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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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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北魏)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도무제 명원제 태무제 남안왕 문성제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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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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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상서치 상서자 상굴탐 상서팽 상남제
등지 鄧至 염위 冉魏
제6대 추존 추존 초대 말대
상첨함 원제 고제 평제 해빈후
환초 桓楚 서연 西燕
항목 참조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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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목제 보근왕 대왕 평문제 혜제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부흥
양제 열제 소성제 헌명제 탁발규
초촉 譙蜀 적위 翟魏 선우조 鮮于趙 왕씨 정권 王氏
초대 초대 초대 추존 초대
성도왕 하남공 선우걸 태상황 태평제
우문부 宇文部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보회 막나 막괴 보발 구불권
제6대 제7대
막규 실독관 걸득귀 일두귀
단부 段部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일륙권 걸진 무목진 취륙권 섭부진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말파 단아 단료 단란 단감
제11대
단근
}}}}}}}}}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북위 초대 황제
도무제 | 道武帝
파일:Yungang11_2010-1.jpg
윈강석굴 20굴[1]
출생 371년 8월 4일
대 참합피 북쪽
(現 내몽골 자치구 우란차부시 량청현)
즉위 386년 2월 20일
대 우천
(現 내몽골 자치구)
사망 409년 11월 22일 (향년 38세)
북위 대군 평성 황궁
(現 산시성 다퉁시)
능묘 성락금릉(盛樂金陵)
재위기간 대왕(代王)
386년 2월 20일 ~ 386년 6월 5일
위왕(魏王)
386년 6월 5일 ~ 399년 1월 24일
초대 황제
399년 1월 24일 ~ 409년 11월 6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탁발(拓跋)
휘 규(珪)
부모 부황 헌명제
모후 헌명황후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도무황후, 선목황후
자녀 10남 1녀
종교 불교
별명 십익규(什翼圭), 익규(翼圭), 개(開)
작호 대왕(代王) → 위왕(魏王)
묘호 열조(烈祖) → 태조(太祖)
시호 선무황제(宣武皇帝)
→ 도무황제(道武皇帝)
연호 등국(登國, 386년 ~ 396년)
황시(皇始, 396년 ~ 398년)
천흥(天興, 398년 ~ 404년)
천사(天賜, 404년 ~ 409년)
}}}}}}}}} ||

1. 개요2. 특징3. 생애
3.1. 초기 생애3.2. 치세
3.2.1. 대나라의 재건
3.3. 북위의 위왕(魏王)
3.3.1. 탁발굴돌의 침투3.3.2. 이민족 부락 병합3.3.3. 유연부와 철불부 토벌3.3.4. 후연의 북위 침공3.3.5. 산동(山東)을 차지하다.
3.4. 북위의 초대 황제
3.4.1. 칭제3.4.2. 제2차 고차 정벌3.4.3. 국가체제 정비3.4.4. 후진과의 충돌3.4.5. 관제 개편3.4.6. 부락 해산3.4.7. 토목공사
3.5. 말년
4. 둘러보기

1. 개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위의 초대 황제.

탁발규는 본래 국호를 위(魏)라고 공표했지만 이후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오늘날까지, 동위와 서위를 구분하는 것처럼 다른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린다. 조씨의 위나라 뒤에 다시 세워진 위나라라 하여 후위(後魏)라 불린 경우도 많다. 다만 조위를 계승했다해서 후위는 아니고 후당이나 후조처럼 나중에 세워진 위나라라 후위로 불리는 것이다.

탁발규의 묘호는 열조(烈祖)였으나 이후 태조(太祖)로 바뀌었다. 시호 또한 본래 선무황제(宣武皇帝)였으나 도무황제(道武皇帝)로 바뀌었다.

생전에는 화북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후 북위의 제2대 황제인 태종 명원제와 제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가 그의 뒤를 이어 정복 사업을 계승한 결과, 북위는 마침내 5호 16국시대의 난세를 마무리하고 화북을 통일하게 된다. 탁발규는 선비족으로서 화북을 통일하고 이민족 왕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2. 특징

탁발규는 전진의 저족 황제 부견에게 멸망한 대나라의 후손으로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참패로 무너져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이 틈을 타서 대나라 왕을 자칭하고 자립했다.

한족이 아닌 탁발선비족이 북위를 건국하여, 100년이 넘는 시기 동안 지속된 5호 16국시대를 끝내 종결시키고, 화북을 정복하자 이 지역에 대대로 살던 한족들은 선비족 탁발씨 황실에 충성을 하거나 아니면 강남으로 피난을 가서 한족계 남조를 떠받치게 되었다. 즉 이때부터 동북방의 이민족이 대거 건너와 화북을 점령하고 화북에 살던 한족들을 남쪽으로 밀어낸 남북조시대를 도무제 탁발규가 열었으니 남북조시대의 위인을 넘어 중국사의 위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이 차례로 중국을 정복하며 중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3. 생애

3.1. 초기 생애

탁발규의 어머니 하란씨는 대왕 탁발십익건의 왕세자 탁발식에게 시집갔고, 처음에 이주하던 중 운택(雲澤)을 유람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해가 방 안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 보니 빛이 창문으로부터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고, 홀연히 태기가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탁발규를 임신하였으나, 탁발규의 아버지인 탁발식은 곧 장손근(長孫斤)의 난을 막아 부왕 탁발십익건을 구하려다가 부상을 입어 요절하였다.

건국 34년(371년) 7월 7일[2], 어머니 하란씨가 탁발규를 참합피(參合陂) 북쪽에서 낳았는데, 그날 밤에도 다시 밝은 빛이 나타났다. 대왕 탁발십익건은 크게 기뻐하였고, 여러 신하도 경하하였다. 이에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조상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으며, 이름을 '섭규(涉圭)'라 지었다.

탁발규를 돌보던 사람은 탁발규의 몸이 보통 아이보다 배나 무거운 것을 보고 남몰래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듬해 탯줄을 묻었던 구덩이에서는 느릅나무가 자라났고, 뒤에는 마침내 숲을 이루었다. 이후 탁발규는 어린 나이에도 말을 할 줄 알았으며, 눈에서는 빛이 났고 이마가 넓으며 귀가 컸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건국 39년(376년) 12월, 탁발부의 대나라가 당시 막 화북을 제패한 전진의 천왕 부견에게 멸망하였고, 대왕 탁발십익건은 그의 아들인 탁발식군에게 시해당하였다. 천왕 부견은 탁발규를 전진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대나라의 신하였던 연봉은 탁발규가 어리고 약하다고 여겨 부견에게 간곡히 청하며 말했다.
"대주(代主)가 막 붕어하였고, 신하들은 배반하거나 도망간데다, 유손(遺孫, 탁발규)은 너무 어려서 보좌할 사람이 없습니다. 별부대인(別部大人) 유고인은 용맹하고 지략이 있으며, 철불부의 유위진은 간사하고 변덕이 많아, 이들 중 누구에게도 단독으로 맡길 수 없습니다. 마땅히 여러 부락을 둘로 나누어 이 두 사람에게 통솔하게 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평소 깊은 원한이 있어 서로 먼저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변방을 안정시키는 좋은 계책입니다. 그리고 그 손자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다시 그를 세운다면, 이는 폐하께서 망국(亡國)에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견이 이를 따랐다. 이리하여 부견의 군대가 물러간 뒤, 대나라의 백성은 흩어졌고 탁발규는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오라버니 하란눌이 이끄는 하란부로 들어갔다.

부견은 대나라의 옛 영토는 독고부의 유고인과 철불부의 유위진에게 나누어 맡겨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남부대인 장손숭과 원타(元他) 등이 옛 백성을 모두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유고인에게 의지하니, 탁발규와 어머니 하란씨 또한 하란부에서 독고부로 옮겨 가 의탁하였다. 탁발규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빼어나고 의젓하여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유고인은 탁발규를 극진히 모시며, 늘 자기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분은 천하를 높이 다스리려는 큰 뜻을 품고 있다. 나라의 대업을 다시 일으키고 조종(祖宗)을 빛낼 사람은 반드시 이분일 것이다."
라 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0월, 전진의 천왕 부견은 천하통일의 야심을 불태우며 사마씨의 동진을 정복하기 위해 100만 대군을 일으켜 장강 이남을 정벌하려다가 되레 비수대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부견의 휘하에 있었던 이민족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켜 전진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 틈을 타서 모용선비족의 모용수와 모용충은 각기 후연과 서연 정권을 수립했고, 강족의 요장은 후진 정권을 수립하였다. 당시 전진에서 진위장군을 지내고 있던 유고인은 전진 조정의 편에 서서 후연의 세력과 맞섰다.

건원 20년(384년) 10월, 유고인은 천왕 부견의 아들인 장락공 부비를 돕기 위해 안문(雁門), 상곡(上谷), 대군(代郡)의 병력을 징발하고 번치(繁畤)에 진을 쳤다. 그러나 본래 잠시 독고부에 의탁해 있던 모용문(慕容文) 등이 징발된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깨닫고, 밤에 삼군(三郡)의 사람들을 이끌고 유고인을 공격해 살해한 뒤 후연으로 갔다. 이에 유고인의 아우 유두권이 독고부를 이끌게 되었다.

건원 21년(385년), 유고인의 아들 유현이 숙부 유두권을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한 뒤, 장차 탁발규까지 해치려 하였다. 이에 유현의 동생인 유항니(劉亢泥)의 처이자 탁발규의 고모인 탁발씨가 이를 탁발규의 어머니 하란씨에게 일러바쳤다. 이때 옛 대나라의 대인(大人) 양개분(梁蓋盆)의 아들 양육권(梁六眷)이 유현의 참모가 되어 그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그 역시 몰래 부하 목숭을 보내 말을 달려 탁발규에게 알리게 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이에 은밀히 옛 신하 장손건(長孫犍), 원타 등과 결탁하였다.

태안 원년(385년) 8월, 하란씨는 밤에 유현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열고 그를 취하게 만든 뒤, 그 틈에 아들 탁발규와 장손건, 원타, 나결(羅結) 등이 경무장한 상태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하란씨는 일부로 마구간의 말을 놀래켜 그 울음소리에 유현이 깨어나게 하고, 유현 앞에서 통곡하며 말했다.
"내 아들들이 여기 있었는데 지금 모두 없어졌다. 너희들 중 죽인 자가 누구냐?"
이에 유현은 하란씨의 말을 믿고 곧바로 탁발규 등의 뒤를 쫓지 않았고, 덕분에 탁발규와 그 무리는 무사히 하란부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윽고 탁발규가 하란부에 이르니, 유현은 그제서야 사람을 보내 탁발규를 찾게 했으나 미처 따라잡지 못하였다. 하란눌은 갑자기 찾아온 탁발규를 보고 놀라고 기뻐하며 절하며 말하였다.
"나리께서는 나라를 되찾으신 뒤에 마땅히 이 늙은 신하를 생각해주십시오."
탁발규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진실로 외삼촌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하란눌의 둘째 동생 하란염간은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하란부 부족민들의 마음을 얻는 탁발규를 시기하여 항상 그를 해치려 하였는데, 매번 고모인 요서공주가 보호해 주었으므로 하란염간이 그 흉악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한편, 옛 남부대인 장손숭도 유현을 배반하여 동료들과 고향 주민 700여 호를 이끌고 오원(五原)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당시 탁발식군의 아들 탁발악(拓拔渥)도 군중을 모아 스스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귀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오악(烏渥)을 만났고, 오악은 장손숭에게 간하였다.
"역적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아들은 따르기에 족하지 않으니, 탁발규에게 귀부하느니만 못합니다."
장손숭은 이를 듣고 망설였으나, 오악이 소의 머리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향하자, 마침내 그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장손숭은 삼한정(三漢亭)에서 탁발규를 배알하였다. 여담으로 이해에 전진의 천왕 부견은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3.2. 치세

3.2.1. 대나라의 재건

태안 원년(385년) 12월, 여러 부족의 대인(大人)들이 하란눌 형제에게 탁발규를 주군으로 추대하기를 청하자 하란염간이 노하여 말하였다.
"우리나라 안에서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이에 하란눌이 말하였다.
"탁발규 왕자는 대국(大國)의 대를 이은 손자로, 선대의 업적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우리나라의 복이다. 항상 서로 돕고 권면하여 정통을 잇는 공훈을 세워야 하거늘, 네가 오히려 이의를 제기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의 도리겠느냐!"
그리고는 마침내 여러 사람과 더불어 탁발규에게 왕위에 오르길 권하였다. 하란염간은 사병을 거느리고 저항해 보았으나, 실패하여 떠났다.

등국 원년(386년) 정월 6일[3], 탁발규는 대국(代國)을 부활시켜 대왕(代王)의 자리에 올라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호는 '등국(登國)'으로 개원하였으며, 우천(牛川)에서 여러 부족장들과 크게 회합하였다. 다시 장손숭을 남부대인(南部大人)으로 삼고, 숙손보락(叔孫普洛)을 북부대인(北部大人)으로 삼아 그 무리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또, 장곤을 좌장사, 허겸을 우사마, 왕건, 화발, 숙손건, 유악을 외조대인(外朝大人), 해목을 치민장(治民長)으로 삼았다. 이들은 모두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한편 군사 계책과 정사를 논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장손도생, 하란비(賀蘭毗) 등 네 사람 등은 좌우에서 탁발규를 가까이 모시며 명령을 전달하고 받아들였으며, 그 외에도 작위를 나누어 내리고 공훈에 따라 서열을 정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등국 원년(386년) 2월, 정양(定襄)의 성락(盛樂)으로 행차하여 백성을 쉬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등국 원년(386년) 3월, 유현이 선무(善無)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마읍(馬邑)으로 달아나니, 그 일족인 유노진(劉奴真)이 자신이 거느리던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유노진에게는 유건(劉鞬)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이전부터 하란부에 살고 있었다. 유노진이 탁발규에게 말하여 유건을 불러오게 한 뒤, 자신이 거느리던 무리를 그에게 넘겨주기를 청하자, 탁발규가 허락하였다. 유건이 무리를 거느리게 되자, 아우 유거근(劉去斤)을 보내 하란눌에게 금과 말을 선물하였다. 이때 하란염간이 유거근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 형제를 후하게 대했는데, 이제 너희가 부락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에게 와서 나를 따라야 한다."
유거근은 이를 승낙하였다. 그러자 유노진은 노하여 말했다.
"우리 조부 때부터 대대로 대(代)의 충신이었기 때문에 내가 부락을 너희에게 넘겨준 것이니, 이는 의리를 지키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이렇듯 도리에 어긋나게 나라를 배반하려고 모의하니, 의리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마침내 유건과 유거근을 죽였다. 하란염간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어 유노진을 공격하자, 유노진은 대나라로 달아났다. 탁발규는 사자를 보내 하란염간을 질책하였고, 이에 하란염간은 공격을 중지하였다.

3.3. 북위의 위왕(魏王)

3.3.1. 탁발굴돌의 침투

등국 원년(386년) 4월, 탁발규가 국호를 위(魏)라 하고, 칭호를 고쳐 위왕(魏王)이라 하였다.

등국 원년(386년) 5월, 탁발규가 동쪽으로 능석(陵石)에 갔다.[4] 이때 호불후부(護佛侯部)의 수령 후진(侯辰)과 을불부(乙弗部)의 수령 대제(代題)가 배반하여 달아났다. 여러 장수가 그들을 추격하려 하자, 탁발규가 그들을 만류하여 말했다.
"후진(侯辰) 등은 대대로 맡은 직분과 부역을 성실히 수행해 왔으니, 비록 작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우선은 참아 주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은 나라를 처음 세우는 때라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하나로 모이지 않았으므로, 어리석고 식견이 얕은 자들이 망설이며 동요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굳이 추격할 필요가 없다."

등국 원년(386년) 7월 10일[5], 탁발규가 성락(盛樂)으로 돌아왔다. 을불부의 대제가 다시 부락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열흘 남짓 지나 달아나 유현에게로 갔다. 이에 탁발규는 그의 손자 배근(倍斤)에게 대신 그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달에 유현의 아우 유폐니(劉肺泥)가 기병을 거느리고 유노진의 부락을 약탈하였다가, 얼마 뒤 자신의 부락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당초 탁발규의 숙부인 탁발굴돌은 대왕 탁발십익건의 막내아들로, 전진군과 대치하다가 탁발식군에게 살해당한 다른 형들과 달리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대나라가 멸망할 때에 천왕 부견에 의해 장안으로 끌려갔는데, 전진이 패망하자 서연의 모용영을 따랐다. 모용영은 탁발굴돌을 신흥태수(新興太守)로 삼았다.

등국 원년(386년) 8월, 유현이 아우 유항니를 보내 탁발굴돌을 맞이하게 하고 군사를 딸려 보냈다. 탁발굴돌은 이들을 거느리고 와서 위나라의 남쪽 변경을 압박하였다. 이에 여러 부락이 소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의 마음도 형세를 관망하며 흔들렸다. 심지어 탁발규의 측근인 우환(于桓) 등이 등은 부락 사람들과 함께 탁발규를 붙잡아 굴돌에게 호응할 것을 모의하였고, 당장(幢將)인 대(代) 사람 막제 등도 몰래 굴돌과 내통하였다.[6] 그러나 우환의 외삼촌 목숭이 이 일을 고발하자, 탁발규는 주모자 우환 등 다섯 사람만 죽였고, 막제 등 일곱 성씨의 사람들은 모두 용서하여 죄를 묻지 않았다. 다만 탁발규는 내부에서 또 변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음산(陰山)을 넘어 다시 하란부에 의탁하였다. 그리고 외조대인인 요동(遼東) 사람 안동을 보내 후연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는 조왕 모용린에게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등국 원년(386년) 10월, 모용린의 군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탁발굴돌의 군대가 점차 전진하여 탁발규를 압박해 왔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하란염간도 이 틈을 타서 위나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그에게 호응하였다. 위나라의 무리가 놀라 소란스러워졌고, 북부대인 숙손보락 등 13명과 여러 오환족 부락이 달아나 철불부의 유위진에게로 갔다. 모용린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안동 등을 돌려보내니, 위나라 사람들은 후연의 군대가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민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한편 탁발굴돌은 진군하여 고류(高柳)에 주둔하였다.[7] 탁발규도 나아가 노산(弩山)에서 우천(牛川)으로 행군하고, 연수(延水) 남쪽에 주둔하였다. 이어 대곡(代谷)을 빠져나가 고류에서 모용린과 합류하여 탁발굴돌을 크게 격파하였다. 탁발굴돌이 크게 패하여 유위진에게 달아나자, 유위진이 그를 죽였다. 탁발규는 굴돌의 무리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대(代) 사람 고적간(庫狄干)을 북부대인으로 삼아 달아난 숙손보락을 대신하였다.[8] 이후 모용린은 군사를 이끌고 중산(中山)으로 돌아갔다.

