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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무제

탁발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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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제3대 황제
태무제 | 太武帝
파일:윈강18굴.jpg
윈강 석굴 18굴[1][2]
출생 408년
북위 대군 평성 황궁 동궁
(現 산시성 다퉁시)
즉위 423년 12월 27일
북위 대군 평성 황궁
(現 산시성 다퉁시)
사망 452년 3월 11일 (향년 44세)
북위 대군 평성 영안궁
(現 산시성 다퉁시)
능묘 운중금릉(雲中金陵)
재위기간 북위 황태자
422년 6월 6일~423년 12월 27일
제3대 황제
423년 12월 27일~452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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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탁발(拓跋)
휘 도(燾)
부모 부황 태종 명원제
모후 명원밀황후
형제자매 7남 4녀 중 장남
배우자 황후 혁련씨, 경애황후
자녀 11남 2녀
종교 도교
자 불리벌(佛狸伐)
아명 불리(佛狸)
작호 태평왕(泰平王)
→ 황태자(皇太子) → 황제(皇帝)
묘호 세조(世祖)
시호 태무황제(太武皇帝)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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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광(始光, 424년~428년)
신가(神䴥, 428년~431년)
연화(延和, 432년~435년)
태연(太延, 435년~440년)
태평진군(太平眞君, 440년~451년)
정평(正平, 451년~4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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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황위에 오르다.2.2. 제1차 북위-유연 전쟁
2.2.1. 모한흘승개가한의 침공2.2.2. 태무제의 유연 친정
2.3. 제1차 북하 정벌2.4. 제2차 북하 정벌
2.4.1. 통만성 함락2.4.2. 관우(關右) 쟁탈전
2.5. 정령족 선우대양의 난2.6. 제2차 북위-유연 전쟁2.7. 칙륵족의 반란2.8. 제1차 원가 북벌 방어전
2.8.1. 도언지의 북벌2.8.2. 제3차 북하 정벌2.8.3. 활대 전투
2.9. 사도 최호의 율령 정비2.10. 화북 통일
2.10.1. 화룡(和龍) 정벌2.10.2. 휴도족의 난2.10.3. 산호 백룡 토벌2.10.4. 북연의 몰락
2.11. 서역과의 통교2.12. 제3차 북위-유연 전쟁
2.12.1. 막북 원정의 실패2.12.2. 태무제의 북량 정벌2.12.3. 칙련가한의 평성 침공
2.13. 저거무휘의 발호2.14. 구지 쟁탈전2.15. 제4차 북위-유연 전쟁2.16. 토욕혼 정복2.17. 갑오의 반란
2.17.1. 거병2.17.2. 태무제의 멸불2.17.3. 양회의 난2.17.4. 유초의 난
2.18. 서역 장악2.19. 제4차 북위-유연 전쟁2.20. 현호 전투2.21. 국사필화(國史筆禍)2.22. 제2차 원가 북벌 방어전
2.22.1. 송나라의 북진2.22.2. 태무제의 남벌2.22.3. 과보 진격2.22.4. 우이 공성전
2.23. 태자 탁발황의 사망2.24. 종애의 정변
3. 평가4. 참고 문헌5. 둘러보기

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태무제(太武帝)였으며, 휘는 도(燾)였다. 북쪽의 유연, 동쪽의 북연, 서쪽의 북량과 북하, 남쪽의 유송 등 사방의 적대국들을 정복하거나, 혹은 전쟁에서 이기고 439년 화북을 통일하여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불교의 삼무일종법난이라 불리는 4대 법난 중에 선봉이자 필두, 대장으로 불린다. 성격이 용무엄혹(勇武嚴酷), 한마디로 용맹하면서도 칼날처럼 엄청 날카롭고, 혹독한 전형적인 군인 같은 성격을 가진 황제였다.

2. 생애

2.1. 황위에 오르다.

천사 5년(408년), 탁발도는 동궁(東宮)에서 태어났는데, 체격과 용모가 빼어나고 범상치 않았다. 할아버지 도무제가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기뻐하여 말했다.
"나의 대업을 이루어 낼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태상 7년(422년) 4월 2일[3], 아버지 명원제가 탁발도를 태평왕(泰平王)에 봉해졌다. 이후 명원제는 건강이 악화되자 마침내 탁발도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상 7년(422년) 5월, 명원제는 황태자 탁발도로 하여금 정전(正殿)에 거처하며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처리하게 하고, 나라의 부주(副主)라 하였다. 탁발도는 총명하고 도량이 컸으며, 마음이 넓고 막힘이 없었다.

태상 8년(423년) 11월 9일[4], 태무제 탁발도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상 8년(423년) 12월 8일[5], 아버지 탁발사를 '명원황제(明元皇帝)'로 추시하였고, 운중(雲中)의 금릉(金陵)에 장사 지냈으며,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또, 어머니인 귀빈 두씨(杜氏)를 추존하여 '밀황후(密皇后)'라 하였다. 아울러 사도 장손숭의 작위를 올려 북평왕(北平王)에 봉하고, 사공 해근을 의성왕(宜城王), 남전공 장손한을 평양왕(平陽王)에 봉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각각 차등을 두어 널리 작위와 관직을 올려 주었다. 양성공 노노원은 중서감, 회계공 유결은 상서령으로 삼았으며, 사위감 울권과 산기시랑 유고인(劉庫仁) 등 여덟 명에게 네 부(部)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6]

하내진장(河內鎮將) 나결을 시중 · 외도대관으로 삼아, 36조(曹)의 일을 모두 총괄하게 하였다. 나결은 당시 나이가 107세였으나 정신과 기력이 쇠하지 않았는데, 탁발도는 그가 충성스럽고 덕이 있다고 여겨 가까이 두고 신임하였다. 이에 그에게 장추경을 겸하게 하여 후궁의 일을 감독하고 맡게 하였으며, 황제의 침전에도 출입하게 하였다. 훗날 나이가 11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노쇠함을 이유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기병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뒤에 죽었다.

좌광록대부 최호는 경전과 학술을 깊이 연구하고 국가의 제도에 정통하여, 조정의 모든 예법과 군국(軍國)에 관한 문서와 조서 가운데 그가 관여하여 맡지 않는 것이 없었다. 최호는 노자와 장자의 책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했다.
"이것은 성현(聖賢)의 뜻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사실을 꾸며 낸 학설로, 사람의 실제 사정과 맞지 않는다. 노담(老聃)은 예(禮)를 익혔고 중니(仲尼)가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인데, 어찌 법도를 무너뜨리는 책을 지어 선왕(先王)의 정치를 어지럽히려 했겠는가!"
그는 특히 불법(佛法)을 믿지 않아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오랑캐의 신을 섬긴단 말인가!"
탁발도가 즉위하자 황제의 측근들 가운데 최호를 헐뜯는 사람이 많았기에, 탁발도도 어쩔 수 없이 최호에게 공(公)의 신분으로 사저에 돌아가 있게 하였다. 그러나 본래 그의 현명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의심스럽거나 논의할 일이 생길 때마다 곧 불러서 물었다.

처음에 숭산(嵩山)의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있었는데, 구찬의 아우였다. 그는 장도릉(張道陵)의 도술을 닦았으며, 스스로 일찍이 노자가 내려오는 것을 만났는데 노자가 구겸지에게 장도릉의 뒤를 이어 천사(天師)가 되라고 명하였다고 말하였다. 노자는 그에게 곡식을 끊어 먹지 않고 몸을 가볍게 하는 술법과 과계(科戒) 20권을 전해 주고, 도교를 깨끗이 정비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구겸지는 신인(神人) 이보문(李譜文)을 만났는데, 그는 자신을 노자의 현손자라 하였다. 이보문은 도록(圖籙)과 진경(真經) 60여 권을 전해 주면서 북방의 태평진군(太平真君)을 보좌하게 하였고, 천궁정륜지법(天宮靜輪之法)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몇 편은 이군(李君)이 직접 쓴 것이었다. 구겸지는 그 책들을 받들어 탁발도에게 바쳤다. 조정과 민간에서는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나, 최호만은 홀로 구겸지를 스승으로 섬기며 그에게서 도술을 배웠다. 또 글을 올려 그 일을 찬양하고 분명히 밝히며 말했다.
"신(臣)이 듣건대 성왕(聖王)이 천명을 받으면 반드시 하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도 모두 벌레와 짐승의 무늬에 말을 맡겨 뜻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과 귀신이 서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손수 쓴 글이 선명하며 그 말과 뜻이 깊고 오묘한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예로부터 이에 견줄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어찌 세속의 평범한 생각만으로 높은 신령의 명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탁발도는 기뻐하여 알자(謁者)에게 옥과 비단, 제물을 받들어 숭악(嵩岳)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산속에 있던 구겸지의 제자들을 맞아 오게 하여 천사(天師)를 높이 받들고 새로운 법을 크게 드러내어 천하에 반포하게 하였다. 이어 평성(平城) 동남쪽에 천사도장(天師道場)을 세우고, 제단을 다섯 층으로 겹쳐 쌓았으며, 도사 120명에게 의복과 음식을 지급하고, 매달 음식을 마련하여 수천 명이 모이는 잔치를 열었다.

시광 원년(424년) 정월 초하루[7], 탁발도가 연호를 '시광(始光)'으로 개원하였다.

정월 4일[8], 안정왕 탁발미가 사망하였다.

시광 원년(424년) 4월 14일[9], 탁발도가 동쪽을 순행하여 대녕(大寧)에 행차하였다.

시광 원년(424년) 7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2.2. 제1차 북위-유연 전쟁

2.2.1. 모한흘승개가한의 침공

당시 유연에서는 욱구려대단(郁久閭大檀)이 가한의 자리에 올랐다. 욱구려대단은 도무제에 의해 한번 멸망할 뻔한 유연족을 다시 일으킨 가한 욱구려사륜의 막내 숙부인 욱구려복혼(郁久閭僕渾)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별도의 부락을 통솔하며 서쪽 변경에 주둔하였는데, 사람들의 마음을 잘 얻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모한흘승개가한(牟汗紇升蓋可汗)'이라 불렀다. 여기서 '모한흘승개(牟汗紇升蓋)'는 유연어의 발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으로, 그 뜻은 곧 '승리로 이끈다'는 뜻이다. 욱구려대단은 명원제가 붕어하고 태무제 탁발도가 새로 즉위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였다.

시광 원년(424년) 8월, 욱구려대단이 유연족 기병 60,000기를 거느리고 운중(雲中)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며, 성락궁(盛樂宮)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탁발도가 친히 그를 토벌하여 사흘 낮과 이틀 밤 만에 운중에 도착하였다. 욱구려대단의 기병대는 탁발도의 부대를 50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기병들이 탁발도가 탄 말의 머리 가까이까지 바짝 다가와 서로 잇달아 선 모습이 마치 담장과 같았다. 위나라 병사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탁발도는 안색이 평소와 다름없었고, 이에 병사들의 마음도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보다 앞서 욱구려대단의 아우 욱구려대나(大那)가 욱구려사륜과 나라를 다투다가 패하여 위나라로 달아나 귀순한 일이 있었다. 이후 욱구려대단은 욱구려대나의 아들 욱구려어척근(於陟斤)을 부락의 장수로 삼았는데, 군사들이 욱구려어척근을 활로 쏘아 죽이자 욱구려대단은 이를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이때 상서령 유결이 탁발도에게 아뢰었다.
"대단(大檀)은 자신의 병력이 많음을 믿고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 청컨대 농작물 수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두 갈래로 나누고, 동쪽과 서쪽에서 함께 진격하여 그를 토벌하십시오."
탁발도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시광 원년(424년) 9월, 탁발도가 군사들을 대대적으로 선발하고 동쪽 교외에서 군대를 훈련하였다. 여러 군대의 기병 50,000기를 나누어 편성하고 장차 북쪽으로 유연을 토벌하려 하였다.

