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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14:27:58

사마휼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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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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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이후

1. 개요

司馬遹
278~300

서진 혜제 사마충의 외아들로 자는 희조(熙祖). 사마충의 정실 가남풍의 자식이 아니라 첩이었던 사구의 소생인 서자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아버지와 달리 현명하고 똑똑해서 할아버지 사마염의 사랑과 기대를 받았다. 사마충이 황태자에서 밀려나지 않은 원인 중의 하나가 사마염이 보기엔 아들 사마충은 어리석었지만 손자 사마휼이 똑똑해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사마염은 사마휼을 총애해서 항상 곁에 두었다. 한 번은 사마휼과 황자들이 전각에서 놀고 있을 때, 아침을 맞아 당시 태자였던 사마충이 황자들의 손을 차례로 잡아주었다. 그 다음 사마충은 사마휼이 자신의 아들인 것을 모르고 그의 손을 잡았는데, 사마염이 "그 아이는 네 아들이다."라고 말하자 깨닫고 손을 놓았다고 한다.

태강 10년(289년) 광릉왕(廣陵王)에 책봉되었고 영희 원년(290년) 가을 사마충이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사마휼은 태위 왕연[1]의 딸 왕씨(왕혜풍)을 황태자비로 삼고 장씨(장준)을 미인(후궁의 작위)으로 삼았다. 사마휼은 장씨와의 사이에서 영강태자 남양왕 사마반(장남), 민형태손 사마장(차남), 회충태손 사마상(막내) 세 아들을 보았다. 다만 왕씨는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사마휼이 나이를 먹어서 돈과 사치 맛을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지가 황제 자리에 오를 게 거의 확실해 보여서 그런지 애가 갑자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쳐놀기 시작한다(...). 당시 황태자(사마염이 죽었으니 황태자 자리에 오른 것은 사마휼)의 월급이 50만 전이었다고 한다.

허나 그 머리가 어디 도망가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사치를 부리는 와중에도 귀신같이 가씨의 전횡을 포착한다. 그런데 머리는 좋았는데 사람이 어린 건지 아니면 형세판단이 덜 된 건지 자신감이 지나친 건지 그 모두인 건지 하여간 그걸 대놓고 드러내버리는 바람에 가남풍의 동생 되는 가밀과 척을 지게 되었다. 가씨의 거두와 황태자가 으르렁대는 사이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황태자는 가씨의 소생이 아니다.[2]

이리 되니 가남풍은 남편이 죽은 뒤, 의붓아들인 사마휼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해 온갖 모함과 음모를 꾸몄다. 한편 사마휼은 아들 사마반이 병에 걸리자 아들을 위해 아버지에게 왕작을 달라고 청했으나 사마충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남풍은 사마휼이 사마충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원강 9년(299년), 가남풍은 사마충의 몸이 불편하다며 사마휼을 불러오게 했는데 막상 그가 왔을때는 만나지 않고 별실에 두게 하고 시비 진무를 시켜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술 세 되를 하사하고 마시게 했다. 태자는 수상하게 여겨 사양했으나, 진무가 천자가 하사한 것을 먹지 않는다고 다그치니 억지로 다 마시게 하였기에 대취했다. 그러자 가남풍은 황문시랑 반악을 시켜 글의 초안을 만들게 하고 비녀 승복에게 종이와 붓, 초안을 가지고 사마충이 조서를 내렸다고 하면서 취해 있던 사마휼에게 베껴 쓰게 했다.

그 글의 내용은...
폐하(사마충)께서는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만약 스스로 물러나시지 않으면 제가 들어가서 끝내드리겠습니다. 중궁(가남풍)께서도 또한 스스로 물러나셔야 될 겁니다. 중궁께서도 물러나시지 않으면 내 손으로 끝내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제 어머니 사씨와 더불어 기일을 정해놓고 행동을 개시할테니 괜히 미루어서 후환을 초래하지 마십시오. 삼진[3] 아래에서 털을 먹고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황천이 걱정거리와 해로운 것을 없애버리라고 허락했으니 도문(사마반)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장씨를 황후로 삼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천제에게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4]

