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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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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의 반란자
모용린 | 慕容麟
시호 없음
작위 조왕(趙王)
모용(慕容)
(麟)
불명
생몰 ? ~ 398년 1월
출신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부황 세조
아들 모용근(慕容根)
국적 후연남연
연호 연평(延平, 39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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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의 황족.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막내아들. 생모는 모용수의 여러 희첩들 중 하나라 그 성씨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혜민제 모용보의 서동생.

2. 생애

건희 10년(369년) 11월, 태부 모용평과 헌무제 모용위의 모후 가족혼 태후는 오왕 모용수를 미워하여 서로 그를 제거하기 위한 모의를 하였다. 모용수는 역시 이를 알고 걱정하다가 세자 모용령의 계책에 따라 용성(龍城)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조정에 대륙(大陸)에서 사냥하겠다 보고하고 성을 빠져나왔다. 모용수가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무렵, 평소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모용린은 배반하여 모용수의 계책을 조정에 죄다 일러바쳤고, 모용평은 헌무제 모용위에게 아뢴 뒤 서평공 모용강(慕容强)에게 정예기병으로 뒤를 쫓게 하여 범양(范陽)에서 모용수를 따라잡았으나, 모용령의 활약으로 그를 사로잡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모용수는 결국 연나라에서 도망쳐 정처 단씨, 모용령, 모용보 등 가족들을 데리고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건희 11년(370년) 5월,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계략에 넘어가 연나라로 다시 돌아왔던 모용령은 헌무제 모용위의 의심을 사고 사성(沙城)으로 유배되었는데, 객지였던 사성에는 그처럼 유배당한 병사들이 많아 모용령은 이들의 마음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령이 위덕성(威德城)을 함락시키고 세력을 떨치면서 장차 발해왕 모용량(慕容亮)이 지키고 있는 용성을 습격하려던 중에 모용린이 또다시 도망쳐 모용량에게 전부 일러바쳤다. 이에 모용량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키며 대비하였고, 기존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모용령에게 항복했던 사성성대 섭규(涉圭)가 배신하여 모용령을 죽였다.

건원 6년(370년) 11월, 전연이 멸망한 후, 모용수는 그동안 모용린이 번번이 일러바친 일을 알고 분노하여 모용린의 생모를 살해하였으나, 차마 자신의 아들인 모용린은 죽이지 못해 살려두는 대신에 외딴 곳으로 보내 드물게 만났다.

건원 19년(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망한 이후 곳곳에서 이민족들이 들고 일어나자, 모용수는 천왕 부견의 허락을 받아 반란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하북으로 가서 자립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모용린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려 모용수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장락공 부비가 감시역으로 붙였던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 제거할 때에도 상당한 공을 세우니, 모용수는 비로소 모용린을 기이하다 여기고 여러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총애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정월, 모용수가 연왕(燕王)을 자칭하여 후연을 건국하고, 모용린을 무군대장군으로 삼았다.

연원 원년(384년) 4월, 연왕 모용수가 전장군•낙랑왕 모용온(慕容溫)으로 하여금 여러 군대를 이끌고 신도(信都)를 치게 하였으나, 전진의 기주(冀州) 자사•부성후 부정(苻定)이 굳게 지켜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모용수는 모용린을 보내 모용온을 돕게 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5월, 부정이 신도를 들어 후연에 투항하였다. 모용린은 이어서 군사를 이끌고 상산(常山)을 공격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6월, 상산이 함락되었고, 상산을 지키던 전진의 부량(苻亮), 중합후 부모(苻謨)가 모두 항복하였다. 모용린은 나아가 중산(中山)을 공격해 포위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7월, 중산까지 떨어뜨리고, 전진의 고안후 부감(苻鑑)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용린은 그대로 중산에 주둔하였고, 연이은 승리로 그 위명을 하북에서 크게 떨쳤다.

연원 원년(384년) 12월, 이미 표기대장군 모용농에게 한번 패해 무극(無極)에서 궁지에 몰려있던 정령족 적요(翟遙)를 모용농과 협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적요는 무극을 버리고 단기로 사촌동생 적진(翟眞)이 주둔하고 있는 승영(承營)으로 도주하였다.

