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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6:11

왕도(동진)

사마진 군공(郡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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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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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의 정치가
시흥문헌공(始興文獻公)
王導 | 왕도
시호 문헌(文獻)
작호 무강후(武岡侯) → 시흥군공(始興郡公)
왕(王)
이름 도(導)
무홍(茂弘)
조부 왕람(王覽)
부친 왕재(王裁)
생몰 276년 ~ 339년 9월 7일
출생 서주(徐州)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국적 서진(西晉) → 동진(東晉)

1. 소개2. 생애
2.1. 초창기2.2. 강동으로2.3. 원제 사마예 즉위2.4. 동진의 승상2.5. 왕돈의 난2.6. 소준의 난2.7. 말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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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동진(東晉) 초기의 권신이며 명재상, 진 원제 사마예진 명제 사마소의 정치적 참모이면서 스승이자 킹메이커. 왕람의 손자다. 는 무홍(茂弘),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2. 생애

2.1. 초창기

서주 낭야국 임기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인정받았으며, 견식이 뛰어나고 청아하여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이가 14세에 이르렀을 때, 진류의 명망높은 선비 장공(張公)이 왕도를 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의 사촌형 왕돈에게 "이 아이의 용모와 뜻은 장군이나, 재상의 그릇을 가지고 태어났소."라 일러주었다. 이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구자(丘子) 작위를 이어받았다.

성인이 되었을 때 사공 유식(劉寔)이 왕도를 동각좨주(東閣祭酒)로 삼았고, 조정으로부터 비서랑, 태자사인, 상서랑 직위도 제안받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후에 동해왕 사마월이 그를 불러 참군으로 삼았다.

2.2. 강동으로

304년 8월, 사마월 휘하에서 일할 당시, 업성에서 낭야왕 사마예가 성도왕 사마영으로부터 도망쳐 낙양으로 왔다. 사마예는 이때 왕도와 처음 만나 서로 친분을 쌓았다. 왕도는 천하가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사마예를 추대해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었고, 사마예 또한 왕도와 생각이 같았으니, 둘의 사이는 공동 목표를 가진 친구와도 같았다. 왕도는 사마예가 낙양에 있을 때 그를 만나 봉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305년 8월, 사마월이 낭야왕 사마예를 평동장군, 감서주제군사로 임명해 하비(下邳)를 진수케 하였다. 사마예는 출진하기 전, 왕도를 자신의 군으로 영입해 안동사마로 삼고 모든 군사 전략과 향후 계책을 그에게 일임했다.

307년, 왕도는 사마월이 하북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사마예에게 우선 강을 건너 건강(建康)[1]으로 근거지를 옮기도록 권했다. 그러나 강동의 명문 호족들은 서진오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배척받은 것에 한을 품고 있어, 아무도 서진의 황족인 사마예를 돕기는 커녕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동에서 다시 나라를 세우려는 왕도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려면 남방 호족들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했다. 그렇게 강동으로 내려온지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방하려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왕도가 이를 심히 걱정하였다. 그때 우연히 사촌형 왕돈이 사마예의 군영에 찾아오자, 왕도가 그를 붙잡고 말했다.
낭야왕께서는 인덕이 두터우나 명성이 아직 가볍습니다. 형님께서는 현재 위풍을 떨치고 계시니 부디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마침 그 날이 3월 3일이라, 왕돈은 동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마예가 당일 계제사를 지내고 내려올 때 왕도와 함께 기병을 거느리고 사마예를 호위하였다. 사마예는 견여를 타고 엄숙한 복장을 갖추었으며, 좌우에 이름난 장군인 왕돈의 기병대가 곁을 호위하니, 강동의 사족들은 모두 그 모습에 감탄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

사마예가 왕도의 건의에 따라, 강동의 명망높은 사족인 하순(賀循)과 고영(顧榮)을 몸소 방문해 맞아들였다. 이에 두 사람은 모두 사마예의 명령에 응해 귀부하였다. 그러자 다른 호족들도 자연히 사마예에게 귀부해왔고, 비로소 군신의 예가 성립되었다. 태부 사마월은 여전히 바빠 강동의 정세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그 해 9월에 사마예를 안동장군, 도독양주강남제군사로 임명하여 건강 통치를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2.3. 원제 사마예 즉위

