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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8:14:18

혁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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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619C><colcolor=#ece5b6>
북하 2대 황제
혁련창 | 赫連昌
출생 불명
전진 삭방군 삭방현
(현 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사망 434년
북위 대군 평성
(現 산시성 다퉁시)
능묘 없음
재위기간 2대 북하 황제
425년 ~ 428년
북위 진왕
430년 ~ 4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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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619C><colcolor=#ece5b6> 성씨 유(劉) → 혁련(赫連)
창(昌)
부모 부황 세조 무열제
모후 부인 파다라씨
형제자매 7남 5녀 중 3남
배우자 시평공주 탁발씨[1]
환국(還國)
작호 진왕(秦王)
연호 승광(昇光, 425년~4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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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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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기 흉노(남흉노) 철불부가 세운 북하의 제2대 황제.

세조 무열제 혁련발발의 3남으로 제3대 황제인 혁련정의 형이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키가 여덟 척에 이르러 건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과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전해진다.

2. 생애

봉상 원년(413년) 12월, 혁련발발이 천왕으로 즉위하여 장남 혁련괴(赫連璝)를 태자로 세우자, 혁련창은 태원(太原公)의 작위에 봉해졌다.

봉상 4년(416년) 6월, 혁련발발이 후진의 장수 요랑자(姚良子)를 죽이고 음밀(陰密)[2]을 점령한 뒤, 혁련창을 사지절•전장군•옹주(雍州) 자사로 삼아 음밀을 진수하도록 하였다.

봉상 5년(417년) 12월, 동진의 권신이자 명장인 유유가 후진을 멸하고 장안을 차지했으나, 어린 아들 유의진에게 장안을 맡기고는 동진으로 귀환했다. 이에 혁련발발이 혁련괴와 무군우장사 왕매덕(王買徳)에게 장안을 공격하도록 하고, 혁련창은 동진의 세력이 탈출할 수 없도록 동관(潼關)[3]을 포위하도록 명령하였다.

봉상 6년(418년) 11월, 유의진은 공세를 버틸 수 없어 장안을 실컷 약탈한 후 철수했다. 하지만 곧 혁련발발이 추격해 유의진의 동진군을 격파하고 대부분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이때 장안에 홀로 남아 있었던 주령석은 백성들에게 추방되어 동생 주초석과 함께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이 지키던 조공루(曹公壘)[4]로 달아났으나, 혁련창이 포위하여 식수를 끊으니, 머지않아 조공루는 함락되었다. 혁련창은 주령석 형제와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 등 동진군의 장수들을 모두 사로잡아 수도 통만성으로 압송하였다.

진흥 6년(424년) 12월, 혁련발발이 장안에 주둔하던 혁련괴를 태자에서 폐하고, 4남인 주천공(酒泉公) 혁련륜(赫連倫)을 태자로 세웠다. 폐태자 혁련괴는 부친에게 반기를 들어 장안에서 거병한 후, 70,000명의 대군으로 수도 통만성을 공격하여, 30,000명으로 항전하던 이복형제 혁련륜을 고평(高平)[5]에서 패사시켰다. 그러나 동복형제인 혁련창이 기병 10,000명으로 혁련괴를 습격해 죽이고, 그 무리를 흡수해 85,000명을 이끌고 통만성으로 귀환하였다. 혁련발발은 크게 기뻐하며 혁련창을 태자로 세웠다.[6]

승광 원년(425년) 8월, 무열제 혁련발발이 붕어하자, 태자 혁련창은 영안전(永安殿)에서 제위를 계승하여 북하의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에 처할 자를 제외한 모든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연호를 '승광(承光)'으로 바꾸고, 문무 관료들의 지위를 차등에 따라 승진시켰다.

승광 2년(426년) 정월, 서진의 왕 걸복치반북위로 사신을 보내어, 함께 군사를 일으켜서 북하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

