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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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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후진 초대 황제
요장 | 姚萇
파일:요장.jpg
출생 331년
전조 남안군 적정현
(現 간쑤성 룽샤오현)
즉위 384년
후진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394년 2월 6일 (향년 63세)
후진 장안 영안궁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원릉(原陵)
재위기간 후진의 진왕
384년 ~ 386년
후진 초대 황제
386년 ~ 3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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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성씨 요(姚)
장(萇)
경무(景茂)
부모 부황 시조 경원제
배우자 사황후
황태후 손씨
자녀 8남 1녀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무소황제(武昭皇帝)
작호 익도후(益都侯)
연호 백작(白雀, 384년 ~ 386년)
건초(建初, 386년 ~ 3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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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전진에서2.3. 후진의 건국2.4. 칭제
3. 자녀4. 둘러보기

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16국 중 하나인 후진의 초대 황제로, 강족 수장인 경원황제 요익중의 24번째 아들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요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철하였으며, 권모술수에 능하면서도 성품이 탁 트이고 솔직하여 행동과 학업을 닦지 않으니 여러 형들이 모두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형 요양이 요익중의 뒤를 이어 강족을 이끌었는데, 저족전진을 공격할 때 요양의 말이 유시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었다. 이에 요장이 자신의 말을 요양에게 넘겨주었다. 요양이 말하기를
"너는 스스로 어떻게 벗어나려 하느냐?"
라 하니, 요장이 답하였다.
"오직 형님께서 위기를 모면하기만 하시면 저 더벅머리 아이들이 반드시 감히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 구원군이 때마침 도착한 덕에 요장은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로 요장은 요양으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고, 매번 중요한 모의에 참여하였다.

요장은 요양을 따라 동진에 귀순했지만, 요양이 동진의 양주자사(揚州刺史) 은호와 척을 진 이후로 사실상 독립하자, 요장도 형과 함께 활동하였다. 처음에 요양이 낙양(洛陽)을 공격할 때 꿈을 꾸었는데, 요장이 곤룡포를 입고 어좌에 오르고 여러 추장들이 모두 그를 모셔 서 있었으므로, 잠에서 깨 여러 장수와 참모들에게 말하기를
"내 꿈이 이와 같았는데 이 아이의 뜻과 도량 또한 예사롭지 않으니, 혹 능히 우리 종족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
라 하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2.2. 전진에서

수광 3년(357년) 5월, 형 요양이 전진의 황제 부생이 보낸 군대와 싸우다 삼원(三原)에서 전사하자, 요장이 여러 아우들을 이끌고 부생에게 황복하였다.

영흥 원년(357년) 6월, 동해왕 부견이 정변을 일으켜 황제 부생을 폐위시키고 대진천왕에 오르자, 요장을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삼았다.

건원 2년(366년) 7월, 보국장군 왕맹, 전장군 양안 등과 함께 동진의 땅인 남향(南鄕)을 공격하자, 동진의 형주자사(荊州刺使) 환활이 구원군을 거느리고 신야(新野)에 주둔하였다. 이에 요장 등은 방향을 돌려 안양(安陽)의 백성 10,000여 호를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건원 3년(367년) 2월, 이전에 강족 염기(斂岐)가 약양군(略陽郡)의 4,000여 호를 이끌고 농서(隴西)의 군벌 이엄(李儼)에게 항복하였는데, 요장은 보국장군 왕맹, 농서태수 강형(姜衡), 남안태수 소강(邵羌)과 함께 염기를 토벌하였다.

건원 3년(367년) 3월, 본래 요익중의 휘하였던 염기는 그 아들인 요장이 온다는 소식에 부락을 이끌고 전진에 귀순하였다. 이후 천왕 부견이 요장을 농동태수(隴東太守)를 겸하게 하였다.

건원 6년(370년) 10월, 천왕 부견이 전연을 정벌할 때, 요장은 승상 왕맹의 지휘 아래에서 노천(潞川) 전투에서 전연의 태부 모용평(慕容評)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익도후(益都侯)에 봉해지고 식읍 300호를 하사받았다.

건원 7년(371년) 3월, 요장이 서현후 부아와 함께 보병과 기병 70,000명을 거느리고 구지의 군주 양찬을 정벌하였다.

건원 7년(371년) 4월, 전진의 정벌군이 구지산 동쪽 취협(鷲峽)에 이르자, 양찬은 50,000명의 군사를 일으키고 출격하여 요장을 막았고, 동진의 독호 곽보(郭寶), 복정(卜靖)도 기병 1,000기를 이끌고 양찬을 구원하러 왔다. 요장 등이 이를 격파하여 곽보와 복정은 모두 전사하였고, 양찬은 병력의 3 ~ 4할을 상실한 채 무도(武都)로 도망쳤다가 곧 부아에게 항복하였다.

건원 9년(373년) 12월, 천왕 부견이 군대를 보내 동진으로부터 익주(益州)를 빼앗은 후, 요장을 녕주자사(寧州刺史)로 삼아 점강(墊江)에 주둔하게 하였다.

건원 10년(374년) 5월, 촉군(蜀郡) 사람 장육(張育)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진 조정에서도 익주자사 축요(竺搖)와 위원장군 환석건에게 군사 30,000명을 주어 이를 기회로 익주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축요와 환석건이 점강을 치자, 요장은 패하여 오성(五城)으로 퇴각하였다.

건원 12년(376년) 5월, 천왕 부견이 전량을 정벌하고자 여러 군대를 파견하면서 요장을 보병교위(步兵校尉)로 삼아 황하 서쪽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 부견은 사신으로 염부(閻負)와 양수(梁殊)를 보내 군대를 움직이기에 앞서 전량의 군주 장천석에게 항복을 권하게 하였는데, 장천석이 염부와 양수를 살해하자 전진의 군대들은 비로소 진군을 시작하였다.

건원 12년(376년) 8월, 요장 등이 금성(金城)의 청석진(淸石津)에서 황하를 도하하여 하회성(河會城)을 공격해 전량의 효열장군 양제(梁濟)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장천석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금창성(金昌城)에 주둔하여 전진군과 맞서 싸우자, 무위장군 구장(苟長)이 요장에게 갑병 3,000명으로 선봉에 서게 하였고, 이내 구장 등과 함께 장천석을 공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건원 14년(378년) 2월, 천왕 부견이 장락공 부비에게 요장 등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양양(襄陽)을 공략하게 하였다. 요장은 모용수와 함께 5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향군에서 출발하여 양양으로 향하였다.

건원 14년(378년) 4월, 요장과 모용수가 남양(南陽)을 함락시킨 뒤, 다른 군대와 합류하여 양양을 협공하였다.

건원 15년(379년) 2월, 장락공 부비가 양양을 포위한 지 10개월 만에 함락시켰다.

건원 19년(383년) 6월, 동진의 형주자사 환충이 양양과 익주를 수복하기 위해 보국장군 양량(楊亮)을 보내 촉 땅을 공략하게 하니, 양량이 나아가 5개의 성을 격파하고 부성(涪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요장은 명령을 받아 후장군 장자와 함께 부성을 구원하였다.

건원 19년(383년) 8월, 하북을 평정한 천왕 부견은 본격적으로 강동까지 병합할 야심을 품고 요장을 용양장군 · 도독익·양2주제군사(都督益梁二州諸軍事)으로 삼은 뒤에 말했다.
"짐이 본래 용양(龍驤)으로써 대업을 세웠으므로, 용양(龍驤)의 칭호는 일찍이 남에게 빌려준 적이 없었으나, 지금 특별히 경에게 주니, 산남(山南)의 일은 하나같이 경에게 맡기겠소. 경은 힘쓰도록 하시오."
그때 좌장군 두충이 말했다.
"왕자(王者)는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폐하께서 이처럼 이르시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말이옵니다."
그러나 부견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요장은 부견을 따라 동진을 공격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1월, 천왕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동진군에게 크게 패하자, 요장도 장안(長安)으로 달아나 돌아왔다.

