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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10:14:55

독발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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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량 말대 군주
景王 | 경왕
묘호 없음
시호 경왕(景王)
연호 홍창(弘昌, 402년 ~ 404년)
독발(禿髮)
녹단(傉檀)
생몰 365년 ~ 415년
재위 402년 ~ 414년
부친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
왕후 절굴씨(折掘氏)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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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남량의 제3대 왕이자 마지막 왕.

선비 독발부 제6대 수령이었던 독발사복건의 3남으로, 남량 제1대 열조 무왕 독발오고와 제2대 강왕 독발리록고의 동생이었다.

2. 생애

독발녹단은 유년 시절부터 매우 용맹하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아버지 독발사복건은 늘 그의 형제들 앞에서 독발녹단을 칭찬했다.
"독발녹단은 고명하고 재주가 있어 너희와 비할 바가 못된다."
398년, 후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양궤(楊軌)를 돕기 위해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출병했다. 그리고 양궤와 합세해 여찬을 쳤으나 대패하고 후퇴했다.

399년 정월, 형 독발오고가 낙도로 천도할 때 거기대장군, 광무공에 임명되어 서평(西平)을 지켰다. 이후 6월에 도성으로 소환되어 녹부국사로 임명받고, 국가 정무를 처리했다. 동년 8월, 독발오고가 낙마 사고로 승하한 후 그 뒤를 이은 독발리록고는 팔짱을 낀 채 나라의 여러 큰 일을 독발녹단에게 일임했다.

400년, 서평에 인질로 잡혀있었던 걸복치반이 도주를 시도하다가 남량 기병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독발리록고가 노하여 걸복치반을 죽이려고 하자 독발녹단이 말렸다.
"신하와 아들이 주군, 아버지에게로 도망치려는 건 과거부터 있던 통의(通義)입니다. 그렇기에 위무제관우를 잘 대접한 뒤 도망치게 해주었고, 진소양왕초경양왕이 도주한 일을 용서해주었습니다. 걸복치반은 비록 배반했으나 효심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를 용서하셔서 깊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은 우리의 기량을 천하에 널리 알리십시오."
독발리록고는 동생 독발녹단의 말을 듣고 걸복치반을 사면했다.

402년, 형 독발리록고가 승하하자 즉위하여 양왕(凉王)을 칭하고 연호를 홍창(弘昌)으로 개원했다. 후진의 제2대 고조 문환제 요흥은 독발녹단을 광무공(廣武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했다. 한편, 서평에 감금되어 있었던 걸복치반이 경비병들을 속여 몰래 후진의 원천(苑川)으로 도망쳤지만 독발녹단은 그를 용서하고 걸복치반의 처자를 모두 돌려주었다.

403년, 독발녹단은 후량을 지속적으로 침략해 괴롭혔지만 후진에겐 칭신하며 복종했다. 한번은 후진이 속국인 후량을 돕기 위해 장수 왕송총(王松怱)을 후량의 도성인 고장(故藏)에 파견했는데, 독발녹단의 동생인 독발문진(禿髮文眞)이 왕송총을 습격해 그를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접한 독발녹단은 대노하여 왕송총을 다시 후진의 도성인 장안으로 돌려보내 사죄하고 이 일에 대해 해명했다. 같은 해 8월, 북량남량의 침략을 견디다 못한 후량의 제4대 군주인 말제 여륭이 나라를 들어 후진에 바쳤다.

