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흠 관련 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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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의 황족 신야장왕(新野莊王) 司馬歆 | 사마흠 | |
시호 | 장왕(莊王) |
작위 | 신야현공(新野縣公) → 신야군왕(新野郡王) |
최종직위 | 남중랑장(南中郞將) →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 표기장군(驃騎將軍)[1] |
성씨 | 사마(司馬) |
휘 | 흠(歆) |
자 | 홍서(弘舒) |
아버지 | 친아버지: 사마준(司馬駿) |
생몰기간 | ? ~ 303년 |
고향 | 사례(豫州)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2] |
재위기간 | 서진의 신야군왕 |
302년 ~ 3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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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서진의 황족이자 사마준의 아들[3]이다. 자는 홍서(弘舒)로 출신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례 하내군 온현. 시호는 장왕(庄王).2. 생애
태강 6년(286년) 아버지 사마준이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큰형 사마창이 부풍왕 직위를 잇자 사마창은 봉국을 동생 사마흠에게 나누어 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태강 9년(289년) 11월, 무제 사마염은 조를 내려 사마흠을 신야현공으로 봉하고 식읍 1800호를 주었으며 의례는 군왕과 동등하게 하였다. 사마흠은 아직 소년임에도 재산이 있어 신분은 높았으나 스스로를 율동하여 도의를 이행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태비 장씨(臧氏)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복하는 모습은 예제를 넘어 효행으로 소문났다. 후에 산기상시로 임명되었다.
영강 2년(301년) 1월, 조왕 사마륜이 제위를 찬탈하자 사마흠은 남중랑장에게 맡겨졌다. 제왕 사마경이 사마륜 토벌의 군사를 올리자 주군에 격문을 보냈다. 사마흠은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조왕 사마륜은 사마흠에게 친숙부인데 제왕 사마경은 사마흠의 종질이었으므로 가깝기로는 사마륜이 더 가까웠다. 이 때, 사마흠의 측근인 왕수(王綏)가 간언하길
"조왕은 공의 근친이고 강성하며 제왕은 소원하고 약소하니 조왕을 따라야합니다."
라며 사마륜에게 붙기를 권한 반면, 사마흠의 참군 손순(孫詢)[4]은 왕수와 반대로 많은 사람들을 앞에서 큰소리로 사마흠에게 간언하길
"조왕은 흉역이며 천하가 공동으로 토벌하려는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의 정은 돌보지 않는 것이 고대부터 현명한 규칙입니다."
하니, 사마흠은 이러한 손서의 말에 동의하고 군사를 일으켜 사마경의 보좌를 맡기로 결심하였다. 사마흠은 곧장 손서를 사마경에게 파견하였고 사마경은 손서를 맞아들여 그 손을 잡고 "우리 대절을 이루게 하는 것은 신야공이다"라고 기뻐하였다.
제왕 사마경을 필두로 상산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륜 토벌에 합류하였으며, 이들중에서 사마흠이 스스로 갑옷을 입고 부하를 이끌어 선봉을 자처하였다. 사마흠의 선봉대는 사마륜의 군대를 물리쳤고 그대로 낙양에 입성하여 조왕 사마륜의 몰락에 일조하였다. 이 공적으로 사마흠은 신야군왕으로 진봉되어 식읍 2만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사지절 도독형주제군사 진남대장군에 임명되어 개부의동삼사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신야왕 사마흠은 조왕 사마륜이 토벌된 뒤 자신의 진수 지역인 형주로 돌아가려고 제왕 사마경과 함께 수레를 타고 진무제의 능묘에 배알하러 갔다. 이 때 그는 사마경에게 권했다.
성도왕(사마영)은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함께 큰 공훈을 세웠으니 지금은 의당 그를 머물게 하여 함께 정치만 보필하게 해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땅히 그의 병권을 빼앗아야만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 장사왕 사마예 역시 사마영과 함께 능묘를 배알했는데, 그는 사마영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천하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만드신 대업이니 대왕께서 오직 이를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예의 말을 들은 사람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영은 "사마경에게 권력을 양보하고 번국으로 돌아가서 사해의 인심을 거둬들이라."는 노지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성도왕 사마영이 사마륜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데다 세력이 막강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사마경도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마경은 사마흠의 건의대로 사마영에게 수도에 남아서 자신과 함께 국정을 운영할 것을 제의했지만, 사마영은 업으로 물러갔다. 이에 사마경이 깜짝 놀라 그를 말리려 달려왔지만, 결국 사마영은 본거지로 돌아가버렸다.
