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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3:26:39

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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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51665><colcolor=#ece5b6>
환초 초대 황제
환현 | 桓玄
출생 369년
동진 예주 초국 용항현
(現 안후이성 벙부시 하이위안현 룽캉진)
사망 404년 6월 19일 (향년 35세)
동진 형주 남군 강릉현 외곽
(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동진의 남군공
373년 8월 18일 ~ 403년 12월
동진의 초왕
403년 12월 ~ 404년 1월 1일
환초 초대 황제
404년 1월 1일 ~ 404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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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51665><colcolor=#ece5b6> 본관 초국 환씨
현(玄)
부모 부황 선무제
모후 예장공태부인
형제자매 7남 4녀 중 7남
배우자 황후 유씨
자녀
1남 [ 펼치기 · 접기 ]
외아들 - 환승(桓升, 398 ~ 404)
경도(敬道)
작호 남군공(南郡公)
→ 초왕(楚王) → 황제(皇帝)
시호 무도황제(武悼皇帝)
연호 영시(永始, 4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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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유년기2.2. 벼슬을 버리다2.3. 왕공의 난2.4. 군벌들과의 대립2.5. 마두 전투2.6. 반란을 일으키다2.7. 건강 장악2.8. 제위 찬탈2.9. 유유의 정변2.10. 반격 실패2.11. 최후
3. 평가4. 기타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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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동진(東晉)의 인물이자, 환초(桓楚)의 건국자.

권신환온(桓溫)의 막내아들로 시호는 무도황제(武悼皇帝)였다. 환현은 결국 아버지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열종 효무제 사마요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환초를 건국하여, 환온의 유지를 이었으나, 불과 3개월 만에 유유(劉裕)에게 반격을 받아, 피살되고 말았다.

2. 생애

2.1. 유년기

어느 날, 환온의 첩 마씨(馬氏)가 밤에 바깥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우연히 달 아래에서 별동별이 떨어져 구리 그릇에 받아둔 물 안에 담겼다. 마씨가 다가가 그릇을 확인하니, 크기가 무려 2촌(寸)에 달하는 화주(火珠)가 담겨있었다고 한다. 화주의 색이 맑고 깨끗한 것이 무척 아름다워, 마씨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고 이내 이상한 느낌이 왔고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환현이 태어날 때, 영문 모를 빛이 방 안을 가득 비추자 점쟁이들이 놀라 말하길,
"아이가 기이한 빛을 내고 있으니 마땅히 천인(天人)으로 보아야 합니다."
라며 아버지 환온에게 아명을 "신영보(神靈寶)"라 지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환온은 세 자로 구성된 것을 꺼려 신(神)자를 빼고 "영보(靈寶)"를 아명으로 삼았다.[1] 환현은 비록 첩 소생의 얼자였으나 아버지 환온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영강 원년(373년) 7월, 환온이 사망하고 그 동생 환충이 형의 군권을 이어받았다. 환충은 환온의 유언에 따라 당시 5살에 불과한 환현으로 하여금 남군공(南郡公) 작위를 잇게 했다.

영강 3년(375년) 5월, 환온의 상이 끝날 무렵, 작은아버지 환충이 양주자사(揚州) 직책을 사안에게 양보하고 경구(京口)로 이동했다. 환충은 도성을 떠나기 전, 환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네 집안의 옛 관리일 뿐이다."
그 말을 들은 환현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2.2. 벼슬을 버리다

어느덧 장성한 환현은 기이한 생김새를 가졌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예술과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 항상 영웅호걸을 자칭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의 두려움을 샀고, 조정의 신뢰도 받지 못해 관직을 얻지 못했다. 이후 나이 23세가 되던 해에 태자선마에 제수받으면서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환현과 그 형제들은 불온한 역신 환온의 자식이라 하여 한미한 관직에 머물렀다.

이때 실권자이던 사마도자는 말을 가려 하질 못했는데 환현을 가벼운 술자리에서 이렇게 자극했었다.
"환온이 만년에 모반하려 했을 때도 이와 같았을까?"
다른 날에는 또 이같이 말했다. 그날은 환현이 의흥군에서 돌아와 사마도자를 만나는 자리였는데 사마도자는 취해있었다.
"환온(환현의 아버지, 일부러 모반을 꾀했던 환온이라 이름을 바꾸어 부름)이 돌아와서 모반을 일으키려고 하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주변의 만류에 사마도자는 억지로 그에게 사과하며 술을 권했다.
"환현, 자아, 한 잔"
여러 번이나,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같이 큰소리로 말하자 환현은 가슴속에 큰 원한을 품었다.

태원 17년(392년) 11월, 조정으로부터 의흥태수에 임명되었지만 환현은 자신의 야망을 펼칠 수 없음에 답답해 했다. 그는 높은 망루에 올라 진택(震澤)을 바라보며,
"아버지께선 구주(九州)의 백(伯)이었건만, 그 아들은 오호(五湖)의 장(長)밖에 되지 못하는구나!"
라 한탄하고는 사직했다. 봉국으로 돌아가기 전, 환현은 상소해 불만 사항을 토로해 보기도 했지만, 조정에서 그의 상소에 답하지 않았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환현은 남군 강릉(江陵)에 자리를 잡고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보냈다.

환씨 가문은 환온 - 환활 - 환충 - 환석민에 걸쳐 대대로 형주에 기반을 마련했기에, 환현은 이런 집안 배경을 믿고 지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형주자사 왕침이 치소를 강릉으로 옮기고 환현을 억제하기 시작하니, 환현은 그에게 억눌려 결국 함부로 설치지 못했다. 얼마 안가 왕침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그 후임으로 왕공을 앉히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환현은 왕공이 두려운 나머지, 수도 건강으로 들어가 효무제 사마요가 신임하던 비구니 지묘음(支妙音)에게 뇌물을 바치고, 비교적 만만한 은중감이 형주자사에 부임할 수 있도록 황제에게 잘 말해달라 부탁했다. 이리하여 은중감이 형주자사로 임명되었고, 환현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방종했으나 은중감은 그가 두려워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번은 환현이 은중감의 관청 뜰 앞에서 말 타며 놀다가 장난삼아 창을 은중감에게 겨냥한 일이 있었다. 중병참군 유매(劉邁)가 감히 환현의 태도를 지적하자, 이에 불쾌감을 느낀 환현은 관청에서 나갔다. 그러자 은중감은 낯빛이 파랗게 질려 유매를 꾸짖었다.
"경은 미쳤는가! 환현은 필시 밤에 사람을 보내 경을 죽일 것이네!"
은중감이 유매를 얼른 건강(建康)으로 도망치게 하니, 과연 환현은 사람을 보내 그 뒤를 추격했지만 끝내 유매를 놓치고 말았다. 은중감의 부하들은 환현을 주살하자 청했지만 은중감이 듣지 않았다.

