다.

조비도 이 문제점을 모르진 않았던 터라 최소한의 안전 장치들을 설치했다. 조조의 사촌형제들의 후손인 조씨 일가와 하후씨가 군권을 장악하게 만들었고 안으로는 내조를 장악했다.[31] 그래서 조비 시기 군부의 일인자는 대사마 조인이었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와 조진이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동서 전선을 담당했다. 내조는 호족 출신이지만 유주와 병주라는 변방 출신이라 황제라는 끈이 없으면 출세하기 힘들었을 유방손자에게 맡겨 황실의 보위에만 충실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말년에는 자기 보신만 하다 사마의에 붙어 위나라 멸망의 방아쇠를 당겨 결과적으로는 망한 인선이 되었다.

하지만 조예는 대호족 출신의 사마의에게 군권을 넘기고, 그 동생인 사마부는 재정부 장관격인 도지상서에 제수해서 사마 형제에게 군사와 재정을 몽땅 넘겨주었다. 이미 구품관인법 덕에 호족들이 문벌귀족화되면서 '관맥 형성'이 시작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력까지 넘겨준 것이다. 심지어 조예는 혈통의 문제로 정통성이 약한 조방을 후계자로 삼아놓고도 주색을 즐기며 본인 건강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죽기 전에는 유방과 손자의 이간에 넘어가 숙부 조우와 황실 친인척들을 차기 조정의 실세로 삼으려는 계획을 파기하고 조상과 사마의의 연립 정권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조방 대에 이르면 힘으로 역성을 이뤄낸 지 겨우 십수년 된 시점+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부실하고 무능한 친황세력+실권을 거머 쥔 유능한 호족이라는 위나라에게 있어 최악의 조합이 완성된다. 한나라오나라에 맞서 위나라를 지켜낸 것도 조예지만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 것도 조예인 것이다. 결국 위나라에게 있어 위엄을 갖춘 황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딱 조예까지로, 그 다음 황제인 조방 때 이전까지 충실한 신하인 척 했던 사마의의 꼭두각시 황제 정도로 전락해버린다. 조조가 군사적으로는 무능했던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기용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다만 조예도 마음만 먹었다면 뛰어난 종친을 육성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후현 같은 뛰어난 종친을 명성만 높은이라고 무시하기만 했을 뿐이다.

처음에 조휴와 조진이 동서 전선을 담당한 것은 조예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조예가 이들을 무시하고 사마의에게 군권을 넘겨준 것이 아니다. 조휴와 조진이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야 하는데 조씨 중에서는 쓸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 사마의에게 군권을 준 것이다. 조예의 사마씨 등용은 조비의 탄압으로 조씨/하후씨의 세력이 위축되어서라기 보단 차세대 조씨/하후씨 중 믿을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별로 없었고[32] 조예 스스로도 하후현 등 능력있는 몇몇 조씨/하후씨를 불신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장 외부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데 원칙을 지키겠다고 무능한 사람에게 군권을 주는 것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비 또한 사마의에게 조예의 탁고를 맡겼으니 사마의의 부상은 이미 조비가 마련해 줬다고도 할 수 있지만 조비가 군권을 조씨 이외에게 넘겨주지 않는 원칙을 지킨 것도 사실이고 조예 때 그 원칙이 깨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조비는 사마의에게 탁고를 맡기긴 했어도 조진, 조휴, 진군에게 나눠서 탁고를 했고 조예는 처음에 조비가 물려준 조씨, 하후씨 유력인사들에게 맡기다가 나중엔 군권, 재정권 다 나눠준 사마씨의 사마의에게 탁고를 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조비시대의 사마의와 조예시대의 사마의는 위상 자체가 다르다. 조조 시대의 사마의는 그냥 투명라인...

