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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후진 제2대 황제 요흥 | 姚興 | |||
| 출생 | 366년 | ||
| 전조 남안군 적정현 (現 간쑤성 룽샤오현) | |||
| 즉위 | 394년 | ||
| 후진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 |||
| 사망 | 416년 (향년 51세) | ||
| 후진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 |||
| 능묘 | 우릉(偶陵) | ||
| 재위기간 | 후진 제2대 황제 | ||
| 394년 ~ 41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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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흥(興) | ||
| 자 | 자략(子略) | ||
| 부모 | 부황 태조 무소제 모후 손황후? | ||
| 배우자 | 장황후 제황후 | ||
| 자녀 | 14남 1녀 | ||
| 묘호 | 고조(高祖) | ||
| 시호 | 문환황제(文桓皇帝) | ||
| 연호 | 황초(永和, 394년 ~ 399년) 홍시(弘始, 399년 ~ 416년) | ||
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후진의 제2대 황제. 무소황제 요장의 장남.2. 생애
2.1. 전진(前秦)을 멸망시키다.
요흥은 본래 전진의 천왕 부견 밑에서 태자사인(太子舍人)을 지냈다. 비수대전에서 크게 패한 전진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아버지 요장이 마목(馬牧)에서 후진을 건국하자, 요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長安)을 빠져나와 요장에게 달려가니, 요장이 그를 황태자로 삼았다. 이후로 요장이 출정하여 정벌할 때면 항상 요흥을 남겨 후방의 일을 총괄하게 했고, 요흥이 장안을 진수할 때에 위엄과 은혜가 있었다. 또, 중서사인 양희(梁喜), 태자선마 범욱(范朂) 등과 더불어 경전과 서적을 강론하여 전란 속에서도 학업을 끊지 않았기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본받았다.건초 8년(393년) 12월, 무소제 요장이 붕어하자, 요흥이 이를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고, 숙부 요서로 하여금 안정(安定)을 지키게 하고, 숙부 요석덕으로 하여금 음밀(陰密)을 지키게 하며, 아우 요숭은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정서장군 요석덕의 장수와 보좌관들이 요석덕에게 일러 말하기를,
"공의 위엄과 명성이 본래 위중하고 부곡은 가장 강한데, 지금처럼 대가 바뀌는 즈음에는 조정에서 반드시 서로 의심할 터라 영구히 편안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차라리 진주(秦州)로 달아나 일의 형세를 관망함만 못합니다."
라 하였으나, 요석덕이 말했다."태자(太子)의 뜻과 도량이 관대하고 밝으니 반드시 다른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부등(苻登)이 멸망하지 않았는데 골육이 서로 다툰다면 이른바 두 원씨(二袁)의 자취를 따르다 남에게 목을 내어주는 꼴이니, 나는 죽을지언정 차마 그리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마침내 가서 요흥을 알현하였고, 요흥이 후하게 예우한 뒤에 그를 돌려보냈다.건초 9년(394년) 정월, 요흥이 스스로 대장군(大將軍)이라 칭하고, 상서우복야 윤위를 대장군부의 장사(長史), 상서 적백지(狄伯支)를 대장군부의 사마(司馬)로 삼아 무리를 이끌고 전진을 정벌하였다. 이때 함양태수(咸陽太守) 유기노(劉忌奴)가 피세보(避世堡)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요흥이 그를 습격하여 사로잡았다. 한편, 전진의 고제 부등도 무소제 요장이 죽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요흥(姚興) 그 어린아이 놈은 내가 몽둥이를 부러뜨려 볼기를 칠 따름이다."
라 하고, 사도 · 안성왕 부광(苻廣)을 남겨 옹(雍)을 지키게 하고, 태자 부숭에게 호공보(胡空堡)를 지키게 했으며,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전부 끌고 동쪽으로 갔다.건초 9년(394년) 4월, 고제 부등이 육맥(六陌)으로부터 폐교(廢橋)로 향하니, 시평태수(始平太守) 요상이 마괴보(馬嵬堡)에서 그를 막았다. 부등의 무리가 매우 성하므로 요흥이 요상이 능히 막아내지 못할까 염려하여, 스스로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부등을 압박하는 한편, 윤위를 별도로 보내 보병을 이끌고 요상을 돕게 하였다. 이에 윤위가 달려가 폐교를 먼저 점거하여 부등에게 대항하니, 부등의 군사가 물을 다투었으나 얻지 못해 갈증으로 죽은 자가 10명 중 2~3명이었다. 이로 인하여 부등이 더욱 급히 윤위를 공격하였고, 윤위가 장차 나와 싸우려 하자, 요흥이 적백지를 보내 윤위에게 말했다.
"병법에 싸우지 않고 사람을 제압한다는 것은 대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오. 부등은 궁지에 몰린 적이므로 마땅히 신중하게 지키며 기다려야지, 가벼이 싸워서는 안 되오."
이에 윤위가 말했다."선제(先帝)께서 세상을 떠나시어 사람들의 마음이 요동치고 두려워하는데, 지금 생각하기로는 분발하고 힘을 내어 저 더러운 역적을 베어 없애지 않는다면 큰 기회가 떠나버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윤위가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부등을 크게 격파하니, 그날 밤 전진의 군대가 흩어졌고 부등은 단기로 옹(雍)으로 달아났다.황초 원년(394년) 5월 17일[1], 요흥이 비로소 발상하고 상복을 입었으며, 괴리(槐里)에서 황위에 올라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의 죄를 사면하고, 연호를 '황초(皇初)'로 개원한 뒤에 마침내 안정으로 갔다. 이보다 앞서 옹(雍)을 지키던 전진의 안성왕 부광과 호공보를 지키던 태자 부숭이 고제 부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부등이 옹(雍)에 이르러 돌아갈 곳이 없자 마침내 평량(平涼)으로 달아나 패잔병을 수습하여 마모산(馬毛山)으로 들어갔다.
황초 원년(394년) 6월, 고제 부등이 그 아들 여음왕 부종(苻宗)을 보내 하남왕 걸복건귀에게 인질로 삼아 구원을 청하고, 걸복건귀를 높여 양왕(梁王)으로 봉하며 그 누이를 맞아들여 양왕후(梁王后)로 삼았다. 이에 걸복건귀가 전군장군 걸복익주(乞伏益州) 등을 보내 기병 10,000기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였다.
황초 원년(394년) 7월, 고제 부등이 군사를 이끌고 마모산을 나와 걸복익주의 군대를 맞이하려 하니, 요흥이 안정으로부터 경양(涇陽)으로 가서 부등과 마모산 남쪽에서 싸워 부등을 사로잡아 그를 죽였다. 그 부곡의 무리를 모두 흩어지게 하여 농업으로 돌아가게 했고, 음밀의 30,000호를 장안으로 옮겼으며, 부등의 황후 이씨(李氏)를 요황에게 하사하였다. 걸복익주 등이 이미 부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 안남장군 강희(強熙)와 진원장군 양다(楊多)가 배반하여 두충을 맹주로 추대하니, 있는 곳마다 요란하고 어지러웠다. 요흥이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그들을 정벌하여 군사가 무공(武功)에 머무르자, 양다의 조카 양민국(楊良國)이 양다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두충의 아우 두창무(竇彰武) 또한 두충과 딴 마음을 품자, 두충이 강희에게로 달아났다. 그러나 강희는 요흥이 장차 도달한다는 소식을 듣고 3,000호를 이끌고 진주(秦州)로 이미 달아났기에, 두충이 다시 견천(汧川)으로 달아났으나 견천의 저족 구고(仇高)가 사로잡아 그를 보내왔다. 이에 두충의 사촌동생 두통(竇統)이 그 남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황초 원년(394년) 12월, 요흥이 사신을 보내 후연과 우호를 맺고 태자 모용보의 아들 모용민(慕容敏)을 후연으로 보내주었다.
황초 2년(395년) 정월, 숙부 정로장군 요서를 진왕(晉王), 정서장군 요석덕을 농서왕(隴西王), 아우 중군장군 요숭을 제공(齊公), 우장군 요현을 상산공(常山公)에 봉하였다. 또 숙부 정남장군 요정(姚靖) 등과 공신 윤위, 제난(齊難), 양불숭(楊佛嵩) 등을 모두 공후(公侯)에 봉하였으며, 그 나머지 문무백관의 봉작은 각각 차등이 있었다.
2.2. 대외팽창의 시작
황초 2년(395년) 5월, 선비족 설발(薛勃)이 이성(貳城)에 주둔하다가 북위에게 정벌당하자, 후진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요흥이 아우 제공 요숭으로 하여금 무리를 이끌고 달려가게 하였는데, 북위의 군사들이 곧 돌아가니 설발이 다시 배반하매, 요숭이 그를 쳐서 사로잡고 그 군사와 말을 크게 노획하여 돌아왔다.황초 2년(395년) 7월, 후연의 태자 모용보가 북위를 침공하자, 북위의 위왕 탁발규가 우사마 허겸을 보내 후진으로 가서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황초 2년(395년) 8월, 요흥이 진동장군 양불숭을 보내 북위를 구원하게 했으나, 양불숭이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자 위왕 탁발규가 허겸에게 명하여 글을 써서 양불숭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무릇 순리에 의지하여 역적을 베어내고 정의를 타서 어두운 자를 치는데, 그 운수가 아님에도 공을 드러내거나 그 때가 아님에도 업적을 나타낸 적은 없었소. 모용씨(慕容氏)가 무도하여 우리 국경을 침범했으나, 그 병사들이 늙고 지쳤으니 하늘이 그들을 멸망시킬 때가 도래하였소. 이로써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여 반드시 기한에 맞추어 도달하기를 바란 것이오. 장군은 방소(方召)의 책임을 의지하여 웅호(熊虎) 같은 군사를 총괄하니, 일과 기회가 부합하는 지금이 바로 그 시기요. 지금 군사를 일으키면 다시 수레를 끌지 않고도 천년의 공훈을 하루아침에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운중(雲中)에서 크게 모여 삼위(三魏)로 군사를 진격시킨 연후에 비로소 잔을 들어 만수무강을 축하한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여유롭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이에 양불숭이 진군 속도를 배로 늘려 밤낮없이 행군하였는데, 도중에 허겸이 양불숭과 더불어 맹세하여 말했다."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에게 명조(鳴條)의 맹약이 있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하양(河陽)의 맹약이 있었으니, 이는 곧 신령에 의지하여 천하에 충성과 신의를 밝히기 위험이었다. 무릇 어짊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은 예로부터 오늘날까지의 법도이므로, 피를 입에 바르고 제물을 잘라 이로써 영원한 화목을 돈독히 한다. 지금 맹세의 말을 한 이후로 좋은 것은 합치고 재앙은 나누며 근심은 구휼하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 것이니, 이 맹세를 위반한다면 신지(神祗)가 그를 베어 벌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보가 이미 패하여 달아나니 양불숭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이 달에 요흥이 서모(庶母) 손씨(孫氏)를 황태후로 추존하여 태묘(太廟)에 배향하였다.
황초 3년(396년), 후구지의 저족 양성이 구지(仇池)를 보위하며 후진으로 사신을 보내 승인을 청하니, 요흥이 그를 사지절 · 진남장군 · 구지공(仇池公)으로 삼았다. 또, 선비족 월질힐귀(越質詰歸)가 20,000호를 이끌고 걸복부의 서진을 배반하여 와서 항복하자, 요흥이 그를 성기(成紀)에 두고 사지절 · 진서장군 · 평양공(平襄公)으로 삼았다.
이 해에 농서왕 요석덕이 낙성(洛城)에서 평량의 호(胡)족 김표(金豹)를 쳐서 이겼다.
당초 천수(天水) 사람 강유(姜乳)가 서진의 영역인 상규(上邽)를 습격해 점거하고 스스로 진주자사(秦州刺史)라 칭하였다. 농서왕 요석덕이 군사를 진격시켜 그를 치자, 강규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후 요흥이 요석덕을 진주목(秦州牧)으로 삼고 호동강교위(護東羌校尉)를 겸하게 하여 상규를 지키게 했으며, 강유를 불러 상서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에 후진을 배반한 저족 강희와 약양(略陽)의 휴관족 권천성(權千城)이 무리 30,000명을 이끌고 함께 상규를 공략했으나, 요석덕이 그들을 격파하였고 강희는 남쪽으로 달아나 구지로 갔다가 다시 길을 빌려 동진으로 망명하였다. 이어 요석덕이 승세를 타고 서쪽으로 진격해 약양에서 권천성을 정벌하니, 권천성이 결국 투항하였다.
얼마 뒤, 요흥이 군국(郡國)에 명하여 각각 해마다 행실이 깨끗한 사람을 각각 한 명씩 효렴(孝廉)으로 천거하게 하였다.
당시 서연이 후연으로부터 공격받아 멸망한 지 1년이 넘었으나, 서연의 하동태수(河東太守)였던 유공(柳恭) 등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며 스스로 지키니, 요흥이 진왕 요서를 보내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서 등이 강에 의지하여 막아 지키자, 요서가 건너지 못하였다. 이때 진동장군 설강(薛疆)이 먼저 양씨보(楊氏堡)를 점거하는 데 성공하고, 요서를 인도하여 용문(龍門)으로부터 강을 건너게 하니, 요서가 마침내 포판(蒲阪)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에 요공이 형세가 꺾이어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이후 요흥은 신평(新平)과 안정의 백성 6,000호를 포판으로 이주시키고, 요서를 병·기2주목(幷冀二州牧)으로 삼아 포판을 지키게 하였다.
황초 4년(397년) 정월, 북위가 후연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후연의 범양왕 모용덕이 업(鄴)을 지키며 후진에 구원을 청했으나 요흥은 군사를 보내 돕지 않았다.
황초 4년(397년) 9월, 요흥의 생모인 황태후 사씨(虵氏)가 사망하자, 요흥이 슬퍼하여 몸을 해침이 예법에 지나쳐 여러 정사를 친히 보살피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고사를 따라 이미 장례가 끝났으니 요흥에게 즉시 상복을 벗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서랑 이숭(李嵩)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앞선 왕들의 뛰어난 정치입니다. 마땅히 천성을 따르시어 도(道)의 가르침을 빛내셔야 하니, 장사를 마친 뒤에도 소복을 입고 조정에 임하십시오."
라 하자, 윤위가 논박하여 말했다."이숭(李嵩)의 제안은 억지로 법도를 어기고 예법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청컨대 담당 관원에 맡겨 그 죄를 논하소서."
이에 요흥이 말했다."이숭은 충신이자 효자이거늘,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마땅히 모두 이숭의 논의를 따르도록 하라."
이때 선비족 설발이 다시 배반하고 영북(嶺北)으로 진격하니, 상군(上郡) 이천(貳川)의 여러 잡다한 이민족들이 모두 여기에 호응하여 안원장군 요상이 지키는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이에 요흥이 제공 요숭과 윤위를 보내 그들을 치게 하였다. 설발 또한 삼교(三交)로부터 금성으로 향했는데, 요숭이 진영을 나란히 하여 그들을 협공했으나 조세 수송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가 크게 굶주렸다. 윤위가 요숭에게 말하기를,
"보국장군 미저고지(彌姐高地)와 건절장군 두성(杜成) 등은 모두 여러 부락의 호족으로서 3품의 벼슬에 올랐는데, 운송을 감독함에 지체하고 머뭇거리며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궁핍하게 만들었으니, 마땅히 엄숙하지 않음을 이유로 그들을 징벌하여 형서(刑書)를 밝히십시오."
라 하였고, 요숭은 이를 받아들여 그들을 참수하였다. 이로써 여러 부락이 크게 진동하여 바친 조세가 50여 만 석이었다. 얼마 뒤, 요흥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친히 설발을 치자, 설발이 두려워 그 남은 무리를 버리고 고평공 몰혁간에게로 달아났다. 그러나 몰혁간이 그를 사로잡아 요흥에게 보냈다.현지남(泫氏男) 요매득(姚買得)이 요흥이 어머니 사씨의 장례를 지내는 것을 틈타 암살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이를 고하는 자가 있었으나 요흥이 믿지 않았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 이숭을 보내어 요매득을 떠보게 하였더니, 요매득이 계획을 이숭에게 모두 털어놓았고, 이숭은 돌아와 다시 요흥에게 아뢰었다. 이에 요흥이 요매득을 사사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를 숙청하였다.