2.3. 왕공의 난

융안 원년(397년) 4월, 중서령 왕국보(王國寶)와 건위장군 왕서(王緖)가 안제 사마덕종의 섭정을 맡은 회계왕 사마도자에게 빌붙어 사방으로 뇌물을 거두어 들이고 횡포를 부렸다. 왕국보는 연청이주자사 왕공과 형주자사 은중감을 꺼려 사마도자와 함께 이들을 견제하니, 왕공은 은중감에게 사자를 보내 왕국보 토벌을 모의하고자 했다. 환현은 이를 자신의 야망을 이룰 기회라 여겨 은중감에게 왕공의 청에 응하자고 유세했다. 은중감은 환현의 계책을 따른다고는 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의심하여 적극적으로 왕공에게 호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왕공이 거병하자 깜짝 놀란 사마도자는 왕국보를 옥에 가두고 왕서를 저자에서 참한 뒤, 왕공에게 사죄했고 왕공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상황이 종료됐다. 사마도자는 왕공과 은중감 세력이 훗날 화근이 될 것이라 생각해 초왕 사마상지와 시평공 사마휴지를 측근으로 두었다.

융안 2년(398년) 7월, 환현은 조정에 자신을 광주자사에 임명시켜달라 청했다. 사마도자는 환현이 형주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순순히 그를 독교광이주군사(督交廣二州軍事), 건위장군, 평월중랑장, 광주자사에 임명시켜 주었지만, 환현은 명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고 형주에 그대로 머물렀다. 이윽고 사마도자의 우려대로 왕공이 예주자사 유해와 연합해 사마상지 형제와 강주자사 왕유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거병했다. 은중감도 이에 호응해 양전기에게 수군 5,000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 환현으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하며, 은중감 본인은 병사 20,000으로 후방에서 지휘했다. 양전기와 환현의 군대가 분구(湓口)에 이르자,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왕유는 당황해 임천(臨川)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환현이 보낸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융안 2년(398년) 9월, 유해가 우저(牛渚)에서 사마상지의 관군과 맞붙었다가 크게 패하고 환현과 양전기의 군영으로 도망쳐 왔다. 사마상지는 승세를 타고 내친 김에 동생 사마회지(司馬恢之), 사마윤지(司馬允之)와 함께 환현까지 공격했다. 환현은 백석(白石)에서 관군과 교전해 대파하고 횡강(橫江)으로 진격하니, 사마상지는 도망치고 사마회지의 수군은 모두 침몰해 익사하고 말았다. 양전기와 환현은 계속 진군해 건강 코앞인 석두성(石頭城)에 도착했고, 은중감의 군대는 무호(蕪湖)에 이르렀다. 하지만 환현이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사이, 왕공의 장수 유뢰지가 왕공을 배반하고 장당호(長塘湖)에서 그를 사로잡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뢰지가 반란군의 맹주인 왕공을 죽이고 건강 서남쪽에 위치한 신정(新亭)에 진영을 늘어뜨리자, 환현과 양전기는 놀라 채주(蔡洲)로 군대를 물리고 관군과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조정은 반란군의 허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심히 근심했다. 이때 환현의 사촌인 좌위장군 환수가 환현과 양전기에게 관직을 내려 회유하고 은중감을 내쫓아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자는 이간책을 제안했다. 사마도자는 이를 옳게 여기고 조서를 내려 환현을 강주자사, 양전기를 옹주자사로 삼고 은중감을 광주자사로 좌천시켰다. 조정에서 태상 은무(殷茂)를 보내 조서를 공표하고 은중감에게 군대를 물리라 명하자, 은중감은 대노하여 환현과 양전기에게 당장 진군할 것을 재촉했다. 본래 환현은 조정에서 관직을 내리면 기꺼이 받으려 했기에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조카 은휼(殷遹)로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받은 은중감은 무호에서 철수하면서 환현과 양전기에게 사람을 보내,
"그대들이 각자 흩어지지 않고 돌아와 대군(大軍)이 강릉(江陵)에 이르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그대들의 가족을 모두 주살할 것이다."
라며 엄포를 놓았다. 양전기의 부장 유계(劉系) 등도 은중감을 따라 하나둘 철수하자, 환현과 양전기는 두려워 허겁지겁 서쪽으로 달려가 심양(尋陽)에서 그를 따라잡고는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맹약을 맺었다. 은중감과 양전기는 환현을 맹주로 추대한 이후, 조정에 유뢰지와 사마상지의 주살할 것을 청하고 왕공과 은중감이 억울한 일을 당했음을 호소했다. 회유에 실패한 조정은 어쩔 수 없이 은중감의 좌천을 취소하고 이 일의 원흉인 환수를 면직시키면서 화의를 구했다. 은중감은 다시 형주자사로 복직되고, 환현은 강주자사 직책을 약속받으면서 서로 만족한 채 다시 형주로 돌아갔다.