또 조예는 조휴, 조진을 중용했지만 그들이 죽은 후 (인재의 문제도 있었지만) 사마씨를 너무 믿었으며 죽을 때가 되어선 출신도 불분명해 정통성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나이 어린 조방에게 억지로 어떻게든 황위를 물려주려다 보니 원래 강력한 친황세력이 되어야 할 조씨/하후씨들을 위험하다 여겨 배제해 버렸고 그 대신 권력이 비대해진 사마의와 아직 정치적 경륜이 부족한 조상에게 탁고를 맡기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차라리 처음부터 출신이 명확하고 굳이 탁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나이 문제도 없으며 능력도 있고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황족에게 물려주었다면 후일 고평릉 사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조예가 사마씨를 너무 믿은 것, 후계자 선정 자체가 엉망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사마씨를 견제하려는 시도를 보였거나, 후사를 잘 선정해 조방이나 조순 같은 양자를 들이지 않을 상황을 만들었다면 위나라는 조금 더 나아졌을 것이다.
3.2.1. 반론
조예가 사마씨를 너무 믿었고 후계자 선정 자체가 엉망이었다는 비판은 한 가지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조방 시기 고평릉 사변이 일어났고 결국 사마씨가 권력을 찬탈했다는 것이다. 사마씨 집권이라는 최종 결과를 알고 있는 미래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이것이 마치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필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봤을 때 필연이지 당대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도 합리적인 필연은 아니다.

먼저 위 서술은 조예가 사마씨를 너무 믿었고 그 결과 사마의는 유능한 호족으로서 실권을 거머쥐었다고 쓰여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예가 사마씨를 너무 믿었다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 검증 가능한 팩트가 아니다. 조예가 사마씨를 너무 믿었다는 근거로 사마 형제에게 군사와 재정을 몽땅 넘겨줬다,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줬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팩트는 조방 시기 사마씨는 실질적인 권력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고평릉 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건 사마씨가 아니라 조상과 그 측근들이었다. 조상이 사마의를 태부로 승진시켜 정치에서 실각시켰다는 기록, 조상의 측근인 하안·등양·정밀 등의 권세가 대단했다는 기록, 조상이 사마의의 뜻에 반해 태후의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 사마의가 조상의 촉 정벌에 반대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심지어 사마의는 이승 앞에서 다 죽어가는 노인네를 연기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이것은 모두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서에 기록이 남아있는 팩트다.

요컨대 고평릉 사변 전까지 황제 조방과 실권자 조상의 체제는 공고했고 사마씨가 나댈 여지 따위는 없었다. 결코 위 서술이 묘사한 것처럼 '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와 '부실하고 무능한 친황세력'의 '최악의 조합'인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예의 엉망인 후계자 선정으로 조방 시기에 최악의 조합이 완성됐다는 주장은 따라서 팩트가 아니다.

물론 그럼에도 고평릉 사변은 일어났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사마씨 집권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는 미래인이기에 합리적인 과정에 따라 그런 결과가 일어났을 것이란 착각, 즉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사람이 항상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 것처럼 역사적 사건도 항상 합리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기록을 종합했을 때 오히려 합리적인 흐름은 고평릉 사변이 아니라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조상 정권이 계속 유지되는 쪽이다. 그 정도로 사마씨는 권력 투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고평릉 사변은 위 서술이 설명한 것처럼 실권을 거머쥔 사마씨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궁지에 몰린 사마씨의 드라마틱한 역전극으로 이해해야 한다. 황제 조방과 실권자 조상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도 사마씨한테 역전을 허용한 셈인데 이것까지 조방과 조상 본인이 아니라 조예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오히려 역으로 조예가 권력을 물려준 덕분에 황제 조방과 실권자 조상이 사마씨와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간과해선 안 될 점은 고평릉 사변이 조예 사망 후 10년 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조예가 의도한 황제 조방과 실권자 조상 체제는 10년이나 지속했고 이 기간 사마씨는 찍소리 못 낼 정도로 죽어지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할 시간이다. 10년 뒤에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뺏긴 것은 조방과 조상의 책임이지 이것을 조예 시기에 생겨난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또한 고평릉 사변 당시 조상한테도 충분히 진압할 기회는 남아있었다. 바로 환범이 황제 조방을 데리고 허창으로 가서 병력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킨 사마의를 치자는 계책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조상이 그대로 사마의한테 항복을 해버린게 문제였다. 결국 위나라 멸망은 조상의 책임이지 조예 때문이 아니다.