시광 원년(424년) 12월, 탁발도가 안집장군 장손한과 안북장군 울권에게 북쪽으로 유연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작산(柞山)에 주둔하였다.[10] 유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여러 군대가 추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으며, 말 10,000여 필을 노획하고 돌아왔다.

이달에 탕창왕 양미홀(梁彌忽)이 아들 양미황(梁彌黃)을 보내 위나라에 들어가 탁발도를 알현하게 하였다.

시광 2년(425년) 정월 23일[11], 탁발도가 작산에서 평성으로 돌아와 노획한 여러 종류의 가축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시광 2년(425년) 2월, 모용갈실린(慕容渴悉鄰)이 북평(北平)에서 반란을 일으켜 북평군 치소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북평태수와 북평을 수비하던 장수가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였다.

시광 2년(425년) 3월 1일[12], 과거 탁발도가 태자가 되어 어머니 밀황후 두씨가 사사당했을 때, 탁발도는 아직 어렸다. 명원제는 두씨(竇氏)가 인자하고 선량하며 행실이 올바르다고 여겨, 그녀에게 탁발도를 보살펴 기르게 하였다. 두씨는 은정을 베풀어 탁발도를 보살피고, 예법에 맞게 가르치고 이끌었다. 탁발도는 그 은덕을 고맙게 여겼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존호를 더하여 '보태후(保太后)'로 높였으며, 봉양하기를 친어머니와 다름없이 하였다.

3월 2일[13], 북평왕 장손숭을 태위, 평양왕 장손한을 사도, 의성왕 해근을 사공으로 삼았다.

3월 5일[14], 옛 동궁을 정비하여 만수궁(萬壽宮)으로 만들고, 영안전(永安殿), 안락전(安樂殿) 두 전각과 임망관(臨望觀), 구화당(九華堂)을 세웠다.

이달에 처음으로 새로운 글자 1,000여 자를 만들어 조서를 내렸다.
"옛날 헌원황제(軒轅皇帝)가 처음으로 제도를 만들고 사물을 정비할 때 창힐(倉頡)에게 명하여 새와 짐승이 남긴 자취를 본떠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그 뒤로 시대에 따라 문자를 고쳐 만들었으므로 전서(篆書)·예서(隸書)·초서(草書)·해서(楷書)가 모두 세상에서 함께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전하고 익히는 과정에서 본래의 올바른 형태를 많이 잃어, 글자의 모양이 서로 어긋나고 잘못되었으며 뜻을 서로 맞추어 이해하는 데에도 적절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후세에 본보기와 법칙을 보여 주는 방법이 아니다. 공자(孔子)가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 문자를 제정하여 세상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먼 곳과 가까운 곳에 두루 반포하여 영원히 본보기로 삼게 한다."

시광 2년(425년) 4월, 용양장군 보퇴(步堆)와 알자복야 호근(胡覲)에게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시광 2년(425년) 5월, 경내에 조서를 내려 백성 10호마다 큰 소 한 마리씩을 내게 하여 곡식을 변경의 요새로 운반하게 하였다.

시광 2년(425년) 9월, 영안전과 안락전이 완성되자, 크게 연회를 베풀어 두 전각의 완공을 축하하였다.

2.2.2. 태무제의 유연 친정

시광 2년(425년) 10월, 태무제 탁발도가 서쪽 교외에서 군대를 훈련하였다.

10월 21일[15], 탁발도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몸소 북쪽 정벌에 나섰다. 군대를 동서로 다섯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진격하였는데, 평양왕 장손한 등은 흑막(黑漠) 방면으로 진군하고, 여음공 장손도생은 백막(白漠)과 흑막 사이로 진군하였다. 탁발도는 가운데 길로 진군하고, 동평공 아청은 그보다 서쪽 길을 따라 율원(慄園)에서 진군하였다. 의성왕 해근과 무원후 안원 등은 서쪽 길로 이한산(爾寒山)에서 진군하였다. 이윽고 여러 군대가 사막 남쪽에 이르자 탁발도는 수레와 군수 물자를 남겨 두고, 경기병에게 15일분의 식량만 휴대하게 하여 사막을 가로질러 욱구려대단을 토벌하였다. 욱구려대단의 부락은 크게 놀라 북쪽으로 달아났다.

시광 3년(426년) 정월 22일[16], 탁발도가 북방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노획한 군수 물자를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출정한 자와 남아서 지킨 자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이달에 서진의 왕 걸복치반이 다시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군대로 북하를 침공할 것 권하였다.

시광 3년(426년) 2월, 평성 동쪽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안연을 배향하였다.

당초 탁발도는 왕혜룡을 남만교위로 삼아 여수(汝水)와 영수(潁水) 사이의 지역을 교란하게 하였는데, 송나라에서 무창공 사회가 반란하였을 때 왕혜룡은 그의 원군이 되었다. 왕혜룡은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사릉수(思陵戍)를 함락시켰고, 이어 진격하여 항성(項城)을 포위하였으나, 사회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물러났다.

시광 3년(426년) 5월 13일[17], 중산공 탁발찬의 작위를 올려 왕으로 삼고, 남안공 탁발소는 이전의 작위인 상산왕(常山王)을 회복시켰다.

시광 3년(426년) 6월, 탁발도가 공경들에게 조서를 내려 물었다.
"지금 군사를 써야 하는데, 혁련씨(赫連氏)와 연연(蠕蠕)[18] 두 나라 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해야 하겠는가?"
장손숭, 장손한, 해근이 모두 답하였다.
"혁련씨는 한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므로, 아직 근심거리가 되지는 못하니 연연을 먼저 정벌하는 것만 못합니다. 추격하여 따라잡는다면 크게 노획할 수 있고,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음산(陰山)에서 사냥하여 짐승의 가죽과 뿔을 거두어 군수 물자를 보충하면 됩니다."
태상 최호가 아뢰었다.
"연연은 새처럼 모였다가 짐승처럼 달아납니다. 대군을 일으켜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없고, 경기병으로 추격하면 또 적을 제압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혁련씨의 영토는 사방 1,000리를 넘지 않으며, 정치와 형벌이 잔혹하여 사람과 신 모두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마땅히 먼저 그들을 정벌해야 합니다."
또, 상서 유결과 무경후 안원은 먼저 북연을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탁발도는 운중(雲中)에서 능묘에 참배하고, 서쪽으로 순행하여 오원(五原)에 이르렀으며, 이어 음산에서 사냥한 뒤에 동쪽으로 화두산(和兜山)에 이르렀다.

시광 3년(426년) 7월, 탁발도가 장천(長川)에 기사대(馬射臺)를 쌓았다. 탁발도가 친히 대에 올라 말들이 달리는 모습을 살펴보았고, 왕공(王公)과 여러 나라의 군장(君長)들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았다. 과녁을 맞힌 사람들에게는 각각 차등을 두어 금, 비단, 견직물, 솜을 하사하였다.

시광 3년(426년) 8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송나라의 전중장군 길항(吉恆)이 위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우호를 다졌다.

2.3. 제1차 북하 정벌

시광 3년(426년) 9월, 태무제 탁발도는 북하의 황제 혁련발발이 죽고, 여러 아들들이 서로 해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하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장손숭 등이 모두 반대하여 아뢰었다.
"저들이 만약 성을 지키며 편안히 쉬면서 지친 우리 군대를 기다리고, 대단(大檀)이 이 소식을 듣고 빈틈을 틈타 침입한다면 이는 위험한 길입니다."
이에 탁발도가 구겸지에게 은밀한 징조가 어떠한지를 물으니, 구겸지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폐하의 신묘한 무위(武威)는 시대의 운수에 부응하고, 하늘의 법도가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니, 마땅히 군사로 구주(九州)를 평정하실 것입니다. 문치를 뒤로 하고 무공을 먼저 행하여 태평진군(太平真君)의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최호 또한 아뢰었다.
"지난해 이래 형혹성(熒惑星)이 두 차례 우림(羽林)에 머물렀다가 구기(鉤己)를 지나갔는데, 그 점괘는 진(秦)이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올해는 오성(五星)이 모두 동쪽에 함께 나타났으니, 서쪽을 정벌하는 데 이롭습니다. 하늘의 징조와 사람의 형세가 서로 호응하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장손숭이 끝까지 반대하며 최호와 다투자 탁발도가 크게 노하여, 장손숭이 관직에 있으면서 탐욕스럽게 재물을 취하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꾸짖고 무사들에게 명하여 그의 머리를 움켜잡아 땅에 처박듯이 눌러 욕보이게 하였다. 이어 탁발도는 중서박사 이순에게 선봉군을 총괄하게 하려 하며, 최호에게 이에 대해 의견을 묻자, 최호가 아뢰었다.
"이순에게 참으로 계책과 지략은 있으나, 신(臣)은 그의 집안과 사돈 맺은 사이여서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는 거취를 결정하는 데 매우 단호하여 믿고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습니다."
이에 탁발도가 그만두니, 이로 인해 이순과 최호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사공 해근에게 군사 45,000명을 거느리고 포판(蒲阪)을 습격하게 하고, 송병장군 주기에게 10,000명을 거느리고 섬성(陝城)을 습격하게 하였으며, 하동태수(河東太守) 설근을 길잡이로 삼았다.

시광 3년(426년) 10월 11일[19], 탁발도가 서쪽 정벌에 나서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군자진(君子津)에 이르렀다. 마침 날씨가 갑자기 몹시 추워져 며칠 만에 황하의 강물이 얼어붙었다.

시광 3년(426년) 11월 3일[20], 탁발도가 경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북하의 도읍 통만성(統萬城)을 기습하였다.

11월 7일[21], 동지(冬至)였기에 북하의 황제 혁련창이 마침 여러 신하와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탁발도의 군대가 들이닥치자 위아래가 모두 놀라 소란에 빠졌다. 탁발도는 통만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흑수(黑水)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혁련창이 성 밖으로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물러나 성 안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성문이 아직 닫히기도 전에 위나라의 내삼랑 두대전(豆代田)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승세를 타서 서궁(西宮)으로 들어가 서쪽 문을 불태웠다. 궁문이 닫히자 두대전은 궁궐 담장을 넘어 밖으로 빠져나왔고, 탁발도는 두대전을 용무장군(勇武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위나라군은 밤에 성 북쪽에서 숙영하였다.

11월 8일[22], 탁발도가 병력을 나누어 사방으로 약탈하게 하여 수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소와 말 10여만 마리를 얻었다. 이후 탁발도가 여러 장수에게 말했다.
"통만(統萬)은 아직 차지할 수 없다. 다른 해에 마땅히 경들과 함께 이곳을 빼앗겠다."
이에 그곳 백성 10,000여 호를 위나라로 이주시켰고, 조산(祚山)에 이르러 노획한 물품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한편 북하의 홍농태수(弘農太守) 조달(曹達)은 주기가 장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지도 않은 채 달아났다. 주기는 승세를 타고 멀리까지 곧장 진격하여 마침내 삼보(三輔)에 들어갔으나, 마침 군중에서 급사하여 군대가 진격을 멈추었다. 포판을 수비하던 북하의 동평공 혁련을두(赫連乙斗)는 해근이 장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통만에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하지만 사신이 통만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탁발도가 이미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사신이 돌아와 혁련을두에게 통만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오보를 전달하니, 혁련을두는 두려워하여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장안(長安)에 달아났고, 해근은 마침내 포판을 함락시켰다. 혁련창의 아우 혁련조흥(赫連助興)은 앞서 장안을 지키고 있었는데, 혁련을두가 도착하자 혁련조흥과 함께 장안을 버리고 서쪽 안정(安定)으로 달아났다.