2.4. 군벌들과의 대립

맹주로 추대받은 환현은 이전보다 더욱 오만해져, 모든 일이 끝나고 심양에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이 뛰어남을 지나치게 자랑하고 다녔다. 홍농 양씨 출신의 양전기는 그 사람됨이 사납고 교만하여 항상 스스로 하나라의 후예라 자랑하고 다녔는데, 환현이 그를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며 대놓고 까자 심히 원망스럽게 생각했다. 결국, 양전기는 환현을 죽일 작정으로 은중감을 몰래 찾아가 환현을 도모하자 제안했다. 하지만 은중감은 환현을 죽인 후 사나운 양전기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을 걱정해 되려 꾸짖고 되돌려 보냈다. 양전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환현은 주둔지를 하구(夏口)로 옮기고 시안태수 변범지를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융안 3년(399년) 12월, 환현이 조정에 형주 4개의 군을 자신의 관할 구역에 편입시켜 줄 것을 청했다. 사마원현은 은중감, 양전기와 환현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그의 청을 수락하여, 장사(長沙), 형양(衡陽), 상동(湘東), 영릉(零陵) 4개의 군을 환현이 관할하게끔 하고, 양전기의 형 양광(楊廣) 대신 환현의 형 환위(桓偉)를 보국장군, 남만교위에 임명했다. 조정의 이러한 조처에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 양전기는 후진으로부터 낙양을 탈환하겠다는 거짓 선언을 하고, 은중감에게 사람을 보내 함께 환현을 습격하자 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양전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속으로는 의심하던 은중감이 오히려 은휼을 보내 양전기를 막게 했다. 홀로 거사해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던 양전기는 하는 수 없이 병사를 해산시켰다. 환현은 양전기가 물러난 틈을 이용해 양전기의 사촌동생 강하상 양자경(楊孜敬)을 납치하고, 그를 멋대로 자신의 군자좨주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인질로 삼았다.

2.5. 마두 전투

그 해(399년), 형주에 홍수가 나 민생이 피폐해지자 은중감은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환현은 은중감이 식량을 털었다는 사실을 알고, 거짓으로 낙양 정벌을 선포하면서 군대를 보내 형주의 곡창지대 파릉(巴陵)을 점령해 버렸다. 이후 조정의 명령을 사칭해, 부임지로 향하던 양주자사 곽전(郭銓)을 속여 자신의 선봉이 되게 했다. 환현은 곽전에게 강하의 병력을 주어 은중감이 있는 강릉(江陵)으로 진군하게 하는 동시에, 형 환위에게 밀서를 보내 강릉성 내부에서 호응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환위는 두려워 은중감에게 밀서를 바치며 자수했고, 은중감은 환위를 인질로 삼아 그로 하여금 환현에게 당장 진군을 멈추라는 서신을 쓰게 했다. 형의 서신을 받은 환현이 말했다.
"은중감은 홀로 결단할 능력이 없어, 항상 계책의 성패에 걱정을 품고 자신의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니, 우리 형은 반드시 안전할 것이다."
환현의 본대가 마침내 파릉에 이르렀다. 은중감이 보낸 은휼이 수군 7,000명을 거느리고 서강구(西江口)에 도착하자, 환현은 곽전과 부굉을 파견해 은휼을 격파했다. 환현이 양구(楊口)로 진격하자 이번엔 양광, 은도호(殷道護) 등이 나아가 막았으나 또 환현에게 패했다. 환현은 은중감이 보낸 모든 군대를 무찌르고 파죽지세로 영구(零口)에 도착하니, 강릉성과의 거리가 20리 밖에 되지 않았다.

은중감은 환현에 대비해야 했지만 이미 구휼한 일로 인해 성내 군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은중감은 양전기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양전기는 강릉에 식량이 없으니 양양(襄陽)으로 와 자신과 함께 환현에 맞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형주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은중감은 양전기에게 성 안에 저축된 식량이 있다 속이고 당장 구원군을 보낼 것을 종용했다. 이에 양전기는 은중감을 믿고 보•기 8,000여 명을 이끌고 강릉에 도착했다. 이때 은중감이 구원군에게 말린 밥풀 따위를 대접하는 것을 본 양전기는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격노해 은중감을 만나주지도 않고 형 양광과 함께 환현의 진영을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환현은 양전기 군대의 예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 마두(馬頭)로 후퇴했다.

다음 날, 환현군의 선봉을 맡은 곽전이 추격해온 양전기와 마두에서 전투를 벌였다. 양전기는 곽전과의 사투 끝에 곽전군을 전멸 직전으로 몰아가며 승기를 다질 무렵, 환현이 가다렸다는 듯 군사를 일으켜 곽전을 구원했다. 이미 다 이겼다 생각해 안심하고 있던 양전기의 병사들은 밀려오는 환현군을 보고 싸울 의지를 잃으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결국 양전기는 대패해 양양(襄陽)으로 돌아갔지만, 환현은 장수 풍해(馮該)를 보내 양전기, 양광 형제를 붙잡아 참수하고 그 수급을 건강으로 보냈다. 양전기의 동생 양사평(楊思平)과 사촌동생 양상보(楊尙保), 양자경은 모두 흩어져 이민족들이 지역으로 달아났다. 양전기의 패전 소식에 은중감과 조카 은도호는 강릉을 버리고 찬성(酇城)으로 들어갔고, 이후 후진의 장안으로 도주하다가 관군성(冠軍城)에서 풍해에게 사로잡혔다. 풍해는 은중감을 압송하다가 작계(柞溪)에 이르렀을 때, 그를 겁박해 자결하게 만들고 은도호마저 살해했다.

융안 4년(400년) 정월,자신을 견제하던 두 세력을 2개월만에 일망타진한 환현은 건강에 사신을 보내 형강이주자사 직책을 요구했다. 조정은 환현을 도독형사옹진양익녕칠주(都督荊司雍秦梁益寧七州), 후장군, 형주자사, 가절로 삼는 대신, 그의 사촌 환수를 강주자사에 임명하는 것으로 타협보려 했다. 그러나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 없었던 환현은 다시 조정에 상소하여 강주자사 직책을 굳게 요구하니,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강주자사도 더해 주었다.

2.6. 반란을 일으키다

융안 4년(400년) 5월, 환현이 이번엔 자신의 형 환위를 관군장군, 옹주자사에 임명해달라 청했다. 조정에서는 아직 손은의 난이 토벌되지 않은 것을 우려해 그의 요청대로 행했다.

융안 5년(401년) 7월, 손은의 반란이 나날이 거세져 도성 건강까지 압박해 왔다. 환현은 형주에서 병기를 정돈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건강에 진입할 틈을 엿봤는데, 마침 조정이 손은의 난으로 고생하자 선뜻 손은을 토벌하겠다 자청했다. 사마원현은 환현이 두려워 그의 청을 잠시 보류해 두었다가, 사염, 유유의 활약으로 손은의 기세가 꺾인 것을 보고 불허했다.