요흥이 조서를 내려 백성들이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을 짜는 것과 지나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달에 요흥이 군사를 이끌고 동진의 호성(湖城)을 침범하자, 동진의 홍농태수(弘農太守) 도중산(陶仲山)과 화산태수(華山太守) 동매(董邁)가 모두 항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섬성(陝城)에 이르러 나아가 상락(上洛)을 쳐서 함락시킨 뒤, 제공 요숭을 보내 낙양(洛陽)을 침범하게 하였으나, 동진의 하남태수(河南太守) 하후종지(夏侯宗之)가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을 굳게 지키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요흥은 백곡(柏谷)을 함락시키고 서하(西河)의 엄언(嚴彥), 하동(河東)의 배기(裴岐), 한습(韓襲) 등 유민 무리 20,000여 호를 옮기고 돌아왔다. 이후 요흥이 조서를 내려 병졸로서 싸우다 죽은 자는 수재(守宰)가 있는 곳에서 그를 매장하게 하고, 그와 촌수가 가까운 사람을 찾아 그를 위해 후사를 세우게 하였다.
무도(武都)의 저족 도비(屠飛)와 담철(啖鐵) 등이 농동태수(隴東太守) 요회(姚回)를 죽이고, 3,000여 호를 탈취하여 방산(方山)을 점거하고 반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평공 요소 등이 그들을 쳐서 격파하고, 그 수괴인 도비와 담철을 참수하였다.
요흥이 사마 적백지를 보내 한중(漢中)에서 유민 조회(曹會)와 우수(牛壽)가 이끄는 무리 10,000여 호를 맞아들였다. 요흥이 정사에 마음을 두고 유민들을 너그럽게 널리 포용하여, 한 마디의 좋은 말이라도 받아들여 모두 특별하게 예우하였다. 또, 요흥은 인재를 중시하여 경조(京兆)의 두근(杜瑾), 빙익(馮翊)의 길묵(吉默), 시평(始平)의 주보(周寶) 등이 당대의 일에 대해 진언하니, 모두 발탁하여 좋은 관직에 등용하였다. 당시 천수의 강감(姜龕), 동평(東平)의 순우기(淳于岐), 빙익의 곽고(郭高) 등은 모두 늙은 유학자로, 당대에 덕망이 높고 경전에 밝았으며 행실을 닦아 각각 문도가 수백 명이었는데, 장안에서 가르치니 제자가 되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이른 자가 만 수천 명이었다. 요흥은 정사를 살피는 와중에도 여가 시간에 강감 등을 동당(東堂)으로 불러들여 도리를 강론하고 복잡하게 얽힌 명리(名理)를 연구하게 하였다. 또한 급사황문시랑 길성선, 중서시랑 왕상(王尚), 상서랑 마대(馬岱) 등의 문장이 바르고 우아하다 하여 기밀을 참관하여 관장하게 하니, 이로써 학자들이 모두 힘쓰고 유학의 풍조가 성하였다.
황초 5년(398년) 10월, 장수교위 요진(姚珍)이 서진으로 달아났다.
이 해에 요흥이 장안에 남대(南臺), 조당(朝堂), 무기고를 짓고, 또 서궁(西宮)을 세워 궁문의 이름을 '황룡문(黃龍門)'이라 하였다.
2.3. 낙양 점령
황초 6년(399년) 7월, 요흥이 제공 요숭과 진동장군 양불숭을 보내어 낙양을 침범하니, 농서(隴西) 출신인 동진의 하남태수 신공정이 성벽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이에 동진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전기가 북위로 사람을 보내 낙양을 구원해줄 것을 청하였다.황초 6년(399년) 8월,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가 태위 목숭을 보내 기병 60,000기를 이끌고 낙양을 구원하게 하였다.
홍시 원년(399년) 9월, 요흥이 명을 반포하여 군국(郡國)의 백성들 가운데 기근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팔아 노비가 된 자들을 모두 면제하여 양인으로 삼았다. 이때 요흥은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고 재앙이 자주 나타난다는 이유로 황제의 칭호를 내려놓고 낮추어 천왕(天王)이라 칭하였고, 이에 따라 조서를 내려 여러 공(公)·경(卿)·사(士)와 장수, 목(牧)·수(守)·재(宰)들로 하여금 각각 관등을 1등급씩 낮추게 하였다. 태위공 조민(趙旻) 등 53인이 간하여 상소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의 공훈은 황천(皇天)에 다다르고 공덕은 사해(四海)를 구제하며, 위엄과 영험함은 멀리 떨어진 영역에 떨치고 명성과 교화는 먼 지방에 미쳤으니, 비록 성탕(成湯)이 은(殷)나라의 터전을 높이고 무왕(武王)이 주(周)나라의 대업을 높인 것이라도 족히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막 강오(江吳)를 널리 평정하고 중악(中岳)에 성공을 고하려 하는 때를 맞이하려는데, 어찌 지나친 겸양으로 존호를 내리시어 황천(皇天)이 돌보아 주시는 뜻을 어기십니까!"
라 하였다. 이에 요흥이 말했다."은(殷)나라 탕왕(湯王)과 하(夏)나라 우왕(禹王)은 덕(德)이 여러 왕들 중 으뜸이었으나, 오히려 순순히 겸손을 지켜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하물며 짐 같이 덕이 부족하고 아둔한 자가 어찌 감히 그 자리에 머무르겠는가!"
이후 조민을 보내어 사직과 종묘에 고하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으며, 연호를 '홍시(弘始)' 로 고쳐 개원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자식이 없는 늙은 자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나이 70세 이상에게는 옷과 지팡이를 하사해 주었으며, 법령을 간소하게 하고 송사를 맑게 살폈다. 수령 가운데 치적이 있는 자는 상을 주고, 탐욕스럽고 잔학한 자는 참수하여 벌하니, 시평태수 주반(周班)과 괴리현령(槐里縣令) 이청(李靔)이 모두 뇌물을 탐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엄숙해졌다.홍시 원년(399년) 10월, 신공정이 낙양을 100여 일 동안 굳게 지켰으나, 북위의 구원군이 도달하지 않아 요숭 등이 마침내 낙양을 함락시켰다. 신공정이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는데, 요흥을 보고도 절하지 않았다. 요흥이 신공정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이 장차 경에게 동남쪽의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 괜찮겠소?"
라 하니, 신공정이 성난 낯빛으로 말했다."내가 차라리 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강족 역적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이에 요흥이 노하여 그를 별실에 가두었다. 낙양이 함락된 이후로 회남(淮南) 이북의 여러 성에서 인질을 보내 항복을 청하는 곳이 많았고, 요흥은 동평공 요소를 도독산동제군사(都督山東諸軍事) ·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아 낙양을 진수하게 하였다.이 달에 요흥이 조서를 내려 조·부모와 형제지간은 서로 죄를 숨겨주더라도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진왕 요서와 농서왕 요석덕은 요흥이 천왕으로 존호를 낮춘 것에 따라 자신들의 왕작도 강등시켜줄 것을 청하였으나, 요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조 사람 위화(韋華)와 초군(譙郡) 사람 하후궤(夏侯軌), 시평 사람 방조(龐眺) 등이 양양(襄陽)의 유민 10,000여 호를 이끌고 동진을 배반해 와서 후진에 의탁하였다. 요흥이 동당(東堂)에서 그들을 접견하고 위화에게 묻기를,
"진(晉)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이래 평화가 오래 지속되었는데, 지금 정치와 풍속이 어떠하오?"
라 하니, 위화가 대답하였다."진나라의 황제는 비록 임금의 존귀함은 있으나 나라를 총괄하여 다스릴 수 있는 실권이 없고, 재상들이 정권을 잡아 정치가 여러 갈래에서 나오며, 권력이 황실에서 멀어진 것이 곧 습속이 되었습니다. 형법의 그물이 가혹하고 엄격하며, 풍속이 사치스럽고 방탕하여, 환온(桓溫)과 사안(謝安) 이후로는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조화를 이룬 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요흥이 크게 기뻐하여 위화를 중서시랑으로 임명하였다.얼마 뒤, 요흥이 하동(河東)으로 행차하였는데, 마침 진왕 요서가 하동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요흥이 집안 사람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아버지 무소제 요장 때부터 후진을 섬겼던 요려애(姚驢磑), 조악지(趙惡地), 왕평(王平), 마만재(馬萬載), 황세(黃世) 등을 5등작의 자작과 남작으로 각각 봉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뛰어난 재능과 기이한 행실이 있는 인재를 추천하게 했으며, 형벌과 정책 중 시대에 맞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모두 없앴다. 이때 금성 사람인 병부랑 변희(邊熙)가 군령이 번잡하고 가혹하니 마땅히 간략히 해야한다 건의하자, 요흥이 이를 보고 훌륭하다 칭찬하고 과거 손자와 오자가 군사들에게 맹세했던 것을 참고하여 군령을 가감하였다.
또, 요흥이 장안에 율학(律學)을 세우고 각 지방에 근무하는 관리들을 불러 가르치니, 통달하고 명철한 자는 군현으로 돌려보내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게 하고, 만약 주·군·현에서 판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정위(廷尉)에게 올려 판결하게 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요흥이 자의당(咨議堂)에 임하여 어려운 옥사를 직접 심리하여 판결하자, 당시에 억울하게 지체되는 일이 없다고 칭송받았다.
얼마 뒤에 진왕 요서와 농서왕 요석덕이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다시 굳게 청하자, 요흥이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요서와 요석덕의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졌는데, 요흥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소인들이 그 중간에서 그들을 방해하거나 미혹시킬까 두려워하여, 청렴하고 바른 군자(君子)를 선발하여 그들의 보좌관으로 붙여주었다.
이 해에 요흥이 사예교위 곽무(郭撫), 부풍태수(扶風太守) 강초(強超), 장안현령 어패(魚佩), 괴리현령 팽명(彭明), 창부랑 왕년(王年) 등이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정결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포상하고 기리며, 곽무의 식읍 100호를 늘려주고 강초에게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하사했으며 어패 등의 관등을 2등급 올려주었다.
2.4. 서진(西秦) 멸망
홍시 2년(400년) 5월, 요흥이 사신을 보내 북위에 빙문하게 하니, 북위에서도 알자복야 장제를 보내 요흥에게 답례로 빙문하게 하였다.이때 요흥이 정서대장군 · 농서공 요석덕을 보내 농우(隴右)의 여러 군대를 이끌고 남안협(南安峽)으로부터 들어가 서진을 정벌하게 하니, 서진의 왕 걸복건귀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막으며 농서(隴西)에 주둔하였다.
홍시 2년(400년) 7월, 요흥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친히 이르러 걸복건귀와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 걸복건귀는 패하여 원천(苑川)으로 달아났고, 요흥은 그 군사 36,000명을 항복시키고 60,000필의 군마와 병장기를 거두었는데, 후진군이 사사로이 민가를 약탈하지 않아 백성들이 요흥을 따랐다. 이후 요흥이 상을 왕공(王公) 이하 병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하사하고, 부한(枹罕)으로 군사를 진격시키자, 걸복건귀는 원천에서 금성으로 다시 달아났다.
요흥이 한창 서쪽을 정벌할 때, 고평공 몰혁간이 허점을 타서 안정을 습격해 접수하고자 하였으나, 장사 황보서(皇甫序)가 간절히 간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이후 몰혁간이 스스로 말실수한 것을 한탄하여 몰래 황보서를 죽이고자 하였다.
홍시 2년(400년) 8월, 걸복건귀가 곤궁하고 피폐해져 요흥에게로 와서 항복하자, 요흥은 그를 진원장군 · 도독하남제군사(都督河南諸軍事) · 하주자사(河州刺史) · 귀의후(歸義侯)로 삼았다.
홍시 2년(400년) 9월, 후량의 황제 여찬의 숙부인 정동장군 여방(呂方)이 후량을 배반하고 후진에 투항하였다.
홍시 2년(400년) 10월, 요흥이 조서를 내려 장수들이 큰 상을 당한다면 변방이나 요충지를 지키는 자가 아닌 이상 모두 가서 상을 치르게 하고 1년이 지나면 복직하게 하였다. 또, 전쟁 중이더라도 상을 당하면 휴가 100일을 허락하고, 만약 자신이 변방의 장수인데 집에 큰 변고가 생겨 교대할 자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감히 함부로 떠나는 자가 있으면 관직을 함부로 떠난 죄로써 벌하게 하였다.
홍시 2년(400년) 11월, 요흥이 동진의 장수 유숭(劉嵩) 등 237명을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돌려보냈다.
홍시 3년(401년) 2월, 요흥이 걸복건귀를 다시 원천으로 돌려보내며, 다시 그의 옛 부곡을 돌려주어 거느릴 수 있도록 하였다.
홍시 3년(401년) 3월, 종묘의 뜰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연결되어 자라기 시작하고, 소요원(逍遙園)에 있는 부들이 변하여 구릿대가 되니 모두 아름답고 상서로운 징조라 여겼다. 이에 요흥이 점치게 하니, 점쟁이가 말했다.
"마땅히 지혜로운 사람이 와서 중국(中國)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2.5. 후량(後涼) 복속
홍시 3년(401년) 5월, 위안(魏安) 사람 초랑(焦朗)이 사신을 보내 농서공 요석덕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여씨(呂氏) 집안은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난 이래로 형제가 서로 공격하여 정치가 바로서지 못하고, 권력을 다투면서 위세를 부려 혹독하게 백성들을 부리니 굶주리거나 죽는 자가 과반입니다. 지금 그들이 서로 찬탈하는 틈을 타서 취한다면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우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라 하였다. 요석덕이 요흥에게 아뢰자, 요흥이 마침내 허락하여 요석덕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60,000명을 거느리고 후량을 정벌하게 하고, 아울러 걸복건귀로 하여금 기병 7,000기로 요석덕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홍시 3년(401년) 7월, 농서공 요석덕이 금성으로부터 강을 건너 곧장 광무(廣武)로 향하고 창송(倉松)을 거쳐 후량의 수도인 고장(姑臧)에 이르렀다. 부장 요방국(姚方國)이 요석덕에게 말하기를,
"지금 선봉으로 3,000명의 병력이 이곳에 이르렀으나, 뒤따르는 부대와 멀어 이어지는 구원군이 없으니 이는 우리 군대의 약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날카로운 칼날을 빛내고 위무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저들이 우리가 먼 곳에서 왔다 하여 반드시 결사적으로 저항할 터이니, 한 번의 전투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량의 황제 여륭이 보국장군 여초(呂超), 용양장군 여막(呂邈) 등을 보내 맞아 싸우게 했으나, 요석덕이 그들을 크게 격파하여 여막을 산 채로 사로잡았고, 이외에도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만 단위로 헤아렸다. 이후로 여륭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고, 동원(東苑)에 주둔해있던 후량의 장수 여타(呂他) 등이 무리 25,000여 명을 거느리고 요석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남량의 독발녹단, 북량의 저거몽손, 서량의 이고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서로 공격하고 정벌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각각 후진으로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홍시 3년(401년) 8월, 후량의 장수 강기(姜紀)가 수십 기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며 요석덕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여륭(呂隆)이 외로이 성을 지키는데 구원이 없으니, 명공(明公)께서 대군으로 임하시면 그 형세상 반드시 항복하기를 청할 것이나, 저들은 한갓 글로만 항복할 뿐이지 아직 기꺼이 복종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청컨대 이 강기(姜紀)에게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주시어 왕송총(王松怱)과 함께 초랑(焦朗)과 화순(華純)의 무리를 이용하여 저들의 빈틈을 노리게 하시면, 여륭 따위는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리하지 않으신다면, 지금 남쪽에 있는 독발씨(禿髮氏)는 군사가 강하고 나라가 부유한데 고장(姑臧)마저 겸하여 차지하고 거점으로 삼을 것이고, 그 위엄과 형세가 더욱 성해질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거몽손(沮渠蒙遜)과 이고(李暠)도 능히 대항하지 못하고 반드시 장차 그에게 복종할 것이니, 이는 곧 국가의 큰 적이 될 것입니다."
라 하였다. 요석덕이 이에 표문을 올려 강기를 무위태수(武威太守)로 삼을 것을 청하고, 군사 3,000명을 배속시켜 안연(晏然)에 주둔하게 하였다. 요석덕이 고장을 포위한 지 여러 달이 되어, 성안에서 밖으로 배반을 꾀하는 자가 많았는데, 요석덕이 이민족과 한족 사람들을 어루만져 받아들이고 수재(守宰)를 나누어 두었으며, 군량을 아끼고 곡식을 비축하여 오래 버틸 계책을 세웠다.홍시 3년(401년) 9월, 황제 여륭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항복하기를 청하자, 요흥이 답장을 보내고 이를 좋게 여겨 여륭을 진서대장군 · 양주자사(涼州刺史) · 건강공(建康公)으로 삼았다.
이 해에 하동군 포판의 아육왕사(阿育王寺)에서 때때로 광명이 비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이상히 여겨 조사하였고, 절에 있던 석함 안에서 부처의 유골을 발견하였는데, 밝게 비추는 것이 지극히 예사롭지 않았다.
홍시 4년(402년) 2월 14일[2], 요흥이 아들 요홍을 태자로 세우고, 경내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의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은 남자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높여주었다.