건원 20년(384년) 4월, 모용홍이 거병하여 천왕 부견에게 대항하자, 부견이 아들 위대장군 부예(苻叡)를 보내 그를 토벌하게 하면서 요장을 그의 사마(司馬)로 배속시켰다. 부예는 성품이 사납고 적을 업신여겨 곧바로 군사를 몰아 모용홍을 치려 했는데, 요장이 간하여 말하길,
"선비족은 모두 관동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괜히 꼬리를 붙잡지말고 관중(關中) 밖으로 그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라 하였다. 그러나 부예는 듣지 않고 화택(華澤)에서 모용홍과 교전했는데, 물러날 곳이 없어진 모용홍과 선비족들이 필사의 각오로 싸워 전진군을 대파하고 부예를 참수하였다. 요장은 용양장군 조도(趙都)와 참군 강협(姜協)을 보내 부견에게 가 사죄하게 했으나, 부견이 노하여 그들을 죽여버렸다. 이에 요장이 두려워하여 위수(渭水) 이북으로 달아났고 마침내 마목(馬牧)으로 갔다.

2.3. 후진의 건국

백작 원년(384년) 4월, 요장이 서쪽으로 이르자, 서쪽 지방의 호족인 윤상(尹詳), 조요(趙曜), 왕침로(王欽盧), 우쌍(牛雙), 적광(狄廣), 장건(張乾), 방연(龐演) 등이 강족 호족들을 부추겨 설득하여 마침내 그 무리 50,000여 호를 이끌고 요장에게 귀순하였다. 이들은 모두 요장을 맹주로 하였는데, 요장이 장차 이를 거절하려 하자 그의 별기교위 윤위가 유세하여 말하기를,
"지금 재앙의 기운이 이미 도달하여 진(秦)나라가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난 마당에 장군께서 세상에 명성을 떨쳐 위엄과 영명함으로 능히 시대의 환난을 바로잡고 구제할 것이므로, 호걸들이 달려와 모두 함께 추대하여 우러르고 있습니다. 명공(明公)께서는 마땅히 마음을 내려놓으시어 뭇 사람들의 논의를 따르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셔야지, 가만히 앉아서 물에 빠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구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라 하였다. 요장이 이를 따라 마침내 스스로 대장군(大將軍) · 대선우(大單于) · 만년진왕(萬年秦王)이라 칭하고, 영내에 사형 이하의 죄수에게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백작(白雀)'으로 정하고 천자(天子)의 일을 대행하겠다 칭하였다. 또, 윤상을 좌장사, 방연을 우장사, 요황을 좌사마, 윤위를 우사마로 삼고, 천수(天水) 사람 적백지(狄伯支), 초건(焦虔), 양희(梁希), 방위(龐魏), 임겸(任謙)을 모두 종사중랑으로 삼았으며, 강훈(姜訓)과 염준(閻遵)을 연속(掾屬)으로 삼고, 왕거(王據), 초세(焦世), 장수(蔣秀), 윤연년(尹延年), 우쌍, 장건을 참군으로 삼았다. 그 외에 왕침로, 요방성(姚方成), 왕파로(王破虜), 양난(楊難), 윤숭(尹嵩), 배기(裴騎), 조요, 적광, 당산(黨刪) 등을 장수로 삼았다.

당시 서연을 건국한 모용홍의 뒤를 이은 모용충이 전진의 천왕 부견과 서로 공격하였는데, 모용충의 무리가 무척 성하여 병력이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요장이 장차 서쪽으로 올라가고자 했으나, 모용충이 가로막을까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고 차남 요숭(姚崇)을 모용충에게 보내 인질로 삼게 하였다.

백작 원년(384년) 5월, 요장이 북지(北地)에 나아가 주둔하며 군사를 훈련하고, 곡식을 쌓아 정세의 변화를 관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천왕 부견이 동진 출신인 이상(李詳) 등 수천 호를 부륙(敷陸)으로 옮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요장에게 와서 항복하였으며 화음(華陰), 북지, 신평(新平), 안정(安定)의 강족을 비롯한 이민족들도 항복한 자가 10여 만 호였다.

백작 원년(384년) 6월, 천왕 부견이 친히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조씨오(趙氏塢)에서 요장의 군사를 치고, 호군장군 양벽(楊璧) 등을 시켜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게 하니, 요장의 군사가 자주 패하였다. 급기야 조씨오를 포위한 전진군이 둑을 쌓아 수로까지 끊어 식수가 부족해지니, 요장은 아우인 진군장군 요윤매(姚尹買)에게 20,000 군사를 주어 전진군의 둑을 파괴하게 했지만, 전진의 좌군장군 두충이 이를 간파하고 학작거(鶴雀渠)에서 요윤매를 공격해 요윤매와 후진군 13,000여 명을 죽였다. 군영 안에 따로 우물이 없어 병졸들 중 목말라 죽는 자가 나타나며 상황은 심각해졌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군영 안에 물이 3척이나 차올랐을 정도로 쏟아졌으나, 군영을 둘러싼 100보 밖은 1촌 남짓 밖에 안 내렸다. 이로써 요장의 군사가 다시 떨쳐 일어나 무리 70,000명을 이끌고 전진군을 치니, 부견이 다시 양벽 등을 보내 맞서게 하였으나 요장에게 패하였다. 이때 요장은 양벽과 전진의 좌장군 서성, 진군장군 모성(毛盛) 등 장수와 관리 수십 명을 사로잡았는데, 모두 예우하여 부견에게 돌려보냈고, 부견은 모용충이 다시 장안을 노린다는 소식에 곧 퇴각하였다.

백작 원년(384년) 10월, 모용충이 장안을 공략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요장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나아갈 계책을 논의하니, 모두 말하기를,
"대왕(大王)께서는 마땅히 먼저 장안(長安)을 취하여 근거지를 세우신 연후에 사방을 경략하여 천하를 제압하셔야 합니다."
라 하였다. 그러나 요장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연(燕)나라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대부들이 군사를 일으켰으니, 만약 공을 이루고 일이 성공하면 모두 동쪽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을 터인데, 어찌 능히 진천(秦川)에 오래 견고히 머물겠는가! 내가 마땅히 주둔지를 영북(嶺北)으로 옮겨 물자와 양식을 널리 거두고, 진(秦)나라가 피폐해지고 연(燕)나라가 돌아가기를 기다린 연후에 팔짱을 끼고 그것을 취하면 군대가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앉아서 천하를 평정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변장자호(卞莊刺虎)'의 계책이다."
라 하였다. 이에 장남 요흥을 남겨 두어 북지를 지키게 하고, 녕북장군 요목(姚穆)으로 하여금 동관천(同官川)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신평(新平)을 공격하였다.

전진의 신평태수 구보(苟輔)가 요장에게 항복하려 하자, 요서태수(遼西太守) 풍걸(馮傑) 등이 간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전단(田單)은 한 성으로써 제(齊)나라를 보전하였는데, 지금 진(秦)나라의 주(州)와 진(鎮)에는 오히려 연이은 성이 백 개를 넘거늘 어찌 갑자기 역신(叛臣)이 되려 하십니까?"
라 하였다. 이에 구보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뜻이다! 단지 오래 싸우는데 구원군이 없으면 군(郡)의 무고한 백성들이 뜻밖에 해를 입을까 두려웠을 뿐이니, 제군이 능히 이와 같이 한다면 내가 어찌 목숨을 돌보겠는가!"
라 하고, 성벽에 의지하여 견고히 지켰다. 요장이 토산을 쌓고 땅굴을 파자, 구보 또한 안에서 그것을 만들어, 혹은 땅속에서 싸우고 혹은 산 위에서 싸워 요장의 무리 중 죽은 자가 10,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성문을 열고 요장을 유인하니, 요장이 장차 성에 들어가려 하다가 그것을 눈치채고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가는 중에 구보가 성 안의 복병을 내보내 추격하면서 거의 사로잡힐 뻔하였고, 이로 인해 죽은 자가 다시 10,000여 명이었다.

