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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량 2대 황제 여소 | 呂紹 | |
출생 | 불명 |
전진 진주 천수군 약양현 (現 톈수이시 친안현) | |
사망 | 399년 |
시호 | 은왕(隱王) |
연호 | 용비(龍飛, 396년 ~ 399년) |
성 | 여(呂) |
휘 | 소(紹) |
자 | 영업(永業) |
부왕 | 의무제(懿武帝) |
재위 기간 | 3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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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후량의 제2대 황제.묘호는 없고 시호는 은왕이며, 태조 의무제 여광의 3남이자 적장자였다,
2. 생애
의무제 여광의 적장자로 여광이 서역 원정을 나설 때 어머니 석씨(石氏)를 모시고 전진의 수도인 장안에 남았다. 383년 11월, 전진의 제3대 세조 선소제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한 후 화북 지역이 이민족들의 자립과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구지(仇池)로 피신했다.인가 원년(389), 가족들과 함께 양주(凉州)에서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한 아버지 여광한테 돌아가서 세자로 책봉받았다. 그리고 용비 원년(396) 6월에 여광이 후량을 건국하고 천왕을 칭할 때 태자가 되었다.
용비 4년(399) 5월, 서형인 태원공 여찬(呂纂)과 출정하여 북량을 토벌했다. 북량왕 단업이 남량왕 독발오고에게 구원을 청하니, 독발오고는 자신의 동생인 표기대장군 독발리록고와 양궤(楊軌)를 보내 돕도록 했다. 남량의 구원군 파견 소식을 들은 단업은 자신감을 얻어 성에서 나와 응전할 준비를 했는데, 노수호족 출신의 장수 저거몽손이 뜯어말려 출병을 취소하고, 수비에만 전념했다. 북량의 수비는 예상외로 단단했고 남량의 구원군 또한 도착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여소와 여찬은 얼마 안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399) 12월, 병세가 악화되어 더이상 정무 처리가 힘들어진 태조 의무제 여광이 태자 여소에게 천왕을 물려준 뒤, 자신은 태상황제(太上皇帝)로 내려왔다. 여광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여소가 난세에 적합하지 않음을 걱정하여, 병권은 서장남인 여찬에게, 내정에 관한 권한은 차남 여홍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그리고 신제 여소에게는 두 형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라는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의무제 여광의 이런 이상주의적인 생각은 도리어 군주인 여소의 황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여소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맏형 여찬을 특히 두려워해, 형님이 공도 많고 나이도 많으니 제위에 올라야 한다며 그에게 양위해주려 했으나 여찬은 스스로 적장자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사촌형인 표기장군 여초는 여찬의 명성이 높으니 당장 병권을 빼앗지 못하면 화가 닥칠 것임을 강조했지만, 황제 여소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여찬을 축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던 중 본래 역심을 품고 있었던 여홍이 상서 강기(姜紀)를 보내 형인 여찬을 부추겼다.
"주상께서는 사리에 어둡고 나약하여 난세에 적합하지 못합니다. 형님의 위엄과 은덕은 국가를 뒤덮고 있으니 절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마시고 마땅히 국가의 사직을 생각해 주시옵소서."
이에 여찬은 반란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밤, 병사 수백 명을 데리고 북성을 뛰어넘어 황성의 광하문을 공격했다. 여홍 또한 여찬에게 호응해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홍범문을 열어주었다. 융명관을 지키던 좌위장군 제종(齊從)이 큰 소리로 꾸짖으며 검을 뽑아 여찬의 이마를 향해 던졌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부상만 입혔고, 제종은 그 자리에서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여찬이 황성 안까지 진입하자 황제 여소는 호분중랑장 여개(呂開)에게 황실의 금군을 주어 반란군을 막도록 했다. 여초도 구원군 2,000여 명을 이끌고 출발했으나 금군이 여찬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싸우려 들지 않아 결국 여개의 부대는 순식간에 궤멸되었다. 여소는 황궁을 빠져나오려다가 실패해 자각(紫閣)에서 자결했고, 여초는 광무(廣武)로 도주했다. 손쉽게 황궁에 들어간 여찬은 겸광전(謙光殿)에 오른 뒤, 천왕에 즉위하고, 죽은 동생 여소를 은왕으로 추시했다.(용비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