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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3:20:24

온교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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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군공(郡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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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시안충무공(始安忠武公)
溫嶠 | 온교
시호 충무(忠武)
작위 건녕현 개국공(建寧縣開國公) → 시안군공(始安郡公)
(溫)
(嶠)
태진(太真)
생몰 288년 ~ 329년 6월 6일
출신 태원군(太原郡) 기현(祁縣)
부모 부친 - 온담(溫憺)
모친 - 최씨(崔氏)[1]
배우자 이씨(李氏) → 왕씨(王氏) 하씨(何氏)
자녀 2남 2녀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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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동진의 인물. 서진의 하동태수 온담의 아들, 사공 온선의 조카.

2. 생애

온교는 성정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어, 어릴 적부터 효도와 우애로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더해서 풍채가 수려하고, 말솜씨도 화려하여 보는 이들이 즐거움을 느낄 정도였다. 온교가 17세가 되었을 때, 여러 지역 관청에서 그를 데려가려 하였으나, 온교가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사예교위의 부름에 응하여 도관종사로 임관하였다. 당시 산기상시 유애(庾敳)는 자신의 권세를 믿고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임관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온교가 조정에 상주하여 유애를 탄핵시켰다. 이로 인해 온교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고, 도성의 관료들은 두려운 마음에 함부로 패악질을 벌이지 못 하였다. 이후 온교는 수재, 작연으로 천거되어 동각좨주, 상당로(上黨潞) 현령을 차례로 지냈다.

영가 4년(310년) 10월, 평북대장군 유곤의 처는 온교의 이모였기에, 유곤이 주청하여 조카인 온교를 참군으로 삼았다.

건흥 2년(314년) 2월, 유곤이 대장군에 임명되자, 온교를 종사중랑, 상당태수로 삼고 진위장군, 독호전봉군사(督護前鋒軍事)를 겸하게 하였다. 온교는 횽노족이 세운 한나라의 석륵과 격돌하여 수 차례 공을 세움으로써 유곤의 신임을 한껏 받았다.

건무 원년(317년) 4월, 장안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서진 정권이 무너진 후, 한나라는 본격적으로 하북에 산재해 있던 여러 군벌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진왕 사마예가 강동에서 자리를 잡고 진나라의 부흥을 꾀하고 있었는데, 유곤이 다스리던 병주 역시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자, 유곤은 온교를 불러 말했다.
"과거 반표(班彪)는 유씨가 부흥할 것을 알았고, 마원은 광무제가 나라를 능히 일으켜 세울 것을 알았다. 비록 지금의 진나라는 쇠하였으나, 아직 천명이 달라지진 않았으니, 나는 하북에 그대로 남아서 공을 세우고, 경을 강남으로 보내 명성을 떨치게 할 계획이다. 그대는 이를 잘 행할 자신이 있는가?"
온교가 답했다.
"이 온교, 비록 대단한 재주는 없으나, 명공께서 제환공, 진문공의 뜻을 품고, 힘을 합하여 국가 재건의 공을 세우려 하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명령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유곤은 이내 온교를 좌장사에 임명하고, 표문을 주어 건강(建康)의 진왕 사마예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이윽고 온교가 강동에 이르자, 마침 인재를 널리 모으고 있던 사마예는 매우 기뻐하며 온교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강동에 정착하게 된 온교는 왕도, 주의, 사곤, 유량(庾亮), 환이 등 여러 명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대흥 원년(318년) 5월, 유곤이 석륵에게 패해 유주의 선비족 단필제에게 도주하였다가 의심을 받고 살해당했다. 이제 막 동진을 건국하고 황위에 오른 원제 사마예는 안그래도 불안한 정국에 불필요한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아, 일부로 유곤의 죽음을 공표하지 않았다. 당초 온교가 강남으로 떠날 때, 그의 어머니 최씨는 하북에 남기를 고집하여 온교가 그녀를 두고 온 바 있었는데, 모종의 경로로 유곤의 사망 소식과 함께 어머니의 부고 소식까지 알게 된 온교는 모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마다하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길 청하였다. 하지만 삼사와 팔좌의 대신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온교의 청을 불허하였고, 결국 온교는 어쩔 수 없이 명을 받아 산기상시에 제수받았다.