이때 전진의 녕삭장군 송방(宋方)이 기병 3,000기를 이끌고 운중(雲中)으로부터 장차 장안으로 가려 하니, 요장이 이현(貳縣)에서 그를 영격하여 깨뜨렸다. 송방은 단기로 달아나 벗어났고, 그의 사마 전황(田晃)이 잔당을 이끌고 와서 요장에게 항복하였다.

백작 2년(385년) 정월, 요장이 여러 장수들을 신평에 남겨 계속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안정(安定)을 쳐 전진의 안서장군 · 발해공 부진(苻珍)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영북(嶺北)의 여러 성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고 복종하였다.

백작 2년(385년) 4월, 신평은 성 안의 양식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졌는데, 외부로부터 구원군은 이르지 않았다. 요장이 사람을 시켜 구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이제 의로움으로써 천하를 취하려 하는데 어찌 충신을 원수로 삼겠는가! 경은 단지 성 안의 사람들을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라. 나는 단지 이 성을 얻고자 할 뿐이다."
라 하니, 구보가 그러하다고 여겨 백성 5,000명을 이끌고 성을 나왔다. 하지만 요장이 그들을 포위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전부 묻어 죽였는데, 요서태수 풍걸의 아들 풍종(馮終)만이 무사히 도망쳐 장안으로 들어갔고 이외에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백작 2년(385년) 6월, 천왕 부견이 장안을 버리고 달아나 오장산(五將山)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모용충이 장안성을 접수하니 전진의 사예교위 권익이 상서 조천, 대홍려 황보복(皇甫覆), 광록대부 설찬(薛讃), 부풍태수(扶風太守) 단갱(段鏗) 등 문무 관원 수백 명을 이끌고 요장에게로 왔다.[1]

백작 2년(385년) 7월, 요장이 고현(故縣)[2]으로부터 신평으로 가면서, 천왕 부견이 오장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효기장군 오충(吳忠)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그를 포위하게 하니, 부견의 군사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부견 곁에는 시어(侍御) 십수 명만이 있었으나, 부견은 안색과 태도가 태연자약하여 앉아서 후진군을 기다리며 재인(宰人)을 불러 음식을 올리게 하였다. 이후 오충이 그를 사로잡아 신평으로 보내어 별실에 가두었다.

얼마 뒤, 요장이 천왕 부견에게 전국새를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 요장이 차례에 따라 역수(歷數)에 응하였으니, 은혜를 베푸는 것이 좋겠소."
라 하자, 부견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꾸짖어 말했다.
"미천한 강족 놈이 감히 천자(天子)를 협박하느냐! 오호(五胡)의 차례에 너희 강족의 이름은 없다.[3] 옥새는 이미 진(晉)나라에 보냈으니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요장이 다시 우사마 윤위를 보내 부견을 설득하며 선양할 것을 요구하니, 부견이 말하기를,
"선양은 성현(聖賢)의 일이거늘, 요장(姚萇)은 반역하는 도적이니 어찌 이를 할 수 있겠느냐!"
라 하였다. 이후 부견이 스스로 평소에 요장을 은혜롭게 대했다고 여겨, 더욱 분통해 하며 자주 요장을 욕하고 죽기를 구하였다. 또, 부인 장씨(張氏)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강족 노복 놈으로 하여금 내 아이들을 욕되게 하겠는가!"
라 하고, 먼저 딸 부보(苻寶)와 부금(苻錦)을 죽였다. 결국 요장은 사람을 보내 부견을 신평의 절에서 목 매어 죽이게 하였고, 부인 장씨와 부견의 막내아들 중산공 부선은 모두 자살하였다. 후진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부견을 위하여 슬퍼하고 통곡하였으며, 요장은 그 오명을 가리고자 부견에게 시호를 올려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하였다.

백작 2년(385년) 10월, 서연의 황제 모용충이 거기대장군 고개(高蓋)를 보내 군사 50,000명으로 침범해 오니, 요장이 신평 남쪽에서 싸워 그를 크게 무찔렀다. 고개가 휘하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니, 요장이 그를 산기상시로 삼았다.

백작 3년(386년) 정월, 요장이 안정(安定)으로 갔다.

백작 3년(386년) 3월, 과연 요장의 예상대로 서연의 모용충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가니 장안성이 텅 비게 되었다. 전(前) 형양태수(滎陽太守)인 조곡(趙穀) 등이 행성(杏城)의 노수호족 학노(郝奴)를 불러들여 4,000호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오게 하니, 학노가 장안에서 칭제하여 조곡을 승상으로 삼았고 위수 이북이 모두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때 부풍(扶風) 사람 왕린(王驎)이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마외(馬嵬)[4]를 점거하여 지키자, 학노가 아우 학다(郝多)를 보내 그를 치게 하였다.

백작 3년(386년) 4월, 요장이 안정으로부터 나와 먼저 왕린을 토벌하여 깨뜨리니, 왕린이 한중(漢中)으로 달아났다. 이어 요장이 학다를 사로잡고 나아가 장안성의 학노를 공격하자, 학노가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므로 요장이 그를 진북장군 · 육곡대도독(六谷大都督)으로 삼았다.[5]

천왕 부견이 죽고 전진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전진의 익주목(益州牧) 왕광(王廣)과 하주목(河州牧) 모흥(毛興)이 서로 세력을 다투었는데, 마침내 모흥이 왕광을 쳐서 격파하였다. 왕광은 진주(秦州)로 달아나다가 농서(隴西)의 선비족 필란(匹蘭)에게 사로잡혀 후진으로 보내졌다.

2.4. 칭제

건초 원년(386년) 5월, 요장이 장안에서 황위에 올라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건초(建初)'로 고쳤으며,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하였다. 아버지 요익중을 추존하여 '경원황제(景元皇帝)'라 하고, 어머니를 '덕황후(德皇后)'라 하였으며, 형 요양의 시호는 '위무왕(魏武王)'이라 하였다. 또, 아내 사씨(蛇氏)를 황후로 삼았으며, 장남 요흥을 황태자로 세우고 백관을 설치하였다. 요장은 스스로 화덕(火德)으로써 부씨(苻氏)의 목덕(木德)을 이어받는다고 여겨, 의복의 색깔을 한나라주나라의 고사를 따른 것처럼 하였다. 이후 안정의 5,000여 호를 장안으로 옮기고, 대우(祋祤) 옛 성에서 서북쪽으로 75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봉유향(鳳游鄉) 위에 전각을 세웠다. 마침 어천지(御泉池)에 물이 있었으므로, 요장은 전각 안에서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기운이 오르자 말하기를,
"여러 경들은 모두 나와 더불어 북면하여 진(秦)나라 조정을 섬겼거늘, 이제 갑자기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되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라 하니, 조천이 말했다.
"하늘이 폐하를 자식으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데, 신(臣)들이 어찌 신하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이에 요장이 크게 웃었다.

한편, 천왕 부견의 붕어 소식을 듣고 새로 전진의 황제가 된 부비가 좌승상 왕영에게 요장과 모용수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사방에 돌리게 하였다. 이에 천수 사람 강연(姜延), 빙익(馮翊) 사람 구명(寇明), 하동(河東) 사람 왕소(王昭), 신평 사람 장안(張晏), 경조(京兆) 사람 두민(杜敏), 부풍 사람 마랑(馬朗)과 건충장군 왕민(王敏) 등이 모두 격문을 받고 군사를 일으키니 각기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진의 관군장군 등경(鄧景)[6]이 무리 5,000명을 이끌고 팽지(彭池)를 점거하고, 두충과 더불어 머리와 꼬리가 되어 후진을 쳤다.