3.3. 정신문제

어린 시절 마땅히 부모의 사랑을 받고 커야 할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며 성장했다. 심리학에서 부모의 방임 또한 엄연히 가정폭력이고, 심지어 이쪽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거다. 당시에 몰랐다는 기록 쪽으로 봐도 어릴 때 갑자기 어머니가 죽었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자기를 방임했다면 충분히 정신적 충격이 된다. 결국 조비는 조예의 성격을 파탄낸 막장부모라는 소리가 된다.[33]

이런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과 공포, 트라우마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자신이 재현하는 것과 강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보통 유아기~청소년기에 외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모를 잃은 이들은 무언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증세를 보인다. 어릴 적의 심대한 불안함과 박탈감, 상실감을 견뎌내기 위한 심리적 기제로써 특정 집착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집착의 대상은 사람이나 물건이 될 수도 있고, 복수나 사치 등의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사랑하던 아이들은 모두 일찍 죽어버려 정신적으로 위험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까지 안 조예는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위략의 기록을 따를 경우 자신을 키워준 계모가 자신의 생모를 모함해서 죽였다는 것을 모른 채 수십 년 동안 잘 지내다가 말년에 가서야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건데, 이러한 상황에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조예는 이러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괴악한 후계자 선정을 하는 등 완전히 미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조예는 정신적 고통을 메워줄 존재를 갈구했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까지 겹쳐 '아버지의 대신'으로 사마의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굳이 사마의였던 것은 어린 나이에 즉위할 때 조비사마의를 탁고대신으로 임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예는 병세가 위중해 다 죽어가는 마당에도 공손연 토벌로 외정을 나간 사마의를 병적으로 찾았는데, 사마의가 귀환하고 임종 직전 조예 曰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라는 말에서 단순히 탁고대신에게 후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무척 신뢰와 호감을 가졌고, 또 집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예 진서 선제기에서는 공손연 토벌을 완수한 사마의의 꿈에 조예가 나타났는데, 마치 가부좌를 튼 아버지의 무릎에 파고든 아이처럼 사마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사마의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봐달라는 말을 하고 놀란 사마의는 꿈에서 깨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하 입장에서 이런 집착은 참 무서운 장면이기도 한데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표출이라는 꿈의 정의를 생각한다면 사마의가 그런 꿈을 꿨다는 것은 사마의도 조예가 자신을 가까이한 이유가 신임하는 신하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 대신이라서 그랬다는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느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마의는 더 까일 법한 게, 조비가 조예를 맡겼고 조예는 아버지 대신으로 집착하면서 뒷일을 맡겼는데 그 감정을 이용해서 시원하게 뒷통수를 후려갈긴 셈이 된다. 당나라이세민이 디스한 것도 다 이유가 있던 것.[34]

다만 조예가 사마의를 비롯해서 사마씨에게 권한을 많이 몰아주기도 했고, 사마의에게 의지하고 신뢰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면에 사마의에 대한 불신도 알게 모르게 꽤 있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세어의 얘기긴 하지만 사마의가 사직을 맡길 수 있는 신하이긴 하느냐고 물었던 적도 있고, 병으로 인해 정신이 혼란한 상황에서 죽기 전에 조우에게 탁고를 맡기려 하고 그 조우가 사마의를 대놓고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사마의에게 탁고를 맡기면서 한편으로는 명망과 실력이 사마의에 미치지 못하는 조상에게 바로 그 사마의와 동급의 권력을 실어주었다. 사마의를 완전히 신뢰했다면 이런 얘기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35]

그러나 이런 말은 신뢰라는 단어가 가진 묘한 뉘앙스나 팬덤의 캐릭터 만들기가 즐거운 것에서 비롯한다. 팬덤의 놀이들이 좀 허황되고 실제 인물에게 소설의 인물 같은 이미지를 덧씌우는 듯한 부분은 있다. 아버지 운운하면서 대상이 살아 있지도 않은 상태인데 아마추어적인 정신분석에 들어가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완전이니 신뢰니 하는 주장을 좀 완화시킬 경우 큰 무리가 없게 된다. 사실 사마의에 대한 주변의 반응, 신뢰도 등은 꾸준하게 낮았다. 사마의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고 아버지를 대입하는 듯한 인물상이 좀 후대의 해석이 과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는 것은 맞다. 또 일단 재미가 있는 해석이니까. 그러나 그런 해석이 나올 만한 기반은 결국, 아니 끝내 찬탈에 성공한 사마씨 일파인 데다가 창업군주인 조조부터가 경계하고 여러 사람들이 위험신호를 보낸 사마씨를 끝까지 믿었던 조예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이상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 신뢰도가 낮은 인물인 사마의에 대한 신뢰라는 판단은 꽤 이상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도 많은 얘기가 나오고 희한한 얘기도 설득력이 생기는 것이다. 완전한 신뢰라는 것은 세상에 있기 어렵기 때문에, 이래저래 논하다 보면 아니라고 말할 만한 구석이 나오기 너무 쉽다. 그러나 지나친 캐릭터 만들기를 조금 자제하고 본다면 끝내 조예의 판단이나 언동이 꽤 이상했음은 부정하기 어렵게 된다.[36]