제왕 사마경이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면서 실권을 잡은 후,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독점하고 공사 간의 집들을 수백 채나 헐어버리며 왕부를 크게 지어 서궁(즉 황궁)과 같은 규모로 만드는 등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이때 하간왕 사마옹의 장사 이함은 양주 자사 황보상과 불편한 관계였는데, 황보상이 제왕 사마경의 참군사에 발탁되자 불안감을 느꼈다. 게다가 사마경의 우사마인 조양과도 틈이 생기자 이러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해 말 한 필을 타고 사마옹에게 달아나서 사마경을 토벌할 것을 권유했다.
태안 원년(302년) 12월, 하간왕 사마옹은 혜제에게 제왕 사마경이 제위 찬탈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사마흠, 성도왕 사마영, 범양왕(范陽王) 사마효(司馬虓)를 낙양에 집결시키고 다시 사마경을 면직시켜 저택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상산왕 사마예가 사마경을 살해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의 삼족을 멸하니 죽은 사람이 2,000여 명이었다. 또한 사마경의 아들 사마초, 사마빙, 사마영을 금용성에 가두고 사마경의 동생인 북해왕 사마식을 폐위시켰으며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영녕에서 태안으로 고쳤다. 사마예는 조정을 장악한 뒤 일이 크고 작고 간에 모두 업성에 가서 성도왕 사마영에게 자문을 받았으며 다른 왕들과도 널리 의논해 협치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사마흠은 자신에게 화를 입을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사마영과 교류를 돈독히 하였다.
태안 2년(303년) 5월, 사마흠의 엄격하고 가혹한 폭정때문에 의양(義陽)의 만이 장창이 만족들을 선동해 강하(江夏)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흠은 기독이였던 근만에게 토벌을 명했으나, 근만은 패주하였다. 이에 사마흠은 급히 조정에 표를 올려 토벌군 지원을 요청하였다. 사마예는 둔기교위 유교를 예주 자사로 삼고, 영삭장군 유홍을 형주 자사로 삼아 장창을 토벌하게 했다. 유교는 여남에 주둔한 뒤 예주를 향하던 장창의 부하 황림의 20,000명 병력을 격파했다.
그러자 황림 등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익양(弋陽)을 공격하였고, 익양태수 양환(梁桓)은 장창군에 맞서 성을 굳게 지켰다. 비록 황림의 군대는 익양에서 고착 상태에 빠졌으나, 장창의 다른 장수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무창(武昌)으로 보낸 마무(馬武)는 성을 함락시킨 뒤 그 태수를 죽였고, 동쪽 지역을 공략하러 간 석빙(石冰)은 양주자사 진휘를 격파하였다. 특히 석빙은 이후로도 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강주와 양주의 여러 지역을 굴복시키고 그곳에 수장을 두었다. 여기에 더해 임회(臨淮) 사람 봉운(封雲)이 거병하고, 장창에게 호응해 서주를 유린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사마흠은 반란군의 수괴였던 장창을 직접 토벌하고자 또 다시 표를 올려 지원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사마영과 대립하고 있었던 사마예는 사마영과 친분이 있는 사마흠이 함께 흉계를 꾸미고 있다 의심하여 토벌군을 보내지 않았다.
토벌군은 커녕 사마예로부터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한시가 급해진 사마흠에게 종사중랑 손순이 간언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번의 나쁜일이라도 관용을 베풀면, 여러 대의 우환으로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공은 지금 왕실의 방벽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중임을 맡아 조정을 돕는 중요한 위치에 계십니다. 이미 상서한 이상 공이 조치를 취한다 해도 죄가 될 거라 보십니까? 간흉은 나날이 기세를 올리고 있어 이미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것들이 왕실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며 일단 출병부터 하기를 권유했다. 그러자 왕수가 이르길
"장창과 같은 소적을 정복하려면 편장(偏将), 비장(裨将)이면 충분합니다. 아직 조정에 의한 허가도 받지 않았는데 어찌 스스로 위험한 싸움에 임하시려는겁니까!"
라고 반대해 취소됐다.
이러한 와중에 세력이 비대해진 장창의 반란군이 번성(樊城)을 내습하자 어쩔수 없이 사마흠이 직접 출진하여 반란군을 요격하였으나 역으로 대패를 당하고 군은 붕괴, 사마흠은 장창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정은 표기장군을 추증하여 장왕으로 시하였다.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후사는 형인 사마창의 아들이자 사마흠의 조카인 사마소(司馬劭)가 이었지만, 영가의 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