홍시 4년(402년) 3월, 동진에서 권신 환현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자, 동진의 양성태수(襄城太守) 사마휴지와 표기부의 종사중랑 유경선, 고아지(高雅之)가 함께 낙양으로 도망쳐왔다. 이들은 각각 자기 집안의 자제들을 인질로 맡기고 요흥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요흥은 이들에게 부신(符信)을 주어 신표로 삼게 하고, 관동(闗東)에서 병사를 모집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수천 명을 모은 뒤 다시 동남쪽으로 돌아가 팽성(彭城) 일대에 주둔하였다.
홍시 4년(402년) 4월, 서진의 걸복건귀가 아들 걸복치반을 보내 조정에 들어가 요흥을 알현하게 하였다. 요흥은 걸복치반을 흥진태수(興晉太守)로 임명하였다.
2.6. 시벽 전투
당초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후진과 통혼하기 위해 북부대인 하적간을 보내 말 1,000필을 바치며 요흥에게 그의 딸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요흥도 처음에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도무제가 별도로 황후를 세우자, 요흥은 하적간을 억류하고 혼인을 끊었으며, 이를 이유로 북위를 대대적으로 침공할 준비를 하였다.홍시 4년(402년) 5월, 요흥이 북위를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로 여러 군대를 동원하여, 동생인 안북장군 · 의양공 요평(姚平)과 상서우복야 적백지 등에게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이끌고 진격하게 하였다. 요평 등의 군대가 하동에 이르자, 요흥은 광원장군 당아(黨娥), 입절장군 뇌성(雷星), 건충장군 왕차다(王次多) 등에게 행성(杏城)과 영북(嶺北)의 돌격 기병대를 거느리고 화녕(和寜)으로 달려가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또, 월기교위 당소방(唐小方)과 적노장군 요양국(姚梁國)에게는 관중(闗中)의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요평의 후속 지원군이 되게 하였다. 아울러 진공 요서는 기존에 하동에 있던 병력을 통솔하여 선봉을 맡아 지휘하였고, 동평공 요소는 낙양 동쪽 주둔해 있던 군대를 이끌었으며, 시평태수 요상은 삭방(朔方)에 주둔해 있던 기병대를 거느렸다. 이들은 모두 평망(平望)에 집결하여 요흥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요흥은 사예교위 · 상산공 요현과 상서령 요황으로 하여금 태자 요홍을 을 보좌하여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또, 고평공 몰혁간에게는 임시로 상규를 진수하게 하고, 중군장군 · 광릉공 요흠(姚欽)에게는 임시로 낙양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요흥 본인은 군사 47,000명을 친히 거느리고 장안에서 출발하여 요평에게로 향하였다.
홍시 4년(402년) 6월, 요평이 북위의 건벽(乾壁)을 공격하였다. 이에 도무제 탁발규가 비릉왕 탁발순, 예주자사 장손비 등에게 60,000명의 군사를 나누어 주고, 일단 선봉으로서 세 갈래로 진격해 후진군의 침략에 대응하게 하였다.
홍시 4년(402년) 7월, 건벽의 성채 안에는 원래부터 병력이 적었는데, 요평이 우물로 통하는 물길마저 끊어버리자, 요평이 공격한 지 60여 일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마침 도무제 탁발규가 직접 장수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친정에 나섰다.
홍시 4년(402년) 8월, 요평의 군대가 영안(永安)에 이르렀다. 요평은 용맹한 장수를 뽑아 정예 기병 200기를 거느리고 북위군의 허실을 정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손비가 이들을 영격하여 모두 사로잡았고 말 한 필조차 돌아오지 못하니, 요평은 마침내 퇴각하여 달아났다.
8월 9일[3], 도무제 탁발규가 급히 추격하여 시벽(柴壁)에서 요평을 따라잡았다. 요평은 성을 굳게 지키며 농성하였고, 북위군은 곧 시벽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요흥은 이에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요평을 구원하려 하였고, 아울러 천도(天渡)를 점거하여 군량을 운송하고 요평에게 보급할 계획이었다. 한편, 도무제는 요흥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상서우병중랑 이선에게 물었다.
"요흥은 천도(天渡)에 주둔하고 요평은 시벽(柴壁)을 점거하여 서로 안팎에서 호응하려 한다. 이제 이들을 섬멸하려 하는데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이선이 대답하였다."신이 듣기로 군대는 정면으로 맞붙되, 전쟁에서는 기이한 책략을 써서 승리한다고 하였습니다. 듣건대 요흥은 천도(天渡)에 병력을 주둔시켜 군량 수송로로 이용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별동대를 보내 우리가 천도를 먼저 점령하고, 시벽(柴壁) 주변에는 곳곳에 복병을 엄중히 배치하여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폐하께서 신묘한 계책으로 시기를 살펴 움직이시면 됩니다. 이리하면 요흥은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수 없고, 물러나려 해도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적은 높은 곳에 의지하고, 깊은 곳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는 병법에서 꺼리는 것인데, 지금 진(秦)군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도무제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이에 포위망을 여러 겹으로 더 쌓아 안으로는 요평이 빠져나오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요흥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때 북위의 광무장군 안동이 말하기를,"분수(汾水) 동쪽에는 몽갱(蒙坑)이 있는데, 동서로 300여 리에 걸쳐 있고 길도 제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흥이 온다면 반드시 분수 서쪽을 따라 곧장 시벽(柴壁)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적군의 기세가 서로 연결되어, 아무리 포위망이 견고하다 하더라도 제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부교를 놓아 분수를 건넌 뒤 서쪽 강안에 진지를 구축하여 막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적이 와도 그 지략과 기세를 펼칠 곳이 없을 것입니다."
라 하니, 도무제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분수(汾水)가 굽이치는 곳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부교를 놓고, 서쪽 강안을 따라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북위군이 포위망을 견고히 하는 동안 요흥은 포판(蒲阪)에 이르렀으나, 북위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비로소 진군하였다.8월 28일[4], 도무제 탁발규는 친히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몽갱(蒙坑)을 통과해 남쪽으로 40리 나아가 요흥을 요격하였다. 요흥의 군대는 아침부터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아직 진영을 설치하지도 못했는데, 북위군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두려움에 빠져 크게 동요하였다. 도무제는 비릉왕 탁발순에게 정예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게 하여 요흥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요흥의 중장기병 수백 기를 사로잡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요흥은 남쪽으로 40여 리 퇴각하여 달아났고, 북위군도 병력을 거두어 돌아갔다. 요평 역시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단지 사람을 보내 북위군이 포위망에 세워둔 목책 수백 보 가량을 불태웠을 뿐이었다.
요흥이 패주한 이래로 북위군은 후진군의 기세가 이미 꺾였음을 알고 곧바로 병력을 나누어 네 곳의 요충지를 장악하였다. 남쪽으로는 몽갱 입구를 차단하고, 동쪽으로는 신판(新阪)의 험로를 봉쇄하였으며, 천도와 가산(賈山)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그리하여 요평의 육로와 수로를 모두 끊고, 갑옷을 입은 채 기다리기만 해도 그를 사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또 분수를 따라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목책을 수십 리 가량 늘여세워 꼴을 수집하기 위해 풀을 베러 나가는 병사들을 보호하였다. 이로써 요평은 시벽 외곽으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홍시 4년(402년) 9월, 요흥은 분수 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 주둔하고, 골짜기에 의지하여 보루를 쌓아 스스로를 굳게 지키려 하였다. 또 기병 수천 기를 보내 서쪽 강안을 따라 북위군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요흥은 측백나무 통나무를 묶어 분수 상류에서 떠내려 보내 북위군이 분수에 놓은 부교를 부수려 하였는데, 북위군은 떠내려오는 나무를 모두 갈고리로 건져 올려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도무제 탁발규는 요흥이 반드시 서쪽 포위망을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참호를 보수하여 더욱 넓히도록 명하였다. 과연 밤이 되자 요흥이 서쪽 포위망을 공격하였는데, 사다리가 짧아 보루에 닿지 않자 이를 참호 속에 버리고 돌아갔다. 이후 요흥은 병력을 나누어 분수에 바짝 붙여서 보루를 세워 수문(水門)을 압박하고, 시벽의 요평과 서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북위군이 수로 가운데를 끊어 버리자, 요흥과 요평의 안팎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꺾였다.
홍시 4년(402년) 10월, 요평은 군량이 모두 떨어지고 화살도 바닥나 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이에 밤을 틈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서남쪽 포위망을 돌파하여 탈출하려 하였다. 요흥은 분수 서쪽에 병력을 늘어세우고 봉화를 올리는 한편,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요평을 지원하였다. 도무제 탁발규는 여러 군대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분수 서쪽에 주둔시키고, 남쪽의 다리를 굳게 지키게 하였으며, 물길의 입구도 완전히 차단하였다. 요흥은 밤에 전투 소리를 듣고 요평이 힘껏 싸워 포위망을 돌파하여 빠져나오기를 기대하였다. 요평 역시 밖에서 북소리가 들리자 요흥이 포위망을 공격해 자신을 끌어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요흥의 군대는 그저 소리만 지르며 겉으로 서로 호응하는 시늉을 할 뿐, 아무도 감히 북위군의 포위망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결국 탈출에 실패한 요평은 계책도 다하고 힘도 다하자, 두 첩과 휘하 기병 30기를 거느리고 분수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때 후진의 안원장군 불몽세(不蒙世), 양위장군 뇌중(雷重) 등을 비롯한 장병 4,000여 명도 대부분 요평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다. 도무제 탁발규가 헤엄을 잘 치는 자들을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갈고리로 이들을 붙잡게 하였으나, 모두 익사하여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나머지 요평의 군사 30,000명은 모두 저항을 포기하고 손을 모아 결박당했다.
이 전투에서 북위군은 상서우복야 적백지, 월기교위 당소방, 적노장군 요양국, 입절장군 뇌성, 건의장군 강환(康宦), 북중랑장 강외(康猥), 그리고 요흥의 조카 요백금(姚伯禽) 등 4품 이상의 장수 40여 명을 사로잡았다. 또한 도무제는 이전에 북위를 배반하고 후진으로 달아났던 왕차다와 근근(靳勤) 등을 붙잡아 모두 목을 베고, 그 시신을 돌려 보이며 군중에게 경고하였다. 요흥은 먼 길을 달려와 구원하였으나, 궁지에 몰린 동생 요평을 자신이 온 힘을 다하고서도 구하지 못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이고 말았다. 이에 전군이 통곡하였는데, 그 울음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뒤흔들었으며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후 요흥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북위에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도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요흥은 조서를 내려 전사한 장병들에게 모두 후하게 표창하고 추증하도록 하였다.
시벽 전투 직후, 북위군은 승세를 타고 포판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는데, 진공 요서는 성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연이 북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에 도무제 탁발규는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10월 15일[5], 요흥은 하서(河西)의 세력이 강한 호족 10,000여 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홍시 4년(402년) 12월, 동진의 보국장군 원건지(袁虔之), 녕삭장군 유수(劉壽), 관군장군 고장경(高長慶), 용양장군 곽공(郭恭) 등이 환현에게 두 마음을 품었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요흥에게 귀순하였다. 요흥은 동당(東堂)에 나아가 이들을 불러 접견하고 원건지 등에게 물었다.
"환현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진(晉)의 신하이지만, 실상은 진(晉)의 역적이다. 그의 재능과 도량은 그 아비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끝내 큰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겠는가?"
원건지가 대답하였다."환현은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기반에 힘입어 형주(荊州)와 초(楚) 지방을 웅거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晉)나라 조정이 정치를 그르친 틈을 타 몰래 조정의 대권을 훔쳐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잔인하고 인정이 없으며, 의심이 많고 살육을 좋아합니다. 재능 없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총애하는 자에게 작위를 내리니, 공평하게 사람을 대하는 도량이 없습니다. 신이 보기에 그는 그 아비보다 훨씬 못합니다. 지금 이미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으니 반드시 찬탈하여 반역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위압할 만한 뛰어난 인재가 아니므로,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해 앞길을 내어 주는 역할에 그칠 뿐입니다. 이는 하늘이 좋은 기회를 폐하께 내려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속히 경략을 펼쳐 오(吳)와 초(楚) 지방을 말끔히 평정하시기 바랍니다."
요흥은 크게 기뻐하여 원건지를 대사마로 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관직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원건지는 굳이 사양하며 변방의 전장에서 직접 공을 세우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요흥은 그의 관직을 바꾸어 가절 · 녕남장군 ·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임명하였다.홍시 5년(403년) 정월, 요흥은 소의 장씨(張氏)를 황후로 세웠다. 또 아들들에게 각각 작위를 내려, 요의(姚懿)를 태원공(太原公), 요필(姚弼)을 광평공(廣平公), 요광(姚洸)을 진류공(陳留公), 요선(姚宣)을 장락공(長樂公), 요심(姚諶)을 박릉공(博陵公), 요음(姚愔)을 남양공(南陽公), 요박(姚璞)을 평원공(平原公), 요질(姚質)을 범양공(范陽公), 요규(姚逵)를 청하공(清河公), 요유(姚裕)를 □공(□公), 요경아(姚耕兒)를 장무공(章武公)에 봉하였다.
홍시 5년(403년) 2월, 요흥이 겸대홍려 양비(梁斐)를 서쪽의 여러 나라들에 사신으로 파견하면서 신평 사람 장구(張構)를 그의 부사(副使)로 붙여주었다. 이로써 남량의 독발녹단을 거기장군 · 광무공(廣武公), 북량의 저거몽손을 진서장군 · 사주자사(沙州刺史) · 서해후(西海侯), 서량의 이고를 안서장군 · 고창후(髙昌侯)로 각각 삼았다. 또, 진원장군 · 형주자사(荊州刺史) 조요(趙曜)에게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금성에 주둔하게 하였고, 건절장군 왕송총(王松怱)에게는 기병을 거느리고 후량의 여륭을 도와 고장을 지키게 하였다. 왕송총이 위안(魏安)에 이르렀을 때, 독발녹단의 동생 독발문진(禿髪文真)에게 포위되어 그의 군대가 무너졌고, 왕송총은 사로잡혀 독발녹단에게로 보내졌다. 독발녹단은 크게 노하여 왕송총을 요흥에게 돌려보내고, 그 죄를 독발문진에게 돌렸으며, 독발문진은 거듭 자신의 잘못을 진술하며 깊이 사죄하였다.
이 달에 요흥은 조서를 내려 마외(馬嵬) 전투 당시의 장수와 관리들의 공적을 기록하게 하고, 이들을 모두 차례로 발탁하여 승진시켰다. 또한 그곳 보루에 속한 백성들에게는 20년 동안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요흥은 본래 검소하고 절약하는 성품이어서 수레와 말에도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아랫사람들도 그의 영향을 받아 모두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평소 유람과 사냥을 매우 좋아하여 농사철의 중요한 일을 적지 않게 방해하였다. 이에 경조 사람 두연(杜延)은 상서복야 제난이 임금을 바로잡고 보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 「풍초시(豐草詩)」를 지어 요흥에게 경계하라는 의미로 바쳤다. 또, 빙익 사람 상운(相雲)은 「덕렵부(徳獵賦)」를 지어 요흥의 사냥을 풍자하였다. 요흥은 이 글들을 모두 읽고 훌륭하다고 여겨 두 사람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으나, 끝내 자신의 습관을 고치지는 못하였다.
얼마 뒤, 동진의 순양태수(順陽太守) 팽천(彭泉)이 자신의 군(郡)을 들어 후진에 항복하였다. 요흥은 양불숭에게 기병 5,000기를 거느리게 하여 진원장군 조요와 함께 팽천을 영접하게 하였다. 곧 순양(順陽)을 접수한 양불숭과 조요는 이어 남향(南鄉)을 함락시키고 동진의 건위장군 유숭(劉嵩)을 사로잡았으며, 양원(梁園)까지 진출하여 그 일대의 땅을 공략한 뒤 돌아왔다.
2.7. 양주(涼州)를 장악하다.