등국 원년(386년) 12월,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는 탁발규를 서선우(西單于)로 삼고 상곡왕(上谷王)에 봉하였으나, 탁발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3.2. 이민족 부락 병합

등국 2년(387년) 정월, 공신들에게 상을 나누어 내렸는데, 장손숭 등 73명에게 각각 차등이 있었다.

등국 2년(387년) 2월, 탁발규가 영천(寧川)으로 행차하였다.

등국 2년(387년) 5월, 독고부의 유현 세력은 영토가 넓고 군사가 강하여 북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마침 그의 형제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장사 장곤이 탁발규에게 아뢰었다.
"유현은 뜻이 크고, 야망은 과도하여 하늘과 땅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오나라(吳)가 월나라(越)와 나란히 공존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될 것이니, 지금 그 내부에 분열이 있는 상황을 틈타 서둘러 공격해야 합니다. 경무장하여 간다고 해도 단독으로 진군한다면 유현이 도망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 모용수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서로 힘을 합쳐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하면, 반드시 유현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 영웅들을 모아 천하를 통합하고, 멀고 가까운 지역을 모두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탁발규는 이를 따르고 다시 안동을 보내 후연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등국 2년(387년) 6월, 탁발규가 직접 마읍 남쪽으로 나아가 독고부를 정벌하였고, 후연에서도 조왕 모용린을 보내 탁발규를 돕게 하였다.

등국 2년(387년) 7월, 철불부의 유위진이 후연에 말을 바쳤는데, 유현이 이를 빼앗았다. 성무제 모용수는 노하여 태원왕 모용해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조왕 모용린을 도와 유현을 공격하게 하였고, 크게 격파하였다. 유현은 마읍 서쪽 산으로 달아났는데,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모용린과 합류하여 미택(彌澤)에서 유현을 공격하였다. 유현은 또 격파당하고 서연으로 달아났으며, 모용린은 그의 부중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말·소·양을 수천에서 수만에 이를 만큼 노획하였다.

등국 2년(387년) 8월, 탁발규가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등국 2년(387년) 10월, 탁발규가 유원(濡源)으로 행차하고 외조대인 왕건을 후연에 사신으로 보냈다.

등국 2년(387년) 11월, 유원에서 적성(赤城)으로 행차하였다.

등국 2년(387년) 12월, 송막(松漠)을 순행한 뒤 돌아와 우천으로 갔다.

등국 3년(388년) 2월, 탁발규가 동쪽 지역을 순행하였다.

등국 3년(388년) 4월, 동적성(東赤城)으로 행차하였다.

등국 3년(388년) 5월 4일[9], 북쪽으로 고막해를 정벌하였다.

등국 3년(388년) 6월, 고막해를 약락수(弱落水) 남쪽에서 크게 격파하고 그들의 네 부락과 여러 종류의 가축 10여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어 약락수를 건넜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공에 따라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등국 3년(388년) 7월 2일[10], 고막부의 수령들이 흩어진 무리를 다시 모아 밤중에 탁발규의 행궁(行宮)을 습격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기병을 풀어 그들을 추격하여 토벌하게 함으로써 모두 죽였다. 그달에 탁발규는 적성으로 돌아왔다.

등국 3년(388년) 8월, 탁발규는 속으로 후연을 도모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구원공 탁발의를 사신으로 중산(中山)에 보냈다. 성무제 모용수가 그를 힐문하였다.
"위왕(魏王)은 어찌하여 직접 오지 않았는가?"
탁발의가 대답하였다.
"선왕(先王) 때부터 우리와 연(燕)나라는 함께 진(晉) 황실을 섬겼고, 대대로 형제의 나라로 지내 왔습니다. 신(臣)은 지금 사신으로서의 명령을 받들고 왔으니, 도리상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모용수가 말했다.
"지금 나의 위세는 사해(四海)에 미치고 있는데, 어찌 옛날과 견줄 수 있겠는가!"
탁발의가 말했다.
"연나라가 덕과 예를 닦지 않고 군사적 위세로 스스로 강성해지고자 한다면, 그것은 장수들이 맡을 일이지 사신인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이후 탁발의가 돌아와 탁발규에게 보고하였다.
"연나라의 임금은 늙어 쇠약하고 태자는 어리석고 나약합니다. 범양왕 모용덕은 자신의 재능과 기개를 크게 자부하고 있으니, 어린 군주를 섬길 신하가 아닙니다. 연나라의 임금이 죽고 나면 반드시 내부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라야 연나라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탁발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등국 3년(388년) 11월,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가 사신을 보내 답례하였다.

등국 3년(388년) 12월 6일[11], 탁발규가 서쪽으로 정벌에 나섰다. 여수(女水)에 이르러 해여부(解如部)를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고, 남녀와 각종 가축을 합하여 십수만을 노획하였다.

등국 4년(389년) 정월, 고차의 여러 부락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등국 4년(389년) 2월 9일[12], 탁발규가 다시 여수(女水)에 이르러 토돌린부(吐突鄰部)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부락 사람들을 모두 옮겨 이주시킨 뒤 돌아왔다. 하란염간 형제가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가 탁발규의 군대와 마주쳤고, 탁발규는 영격하여 그들을 패주시켰다.

등국 4년(389년) 4월, 탁발규가 돌아오는 길에 적성을 들렀다.

등국 4년(389년) 5월, 진류공 탁발건을 후연에 사신으로 보냈다.

등국 4년(389년) 10월, 후연에서 사신을 보내 답례하였다.

등국 5년(390년) 3월, 탁발규가 서쪽으로 정벌에 나서서 녹혼해(鹿渾海)에 주둔하여 고차의 원흘부(袁紇部)를 습격하고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사람과 말·소·양이 모두 20여만에 이르렀다. 성무제 모용수는 조왕 모용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탁발규와 합류하게 하였다.

등국 5년(390년) 5월 28일[13], 탁발규가 의신산(意辛山)으로 행차하여 조왕 모용린과 함께 하란부, 흘돌린부(紇突鄰部), 흘해부(紇奚部) 등 여러 부락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등국 5년(390년) 6월, 탁발규가 돌아와 우천으로 행차하였다. 그때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劉直力鞮)를 보내 하란부를 침략하고 포위하게 하자, 하란눌 등은 항복을 청하면서 곤경에 처했음을 알렸다.

등국 5년(390년) 7월 30일[14],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하란부를 구원하러 나아가 양산(羊山)에 이르자, 유직력제가 물러나 달아났다. 탁발규는 하란눌의 부락을 동쪽 변경으로 이주시켰다.

등국 5년(390년) 8월, 탁발규가 우천으로 돌아왔다. 그달에 동생인 진왕 탁발고를 후연에 사신으로 보냈다.

등국 5년(390년) 9월 26일[15], 탁발규가 낭곡하(囊曲河)에서 질노부(叱奴部)를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등국 5년(390년) 10월, 탁발규가 운중(雲中)으로 가 낭산(狼山)에서 고차의 두진부(豆陳部)를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등국 5년(390년) 11월, 흘해부의 대인(大人) 고한(庫寒)이 부락 전체를 이끌고 귀부하였다.

등국 5년(390년) 12월, 흘돌린부의 대인 굴지건(屈地鞬)이 부락 전체를 이끌고 귀부하였다. 탁발규는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백막(白漠)에 주둔하였다.

등국 6년(391년) 2월, 탁발규는 유질천(紐垤川)으로 이동하였다.

등국 6년(391년) 3월, 구원공 탁발의와 진류공 탁발건 등을 보내 서쪽의 출불부(黜弗部)를 토벌하게 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등국 6년(391년) 4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등국 6년(391년) 6월, 후연의 조왕 모용린이 적성에서 하란부를 공격해 하란눌을 사로잡으니, 그 부락 수만 명이 후연에 항복하였다.

등국 6년(391년) 7월 2일[16], 탁발규는 우천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끝난 뒤에는 유질천으로 돌아왔다. 이때 성무제 모용수의 아들들이 후연으로 보냈던 진왕 탁발고를 억류하고 명마(名馬)를 요구하자, 탁발규는 후연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사신을 서연의 모용영에거 보내 교류하였다. 모용영 또한 대홍려 모용균(慕容鈞)을 보내 서신을 전하였다.

그달에 철불부의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고양새(棝楊塞)에서 출병하게 하였고, 흑성(黑城)에까지 침입하였다.

등국 6년(391년) 9월, 탁발규가 오원(五原)을 습격하여 함락하고 그곳을 도륙하였다. 그곳에 쌓아 두었던 곡식을 거두어 유질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양새 북쪽에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

3.3.3. 유연부와 철불부 토벌

처음에 유연부(柔然部) 사람들은 대대로 대나라에 복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 대인(大人) 욱구려지속원(鬱久閭地粟袁)이 죽자 부락이 둘로 나뉘었는데, 맏아들 욱구려필후발(鬱久閭匹候跋)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쪽 지역에 거주하였고, 둘째 아들 욱구려온흘제(鬱久閭縕紇提)는 따로 서쪽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후 전진의 천왕 부견이 대나라를 멸망시키자, 유연부는 철불부에 복속하였다. 위왕 탁발규가 즉위한 뒤 고차 등 여러 부락을 공격하자 대부분 모두 복종하였으나, 오직 유연만은 위나라를 섬기지 않았다.

등국 6년(391년) 10월 29일[17],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유연을 공격하자 유연은 부락 전체를 이끌고 달아났다. 탁발규는 그들을 600리나 추격하였는데, 여러 장수가 장사 장곤을 통해 탁발규에게 권하였다.
"적은 멀리 달아났고 우리 군량도 다 떨어졌으니, 일찍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탁발규가 여러 장수에게 물었다.
"여분으로 끌고 가는 말을 잡아 사흘 동안 먹을 식량으로 삼는다면 충분하겠는가?"[대체로]
모두가 말했다.
"충분합니다."
이에 다시 행군 속도를 배로 높여 추격하여 대적(大磧) 남쪽 상산(床山) 아래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탁발규는 유연을 크게 격파하여 그 부락의 절반을 사로잡았고, 욱구려필후발과 별부의 수령 옥격(屋擊)은 각각 남은 무리를 거두어 달아났다. 이에 장손숭과 장손비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후 탁발규가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내가 앞서 사흘 치 식량에 대해 물은 뜻을 아는가?"
그들이 대답하였다.
"알지 못합니다."
탁발규가 말했다.
"유연은 가축을 몰고 며칠 동안 계속 달아났으니, 물이 있는 곳에 이르면 반드시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경무장한 기병으로 뒤쫓는다면 거리로 계산해 보아 사흘을 넘기지 않고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두가 말했다.
"저희가 미처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한편 장손숭은 평망천(平望川)에 이르러 옥격을 크게 격파하여 사로잡은 뒤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돌려 보였다. 장손비는 탁야산(涿邪山)에 이르러 욱구려필후발을 따라잡았고, 욱구려필후발은 부락 전체를 이끌고 항복을 청하였다. 또 욱구려온흘제의 아들 욱구려갈다한(鬱久閭曷多汗)과 그 형 욱구려힐귀지(鬱久閭詰歸之), 욱구려사륜, 욱구려곡률 등과 그들의 종족과 당여 수백 명을 사로잡아 여러 부락에 나누어 배속하였다. 욱구려온흘제는 서쪽으로 달아나 유위진에게 귀부하려 하였으나, 탁발규가 그를 추격하여 발나산(跋那山)에 이르자 욱구려온흘제는 다시 부락을 들어 항복하였다. 탁발규는 그의 부락을 모두 운중으로 옮겼다.

등국 6년(391년) 11월 9일[19], 탁발규가 유연 정벌을 마치고 유질천으로 돌아왔을 때,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위나라 남쪽 지역을 침략하게 하였다.

11월 10일[20], 탁발규가 유직력제를 막기 위해 직접 출정하였다.

11월 13일[21], 탁발규가 철기산(鐵歧山) 남쪽에서 유직력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그들의 병장기와 치중을 노획하여 소와 양 20여 만 마리를 얻었다. 유직력제는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11월 19일[22], 탁발규가 오원의 금진(金津)에서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곧바로 철불부의 경계 안으로 진입하였다. 탁발규의 역공을 예상치 못했던 철불부의 부락들은 크게 놀라 혼란에 빠졌다.

11월 22일[23], 탁발규의 대군이 유위진이 거주하는 열발성(悅跋城)에 이르니, 유위진 부자가 성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11월 23일[24], 탁발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진류공 탁발건은 남쪽으로 백염지(白鹽池)에 이르러 유위진의 가족을 사로잡았고, 장군 이위(伊謂)는 목근산(木根山)에 이르러 유위진의 장남 유직력제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를 모두 병합하였다. 유위진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났으나 이내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유위진의 수급은 탁발규에게 보내졌다.

등국 6년(391년) 12월, 탁발규는 유위진의 수급을 여러 사람에게 돌려 보인 뒤, 사로잡힌 유위진의 자제와 종족, 당여를 나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5,000여 명을 모두 죽여 황하에 던졌다. 오직 유위진의 셋째 아들 유발발만이 홀로 살아남아 질간부(叱干部)로 달아났다. 이로써 황하 이남의 여러 부락이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모두 평정되었다. 그들이 보유한 진귀한 보물과 가축을 장부에 기록하니, 명마가 30여만 필이고 소와 양이 400여만 마리였는데, 이를 대신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이를 나누어 주었다.

산호(山胡)의 추장 대번퇴(大幡頹), 업역어(業易於) 등이 3,000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귀부하자, 그들을 마읍으로 보내 거주하게 하였다.

이해에 하남궁(河南宮)을 짓기 시작하였다.

등국 7년(392년) 정월, 탁발규가 목근산으로 행차하고 이어 흑염지(黑鹽池)에 주둔하였다.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여러 나라에서 조공하러 온 사신들의 알현을 받은 다음 북쪽으로 미수(美水)에 갔다.

등국 7년(392년) 3월, 물가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고 돌아와 하남궁으로 행차하였다.

서부(西部) 읍려(泣黎)의 대인(大人) 무선(茂鮮)이 배반하여 달아나자, 남부대인 장손숭을 보내 추격하여 토벌하게 하였고 크게 격파하였다.

등국 7년(392년) 5월, 여러 관원에게 말·소·양을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등국 7년(392년) 8월, 탁발규가 막남(漠南)으로 행차하고 이어 순대(巡臺)를 축조하였다.

등국 7년(392년) 12월, 서연의 모용영이 사신을 보내왔다.

이해에 황자 탁발사가 태어났다.

등국 8년(393년) 정월, 탁발규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등국 8년(393년) 2월, 고양원(羖羊原)으로 행차한 뒤 백루(白樓)로 나아갔다.

등국 8년(393년) 3월, 탁발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출정하여 후려린부(侯呂鄰部)를 정벌하였다.

등국 8년(393년) 4월, 탁발규가 고수(苦水)에 이르러 후려린부를 크게 격파하였다.

등국 8년(393년) 5월, 백루로 돌아왔다. 이때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가 서연의 수도 장자(長子)를 공격하였다.

등국 8년(393년) 6월, 탁발규가 북쪽 지방을 순행하였는데, 서연의 모용영이 위급함을 알리며 구원을 요청하자, 진류공 탁발건과 장군 유악에게 기병 50,000기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가 구원하게 하였다. 탁발건 등은 유발부(類拔部)의 수령 유요(劉曜) 등을 격파하고 그 부락을 옮겨 이주시킨 뒤 수용(秀容)에 주둔하였고, 후연군은 마침내 장자(長子)를 포위하였다.

등국 8년(393년) 7월, 탁발규가 새로 세운 제단으로 행차하여 확인하였다. 이후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고 이어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등국 8년(393년) 8월, 탁발규가 남쪽으로 출정하여 삼성(三城)에서 질간부의 수령 태실복(太悉伏)을 정벌하였다. 마침 태실복이 그보다 앞서 조복(曹覆)을 공격하러 나가 있었으므로, 탁발규는 그 틈을 타 그의 성을 도륙하고 태실복의 아들과 보물을 빼앗았으며, 그 백성을 옮겨 이주시킨 뒤 돌아왔다. 태실복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으나 미처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후진으로 달아났다.

등국 8년(393년) 9월, 탁발규가 돌아와 하남궁으로 들어갔다.

등국 9년(394년) 3월, 탁발규가 북쪽 지방을 순행하면서 동평공 탁발의에게 하북(河北)의 오원에서 고양새(棝楊塞) 바깥에 이르는 지역에 둔전을 설치하게 하였다.

등국 9년(394년) 5월, 하동(河東)에서 사냥하였다.

등국 9년(394년) 7월, 하남궁으로 돌아왔다.

등국 9년(394년) 8월, 욱구려갈다한과 욱구려사륜이 부락을 거느리고 아버지 욱구려온흘제를 버린 채 서쪽으로 달아났다. 장손비가 경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상군(上郡)의 발나산에 이르러 욱구려갈다한을 참수하고 그 무리를 모두 죽였다. 욱구려사륜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욱구려필후발에게 달아나니, 욱구려필후발은 그를 자신의 본거지에서 500리 떨어진 남쪽 변경에 머물게 하고, 아들 네 명에게 욱구려사륜을 감시하게 하였다.

얼마 뒤, 욱구려사륜은 자신의 직속 무리를 거느리고 욱구려필후발의 네 아들을 붙잡아 반란을 일으켜 욱구려필후발을 습격하여 사로잡았다. 욱구려필후발의 여러 아들은 남은 무리를 거두어 달아나 고차의 곡률부(斛律部)에 의지하였다. 욱구려사륜은 흉악하고 교활하며 임기응변에 능하였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욱구려필후발을 풀어 주고 그의 여러 아들도 돌려보냈는데, 이는 그들을 한데 모은 뒤 모조리 없애려는 것이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욱구려사륜은 몰래 군사를 보내 욱구려필후발을 습격하여 죽였다. 이에 욱구려필후발의 아들 욱구려계발(鬱久閭啟拔), 욱구려오힐(鬱久閭吳頡) 등 15명은 위나라에 귀부하였고, 탁발규는 계발과 오힐을 안원장군 · 평후(平侯)로 삼았다.