결론은 더이상 왕관의 무게에 짓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다 해 두었으니까요. 순순히 왕관을 넘기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도의 내용이다. 정확히는 아버지, 양어머니보고 안 물러나면 패륜을 저지를 것이며 친어머니와 함께 손잡고 날을 정해 거사해서 내가 황제가 되겠다는 엄청난 패드립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사마휼은 이미 술에 떡이 돼서 초안을 보고도 뜻을 모르고 그대로 베껴 썼는데 쓰다가 술 때문에 쓰러져 적지 못한 부분은 그의 필적을 이용해 가남풍이 보충해서 사마충에게 올렸다. 다음 날 사마충은 대신들을 불러 사마휼을 죽이는 것에 대해 의논했는데[5] 대신들 중에서 장화는 신중하게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가남풍이 이미 사마휼의 필적을 베껴 적인 10여 장의 반역문을 보여주자 감히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다.[6] 결국 상서 화욱을 시켜 사마휼을 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사마휼은 절하고 의복을 고쳐 입은 다음 조잡한 달구지에 탔는데 동무공 사마담이 병장기를 가지고 사마휼, 아내 왕씨, 그의 세 아들을 태워 금용성에 유폐시켰다. 이때 그의 장인 왕연은 스스로 표문을 올려 딸 왕씨와 사마휼을 이혼시켜 달라고 했다.[7] 표문은 반영되어 왕씨는 사마휼과 강제로 이혼했고 유폐에서 풀려나 통곡하면서 본가로 돌아갔다. 그 후 가남풍은 사람을 시켜 사씨와 장씨를 죽여 후환을 없앴다.

이에 우위독 사마아, 상종독 허초, 전 중랑장 시의 등은 사마휼을 다시 황태자로 만들고자 당시 병권을 쥐고 있던 조왕 사마륜을 찾아가 호소한다. 그러나 사마륜은 이미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부하였던 손수는 사마륜에게 가남풍의 조카 가밀[8]로 하여금 사마휼을 죽이도록 하여 여러 사람들의 희망을 끊어 버리라고 했다. 사마륜이 가남풍과 같은 편이었던 걸 누구나 다 아는데 황태자가 고마워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가남풍에게 사마휼을 죽이자고 꼬시고 그 후에 뜻을 펼쳐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사마륜도 동의한다.

결국 사마륜은 세간에 "궁안의 누군가가 가남풍을 끌어내리고 황태자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가남풍은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마륜과 손수가 가남풍에게 사마휼을 죽이라고 권하자 가남풍은 이를 받아들인다.

가남풍은 자신의 측근 태의령 정거에게 독약을 만들게 하고 황문 손려를 시켜 사마휼을 독살하게 했다. 사마휼은 폐태자가 된 후부터 가남풍에게 독살될까 봐 항상 자기 앞에서 자기가 먹을 음식을 조리하고 데우게 했다. 가남풍이 보낸 손려가 사마휼을 감시하던 저시어사 유진에게 온 뜻을 밝히자 유진은 사마휼을 작은 방으로 옮기고 음식을 끊었는데 그래도 궁인들이 몰래 음식을 보내 주었다. 사마휼은 이 때 화장실에서 일 보고 있었는데(...) 손려는 갑자기 들어가 독약을 먹게 했다. 하지만 사마휼이 눈치채고는 먹지 않자 손려가 약 찧는 절구를 꺼내 때려 죽이면서 사마휼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사마휼이 살해되는 비명 소리가 담장 너머까지 들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 유사가 서인의 예로 장례 치르기를 청했지만 가남풍은 광릉왕(廣陵王)의 예로 장사지냈다.

하지만 이에 사마륜은 "가황후와 가밀이 황태자를 죽였다!" 라고 하며 반기를 들고, 제왕 사마경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와서 가밀을 참수하고 가남풍을 붙잡아 독약을 강제로 먹여 독살했다. 이에 가남풍은 "사마륜이 역적이다." 라며 피를 토하고 죽게되니, 향년 44세였으며 이게 팔왕의 난의 시작이 되었다. 사마륜 이 자는 마치 이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가남풍이 결국 사마휼을 죽이자 그걸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가씨를 족멸하고 권력을 잡아 황제가 된 위인이다. 결국 사마륜은 계획대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한 건데 결국 소원대로 황제가 됐지만 두 달만에 다른 왕들의 공격을 받아 자식들과 함께 참혹하게 죽었다.