건초 원년(386년) 7월, 전진의 평량태수(平涼太守) 김희(金熙)와 안정도위 몰혁간이 후진의 좌장군 요방성과 손구곡(孫丘谷)에서 싸웠는데, 요방성의 군대가 패하였다. 이에 요장이 아우인 정로장군 요서를 사예교위(司隸校尉)로 삼아 장안을 지키게 하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안정에 이르러 김희 등을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7]

당초 요장의 동생 요석덕은 농상(隴上)에서 강족 부락을 통솔하며 머물다가, 요장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정서장군이라 칭하고 기성(冀城)에 무리를 모아 호응하고 있었다. 또, 요양의 손자 요상을 안원장군으로 삼아 농성(隴城)에 점거하게 하고, 종손자 요훈(姚訓)을 안서장군으로 삼아 남안(南安)의 적정(赤亭)에 주둔하게 하여 전진의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통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건초 원년(386년) 8월, 요장이 안정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요석덕과 합류해 왕통을 공격하니, 천수의 흉노족 도각부(屠各部)와 약양(略陽)의 강족과 이민족 중 여기에 호응한 자가 20,000여 호였다. 이에 전진의 약양태수 왕피(王皮)가 요장에게 항복하였다.[8]

건초 원년(386년) 9월, 왕통이 진주(秦州)를 들어 항복하자, 요장이 상규(上邽)에서 장수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요석덕을 사지절 · 도독농우제군사 · 정서장군 · 진주자사(秦州刺史) · 영호동강교위로 삼아 상규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 남안 사람 길성선이 요장에게 금과 비단을 풀어 현명한 선비를 불러 모으라 조언하니, 요장이 기뻐하며 그를 상서랑으로 삼았다.

건초 원년(386년) 10월, 요장이 안정으로 돌아와 덕정을 닦고 은혜로운 교화를 베풀었으며, 시급하지 않은 사안은 배제함으로써 비용을 절약하여 시대의 폐단을 없애고, 가난한 선비라도 작은 선행이라도 있는 자는 모두 드러내어 특별히 우대하였다.

이때 전진의 남안왕 부등이 이미 남안(南安)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요석덕이 지키고 있는 상규를 공격하였다. 요장은 직접 요석덕을 구원하러 가서 부등과 더불어 상규 서쪽 호노부(胡奴阜)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20,000여 명의 병력을 잃었고 요장 본인은 부등의 장수 담청(啖青)이 쏜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요장은 상규로 들어가 지켰는데, 부상이 심해 요석덕이 대신 군대를 통솔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의 황제인 부비가 낙양을 공격하다 전사하자, 부등은 후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당시 흉노족 철불부의 수령 유위진이 삭방(朔方)에 머무는데 군사와 말이 매우 성했기에, 요장은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장군 · 대선우 · 하서왕(河西王) · 유주목(幽州牧)으로 삼았다.

건초 원년(386년) 11월, 전진의 상서 구유(寇遺)가 부비의 아들인 발해왕 부의(苻懿), 제북왕 부창(苻昶)을 받들어 남안왕 부등에게 의탁하러 왔다. 신하들은 그 둘이 아직 어리고 사방에 적이 많다는 이유로 부등에게 황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고, 부등은 이를 따라 농동(隴東)에게 전진의 황제가 되었다.

이 해에 보검 두 자루를 만드니 길이가 7척으로, 하나는 예서체로 '자(雌)'라 새기고, 다른 하나는 예서체로 '웅(雄)'이라고 새겼는데 도적이 나타나면 곧 울렸다. 이후로 보검 한 자루를 더 만들고, 예서체로 '중산(中山)'이라고 새겼고 길이가 3척 7촌이었다.

건초 2년(387년) 정월, 진주(秦州)의 호걸 30,000호를 안정으로 이주시켰다.

건초 2년(387년) 4월, 정서장군 요석덕이 전진의 대장군 · 구지공 양정에게 압박당하여 물러나 경양(涇陽)에 주둔하니, 양정이 전진의 노왕 부찬(苻纂)과 힘을 합쳐 요석덕을 공격하여 경양에서 그를 크게 격파하였다. 요장이 음밀(陰密)로부터 그를 구원하러 오자, 부찬은 동쪽으로 물러나 부륙(敷陸)을 지켰다.

건초 2년(387년) 7월, 전진의 고제 부등이 와정(瓦亭)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한편, 요장은 노왕 부찬에게 복속한 노수호족 팽패곡(彭沛穀)을 공격해 그 보루를 함락시켰고, 팽패곡은 패하여 행성(杏城)으로 달아났다. 이후 요장은 음밀로 돌아와 태자 요흥으로 하여금 장안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마침내 부등과 더불어 서로 대치하였다.

건초 2년(387년) 8월, 전진의 빙익태수 난독(蘭櫝)이 화녕(和寧)으로 가, 노왕 부찬과 함께 장안을 습격할 계획을 모의하였는데, 부찬의 동생인 삭방공 부사노(苻師奴)가 반란을 일으켜 형 부찬을 살해하고 진공(秦公)을 자칭하였다. 이에 난독이 부사노와의 연락을 끊으니, 서연의 하동왕 모용영이 이를 눈치채고 기회를 엿보아 난독의 군대를 기습하였다. 난독이 사신을 보내 요장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요장은 장차 그를 구원하러 가고자 했는데, 상서령 요민(姚旻)과 상서좌복야 윤위가 간하여 말하길,
"부등(苻登)이 가까이 와정(瓦亭)에 있으니 장차 허를 찔러 우리의 뒤를 칠 것입니다. 폐하께서 가볍게 움직이시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라 하니, 요장이 말했다.
"부등은 병력이 많아 하루아침에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으며, 또 부등은 굼뜨고 신중하며 결단력이 없어 매번 시기를 놓친다. 내가 몸소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등은 그저 군사와 물자를 널리 모으기만 할 따름이지, 반드시 경솔하게 군사를 이끌고 감히 깊이 진입해 오지 못할 것이다. 두 달 사이에 내가 반드시 적을 깨뜨리고 돌아올 터이니, 부등이 그때 가서 비로소 나아가더라도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건초 2년(387년) 9월, 요장이 나아가 니원(泥源)에 진쳤는데, 부사노가 먼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요격을 시도하였다. 요장이 부사노와 맞서 싸워 격파하고 그 무리를 모두 사로잡으니, 부사노에게 복속해 있던 도각족 동성(董成)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부사노는 도망쳐 선비족에게로 갔다.

건초 2년(387년) 10월, 요장이 하서(河西)에서 서연의 하동왕 모용영을 격파하였고, 모용영은 달아나 서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난독이 다시 병사들을 늘어세우고 요장에게 맞서자, 요장이 그를 공격하였다.