융안 5년(401년) 12월, 환현이 환위를 강주자사로 임명해 하구(夏口)에 주둔하게 하고, 측근 조창(刁暢)을 보국장군으로 삼아 양양(襄陽)에, 장수 황보부와 풍해를 분구(湓口)에 배치시켰다. 또, 저수(沮水)와 장수(漳水) 인근에 거주하던 만족를 강남으로 이주시켜 무녕군(武寧郡)을 새로 세우고, 전란으로 인해 떠돌던 유민족들을 거두어 수안군(綏安郡)을 편성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사마원현은 환현의 최측근인 광주자사 조규와 예장태수 곽창지(郭昶之)에게 입조할 것을 명했으나, 환현은 이들을 붙잡아 두고 건강에 보내지 않았다.

원흥 원년(402년) 2월, 환현은 사촌형 환석생으로부터 사마원현이 자신을 토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사 변범지의 계책에 따라 먼저 거병해 사마원현의 죄를 널리 폭로하고 곧장 건강으로 진격했다. 사마원현은 안제 사마덕종의 호송을 받으며 배에 올라탔으나 환현이 너무 두려워 출발하지 못했다. 환현은 건강으로 향하면서도 행여나 이기지 못할까 걱정해 다시 서쪽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와중, 심양을 지날 때 관군이 없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진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조정은 제왕 사마유지(司馬柔之)를 보내 환현에게 해산을 권고케 했지만, 환현은 그의 선봉을 격파하고 사마유지를 살해했다.

환현의 군대가 고숙(姑孰)에 이르렀을 때, 환현은 장수 풍해, 황보부, 부굉, 색원을 보내 역양(歷陽) 공격하자 양성태수 사마휴지 성을 굳게 지켰다. 초왕 사마상지가 9,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포(洞浦) 상류에 주둔하고, 무도태수 양추(楊秋)를 파견해 횡강(橫江)을 지키게 했으나, 양추가 싸우지도 않고 환현에게 항복하면서 군대가 무너졌다. 사마상지는 도중(涂中)으로 도망치다가 환현에게 사로잡혔고, 사마휴지 역시 성 밖으로 뛰쳐나와 싸우다가 패해 역양을 버리고 도주했다.

원흥 원년(402년) 3월, 율주(溧洲)에 주둔해 있던 유뢰지는 동해국 중위 하무기, 참군 유유의 반대를 무시하고, 친척 하목(何穆)의 설득에 넘어가 아들 유경선을 보내 환현에게 항복했다. 환현은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유경선 자의참군으로 삼았다. 환현군이 신정(新亭)에 이르렀을 때, 건강성 선양문(宣陽門)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사마원현은 적이 바로 코앞까지 왔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황궁으로 들어가려 했다. 환현이 칼을 뽑고 소리치길,
"무기를 버려라!"
라 하니, 사마원현의 군사들은 일제히 붕괴되었다. 사마원현은 말을 타고 동부(東府)로 들어가 아버지 사마도자에게 계책을 물었으나,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던 사마도자는 아들을 마주보고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환현은 태부종사중랑 모태(毛泰)로 하여금 사마원현을 붙잡아 오게 하고, 그의 앞에서 죄목을 일일이 나열했다. 이후 건강에 입성한 환현은 조서를 사칭해 융안으로 연호를 회복하고, 스스로 총백규(總百揆), 시중,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승상, 녹상서사, 양주목(揚州牧), 영서주자사에 올랐다. 또, 가황월(假黃鉞), 우보도취(羽葆鼓吹), 반검(班劍) 20명을 하사받았고, 휘하에 좌우장사, 사마, 종사중랑 4명을 둘 수 있게 되었으며, 갑병 200명과 함께 입궁하는 혜택이 주어졌다.

2.7. 건강 장악

이리하여 동진의 대권을 장악한 환현은 평소 악감정이 있던 태부 사마도자를 안성군(安成郡)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관계자들에게도 미쳐, 표기대장군 사마원현은 물론이고, 태부종사중랑 모태, 모태의 아우인 유격장군 모수(毛邃), 태부참군 순손(荀遜), 전 예주자사 유해 부자, 이부랑 원준(袁遵), 초왕 사마상지, 표기장사 왕탄(王誕), 태부주부 모둔(毛遁) 등을 싸그리 붙잡아 저자에서 공개처형해 버렸다. 처형당한 사마상지의 동생 단양윤 사마휴지와 광진백 사마충지는 환현이 보낸 추격병을 피해 교주와 광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환현은 인척과 측근들에게 관직을 배분하고,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연호를 대형(大亨)으로 개원했다.

유뢰지가 환현을 배신하려다 일이 누설되는 바람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끝까지 도망가지 못하고 신주(新洲)에 이르러 목을 메어 자결했다. 유뢰지를 따르던 장수와 관리들은 그의 시신을 거두어 염을 하고 단도(丹徒)에 돌려 보냈는데, 환현이 좌우에 명해 유뢰지의 관을 쪼갠 뒤 부관참시를 시전하고 저자에 그 시신을 보였다. 이후 승상 직책을 사양하고 스스로 태위, 영평서장군, 예주자사에 올랐다. 나라의 큰 일은 환현이 직접 처리하였고, 작은 일은 상서령 환겸, 단양윤 변범지가 처리하였다.

정권을 잡은 환현은 잠깐 동안은 아첨하는 자들을 파면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면서 정상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러나 이는 한 달만에 무너져, 환현은 어느새 도성에서의 사치와 향락에 취해 그 정도가 사마도자 부자를 넘어섰으며, 정령을 수시로 바꿔 조정의 당파는 더욱 분열되었고, 부패는 극을 달려 조정은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또, 황제에게 쓰이는 예산도 삭감하는 바람에 안제 사마덕종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강동에 대기근이 들어 부유한 집안도 비단을 두른 채 아사할 정도로 그 상황이 매우 심각해 호구가 반토막 났다.