311년 9월, 낙양이 함락되자 사공 순번이 밀(密) 현에 행대를 세우고 낭야왕 사마예를 맹주로 추대하였다. 순번 등은 진왕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였으나, 관군장군 염정이 장안으로 가길 고집하며 팀킬을 시전하는 바람에 순번을 비롯한 서진의 고위관료들이 장강을 건너 사마예에게로 귀순했다. 이외에도 중원 각지의 백성과 병사들도 5호의 발호를 피해 귀순해 오니, 왕도는 사마예에게 건의해 이들 중 인재를 선별하여 함께 나라를 꾸려나갈 인원들을 모집하였다. 연속(掾屬) 1백여 명이 선발되어 벽소되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106연(掾)'이라 하였다.

313년, 왕도는 단양태수로 옮겨져 보국장군을 겸하였다. 왕도는 외지에 나가서도 사마예에게 서신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를 언제나 고맙게 여기며, 왕도를 영원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진위장군을 더해 주었다. 장안에서 민제 사마업이 즉위해 왕도를 이부랑으로 징소하였으나, 왕도는 응하지 않았다.

이때 당시,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에는 화란이 미치지 않아 평온하였고, 인구 수도 풍족했는데, 사마예는 왕도의 보좌를 받아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면서 청렴한 정치를 해나갔다. 사마예는 왕도를 자신의 소하라며 신하들 중 왕도를 가장 의지하였고, 조야에서는 왕도를 가리켜 '중보(仲父)'라 부릴 정도로 인심이 쏠렸다. 왕도는 사마예에게 북에서 피난 온 사족들도 우대하여 줄 것을 건의하자 사마예가 이에 따랐다. 이로써 317년 3월, 남북의 사족들이 연합해 사마예를 진왕(晉王)에 옹립하니, 사마예는 백관을 설치하고 종묘를 세워 마침내 동진 정권을 세웠다. 사마예는 왕도의 공을 인정해 승상으로 삼았다. 승상이 된 왕도는 원제에게 상소해, 학교를 세워 오교(五敎)를 가르치고, 혼란으로 무너졌던 덕과 예를 바로세워 부자, 형제, 부부, 군신 간의 의가 부활하였다.

2.4. 동진의 승상

318년 3월 10일, 민제 사마업의 사망 소식이 건강에 전해지자, 진왕 사마예는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중흥을 선포하였다. 원제 사마예는 승상 왕도를 불러 함께 왕좌에 앉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왕도는 서너차례나 굳게 사양하며 말했다.
만약 태양이 내려와 만물과 나란히 있는다면 만민이 어찌 그 빛을 우러러볼 수 있겠습니까?
그제서야 원제는 그만 두었다. 그리고 왕도를 표기대장군로 삼아 개부의동삼사, 시중, 중서감, 녹상서사를 겸하게 하고, 무강후(武岡侯)에 봉했다.

319년 6월, 태산군에서 서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도는 태산군 출신인 태자좌위솔 양감을 정로장군으로 천거하였으나 양감이 패하고 돌아왔다. 이에 왕도가 상소하였다.
서감이 반역하였으나 천벌이 늦어져 신은 난을 정토할 수 있는 인재로 양감을 추천하였습니다. 감(鑒)은 사리에 어둡고 나약하여 결국 패배하고 군법에 따라 극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허나, 성은이 망극하옵게도 폐하께서는 천지와 같은 은정으로 그 목숨만은 구해주셨습니다. 신은 중요한 위치에서 정치 전반을 담당하고 있으며 삼군을 좌절시킨 것도 모두 신의 책임입니다. 부디 신을 강등시켜 조정을 공평하게 만들어주시옵소서.
그러나 사마예는 강등을 불허하고 왕도를 태자태부로 옮겼다.

