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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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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1. 개요

慕容翰
(? ~ 344)

전연의 인물. 자는 부옹(符邕).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출신. 고조 무선황제 모용외의 서장자. 어머니의 이름이나 성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출신이 비천하여 모용외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받지 못하였다.

2. 생애

성정이 용맹하고 사나웠으며, 권세와 모략이 많았고,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당시 모용부를 이끌던 그의 아버지 모용외는 이런 그를 중히 여기고, 응양장군으로 삼아 적진을 무너뜨리는 중임을 맡겼다. 모용한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위세와 명성을 크게 떨치니, 멀고 가까운 곳의 적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영가 3년(309년) 12월, 서진의 동이교위 이진(李臻)이 요동(遼東)태수 방본(龐本)에게 살해당하자, 요동군에 거주하던 선비족 소희련(素喜連)과 목환진(木丸津)이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거병해 여러 현들을 함락시키고, 수년에 걸쳐 약탈을 자행하였다. 주와 군에서는 종종 병력을 보내 토벌을 시도했지만, 토벌군이 번번이 패하기만 하니, 동이교위 봉석(封釋)은 해당 사건의 원흉인 방본을 처형하고, 난동을 피우는 선비족 부락과 화친을 청했으나 소희련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가 5년(311년) 12월, 모용한이 모용외에게 나아가 말했다.
"예로부터 제후들은 임금을 향한 충성을 내세워 백성의 마음을 얻은 후에 업(業)을 성사시켰습니다. 지금 소희련과 목환진은 관군을 전패시키고 백성을 도륙하고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저 어리석은 이들은 밖으로는 방본을 명분으로 하였으나, 안으로는 사실 도적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봉 사군께서 방본을 주살하고 화해를 청하였음에도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요동이 함락된 지 2주가 지났고, 중원의 병란으로 주의 관군이 번번이 패하니,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의(義)를 다할 때입니다. 선우께서는 의당 구벌(九伐)을 명백히 하여 위태로운 백성을 구출하고, 소희련, 목환진의 악행을 헤아려 의병으로 그들을 벌하십시오. 위로는 요(遼) 지방을 부흥시키고, 아래로는 두 선비족 부를 병탄하여 충의를 본조(本朝)에 행한다면, 그 이익은 모두 우리나라에게로 귀속될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의 시작점이 되어 훗날 제후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모용외가 크게 웃으며
"아직 애송이라 생각했건만 어느새 그런 지혜를 익히고 있었느냐."
라 하고, 그의 말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해 모용한을 선봉으로 세워 소희련과 목환진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소희련과 목환진을 사로잡아 참수한 뒤, 선비족의 두 부의 3,000여 호를 그대로 모용부로 흡수하였다.

영가 7년(313년) 4월, 서진의 사공 왕준이 군대를 보내 역수(易水)에 주둔시키고, 단부단질육권을 불러 함께 석륵을 토벌하자 하였는데, 단질육권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분노한 왕준은 탁발부탁발의로와 모용부의 모용외에게 폐백을 선물하면서 단질육권 토벌을 청하였고, 탁발부와 모용부는 모두 이 요청을 받아들여 각각 탁발육수와 모용한을 보내 단부를 쳤다. 모용한이 도하(徒河)와 신성(新城)을 공격해 빼앗고 양락(陽樂)에 이르렀을 때, 탁발육수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하로 돌아가 청산(靑山)에 누벽을 쌓았다. 그 후 모용한은 몇 년간 도하에 머물면서 단부의 공격을 막아냈다.

대흥 2년(319년) 2월, 당시 요동군을 다스리던 평주자사 최비(崔毖)는 스스로 인망있다 생각해 백성을 위무하였으나, 백성들이 모용외를 더 잘 따르자 이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최비는 자주 사자를 파견해 모용부로 귀부한 백성들 불렀지만 그들이 오지 않으니, 모용외가 백성을 억류해서라 여기고 고구려, 단부, 우문부 세 나라를 연합시켜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棘城)을 공격케 하였다. 이에 3국 연합군이 극성에 이르렀으나, 모용외의 꾀로 고구려, 단부는 본국으로 귀환하고, 우문부의 우문실독관만이 남아서 극성을 포위하였다. 모용외가 도하에 있는 모용한에게 구원을 청하자, 모용한은 사자를 보내 모용외가 나가서 싸울 때 자신이 밖에서 우문부의 뒤를 기습하겠다 답하였다. 이를 들은 모용외는 순간 모용한을 의심했으나, 한수(韓壽)의 간언을 듣고 이내 의심을 풀었다.