홍시 5년(403년) 7월, 남량의 독발녹단과 북량의 저거몽손이 번갈아 군대를 내어 후량의 여륭을 공격하니, 여륭이 이를 근심하였다. 이에 요흥의 참모가 요흥에게 진언하기를,"여륭은 선대가 남긴 기반에 의지하여 한 지방을 독자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굶주리고 곤궁하여도 아직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물자가 풍족해진다면 끝내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양주(涼州)는 지세가 험하고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며, 토지는 비옥합니다. 난세가 닥쳤을 때도 그 선조는 먼저 도의를 저버렸고, 또한 여륭은 전에도 뒤늦게야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굶주리고 쇠약해진 틈을 타서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
라 하니, 요흥은 겸산기상시 석확(席確)을 양주(涼州)로 보내 여륭의 동생 여초를 불러 조정에 들어와 숙위하게 하였다. 여륭은 여초를 보냈고, 이어 여초를 통해 표문을 올려 자신들도 내지로 옮겨 살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요흥은 상서좌복야 제난, 진서장군 요힐(姚詰), 진원장군 걸복건귀와 조요 등에게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여륭을 맞이하게 하였다.홍시 5년(403년) 8월, 제난 등이 고장에 이르자, 여륭은 흰 수레와 흰 말을 갖추고 길가로 나가 그들을 마중나왔다. 여륭은 이 기회에 제난에게 저거몽손을 공격하도록 권하였다. 제난이 여륭의 말에 넘어가 북량을 공격하자, 저거몽손은 장막해(臧莫孩)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는데, 제난의 선봉군이 패하였다. 이에 제난은 저거몽손과 맹약을 맺은 후에 철수하였다. 이후 제난은 장군 염송(閻松)을 창송태수(倉松太守)로, 곽장(郭將)을 번화태수(番禾太守)로 삼아 각각 두 성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또, 사마 왕상(王尚)에게 양주자사(涼州刺史)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고, 병사 3,000명을 배속시켜 고장을 진수하게 한 뒤에 여륭의 종실과 관리들, 그리고 고장의 백성 10,000여 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왕상이 고장에 남은 백성들을 신뢰와 의리로 이끄니, 백성들은 그의 은혜로운 교화를 마음에 품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여륭이 장안에 이르자, 요흥은 그를 산기상시로 삼고, 그 동생 여초는 안정태수(安定太守)로 삼았다. 그 밖의 문관과 무관들도 각자의 재능에 따라 발탁하여 관직에 제수하였다. 이때 저거몽손은 동생 저거나(沮渠拏)를 보내 그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동진의 초왕 환현이 사신을 보내 우호를 맺고 후진에 포로로 잡혀있는 신공정과 하담지(何澹之)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흥은 신공정은 남겨 두고 하담지만 돌려보내며 그에게 말하기를,
"환현은 시대의 운수와 천명을 헤아리지 않고 장차 제위를 찬탈하여 반역을 꾀하려 하나, 하늘이 아직 진(晉)을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의거(義舉)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환현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니, 경이 지금 급히 돌아가면 반드시 그의 패망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도 늦기는 하겠지만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공정도 자신을 지키던 사람들을 속이고 담을 넘어 달아나 강동(江東)으로 돌아갔다.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를 자의참군으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홍시 6년(404년) 2월, 남량의 독발녹단은 후진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연호를 없애고, 상서(尚書)·승(丞)·낭(郎) 등의 관직도 폐지하였다. 그리고 참군 민상(閔尚)을 보내 후진에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요흥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 독발녹단은 양주(涼州)를 관할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요흥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달에 북부(北部) 선비족의 여러 부족들도 모두 사신을 보내 후진에 공물을 바치고 복종의 뜻을 표하였다.
홍시 6년(404년) 3월 9일[6], 북위군이 후진의 녕북장군 · 태평태수(太平太守) 형담(衡譚)을 사로잡고, 3,000여 명을 약취하여 돌아갔다.
요흥은 대장군 · 농서공 요석덕과 별장(別將) 요염성(姚斂成), 요수도(姚壽都) 등에게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후구지의 구지왕 양성을 정벌하게 하였다. 요수도 등은 탕창(宕昌) 방면으로 진입하였고, 요염성은 하변(下辯)에서 진군하였는데, 양성은 동생 양수(楊壽)를 보내 요염성을 막게 하고, 조카 양빈(楊斌)을 보내 요수도를 막게 하였다. 요수도가 후구지의 군대를 요격하여 양빈과 그의 병사들을 모두 포로로 잡으니, 양수 등은 두려워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이후 요석덕은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다.
동진의 여남태수(汝南太守) 조책(趙策)은 자신이 지키던 곳을 버리고 후진으로 귀순하였다.
2.8. 불교를 받아들이다.
홍시 6년(404년) 11월, 승려 구마라집이 장안에 도착하였다.홍시 7년(405년) 정월, 요흥은 구마라집을 소요원(逍遙園)에 머물게 하고 국사(國師)의 예로 대우하였으며, 그를 신처럼 받들어 매우 각별히 총애하였다. 요흥은 직접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소요원으로 가서, 구마라집 여러 승려들을 징현당(澄玄堂)으로 불러 모으고 구마라집이 불경을 강설하는 것을 들었다. 이후 대대적으로 탑과 사찰을 짓고, 소요원에 궁의 전각을 건축하였다. 뜰 좌우에는 높이가 100척에 이르는 누각이 있었고 서로 40장 떨어져 있었는데, 둘레가 한 아름이나 되는 삼베 밧줄을 걸어 양쪽 끝을 각각 누각 위로 통하게 하였다. 법회가 열리는 날이면 두 사람이 각기 누각 안에서 나와 밧줄 위를 걸어가게 하여, 마치 부처와 신령이 서로 만나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구마라집은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하루에 천 자씩 외웠는데, 대체로 그 뜻까지도 잘 이해하였으며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한 중국의 언어에도 능통하였다. 그가 이전에 번역된 경전들을 살펴보니 잘못된 곳이 많고 범어 원본과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이에 요흥은 승려 승계(僧契), 승천(僧遷), 법렴(法斂), 도류(道流), 도표(道標), 도항(道恒), 승예(僧睿), 승조(僧肇), 담순(曇順) 등 800여 명에게 다시 《대품경(大品經)》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후 구마라집이 서역어 원본을 들고 요흥은 옛 번역본을 들어 서로 대조하여 확인하였는데, 새로 번역한 문장이 옛 번역과 다른 경우에도 모두 경전의 이치와 뜻에 부합하였다. 이어서 여러 불교 경전과 서적 300여 권을 번역하였고, 당시 새로 번역된 경전들은 모두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이었다. 요흥이 이처럼 불교에 마음을 기울이자 공경 이하의 신하들도 모두 불교를 신봉하였고, 먼 곳에서부터 후진으로 찾아온 승려가 5,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불심이 매우 높은 사람이 50명이나 되었다.
요흥이 영귀리(永貴里)에 불탑을 세우고, 궁궐 안에는 반야대(波若臺)를 세웠다. 또한 수미산(須彌山)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사방에는 높은 바위와 가파른 절벽을 조성하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 산림과 초목을 매우 정교하고 기이하게 만들어 놓았다. 신선과 부처의 형상 가운데 사람들이 이전에 알거나 본 적이 없는 것들도 만들어 놓았으므로 모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당시 후진에서는 좌선하는 승려가 항상 1,000명에 달하였다. 주와 군의 백성들도 이러한 풍조에 감화되어 불교를 받들었으니,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불교를 믿을 정도였다.
이보다 앞서 유유가 환초의 황제 환현을 토벌하여 죽이고, 동진의 안제를 다시 황제로 복위시켰다. 이에 환초의 위장군 · 신안왕 환겸, 임원왕 환이(桓怡), 옹주자사(雍州刺史) 환울(桓蔚), 좌위장군 환밀(桓謐), 중서령 환윤(桓胤), 장군 하담지 등이 강동에서 도망쳐 후진으로 망명해 왔다.
2.9. 후구지 복속
홍시 7년(405년) 5월, 농서공 요석덕과 관군장군 서낙생(徐洛生) 등이 병력을 거느리고 구지왕 양성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양성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때 요흥은 다시 군대를 보내어 건무장군 조곤(趙琨)은 탕창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장군 염구(斂俱)는 한중(漢中)을 침공하게 하였다. 염구는 고성(固城)을 함락시키고, 유민 곽도(郭陶) 등 3,000여 호를 관중(闗中)으로 옮겼다.홍시 7년(405년) 7월, 구지왕 양성이 항복을 청하며 아들 양난당(楊難當)과 관료들의 자제 수십 명을 인질로 보냈다. 요흥은 양성의 투항을 받아주고, 그를 사지절 · 산기상시 · 도독익·녕2주제군사(都督益寧二州諸軍事) · 정남대장군 · 개부 · 익주목(益州牧)으로 삼고 무도후(武都侯)에 봉하였다.
동진의 대권을 장악한 거기장군 유유가 참군 형개지(衡凱之)를 상산공 요현에게 보내 우호 관계를 맺기를 청하였다. 요현은 자신의 사마 길묵(吉默)을 보내 답례하였고, 이때부터 양국 사이에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유는 이전에 요흥이 빼앗은 남향(南鄉) 등 여러 군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요흥은 이를 흔쾌히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불가하다며 간언하자 요흥이 말하기를,
"천하에서 선한 도리는 하나뿐이다. 유유는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환현을 토벌하여 주살하고 진(晉) 황실을 바로 세워 보좌하였다. 안으로는 여러 정사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국경을 안정시켰는데, 내가 어찌 몇 개의 군(郡)을 아까워하여 그의 아름다운 공업을 이루어 주지 않으려 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남향(南鄉), 순양(順陽), 신야(新野), 무음(舞陰) 등 12개 군을 떼어 동진에게 돌려주었다.홍시 7년(405년) 10월, 동진의 강릉현령(江陵縣令) 나수(羅脩)가 왕혜룡과 함께 후진으로 망명해 왔다.
홍시 8년(406년) 6월, 남연의 사도 · 북지왕 모용종(慕容鍾), 상서우복야 · 제양왕 모용억(慕容嶷), 고도공 모용시(慕容始)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모두 후진으로 망명해 왔다.
2.10. 양주 지배권 상실
홍시 8년(406년) 6월, 농서공 요석덕이 상규에서 조정으로 들어와 조회하였다. 요흥은 그를 위해 대사면령을 시행하였다. 요석덕이 돌아갈 때에는 요흥이 직접 그를 전송하여 옹(雍)에 이른 뒤에야 돌아왔다. 또 나라 안과 조정의 문무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이름을 지을 때 요흥의 숙부 요서와 요석덕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두 사람을 특별히 예우한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이때부터 점차 상서롭지 못한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번은 태사령 곽뇌(郭黁)가 요흥에게 아뢰었다.
"술해(戌亥)에 해당하는 해에는 반드시 서북쪽에서 요사스러운 도적이 일어날 것이니, 마땅히 그 칼날을 조심해야 합니다. 군사가 일어나면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죽는 자는 흐트러진 마(麻)처럼 많을 것입니다. 융마(戎馬)가 끊임없이 오가며 농두(隴頭)에 모이고,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은 거처가 안정되지 못하게 되니, 나라와 조정은 밤낮으로 사방의 사태를 수습하느라 지치게 될 것입니다."
당시 후진의 영역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났는데, 이를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뒤에는 효험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또, 여러 차례 요사스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신녀(神女)'라고 칭하였으므로, 요흥은 명을 내려 이들을 처형하게 하였다.
참새 수만 마리가 종묘 위에서 서로 싸웠는데, 깃털이 부러져 떨어지고 죽는 새도 매우 많았다. 이러한 일이 한 달 남짓 계속된 뒤에야 그쳤다. 이에 식견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지금 참새들이 종묘 위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니, 장차 자손들 사이에 다툼과 변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요흥의 궁전 뒤에서 소가 우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렸으며, 여우 두 마리가 장안성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여우 한 마리는 요흥의 궁전 지붕에 올라갔다가 궁궐 안으로 달아났고, 다른 한 마리는 시장으로 들어갔다. 요흥은 사람들을 시켜 찾게 하였으나 모두 붙잡지 못하였다.얼마 뒤, 요흥은 두우(杜郵)에서 양목(羊牧)에 이르는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 달에 독발녹단이 말 3,000필과 양 30,000마리를 바쳤다. 요흥은 그가 충성을 다한다고 여겨 독발녹단을 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 · 양주자사(涼州刺史) · 거기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예전에 독발녹단이 양주를 맡겨달라는 청을 마침내 들어주어 고장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양주자사 왕상을 소환해 장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양주 사람 신도영(申屠英) 등은 주부 호위(胡威)를 장안으로 보내어 왕상을 그대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허락하지 않다가 나중에 호위를 불러 접견하자, 호위가 눈물을 흘리며 요흥에게 말했다.
"신(臣)이 사는 양주(涼州)가 왕조의 교화를 받든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이 땅은 궁벽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 조정의 위엄이 직접 미치지 못하므로, 저희는 쓸개를 입에 물고 얼음 위에 깃든 듯한 심정으로 외로운 성을 홀로 지켜 왔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스스로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는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을 믿고, 아래로는 훌륭한 목민관의 어진 정치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과 사람의 뜻을 거슬러 중화의 땅을 융적(戎狄)에게 내주시려 합니다. 만약 독발녹단(禿髪傉檀)의 재능과 명망이 한 시대를 맡길 만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듣자 하니 저희를 말 3,000필과 양 30,000마리와 맞바꾸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가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군사나 국가의 일로 인해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면 상서성(尚書省)에서 명령서 하나만 내리면 될 일입니다. 저희 양주(涼州)에는 3,000여 호가 있으니 집집마다 말 한 필씩 내게 하면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이면 모두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 지방 전체를 이 간악한 오랑캐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옛날 한(漢)의 무제(武帝)는 천하의 재물과 인력을 기울여 하서(河西)를 개척하고 여러 융족을 서로 단절시켜 흉노(匃奴)의 오른팔을 잘라 놓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침내 대완(大宛)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비를 과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바야흐로 옥문(玉門)에 정사를 펼치시고, 교화를 서역에까지 미치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섯 군의 땅을 험윤(獫狁)에게 넘겨주고, 충성스러운 중화의 백성들을 포악한 오랑캐에게 버리려 하십니까? 이는 단지 저희 양주(涼州)의 백성만 도탄에 빠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성스러운 폐하께서 해가 기울도록 끼니도 들지 못할 만큼 근심해야 할 화근이 될까 두렵습니다."
요흥은 이를 듣고 후회하여 서평(西平) 사람 차보(車普)를 급히 보내 왕상의 귀환을 중지시키게 하였고, 다시 사신을 보내 독발녹단에게 그 뜻을 알리게 하였다. 그러나 마침 독발녹단은 이미 고장에 도착해 있었다. 차보가 먼저 사정을 알려 주었지만, 독발녹단은 곧바로 왕상을 압박하여 떠나게 하고 마침내 고장에 들어갔다.옛날 한(漢)의 무제(武帝)는 천하의 재물과 인력을 기울여 하서(河西)를 개척하고 여러 융족을 서로 단절시켜 흉노(匃奴)의 오른팔을 잘라 놓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침내 대완(大宛)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왕비를 과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바야흐로 옥문(玉門)에 정사를 펼치시고, 교화를 서역에까지 미치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섯 군의 땅을 험윤(獫狁)에게 넘겨주고, 충성스러운 중화의 백성들을 포악한 오랑캐에게 버리려 하십니까? 이는 단지 저희 양주(涼州)의 백성만 도탄에 빠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성스러운 폐하께서 해가 기울도록 끼니도 들지 못할 만큼 근심해야 할 화근이 될까 두렵습니다."
왕상이 장안에 도착한 뒤, 요흥은 그가 후량이 멸망하여 여륭 등이 장안으로 갈 당시에 후량의 궁인을 사사로이 숨긴 죄와 도망자 박화(薄禾) 등을 제멋대로 죽였다는 죄로 남대(南臺)에 구금하였다. 이에 왕상의 별가 종창(宗敞), 치중 장목(張穆), 주부 변헌(邊憲)과 호위 등이 상소하여 왕상을 변호하였다.