조예는 죽은지 오래된 사람이고 딱히 관련된 인터뷰도 한 적도 없다. 어쨌든 이런저런 추측이 재미있는 것은 맞다. 그런 추측에 따를 때 조예는 가정환경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미성숙, 불안정하게 성장한 상태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 타락해버린 불쌍한 사람이 된다.

또한 조예는 말년의 실정으로 무리한 토목공사, 궁전건축 등으로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였다. 삼국지 정사 위명제기에 이러한 평가가 잘 나타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시 백성의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가 분열된 와중에(위촉오 삼국시대) 명제는 성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계승하거나 왕업의 기틀을 개척하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 무제를 성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획과 목표를 기준으로 헤아려볼 때 이는 아마도 성급한 것이리라'

조예의 가정환경과 이러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잘 살펴보면, 조예의 이같은 행동은 아버지(조비)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방임되어 자란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일종의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4. 가족 관계


조예는 평원왕 시절 왕비로 평원왕비 우씨를 데리고 있었지만 정작 즉위하고 나서 명도황후 모씨를 황후로 삼았다. 하지만 말년의 조예는 아버지처럼 명도황후를 죽이고 명원황후 곽씨를 새 황후로 삼았다. 가정폭력대물림이라 할 만하다. 생전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조비의 여러 가지 추태가 얼마나 조예의 정신상태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파격적이게도 조예에게 남총이 있었는데 조조 문서 참조.

조예의 세 아들과 장녀는 모두 3살을 넘기지도 못하고 요절했다. 평원공주 조숙은 문소황후의 집안인 견황(甄黃)이 죽자 합장하고 명혼식을 했으며, 역사상 최초로 공주에게 시호를 내리고 평원후(平原侯)의 관직을 이어나가게 만들어 신하들에게 욕먹기도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장공주는 장성해서 이도와 혼인해 세 아들을 낳았지만 이도가 죽자 임개에게 재가했다.[38]

조예가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잘 가다가 갑자기 타락한 건 잇따른 자식들의 죽음이 발단이었는데, 232년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잃자 궁궐공사를 벌이는 등 슬슬 맛이 가던 중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자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평원공주의 일화도 그렇고 조예가 자식 사랑은 컸던 모양.

조위의 황족이자 진사왕인 조식이 쓴 {위진왕조식 평원의공주 애도문}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 애도문에는 '조숙(삼국지)가 죽자 명제(조예)가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식이 과장한 면도 있겠지만, 한 나라의 공주에게 영토를 내리는 것도 모자라 벼슬을 주는 행동(평원후로 봉함)과 겹쳐 보면 조예가 얼마나 딸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태화 4년(230년) 황자 조은(曹殷)이 탄생하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두 아들(조경, 조목)을 잃고 새 아들을 얻은 조예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조예는 친아들들이 모두 죽은 뒤 조순과 조방을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 조예는 그중 조방을 선택했고 후계자로 삼았지만, 나이도 어리고 황가와 정확한 연고도 알려지지 않은 조방은 정통성이 부족했다. 심지어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도 조방이 어디서 왔는지, 어느 출신인지도 알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예가 어디서 데려왔는지 말을 안 했기 때문. <위씨춘추>와 <세설신어>에서는 조창의 아들인 임성왕 조해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근거는 없다.

위나라는 창업 때부터 후계자 선정에 문제가 많았다. 조조 때 벌어진 조비조식의 후계자 경쟁부터 시작해서 상도향공 조환까지..

