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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7 15:07:33

모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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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임시 제3대 말대
성무제 혜민제 창려왕 소무제 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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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부 慕容部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막호발 모용목연 모용섭귀 무선제 문명제
전연 前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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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제 경소제 헌무제
서연 西燕 후연 後燕
초대 제2대 초대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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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제3대 임시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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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제5대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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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혼 吐谷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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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혼 토연 쇄해 엽연 시연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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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연 섭인 도이후 부연수 과여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세부 부윤 낙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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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a2c8><colcolor=#000>
후연 제3대 황제
중종 소무제 | 中宗 昭武帝
출생 373년
전진 경조군 장안현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401년 9월 13일 (향년 28세)
후연 화룡성
(現 랴오닝성 차오양시)
능묘 흥평릉(興平陵)
재위기간 제3대 황제
398년 10월 ~ 401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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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a2c8><colcolor=#000> 성씨 모용(慕容)
성(盛)
부모 부황 열종
모후 정씨
형제자매 8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황후 난씨
자녀 1남
도운(道雲)
작호 장락군공(長樂郡公) → 장락왕(長樂王)
묘호 중종(中宗)
시호 소무황제(昭武皇帝)
연호 건평(建平, 398년 ~ 399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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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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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後燕)의 제3대 황제.

휘는 성(盛), 자는 도운(道運)으로 묘호는 중종, 시호는 소무황제(昭武皇帝)였다.

제2대 열종 혜민제 모용보의 서장자로,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민첩하며 모략을 꾸미는 데 능하다는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북위가 성장함에 따라 후연의 판도는 요서로 축소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내분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는데, 모용성은 정권을 찬탈한 난한을 타도하여 모용씨의 몰락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공포정치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단기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입은 부상으로 붕어했다.

2. 생애

385년, 서연의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고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가 성 내에서 반기를 들자, 전진의 세조 선소제 부견은 장안성 내에 있는 모용씨 가문 사람들의 대부분을 학살했다. 이때 모용성은 성을 탈출해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당숙이 되는 위황제 모용충(慕容沖)이 다스리는 서연으로 도주했다. 1년 뒤 서연을 나와 후연으로 향했고, 387년 후연에 도착한 그는 장락왕(長樂王)에 임명되었다.

398년, 단속골의 난이 일어나자 후연의 황제였던 아버지 모용보와 함께 각지를 떠돌았는데, 아버지가 정서 난한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반대하다가 설득시키지 못하자 자신의 세력과 함께 이탈했다. 얼마 후 난한이 부황 모용보의 목숨을 빼앗자,(난한의 난)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고 충성하는 척을 했다. 마침 난한은 모용성의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모용성은 난한의 형들과 난한의 사이를 계속 이간질시켰고, 은밀히 모용기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했다. 결국 모용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난한의 형 난제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난한의 아들 난목이 난제의 반란을 진압하자 모용성은 그의 목숨을 빼앗았고, 군대를 시켜 난한과 그 일족을 싸그리 죽이고는 정권을 잡았다.

이후 모용성은 난한이 요동공으로 삼은 숙부 모용희를 다시 하간공으로 되돌리고[1] 시중·거기장군·중령군·사예교위로 삼았다.

모용성은 398년 10월에 비로소 황제로 즉위했다가 399년에 '서인천왕'(庶人天王)이란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했고 급속도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권력 강화는 큰 후유증을 낳게 되니 바로 연이은 숙청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 모용성은 작은 혐의가 있어도 잡아들이거나, 심지어 취조도 없이 사건을 판결할 정도로 냉혹하게 숙청을 실행하여 악명을 떨쳤다. 이에 신하들의 반발이 날로 커져서, 급기야 401년에 전장군 단기가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모용성은 단기의 난을 진압하다가 패잔병들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게 되었고, 후유증 때문에 결국 붕어하고 말았다.

3. 평가

두 차례나 목숨을 건지며, 반란으로 끝장날 뻔한 모용씨 가문을 구해내고, 원수인 난한을 제거할 만큼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결국 공포정치로 몰락했다.

4.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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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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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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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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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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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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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용성이 처음 정권을 잡으면서 황제로 즉위하길 거부하고, 여전히 장락왕의 호칭을 유지했으므로 종실의 다른 왕들을 낮추어 공으로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