"저희 양주(涼州)는 황량한 변경에 위치하여 적들과 맞닿아 있으므로, 태평할 때에도 팔짱을 끼고 편안히 지낼 형편이 아니며, 운수가 나쁠 때에는 곧 나라가 기울고 무너지는 재난을 겪게 됩니다. 장씨(張氏)의 기반이 무너진 뒤에는 덕에 의한 교화가 끊겨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여씨(呂氏)의 운명도 다해 가면서 올빼미와 같은 간악한 무리가 활개를 쳤습니다. 백성들은 끝없는 고통에 빠졌고 서하(西夏)에는 불길이 번지는 듯한 재앙이 닥쳤습니다. 다행히 황제께서 굽어살피시어 순후한 교화가 먼 곳까지 미쳤고, 자사(刺史) 왕상(王尚)은 거의 멸망한 주를 맡아 보전하기 어려운 땅에서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가볍게 여기고 아랫사람들을 이끌었으며, 몸소 검소하게 지내고 비용을 절약하였습니다. 수고로움과 편안함, 풍족함과 궁핍함을 모두 백성들과 함께하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독려하여 백성들이 시기를 놓쳐 생업을 폐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런 뒤 왕조의 위엄을 떨쳐 조정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쓸어버리고, 황제의 은택을 돌려 사악한 기운을 씻어 냈습니다. 이에 여러 반역 세력은 얼음이 녹듯 무너졌으니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마치 가을 서리에 대나무 껍질이 떨어지는 것과 같아 거센 바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찌 한(漢)의 정원후(定遠侯) 반초(班超)만이 높이 평가받을 자이며, 영평후(營平侯) 조충국(趙充國)만이 홀로 훌륭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 조정의 계획이 바뀌어 다른 사람에게 직임이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보기 드문 공적이 거의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끝까지 완성되지 못하였고, 한번 놓치면 다시 얻기 힘든 기회를 맞이하고도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사정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왕상은 멀리 떨어진 변경에서 오랫동안 복무하며 밖에서 온갖 수고를 다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공로가 아직 충분한 보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공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사(京師)에 도착한 지 이제 스무 날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다시 수레를 타고 출정하라는 명령은 내려지지 않고 주변의 참소와 비방에서 비롯된 책망만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왕상은 여씨(呂氏)의 궁인 배씨(裴氏)를 데려왔고 도망자 박화(薄禾) 등을 죽였다는 이유로 남대(南臺)에 구금되었습니다. 폐하께서 밝게 살피시어 잠시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그를 비난하고 처벌하려는 글은 아직 장부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배씨의 나이는 곧 쉰에 가까워 머리가 반백이 되었고, 본래 자기 집에서 과부로 살았을 뿐 왕상의 집에 있던 여인이 아닙니다. 나이도 많고 용모도 쇠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그녀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또, 변방의 요충지를 지키는 일은 많은 사람의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박화 등은 사사로이 달아난 자들이므로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했으니, 그들을 죽여 다른 살인을 막은 것은 변경을 안정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설령 배씨를 보내지 않은 일을 죄라 하더라도, 이는 궁중의 천한 여자 한 명이 빠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로를 논한다면 그의 공은 크고, 허물을 말한다면 그의 잘못은 작습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털을 불어 흠집을 찾듯 작은 잘못을 캐내어 공로는 잊고 허물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옛 현자들이 당대에 피눈물을 흘렸던 까닭이며, 이 미천한 신하들이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뿌리는 까닭입니다.
또한, 왕상은 나라를 섬기며 두 조정을 거쳤으므로 그의 역량은 이미 지난 행적에서 명백히 드러났고, 그의 인품과 재능은 성상께서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설령 작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공로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끝없는 은혜를 널리 베푸시어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 주듯 큰 덕(德)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서주(西州)에서 태어나 조정에 날아올라 도움을 드릴 재주도 없었으며, 오랫동안 참람한 정권 아래 묻혀 살아 벼슬길로 나아갈 길도 끊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폐하의 교화가 저희에게 미치자 낚싯대를 버리고 세상에 나갈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 마침내 이름을 관적에 올리고 몸을 맡겨 신하가 되었습니다. 과분하게도 관리의 지위에 있게 되었으니, 주군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근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발에 굳은살이 겹겹이 생길 만큼 먼 길을 찾아와 진정을 아뢰는 것이오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저희의 충정을 밝게 헤아려 주십시오."
요흥은 이 상소를 읽고 크게 기뻐하며 황문시랑 요문조(姚文祖)에게 물었다.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 조정의 계획이 바뀌어 다른 사람에게 직임이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보기 드문 공적이 거의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끝까지 완성되지 못하였고, 한번 놓치면 다시 얻기 힘든 기회를 맞이하고도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사정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왕상은 멀리 떨어진 변경에서 오랫동안 복무하며 밖에서 온갖 수고를 다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공로가 아직 충분한 보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공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사(京師)에 도착한 지 이제 스무 날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다시 수레를 타고 출정하라는 명령은 내려지지 않고 주변의 참소와 비방에서 비롯된 책망만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왕상은 여씨(呂氏)의 궁인 배씨(裴氏)를 데려왔고 도망자 박화(薄禾) 등을 죽였다는 이유로 남대(南臺)에 구금되었습니다. 폐하께서 밝게 살피시어 잠시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그를 비난하고 처벌하려는 글은 아직 장부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배씨의 나이는 곧 쉰에 가까워 머리가 반백이 되었고, 본래 자기 집에서 과부로 살았을 뿐 왕상의 집에 있던 여인이 아닙니다. 나이도 많고 용모도 쇠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그녀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또, 변방의 요충지를 지키는 일은 많은 사람의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박화 등은 사사로이 달아난 자들이므로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했으니, 그들을 죽여 다른 살인을 막은 것은 변경을 안정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설령 배씨를 보내지 않은 일을 죄라 하더라도, 이는 궁중의 천한 여자 한 명이 빠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로를 논한다면 그의 공은 크고, 허물을 말한다면 그의 잘못은 작습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털을 불어 흠집을 찾듯 작은 잘못을 캐내어 공로는 잊고 허물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옛 현자들이 당대에 피눈물을 흘렸던 까닭이며, 이 미천한 신하들이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뿌리는 까닭입니다.
또한, 왕상은 나라를 섬기며 두 조정을 거쳤으므로 그의 역량은 이미 지난 행적에서 명백히 드러났고, 그의 인품과 재능은 성상께서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설령 작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공로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끝없는 은혜를 널리 베푸시어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 주듯 큰 덕(德)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서주(西州)에서 태어나 조정에 날아올라 도움을 드릴 재주도 없었으며, 오랫동안 참람한 정권 아래 묻혀 살아 벼슬길로 나아갈 길도 끊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폐하의 교화가 저희에게 미치자 낚싯대를 버리고 세상에 나갈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 마침내 이름을 관적에 올리고 몸을 맡겨 신하가 되었습니다. 과분하게도 관리의 지위에 있게 되었으니, 주군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근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발에 굳은살이 겹겹이 생길 만큼 먼 길을 찾아와 진정을 아뢰는 것이오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저희의 충정을 밝게 헤아려 주십시오."
"경은 종창(宗敞)을 알고 있는가?"
요문조가 대답하였다."신(臣)과 같은 고을 출신으로, 서쪽 일대의 뛰어난 인재입니다."
요흥이 말했다."왕상을 변호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문장과 뜻이 매우 훌륭하다. 아마 왕상이 깊이 생각하여 지은 글일 것이다."
요문조가 대답하였다."왕상은 남대(南臺)에 구금되어 있어 빈객들과 왕래할 수 없습니다. 종창은 지금 양환(楊桓)의 집에 머물고 있으니, 이 상소가 왕상이 지은 것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요흥이 말했다."그렇다면 이 글은 양환이 생각을 짜내어 지은 것인가?"
요문조가 대답하였다."서쪽 일대에서는 종창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양환보다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종창은 예전에 여초(呂超)와 교류하였으니, 폐하께서 한번 여초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이에 요흥이 여초를 불러 물었다."종창의 글재주는 어떠한가? 누구와 견줄 만한 사람인가?"
여초가 대답하였다.요흥은 곧 종창의 상소문을 여초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양주(涼州)처럼 작은 지방에서 어찌 이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는가?"
여초가 대답하였다."신(臣)이 종창의 다른 글들과 이것을 비교해 보건대, 이 정도는 특별히 대단하다고 할 것도 못 됩니다. 아름다운 옥은 곤륜(崑嶺)에서 나오고, 빛나는 진주는 바닷가에서 생겨납니다. 반드시 출신 지역으로 사람의 재능이 제한된다면, 문명(文命)은 대하(大夏)에서 버림받을 사람에 불과하고, 희창(姬昌)은 동이(東夷)에서 배척받을 선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마땅히 그 사람의 글재주가 어떠한지만 따져야지, 출신 지역을 가지고 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요흥은 크게 기뻐하며, 왕상의 죄를 사면하고 그를 상서로 임명하였다.홍시 8년(406년) 11월, 진원장군 걸복건귀가 조정에 들어와 조회에 참석하였다.
홍시 9년(407년) 정월, 요흥은 정덕전(正徳殿)에서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았다. 이때 걸복건귀의 세력이 점차 강해져 제어하기 어렵다고 여겨 그를 장안에 머물게 하고 주객상서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세자 걸복치반를 행서이교위(行西夷校尉)로 삼아 그 휘하의 무리를 감독하게 하였다.
홍시 9년(407년) 4월, 동진 조정에서 평북장군 부선(苻宣)을 양주독호(梁州督護)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후진의 영역인 한중을 침범하게 하였다. 그러자 후진의 양주별가(梁州別駕) 여영(呂瑩)과 한중 사람 서일(徐逸), 석난(席難)이 군사를 일으켜 부선에게 호응하였다. 후진의 남양주자사(南梁州刺史) 왕민(王敏)이 이들을 토벌하자, 부선은 후구지의 무도후 양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양성이 곧 군대를 보내 진구(濜口)에 이르게 하니, 왕민은 남쪽으로 물러나 무흥(武興)에 주둔하였고, 양성은 후진을 배반하고 다시 동진과 교통하였다.
2.11. 유발발의 반란
홍시 9년(407년) 5월, 유연의 욱구려사륜이 후진과 화친하고 말 8,000필을 선물하였다. 말들이 막 황하를 건너기 시작했을 무렵, 후진의 안북장군 유발발이 요흥이 가문의 원수인 북위와 우호 관계를 맺은 데 분노하였다. 이에 고평공 몰혁간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그의 무리 수만 명을 거둔 다음, 욱구려사륜이 보내온 말들을 가로채고, 영북(嶺北)의 여러 진을 약탈하였다.이보다 앞서 요흥은 북위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1,000필로 시벽 전투에서 사로잡힌 적백지 등을 속환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억류하고 있던 하적간을 북위로 돌려보냈다. 북위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적백지, 요백금, 당소방, 요양국, 강환 등을 풀어 장안으로 돌아가게 하였고, 요흥은 이들의 작위와 관직을 모두 이전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이 때문에 유발발은 요흥이 북위와 다시 화친한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홍시 9년(407년) 6월, 요흥이 태자 요홍에게 녹상서사(録尚書事)를 맡겼다.
홍시 9년(407년) 7월, 남연의 2대 황제 모용초는 어사중승 봉개(封愷)를 보내 우호를 청하면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곧이어 다시 중서령 한범(韓範)을 보내 표문을 올려 후진의 번국을 자처하였다.
홍시 9년(407년) 8월, 요흥은 답례차 원외산기상시 위종(韋宗)을 보내 모용초에게 사절로 가게 하였다.
홍시 9년(407년) 9월, 초촉을 세운 성도왕 초종이 동진에 반란하여 익주(益州)와 영주(寧州) 지역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는데, 동진의 양성태수(襄城太守) 유경선이 병사 5,000명을 거느리고 초종을 공격하였다. 이에 초종은 후진으로 사신을 보내 번국을 자처하였다.
홍시 9년(407년) 10월, 후진의 하주자사(河州刺史) 팽해념(彭奚念)이 반란을 일으켜 독발녹단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요흥은 걸복치반에게 하주자사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이 달에 모용초가 다시 상서좌복야 장화(張華), 급사중 종정원(宗正元)을 보내 대악(大樂)의 악공 120명을 후진에 바쳤다. 요흥은 이에 모용초의 어머니와 아내를 돌려보냈으며, 많은 재물과 예물을 후하게 갖추어 보내 주었다.
화산(華山)에서는 땅에서 뜨거운 물이 끓어 솟아올랐다. 그 범위가 사방 100여 보에 이르렀으며, 그 안의 생물은 뜨거운 열에 모두 익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다섯 달이 지나서야 그쳤다.
유발발이 후진에 복속되어 있었던 선비족 설간부(薛干部) 등 3부를 격파해 그 무리 10,000여 명을 항복시켰다. 그리고는 삼성(三城) 이북에 후진이 세워둔 여러 주둔지를 토벌하여 후진의 장수 양비(楊丕)와 요석생(姚石生) 등을 참수하였다. 이후로 유발발이 당장 후진을 무너뜨리기에는 상당한 힘이 소요될 것이라 판단하여, 요흥이 죽고 후진이 점차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영북군과 하동군을 자주 침범해 약탈로 세력을 키우니, 각 성들은 낮에도 감히 문을 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국경이 혼란에 빠지자 요흥은 탄식하며 유발발을 받아준 것을 후회하였다.
홍시 9년(407년) 11월, 유발발이 양무(陽武) 전투에서 독발녹단의 군대를 대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석원(青石原)에서 후진의 장수 장불생(張佛生)을 격파하고, 5,7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2.12. 연이은 작전 실패
홍시 10년(408년) 3월, 남량의 독발녹단과 북량의 저거몽손이 번갈아 서로 공격하였다. 이때 독발녹단은 이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팽해념을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팽해념은 스스로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독발녹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홍시 10년(408년) 5월, 촉왕 초종이 다시 동진의 반란 세력인 노순과 은밀히 내통하였다. 초종은 표문을 올려 환겸을 자신에게 보내 도와 달라고 요청하면서,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함께 유유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요흥이 이에 대해 환겸에게 의견을 물으니, 환겸이 대답하였다.
"신(臣)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형초(荊楚) 지방에 은덕을 베풀어 왔습니다. 만약 파촉(巴蜀)의 자원을 이용하여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간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한마음으로 호응할 것입니다."
요흥이 말했다."작은 물에는 큰 물고기가 살 수 없소. 초종의 재주와 역량만으로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굳이 그대를 빌려 날개처럼 쓸 필요도 없을 것이오. 그대는 스스로 복을 많이 구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마침내 환겸을 초종에게 보냈다. 이윽고 환겸이 성도(成都)에 이르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어 선비들을 예우하였는데, 초종은 이를 의심하여 환겸을 용격(龍格)에 머물게 하고 사람을 시켜 감시하였다. 환겸은 눈물을 흘리며 여러 아우들에게 말하기를,"요주(姚主)의 말은 참으로 신묘했구나."
라 하였다.한편, 양무 전투에서 독발녹단이 수많은 병력을 잃은 이래로, 남량은 밖으로는 북량과 북하로부터 압박 받고, 안으로는 팽해념 등의 반란하여 큰 혼란에 빠졌다. 요흥은 이처럼 독발녹단이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아진 것을 보고 이 기회를 틈타 그를 취하려 하였다. 이에 상서랑 위종을 남량으로 보내 정탐하게 하였다. 위종은 독발녹단과 만나 그와 더불어 당대의 형세에 대해 논하였는데, 독발녹단이 형세를 막히는 부분 없이 상세히 말하는 것을 보고는 돌아와 요흥에게 아직 남량 정벌은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러나 요흥은 따르지 않고, 중군장군 · 광평공 요필, 후군장군 요염성, 진원장군 걸복건귀 등에게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남량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상서좌복야 제난 등에게는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주어 북하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이부상서 윤소(尹昭)가 간언하였다.
"독발녹단은 험준하고 먼 지형을 믿고 경솔하게 반역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차라리 저거몽손과 이고에게 명을 내려 서로 공격하게 하고, 양쪽이 모두 지치고 쇠약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취하는 것이 낫지, 굳이 조정의 군대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른 바 변장자(卞莊子)가 두 호랑이가 싸우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취했던 계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흥은 또 따르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요필 등이 금성에서 황하를 건넜다. 그의 부장 강기가 요필에게 말하기를,
"지금 왕사(王師)가 대외적으로 유발발을 토벌한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독발녹단은 아직 의심만 하고 있을 뿐 엄중하게 방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저에게 경기병 5,000기를 주시어 그의 진영을 기습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산과 늪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우리에게 귀순할 것이고, 독발녹단은 외로운 성 하나만 홀로 지키게 될 것으로, 가만히 앉아서도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라 하였으나, 요필은 듣지 않았다. 요필은 계속 진군하여 창송(昌松)을 함락하고 남량의 창송태수 소패(蘇霸)를 참수한 뒤, 곧장 남량의 수도인 고장까지 진격하였다. 독발녹단아 성을 굳게 지키며 농성하다가 기병을 불시에 출동시켜 요필의 군대를 습격하자, 요필은 패하여 서원(西苑)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독발녹단은 진북장군 구연(俱延), 진원장군 경귀(敬歸) 등을 보내 추격하게 하였고, 요필은 다시 크게 패하여 갑병 7,000여 명을 잃었다. 이에 요필은 진지를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았고, 독발녹단이 그의 진지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홍시 10년(408년) 7월, 요흥은 위대장군 · 상산공 요현에게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여러 군대를 총지휘해, 요필을 도와 남량을 정벌하게 하였다. 요현은 고평(高平)에 이르러 요필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고장에 이르러 맹흠(孟欽) 등 활을 잘 쏘는 다섯 사람을 보내 양풍문(涼風門) 앞에서 싸움을 걸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아직 활시위조차 당기기 전에 남량의 재관장군 송익(宋益) 등이 병력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고, 맹흠 등 다섯 명은 모두 전투 중에 목이 베였다. 그러자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요염성에게 돌리고, 사신을 보내 독발녹단에게 사죄하였다. 이후 황하 이서 지방을 위무한 뒤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니, 독발녹단도 서숙(徐宿)을 요흥에게 보내 사죄하였다.