시광 3년(426년) 12월, 탁발도는 해근에게 서쪽으로 진군하여 장안을 점거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강족, 저족이 모두 혁련창을 배반하고 해근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북량의 하서왕 저거몽손과 후구지의 저왕 양현(楊玄)도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사신을 보내 위나라에 귀부하였다.

위나라가 처음 중산(中山)을 함락시키고 중원을 차지했을 때에는 백성들 가운데 도망하여 숨어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도무제는 천흥 연간에 조서를 내려 호적에서 빠진 사람들을 찾아내어 비단을 거두게 하였다. 이에 스스로 주(紬)·료(癆)·라(羅)·곡(縠)을 생산하는 호(戶)라고 신고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이들은 군현(郡縣)에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금과 부역의 부담이 고르지 못하였다. 이해에 이르러 탁발도가 처음으로 조서를 내려 이러한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해당 호들을 군현에 소속시키게 하였다.

시광 4년(427년) 정월 11일[23], 탁발도가 서쪽 정벌을 마치고 평성으로 돌아왔다. 수도에 남아 있던 문무 관리들에게 포로로 잡아 온 사람·비단·말·소를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다만 통만에서 이주시킨 백성들은 길에서 많이 죽어, 평성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열 명 가운데 겨우 여섯이나 일곱 명뿐이었다.

정월 25일[24], 탁발도가 유주(幽州)에 행차하였다. 이때 북하의 황제 혁련창이 평원공 혁련정에게 군사 20,000명을 주어 장안을 탈환하게 하니, 탁발도가 이 소식을 듣고 음산(陰山)에서 나무를 베게 하여 공성 기구를 대대적으로 만들고, 다시 북하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시광 4년(427년) 2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2.4. 제2차 북하 정벌

2.4.1. 통만성 함락

시광 4년(427년) 3월 3일[25], 고량왕 탁발예(拓跋禮)를 보내 장안을 지키게 하고, 집금오 환대(桓貸)에게 조서를 내려 군자진에 다리를 놓게 하였다.

3월 4일[26], 태무제 탁발도의 숙부인 광평왕 탁발연이 사망하였다.

시광 4년(427년) 4월 4일[27], 원외산기상시 보퇴와 알자복야 호근 등에게 조서를 내려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이달에 군대를 훈련하고 무예를 익히게 한 뒤 여러 군대를 나누어 편성하였다. 사도 장손한, 정위 장손도생, 종정 아청의 기병 30,000기를 선봉으로 삼고, 상산왕 탁발소, 태복 구퇴, 장군 원태비(元太毗)의 보병 30,000명을 후속군으로 삼았다. 남양왕 탁발복진(拓跋伏眞), 집금오 환대, 장군 요황미의 보병 30,000명에게 공성 기구를 맡게 하고, 장군 하다라(賀多羅)의 정예 기병 3,000기를 선발 정찰대로 삼았다.

시광 4년(427년) 5월, 탁발도가 서쪽으로 혁련창을 정벌하러 나섰다.

5월 9일[28], 탁발도가 군자진에서 황하를 건넜다. 이어 발린산(拔鄰山)에 머물러 성을 쌓고, 치중을 남겨 둔 뒤 경기병 30,000기를 거느리고 하루에 두 배의 거리를 달려 먼저 진군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간하였다.
"통만성(統萬城)은 견고하여 하루아침에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경무장한 병력만으로 이를 치러 간다면, 진격해서는 이길 수 없고 물러나도 의지할 물자가 없습니다. 보병과 공성 기구를 함께 한꺼번에 이끌고 가는 것만 못합니다."
탁발도가 말했다.
"용병의 방법 가운데 성을 공격하는 것은 가장 하책으로, 반드시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비로소 쓰는 것이다. 지금 보병과 공성 기구를 모두 이끌고 진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두려워하여 굳게 지킬 것이다. 만약 공격해도 제때 함락시키지 못하면 식량은 다하고 병사들은 지치며, 바깥에서는 약탈하여 보충할 곳도 없어 진퇴할 곳이 없게 되니, 경기병만으로 곧장 그 성 아래까지 가는 것만 못하다. 저들이 보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이 반드시 느슨해질 것이다. 내가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 그들을 유인하면, 저들이 혹시 성 밖으로 나와 싸운다면 곧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 군사들이 집에서 2,000여 리나 떨어져 있고, 또 큰 강까지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지에 두어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병력으로 성을 공격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결전을 벌이기에는 충분하다."
마침내 그대로 진군하였다. 이때 삼성(三城)의 호인(胡人) 추장 작자(鵲子)가 부락을 이끌고 귀부하였다.

5월 26일[29], 탁발도가 흑수(黑水)에 이르러 친히 하늘에 기도하고 조종(祖宗)의 신령에게 고한 뒤 군사들에게 맹세하게 하였다.

시광 4년(427년) 6월 1일[30], 탁발도가 통만성에 이르러 군사를 나누어 깊은 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적은 병력만을 거느리고 성 아래에 이르렀다. 이때 북하의 장수 적자옥(狄子玉)이 탁발도에게 항복하고 말했다.
"하주(夏主)는 위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평원공 혁련정을 불렀는데, 혁련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만은 견고하고 험하여 쉽게 공격해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제가 해근을 사로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가서 안팎에서 함께 공격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하주는 성을 굳게 지키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탁발도는 이를 걱정하여 군대를 물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아청과 영창왕 탁발건에게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통만 인근의 민가를 약탈하게 하였다. 당시 위나라 진영의 병사 가운데 죄를 짓고 달아나 북하로 투항한 자가 있었는데, 그가 혁련창에게 말했다.
"위군(魏軍)은 군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이 나물을 뜯어먹고 있으며, 치중은 후방에 있고 보병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서둘러 공격해야 합니다."
혁련창은 그 말을 따랐다.

6월 2일[31], 북하의 황제 혁련창이 직접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오자, 장손한 등이 모두 말했다.
"하(夏)나라의 보병 진형은 무너뜨리기 어려우므로,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
이에 탁발도가 말했다.
"내가 멀리까지 온 것은 적과 싸우기 위해서이며, 오직 그들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을 뿐이다. 지금 이미 나왔는데 도리어 피하여 공격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기세가 오르고 우리는 약해질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병력을 거두어 거짓으로 달아나면서 적을 끌어내어 지치게 하였다. 그러자 하나라 군대는 좌우 양익을 펼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기세 좋게 위나라군을 추격하였다. 그렇게 5~6리를 나아갔을 때 마침 동남쪽에서 비바람이 불어와 모래를 날리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환관 조예(趙倪)는 방술(方術)을 제법 알고 있었는데, 탁발도에게 보고하였다.
"지금 비바람이 적의 쪽에서 불어오니 우리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저들은 바람을 등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장수와 병사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기병을 거두어 피하셨다가 다른 날을 다시 기다리십시오."
최호가 이를 듣고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천 리를 달려와 승리를 거두려 하는데, 어찌 하루 사이에 계책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적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욕심을 내어 멈추지 않고 있으므로 후속 부대와 이미 단절되었다. 마땅히 군사를 숨겨 나누어 출동시켜 뜻하지 않은 틈을 덮쳐 공격해야 한다. 바람의 쓰임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일정한 형세가 있겠는가!"
이에 탁발도가 외쳤다.
"좋다!"
이어 기병을 좌우 두 부대로 나누어 적을 양쪽에서 견제하며 공격하게 하였다. 한창 전투 중에 탁발도가 탄 말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탁발도도 말에서 떨어졌고, 거의 북하군에게 사로잡힐 뻔하였다. 그때 열황제 탁발예괴의 현손자인 탁발제가 자신의 몸으로 탁발도를 가려 보호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우자 북하의 군사들이 비로소 물러났다. 이후 탁발도는 다시 말에 올라 북하의 상서 곡려문(斛黎文)을 찔러 죽였고, 아울러 북하의 기병 10여 명을 죽이며 전장을 누볐다. 자신도 날아온 화살을 맞았으나, 분전하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북하군은 크게 무너져 달아났다.

위나라군은 승세를 타고 황제 혁련창을 추격하여 성 북쪽에 이르렀고, 혁련창의 아우 하남공 혁련만(赫連滿)과 그의 조카 혁련몽손(赫連蒙遜)을 죽였다. 이때 전사한 북하군은 10,000여 명에 달하였다. 혁련창은 끝내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휘하의 기병 수백 기만 거느려 서남쪽으로 달아나 상규(上邽)로 들어갔다. 탁발도는 달아나는 적을 조금 뒤쫓다가 통만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탁발제가 한사코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탁발도가 입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하 사람들이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성문을 걸어 잠갔다. 이에 탁발도는 탁발제 등과 함께 궁중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아녀자의 치마를 얻어 창대 위에 묶었고, 탁발도는 그것을 타고 올라가 가까스로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침 날이 저물자 북하의 상서복야 문지(問至)가 혁련창의 모친을 모시고 성을 빠져나가 달아났다.[32] 한편 장손한은 기병 8,000기를 거느리고 혁련창을 추격하여 고평(高平)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6월 3일[33], 탁발도가 재차 통만성에 들어가 혁련창의 여러 아우와 그들의 여러 모친, 자매, 처, 첩 및 궁인(宮人) 수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관부와 창고에 있던 보물, 수레. 깃발, 기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얻었다. 탁발도는 혁련창의 궁인과 포로, 금·은·진귀한 보물·비단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북하의 초대 황제 혁련발발은 성품이 호방하면서도 사치스러워, 통만성을 축성할 때 성벽의 높이는 10인(仞)이었고, 기초 부분의 두께는 30보, 위쪽의 너비는 10보였으며, 궁궐 담장의 높이는 5인이었다. 그 견고함은 칼과 도끼를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또, 누대와 정자는 웅장하고 거대하였으며, 모두 조각을 새기고 그림을 그린 뒤 화려한 비단과 수놓은 천으로 덮어 장식의 화려함을 극도로 다하였다. 탁발도가 이를 구경하고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처럼 작은 나라가 백성을 이렇게 부려먹었으니, 망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통만성을 함락시킨 탁발도는 북하의 태사령 장연과 서변(徐辯)을 얻었는데, 그들을 다시 태사령으로 임용하였다. 또, 동진이 멸망하기 전에 북하군에게 사로잡혀 포로로 있던 장수 모수지와 서진의 장수 고락간(庫洛干)을 얻었는데, 고락간은 서진으로 돌려보냈고, 모수지는 요리를 잘하였으므로 태관령(太官令)으로 삼았다. 탁발도는 북하의 저작랑 조일이 지은 글을 보았는데, 그 글에서 혁련창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을 보고 노하여 말했다.
"이놈은 도리가 없구나. 어찌 감히 이와 같이 썼는가! 누가 지은 것이냐? 당장 조사하라!"
최호가 만류하며 아뢰었다.
"글을 짓는 선비들이 사람을 칭찬하거나 비판할 때에는 실제보다 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부득이하여 그렇게 쓴 것일 터이니, 죄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에 그만두었다. 이후 탁발도는 혁련발발의 세 딸을 받아들여 모두 귀인(貴人)으로 삼았다.