건초 2년(387년) 12월, 요장이 난독을 사로잡고 그 병력과 말을 거둔 후에 행성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좌장군 요방성이 전진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서숭의 보루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숭을 사로잡아 그 죄를 꾸짖었다. 그러자 서숭이 욕하며 말하기를,
"네놈들이 섬기는 요장은 죄가 깊어 만번 죽어 마땅한 인물이다. 부황미가 요장을 참하려 할 때, 선제(부견)께서 말리시고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신 뒤, 내외로 중용하시어 열장(列將)의 지위를 누리게 하셨고 극진한 영화와 총애를 내리셨다. 일찍이 개와 말조차도 길러준 은혜와 친근함을 잊지 않는 법이나, 그보다 못난 너희 대역(大逆)한 강족 무리에게 어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서 죽이지 않고 뭐하느냐? 나는 빨리 선제를 뵈어 지하에서 요장을 심판하리라!"
요방성이 노하여 서숭을 삼참(三斬)[9]하고, 그 병사들을 모두 묻어 죽였으며, 그 아내와 자식들을 군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후 요장이 부견의 시신을 파내어 채찍질을 셀 수 없이 하고, 시신의 옷을 벗겨 몸을 드러내게 한 뒤, 다시 땅을 파고 가시나무를 깔개로 두어 시신을 매장하였다. 부견은 고제 부등에 의해 서숭과 호공(胡空)이 지키는 두 보루 사이에서 천자의 예로써 다시 장사지내졌는데, 서숭의 보루가 이미 함락되었으므로 요장이 묘를 파고 시신에 채찍질하여 그 분풀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초 3년(388년) 정월, 고제 부등이 조나(朝那)에 군사를 두니, 요장이 무도(武都)에 군사를 두고 대치하였다. 이때 서연의 정서장군 왕선(王宣)이 무리를 이끌고 요장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처음에 관서(關西)의 호걸들은 전진이 이미 끝났고 요장의 영웅다운 지략이 세상을 덮으니 천하의 일이 아침저녁으로 정해질 수 있다고 여겼으나, 요장이 봄부터 부등과 대치하며 여러 차례 싸워도 제대로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전진에 귀부하였다. 오직 정로장군 제난(齊難), 관군장군 서낙생(徐洛生), 보국장군 유국단(劉郭單), 관위장군 미저파촉(彌姐婆觸), 용양장군 조악지(趙惡地), 진북장군 양국아(梁國兒) 등이 충성을 지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함께 자제들을 남겨 두어 영(營)을 지키며 군량을 계속 지원하고, 몸소 정예 군사를 이끌고 요장을 따라 정벌하였다. 이때 여러 군영이 이미 많았으므로 요장의 군사를 일컬어 '대영(大營)'이라 하였으니, '대영(大營)'이라는 후진군의 칭호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건초 3년(388년) 10월, 요장이 안정으로 돌아오자, 부등이 군량을 충원하기 위해 신평을 들르는 와중에 무리 10,000여 명을 이끌고 요장의 군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크게 통곡하였다. 요장도 군영 안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통곡함으로써 이에 응하게 하니, 부등의 무리가 마침내 물러갔다.

건초 3년(388년) 11월, 하늘에서 큰 눈이 내리니 요장이 조서를 내려 깊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벌했으며, 후궁의 비단과 보물을 풀어 군비에 충당하였다. 또, 몸소 한 가지 찬거리만 먹고 아내는 화려한 옷을 겹쳐 입지 않았으며, 장수 중 왕사(王事)에 죽은 자에게는 관품 2등을 더해주고 병졸로서 전사한 자에게는 모두 포상하여 추증하였다. 아울러 태학(太學)을 세우고 선현(先賢)의 후손을 예우하였다.

건초 4년(389년) 정월, 요장이 전진군과 자주 싸워 매번 패하므로 부견의 신령이 돕는 것이라 여겨 또한 군중에 부견의 신주를 세우고 기원하여 말하기를,
"지난해 신평(新平)의 화는 신(臣)이 요양(姚襄)의 명령을 행한 것이니, 이 요장의 죄가 아닙니다. 신의 형 요양이 섬(陝)으로부터 북쪽으로 건너 길을 빌려 서쪽으로 가고자 하여 여우가 죽을 때 언덕으로 머리를 두듯 잠시 고향을 보고자 하였는데, 폐하께서 부황미(苻黃眉)와 더불어 길을 막고 막아 치시니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 요양이 신에게 시해를 행하라 명했으므로 신의 죄가 아닙니다. 부등(苻登)은 폐하의 먼 친족인데도 오히려 원수를 갚고자 하거늘, 하물며 신이 형을 위하여 수치를 갚는 것이 올바른 이치에 무엇이 어긋난 일이겠습니까! 또한 폐하께서 신에게 용양(龍驤)의 칭호를 빌려주시고, 신에게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짐이 용양(龍驤)으로써 업을 세웠으니 경은 힘쓰라.' 하셨으니, 조서가 명백하여 말씀이 오히려 귀에 남아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록 세상을 떠나 신령이 되셨으나, 어찌 부등의 손을 빌려 신을 도모하며 남쪽을 정벌하기 전 때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이제 폐하를 위하여 신상을 세우니 이곳에 돌아와 쉬시고, 신의 허물을 따져 계산하지 마시며, 신의 지극한 정성을 들으소서."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제 부등이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공격하러 왔다가 얼마 후 누각에 올라 멀리서 요장에게 일러 말하기를,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도리어 신상을 세워 복을 구하며 이로움이 있기를 바라는 자가 있겠느냐!"
하고, 이로 인하여 크게 외쳐 말하기를,
"군주를 시해한 도적 요창(姚萇)은 어찌 스스로 나오지 않느냐! 내가 너와 더불어 결판을 낼 것이니 어찌 무고한 자들을 억울하게 해치느냐!"
라 하자, 요장이 꺼리어 응하지 않았다. 결국 요장이 스스로 부견의 신상을 세운 이래로 싸움에 이로운 형세도 없고 군사들이 되레 매일 밤 놀라고 두려워하니, 북을 엄하게 치고 신상의 머리를 베어 부등에게 보냈다.

건초 4년(389년) 2월, 고제 부등이 치중을 대계(大界)에 두고 친히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안정 인근의 밀조보(密造保)를 공격해 무너뜨렸다.

건초 4년(389년) 4월, 요장이 부등과 더불어 싸워 여러 번 패하자, 아들 중군장군 요숭을 보내 대계(大界)를 습격하게 했는데, 고제 부등이 요격하여 안구(安丘)에서 패하였다.

건초 4년(389년) 7월, 고제 부등이 우장군 오충 등을 평량(平涼)에서 공격하자, 오충 등이 크게 패하였다.

건초 4년(389년) 8월, 고제 부등이 나아가 구두원(茍頭原)에 주둔하여 안정을 공격하고 압박하자, 여러 장수들이 요장에게 결전을 치르자 권하였다. 요장이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적과 승부를 다투는 것은 병법의 하책이다. 내가 장차 계책으로써 그들을 취하겠다."
라 하고, 이에 상서령 요민을 남겨 안정을 지키게 하고, 밤에 대계(大界)에 있는 부등의 치중을 둔 군영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러 장수들이 부등의 군대가 놀라 혼란해진 틈을 타 이어서 공격하고자 하니, 요장이 말하기를,
"부등(苻登)의 무리가 비록 혼란하나 노여운 기운이 아직 왕성하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라 하고 마침내 그만두었다. 요장이 안정의 땅이 좁고 또한 부등에게 압박당하므로 정서장군 요석덕으로 하여금 안정을 지키게 하고, 안정의 3,000여 호를 음밀(陰密)로 옮겨 아우 정남장군 요정(姚靖)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건초 4년(389년) 9월, 고제 부등이 동쪽으로 가자, 요장이 요석덕으로 하여금 진주(秦州)에 수재(守宰)를 두게 하고, 사촌 동생 요상(姚常)으로 하여금 농성(隴城)을 지키게 하고, 형노(邢奴)로 하여금 기성(冀城)을 지키게 하고, 요상(姚詳)으로 하여금 약양(略陽)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전진의 구지공 양정이 농성(隴城)과 기성(冀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요상(姚常)을 참수하였으며 형노는 사로잡혔다. 이에 요상(姚詳)이 약양을 버리고 음밀로 달아났다.

건초 4년(389년) 10월, 요장이 장안에 사직을 세우고, 백성 중 나이 70세 이상이고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 중대부(中大夫)로 삼아 해마다 소와 술을 하사하였다.

건초 4년(389년) 12월, 요장이 동문장군 임분(任売)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사신을 보내 고제 부등을 불러들여 문을 열어 성 안으로 유인하게 하였다.[10] 부등이 장차 임분을 믿고 그의 말을 따르려 했는데, 강족 정동장군 뇌악지(雷惡地)가 군사를 이끌고 외지에 있다가 이를 듣고 말을 달려 부등을 찾아와 말하기를
"요장(姚萇)은 간사한 속임수가 많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
라 하니, 부등이 이에 그만두었다. 한편, 요장이 뇌악지가 부등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저 강족 놈이 부등(苻登)을 만났으니 일이 성사되지 않겠구나!"
라 하였다. 그러나 부등은 뇌악지의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남으로 인하여 속으로 그를 꺼렸기에, 뇌악지가 두려워하여 무리를 이끌고 와서 후진에 항복하니, 요장이 그를 진군장군에 제수하였다.

