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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1:07:06

성공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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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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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成公簡
(? ~ 311)

서진의 학자이며 자는 종서(宗舒)로 연주 동군 백마현 출신. 그의 집안은 대대로 태수직에 머물렀으나 성공간은 문관으로서 인정받아 중앙에서 출세했다.

2. 생애

천성이 소박하고 부귀영화에 뜻을 두지 않으며, 기억력이 매우 좋있다고 한다. 장화는 성공간에 대해, "맑고 침착함은 양웅에 비견되며, 묵식함은 장안세와 맞먹을 것이다."라 평했다.

친구 주복(周馥)과 함께 청주의 명사로서 이름을 떨치니, 관직에 천거되어 중서시랑을 지냈다. 성공간은 항상 주복의 재주가 자신보다 못하다 여겼음에도, 당시 주복이 사예교위와 진동장군을 역임하니 성공간보다 지위가 높았다. 이에 성공간이 주복에게 말했다.
"양웅은 3대에 걸쳐 낭에 머물렀던 반면, 왕망동헌은 삼사에 올랐는데, 지금도 예전과 다를 바 없구나."
주복은 그 뜻을 파악하고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이후 성공간은 차근차근 승진하여 관직이 태자중서자,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구희(苟晞)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러나 311년, 구희가 석륵을 배반하고 낭야왕 사마예에게 투항하려다 걸려 주살될 때 성공간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