서진을 무너뜨렸던 흉노의 한나라가 전조후조로 분열하였고, 전조의 유요가 포로로 있던 회제 사마치의 장남 효회태자 사마전(司馬詮)을 살해했다. 이윽고 동진에도 그 소식이 전해져 여러 신하들은 군신의 예로 장례를 치르자 하였지만, 승상 왕도만은 나서서 황태자는 천자에 버금가는 것으로, 천하에 정이 있다면 천자의 예로 치러야 한다 주장했다. 원제는 왕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왕도 또한 원제와 점점 멀어졌지만, 왕도는 이를 원망하지 않고 본인의 직무를 수행하며 권력에 집착하지 않았다.

왕도는 재상으로 국가의 모든 기밀사무를 총괄하였고, 사촌형 왕돈은 대장군에 올라 6주의 병권을 장악하여 장강 상류를 지켰는데 여러 조카와 친척들이 요직에 올랐다. 이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가졌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나왔다. 그럼에도 왕돈은 조금도 겸양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원제는 왕돈을 두려워하여 유외(劉隗), 조협(刁協) 등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왕씨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서랑 공유(孔愉)가 왕도의 충성과 현명함으로 중흥시켜 보좌한 공훈이 있으니 중책을 맡아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원제는 공유를 사도좌장사로 내보냈다.

원제가 자신을 멀리함에 분노한 왕돈은 원제가 왕도를 좌천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왕도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왕도가 먼저 이 상소문을 입수해 읽고는 바로 돌려보냈지만 왕돈은 다시 사람을 보내 원제에게 상소문을 전달했다. 왕돈의 상소문을 읽은 원제는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承)에게 의견을 물으니, 사마승은 왕돈을 경계해야 한다 조언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왕돈이 표문을 올려 자신의 심복 심충(沈充)을 상주자사로 삼으려 하자, 원제는 몹시 분노하여 "간사한 역적이 본색을 드러냈구나!" 소리치며 표문을 폐기하고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2.5. 왕돈의 난

319년 7월 25일, 원제는 왕도를 사공으로 옮겨 정무에서 배제시키면서 실질적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다. 원래는 아예 면직당할 뻔했으나 어사중승 주숭(周嵩)의 간언으로 이정도로 그친 것이다.

322년 정월, 원제가 자신을 멀리함에 분노한 왕돈이 참모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간신 유외와 조협 토벌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원제는 모든 관원들을 비상소집하였는데, 유외가 의기양양하게 조정으로 들어가 왕도를 비롯한 도성 내에 모든 왕씨 가문 인사들을 죽일 것을 주장했으나 원제가 불허하였다. 당시 사공 왕도는 매일 아침 조정 밖에서 중령군 왕수(王邃), 좌위장군 왕이, 시중 왕간(王侃) 등 20여명의 집안 사람들과 함께 석고대죄하였는데, 상서좌복야 주의가 원제에게 왕도의 충절을 전했다. 원제는 왕도에게 조복(朝服)을 돌려주고 맨발로 나와 그를 맞이하니, 왕도는 왕돈을 토벌하러 가길 청하며 말했다.
역신이나 도적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설마 신의 집안에서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원제가 대답했다.
무홍(茂弘)이여! 백리(百里)의 명을 그대에게 맡겼거늘,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대는 대의에 따라 친족을 토벌하러 가니, 짐이 안동장군 되었을 때 받았던 절(節)을 그대에게 내리겠노라.
원제는 그 자리에서 조서를 내려 왕도를 전봉대도독으로 삼아 왕돈 토벌에 참여하게 하였다.

건강의 석두성(石頭城)을 지키던 주찰(周札)이 성문을 열어 왕돈을 맞이하였다. 원제 친히 갑옷을 입고 유외, 조협, 대연(戴淵), 왕도, 주의 등을 지휘해 3갈래로 석두성을 쳤으나 왕돈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패배한 후 병사들이 모두 흩어지니, 원제는 갑옷을 벗고 왕돈에게 굴복하여 그를 승상에 임명하면서 양위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조협은 살해당해 그 수급이 왕돈에게로 갔으며, 유외는 후조로 도망쳤다. 마침내 뜻을 이룬 왕돈은 재능이 있는 주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왕도로 하여금 그를 설득해달라 3번에 걸쳐 부탁했으나, 왕도가 외면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왕돈은 왕도를 영군사마로 내쫓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주의와 대연을 석두성 남문에서 참수하였다.