원흥 원년(402년) 5월, 영가태수 노순이 사망한 손은의 뒤를 이어 무리를 거느리고 동양(東陽)으로 들어가 난을 일으켰다. 이에 환현은 유유를 보내 노순을 토벌하게 했다.

원흥 원년(402년) 10월, 과거 유뢰지가 이끌던 북부병 소속 장수들인 오흥태수 고소(高素), 보국장군 축겸지(竺謙之), 그의 사촌형 고평상 축랑지(竺朗之), 보국장군 유습(劉襲), 그 동생 팽성내사 유무(季武) 등을 숙청했다. 영삭장군 고아지(高雅之)와 살해당한 유습의 형인 기주자사 유궤(劉軌)는 분노하여 산양(山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사마휴지, 유경선 등을 맞이해 환현을 토벌하려 들었다. 그러나 환현이 유궤를 공격해 반란군을 궤멸시켰고, 유궤, 사마휴지, 유경선, 고아지는 선비족남연으로, 장수 원건지(袁虔之), 유수(劉壽), 고장경(高長慶) 등은 강족후진으로 제각기 흩어져 달아났다.

원흥 원년(402년) 12월, 어사 두림(杜林)을 보내 안성군에 유폐되어 있는 사마도자를 짐독으로 암살하게 했다. 그리고 동진 전역에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의 이름을 조사하게 하고, 아버지 환온과 같이 '온(溫)'자를 이름으로 쓰는 자는 강제로 개명하게 만들었다. 또, 친어머니인 마씨가 첩 신분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의 호칭을 예장공태부인(豫章公太夫人)으로 고치게 했다.

원흥 2년(403년) 2월, 스스로 대장군에 오르고 과거 북부병 소속 장수였던 손무종(孫無終)에게 누명을 씌워 살해했다.

원흥 2년(403년) 8월, 형주자사 환위가 사망하자 그를 표기장군으로 추증해주고, 사촌 환석강을 서중랑장, 형주자사로 삼았다. 환현은 형의 상 중임에도 상복을 벗고 평소처럼 향락을 즐겼다.

2.8. 제위 찬탈

원흥 2년(403년) 9월, 측근인 시중 은중문과 산기상시 변범지가 환현에게 황위를 찬탈하라 재촉했다.[2] 환현 또한 찬탈하고픈 마음이 있어, 스스로 구석을 더하고, 남군, 남평(南平), 의도(宜都), 천문(天門), 영릉, 영양(營陽), 계양(桂陽), 형양, 의양(義陽), 건평(建平) 총 10개의 군을 자신의 봉지로 편입시켜 초왕(楚王)에 봉한다는 조서를 꾸몄다. 이후 초국(楚國)에 승상을 포함한 문무백관을 설치하고, 초국의 왕비를 왕후, 세자를 태자라 고쳐 칭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10여 뼘이나 되는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깃발을 사용하며,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금근거(金根車)를 타고 다니는 등, 마치 천자가 된 것인 양 행세했다.

원흥 2년(403년) 11월, 안제 사마덕종이 초왕 환현에게 선양의 의사를 표하자, 환현은 사양하면서 황제를 영안궁(永安宮)에 가두고 진나라의 신주는 낭야국으로 옮겼다. 환현은 사마덕종의 이름으로 조서가 작성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안제로부터 옥새를 탈취했다.

원흥 2년(403년) 12월, 조정의 백관들이 고숙으로 이동해 환현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했다. 환현은 거짓으로 여러 번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척 고숙성 남쪽 들판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곧바로[3] 초나라(楚)의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즉위 의식 중에 예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백관들이 만세를 외치는 절차를 깜빡하고 행하지 않았다. 환현은 연호를 영시(永始)[4]로 개원하고, 폐위된 사마덕종을 평고왕(平固王)에 봉해 심양에 유폐시켰다. 또, 아버지 환온을 선무황제, 양어머니 남강장공주를 선무황후로 추존하고, 자신의 아들 환승(桓昇)을 예장왕(豫章王)에 봉했다.

그렇게 황위를 찬탈한 환현은 위풍당당하게 건강성으로 들어가 입궁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돌풍이 불어와 깃발과 장식을 사방에 흩뿌렸다. 환현이 입궁하여 정전에 들어가 어좌에 앉으려던 찰나, 이번에는 갑자기 마루가 가라앉으니 그 광경을 목격한 백관들이 모두 크게 놀라 불길하게 여겼다. 그때 은중문이 나아가 말했다.
"폐하의 성스러운 덕이 깊고 두터워, 대지도 이를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환현 또한 갑작스런 불길한 징조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이후 감옥으로 이동해 죄의 경중과 관계없이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주고, 승여에 접근해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 구휼해 주었는데, 작은 은혜를 베푸는 것을 좋아하기가 이와 같았다. 황제에 오른 환현이 놀기 좋아하는 성격 탓에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시작하니, 백성들은 더더욱 도탄에 빠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환현은 사냥을 좋아해 하루에도 수 차례씩 사냥에 나섰고, 거처를 동궁으로 옮겨 궁성에 토목공사를 크게 벌였다. 관리와 백성들은 그의 이러한 행보에 지쳐 반란을 생각하는 자들이 열 중 여덟 아홉이었다.

2.9. 유유의 정변

원흥 3년(404) 2월, 일찍이 환현은 건무장군 유유를 후히 대접하고 노닐 때마다 항상 그를 불렀다. 황후 유씨가 환현에게 유유는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 제거해야 한다 경고했지만, 환현은 중원을 평정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황후의 예상대로 유유는 환현 정권을 뒤집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유도규, 유의, 하무기, 왕원덕(王元德), 왕중덕(王仲德), 맹창(孟昶), 제갈장민 등 12명과 거병을 모의했다.

