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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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虞喜생몰연도 불명[1]
동진의 인물. 자는 중녕(仲寧). 양주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출신. 동오 시기 정로장군을 지낸 우찰(虞察)의 아들. 동진 시기 역사가 우예의 형. 광록대부 우담과는 친척 사이.
2. 생애
어려서부터 태도와 행실을 갖춰 여러 학문을 섭렵했고, 과거의 일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 명성을 들은 회제 사마치가 마차를 보내 우희를 박사로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건흥 원년(312년) 4월, 제갈회가 회계태수로 부임하자, 우희는 출사하여 공조로 임관했다. 이후 효렴으로 살펴져 주의 수재로 천거되고, 사도부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우희는 전부 응하지 않았다.
태녕 연간(323년 ~ 325년)에 명제 사마소가 그를 박사로 삼아 중앙에 불러들이려 했으나, 우희가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명제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조서를 내리자, 우희는 병을 핑계대며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함화 원년(326년), 황문시랑 하충이 상소를 올려 우희를 천거하니, 조정에서는 우희를 산기상시로 삼았지만 이번에도 우희는 역시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우희는 이후로도 집에서 경전을 연구하면서 《모시》를 해석해 《모시략》(毛詩略)을 집필하고, 《효경》에 주석을 달았으며, 《지림》(志林) 30편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도참설에도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던 중에 우연히 천문학에 대한 관심도 생겨, 우주에 관한 동양의 주요 학설인 선야설, 혼천설, 개천설 세 학설들을 비교, 연구하여 《안천론》(安天論)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관직을 거부하고 학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7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자식이 없어 대가 끊겼다.
[1] 270년 ~ 345년으로 봐야한다는 설이 우세하나, 281년 ~ 356년으로 봐야한다는 설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