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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농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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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4ba3><colcolor=#ece5b6>
요서환열왕(遼西桓烈王)
모용농 | 慕容農
시호 환열(桓烈)
작위 요서왕(遼西王)
모용(慕容)
(農)
도후(道厚)
아명 악노(惡奴)
생몰 ? ~ 398년 4월 7일
출신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부황 세조 성무황제
형제자매 10남 중 3남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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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의 황족.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셋째 아들이나, 애첩 소생의 서출이라 동생인 모용보에게 계승 순위가 밀렸다. 후연의 명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지만, 단속골(段速骨)이 반란 일으켰을 때 한순간의 잘못된 결단으로 목숨도 잃고 나라의 멸망을 앞당겼다.

2. 생애

모용농은 9살이 되었을 때 태사령 황홍에게 물었다.
"속설에 따르면, 삼성(參星)진성(辰星)이 서로 만나 각자 하루씩 머물 때에는 만인(萬人)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에 황홍이 답했다.
"과거 고신씨(髙辛氏)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백알(伯閼)과 차남인 실심(實沈)은 항상 방패와 창을 들어 서로를 정벌하며 세력을 다투었습니다. 이를 안 좋게 본 황제는 둘이 만나 싸우는 일을 줄이고자, 백알은 진성, 실심은 삼성을 각각 주관케 함으로써 서로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행성이 만날 때면 백알과 실심이 싸우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용농이 다시 물었다.
"사람들은 하늘에 정해져있는 별자리를 살펴 증오와 사랑을 만드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은 삼성과 진성에 대해 어떤 말을 하였습니까?"
황홍은 답을 내놓을 수 없었고, 이를 들은 아버지 모용수는 모용농의 총명함을 기특하게 여겼다.

건희 10년(369년) 11월, 정쟁으로 목숨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부인 단씨와 모용령, 모용보, 모용농 등 아들들을 데리고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진나라에 도착한 모용농은 어느 날 그 궁궐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 몰래 모용수에게 말했다.
"왕맹이 죽은 이래로 진나라의 법도가 날로 퇴폐해지고 있는데, 지금 또 사치를 가중하고 있어 장차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도참의 말대로 행해지면 응당 증명될 것이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영웅과 호걸들을 불러모으시고, 하늘의 뜻을 받드시어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용수가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일은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건원 19년(383년) 11월, 동진을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비수대전에서 대패한 천왕 부견은 낙양에 이르러 흩어진 패잔병을 수습하고 병장기를 갖추어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모용농이 모용수에게 말했다.
"존귀하신 분(모용수)께서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지 않으셨으니, 그 의로운 명성이 천지를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모용농이 들은 비기(秘記)에 의하면 연나라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하양(河陽)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열매가 덜 익었을 때 따는 것과 스스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늦어도 불과 열흘뿐이지만, 그 어려움과 쉬움, 그 상태의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큽니다."
모용수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면지(澠池)로 가, 천왕 부견을 알현해 하북을 진수하면서 연나라의 종묘를 반란군으로부터 지키겠다며 외지로 나가길 청하였다. 상서좌복야 권익이 반대하였지만, 부견은 듣지 않고 장수 이만(李蠻), 민량(閔亮), 윤고(尹固)와 3,000 병력을 모용수에게 주어 하북으로 보냈다.

건원 19년(383년) 12월, 업(鄴)을 진수하던 장락공 부비는 모용수를 내심 꺼려 모용수로 하여금 신안(新安)에서 반란 일으킨 정령족 적빈(翟斌) 토벌을 명하였다. 모용수는 모용농과 조카 모용해, 모용소를 업에 남겨두고, 부비가 감시역으로 붙여둔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과 함께 적빈을 토벌하러 떠났다.

부비룡을 성공적으로 암살하고 자립할 뜻을 품은 모용수는 황하를 건넌 다음, 참군 전산(田山)을 업으로 보내 모용농 등에게 군사를 일으켜 호응할 것을 명하였다. 전산이 모용농 등에게 이를 전달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모용농과 모용해는 일단 업성에서 가만히 하룻밤을 보냈고, 모용소만 먼저 부비의 준마 수백 필을 훔쳐 포지(蒲池)에서 모용농과 모용해를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모용농과 모용해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기병 수십 기를 인솔하여 열인(列人)으로 달아났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초하루, 장락공 부비는 신정을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성대하게 열고 수많은 빈객을 초대하였는데, 모용농 등만이 오지 않자 비로소 변고가 발생했음을 깨닫고 사방으로 사람을 파견해 그들의 행방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조사한지 3일만에 모용농 등이 열인으로 가서 거병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한편, 열인으로 달아난 모용농은 그곳의 오환족 노리(魯利)의 집에 머물렀는데, 노리가 음식을 주어도 모용농은 웃기만 할 뿐 먹지 않았다. 이에 노리가 자신의 아내에게 말했다.
"악노(惡奴: 모용농의 아명) 낭군[1] 같은 귀한 분께서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가난하여 먹을만한 음식을 내어줄 수 없으니 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노리의 아내가 답했다.
"낭군께서는 뛰어난 재주와 높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연고도 없이 찾아온 것은 필시 장차 다른 뜻이 있는 것이지, 음식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군(夫君)께서는 속히 먼 앞날을 내다보시고 비상시에 대비하십시오."
노리가 그 말을 따르자, 모용농이 노리에게 말했다.
"나는 병사를 모아 열인에서 흥복(興復)을 도모하고자 한다. 경은 나를 따르겠는가?"
노리가 답했다.
"죽고 사는 것은 오직 낭군을 따를 뿐입니다."
노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모용농은 이후 또다른 오환족인 장양(張驤)을 찾아가 유세하며 말했다.
"왕가(王家)에서 이미 대사(大事)를 일으켜, 적빈 등이 모두 추대하여 받들었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호응하였으므로, 내 일부로 그대를 찾아와 이렇게 고하는 것이오."
이에 장양은 재차 절하며 말했다.
"다시 옛 주인을 만나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목숨 바쳐 죽을 각오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리하여 열인을 장악한 모용농은 그 백성들을 병사로 삼고, 뽕나무와 느릅나무를 베어 무기를 만들었으며, 치마를 찢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추흉노족 도각부의 필총(畢聰)에게 보내 그 또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필총은 도각부의 복승(卜勝), 장연(張延), 이백(李白), 곽초(郭超)와 동이족[2] 여화(餘和), 칙발(敕勃)과 역양(易陽)의 오환족 유대(劉大)와 더불어 각기 수천 명을 이끌고 모용농에게로 갔다. 이에 모용농은 이들에게 임시로 관직을 내려, 장양을 보국장군, 유대를 안원장군, 노리를 건위장군으로 각각 삼았다.