한편 욱구려사륜은 욱구려필후발을 죽인 뒤 위나라의 군대가 자신을 토벌할까 두려워하여 오원 서쪽의 여러 부락을 약탈하고 북쪽으로 대막(大漠)을 건넜다. 이후 욱구려사륜이 후진으로 사신을 보내 통교하니, 탁발규는 재관장군 화돌(和突)을 보내 출불부와 소고연부(素古延部) 등 여러 부락을 습격하게 하였다. 욱구려사륜이 기병을 보내 소고연부를 구원하게 하자, 화돌이 이를 맞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자 욱구려사륜은 멀리 막북(漠北)으로 달아난 뒤, 고차를 침략하여 그 땅 깊숙이 들어갔고, 마침내 여러 부락을 병합하니 흉포한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욱구려사륜은 북쪽으로 약락수(弱洛水)로 옮겨 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군법을 세웠다. 1,000명을 군(軍)으로 삼아 군마다 장수 한 명을 두었고, 100명을 당(幢)으로 삼아 당마다 수령 한 명을 두었다. 전투에서 먼저 적진에 오른 자에게는 노획물을 상으로 주었으며, 물러나거나 겁을 먹은 자는 돌로 머리를 쳐 죽이거나 그때그때 매질하였다. 문서와 기록은 없었고, 장수들은 양의 똥을 이용하여 대략 병사의 수를 계산하였는데, 나중에는 차츰 나무에 새겨 기록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서북쪽에는 흉노족의 남은 부족이 있었는데, 나라가 특히 부유하고 강성하였다. 그 부락의 수령은 발야계(拔也稽)라 하였으며, 군사를 일으켜 욱구려사륜을 쳤다. 욱구려사륜은 알근하(頞根河)에서 그를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고, 뒤에는 그 무리를 모두 병합하였다. 이로써 유연은 강성한 세력으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북쪽에서 위나라를 침략하며 팽창을 억제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에 탁발규는 상서 최굉에게 유연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연연(蠕蠕) 사람들은 예전부터 고집이 세고 시끄러운 족속이라고 불렸다. 이들이 매번 쳐들어와 약탈할 때면 암소를 타거나 몰아 달아나면서 수소를 뒤따르게 했는데, 암소가 주저앉아 더 나아가지 못하곤 하였다. 다른 부락 사람이 수소로 바꾸라고 가르쳐 준 적이 있었는데도 연연 사람들은 '그 어미도 걷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새끼가 어찌 걷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바꾸지 않았고, 결국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데 지금 사륜(社侖)은 중원의 제도를 배워 법을 세우고 전투 진형을 마련하여 끝내 변경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도가(道家)에서 '성인(聖人)이 나면 큰 도적도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3.3.4. 후연의 북위 침공

등국 10년(395년) 정월, 후진으로 갔던 질간부의 수령 태실복이 장안에서 영북(嶺北)으로 돌아오자, 상군(上郡) 서쪽 지역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등국 10년(395년) 5월, 탁발규가 염지(鹽池)로 행차하였다. 이때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가 그의 태자 모용보, 조왕 모용린 등을 보내 오원을 침략하게 하였다.

등국 10년(395년) 6월, 하남궁으로 돌아왔다.

등국 10년(395년) 7월, 장사 장곤은 후연군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탁발규에게 아뢰었다.
"연(燕)나라는 활대(滑台)와 장자(長子)에서 승리한 데 익숙해져, 나라의 재력과 병력을 모두 쏟아부어 쳐들어오면서 우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마땅히 약한 모습을 보여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어야 비로소 이길 수 있습니다."
탁발규는 이를 따라 모든 부락과 가축을 옮겨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1,000여 리 물러나 모용보의 군대를 피하였다. 이윽고 후연군은 오원에 이르러 위의 별부(別部) 30,000여 호를 항복시키고, 기장밭에서 100여 만 석에 이르는 곡식을 거두어들인 뒤에 흑성(黑城)에 주둔하였다. 곧이어 후연군은 진격하여 황하에 이르렀고, 배를 만들어 황하를 건널 준비를 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우사마 허겸을 보내어 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등국 10년(395년) 8월, 탁발규가 직접 황하 남쪽에서 군대를 정비하였다.

등국 10년(395년) 9월, 탁발규가 군대를 진격시켜 황하에 이르렀다. 후연의 태자 모용보는 군사를 벌여 세우고 황하를 건너려 하였는데,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배 수십 척이 떠밀려 남쪽 강기슭에 닿았다. 위나라 군사들은 그 배에 타고 있던 갑병 300여 명을 사로잡았으나, 모두 풀어 주어 돌려보냈다.

당초 모용보가 중산(中山)을 출발할 때, 성무제 모용수는 이미 병을 앓고 있었다. 모용보가 오원에 이른 뒤, 탁발규는 사람을 보내 중산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모용보의 사신들을 엿보아 모두 붙잡게 하였다. 모용보 등은 몇 달 동안 모용수의 안부를 전혀 듣지 못하였는데, 탁발규는 붙잡아 둔 사신을 황하 가로 데려오게 하여 모용보에게 외치게 하였다.
"너희 아버지는 이미 죽었는데, 어찌하여 일찍 돌아가지 않는가!"
이에 모용보 등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병사들도 크게 동요하였다. 이후 탁발규는 진류공 탁발건에게 기병 50,000기를 거느리고 황하 동쪽에 주둔하게 하고, 동평공 탁발의에게 기병 100,000기를 거느리고 황하 북쪽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약양공 탁발준에게는 기병 70,000기를 거느리고 적의 남쪽 퇴로를 막게 하였다. 한편 후진의 문환제 요흥도 양불숭(楊佛嵩)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렇게 연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대치한 지 수십 일이 되었다. 조왕 모용린의 장수 모여숭(慕輿嵩) 등은 성무제 모용수가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모용린을 군주로 받들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모여숭 등은 모두 죽었고, 모용보와 모용린 등은 서로 마음속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등국 10년(395년) 10월 25일[25], 모용보는 배를 불태우고 밤중에 달아났다. 당시 황하의 얼음이 아직 얼어붙지 않았으므로 모용보는 위나라 군대가 틀림없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척후를 두지 않았다.

등국 10년(395년) 11월 3일[26],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황하가 얼어붙었다. 탁발규는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넌 뒤, 치중은 남겨 두고 정예 기병 20,000여 기를 선발하여 급히 추격하였다.

모용보의 군대가 참합피(參合陂)에 이르렀을 때 큰바람이 불었고, 둑처럼 생긴 검은 기운이 군대의 뒤쪽에서 밀려와 군진 위를 뒤덮으려 하였다. 승려 지담맹(支曇猛)이 모용보에게 말했다.
"바람과 기운이 갑자기 사납고 빠르게 일어나니, 이는 위(魏)나라 군대가 장차 도착할 징조입니다. 마땅히 군사를 보내 방비해야 합니다."
모용보는 위나라 군대와 이미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여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지담맹이 계속 강하게 청하자, 모용린이 노하여 말했다.
"전하의 신묘한 무용과 이처럼 성대한 군세라면 사막을 종횡할 만한데, 삭로(索虜) 따위가 어찌 감히 멀리까지 쫓아오겠는가! 지담맹이 망령된 말을 하여 군사들을 놀라게 하니, 마땅히 참수하여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지담맹이 울면서 말했다.
"부씨(苻氏)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회남(淮南)에서 패한 것은 바로 병력이 많음을 믿고 적을 얕보며 하늘의 이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모용덕이 모용보에게 지담맹의 말을 따르라고 권하였다. 이에 모용보는 모용린에게 기병 30,000기를 거느리고 군대의 후방에 머물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용린은 지담맹의 말이 망령되다고 여겨 기병을 풀어 사냥이나 하게 하고 제대로 방비하지 않았다. 또, 모용보가 척후 기병을 보내 되돌아가 위나라 군대의 동정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기병들은 10여 리쯤 가자 곧 말안장을 풀고 잠을 잤다. 한편 위나라 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행군하여 11월 9일 저녁에 참합피 서쪽에 이르렀다. 연나라 군대는 참합피 동쪽에 있었으며, 반양산(蟠羊山) 남쪽의 물가에 진을 치고 있었다.[27] 탁발규는 밤중에 여러 장수에게 각각 임무를 나누어 주고, 연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덮치게 하였다. 병사들은 입에 재갈을 물고 말의 입도 묶은 채 소리 없이 은밀히 전진하였다.

11월 10일[28] 해가 뜰 무렵, 위나라 군대가 산 위에 올라 아래의 연나라 진영을 내려다보았다. 연나라 군대는 막 동쪽으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는데, 연나라 병사들이 뒤를 돌아 위나라 군대를 발견하자 크게 놀라 소란에 빠졌다. 탁발규가 군사를 풀어 공격하자 연나라 병사들은 물가로 달아났고,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고 겹쳐 넘어지면서 압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약양공 탁발준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차단하니, 연나라 병사 4 ~ 50,000명이 한꺼번에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모은 채 사로잡혔고, 흩어져 달아난 자는 불과 수천 명뿐이었다. 그나마 태자 모용보 등 지휘관들은 모두 홀로 말을 타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탁발규는 이 전투에서 후연의 진류왕 모용소를 죽이고, 노양왕 모용왜노(慕容倭奴), 계림왕 모용도성(慕容道成), 제음공 윤국(尹國) 등 문무 장수와 관리 수천 명을 생포하였으며, 노획한 무기와 갑옷, 군량과 재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탁발규는 연나라의 신하 가운데 재능이 있어 쓸 만한 자들을 골라 남겨 두었다. 대군태수(代郡太守)인 광천(廣川) 사람 가규(賈閨), 가규의 사촌동생 창려태수(昌黎太守) 가이, 태사랑 조숭 등이었다. 그 나머지 포로들에게는 모두 옷과 양식을 주어 돌려보냄으로써 중원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때 중부대인 왕건이 아뢰었다.
"연(燕)나라는 병력이 강성합니다. 지금 나라의 힘을 기울여 쳐들어왔는데 우리가 다행히 크게 이겼으니, 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면 연나라의 국내가 텅 비게 되어 그 나라를 취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또 적을 사로잡고도 풀어 준다는 것이 아무래도 옳지 않지 않겠습니까!"
이에 탁발규는 포로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등국 10년(395년) 12월, 탁발규는 운중의 성락(盛樂)으로 돌아왔다.

등국 11년(396년) 정월, 정양(定襄)의 호산(虎山)에서 대대적으로 사냥하고, 이어 동쪽으로 선무(善無)의 북피(北陂)에 행차하였다.

등국 11년(396년) 3월,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가 참합피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친히 군대를 이끌어 은밀히 출발하였다. 청령(青嶺)을 넘어 천문(天門)을 지나면서, 산을 뚫어 길을 내고 위나라가 예상하지 못한 틈을 타 곧장 운중을 향하였다. 당시 진류공 탁발건은 부락 30,000호를 거느리고 평성(平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수가 엽령(獵嶺)에 이르러 요서왕 모용농과 고양왕 모용륭을 선봉으로 삼아 평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때 연나라 군대는 막 패배를 당한 뒤라 모두 위나라를 두려워하였으나, 오직 고양왕 모용륭이 이끄는 용성(龍城)의 병사들만은 용맹하고 날래어 앞다투어 진격하였다. 탁발건은 평소 방비를 해 두지 않았다가 연나라 군대가 평성에 도착하고서야 탁발건은 비로소 이를 알아차렸다. 그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패하여 전사하였고, 연나라 군대는 그의 부락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진류공 탁발건의 용맹은 대(代) 이북을 뒤덮을 정도로 위나라의 여러 장군 중 으뜸이었으나, 그가 하루아침에 전사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탁발규는 크게 놀라고 두려워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부락은 탁발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두 마음을 품었기에, 탁발규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태자 모용보가 이끄는 연나라 별동대는 점차 운중 가까이 접근 중이었다.

성무제 모용수가 참합피를 지날 때, 쌓인 시신의 뼈가 산처럼 된 것을 보고 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였고, 그 울음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모용수도 비통하고 분한 나머지 피를 토하였으며, 이로 인해 병이 나서 수레를 타고 진군하였다. 하지만 병이 깊은 나머지 그는 평성 서북쪽 30리 지점에 머물렀다. 결국 태자 모용보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때 연나라 군대에서 배반하여 달아난 자가 위나라에 와서 알렸다.
"모용수는 이미 죽었고, 그 시신을 수레에 실어 군영 안에 두고 있습니다."
탁발규는 그들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평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군사를 이끌고 음산(陰山)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모용수는 평성에 열흘 동안 머물렀는데 병세가 더욱 위독해지자, 연창성(燕昌城)을 쌓은 뒤 돌아갔다.

등국 11년(396년) 4월, 성무제 모용수가 상곡(上谷)의 저양(沮陽)에서 사망하였다. 태자 모용보는 그의 죽음을 숨기고 곧바로 발상하지 않았다.

등국 11년(396년) 6월 1일[29], 탁발규는 장군 왕건 등에게 세 갈래 군대를 거느리고 후연의 광녕태수(廣寧太守) 유항니를 토벌하게 하였다. 위나라 군대가 유항니를 참수하고 그의 부락을 옮겨 이주시키니, 후연의 상곡태수(上谷太守) 모용보린(慕容普鄰)은 상곡군을 버리고 달아났다.

6월 15일[30], 탁발규의 어머니 왕태비 하란씨가 세상을 떠나 이달에 장사지냈다.

3.3.5. 산동(山東)을 차지하다.

황시 원년(396년) 7월, 우사마 허겸이 글을 올려 탁발규에게 칭제할 것을 권하였다. 탁발규는 이때부터 비로소 천자(天子)의 깃발을 세우고, 출입할 때 경필(警蹕)을 시행하였으며, 연호를 '황시(皇始)'로 개원하였다.

황시 원년(396년) 8월 16일[31], 동쪽 교외에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8월 28일[32], 탁발규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후연 정벌 작전을 개시하였다. 탁발규가 직접 육군(六軍) 40여만 명을 통솔하여 남쪽으로 마읍을 나와 구주(句注)를 넘었다. 깃발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2,000여 리에 이어졌으며, 북을 울리며 진군하니 백성들의 집까지 모두 진동하였다. 아울러 별도로 장군 봉진 등에게 세 갈래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 길로 나아가 유주(幽州)를 습격하고 계(薊)를 포위하도록 명하였다.

황시 원년(396년) 9월 18일[33], 탁발규는 양곡(陽曲)에 주둔하고는 서산(西山)에 올라 진양(晉陽)을 굽어보며 살펴본 뒤, 여러 장수에게 기병을 이끌고 진양을 포위하여 압박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였다. 후연의 병주목(幷州牧)인 요서왕 모용농이 크게 두려워하여 처자식과 함께 성을 버리고 밤중에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아나니, 병주가 하루 만에 평정되었다. 병주를 장악한 탁발규는 처음으로 중원의 국가체제를 채용하여 대성(臺省)을 설치하고 백관을 두었으며, 공(公)·후(侯)·장군(將軍)·자사(刺史)·태수(太守)를 봉하고 임명하였다. 또, 상서랑(尚書郎) 이하의 관직에는 모두 유학자로 채웠다. 중원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딛은 탁발규는 사람들을 위무하고 받아들이는 데 각별히 마음을 썼다. 군문(軍門)을 찾아온 여러 사대부는 나이가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그들의 형편을 두루 자세히 묻고 살폈으며,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게 하였다.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자라면 모두 그에 맞게 관직에 등용하였다.

9월 19일[34], 보국장군 해목에게 명하여 분천(汾川) 일대를 공략하게 하여, 평도성(平陶城)에서 후연의 단양왕 모용매득(慕容買得)과 이석호군 고수화(高秀和)를 사로잡았다. 이후 탁발규는 중서시랑 장순(張恂) 등을 여러 군의 태수(太守)로 삼아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아 위무하고,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며 독려하게 하였다. 또, 관군장군 우율제와 녕삭장군 공손란(公孫蘭)에게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은밀히 진양(晉陽)에서 한신(韓信)이 옛날에 이용했던 길을 다시 열게 하였다.[35]

한편 후연의 혜민제 모용보는 위나라 군대가 장차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당(東堂)에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중산윤 부모(苻謨)가 말했다.
"지금 위나라 군대는 병력이 많고 강하며, 천 리 먼 길을 와서 싸우면서 승세를 타 사기가 날카롭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탄한 지역으로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다면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험준한 길목을 막아 저지해야 합니다."
중서령 수수(眭邃)가 말했다.
"위나라는 기병이 많아 왕래하며 빠르게 노략질하지만, 말 위에 싣고 다닐 수 있는 군량은 열흘을 넘지 못합니다. 마땅히 여러 군현(郡縣)에 명하여 백성을 모으고, 1,000호마다 하나의 보루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은 뒤 들판을 깨끗이 비워 그들을 기다리면, 적이 와도 노략질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60일을 넘기지 못하고 군량이 다하여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
상서 봉의가 말했다.
"지금 위나라 군대는 수십만으로 천하의 강적입니다. 백성이 보루를 쌓는다 해도 스스로 굳게 지키기에는 부족하니, 이는 오히려 병력과 물자를 한곳에 모아 적에게 내주는 셈이 될 뿐입니다. 또 백성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우리 쪽의 약세를 드러내게 됩니다. 관문과 험지를 막고 적을 맞아 싸우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조왕 모용린이 말했다.
"위나라는 지금 승세를 타 사기가 날카로우니 그 예봉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마땅히 중산(中山)을 굳게 지키면서 그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그 틈을 타 공격해야 합니다."
이에 모용보는 성을 수리하고 곡식을 쌓아 장기간 버틸 준비를 하고, 요서왕 모용농에게 명하여 안희(安喜)에 나가 주둔하게 하였다. 또, 군사의 모든 움직임과 조치는 전부 모용린에게 맡겼다.

황시 원년(396년) 10월 15일[36], 탁발규가 우율제 등이 뚫은 길을 통해 정형(井陘)을 빠져나와 후연의 수도 중산을 향해 달려가면서, 관군장군 왕건과 좌군장군 이율에게 기병 50,000기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먼저 출발하게 하였다. 이때 이선이 탁발규에게 항복하자, 탁발규는 그를 정동부의 좌장사로 삼았다.

황시 원년(396년) 11월 1일[37], 탁발규가 진정(真定)에 이르렀다. 이어 다시 진군하여 상산(常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후연의 상산태수 구연(苟延)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상산 동쪽에서는 수령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숨기도 하고, 군문(軍門)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기도 하였는데, 오직 중산, 업(鄴), 신도(信都)의 세 성만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탁발규는 별도로 정동대장군 · 동평공 탁발의에게 기병 50,000기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업을 공격하게 하고, 관군장군 왕건과 좌군장군 이율 등에게 신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또한 군대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백성의 뽕나무와 대추나무를 훼손하지 못하게 하였다.

11월 19일[38], 군대를 진격시켜 중산에 이르렀다.