3. 이후

그의 죽음은 팔왕의 난, 더 크게는 서진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마륜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상국(相國)이 되어 대권을 잡자 사마휼을 명예회복하고 민회태자(湣懷太子)로 추증했다. 또 요절한 사마반을 남양왕(南陽王)[9], 민형태손 사마장(湣衡太孫 司馬臧)을 임회왕(臨淮王), 회충태손 사마상(懷沖太孫 司馬尙)은 양양왕(襄陽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마장을 황태손으로 삼고 이혼했다가 돌아온 왕씨를 그의 양어머니로 삼으며 사마휼을 현평릉에 다시 안장했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 싶었던 사마륜은 사마장을 죽이고[10] 사마충을 협박하여 잠시 황제가 됐다가 다른 왕들의 공격을 받아 죽는다. 사마륜을 죽이고 제왕 사마경이 사마충을 복위시키자 사마휼의 막내아들이자 유일하게 살아 있던 사마상은 황태손이 됐다. 하지만 겨우 2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사마충과 사마휼의 대는 완전히 끊기게 된다.

묘하게 동오 대제의 장남인 손등하고 겹친다. 유능하지만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부친보다 먼저 죽은 비운의 태자이거나, 사후 스스로의 죽음 때문의 황실 가문 내에서 난리가 난다거나.


[1] 훗날 팔왕의 난을 종결시킨 동해왕 사마월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대권을 잡은 위인으로 난을 피해 도망치다가 석륵에게 잡혔다. 석륵은 그의 죄를 논죄했는데 왕연은 살살 아부하다가 빡친 석륵이 밤에 흙담을 넘어뜨려 압사시켜 죽였다.[2] 그런데 가밀도 가남풍을 믿고 처신을 개판으로 한 건 사실이었다. 혜제와 사냥을 가는데 거기서 기고만장한 짓거리를 해서 신하들에게 '저놈이 나중에 제위를 찬탈하려는 거 아닌가' 하는 뒷말도 많이 나왔고, 나름 머리는 좋아서 아는 것은 많았던 모양인데 그걸로 하도 잘난체를 해대다 보니 사마휼이 빡친 적도 있었다. 가밀이 하도 싸가지없게 구는 바람에 그걸 보고 빡친 성도왕 사마영이 가밀에게 한마디 했다가 저 멀리 좌천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제3자가 보기도 영 아니었던 듯. 그리고 사마휼이 결혼하고 싶어했던 왕연의 큰 딸을 자기가 가로채서 결혼해 버린 일도 있었다. 가밀의 어머니 가오가 260년 생이란 걸 감안해 보면 가밀이 끽해야 20대 초반이었을 터인데(278년생인 사마휼과는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진서에서 저 인간 이야기를 보면 무슨 외척의 우두머리 같은 짓거리는 죄다 하고 다녔다. 이렇게 젊은 놈이 온갖 개판은 다 치고 다녔으니 사마휼 입장에서야 진짜 엄청난 포커 페이스가 아니고서야 저 인간을 보고 웃어넘길래야 웃어넘길 수가 없을 수밖에... 거기다 훗날 사마륜의 부추김에 뒷 일 생각 안하고 옳타꾸나 하고 사마휼 죽이는 데 앞장선 걸 보면 판단력도 영 개판인 데다, 사마륜의 쿠테타에 자기 수하에 있는 군사를 이끌고 싸운다거나 했던 것도 없이 마룻바닥에서 목숨을 구걸하다 죽은 걸 보면 실제로 별다른 자기 세력도 없는 인간이었다.[3] , , [4] 陛下宜自了,不自了,吾當入了之。中宮又宜速自了,不自了,吾當手了之。並與謝妃共要,刻期兩發,勿疑猶豫,以致後患。茹毛飲血於三辰之下,皇天許當掃除患害,立道文為王,蔣氏為內主。願成,當三牲祠北君。 ─ 자치통감[5] 당연하지만 사마충은 글을 못알아봤는데다가 바보라서 자기가 하고 있는 게 뭔지도 몰랐다.[6] 사실 변호할수도 없었다. 왜냐면 변호하는 즉시 가남풍이 죽이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7] 사실 이는 딸을 살리려는 조치였다. 안그러면 가남풍이 왕씨도 죽일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8] 원래 이름은 한밀로 가남풍 여동생의 아들인데 가남풍의 아버지 가충이 후계자가 없어서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남동생이었다.[9] 원래는 영강태자였는데 조왕 사마륜이 집권한 후 그렇게 바꿨다. 정통성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던 걸로 보인다.[10] 사마륜은 사마의의 9남으로 황제 자리와 멀리 있는 사람이다. 사마장은 당시 황제였던 사마충의 둘째 손자였으니 자신의 정통성이 심히 후달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