기일이 되자, 유유는 사냥 나간다는 핑계로 성을 빠져나와 하무기와 함께 무리 100여 명을 모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경구성으로 달려가 황제가 보낸 칙사를 칭하며 성 안으로 진입하고, 그곳을 수비하던 안성왕 환수를 참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광릉을 지키던 청주자사 환홍(桓弘)도 사냥을 나가자는 주부 맹창의 권유에 의심없이 따라나섰다가, 미리 성 밖에서 수십 명의 장사들과 대기하고 있던 유의, 유도규의 습격을 받고 참수당했다. 유유가 경구를 장악한 뒤, 주안목(周安穆)을 건강성으로 파견하면 성내에서 경릉태수 유매(劉邁), 하내태수 신호(辛扈), 홍농태수 왕원덕, 진위장군 동후지(童厚之) 등이 내응할 계획이었으나, 유매가 겁을 먹고 새벽에 환현을 찾아가 거병 모의를 모두 털어놓았다. 결국 반란군의 건강성 장악은 실패해 주안목은 다시 유유에게로 되돌아가고, 유매를 비롯한 신호, 왕원덕, 동후지 등은 전부 주살되었다.[5]

경구에서 거병한 유유는 무리 내에서 맹주로 추대받고 총독서주자사를 자칭했다. 그는 경구에 맹창을 남겨 지키게 한 후, 1,700명을 거느리고 죽리(竹里)에 주둔해 사방에 격문을 뿌렸다. 동궁에 있던 환현은 상황이 급박함을 알고 다시 상궁(上宮)으로 돌아와 관리들을 모두 궁내에 숙직하게 했다. 그리고 신안왕 환겸을 불러 정토도독을 더하고, 둔구태수 오보지(吳甫之), 우위장군 황보부(皇甫敷)를 보내 두 갈래로 반란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여러 반란을 겪어본 환현이 유독 유유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심하니, 혹자가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환현이 답했다.
"유유는 족히 한 세기의 영웅이라 할 수 있고, 유의는 주사위 도박만으로 백만 전을 벌었을 정도로 운이 좋으며, 하무기는 그의 장인인 유뢰지와 재능이 맞먹으니, 함께 대사를 도모하면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원흥 3년(404) 3월, 오보지가 먼저 강승(江乘)에서 유유의 군대와 만나 전투를 벌였다. 오보지는 타고난 맹장으로 그가 이끄는 병사들 역시 하나같이 기세가 날카로웠으나, 대장인 유유가 직접 선두에 서서 긴 칼을 뽑고 적군을 풀 베 듯이 쓸어버리자, 유유의 병사들도 사기가 크게 올라 힘껏 싸운 끝에 적군을 격멸시킬 수 있었다. 유유는 오보지를 그 자리에서 즉시 참수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나락교(羅落橋)에 이르렀다. 그때 황보부도 수천 명의 병력과 나락교에 도착해 유유의 장수 단빙지를 죽이는 활약을 했지만, 유유에게 달려들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두 장수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들은 환현은 두려움에 떨며, 도사들을 불러모아 앞날을 묻고 유유를 저주하게 했다. 그리고 대신들을 불러모아 물었다.
"짐이 패했는가?"
조정지(曹靖之)가 답했다.
"귀신이 분노하고 사람들이 원망하는데,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환현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원망하고, 귀신이 분노한 것이냐?"
조정지가 답했다.
"진나라의 종묘를 함부로 옮겨 민심이 떠난 것이고, 대초(大楚)의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 조상신이 분노한 것입니다."
환현이 물었다.
"경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간언하지 않았는가?"
조정지가 다시 답했다.
"수레에 올라 지금이 요순의 시대라 지껄이는 자들만 가까이 두시니, 신이 어찌 감히 그 앞에서 간언하겠습니까!"
환현은 조정지로부터 쓴 소리를 듣고 더더욱 두려움이 깊어져, 신안왕 환겸, 유격장군 하담지(何澹之)를 보내 동릉(東陵)에 주둔시키고, 후장군 변범지를 복주산(覆舟山) 서쪽에 주둔시키니, 그 무리가 도합 20,000이었다. 다음 날, 유유가 복주산 동쪽으로 진군해, 병사들 중 허약하거나 늙은 이들을 골라 깃발을 들게 하고, 복주산을 오르게 했다. 복주산 위로 올라간 유유의 병사들이 산 위에 기치(旗幟)를 늘어놓고 이를 의병(疑兵)으로 삼자, 마치 병사들이 산과 골짜기를 빼곡히 메운 것처럼 보였다. 정찰병이 이 광경을 보고 돌아와, 환현에게 적의 수를 알 수 없다 보고하니, 환현은 더욱 근심하며 무위장군 유이지(庾頤之)에게 정예병을 주고 환겸과 변범지를 돕게 했다.

당시 환겸 등이 이끌던 병력은 원래 북부병 소속의 병사들로 유유와 싸울 마음이 아예 없었다. 유유와 유의가 부대를 여러 개로 나누고, 마침내 공격을 개시해 환겸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유유가 이번에도 앞장서서 싸우자, 그의 장수와 병사들 역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일당백을 자랑했다. 유유군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고, 때마침 부는 북동풍을 이용해 환겸의 진영에 불까지 놓으니, 화염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으면서 환겸의 초군은 혼란에 빠져 일시에 무너졌다. 환겸의 패전 소식을 들은 환현은 자신의 측근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액문(南掖門)으로 건강성을 빠져 나왔다. 참군 호번(胡藩)이 우연히 도망치는 환현과 마주치자, 환현의 말고삐를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 우림군(羽林軍)[6]의 사수는 여전히 800명인데, 모두 의리가 있는 옛 친구들이고, 서쪽 사람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은혜를 받았는데 내몰아서 한 번 싸우게 하지도 아니하고 하루아침에 이곳을 버리시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그러나 환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말채찍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 뒤에[7] 호번을 뿌리치고 석두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중문이 미리 준비해둔 배에 올라, 장강을 타고 남쪽을 향해 달아났다. 환현은 이때 하루종일 굶어서 주변 사람들이 거친 밥을 올렸는데, 환현은 이를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아들 환승이 가슴을 안아 어루만지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한편, 유유는 환현이 버리고 간 건강성을 차지해, 초나라의 신주를 불사르고 진나라의 신주를 새로 만들어 태묘에 들였다.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건강에 남아있던 환권(桓權), 환홍(桓洪) 등 환현의 친척들은 전부 유유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유유는 유의, 유도규, 하무기를 파견해 도망친 환현을 계속 추격하게 하고, 상서 왕하를 보내 심양에 유폐된 안제 사마덕종을 다시 건강으로 모셔오게 했다. 하지만 환현이 먼저 심양에 도착해, 강주자사 곽창지로부터 군수품과 병력 지원을 받고, 평고왕 사마덕종을 강제로 데리고 강릉으로 도주했다.