모용한이 도하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우문실독관은
"모용한은 그 용맹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음에도 지금 구원하러 오지 않는 것은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뜻이다. 먼저 모용한부터 없앤다면 극성 따위는 걱정거리도 못 될 것이다."
라 말하고 별동대로 기병 수천 기를 나누어 파견해 도하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를 예상했던 모용한은 즉시 부하를 단부의 사자로 분장시키고, 그로 하여금 우문부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면서
"모용한은 예전부터 저희의 골칫거리였으므로, 그대들이 모용한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저희 역시 출진하여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장 속히 진군하십시오!"
라 말하게 하였다. 그동안 모용한은 성 밖에 나와 군사를 매복시켜 우문부의 군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모용한의 가짜 사자의 말을 믿은 우문부의 군사들은 무척 기뻐하며 아무 대비도 없이 곧장 진격하다가, 모용한의 매복에 걸려들어 전부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문부의 군사를 격파한 모용한은 승세를 타고 지름길을 통해 극성으로 진격하면서 먼저 사자를 보내 모용외에게 모든 병력을 이끌고 출전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모용황과 장사 배억에게 정예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 스스로 군대를 친히 지휘하여 그 뒤를 이었다. 차마 모용외가 공격하러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던 우문실독관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비로소 소식 듣고 전군을 들어 출진하였다. 모용외의 선봉이 우문부의 군대와 맞붙을 즈음에 모용한은 벌써 기병 1,000여 기와 함께 우문부 군대의 후미에 도착하여 그 진영에 불을 놓았다. 갑자기 뒤에서 솟구치는 불길을 본 우문부의 병사들은 당황하였고, 결국 모용외와 모용한의 협공으로 전멸하였으며, 우문실독관만 겨우 목숨을 구해 달아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모용외는 수많은 포로를 잡고, 우문실독관 진영에 있던 황제의 옥새 인끈 3줄을 노획하였다.

대흥 3년(320년) 3월, 고구려의 미천왕이 자주 요동을 쳐들어오자,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미천왕이 맹약을 청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거두어 복귀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동진에서 요동으로 알자를 보내 모용외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고, 거기장군, 평주목, 요동공(遼東公)으로 삼아 휘하에 관속을 두는 것을 허하였다. 이때 모용한은 요동군의 양평을 지키면서 자주 민심을 어루만지고 유학자를 우대하였기에, 귀족부터 일반 백성까지 모두 한 마음으로 그를 따르니, 고구려의 미천왕은 요동 정벌을 잠시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함화 8년(333년) 5월, 모용외가 사망하고 그 세자 모용황이 후사를 잇자, 모용한은 건위장군에 임명되었다.

함화 8년(333년) 10월, 모용황의 동생인 모용인은 모용한보다는 못하지만 재주와 군략을 겸비하였고, 막내동생인 모용소 또한 글재주가 있어, 모용한과 더불어 아버지 모용외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모용황은 세 사람을 평소 시기하였었다. 한데 막 뒤를 이은 모용황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법률을 각박하고 엄하게 집행하니, 모용한은 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우리는 선공(先公)으로부터 중임을 위임받아 온 힘을 다해도 부족하였으나, 다행히 선공의 영령이 도운 덕에 공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하늘이 우리 국가의 편을 들어준 것일 뿐,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 사람들은 이를 우리의 재능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라 여겨, 우리가 남의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 평하여 아우의 시기심을 더욱 불태우고 있다. 내 어찌 앉아서 화를 기다리겠는가!"
라 한탄하고는 아들들을 데리고 요서의 단부로 달아났다. 모용한의 용맹과 명성을 익히 들었던 요서공 단요(段遼)는 그의 재주를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영접하고 후히 대접하였다. 모용인 역시 평곽(平郭)에서 거병하였고, 모용소는 극성에서 모용인에게 호응하려다 걸려 사사당했다.