이때 해근은 북하의 평원공 혁련정과 장안에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었다. 탁발도는 종정 아청과 태복 구퇴에게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관우(關右)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다. 혁련정은 통만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상규로 달아났고, 해근은 옹(雍)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청과 구퇴는 북하의 이성(貳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상황이 정리되자 탁발도는 해근 등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자, 해근이 글을 올려 아뢰었다.
"혁련창은 달아나 상규(上邽)를 지키면서 패잔병을 모으고 있으나, 아직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버틸 만한 기반은 없습니다. 지금 그가 위태로운 틈을 타서 멸망시키는 것은 쉽습니다. 청컨대 갑옷과 말을 더 주시면 혁련창을 평정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해근이 거듭 강하게 청하자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해근에게 군사 10,000명을 더해 주고, 장군 유발(劉拔)을 보내 말 30필을 전달하게 하였다. 아울러 아청과 구퇴를 그대로 관우에 머물게 하여 해근과 함께 북하를 공략하게 하였다.

6월 19일[34], 탁발도에서 동쪽으로 돌아오면서 상산왕 탁발소를 정남대장군으로 삼고, 집금오 환대, 막운과 함께 통만에 남아 지키게 하였다.

시광 4년(427년) 7월 7일[35], 조령(祚嶺)에 단을 쌓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놀이를 하였다.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힌 사람들에게는 금·비단·견직물·솜을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이때 유연이 운중(雲中)을 침공하였으나, 혁련창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되돌아 달아났다.

시광 4년(427년) 8월 11일[36], 탁발도가 서쪽 정벌을 마치고 평성으로 돌아왔다. 개선 의식을 거행하고 공훈을 기록하여 종묘(宗廟)에 고하였으며, 노획한 군수 물자를 수도에 남아 있던 백관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2.4.2. 관우(關右) 쟁탈전

시광 4년(427년) 9월 26일[37], 안정(安定)의 백성들이 성 전체를 들어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시광 4년(427년) 11월, 태무제 탁발도가 사마 공손궤에게 대홍려를 겸하게 하여, 절(節)을 지니고 가서 책서를 내려 저왕 양현을 가정남대장군 · 도독형·양·익·녕4주제군사(都督荊梁益寧四州諸軍事) · 양주자사(梁州刺史) · 남진왕(南秦王)으로 삼게 하였다. 공손궤가 양현의 경내에 이르렀으나 양현이 나와 맞이하지 않았으니, 공손궤가 그를 꾸짖고 책서를 받들어 그대로 돌아가려 하자, 양현은 두려워하여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탁발도는 이를 잘했다고 여겨 공손궤를 상서로 삼았다.

시광 4년(427년) 12월, 탁발도가 중산(中山)에 행차하였다. 지방 수령 가운데 탐욕스럽게 재물을 취하고 부정을 저질러 파면된 사람이 십수 명이었다. 이후 탁발도는 평성으로 돌아와 지나온 지역의 전조(田租)를 절반 면제하였다.

시광 5년(428년) 정월 2일[38], 탁발도의 숙부 경조왕 탁발려가 사망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2월, 정주(定州)에서 흰 사슴이 잡히자, 탁발도는 연호를 '신가(神䴥)'로 고쳤다.

당시 위나라의 평북장군 울권이 상규에서 북하의 황제 혁련창을 압박하자, 혁련창은 물러나 평량(平涼)에 주둔하였다. 이때 사공 해근은 안정(安定)으로 진군하여 구퇴와 아청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해근의 말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많았고 병사들은 식량이 부족하였으므로, 깊이 진지를 구축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그리고 구퇴를 보내 민간에서 조세를 거두게 하였는데, 병사들이 함부로 약탈하면서 경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혁련창이 이를 습격하자 구퇴의 군대가 패하였고, 구퇴는 기병 수백 기만을 거느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혁련창은 승세를 타고 날마다 성 아래까지 와서 약탈하였다. 위나라군은 꼴을 구하거나 말을 방목할 수도 없게 되자 여러 장수가 이를 걱정하였다. 감군시어사 안힐이 해근에게 말했다.
"우리는 적을 멸하라는 조서를 받고 왔는데, 지금 도리어 적에게 곤궁하게 되어 궁지에 몰린 성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습니다. 적에게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법에 걸려 처형될 것이니, 나아가든 물러나든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왕공(王公)께서는 태연히 계시면서 어찌 일찍이 대책을 세우려 하지 않으십니까?"
해근이 답하였다.
"지금 병사들이 탈 말이 없는데, 보병으로 기병을 공격해서는 반드시 이길 도리가 없다. 마땅히 경사(京師)에서 구원을 청해 기병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 공격해야 한다."
안힐이 다시 말했다.
"지금 사나운 적이 밖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고, 우리 병사들은 지쳤으며 식량도 다했습니다. 한 번 결전을 벌이지 않는다면 죽음이 아침저녁으로 닥칠 터인데, 어느 세월에 구원을 기다리겠습니까! 어차피 죽게 될 바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해근이 다시 말이 적다는 것을 이유로 들자, 안힐이 이어 말했다.
"지금 여러 장수가 타고 있는 말을 모으면 200필은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을 모집하여 나가 공격하겠습니다. 설령 적을 격파하지 못하더라도 그 예봉을 꺾을 수는 있습니다. 또 혁련창은 성급하면서도 꾀가 없고, 용맹을 좋아하면서도 경솔합니다. 매번 스스로 나와 싸움을 걸기 때문에, 병사들이 모두 그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갑자기 공격한다면 혁련창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해근은 여전히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에 안힐은 몰래 울권 등과 모의하여 기병을 선발해 두고 기다렸다.

얼마 뒤, 혁련창이 성을 공격하러 오자 안힐이 나가 맞섰다. 혁련창이 직접 진형 앞으로 나와 육박전을 벌이자, 위나라 병사들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마침 큰바람이 불어 먼지가 일어나 대낮에도 어두워졌는데, 혁련창은 패하여 달아났고, 안힐이 그를 추격하였다. 그때 혁련창이 탄 말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혁련창도 떨어졌고, 마침내 안힐이 그를 사로잡았다. 혁련창의 남은 무리는 평량으로 달아나 그의 아우 혁련정을 북하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3월 5일[39], 시중 고필에게 조서를 내려 혁련창을 맞아 오게 하였다.

3월 13일[40], 고필 등이 혁련창을 데리고 평성으로 왔다. 탁발도는 그를 서궁(西宮)에 머물게 하였으며, 궁문 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은 모두 황제용으로 마련해 둔 예비품을 지급하였다. 또 자신의 누이인 시평공주(始平公主)를 혁련창에게 시집보냈고, 혁련장을 임시로 상충장군(常忠將軍)으로 삼았으며, 회계공(會稽公)에 봉하였다. 이어 안힐을 건절장군으로 삼고 서평공(西平公)에 봉하였으며, 울권을 녕북장군으로 삼고 작위를 올려 어양공(漁陽公)에 봉하였다.

탁발도는 혁련창을 자신의 곁에서 시종하게 하면서, 때때로 그와 단둘이 말을 타고 함께 사슴을 쫓아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가곤 하였다. 혁련창은 본래 용맹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여러 장수가 모두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탁발도가 그들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천명(天命)은 정해진 바가 있는데, 또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혁련창을 친근하게 대우하기를 처음과 다름없이 하였다.

한편 해근은 자신이 원수(元帥)인데 혁련창이 휘하의 장수에게 사로잡힌 것을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치중을 거두어 두고, 3일분의 식량만 휴대한 채 평숙(平淑)에 있는 혁련정을 추격하였다. 아청은 물길을 따라 진군하려 하였으나, 해근은 따르지 않고 북쪽 길로 가서 혁련정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이윽고 마모령(馬髦嶺)에 이르렀는데, 북하군이 달아나려 하던 차에 마침 위나라의 하급 장수 하나가 죄를 짓고 도망하여 북하에 투항하면서, 위나라군은 식량이 적고 물도 없다고 알려 주었다. 이에 혁련정은 병력을 나누어 해근을 가로막고 앞뒤에서 협공하였다. 위나라군은 크게 무너졌고, 해근과 아청, 유발이 모두 북하군에게 사로잡혔으며, 병사 가운데 죽은 사람이 6~7,000명에 이르렀다. 구퇴는 안정(安定)에서 치중을 지키고 있었는데, 해근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치중을 버리고 장안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다시 고량왕 탁발예와 함께 포판으로 달아났고, 혁련정은 장안을 수복하였다. 탁발도는 크게 노하여 안힐에게 명해 구퇴를 참수하게 하고, 그 군대를 대신 거느려 포판에 주둔하면서 북하군을 막게 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4월, 북하의 황제 혁련정이 사신을 보내 위나라에 화친을 청하자, 탁발도는 거부하고 조서를 내려 그를 타일러 항복을 권하였다.

4월 15일[41], 탁발도가 서쪽을 순행하였다.

4월 21일[42], 하서(河西)에서 사냥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2.5. 정령족 선우대양의 난

신가 원년(428년) 6월 1일[43], 병주(幷州)의 호인(胡人) 추장 복전(卜田)이 반란을 모의하다가 처형되자 남은 무리가 불안해하였다. 태무제 탁발도는 회남공 왕근에게 조서를 내려 여사(慮虒)에 주둔하면서 그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6월 18일[44], 탁발도가 장천(長川)에 행차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7월, 평성으로 돌아왔다.

신가 원년(428년) 8월, 탁발도가 동쪽으로 광녕(廣寧)에 행차하여 온천에 이르러 살펴보았고, 태뢰(太牢)의 제물로 황제(黃帝)·요(堯)·순(舜)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유연의 가한 욱구려대단이 아들에게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변경의 요새 안으로 침입하게 하여 변경의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한 뒤 달아나게 하였다. 위나라에 귀부한 고차국에서 이를 추격하여 격파하였고, 탁발도도 광녕에서 돌아와 그들을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달에 상락(上洛)의 파족 수령 천오촉(泉午觸) 등 10,000여 호가 위나라에 귀부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9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신가 원년(428년) 10월 10일[45], 탁발도가 북쪽을 순행하였다.

10월 18일[46], 우천(牛川)에서 사냥하였다. 이때 송나라의 회북진장 왕중덕(王仲德)이 보병과 기병 2,000여 명을 보내 제양(濟陽)과 진류(陳留)를 침공하였다.

이달에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신가 원년(428년) 윤달 10월 17일[47],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이 다시 장군 왕현모와 연주자사(兗州刺史) 축영수(竺靈秀)에게 보병과 기병 2,000명을 거느리고 형양(滎陽)을 침공하여 장차 호뢰(虎牢)를 습격하게 하였다. 예주(豫州)에서 군사를 보내 영격하자 이들은 달아났다. 이때 상군(上郡) 도각부의 외힐귀(隗詰歸)가 10,000여 호를 거느리고 위나라에 귀부하였다.

이달에 정주(定州)의 정령족인 선우대양(鮮于臺陽)과 적교(翟喬) 등 2,000여 호가 반란을 일으켜 서산(西山)으로 들어가 군현을 약탈하였다. 정주의 군대가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패하니, 탁발도는 진남장군 · 수광후 숙손건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11월, 탁발도가 하서(河西)에 행차하여 대대적으로 사냥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12월 21일[48],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이해에 황자 탁발황이 태어났다.

신가 2년(429년) 정월, 북하의 황제 혁련정의 아우인 주천공 혁련준(赫連俊)이 평량에서 빠져나와 위나라에 귀순하였다. 이때 선우대양 등이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귀순하자, 탁발도가 조서를 내려 그들을 사면하였다.

신가 2년(429년) 2월, 상당(上黨)의 이우(李禹)가 무리를 모아 태수를 죽이고 스스로 '무상왕(無上王)'이라 칭하며 장수들을 임명하였다. 하내(河內)의 수장(守將)이 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이우는 달아나 산속으로 들어갔으나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압송되어 이내 참수되었다.