한편, 유발발은 상서좌복야 제난 등이 이끄는 토벌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물러나 하곡(河曲)을 지켰다. 제난은 유발발이 이미 멀리 물러났다고 생각하여 군사들을 풀어 들판에서 약탈하게 하였는데, 이를 들은 유발발이 몰래 군대를 이끌고 기습하여 후진군 7,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제난은 군대를 이끌고 황급히 철수하였으나, 유발발이 목성(木城)까지 추격하였다. 결국 제난은 목성에서 유발발에게 사로잡혔고, 후진의 장수와 병사 13,000여 명도 사로잡혔다.
홍시 10년(408년) 8월, 동진의 양성태수 유경선은 이미 삼협(三峽)으로 진입한 뒤, 파동태수(巴東太守) 온조(溫祚)에게 병사 2,000명을 주어 외수(外水) 방면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경선 자신은 익주자사(益州刺史) 포루(鮑陋), 보국장군 문처무(文處茂), 용양장군 시연조(時延祖)를 거느리고 점강(墊江)을 거쳐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유경선이 초종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초종은 사신을 보내 요흥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요흥은 평서장군 요상(姚賞)과 남양주자사 왕민에게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초종을 구원하게 하였고, 이로써 유경선 등은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홍시 11년(409년) 정월, 요흥은 막내동생인 평북장군 요충(姚沖)에게 정로장군 적백지, 보국장군 염만외(斂曼嵬), 진동장군 양불숭과 함께 보병과 기병 40,000명을 거느리고 북하를 토벌하게 하였다. 군대가 영북(嶺北)에 이르자 요충은 군사를 돌려 장안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적백지가 따르지 않아 계획을 그만두었다. 다만, 요충은 자신의 모반 계획이 누설될까 두려워 적백지를 독살하여 입을 막았다.
이 달에 초종이 사신을 보내 그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요흥은 겸사도(兼司徒) 위화(韋華)에게 절(節)을 지니고 가게 하여 책서로 초종을 대도독 · 상국 · 촉왕(蜀王)으로 삼고, 구석(九錫)을 더해 주었다. 의장과 책명에 관한 제도는 모두 위(魏)·진(晉)의 옛 제도와 같게 하였으며, 황제의 명을 받들어 관작을 봉하고 제수하는 일도 모두 왕자(王者)의 의례에 따르게 하였다.
홍시 11년(409년) 2월, 요흥이 평량(平涼)으로 행차하자, 빙익 사람 유궐(劉厥)이 수천 명을 모아 만년(萬年)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태자 요홍은 진군장군 팽백랑(彭白狼)을 보내어 동궁(東宮)의 금군을 거느리고 유궐을 토벌하게 하였다. 팽백랑은 만년에서 유궐을 격파하여 참수하였고, 요홍이 나머지 반란 무리를 사면하였다. 이때 여러 장수들은 승전 소식을 널리 알리는 노포(露布)를 올리면서 적의 수급 수를 부풀려 보고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요홍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주상께서 내게 후방의 일을 맡기셨는데도 내가 도적의 반역을 미리 막아 내지 못했으니, 마땅히 내 몸을 책망하고 죄를 청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어찌 감히 교만하게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겠는가?"
한편, 요흥은 평량에서 조나(朝那)로 갔다가 요충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그리고 서인(庶人)의 예로 장사 지냈다.이 달에 걸복치반이 부한(枹罕)에서 팽해념을 무찌르고 점거한 뒤, 걸복건귀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걸복건귀는 요흥을 따라 평량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전달받고는 몰래 도망쳐 본거지인 원천으로 돌아갔다.
홍시 11년(409년) 3월, 요흥이 장안으로 돌아왔다.
홍시 11년(409년) 4월, 유발발이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약탈하여, 평량 일대의 여러 이민족 7,000여 호를 빼앗은 뒤 의력천(依力川)으로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홍시 11년(409년) 6월, 동진의 예장공 유유가 남연을 공격하자, 남연의 황제 모용초는 상서랑 장강(張綱)을 후진으로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장강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유유의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홍시 11년(409년) 7월, 모용초가 상서령 한범을 후진으로 보내 재차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요흥은 위장군 요강(姚強)에게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한범을 따라가게 하였다.
홍시 11년(409년) 9월, 요흥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북하를 토벌하기 위해 이성(貳城)에 이르렀다. 요흥은 안원장군 요상(姚詳), 보국장군 염만외, 진군장군 팽백랑을 보내 여러 군대의 군량 수송을 나누어 감독하게 하였는데, 여러 군대가 아직 집결하지 않은 사이 유발발이 기병을 거느리고 허점을 틈타 갑자기 들이닥쳤다.
요흥은 보병은 남겨 두고 자신은 가벼운 차림으로 요상(姚詳)의 진영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고 여러 신하가 완강하게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요흥은 듣지 않았다. 오직 상서랑 위종이 요흥의 뜻에 영합하여 속히 출발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자 난대시어사 강릉(姜楞)이 차례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위종은 간사하고 음험하며 충성스럽지 못하여 나라의 계책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를 요참형에 처하여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만일 폐하의 수레가 움직이면 육군(六軍)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사람마다 지킬 뜻을 잃게 될 것이니, 이는 스스로 위험을 취하는 길입니다. 마땅히 사신 한 사람만 보내 요상(姚詳) 등을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요흥은 이를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상서우복야 위화 등도 간언하였다."만약 폐하께서 가벼이 움직이시면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또한 요상(姚詳)의 진영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이 점을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결국 요흥은 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어 유발발을 맞아 싸웠으나, 유발발이 복병을 두었다가 양쪽에서 협공하는 바람에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장수 요유생(姚榆生)이 북하군에게 사로잡히는 등 위기에 빠졌지만, 좌장군 요문종(姚文宗)이 금군을 거느리고 분투하였고, 후속 지원을 맡았던 중루장군 제막(齊莫)도 저족 병사를 통솔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우며 요흥을 지켰다. 유발발은 그들을 끝내 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퇴각하였고, 요흥도 금군 5,000명을 요상(姚詳)에게 배속시켜 이성을 지키도록 한 뒤 장안으로 돌아갔다.한편, 요강은 낙양에 있는 동평공 요소에게 가서 그의 군대와 합세한 뒤에 남연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이성에서 요흥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돌려 장안으로 복귀하였다.
홍시 11년(409년) 10월, 요흥은 국가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관문과 나루의 세금을 늘리고, 소금과 대나무, 산의 목재에도 모두 세금을 부과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간언하기를
"하늘이 온갖 산물을 내어 만물을 기르고, 임금은 천하 만민을 자식처럼 길러야 합니다. 재정을 확충한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라 하였으나 요흥이 말했다."관문과 나루를 넘나들며 산과 강의 이로움을 이용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호화롭고 부유한 집안들이다. 내가 남는 자들의 것을 덜어 부족한 곳을 보충하는 것인데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그리고는 마침내 이 조세 제도를 시행하였다.2.13. 서진(西秦)의 부흥
홍시 12년(410년) 2월, 이전에 도망친 걸복건귀가 다시 진왕(秦王)을 칭하고 군대를 이끌어 금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뒤, 후진의 금성태수 임란(任蘭)을 사로잡았다. 임란이 엄한 낯빛으로 걸복건귀가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버렸다고 꾸짖으니, 걸복건귀는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임란은 옥에서 단식하다가 얼마 안 지나 굶어 죽었다.홍시 12년(410년) 3월, 유발발은 상서 호금찬(胡金纂)에게 기병 10,000여 기를 거느리고 평량을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요흥이 직접 이성으로 가서 평량을 구원하니, 북하군은 크게 패하였고 호금찬은 생포되었다.
얼마 뒤, 유발발은 다시 조카 유나제(劉羅提)를 보내 정양(定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나제는 후진의 북중랑장 요광도(姚廣都)를 사로잡고 그 장수와 병사 4,000여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이에 후진의 장수 조치(曹熾), 조운(曹云), 왕사불(王肆佛) 등은 각각 수천 호의 백성을 이끌고 북하군을 피해 내지로 이주하였다. 요흥은 왕사불의 무리를 황산택(湟山澤)에 정착시키고, 조치와 조운의 무리를 진창(陳倉)에 정착시켰다.
곧이어 유발발이 농우(隴右)를 침공하여 백애보(白崖堡)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청수(清水)로 향하였다. 약양태수 요수도가 자신이 지키던 곳을 버리고 진주(秦州)로 달아나니, 유발발은 그곳의 백성 16,000호를 포로로 끌고 돌아갔다. 요흥은 안정(安定)에서부터 그를 추격하여 수거천(壽渠川)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홍시 12년(410년) 6월, 동진의 하간왕 사마담지(司馬曇之)의 아들들인 사마국번(司馬國璠)과 사마숙번 형제, 장무왕의 아들 사마숙도(司馬叔道)[7]가 후진으로 망명해 왔다. 요흥이 이들에게 물었다.
"유유는 지금 환현을 토벌하여 죽이고 진(晉) 황실을 바로잡아 복구하고 있는데, 경들은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왔는가?"
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기를,"유유는 불량한 무리와 어울려 황실을 약화시키고 있어, 저희들의 종실 가운데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하고 바로설 능력이 있는 자는 모두 그에게 해를 입어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장차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 환현보다도 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피하여 온 것이며, 사실 진심으로 귀순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죽음을 피하려고 왔을 뿐입니다."
요흥은 이들의 솔직한 말을 가상히 여겨 사마국번을 건의장군 · 양주자사(楊州刺史)로, 사마숙도를 평남장군 · 교주자사(膠州刺史)로 임명하고 장안성 내에 근사한 저택을 하사하였다.홍시 12년(410년) 9월, 서진의 걸복건귀가 다시 공격해 왔다. 이로 인해 후진은 약양, 남안(南安), 농서(隴西) 등 여러 군을 잃었다.
2.14. 형주(荊州) 공략전
홍시 12년(410년) 9월, 촉왕 초종이 시중 초량(譙良)과 태상 양궤(楊軌)를 보내 조정에 들어가 요흥을 알현하게 하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강동(江東)을 침공해 달라고 청하였다. 아울러 초종은 환겸을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초도복(譙道福)을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강릉(江陵)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요흥도 전장군 구림(茍林)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류하게 하였다. 환겸은 가는 길에 예전부터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옛 부하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에게 몸을 던져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20,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진군하여 지강(支江)에 주둔하였고, 구림도 강진(江津)으로 진군하여 주둔하였다.환겸의 가문은 강우(江右)의 명문 귀족으로, 그 집안의 부곡들이 형주(荊州)와 초(楚) 지방 곳곳에 퍼져 있었다. 이 때문에 강릉을 수비하는 장수와 병사 가운데 상당수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동진의 형주자사 유도규는 여러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였다.
"환겸이 지금 가까운 곳에 와 있다. 듣건대 여러 장로들 가운데 거취를 달리할 생각을 품은 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어차피 나와 함께 동쪽에서 온 문무 관리만으로도 충분히 일을 해낼 수 있으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애초부터 막지 않겠다."
그리고 밤에 성문을 열어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닫지 않았는데, 모두 유도규를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떠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이때 마침 동진의 옹주자사(雍州刺史) 노종지가 소식을 듣고 강릉을 구원하고자 양양(襄陽)에서 급히 달려왔다. 유도규는 홀로 말을 타고 나가 그를 맞이한 뒤, 노종지를 마음 속 깊이 신뢰하여 그를 강릉에 남겨 수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군대를 거느리고 환겸을 공격하러 나서자, 그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지금 멀리 나가 환겸을 토벌하려 해도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려우며, 구림은 강진(江津)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엿보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성을 공격한다면 노종지가 반드시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일이 어긋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됩니다."
이에 유도규가 말했다."구림은 어리석고 나약하여 별다른 기이한 계책이 없다. 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함부로 성으로 향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환겸을 공격하러 가서 도착하는 즉시 그를 격파할 수 있고, 구림이 머뭇거리며 의심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돌아오게 될 것이다. 환겸이 패하면 구림은 간담이 서늘해질 텐데, 어찌 다시 성을 공격할 겨를이 있겠는가? 게다가 노종지가 홀로 지킨다 한들 어찌 며칠조차 버티지 못하겠는가?"
그리고는 수륙 양면으로 급히 달려가 환겸을 공격하였다. 환겸 등도 수군을 크게 펼쳐 진을 치고, 육지에서는 보병과 기병을 함께 늘어세워 적을 기다렸다. 양군은 지강에서 크게 싸웠고, 환겸의 군대가 결국 패하였다. 환겸은 가벼운 배를 타고 도망하여 구림의 진영으로 향했으나, 유도규가 추격하여 그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이후 유도규가 용구(湧口)로 돌아와 다시 구림을 공격하니, 구림은 두려워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유도규는 자의참군 유준에게 병력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고, 구림을 포함해 후진군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유준은 파릉(巴陵)에서 구림을 참수하였고, 이로써 요흥의 형주 공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15. 기울어진 국운
홍시 13년(411년) 정월, 태자 요홍의 동생인 광평공 요필은 아버지 요흥의 총애를 받아 조정의 정사를 맡게 되었다. 요필의 심복인 강기는 이에 온 마음을 다해 요필에게 아첨하며 붙었다. 강기는 본래 후량을 배반했던 신하로, 아첨과 간사한 술수를 잘 부렸으며 사람들의 친족 사이를 이간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요필이 옹주자사(雍州刺史)로서 임시로 안정에 주둔하고 있었을 당시, 강기는 은밀히 요필에게 진언하여 상산공 요현을 극진히 섬기고 그의 측근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조정에 들어올 기회를 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덕분에 요필은 부름을 받아 상서령 · 시중 · 대장군으로 임명된 것이었다.요필은 황제의 곁에 있게 되자 마음을 열어 사람들을 널리 받아들이고 조정의 대신들을 끌어모아 결탁하였다. 그 세력이 동궁을 압도할 정도가 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때마침 요흥은 유발발과 걸복건귀가 서북쪽에서 난을 일으키고, 독발녹단과 저거몽손이 하우(河右)에서 제멋대로 군사를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군들과 상의하여 출중한 장수로 하여금 두 방면을 진무하려 하였다. 이에 농동태수(隴東太守) 곽파(郭播)가 요흥에게 말했다.
"영북(嶺北)의 두 주에는 진호(鎮戶)가 각각 수만 호씩 있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하여금 이들을 위무한다면 변경을 안정시키고 간악한 무리의 길을 막기에 충분합니다."
요흥이 말했다."나는 늘 염파(廉頗)나 이목(李牧) 같은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진무하게 하고, 상황에 따라 재량껏 일을 처리하게 하고 싶었으나,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늘 패배를 초래하곤 하였다. 경이 한번 인물을 천거해 보라."
곽파가 다시 말했다."청렴하고 결백하며 변경의 백성을 잘 위무하는 인물로는 평륙자(平陸子) 왕원시(王元始)가 있고, 용맹하며 기이한 계략이 많은 인물로는 건위장군(建威將軍) 왕환(王煥)이 있습니다. 상벌을 반드시 시행하고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는 인물로는 분위장군(奮武將軍) 팽호(彭蚝)가 있습니다."
요흥이 다시 말했다."팽호는 명령을 내리면 금방 행하고, 금지하면 바로 멈추는 능력은 있지만, 변경을 위무할 만한 인재는 아니다. 왕원시와 왕환은 아직 젊어서 내가 그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한다."
이에 곽파가 말했다."광평공(廣平公) 요필(姚弼)은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으니, 한 방면의 진(鎭)을 감독하여 지키게 하기에 적합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멀리 지난날에 수레가 엎어진 일을 거울로 삼고, 가까이는 이미 앞선 실패를 돌이켜 보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요흥은 따르지 않고, 태상 색릉(索棱)을 태위로 삼아 농서내사(隴西內史)를 겸하게 하였다. 걸복건귀는 이에 감격하고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자신이 약탈해 갔던 지방관들을 돌려보내고 죄를 사과하며 항복을 청하였다. 요흥은 북하를 의식하여 임시방편으로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걸복건귀를 정서대장군 · 하주목(河州牧) · 하남왕(河南王)으로, 그의 아들 걸복치반을 진서장군 · 좌현왕(左賢王) · 평창공(平昌公)으로 삼았다.얼마 뒤, 요흥이 삼원(三原)에 갔다가 여러 신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관동(闗東)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관서(闗西)에서는 장수가 나온다'고 하였소. 또, 삼진(三秦)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고, 여·영(汝潁) 지방에도 기이한 선비가 많다고 들었소. 나는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중원(中原)을 차지하였고, 유사(流沙) 동쪽과 회·한(淮漢) 북쪽에서 나 자신을 낮추어 인재를 구해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좌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건만, 나의 밝음이 아래까지 비추지 못하여 인재들이 벼슬길이 막혔다고 탄식하게 되었소. 지혜가 한 관직에서 효과를 나타내거나 행동에서 한 가지라도 훌륭한 점이 드러난 사람이라면, 나는 차례차례 품계를 올려 등용하여 뒷문이 막혔다고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였소. 경들은 마땅히 낮은 곳에 묻혀 있는 인재들을 밝게 드러내어 나를 도와 천거하도록 하시오."