승광 2년(426년) 6월,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가 나라의 공경들에게 물었다.
"지금 혁련(赫連)과 연연(蠕蠕), 두 나라 중 어느 나라를 먼저 공격해야 하는가?"
이에 장손숭, 장손한(長孫翰), 해근(奚斤) 등이 입을 모아 말했다.
"혁련은 땅 위에 정착하고 있으므로 당장은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 먼저 연연을 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추격해서 따라잡으면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음산(陰山)에서 사냥을 하여 짐승의 가죽과 뿔을 군수 물자로 충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상 최호가 반대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연은 까마귀처럼 모였다가 흩어지고, 짐승처럼 도망칩니다. 대군을 이끌고 추격하면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경무장한 병력으로 추격하면 적을 제압하기에 부족합니다. 혁련씨의 영토는 1,000리도 되지 않고, 그 정치는 잔혹하여 사람과 신령에게 버림받으니, 마땅히 먼저 혁련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때 상서 유결(劉潔)과 무경후(武京侯) 안원(安原)은 선비족 모용부의 후연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태무제는 대다수 공경들의 의견에 따라 운중(雲中)에서 서쪽으로 순행하여 오원(五原)에 이르렀고, 음산(陰山)에서 사냥을 하다가 동쪽으로 화두산(和兠山)에 이르러 돌아왔다.

승광 2년(426년) 8월, 서진의 왕 걸복치반이 북하의 동맹국인 북량을 정벌하자, 북량의 군주 저거몽손이 사신을 보내 빈틈을 타 서진의 수도 부한(枹罕)[7]을 쳐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혁련창은 정남대장군 호로고(呼盧古)에게 기병 20,000명을 주어 원천(苑川)을 치게 하고, 거기대장군 혁련위벌(赫連韋伐)에게 기병 30,000명을 주어 남안(南安)을 침공하도록 했다. 호로고와 혁련위벌은 각각 남안과 원천을 무너뜨려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서평(西平)[8]까지 진출했으나, 병력이 바깥으로 정벌 나가는 바람에 본국의 방비가 약화되었다.

승광 2년(426년) 7월, 사성(查城)의 유저천(劉渚川)에서 사람들이 말머리만한 푸른 돌이 물에 떠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구경하였다.

승광 2년(426년) 9월, 혁련창이 혁련발발의 다른 아들들과 다투자, 관중(關中)이 큰 혼란의 빠져 백성들이 불안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북위의 태무제가 북하를 정벌하려 하자, 장손숭 등이 말했다.
"그들은 성을 지키며 안락한 상태에서 지친 우리를 기다릴 것이고, 유연의 욱구려대단(郁久閭大檀)도 그 소식을 듣고 우리의 빈틈을 노려 쳐들어올 것이니, 이는 위험한 길입니다."
이때 최호가 태무제에게 찬성하며 말했다.
"작년부터 형혹(熒惑)이 두 번이나 우림(羽林)에 머물렀는데, 이 징조는 이미 모든 것이 성취되어 그 결과로 진나라(西秦)가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올해 다섯 개의 행성이 동방에 함께 나타났으니, 서쪽을 정벌하는 데 이로울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하늘의 징조와 인간의 마음이 모두 모였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장손숭이 북하 정벌을 끝까지 반대하자, 태무제는 크게 노하여 장손숭이 탐욕스럽고 부패하다 비난한 뒤, 무사들을 시켜 그의 머리를 잡아 강제로 조아리게 하는 것으로 모욕을 주었다. 이후 태무제는 사공 해근과 의병장군 봉례(封禮) 등을 보내어 4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포판(蒲阪)을 기습하게 하였고, 흑삭장군 우율제(于栗磾)와 송병장군 주기(周幾)에게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섬성(陜城)을 기습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동(河東) 태수 설근(薛謹)에게는 정벌군의 길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겼다.

승광 2년(426년) 10월, 태무제가 친히 이끄는 정벌군도 뒤이어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에서 출병하였다.

승광 2년(426년) 11월, 태무제가 운중(雲中)에 이르러 군자진(君子津)에서 머무를 때, 갑자기 날씨가 매우 추워져 며칠 동안 얼음이 황하를 덮었다. 덕분에 태무제는 20,000기의 경기병을 이끌고 별 어려움 없이 황하를 도하하여 수도 통만성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혁련창은 동짓날을 기리기 위해 연회를 열어서 신하들과 한창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북위의 군대가 수도 인근까지 도착했다는 급보를 받자 모두 놀라 혼란에 빠졌다. 태무제의 군대가 흑수(黑水)에 진을 치니, 이는 통만성에서 불과 3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혁련창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태무제의 공격에 패배하고 수십 기의 기병과 함께 퇴각하여 성으로 도망쳤다. 혁련창은 성문이 닫히기 전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으나, 북위의 내삼랑 두대전(豆代田)도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성으로 돌입하여 왕궁의 서문(西門)을 불태웠다. 혁련창은 서둘러 나머지 왕궁의 문을 닫았으나, 두대전은 재빨리 궁의 담장을 넘어서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혁련창이 패주한 날 밤, 북위군은 통만성 북쪽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태무제는 병력을 네 방면으로 나누어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면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소와 말 100,000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이후 태무제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통만성은 지금 바로 함락할 수 없으므로, 지금 모든 병력을 소진하는 것은 백성을 위로하는 도리가 아니다. 내년에 다시 와서 이 성을 점령할 것이다."
태무제는 북위로 귀환하여 사로잡은 백성 10,000여 호를 평성으로 이주시켰다.