2.6. 제2차 북위-유연 전쟁

신가 2년(429년) 4월, 태무제 탁발도가 유연을 정벌하고자 남쪽 교외에서 군대를 훈련하였다.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군대를 편성하고 대열과 진형을 정비하였다. 조정 안팎의 여러 신하가 모두 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보태후도 한사코 이를 만류하였으나, 오직 최호만은 출정을 권하였다. 상서령 유결 등은 함께 태사령 장연과 서변을 내세워 탁발도에게 아뢰었다.
"금년은 기사년(己巳年)으로, 삼음(三陰)의 해입니다.[49] 해와 달의 운행에서도 음(陰)이 거듭되고, 태백성(太白星)이 서쪽에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북쪽을 정벌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며, 설령 이기더라도 폐하께 이롭지 않습니다."
여러 신하도 이에 함께 그 말을 지지하며 말했다.
"장연 등은 젊었을 때 일찍이 부견(苻堅)이 남쪽을 정벌하려 할 때 간한 적이 있으나, 부견이 따르지 않아 패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은 맞지 않은 적이 없으니,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탁발도는 마음이 매우 불쾌하여, 최호에게 조서를 내려 장연 등과 자신의 앞에서 논쟁하게 하였다. 이에 최호가 장연과 서변을 따져 물으며 말했다.
"양(陽)은 덕(德)이 되고 음(陰)은 형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일식이 있으면 덕을 닦고, 월식이 있으면 형벌을 바로잡습니다. 왕이 형벌을 시행할 때 작은 죄라면 저잣거리와 조정에서 집행하고, 큰 죄라면 들판에 군사를 늘어세워 집행합니다. 지금 군사를 출동시켜 죄 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형벌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천문을 살펴보니, 근년 이래 달이 운행하면서 앙성(昂星)을 가리는 일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점괘에 따르면 3년 안에 천자가 모두(旄頭)의 나라를 크게 격파한다고 합니다. 연연(蠕蠕)과 고차(高車)가 바로 모두(旄頭)의 무리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장연과 서변이 다시 말했다.
"연연(蠕蠕)은 멀리 황량한 변경 밖에 있는 쓸모없는 무리입니다. 그 땅을 얻어도 농사지어 먹고살 수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신하로 삼아 부릴 수 없는데, 움직임이 빠르고 일정한 거처가 없어 붙잡아 제압하기도 어렵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하기에 병사와 말을 수고롭게 하면서까지 그들을 정벌하려 하십니까?"
최호가 말했다.
"장연과 서변이 천도(天道)를 말하는 것은 그래도 그들의 직분에 해당하지만, 사람의 일과 현실의 형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이런 말은 한(漢)나라 때부터 늘 해 오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를 오늘날에 적용하면 실제 형편과 크게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연연은 본래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신하였으나, 중간에 배반하여 떠난 것입니다. 지금 그 우두머리 악인들을 처벌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거두어 다시 예전처럼 우리를 위해 복역하게 한다면, 어찌 쓸모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장연과 서변이 술수에 통달하여 성패를 분명히 판단한다고 말합니다. 신(臣)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얼마 전 통만(統萬)이 아직 떨어지기 전에, 패망할 징조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만약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면 불충한 것입니다."
당시 혁련창이 자리에 함께 있었고, 장연 등은 자신들이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끝내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탁발도는 크게 기뻐하였다.

논의를 마친 뒤, 대신 가운데 어떤 이가 최호를 나무라며 말했다.
"지금 남쪽의 적이 우리나라의 빈틈을 엿보고 있는데, 그들을 내버려 두고 북쪽을 정벌하려 하십니다. 만약 연연(蠕蠕)이 멀리 달아나 앞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뒤에서는 강한 적이 침입해 온다면 장차 무엇으로 대처하겠습니까?"
최호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먼저 연연(蠕蠕)을 격파하지 않으면 오히려 남쪽의 적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통만(統萬)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떠들며 병력을 동원하여 회북(淮北)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연을 격파하고 왕복하는 동안에는 남쪽의 적이 반드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저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입니다. 저들이 북쪽으로 올 수 있다면 우리도 남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저들에게는 매우 힘들지만 우리에게는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남과 북은 풍속이 서로 다르고, 수로와 육로에 적응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설령 우리나라가 하남(河南)을 저들에게 내준다 하더라도 저들은 그곳을 지킬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유유(劉裕)처럼 뛰어난 인물도 관중(關中)을 병합한 뒤 자신이 아끼는 아들을 그곳에 남겨 두고 훌륭한 장수들로 보좌하게 하였으며 정예병 수만 명까지 두었지만, 그래도 지켜 내지 못하고 군대 전체가 전멸하였습니다. 통곡하는 소리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았다고 할 정도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유의륭(劉義隆)과 신하들은 유유 때와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우리 주상께서는 영명하고 용맹하시며 병사와 말도 정예롭고 강합니다. 저들이 정말로 온다면 망아지와 송아지를 몰아 호랑이와 이리를 상대하게 하는 것과 같을 뿐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연연은 자신들이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믿고 우리나라의 힘으로는 자신들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마음을 놓고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무리를 흩어 가축을 방목하다가 가을에 가축이 살찌면 비로소 다시 모입니다. 추운 곳을 등지고 따뜻한 곳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침략하고 약탈합니다. 지금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틈을 갑자기 덮치면 반드시 우리 군대가 일으키는 먼지만 바라보고도 놀라 흩어질 것입니다. 수말은 암말을 지키려 하고, 암말은 망아지를 떠나지 않으려 하므로 급히 달아나게 몰아붙여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물과 풀이 없으면 불과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반드시 한곳에 모여 지치고 곤궁해질 것이니, 한 번의 공격으로 섬멸할 수 있습니다. 잠시 수고하여 영원한 안정을 얻는 것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폐하께서 이런 뜻이 없으신 경우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도사 구겸지가 최호에게 물었다.
"연연을 정말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최호가 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여러 장수가 자잘한 일에 매여 앞뒤를 걱정하다가 승세를 타고 깊숙이 진격하지 못하여 한 번에 완전히 쓸어버리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이에 앞서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위나라의 사신이 돌아갈 때 탁발도에게 전하게 하였다.
"너는 서둘러 하남(河南) 땅을 나에게 돌려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장차 우리 장수와 병사들의 힘을 모조리 쏟아붓겠다."
탁발도는 마침 유연을 정벌할 일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공경들에게 말했다.
"저 거북이 같은 남쪽 땅의 어린놈이, 자기 몸 하나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설령 정말로 쳐들어올 수 있다 하더라도, 먼저 연연을 멸하지 않는다면 이는 가만히 앉아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며 앞뒤로 적을 맞는 셈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나는 출정하기로 이미 결정하였다."

4월 29일[50], 탁발도가 평성에서 출발하면서 북평왕 장손숭과 광릉공 누복련을 남겨 수도를 지키게 하였다. 탁발도는 직접 동쪽 길로 흑산(黑山)을 향하고, 평양왕 장손한에게는 서쪽 길로 대아산(大娥山)을 향하게 하여, 함께 유연의 본거지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신가 2년(429년) 5월 16일[51], 탁발도가 막남(漠南)에 이르러 치중을 남겨 두고, 경기병을 거느리되 한 명마다 여분의 말 한 필씩을 갖추게 하여 유연을 습격하고 율수(慄水)에 이르렀다. 유연의 모한흘승개가한 욱구려대단은 이전부터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고, 백성과 가축이 들판에 가득하였는데, 위나라군이 갑자기 닥치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한편 그의 아우 욱구려필려(郁久閭匹黎)는 이전부터 동부(東部)를 맡고 있었는데, 위나라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무리를 거느려 형에게 합류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장손한을 만났고, 장손한이 길을 막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으며, 그들의 대인(大人) 수백 명을 죽였다. 욱구려대단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자신의 종족과 무리를 거느리고 거처를 불태운 뒤 자취를 끊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며,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유연의 여러 부락은 사방으로 흩어져 산과 골짜기에 숨어들었고, 가축들은 들판에 널려 있었으나 돌보거나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 탁발도는 율수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후한의 장군 두헌이 세웠던 옛 보루를 지나갔다.

신가 2년(429년) 6월, 탁발도가 면원수(免園水)에 머물렀는데, 평성에서 3,700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때 군대를 나누어 수색하고 토벌하게 하였는데, 동쪽으로는 한해(瀚海)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장액수(張掖水)에 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연연산(燕然山)을 넘었다. 그 범위는 동서로 5,000여 리, 남북으로 3,000리에 이르렀다. 고차의 여러 부락은 욱구려대단의 종족들을 죽이고, 전후하여 귀순한 사람이 30여 만에 이르렀다. 적의 수급과 포로 및 군마를 합하여 100여만을 노획하였다. 이후 탁발도는 약수(弱水)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탁야산(涿邪山)에 이르렀다. 여러 장수는 너무 깊이 들어가면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탁발도에게 그곳에 머물러 더 나아가지 말 것을 권하였다. 구겸지는 최호가 했던 말을 탁발도에게 아뢰었으나, 탁발도는 장수들의 말을 따라 머물렀다.

신가 2년(429년) 7월, 탁발도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흑산(黑山)에 이르러 노획한 물품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얼마 뒤 항복한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가한(可汗)은 이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위군(魏軍)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마침내 궁려(穹廬)를 불태우고, 수레에 몸을 싣고 수백 명을 거느려 남산(南山)으로 들어갔습니다. 백성과 가축은 궁지에 몰려 한데 모여 있었으나 아무도 통솔하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 군대와의 거리는 180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추격군이 오지 않자 비로소 천천히 서쪽으로 달아났고, 오직 이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뒤에 양주(涼州)의 호인(胡人) 상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만약 다시 이틀만 더 전진했더라면 그들을 모조리 섬멸했을 것입니다."
이에 탁발도는 최호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한편 욱구려대단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그의 아들 욱구려오제(郁久閭吳提)가 즉위하여 '칙련가한(敕連可汗)'이라 칭하였다.[52]

신가 2년(429년) 8월, 탁발도가 막남(漠南)에 이르러 고차의 동부(東部)가 이니피(已尼陂)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는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고 위나라 진영에서 1,000여 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상서좌복야 안원 등에게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고차의 여러 부락 가운데 나와서 항복한 자가 수십만 부락에 이르렀으며, 말·소·양 100여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신가 2년(429년) 10월, 탁발도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고 평성으로 돌아와 종묘에 승전을 고하였다. 새로 귀부한 백성들을 막남(漠南)에 곳곳마다 배치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유원(濡源)에서 서쪽으로는 오원(五原),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3,000리에 걸친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하면서 그들에게서 공물과 세금을 거두었다. 탁발도는 사도 · 평양왕 장손한, 상서령 유결, 상서좌복야 안원, 시중 고필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지키고 위무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위나라에서는 말·소·양과 양탄자, 모피의 값이 싸졌다.