5. 기타

나이에 논란이 있다. 정사 삼국지 명제기에 따르면 조예는 239년에 죽었고 이때 나이는 36세였다. 이를 바탕으로 역산을 해보면 조예는 204년생이 된다. 하지만 조조가 업성을 무너뜨린 것이 204년 8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조비가 업에 있던 원희의 처 문소황후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문소황후가 이때 바로 조비의 아들을 임신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204년에 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조예가 204년생이 맞는다면 조예는 절대로 조비의 아들이 될 수 없다.[39]

이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조예가 205년생이라는 의견을 적었다. 배송지조비문소황후가 업성이 함락된 204년 8월에 바로 결혼했기 때문에 조예가 205년생이고 36세는 잘못된 계산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명제기의 다른 기록을 보면 조예는 15세에 무덕후가 되었다. 그리고 문제기에 따르면 조예가 무덕후가 된 것은 220년이다. 따라서 이것을 바탕으로 역산을 해보면 조예는 205년생이 아니라 206년생이 된다.

노필이 지은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가 있는데 220년 이전에 조예가 이미 무덕후가 되었다는 자료 또한 존재한다. 어떤 자료가 맞는지 알 방법이 없으므로 조예가 정확히 몇 년 생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는 상황이다. 만일 정사 삼국지진수가 시기를 곡해한 것이 맞다면 조예가 조비의 자식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남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40]

세설신어에 의하면 긴 머리의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가 유행했다고 한다.[41] 패션 센스도 독특한 것을 추구했는지 꽃을 꽂은 모자와 소매가 짧은 비단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서 여복지에 따르면 "천자의 관 앞뒤에 달린 류(旒, 관에 달린 구슬끈)에는 본래 백옥 구슬을 쓴다. 위명제가 여인의 장식을 좋아하여 이를 산호 구슬로 바꿨다."는 기록도 있다. 원문에는 '부인의 식(飾)'을 좋아한다고 되어있는데, 식(飾)자는 장식 뿐 아니라 분장 행위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조예는 여장을 좋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대군사 사마의에서 조예의 여장도 여기에 기반해서 나왔던 것이다. 어찌 보면 삼국 시대의 패셔니스타였던 듯. 여성의 의류/장식 등을 밝히는 점에는 하안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조예 사후 그의 시호를 명제로 정하는 걸 주도한 인물이(아마 황실의 큰어른+대학자라는 권위빨) 하안이었다는 것을 보면 재밌는 부분이다. 사실 조예와 하안의 평소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하면,(조예는 즉위 극후반 조상을 등용하기 전까지 하안과 같은 무리들을 '실속 없고 허무맹랑한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평했고 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하안이 능력은 좋았던 모양.

다만 남자취향은 같지 않았는데 하안의 경우 당대 최고의 미남 하후현은 물론 역시 훤칠하게 잘 생겼다는 기록이 있는 사마사와도 친했고. 왕필의 경우 본인 외모는 잘 모르겠으나 그 할아버지가 꽤나 잘생긴 외모(+가문) 덕분에 유표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니, 어쨌든 미남 유전자 보유자일 확률이 높다. 하안이 좋아했던 하후현을 조예는 싫어했고 역시 미남이라고 추정할 근거가 있는 제갈탄 역시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놓고 어떤 외모를 좋아했는가 하니 첫번째로 사마의였다. 조예가 사마부를 처음 등용할 때 "형(사마의)의 풍(風, 대개 외모)이 있는가?"라고 묻고 그렇다니까 사마의가 둘로 늘어난 셈이라며 기뻐했다는데, 하여간 사마의의 외모 자체에 꽤 의미가 부여된 건 사실이다.

사마의는 낭고상으로도 유명하지만, 이건 사마의의 통찰력에 대한 비유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고, 형인 사마랑 관련 기록인 사마랑전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12세) 시험을 보는데 하도 덩치가 커서 나이를 속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게다가 역시 한 덩치하는 동탁이 사마랑에 대해 '내 아들이랑 꼭 닮았다'고 평가했다고. 사마랑 본인 말에 따르면 집안 유전이라니 사마의와 사마부도 꽤 한 덩치 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종합해 보자면 조예는 본인 외모와 비슷한 스타일인 하후현/제갈탄 같은 꽃미남 계열들은 동족혐오 때문인지 꺼려(...)하고 본인 스타일과는 정반대 타입인 사마의, 사마부 같은 덩치 큰 우락부락한 마초형 스타일의 남자들[42]을 좋아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예의 취향을 감안하면 조예의 남총으로 유명한 조휴의 아들 조조 같은 경우도 남총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인 여리여리한 꽃미남 스타일이 아니라 남성적인 매력이 강한 타입이었을 공산이 크다.