한편, 홍농(弘農) 태수 조달(曹達)은 북위의 송병장군 주기가 진격해오자 싸우지 않고 도망쳤고, 주기는 그 기세를 타고 삼보(三輔)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나, 도중에 군중에서 사망하여 그 군대가 진격을 중단하였다. 또, 포판을 수비하는 동평공(東平公) 혁련을두(赫連乙斗)은 해근이 다가오자, 통만성으로 사신을 보내 급히 구원을 청하였다. 혁련을두의 사신은 통만성에 이르렀으나, 당시에는 태무제가 통만성을 포위하고 있었기에, 사신은 혁련을두에게 돌아가 통만성은 이미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혁련을두는 두려워 포판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쳤으나, 해근의 추격을 받아 패하면서 장안(長安)으로 도망쳤다. 포판을 점령한 해근은 그곳의 물자를 거두고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이때 혁련창의 동생 헌련조흥(赫連助興)은 장안을 지키고 있었는데, 혁련을두가 도망쳐오자 겁을 먹은 혁련조흥은 그와 함께 장안을 버리고 서쪽 안정(安定)으로 도망쳤다.

승광 2년(426년) 12월, 해근은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장안을 점령하였다. 이에 진(秦)과 옹(雍) 일대의 저족강족 모두가 북위에 항복하였고, 해근은 이들을 모두 안심시키고 어루만져 다스렸다. 이로 인해 북하는 관중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승광 3년(427년) 정월, 황제 혁련창은 동생인 평원공 혁련정을 보내 병력 20,000명으로 장안을 탈환해오도록 명령하였다. 태무제는 혁련창이 장안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음산에서 나무를 베어 대대적으로 공성 장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승광 3년(427년) 3월, 태무제가 집금오 환대(桓貸)에게 명령을 내려 군자진에 다리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량왕 탁발례(拓跋禮)를 파견해 장안에 주둔하게 하였다.

승광 3년(427년) 4월, 북위의 사공 해근이 평원공 혁련정과 장안에서 대치하였다. 태무제는 그 틈을 타 통만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병력을 엄선하고 군사를 훈련시킨 다음, 여러 장수들에게 임무를 나누어 부여하였다. 사도 장손한, 정위 장손도생(長孫道生), 종정 아청(娥清) 등은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이끌고 선봉에 섰고, 상산왕(常山王) 탁발소, 태복 구퇴(丘堆), 장군 원태비(元太毗) 등은 보병 30,000으로 그 뒤를 이었으며, 남양왕(南陽王) 탁발복진(拓跋伏眞), 집금오 환대, 장군 요황미 등이 보병 30,000명으로 공성 병기들을 운반하였다. 또, 장군 하다라(賀多羅)는 정예 기병 3,000기를 거느리고 척후를 맡았다.

승광 3년(427년) 5월, 태무제가 평성에서 군대를 발동하고, 용양장군 육사(陸俟)에게 여러 군대를 감독해서 대석(大磧)에 주둔하게 하여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태무제는 군자진을 건너고 발린산(拔鄰山)에 도착하여, 성을 쌓고 병참 물자를 그곳에 저장한 뒤에, 공성병기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00기의 경기병만으로 신속하게 행군하였다.