어느정도 세력이 갖추어지자, 모용농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관도(館陶)를 공격하여 격파한 뒤, 그 군수물자와 병장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장수 난한, 조추, 단찬(叚讃), 모여희(慕輿悕)를 보내 강대(康臺)의 목장을 공격하여 말 수천 필을 약탈하였다. 이에 보병과 기병이 구름처럼 모여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장양 등은 합심하여 모용농을 사지절•도독하북제군사(都督河北諸軍事)•표기대장군으로 추대하였다. 모용농이 여러 장수들을 각기 감독하여 재능에 따라 알맞는 부서를 정하니 위아래가 숙연하였다. 모용농은 모용수가 아직 이르지 않아 감히 상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이때 조추가 모용농에게 권했다.
"군대에서 포상하지 않으면 병사들은 전쟁에 나서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오는 자들은 모두 한때의 공을 세워 만세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자들이니, 의당 승제하여 봉배함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넓혀야 합니다."
모용농이 이에 따라 상을 내리자, 더 많은 이들이 달려와 모용농의 군대에 합류하였고, 이를 들은 모용수는 오히려 모용농을 칭찬하며 기뻐하였다.

모용농이 서쪽으로 상당(上黨)의 고녹관위(庫傉官偉), 동쪽으로 동아(東阿)의 걸특귀(乞特歸), 북쪽으로 광열장군 평예(平叡)와 평예의 형 여양(汝陽)[3] 태수 평유(平幼)를 부르니, 고녹관위 등이 모두 이에 응하였다. 또, 난한 등을 보내 돈구(頓丘)를 공격해 뽑았다. 모용령의 호령이 엄정하여 그 군사들이 사사로이 노략질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업성의 장락공 부비는 전투 경험이 많고 노련한 효기장군 석월에게 보•기 10,000명을 주어 모용농을 토벌케 하였다. 석월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농이 말했다.
"석월은 지혜와 용기가 있는 인물로, 지금 남쪽에서 오는 대군을 막지 않고 여기 온 것은 왕(모용수)을 두려워하면서 나를 얕보는 것이다. 석월은 반드시 대비하지 않을 것이므로 만반의 대비를 하여 계책을 세운다면 그를 마땅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모용농의 부하들은 열인성(列人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모용농이 다시 말했다.
"병사를 잘 다루는 자는 병사의 마음을 결속시킬 뿐, 그것 이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의병을 일으켜 오로지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의당 산과 강을 성벽으로 삼아야지, 어찌 열인을 수리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같은 달 14일[4], 석월의 군대가 열인 서쪽에 이르자, 모용농은 장수 조추와 참군 기모등(綦母滕)을 보내 석월을 공격하고 그 선봉을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석월군의 기세는 크게 꺾이니, 참군 조겸(趙謙)이 모용농에게 말했다.
"석월의 갑옷과 무기는 정교하나 병사들의 마음이 위태롭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쉽게 무너뜨릴 수 있으니 속히 공격하심 좋습니다."
이에 모용농이 답했다.
"그들의 갑옷은 몸에 있으나 우리의 갑옷은 마음에 있다.[5] 대낮에 싸우면 병사들이 외형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니, 어두워질 때 공격하는 것이 필승의 계책이다. 군사들에게 엄히 준비시키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라."
이때 석월이 진영 둘레에 목책을 만들어 스스로를 굳게 지키려 하자, 모용농은 웃으며 장수들에게 말했다.
"석월의 병사는 정예하고 숫자가 많으나, 처음의 기세를 이용해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굳게 지키고자 하니, 나는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겠구나!"
이윽고 해가 지기 시작하니, 모용농은 북을 울려 성 서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출진 준비를 하였다. 아문 유목(劉木)이 먼저 모용농에게 나아가 석월의 진영을 공격하기를 청하자, 모용농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하는 법인데, 어찌 네 청만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의 용맹함이 가상하니 선봉을 맡기겠다."
이후 출진하게 되었을 때, 유목은 장사 400명과 함께 선봉에 서서 석월의 목책을 뛰어넘어 안으로 진입하였고, 석월의 군대는 이로써 큰 혼란에 빠져 금세 무너졌다. 모용농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군을 휘몰아 진격하니, 석월은 대패하여 그 군대가 전멸하였고, 석월은 모용농의 병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용농은 석월의 목을 베고, 그 수급을 아버지 모용수에게 바쳤다.