2.10. 반격 실패

원흥 3년(404) 4월, 환현의 무리가 강릉에 도착하자, 형주자사 환석강이 그를 받아들였다. 환현은 강릉 남성(南城)에 장막으로 집을 지어 거처로 삼고 백관들을 두었다. 또, 군대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하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병력은 다시 20,000으로 회복했고 누선과 병기는 제법 강성해졌다. 그러나 환현은 자신이 유유에게 패주한 이후로 위엄이 서지 않을 것을 염려해, 이전보다 형벌을 늘리고 더욱 엄격히 집행하자, 따르던 이들 중 여럿이 원망하면서 무리에서 이탈했다. 이에 은중문이 간했다.
"폐하께선 영예(英譽)를 적게 뿌리셨음에도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복종해왔고, 형옹(荊雍)을 평정함으로써 팔방에 그 명성을 날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천하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셨는데, 한 번 무너진 것만으로 위엄이 부족해지진 않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황제의 은혜를 바라고 있으니, 마땅히 인덕으로 다스려 민심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환현이 화를 내며 말했다.
"한고제위무제도 여러 장수들을 거느려 싸웠음에도 우연히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지금 천문이 불리한 마당에 우리 초나라의 도읍을 되찾기 위해서는 함부로 선동하거나 시비를 일으키는 자는 마땅히 규탄해야 할 뿐, 은혜를 베풀어서는 아니 된다! "
이후 유격장군 하담지, 무위장군 유치조(庾稚祖), 강하태수 환도공(桓道恭) 등에게 수천 병력을 주고, 강주자사 곽창지, 장수 곽전과 함께 분구(湓口)를 지키도록 했다. 또, 보국장군 환진(桓珍)을 파견해 의양(義陽)에서 병사를 모으고, 익양(弋陽)에 주둔하게 했다.

하무기, 유도규의 군대가 분구 동북쪽 상낙주(桑落洲)에 이르니, 하담지가 먼저 수군을 이끌고 나와 싸움을 걸었다. 하담지는 항상 자신의 누선에 깃발과 우의(羽儀)를 성대하게 꽂아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하무기가 그 깃발과 우의만 탈취해 적장을 사로잡았다 외치자, 초나라 수군은 놀라 크게 흔들렸지만 하무기의 병사들은 역시 그럴 것이라 믿고 기세 좋게 진격해 하담지의 군대를 대파했다. 하무기와 유도규는 승세를 타고 심양까지 점령하면서 강주를 장악해 버렸다. 익양에 있던 환진도 유유의 용양장군 호화(胡譁)에게 격파당해 군대를 잃고 단기로 도주했다.

보내는 군대마다 족족 패배해 돌아오니, 환현은 결국 친정을 결심했다. 그는 양주자사 부굉을 선봉으로 삼아 강릉에서 주함 200대를 끌고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유유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자 사마덕종도 강제로 끌고 갔다. 그리고 파양태수 서방(徐放)을 건강으로 보내 유유에게 항복을 권하게 했지만, 이미 환현이 패배했음을 직감한 서방은 유유에게 가지도 않고 하무기에게 투항했다.

원흥 3년(404) 5월, 유유가 제갈장민을 산양(山陽)에 진수시키고, 유의, 유도규, 하무기, 맹회옥에게 서쪽에서 내려오는 환현을 막으라 명했다. 유의 등은 쟁영주(崢嶸洲)에서 환현의 군대를 만났으나, 자신들의 병력이 10,000 미만인 데에 반해 환현의 병력은 수만에 달하는 것을 보고 다시 심양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유도규가 반대하며 부대를 이끌고 환현군을 향해 돌진하니, 유의 등도 하는 수 없이 유도규의 뒤를 따랐다. 환현은 항상 패배에 대비해 빠른 배를 자신의 함선 옆에 두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부하들은 제대로 싸울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때 유도규, 유의 등이 갑자기 들이닥쳐 배에 불을 지르고, 정예병을 앞장세워 공격해오자 환현군은 빠르게 무너졌다. 환현은 그 날 밤까지 싸우다가 치중이 모두 불에 탄 것을 보고 달아났으며, 환현의 전장군 곽전은 유의에게 항복했다. 그 무렵에 환현의 장수 유통(劉統)과 풍치(馮稚) 등이 잔당 400명을 모아 심양성을 습격해 깨뜨렸으나, 유의가 보낸 건위장군 유회숙에 의해 금방 토벌당했다.

2.11. 최후

원흥 3년(404년) 6월, 쟁영주 전투에서 패배한 환현은 사마덕종과 안희황후, 목장황후를 끼고, 파릉(巴陵)으로 도망쳤다. 은중문도 환현과 같은 배에 올랐지만, 더이상 환현에게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따로 배를 구해, 두 황후를 모시고 건강으로 달아나 유유에게 투항했다. 파릉에서 나와 다시 강릉에 무사히 입성한 환현은 더이상 싸울 마음을 잃어버리고, 유유를 피해 형 환희(桓希)가 지키고 있는 한중(漢中)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옹주자사 풍해가 다시 내려가 싸우자 권했지만 환현이 따르지 않으니, 부하들도 크게 실망해 환현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밤, 강릉성 안의 혼란이 가중되자 환현은 심복 100여 명과 말을 타고 서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환현을 노리고 공격했지만, 워낙 캄캄한 탓에 환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살해당했다. 환현 일행은 크게 놀라 서로를 의심하며 죽이기 시작하니, 사방에서 시체가 널부러졌다. 환현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배에 올랐는데, 좌우는 이미 흩어졌고 변범지 등 소수의 측근만이 곁을 지켰다. 그렇게 배를 타고 한중으로 이동하던 환현은 익주자사 모거의 조카 모수지의 제안에 따라 촉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초 환현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모거는 동생인 영주자사 모번이 사망하자, 조카 모우지와 장수 비념에게 그의 관을 강릉으로 호송하게 했다. 강릉으로 향하던 모우지 등은 우연히 매회주에서 촉으로 진입하려는 환현의 무리와 마주쳐, 그들을 알아보고는 곧바로 화살을 퍼부었다. 그때 환현의 총신 정선기, 만개 등이 자신의 몸으로 환현을 덮어 대신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를 본 익주독호 풍천이 칼을 뽑고 환현을 치기 위해 달려들자, 환현은 옥도(玉導)[8]를 빼어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천자를 죽이려고 하느냐!"
이에 풍천이 대답했다.
"나는 천자를 죽이는 도적놈일 뿐이다!"
그러고는 환현을 참수했다. 향년 36세. 불과 재위 6개월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현을 따라 도망치던 환석강, 환준, 등도 모조리 참수되었고, 유이지는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환현의 6살배기 아들 환승은 모우지에게 붙잡혀 끌려갈 때,
"나는 예장왕이니, 그대들은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라며 애원하였으나, 모우지 등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강릉 저자에서 환승을 처형해 버렸다.