승광 3년(427년) 6월, 태무제가 통만성 인근에 이르러 흑수에 주둔하였다. 태무제는 군대를 나누어 깊은 계곡에 매복시키고,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성 아래로 나아갔다. 그때 혁련창의 장수 적자옥(狄子玉)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며 태무제에게 이렇게 고하였다.
"하주(夏主, 혁련창)는 위나라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원공 혁련정을 불러오도록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혁련정이 답하기를, '통만(統萬)은 견고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해근 등을 먼저 격파한 후 천천히 통만으로 가서 안팎으로 공격하면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하주(夏主)는 성을 굳게 지키며 혁련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들은 태무제는 크게 분노하며, 군대를 성 북쪽으로 물려 일부로 약점을 보이게 하고, 종정 아청과 영창왕 탁발건 등에게 기병 5,000기를 나누어, 서쪽으로 보내 백성을 약탈하게 하였다. 이때 북위군의 병사 하나가 죄를 짓고 탈영하여, 통만성으로 들어가 혁련창에게 항복하며 말했다.
"관군(북위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졌고, 병사들은 채소만 먹고 있습니다. 병참 물자는 뒤에 있고, 보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지금 속히 공격하셔야 합니다."
혁련창은 이 말을 믿고,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혁련창이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뛰쳐나오자, 북위의 사도 장손한 등이 모두 태무제에게 말했다.
"하나라 군대가 보병으로 진을 치면 함락시키기 어려우니, 그들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고 보병을 모아 한 번에 강하게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태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멀리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왔는데, 다만 그들이 나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이미 나왔는데도 피하며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기세는 올라갈 것이고, 우리의 기세는 약해질 것이다.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라며 신하들의 제안을 기각하고, 군대를 모아 거짓으로 당해내지 못하는 척 후퇴하며 북하군을 피곤하게 만들려 하였다. 혁련창은 이를 보고 북위 군대가 퇴각한다고 생각하여, 북을 치며 병사들을 몰아 이를 추격하였다. 혁련창이 군대의 좌익과 우익을 펼쳐 나란히 행군하면서 5~6리 정도를 나아갔을 때, 태무제는 방향을 돌려 병사들에게 혁련창의 진영으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북위의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동북쪽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며 모래가 휘날려 하늘이 어두워졌다. 방술에 능통한 환관 조예(趙倪)가 태무제에게 말했다.
"지금 바람과 비가 적의 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니, 우리는 맞서고 그들은 등을 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이고, 군사들 또한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입니다. 폐하께서는 기병을 거두어 후퇴하시고, 다른 날을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최호가 조예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천 리를 달려 하루 만에 승부를 결정하려는 마당에 어찌 계획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폐하, 적군은 탐욕스럽게 계속 전진하며 후방과 이미 연결이 끊어졌으니, 우리는 병력을 나누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바람의 방향이 사람에게만 고정된 법은 없으니, 이런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무제는 최호의 말을 듣고 "좋다"라 답한 뒤,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기병(掎兵)으로 삼아 북하군의 양옆으로 공격하였다. 이때 태무제의 말이 넘어져 태무제가 낙마하였고, 이 때문에 혁련창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힐 뻔하였는데, 탁발제가 자신의 몸을 던져 필사적으로 싸워 혁련창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태무제는 다시 말에 올라 혁련창의 진영으로 돌진하여 북하의 상서 곡리문(斛黎文)과 북하의 기병 10여 명을 손수 죽였으며, 손에 화살이 맞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싸웠다. 결국 혁련창의 군대는 크게 무너져 크게 패배하였고, 혁련창은 장손한의 부대에 의해 통만성으로 돌아가는 길도 막혀,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도망쳐 상규(上邽)[9]로 달아났다.

승리를 거둔 태무제가 통만성 북쪽으로 진격하자, 성에 남아서 수비하던 혁련창의 동생 하남공(河南公) 혁련만(赫連滿)과 조카 혁련몽손(赫連蒙遜)이 밖으로 나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혁련만과 혁련몽손 모두 대패하여 전사하였고, 이 전투에서 북위군에게 사살당한 자만 10,000여 명이 넘었다. 얼마 뒤, 통만성을 점령한 태무제는 아직 성에 남아있던 북하의 상서 왕매덕(王買德)과 설초(薛超), 태사령 장연(張淵)과 서변(徐辯) 등의 관리들과 혁련창의 여러 어머니, 자매, 아내, 첩, 궁인 등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노획한 말은 300,000마리 이상, 소와 양은 수천만 마리에 이르렀으며, 부고에 쌓인 보물, 수레, 깃발, 군수품 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태무제는 포로들과 금은보화, 비단 등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다만, 혁련창의 생모 파다라씨는 상서복야 문지발(問至跋)이 성 함락 직전에 모시고 도망쳐 북위군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한편, 8,000기의 기병으로 혁련창의 뒤를 추격하던 장손한은 고평(高平)에 이르렀으나, 끝내 추격에 실패하고 돌아왔다.