수신기에 나오는 일화가 있다. 화완포라는 생물은 남방이나 서역의 화산에 사는 불쥐로 그 털로 옷을 해 입으면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위 문제 조비는 자신의 책 전론에 그런 동물은 없다고 논증했으나, 그 후 명제 조예 때 진짜 화완포가 진상되자 전론을 새긴 비석에서 그 부분을 부랴부랴 깎아버려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타지 않는 직물인 화완포(火浣布)라는 것은 서양에서 일명 샐러맨더의 가죽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방견문록에도 등장하는데, 오늘날에는 석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주집에 따르면 동진 함강(咸康, 335년~342년) 연중에 주위(周謂)라는 선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그가 천제의 부름을 받아 궁궐에 이끌려 천제를 보았더니 천제의 얼굴은 사방 1척이나 되었다. 주위가 좌우에게 묻기를 "이분이 옛날의 장천제(張天帝)이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고 때의 천제께서는 돌아가신지(聖去) 오래이고, 이분께서는 근래의 조명제(曹明帝)이십니다." 하였다.

5호16국 시대 성한의 군주인 이수전한유철과 조위의 조예를 항상 존경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존경심은 말년에 폭주하여 그동안의 검소한 생활과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정책을 모두 폐기하고 무리한 토목공사와 엄격한 형벌을 시행해 이웅이 이룩해 놓은 태평성대를 모두 엎어버렸다. 그 결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바로 다음 황제인 이세 대에 성한은 동진의 환온에게 공격받아 멸망하게 된다.

여담으로 고려의 공민왕과 비슷한 인물이다. 군주로서 권력을 제대로 행사했던 사실상의 마지막 인물이라는 점, 즉위기 초반에는 명군의 면모를 보였지만 말기로 갈수록 암군으로 퇴보했던 점, 그리고 암군 테크를 타게 한 결정적인 요인도 비슷한 점,[43] 들의 혈통이 불분명하고 만 하다가 에게 폐위되고 선양을 하거나 죽임을 당했다는 점, 공민왕과 조예 사후 데타가 일어났다는 점 등 너무 흡사한 포지션에 위치한 왕이다.