11월 20일[39], 탁발규가 기병을 이끌고 중산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후연의 고양왕 모용륭이 남곽(南郭)을 지키면서 병력을 거느리고 힘껏 위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다.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전투가 이어져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고, 위나라 군대는 마침내 물러났다. 여러 장수에게 말했다.
"짐이 헤아려 보건대 모용보(慕容寶)는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하고 반드시 성에 의지해 스스로 지키면서 세월만 끌려고 할 것이다. 급히 공격하면 병사들이 다치고, 오래 포위하면 군량이 많이 든다. 그러니 먼저 업(鄴)과 신도(信都)를 평정한 뒤 돌아와 중산(中山)을 취하는 것이 계책상 편리하다. 우리가 군대를 옮겨 멀리 떠나면 모용보는 반드시 병력을 흩어 민간에서 식량을 구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고 서로 갈라질 것이니, 그때 공격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
여러 장수가 훌륭한 계책이라고 칭송하였다.

11월 28일[40], 탁발규가 남쪽으로 내려가 노구성(魯口城)에 진을 쳤다. 이에 후연의 박릉태수(博陵太守) 신영(申永)은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고, 고양태수(高陽太守) 최굉은 해저(海渚)로 달아났다. 탁발규는 평소 최굉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찾게 하였고, 마침내 그를 붙잡았다. 이어 최굉을 황문시랑으로 삼아 급사황문시랑 장곤과 함께 기밀 업무를 맡게 하고 제도를 새로 세우게 하였다. 또, 후연의 박릉현령 굴준이 위나라에 귀순하자, 탁발규는 그를 중서령으로 삼아 명령을 출납하게 하고, 아울러 문서와 조칙 작성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한편 후연의 범양왕 모용덕은 남안왕 모용청(慕容青) 등을 보내 밤중에 업성 아래의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하여 격파하였다. 업을 공략하던 동평공 탁발의는 물러나 신성(新城)에 주둔하였다.[41] 모용청 등이 위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공격하기를 청하자, 별가 한변(韓辺)이 진언하였다.
"옛사람은 먼저 계책을 세운 뒤 싸웠습니다. 지금 위나라 군대를 공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원정 온 군대이므로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합니다. 둘째, 수도와 가까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사지(死地)에 군사를 두고 있습니다. 셋째, 선봉이 이미 패하였으므로 후방의 진영은 이제 더욱 굳게 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넷째, 저들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반대로 관군이 움직여서는 안 되는 이유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땅에서 싸우기 때문입니다.[42] 둘째, 출전하였다가 승리하지 못하면 병사들의 마음을 굳게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성과 해자가 아직 제대로 수리되지 않아 적이 다시 쳐들어올 경우 대비할 수 없습니다. 지금 위나라 군대에는 군량과 물자가 부족하니, 차라리 보루를 깊고 견고하게 하여 군사를 굳게 지키면서 저들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모용덕은 그의 말을 따르고 모용청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황시 원년(396년) 12월, 탁발규가 요서공 하뢰노(賀賴盧)에게 기병 20,000기를 주어 동평공 탁발의를 도와 업을 공략하게 하였다. 하뢰노는 탁발규의 외삼촌 하란눌의 아우였다.[43]

12월 20일[44], 위나라의 별부대인 몰근(沒根)은 담력과 용맹이 뛰어났는데, 탁발규는 그를 미워하였다. 몰근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친위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후연에 항복하였다. 몰근이 혜민제 모용보에게 다시 위나라 진영을 습격하기를 청하자, 모용보는 그에게 많은 병력을 맡기기를 꺼려 기병 100여 기만 주었다. 몰근은 위나라 군대의 호령을 흉내 내면서 밤중에 위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황제의 근위 진영에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탁발규가 이를 알아차리고 크게 당황하여 허둥지둥 달아났다. 몰근은 자신을 따라온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위나라 대군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적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사로잡은 뒤 돌아갔다.

황시 2년(397년) 정월 초하루[45], 탁발규가 노구에서 여러 신하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업을 지키는 후연의 범양왕 모용덕은 후진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진나라 군대는 출병하지 않았고, 이에 업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한편 하뢰노는 자신이 탁발규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동평공 탁발의의 지휘를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탁발의의 사마 정건(丁建)은 몰래 모용덕과 내통하면서 이를 이용해 두 사람 사이를 더욱 이간질하였다. 그리고 정건은 화살에 편지를 매어 성 안으로 쏘아 보내 그 사정을 알렸다.

정월 7일[46], 바람에 흙먼지가 일어 대낮인데도 어두워졌다. 이때 하뢰노의 진영에서 불이 나자 정건이 탁발의에게 말했다.
"하뢰노가 진영을 불태우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탁발의는 그 말을 사실로 여겨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고, 하뢰노도 이 소식을 듣고 역시 퇴각하였다. 정건은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용덕에게 가서 항복하면서, 탁발의의 군대가 오랜 원정으로 지쳐 있으니 공격할 수 있다고 일렀다. 모용덕은 계양왕 모용진(慕容鎮)과 남안왕 모용청에게 기병 7,000기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공격하게 하였고, 크게 격파하였다.

후연의 혜민제 모용보는 좌위장군 모여등(慕輿騰)을 보내 박릉을 침략하게 하였다. 모용등은 탁발규가 임명한 중산태수 및 고양(高陽) 등 여러 현의 현령과 현장을 죽이고, 조세로 운반하던 물자를 약탈하였다.

정월 22일[47], 당시 왕건 등이 60여 일 동안 신도를 공격하였으나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탁발규는 군대를 진격시켜 신도로 향하였다.

정월 24일[48], 탁발규가 기병을 이끌고 도착해 신도성을 포위하였다. 그날 밤 신도를 지키던 후연의 기주자사(冀州刺史) · 의도왕 모용봉(慕容鳳)이 성을 넘어 달아나 중산(中山)으로 돌아갔다.

정월 25일[49], 후연의 보국장군 장양(張驤)과 호군장군 서초(徐超)가 장수와 관리 이하를 거느리고 신도성 전체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때 혜민제 모용보는 탁발규가 신도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박릉의 심택(深澤)으로 달려가 호타수(呼沱水)에 주둔하였다. 또, 조왕 모용린을 보내 양성(楊城)을 침략하게 하여 상산(常山)의 수비병 300여 명을 죽였다. 모용보는 가지고 있던 진귀한 보물과 궁인(宮人)을 모두 내놓아 여러 군현에서 사람을 모집하였다. 이에 도적과 무뢰배 가운데 많은 자들이 호응하였다.

황시 2년(397년) 2월 1일[50], 탁발규가 진군하여 양성(楊城)으로 행차하였다. 몰근의 조카 추제(丑提)는 위나라의 병주감군(幷州監軍)이었는데, 숙부가 연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자신이 거느리던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탁발규는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여 국상(國相) 섭연(涉延)을 보내 연나라에 화친을 요청하고, 아울러 자신의 아우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혜민제 모용보는 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도리어 용종복야 난진(蘭真)을 보내 탁발규가 은혜를 저버렸다고 책망하게 하였다. 이후 모용보는 보병 120,000명과 기병 37,000기를 모두 동원하여 곡양(曲陽)의 백사(柏肆)에 주둔시킴으로써 연나라 군대는 호타수 북쪽에 진을 치고 탁발규를 가로막으려 하였다.

황시 2년(397년) 2월 9일[51], 위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호타수 남쪽 거록(鉅鹿)의 백사오(柏肆塢)에 진을 쳤다. 혜민제 모용보는 군사를 은밀히 보내 밤중에 강을 건너게 하고, 용맹한 병사 10,000여 명을 모집하여 위나라 진영을 습격하게 하는 동시에, 모용보 자신은 진영 북쪽에 진을 치고 그들을 지원하였다. 모집한 후연의 병사들이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고 위나라 군대를 맹렬히 공격하니, 불길이 행궁(行宮)에까지 번졌고 위나라 병사들은 놀라 흩어졌다. 이로써 위나라 군대가 크게 혼란에 빠지자 탁발규는 놀라 의관을 갖출 겨를도 없이 맨발로 뛰어나가 진영을 버리고 맨발로 달아났다. 후연의 장군 걸특진(乞特真)이 100여 명을 거느리고 탁발규의 장막 아래까지 이르러 그의 옷과 신발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얼마 뒤 후연의 병사들이 까닭 없이 스스로 놀라 서로 칼로 베고 활을 쏘기 시작하였다. 탁발규는 진영 밖에서 이 모습을 보고 곧 북을 쳐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좌우의 측근과 중군(中軍)의 장병들이 조금씩 모여들자 진영 밖에 횃불을 많이 늘어세우고 기병을 풀어 돌격하게 하였고, 결국 후연의 병사들이 크게 패하여 장군 고장(高長) 등 4,000여 명이 사로잡혔다. 패한 병사들이 모용보의 본진으로 돌아오자, 모용보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호타수 북쪽으로 건너갔다.

황시 2년(397년) 2월 10일[52], 위나라 군대가 대오를 정비하여 도착한 뒤 연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는데, 연나라 군대는 이미 기세가 꺾여 있었다. 혜민제 모용보는 군사를 이끌고 중산(中山)으로 돌아갔고, 위나라 군대가 뒤따라 공격하자 연나라 군대는 거듭 패하였다. 모용보는 두려워하여 대군을 버리고 기병 20,000기만 거느린 채 달아나 돌아갔는데, 당시 큰 눈보라가 몰아쳐 얼어 죽은 자들이 서로 베개를 벤 듯 잇달아 쓰러졌다. 그럼에도 모용보는 위나라 군대에게 따라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병사들에게 겉옷과 무기·장비를 모두 버리도록 명하였다. 버려진 병기만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칼 한 자루조차 제대로 가지고 돌아가지 못하였다. 위나라군은 그의 무기와 치중을 수십만에 이를 만큼 노획하였다.

백사 전투에서 수많은 연나라 신하들이 위나라에 사로잡혔다. 후연의 상서 민량(閔亮), 비서감 최영, 태상 손기(孫沂), 전중시어사 맹보(孟輔) 등도 모두 항복하였고, 이외에도 항복하는 자가 잇따르자, 각각 차등을 두어 관직과 작위를 내려 주었다. 이보다 앞서 장곤은 일찍이 탁발규에게 후연의 비서감 최영의 재능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탁발규는 최영을 얻게 되자 매우 기뻐하여 그를 상서(尚書)로 삼고, 상서성의 36조(曹)[53]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정사를 맡겨 처리하게 하였다.

이때 백사의 전투를 두고 멀고 가까운 곳에 온갖 소문이 퍼졌고, 급기야 탁발규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문까지 널리 퍼졌다. 이에 항복했던 후연의 장수 서초가 반성(畔城)에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탁발규는 장군 해욕(奚辱)에게 명하여 그를 붙잡아 참수하게 하였다. 또, 병주(幷州)를 지키던 장수 봉진(封真)이 자신의 종족과 도하(徒何) 사람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병주자사 탁발소연을 공격하려 하자, 탁발소연이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당시 남안공 탁발순은 후방에서 운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국사(國事)를 맡아 처리하려 하였다. 이에 당장 막제가 간하였다.
"이는 중대한 일이니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뒤이어 오는 소식을 자세히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탁발순은 그만두었다. 한편, 하란부의 수령 부력권(附力眷), 흘린부의 수령 익물니(匿物尼), 흘해부의 수령 질노근(叱奴根)은 이 소문을 믿고 무리를 모아 음관(陰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탁발순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탁발규는 안원장군 유악에게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돌아가 세 부락을 토벌하게 하였고, 모두 평정하니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탁발규는 새로 귀부한 사람들을 위무하고자 하였으며, 참합피에서 포로들을 학살한 일을 깊이 후회하였다. 그러나 병주자사 탁발소연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토벌하면서 너무 많은 사람을 살육하자, 탁발규는 그를 관직에서 면직시키고 해목을 병주자사로 삼았다. 해목은 후진의 문환제 요흥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돈수(頓首)'라고 쓰며 그와 대등한 예로써 교류하였다. 서신을 받은 요흥은 이에 노하여 탁발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탁발규는 이 일로 해목을 죽였다.

황시 2년(397년) 3월 11일[54], 탁발규가 노노(盧奴)에 머물렀다. 혜민제 모용보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면서 이전에 억류해 두었던 탁발규의 동생 진왕 탁발고를 돌려보내고, 상산(常山) 서쪽의 땅을 떼어 위나라에 바치며, 중산 동쪽 지역만을 자신이 지키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탁발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보는 후회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3월 13일[55], 탁발규가 중산에 이르러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성을 포위하게 하였다. 급사황문시랑 장곤이 탁발규에게 아뢰었다.
"모용보(慕容寶)는 3대의 자산과 성과 해자의 견고함에 의지하고 있는데, 비록 황제의 위엄이 진동하고 엄숙하여 형세상 분명 사로잡아 없앨 수 있더라도, 무력을 다하고 군사를 극도로 쓰는 것은 왕자(王子)가 마땅히 할 바가 아닙니다. 옛날 역생(酈生)이 한 번 말하자 전횡(田橫)이 투항하였고, 노연(魯連)이 편지를 날리자 요성(聊城)이 스스로 항복을 결심했습니다. 신(臣)은 비록 옛사람만큼의 덕망이 없고, 기발한 계책도 없으나, 폐하의 위엄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감응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탁발규가 이를 따라 혜민제 모용보에게 편지를 보내 성패를 깨우치게 하니, 모용보가 편지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날 밤 조왕 모용린이 좌위장군 · 북지왕 모용정(慕容精)을 살해하고 처자식과 함께 서산(西山)으로 달아났다. 모용보는 모용린이 달아난 것을 보고 그가 화룡(和龍)을 차지할까 두려워하였다.

3월 14일[56], 혜민제 모용보는 마침내 처자식과 형제, 종족과 함께 기병 수천 기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후연의 장수 이침(李沈), 왕차다(王次多), 장초(張超), 가귀(賈歸) 등이 성에서 나와서 항복하였다. 탁발규는 중령장군 장손비와 좌장군 이율에게 기병 3,000기를 거느리고 모용보를 추격하여 범양(范陽)에 이르게 했으나, 미치지 못하고 그 신성(新城)의 수자리를 깨뜨려 1,000여 명을 사로잡고 약탈하였다. 이로써 중산성 안에는 주인이 없어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미혹되어 동문(東門)을 닫지 않았는데, 탁발규가 밤에 성으로 들어가 점거하여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관군장군 왕건이 탐욕스럽고 꾀가 없으며 뜻이 중산성을 노획하고 약탈하는 데 있었으므로 탁발규에게 아뢰었다.
"병사들이 방자하게 약탈하여 부고(府庫)를 어지럽힐까 두려우니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를 청합니다."
이에 탁발규가 그만두었다. 개봉공 모용상이 모용보를 따라 도망치려 했지만 미처 따르지 못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안에서 그를 주인으로 세워 마침내 문을 잠그고 맞서 지켰다. 이후 위나라군이 힘을 다하여 공격했으나 며칠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사람을 시켜 누거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며 그 무리를 불러 타일러 말했다.
"모용보(慕容寶)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 이미 너희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희 백성들은 누구를 위해 지키는가? 어찌 천명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스스로 죽음을 취하는가?"
그러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소인배들은 무지하여 단지 다시 참합(參合)의 무리처럼 될까 두려울 뿐이므로 구차하게 열흘 동안이라도 목숨을 연장할 따름입니다."
탁발규가 이를 듣고 돌아보아 왕건을 바라보며 그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황시 2년(397년) 4월, 탁발규가 중산을 포위하던 중에 군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자, 정동대장군 · 동평공 탁발의에게 명하여 업(鄴)의 포위를 풀고 거록(鉅鹿)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였으며, 양성(楊城)에 조세로 거둔 곡식을 쌓아 두게 하였다. 이때 후연의 개봉공 모용상은 보병 6,000명을 내보내 틈을 엿보아 여러 곳에 주둔한 위나라 군대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중령장군 장손비 등에게 경기병을 거느리고 나가 그들을 유인하게 하고, 자신은 호대(虎隊) 5,000명으로 그 후방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모용상의 군사 5,000명을 참수하고 700명을 생포하였으나, 사로잡은 이들은 용서하여 돌려보냈다.

황시 2년(397년) 5월 3일[57], 공신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 탁발규는 중산성 안의 사람들이 모용상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데다가 대군이 성을 압박하고 있어, 항복하고 싶어도 길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몰래 사람을 보내 그들을 불러 타이르고 귀순을 권하였다.

5월 7일[58], 탁발규가 군사를 크게 드러내어 위세를 과시하고 성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 준 뒤,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옮겨 가면서 성 안의 변화를 기다리게 하였다.

5월 17일[59], 동평공 탁발의를 표기대장군 · 도독중외제군사 · 연·예·옹·형·서·양6주목(兗豫雍荊徐揚六州牧) · 좌승상으로 삼고 위왕(衛王)에 봉하였다. 또, 양성공 탁발제도 작위를 올려 왕(王)에 봉하였다.

황시 2년(397년) 7월, 후연의 개봉공 모용상이 칭제하여 자립하고, 아직까지도 중산(中山)에 억류되어 있던 진왕 탁발고를 죽여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으려 하였다. 이후 오환족 장양(張驤)에게 무리 5,000여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가 식량을 구하게 하였다. 장양은 상산(常山)의 영수(靈壽)를 침략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해하였다. 이때 도망쳤던 조왕 모용린이 장양의 군대로 들어가 그 무리를 장악한 뒤, 다시 중산으로 들어가 모용상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탁발규는 노구(魯口)로 돌아가면서 중령장군 장손비에게 기병 1,000기를 주어 중산을 습격하게 하였고, 장손비는 그 외성까지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황시 2년(397년) 8월 1일[60], 탁발규는 노구에서 군대를 진격시켜 상산의 구문(九門)에 이르렀다. 이때 큰 전염병이 돌아 사람과 말, 소가 많이 죽었다. 탁발규가 여러 장수에게 전염병의 상황을 묻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살아남은 자가 겨우 열에 네다섯뿐입니다."
이때 중산은 여전히 항거하여 지키고 있었고, 기근과 전염병까지 한꺼번에 닥치자 신하들은 모두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탁발규가 그들의 뜻을 알고 말했다.
"이것은 본래 천명인데 장차 어찌하겠는가! 사해(四海)의 사람들은 모두 함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백성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어루만져 다스리느냐에 달렸을 뿐이니, 어찌 백성이 없을까 걱정하겠는가!"
그러자 여러 신하는 감히 다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무군대장군 · 약양공 탁발준을 보내 중산을 습격하게 하여 곡식과 채소를 베어 없애고 외성까지 들어갔다가 돌아오게 하였다.