상서우복야 양희가 대답하였다."저희들은 성상의 뜻을 받들어 인재를 찾으며 감히 쉬거나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라를 보필할 만한 큰 재주나 임금을 보좌할 만한 그릇을 갖춘 사람을 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현자가 부족하다고 할 만합니다."
요흥이 말했다."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 때마다 장수로는 손무(孫武)·오기(吳起) 같은 인물만을, 재상으로는 소하(蕭何)·등우(鄧禹) 같은 인물만을 얻었던 것이 아니오. 끝내 옛 현인 가운데서만 장수를 찾고, 후대의 뛰어난 이들 가운데서만 재상을 구한 것도 아니오. 시대에 맞추어 인재를 임용하였기에 모두 능히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오. 경 스스로가 사람을 알아보고 발탁하는 데 밝지 못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에 인재가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소?"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어느 날, 태사령 임의(任猗)가 요흥에게 아뢰었다.
"흰 기운이 북쪽에서 나타나 동서로 하늘을 가로질러 500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장차 군대가 패하고 장수가 죽어 피가 흐를 징조입니다."
홍시 13년(411년) 2월, 요흥의 조카인 안원장군 요상(姚詳)은 행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북하군의 압박을 받으면서 마침내 군량이 다하고 화살마저 떨어지자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요상이 대소(大蘓)에 이르렀을 때, 북하의 평북장군 녹혁간(鹿奕干)이 길을 막아 공격하였다. 요상의 군대는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요상은 결국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요흥은 위대장군 · 상산공 요현을 보내 요상을 맞이하게 하였으나, 요현은 요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행성으로 가서 그대로 머물러 주둔하였다. 이에 요흥은 요현을 도독안정·영북2진제군사(都督安定嶺北二鎮諸軍事)로 삼아 안정과 영북 두 진의 군대를 총괄하게 하였다.
영천태수(潁川太守) 평도(平都)가 허창(許昌)에서 조정으로 들어와 요흥을 알현하고 보고하였다.
"유유가 감히 간사한 계책을 품고 작피(芍陂)에 군량과 물자를 모아 두었으니,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려는 뜻이 있는 듯합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그것을 불태워 그의 계획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요흥이 말했다."유유는 매우 미약한데 어찌 감히 우리의 변경을 넘볼 수 있겠는가? 설령 간사한 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손의 시대에나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어서 상서 양불숭에게 말하기를,"오(吳) 지방의 애송이들이 제 분수를 알지 못하고 감히 과분한 뜻을 품고 있구나. 초겨울이 되면 경에게 정예 기병 30,000기를 맡겨 그들이 쌓아 둔 물자를 불태우게 하겠다."
라 하니, 양불숭이 말했다."폐하께서 신에게 이 임무를 맡기신다면, 마땅히 비구(肥口)에서 회수(淮水)를 건너 곧바로 수춘(壽春)으로 진격하겠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성 아래 주둔하는 한편 경기병을 풀어 들판을 휩쓸게 하여 회남(淮南)을 황폐하게 만들고, 병력과 군량을 모두 소진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오(吳) 지방의 애송이들은 고개를 들거나 숙이는 것조차 불안해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백이 날아갈 만큼 크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에 요흥은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 객성(客星)이 동정(東井)에 들어왔고, 요흥이 머무는 곳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앞뒤로 모두 156차례나 땅이 흔들렸다. 공경들이 표문을 올려 자신들의 죄를 청하자, 요흥이 말했다.
"재앙과 하늘의 견책이 내려오는 것은 그 허물이 임금에게 있는 것이다. 근래에는 때때로 그 죄를 삼공(三公)에게 돌리곤 하는데, 이는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짐이 마땅히 스스로를 살피고 반성하여 송경공(宋景公)의 뜻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공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모두 관모와 신발을 갖추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라."
홍시 13년(411년) 11월, 서진의 걸복건귀가 다시 배반해 백양보(柏陽堡)에서 후진의 약양태수 요룡(姚龍)을 쳐서 격파하고, 이어 수낙성(水洛城)에서 후진의 남평태수(南平太守) 왕경(王憬)을 무찌르고 백성 3,000여 호를 빼앗아 담교(譚郊)로 옮겼다.
홍시 14년(412년) 6월, 서진의 왕 걸복건귀가 그 조카인 진위장군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피살되자, 세자 걸복치반이 새로 즉위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요흥에게 이 기회에 서진을 취하라고 권하였으나, 요흥이 거절하며 말했다.
"걸복건귀는 이전에 이미 마음을 돌려 올바른 길을 따랐으니, 바야흐로 그를 품어 위무하려던 참이었다. 그가 상을 당한 틈을 타 공격하는 것은 짐의 본래 뜻이 아니다."
홍시 14년(412년) 10월, 후구지의 구지공 양성이 군사를 믿고 반란을 꾀하여 기산(祁山)을 침범하고 소란을 일으켰다. 요흥은 건위장군 조곤에게 기병 5,000기를 통솔해 선봉을 맡게 하고, 입절장군 요백수(姚伯壽)에게 보병을 통솔하여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아울러 전장군 요회(姚恢)와 좌장군 요문조는 취협(鷲峽)으로 출병하고, 진서장군 · 제공 요숭은 양두협(羊頭峽)에서 출병하였으며, 우위장군 호익도(胡翼度)는 음밀(陰宻)에서 출발하여 견성(汧城)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요흥은 군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후구지를 토벌하게 하였으며, 자신도 경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옹(雍)에서 출발하여 여러 장수와 농구(隴口)에서 합류하였다. 천수태수 왕송총이 요숭에게 말했다.
"선제(요장)께서는 신묘한 계략이 변화무쌍하였고 그 위엄과 무용은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관군장군(冠軍將軍) 서낙생(徐洛生)도 남보다 뛰어난 용맹과 굳센 결단력을 갖추고 있어 선제를 보좌하여 나라를 세우는 데 힘썼습니다. 그런데도 두 차례나 구지(仇池)에 들어갔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습니다. 이는 양씨(楊氏)가 지혜롭고 용맹하여 스스로를 온전히 지켜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그곳의 지세가 험하고 견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곤(趙琨)의 병력과 사군의 위세를 이전 조정의 군세와 비교해 보면, 실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군께서도 그곳의 지형과 유리하고 불리한 점을 자세히 파악하여 이 점을 잘 알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이를 표문으로 폐하께 아뢰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요숭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이윽고 구지공 양성은 군대를 거느리고 조곤과 대치하였는데, 요백수는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않았다. 조곤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양성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였다. 이에 요흥은 요백수를 참수하고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요숭이 왕송총이 앞서 했던 말을 자세히 요흥에게 아뢰니, 요흥은 왕송총의 말이 옳았다고 여겨 비단 10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후 요흥은 양불숭을 도독영북토로제군사(都督嶺北討虜諸軍事) · 안원장군 ·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아 영북(嶺北)에 있던 병력을 거느리고 북하를 정벌하게 하였다. 양불숭이 출발한 지 며칠이 지나자 요흥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양불숭은 사납고 용맹하며 과감하고 날카로워, 적을 마주할 때마다 그 기세를 억누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를 절제시키기 위해 맡기는 병력을 5,000명이 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거느린 군사가 이미 많으니,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할 것이고, 더구나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려 뒤쫓아 불러들이기도 어렵다. 내가 이를 매우 걱정하는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신하들은 모두 요흥의 우려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였으나,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양불숭이 과연 패하여 유발발에게 사로잡히자 스스로 목을 끊어 죽었다. 홍시 15년(413년) 정월, 요흥은 소의 제씨(齊氏)를 황후로 세웠다. 또 조서를 내려, 사망한 승상 요서, 태재 요석덕, 태부 요민, 대사마 요숭, 사도 윤위 등 24명을 무소제 요장의 사당에 배향하게 하였다. 이처럼 여러 대신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요흥은 담당 관청에 명하여, 대신이 죽었을 때 황제가 직접 조문하러 가는 제도를 다시 자세히 검토하게 하였다. 담당 관청에서는 옛 제도에 따라 동당(東堂)에서 애도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었으나, 요흥은 따르지 않고 대신이 죽을 때마다 모두 직접 찾아가 조문하였다.
홍시 15년(413년) 3월 5일[8], 요흥이 사신을 북위로 보내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홍시 15년(413년) 4월, 태위 색릉이 농서를 들어 서진의 걸복치반에게 항복하였다.
동진의 유유는 서양태수(西陽太守) 주령석을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성도로 가서 촉왕 초종을 토벌하게 하였다.
홍시 15년(413년) 7월, 주령석이 초종의 세력을 평정하고 초종을 참수한 뒤, 그 머리를 건강(建康)으로 보냈다.
홍시 15년(413년) 11월,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가 후진으로 사자를 보내어 사돈 맺기를 청하니, 요흥이 이를 허락하였다. 때마침 평양태수(平陽太守) 요성도(姚成都)가 조정에 들어오자, 요흥이 그에게 물었다.
"경은 오랫동안 동쪽 변경에 있으면서 위(魏)와 이웃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혼인을 청해 왔고 짐도 이미 허락하였다. 과연 앞으로 재앙과 환난을 더불어 나누며 먼 곳에서도 서로 구원해 줄 수 있겠는가?"
요성도가 대답하였다."위(魏)는 시벽(柴壁)에서 승리한 이래 군사력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장병과 말은 용맹하고 군대는 강성합니다. 지금 서로 화친을 맺는 데 더하여 혼인까지 한다면 어찌 재난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데 그치겠습니까? 실로 나라를 오래도록 안정시키는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요흥은 크게 기뻐하고, 산기상시 · 상서이부랑 엄강(嚴康)을 사신으로 보내 답례하며, 아울러 지방의 특산물을 예물로 보냈다. 2.16. 제1차 요필의 난
홍시 16년(414년) 5월, 이원(貳原)에서 저족 구상(仇常)이 반란하자, 요흥은 후장군 요염성, 진군장군 팽백랑, 북중랑장 낙도(洛都)를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염성 등이 구상에게 크게 패하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조흥태수(趙興太守) 요목(姚穆)에게 가서 패전의 죄를 고하였다. 이때 요목이 그들을 압송하여 죽이려 하자, 요염성은 두려워 북하로 달아났다.요흥은 동평공 요소와 광평공 요필에게 금위군을 비롯한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영북(嶺北)을 진무하게 하였다. 당시 요동후 미저정지(彌姐亭地)는 자신의 부족 사람들을 거느리고 남쪽 음밀로 옮겨 살면서 백성을 약탈하였는데, 요필은 미저정지를 체포하여 압송하고 그 무리 700여 명을 죽였으며, 2,000여 호를 정성(鄭城)으로 이주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흥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요사스러운 도적 이굉(李宏)이 이원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구상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였다. 요흥은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직접 토벌에 나서 구상을 참수하고 이굉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또 구상의 부락 500여 호를 허창으로 이주시켰다.
당초 좌장군 요문종은 태자 요홍의 총애를 받았다. 광평공 요필은 이를 몹시 꺼려 요문종이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고 무고하고, 시어사 염도생(亷桃生)을 증인으로 내세우자, 요흥이 노하여 요문종을 사사하였다. 이때부터 여러 신하는 발을 모으고 몸을 사릴 정도로 두려워하여 다시는 감히 요필의 잘못을 말하지 못하였다.
요필에 대한 요흥의 총애는 갈수록 두터워졌으며, 요필이 시행하려는 일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요필은 총신 윤충(尹沖)을 급사황문시랑으로, 당성(唐盛)을 치서시어사로 삼게 하였다. 이외에도 조정의 기밀을 맡는 자리에는 모두 요필의 당파가 들어갔다. 요필은 점차 자신의 세력을 더욱 널리 심어 수족과 같은 측근을 늘리고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 하였다. 상서우복야 양희, 시중 임겸(任謙), 경조윤 윤소가 기회를 보아 요흥에게 아뢰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은 남이 말하기 어려운 법이나,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 또한 부자간의 정에 못지않으므로, 신(臣)들이 도리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후궁이 황후와 나란히 서고 서자가 적자와 맞서게 하여, 나라와 집안을 기울거나 어지럽히지 않은 경우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광평공 요필은 간악하고 흉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몰래 태자의 지위를 넘보고 빼앗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위세와 권력을 내주시니, 간사하고 음험하며 믿을 수 없는 무리가 모두 수레바퀴살이 바퀴통으로 모이듯 그의 곁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거리와 골목의 사람들마저 모두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고 새로 세우실 뜻이 있다고 수군거립니다. 참으로 그러하시다면 신들은 죽을 뿐이지 감히 그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에 요흥이 말했다."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양희 등이 다시 말했다."그런 뜻이 없으시다면 폐하께서 요필을 이처럼 지나치게 사랑하시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화를 불러오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그의 측근을 제거하고 권세를 줄이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요필만 태산처럼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직과 종묘 또한 반석처럼 굳건해질 것입니다."
요흥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대사농 두온(竇溫)과 사도 좌장사 왕필(王弼)은 은밀히 상소하여 요흥에게 요필을 태자로 세우라고 권하였다. 요흥은 이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꾸짖지도 않았다.얼마 뒤에 요흥의 병이 위중해졌다. 태자 요홍은 병력을 동화문(東華門)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자의당(咨議堂)에서 요흥의 병을 간호하였다. 이에 광평공 요필은 몰래 반란을 꾀하여, 자신의 당파 수천 명을 불러 모아 갑옷을 입힌 채 사저에 숨겨 두고서 요흥이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태자 요홍을 죽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려 하였다.
당시 무군장군 · 동평공 요소, 시중 임겸, 상서우복야 양희, 관군장군 요찬(姚讃), 경조윤 윤소, 보국장군 염만외는 모두 금군을 맡아 궁궐 안에서 숙위하였다. 요흥의 아들 요유는 포판에 있는 형 태원공 요의에게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각지의 번진에 있던 여러 형제에게도 은밀히 서신을 보내 요필의 반역 정황을 알렸다. 요유로부터 모든 것을 전해들은 요의는 눈물을 흘리며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했다.
"주상께서 지금 병석에 누워 계시니 신하와 자식 된 사람이라면 관모와 신발조차 제대로 갖출 겨를이 없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 광평공 요필은 자신의 사저에 군대를 모아 두고 태자 저하에게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다. 지금이 바로 내가 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이다. 그대들도 모두 충성스럽고 절개와 의리 있는 사람들인 만큼 나와 함께 이 의거에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장수와 병사들도 이 말을 듣고 모두 분노하여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전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삶과 죽음을 막론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이에 요의는 죄수들을 모두 사면하고, 비단 수만 필을 풀어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군기를 세우고 군사들에게 맹세한 뒤, 장안으로 향하려 하였다. 진동장군 · 진류공 요광은 낙양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평서장군 · 박릉공 요심은 옹(雍)에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이들 역시 모두 장안으로 달려가 요필을 토벌하려던 참에 마침 요흥의 병이 나았다.요흥은 전전(前殿)에 올라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았다. 정로장군 유강(劉羌)이 눈물을 흘리며 요흥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병석에 누워 계신 지 수십 일이 되었을 뿐인데 어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요흥이 말했다."짐이 가정에서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여러 아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천하에 부끄럽도다. 경들은 각자 마음에 품은 바를 말하여 사직을 안정시킬 방도를 아뢰라."
경조윤 윤소가 아뢰었다."광평공 요필은 총애를 믿고 공손하지 않았으며, 군사를 모아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마땅히 법 조항에 따라 처벌하여 나라의 법을 밝히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차마 그를 곧바로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시겠다면 우선 그의 권세를 빼앗고 여러 번국으로 흩어져 살게 하십시오. 그리한다면 제위를 엿보는 데서 비롯될 화를 늦추면서도 부자의 천륜은 온전히 보전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요흥이 상서우복야 양희에게 물었다."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양희가 대답하였다."신의 어리석은 생각도 윤소가 아뢴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요흥은 요필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했다고 여겨 차마 법대로 처벌하지 못하였다. 이에 상서령의 직책만 면직하고, 장군(將軍)과 공(公)의 신분으로 사저에 머물게 하였다. 태원공 요의 등은 요흥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자 각자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진(鎭)으로 돌아갔다.곧이어 진류공 요광과 그의 동생 박릉공 요심 등은 모두 강력하게 표문을 올려 요필의 죄를 논하고 법에 따라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의, 요광, 요선, 요심 등 형제들이 모두 조정으로 들어와, 요유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 요흥에게 아뢰게 하였다.