대흥 3년(320년), 죽은 유곤의 종사중랑 노심(盧諶), 최열(崔悅)이 잔당을 수습해 단필제로부터 도망치고, 요서의 단말배에게 귀순하였다. 노심, 최열 등은 사람을 보내 유곤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온교도 가세해 비록 유곤에게 공훈은 없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다 패가망신했으니 기려야 한다 주장하였다. 원제 사마예 또한 이를 옳게 여겨 비로소 유곤의 사망을 공표하고, 그를 태위, 시중으로 추증해주었다.

온교는 왕도의 장사로 배속되었다가, 태자중서자로 옮겨져 동궁에 거주하면서 태자 사마소와 친분을 쌓았다. 한번은 태자가 궁중 연못 서쪽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누각을 지으려 하니, 온교가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간언하고, 이러한 사치를 즐기기보단 직접 농사를 공부하여 백성을 헤어릴 것을 권하였다. 태자 사마소는 이를 선뜻 받아들이고는 온교를 더욱 신뢰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유외조협 토벌을 명목으로 무창(武昌)에서 거병하였다. 원제 사마예는 유외, 주의, 대연 등에게 6군의 지휘를 맡겨 왕돈을 무찌르게 하였으나, 관군이 석두(石頭)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태자 사마소가 동궁의 병력을 거느리고 친히 출전하려 하니, 온교가 사마소의 말고삐를 붙들고 간언하였다.
"신이 듣기로, 싸움에 능한 자는 분노하지 아니하고, 승리를 자주 하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러할진대 어찌하여 만승(萬乘)의 저하께서 천하의 일을 가볍게 다루려 하십니까![2]"
온교의 간언을 듣고 태자는 이내 출전을 중지하고 군사를 물렸다. 나중에 태자가 반항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돈은 그 과감한 결단력을 꺼려, 조정을 겁박해 불효죄라는 명목으로 사마소를 폐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온교가 강력히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왕돈의 횡포에 걱정과 분노에 휩싸인 원제 사마예는 곧이어 병을 얻고 붕어하였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명제 사마소는 온교를 시중으로 삼았다가, 중서령으로 옮겨 조정의 기밀과 책략을 관리하게 하였다. 온교가 나라의 대들보 역할을 하며 황제의 측근으로서 힘쓰니, 이를 몹시 꺼렸던 왕돈은 온교를 명제와 떨어뜨려 놓고자 조정에 청해 자신의 좌사마로 배속시켰다. 온교는 왕돈에게 거짓으로 경의를 표하고, 그의 심복인 전봉 등과 교류하면서 왕돈의 신뢰를 얻는 동시에 은밀히 조정과 내통하였다.

