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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1:19:32

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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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전진 제3대 천왕
부견 | 苻堅
파일:부견의 동상.jpg
부견의 동상
출생 338년
후조 진주 약양군 임위현
(現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현)
사망 385년 10월 16일 (향년 47세)
전진 옹주 신평군 불사
(現 산시성 바오지시 인근)
능묘 장각총(長角冢)
재위기간 제3대 천왕
357년 7월 ~ 385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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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ece5b6> 성씨 부(苻)
견(堅)
부모 부황 문환제
모후 태후 구씨
형제자매 5남 중 차남
배우자 황후 구씨
자녀 7남 4녀
종교 불교
아명 견두(堅頭)
영고(永固), 문옥(文玉)
작호 동해왕(東海王)
→ 대진천왕(大秦天王)
묘호 세조(世祖)
시호 전진: 선소황제(宣昭皇帝)[1]
후진: 장렬천왕(壯烈天王)[2]
후량: 문소황제(文昭皇帝)[3]
연호 영흥(永興, 357년 ~ 359년)
감로(甘露, 359년 ~ 364년)
건원(建元, 365년 ~ 385년)
}}}}}}}}}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수광정변(357)과 황제 즉위2.3. 재위와 전진의 전성기
2.3.1. 황권 강화2.3.2. 내정 진흥(왕맹치진)2.3.3. 5공(五公)의 난(367~368)과 화북 통일(376)2.3.4. 사민정책
2.4. 동진 정벌의 실패
2.4.1. 동진 정벌의 서막2.4.2. 비수대전의 참패(383. 11)
2.5. 몰락의 길2.6. 장안 공방전(384. 9~385. 5)2.7. 비참한 죽음과 사후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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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제3대 황제이자, 수 고조 문황제 양견의 등장 이전까지, 즉 오호십육국시대와 남북조시대에서 가장 천하통일에 근접했을 정도로 전진의 전성기를 이끌고, 말년에는 스스로 닫은 티베트계 저족의 영웅이었다.

부견은 전진의 초대 황제 부건의 조카로, 부웅[4]의 아들이었다. 20세의 나이에 제2대 황제인 부생을 제거하고 전진의 황제가 되었다. 이후 한족 책사인 왕맹을 비롯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학문과 문화를 부흥시켰으며, 농업과 민생의 진흥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외교 관계를 맺어, 불교를 전해주기도 했다.

내치뿐 아니라 외정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어, 환온을 앞세워 북진을 시도하려는 동진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이를 공격하여 양양을 비롯한 넓은 영토를 획득했다. 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빠른 속도로 국력을 확장했고, 선비 모용부전연을 비롯한 적대 세력들을 차례로 쓰러뜨려 오호십육국시대 최초로 화북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왕맹이 죽은 후,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는 무리하게 동진 정벌을 추진하다가 비수대전에서 참패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난세를 평정하여 화북을 통일했고, 적극적으로 여러 이민족들의 융합을 꾀하는 장기적인 비전을 펼쳤으며, 농업과 학문을 진흥시켜 잠시나마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점에 있어서 오호십육국시대의 숱한 군주들 사이에서도 후조갈족 황제 석륵과 더불어 명군으로 평가받는 몇 되지 않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단순히 전쟁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경륜도 빼어나서, 그야말로 문무(文武)의 자질을 겸비한 엘리트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성공으로 인한 자만심과 지나친 이상주의가 발목을 잡아서 참혹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이 때문에 후대인들로부터 양면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부견은 337년, 전진의 초대 황제 부건의 동생인 부웅과 그의 아내인 구씨(茍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였던 구씨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 서문표의 사당에 들어갔다가 신령과 교접했는데, 그로부터 12개월이 지난 후에 부견을 태어났다고 한다. 이때 신비로운 빛이 하늘에서 집의 뜰을 비추었고, 부견의 등에는 전서체로
"함양에 들어가 왕이 될 것이다."
라는 내용의 붉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는 등의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부홍 또한 부견의 모습을 보고 심상치 않게 여겨 그를 '견두(堅頭)'라 이름하였다.

부견은 어렸을 적에는 할아버지 부홍을 비롯한 다른 일족들처럼 후조석호의 휘하에 들어가 그 수도인 업(鄴)의 영귀리(永貴里)에 거주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했는데, 7살 때부터 총명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이 규칙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 항상 부홍의 곁에 있으면서 부홍의 행동과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살펴보니, 부홍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며 말했다.
"이 아이는 외모가 빼어나고 타고난 성품이 남다르니, 비범한 상이로다."
사람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고평(高平) 사람 서통(徐統) 또한 부견의 비범함을 눈치채고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부랑(苻郎, 부견), 이곳은 관리들이 다니는 거리인데, 어린 아이가 감히 여기서 놀다니, 사예교위가 잡아가지 않을까 두렵지도 않느냐?"
이에 부견이 답했다.
"사예교위는 죄인을 잡아가지, 노는 아이를 잡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서통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패왕(霸王)의 상을 가지고 있다."
라 말하고 다녔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통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서통은 오히려 너희따위가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맞받아쳤다. 이후 주변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조용히 부견에게 말했다.
"부랑(苻郎)의 골상은 평범하지 않으니, 훗날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보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부견이 답했다.
"정말 공의 말씀과 같다면, 감히 공의 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부견이 8살이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스승을 청하여 집에서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다. 이에 부홍은 감탄하며
"우리 집안 사람들은 융적(戎狄)인지라 대대로 먹고 마실 줄만 알았는데 너는 학문을 하려는구나!"
라고 말하고는 기뻐하며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이후 장성하게 된 부견은 성품이 무척 효성스러웠고, 박학하였으며, 재능이 많았다.

영화 6년(350년) 정월, 후조의 폭군 석호가 붕어하고, 나라 전체가 내란에 휩싸이며 혼란에 빠지게 되자, 부홍(태조 혜무제로 추숭됨)이 본래의 성씨인 '포'(蒲)를 '부'(苻)로 바꾸고 대장군 · 대선우 ·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독립했다.[5] 그에 따라 부견도 성이 부씨가 되었다.

영화 6년(350년) 3월, 부홍이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이자 부견에게는 백부가 되는 부건(전진의 제1대 고조 경명제)이 뒤를 이었다.

영화 6년(350년) 11월, 부건이 관중에서 할거하던 두홍(杜洪)을 공격해 무찌르고, 장안(長安)을 점령하면서 마침내 전진(前秦)을 건국하여 천왕[6]을 자칭하였다. 어느 날, 부건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하늘의 신이 사자를 보내 붉은 옷과 붉은 관을 씌워주고, 부견을 용양장군으로 임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잠에서 깬 부건은 바로 다음 날 곡오(曲沃)에 제단을 세워 14살 밖에 되지 않은 부견을 용양장군으로 삼았다.[7] 부건이 눈물을 흘리며 부견에게 이르길,
"네 조부도 이 호칭을 받았고, 네 아비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제 너도 신의 명령을 받아 여기에 임명되었으니, 이를 게을리 하지 말아라!"
라 하였다.