함화 9년(333년) 2월, 모용황은 모용인에게 요동군을 전부 잃게 되자, 단부의 단요는 이를 기회로 여겨 동생 단난(段蘭)과 모용한을 파견해 유성(柳城)을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성을 지키던 도위 석종(石琮)과 성대(城大) 모여니(慕輿泥)가 죽을 각오로 싸워 성을 지켜냈고, 단난과 모용한은 잠시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패전 소식을 들은 단요는 대로하여 그 둘을 질책하고, 반드시 유성을 공략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단난과 모용한은 20여 일 동안 휴식을 한 다음 다시 군사를 늘려 유성을 압박하였다. 단부의 병사들은 모두 갑옷을 두 겹으로 껴입고 방패로 덮어 쏟아지는 화살을 막았으며, 공성용 사다리인 비제(飛梯)를 이용해 성벽 4면으로 올라가려 하였다. 하지만 유성의 방어가 워낙 굳건해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음에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때 모용황은 녕원장군 모용한(慕容汗)과 사마 봉혁을 보내 유성을 구원하게 하니, 단난과 모용한은 우미곡(牛尾谷)에서 모용한이 이끄는 구원군을 격파하였다. 단난은 승세를 타고 깊숙이 추격하려 했으나, 모용부가 자칫 멸망할까 걱정한 모용한이 단난을 말리며 말했다.
"장군이라면 신중을 기하여 적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만전을 기하기 전에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적군의 별동대를 격파했다고는 해도 아직 주력이 멀쩡하며, 모용황 또한 꾀가 많아 깊이 숨기면서 드러내지 않기를 좋아하니, 만일 그가 거병해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온다면 우리가 고군분투하여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임금의 명을 받은 것은 오늘의 승리를 위함일진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돌진하였다가 실패한다면 그간의 공과 명망은 모두 잃게 될 것으로,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임금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에 단난이 답했다.
"모용황을 잡을 수 있는 것만큼 확실하고도 큰 공이 없는데, 그대가 반대하는 것은 단지 그대의 조국이 망할까 걱정해서 아닌가! 지금 모용인이 동쪽에 있으니, 진군하여 뜻을 이룬다면 그를 영접해 모용부의 후계로 삼을 것으로, 결코 그대의 종묘가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 모용한이 말했다.
"제가 몸을 의탁한 이상 다시 돌아갈 도리는 없습니다. 조국의 존망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단지 그대의 나라를 위해 공명을 세우고, 저와 그대의 공명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이후 모용한이 자신의 부대를 거두어 돌아가려 하자,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던 단난은 부득이하게 모용한을 따라 돌아갔다.

건무 4년(338년) 정월, 연왕(燕王)에 즉위한 모용황이 후조에 칭번하고 단부 토벌을 청하니, 후조의 천왕 석호가 이를 수락하고 여러 갈래로 단요를 공격하였다. 결국 단요는 모용황에게 패하여 도읍인 영지(令支)를 잃었고, 모용한은 북쪽으로 달아나 우문부에 의탁하였다. 우문부의 대인 우문일두귀가 모용한의 재주와 명망을 꺼려 경계하자, 모용한은 미친 척하면서 머리를 풀어헤치며 술을 퍼마시고, 음식을 구걸하고 다녔다. 이에 우문부에서는 그를 천대하여 신경 쓰지 않았고, 그 덕에 모용한은 자유로이 우문부의 영역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모용한은 이 기회를 이용해 우문부 곳곳을 다니며 그 지역의 산천을 기억하였다.