사실 어린 시절의 불행으로 점철된 개인사를 생각해보면 진작에 안 미치고 초기에 업적이 많은 게 신기할 정도다. 생각해보면 초기에 업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촉한과 오와의 전쟁으로 보냈다. 국경을 위협하는 선비족,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촉한, 그리고 위협적인 오나라까지. 이런 점 때문에 조예의 업적은 군사적 업적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예는 초기엔 내치에서도 업적이 많다. 또한 235년에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처음 알았다고 위략이 기록하고 있고 그 이후로 조예의 행보가 점점 이상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쟁이라는 위협요소가 없었다면 조예는 초창기부터 나태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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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왕까지 포함하면 할아버지 조조와 아버지 조비에 이어 세 번째.[2] 그래도 재위 기간 내내 촉한과 오나라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국의 우위를 끝내 지켜냈으니 묘호에 종이 아닌 조가 붙은 듯하다. 중국에서 묘호가 모든 왕에게 붙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이후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묘호를 받은 왕들은 최소한 나라를 잘 이끌었거나 덕이 많았던 왕을 말한다. 한경제문경지치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묘호가 없었다.[3] 토목 공사, 궁전 건축 등[4] 逮丕繼業, 年已長大 (중략) 今叡幼弱, 隨人東西 (중략) 一爾已往, 群下爭利, 主幼不御, 其為敗也焉得久乎?[5] 이는 맹달이 내부에서 제갈량에게 호응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아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6] 여기서 걸린 게 필궤, 하안, 이승, 정밀, 환범 등등의 인사들. 이들은 조예가 죽은 후에야 조상의 도움으로 출세하는데,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의의 손에 제거된다.[7] (전략)深思句踐滋民之術, 由恐不及, 而尚方所造金銀之物, 漸更增廣, 工役不輟, 侈靡日崇, 帑藏日竭。昔漢武信求神仙之道, 謂當得雲表之露以餐玉屑, 故立仙掌以承高露。陛下通明, 每所非笑。漢武有求於露, 而由尚見非, 陛下無求於露而空設之;不益於好而糜費功夫, 誠皆聖慮所宜裁制也。[8] 위기는 229년에 죽었으므로 그 이전에 간언했을 것이다.[9] 2, 3, 4차 북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 문서 참조.[10] 椒房, 산초나무 열매의 가루를 바른 방이라는 뜻으로, 왕비가 거처하는 방이나 궁전 따위를 이르는 말.[11] 그외 장무는 황실의 물건을 관리하는 창고인 중상방(中尙方)에선 장난감이나 만들고 있고 뒷 뜰에서 승로반을 세우니 이게 무슨 요순이 아니라 한무제 같은 짓이냐면서 깠다. 유엽이 조예를 처음 봤을 때 한무제를 떠올렸다는 걸 생각하면 유엽의 안목은 묘하게 들어맞았던 셈이다.[12] 자치통감의 현대 백화문 번역인 자치통감전역(資治通鑑全譯)에서는 대놓고 한재(旱災) 즉, 가뭄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이라고 쓰고 있다.[13] 이 방식은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초빈으로 조예는 똑같은 형벌로 원수를 처형한 것이다.[14] 그리고 진수가 나이에 대해서 애매하게 써 놓은 것도 그렇고 당대에 조예가 조비의 자식 맞느냐는 정통성에 치명적인 의문을 제기할 만한 소문이 있었을 공산도 있다.[15] 자치통감의 기록[16] 黃初之際,天兆其戒, 異類之鳥, 育長燕巢口爪胸赤, 此魏室之大異也。宜防鷹揚之臣於蕭牆之內。可選諸王, 使君國典兵, 往往棋跱, 鎮撫皇畿, 翼亮帝室[17] 이는 고당륭의 유언 중 일부이다. 상소문의 시작이 高堂隆疾篤(고당륭이 병이 매우 깊어)로 시작하며 말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나온다.[18] 사마의[19] 帝嘗問矯:「司馬公忠貞,可謂社稷之臣乎?」矯曰:「朝廷之望也,社稷則未知也。[20] 단 세어의 기록이라 신빙성은 다소 떨어진다.[21] 또는 서열상 우위인 종친세력 수장 조우의 자리를 노리고 유방, 손자쪽으로 밀탁/갈아탔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조상은 훗날 사마의까지 한때 정치적 열세로 몰아가는 등 의외로 판 뒤집기에 능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 조우는 표면적으로 대장군 자리를 내키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반되게 정적인 사마의 등을 견제하는 등 행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조상의 배반으로 자신이 이끄는 황족 세력이 흔들리니 조상/유방/손자 연합세력과 자신은 정쟁에서 적당한 선에 물러나는것으로 해석하면 '내키지 않았다'와 초반에 나름 정적들을 견제하는 상반된 기록이 이해된다.[22] 황제가 신하들을 바라볼 때는 남쪽을 바라본다, 이는 즉, 조우가 황제의 자리를 노렸다는 뜻이다.[23] 辟邪, 호칭 이름으로 고대 전설 중에 요괴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신령스러운 짐승을 뜻하기도 한다.