2.2. 수광정변(357)과 황제 즉위

황시 2년(352년) 정월, 경명제 부건이 칭제한 이후로, 부견은 유력한 황족들 중 하나로 성장해나갔다. 부견은 문무에 모두 능통했는데, 그가 칼을 휘두르고 말을 타는 모습은 기백이 넘쳐나서 사졸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며, 어렸을 적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민족 출신의 권력자로서는 드물게 박학다식하여 공부를 즐겨하고 유학을 숭상했다. 그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그를 보좌하게 될 여파루[8] , 강왕(強汪), 양평로, 설찬(薛贊), 권익 등의 쟁쟁한 인재들을 휘하에 거느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런 인재들 중에서도 특히 여파루가 데려온 왕맹은 그 식견과 재주가 뛰어났는데, 부견은 마치 유비제갈량을 대하듯 왕맹을 우대했다.[9]

수광 원년(355년) 6월, 전진을 건국한 고조 경명제 부건이 붕어한 후에 그의 아들인 부생이 뒤를 이어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애꾸눈이었던 황제 부생은 매우 용맹하며 전투에 능했고, 싸움 실력은 당할 자가 없을 정도의 맹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심한 폭정을 휘둘렀다.[10] 이에 설찬, 권익이 부견에게 말했다.
"지금의 주상은 어리석고 포악하여 천하의 마음이 떠나고 있습니다. 덕이 있는 자는 번창하고, 덕이 없는 자는 재앙을 받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제왕의 업은 중대하니, 다른 사람이 이를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탕왕과 무왕의 일을 행하여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받드십시오."
부견은 깊이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모주(謀主)로 삼았다.

수광 3년(357년) 5월, 부견은 황제 부생의 명령을 받들어 광평왕 부황미를 따라 강족을 정벌하고 그 우두머리인 요양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11]

수광 3년(357년) 6월, 부생은 부견과 그 배다른 형인 부법을 의심하여 이들을 죽이려 했으나, 부생의 시녀가 그 사실을 몰래 부법에게 알려주었다. 부법은 어사중승 양평로, 광록대부 강왕을 불러 장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운룡문(雲龍門)을 통해 황궁에 잠입하였다. 이때 부견은 상서 여파루와 함께 사병 300명으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부법의 뒤를 이으니, 궁중의 숙위병들은 모두 병장기를 버리고 부견에게 투항하였다. 부견의 병사들은 아직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황제 부생을 붙잡아 별실에 가두었고, 폐위시켜 월왕(越王)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살해하였다.(수광정변)

정변을 성공시킨 부법, 부견 형제는 천자의 지위를 두고 서로 양보하였다. 부법은 자신이 서얼 출신이라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여겼고, 부견은 아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제위에 오르기를 꺼렸다. 결국, 부견의 생모 구 태후가 나서서 여러 신하들을 설득해 부견에게 황위를 오를 것을 청해달라 부탁하였고, 신하들이 이에 따르니 비로소 부견은 천자의 지위에 올라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영흥(永興)'이라고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0세였다. 제위에 오른 부견은 여왕 부생에게 살해당한 신하들의 관직을 회복시켜주는 한편,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하들과 친족들에게 논공행상을 했다. 다만 기존의 작위였던 '왕'(王)을 '공'(公)으로 격하시켜 황제의 권력을 강화했다.

영흥 원년(357년) 11월, 본디 구 태후는 부법이 부견보다 나이가 많고 현명하여 무리의 마음을 얻는 것을 꺼렸는데, 한번은 그녀가 선명대(宣明臺)로 향하다가 부법의 저택 문 앞에 수많은 마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들인 부견에게 이롭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위군장군 이위와 공모하여 부법을 독살하였다. 천왕 부견은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했지만 부법과도 우애가 깊었기에, 부법의 관을 동당(東堂)에서 떠나보내면서 피를 토하고 통곡하였다. 이후 부법의 시호를 '헌애(獻哀)'라 하고, 그 아들 부양을 동해공, 부부(苻敷)를 청하공(清河公)으로 봉하였다.

2.3. 재위와 전진의 전성기

2.3.1. 황권 강화

황제가 된 부견은 가장 먼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황권을 강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부견이 집권했을 당시의 전진은 소수 저족 유력 가문의 힘이 강력했으며, 황권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더욱이 부견 자신이 찬탈을 통해 집권했기 때문에 뒷통수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부견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맹을 비롯한 한족 출신의 참모들을 대거 고위직에 등용하고, 그 반면에 황권에 도전할 기미가 보이는 저족의 유력 가문들은 숙청해나갔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부견의 오른팔인 왕맹이었다.

부견이 제위에 올랐을 때, 시평 지역에서는 강도들과 호족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에 부견은 왕맹을 시평령으로 삼아 파견했는데, 그곳에서 왕맹은 엄격한 법치로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12] 숙청은 중앙에서도 계속되었다. 예컨대 저족 출신의 공신이었던 번세는 왕맹의 승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부견의 면전에서 왕맹을 폭행하려 하는 등 거센 반발을 표했다가 처형당했다. 이에 저족 출신의 호족들이 황궁으로 몰려와 항의하자, 부견은 이들을 크게 꾸짖고는 묶어놓고 매질을 하다가 측근인 권익이 말리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이후로 부견의 권력 강화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선대 고조 경명제 부건의 매부인 강덕은 호족으로서 그 횡포가 극심했는데 마찬가지로 처형당해 저자거리에서 기시되었다.[13] 이후로도 왕맹은 부견 휘하의 맹장인 등강의 도움으로 수십 일 사이에 20명이나 되는 호족들을 잡아 죽였다. 이후로 부견에게 감히 불손하게 구는 이들이 사라졌는데, 이에 부견은
"이제야 비로소 천하에 법이 있음을 알았고, 천자가 존귀한 줄 알게 되었다!"
며 감탄했다고 한다.

2.3.2. 내정 진흥(왕맹치진)

부견은 명재상 왕맹의 보좌를 받아 황권을 강화한 후, 내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농업과 민생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따라 대상인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그 대신에 경작지를 개간하며 농업을 권장하는 등 억상중농정책을 펼쳤다. 또한 제후와 귀족들의 노비들을 징발해서 산을 깎고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대공사를 일으켜 황무지에도 물을 끌어다 써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 가뭄이 들 때는 먹는 반찬수를 줄이는 등 황궁에서 앞장서서 근검절약을 실천했고, 틈틈이 나이 든 홀아비들과 과부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등 사회 취약층들을 구휼했다. 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사신을 파견해서 구휼 실태를 점검하고, 소홀함이 있으면 그 지방관을 벌하도록 했다.

부견은 농업과 민생뿐 아니라 학문을 진흥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부견은 수도 장안에 태학(太學)을 세우고는, 경전을 하나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학생으로 받아 들였으며, 관료들의 자식들 또한 태학으로 불러와서 수업을 받도록 했다. 부견은 그 자신도 학문에 매우 밝았기 때문에, 몸소 한 달에 한 번씩 태학에 행차해[14] 직접 학생들을 시험쳐서 점수를 매겼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박사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부견의 박학다식 앞에서는 박사들조차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태학의 박사 왕실은 부견이 학문에 힘을 쏟는 광경을 보고는 감격한 나머지 한무제광무제라도 부견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제가 직접 태학까지 와서 학문에 힘을 쏟으니,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없었다.