연원 2년(385년) 정월, 모용농과 모용린이 적진을 쳐 승영의 외성을 점령하였다.

연원 2년(385년) 3월, 연왕 모용수는 업 공성전을 시작한지 어느덧 1년여 정도 지났음에도 전진의 장락공 부비가 굳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모용수는 일단 기주부터 평정하기 위해 모용린을 신도(信都)에 주둔시키고, 모용농을 불러 자신을 대신해 업을 계속 공략하게 하였다.

연원 2년(385년) 8월, 장락공 부비가 업을 포기한 채 서쪽으로 도망가 진양(晉陽)에서 황제로 즉위하니, 노왕 모용화(慕容和)가 모용수의 명령을 받고 비어있는 업성을 접수하였다. 마침 연왕 모용수도 행당(行唐)에서 정령족을 완전히 진압하면서 후연은 하북의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이때 모용린은 모용수의 명을 받들어 발해(渤海)를 공격해 전진의 발해태수 봉의를 사로잡고, 다시 신도로 돌아와 역구(歷口)에 주둔하였다.

연원 2년(385년) 11월, 역막(繹幕) 사람 채광(蔡匡)이 거병하여 보루를 점령하자, 모용린은 관군대장군 모용륭과 함께 채광을 토벌하였다. 동진의 태산(太山) 태수 임태(任泰)는 채광을 돕기 위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몰래 채광의 보루와 8리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이를 알아차린 모용륭이 잠시 보루의 포위를 풀어 임태를 대파하고 동진군 1,000명을 참살하였다. 채광은 머지않아 투항하였지만, 모용수는 그를 용서치 않아 참수하고 보루 안의 사람들도 모조리 도륙하였다.

연원 2년(385년) 12월, 고안후 부감이 배신해 전진의 평주(平州) 자사 왕연이 지키는 박릉(博陵)으로 도망치니, 모용린이 군대를 이끌고 박릉을 공격하였다. 이윽고 박릉성 내의 화살과 양식이 모두 떨어지자, 왕연의 공조 장의(張猗)가 성에서 나와 무리를 모으고 모용린에게 호응하였다. 그러나 왕연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이 함락되면서 왕연과 부감은 모두 모용린에게 살해당했다.

건흥 원년(386년) 4월,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린을 위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조왕(趙王)에 봉하였다.

건흥 원년(386년) 8월, 상서우복야•유대상서(留臺尚書)에 임명되었다. 당시 성무제 모용수는 수도 중산을 태자 모용보에게 맡기고, 범양왕 모용덕과 더불어 남쪽을 정벌하러 떠났는데, 그 소식을 들은 정령족 선우걸(鮮於乞)은 망도(望都)에 군영을 세우고, 인근 백성들을 약취하며 반란을 기도하였다. 이에 모용린은 노구(魯口)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선우걸을 안심시켰다가, 밤에 망도로 향하여 날이 밝아올 무렵에 선우걸의 군영을 습격해 선우걸을 사로잡았다.

건흥 원년(386년) 10월, 성무제 모용수의 명령을 받고, 북위의 원군으로 출전하여 탁발굴돌을 대파한 후 귀환하였다.

건흥 2년(387년) 7월, 북위의 군사와 힘을 합쳐 상곡(上谷)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민(王敏)을 토벌하고, 왕민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이때 흉노족 철불부유위진이 후연에 말을 바쳤는데, 독고부유현이 습격해 말들을 모두 약탈하였다. 성무제 모용수가 이를 듣고는 크게 노하여 태원왕 모용해를 파견해 이미 출정해있는 모용린의 군대와 합류케 하고 그대로 독고부를 정벌토록 하였다. 유현은 모용린과 모용해의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마읍(馬邑)의 서산(西山)으로 도망쳤으나, 이번에는 북위의 탁발규까지 가세하여 후연을 돕기 시작하였고, 결국 미택(彌澤)에서 따라잡혀 북위와 후연 연합군에게 또 패하였다. 유현은 서연모용영에게로 도망쳤고, 모용린은 유현의 무리와 말, 소, 양 등의 가축 수천여 마리를 모두 거두었다. 성무제 모용수는 유현의 동생 유가니(劉可泥)를 오환왕(烏桓王)으로 세워 독고부 무리를 위무하고, 그 8,000여 호를 도읍 중산에 옮겨 관리하였다.