탁발도는 최호에게 시중 · 특진 · 무군대장군 관직을 더하여, 그가 계책을 세운 공을 포상하였다. 최호는 천문을 관측하여 점치는 데 능하여 항상 구리로 만든 첨(鋋)을 식초를 담은 그릇 속에 넣어 두었다가, 밤에 특이한 천문 현상을 발견하면 곧 그 첨으로 종이에 글자를 그어 그 이상 현상을 기록하였다. 탁발도는 최호의 집에 갈 때마다 재앙이나 이상 현상에 관해 물었다. 때로는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최호가 허리띠조차 제대로 갖추어 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최호가 거친 음식을 올려 정성껏 맛있는 음식을 마련할 겨를이 없더라도, 탁발도는 반드시 그를 위해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었으며, 때로는 서 있는 채로 맛만 보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또, 탁발도는 일찍이 최호를 자신의 침전 안까지 드나들게 하였으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호에게 말했다.
"경은 재주와 지혜가 깊고 넓으며, 나의 조상들을 섬기면서 3대에 걸쳐 충성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짐이 경을 불러 가까이 두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나를 바로잡고 간하며,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짐이 비록 때때로 화를 내어 경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끝내 시간이 지나면 경의 말을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새로 항복한 고차의 우두머리들에게 최호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너희는 이 사람이 몸이 가늘고 연약하여 활을 당기거나 창을 들지도 못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가슴속에 품고 있는 지략은 무기와 군대보다도 뛰어나다. 짐에게 비록 정벌하려는 뜻은 있었지만 스스로 결단하지 못한 일이 많았는데, 전후로 공을 세운 것은 모두 이 사람이 가르쳐 준 덕분이다."
또 상서(尚書)들에게 명하였다.
"무릇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계책 가운데 너희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반드시 최호에게 자문한 뒤 시행하라."

신가 2년(429년) 11월, 탁발도가 서쪽으로 순행하여 하서(河西)에서 사냥하고 작산(柞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신가 2년(429년) 12월, 내도대관 · 중산공 이선과 고양공 안동이 사망하였다.

2.7. 칙륵족의 반란

신가 3년(430년) 정월 13일[53], 태무제 탁발도가 궁궐로 돌아왔다.

정월 15일[54],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정월 16일[55], 탁발도가 광녕(廣寧)에 행차하여 온천에 이르고 《온천지가(溫泉之歌)》를 지었다.

신가 3년(430년) 2월 10일[56], 사도 · 평양왕 장손한이 사망하였다.

2월 11일[57], 탁발도가 궁궐로 돌아와 장손한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직접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신가 3년(430년) 3월 16일[58], 회계공 혁련창의 작위를 올려 진왕(秦王)으로 삼았다.

당초 위나라에 새로 귀부한 칙륵(敕勒) 1,000여 호가 있었는데, 장수와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리자, 서로 원망하는 말을 하며 풀이 자라고 말이 살찌는 때를 기다렸다가 도망하여 막북(漠北)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상서령 유결과 상서좌복야 안원은 황하의 얼음이 아직 녹기 전에 이들을 황하 서쪽으로 옮기고,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북쪽으로 달아날 수 없게 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탁발도가 말했다.
"이 무리는 오랫동안 자유롭게 흩어져 사는 풍속에 익숙해져 있다. 비유하자면 동산에 가둬 놓은 사슴과 같아서, 너무 몰아붙이면 뛰쳐나가지만 느슨하게 대하면 저절로 안정된다. 내가 이들을 배치하고 다스릴 방법은 따로 있으니 굳이 옮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결 등이 거듭 강하게 청하여 그치지 않자, 마침내 칙륵 30,000여 부락을 나누어 황하 서쪽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서쪽으로 백염지(白鹽池)에 이르기까지 배치하였다. 칙륵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말했다.
"우리를 황하 서쪽에 가두어 놓고 죽이려는 것이다!"
이에 서쪽으로 양주(涼州)로 달아날 것을 모의하였다. 유결은 오원(五原)의 황하 북쪽에 주둔하고, 안원은 열발성(悅拔城)에 주둔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3월 17일[59], 칙륵족이 반란을 일으켜 기병 수천 기로 달아나자 유결이 추격하여 토벌하였다. 달아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잇달아 쓰러져 죽었다.

위나라의 남쪽 변경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송인(宋人)들이 매우 엄중하게 군비를 갖추고 장차 침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군사 30,000명을 보내 주십시오. 저들이 아직 출발하기 전에 먼저 영격하면, 충분히 그 예봉을 꺾어 감히 깊숙이 침입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어 변경에 살고 있는 하북(河北) 출신의 유민들을 모두 죽여 송군의 길잡이가 되는 것을 막자고 청하였다. 탁발도는 공경들에게 이 일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모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최호가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쪽 지방은 지대가 낮고 습합니다. 여름에 들어선 뒤에는 비와 물이 많이 내리고,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지며, 땅의 습하고 더운 기운이 뭉쳐 질병이 생기기 쉬우므로 군사를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또 저들이 이미 엄중히 대비하고 있다면 성을 반드시 굳게 지킬 것입니다. 군대를 오래 머물게 하여 공격하면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군대를 나누어 사방으로 약탈하게 하면 병력이 분산되어 적을 상대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 공격해서는 이익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들이 정말 북쪽으로 쳐들어온다면, 그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가을이 되어 날씨가 서늘해지고 말이 살찐 뒤 적지에서 식량을 취하면서 천천히 가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계책입니다. 조정의 여러 신하와 서북쪽을 지키는 장수들은 폐하를 따라 정벌에 나서 서쪽으로 혁련씨(赫連氏)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연연(蠕蠕)을 격파하면서, 미녀와 진귀한 보물을 많이 얻고 소와 말을 떼로 노획하였습니다. 남쪽 변경의 여러 장수도 이 소식을 듣고 부러워하여, 자기들도 남쪽으로 약탈하러 가서 재물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여 나라에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따라서는 안 됩니다."
탁발도는 이에 그들의 요청을 중지시켰다.

여러 장수가 다시 글을 올려 아뢰었다.
"남쪽의 적이 이미 이르렀는데, 우리가 거느린 병력은 적습니다. 청컨대 유주(幽州) 이남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우리를 도와 수비하게 하고, 장수(漳水)에서 배를 만들어 엄중히 대비하여 적을 막게 해 주십시오."
공경들은 모두 그들의 요청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아울러 사마초지, 노궤, 한연지 등을 장수로 임명하여 남쪽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회유하게 하자고 하였다. 이에 최호가 아뢰었다.
"이는 장기적인 계책이 아닙니다. 사마초지 등은 모두 저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저들이 우리나라가 유주 이남의 정예병을 모조리 동원하고 대대적으로 군함을 만들며, 여기에 경기병까지 따르게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나라가 사마씨(司馬氏)를 다시 세우고 유씨(劉氏) 종족을 제거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멸망할 것을 걱정하고,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한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남쪽 변경의 여러 장수로서는 그들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지금 공경들은 위세와 무력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하지만, 이는 도리어 적이 더 빨리 쳐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허세를 크게 벌여 실제의 재앙을 불러들인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마초지 같은 무리가 저쪽으로 가면 저들이 쳐들어오고, 이쪽에 머물러 있으면 저들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형세가 본래 그러합니다. 또 사마초지 등은 모두 잔꾀에 밝은 작은 재주를 가진 자들일 뿐이라, 경박하고 무뢰한 자들을 불러 모을 수는 있어도 큰 공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앙이 이어지게 할 뿐입니다. 옛날 노궤가 요흥(姚興)을 설득하여 형주(荊州)를 차지하게 하려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패하여 흩어졌고, 만인(蠻人)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으며, 끝내 그 재앙이 요홍(姚泓)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이것이 이미 실제로 드러난 증거입니다."
탁발도는 아직 그 말을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에 최호가 다시 천시(天時)를 들어 설명하면서, 남쪽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불리하다며 아뢰었다.
"금년에는 해로운 기운이 양주(揚州)에 있으니, 이것이 첫째입니다. 경오년(庚午年)은 스스로를 해치는 해이므로 먼저 군사를 일으키는 쪽이 손상을 입으니, 이것이 둘째입니다. 일식이 일어나 대낮이 어두워졌을 때 별자리로는 두수(斗宿)와 우수(牛宿)에 해당하였으니, 이것이 셋째입니다. 형혹성(熒惑星)이 익수(翼宿)·진수(軫宿)에 숨어 있는데, 이는 혼란과 죽음을 주관하니 이것이 넷째입니다. 태백성(太白星)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때 군사를 진격시키는 쪽이 패합니다. 이것이 다섯째입니다. 무릇 나라를 일으키는 군주는 먼저 사람의 일을 닦고, 다음으로 지형의 이로움을 다하며, 그 뒤에 천시(天時)를 살핍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일으킬 때마다 완전하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유의륭(劉義隆)의 나라는 새로 세워져 사람들의 관계와 질서가 아직 잘 안정되지 않았고, 재앙과 이상 현상이 여러 차례 나타나 천시가 맞지 않습니다. 또한 배를 움직이는 데 물길에 제약이 있으므로 지리의 이로움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 유의륭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니, 반드시 스스로 패할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탁발도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어, 기주(冀州)·정주(定州)·상주(相州) 세 주에 조서를 내려 배 3천 척을 만들게 하고, 유주 이남의 수비병을 선발하여 황하 가에 집결시키고 이에 대비하게 하였다.

신가 3년(430년) 4월 8일[60], 탁발도가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 이때 칙륵족 10,000여 부락이 반란을 일으켜 달아나자, 탁발도는 상서 봉철(封鐵)에게 조서를 내려 추격하여 토벌하고 이들을 섬멸하게 하였다.

신가 3년(430년) 5월 13일[61], 탁발도가 조서를 내렸다.
"무릇 선비가 행실을 닦음에 있어서는 집에 있을 때 반드시 효도하고, 조정에 있을 때 반드시 충성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당대에 자신이 영화롭게 되고 이름을 후세에 드날릴 수 있다. 근래 상서 봉철을 보내 도망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제거하게 하였는데, 그가 거느린 장수와 병사 가운데 충성을 다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자들은 이제 모두 추증하여 작위와 칭호를 내린다. 혹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자신의 힘을 다한 자들은 공적의 차례에 따라 관직을 올려 주고, 혹 일부러 군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소속 부대와 지휘관을 떠난 자들은 군법에 따라 처형한다. 무릇 공이 있는 자가 상을 받고 죄가 있는 자가 처벌받는 것은 나라의 변함없는 법도이니 잠시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오늘 이래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하라. 이 명령을 조정 안팎에 선포하여 모두가 듣고 알게 하라."

2.8. 제1차 원가 북벌 방어전

2.8.1. 도언지의 북벌

신가 3년(430년) 6월, 태무제 탁발도가 평남대장군 탁발대비(拓跋太毗)에게 조서를 내려 황하 가에 주둔하게 하고, 사마초지를 안남대장군 · 낭야왕으로 삼아 영천(潁川)에 주둔하게 하였다.

신가 3년(430년) 7월 4일[62], 당시 송나라의 장수 도언지가 회수(淮水)에서 사수(泗水)로 들어갔는데, 강물이 아래로 스며 빠져나가 물의 양이 줄어들었다. 하루에 겨우 10리씩 나아가, 동년 4월에 출발하여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수창(須昌)에 도착하였다. 이어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갔다. 한편, 탁발도는 하남(河南)의 네 진(鎭)인 금용(金墉), 호뢰(虎牢), 활대(滑台), 확오(碻磝)에 병력이 적다고 여겨 여러 군대에 명하여 병력을 모두 거두어 황하 북쪽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이에 위나라의 확오 수비병이 성을 버리고 떠났다.

7월 14일[63], 위나라의 활대 수비병도 역시 성을 버리고 떠났다.

7월 15일[64], 탁발도가 조서를 내렸다.
"옛날 태조(太祖)께서 난세를 바로잡으셨으나 제도는 처음 세우는 단계에 있었고, 태종(太宗)께서도 종전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느라 미처 고쳐 정비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군사와 국가의 관속(官屬)에 이르러서는 아예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제 여러 정벌이나 진수를 담당하는 장군과 왕공(王公) 가운데 절(節)을 지니고 먼 변경에 있는 자들에게는 부(府)를 열어 관리를 불러 임명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다음 등급의 사람들에게도 속관의 정원을 늘려 설치하도록 한다."