부견은 유교를 가장 좋아했으나 불교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때문에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도안을 모셔와 높이 우대했으며, 그로부터 여러 조언을 듣곤 했다. 또한 372년, 부견은 승려 순도고구려에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하도록 했다. 이에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사자를 보내 답례했다. 다만 부견은 유교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과는 달리, 도참 사상과 노장 사상은 이단시하며 매우 싫어했다. 때문에 이를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하기도 했다.

옛 기록에서는 부견이 다스리던 태평성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견과 왕맹의 통치하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진의 풍경이었다.
영가의 난 이래로 학교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는데, 부견이 왕을 참칭할 때에 이르러 자못 유학(儒學)에 마음을 두었으며, 왕맹이 풍속을 정비했으니, 정치는 훌륭히 행해졌으며, 학교는 흥했다. 관롱(關隴)은 평안해졌고, 백성들은 풍요로워졌다. 장안으로부터 여러 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마다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20리마다 정(亭)을 하나씩 두었고, 40리마다 역(驛)을 하나씩 두었으니, 여행자들이 길에서 휴식을 취했으며, 공업자와 상인들은 길에서 장사했다.
백성들이 이를 노래하며 말했다. "장안의 큰 길가는 버드나무와 회화나무가 있다네. 아래로는 붉은 수레가 달리고 위로는 난새가 날아다니네. 훌륭한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우리 백성들을 이끌어 준다네."
- 《진서》 <부견 재기>

2.3.3. 5공(五公)의 난(367~368)과 화북 통일(376)

부견은 중농정책을 통해 국가의 경제와 생산력을 향상하는 한편, 학문과 문화를 진흥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부견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분열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전란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후에는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실시하여 승승장구를 이어나갔다.

366년, 왕맹과 양성을 파견하여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여 10,000여 호의 인구를 획득했다. 또한 농서의 세력가인 이엄과 충돌이 일어나자 또다시 왕맹을 파견하여 이를 평정하고 이엄을 사로잡았으며, 한족이 세운 전량의 왕 장천석을 굴복시켰다.

367년에는 조공(趙公) 부쌍(苻雙) · 진공(晉公) 부유(苻柳) · 위공(魏公) 부수(苻廋) · 연공(燕公) 부무(苻武) 등을 비롯한 전진의 부씨 황족들이 상규(上邽) · 포판(蒲阪) · 섬성(陝城) · 안정(安定) 등에서 황제인 부견에게 대항하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부견의 군대를 화음까지 후퇴하게 만들며 궁지에 몰아넣는 듯 했으나, 부씨의 반란군을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던 선비 모용부의 전연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전진의 군대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듬해(368) 부견은 군대를 네 갈래로 나누어 왕맹은 포판, 장자양안은 섬성, 양성세는 상규, 모숭은 안정을 급습해 각 반란군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왕맹은 포판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그 자리에서 부유를 참살했으며, 장자의 군대 또한 3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섬성을 함락시키고 부수를 사로잡아 수도 장안으로 압송했다. 양성세와 모숭은 오히려 반란군에게 격파당했지만 부견은 곧바로 등강과 왕감을 다시 보내 상규와 안정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부쌍과 부무를 모두 죽였다.{5공(五公)의 난}[15]

369년, 동진의 군벌 환온이 제3차 북벌을 시도하여 전연을 공격해오자,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부견에게 무뢰(武牢) 이서의 땅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도움을 청했다. 부견은 이에 응하여 장수 구지를 파견해서 전연을 돕도록 했다. 전연은 명장 모용수의 활약과 부견의 도움에 힘입어 환온의 북벌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16] 이후 모용수가 전연의 실권자였던 모용평의 위협을 받고 전진으로 망명해오자, 부견은 왕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었다.
파일:전량-전진-전연-동진.jpg
4세기 후반의 중국
때마침 전연의 황제 모용위가 약속을 어기고 땅을 나눠주려 하지 않았다. 부견은 이를 빌미로 전연을 공격해서 모용장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낙주자사 모용축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고도 낙양 일대를 점령했다. 이후, 부견은 왕맹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후, 양성, 등강, 모당 등 10명의 장수들과 함께 60,0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전연 정벌을 시작했다. 왕맹이 거느린 군대는 노천(潞川)에서 전연의 태부 모용평이 거느린 대군 300,000명과 대치하게 되었다. 왕맹은 샛길로 우회하여 전연군의 보급 물자를 태워버리는 한편, 맹장인 등강과 장자 등을 앞세워 전연의 주력을 거의 궤멸시켰다.(노천 전투) 그해 11월, 부견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왕맹의 군대와 합류한 뒤 전연의 수도이자 관동의 중심지인 에 입성하면서 전연은 멸망했다.(370) 달아나다가 사로잡힌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를 위시한 선비 모용씨 황족들은 장안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전진은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전연을 정복함으로써 중원의 중심지였던 관중 · 관동 일대를 모두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화북 최강의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371년, 권신 환온에게 불만을 품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킨 원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원근이 뒤를 이었다. 원근은 끝까지 동진의 환온과 맞서 싸우는 동시에 전진에게 항복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마침 전연을 멸망시키기도 했고 수춘도 탐이 났던 부견은 장자와 왕감을 보냈지만 동진의 맹장 환이환석건에 의해 구원군은 격파당했다. 그리고 전진이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환온이 수춘성을 탈환하고 동진으로 돌아갔다.

371년 4월, 부견은 서남쪽에 위치한 저족 국가 전구지의 구지공 양찬이 숙부인 양통과 불화한 틈을 타서 이를 공격했다. 양찬은 동족인 전진과 단교하고, 한족의 동진을 따랐기에 이 사실을 안 동진 조정은 곽보 등을 보내 돕게 했지만 양찬의 구지군은 취협(鷲峽) 전투에서 대패했고, 전진에게 항복하면서 구지는 멸망했다. 부견은 장수 양안을 남겨 구지를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농서 지역의 선비족 수령인 걸복사번[17]을 공격해 그 무리들을 복속시키고, 걸복사번은 장안에 머물게 했다.[18] 선비 모용부가 세운 토욕혼(吐谷渾)의 군주 모용벽해는 본래 성품이 나약했는데 이러한 전진의 위세에 두려워하며 공물을 바치고 항복했다.