322년 4월, 정권을 장악한 승상 왕돈은 다시 왕도를 불러 상서령에 삼고, 왕이를 형주자사로 삼아 자기 마음대로 백관과 지방관들을 교체하였다. 관직이 이리저리 옮겨진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심한 경우엔 아침에 시행했다가 저녁에 다시 물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 또 원제가 암살을 꾸밀까 두려워 단 한 번도 입조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근거지인 무창(武昌)에 머무르며 서신으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동년 11월, 사도 순조(荀祖)가 사망하자 왕돈은 사도부를 폐지하고 승상부로 편입시켜 자신의 권력을 더욱 넓히려 하였다. 승상부의 관속들이 조정에 넓게 퍼져 정사를 심히 통제하니, 결국 원제는 걱정과 분노가 더해져 병사하였다. 명제 사마소(司馬紹)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도는 유조를 받들어 정치를 보좌했다. 왕돈은 왕도를 사도(司徒)로 옮기고 자신은 스스로 영양주목이 되었다.

323년 11월, 왕돈의 조카 왕윤지는 왕돈의 총애를 받아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때 왕돈이 자신의 심복 전봉(錢鳳)과 반역을 모의하는 것을 엿들었다. 왕윤지는 즉시 구토하여 몸이 좋지 않음을 핑계로 자리를 뜨고 건강으로 가 아버지인 정위 왕서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쳤다. 왕서는 이를 사도 왕도와 명제에게 전했고, 왕도는 왕돈 몰래 반역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324년 6월, 과연 왕돈은 다시 반란을 선포했다. 명제는 광록훈 응첨(應詹)의 말에 따라 토벌군을 편성하여 왕도에게 대도독, 영양주목을 더해 토벌군 총대장으로 삼고, 명제 본인은 건강성이 뚫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친히 갑옷을 입고 황궁 선양문(宣陽門) 밖 중당(中堂)에서 친위대와 주둔하였다.

당시 왕돈은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토벌군 대장인 왕도가 이를 이용해 왕돈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가문의 자제들을 이끌어 왕돈의 상을 치르니, 병사들은 왕돈이 죽은 줄로만 알고 전의가 상승했다. 이후 왕돈의 대장군부로 조서를 내려 그동안의 죄악을 열거한 뒤, 전봉의 목을 베어오는 자는 5천호의 후(侯)로 봉할 것이고, 귀순해오는 왕돈의 장수와 병사는 사면하여 3년간의 휴가를 내릴 것이라 하였다. 무창에서 치료받고 있던 왕돈은 왕도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해 병이 더욱 위독해져 도저히 군을 통솔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왕돈은 형 왕함을 원수로 삼아 자신을 대신해 군을 통솔케 했다. 왕함은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진공하여 남안(南岸)을 습격하니, 석두성을 지키던 온교가 나와 주작교(硃雀橋)를 불태워 반란군이 회수를 건너지 못하게 막았다. 왕도는 사촌형 왕함에게 서신을 보내 설득해보려 했으나 왕함은 회답하지 않았다.