7월 16일[65], 탁발도는 대홍려 · 양평공 두초를 도독기·정·상3주제군사(都督冀定相三州諸軍事) · 태재로 삼고, 양평왕(陽平王)으로 작위를 올려 업(鄴)에 주둔하면서 여러 군대를 총괄하여 지휘하게 하였다.

7월 26일[66], 위나라의 낙양과 호뢰 수비병도 모두 성을 버리고 떠났다.

얼마 뒤, 도언지가 위나라가 버리고 간 진들을 모두 접수하고, 주수지를 남겨 활대를 지키게 하고, 윤충(尹衝)에게 호뢰를 지키게 하였으며, 건무장군 두기(杜驥)에게 금용을 지키게 하였다. 송나라의 여러 군대는 진격하여 영창진(靈昌津)에 주둔하고, 황하 남쪽 기슭을 따라 동관(潼關)에 이르기까지 병력을 늘어놓아 지켰다. 이로써 사주(司州)와 연주(兗州)가 이미 평정되자 여러 군대가 모두 기뻐하였으나, 왕중덕만은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며 말했다.
"여러분은 중원의 형편과 그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니, 반드시 저들의 계책에 빠질 것입니다. 호로(胡虜)는 비록 인의는 부족하지만 흉악하고 교활한 데에는 넘칠 정도입니다. 지금 수비병을 거두어 황하 북쪽 기슭으로 물러난 것은 반드시 병력을 한데 모아 군세를 온전히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황하가 얼어붙고 나면 장차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텐데, 어찌 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가 3년(430년) 8월, 청하(清河)의 여러 도적이 태수(太守)를 죽였다. 이때 탁발도는 관군장군 안힐을 보내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도언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8월 12일[67], 도언지는 비장(裨將)인 오흥(吳興) 사람 요소부(姚聳夫)를 보내 황하를 건너 야판(冶阪)을 공격하게 하였고, 안힐과 싸우게 하였다. 안힐이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이를 격파하고 5,00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물에 뛰어들어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8월 20일[68], 탁발도가 남궁(南宮)에 행차하고 남산(南山)에서 사냥하였다.

8월 24일[69], 정서대장군 장손도생에게 조서를 내려 평남대장군 탁발대비와 합류하여 황하 가에 주둔하면서 도언지를 막게 하였다.

2.8.2. 제3차 북하 정벌

신가 3년(430년) 9월 6일[70], 북하의 황제 혁련정이 아우 혁련위이대(赫連謂以代)를 보내 위나라의 부성(鄜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평서장군 · 시평공 탁발외귀(拓跋隗歸) 등이 그를 공격하여, 10,000여 명을 죽이자 혁련위이대는 달아났다. 이에 혁련정 친히 수만 명을 거느리고 부성 동쪽에서 탁발외귀를 요격하면서 아우 상곡공 혁련사건(赫連社乾)과 광양공 혁련도락고(赫連度洛孤)를 남겨 평량(平涼)을 지키게 하고,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화친을 청하였다. 그들은 서로 군사를 합쳐 위나라를 멸하기로 약속하고, 황하 북쪽의 땅을 미리 나누어 항산(恆山) 동쪽은 송나라에 속하게 하고 서쪽은 하나라에 속하게 하기로 하였다.

탁발도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정비하여 장차 하나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말했다.
"유의륭(劉義隆)의 군대가 아직 황하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간다면 앞의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고, 유의륭이 그 빈틈을 타 황하를 건넌다면 산동(山東)을 잃게 될 것입니다."
탁발도에게 최호에게 이에 대해 묻자, 최호가 대답하였다.
"유의륭과 혁련정(赫連定)은 멀리서 서로 끌어들이며 허세로 서로 호응하여 함께 우리 대국을 넘보고 있습니다. 유의륭은 혁련정이 먼저 진격하기를 바라고, 혁련정은 유의륭이 먼저 나아가기를 기다리니, 어느 쪽도 감히 먼저 들어오지 못합니다. 비유컨대 서로 묶인 닭과 같아서 함께 날 수 없으니,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신(臣)은 처음 유의륭의 군대가 오면 마땅히 황하 가운데에 주둔했다가 두 길로 나누어 북쪽으로 올라와, 동쪽으로는 기주(冀州)를 향하고 서쪽으로는 업(鄴)을 곧장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폐하께서 마땅히 친히 그들을 토벌하셔야 하므로 천천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서로 2,000리에 걸쳐 병력을 늘어놓았지만 한 곳의 병력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아, 병력은 나뉘고 기세는 약합니다. 이를 보면 그들의 나약한 속셈이 드러난 것이니, 이는 그저 황하를 굳게 지키며 스스로 방어하려는 것일 뿐, 북쪽으로 건너올 뜻은 없습니다. 혁련정은 이미 쇠잔한 뿌리에 불과하여 쉽게 꺾을 수 있으니, 공격하면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혁련정을 격파한 뒤 동쪽으로 동관(潼關)을 나와 휩쓸듯 진격하면, 위세가 남쪽 끝까지 떨쳐져 강수(江水)와 회수(淮水) 이북에는 서 있는 풀조차 남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홀로 내리신 계책은 어리석고 식견이 얕은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9월 20일[71], 탁발도가 업(鄴)에 밀황태후의 사당을 세웠다.

9월 21일[72], 탁발도가 통만에 행차하고 이어 평량을 기습하려 하여, 위병장군 왕근을 포판(蒲阪)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신가 3년(430년) 10월 7일[73], 도언지와 왕중덕은 황하를 따라 수비병을 배치한 뒤 돌아가 동평(東平)을 지켰다.

10월 22일[74], 관군장군 안힐이 위속진(委粟津)에서 황하를 건너 금용을 공격하였다. 금용은 오랫동안 수리되지 않았고, 또 군량도 없었기에, 두기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었으나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남쪽으로 달아났다.

10월 23일[75], 안힐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송나라의 장수 20명을 사로잡았으며 5,000여 명을 죽였다.

당시 황하 북쪽의 여러 위나라의 군대가 칠녀진(七女津)에 모여 있었다. 도언지는 위나라군이 황하를 남쪽으로 건널 것을 두려워하여 장수 왕반룡(王蟠龍)을 보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위나라의 관선(官船)을 빼앗게 하였다. 이에 양평공 두초 등이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적장 왕반룡을 참수하였다.

10월 28일[76], 안힐이 용양장군 육사와 함께 호뢰를 공격해 탈환하였다. 송나라의 사주자사(司州刺史) 윤충과 형양태수(滎陽太守) 최모가 위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달에 서진의 왕 걸복모말이 북량의 압박을 받자 신하 왕개(王愷)와 오눌전(烏訥闐)을 보내 위나라에 자신을 맞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탁발도는 평량과 안정의 땅을 주어 그를 봉하겠다고 허락하였다. 이에 걸복모말은 성읍을 불태우고 보물과 기물을 부순 뒤, 15,000호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상규로 향하였다. 혁련정은 걸복모말이 장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막게 하니, 걸복모말은 남안(南安)에 머물러 지켰다.

신가 3년(430년) 11월 3일[77], 탁발도의 군대가 평량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혁련정은 수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부성에서 위나라군을 막고, 아우 상곡공 혁련사건과 광평공 혁련도락고를 남겨 평량성을 지키게 하였다. 탁발도가 평량에 이르러 성 북쪽 언덕에 올라 진왕 혁련창을 보내 그들을 타일러 항복하게 하였으나, 혁련사건은 항복하지 않았다.

얼마 뒤, 탁발도는 안서장군 고필 등에게 조서를 내려 별동대를 거느리고 안정(安定)을 공격하게 하였다. 혁련정은 이 소식을 듣고 부성을 버리고 안정으로 들어간 뒤, 친히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순고원(鶉觚原)에서 출발하여 평량을 구원하려 하였다. 도중에 고필과 맞닥뜨리자 고필은 거짓으로 물러나 혁련정을 유인하였다. 혁련정이 그를 추격하자 고차의 군사들에게 말을 달려 공격하였고, 북하군은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이 참수되었다. 혁련정은 다시 달아나 순고원에 오르고, 방진(方陣)을 치고 스스로 굳게 지켰으며, 위나라군은 그곳으로 나아가 그를 포위하였다.

11월 10일[78], 문제 유의륭이 정남대장군 단도제에게 도독정토제군사 직임을 더하고, 군사를 거느려 위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11월 12일[79], 수광후 숙손건과 여음공 장손도생이 황하를 건넜다. 도언지는 낙양과 호뢰를 지키지 못하고 여러 군대가 잇달아 달아나 패하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다. 송나라의 전중장군 원호지(垣護之)가 글을 보내 그를 간하며, 마땅히 연주자사(兗州刺史) 축영수(竺靈秀)에게 주수지를 도와 활대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하북(河北)을 겨냥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언지는 따르지 않았다.

도언지가 배를 불태우고 육로로 달아나려 하자, 왕중덕이 말했다.
"낙양(洛陽)이 이미 함락되고 호뢰(虎牢)를 지키지 못한 것은 형세상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오랑캐는 우리에게서 아직 1,000리나 떨어져 있고, 활대(滑台)에도 여전히 강한 병력이 있습니다. 만약 갑자기 남쪽으로 달아난다면 병사들이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 마땅히 배를 이끌고 제수(濟水)로 들어가 마이곡구(馬耳谷口)에 이른 뒤, 다시 무엇이 마땅한지 자세히 헤아려야 합니다."
도언지는 이전부터 눈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이 크게 도졌다. 게다가 장수와 병사들 사이에도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결국 군사를 이끌고 청수(清水)에서 제수(濟水)로 들어갔다. 이후 남쪽으로 역성(歷城)에 이르자 배를 불태우고 갑옷을 버린 뒤 걸어서 팽성(彭城)으로 급히 향하였다. 송나라의 연주자사 축영수도 수창(須昌)을 버리고 남쪽으로 호륙(湖陸)에 달아났으므로, 청주(青州)와 연주(兗州)가 크게 동요하였다. 송나라의 장사왕 유의흔(劉義欣)은 팽성에 있었는데, 장수와 보좌관들은 위나라군이 대거 밀려올까 두려워하여, 유의흔에게 팽성을 버리고 수도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유의흔은 따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나라군이 제남(濟南)을 공격하였다. 송나라의 제남태수 소승지는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위나라군이 대거 집결하자, 소승지가 병사들을 숨기고 성문을 활짝 열게 하니, 사람들이 말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은데,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적을 가볍게 여기십니까!"
소승지가 말했다.
"지금 외따로 궁지에 몰린 성을 지키고 있어 형세가 이미 위급하다. 만약 다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반드시 저들에게 도륙당할 것이다. 오직 강한 모습을 보여 그들을 상대해야 할 뿐이다."
과연 위나라군은 복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여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11월 15일[80], 위나라군이 혁련정을 여러 날 포위하여 물과 풀을 얻는 길을 끊으니, 혁련정이 무리를 이끌고 순고원 아래로 내려왔다. 탁발도는 무위장군 구권(丘眷)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공격하게 하였고, 혁련정의 군대는 크게 무너져 죽은 사람이 10,000명여 명에 이르렀다. 혁련정은 몸에 큰 상처를 입고 혼자 말을 타고 상규(上邽)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위나라군은 혁련정의 아우 단양공 혁련오시발(赫連烏視拔), 무릉공 혁련독골(赫連禿骨) 및 북하의 공후(公侯) 1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날 여러 장수가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마침내 안정을 함락시켰으며, 혁련정의 사촌형 동평공 혁련을승(赫連乙升)도 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달아났다가, 수천 호를 약탈하여 서쪽으로 다시 상규로 도망쳤다.