"요의 등이 지금 모두 밖에 있는데, 폐하께 직접 아뢸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요흥이 말했다."너희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요필의 일이 아니더냐. 짐이 이미 알고 있으니 다시 번거롭게 만나 볼 필요가 없다."
요유가 다시 아뢰었다."요필에게 정말 논해야 할 죄가 있다면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 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만일 요의 등의 말이 대의를 어긴 것이라면 그들을 법에 따라 처형하시면 됩니다. 어찌 처음부터 만나기를 거부하십니까?"
이에 요흥은 자의당(咨議堂)에서 요의 등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때 장락공 요선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선제(先帝)께서는 큰 성덕으로 나라의 기반을 세우셨고, 폐하께서는 신묘한 무용으로 대업을 안정시키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700년의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만세의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셔야 하는데, 어찌 요필이 사직을 뒤엎으려 꾀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를 유사(有司)에 넘겨 엄정하게 형법을 밝히셔야 합니다. 신(臣)들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청합니다."
요흥이 말했다."짐이 스스로 처리할 것이니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동평공 요소의 동조속(東曹屬) 강규(姜虯)가 상소하였다."광평공 요필은 여러 해 동안 간악한 마음을 품었고, 오랫동안 반란을 꾀해 왔습니다. 간사한 소인배들이 몰려들어 그의 일을 부추겼으며, 마침내 죄악이 이루어지고 반역의 실상이 드러나 변경의 오랑캐들에게까지 비웃음을 사게 되었습니다. 옛날 문왕(文王)의 교화는 먼저 자신의 아내에게서부터 본보기가 되었건만, 지금 성조(聖朝)의 혼란은 오히려 총애하는 아들에게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그의 허물을 참고 죄를 덮어 주고자 하셔도 반역의 무리는 여전히 많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요필의 반역하려는 마음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흉악한 무리를 흩어 없애 화근을 끊으셔야 합니다."
요흥은 강규의 상소문을 양희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천하 사람들이 모두 내 아들을 입에 올려 비난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양희가 대답하였다."참으로 강규의 말과 같다면 폐하께서는 마땅히 조속히 결단하셔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재앙의 기미가 몰래 터져 나온다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습니다."
요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끝내 요필을 죽이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한 채 관직만 면하였다.한편, 태자첨사 왕주(王周) 역시 마음을 열어 선비들을 끌어들이고 동궁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였다. 요필은 이를 미워하여 틈만 나면 왕주를 모함하고 해치려 하였음에도 왕주는 뜻을 굳게 지켜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요흥은 그가 정도를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중서감으로 삼았다.
홍시 16년(414년) 8월, 북위에서 마읍후 누손(陋孫)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홍시 17년(415년) 2월, 동진의 형주자사 사마휴지는 강릉을 점거하고, 옹주자사 노종지는 양양을 점거한 채 유유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이들은 후진으로 사신을 보내 요흥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요흥은 정로장군 요성왕(姚成王)과 건의장군 사마국번에게 기병 8,000기로 구원하러 가게 하였다. 요성왕이 진군하여 남양(南陽)에 주둔하였으나, 사마휴지 등이 이미 유유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사마휴지는 마침내 노종지, 초왕(譙王) 사마문사, 신채왕 사마도사(司馬道賜), 녕삭장군 · 양주자사(梁州刺史) 마경(馬敬), 보국장군 · 경릉태수(竟陵太守) 노궤, 녕삭장군 · 남양태수 노범(魯範)과 함께 요흥에게로 망명해 왔다.
2.17. 제2차 요필의 난
홍시 17년(415년) 3월, 광평공 요필은 동생 요선이 자신을 헐뜯은 것을 원망하여 마침내 요흥에게 요선을 참소하였다. 마침 요선의 사마 권비(權丕)가 장안에 있었기에, 요흥은 권비가 요선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고 꾸짖으며 죽이려 하였다. 권비는 본래 간사하고 교활한 성품이었으므로, 자신이 죽음을 면하려고 도리어 요선의 죄상을 거짓으로 꾸며 고발하였다. 요흥은 크게 노하여 사신을 행성으로 보내 요선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게 하고, 요필에게 병사 30,000명을 주어 진주(秦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에 경조윤 윤소가 요흥에게 아뢰었다."광평공 요필은 황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 지금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밖에 있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신다면 신(臣)은 사직이 반드시 위태로워질까 두렵습니다. 작은 정을 차마 끊지 못하여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는 말이 바로 폐하께 해당합니다."
그러나 요흥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요필을 중군대장군으로 삼아 병사 3,000명을 더해주고 위수(渭水) 북쪽에 주둔하게 하였다. 북하의 황제 혁련발발이 행성을 공격하자, 요흥은 요필에게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필이 관천(冠泉)에 이르렀을 때, 행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행성을 지키던 장수 요규(姚逵)는 전사하였다.
요흥이 북지(北地)로 행차하였고, 광평공 요필은 삼수(三樹)에 주둔하였다. 이후 요흥은 요필과 보국장군 염만외를 신평으로 보내고 자신은 장안으로 돌아갔다.
홍시 17년(415년) 9월, 북하의 혁련발발이 다시 장수 혁련건(赫連建)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현(貳縣)을 침공하게 하였다. 혁련건은 계속 진군하여 평량으로 들어갔고, 평량을 지키던 전장군 요회는 오정(五井)에서 혁련건과 싸웠으나 패하여 평량태수 요주도(姚周都)가 혁련건에게 사로잡혔다. 혁련건이 다시 신평으로 진군하자, 광평공 요필이 이를 영격하면서 양군은 용미보(龍尾堡)에서 싸웠는데, 요필이 북하군을 크게 격파하고 혁련건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이보다 앞서 혁련발발은 팽쌍방(彭雙方)이 지키는 석보(石堡)를 공략 중이었고, 팽쌍방이 힘껏 싸우며 수년 동안 버티자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련건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석보에서 철수하였다.
후진으로 망명한 사마휴지 등이 마침내 장안에 도착하자, 요흥이 그에게 물었다.
"유유는 진(晉)의 황제를 높이 받들고 있는데, 설마 황제를 대우하는 데 부족함이 있겠는가?"
사마휴지가 대답하였다."신(臣)이 지난날에 수도로 내려갔을 때 낭야왕 사마덕문이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말하기를, '유유가 주상께 올리는 물품은 몹시 박하면서도 진귀한 물건들은 아끼고 있다. 지금의 형세로 미루어 보면 장차 사직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그 앞날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요흥은 사마휴지를 진군장군 ·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으며, 노종지 등에게도 각각 관직을 제수하였다.양무장군 · 안향후 강환이 백록원(白鹿原)의 저족을 비롯한 이민족 수백 호를 강제로 약취하여 상락(上洛)으로 달아났다. 상락태수 송림(宋林)이 이를 막았고, 상락 사람 황금(黃金) 등도 의병을 일으켜 강환을 치니, 강환은 무리를 거느리고 돌아와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다. 요흥은 그를 사면하고 작위와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당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고, 형혹성(熒惑星)이 포과성(匏瓜星)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세 차례나 자취를 감추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80일 뒤 형혹성이 동정(東井)에 나타나 오랫동안 머물며 맴돌았다. 그해에는 큰 가뭄이 들어 땅이 붉게 메말랐고 곤명지(昆明池)의 물도 말라 버렸으며, 이상한 동요와 괴이한 소문이 퍼져 나라 안이 시끄럽고 어수선하였다. 이때 어떤 술사가 요흥에게 아뢰었다.
"장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으나 끝내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당시 요흥은 다시 병이 도져서 병석에 누웠고, 약의 기운이 발작하여 병세가 좋지 않았다. 이에 광평공 요필은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고, 다시금 자신의 저택에 병사들을 모았다. 요흥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요필의 당파인 전중시어사 당성과 손현(孫玄) 등을 체포하여 죽였다. 그러자 태자 요홍이 요흥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참으로 불초하여 형제들을 화목하게 하지 못한 까닭에 요필이 이처럼 시비와 분란을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우러러 하늘과 해를 대하기가 부끄러우니, 이는 모두 신의 죄입니다. 폐하께서 신을 사직의 근심거리라고 여기시어 신을 제거하면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생각하신다면 바라건대 신에게 죽음을 내려 주십시오. 만일 천륜의 은혜를 베푸시어 차마 신을 죽이지 못하시겠다면, 바라건대 신이 번국을 지키러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요홍의 말을 들은 요흥은 슬픈 표정으로 낯빛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내 요찬, 양희, 윤소, 염만외를 자의당(咨議堂)으로 불러 요필을 체포할 일을 은밀히 의논하였다. 당시 동평공 요소가 옹성(雍城)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으므로, 급히 사람을 보내 요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요필이 며칠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요필의 당파가 크게 불안해하였다. 요흥은 이들이 변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요필을 체포하여 가두고, 중조(中曹)에 명하여 그 당파를 철저히 조사한 뒤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 요홍이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살려 달라고 청하자 요흥은 처형을 중지하였다. 요흥이 양희에게 말했다.
"태자는 천성이 온화하고 사람을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적다. 반드시 여러 현자를 포용하고 내 아들들 역시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요필의 당파를 사면하였다. 이후로도 요홍은 동생 요필을 처음처럼 대하고, 그에게 분노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어느 날, 난대령(蘭臺令) 장천(張泉)이 저녁에 요흥에게 아뢰었다.
"형혹성이 동정(東井)에 들어왔다가 열흘 남짓 만에 되돌아갔는데,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나 심성(心星)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는 임금에게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마땅히 어진 정치를 닦고 자신을 낮추어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셔야 합니다."
요흥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홍시 17년(415년) 10월 2일[9], 요흥은 산기상시 요창(姚敞) 등을 보내 자신의 딸 서평공주(西平公主)를 북위로 보내게 하였다. 명원제는 황후의 예로 그녀를 맞아들였고, 황후 책립을 점치기 위해 금으로 사람 형상을 주조하였으나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명원제는 이를 무시하고 그녀를 황후로 세우려 하였으나, 서평공주가 스스로 부인(夫人)이 되기를 원하여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명원제의 총애와 대우는 매우 후하였다.
2.18. 남양공 요음의 난
홍시 18년(416년) 정월 초하루[10], 요흥은 태극전(太極殿) 전전(前殿)에서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았다. 이때 승려 하승(賀僧)이 크게 통곡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자 모두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당시 하승은 어디 출신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가 앞일에 관해 말한 것은 모두 들어맞았기에, 요흥은 그를 매우 신이한 사람으로 여겨 예우하였다. 하승은 일찍이 은사(隱士) 몇 사람과 함께 요흥의 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요흥은 노종지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양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노종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이에 그의 아들 보국장군 노궤가 양양을 침략하였으나, 동진의 옹주자사 조륜지가 노궤를 반격하여 무찔렀다.
홍시 18년(416년) 2월, 요흥은 화음(華陰)으로 행차하고, 태자 요홍에게 감국(監國)을 맡겨 서궁(西宮)에 들어가 머물게 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서 요흥의 병이 위중해지자 마침내 장안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요홍이 궁 밖으로 나가 요흥을 맞이하려 하자 궁중의 신하들이 간언하였다.
"지금 주상께서는 병이 위중하시고 간신들이 그 곁에 있습니다. 광평공 요필은 비상한 일을 노리고 있으므로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지금 저하께서 밖으로 나가신다면 앞으로 나아가도 주상을 뵙지 못할 수 있고, 물러나려 해도 요필 등에게서 예측할 수 없는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차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마땅히 사사로운 감정을 깊이 억누르시고 사직을 안정시키셔야 합니다."
그러나 요홍이 말했다." 신하와 자식 된 사람이 임금이자 아버지께서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연히 앉아 나가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신하들이 대답하였다."몸을 온전히 보전하시어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결국 요홍은 그 말을 따라, 멀리 나가 맞이하지 않고 황룡문(黃龍門) 아래에서 요흥을 맞이하는 데 그쳤다. 한편, 요필의 당파는 요흥이 수레에 오르는 것을 보고 모두 위태로움을 느끼며 두려워하였다. 앞서 황문시랑 윤충(尹衝) 등은 요홍이 밖으로 나오면 그 기회를 틈타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이때 당시 상서 요사미(姚沙彌)가 윤충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태자가 미리 대비하여 맞이하러 나오지 않는다면, 마땅히 황제의 수레를 받들어 곧장 광평공(廣平公)의 저택으로 가야 합니다. 숙위하는 장수와 병사들은 황제의 수레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곳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태자와 함께 궁궐을 지키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들은 광평공 때문에 이미 한번 반역에 몸을 담근 처지가 되었으니 이제 어디에 몸을 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 황제의 수레를 받들어 남쪽으로 행차한 뒤 그 기회를 이용해 거사한다면, 이는 대의를 내세우는 일이 됩니다. 광평공을 재앙에서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이전 죄도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윤충 등은 따르지 않았다. 이들의 계획은 요흥을 따라 궁궐 안으로 들어가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었으나, 요흥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므로 의심하고 머뭇거리다가 행동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 덕분에 요흥은 무사히 궁궐에 들어가 태자 요홍을 녹상서사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또, 동평공 요소와 우위장군 호익도에게 궁중의 병력을 맡겨 안팎을 통제하게 하였고, 전중상장군 염만외에게는 요필의 저택에 있던 갑옷과 병기를 거두어 무기고에 수납하게 하였다.요흥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그의 누이인 남안장공주(南安長公主)가 문병하러 와 말을 걸었지만 대답을 못할 정도였다. 이때 요흥의 막내 아들 장무공 요경아가 밖으로 나와 형인 남양공 요음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라 하니, 요음은 즉시 자신의 당파인 윤충(尹衝), 요무백(姚武伯) 등과 함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단문(端門)을 공격하였다. 이에 염만외가 병력을 정돈하여 맞서 싸웠고, 호익도는 금군을 거느리고 사방의 궁문을 폐쇄하였다. 요음 등은 용맹한 자들을 뽑아 성문 위에 올라가 지붕을 타고 궁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이내 그 무리가 마도(馬道)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태자 요홍은 자의당(咨議堂)에서 요흥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염만외에게 명하여 전중(殿中)의 병력을 거느리고 무기고로 올라가 맞서 싸우게 하였다. 때마침 태자우위솔 요화도(姚和都)도 소란을 듣고 동궁의 병력을 이끌어 마도 남쪽에 주둔하였다. 이로써 나아갈 길이 막힌 요음의 무리는 마침내 단문에 불을 질렀다. 하는 수 없이 요흥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전전(前殿)에 나아가 금군과 반군 앞에서 광평공 요필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금군은 요흥이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갑옷을 갖춰 입고 앞다투어 반군을 공격하러 나아갔고, 요흥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음 등은 크게 혼란에 빠졌다. 앞뒤로 협공당한 요음의 군대는 결국 무너져 흩어졌고, 요음은 여산(驪山)으로 달아났다. 그의 당파인 건강공 여륭은 옹(雍)으로 달아났으며, 윤충과 그의 동생 윤홍(尹泓)은 동진으로 달아났다.2.19. 최후
요음의 난을 정리한 요흥은 요소, 요찬, 양희, 윤소, 염만외 등을 침실 안으로 불러들이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태자 요홍을 보좌하여 정사를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요흥은 붕어하였다. 향년 51세로, 재위 22년만이었다.시호는 '문환황제(文桓皇帝)', 묘호는 '고조(髙祖)'이며, 우릉(偶陵)에 장사 지냈다.
3. 평가
후진의 전성기를 연 군주였으나, 일을 벌여 놓기만 할 뿐, 지키는 데는 미흡하여 자신이 이룩한 성과가 자신의 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 또한 말끔히 처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족 사마씨의 서진, 남흉노 유씨의 전조, 갈족 석씨의 후조, 한족 사마씨의 동진, 저족 부씨의 전진까지 3대 100여 년에 걸친 핍박을 견뎌내고 세워진 강족의 국가 후진은 요흥의 사후 1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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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거몽손 | 혁련발발 | |||||||||
[1] 갑오년 경오월 신축일. 음력으로는 5월 17일이고, 양력으로 7월 1일이다.[2] 임인년 계묘월 계축일. 음력으로 2월 14일이고, 양력으로 4월 2일이다.[3] 임인년 기유월 을사일. 음력으로 8월 9일이고, 양력으로 9월 21일이다.[4] 임인년 기유월 갑자일. 음력으로 8월 28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0일이다.[5] 임인년 신해월 경술일. 음력으로 10월 15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5일이다.[6] 갑진년 무진월 병인일. 음력으로 3월 9일이고, 양력으로 4월 4일이다.[7] 사마국번, 사마숙번의 사촌동생이다.[8] 계축년 병진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3월 5일이고, 양력으로 4월 21일이다.[9] 정해년 을묘월 임자일. 음력으로 10월 2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9일이다.[10] 병진년 경인월 기묘일. 음력으로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2월 14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