건초 5년(390년) 정월, 요장이 전진의 부풍태수 제익남(齊益男)이 지키는 신라보(新羅堡)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제익남이 패하여 달아났다. 이때 고제 부등이 후진의 천수태수 장업생(張業生)을 농동(隴東)에서 공격하자, 요장이 달려와 그를 구원하였고, 부등이 이에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건초 5년(390년) 4월, 전진의 진동장군 위게비(魏揭飛)가 스스로 대장군 · 충천왕이라 칭하고, 저족과 이민족 수만 명을 이끌고 후진의 안북장군 요당성(姚當成)을 행성(杏城)에서 공격하였다. 뇌악지도 다시 반역하여 여기에 호응하고, 후진의 진동장군 요한득(姚漢得)을 이윤(李潤)에서 공격하였다. 요장이 장차 그들을 토벌하고자 논의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폐하께서 60리 거리의 부등(苻登)은 근심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600리 거리의 위게비(魏揭飛)를 근심하시니 어찌 된 까닭입니까?"
라 하니, 요장이 말했다.
"부등은 한순간에 박멸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며, 우리의 성 또한 부등이 능히 한순간에 도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뇌악지(雷惡地)의 지혜와 모략은 범상치 않으므로, 만약 남쪽으로 위게비를 끌어들이고 동쪽으로 동성(董成)과 결탁하여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로써 간사한 계책을 이루어, 행성(杏城)과 이윤(李潤)을 점거하여 서로 날개가 된다면, 장안(長安)의 동북쪽은 다시 우리가 소유한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몰래 정예 군사 1,600명을 이끌고 그곳으로 갔다.

위게비와 뇌악지의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는데, 저족과 이민족 중 그곳으로 이르는 자가 연이어 끊이지 않았다. 요장이 매번 한 군대가 그곳으로 이르는 것을 볼 때마다 문득 기쁜 빛을 띠었으니, 여러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었다. 요장이 말하기를,
"위게비 등이 간보던 자들을 부추기고 유혹하여 무리가 무척 번성하므로, 설령 내가 그 우두머리를 이기더라도 남은 무리를 갑자기 멸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제 까마귀처럼 모여 여기로 왔으니, 내가 승세를 타서 싹 쓸어버려 일거에 그 소굴을 뒤엎으면 동북쪽은 다시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라 하였다. 한편, 위게비 등은 요장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무리를 다 이끌고 와서 공격하자, 요장이 보루를 견고히 하고 싸우지 않으면서 일부러 약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몰래 중군장군 요숭을 보내 정예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그들이 예기치 못한 곳으로 나와 그 뒤를 치게 하니, 위게비의 군사가 마침내 혼란해졌다. 그때 요장이 진원장군 왕초(王超)와 평원장군 담량(譚亮)을 보내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치게 하였고, 결국 위게비의 무리가 크게 흩어져 패주하였다. 요장은 위게비를 포함해 장수와 병사 10,00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뇌악지가 또 투항하자 요장은 그를 용서하고 처음과 같이 예우하였다. 뇌악지가 매번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스스로 지혜와 모략이 당대에 뛰어난 자라 여겨, 여러 영웅, 호걸들을 헤아려 보면서 나와 같은 부류는 모두 응당 한 지방을 걸터앉아 점거하여 호랑이처럼 천 리에 포효해야 할 터라 생각했는데, 매번 요옹(姚翁)을 만날 때마다 지혜와 힘이 꺾이고 굴복하니 실로 그것이 나의 분수겠구나."
라 하였다. 이후로 뇌악지가 용맹하고 굳세며, 맑고 엄숙하게 행동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범하지 않으니, 영북(嶺北)의 여러 호걸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요장이 요당성에게 명령하여 군영을 친 곳의 땅에 매 울타리 구멍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자신의 전공을 드러나게 하였는데, 한 해 남짓 지나 그에게 물으니 요당성이 말하기를,
"군영을 친 땅이 너무 작아 이미 그것을 넓혔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요장이 말하기를,
"내가 머리를 묶은 이래로 사람들과 전투함에 일찍이 이처럼 통쾌한 적이 없었다. 1,600명으로써 30,000명의 무리를 깨뜨렸으니 나라의 사업이 이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났도다. 군영을 친 땅이 작아야 비로소 기이한 일이 될 터인데, 어찌 큰 것을 족히 귀하게 여기겠느냐!"
라 하였다.

이성(貳城)의 호(胡)족 조인(曹寅)과 왕달(王達)이 말 3,000필을 바치자, 조인을 진북장군 · 병주자사(幷州刺史)로 삼고, 왕달(王達)을 진원장군 ·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또, 남강(南羌)족 두앙(竇鴦)이 5,000호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자 안서장군으로 삼았다.

요장은 성품이 털털하고 솔직하여 휘하 여러 사람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혹 면전에서 대놓고 욕하고 꾸짖으니, 태상 권익이 말하기,
"폐하께서는 스스로 널리 통달하였다 자부하시어 작은 예절을 다듬지 않으시고, 여러 영웅들을 거두어 다스리시며 뛰어난 인재들을 포용하시고, 더러운 것을 버리고 선한 것을 취하시니 고조(高祖)의 기량이 있으십니다. 다만, 경박하고 거만한 풍조는 마땅히 제거해야 할 바입니다."
라 하였다. 이에 요장이 말했다.
"그것은 내 타고난 성품이오. 내가 순 임금의 미덕은 한 조각도 가진 것이 없으나, 한고조(漢高祖)의 단점은 이미 그 하나를 거두었으니, 바른 말을 듣지 못한다면 어찌 허물을 알겠소!"

얼마 뒤, 요장이 조서를 내려 사사로이 원수를 갚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이게 하고, 장수와 관리로서 사망하여 대가 끊긴 자는 각기 촌수가 가까운 바에 따라 후사를 세우게 한 뒤 진휼하여 보살피고 양육하게 하였다.

건초 5년(390년) 7월, 빙익 사람 곽질(郭質)이 광향(廣鄉)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진에 호응하고, 삼보(三輔)에 격문을 보내 말하기를,
"요장이 흉악하고 잔학하여 그 독이 신령과 사람에게 미쳤다. 우리 무리가 대대로 선제(先帝, 부견)로부터 요(堯) · 순(舜)과 같은 어진 총애를 입어, 곧 상백(常伯)과 납언(納言)의 아들, 혹은 경교(卿校)와 목수(牧守)의 손자가 될 수 있었다. 수치를 머금고 사는 것이 어찌 바른 도리를 밟다가 죽는 것만 못하겠는가!"
라 하였다. 이에 삼보 일대의 보루들이 모두 곽질에게 호응하였으나, 정현(鄭縣)의 구요(苟曜)만이 홀로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후진에 붙었다. 고제 부등은 곽질을 빙익태수로 삼았고, 요장은 구요를 진동장군 ·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건초 5년(390년) 12월, 곽질과 구요가 정현 동쪽에서 싸웠는데, 곽질이 패해 낙양으로 달아났다.

건초 6년(391년) 3월, 고제 부등이 옹성(雍城)에서 출병하여 후진의 안동장군 김영(金榮)이 지키는 범씨보(範氏堡)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위수(渭水)를 건너 후진의 경조태수(京兆太守) 위범(韋範)이 지키는 단씨보(段氏堡)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 나아가 두현(杜縣) 동북쪽에 위치한 곡뢰(曲牢)에 주둔하였다.

건초 6년(391년) 4월, 진동장군 구요가 무리 10,000명을 이끌고 역만보(逆萬堡)를 지키고 있었는데, 고제 부등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내응하겠다 약조하자, 부등이 곡뢰로부터 번천(繁川)으로 향하여 마두원(馬頭原)에 진쳤다.