태녕 2년(324년) 6월, 단양윤 직책이 결원이 되자, 온교와 전봉은 서로를 천거하였다. 온교가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 된 것이라 착각한 왕돈은 그를 단양윤으로 삼고, 조정의 낌새를 감시하게 하였다. 온교는 자신이 건강에 간 틈을 타 전봉이 왕돈에게 이간질하여 그동안 벌어놓은 신임을 떨어뜨릴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온교는 전별회에서 술에 취한 척 전봉 앞으로 다가가, 전봉이 쓰고 있던 관모를 손으로 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도리어 전봉을 향해 불쾌한 기색을 비치며 말하길,
"전봉, 그대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 온태진(溫太真)이 권하는 술을 감히 마시지 않느냐!"
라 하였다. 왕돈은 온교가 취한 것이라 생각하고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온교는 건강으로 떠나면서 왕돈 앞에서 눈물을 쏟고 관문을 나갔다 다시 들어오길 두세번 반복한 후에야 길을 떠났다. 온교가 떠난 것을 확인한 뒤, 전봉이 왕돈에게 말했다.
"온교는 본래 조정과 매우 친밀했고, 유량과는 교우가 깊은 사이이니, 반드시 신뢰할 만한 자가 아닙니다."
왕돈이 답했다.
"어제 태진은 술에 취해 언성이 조금 높아졌을 뿐이거늘, 어찌 이처럼 참소할 수 있는가?"
왕돈이 이렇게 나오자 전봉도 더이상 온교에 관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도성 건강에 도착한 온교는 곧바로 입조하여 명제에게 왕돈의 역모 계획을 상세하게 일러바치고, 유량과 함께 왕돈 토벌을 모의하였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왕돈은 크게 분노하여, 사촌동생 왕도에게 서신을 보내 온교가 며칠만에 배신했다 역정을 내었다. 또, 조정에 상표하여 당장 간신배 온교의 목을 잘라 무창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고, 그 수급이 오면 직접 혓바닥을 뽑아버릴 것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왕돈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온교를 중루장군, 지절, 도독동안북부제군사(都督東安北部諸軍事)로 삼았다.

태녕 2년(324년) 7월, 명제 사마소가 먼저 역적 왕돈 토벌을 명목으로 거병하였다. 이에 왕돈도 간신배 온교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50,000 병력을 일으키고, 형 왕함(王含) 등을 보내 강녕(江寧)을 습격하였다. 석두성에 주둔해있던 온교는 병력을 회수(淮水) 북쪽으로 옮기고, 주작교를 불태워 왕함군 선봉의 예기를 꺾었다. 그러나 친히 군대를 이끌고 왕함군을 박살낼 작정이었던 명제는 주작교가 불탔다는 보고에 크게 노하니, 온교가 말했다.
"지금 궁궐의 숙위병들은 수가 적고 약하며, 소집한 병력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적들과 격돌하게 된다면 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다리 하나를 아까워하십니까."
과연 적들은 강을 건너올 방법이 없어 건너편에 그대로 주둔하였다.

양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상태에서 명제 사마소는 군대를 거느리고 남황당(南皇堂)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강한 장병 1,000여 명을 선발하고, 밤에 배를 띄워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은 왕함군을 야습하였다. 온교 역시 수군을 이끌고 왕함군과 수전을 벌여 적을 격파하였다. 오래지 않아 소준이 심충과 전봉의 군대도 회수 남쪽에서 격파하면서 왕돈이 보낸 군대는 모두 전멸하니, 온교는 연주자사 유하와 더불어 도망친 왕함과 전봉을 추격하였다. 반란이 평정되고 후에는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건녕현 개국공(建寧縣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비단 5,400필을 하사받았다.

태녕 3년(325년) 8월, 명제 사마소가 유조를 내려 태재 사마양, 사도 왕도, 상서령 변곤, 거기장군 치감, 호군장군 유량, 영군장군 육엽, 전장군 온교를 불러들이고, 유조를 내려 어린 태자 사마연의 보정을 부탁하고 서거하였다. 성제 사마연은 무척 어렸기에, 그의 어머니인 명목황태후 유문군이 섭정하였고, 이에 따라 황태후의 오라버니인 유량이 자연스럽게 득세하게 되었다. 유량은 중서령에 임명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함화 원년(326년) 8월, 소준과 도간을 경계하던 유량은 온교를 강주자사, 지절, 도독, 평남장군으로 삼아 무창에 진수하게 하였다. 온교는 지역을 은혜롭게 다스리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후한 시기 명사인 서유자(徐孺子)의 묘를 친히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등 민심 살피기에 힘썼다.