통만성이 넘어갈 당시까지도 장안에서 북위의 사공 해근과 대치하고 있던 평원공 혁련정은 혁련창이 패하고, 통만성은 이미 북위군이 차지했다는 소문을 듣고 서쪽 상규로 퇴각하였다. 해근은 그를 추격하여 옹(雍)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태무제가 종정 아청과 태복 구퇴에게 5,000기의 기병을 이끌고 관우(關右) 지역을 약탈하게 명령하였는데, 아청과 구퇴는 이성(貳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북하의 수도를 함락시킨 태무제는 혁련창이 이미 힘을 잃었다고 생각해, 해근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근이 아직 물러갈 때가 아니라며 기병과 말을 더 지원해달라 거듭 청하니, 태무제는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해근에게 병사 10,000명을 주고, 장군 유발(劉拔)을 보내 말 3,000필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아청과 구퇴도 해근과 함께 남게 하여, 상규로 도망간 혁련창을 계속 공격하게 하였다.

승광 3년(427년) 9월, 안정(安定)의 백성들이 성을 들어 아청과 구퇴에게 투항하였다.

승광 4년(428년) 9월, 북위의 평북장군 울권(尉眷)이 상규를 침공하자 혁련창은 동쪽으로 물러나 평량(平涼)에 주둔하였다. 이후 혁련창은 안정군으로 진격해 지역 백성들을 노략질하던 구퇴의 병사들을 패퇴시켰고, 구퇴는 기병 수백 기와 함께 안정성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북위군이 성안에 틀어박히게 되니, 혁련창은 이 승리로 거만해져 성 아래까지 진격하여 승리를 거듭하고, 군사를 풀어 안정성 인근을 마음껏 노략질하였다. 이에 북위의 감군시어사 안힐(安詰)은 혁련창이 안정성을 다시 공격할 때 울권과 함께 성을 나와, 북하군과 싸워서 이겼다. 혁련창은 패주하다가 낙마하여, 추격해오던 안힐에게 생포되었다. 혁련정은 잔당 수만 명을 거두어 평량에서 북하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3월 13일, 혁련창은 압송되어 북위의 도읍이었던 평성에 도착했다. 태무제는 시중 고필(古弼)을 보내어 그를 영접하고, 후히 대하며 서궁에 거처하게 하였다. 또, 방 안의 일상 기물과 용구 등을 황제의 것과 같게 해주었고, 자신의 여동생 시평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면서 상충장군(常忠將軍), 회계공(會稽公)으로 삼았다. 태무제는 항상 명령하여 혁련창을 측근에서 시위로 수종하게 하고, 수렵할 때는 둘이서 같이 말을 타게 했으며, 그를 신임해 함께 깊은 산속까지 사냥하러 들어가곤 했다. 여러 제장들이 혁련창은 용명(勇名)이 있어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태무제는
"천명(天命)은 정해져 있는데 무얼 두려워하겠는가!"
라며 반박했다.

신가 3년(430년) 3월 16일, 혁련창을 진왕(秦王)으로 고쳐 봉했다.

신가 3년(430년) 11월, 태무제 탁발도가 북하를 정벌하기 위해 평량성을 쳤는데 상곡공 혁련사간(赫連社干)이 성을 굳게 지켰다. 탁발도는 혁련창으로 하여금 서신을 보내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신가 4년(431년) 6월, 서진을 정복한 혁련정이 북량의 정복을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황하를 반쯤 건넜을 때 토욕혼에게 기습당해 사로잡혔고 이로써 북하는 멸망했다.

연화 원년(432년) 3월 28일, 토욕혼의 모용모괴(慕容慕璝)에 의해 동생 혁련정이 평성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연화 3년(434년) 3월 11일, 혁련창은 북위를 배반해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도망친지 2일만에 하서(河西)에서 북위의 장수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혁련창의 모반을 확인한 태무제 탁발도는 남아있던 혁련창의 형제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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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의 역대 황제
초대 세조 무열제 혁련발발 2대 진왕 혁련창 3대 평원왕 혁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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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제 혁련발발
북하 황제
초대 제2대 제3대
무열제 폐제 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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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위 제2대 태종 명원제 탁발사의 딸이자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의 여동생이었다.[2]간쑤성 핑량시.[3]섬서성 웨이난시.[4] 현 웨이난.[5]닝샤 구위안시.[6] 혁련발발의 재위 말년에 일어난 후계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혁련창에게 부황 혁련발발마저 사실상의 권력 누수 현상으로 압도되어 그를 태자로 책봉한 것으로 여겨진다.[7] 현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8]칭하이성 시닝시.[9] 현 섬서성 톈수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