동년 7월, 왕함군의 전봉과 심충이 수군만 거느려서 회수를 건넜으나 임회태수 소준에게 남당(南塘)에서 대패당해 수군이 모두 전멸하였다. 반란 소식을 들은 심양태수 주광(周光)도 서둘러 1천 병력을 거느리고 남안에 주둔해있는 왕함을 쳤다. 주광의 형 주무(周撫)는 왕함군의 장수로 종군하고 있었는데, 동생의 설득에 넘어가 왕함 군영에 불을 질러 반란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왕함군은 이내 대패하여 왕함 등의 대장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무창에서 형의 패배 소식을 들은 왕돈은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나서려 했으나 끝내 출정하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왕돈의 잔당들은 왕도가 보낸 동진의 장수들에 의해 토벌되었고 심충과 전봉은 살해되어 그 수급이 건강으로 보내졌다. 관리들은 왕돈의 무덤은 파헤쳐 부패되지 않은 왕돈의 시신을 꺼내 무릎 꿇려서 참수하고 그 목을 매달았다. 이로써 왕돈의 난이 평정되니, 왕도는 그 공을 인정받아 태보로 승진하고 가절, 도독제군, 양주자사를 겸했으며, 시흥군공(始興郡公)에 봉해져 식읍 3천여 호가 더해졌다. 더불어 명제는 왕도가 공이 있음을 들어 왕돈의 친족들이 반역죄에 연좌되는 것을 막았다. 명제는 이것도 모자라서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조회불배(朝會不拜)의 3가지 특권도 주려했으나 왕도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2.6. 소준의 난

325년 8월, 명제가 제위 4년만에 붕어하고 5살에 불과한 성제 사마연이 즉위했다. 성제의 어머니 유 태후가 섭정을 맡았으며 왕도는 유량(庾亮)과 함께 보필하였다. 허나, 외척인 유량의 권위가 더 강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중요한 일은 모두 유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사도 왕도는 관대하고 온화하여 뭇 사람들이 좋아하였으나 중서령 유량은 모든 것을 법에 맡기고 냉혹하게 집행하니 인심이 그를 떠났다.

326년 11월, 후조의 급군태수 석총이 준주(逡遒)와 부릉(阜陵)을 침공해 5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왕도를 대사마, 가황월을 더하여 석총을 막게 하자, 왕도는 출정하여 강녕(江寧)에 주둔했다. 하지만 역양내사 소준이 먼저 자신의 장수 한황을 보내 석총을 패주시키니, 왕도는 다시 건강으로 돌아왔고 조정에서는 대사마직을 회수하였다.

327년 10월, 소준의 존재를 껄끄러워하던 유량은 왕도에게 소준을 중앙으로 불러 병권을 뺏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이에 왕도가 강하게 반대하며 답했다.
소준은 의심이 많고 음험하여 조정에서 부른다고 순순히 올 리 없습니다. 산이 수풀로 독충을 감싸듯이 차라리 덕으로써 소준을 감싸느니만 못합니다.
하지만 유량은 왕도의 의견을 무시하고 조서를 내려 소준을 불렀다. 과연 왕도의 말대로 소준은 정변을 일으켜 동진의 6군을 대패시키고 수도 건강을 장악하였다. 황궁은 소준의 병사들에 의해 엉망이 되었으나 왕도는 시중 저삽, 좌광록대부 육엽, 상서 장개(張闓)와 함께 성제를 둘러싸, 황제가 미쳐날뛰는 병사들로부터 호위하였다. 백관들은 소준의 병사들에게 짐승처럼 채찍질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소준이 평소 왕도를 존경한 덕에 그에게는 어떠한 위해를 가해지지 않았다. 소준은 왕도의 사도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면서 항상 왕도를 자신보다 상석에 모셨다.

328년 5월, 형주자사 도간 등의 의병을 일으켜 소준에 대항하였다. 소준은 이들과 맞서기 위해 왕도의 저항을 뿌리치고 성제를 핍박하여 석두성으로 끌고갔다. 당시 8살이던 성제가 슬피 울며 강제로 수레에 오르자 궁중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석두성에 도착한 소준은 성제를 안쓰는 창고에 묵게 하고 매일 찾아와 추악한 말을 내뱉으니, 왕도는 성제가 소준에게 화를 입지 않을까 매일 두려워하였다.

한편, 건강에 남아있던 소준의 심복 노영, 가녕 등은 소준에게 왕도를 비롯한 백관들을 하루빨리 숙청하고 심복들로 채워야한다 진언했지만 소준이 이를 따르지 않아 크게 실망하였다. 왕도는 그 사실을 듣고 참군 원탐(袁耽)을 가녕 등에게 보내 소준을 배반하고 의병에게 투항하라 권했다. 노영 등은 설득에 넘어가 소준을 배신해 백석루의 의병군 진영으로 도망쳤고, 왕도도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노영 등의 뒤를 따라 의병과 합류하였다.