건무 6년(340년) 정월, 모용황은 애초에 모용한이 반란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과 자신의 시기심 때문에 나라를 떠났음에도 항상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모용황이 상인인 왕거(王車)에게 밀명을 내려 우문부로 들어가 장사를 하면서 모용한의 상태를 살피게 하였다. 모용한과 왕거는 시장에서 서로 자주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모용한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왕거로부터 보고를 받은 모용황은
"모용한이 오고자 하는구나."
라 말하고, 기뻐하며 부하들에게 명해 모용한이 애용하던 3석(石) 무게의 활과 큰 화살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다시 왕거에게 주고 모용한을 데려올 것을 명하였다. 왕거는 그 활을 길가에 묻은 뒤, 은밀히 그 위치를 모용한에게 전하였고, 이를 받은 모용한은 우문부에서 탈출을 결심하였다.

건무 6년(340년) 2월, 모용한이 우문일두귀가 소유하던 명마를 훔쳐 두 아들들을 데리고 전연으로 향하였다. 급보를 들은 우문일두귀는 날랜 기병 100여 기를 보내 그 뒤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모용한은 추격 기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오래도록 타지에 머물렀고,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이제와서 말머리를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오. 나는 매일 어리석은 척하며 그대들을 속였으나, 사실 이전의 실력을 잃지 않았소. 만일 더 가까이 온다면 그대들 스스로 죽음을 청하는 것이 될 것이오!"
그러나 추격병들이 멈추지 않고 모용한을 따라잡으니, 모용한이 다시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대들의 나라에 살면서 애틋한 감정이 있어 그대들을 죽이고 싶지 않소이다. 그대들이 나에게서 10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칼을 세워 두면 내가 그것을 활로 쏘아 맞추겠소. 만약 한 발의 화살로 맞히면 그대들은 나를 두고 돌아가야 하나, 맞히지 못한다면 내 자진해서 그대들과 함께 돌아가리라."
추격병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백 보 거리에 칼을 세워 두었고, 모용한이 이를 활로 쏘아 그 칼의 고리에 정확히 맞추니, 추격병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이윽고 모용한이 전연으로 돌아오자,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후히 영접하고 다시 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건무 8년(342년) 11월, 연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자 모용황이 진언하였다.
"우문부는 오래도록 강성하여 국가의 우환이 되었으나, 지금은 우문일두귀가 찬탈하여 무리의 민심이 그를 따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성품과 식견이 모두 평범하여 쓰는 장수들은 무능하고, 방어책이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아 군사들의 조직 체계는 형편없는 상태입니다. 신은 오랫동안 그 나라에 거주하면서 지형을 다 외워두었고, 나라의 위치 또한 그들의 우호국인 갈족의 강대한 국가와 거리가 멀어 원군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문부를 공격한다면 백전백승 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 고구려가 그 지척에서 늘 저희를 염탐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문부가 멸망한다면 그 다음 차례가 자신들임을 알고 있어, 우리가 우문부를 칠 때 반드시 저희의 뒤를 노릴 것입니다. 적은 병력을 남기면 방어하기에 부족하고, 많은 병력을 남기면 우문부를 정벌하지 못하니, 이는 저희의 근심거리이므로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만 합니다. 신이 고구려 국력을 헤아려 보건대,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으며, 우문부는 굳이 군사를 보내 이익을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고구려를 잡은 뒤라면 우문부의 멸망은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입니다. 두 나라가 평정된다면 동해(東海) 안쪽으로는 전부 우리의 영역이 될 것이고, 후방의 우환이 남아있지 않는 이상 중원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황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고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북쪽의 길은 평평하고 넓었으나, 남쪽의 길은 좁고 험하였다. 많은 신하들은 북도로 가야한다 주장했으나, 모용한이 반대하며 말했다.
"적도 분명 북도를 중시하고 남도를 경시할 것입니다. 남도는 비록 길이 좁아 대군이 이동하기에는 부족하나, 정예병만 이끌고 남도로 진격한다면 능히 적들의 허를 찌를 수 있으므로, 그들의 수도인 환도(丸都) 또한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나머지 군대로 북도를 이용해 진격한다면 적들은 이미 사기가 크게 떨어져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모용황은 모용한의 계책을 채택하여, 친히 40,000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모용한과 모용황의 5남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아 남도로 진격하였다. 이때 장수 왕우(王寓)에게 따로 15,000명의 병력을 주어 북도로 나아가게 하였다.