건초 6년(391년) 5월, 요장이 군사를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고제 부등이 요장을 격파하고 우장군 오충을 참수하였다. 요장이 곧바로 무리를 수습해 다시 나아가 싸우려 하니, 정서장군 요석덕이 여러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가벼이 싸우는 것을 삼가시어 매번 계책으로써 그들을 취하고자 하셨는데, 지금 싸움이 이미 이로움을 잃었음에도 다시 나아가 적을 압박하려 하시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라 하였다. 요장이 이를 듣고 요석덕에게 말하기를,
"부등은 본래 군사를 부리는 것이 둔하고 느려 허실을 알지 못하는데, 지금 경무장한 군사로 바로 나아가서 우리를 지나쳐 동쪽에 거점하니, 이는 분명 구요(苟曜) 그 애송이가 그와 연계한 것이다. 시간을 끌었다가 변수가 생기면 그 화를 헤아리기 어렵기에, 속히 싸우고자 하는 까닭은 애송이의 계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결탁이 아직 깊지 않을 때 그 일을 무산시켜 깨뜨리고자 할 따름이다."
라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전진군과 싸워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고, 부등은 물러나 미(郿)에 주둔하였다.

이때 전진의 연주자사(兗州刺史) 강금퇴(強金槌)가 신평을 들어 요장에게 투항하였다. 요장이 경기병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강금퇴의 군영에 들어가려 하니, 신하들이 간하였다. 이에 요장이 말하기를,
"강금퇴(強金槌)가 이미 부등을 떠났고, 부등이 또 그를 도모하고자 하니, 장차 그가 어디로 돌아가겠느냐! 또한 저들이 처음 귀순해 와서 정성으로 따르니 마땅히 마음을 미루어 서로 결탁해야지, 다시 신의가 없다 하며 그를 의심한다면 무엇으로써 사물을 다스리겠느냐!"
라 하였다. 여러 저족들이 과연 딴 마음이 있었으나, 강금퇴가 따르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요장은 그 아들 강규(強逵)를 인질로 삼았다.

건초 6년(391년) 7월, 고제 부등이 신평을 공격해 탈환을 시도하자, 요장이 그곳을 구원하러 갔다. 이에 부등이 곧 물러났다.

건초 6년(391년) 12월, 부등이 요장을 공격하자, 요장이 음밀로 이동해 부등을 막으러 가며 태자 요흥에게 칙명을 내려 말했다.
"구요(苟曜)는 간사함을 좋아하고 변덕스러워 장차 나라의 해가 될 것이다. 내가 북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와서 너를 볼 터이니, 너는 사로잡아 그를 죽여라."
구요가 과연 장안으로 와 요흥을 알현하니, 요흥이 상소좌복야 윤위를 보내 그를 꾸짖은 뒤에 죽였다.

요장이 안정성 동쪽에서 고제 부등의 군대와 싸워 격파하였고, 부등은 물러나 노승보(路承堡)에 주둔하였다. 이후 요장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크게 잔치를 베푸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위무왕(魏武王, 요양)을 만났다면 이 도적으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게 하지 않았을 터인데, 폐하께서는 군사를 다루시면서 너무 지나치게 신중하실 따름입니다."
요장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죽은 형님만 못한 점이 네 가지가 있소. 신장이 8척 5촌이고 팔이 늘어져 무릎을 넘으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경외한 것이 첫째요, 10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천하를 두고 겨루며 깃발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앞을 가로막는 진영이 없었던 것이 둘째요, 옛것을 온전히 익하고 지금의 것을 알며 도의를 강론하고 영웅과 뛰어난 인재들을 포용하여 거둔 것이 셋째요, 대중을 거느리고 통솔함에 위아래가 아울러 기뻐하여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한 것이 넷째요. 다만 내가 공업(功業)을 세우고 여러 현인들을 부릴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계산과 책략이라는 한 토막의 장점이 있어서일 따름이오."
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건초 7년(392년) 정월, 요장이 조서를 내려 유대(留臺)와 여러 진(鎮)에 각기 학관(學官)을 두고 쇠퇴함이 없게 하며, 우열을 시험하여 재능에 따라 발탁하여 등용하게 하였다.

건초 7년(392년) 2월, 전진의 표기장군 몰혁간이 6,000호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자, 사지절 · 거기장군 · 고평공(高平公)으로 삼았다.

건초 7년(392년) 3월, 요장이 병으로 눕게 되어, 정서장군 요석덕에게 명하여 이윤(李潤)을 지키게 하고, 상서좌복야 윤위로 하여금 장안을 지키게 하며, 태자 요흥을 불러 행영(行營)으로 오게 하였다. 이때 정남장군 방성(方成)이 요흥에게 말하기를,
"지금 도적 무리가 아직 멸망하지 않은 마당에 주상께서 다시 병으로 누우셨고, 왕통(王統)과 부윤(苻胤) 등은 모두 부곡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끝내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될 터이니 마땅히 다 제거해야 합니다."
라 하였다. 이에 요흥은 전진의 항장 출신인 부윤(苻胤), 왕통, 왕광, 모성, 서성을 죽인 연후에 비로소 부름에 응하여 나아갔다. 이윽고 요흥이 이르자 요장이 노하여 말하기를,
"왕통(王統) 형제는 모두 나의 고향 사람으로 다른 먼 뜻이 없고, 서성(徐成) 등은 옛날 진(秦) 조정에 있을 때 모두 명장이었으니 천하가 조금 안정되면 내가 막 쓰려 했거늘, 어찌하여 다짜고짜 도리어 죽이고 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기를 꺾이게 만드느냐!"
라 하였다.

건초 7년(392년) 7월, 고제 부등이 요장의 병이 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선소제 부견의 신주에 제사 지내어 고하고,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관의 관위를 2등급 올리며, 말에 풀을 먹이고 병기를 갈아 진격하여 안정을 압박하니, 성과의 거리가 90여 리였다.

건초 7년(392년) 8월, 요장의 병이 조금 낫자, 나아가 전진군을 막았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정벌에 종군하는 병사와 관리로서 가족들을 대영(大營)에 있는 자는 대대로 그 집안의 부역을 면제하여 다시 관여하는 바가 없게 하였다. 한편, 부등이 군사를 이끌고 진영을 나와 장차 맞아 싸우려 했는데, 요장이 안남장군 요희륭(姚熙隆)을 보내 별도로 전진의 진영을 습격하게 하자, 부등이 두려워하여 퇴각하였다. 요장이 밤에 군사를 이끌고 옆으로 나와 그 뒤를 바짝 쫓으니, 아침에 전진의 척후 기병이 후진군의 군영을 살펴보고 부등에게 보고하기를,
"적의 여러 영(營)이 이미 텅 비어 향한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 하였다. 부등이 놀라 말하기를,
"저 자는 어떤 사람인가! 가는데도 나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오는데도 나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며, 장차 죽을 것이라 여겼는데 갑자기 다시 나타나니, 짐이 이 강족 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어찌 이리도 불행할 수 있는가!"
라 하였다. 이후 부등이 마침내 옹성(雍城)으로 돌아가니, 요장 또한 안정으로 돌아갔다.

건초 7년(392년) 10월, 파(巴), 촉(蜀) 출신 중 관중(關中) 일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후진을 배반해 홍농(弘農)을 점거하고 전진에 붙었다.

건초 7년(392년) 12월, 약양(略陽)의 휴관(休官)족 권천성(權千成)이 현친현(顯親縣)을 점거하고 스스로 진주목(秦州牧)이라 칭하였다.

건초 8년(393년) 6월, 전진의 우승상 두충이 고제 부등에게 반란하여 화음(華陰)에서 '진왕(秦王)'이라 칭하였다.