329년 정월, 반란군 총지휘관인 소준이 어이없게도 호위기병 몇 기만 대동한 채 앞장서서 의병군 진영으로 돌격하다 전사하였다. 반군 세력은 황급히 소준의 동생 소일(蘇逸)을 옹립했으나, 사실상 소준 한 사람의 군재와 카리스마로 뭉쳐있던 반란군은 대장이 사망하자 빠르게 붕괴했고, 얼마 안가 서주자사 치감에 의해 평정되었다.

2.7. 말년

329년 2월, 왕도는 성제를 모시고 다시 수도 건강으로 돌아왔는데, 궁궐은 그동안의 난리로 인해 흔적도 없이 불 타 없어졌다. 성제는 건강성 건평원(建平園)을 임시 거처로 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였다. 3오 지역 호족 출신인 온교 등은 회계군 천도를 주장했으나 나머지 호족들이 반대하면서 서로 옥신각신 하였다. 이에 왕돈이 말했다.
건강은 과거부터 금릉(金陵)이 있던 제왕의 땅이고, 손중모, 유현덕 모두 왕자(王者)의 거처라 한 바 있습니다. 위문공의 천도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옛 제왕들은 반드시 땅의 풍요나 험난함에 따라 수도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늘날 북방의 이민족이 호시탐탐 약점만 노리고 있는데, 천도를 하여 국고를 축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럴 시간에 재빨리 도성을 재건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왕도가 천도 반대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명제는 왕도의 말에 따랐고, 온교 등의 천도 계획은 퇴짜를 맞았다.

330년 정월, 곽묵이 강주자사 유윤(劉胤)과 다퉈, 그를 죽이고 조서를 위조해 거짓으로 역모죄를 뒤집어씌웠다. 유윤의 수급이 건강에 도착하자 왕도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나, 곽묵이 통제를 벗어날 것을 걱정해 대사면령을 내리고 조용히 곽묵 토벌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도간이 중앙으로부터 토벌 조서가 안내려왔음에도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곽묵을 쳤고, 곽묵은 놀라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 결국, 왕도의 계책에 따라 토벌을 준비하던 예주자사 유량은 그냥 바로 토벌하자 청하였고, 왕도는 하는 수 없이 유량을 정토도독에 삼아 보기 2만으로 도간과 합류하게 하였다. 곽묵은 용맹했으나 다행히 결단력이 부족하여 우물쭈물하다가 금세 도간에게 토벌되었다.

331년 겨울, 당시 건강에는 겨울 축제가 열렸다. 성제는 왕도에게 축제 공물로 쓰인 고기를 하사하면서 불배(不拜)의 특권을 하사하려 했지만, 왕도는 물러나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성제는 이전부터 유약하여 사도 왕도를 만날 때마다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고, 왕도에게 조서를 내릴 때마다 '황공하게 말하옵니다(惶恐言)'를 반드시 적었으며, 중서(中書)에서 조서를 지을 때 '공경하며 묻습니다(敬問)'라는 글귀를 꼭 넣었다. 어리다 할지라도 최고권력자인 황제가 이처럼 사도를 깎듯이 모시니 대신들 사이에선 서서히 논란이 되기 시작하였다.

332년 정월, 어느 날 왕도가 조례를 하기 위해 조정에 들어오자 성제가 벌떡 일어서서 맞이했다. 때마침 가뭄이 들었기에 왕도는 이를 핑계로 성제 앞에서 벼슬을 내려놓기를 청하고 사퇴하여 돌아갔다. 하지만 성제는 조서를 수 차례 내려 왕도의 복귀를 간곡히 청하니, 왕도는 결국 다시 조정으로 복귀해 정무를 보았다.

335년 정월, 성제가 마침내 15세가 되어 성인식을 치렀다. 왕도가 조정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노쇠해지자, 성제는 친히 사도부로 행차해 군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열고 왕도 부부에게 절을 하였다. 보다 못한 시중 공탄(孔坦)이 성제에게 너무 왕도에게 정사를 일임하지 말라 간언했다가 왕도의 미움을 사 정위로 좌천되었다. 왕도는 나이가 들면서 아첨하는 무리들을 가까이 하니, 환경(桓景) 등이 그에게 빌붙어 관직을 받았다.