373년에는 동진의 양주자사 양량(楊亮)이 그의 아들 양광(楊廣)을 보내 구지를 침공했지만 그곳을 지키던 전진군의 장수 양성에게 대패했다. 피해가 막심해 더이상 동진의 국경을 지킬 전력마저 부족해진 양량은 어쩔 수 없이 전진과 맞닿아 있는 국경인 저수(沮水)에 배치해둔 병력들까지 거두어 동진령 익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비어있는 동진령 양주를 가볍게 점령한 부견은 이어서 동진의 익주까지 공격했다. 전진의 익주자사 왕통, 비서감 주융에게 20,000명을 주어 한수를 건너게 함과 동시에 응양장군 서성, 둔기교위 모당은 검각을 통해 동진령 익주를 공략하게 했다. 동진의 양량은 청곡(青谷)에서 10,000여 명의 요족(獠族)[19]들을 징집해가며 전진군에게 저항했지만 당해내지 못하고, 서성(西城)으로 후퇴해 수비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전진의 동진령 익주 정벌군은 익주로 밀고 들어가 한중, 검각, 재동을 차례로 점령했다. 동진의 익주자사 주중손은 면죽에서 왕통의 전진군과 한창 싸우던 중, 모당의 전진군이 길을 우회하여 성도까지 점령해버리자 패퇴하여 남중으로 달아났다. 이후 두 갈래의 전진군이 힘을 합쳐 서성을 함락하고 동진의 양량을 죽이니, 부견은 동진령 익주와 양주까지 모두 점령하면서 전진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374년, 익주 사람인 장육, 전사한 양량의 아들 양광이 촉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동진과 내통했고, 파주의 요족들 또한 장중과 이만(尹萬)을 주축으로 전진의 통치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동진은 이를 기회로 삼아 주중손을 대신해 새로 임명된 익주자사 축요(竺瑤), 위원장군 환석건에게 군사를 주어 촉을 다시 정벌하도록 했다. 반란군은 성도까지 진격해 포위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장육과 양광의 다툼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서 전진군의 장수 등강에게 격파당했다. 축요와 환석건은 당시 전진의 영주자사였던 강족 수령 요장을 무찌르긴 했지만, 그 시점엔 이미 등강에 의해 익주의 반란이 모조리 평정된 상태라 다시 동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376년 8월에는 130,000명의 대군을 일으켜 서쪽에 위치한 전량을 정벌했다. 한족 정권이었던 전량의 마지막 왕인 장천석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용양장군 마건, 정동장군 상거와 함께 100,000명의 대군을 일으켜 전진군의 침공을 막았다. 하지만 마건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으며 상거는 홍지(洪池)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국왕 장천석의 주력군 또한 금창(金昌)에서 구장이 이끄는 전진군에게 패배했다. 금창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장천석은 크게 놀라 도성인 고장(姑臧)을 버리고 도망갈 궁리를 하다가 사로잡히면서 전량은 멸망했다.(376)

376년 12월, 하북의 마지막 군벌인 탁발선비(代)나라에서 탁발선비와 남흉노의 혼혈인 철불부의 수령 유위진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1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탁발선비의 대나라군에게 진압당할 위기에 처하자 유위진은 전진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다. 부견은 이에 응해 유주자사 부락에게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위진을 구원하라고 명령하면서, 등강, 모당 등에게 200,000명의 군사를 주어 대나라의 땅을 침공하도록 했다. 때마침 대나라의 왕 탁발십익건이 병에 걸려 군대를 이끌 수 없게 되자, 탁발십익건은 백부(白部)와 독발부로 하여금 전진군의 진격을 막게 하였지만 부락에게 모두 격파당했다. 전진군이 석자령(石子嶺)에서 독발부의 남부대인 유고인의 기병 100,000명을 격파하니, 탁발십익건은 북쪽으로 도주하려다가 실패하고 운중(雲中)으로 돌아왔다.

대나라의 왕족인 탁발근이 탁발십익건의 서장자 탁발식군을 속여 국왕 탁발십익건과 그 아들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전진군은 대혼란에 빠진 대나라 군대를 섬멸하고, 반란의 주모자인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함으로써 대나라는 건국 61년만에 멸망했다.(376) 이렇게 하여 부견은 재위 20여 년 만에 오호십육국시대 최초로 화북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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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분홍색)의 최대 영역(376)

2.3.4. 사민정책

부견은 영토를 확장하고 화북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정복한 지역의 지도층과 인민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그 대신에 부락을 재편하거나 해체하고 그 지배 계급을 수도인 장안 및 그 인근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화융지술(和戎之術)이 바로 그것이었다.

358년, 병주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군벌 장평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견은 맹장 등강과 여광 등을 앞세워 이를 토벌한 후, 반란군의 괴수였던 장평과 그의 양자인 장자(張蚝)에게 오히려 벼슬을 내려 등용하고는 그들이 다스리던 부락에서 3,000여 호를 빼와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켰다.[20]

또한 365년에는 흉노 철불부의 수령인 유위진이 흉노의 우현왕 조곡과 더불어 전진을 배신하고는 이를 공격했는데,[21] 부견은 이를 토벌한 후, 조곡이 거느리던 추장과 호족 6,000여 호를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켰다.

370년, 전연을 멸망시킨 후에도 대규모 사민정책이 실시되었다. 우선 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위를 위시한 그 휘하 왕공들을 모두 사면하고 모두 장안으로 이주시켜 봉작을 수여했다. 또한 관동의 호족과 잡이 100,000호를 관중으로 이주시켰으며, 그 일대의 동호오환족은 빙익과 북지로, 튀르크계 정령족(퇼레스)은 신안으로, 진류와 동아의 10,000여 호를 청주로 이주시켰다.

또한 376년, 한족 정권인 전량을 멸망시켰을 때는 그 마지막 왕이었던 장천석에게 관작을 내렸고, 그곳의 호족 7,000여 호를 관중으로 이주시켰다. 그해(376)에 탁발선비가 세운 대국을 멸망시켰을 때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아들에게 배신당해서 사로잡힌 대국의 왕 탁발십익건을 장안으로 데려와 태학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데 그쳤다.[22]

뿐만 아니라, 부견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도 그 출신 배경과는 상관없이, 능력과 자질에 따라 등용하는 이른바 수재탁수책(隨才擢授策)을 펼쳤다. 때문에 부견의 휘하에는 저족 뿐 아니라 한족, 선비족, 강족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부견의 오른팔로 활약하며 지위가 승상에 이른 왕맹, 그리고 그 못지 않은 측근들이었던 권익설찬 등은 모두가 한족 출신이었다. 또한 모용선비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은 특히 부견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다.[23]

이처럼 부견은 자신이 정벌한 땅의 지배층을 수도 장안 일대로 옮기는 반면, 관중에 거주하던 저족들은 지방으로 파견하여 그 지배력을 높이고자 했다. 380년에 친척이었던 부락의 반란을 평정한 후, 그해 7월에는 아들인 부비를 포함한 저족의 자제 3,000여 호를 나누어 업성을 비롯한 관동 일대에 파견했던 것이 그 예이다.