404년, 후진의 강성함을 두려워해 복종의 의미로 사용하던 연호를 폐지하고, 상서승낭관 관직을 없앤 뒤 참군 관상(關尚)을 후진에 사신으로 보냈다. 문환제 요흥이 관상에게 말했다.
"거기장군은 내게 충성을 바치겠다며 칭번했으나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성곽을 지었으니, 이것이 신하로서의 도리인가?"
이에 관상이 대답했다.
"왕후(王侯)가 험난한 곳에 성을 짓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본래 선왕(先王)들도 하던 일로, 황제의 안전을 지키고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거기장군은 외딴 땅에 있어, 남쪽에선 강족들이, 서쪽에선 저거몽손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벽을 쌓은 것인데, 폐하께서 이를 의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문환제 요흥은 훌륭한 대답이라고 칭찬했지만 독발녹단에 대한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406년, 독발녹단은 장수 독발문지(禿髮文支)를 보내 남쪽에 있었던 강족들을 격파했다. 독발녹단은 후진의 요흥에게 사신을 파견해 양주의 고장을 자신이 관할하길 청했으나 요흥이 이를 거절하고 독발녹단을 산기상시에 봉한 뒤 식읍 2,000호를 늘려주었다.

동년(406) 6월, 군사를 일으켜 북량의 저거몽손을 정벌해 저지(氐池) 북쪽에 주둔했다. 저거몽손이 싸워주지 않고 성만 굳게 지키자 독발녹단은 인근 논밭에 심어져 있는 벼 모종을 뽑아버리고, 적천(赤泉)까지 가서 약탈을 마친 후 남량으로 돌아갔다. 이때 독발녹단은 돌아가면서 약탈품 중 말 3,000필과 양 30,000구를 후진에 바쳤다. 문환제 요흥은 그가 충성스럽다고 여겨 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將),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하고 고장을 다스리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후진에 보낸 양주자사 왕상(王尙)을 소환해 독발녹단이 고장(姑臧)으로 입성하게끔 도와주도록 했다.

독발녹단이 보•기 30,000명을 거느리고 고장성 인근인 오간(五澗)에 주둔했다. 왕상은 문환제 요흥의 명령을 받들어 청양문(靑陽門)을 통해 성을 나갔고, 남량군은 진남장군 독발문지를 선두로 하여 양풍문(凉風門)으로 고장에 들어왔다. 독발녹단 또한 뒤이어 입성하여 고장성 겸광전(謙光殿) 선덕당(宣德堂)에서 문무백관들과 연회를 열고 황금과 말을 나누어주었다. 요흥은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어 황급히 명령을 취소했으나 이미 독발녹단이 고장성을 장악해버려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장을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이후 독발녹단은 독발문지에게 고장을 맡기고 자신은 도성인 낙도로 귀환했다.

같은 해(406) 11월, 서량에 사자를 보내 태조 무소왕 이고와 화친하고 도읍을 낙도에서 고장으로 천도했다.

407년 9월, 50,000여 명의 대군을 일으켜 북량을 공격했으나 균석(均石)에서 대패했다.(균석 전투) 북량군이 진격하여 서군(西郡)의 일륵(日勒)[1]까지 이르니, 서군태수(西郡太守) 양통(楊統)이 북량에 투항했다. 10월에 후진의 하주자사 팽해념(彭奚念)이 남량에 귀순했다.

동년(407) 11월, 흉노 철불부가 세운 북하의 황제 혁련발발이 혼인으로 동맹을 맺자고 했으나 독발녹단이 거부했다. 혁련발발은 2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남량을 공격해 광무군 지양(支陽)[2] 일대를 약탈했다. 북하군은 백성 10,000여 명을 학살하고 27,000여 명을 포로로 삼은 뒤, 가축 수십만 구를 빼앗아 돌아갔다. 독발녹단이 급히 추격했으나 양무(陽武)[3]에서 크게 패해 남량의 병사 10,000여 명과 장수 10명이 전사했다.(양무 전투) 독발녹단은 겨우 목숨을 구해 살아남은 기병 수십 명과 함께 지양의 남쪽 산에 들어갔다. 혁련발발은 죽은 남량인들의 시체를 쌓아 언덕을 만들고 여기에 '촉루대'(髑髏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달아 북량과 북하 두 나라에 대패한 독발녹단은 외세의 침략이 두려워 고장성 밖 300리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양무 전투에서의 패배로 경내에 백성들의 원망 소리가 가득해져 반란이 수차례 일어나면서 남량은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각족(屠各族)의 수령 성칠아(成七兒)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천중도위 장맹(張猛)에게 토벌당했고, 군자좨주 양부(梁裒), 보국사마 변헌(邊憲)이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독발녹단에게 처형당했다.