함화 2년(327년) 10월, 유량이 온교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소준을 대사농에 임명하였다. 역양내사 소준 입장에서는 승진처럼 보여도 사실상 병권을 전부 포기하라는 명령이었기에, 사마 하잉을 파견해 거절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유량은 소준의 항의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도성 주변에 병력과 장수를 배치시킴으로써 긴장을 고조시켰다. 온교는 유량에게 서신을 보내, 즉시 군대를 이끌고 건강을 보위하러 가겠다 청했지만, 유량은 절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도간이나 감시하라 명하였다.

함화 3년(328년) 정월, 소준이 예주자사 조약(約結)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관군을 연거푸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도성 건강을 향해 치고 올라가자, 온교는 군대를 이끌고 무창에서 나와 심양(尋陽)에 주둔하였다.

함화 3년(328년) 2월, 소준의 반란군이 건강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을 들은 온교는 통곡하였다. 도성을 무사히 빠져나온 유량은 온교에게로 도망쳤는데, 유 태후는 소준 몰래 조서를 내려 온교를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온교가 굳게 사양하며 말했다.
"오늘날 급한 일은 먼저 도적을 섬멸하는 것입니다. 아직 공훈을 세우지 못 했음에도 영총(榮寵)을 받는 것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데, 어찌 그 추태를 천하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유량이 패하여 도망쳐왔음에도 온교는 그를 업신여기지 않고 휘하의 병력을 나누어 주었다.

함화 3년(328년) 4월, 온교와 유량은 7,000의 병력으로 의군을 일으키고, 형주자사 도간을 맹주로 추대하기 위해 왕건기(王愆期) 등을 사자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도간은 자신을 견제하던 유량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것에 의심을 품고 응하지 않았다. 계속된 설득에도 도간이 뜻을 굽히지 않자 온교는 포기하려 했는데, 마침 다른 임무로 파견나갔다가 돌아온 모보의 간언을 듣고 서신의 내용을 고쳐 마지막으로 다시 사자를 보내 도간을 설득하였다. 도간은 그제서야 독호 공등(襲登)을 보내 의군의 맹주를 맡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드디어 의군을 조직한 온교는 상서(尚書)를 올리고, 조약과 소준의 죄상을 나열한 격문을 4방과 4진 장군들에게 보냈다. 이때 광릉(廣陵)에 주둔하고 있던 서주자사 치감 또한 부장 하후장을 보내 의군에 참여하였다.

도간은 일단 맹주가 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 하고 미적거리기만 하였다. 여기에 더해 독호 공등에게 돌아올 것을 명하자, 온교는 다시 서신을 보내 유세하였다. 도간은 온교의 서신을 받고 나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즉시 군복을 갖춰 입고 온교와 합류하기 위해 함선에 올랐다.

함화 3년(328년) 5월, 도간의 수군이 심양에 이르자, 사람들은 모두 도간이 유량을 죽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유량은 몹시 두려웠던 나머지 온교의 건의에 따라 도간 앞에 엎드려 사죄를 구하고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도간은 유량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함께 담화를 나누면서 이전의 오해와 원한을 풀었다. 한편, 도간이 의군의 편에 서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소준은 도간의 아들인 도첨(陶瞻)을 주살하였다.

마침내 유량, 온교, 도간의 연합군이 도성 건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융졸의 수는 40,000에 달했고, 정기(旌旗)는 700여 리에 걸쳐 늘어섰으며, 징과 북의 소리는 100리 밖에서도 진동하였다. 소준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석두성으로 향하면서 성제 사마연도 핍박해 강제로 데려갔다. 이때 연합군은 가자포(茄子浦)에 이르러 치감의 군대와도 합류하고, 계속 진군해 도간의 군대는 사포(查浦)에, 온교와 유량 등의 군대는 사문포(沙門浦)에 주둔하였다. 당시 역양(歷陽)에서 소준을 지원하던 조약이 온교 등의 군세가 자못 강성한 것을 보고 부하들에게 한탄하였다.
"나는 본래 온교가 능히 사군자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그러하구나."
석두성에 있던 소준도 봉화루에 올라 새까맣게 모여든 연합군의 모습을 보고는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소준군은 기병이 많았던 반면, 연합군은 대부분 수군이었기에 서로 함부로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온교는 자신의 남부군이 수전에 익숙한 것에 반해, 소준군은 육상전에 유리하다 여겨, 감히 상륙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군령을 내렸다. 그때 석두성의 소준은 군량 10,000석을 조약에게 보냈고, 조약은 사마 환무(桓撫) 등을 파견해 군량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모보는 온교의 군령을 어기고, 환무를 습격해 그 군량을 모두 탈취하였다. 이로 인해 죽거나 사로잡힌 적이 10,000여 명이나 되었고, 군량을 빼앗긴 조약의 군사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모보의 승전 소식을 접한 온교는 그가 군령을 어겼음에도 매우 기뻐하며 여강태수로 삼았다.