후조의 중산왕 석호가 남쪽을 순수하여 장강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이때 후조의 척후기병 10여기 역양을 정탐하고 돌아갔는데, 역양태수 원탐이 이를 보고하면서 적군의 수를 적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큰일이 난 것이라 착각하고 진동하니, 왕도가 나서서 석호를 토벌하겠다 청하였다. 성제는 왕도에게 대사마, 가황월, 정토도독제군사를 더하고 광막문(廣莫門) 아래에 군대를 사열하여 역양 구원하라 명했다. 원탐은 이를 듣고 얼른 '적의 수는 매우 적었고 이미 돌아갔다'며 다시 보고하였다. 성제는 수도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왕도의 대사마 직을 회수하였다.

338년 6월, 성제가 사도 왕도를 승상에 임명하면서 사도부를 폐지하고 승상부에 편입시켰다. 왕도가 관대하게 부하들을 다스리니 휘하의 제장들인 조윤, 가녕 등은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무창에 진수하던 사공 유량은 태위 치감에게 서신을 보내 같이 거병하여 왕도를 폐출하자 권했지만 치감이 따르지 않았다. 남만교위 도칭(陶稱)은 이를 왕도에게 일러바치자 왕도가 말했다.
나는 원규(元規)[2]와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런 헛소문은 지혜로운 자라면 입에 담지 말아야 하느니라. 만약 자네 말처럼 원규가 공격해 온다면 나는 각건(角巾)을 고쳐쓰고 내 집으로 돌아가면 될텐데 무엇이 두려우리오? 유공(庾公)은 폐하의 외삼촌되시니 그대는 마땅히 잘 섬기도록 하라!
유량도 참군 손성의 간언을 받아들여 거병 계획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유량은 자신의 계획을 왕도에게 그대로 일러바친 도칭을 매우 미워하여, 그를 남중랑장, 강하재상으로 삼아 면중(沔中)에 배치시키고, 도칭이 부임하러 오자 그에게 죄를 덮어씌워 참수하였다.

339년 4월, 유량은 무창에서 정예 병력을 양성하며 북벌을 꿈꾸고 있었다. 이윽고 조정에 표를 올려 자신의 북벌 계획을 바치니, 승상 왕도는 찬성하였으나 태상 채모(蔡謨), 태위 치감은 북벌불가론을 펼치며 반박하였다. 이에 성제는 유량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를 움직이는 것을 불허하였다.

동년 7월 18일[3], 왕도가 유언으로 단양윤 하충과 사공 유량을 천거하고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제는 궁에서 봉수(賵襚)의 예로 사흘 동안 왕도의 장례를 치르며 애도하였다. 그리고 왕도의 시신을 매장할 때, 구유(九游)의 온량거(轀輬車), 황옥(黃屋)의 좌기(左纛), 우보고취(羽葆鼓吹) 등을 함께 묻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성제는 왕도의 뜻을 받들어 하충을 이부상서로 삼은 뒤, 유량을 승상으로 삼으려 했지만 유량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3. 기타

왕돈은 그의 사촌형인데 왕도와는 달리 개막장이라서 왕도가 동진의 충신이 된 반면 왕돈은 동진의 역적이 되었다. 그들의 인성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둘이 서진에서 내로라하는 부자 중 하나인 석숭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4] 당시 석숭은 손님이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집의 기녀를 참수시키는 가혹한 주인이었다.