408년, 양무 전투와 여러 반란 소식까지 들은 후진의 문환제 요흥은 힘이 빠진 독발녹단을 도모할 생각으로 상서랑 위종(衛宗)을 보내 남량을 살피도록 했다. 독발녹단과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위종은 한탄하며 요흥에게 아직 남량을 도모하긴 힘들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요흥은 이를 듣지 않고 그의 아들인 중군장군 요필(姚弼), 후군장군 염성(斂成), 진원장군 걸복건귀에게 보•기 30,000명을 주어 남량을 습격하게 하고, 장수 요현(姚顯)에게도 20,000명의 군사를 주어 요필군의 후속 병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좌복야 제난(齊難)에게 20,000명의 군사를 주어 북하를 토벌하게 하고 독발녹단에게 서신을 보내, 지금 북하를 토벌 중인데 혁련발발이 서쪽으로 도망칠까 염려해 요필과 군사를 보낸다며 안심시켰다. 독발녹단은 그러겠거니 하며 방비를 하지 않았다.

요필의 후진군이 마침내 남량에 이르러 창송을 무너뜨리고 창송태수 소패(蘇霸)를 참수했다. 요필이 계속 진격하여 고장에 당도하자 독발녹단은 비로소 방비를 철저히 하고, 성을 굳게 지키며 기습을 가해 요필의 후진군을 무너뜨렸다. 패배한 요필은 서원(西苑)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고장성 안에서 왕종(王鍾), 송종(宋鍾), 왕아(王娥) 등이 요필과 내응하려다가 연락책이 관리들에게 붙잡혔다. 독발녹단은 주모자만 주살하고 나머진 사면해주려 했으나, 전부 용서해선 안된다는 전군장군 이역연후(伊力延侯)의 말을 좇아 5,000명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부녀자들은 병사들에게 상으로 던져주었다.

독발녹단은 각 군현에 명령해 소와 양을 모두 야외로 몰게 했다. 후진의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노략질하자, 진북장군 독발구연(禿髮俱延), 진군장군 경귀(敬歸) 등 10여 명의 장수들에게 기병을 주어 후진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염성은 대패했고 후진군 7,000여 명이 참수당했다. 독발녹단은 뒤이어 요필도 쳤으나 후진군이 보루를 높게 쌓고 응전하지 않아 강 상류의 물줄기를 끊고, 영채를 포위하여 후진군을 말라죽이려고 했다. 독발녹단의 작전대로 요필의 군대는 탈수로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하필 큰 비가 내려 강 상류에 만들었던 제방이 무너지면서 살아날 수 있었다.

요필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요현은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격했다. 요현은 먼저 맹흠(孟欽) 등 사장(射將) 5명을 보내 고장성 양풍문 앞에서 싸움을 걸게 했다. 남량의 재관장군 송익(宋益)이 그들을 보고 갑자기 달려나와 맹흠 등이 활을 쏴보기도 전에 모두 죽여버렸다. 남량이 아직 건재한 것을 본 요현은 모든 것이 염성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라며 그에게 죄를 덮어씌운 뒤, 독발녹단에게 사죄하고 철수했다. 독발녹단도 서숙(徐宿)을 후진에 사자로 보내 사과했다.

동년(408) 11월, 독발녹단은 다시 양왕을 칭하면서 백관을 설치하고 가평(嘉平)이란 연호를 선포하여 연호제를 부활시켰다. 부인 절굴씨(折掘氏)를 왕후로 세우고, 세자 독발호대(禿髮虎台)를 태자로 삼았다.

409년 2월, 하주자사 팽해념이 서진의 걸복치반을 공격했다가 반격당해 부한(枹罕)을 빼앗겼다.