건흥 3년(388년) 3월, 대군(代郡)을 점거하고 있는 허겸을 공격해 격파하였고, 허겸은 서연으로 도망쳤다. 성무제 모용수는 대군을 폐지하고 그 백성을 모두 용성으로 옮겼다.

건흥 3년(388년) 12월, 태원왕 모용해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합구(合口)로 나아가 장신(張申), 왕조(王祖)의 반란을 진압 중인 고양왕 모용륭과 합세하였다. 후연군이 장신부터 공격하자 왕조는 장신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보루의 병력을 이끌고 밤에 후연군을 공격하였으나, 모용린 등은 이를 간파하여 역으로 왕조를 쳐 패주시켰다. 모용륭은 모용해와 모용린을 남겨둔 뒤, 왕조를 추격해 날이 밝을 때 즈음에 다시 한번 격파하고 적병의 수급을 많이 노획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전날 전투에서 얻은 수급들을 보루에서도 볼 수 있도록 매달아 놓으니, 겁을 먹은 장신이 보루에서 나와 항복하였고, 왕조도 죄값을 받기를 청하며 귀순하였다.

건흥 4년(389년) 5월, 범양왕 모용덕과 함께 하란부하란눌을 정벌하여 물근산(勿根山)에 이르렀다. 절박해진 하란눌은 동생 하란염간을 인질로 보내 항복하였다.

건흥 5년(390년) 5월, 의신산(意辛山)에서 탁발규와 회합하고, 북위군을 도와 하란, 흘돌린(紇突鄰), 흘해(紇奚) 선비족 3부를 전부 격파하였다. 이에 흘돌린부와 흘해부가 북위에 복속되기를 청하였다.

건흥 6년(391년) 2월, 하란눌과 하란염간이 골육상쟁하니, 탁발규가 이 사실을 후연에 알리고 더불어 하란부를 평정하자 하였다.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린과 진북장군 난한을 파견해 각각 하란눌과 하란염간을 치게 하였다.

건흥 6년(391년) 6월, 적성(赤城)에서 하란눌을 격파하여 사로잡자, 그 부락 수만여 호가 투항하였다.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린에게 명해 투항한 하란눌의 부락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모용린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여 성무제 모용수를 알현하면서 말했다.
"소신이 보건대, 탁발규의 거동이 결국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므로, 그를 조정에 소환하여 곁에 두고 그의 아우에게 위나라의 국사(國事)를 감독케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모용수는 듣지 않았다.

건흥 10년(395년) 5월, 탁발규가 후연을 배반하여 국경을 어지럽히자,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린과 태자 모용보, 요서왕 모용농에게 80,000 군사를 주어 오원(五原)에서부터 북위를 정벌케 하고, 범양왕 모용덕과 진류왕 모용소에게는 따로 18,000 군사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로 벌어지는 전투가 바로 후연군이 대패한 참합피 전투로, 자세한 경위는 해당 문서 참조.

영강 원년(396년) 4월, 성무제 모용수가 붕어하고, 혜민제 모용보가 즉위하였다. 모용린에게는 상서좌복야 직책이 더해졌다.

모용보가 아직 태자이던 시절, 황후 단씨가 성무제 모용수에게 모용보와 모용린은 세상을 구원할 재능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며 현명한 요서왕 모용농이나 고양왕 모용륭을 태자로 세울 것을 간언한 일이 있었다. 모용보와 모용린은 이를 한스럽게 여겼기에, 황제로 즉위한 혜민제 모용보는 아직 아버지 모용수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모용린에게 명하여 황태후 단씨를 압박케 하였고, 이로 인해 단씨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혜민제 모용보는 황태후 단씨의 장례조차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중서령 휴수(眭邃)가 간하여 마지못해 장사를 지냈다.