부견의 이와 같은 이민족 포용정책인 '화융지술'과 '수재탁수책'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천하통일과 호한융합(胡漢融合)에 대한 야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여겨진다. 이 점에 있어서, 저족인 부견은 앞서 화북의 패권을 장악했던 남흉노의 전조나 갈족의 후조 등의 여타 이민족 왕조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견이 빠른 속도로 화북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책들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견의 오른팔이었던 왕맹, 그리고 부견이 왕맹 다음으로 신뢰했던 측근 부융 등은 그 도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고, 이런 염려는 후에 결국 참혹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2.4. 동진 정벌의 실패

2.4.1. 동진 정벌의 서막

이처럼 부견이 천하통일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부견의 오른팔이자 화북 쟁패의 1등 공신이었던 명재상 왕맹이 375년, 5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왕맹은 병상에서 죽어가면서, 주군인 부견에게 동진을 치지 말 것, 그리고 내부의 적인 선비족과 강족을 먼저 제거할 것을 간언했다. 부견은 왕맹이 병으로 죽어갈 무렵에 그를 살리기 위해 대사면을 행하고, 몸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왕맹이 죽은 후에는
"하늘은 내가 천하를 통일하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 어찌 내게서 이렇게 일찍 왕경략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
라고 한탄할 정도로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견은 왕맹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역으로 거스르기 시작했다. 부견은 그동안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모용선비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 등을 총애하여 이들을 중용했을 뿐 아니라, 저족의 자제들을 지방으로 파견하고, 이민족들은 수도 장안 인근에 거주하게 했던 기존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24]

또, 378년에는 왕맹이 그렇게 말렸던 동진 정벌에 대한 야욕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견은 아들인 부비에게 군사를 주어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부비가 거느린 군대는 이후 1년 동안의 혈전 끝에 379년, 양양을 점령했다.(양양 공방전)[25] 그 다음에는 연주자사 팽초를 도독으로 삼고 구난(俱難)과 모성(毛盛) 등을 보내 회음, 우이 일대까지 침입하여 광릉 땅 100리를 빼앗았다. 동진의 연주자사 사현과 패군태수 대록(戴逯)은 팽성을 구원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출정했으나 전진의 군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므로 후퇴했다. 동진의 유주자사 전락(田洛)은 삼하(三阿)에서 포위당했고, 동진의 주요 요충지인 광릉은 전진군의 손에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동진군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사현이 군사를 이끌고 삼하를 포위하던 구난의 전진군을 공격해 격파하자, 팽초 등은 우이를 버리고 회음까지 전진군을 물리기 시작했다. 전진의 군대가 회하에 다리를 세우고 북으로 퇴각하던 중 동진군에게 기습을 당해 다리가 불에 타고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회하 전투) 팽초가 이끄는 전진군은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후퇴를 멈추고, 사현이 이끄는 동진군과 군천(君川)에서 크게 싸웠지만 되려 패배했다.(군천 전투) 동부전선에서의 참패 소식을 들은 부견이 격노하여 팽초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자신이 처형될까 두려웠던 팽초는 군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부견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구난과 모성 등 회남 원정에 참여했던 제장들에게 책임을 물어 모두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본래 양양과 광릉을 교두보로 삼아 두 갈래로 남진하려던 대전략이 틀어져버리자 부견은 동진 공략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382년 10월, 부견은 태극전에서 신하들과 처음으로 대대적인 동진 정벌과 천하통일의 포부를 밝혔다. 부견의 측근이었던 대신 권익과 석월 등은 부견의 뜻에 반대했고, 부견의 아우이자 그가 왕맹 다음으로 신뢰했던 참모였던 양평공 부융조차도 우선 선비족과 강족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이후에도 부견의 아내인 황후 구씨, 부견의 조언자였던 승려 도안, 부견이 가장 총애했던 후궁인 장부인, 장부인의 소생으로 부견이 총애하던 막내 아들 부선, 심지어 부견의 태자였던 부굉까지 모두 동진을 정벌하려는 부견을 말렸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와중에 부견의 동진정벌론에 찬동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모용선비 출신으로 부견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워 총애를 받고 있었던 모용수였다. 모두가 반대하는 와중 모용수가 찬성하자 부견은 크게 기뻐하며 모용수에게 500필의 비단을 하사했다. 그리고는 당시 부견이 동진 정벌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짐의 군사들이 강에 채찍을 던져넣기만 해도 족히 장강의 흐름을 끊을 수 있소."
라며 호언장담을 던졌는데,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투편단류(投鞭斷流)
이다.

383년, 마침내 부견은 화북에 이어 강남까지 정복함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해 정월, 부견은 휘하의 명장 여광에게 100,000명의 대군을 내주어 서역 원정을 명령했다. 5월에 동진의 환충이 양양 일대를 공격해오자, 부견은 이를 방어한 후 마침내 동진을 정벌할 뜻을 굳혔다. 그에 따라 조서를 내려 군사를 징발했다. 이렇게 부견이 동진 정벌을 위해 긁어 모은 군사는 거의 100만 명에 달했다.

2.4.2. 비수대전의 참패(383. 11)

부견은 383년 8월에 먼저 동생 부융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장자, 모용수, 양성 등의 장수들과 함께 250,000명에 달하는 기병을 주어 선봉으로 나아가게 하며 동진 황제를 상서좌복야, 사안을 이부상서, 환충을 시중으로 미리 임명한다. 그리고 부견 자신은 270,000명의 기병과 600,000명의 보병을 이끌며 장안에서 출발했다.[26]

383년 10월에는 열종 효무제 사마요[27] 통치하의 동진은 사석을 정토대도독, 사현을 선봉도독으로 삼고 사안의 아들 사염과 환이 등을 장수로 삼아 8만 병사로 동진의 대군에 맞서도록 했다. 양성이 낙간(洛澗)에서 사석과 사현의 동진군을 막는 사이, 총사령관 부융은 수춘(수양) 방면을, 모용수는 운성 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부견은 수춘이 함락되어 동진군의 기세가 꺾였다는 보고를 접하자 비밀리에 8,000명의 경기병을 거느리고 몸소 아우 부융이 지휘하던 수춘 전선으로 향했다. 부견은 본래 동진의 관료였다가 양양 공방전에서 포로로 잡혀 그의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주서를 동진 측의 진영에 보내 항복을 권하도록 했다. 그러나 주서는 오히려 동진 측의 총사령관 사석[28]에게 부견이 지금 수춘에 이르렀으되 아직 전진의 100만 대군이 온전히 집결하지 않았으니, 이들이 모이기 전에 신속히 공격해서 예봉을 꺾으면 승산이 있다는 기밀을 알려주었다.

383년 11월, 사석은 처음에 부견이 수춘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운 마음에 싸움을 회피하려 했으나 조카인 사염이 주서의 말을 따를 것을 권하자 마음을 돌려서 전진군의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부견의 장수였던 양성이 팽성쪽에서 진군하여 수춘 근방까지 이르러 목책을 세웠는데, 사석은 동진 북부군의 명장 유뢰지를 보내 이를 야습하도록 했다. 이 낙간 전투로 전진은 15,0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고, 양성을 위시한 10명의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받아 예봉이 꺾이고 말았다.

한편 부견과 부융은 미처 이 사실을 모른 채 수춘의 성벽에 올라 동진군의 형세를 살폈는데, 직전에 낙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동진군의 사기는 드높았으며 진영도 빈틈이 없었다. 부견은 수춘 방면에서 전진군이 승리를 거둔 탓에 동진의 사기가 바닥을 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황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부견은 인근에 위치한 팔공산을 뒤덮은 초목을 동진군으로 착각하고는 기겁을 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초목개병(草木皆兵)
이다.

동진군의 주력이 의외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 부견은 아우인 부융과 함께 비수 근처에 진을 치고 동진군과 대치했다. 이때 동진의 사현이 부융에게 사절을 보내
전진군이 진영을 조금만 뒤로 물려준다면, 동진군이 강을 건널 테니 서로 승부를 겨루는 게 어떻겠느냐.
는 제안을 건냈다. 보고를 받은 부견은 진영을 조금 뒤로 물려주는 척 하다가, 동진군이 비수를 반쯤 건너면 그때 전진군의 철기병을 보내 이를 공격한다는 작전을 계획했다. 부융 또한 이에 동의하여 전진군은 진영을 뒤로 물리게 되었다.