410년 후진에 멸망당한 서진(西秦)이 다시 재건되면서 남량은 더더욱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북량과의 악연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수 차례 서로 침공을 주고받았다. 독발녹단이 먼저 좌장군 고목(枯木), 부마도위 호강(胡康)을 보내 북량의 임송에 있었던 1,000여 호를 약탈하고 돌아왔다. 저거몽손은 이에 몹시 분노하여 친히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남량의 현미(顯美)의 수천 호를 약탈하고 떠났다. 독발녹단은 또 저거구연을 보내 북량을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돌아왔다. 이에 독발녹단이 몸소 5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량을 정벌하려 하자 좌장사 조조(趙晁), 태사령 경보(景保)가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이 중 경보는 끈질기게 천문을 헤아려 달라며 출병을 방해했다. 결국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독발녹단은 경보를 군중에 가두어 종군하게 하고는
"내가 이기면 너를 죽여 모두에게 알릴 것이고, 내가 진다면 너를 100호후(百戶侯)에 봉할 것이다."
라고 말한 뒤 출진했다. 남량군은 궁천(窮泉)에서 저거몽손의 군대와 교전하여 대패했고, 독발녹단은 홀로 말을 타고 고장으로 도망쳤다.(궁천 전투) 이때 경보는 저거몽손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다시 독발녹단에게 돌아가길 청했다. 저거몽손은 원소전풍의 고사를 들먹이며 조롱했지만 경보가 뜻을 굽히지 않아 그냥 석방해주었다. 독발녹단은 돌아온 경보를 맞이해 주고 약속대로 안정후(安亭侯)에 봉했다.

411년, 저거몽손이 궁천 전투의 승세를 몰아 고장까지 포위했다. 저거몽손은 겁을 줄 심산으로 고장 인근 지역인 동원(東苑)으로 가 그곳의 백성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과거 남량에 복속했던 이민족들은 크게 놀라 누굴(壘掘), 맥전(麥田), 차개(車蓋) 등 여러 부의 선비족 약 10,000여 호 가량이 남량을 버리고 북량에 귀순했다. 독발녹단은 공포에 질려 사자를 보내 저거몽손과 화해하고 사예교위 경귀(敬歸)와 그 아들 경타(敬他)를 인질로 보냈다. 경귀는 호항(胡阬)에서 도망쳐 고장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경타만이 인질로 남았다. 이후 저거몽손은 8,000여 호를 추가로 거두어 북량으로 돌아갔다. 우위장군 절굴기진(折掘奇鎭)이 석여(石驢)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절굴기진이 영남(嶺南) 일대를 손에 넣을까 두려워 대사농 성공서(成公緖)를 고장에 남기고 낙도로 다시 천도했다. 독발녹단이 고장성을 떠나자마자 초심(焦諶)과 왕후(王侯) 등이 성문을 닫고 반란을 일으켰다. 초심은 초랑(焦朗)을 대도독, 용양대장군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양주자사를 자칭한 뒤 북량에 항복해 고장을 바쳤다. 저거몽손은 동생 저거나(沮渠拏)를 진주자사로 삼고 고장을 지키도록 했다.

마침내 고장을 손에 넣은 북량이 계속해서 낙도로 공격해오자 독발녹단은 30여일 동안 농성하며 성을 지켰다. 저거몽손이 낙도성 앞에서 병사들에게 집을 짓게 하고 쟁기질을 해 장기전 돌입 준비를 시작하니, 두려워진 독발녹단이 아들 독발안주(禿髮安周)를 인질로 보내 화의를 청했고 북량군이 이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북량군이 돌아간 뒤, 독발녹단은 바로 화친을 깨고 또다시 북량 정벌을 선포했다. 감천호군 맹개(孟愷)의 반대를 물리치고 바로 다섯 길로 진격해 북량을 쳤다. 남량군은 초조(苕藋)에서 5,000여 호를 약탈하는 등 초반엔 순조로워 보였지만 이내 비바람을 뚫고 등장한 북량군과 만나 대패했다. 이번에도 저거몽손에게 낙도가 포위당하자 다른 아들 독발염간(禿髮染干)을 인질로 보내 북량과 화의했다.