황시 2년(397년) 9월, 모용린은 굶주림으로 궁지에 몰리자 30,000여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신시(新市)를 침략하였다. 탁발규가 갑자일인 9월 29일에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토벌하려 하니, 태사령 조숭이 아뢰었다.
"길하지 않습니다."
탁발규가 물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조숭이 대답하였다.
"옛날 주왕(紂王)이 갑자일(甲子日)에 망하였으므로 병법에서는 이날을 꺼립니다."
탁발규가 말했다.
"주왕이 갑자일에 망했다면, 주 무왕(周武王)은 갑자일에 승리한 것이 아니더냐?"
조숭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황시 2년(397년) 10월 2일[61], 탁발규가 군대를 진격시켜 신시(新市)에 이르자, 모용린은 물러나 파수(泒水)를 등지고, 점차 늪과 습지가 이어지는 지형에 의지하여 스스로 방어를 굳혔다.

황시 2년(397년) 10월 10일[62], 탁발규가 모용린의 진영에 이르러 의대오(義臺塢)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고, 9,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모용린은 홀로 말을 타고 서산(西山)으로 달아났다가 마침내 업(鄴)으로 가 후연의 범양왕 모용덕에게 의탁하였다.

10월 20일[63], 모용린이 임명했던 공경(公卿)·상서(尚書)·장수·관리와 병사 가운데 항복한 자가 모두 20,000여 명이었다. 그의 장수 장양, 이침, 모용문 등은 앞서 와서 항복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달아나 돌아갔는데, 그날 바로 다시 붙잡혔다. 그러나 탁발규가 그들을 모두 사면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또 그들이 바친 황제의 옥새, 도서(圖書), 부고(府庫)의 물자와 진귀한 보물을 얻었는데, 장부에 기록된 것이 수만에 이르렀다. 이에 공신과 장수 및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이로써 마침내 중산(中山)이 평정되었다.

10월 21일[64], 당초 위나라군은 의대에서 모용린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전투 중에 양성왕 탁발제가 유시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탁발규는 신속히 태의령 음광(陰光)에게 탁발제를 진찰하게 하였지만 이미 늦어 무슨 수를 써도 살릴 방도가 없었다. 결국 탁발제가 이날 사망하자, 탁발규는 음광이 제대로 진료하지 않아서 죽은 것이라 여기고 음광을 처형하였다.

10월 23일[65], 탁발규가 위왕 탁발의에게 다시 기병 30,000기를 주어 장차 업(鄴)을 공격하려 하였다.

황시 3년(398년) 정월, 업(鄴)을 지키던 후연의 범양왕 모용덕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활대(滑臺)를 지켰다. 위왕 탁발의는 업성을 함락하고 그 창고의 물자를 거두었으며, 탁발규는 조서를 내려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이어 탁발의가 모용덕을 추격하여 황하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정월 7일[66], 탁발규는 중산(中山)에서 출발하여 상산(常山)의 진정(真定)으로 행차하고, 조군(趙郡)의 고읍(高邑)에 머물렀다. 여기서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손자 왕헌을 만나고 기뻐하며 말했다.
"왕경략(王景略)의 손자로구나."
그리고는 왕헌을 청주중정(靑州中正)으로 삼았고, 아울러 선조(選曹)의 일을 맡겼으며, 문하성(門下省)의 업무도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 탁발규는 업(鄴)에 이르러 행대(行臺)를 설치하고, 용양장군 · 일남공 화발을 상서로 삼아 상서좌승 가이와 함께 관리와 병사 5,000여 명을 거느리고 업을 지키게 하였다. 여기서 행대란 설치된 지역에서 황제를 대행하여 그 일대의 정무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탁발규는 업에서 중산으로 돌아오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의 형편을 묻고 위로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대군이 지나간 주군(州郡)에서는 조세를 1년간 면제하고, 산동(山東) 백성의 조세와 부역은 절반을 감면하였다. 탁발규가 장차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병사 10,000명을 동원해 직도(直道)를 닦게 하였는데, 망도(望都)의 철관(鐵關)에서부터 항령(恆嶺)을 뚫어 대(代)까지 이어지는 길로, 그 길이가 500여 리에 달하였다. 탁발규는 자신이 돌아간 뒤 산동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중산에도 행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좌승상 · 수상서령 · 위왕 탁발의에게 중산을 지키게 하고, 무군대장군 · 약양공 탁발준에게 발해(勃海)의 합구(合口)를 지키게 하였다. 과연 후연 항장 출신인 우군장군 윤국은 앞서 기주(冀州)에서 조세 징수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탁발규가 장차 북쪽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반란을 꾀하여 신도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남장군 장손숭이 그를 붙잡아 탁발규에게 보내자, 탁발규는 그를 참수하였다.

정월 28일[67], 탁발규가 중산에서 출발하여 망도(望都)의 요산(堯山)에 이르렀다. 이때 산동의 여섯 주(州)의 백성과 관리, 그리고 도하(徒何), 고구려 등 여러 이민족 36만 명과 각종 기술을 지닌 장인 10여 만 명을 옮겨 수도를 채우게 하였다.

탁발규가 항산(恆山) 남쪽에 머무를 때, 박릉, 발해, 장무(章武)에서 여러 도적 무리가 동시에 일어나자 약양공 탁발준 등이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광천태수(廣川太守) 하뢰노가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보(王輔)를 죽이고 수비병들을 몰아 거느린 채 양평(陽平), 돈구(頓丘) 등 여러 군을 약탈하였다. 이어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남연의 모용덕에게 달아났다.

3.4. 북위의 초대 황제

3.4.1. 칭제

황시 3년(398년) 2월, 탁발규는 번치(繁畤)의 궁으로 행차하여 다시 주둔군과 숙위(宿衛)를 선발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내부로 이주시킨 새 백성들에게 경작할 소를 지급하고,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후 평성 동쪽 백등산(白登山)에서 사냥하였다.

탁발규가 대(代)로 돌아온 후, 이선을 상서 우중병랑으로 임명하였다. 탁발규가 이선에게 말했다.
"지금 연연(蠕蠕)이 자주 변경을 침범하고 있으니, 짐이 이를 토벌하고자 한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선이 대답하였다.
"연연(蠕蠕)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황막한 북방에 숨어 있으면서 자주 침략하여 변경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시고 위엄과 덕망이 멀리 떨치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신다면 반드시 섬멸할 것입니다."
이에 탁발규가 친히 북벌에 나서셨고, 유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이선은 노비 3명과 말, 소, 양 각각 50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황시 3년(398년) 3월, 이석(離石)의 호족(胡族) 수령 호연철(呼延鐵)과 서하(西河)의 호족 수령 장숭(張崇) 등이 탁발규의 이주 정책에 불만을 품고 무리 수천 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서를 내려 안남장군 유악을 보내 이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이후 어양(漁陽)의 여러 세력 가운데 고녹관도(庫傉官韜)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중견장군 이위에게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어 좌승상 탁발의를 불러 수도로 돌아오게 하고, 약양공 탁발준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여 중산(中山)을 지키게 하였다.

황시 3년(398년) 4월 1일[68], 약양공 탁발준의 봉작을 올려 상산왕(常山王)으로 삼고, 남안공 탁발순의 봉작을 올려 비릉왕(毗陵王)으로 삼았다. 또, 정로장군 · 역양공 목숭을 태위, 안남장군 · 거록공 장손숭을 사도로 임명하였다. 이어 탁발규가 서쪽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의장에 쓰는 깃발과 휘장의 격식을 더욱 높였다.

광평태수(廣平太守) · 요서공 탁발의열이 반역을 꾀하자 탁발규는 군(郡)에서 그를 사사하고, 그의 처자식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부성(鄜城)의 도각족 동강(董羌), 행성(杏城)의 노수호족 학노(郝奴), 하동(河東)의 촉(蜀) 사람 설유(薛榆), 저족 수령 부흥(苻興)이 각각 자기 종족을 거느리고 귀부하였다.

황시 3년(398년) 6월 16일[69], 담당 관청에 조서를 내려 국호를 논의하여 정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가 아뢰었다.
"옛날 주(周)·진(秦) 이전에는 대대로 자신들이 태어나 살아온 땅에 거주하면서 나라와 봉읍을 가지고 있었고, 천하의 왕이 된 뒤에도 그대로 그 이름을 이어 국호로 삼았습니다. 한(漢)나라 이후로는 제후를 없애고 지방관을 두어 대대로 계승하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하늘의 기운에 응하여 일어난 자들은 모두 한 자의 땅조차 기반으로 삼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만세토록 대대로 이어져 왔으며, 그 기틀을 연 곳은 대(代)였습니다. 신(臣)들은 국호를 오래도록 이어 갈 뜻을 취한다면 마땅히 '대(代)'를 국호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탁발규가 조서를 내렸다.
"옛날 짐의 먼 조상께서는 북방의 땅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를 제어하셨으나, 비록 왕위에 오르셨다 해도 아직 구주(九州)를 평정하지는 못하셨다. 짐에 이르러 백대의 말세에 처하여 천하가 분열되고 중화의 여러 나라에는 주인이 없게 되었다. 백성의 풍속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어루만져 다스리는 것은 덕(德)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짐이 몸소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중원(中原)을 평정하여 흉악한 역적들을 깨끗이 제거하니,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복종하였다. 마땅히 이전의 국호를 그대로 이어 '위(魏)'라 하겠다. 천하에 널리 알려 모두 짐의 뜻을 알게 하라."
신하들이 이를 따랐다.

황시 3년(398년) 7월, 운중에서 평성(平城)으로 천도하였다. 이때부터 궁실을 짓기 시작하고 종묘(宗廟)를 세우며 사직(社稷)을 설치하였다. 어양의 오환족 고녹관도가 다시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자, 조서를 내려 관군장군 왕건에게 토벌하게 하였고 마침내 평정하였다.

황시 3년(398년) 8월, 담당 관청에 조서를 내려 수도 주변의 봉기(封畿)를 바로 정하고 교전(郊甸)의 구역을 정하게 하였으며, 도로를 가지런히 정비하고 이정표를 세워 거리를 표시하게 하였다. 또한 다섯 가지 저울의 기준을 통일하고, 다섯 가지 용량을 교정하며, 다섯 가지 길이의 기준을 정하였다. 아울러 사신을 보내 여러 군국(郡國)을 순찰하게 하여 수령 가운데 법을 어기는 자를 적발해 아뢰게 하였고, 탁발규가 직접 이를 살펴 파면하거나 승진시켰다.

황시 3년(398년) 9월, 오환족 장수 장양의 아들 장초(張超)가 도망자들을 규합하여 3,000여 호의 무리를 모은 뒤, 발해의 남피(南皮)를 점거하고 스스로 정동대장군· 오환왕(烏桓王)을 칭하며 여러 고을을 약탈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안원장군 유악에게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황시 3년(398년) 10월, 천문전(天文殿)을 세웠다.

황시 3년(398년) 윤달 11월 23일[70], 조서를 내려 상서 이부낭중 등연에게 관제를 맡아 작위와 관품을 세우고, 궁중 음악의 가락을 정리하여 조화롭게 하게 하였다. 의조낭중 동밀(董謐)에게는 교외와 종묘, 사직의 제사, 조근(朝覲), 향연(饗宴)의 의례를 정하게 하고, 삼공낭중 왕덕(王德)에게는 율령을 정하고 법조문과 금령을 밝히게 하였다. 태사령 조령에게는 혼천의를 제작하여 천문 현상을 살피게 하였으며, 이부상서 최굉이 이 모든 일을 총괄하여 재정하게 하였다. 이날 좌승상 탁발의를 비롯해 여러 왕·공경·사대부가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아뢰었다.
"신(臣)들이 듣건대 신극(宸極)이 중앙에 자리하면 여러 별이 그 운행을 가지런히 하고, 제왕이 하늘의 뜻을 따르면 여러 제후가 그 법도를 우러러본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의 덕(德)은 천지와 조화를 이루고, 도(道)는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도 융성하며, 어진 풍습은 사해(四海)에 퍼지고 성대한 교화는 온 천하를 가득 채워, 그 혜택이 벌레에까지 미치고 은혜가 길가의 갈대에까지 젖어 들었습니다. 노래하며 칭송하는 백성이 모두 폐하께 마음을 두고, 팔방의 먼 곳까지 마음을 돌려 귀의하였습니다. 군대의 위엄이 미치는 곳마다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복종하였으며, 만백성이 간절히 우러러 모두 자신의 운명을 폐하께 맡기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몸소 겸허함을 지키시어 자신을 뒤로 물리고 계시니, 천자의 신의(宸儀)가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고, 복장도 정식으로 아직 갖추어 입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위로 황천(皇天)의 뜻에 부응하고 아래로 백성이 기꺼이 추대하는 마음에 보답하는 길이 아닙니다. 마땅히 성대한 공업을 더욱 빛내어 만세의 법도를 보여 주셔야 합니다. 신들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아룁니다."
탁발규는 세 차례 사양한 뒤에야 이를 허락하였다.

천흥 원년(398년) 12월 2일[71], 탁발규가 천문전에 임하여 황제를 칭하자, 태위 목숭과 사도 장손숭이 옥새와 인끈을 올렸고, 백관은 모두 만세를 외쳤다. 도무제 탁발규는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천흥(天興)'으로 고쳤다. 아울러 소성황제 탁발십익건 이하의 선대 군주들과 그 부인, 왕비들을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고 시호를 올렸다. 음악에는 「황시(皇始)」의 춤을 사용하였다. 이후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위나라가 오덕(五德) 운행에서 어느 차례에 해당하는지를 논의하여 정하게 하였다. 이에 상서 최굉 등이 아뢰어 토덕(土德)을 따르기로 하였으며, 복색은 황색을 숭상하고 수는 5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또, 조제(祖祭)는 미일(未日)에, 납제(臘祭)는 진일(辰日)에 지내며, 제물은 흰색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오교(五郊)에서는 계절의 기운에 맞추어 제사를 세우고 시령(時令)을 선포하여, 공경히 백성에게 농사철을 알려 주도록 하였으며, 역법은 하나라의 정월 체계를 따랐다.

6주(州) 22군(郡)의 수령과 호족, 관리, 백성 가운데 2,000여 호를 평성으로 이주시켰다.

3.4.2. 제2차 고차 정벌

천흥 2년(399년) 정월 7일[72], 탁발규가 처음으로 남교(南郊)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조(始祖) 신원황제(神元皇帝) 탁발역미를 배향하였다. 제단에서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것을 살펴본 뒤 의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정월 8일[73], 수도에 특별히 사면령을 내렸다. 이때 처음으로 삼가(三駕)의 제도를 정하였다.

정월 13일[74], 탁발규가 북쪽 지방을 순행하면서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나누어 고차를 대대적으로 습격하게 하였다. 대장군 · 상산왕 탁발준 등 세 군대는 동쪽 길을 따라 장천(長川)으로 나아갔고, 진북장군 · 고량왕 탁발낙진 등 일곱 군대는 서쪽 길을 따라 우천(牛川)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탁발규는 친히 육군(六軍)을 통솔하여 중앙의 길을 따라 박염수(駁髯水)에서 서북쪽으로 진군하였다.

천흥 2년(399년) 2월 1일[75], 여러 군대가 한곳에 모여 고차의 여러 종족 30여 부락을 격파하였고, 70,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30여만 필, 소와 양 140여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후 표기대장군 · 위왕 탁발의는 별도로 기병 30,000기를 지휘하여 서북쪽으로 사막 1,000여 리를 가로질러 나아가, 앞서 흩어져 달아났던 일곱 부락을 격파하여 20,000여 명을 사로잡고 말 50,000여 필, 소와 양 20여만 마리, 고거의 수레 20여만 승과 의복, 기물 등 여러 물품을 노획하였다. 탁발규는 돌아오는 길에 우천과 박산(薄山)에 이르러 모두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하였고, 종군한 신하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2월 24일[76], 유악이 발해에서 오환왕 장초를 격파하였다. 장초는 평원(平原)으로 달아났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탁발규는 사로잡은 고차 사람들을 동원하여 녹원(鹿苑)을 조성하였다. 남쪽으로는 대음(臺陰)에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장성(長城)에 닿으며, 동쪽으로는 백등(白登)을 감싸고 서쪽으로는 서산(西山)에 이어지게 하였는데, 사방의 규모가 수십 리에 달하였다. 또, 수로를 파서 무천(武川)의 물을 녹원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를 다시 세 갈래 도랑으로 나누어 궁성 안팎으로 흐르게 하였다. 또 홍안지(鴻雁池)를 팠다.

천흥 2년(399년) 3월 3일[77], 탁발규가 북방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3월 8일[78], 처음으로 《오경(五經)》을 비롯한 여러 서적마다 박사(博士)를 두게 하고, 국자태학(國子太學)의 학생 정원을 3,000명 늘렸다.

이달에 저족 사람 이변(李辯)이 남연의 모용덕에게 반란하고 업(鄴)의 행대상서 화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화발은 경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이에 호응하여 활대를 함락하고, 모용덕의 궁인(宮人)과 부고(府庫)의 재물을 거두었다. 또, 남연의 계림왕 모용진과 관리, 장수, 병사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탁발규는 화발을 재관장군으로 임명하고 정릉공(定陵公)으로 개봉하였다.

3월 20일[79], 건의장군 유진(庾真)과 월기교위 해근을 보내 태혼천(太渾川)에서 고적부(庫狄部)의 수령 엽역간(葉亦干)과 유련부(宥連部)의 수령 두우니(竇羽泥)를 토벌하게 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고적근지(庫狄勤支)의 아들 답역간(沓亦幹)은 자신의 부락을 거느리고 귀부하였다. 유진 등은 계속 진격하여 후막진부(侯莫陳部)를 격파하고 말·소·양 10여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어 흩어져 달아난 나머지 무리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 대아곡(大峨穀)으로 들어가 수자리를 설치하고 돌아갔다.

탁발규가 구유(仇儒)를 중산태수(中山太守)로 임명하자, 남쪽 외지로 부임하는 것을 원치 않던 구유는 달아나 조군(趙郡)에 숨어 있다가 여러 도적의 무리 가운데 조준(趙準)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조준은 사지절 · 정서대장군 · 기·청2주목(冀青二州牧) · 거록공(鉅鹿公)을 자칭하였고, 구유는 조준의 장사(長史)가 되어 무리를 모아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혹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중령군 장손비에게 토벌하게 하였고, 마침내 평정하였다.

3.4.3. 국가체제 정비

천흥 2년(399년) 4월, 전(前) 청하태수(清河太守) 부세(傅世)가 1,000여 호의 무리를 모아 반란하고 스스로 무군장군이라 칭하였다.

천흥 2년(399년) 5월 8일[80], 정로장군 유악이 부세를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천흥 2년(399년) 6월, 범양 사람 노부(盧溥)가 해안에서 무리를 모아 여러 군현을 공격하고 약탈하자, 후연의 소무제 모용성은 그를 사지절 · 정북대장군 ·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삼아 위나라의 변방을 어지럽히게 하였다.

천흥 2년(399년) 7월, 천화전(天華殿)을 건축을 시작하였다.