이 자리에서 왕도는 기녀들을 위해 술을 열심히 마셨는데, 정작 그는 술을 잘 하지 못했음에도 이랬다. 그러나 왕돈은 주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기녀들이 3명이나 죽어나갔고,[5] 보다못한 왕도가 기녀들이 죽어나간다고 왕돈을 나무랐다. 그러자 왕돈은 자기 손으로 자기 집 사람을 죽이는데 내가 뭔상관? 이라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6]

왕도는 관직에 있으면서 검소하고 욕심이 적어 곳간에는 비축해둔 곡식이 없었고, 의복이 헤져도 천을 덧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알게된 성제가 친히 비단 1만 필을 하사하며 부디 사적인 용도로 이용해달라 당부하였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타락하기 전에 한정된 일화로, 수도 재건 이후 점점 늙어가면서 그도 다른 동진의 사족들과 마찬가지로 사치와 향략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왕도의 정처 조씨(曹氏)는 질투심이 많아 왕도가 그녀를 무척 꺼렸다. 이에 왕도는 은밀히 별장을 운영하며 첩들을 그곳에 거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씨는 왕도와 함께 우거(牛車)를 타고 그 별장으로 향하였다. 소를 몰던 왕도는 첩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슬그머니 달구지 방향을 돌리려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자, 주미(麈尾)의 자루 부분을 잡고 몰면서 겨우 방향을 돌려 별장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위 이야기를 들은 사도 채모는 조정에서 왕도를 만나자, "조정에서 승상께 공개적으로 구석(九錫)을 하사하려 하고 있습니다."라는 농담을 하였다. 왕도는 이를 사실로 알고 깜짝 놀라 겸손히 사퇴를 청하려 하니, 채모가 그를 말리면서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승상께서 긴 주미 자루가 달린 짧은 송아지 수레를 몰았다고 들었습니다."[7] 왕도는 그제서야 채모가 자신을 비꼬는 것이라 눈치채고는, "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현자들과 교류해왔지만, 일찍이 채극(蔡克)[8]에게 자식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구려!"라며 바로 패드립을 박았다.[9]

동진 초기에 강남 호족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육씨 일가의 육완과 혼사를 맺으려 했으나 질서를 혼란케 할 혼담은 결코 응할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이는 화합되지 못하는 초기 동진 내부의 현실을 드러낸다.

왕도의 장남 왕열(王悅)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닮은 기풍이 있어, 사람됨이 신중하고 겸손하며, 양친을 극진히 모셨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그에 반해 차남 왕염(王恬)은 사람됨이 오만하고 예절에 구애받지 않아, 동진의 사대부들이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에 왕도는 왕열의 모습만 봐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왕념을 보면 일단 화부터 냈다고 한다.

[1] 손오의 수도 건업이다.[2] 유량의 자(字)[3] 사서에 기록된 날짜가 다 그렇듯이 음력이다. 양력으로 계산할 시 9월 7일.[4] 석숭은 서진 시대에 왕제, 왕개와 함께 엄청난 거부 중 하나였다. 심지어 그 왕개와 사치 대결을 벌여서 이겼을 정도다.[5] 석숭은 기녀들에게 손님들을 대접하게 하고 만일 손님이 술을 받지 않으면 그 기녀를 죽여버렸다. 이를 알던 왕도는 기녀들을 살리기 위해 못하는 술을 들었고 반대로 인성개차반인 왕돈은 1명도 아니고 3명이나 죽어나도록 주당임에도 술을 들지 않은 것이다.[6] 사실 이 일화는 세설신어 등의 소설에서 기인한 기록인데 어디에서는 석숭이 그런 연회를 열었다고 하고 어디에서는 왕개가 그런 연회를 열었다고 하는 등 해당 연회의 주최자가 중구난방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마도 후대에 왕도와 왕돈의 엇갈리는 평가와 말년을 두고 두 사람의 성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해 지어진 일화일 가능성이 높다.[7] 구석의 특전 중 소가 이끄는 화려한 수레를 하사받는 특전이 있다. 직역하면 "승상 첩 숨기는 솜씨가 구석 받을 급이네요" 정도 된다.[8] 채모의 아버지. 서진 시기 거기장군 휘하의 종사중랑을 지냈다.[9] 왕도와 채모 사이는 원래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왕도의 애첩인 뇌씨(雷氏)는 정사에 직접 관여하면서 뇌물을 수수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왕도를 이용했는데, 채모는 항상 그녀를 가리켜 '뇌상서'라 비판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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