연원 원년(384년) 정월 26일[6], 군대를 거느리고 마침내 업성 인근에 이른 모용수는 '연원(燕元)'으로 개원하고 전연의 관리의 복색과 조정의 의례를 되살려 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농도 군세를 이끌고 업으로 와 합류하였고, 모용수는 모용농의 표기대장군 관직과 모용농이 그의 부하들에게 임시로 내린 관직들을 모두 정식으로 승인해주었다.

연원 원년(384년) 8월, 하남왕 적빈이 반란을 꾸미다 주살당하면서 한단(邯鄲)으로 도망친 그 조카 적진(翟真)이 한단에서 군사를 모아 부비와 안팎으로 후연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보와 모용륭의 협공을 받고 패해 다시 한단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적진이 다시 한단 북쪽으로 도망치자, 모용농은 태원왕 모용해와 함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해 하읍(下邑)에서 적진을 따라잡았다. 모용해는 즉시 적진과 싸우려 하였는데, 모용농이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지금 배고프고 지쳐있으며 또, 적의 진영에서 정장(丁壯)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매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용해는 이를 무시하고 진격해 싸웠다가 적진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적진은 성공적으로 후연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중산(中山)으로 달아나 승영(承營)에 주둔하였다.

같은 달 15일[7] 밤, 연왕 모용수가 업성의 포위를 풀고 신성(新城)으로 향하면서, 모용농(慕容農)을 파견하여 청하(清河)와 평원(平原)까지 순행하고 그 조세를 거두게 하였다. 모용농이 규율을 명확히 세워 재산의 유무에 따라 균등하게 세율을 조절하고, 군령을 엄격히 하여 어떠한 침해나 폭력도 없도록 하니, 곡물과 비단이 길을 따라서 이어져 군수물자가 풍족하게 공급되었다.

연원 원년(384년) 10월, 조군(趙郡) 사람 조속(趙粟) 등이 거병하여 백향(柏鄉)에서 전진의 양평(陽平) 태수 소흥(邵興)에게 호응하자, 연왕 모용수는 관군대장군 모용륭과 용양장군 장숭(張崇)을 보내 적들을 진압케 하고, 모용농에게도 청하의 병력을 인솔해 모용륭과 장숭의 군대를 돕게 하였다. 모용륭은 양국(襄國)에서 소흥을 대파하였고, 소흥은 도망치다가 광아(廣阿)에서 모용농과 조우하여 사로잡혔다. 소흥의 패배 소식을 들은 전진의 용종복야 광조는 서쪽 산을 따라 업으로 도망쳤으며, 모용륭과 모용농은 조속 등을 공격하여 기주(冀州)의 전진 세력을 모두 진압하였다. 이로써 전진과 후연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기주의 군현들이 전부 연나라에 다시 복종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11월, 모용농이 신도(信都)에서 북쪽으로 진격해 노구(魯口)에서 적진의 사촌형 적요(翟遙)를 무찔렀다. 적요가 패주하여 무극(無極)에 주둔하자, 모용농은 고성(蒿城)에 주둔해 적요를 압박하였다.

연원 원년(384년) 12월, 동생인 조왕 모용린과 함께 적요를 협격해 대파하였다. 적요는 무극을 버리고 단기로 사촌동생 적진이 있는 승영으로 도주하였다.

연원 2년(385년) 2월, 모용린과 중산(中山)에서 합류하여 함께 승영의 적진을 공격하러 향하였다. 모용농과 모용린이 수천 기병으로 먼저 도착하여 형세를 살피고 있으니, 적진은 후연군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는 곧바로 출전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어서 퇴각하자고 주장하자, 모용농이 말했다.
"정령족은 본래 사납고 용맹하나, 적진은 나약하다. 지금 정예병을 선발하여 적진이 있는 곳을 향해 돌격한다면, 적진은 도망갈 것이고 그 무리는 반드시 흩어질 것이다. 이때 황급히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들을 압박하면 가히 모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효기장군 모용국(慕容國)에게 정예 기병 100여 기로 적진을 영격케 하였다. 과연 적진은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무리는 성 안으로 도망치기 위해 서로 다투다가 짖밟혀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이 틈에 모용농은 진격하여 승영의 외성을 점령하였다.

연원 2년(385년) 3월, 연왕 모용수는 업 공성전을 시작한지 어느덧 1년여 정도 지났음에도 전진의 장락공 부비가 굳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모용수는 일단 정령족의 반란부터 자신이 직접 평정하기 위해 모용린을 신도(信都)에 주둔시키고, 모용농을 불러 자신을 대신해 업을 계속 공략하게 하였다.

업으로 향하던 모용농은 고읍(高邑)에 이르러 종사중랑 휴수(眭邃)를 내보내 지역을 살피게 하였는데, 기한이 지났음에도 휴수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장사 장반(張攀)이 모용농에게 말했다.
"휴수는 참좌(參佐)의 위치에 있음에도 감히 기망하여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군대를 돌려 그를 토벌하십시오."
하지만 모용농은 답하지 않고, 가판(假版)을 준비하여 휴수를 고양(髙陽) 태수로 삼은 뒤, 조군 북쪽 출신인 자들에게 모두 임시직을 수여하고 돌려보내니, 무릇 태수로 임명된 자가 3명, 장사로 임명된 자가 20여 명이었다. 이후 모용농은 장반에게 말했다.
"그대의 의견은 매우 잘못되었다. 지금 이와 같은 시기에 어찌 서로 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내가 훗날 북쪽으로 돌아갈 때 휴수 등이 스스로 길 왼편에서 맞이할 것이니, 그대는 지켜보기만 하라."