영강 원년(396년) 8월, 혜민제 모용보는 아직 어린 아들 복양공 모용책(慕容策)을 제일 총애하였는데, 모용회를 태자로 삼으라는 성무제 모용수의 유언 때문에 차마 태자로 책봉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평소 모용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모용보의 서장남인 장락공 모용성은 모용린과 합동하여 복양공 모용책을 태자로 삼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모용보는 이들의 말에 넘어가 모용책을 태자로 세우고 말았다. 그렇다고 모용책이 총명했던 것은 아니라서 모용회는 내심 무척 분노하고 원망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9월, 북위의 탁발규가 쳐들어와 모용농을 격파하고 병주(幷州)를 장악하자, 혜민제 모용보는 동당(東堂)에서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였다. 이때 모용린이 말했다.
"위나라 군대는 지금 연전연승으로 기세를 올려 정면 승부로는 그 예봉을 꺾을 방도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산을 완벽하게 지키며 그들이 피폐해져 허실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모용보는 모용린의 의견을 수용하여 곡식을 쌓아 지구전을 준비하였고, 군사(軍事)에 관한 것은 모용린에게 일임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11월, 탁발규의 대군이 중산에 도착하여 공성을 하자, 고양왕 모용륭이 중산의 외성 남쪽 성벽에서 아침부터 오후까지 힘껏 싸워 북위군을 막아냈다. 탁발규는 중산의 수비가 견고한 것을 보고는 모용보가 출전하지 않으리라 여겨 중산을 뒤로 한 채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영강 2년(397년) 정월, 탁발규가 신도(信都)를 공격해 떨어뜨렸고, 신도를 지키던 의도왕 모용봉은 성벽을 넘어 중산으로 도망쳤다. 그제서야 탁발규가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알게 된 혜민제 모용보는 성에서 나와 심택(深澤)에 주둔하고, 모용린을 파견해 포음(蒲陰)을 공격케 하였다. 모용린은 포음의 양성(揚城)을 쳐 북위의 수비군 300여 명을 죽이고 돌아갔다.

영강 2년(397년) 2월, 혜민제 모용보가 중산에서 나왔다는 보고를 들은 탁발규가 군대를 다시 북으로 돌려 양성에 주둔하였다. 모용보는 탁발규를 질책한 뒤, 백사(柏肆)로 나아가 북위군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아군의 사기가 형편없는 것을 파악하고는 두려워 황급히 퇴각하다가 북위군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모용보가 백사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하자, 상서랑 모여호(慕輿護)가 모용보를 시해하고 모용린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여 탁발규에게 귀순하였다. 모여호가 꾸민 반란 때문에 모용린 본인도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영강 2년(397년) 3월, 탁발규가 다시 중산을 침공하자, 고양왕 모용륭이 성 밖으로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다. 혜민제 모용보도 이를 옳게 여겨 허하려 했지만, 모용린이 매번 반대하여 모용륭의 입을 막았고, 모용륭이 군대를 정돈할 때면 나타나 해산시켰다. 그러기를 4번이나 반복한 끝에 모용륭은 겨우 모용보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여 병사를 정비한 후, 여러 부장들에게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을 당부하면서 출진하려던 찰나, 모용린이 또 나타나 중단케 하니 병사들이 한스러워하며 분노하였다. 그러나 군사를 일임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모용린이었기에, 모용륭은 그저 울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모용륭의 군사 행동이 중단된 그 날 밤, 모용린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북지왕 모용정(慕容精)을 겁박하여 혜민제 모용보를 시해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용정은 충의를 중시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고, 모용린은 분노하여 모용정을 죽인 다음 서쪽으로 달아나 정령족의 잔당에게 의지하였다. 한편, 반란한 모용린이 어디로 도망간 건지 모르던 혜민제 모용보는 행여나 모용린이 계(薊)의 청하왕 모용회과 손잡고 용성을 점령해 반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모용륭과 모용농을 불러 중산성을 포기하고 용성을 지키는 계획에 대해 의논하였다. 모용륭이 용성으로 가는 것에 대한 장단점을 말하며 찬성하자, 모용보는 태자 모용책, 모용농, 모용륭, 모용성 등 가족과 주요 장수들을 전부 데리고 기병 10,000기와 함께 중산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쳤다. 중산성에 남겨진 낙랑왕 모용해, 중서시랑 한범(韓範), 태사령 유기(劉起) 등도 업(鄴)으로 달아났고, 하루밤만에 주인은 없어지고 성 동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본 중산성 백성들은 모두 황당해하였다. 당시 개봉공 모용상(慕容詳)은 혜민제 일행을 따라가려다 놓쳐, 다시 중산으로 돌아오고 성을 장악하여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다시 지켰다.