7월 7일[81], 녹원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고, 연회를 베풀어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이때 진군(陳郡)과 하남(河南)의 유민 10,000여 명이 위나라 내부로 이주해 오자, 사신을 보내 그들을 위문하고 노고를 치하하였다.

당시 요흥은 제공 요숭과 진동장군 양불숭을 보내 낙양(洛陽)을 포위하였는데, 동진의 하남태수 신공정은 성을 굳게 지켰고, 동진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전기가 위나라로 사람을 보내 낙양을 구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천흥 2년(399년) 8월, 태위 목숭에게 기병 60,000기를 거느리고 가서 낙양을 구원하게 하였다.

수도 평성에 열두 개의 성문을 더 설치하여 열고, 서무고(西武庫)를 지었으며, 주군(州郡) 백성의 조세와 부역을 절반 감면하였다.

후연의 유주자사 노부가 위나라의 유주자사 봉답간(封沓幹)을 죽였다.

8월 28일[82], 예관(禮官)에게 조서를 내려 여러 의례를 완비하여 정리하고, 새 율령에 기록하게 하였다.

후연의 요서태수(遼西太守) 이랑(李朗)이 요서군 전체를 들어 귀부하였다. 또, 서하(西河)의 호족(胡族) 수령 호낙어(護諾於), 정령(丁零)의 수령 적동(翟同), 촉인(蜀人)의 수령 한롱(韓礱)도 모두 서로 잇따라 무리를 거느리고 귀부하였다.

천흥 2년(399년) 10월, 태묘가 완성되자 신원황제, 평문황제, 소성황제, 헌명황제의 신주(神主)를 태묘로 옮겼다. 이달에 위나라군이 도착하기 전에 낙양이 함락되니, 탁발규는 목숭을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아 야왕(野王)에 주둔하게 하였다.

천흥 2년(399년) 12월 12일[83], 후연의 정로장군 · 연군태수(燕郡太守) 고호가 3,000호를 거느리고 위나라에 귀부하였다.

12월 29일[84], 재관장군 화발에게 노부를 토벌하게 하였다. 또, 이때에 이르러 천화전이 완성되었다.

천흥 3년(400년) 정월 7일[85], 화발이 요서(遼西)에서 노부를 격파하고, 노부와 그의 아들 노환(盧煥)을 생포하여 수도로 압송하였다. 탁발규는 이들 부자를 거열형에 처하였다. 후연의 소무제 모용성은 광위장군 맹광평(孟廣平)을 보내 노부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그전에 노부가 패배하니 요서태수 이랑을 공격해 무종(無終)에서 그를 죽였다.

정월 12일[86], 북교(北郊)에서 제사를 지냈다. 여러 관원에게 명령을 나누어 주군(州郡)을 순행하게 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피고 법을 어기는 자를 조사하여 적발하게 하였다. 또, 여러 신하에게 베와 비단을 각각 차등을 두어 내려 주었다.

천흥 3년(400년) 2월 6일[87], 담당 관청에 조서를 내려 동교(東郊)에서 해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시행하여 직접 밭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월 21일[88], 황자 탁발총(拓跋聰)이 세상을 떠났다.

천흥 3년(400년) 3월 8일[89], 좌승상 탁발의 등이 황후를 정할 것을 주청하니, 이전에 중산을 함락시키고 얻은 혜민제 모용보의 넷째 딸 모용씨를 황후로 세웠다.

이달에 성 남쪽에 수로를 파서 성 안까지 통하게 하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어지(魚池)를 만들었다.

천흥 3년(400년) 5월 19일[90], 알자복야 장제에게 조서를 내려 후진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5월 20일[91], 탁발규가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마침내 탁록(涿鹿)으로 행차하고, 사신을 보내 태뢰(太牢)의 제물로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어 서쪽으로 마읍에 행차하여 루원(灅源)을 살펴보았다.

천흥 3년(400년) 7월 4일[92], 탁발규가 궁궐로 돌아왔다. 이달에 중천전(中天殿)과 운모당(雲母堂), 금화실(金華室)을 지었다.

천흥 3년(400년) 11월, 고차 휘하의 부락 수령 칙력건(敕力犍)이 900여 부락을 거느리고 귀부하였다.

천흥 3년(400년) 12월 19일[93], 조서를 내렸다.
"세간에서는 한 고조(漢高祖)가 평민의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얻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 까닭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대저 유씨(劉氏)는 요(堯)의 혈통을 이어 아득한 세월 동안 그 덕을 계승하였기에, 뱀과 용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고 채색 구름의 감응이 나타났으며, 다섯 행성이 하늘에서 한곳에 모였다. 하늘과 사람이 모두 호응하였으니, 혁명하여 새 왕조를 열 군주는 큰 운수가 모이는 사람이지, 분수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바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도 미치고 교활한 무리가 거듭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그치지 않는 것은 실로 천하를 사슴으로 여겨 서로 쫓는 말에 미혹되고 천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앞서 뒤집힌 수레의 자취를 그대로 따르고 반역의 길을 밟는 자들이 생겼다. 해악이 심한 자는 주군(州郡)을 뒤엎고, 해악이 작은 자도 읍리(邑里)를 망가뜨렸다. 마침내 자신은 죽고 명성은 무너졌으며 재앙이 구족(九族)에까지 미쳤는데도, 난리에 휩쓸려 따라가 죽으면서도 뉘우치지 않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춘추(春秋)》에서는 '대일통(大一統)'을 아름답게 여겼다. 오(吳)와 초(楚)가 참람하게 왕호를 칭한 일에 대해서도 오래도록 꾸짖고 배척하였으며, 군자는 그 거짓 칭호를 천하게 여겨 먼지와 때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겼다. 성인(聖人)의 뒤를 이어 덕을 짊어지고 하늘과 사람의 뜻이 함께 모인 경우가 아니라면 제왕의 대업이 어찌 까닭 없이 응하여 이루어지겠는가? 고금의 일을 두루 살펴보면, 의롭지 못하면서 분수 넘어서는 자리를 탐한 자는 그저 집안을 보전할 길을 잃고 칼과 톱의 형벌에 처해졌을 뿐이다. 나라를 가진 자와 집안을 가진 자가 참으로 흥하고 망하는 것에는 정해진 때가 있음을 헤아리고, 천명은 쉽게 바뀌지 않음을 살피며, 징조와 감응이 은밀히 내려지는 것을 깨닫고, 서로 다투어 제위를 쫓으라는 사악한 말을 막으며, 간웅이 참람하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끊고, 만족할 줄 아는 데서 많은 복을 구한다면 거의 신명한 지혜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타고난 수명을 다할 때까지 영화와 녹봉을 보전할 수 있고, 남은 복을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면 어찌 까닭 없이 재앙과 반란이 생기겠으며, 군대와 전쟁이 어떤 이유로 일어나겠는가? 무릇 후세의 사람들은 힘쓰고 경계할지어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태사(太史)가 여러 차례 천문 현상이 어지럽다고 아뢰었다. 이에 탁발규는 직접 경전과 점서의 기록을 살펴보았는데, 그 가운데 왕조가 바뀌고 정사가 변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 관직의 명칭을 고쳤는데, 하나는 흉악하고 교활한 자들의 야심을 막으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앙의 징조를 없애고 변화에 대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탁발규는 신하들이 의혹을 품어 마음속으로 비방하고 속으로 그르다고 여길까 염려하였다. 이에 다시 조서를 내렸다.
"상고(上古)의 정치는 덕을 숭상하고 명예를 가볍게 여겨 맡은 직임은 있었지만 작위는 없었다. 그러므로 다스리기가 쉬웠고 일에는 질서가 있었으며, 사악한 모의는 잠잠하여 일어나지 않았고 간사한 일이 끊겨 생겨나지 않았다. 주(周)나라 희씨(姬氏)의 말기에 이르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면서 윗사람의 권위가 쇠퇴하였다. 사람들은 칭호로 스스로의 지위를 정하고 관직의 위치에 따라 녹봉을 정하였으며, 경(卿)은 그 관직을 세습하고 대부(大夫)는 제멋대로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밝은 덕은 펼쳐지지 못하고 정사의 논의마저 경이나 대부의 가신들에게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틈과 분쟁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전쟁 또한 여기에서 일어났다. 진(秦)·한(漢)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덕을 버리고 사치를 숭상하여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가 뒤섞이고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뒤엉켰으며, 여러 관직의 질서가 무너지고 직임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에 충성과 의리의 도(道)가 쇠퇴하고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절개가 사라졌으며, 겸양하는 풍속이 끊기고 남을 헐뜯거나 칭찬하여 명성을 다투는 풍조가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은 명예와 지위를 귀하게 여긴 데서 비롯되었고, 마침내 화와 패망이 뒤따랐다.

옛날 삼공(三公)을 설치한 것은 그 직무가 크고 책임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죄를 기다린다'고 말하였다. 이는 일을 맡기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우려는 것이지, 헛되이 총애하고 녹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 세속에서는 모두 대신의 자리를 영화롭고 귀한 것으로 여겨 우러러 바라며 얻기를 구한다. 대저 이런 관직은 임금이 누구에게 맡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을 쓰면 그 직임이 무거워지고, 쓰지 않으면 가벼워진다. 그렇다면 관직에는 반드시 고정된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맡겨진 직임에는 정해진 분수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어찌 삼공의 헛된 이름을 취할 필요가 있겠는가? 걸(桀)과 주(紂)가 남면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았던 것은 비록 지위가 높았어도 천하게 여길 만하고, 희단(姬旦)이 신하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비록 지위가 낮았어도 귀하게 여길 만하다.

하나의 관직에 있으면서도 지혜를 펼칠 수 있고, 가난한 집에 살면서도 세상에 모범을 남길 수 있다. 진실로 도덕을 실질로 삼는다면 높은 직책을 맡고도 감당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고 집안을 어둡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는 자는 끝을 훌륭히 맺어 의리를 온전히 하고, 이익에 눈이 먼 자는 몸이 화에 빠지고 이름까지 사라진다. 이익과 명예는 헐뜯음과 칭찬을 다투는 데서 생기는 흠이고, 도와 덕은 신명한 식견을 지닌 자가 집안의 보배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의(道義)는 정치의 근본이고, 명예와 작위는 정치의 말단이다. 명예가 도에 근본을 두지 않는다면 합당하다고 할 수 없고, 작위가 시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를 계속 사용하고 금하지 않는다면 병폐가 깊어질 것이다. 그 변화에 통달하면서도 올바른 도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참으로 성패(成敗)의 이치를 생각하고 치란(治亂)의 원인을 살피며, 은(殷)·주(周)의 잘못을 거울로 삼고 진(秦)·한(漢)의 폐단을 고친다면, 거의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의조랑 동밀이 복약하여 신선이 되는 법을 적은 선경(仙經)을 바치자, 탁발규는 선인박사(仙人博士)를 두고 선방(仙坊)을 설치하여 온갖 약물을 달이고 제련하게 하였다. 또 서산(西山)을 봉하여 그곳에서 땔나무를 공급하게 하였다. 약이 완성되자 사형수들에게 시험 삼아 먹게 하였는데, 많은 사람이 죽기만 할 뿐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탁발규는 여전히 이를 믿어 신선술을 계속 찾아 구하였다.

탁발규는 후연의 성무제 모용수가 여러 아들에게 요충지를 나누어 맡겨 권력이 아래로 옮겨 가게 하였고, 결국 그 때문에 패망에 이르렀다고 여겨 이를 매우 잘못된 일로 보았다. 이때 박사 공손표가 탁발규의 뜻에 영합하여 『한비서(韓非書)』를 올리고, 탁발규에게 법과 제도로 신하들을 통제할 것을 권하였다. 마침 좌장군 이율은 성품이 소탈하고 거만하였는데, 그는 늘 탁발규를 대할 때에도 태도가 느슨하고 거리낌이 없어 엄숙하지 않았으며, 기침을 하거나 침을 뱉는 것도 제멋대로 하였다. 탁발규는 그가 이전부터 저질러 온 잘못들을 쌓아 두었다가 마침내 법을 내세워 그를 주살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는 크게 두려워 떨었다. 이때로부터 탁발규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 점차 도리에 어긋나고 포악해졌다.

천흥 4년(401년) 정월, 고차의 별부 수령이 자신의 부락 3,000여 호를 거느리고 위나라에 귀부하였다.

천흥 4년(401년) 2월 12일[94], 악사(樂師)들에게 학교에 들어가 춤을 익히게 하고,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석채례(釋菜禮)를 올렸다.

2월 22일[95], 사신들에게 명을 나누어 여러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송사를 듣고 살피며, 법을 어긴 자를 규찰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천흥 4년(401년) 3월, 탁발규가 직접 물고기를 잡아 침묘(寢廟)에 올렸다.

천흥 4년(401년) 4월 17일[96], 탁발규가 업(鄴)의 행대(行臺)를 폐지하고, 통치하던 6군(郡)에 상주(相州) 설치하였으며, 유악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또, 담당 관청에 조서를 내려 숨어 지내는 은거하는 선비들을 널리 찾아 천거하게 하였다.

천흥 4년(401년) 5월, 자극전(紫極殿), 현무루(玄武樓), 양풍관(涼風觀), 석지(石池), 녹원대(鹿苑臺)를 세웠다.

천흥 4년(401년) 7월, 진원장군 · 연주자사(兗州刺史) 장손비에게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나아가 허창(許昌)과 팽성(彭城) 일대를 순행하며 복속시키게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천하 각지의 진(鎭)과 수자리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베와 비단을 각각 차등을 두어 내려 주었다.

천흥 4년(401년) 12월 11일[97], 정서대장군 · 상산왕 탁발준, 정릉공 화발 등에게 조서를 내려 병력 50,000명을 거느리고 선비족 다란부(多蘭部)의 수령 몰혁간을 토벌하여 격파하게 하였다. 이어 재관장군 화돌이 기병 6,000기를 거느리고 출불부(黜弗部), 소고연부(素古延部) 등 여러 부락을 습격하였다.

12월 15일[98], 위호장군 숙답간(宿沓干)이 영지(令支)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곳에 수자리를 설치하였다.

이해에 탁발규는 박사와 유생을 모아 여러 경전의 글자들을 서로 대조하고, 뜻과 종류가 서로 같은 것끼리 분류하였다. 모두 4만여 자에 이르렀으며, 이를 『중문경(眾文經)』이라 이름하였다.

3.4.4. 후진과의 충돌

천흥 5년(402년) 정월 8일[99], 후연의 소문제 모용희가 중루장군 모용발(慕容拔)을 보내 요서를 침략하게 하였다. 위호장군 숙답간 등이 맞서 싸웠으나 불리해지자, 영지(令支)를 버리고 달아났고 요서태수 나힐(那頡)은 사로잡혔다.

정월 19일[100], 재관장군 화돌이 출불부, 소고연부 등 여러 부락을 격파하고 말 3,000여 필과 소·양 70,000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정월 21일[101], 탁발규가 후진이 장차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와 수레를 대대적으로 징발하였다. 또 병주(幷州)의 여러 군대에 조서를 내려 평양(平陽)의 건벽(乾壁)에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다.

정월 22일[102], 유연의 욱구려사륜은 후진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는데, 기병을 보내 소고연부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화돌은 산남(山南)의 하곡(河曲)에서 이를 영격하여 격파하고, 개마(鎧馬) 2,000필을 노획하였다. 이후 화돌이 군대를 돌려 귀환하니, 탁발규는 공을 세운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천흥 5년(402년) 2월 14일[103], 정서대장군 · 상산왕 탁발준 등이 안정(安定)의 고평(高平)에 이르자, 몰혁간은 수천 기를 거느리고 이전에 탁발규가 놓쳤던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과 함께 근거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탁발준 등은 농서(隴西)의 와정(瓦亭)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그들의 치중과 창고의 물자를 노획하였는데, 말이 40,000여 필, 낙타와 야크가 3,000여 마리, 소와 양이 90,000여 마리에 이르렀다. 탁발규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고, 그 백성을 수도로 옮겼다.

천흥 5년(402년) 4월, 승려 장교(張翹)가 스스로 무상왕(無上王)이라 칭하고, 정령족 선우차보(鮮于次保)와 함께 무리를 모아 상산(常山)의 행당(行唐)에서 거병하자, 상산태수 누복련이 이들을 토벌하여 참수하였다.

천흥 5년(402년) 5월, 후진의 천왕 요흥이 아우 안북장군 · 의양공 요평(姚平)에게 군사 40,000명을 거느리고 침입하게 하였고, 평양의 건벽이 요평에게 함락되었다.

천흥 5년(402년) 6월, 탁발규가 동쪽 교외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여러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이어 진서대장군 · 비릉왕 탁발순, 장손비 등 세 장수에게 조서를 내려 기병 60,000기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였다.

천흥 5년(402년) 7월 1일[104], 탁발규가 직접 서쪽으로 출정하였다.

천흥 5년(402년) 8월, 요평의 군대가 영안(永安)에 이르렀다. 요평은 용맹한 장수를 뽑아 정예 기병 200기를 거느리고 위나라군 선봉의 허실을 정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손비가 이들을 영격하여 모두 사로잡았고 말 한 필조차 돌아오지 못하니, 요평은 마침내 퇴각하여 달아났다.

8월 9일[105], 탁발규가 시벽(柴壁)에 이르러 요평을 따라잡으니, 요평은 시벽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시벽을 포위하자, 천왕 요흥은 자신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구원하려 하였고, 아울러 천도(天渡)를 점거하여 군량을 운송하고 요평에게 보급할 계획이었다. 탁발규는 요흥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상서 우병중랑 이선에게 물었다.
"요흥은 천도(天渡)에 주둔하고 요평은 시벽(柴壁)을 점거하여 서로 안팎에서 호응하려 한다. 이제 이들을 섬멸하려 하는데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이선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로 군대는 정면으로 맞붙되, 전쟁에서는 기이한 책략을 써서 승리한다고 하였습니다. 듣건대 요흥은 천도(天渡)에 병력을 주둔시켜 군량 수송로로 이용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별동대를 보내 우리가 천도를 먼저 점령하고, 시벽(柴壁) 주변에는 곳곳에 복병을 엄중히 배치하여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폐하께서 신묘한 계책으로 시기를 살펴 움직이시면 됩니다. 이리하면 요흥은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수 없고, 물러나려 해도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적은 높은 곳에 의지하고, 깊은 곳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는 병법에서 꺼리는 것인데, 지금 진(秦)군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탁발규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이에 포위망을 여러 겹으로 더 쌓아 안으로는 요평이 빠져나오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요흥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때 광무장군 안동이 아뢰었다.
"분수(汾水) 동쪽에는 몽갱(蒙坑)이 있는데, 동서로 300여 리에 걸쳐 있고 길도 제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흥이 온다면 반드시 분수 서쪽을 따라 곧장 시벽(柴壁)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적군의 기세가 서로 연결되어, 아무리 포위망이 견고하다 하더라도 제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부교를 놓아 분수를 건넌 뒤 서쪽 강안에 진지를 구축하여 막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적이 와도 그 지략과 기세를 펼칠 곳이 없을 것입니다."
탁발규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분수(汾水)가 굽이치는 곳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부교를 놓고, 서쪽 강안을 따라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위나라군이 포위망을 견고히 하는 동안 요흥은 포판(蒲阪)에 이르렀으나, 위나라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비로소 진군하였다.