모용농이 업에 도착하자, 연왕 모용수는 모용농에게 업의 포위망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친히 손취책(孫就柵)에서 동진의 용양장군 유뢰지의 북벌군과 싸우는 여양태수 유무(劉撫)를 구원하러 갔다. 장락공 부비는 모용수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군대를 거느려 성 밖으로 나가 후연군을 야습했지만, 모용농이 이를 격퇴하여 부비는 성 안으로 패주하였다. 유뢰지 또한 손취책에서 모용수를 이기지 못해 여양으로 후퇴하였고, 모용수는 다시 업성의 포위망으로 돌아왔다.

연원 2년(385년) 4월, 유뢰지가 다시 진격하여 업성에 이르자, 연왕 모용수는 다시 유뢰지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는 패하였다. 모용수가 업성의 포위를 거두고 비향(肥鄕)의 신성(新城) 북쪽으로 돌아가 숨으니, 유뢰지는 장락공 부비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고 동진군만으로 모용수의 뒤를 추격하였다. 유뢰지는 동당연(董唐淵)에서 후연군의 꽁무니를 따라잡고, 더욱 질주하여 오교택(五橋澤)에서 후연군의 치중을 습격하였는데, 모용수가 군대를 돌려 요격하고 유뢰지의 군대를 대파하여 동진군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 유뢰지는 단기로 달아나다가 모용수의 패배 소식을 뒤늦게 전해듣고 동진군에게 가세하기 위해 성에서 나온 부비의 전진군을 만나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후연군은 비록 유뢰지를 격파했지만, 하필 업에 기근이 심하게 들어 많은 병사들이 아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연왕 모용수는 장차 북쪽 중산으로 가고자 모용농을 선봉으로 삼았다. 모용농이 북쪽으로 진군할 때, 1달여 전에 그가 가판으로 임명한 고양태수 휴수 등이 모두 나와 후연군을 영접하니, 장사 장반이 이를 보고 모용농의 지략에 감복하였다.

연원 2년(385년) 8월, 장락공 부비가 업성을 버리고 진양(晉陽)으로 들어가 전진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에 연왕 모용수는 노왕 모용화(慕容和)를 남중랑장으로 삼아 비어있는 업성을 접수케 하고, 모용농에게는 군사를 거느리고 거용관(居庸關)의 열옹새(蠮螉塞)로 나가 용성(龍城)에서 군대를 정돈한 뒤에 배반한 건절장군 여암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연원 2년(385년) 11월, 용성에 도착한 모용농은 10여일 동안 병사와 말을 쉬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용농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이곳까지 매우 빨리 도착하셨는데, 이제와서 여기에 오래 머무르며 진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용농이 답했다.
"내가 빨리 온 것은 여암이 산을 넘어 백성들을 습격하며 괴롭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여암의 재능은 남보다 뛰어나지 않으며, 굶주린 자들을 속여 모아 무리를 이룬 것이지, 조직을 제대로 갖춘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그의 목을 죄었으니, 오래지 않아 그 무리는 흩어질 것이고, 여암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곳의 곡식이 잘 익었지만 아직 수확하지 못하였는데, 그냥 떠난게 된다면 우리만 손해를 보지 않겠느냐? 수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가더라도 그들을 무찌르는 데에는 채 열흘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얼마 뒤, 모용농이 보•기 30,000명을 이끌고 영지(令支)에 이르자, 여암의 무리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그들 중 조금씩 성벽을 넘어 모용농에게 귀순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여암은 계책이 다하여 성에서 나와 항복하였으나, 모용농은 그를 용서치 않고 처형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다시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고 용성으로 돌아왔다.

모용농이 상소를 올려 용성의 있는 전연의 능묘를 수리할 것을 청하였다. 모용수를 이를 수락하고 모용농을 사지절•도독유평2주북적제군사(都督幽平二州北狄諸軍事)•유주목(幽州牧)으로 삼아 옹성을 그대로 진수케 하였다. 모용농은 법률과 제도를 새로 만들어 간략하게 하고, 형옥(刑獄)을 공정히 집행하였으며, 부역을 줄여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부유해져 생활이 안정되었고, 수만 명에 달하는 유민들이 앞다투어 귀순하였다. 이전에는 많은 유민들이 고구려로 들어갔기에, 모용농은 사마 방연(龎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고구려로 피난간 유민들을 불러 위무케 하였다.

건흥 원년(386년) 4월,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농을 요서왕(遼西王)으로 봉하였다.

건흥 4년(389년) 정월, 용성에 5년여 동안 있으면서 여러 사무를 개편하고 수행하던 모용농은 조정에 상소하였다.
「최근에 출정해 이곳에 주둔하면서 신이 통솔하던 장병들은 여러 해 동안 평안히 지냈습니다. 하나, 아직 청주, 서주, 형주, 옹주에 걸쳐서 여전히 수많은 도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신은 이제 전장으로 돌아가 미력한 힘을 다하여 적들을 토벌하기를 원하며, 설령 싸우다 생을 마치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뜻입니다.」
이에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농을 중앙으로 소환하여 시중•사예교위로 삼고, 용성에 유대(留臺)를 건립해 고양왕 모용륭을 녹유대상서사(録留臺尚書事)로 삼아 모용농 대신 용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모용륭이 모용농이 세워둔 법률과 제도에 의거해 지역을 다스리니, 요(遼)와 갈(碣) 일대가 매우 안정되었다.