이후로도 양군은 여러 번 전투를 벌였으나, 양쪽 모두 별다른 공훈을 세우지 못 했다. 도간과 온교가 감군부장 이근(李根)의 계책에 따라 밤에 석두성 동북쪽에 백석루(白石壘)를 축조하고, 유량에게 2,000명의 군사를 주어 수비를 맡겼다. 소준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보•기 10,000여 명을 보내 백석루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 하고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해야만 하였다. 소준이 백석루에 정신이 팔린 사이, 도간과 온교는 대업(大業), 곡아(曲阿), 능정(庱亭) 세 지역에도 보루를 쌓아 사방으로 석두성을 압박하는 형세를 갖추었다.

함화 3년(328년) 9월, 보루를 네 방향으로 쌓아 소준의 군세를 분산시켰음에도 연합군은 5개월 동안 소준군과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하였고, 식량까지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도간은 노하여 온교를 책망하며 말했다.
"사군께서는 일전에 제게 이르기를, 근심 없이는 장수와 병졸이 없고, 오직 늙은 하인만이 남을 뿐이다라 하였습니다. 지금 수 차례 전투를 벌였음에도 모두 패하였는데, 대체 훌륭한 장수는 어디 있습니까? 형주는 북방의 오랑캐와 촉 양면으로 접하고 있어 항상 창고에 식량을 가득 채워 대비하는데, 만약 식량을 구하지 못 한다면 저는 서쪽으로 돌아가 좋은 계획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올해 안으로 적을 전멸시키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도간은 곧이어 형주로 귀환하려 했지만, 모보와 온교의 간곡한 설득 끝에 남아있기로 하였다. 이후 식량 문제는 모보의 맹활약 덕에 해결할 수 있었다.

온교는 임시조정을 세우고, 제단을 만들어 하늘신과 땅신에 제사를 지내 널리 조정이 재건되었음을 널리 알렸다. 이후 소준과 결전을 벌이고자, 도간은 수군을 거느리고 강줄기를 따라 석두성으로 진격하고, 온교와 유량 등은 정예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백석에서 적을 도발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이에 소준은 아들 소석과 장수 광효에게 군사 8,000명을 주어 보냈고, 소석과 광효는 손쉽게 관군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소준은 술을 돌려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였는데, 본인도 마시다가 술에 취하였다. 멀리서 도망치는 적군을 바라보던 소준은 취기가 돌았는지, 갑자기 말에 올라 기병 몇 명만 대동한 채 그 뒤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후퇴하던 연합군을 따라잡은 소준은 진으로 돌진했다가 막히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돌려 석두성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던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아, 백목피(白木陂)에서 소준의 말이 넘어진 틈을 타 소준의 목을 베었다. 소준이 너무도 어이없게 전사하자, 남은 소준의 무리는 그 동생인 소일을 옹립하고 석두성 문을 굳게 걸어잠궜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명에 따라 도성을 지키고 있던 광술(匡術)이 성을 들어 온교에게 투항하였다. 이윽고 소일이 건강을 탈환하고자 군대를 보내 광술을 공격하니, 광술은 온교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강주별가 나동(羅洞)이 온교에게 권했다.
"지금 수심이 깊고 물살이 난폭하여 구원하러 가는 것은 적절치 않고, 차라리 탑항(榻杭)을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탑항을 지키는 군대를 무찌른다면 광술의 포위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온교는 이에 따라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곧장 석두성을 공격하였다. 소일의 조카이자 소준의 아들인 소석은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와 반격을 가했으나, 이내 온교에게 패하고 참수당하였다. 소일의 군대는 사기가 크게 꺾여 모두 앞다퉈서 석두성을 버리고 좁은 성문을 통해 도망치다가 10,000여 명 가량이 밟혀 죽었다. 석두성에 입성한 온교는 미처 피신하지 못 한 소일을 붙잡아 참수하고, 뒤이어 반란을 방조했던 서양왕 사마양과 팽성왕 사마웅도 사로잡아 주살하였다. 연합군이 석두성을 완전히 탈환한 후, 분위장사 등함(滕含)이 성제를 품에 안고 온교의 배 위로 올랐다. 성제를 알현한 제장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린 채 눈물을 흘리며 벌을 청하였다.