413년 4월에도 독발녹단은 북량을 공격했지만 약후오(若厚塢)에서 패배했다. 독발녹단은 패잔병을 재정비하여 약량(若涼)에서 북량군과 다시 한번 싸웠지만 또 패배했다. 진남장군 독발문지가 황하(湟河)에서 5,000여 호를 거느리고 북량에 투항했고, 승기를 타고 진격해온 저거몽손에게 또 낙도를 포위당했다. 독발녹단이 태위 독발구연을 인질로 보내자 저거몽손이 비로소 물러갔다.

414년, 타계한부(唾契汗部), 을불부(乙弗部) 등 여러 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독발녹단은 맹개의 반대를 무시한 채 태자 독발호대에게 1개월 안에 오겠다고 하고는 기병 7,000명을 거느리고 친정하여 토벌에 나섰다. 독발녹단은 을불부를 격파하고 소, 말, 양 40여만 마리를 노획했다. 그러나 서진왕 걸복치반의 허를 찌르는 공격으로 수도인 낙도가 함락당했다. 안서장군 독발번니(禿髮樊尼)가 서평으로 달려가 독발녹단에게 수도 낙도가 함락당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독발녹단이 모두에게 말했다.
"낙도는 이미 걸복치반에게 함락되어 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병사들의 상으로 주어져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을불부에서 노획한 물자로 타계한(唾契汗)부를 취해 잡혀있는 우리들의 처자와 맞바꾸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은 채 걸복치반에게 복속하면 우리는 그들의 종이 될진데, 너희는 네 아내와 자녀가 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타계한부를 치기 위해 서쪽으로 출진했으나 많은 병사와 장수들이 탈영했다. 독발녹단은 진북장군 단구(段苟)를 보내 그들을 잡아오도록 시켰지만 단구마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병사와 장수들은 전부 흩어지고 독발번니, 중군장군 독발흘발(禿髮紇勃), 후군장군 독발낙굉(禿髮洛肱), 산기시랑 음리록(陰利鹿) 만이 남아 독발녹단의 곁을 지켰다. 독발녹단은 망연자실하여 외쳤다.
"저거몽손과 걸복치반은 모두 예전에 내 신하들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들에게 귀순해야하는 신세라니 너무 천하지 않은가! 사해는 넓지만 이 한 몸 둘 곳조차 없으니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함께 죽을 바엔 떨어져 있는 것이 일부나마 보전할 수 있다. (독발)번니는 우리 형의 아들로서 가문에 기여한 바가 커 앞으로도 큰 힘이 될테니, 너희는 북방으로 가 아직 잔존하는 우리들의 무리 10,000여 호를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 훗날을 기약하라. (독발)흘발과 (독발)낙굉도 번니와 함께 가도록 하라. 나는 늙어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테니 어차피 죽을 거, 죽기 전에 처자식이나 보고 죽겠다!"
말을 마친 독발녹단은 독발번니 일행과 헤어졌고, 음리록과 함께 서평으로 돌아가 서진에 항복한다는 사자를 보냈다. 서진이 항복을 받아들이자 함락된 낙도로 출발했고 음리록만이 그를 따라나섰다. 남량은 그렇게 멸망했다.

당초, 걸복치반이 낙도를 함락시켰을 때 남량의 모든 성읍들이 항복했지만 독발녹단의 장수 위현정만이 호문(浩亹)을 지키며 항복하길 거부했다. 위현정은 독발녹단이 항복하기 위해 낙도로 향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걸복치반은 독발녹단을 영접해 좌남공(左南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했다가 이듬해 짐독으로 독살했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 해독제를 먹으라고 권하자 독발녹단이 말했다.
"내 병이 들어 그런 건데 해독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 안가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년간 재위에 있었으며 시호는 경왕(景王)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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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강왕 독발리록고 3대 경왕 독발녹단 남량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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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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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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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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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간쑤성 산단.[2] 現 간쑤성 후이닝.[3] 現 간쑤성 징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