모용린이 우연하게도 혜민제 모용보의 무리와 정성(𨸦城)에서 만나니, 모용린은 경악하여 자신의 무리를 인솔해 황급히 포음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망도로 내려가 주둔하였다. 하지만 모용보는 모용린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갈 길을 갔으며, 오히려 중산의 모용상이 소식 듣고 별동대를 보내 모용린의 무리를 공격하였다. 모용린은 패주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영강 2년(397년) 7월, 모용상이 스스로 북위군을 물리칠 수 있다 자신하며 중산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모용상은 사치스럽고 음란하여 민심을 급격히 잃었고, 중산성의 사람들은 모두 조왕 모용린을 맞이할 마음을 품었다. 모용상이 보국장군 장양(張驤)에게 5,000 군사를 주어 세금을 걷게 하였는데, 모용린은 장양의 병사로 위장해 그 무리 속에 숨어들었고, 이내 중산성에 성공적으로 잠입하여 모용상을 잡아 참수하였다. 중산을 장악한 모용린은 스스로 존호를 올리고 개원하였다.

연평 원년(397년) 8월, 탁발규가 장손비에게 7,000명의 기병을 주어 중산을 습격하도록 명하였다. 장손비는 성의 외곽까지만 들어갔다가 돌아갔는데, 모용린이 보•기 4,000명을 이끌고 과수(泒水)에서 장손비를 추격하였다. 이에 장손비는 위창(魏昌)에서 모용린을 요격하여 무찌르고, 후연의 기병 200명을 사로잡았다.

연평 원년(397년) 9월, 중산의 기근이 심해지자, 모용린은 20,000여 병력을 이끌고 신시(新市)를 점거하였다.

연평 원년(397년) 10월, 탁발규가 친히 신시를 공격하니, 모용린은 도망치려 하였으나 고수(泒水)에서 진군이 막혔고, 의대(義臺)에서 결국 탁발규의 군대와 조우하여 대패하였다. 참수당한 병사만 9,000여 명에 달했고, 모용린은 기병 수십 기와 함께 전장을 빠져나와 처자식만 챙긴 뒤, 서쪽으로 달아나 업으로 들어갔다.

영강 2년(397년) 12월, 업에 도착한 모용린은 존호를 버리고, 범양왕 모용덕의 휘하로 들어가 다시 조왕을 칭하였다. 모용린은 북위의 기세가 강하므로 황하 이남의 활대(滑臺)로 내려가, 황하를 끼고서 북위군을 막고 힘을 기르자 주장하였다. 때마침 활대의 노양왕 모용화(慕容和)도 모용덕에게 사람을 보내 활대로 올 것을 청하니, 모용덕이 이를 받아들이고 업의 40,000호를 인솔해 활대로 향하였다.

영강 3년(398년) 정월, 모용린이 모용덕에게 황제로 즉위할 것을 권했으나, 모용덕은 모용수의 고사를 들어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백관을 두었다. 모용린은 사공•영 상서령에 임명되었지만, 남연이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모반을 획책하니, 모용덕이 그를 붙잡아 처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