연합군은 성제 사마연을 모시고 드디어 건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황궁은 소준의 반란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불타 없어져 버려 급한대로 건평원(建平園)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대신들 사이에서 천도에 관한 의견이 오가기도 하였지만, 사도 왕도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왕도는 저삽을 단양윤에 임명하여 전후 복구에 힘쓰면서 어느정도 조정이 안정을 되찾았다. 온교는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어 산기상시를 겸하고, 시안군공(始安郡公)으로 진작되니, 식읍이 3,000호에 달했다. 왕도는 소준이 죽기 전에 귀순했던 노영, 가녕 등을 포상해주려 했으나, 온교가 완강히 반대하여 이들은 겨우 죽음만 면하였다. 조정에서는 온교가 중앙에 남아 보정을 맡길 희망하였다. 하지만 온교는 부임지로 돌아가길 청하고 다시 무창으로 돌아갔다.

함화 4년(329년) 4월, 온교가 우저기(牛渚磯)를 지나던 중, 그곳의 수심이 매우 깊어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고, 물 아래에 수많은 괴물이 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온교는 사람에게 명해 코뿔소의 뿔을 태워 물가를 비춰보도록 하였다. 오래지 않아 물 속에 여러 생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괴이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물 아래에서 사람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듯한 형체도 보였다. 그 날 밤, 온교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온교에게 말했다.
"그대와 나는 이승과 저승에서 각자 다른 길을 가는데, 어찌하여 나를 바춰본 것이요?"
곧바로 잠에서 깬 온교는 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그 꿈을 꾸기 전에 온교는 충치가 있어 이빨을 뽑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을 꾸고 난 후, 발치한 자리에 중풍이 들었고, 병에 걸린지 열흘이 채 지나기도 전인 4월 23일에 병사하였다.[3][4] 향년 42세.

온교의 죽었다는 소식에 강주의 백성들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성제 사마연 또한 책서를 내려 온교를 시중, 대장군, 지절로 추증하고, 도독, 자사직은 이전과 같게 하였다. 또, 돈 100만 전과 베 1,000필을 하사하였으며, 시호는 '충무(忠武)'라 하였다. 온교의 작위는 장남인 온방지(溫放之)가 습작하였다.

3. 기타



[1] 삼국시대 조위의 사공 최림의 손녀이다.[2] 후문의 "何萬乘儲副而以身輕天下" 부분은 노자의 도덕경 26장에 나오는 말을 살짝 변형시켜 인용한 것이다.[3] 양력으로 계산할 시 6월 6일.[4] 의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발치 등 치과 수술을 받고 난 후 뇌졸중(중풍)이 찾아오는 경우가 가끔씩 발생하는 걸 생각하면 딱히 귀신의 소행으로 볼만한 일은 아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