건흥 4년(389년) 10월, 정령족의 적요가 부하 고제(故堤)를 보내 거짓투항으로 낙랑왕 모용온과 그 장사 사마구(司馬驅)를 암살하였다. 임무에 성공한 고제는 수비군 200호를 이끌고 서연으로 달아났다. 이에 모용농은 양국에서 그들을 습격해 고제를 제외한 인원들을 전부 사로잡았다.

건흥 6년(391년) 10월, 적요의 뒤를 이어 세력을 통솔하게 된 그 아들 적소(翟釗)가 업을 침공하자, 모용농이 이를 요격하여 무찔렀다.

건흥 7년(392년) 3월, 성무제 모용수가 적소를 정벌하러 갈 때 종군하였다.

건흥 7년(392년) 6월, 모용수가 여양에서 진을 치고 황하를 건너려 하자, 적소는 황하 남안에 군대를 벌려 강 건너편에서 후연군의 도하를 막았다. 이에 모용수가 군영을 여양에서 서쪽으로 40리 가량 떨어져있는 서진(西津)으로 옮기고, 우피선(牛皮船) 100여 척에 거짓으로 병장기를 늘여놓은 뒤, 몰래 강을 거슬러 올랐다. 이때 적소 또한 서진으로 진군하였는데, 모용수는 적소의 군사가 물러간 이 기회를 활용해 몰래 중루장군 모용진(慕容鎭) 등으로 하여금 여양진에서 황하를 건너게 하였다. 모용진이 밤에 황하를 건너 날이 밝아올 때 즈음에 군영을 완성하니, 이 소식을 들은 적소는 황급히 모용진의 군영을 공격했지만, 모용진은 문을 굳게 닫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적소의 병사들은 하루종일 왔다갔다 하면서 더위에 지치고 피폐해졌고, 모용진의 군영을 도저히 뽑을 수 없다 판단한 적소는 서둘러 퇴각하려 하였다. 그러자 적의 동향을 파악한 모용진이 군사들을 이끌고 나와 적소의 군대를 덮쳤고, 서진에서 황하를 건너 모용농도 도착해 모용진과 함께 적소를 공격하였다. 대패한 적소는 활대(滑臺)로 돌아가 처자식을 데리고, 무리를 수습하여 백록산(白鹿山) 위로 올라가 험지에 기대어 스스로를 지켰다.

후연군이 더이상 진군할 수 없게 되자, 모용농이 말했다.
"적소는 군량이 없어 산 속에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기병대만 남겨 감시케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소는 산에서 내려왔고, 보고를 받은 모용농은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 적소를 습격하여 그 무리를 모두 사로잡았다. 적소는 홀로 말타고 서연의 수도 장자(長子)로 도망쳤다.

건흥 7년(392년) 12월, 적위(翟魏)를 평정한 이후 중산으로 돌아온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농을 도독연예형서옹5주제군사(都督兖豫荆徐雍五州諸軍事)로 삼아 업을 진수케 하였다.

건흥 9년(394년) 2월, 성무제 모용수가 서연의 황제 모용영을 정벌할 준비를 하면서 청하공 모용회를 업으로 보내 진수케 하고, 모용농은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호관(壺關)으로 향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모용영도 병력을 엄히 통솔하여 여러 갈래로 나누어 지키고, 곡식을 모아 대벽(臺壁)에 비축하였다. 또, 그의 사촌인 정동장군 모용소일두귀(慕容小逸豆歸), 진동장군 왕차다(王次多), 우장군 늑마구(勒馬駒)에게 10,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벽을 수비케 하였다.

건흥 9년(394년) 5월, 후연군이 대벽에 이르자, 모용영은 모용소일두귀의 형인 모용대일두귀(慕容大逸豆歸)를 보내 대벽을 구원하였으나 후연의 장수 평규(平規)에게 격파당했다. 모용소일두귀도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싸웠지만, 모용농이 이를 격파하여 늑마구를 전사시키고 왕차다를 사로잡았다. 모용농이 이어서 대벽을 포위하니, 모용영이 친히 50,000 군사를 거느리고 대벽 남쪽에 진을 쳐서 대벽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성무제 모용수는 짐짓 포위를 풀고 후퇴하여 모용영을 유인하였고, 모용영이 여기에 걸려들어 계곡까지 추격해오자, 모용국의 복병이 튀어나와 모용영의 퇴로를 끊어버렸다. 이윽고 모용수가 군대를 돌려 반격하였고, 모용농과 모용해는 각자 양익을 맡아 서연군을 쳤다. 서연군은 대패하여 8,000여 명이 참수당했고, 모용영은 겨우 목숨을 구해 장자로 도주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서연의 수도 장자가 무너지면서 서연이 멸망하였고, 모용농은 성무제 모용수를 따라 업으로 돌아갔다.