8월 28일[106], 탁발규는 친히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몽갱(蒙坑)을 통과해 남쪽으로 40리 나아가 요흥을 요격하였다. 요흥의 군대는 아침부터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아직 진영을 설치하지도 못했는데, 탁발규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두려움에 빠져 크게 동요하였다. 탁발규는 비릉왕 탁발순에게 정예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게 하여 요흥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요흥의 중장기병 수백 기를 사로잡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요흥은 남쪽으로 40여 리 퇴각하여 달아났고, 위나라군도 병력을 거두어 돌아갔다. 요평 역시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단지 사람을 보내 위나라군이 포위망에 세워둔 목책 수백 보 가량을 불태웠을 뿐이었다.

요흥이 패주한 이래로 탁발규는 후진군의 기세가 이미 꺾였음을 알고 곧바로 병력을 나누어 네 곳의 요충지를 장악하였다. 남쪽으로는 몽갱 입구를 차단하고, 동쪽으로는 신판(新阪)의 험로를 봉쇄하였으며, 천도와 가산(賈山)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그리하여 요평의 육로와 수로를 모두 끊고, 갑옷을 입은 채 기다리기만 해도 그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또 분수를 따라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목책을 수십 리 가량 늘여세워 꼴을 수집하기 위해 풀을 베러 나가는 병사들을 보호하였다. 이로써 요평은 시벽 외곽으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천흥 5년(402년) 9월, 요흥은 분수 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 주둔하고, 골짜기에 의지하여 보루를 쌓아 스스로를 굳게 지키려 하였다. 또 기병 수천 기를 보내 서쪽 강안을 따라 위나라군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탁발규는 요흥이 반드시 서쪽 포위망을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참호를 보수하여 더욱 넓히도록 명하였다. 과연 밤이 되자 요흥이 서쪽 포위망을 공격하였는데, 사다리가 짧아 보루에 닿지 않자 이를 참호 속에 버리고 돌아갔다. 이후 요흥은 병력을 나누어 분수에 바짝 붙여서 보루를 세워 수문(水門)을 압박하고, 시벽의 요평과 서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이에 위나라군이 수로 가운데를 끊어 버리자, 요흥과 요평의 안팎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다시 꺾였다.

천흥 5년(402년) 10월, 요평은 군량이 모두 떨어지고 화살도 바닥나 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이에 밤을 틈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서남쪽 포위망을 돌파하여 탈출하려 하였다. 요흥은 분수 서쪽에 병력을 늘어세우고 봉화를 올리는 한편,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요평을 지원하였다. 탁발규는 여러 군대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분수 서쪽에 주둔시키고, 남쪽의 다리를 굳게 지키게 하였으며, 물길의 입구도 완전히 차단하였다. 요흥은 밤에 전투 소리를 듣고 요평이 힘껏 싸워 포위망을 돌파하여 빠져나오기를 기대하였다. 요평 역시 밖에서 북소리가 들리자 요흥이 포위망을 공격해 자신을 끌어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요흥의 군대는 그저 소리만 지르며 겉으로 서로 호응하는 시늉을 할 뿐, 아무도 감히 위나라군의 포위망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결국 탈출에 실패한 요평은 계책도 다하고 힘도 다하자, 두 첩과 휘하 기병 30기를 거느리고 분수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때 후진의 안원장군 불몽세(不蒙世), 양위장군 뇌중(雷重) 등을 비롯한 장병 4,000여 명도 대부분 요평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다. 탁발규가 헤엄을 잘 치는 자들을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갈고리로 이들을 붙잡게 하였으나, 모두 익사하여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나머지 요평의 군사 30,000명은 모두 저항을 포기하고 손을 모아 결박당했다.

탁발규는 상서우복야 적백지(狄伯支), 월기교위 당소방(唐小方), 적노장군 요양국(姚梁國), 건충장군 뇌성(雷星)과 강관(康官), 북중랑장 강외(康猥), 요평의 사촌동생 요백금(姚伯禽) 이하 4품 장군 이상 40여 명을 사로잡았다. 앞서 후진으로 달아났던 장수 왕차다와 근근(靳勤)도 붙잡아 모두 참수하고 그 머리를 여러 사람에게 돌려 보였다. 탁발규는 곧장 승세를 타고 포판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는데, 후진의 진공 요서는 성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연의 욱구려사륜이 후환이 될까 두려워 군대를 거두어 물러났다. 이후로 요흥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탁발규는 허락하지 않았다.

천흥 5년(402년) 11월, 탁발규가 진양(晉陽)에 머물렀다. 그리고 상주자사 유악을 불러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11월 12일[107], 좌장군 막제를 보내 상당(上黨)의 도적 진파(秦頗)와 정령족 적도(翟都)를 호관(壺關)에서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상당태수가 진파를 붙잡아 참수하니, 적도는 임려(林慮)로 달아났다.

천흥 5년(402년) 12월, 탁발규가 서쪽 정벌을 마치고 운중(雲中)에 도착하였다.

당시 유연의 욱구려사륜은 탁발규가 정벌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변경의 요새를 침범하였다. 유연군은 참합피(參合陂)로 들어와 남쪽으로 시산(豺山)과 선무(善無) 북쪽의 못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탁발규는 조서를 내려 상산왕 탁발준에게 기병 10,000기로 추격하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해에 월근막불(越勤莫弗)이 자신의 부락 10,000여 호를 거느리고 귀부하여 오원 북쪽에 거주하게 하였다.

천흥 6년(403년) 정월 2일[108], 삭방(朔方)의 울지부(尉遲部) 수령이 10,000여 호를 거느리고 귀부하여 운중에 들어와 거주하게 하였다.

천흥 6년(403년) 5월, 탁발규는 대대적으로 병력과 수레를 선발하여 장차 강회(江淮) 지역을 공략하고 동진을 평정할 생각을 품었다.

천흥 6년(403년) 7월, 비릉왕 탁발순이 죄를 지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왕의 작위만 유지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7월 27일[109], 탁발규가 북쪽 지방을 순행하여 시산(犲山)에 이궁(離宮)을 짓고 병사들을 풀어 사냥하게 하였다. 이어 동북쪽으로 계령(罽嶺)을 넘어 참합과 대곡(代谷) 사이로 나왔다. 탁발규는 평소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평원태수 화발을 미워했는데, 도착한 김에 체포하고 수도로 돌아가 처형하였다.

천흥 6년(403년) 9월, 탁발규가 남평성(南平城)으로 행차하여 루남(灅南) 일대의 지세를 살펴 규모를 정하였는데, 하옥산(夏屋山)을 앞에 두고 황과퇴(黃瓜堆)를 등진 곳에 새 도읍을 건설하려 하였다.

9월 11일[110], 탁발규가 궁으로 돌아왔다.

천흥 6년(403년) 10월, 서쪽에 소양전(昭陽殿)을 세웠다.

10월 25일[111], 황자 탁발사를 제왕(齊王)에 봉하고, 거기대장군을 더하여 지위는 상국(相國)에 이르게 하였다. 또, 탁발소를 청하왕(清河王)에 봉하고 정남대장군을 더하였으며, 탁발희를 양평왕(陽平王), 탁발요를 하남왕(河南王)에 봉하였다. 죽은 진민왕 탁발고의 아들 탁발기(拓跋夔)를 예장왕(豫章王)에 봉하고, 진류왕 탁발건의 아들로 우장군이던 탁발열을 주제왕(朱提王)에 봉하였다.

10월 27일[112], 장군 이위에게 조서를 내려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고차의 원흘부와 오빈부(烏頻部)를 습격하게 하였다.

천흥 6년(403년) 11월 11일[113], 이위가 원흘부와 오빈부를 크게 격파하였다.

3.4.5. 관제 개편

천흥 7년(404년) 정월, 이석호군 유탁(劉托)을 보내 기병 3,000기를 거느리고 포자(蒲子)를 습격하게 하였다.

천흥 7년(404년) 3월 9일[114], 유탁은 후진의 태평태수(泰平太守) 형담(衡譚)을 사로잡고,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달에 처음으로 현(縣)의 호수가 100호에 미치지 못하면 그 현을 폐지하도록 기준을 정하였다.

천흥 7년(404년) 4월, 상서 낭중 공손표에게 조서를 내려 강남(江南)에 사신으로 보내 환현의 틈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환현이 마침 패망하여 돌아왔다. 이때 유연의 욱구려사륜의 사촌동생 욱구려열벌(鬱久閭悅伐)과 욱구려대나(鬱久閭大那) 등이 욱구려사륜을 죽이고 욱구려대나를 세우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위나라로 달아나 귀부하였다. 탁발규는 욱구려열벌을 관군장군 · 서평후(西平侯), 욱구려대나를 월기교위 · 역영자(易陽子)로 각각 삼았다.

천흥 7년(404년) 5월, 산동(山東) 각지에 야금소를 설치하고 여러 주군(州郡)의 죄수와 유배형을 받은 자들을 징발하여 무기와 갑옷을 만들게 하였다.

천흥 7년(404년) 6월, 탁발규가 소양전에 임하여 백관을 개편하고 보충하였다. 조정의 문무 신하들을 불러 직접 인재를 선발하고, 각자의 재능에 따라 직임을 맡겼다. 작위는 네 등급으로 나누어, 왕(王)은 큰 군(郡)을 봉읍으로 받고, 공(公)은 작은 군을, 후(侯)는 큰 현(縣)을, 백(伯)은 작은 현을 봉읍으로 받았다. 그 품등은 1품에서 4품까지였다. 옛 신하 가운데 공이 있으면서도 작위가 없는 자에게는 추후에 봉작을 내렸고, 종실 가운데 혈연이 먼 자와 이성(異姓)으로서 작위를 세습한 자는 각각 차등을 두어 작위를 낮추었다. 또 산관(散官)을 다섯 등급으로 두었는데, 그 품등은 5품에서 9품까지였다. 문관 가운데 조예가 깊고 재능이 뛰어난 자와 무관 가운데 장수가 될 만한 자도 그 품등을 5품에서 9품에 견주어 정하였는데, 백관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이들 가운데서 뽑아 보충하였다. 관직의 명칭은 한(漢)·위(魏)의 옛 제도를 사용하지 않고, 상고시대의 용관(龍官)과 조관(鳥官)을 본떠 정하였다. 예를 들어 여러 조(曹)에서 심부름을 담당하는 사람을 '부압(鳧鴨)'이라 불렀는데, 이는 물오리가 빠르게 날아다니는 점을 취한 것이었다. 후관(候官)으로서 동정을 엿보고 살피는 자는 백로(白鷺)라고 불렀는데, 백로가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취한 것이었다. 그 밖의 관직 명칭도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하였다.

천사 원년(404년) 10월 28일[115],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천사(天賜)'로 고쳤다. 또, 서궁(西宮)을 건설하였다.

천사 원년(404년) 11월, 탁발규가 서궁에 행차하여 조정 신하들을 대대적으로 선발하였다. 각자 자신의 종족과 친당(親黨)을 분명히 밝히고, 재능과 행실이 있는 사람을 보증하여 천거하게 하였다. 여러 부락의 자손 가운데 본래의 직위를 잃었던 자들에게 작위를 내렸는데, 이때 작위에 얻은 사람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천사 원년(404년) 12월 16일[116], 탁발규가 시산궁(犲山宮)에 행차하였다.

천사 2년(405년) 2월 11일[117], 탁발규가 시산궁에서 돌아와 상서성의 36조(曹)를 폐지하였다.

3.4.6. 부락 해산

탁발규는 이른바 부락 해산이라 불리는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부락은 선비족의 유목적 단위를 한자로 통칭하는 것으로, '추장'이나 '대인'과 같은 유목적 지도자가 이끌고 있었다. 탁발규는 이런 부락을 해산하고자 했는데, 유목적 질서를 해산하고, 중앙집권제를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대인과 같은 지도자들은 황제의 관료로 편입되었으며, 유목적 권위가 아니라 황제에 의한 임명에서 권위가 나오도록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부락 해산은 잘 실시되지 못했다. 유목민들은 성이 없고 이름만으로 불렸는데, 한족 역사가들은 필요에 따라 그들의 부족명을 성처럼 기록했다. 예를 들면 탁발규는 '탁발 부족의 규'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규'는 한화된 이름으로 선비족 이름은 따로 존재한다. 이는 탁발규의 부락 해산 이후에도 부락은 해산되지 않았고, 부족의 성으로 남아 부락의 지도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란부나 우문부 등 유목적 부락은 여전히 건재했고, 북위의 귀족으로서의 자리까지 잡아가고 있었다. 비록 명문상 부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들 북위의 귀족들은 여전히 부락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북위 조정은 부락을 파괴해 그 정체성을 희미하게 만든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북위의 귀족으로서 자리잡게 했고, 이는 북위가 멸망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또한 선비족 외 다른 부족에게는 부락 해산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이에 북위가 굳이 부락 해산을 강요할 정도로 다른 종족의 힘이 강하지 않았다는 견해와 북위의 힘이 부족해 타 부족에게까지 부락 해산을 강요하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다. 어찌 되었든 훗날 해산당하지 않은 선비계 글호족의 추장 이주영이 육진의 난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해 북위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3.4.7. 토목공사

천사 2년(405년) 4월, 탁발규가 서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수레와 깃발을 모두 검은색으로 하였다.

천사 2년(405년) 5월, 동진의 북청주자사(北青州刺史) 유해(劉該)가 동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위나라를 끌어들여 원군으로 삼으니, 동진의 청하·양평2군태수(清河陽平二郡太守) 손전(孫全)이 무리를 모아 이에 호응하였다.

천사 2년(405년) 6월, 예주자사(豫州刺史) 색도진(索度真)과 대장 곡사란(斛斯蘭)이 서주(徐州)를 침공하여 팽성(彭城)을 포위하였다. 동진의 시중 유유는 아우인 남팽성내사 유도련, 동해태수(東海太守) 맹용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유도련 등은 위나라군을 격파해 패주시켰고, 유해와 손전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천사 3년(406년) 정월 8일[118], 탁발규가 북쪽 지방을 순행하여 시산궁에 다시 행차하고, 사냥을 벌이며 옥고산(屋孤山)에 이르렀다. 이때 여러 주(州)에는 자사(刺史)를 각각 세 명씩 두고, 군(郡)에는 태수(太守)를 각각 세 명씩 두며, 현(縣)에는 현령·현장을 각각 세 명씩 두었다. 자사와 현령·현장은 각각 자신이 맡은 주와 현으로 부임하였고, 태수는 비록 두었으나 아직 직접 백성을 다스리게 하지는 않았다. 아울러 공신 가운데 주의 장관을 맡고 있던 자들은 모두 수도로 불러들여, 작위만 지닌 채 사저로 돌아가게 하였다.

천사 3년(406년) 2월 29일[119], 탁발규가 대원산(代園山)에 행차하여 오석정(五石亭)을 세웠다.

천사 3년(406년) 3월 25일[120], 탁발규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천사 3년(406년) 4월 15일[121], 탁발규가 다시 시산궁에 행차하였다. 이때 점술에 능한 왕의제(王宜弟)를 저작랑으로 삼아 『병법고허입성도(兵法孤虛立成圖)』의 360시(時)를 만들게 하였다. 이어 정양(定襄)의 각사산(角史山)에 올랐고, 또 마성(馬城)에 행차하였다.

4월 29일[122], 탁발규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이달에 유연이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에 밤중에 군사를 소집하였으나, 날이 밝으려 할 무렵 적이 달아났으므로 군사를 해산하였다.

천사 3년(406년) 6월, 팔부(八部)와 그 주위 500리 안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루남궁(灅南宮)을 건설하였다. 궁의 문과 누각은 높이가 10여 장(丈)에 이르렀고, 도랑을 끌어들여 연못을 파며 원유(苑囿)를 넓혔다. 또 평성에 외성(外城)을 세울 계획을 세웠는데, 사방 20리 규모로 하고 시장과 거주 구역을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큰길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6월 30일에 공사를 중단하였다.

천사 3년(406년) 7월, 태위 목숭이 사망하였다.

천사 3년(406년) 8월 1일[123], 탁발규가 시산궁에 행차하고 이어 청우산(青牛山)에 이르렀다.

8월 13일[124], 서쪽으로 무요(武要)의 북원(北原)에 올라 구십구천(九十九泉)을 살펴보고 석정(石亭)을 세운 뒤, 이어 석막(石漠)으로 갔다.

천사 3년(406년) 9월 1일[125], 탁발규가 막남(漠南)의 염지(鹽池)에 행차하였다.

9월 9일[126],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 천염지(天鹽池)를 살펴보았다. 이후 사막을 건너 북쪽의 토염지(吐鹽池)로 갔다.

9월 20일[127], 남쪽으로 돌아 장천(長川)에 이르렀다.

9월 23일[128], 장피(長陂)에 임하여 살펴보았다.

천사 3년(406년) 10월 18일[129], 탁발규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천사 4년(407년) 2월, 황자 탁발수를 하간왕(河間王), 탁발처문을 장락왕(長樂王), 탁발련을 광평왕(廣平王), 탁발려를 경조왕(京兆王)에 봉하였다.

천사 4년(407년) 5월, 탁발규가 북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참합피에서 동쪽으로 반양산을 지나다가 큰비를 만났는데, 갑자기 불어난 물이 치중 수백 승을 휩쓸어 100여 명이 죽었다. 이어 동북쪽으로 석막(石漠)을 넘어 장천(長川)에 이르렀고, 유원(濡源)에 행차하였다. 상산왕 탁발준은 본래 술을 좋아하였는데, 탁발규를 수행하여 유원에 이르렀을 때, 술자리에서 탁발규의 딸인 태원공주(太原公主)에게 실례를 범하자 탁발규가 그를 사사하였다.

이달에 시벽 전투에서 사로잡았던 후진의 포로를 이전에 후진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당한 하적간과 교환하였다.