유의는 환현의 수급을 인도받아 유유에게 보냈고, 유유는 그것을 건강성 대항(大桁)에 효수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다. 백성들은 환현의 목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훗날 환진에 의해 무도황제(武悼皇帝)로 추존되었다.[9]

3. 평가

사실 환현은 정치적 역량이 상당히 딸리는 인물이었다. 환현의 경우, 수도인 건강 일대의 양주 군벌들에 대한 장악이 허술했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이를 《삼국지》로 비유하자면 관구검제갈탄 등의 세력이 버젓이 있는데 이들을 내버려두고 사마사, 사마소가 무리하게 찬탈해서 군벌 세력에게 빌미를 줘, 반사마사 대연합을 만들어놓은 격이었다.

아버지 환온이라면 몰라도 아들인 환현은 사마사, 사마소는커녕 사마염과 비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치력과 교양이 함량 미달이었고, 당연히 평판도 좋지 못했다. 환현의 군재는 사마사보다 크게 모자라지는 않았지만, 사마사의 정치적 술수는 환온도 넘지 못할 정도로 환현을 훨씬 능가했다.

그러나 사실 환현의 입장에서 사마염이나 조비에 본인을 비유하면 상당히 억울할 수도 있다. 환현은 아버지 환온이 직접 권력을 통째로 물려줘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환온이 닦아놓은 세력이라곤 해도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어없게도 수많은 정적들을 숙청하면서 정작 가장 위험한 인물인 유유와 하무기의 무리를 제거하지 않았고, 이는 곧 환현 본인의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

다만 유유는 환현의 사촌동생인 환수에게 배속된 상태라 어느 정도 구속을 시킨 상태였고, 유유를 지지했던 유도규, 제갈장민이 환홍의 수하였으니, 저 비유가 완전하지는 못하다. 그런데 유유가 거병했을 때 환수와 환홍은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가 관광만 당하고, 요충지를 적에게 헌납해준 수준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즉, 환현 본인도 능력자라고 여겼던 유유를 저런 모자란 인물들에게 맡긴 것은 큰 무리였다. 그렇지 않다면 미리 군대에서 축출시켰어야 했는데 그런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유유를 배제해야 한다고 참모들과 아내가 환현에게 간언하고 있었으나, 북벌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찬탈 전에 유유를 시험해 보고는 이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때문에 환현에게 제거당한 유뢰지 휘하에서 틈을 엿보던 유유에게 당하고 말았다.

한 예로 소설인 《세설신어》의 내용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환현은 평소 사냥을 좋아해서 수십리에 걸쳐 몰이꾼을 풀었다. 이때 사냥감이 도망가는 일이 있으면 누구든 결박당해 끌려와야 했다. 그러자 환도공(위에 언급한 사촌동생 환수)은 항상 붉은 색 비단끈을 가지고 다녔다. 환현이 이유를 묻자 환도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공은 사람을 묶어 다니길 좋아하니, 나중에 제가 결박당할 때 끈 때문에 손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라고. 즉 환현을 비꼰 것이었다.

환현의 찬탈 이후 나중에 유유가 찬탈을 하게 되는데 그의 찬탈은 환현과 다른 면이 많았다. 아마도 환현의 찬탈에서 교휸을 얻은 듯한데 환현의 찬탈은 세 가지 교훈점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유유는 북벌의 성공으로 적어도 낙양까지는 확실히 먹어두었다. 또한 사마덕종을 아예 죽여버리고 사마덕문에게 떠넘겨 적어도 멀쩡한 황제에게 선양받는 모양새를 갖췄으며 나중에는 사마덕문을 죽여 혹시라도 사마덕문을 옹립하려는 제2의 유유를 막았다.

4. 기타

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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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자이자 베이징대학 저우이량 교수는 환현의 아명을 "영보(靈寶)"로 지은 점과 환현의 자에 "도(道)"자가 들어가는 점을 들어 환온이 남북조시대 유행하던 천사도를 숭배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2] 환현은 변범지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예전에 양부는 언제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도록 말렸었어. 이제 심복인 양부를 잃었고, 색원도 잃었다고. 그러니 무모하게 이런 당돌한 일을 함에 있어 하늘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아마도 환현을 따르는 무리에서도 동진 황위 찬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3] 사마덕종은 심각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보니 굳이 그로부터 직접 선양받는 방식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옥새를 비롯한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들을 손에 넣은 상태이기도 했고. 물론 그 덕택에 사마덕종은 환현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4] 중간에 잠시 영시에서 건시(建始)로 바꿨으나, 건시는 과거 조왕 사마륜이 사용했던 연호라는 지적을 받아 다시 영시로 고쳤다.[5] 유매는 비록 환현에게 모든 것을 일러 바치고 중안후(重安侯)에 봉해졌으나, 주안목을 도망치게 했다는 의심을 사 동료들이 처형당한 바로 다음 날 주살당했다.[6] 황제의 친위대이다.[7] 호삼성은 이 행동을 항우가 했던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다.'와 같은 의미라고 해석했다.[8] 옥으로 된 머리꽂이로,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관책 속에 넣는 도구이다.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장식품이었다.[9] 참고로 환현을 촉 땅으로 유인한 모수지는 공이 있다 하여 효기장군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