건흥 9년(394년) 10월, 성무제 모용수가 업에서 양평으로의 순행하면서 모용농과 안남장군 윤국(尹國)에게 명해 청주와 연주의 땅을 빼앗게 하였다. 이에 모용농은 늠구(廩丘), 윤국은 양성(陽城)을 공격해 모두 뽑고, 동진의 동평(東平) 태수 위간(韋簡)을 전사시켰다. 그러자 고평(高平), 태산(泰山), 낭야(琅邪) 등 여러 군의 동진군들이 무서워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모용농은 임해(臨海)까지 진군하여 태수와 재상을 두었다.

건흥 9년(394년) 11월, 용수(龍水)에서 동진의 유주자사 벽려혼(辟閭渾)을 물리치고 임치(臨淄)에 입성하였다.

건흥 9년(394년) 12월,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농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건흥 10년(395년) 5월, 탁발규가 후연을 배반하여 국경을 어지럽히자,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농, 태자 모용보, 조왕 모용린에게 80,000 군사를 주어 오원(五原)에서부터 북위를 정벌케 하고, 범양왕 모용덕과 진류왕 모용소(慕容紹)에게는 따로 18,000 군사로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이후로 벌어지는 전투가 바로 후연군이 대패한 참합피 전투로, 자세한 경위는 해당 문서 참조.

건흥 11년(396년) 3월, 성무제 모용수가 참합피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범양왕 모용덕을 중산에 남겨 지키게 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대를 거느려 곧바로 운중(雲中)으로 향하였다. 후연군이 엽령(獵嶺)에 이르렀을 때, 성무제 모용수가 모용농과 모용륭을 선봉으로 삼아 평성(平城)을 습격하니, 평성을 수비하던 북위의 진류공 탁발건은 출전하여 싸웠다가 패사하였다.

건흥 11년(396년) 4월, 평성을 접수한 성무제 모용수는 평성에서 10일간 머물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져 연창성(燕昌城)만 쌓고 귀환하는 길에 저양(沮陽)에서 붕어하였다. 후연군은 곧바로 발상하지 않다가 군대가 중산에 이르러서야 발상하였고, 태자 모용보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5월, 혜민제 모용보는 형 모용농을 도독병옹익양진량6주제군사(都督并雍益梁秦凉六州諸軍事)•병주목(并州牧)으로 삼아 진양을 진수케 하였다. 모용농은 부곡(部曲) 수만 명을 거느리고 진양으로 들어갔는데, 병주에는 평소 쌓아둔 물자가 부족하였고, 서리가 다른 지역보다 일찍 내리는 것을 몰라 농사까지 실패하면서 식량 공급이 막히고 말았다. 또, 여러 이민족 부락에 호군(䕶軍)을 파견해 철저히 감시하니, 이민족들은 모두 원망하며 몰래 북위군에게 내응하려 하였다.

영강 원년(396년) 9월, 북위군이 양곡(陽曲)에 이르러 서산(西山)에 올라, 종종 기병을 보내 진양성을 에워싸고 크게 소리친 후에 떠나며 모용농을 압박하였다. 이에 모용농은 출전하여 북위군과 격돌하였다가 패하였고, 다시 군대를 돌려 진양성으로 퇴각하려 하였는데, 모용농의 사마 모여숭(慕輿嵩)이 배신하여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모용농은 하는 수 없이 처자식과 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북위의 중령장군 장손비가 그를 추격하여 노천(潞川)에서 모용농의 군대를 격파하여 전멸시키고 그 처자식을 모두 사로잡으니, 모용농은 살아남은 3명의 기병과 도망쳐 중산으로 들어갔다.

영강 원년(396년) 10월, 혜민제 모용보의 명령을 받고 안희(安喜)로 나가 주둔하였다.

영강 2년(397년) 3월, 조왕 모용린이 혜민제 모용보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망치자, 모용보는 모용린이 행여나 계(薊)의 청하왕 모용회를 속여 그 병력을 탈취하고 용성을 점령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모용륭과 모용농을 불러 중산성을 포기하고 용성을 지키는 계획에 대해 의논하였다. 여기서 모용륭이 찬성하자, 모용보는 용성으로 옮기기로 결론을 내었다. 용성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농의 부장 곡회귀(谷會歸)가 모용농에게 말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탁발규가 참합피에서 벌인 잔혹한 짓에 눈물 흘리며 분노하였고, 전사자들의 아버지나 아들, 형제는 피눈물을 흘리며 위나라와 싸우기를 원하며 위군(衛軍)으로 입대하였습니다. 한데, 이제 주상께서 북쪽으로 옮기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말하기를, '모용씨 한 사람을 받들어 위나라와 싸워 죽는다면 후회가 없겠다'고 합니다. 만약 대왕께서 여기 남아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여 위군을 물리쳐 국경을 안정시키고, 나중에 대가(大駕)를 맞이한다면 충신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용농은 곡회귀를 죽이려다가 그의 재능이 아껴 그만두고 한탄하며 말했다.
"필시 이처럼 살기를 바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이후 모용농은 혜민제 모용보를 따라 태자 모용책, 모용농, 모용륭, 모용성 등과 기병 10,000기와 함께 중산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쳤다. 혜민제 모용보가 계에 도착하자 청하왕 모용회가 그를 영접하였는데, 평소 태자로 책봉받지 못함에 불만이 극심했던 모용회는 군사를 사열하여 황제를 맞이하면서 원망스럽고 한스러운 기색을 거침없이 내보였다. 모용보는 이를 무척 괴이하게 여겨, 모용회의 군사를 나누어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각각 배속시켰다.

