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등 관련 틀 ''' | ||||||||||||||||||||||||||||||||||||||||||||||||||||||||||||||||||||||||||||||||||||||||||||||||||||||||||||||||||||||||||||||||||||||||||||||||||||||||||||||||||||||||||||||||||||||||||||||||||||||||||||||||||||||||||||||||||||||||||||||||||||||||||||||||||||||||||||||||||||||||||||||||||||||||||
<colbgcolor=#ece5b6><colcolor=#800080>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신채무애왕(新蔡武哀王) 司馬騰 | 사마등 | |
시호 | 무애(武哀) |
봉호 | 동영공(東瀛公) → 동연왕(東燕王) → 신채왕(新蔡王) |
최종직위 | 안북장군(安北將軍) |
성씨 | 사마(司馬) |
휘 | 등(騰) |
자 | 원매(元邁) |
아버지 | 친아버지:사마태(司馬泰) |
생몰기간 | ? ~ 307년 |
동연왕 재위기간 | 306년 ~ 307년 |
신채왕 재위기간 | 307년 ~ 307년 |
[clearfix]
1. 개요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의의 넷째 동생인 동무대후(東武戴侯) 사마규(司馬馗)[1]의 손자이고 고밀문헌왕(高密文獻王) 사마태(司馬泰)[2]의 둘째아들이다. 자는 원매(元邁).[3] 봉호는 신채왕이고 시호는 무애로 모두 더해 신채무애왕(新蔡武哀王)이다. 형으로는 팔왕의 난의 8왕중 한명인 동해효헌왕 사마월이 있으며 동생들로는 사마략, 사마모가 있다.2. 생애
젊은 나이에 용종복야(冗從僕射), 동영공(東瀛公)에 봉해져 남양태수, 위군태수를 역임하고 부임지에서 행정처리 능력을 칭찬받았다. 그 결과로 중앙에 입조하자 종정(宗正)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태상(太常)이 되었으며, 다시 지절·영북장군·도독촉주제군사·병주자사로 승진하였다.태안 2년(303년)경 병주는 기근을 겪었는데, 사마등은 이민족들을 잡아 팔아넘겨서 군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석륵이 사마등에게 잡혀 산동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영안 원년(304년) 7월 형 동해왕 사마월은 성도왕 사마영이 업성에서 향락에 빠져 사느라 수도 낙양을 비워둔 틈을 타 진진에게 군대를 이끌고 운용문을 통해 궁궐을 장악하게 한 뒤 삼공과 백관들, 그리고 전중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서 계엄령을 내리고 사마영을 토벌하게 했다. 이후 사마월은 7월 3일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사마영이 폐위시켰던 황후 양씨와 태자 사마담을 복위시켰다. 사마등은 형의 명을 받아 사마영에게 반기를 든 유주제군사도독 왕준에게 가서 선비, 오환족과 연합하여 사마영을 치게 했다. 사마영은 이에 맞서 흉노족과 연합했으나 흉노족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왕준, 사마등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업에서 달아났다. 그 공으로 사마등은 안북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석에서 거병한 유연에 대항하여 사마등은 선비족 탁발의타에게 요청하여 군사를 빌렸다. 유연을 공격했고, 몇번의 승리를 거뒀으나 결국 격파당하였고 병주를 뺏기고 말았다.
영가 원년인 307년 5월, 반란군인 급상이 부하 장수 석륵을 앞세워 위군태수 풍숭을 격파하고 업성을 공략했다. 당시 업성을 지키고 있던 사마등은 업성이 공략되자 도망치다가 급상의 장수 이풍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