천사 4년(407년) 6월, 드디어 하적간이 억류에서 풀려 귀국하였는데, 탁발규는 그가 말과 의복에서 강족의 풍속을 따른 듯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탁발규는 오랜만에 보는 하적간의 모습이 마치 그가 강족의 문화를 흠모하여 습득한 것으로 오해하고 분노하여 결국 그를 처형하였다. 하적간의 동생 하적귀(賀狄歸)도 강직하고 정직하며 품행이 단정한 인물이었으나, 형 하적간이 처형당할 때 연좌되어 같이 처형당했다.

천사 4년(407년) 7월, 탁발규가 유원에서 서쪽으로 참합피에 갔다. 이어 북궁(北宮)의 담장을 쌓다가 30일 만에 공사를 중지하고, 곧 평성으로 돌아왔다.

천사 4년(407년) 8월, 탁발규가 또 시산궁으로 갔다. 이때 후관(候官)이 고발하기를, "사공 유악은 의복과 장식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행동거지와 풍채가 임금을 본받고 있습니다."라 하니, 탁발규는 유악을 체포하여 죽였다.

천사 4년(407년) 11월, 탁발규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천사 5년(408년) 정월, 탁발규가 다시 시산궁으로 행차하고, 이어 참합피로 갔다. 이후 연수(延水)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하고 영천(寧川)에 이르렀다.

천사 5년(408년) 12월, 처음에 숙부 탁발굴돌이 탁발규를 공격했을 때, 고읍공 막제는 탁발규가 나이가 어리다고 여겨, 몰래 화살을 탁발굴돌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세 살짜리 송아지가 어찌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탁발규는 이 일을 마음속에 원한으로 품고 있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막제의 평소 거처와 행동이 오만하여 임금을 본뜨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탁발규는 사람을 시켜 그 화살을 막제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였다.
"세 살짜리 송아지는 과연 어떠하더냐?"
막제 부자는 서로 마주 보며 울었고, 바로 다음날 아침에 탁발규는 막제 부자를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3.5. 말년

천사 6년(409년) 3월, 항산(恆山)이 무너졌다.

천사 6년(409년) 4월, 벼락이 천안전(天安殿)의 동쪽 담장을 쳤다. 탁발규는 이를 불길하게 여겨 좌교(左校)에게 명하여 충차(衝車)로 동쪽과 서쪽 담장을 들이받게 하였고, 마침내 모두 허물어 버렸다.

탁발규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보잘 것 없는 세력이었던 북위를 화북 최강의 세력으로 키워놓았으나, 말년에는 심한 폭정을 일삼았다. 이는 선경 연구를 시작하고 한식산(寒食散)을 복용하면서 얻은 부작용 때문이었다. 한식산은 다섯 종류의 중금속과 광물을 섞은 마약의 일종으로 오석산(五石散)이라고도 불린다. 한식산은 복용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심신을 안정시켜 주며 환각을 체험할 수 있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독성이 있어 건강에는 매우 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식산은 위진 시대 이래로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보약으로 알려져 왔다. 한식산을 보약으로 복용해왔던 탁발규는 말년에 들어 심신이 크게 피폐해져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130]

탁발규는 태의령 음강(陰羌)이 죽은 뒤부터 약기운이 자주 발작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재앙과 변고의 징조가 거듭 나타나자 근심과 번민으로 불안해하여, 때로는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고 때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책임을 여러 신하에게 돌려 주살하였으며,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리가 불안정하였다. 탁발규는 그의 백관과 측근들조차 믿을 수 없다고 여기고, 천문(天文)의 점괘가 말하는 것처럼 혹 가까운 측근에게서 변고가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지난날의 성공과 실패, 득실을 되짚어 생각하며 온종일 밤새도록 혼잣말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곁에 귀신이 있어 서로 응답하며 이야기하는 듯하였다. 조정 신하가 앞에 나오면 그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들추어내어 모두 죽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얼굴빛이 조금 변하거나, 숨 쉬는 것이 고르지 못하거나, 걸음걸이가 평소와 어긋나거나, 신하가 말하다가 실수하기만 해도 탁발규는 모두 그가 마음속에 악의를 품고 있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 여겼다. 이에 직접 신하를 손으로 구타하여 죽였으며,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모두 천안전 앞에 늘어놓아 전시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과 민간의 사람들은 저마다 위태로움과 두려움을 품었다. 담당 관리들은 태만해져 서로 감독하고 통제하지 않았고, 여러 장인과 백성들은 거리낌없이 훔치고 약탈하였으며, 도적들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녔다. 골목과 마을에는 사람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탁발규는 이를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
"짐이 일부러 내버려 두어 이렇게 되도록 한 것이다. 재앙의 해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다시 깨끗이 다스리면 그만이다."

천사 6년(409년) 7월, 모용부의 지파와 친속 100여 호가 불안을 느낀 나머지 밖으로 달아나려 모의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탁발규에 의해 주살되었는데, 죽은 자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

천사 6년(409년) 8월, 천문에 기이한 변화가 많이 일어나니, 점술가가 말했다.
"곧 역신(逆臣)이 쓰러져 피를 흘릴 것이다."
다만 탁발규는 역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꺼려 더 많은 공경들을 죽여 하늘의 재앙을 막고자 하였다. 위왕 탁발의는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두려워 수도를 벗어나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려 했으나, 탁발규가 사람을 보내 그를 추격하여 마침내 체포하고 사사하였다.

천사 6년(409년) 10월, 이전에 위나라로 귀부했던 단굉(段宏)이 탁발규의 통치에 불안을 느끼고 동진으로 달아났다.

이달에 탁발규는 제왕 탁발사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탁발부에서는 후계자를 세울 때마다 먼저 그 어머니를 죽이는 자귀모사(子貴母死)의 오랜 전통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탁발사의 생모 귀인 유씨에게 죽음을 명하였다. 이후 탁발규는 탁발사를 불러 변명하며 타일렀다.
"한 무제(漢武帝)가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인 것은 모후(母后)가 정사에 관여하고 외척이 난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네가 마땅히 대통을 이어야 하므로, 내가 옛사람의 일을 멀리 본받아 이렇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탁발사는 효성이 지극하여 슬피 울며 감정을 이기지 못하였고, 이를 본 탁발규는 노여워하였다. 탁발사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 뒤에도 밤낮으로 소리 내어 울자, 탁발규는 이 사실을 알고 다시 그를 불렀다. 이때 탁발사의 측근들이 말했다.
"주상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니, 들어가시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선 피신하였다가 주상의 노여움이 풀린 뒤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이에 탁발사는 밖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다. 그의 휘하에 있던 대(代) 사람 차로두와 경조 사람 왕낙아 두 사람만이 그를 따랐다.

처음에 탁발규가 하란부에 갔을 때, 어머니 헌명황후의 여동생 하란씨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헌명황후에게 말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헌명황후가 말했다.
"안 된다. 이 아이는 지나치게 아름다우니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미 남편이 있으니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탁발규는 몰래 사람을 시켜 그 남편을 죽이고 이모인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탁발규와의 사이에서 청하왕 탁발소를 낳았다. 탁발소는 성격이 흉악하고 사나우며 행실이 무뢰하였다. 거리와 골목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길 가는 사람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옷을 벗기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탁발규는 이에 노하여 한때 그를 우물 속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즈음에 꺼내 주었다. 제왕 탁발사 또한 여러 차례 탁발소를 훈계하고 꾸짖었고, 이로 인해 탁발소는 탁발사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10월 13일[131], 탁발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인 하란씨를 질책한 뒤에 그녀를 가두어 장차 죽이려 하였으나, 마침 날이 저물어 아직 처결하지 못하였다. 하란씨는 몰래 사람을 보내 아들 탁발소에게 알리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나를 구해 주겠느냐?"
이에 당시 나이가 16세이던 탁발소는 밤이 되자 자신의 휘하 사람들과 환관, 궁인 몇 명과 함께 모의하고 담을 넘어 궁궐로 들어가 천안전에 이르렀다. 탁발규는 잠을 자다가 측근들이 도적이 침입했다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 놀라 일어나 활과 칼을 황급히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결국 탁발규는 아들인 탁발소에게 시해당했다.

영흥 2년(410년) 9월 5일[132], 청하왕 탁발소를 제거하고 황위에 오른 명원제 탁발사는 탁발규를 '선무황제(宣武皇帝)'로 추시하고, 성락(盛樂)의 금릉(金陵)에 장사 지냈다. 묘호는 '태조(太祖)'라 하였다.

태상 5년(420년), 시호를 고쳐 '도무황제(道武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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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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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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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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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윈강석굴의 대불이 그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교도 불교였고, 남북조 시대 내에서도 가장 불교를 숭배한 국가가 북위였으니 그럴 법하다.[2] 신미년 병신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7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4일이다.[3] 병술년 경인월 무신일. 음력으로는 1월 6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20일이다.[4] 능석(陵石)은 지명으로, 성락(盛樂) 동쪽에 있다.[5] 병술년 병신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7월 10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20일이다.[6] 「관씨지(官氏志)」에 따르면, 탁발규가 북위를 처음 세웠을 때, 당장(幢將) 여섯 명을 두어 궁중에서 숙직하는 삼랑(三郎)의 위사(衛士)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시중(侍中) 이하 중산(中散) 이상의 관원들이 모두 이들을 통솔하였다. 한마디로 막제는 궁중에서 금군을 지휘하는 여섯 친위대장 중 한 사람인 셈인데, 탁발규와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인물마저 배반한 것이다.[7] 고류현(高柳縣)은 한(漢)나라 때 대군(代郡)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때 폐지되었다. 역도원은 "고류는 대(代) 지역에 있는데, 그 산은 겹겹이 봉우리가 이어지고 산봉우리가 층층이 솟아 있으며, 노을이 피어오르고 구름이 높이 걸린다. 그 산맥은 아득히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요새(遼塞)까지 뻗어 나간다"고 하였다.[8] 「관씨지(官氏志)」에 따르면 남쪽의 여러 부락 가운데 고적씨(庫狄氏)가 있었는데, 나중에 적산씨(狄山氏)가 되었다.[9] 무자년 무오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5월 4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24일이다.[10] 무자년 경신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7월 2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20일이다.[11] 무자년 을축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388년 12월 6일이고, 양력으로는 389년 1월 18일이다.[12] 기축년 정묘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2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1일이다.[13] 경인년 임오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5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26일이다.[14] 경인년 갑신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7월 30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26일이다.[15] 경인년 병술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9월 26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21일이다.[16] 신묘년 병신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7월 2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17일이다.[17] 신묘년 기해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10월 29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11일이다.[대체로] 북방 사람들이 기병을 운용할 때에는 각자 말 한 필을 타고, 또 별도로 한 필을 여분의 말로 데리고 다녔다.[19] 신묘년 경자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11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21일이다.[20] 신묘년 경자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11월 10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22일이다.[21] 신묘년 경자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11월 13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25일이다.[22] 신묘년 경자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11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31일이다.[23] 신묘년 경자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391년 11월 22일이고, 양력으로는 392년 1월 3일이다.[24] 신묘년 경자월 임진일. 음력으로는 391년 11월 23일이고, 양력으로는 392년 1월 4일이다.[25] 을미년 정해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10월 25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3일이다.[26] 을미년 무자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11월 3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1일이다.[27]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가불난수(可不難水)는 안문(雁門) 옥양현(沃陽縣) 동남쪽 60리의 산 아래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옥수(沃水)로 들어가고, 합류한 뒤 동쪽으로 흘러 참합현(參合縣) 남쪽을 지난다.[28] 을미년 무자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11월 10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8일이다.[29] 병신년 을미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6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 22일이다.[30] 병신년 을미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6월 15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5일이다.[31] 병신년 정유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8월 16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4일이다.[32] 병신년 정유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8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16일이다.[33] 병신년 무술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9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4일이다.[34] 병신년 무술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9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5일이다.[35] 이 길은 한신이 정형(井陘)을 거쳐 조(趙)를 정벌할 때 이용했던 옛길이다.[36] 병신년 기해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10월 15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1일이다.[37] 병신년 경자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11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다.[38] 병신년 경자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396년 11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397년 1월 3일이다.[39] 병신년 경자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396년 11월 20일이고, 양력으로는 397년 1월 4일이다.[40] 병신년 경자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396년 11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397년 1월 12일이다.[41] 신성(新城)은 곧 성무제 모용수가 거병하여 업을 공격할 때 쌓았던 성이다.[42] 자기 땅에서 싸우면 병사들이 쉽게 흩어져 달아난다는 의미이다.[43] 하란부 출신 여러 성씨 가운데 하뢰씨(賀賴氏)가 있었고, 북방에는 하란씨(賀蘭氏)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모두 하씨(賀氏)가 되었다. 아마 내부로 들어온 자들은 하뢰씨가 되고 북방에 남은 자들은 하란씨가 된 것으로, '란(蘭)'과 '뢰(賴)'는 말소리가 변한 것일 뿐이다. 또 흉노(匈奴)의 여러 종족 가운데에도 하뢰씨가 있었다.[44] 병신년 신축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396년 12월 20일이고, 양력으로는 397년 2월 3일이다.[45] 정유년 임인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14일이다.[46] 정유년 임인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6일이다.[47] 정유년 임인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6일이다.[48] 정유년 임인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월 24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8일이다.[49] 정유년 임인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1월 25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9일이다.[50] 정유년 계묘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15일이다.[51] 정유년 계묘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2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3일이다.[52] 정유년 계묘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2월 10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4일이다.[53]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상서성에 직사(直事)·전중(殿中)·사부(祠部)·의조(儀曹)·이부(吏部)·삼공(三公)·비부(比部)·금부(金部)·창부(倉部)·탁지(度支)·도관(都官)·이천석(二千石)·좌민(左民)·우민(右民)·우조(虞曹)·둔전(屯田)·기부(起部)·수부(水部)·좌주객(左主客)·우주객(右主客)·가부(駕部)·차부(車部)·고부(庫部)·좌중병(左中兵)·우중병(右中兵)·좌외병(左外兵)·우외병(右外兵)·별병(別兵)·도병(都兵)·기병(騎兵)·좌사(左士)·우사(右士)·북주객(北主客)·남주객(南主客) 등 모두 34조를 두었는데, 뒤에 다시 운조(運曹)를 두어 모두 35조가 되었고, 낭(郎) 23명을 두어 서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탁발규가 국가의 조직을 개편하면서 다시 이를 늘려 36조로 만든 것이다.[54] 정유년 갑진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3월 11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4일이다.[55] 정유년 갑진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3월 13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6일이다.[56] 정유년 갑진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3월 14일이고, 양력으로 4월 27일이다.[57] 정유년 병오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5월 3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14일이다.[58] 정유년 병오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5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18일이다.[59] 정유년 병오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5월 17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28일이다.[60] 정유년 기유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8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9월 8일이다.[61] 정유년 신해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10월 2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7일이다.[62] 정유년 신해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10월 10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15일이다.[63] 정유년 신해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0월 20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5일이다.[64] 정유년 신해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10월 21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6일이다.[65] 정유년 신해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10월 23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8일이다.[66] 무술년 갑인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9일이다.[67] 무술년 갑인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1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일이다.[68] 무술년 정사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4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2일이다.[69] 무술년 기미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6월 16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 15일이다.[70] 무술년 신사일. 음력으로는 398년 11월 23일이고, 양력으로는 399년 1월 17일이다.[71] 무술년 을축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398년 12월 2일이고, 양력으로는 399년 1월 24일이다.[72] 기해년 병인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28일이다.[73] 기해년 병인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1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1일이다.[74] 기해년 병인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1월 13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6일이다.[75] 기해년 정묘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3일이다.[76] 기해년 정묘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2월 24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15일이다.[77] 기해년 무진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3월 3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4일이다.[78] 기해년 무진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3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9일이다.[79] 기해년 무진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3월 20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11일이다.[80] 기해년 경오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5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27일이다.[81] 기해년 임신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7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24일이다.[82] 기해년 계유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8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13일이다.[83] 기해년 정축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399년 12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400년 1월 24일이다.[84] 기해년 정축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399년 12월 29일이고, 양력으로는 400년 2월 10일이다.[85] 경자년 무인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17일이다.[86] 경자년 무인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1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22일이다.[87] 경자년 기묘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2월 6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17일이다.[88] 경자년 기묘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2월 21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1일이다.[89] 경자년 경신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3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17일이다.[90] 경자년 임오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5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26일이다.[91] 경자년 임오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5월 20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27일이다.[92] 경자년 갑신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7월 4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9일이다.[93] 경자년 기축월 을미일. 음력으로는 400년 12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401년 1월 19일이다.[94] 신축년 신묘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2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12일이다.[95] 신축년 신묘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2월 22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2일이다.[96] 신축년 계사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4월 17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15일이다.[97] 신축년 신축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401년 12월 11일이고, 양력으로는 402년 1월 30일이다.[98] 신축년 신축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401년 12월 15일이고, 양력으로는 402년 2월 3일이다.[99] 임인년 임인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1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25일이다.[100] 임인년 임인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1월 19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8일이다.[101] 임인년 임인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1월 21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10일이다.[102] 임인년 임인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11일이다.[103] 임인년 계묘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2월 14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일이다.[104] 임인년 무신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7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15일이다.[105] 임인년 기유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8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21일이다.[106] 임인년 기유월 갑자일. 음력으로 8월 28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0일이다.[107] 임인년 임자월 정축일. 음력으로 11월 12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2일이다.[108] 계묘년 갑인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1월 2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9일이다.[109] 계묘년 경신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7월 27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30일이다.[110] 계묘년 임술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9월 11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12일이다.[111] 계묘년 계해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10월 25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5일이다.[112] 계묘년 계해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10월 27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7일이다.[113] 계묘년 갑자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11월 11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10일이다.[114] 갑진년 무진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3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4일이다.[115] 갑진년 을해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10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15일이다.[116] 갑진년 정축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404년 12월 16일이고, 양력으로는 405년 1월 31일이다.[117] 을사년 기묘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2월 11일이고, 양력으로는 3월 27일이다.[118] 병오년 경인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11일이다.[119] 병오년 신묘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2월 29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3일이다.[120] 병오년 임진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3월 25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8일이다.[121] 병오년 계사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4월 15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18일이다.[122] 병오년 계사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4월 29일이고, 양력으로는 6월 1일이다.[123] 병오년 정유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8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30일이다.[124] 병오년 정유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8월 13일이고, 양력으로는 9월 11일이다.[125] 병오년 무술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9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9월 29일이다.[126] 병오년 무술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9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7일이다.[127] 병오년 무술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9월 20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18일이다.[128] 병오년 무술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9월 23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21일이다.[129] 병오년 기해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0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14일이다.[130] 탁발규는 어릴 적부터 주변 사람들과 친족들로부터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으며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에 심적으로 굉장한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한식산을 탐닉한 데는 이런 정신적인 문제가 한몫했을 가능성이 있다.[131] 기유년 을해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10월 13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6일이다.[132] 경술년 병술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9월 5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1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