혜민제 모용보는 계의 부고(府庫)를 용성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때 어양(漁陽)에 주둔해 후연군의 동정을 살피던 북위의 장수 석하두(石河頭)가 하겸택(夏謙澤)에서 모용보를 습격하였다. 모용회는 군대를 정돈해 북위군을 훌륭히 막고, 모용농과 모용륭이 기병을 이끌며 남쪽으로 내려와 석하두를 협공하니, 석하두는 대패하여 도망쳤고 북위군 수천 명이 참살당했다.

본래 모용회의 은혜를 입은 바 있던 계성의 군사들은 모두 혜민제 모용보를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또한 혜민제 모용보를 따라온 사람들도 모용회의 사람들과 불화하면서 갈등은 점점 심해져, 모용보를 따르는 신하들이 모용회 암살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시어사 구니귀(仇尼歸)는 모용회를 찾아가 모용농과 모용륭을 제거하고 모용책을 폐위시킬 것을 권하였는데, 모용회가 이를 망설였다. 그 와중에 모용보가 모용농, 모용륭에게 말했다.
"짐이 보건대 모용회가 반란 일으킬 마음을 품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의당 그를 제거해야만 하오."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대하며 말했다.
"지금 외적의 침입과 내부의 분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위험이 누란(累卵)과도 같으니, 옛 도읍을 진무(鎭撫)하고 국가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용회의 위세와 명망은 사방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하므로, 반역의 징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마당에 갑자기 그를 죽이신다면 부자간의 은혜를 해칠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손실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모용보가 다시 말했다.
"모용회는 이미 반역의 뜻을 품었으나, 경들은 인자하게도 일찍 죽이지 않으려 하고 있소. 만약 언젠가 변고가 생기면 먼저 여러 종친들을 해치고 나서 짐에게 이를 것이오. 그때가 되어서야 뉘우치지나 마시오."
이를 전해들은 모용회는 더욱 불안해하였다.

영강 2년(397년) 4월 6일[8], 혜민제 모용보가 광도(廣都)의 황유곡(黄榆谷)에 유숙하게 되었다. 모용회는 이 때를 노려 구니귀와 오제염간(吳提染干)에게 장사(壯士) 20여 명을 나누어주어 모용농과 모용륭 암살을 시도하였다. 모용륭은 장막 아래에서 오제염간에 의해 비명횡사하였으나, 모용농은 중상을 입어 피투성이된 몸으로도 구니귀를 제압한 뒤, 그를 납치해 산속으로 도망쳤다. 모용회는 구니귀가 잡혀간 것으로 인해 진실이 밝혀질 것이 두려워 모용보에게 나아가 말했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역을 모의하여 신이 미리 그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챈 모용보는 모용회를 베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겉으로는 좋은 말로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나는 두 왕을 오래 전부터 의심해왔으니, 그들을 제거한 것은 무척 잘한 일이다."

4월 7일[9] 아침, 모용회는 군사를 엄히 정돈하고, 도망친 모용농을 쫓아 혜민제 모용보와 함께 산 속으로 진입하였다. 모용회는 출발하기 전에 모용륭의 시신을 두고 가려 하였는데, 건위장군 여숭(餘崇)이 눈물 흘리며 간청하여 하는 수 없이 시신을 수레에 싣고 따르게 하였다. 모용보가 산 속으로 진입하였을 때 모용농이 나타나니, 모용보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홀로 모든 것을 부담하려 하였느냐?"
그리고 군사들에게 명해 그를 붙잡아 끌고 오게 하였다. 그런 후에 10여 리 정도 가다가 진군을 멈추고 식사를 하면서 여러 신하들과 모용농의 죄를 논하였다. 잠시 후에 도착한 모용회도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착석하자, 모용보는 위군장군 모여등(慕輿騰)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 모용회의 목을 내려치게 하였으나, 목에 상처만 내고 죽이는 데에 실패하였다. 모용회는 그대로 도망쳐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모용보를 공격하였다. 모용보는 기병 수백 기와 함께 모용회의 군사들의 추격을 떨쳐내고 용성으로 들어갔다.

4월 9일[10], 시어랑 고운의 활약으로 모용회는 패주하여 중산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황제를 자칭하던 개봉공 모용상에게 살해당했다. 이리하여 4일만에 모용회의 반란을 진압한 혜민제 모용보는 경내 대사면령을 내려 모용회에게 붙었던 자들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논공행상하여 많은 자들이 고귀한 직책에 올랐다. 모용농은 두개골이 깨져 골수가 흐를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는데, 모용보가 손수 치료하여 회복할 수 있었다. 모용보는 모용농을 상서좌복야로 삼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영 상서령(領尚書令)으로 승진시켰다.

영강 2년(397년) 9월, 도독중외제군사•녹상서사•대사마에 임명되었다.

영강 3년(398년) 정월, 남쪽의 형세를 살피던 장수 계륜(啟倫)이 용성으로 복귀하여 중산성이 이미 함락되었음을 보고하니, 혜민제 모용보는 용성에 소집해놓은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이때 모용농이 진언하였다.
"지금 도읍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남쪽을 정벌할 수 없습니다. 병력을 모아 고막해를 습격하여 그들의 소와 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고, 상황을 잘 살핀 후 내년에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보가 이를 따랐다.