[24] 세어에 따르면 하후헌의 계책.[25] 상당히 문학적 표현이 가미되어있는데 원문을 보면 又教齊王令前抱宣王頸이라 되어있다. 직역하면 또 (조예가) 제왕(조방)으로 하여금 앞의 선왕(사마의)의 목을 안아주어라 하였다.가 끝이다. 타박타박 같은 표현은 바로 다음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조방의 나이가 8세에 불과해 어리다는 것을 극대화시키는 문학적 표현으로 보인다.[26] 이는 조상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집권 한 후에도 조경 등이 황족 부흥책을 내나 조상은 듣지 않았다.[27] 위진남북조사, 이공범.[28] 다만 환관이 아니라 외척의 경우에는 신나라왕망, 위진남북조시대의 셀 수 없는 수준의 나라들, 수나라양견, 당나라이연 등 제위찬탈이 있기는 했다.[29] 군주정(monarchy)에서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모든 군주는 혈통에 의해 계승된다. 따라서 조비의 권위가 약한 원인은 장남으로서의 정통성으로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즉위 이후 통치실적이 부족한 것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30] 다만 조창은 대놓고 조조 죽고 옥새 어딨느냐면서 따지고 조식에게 반란 종용했는데 이런 이를 믿고 써야 한다는 건 지나치게 나이브한 사고 방식이긴 하다.[31] 내조의 강화는 한나라한무제 시절부터 실행되던 것으로, 광무제 시기 상서가 외조로 떨어지면서 중서가 내조의 핵심이 되어 한나라위나라는 상서령보다 중서령이 실세로 등극했다.[32] 조휴, 조진 외에 믿을만한 장군이었던 하후상은 조비에게 애첩을 잃고 병을 얻어 죽어버렸다. 조비는 사이 나쁜 사람에겐 나쁜 대로 인성질을 부리고, 친한 사람에겐 친한대로 지나친 오지랖을 부렸는데 오지랖으로 애먼 사람 잡은 케이스.[33] 조비야 동생들도 핍박하고 죽였다는 의혹까지 있는 막장 형이니까 막장 남편에 막장 아빠라고 해도 위화감은 없는 인물이다.[34] 다만 사마가문은 역적이 맞아도 사마의 개인은 완벽히 조예 뒷통수를 후려갈겼다고 보기도 좀 애매하다. 사마의 항목의 충의 참조.[35] 게다가 사서를 보면 사마의는 장자를 낳은 정실부인조차 냉대해서 '그런 늙다리가 죽어도 상관은 없지만 내 귀한 아들들이 다치면 안 되니 사과했다'고 공공연히 떠들 정도로 가부장적인 인물이었다. 사마의의 이런 면모는 어떻게 보면 아내를 냉대하다가 죽인 조예의 아버지 조비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도 있는게 사실이다. 사마의의 이런 면을 조예도 알고 있었다면 과연 조비와 사마의를 겹쳐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36] 사실 사마의가 가부장적인 것이 그 당시 이상하거나 비도덕적인 일도 아니었으며, 사마의의 집안일에 대해 조예가 그렇게 훤하다면 조씨황실의 집안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하후씨의 인물인 하후휘의 묘한 죽음에 조예는 더욱 민감한 감각을 느꼈어야 한다.[37] 조휴의 아들로 위무제 조조와 한글로는 동명이인이다.[38] 이도의 아버지 이풍이 사마사를 제거하려 모의한 것이 발각당해 연좌제로 죽었다. 다만 세 아들은 살았다고.[39] 원희가 유주로 가면서 견씨를 데려가지 않아서 5년간 별거 중이었으니 원희의 아들은 아닐수도 있지만 말이다.[40] 사실 진수는 절대로 삼국지 정사를 공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그 당시 시대상으로 그러다가는 목이 날아갈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수는 위와 진에 불리한 기록에 대해서는 기록에 위화감을 주어 후세에서 미루어 짐작케 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41]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위나라 사람들은 긴 머리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대의 유행이었던 듯 하다. 어머니를 닮아서 곱상한 미소년이었을 수도 있다.[42] 사마의의 외모에 대해선 아쉽게도 새왕조의 사실상의 개창자임에도 별 다른 기록이 안 남아서 전적으로 추측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흔히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에서 날카롭거나 노회한 문관형 외모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이처럼 풍채 좋은 마초형 타입이었을 확률이 높다. 체격이 좋은 사마씨 집안 내림도 있거니와, 후일 오호십육국 시대 동진의 명장이자 권신인 환온은 풍채가 좋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수염이 고슴도치 털처럼 무성해 당대 사람들로부터 "사마선왕(사마의)과 손중모(손권)와 닮았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이를 통해 사마의의 외모가 우락부락한 남성적인 스타일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사마의는 꽃미남 스타일에, 또 여성적인 감수성을 갖고 있던 조예가 여러모로 꽂힐 만하다.[43] 조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식들의 죽음이 암군이 된 주된 요인이었고, 공민왕은 자기가 그토록 의지하던 노국대장공주가 출산 도중에 죽은 이후로 국정에 손을 놓고 사치와 예술에만 탐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