건초 8년(393년) 7월, 고제 부등이 야인보(野人堡)에서 두충을 토벌하니, 두충이 후진에 구원을 청하였다. 요장이 그를 칠 것을 논의할 때, 윤위가 요장에게 말하기를,
"태자께서 인후하다는 명성은 멀고 가까운 곳에 드높으나 영걸스러운 지략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태자를 보내 친히 가서 그들을 치게 하시어 점차 위무를 넓히고, 틈을 엿보는 자들을 뿌리 뽑으셔야 합니다."
라 하였다. 요장이 이를 채택하고, 요흥에게 경고하며 말하기를,
"도적 무리는 네가 점차 가까워짐을 눈치채면 반드시 서로 몰려 보(堡)로 들어갈 터이니, 모여있을 때 덮치면 깨뜨리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라 하였다. 과연 부등이 요흥이 호공보(胡空堡)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요흥이 호공보에 이를 즈음 두충의 포위가 절로 풀렸다. 이에 요흥은 평량(平涼)을 습격하여 크게 이기고 돌아왔는데, 모두 요장의 계책과 같았다. 이후 요장은 요흥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돌아가 지키게 하고, 또 조서를 내려 요사스럽고 비방하는 말과 간사하고 더러운 일에 대해 서로 탄핵하고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그 죄로써 벌주게 하였다.

건초 8년(393년) 8월, 동진의 평원장군 · 호저교위 양불숭(楊佛嵩)이 저족 부락 3,000여 호를 이끌고 와서 후진에 항복하니, 동진의 장수 양전기와 조목(趙睦)이 그를 추격하였다.

건초 8년(393년) 9월, 요장이 중군장군 요숭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양불숭에게 호응하게 하였고, 요숭은 곧 동진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목을 베었다. 이후 요장은 양불숭을 진동장군으로 삼았다.

건초 8년(393년) 10월, 요장이 장안으로 가다가 신지보(新支堡)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수레에 병든 몸을 싣고 나아갔다. 그때 꿈에서 부견이 천관사자(天官使者)와 귀병(鬼兵) 수백 명을 거느리고 영(營) 안으로 돌진해 들어오니, 요장이 두려워 달아나 궁으로 들어갔는데, 궁인(宮人)이 요장을 마중나오고 창으로 그를 뒤쫓아오는 귀신을 찌르려다 잘못하여 요장의 음부를 찔렀다. 귀신들이 서로 말하기를,
"바로 죽을 곳을 맞혔다."
라 하고, 창을 뽑아내니 피가 1석 남짓 흘렀다. 이윽고 잠에서 깬 요장은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마침내 음부가 부어오르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의원을 불러 그 부위를 째자 피가 나오는 것이 꿈과 같았다. 이에 요장이 미쳐 소리지르고 발광하며 혹은 스스로 신하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를,
"이 요장으로 하여금 폐하를 죽이게 한 자는 신(臣)의 형 요양(姚襄)이므로 신의 죄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신을 굽어 살피시어 억울한 일이 없게 하소서."
라 하였다.

건초 8년(393년) 12월 19일[11], 요장이 마침내 장안에 이르러 태위 요민, 상서좌복야 요황(姚晃), 상서우복야 윤위, 장군 요대목(姚大目), 상서 적백지 등을 금중(禁中)으로 불러들여 유조(遺詔)를 받고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기력이 점차 쇠약해져 장차 다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할 터이니, 경들은 내 아들을 잘 보좌하여 대업을 힘써 이루시오."
라 하고, 이어서 태자 요흥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여러 공들을 헐뜯는 자가 있거든 삼가 받아들이지 마라. 네가 골육을 어짊으로써 어루만지고, 대신을 예로써 대하며, 만물을 신의로써 대하고, 백성을 은혜로써 대우하라. 이 네 가지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한이 없겠다."
라 하였다. 이때 요황이 눈물을 흘리며 전진의 황제 부등을 잡을 계책을 물으니, 요장이 답하기를,
"지금 대업이 거의 이루어졌고 요흥(姚興)의 재능과 지혜가 족히 그를 처리할 만하거늘, 어찌 다시 묻느냐!"
라 하였다.

12월 20일[12], 요장이 영안궁(永安宮)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64세였고, 재위한 지 8년 만이었다. 시호는 '무소황제(武昭皇帝)'라 하고, 묘호는 '태조(太祖)'라 했으며, 장지를 '원릉(原陵)'이라 칭하였다.

당초 요장이 전진의 좌위장군으로서 전장군 양안과 함께 촉 땅을 정벌할 때, 낮에 물가에서 자는데 위에 신령스러운 빛이 찬란하니 좌우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 뒤에 재동령(梓潼嶺)에 이르러 한 신인(神人)을 만났는데, 그가 요장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속히 진(秦)으로 돌아가시오. 진(秦) 땅에 주인이 없으니 그 자리가 그대에게 있지 않겠소!"
라 하였다. 요장이 그 성씨를 물으니, 또 말하기를,
"장악자(張惡子)요."
라 하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과연 진(秦) 일대에서 요장이 황제를 칭하게 되었고, 요장은 즉시 그 땅에 장상공묘(張相公廟)를 세워 제사 지냈다고 한다.

3.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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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습 · 양가 · 공손봉 · 공손영 · 장충 · 석원 · 송섬 · 곽하 · 곽우 · 기가 · 구형 · 사부 · 대규 · 공현지 · 도담 · 도연명
95권 「예술전(藝術傳)」
진훈 · 대양 · 한우 · 순우지 · 보웅 · 두불건 · 엄경 · 외소 · 복후 · 포정 · 오맹 · 행령 · 불도징 · 마유 · 선도개 · 황홍 · 색담 · 맹흠 · 왕가 · 승섭 · 곽논 · 나습 · 욕곽 · 태산
96권 「열녀전(列女傳)」
신헌영 · 엄헌 · 종염 · 왕혜풍 · 이락수 · 순관 · 사도온 · 용린 · 유아 · 염부인 · 소혜 · 모황후 · 단원비 · 양황후 · 윤태후
97권 「사이전(四夷傳)」
부여 · 숙신 · 마한 · 진한 · · 토욕혼 · 언기국 · 구자국 · 대완국 · 강거국 · 대진국 · 임읍국 · 부남국 · 흉노
<rowcolor=#ece5b6>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왕돈 · 환온환현 · 변범지 · 은중문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왕미 · 장창 · 진민 · 왕여 · 두증 · 두도 · 왕기 · 조약 · 소준 · 손은 · 노순 · 초종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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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재기(戴記)]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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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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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제기(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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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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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열전(列傳)]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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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본기(本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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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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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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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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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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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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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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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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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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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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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익은 요장의 형 요양의 참군으로 발탁되어 요양을 섬겼던 적이 있었기에, 요장과도 어느 정도 연이 있었다.[2] 본래 전한 시기에 안정군(安定郡)에는 안정현(安定縣)이 있었는데, 후한서진 시기에는 안정현을 폐지하였으므로 고현(故縣)이라 하였다.[3] 호(胡)·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이 오호(五胡)의 차례이다. '너희 강족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도참의 글을 언급한 것인데, 요장이 스스로 차례에 따라 역수에 응한다고 말하였으므로, 부견 또한 도참의 글로써 반박한 것이다.[4] 마외산(馬嵬山)은 함양현(咸陽縣) 서쪽에 있는데 장안성에서 100여 리 떨어져 있다.[5] 장안의 남산(南山)에 육곡(六谷)이 있다.[6] 전진의 맹장 등강의 아들이다.[7] 김희는 요하(遼河)와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거주하던 선비족으로, 전진에서는 이 선비족들을 일컬어 '동호(東胡)'라 불렀는데, 한반도의 김(金)씨와는 무관하다.[8] 왕피는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아들이다.[9] 삼참(三斬)이란 발, 허리, 목 순서로 세 번 베는 것이다.[10] 동문장군(東門將軍)은 요장이 만든 관직으로, 안정성의 동문(東門)을 지키는 관직이다.[11] 계사년 을축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393년 12월 19일이고, 양력으로 394년 2월 5일이다.[12] 계사년 을축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393년 12월 20일이고, 양력으로 394년 2월 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