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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9 22:47:01

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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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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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서진에 출사하다3. 장창의 난4. 두도의 난5. 광주로 좌천되다6. 남방에서의 통치7. 죽음

1. 개요

陶侃
259년 ~ 334년

동진의 인물이며 자는 사행(士行)으로 동진 말기의 유명한 시인인 도연명의 증조부다.

2. 서진에 출사하다

그의 집안은 오나라 출신으로 오나라가 망하면서 여강의 심양(尋陽)에 이주해 살았는데,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집이 가난해 어머니 담씨는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아 술과 안주로 바꿔 생활에 보탰다. 군독우가 되어 장사태수 만사가 여강을 지나다가 도간을 보고 특이하게 생각해 아들에게 도간과 친구가 되라고 했다.

도간이 어량을 관리하는 관리로 있다가 젓갈 단지를 어머니에게 보냈는데, 어머니는 이를 돌려주면서 관리가 되어 물건을 보내는 것은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근심을 더하게 만든다는 질책을 들었다. 범규의 천거로 여강태수 장기 휘하에서 주부를 지내다가 효렴에 천거되었으며, 낙양에서 손수의 사인을 지냈고 장화, 양탁, 고영 등의 칭찬을 받아 이름이 알려졌다.

3. 장창의 난

남만장사를 지내다가 303년에 장창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6월에 유홍으로부터 대도호에 임명되었으며, 장창을 경릉에서 공격했고 305년에 진민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간은 진민과 같은 군 출신이고 같은 해에 관리로 천거된 지라 도간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는 말이 나왔다. 이에 도간은 아들 도홍, 조카 도진 등을 유홍에게 인질로 보내자 유홍은 그들을 돌려보냈다.

유홍의 천거로 강하태수가 되었고 진민의 부하 진회가 무창을 공격하자 전봉독호에 임명되었으며, 곡물운반선을 전함으로 만들어 무창으로 가서 진회와 여러 차례 싸워 격파했다.

4. 두도의 난

양무장군이 되었다가 311년에는 무창태수가 되었고 같은 해에 두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참전해 313년에 주의가 심수성에서 어려움을 겪자 주사를 보내 구원하게 했으며, 도간이 무창으로 갈 것으로 짐작해 무창에서 기다려서 주사와 함께 두도를 격파했다. 이 때의 공으로 형주자사가 되었다가 참군 왕공을 시켜 왕돈에게 공을 보고하게 했는데, 왕공이 도간의 명령을 고쳐 두증을 전봉대도독으로 삼아 왕충을 토벌했지만 명령을 고친 일로 죄를 얻을까봐 왕공, 두증의 공격을 받아 겨울 10월에 대패해 몸만 죽음을 면했다.

왕돈이 표문을 올려 백의를 입고 직무를 관장하다가 심양태수 주방 등을 이끌고 두도를 격파해 왕돈이 표문을 올려 벼슬을 회복했다. 314년에 두도의 부하 왕진이 임장에서 공격하자 섭중으로 달아났다가 주방의 구원을 받아 왕진을 격파했다. 315년에 두도에게 항복한 왕공을 설득해 투항시키고 남평태수 응첨과 함께 장사를 함락해 상주를 평정했다.

5. 광주로 좌천되다

두증을 가벼이 여겨 사마 노념이 전투에서는 장수를 살펴야 한다면서 사군의 제장 가운데 두증을 따라갈 사람이 없어 쉽게 압박할 수 없을 것이라 했지만 무시하고 석성에서 두증을 포위했다가 기습을 받고 격파당해 수백 명이 죽었다. 전봉이 공로를 질투해 모함을 받아 광주자사로 좌천되었고 두홍, 왕기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두홍을 격파하고 소계에서 유침을 붙잡았으며, 독호 허고를 시켜 왕기를 진압했고 편지를 보내 온소를 달아나게 만들어 시흥에서 온소를 붙잡았고 두홍이 왕돈에게 항복해 광주가 평정되었다

도간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아침마다 100장의 벽돌을 재실 밖으로 운반했다가 저녁에는 다시 재실 안으로 옮겼는데, 어떤 이가 이유를 묻자 자신은 중원에다 힘을 쏟아야 하는데 지나치게 안일하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그런 연고로 스스로를 수고롭게 한다고 했다.

6. 남방에서의 통치

318년에 도독교주제군사가 되었고 322년에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자 참전했고 영강주자사에 임명되었으며, 상주자사에 임명되었다가 광주자사, 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양석이 교주를 점거하자 교주자사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고 정남대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

325년 5월에 정서대장군, 도독형상옹양사주제군사, 형주자사가 돠고 형주의 남녀는 이를 축하했으며, 도간의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하면서 공손하고 부지런해 온종일 다리를 오므리고 꼿꼿하게 앉아서 대장군부의 여러 일을 살피는데 빠짐없이 정리해 조금도 한가한 틈이 없었다. 여러 보좌하는 사람들 중에 농담하면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술잔과 도박기구를 가져오도록 해 모두 강물에 던졌다.

먹을 것을 바치는 사람들 중에 양이 적더라도 힘들여 얻은 것이라면 위로하면서 그 세 배를 내렸으며, 이치에 맞지 않게 얻으면 절실하고 엄하게 욕하면서 먹을 것을 돌려보냈다. 어떤 사람이 덜 익은 벼를 가진 것을 보고 물었다가 그 사람이 길을 지나오다가 보여서 그냥 그것을 뜯었다고 하자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놀이 삼아 다른 사람의 벼를 훔쳤다면서 채찍으로 매질을 했다.

이리하여 백성들이 농사짓는 일에 부지런하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풍족하게 되었으며, 배를 만들 때 거기에서 떨어지는 나무 조각, 대나무 쪼가리가 있자 이를 기록해 관리하게 하니 사람들은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후에 정월 모임에서 눈이 쌓이도록 오다가 처음으로 개이자 청사 앞이 남은 눈으로 습기가 차 있자 마침내 그 나무 부스러기를 땅에 깔게 했으며, 훗날 환온이 촉을 정벌할 때 도간이 저장해놓은 대나무 쪼가리로 대나무 못을 만들어 배를 처리했고 도간이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주 자세하고 세밀한 것이 이와 같았다.

도간은 영주자사 왕견이 이민족을 막을 수 없다고 표문을 올려 왕견 대신 윤봉으로 교체되어 윤봉이 만족의 우두머리 찬량, 이적 등을 이겼다. 327년에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자 참전해 수군을 지휘했으며, 329년에 소준을 평정한 공으로 시중, 태위가 되고 장사군공에 책봉되면서 도독교광영주제군사가 덧붙여졌다. 330년에는 곽묵의 반란도 진압했다.

7. 죽음

이후 도간은 여러 차례 봉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가 보좌하는 관리들이 그를 만류했다가 병이 위독해지자 물러났으며, 334년 3월 13일에 번계에서 죽었다.

도간은 군대에는 41년간 있었고 밝고 결단을 잘 내렸으며, 섬세하고 비밀스러운 것을 잘 살폈으므로 다른 사람이 속일 수가 없었다. 남릉에서 백제에 이르기까지 수 천 리에 이르렀는데, 길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