그런데 상황은 부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진의 군사들은 동진군과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진영을 뒤로 물려야 한다는 황제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잔뜩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전진의 군사들은 차츰 제어가 어려워졌는데, 이때 동진에서 이런 말을 하며 기병을 출격시켜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진군秦이 패했다!

이에 전진의 대군은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대열이 붕괴된 부견의 대군은 서로를 밟아 죽여가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융은 어떻게든 대열을 수습하기 위해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를 썼으나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죽임을 당했고, 부견 또한 난전에 휘말려 화살을 맞고는 말을 달려 달아나는 일생일대의 치욕을 겪어야 했다.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지만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이 싸움을 비수대전이라고 한다.

부견은 다급히 달아나는 와중에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동진군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며 불안해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풍성학려(風聲鶴唳)
이다.

간신히 동진군의 추격을 벗어난 부견은 길가에서 어느 농부를 만나고는 그가 바친 밥과 돼지고기로 주린 배를 채웠으며 그 보답으로 비단을 하사하려 했는데, 되려 그 농부로부터
"오늘날의 몽진(蒙塵)이 어찌 하늘의 뜻이겠습니까!"
라는 힐난을 들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부견은 동진 정벌을 무리하게 강행한 것을 후회하면서 함께 있었던 후궁인 장부인에게
"짐이 만일 조신들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을 만났겠소!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소?"
라 말하고는 눈물을 쏟았으나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2.5. 몰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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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대전 이후 중국의 형세[29]
비수대전에서의 참패 이후, 전진은 순식간에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왕맹과 부융의 염려는 과연 들어 맞아서, 부견이 거느린 주력군이 비수대전에서 궤멸하자 선비 걸복부의 수령이었던 걸복보퇴의 반란을 시작으로 그동안 야심을 숨기고 있었던 부견 휘하의 여러 이민족 세력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부견이 애써 통일한 화북은 갈갈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멸망당한 전연의 황족이었던 모용수는 과거의 의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30] 간신히 도망쳐온 부견을 수도 장안까지 호위했다. 장안에 도착한 부견은 종묘에 죄를 고하고, 전사한 아우 부융을 애도한 뒤 대사면령을 내렸다. 병기를 재정비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등 국력의 회복에 힘을 썼지만 이전과 같이 회복하지 못했다. 호위를 마친 모용수가 옛 전연의 수도였던 업성을 방어하러 가길 자청하자 부견은 권익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용수는 이미 딴마음을 품고 있었던 상태였다.

384년 정월, 튀르크계 정령족의 수령 적빈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수가 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윽고 선비족을 결집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한 후 구도 업성을 공격했다.

384년 3월, 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위는 모용수가 부견을 배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외지에 파견되어 있었던 자신의 종실들과 내통하여 전연의 부흥을 꾀했다. 모용위의 아우 모용홍은 이에 호응하여 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연(西燕)을 건국했다. 부견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4월, 아들인 부예를 파견했다. 그러나 부예는 자신을 보좌하던 요장의 충고를 무시하고, 성급히 군사를 움직였다가 모용홍에게 패배하고 죽었다. 요장은 부견에게 사자를 보내 죄를 빌었으나, 분노한 부견이 이들을 죽여버리자 도주한 후 흩어진 강족의 무리 50,000여 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후진(後秦)을 건국했다.

384년 6월, 모용홍은 서연군을 거느리고 전진의 수도였던 장안을 향해 진격하던 중 그의 가혹함과 무능력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아우인 모용충이 서연의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부견의 아들 하간공 부림과 평원공 부휘가 50,000명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군해 오던 모용충의 서연군을 요격하려 했으나 정서(鄭西) 전투에서 패배했다. 전장군 강우가 30,000명을 이끌고 아방성에서 부림과 합류해 다시 한번 모용충을 막으려 시도했지만 성은 함락되어 부휘는 도주하고 부림과 강우는 전사했다.(아방 전투) 모용충은 아방성을 함락시킨 후, 이를 근거지로 삼았으며 9월에는 마침내 장안을 공격해왔다. 한편, 부견은 몸소 20,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진을 세운 요장과 수차례 싸워 승패를 반복했으나 결국 이를 제압하지 못했다. 아들이 죽고 장안 근방까지 모용충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부견은 요장과 싸우다 말고 결국 군세를 돌려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385년 정월에는 모용충이 황제를 자칭했다. 또한 이해에 농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선비 걸복부의 수령 걸복국인서진(西秦)을 건국했다.

2.6. 장안 공방전(384. 9~385. 5)

이후 384년 9월~385년 5월에 이르기까지, 서연의 모용충은 장안을 포위한채 지리한 공성전을 감행했다. 고양공 부방[31] 등이 사촌인 부견을 구원하기 위해 장안의 포위를 풀려는 시도를 했지만 모두 패배하고 모용충에게 잡혀 죽었다. 부견도 수차례 모용충과 승패를 주고 받았으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한편 부견은 모용위가 장안성 내에서 서연군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암살하려 했음을 알고는 결국 성내의 모든 선비족들을 학살해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안성의 공방전은 처절해져만 갔다. 모용충의 서연군이 민가를 약탈하는 바람에 장안 인근에는 곧 사람의 그림자와 밥짓는 연기가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장안성 내에도 기근이 닥쳐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부견 휘하의 전진군 장수들은 진영에서 식사로 배급받은 고기를 먹은 후, 집으로 와서 이를 토해내 가족들에게 먹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살상한 서연군의 시체를 뜯어먹기까지 했다. 385년 3월에는 부휘가 번번이 패배하고 돌아오자 부견이 그를 향해
"넌 내 아들이고, 수만 군대를 거느렸음에도 모용충에게 매번 패하고 오니, 살아서 무엇하느냐!"
며 심하게 질책했는데, 결국 부휘는 분통함을 참지 못해 자결하는 참극까지 일어났다. 그 와중에 4월에는 후연의 모용수가 결국 업성을 함락시켰고, 후진의 요장이 신평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등의 비보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부견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남아있어 실로 감동스럽고 비장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385년 5월, 빙익의 백성들은 모용충의 공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목숨을 걸면서 장안으로 양식을 짊어지고 왔다. 이들은 황제인 부견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는 장안성 밖으로 나가서 모용충의 서연군 막사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다가 오히려 불길에 휘말려 적진과 함께 타죽는 등 처절한 혈투 끝에 거의 궤멸당하고 말았다. 부견은 빙익 백성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하며 몸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통곡을 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2.7. 비참한 죽음과 사후

장안 공방전이 길어지자 부견은 점차 모용충의 집요한 포위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견 그 자신조차도 성루에 올라 전투를 지휘하다가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는 등 전황도 악화되어 갔다. 더욱이 신뢰했던 장수 양정마저 모용충에게 사로잡힌 사건은 부견을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점점 악화되어 가는 전황속에서 부견은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멘탈붕괴에 빠지기 시작했다.