전연이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자, 과연 모용한의 예상대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동생 고무에게 50,000명의 정예병을 주어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사들로 남도를 막았다. 선봉인 모용한의 군대가 고국원왕의 군대와 먼저 전투를 시작하였고, 그 뒤에 모용황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였다. 좌상시 선우량 수십 기병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진영을 돌파하니, 이로 인해 고구려의 진영이 뒤틀렸고, 모용황은 이를 기회로 전군에게 총공격을 명해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좌장사 한수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를 참수하였고, 승세를 탄 전연군은 도망치는 고구려군을 추격해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까지 밀고 들어왔다. 고국원왕이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자, 경거장군 모여니가 그 뒤를 쫓아가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처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하지만 모용황은 북도로 나아가던 왕우가 고무에게 패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더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정벌을 중단하고 환도성을 불태운 뒤 돌아갔다.

건무 9년(343년) 2월, 고국원왕이 동생을 전연에 입조시켜 칭신하고, 진귀한 보물 1,000여 개를 바쳤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보내는 대신, 그 모친은 남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그제서야 우문부의 우문일두귀가 뒤늦게 재상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전연을 침공하니, 모용황은 일부로 응전하지 않으면서 적이 방심하기만을 기다렸다가, 모용한을 보내 막천혼을 공격하였다. 막천혼은 대패하여 겨우 죽음만 면한 채로 도망쳤고, 그 무리는 모두 전연군의 포로가 되었다.

건무 10년(344년) 정월, 드디어 때가 되었다 생각한 모용황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우문부를 정벌하였다. 모용한은 전봉장군에 임명되어 모용황의 부관이 되었다. 우문일두귀가 남라(南羅)의 대인 섭야간(渉夜干)에게 병력을 주어 전연군을 요격케 하니, 모용황은 모용한에게 사신을 보내 말했다.
"섭야간의 용맹은 3군 중 으뜸으로 잠시 군대를 뒤로 물림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모용한은
"우문일두귀는 모든 정예병을 모아 섭야간에게 배속시켰습니다. 섭야간은 물론 용명이 있어 온 나라가 그에게 의자하고 있으니, 신이 그를 무찌른다면 우문부는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은 우문부에 살았던 만큼 그 용명은 단지 헛된 명성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퇴각한다면 우리 군의 사기만 꺾일 뿐입니다."
라고 하며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모용한이 나아가 섭야간의 군대와 정면에서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모용패가 적진의 측면을 돌파해 섭야간을 참수해버히자, 섭야간의 수급을 본 우문부의 군사들은 놀라 삽시간에 붕괴되었다. 전연군은 승승장구하면서 우문부의 도성까지 함락시켰고, 우문일두귀는 달아나다가 막북(漠北)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우문부가 멸망하였다. 모용황은 우문부의 5,000여 부락들을 거두어 창려군으로 이주시키고, 1,000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전연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모용한은 전투 중에 유시에 맞고 병이 들어 오랫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조금씩 상처가 아물어가자, 집에서 나와 시험삼아 말을 탔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 모용황에게 "모용한이 병을 핑계로 집에서 몰래 승마 연습을 한다" 고하였다. 비록 그동안 모용한의 계책 덕분에 숱한 전투를 이겨왔지만, 내심 모용한의 용맹과 지략을 꺼렸던 모용황은 이를 그대로 믿고 모용한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였다. 이에 모용한이 한탄하며 말했다.
"이 모용한은 멋대로 의심을 품고 도망치는 죄를 지었음에도 주살당하지 않았고, 나의 해골이 도적의 뜰에 묻히는 것이 싫어 다시 돌아온 죄가 있으니, 마땅히 그 죄값을 치러야만 한다.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지금까지 살아있던 것이니, 오늘의 죽음이 곧 나에게 허락된 천수일 것이다. 하나, 역호(逆胡)들이 신주(神州)를 점거하고, 중원도 아직 평정하지 못하였는데, 항상 마음 속으로 맹세했던 오랑캐를 평정할 뜻과 선왕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채로 산해(山海)의 책임을 받게 되었구나. 뜻밖에도 마음에 둔 뜻을 도모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겠지만 이것 역시 운명이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이후 약을 받아 먹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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