혜민제 모용보가 용성의 궁으로 돌아가 여러 군대에 조서를 내려 주둔지를 지키게 하고 해산을 엄금하였으며, 여러 장수와 병사들에게 가속들을 거느리고 주둔지로 가서 살게 하였다. 모용농은 장락왕 모용성과 함께 모용보에게 간곡히 간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피로하고 힘이 약해졌는데, 위나라가 새롭게 세력을 얻었으니, 지금은 적과 싸울 때가 아닙니다. 병력을 기르고 틈을 엿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보가 이를 따르려 하자, 무군장군 모여등(慕輿騰)이 말했다.
"백성들과 성공을 함께 즐길 수는 있어도, 시작을 함께 도모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군대가 이미 집결하였으니, 마땅히 성심으로 결단을 내려 기회를 틈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 의견을 널리 들어 대계(大計)를 저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모용보가 말했다.
"내 계획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

영강 3년(398년) 2월, 혜민제 모용보는 결국 친히 출정하여 주둔지로 나아가 진을 쳤고, 모용성을 용성에 남겨 뒷일을 맡겼다. 모여등은 선봉, 모용농은 중군, 혜민제 모용보는 후군을 통솔하여 각기 약 1돈(頓)의 거리를 두고, 100리에 걸쳐 진영을 이루며 진격하였다. 모용보가 을련(乙連)에 이르렀을 때, 장상(長上) 단속골과 송적미(宋赤眉) 등이 정벌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군사들의 마음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다. 단속골 등은 모두 죽은 고양왕 모용륭의 옛 부하들이었는데, 합심하여 모용륭의 아들 고양왕 모용숭(慕容崇)을 핍박해 주군으로 추대하고, 낙랑왕 모용주, 중모공 단의(叚誼)를 비롯한 후연 종실의 여러 왕들을 살해하였다.

모용보가 반란군을 피해 10여 기의 기병만 데리고 모용농의 진영으로 도망치자, 모용농은 장차 그를 영접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좌우의 사람들이 그의 허리를 붙잡고 말리며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시지 마시고, 의당 상황이 조금 맑아진 후에 움직이십시오."
모용농은 칼을 뽑아 휘둘러 그들을 베는 척하며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가 모용보를 영접하였다. 그리고 선봉으로 사신을 보내 모여등에게 반란을 보고하게 하였다.

다음 날, 모용농은 모용보와 함께 대영(大營)으로 가 단속골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모용농의 병사들도 정벌을 싫어하여 모두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모여등의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이내 무너지니, 모용보와 모용농은 용성으로 달아났고, 소식을 들은 모용성이 군사들을 이끌고 성에서 나와 맞이한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영강 3년(398년) 3월, 모용수의 외숙부인 돈구왕 난한은 은밀히 단속골과 통모하여 군대를 이끌고 용성 동쪽에 군영을 세웠다. 단속골이 장차 용성을 공격하려 하자, 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던 모용농은 난한의 유혹에 넘어가 밤에 몰래 그의 군영을 찾아 자신의 목숨만을 구하였다. 모용농이 난한에게 투항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단속골 등은 성을 공격하였으나, 장락왕 모용성이 성벽 위에서 강력하게 저항하여 단속골의 무리 중 100여 명이 죽었다. 그러자 단속골은 모용농을 수레에 태우고 용성 주위를 돌았다. 당시 모용농은 충절로 명망이 높았으므로, 그 무리가 의지하여 힘내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 모용농이 반란군 수괴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용성의 병사들은 경악하여 모두 기운이 크게 꺾여 도망쳤다. 이후 단속골은 순식간에 용성을 무너뜨렸고, 모용보와 모용성은 모여등, 여숭, 장진(張真), 이하(李旱), 조은(趙恩) 등과 경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손쉽게 용성을 함락시킨 단속골은 모용농을 궁궐 안에 유폐시켰다.

3월 5일[11],단속골의 측근인 장상 아교라(阿交羅)는 고양왕 모용숭이 유약한 것을 들어 모용농을 옹립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를 들은 모용숭의 절친한 친구 종양(鬷讓)과 출력견(出力犍) 등이 아교라와 모용농을 살해하였다. 이에 모용농의 부하 좌위장군 우문발(宇文拔)은 요서로 도망쳤고, 단속골은 즉시 종양 등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단속골 또한 이틀 뒤에 난한의 습격을 받아 부하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면서 단속골의 난은 끝이 난다.

모용농 사후, 그의 시호를 '환열(桓列)'이라 하였다.


[1] 낭군은 보통 남편에 대한 애정섞인 존칭으로 쓰이지만, 다른 집안의 아들을 높여 부를 때 낭군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2] 동이(東夷)라고만 나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일각에서는 부여로 추정하기도 한다.[3]십육국춘추》에서는 여남(汝南)으로 나오나, 여남이 훨씬 남쪽에 위치한 것을 고려하면 오기로 보인다.[4] 384년 정월 신묘일. 음력으로 1월 14일이고, 양력으로 2월 23일이다.[5] 병사들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비록 갑옷이 없더라도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의미.[6] 384년 정월 경술일. 음력으로 1월 26일이고, 양력으로 3월 4일이다.[7] 384년 8월 병인일. 음력으로 8월 15일이고, 양력으로 9월 16일이다.[8] 397년 4월 계유일. 음력으로 4월 6일이고, 양력으로 5월 18일이다.[9] 397년 4월 갑술일. 음력으로 4월 7일이고, 양력으로 5월 19일이다.[10] 정유년 을사월 병자일. 음력으로 4월 9일이고, 양력으로 5월 21일이다.[11] 398년 4월 정유일. 음력으로 3월 5일이고, 양력으로 4월 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