급박한 처지에 몰린 부견은 과거와는 달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참설'에 의지하는 등 이성을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견은 본래 유학자적인 성향이 강해서 도참설을 굉장히 싫어했으나, 이처럼 상황이 절망적으로 흘러가자 때마침 장안성에 떠돌던
"황제가 오장(五將)으로 나가면 오래 갈 수 있다."
는 참언에 마지막 희망을 걸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결국 부견은 태자 부굉에게 장안의 수비를 맡긴채 자신은 두 딸 부보와 부금을 포함한 몇몇 혈육과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탈출했다.

385년 6월, 장안성을 빠져나온 부견 일행은 이윽고 오장산에 이르렀으나 요장의 측근인 오충이 후진군을 이끌고 공격했다. 맞서 싸울 병력이 없었던 부견은 결국 그곳에서 오충에게 사로잡혀 한때 총애하던 부하였던 후진의 요장에게 보내졌다. 요장은 사로잡힌 주군인 부견에게 옥새를 요구했다. 그러나 부견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도리어 요장을 크게 꾸짖으며 이를 거부했다. 요장은 부견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신평의 한 사찰에 감금했다가 10월 16일에 목을 매달아서 교살해버렸다. 당시 부견의 나이는 48세였는데, 재위에 오른 지 28년, 비수대전에서 참패한지 약 2년 만이었다. 요장은 죽은 부견의 시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고 했다.

부견과 함께 오장산에서 요장에게 사로잡혔던 그의 가족들도 모두 비슷한 시기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사로잡힌 부견은 자신이 죽고 나면 함께 사로잡힌 자신의 딸들이 요장에게 능욕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또한 부견이 교살당한 후, 그가 특히 총애했던 장부인과 어린 아들 부선 또한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부견이 달아난 직후에 결국 모용충의 서연군이 장안을 함락시켰고, 마지막까지 장안을 사수하던 태자 부굉은 도주하여 곧 동진으로 망명했다. 그 외에 부견의 명령을 받들어 서역 원정을 떠났던 저족 장수 여광은 부견을 '문소황제'(文昭皇帝)로 추존했으며 이후 후량을 건국했다.

부견의 뒤를 이어 전진의 황제로 즉위한 인물은 그의 아들로서 이전에 양양을 함락시켜 전공을 세웠던 부비(전진의 제4대 애평제)였다. 부비는 부황 부견을 '세조(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로 추존했다. 전진의 잔존세력은 애평제 부비와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등(전진의 제5대 태종 고황제) · 부숭(전진의 제6대 황제) 등의 통치하에 요장이 세운 후진과의 처절한 항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뒤집힌 전세를 역전할 수는 없었고, 부견이 죽은 지 약 10년이 흐른 394년에 멸망했다.[32]

3. 평가

세조 선소제 부견(저족)은 5호 16국시대의 군주들 가운데 후조의 고조 명황제 석륵(갈족)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명군이자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자신이 화북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넓은 포용책과 관대함을 선보였고, 유학과 농업의 진흥 및 민생의 구휼에도 많은 공을 쏟아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화북 일대에 잠시나마 태평성대(왕맹치진)를 이루었기에 중국사상 최악의 난세로 손꼽히는 5호 16국시대의 숱한 막장군주들에 비하면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

다만 부견은 일생동안 착실히 쌓아온 업적에도 불구하고, 비수대전의 참패로 일거에 몰락한 일 때문에 실속없고 허황되며 오만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비록 그 업적은 뚜렷했으나 몰락하는 과정 또한 매우 극적이고 처참했기에 예나 지금이나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릴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부견의 일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인
투편단류(投鞭斷流)
초목개병(草木皆兵)
풍성학려(風聲鶴唳)
등이 모두 비수대전의 참패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를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5호 16국시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했던 인물이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전에 등장했던 5호 16국시대의 군주들과는 달리, 부견에게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천하통일이라는 뚜렷한 비전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역사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위진남북조사 연구의 권위자인 박한제 교수도 천하통일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능력 위주의 인재 채용 및 한화정책과 민족융합책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던 점을 부견 정권의 특징으로 손꼽았다.[33]

혹자는 부견이 조금만 더 참을성을 가지고 내실을 다졌다면, 최소한 남북조시대가 빨리 나타날 수 있었고,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동진의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천하를 통일했을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전진이 무너지면서 화북은 60년 뒤인 서기 439년에야 선비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의 제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 탁발도가 재통일했고,[34] 천하통일은 수나라 고조 문제 양견이 남조 진나라의 암군 진숙보를 멸망시킨 589년에야 실현되었다. 이후 북방 민족 왕조가 중국을 통일하는 것은 1,000여년 뒤에 원나라 세조 무황제 쿠빌라이 칸때의 일이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비수대전에서의 패배로 연쇄작용이 일어나 온 나라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버렸던 점을 생각하면, 부견이 건설한 정권은 겉으로 탄탄해보이는 것과는 달리 내부의 결속력은 사실 영 부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태였다면 설마 비수대전에서 승리하고 동진을 정복했더라도 밝은 앞날을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남조 소량양무제 소연과 비교되는데 생전에 유능했다는 것과 말년의 실책이 다 말아먹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고우영 십팔사략》 8권 <남북조시대>에 등장한다. 작중에서는 5호 16국시대 군주 중 후조석륵석호와 더불어 그나마 비중있게 등장하는 편이다.[40] 사실 이들보다 중국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긴 북위탁발선비의 이야기가 송두리째 짤렸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특혜를 입은 셈이다. 카이저 콧수염을 기른 푸짐한 인상의 아저씨로 등장하며, 처음에는 현명한 명군이었으나 왕맹이 죽은 후 자만해져서 암군으로 전락하여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정벌하러 갔다가 참패하여 몰락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41]

홍콩의 소설가 황역이 5호 16국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 《변황전설》(邊荒傳說)에서도 초반부에 비수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부견이 나름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만화가 황옥랑 등이 그림을 담당한 《변황전설》 만화판에서는 근육질의 엄청난 거구로 등장하는데 세기말 패왕스런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로 묘사된다. 대머리와 수염이 특히 인상적이다.

일본에서는 2008년, 부견과 왕맹을 주인공으로 한 《왕도의 나무》(王道の樹)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다. 이후에는 2012년, 《부견과 왕맹 : 불세출의 명군과 와룡의 군사》(苻堅と王猛: 不世出の名君と臥竜の軍師)라는 제목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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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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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견의 아들인 부비가 올린 시호.[2] 부견을 살해한 장본인인 후진요장이 올린 시호.[3] 부견의 옛 장수였던 후량여광이 올린 시호.[4] 부건의 아우로, 지략이 뛰어나 형의 참모이자 오른팔로 활약하며 큰 총애를 받았다. 부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부건은 "천하는 내가 대업을 이루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라고 절규하기까지 했다.[5] 성씨를 바꾼 것은 당시에 나돌던 참언을 따른 것이었다.[6] 5호 16국시대에 들어선 이민족 왕조들이 황제라는 칭호 대신에 이 칭호를 자주 사용했다. 이름만 천왕일 뿐이지, 예법이나 시호, 묘호 등 모두를 중국 황제의 예를 따랐다.[7] 부견은 이 일을 매우 특별하게 여겼는지, 황제가 된 후에 그 누구에게도 용양장군의 작위를 내리지 않다가, 훗날 자신이 총애했던 강족 출신의 측근인 요장에게만 특별히 이를 내려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장은 훗날 부견을 배신하고 그 목숨까지 앗아가게 된다.[8] 비수대전 이후 건국된 후량의 초대 황제인 태조 의무제 여광의 아버지였으며, 경소왕으로 추존되었다.[9] 실제로 왕맹은 경력도, 빽도 없는 식객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부견이 즉위하자마자 중서시랑에 임명되어 국가 기밀을 관장하는 등 사실상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왕맹은 이후로 승진을 거듭하여 지위가 승상에 이르렀다.[10] 하지만 부견 측에서 사촌인 부생을 의도적으로 폄하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조일의 《낙양가람기》에 따르면, 부생은 용맹했지만 어질며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현왕을 자처한 부견 측 사가들이 멋대로 폭군으로 몰았다라고 말한다. 각종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진서》와는 반대의 시각이다.[11] 요양의 아우였던 요장이 이때 전진에 항복했는데, 그는 부견의 측근이 되어 맹활약했으나 훗날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하여 세력이 와해된 틈을 타서 강족의 세력을 규합하고, 후진을 건국했다.[12] 시평에 파견된 왕맹이 하루는 관리를 매질해서 죽였는데, 이에 대한 상소가 들어오자 부견은 그를 압송하여 어째서 사람들을 덕행으로 교화하지 않고 무참히 죽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맹은 법을 어지럽히는 자를 벌한 것이 죄가 된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으나, 부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겠다고 답했다. 이에 부견은 감탄하며 왕맹을 사면했다.[13] 부견도 친족을 희생시키는 일은 꺼림칙했는지, 이를 말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왕맹은 부견의 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강덕을 죽여버렸다. 그럼에도 부견은 여전히 왕맹을 신뢰하여 벌하지 않았다.[14] 그나마도 처음에는 한 달에 3번이나 들르던 것을 나중에 줄인 것이었다.[15] 367. 10~368. 12[16] 이 제3차 북벌의 실패는 환온에게 뼈아픈 타격이 되었고, 하내 사마씨의 제위를 찬탈하려던 환온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17] 乞伏司繁. 서진의 초대 황제인 열조 선열왕 걸복국인의 아버지였다.[18] 우두머리가 장안으로 불려가자 농서의 선비 걸복부는 걸복사번의 당숙인 걸복토뢰가 이끌기 시작했다.[19] 파주(巴州)에 모여 살던 이민족[20] 장자는 부견 휘하 최고의 맹장이었던 등강과 맞먹을만한 용장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부견의 심복이 되어 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이때문에 전진 사람들은 장자와 부견을 만인지적이라 칭했다고 한다.[21] 본래 유위진은 360년경에 전진의 휘하에 들어간 바 있었다.[22]위서》에서는 탁발십익건이 부견과 끝까지 항전하려다가 아들에게 배신당해 곧바로 살해당했다고 했으나, 《진서》 <부견 재기>에서는 탁발십익건이 죽지 않고, 장안으로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면서 태학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고 전한다. 《위서》의 기록은 아마도 북위 황실의 시조인 탁발십익건이 죽지도 않고, 적국 전진의 포로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는 치욕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23] 물론 저족 출신으로 권세를 쥔 사람은 많았다. 부견이 왕맹 다음으로 신뢰했던 참모는 바로 그의 아우였던 부융이었으며, 부견의 즉위 과정에서 크게 활약한 공신 여파루와 그의 아들인 명장 여광도 저족 출신이었다. 부견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던 이들도 대체로 부씨 황족들이었다.[24] 당시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모용수는 관군장군, 경조윤, 전연 마지막 황제 모용위는 신흥후, 모용위 동생 모용충은 평양태수, 구지 출신 양통은 평원장군, 남진주자사, 전량 장천석은 귀의후, 강족 요장은 양무장군이었다.[25] 부견의 조언자였던 승려 도안은 본래 양양에 살았는데, 이곳이 정복되면서 부견의 휘하에 들어왔다고 한다.[26] 해당 병력수는 《자치통감》과 《진서》의 기록이지만 과장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기병 문서만 참고해도 알 수 있듯이, 기병은 어마무시한 비용을 소모하여 통일국가인 한나라도 수십만 기병을 유지하면서 국고가 휘청할 정도였다. 전진이 수많은 북방 이민족을 그대로 포용하여 그들이 원래부터 거느리던 기병을 손에 넣었다곤 해도 500,000명이 넘는 기병은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로 봐도 전례없는 병력수이다.[27] 동진 제13대 황제[28] 사안의 아우이다.[29] 파란색은 선비 걸복부의 서진, 분홍색은 저족 여씨의 후량, 후량 남쪽의 무색인 곳은 선비 모용부토욕혼, 녹색은 강족 요씨의 후진, 후진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서연, 서연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후연, 후연 북쪽은 선비 탁발부북위, 북위 북쪽은 튀르크계 고차(퇼레스), 남쪽의 노란색은 한족 사마씨의 동진이다.[30] 예전에 모용수는 전연의 마지막 황제인 모용위와 그 측근이었던 모용평에게 의심을 받고 부견에게 망명해왔다. 이때 왕맹은 모용수가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남의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를 제거할 것을 건의했으나, 부견은 모용수와 같은 영웅호걸을 죽일 수 없다며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31] 전진의 건국 군주인 고조 경명제 부건의 5남[32] 태조 무소제 요장은 부비 · 부등 · 부숭 등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벌이다가 끝내 싸움의 끝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요장이 붕어하고, 후진의 전성기를 이끈 제2대 고조 문환제 요흥이 즉위한 후에야 부숭을 죽이고 숙적인 전진을 완전히 멸망시켰다.[33] 특히 부견은 선비족(특히 모용선비)과 강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을 수도인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키면서도, 자신의 종족인 저족은 오히려 지방으로 파견했는데 이는 꽤나 독특한 정책이었다.[34] 그러나 북위는 534년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로 나뉘었고, 577년에 북주의 제3대 고조 무제 우문옹이 재통합했다.[35] 답례(?)인지는 몰라도 고국원왕 말기에 전진에 쫓겨 고구려로 도망쳐온 전연의 태부 모용평을 고구려측에에서 전진으로 친절하게 배달해준 사건도 있었다.[36] 그 외에 부견의 사촌인 부락(苻洛)이 반역을 꾀하고자 여러 이민족들에게 군사를 청했는데 그 명단 중에 고구려와 백제뿐 아니라 신라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무시당했다.[37] 진평은 소하나 조참과는 달리, 대놓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서 두 사람에 비하면 세간의 평가는 낮았으나 그 능력 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뛰어난 모사였다. 부견은 이런 발언을 통해 자신이 철저하게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채용하겠다는 뜻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려 한 듯하다.[38] 사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남조의 궁정에서는 여자가 나체로 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남조 송나라의 산음공주 유씨가 30명의 남자 애인들을 거느릴 만큼 성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39] 부견이 미소년을 총애하는 모습이 의아해보일 수 있으나, 당시 중국은 남색 문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40] 전조유연유총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은 꽤 적은 편이다.[41] 다만 이 작품에서는 부견의 아우인 '부융'의 이름을 '부용'으로 잘못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