11월 16일[81], 숙손건이 호륙에서 축영수를 따라잡고, 크게 격파하여 5,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후 숙손건은 군대를 돌려 범성(範城)에 주둔하였다.

11월 17일[82], 탁발도가 안정으로 들어갔다. 이때 서진의 왕 걸복치반이 북하에 보냈던 아들 걸복모말을 구출하였고, 아울러 혁련정의 수레와 깃발을 노획하였다. 또 사로잡은 사람과 재물, 가축을 장부에 기록하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11월 18일[83], 탁발도는 안정에서 돌아와 다시 평량에 이르러 참호를 파고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이어 유성(紐城)에 행차하여 새로 귀부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백성들을 사면하여 7년 동안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때 혁련정 휘하 농서(隴西)의 장수, 병사 수천 명이 와서 항복하였다.

11월 19일[84], 숙손건이 활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탁발도는 그를 도독기·청·서·제4주제군사(都督冀青徐濟四州諸軍事)로 삼고, 단양왕(丹陽王)에 봉하였다.

이달에 탁발도는 상서 고결(庫結)을 보내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위나라에 귀순한 서진왕 걸복모말을 영접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진의 위장군 걸복길비(乞伏吉毗)는 위나라 안으로 옮겨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겼고, 걸복모말은 그 의견을 따랐다. 이에 고결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신가 3년(430년) 12월 15일[85], 혁련사건과 혁련도락고가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평량은 평정되었고, 탁발도는 그곳의 진귀한 보물들을 거두었다. 그러자 북하의 장안, 임진(臨晉), 무공(武功)을 지키던 장수들도 모두 달아났으므로, 탁발도는 파동공 연보(延普)를 남겨 안정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고, 진서장군 왕근에게 장안을 지키게 하니, 마침내 관중(關中)이 평정되었다.

평량이 함락된 후, 관중후 두대전이 일전에 마모령 전투에서 북하군에게 사로잡혔던 해근, 아청 등을 구출하여 탁발도 앞으로 데리고 왔다. 탁발도는 혁련정의 후비를 두대전에게 하사하고, 해근에게 무릎으로 기어가 술잔을 들어 두대전에게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해근에게 말했다.
"네 목숨을 온전히 보전해 준 사람은 두대전이다."
이어 두대전을 정형후(井陘侯)에 봉하고, 산기상시 · 우위장군으로 삼았으며, 내도당장(內都幢將)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86]

12월 20일[87], 탁발도가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해근을 재사(宰士)로 삼아 술과 음식을 짊어지고 자신을 따라오게 하였다.[88]

장안을 진수하게 된 진서장군 왕근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측근들을 신임하고 백성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함부로 부과하였다. 백성들은 그 명령을 견디지 못하여 남쪽 한천(漢川)으로 달아난 집이 수천 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조사하여 살핀 결과 그 사실이 확인되자, 왕근을 참수하여 여러 사람에게 본보기로 보였다.

한편,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북벌을 말아먹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도망쳐 온 우장군 도언지와 안북장군 왕중덕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가 관직에서 면직시켰다. 또, 연주자사 축영수는 군대를 버린 죄로 처형되었다.

2.8.3. 활대 전투

신가 4년(431년) 정월 초하루[89], 태무제 탁발도가 목근산(木根山)에 행차하고, 그곳에 머물러 여러 신하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차등을 두어 베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신가 4년(431년) 정월 15일[90], 송나라의 정남대장군 단도제와 녕삭장군 왕중덕 등이 청수(清水)에서 출발하여 활대(滑臺)를 구원하러 왔다. 단양왕 숙손건과 여음공 장손도생이 이들을 막으니, 단도제 등은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신가 4년(431년) 정월 16일[91], 단도제가 수장(壽張)에 이르러 안평공 을전권(乙旃眷)의 군대와 조우하였다. 단도제는 녕삭장군 왕중덕과 효기장군 단굉(段宏)을 거느리고 맹렬히 공격하여 을전권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어 싸움을 계속하며 고량정(高梁亭)에 이르러 위나라의 제주자사(濟州刺史) 실번고결(悉煩庫結)을 참수하였고, 진격하여 마침내 제수(濟水) 가에 이르렀다. 위나라군은 20여 일 동안 단도제의 송나라군과 30여 차례 싸웠는데, 단도제에게 대부분 패하였다.

이달, 위나라로 들어가길 거부한 서진왕 걸복모말이 혁련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신가 4년(431년) 2월, 단도제의 군대가 역성(歷城)에 이르자, 숙손건 등은 경기병을 풀어 단도제 군대의 앞뒤를 가로막고, 풀과 곡식을 불태웠다. 이에 단도제의 군대는 식량이 부족해져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고, 이 덕분에 안힐과 사마초지 등은 전력을 오로지 활대를 공격하는 데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탁발도는 초병장군 왕혜룡을 보내 그들을 돕게 하였다. 주수지는 활대에서 몇 달 동안 굳게 지켰으나 군량이 다 떨어지자, 병사들과 함께 연기를 피워 쥐를 몰아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2월 10일[92], 사마초지 등이 활대를 함락하고 주수지, 이원덕(李元德)과 동군태수(東郡太守) 신모(申謨)를 비롯해 10,000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2월 22일[93],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와 크게 연회를 베풀고 종묘에 승전을 고하였다. 장수들과 여러 관리가 모두 상을 받았으며,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은 향후 10년 동안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2월 26일[94], 탁발도가 남궁(南宮)에 행차하였다. 이때 위나라의 남쪽 변경에 큰 홍수가 나서 백성 가운데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상서령 유결이 탁발도에게 아뢰었다.
"근래 변경의 적이 안으로 침입하여 군대를 여러 차례 출동시켰습니다. 하늘이 성명하신 폐하를 도와 가는 곳마다 적을 모두 섬멸하였고, 사방의 난리가 이미 평정되자 모두가 후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군국(郡國)의 백성들은 비록 직접 정벌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농사에 힘써 군대와 나라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였으니, 실로 세상을 유지하는 큰 근본이며 부고(府庫)가 의지하는 바입니다. 지금 산동(山東) 일대가 수해를 입었으니, 마땅히 더욱 불쌍히 여겨 보살핌을 베풂으로써 널리 감싸 기르는 은혜를 펼쳐야 합니다."
탁발도는 이를 받아들여 경내의 백성들에게 1년 동안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날, 단도제 등의 군대는 식량이 다 떨어지자 역성(歷城)에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송나라 군사 가운데 도망하여 위나라에 항복한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이러한 사정을 모두 위나라군에 알렸다. 이로 인해 위나라군이 뒤쫓아 오자 단도제 등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단도제는 밤에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수량을 세게 하면서 모래를 곡식처럼 되질하게 하고,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쌀을 그 모래 위에 덮어 놓았다. 날이 밝자 위나라군이 이것을 보고 단도제의 군량이 아직 넉넉하다고 생각하였고, 항복해 온 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여겨 그를 참수하였다.

당시 단도제의 병력은 적었고 위나라 병력은 매우 많아, 위나라의 기병이 사방에서 에워쌌다. 단도제는 군사들에게 모두 갑옷을 입게 하고, 자신은 흰옷을 입은 채 수레를 타고 군사를 이끌어 천천히 포위망 밖으로 나아갔다. 위나라군은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씩 물러났고, 단도제는 마침내 군대를 온전히 보전하여 퇴각하였다.

신가 4년(431년) 3월 30일[95], 관군장군 안힐이 평성으로 귀환하여 송나라의 포로 10,000여 명과 갑옷 등 병장기 30,000벌을 바쳤다.

신가 4년(431년) 5월 11일[96], 탁발도가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

신가 4년(431년) 6월, 북하의 혁련정이 북량을 습격하러 가던 도중에 토욕혼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혔다. 이로써 북하는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달에 변경 관리들이 유연의 순찰병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탁발도가 그들에게 의복을 하사한 뒤 돌려보내자, 유연의 칙련가한은 크게 기뻐하였다.

신가 4년(431년) 윤달 6월 16일[97], 칙련가한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자, 탁발도가 그들을 후하게 예우하였다.

이달에 탁발도는 산기시랑 주소(周紹)를 보내 송나라에 우호 사절로 보내며, 아울러 서로 사돈을 맺을 것을 청하였다. 문제 유의륭은 분명하게 승낙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모호하게 대답하였다.

2.9. 사도 최호의 율령 정비

신가 4년(431년) 7월 1일[98], 태무제 탁발도가 하서(河西)에 행차하여 승화궁(承華宮)을 세웠다.

신가 4년(431년) 8월 7일[99], 북량의 하서왕 저거몽손이 아들 저거안주(沮渠安周)를 보내 조정에 들어가 탁발도를 시중들게 하였다. 또, 토욕혼의 토욕혼모괴(吐谷渾慕璝)는 시랑 사태녕(謝太寧)을 사신으로 보내 표문을 올리고 사로잡은 혁련정을 보내겠다 청하였다.

8월 11일[100], 토욕혼모괴를 대장군 · 서진왕(西秦王)으로 삼았다.

신가 4년(431년) 9월 6일[101],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9월 13일[102], 태위 장손숭에게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을 더하고, 좌광록대부 최호를 사도, 정서대장군 장손도생을 사공으로 삼았다.

9월 16일[103], 조서를 내려 겸태상 이순에게 절(節)을 지니게 하고, 북량으로 보내 하서왕 저거몽손을 가절 · 시중 · 도독양주급서역강융제군사(都督涼州及西域羌戎諸軍事) · 행정서대장군(行征西大將軍) · 태부 · 양주목(涼州牧) · 양왕(涼王)의 관직과 작위를 더하여 임명하게 하였다.

9월 25일[104], 탁발도가 조서를 내렸다.
"근래 명을 거역한 자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천하가 아직 평안하지 못하였으므로, 군대를 여러 차례 출동시켜 쉴 겨를이 없었다. 이제 두 적이 꺾여 섬멸되고 병사와 말도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무력을 거두고 문치를 닦아 태평한 교화를 따르려 한다. 폐해진 직무를 바로잡고, 초야에 묻힌 인재를 천거하며, 드러나지 못한 채 곤궁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발탁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등용하고자 한다. 새벽이 밝기도 전부터 인재를 구할 것을 생각하고, 스승이 되어 보좌할 만한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니, 비록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꿈에서 흙을 다져 성벽을 쌓던 부열(傅說)을 만난 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담당 관리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범양(範陽)의 노현(盧玄), 박릉(博陵)의 최작(崔綽), 조군(趙郡)의 이령(李靈), 하간(河間)의 형영(邢穎), 발해(勃海)의 고윤(高允), 광평(廣平)의 유아(游雅), 태원(太原)의 장위(張偉) 등은 모두 현명하고 뛰어난 집안의 후손으로서 각 주와 고을에서 이름난 명문 인사들이며, 조정의 모범이 되어 쓰일 만한 인재라고 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는가. '학이 깊은 늪에서 울어도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 바라건대 이러한 인재들을 얻어 정사를 맡김으로써 함께 화목하고 번영하는 아름다운 세상에 이르고자 한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내게 좋은 작위가 있으니, 내가 그대와 함께 그것으로 맺으리라.'라고 하였다. 노현과 같은 부류로서 누추한 집에 몸을 숨기고 명예를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주(州)와 군(郡)에 명하여 예를 갖추어 불러 보내도록 하라."
이에 노현 등을 징소하고, 주군에서 보내어 도착한 사람도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을 차례와 등급에 따라 관직에 등용하였다. 노현 등은 모두 중서박사(中書博士)에 임명되었으나, 최작(崔綽)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완강히 사양하였다. 이때 최호는 품계와 신분 질서를 크게 정비하고, 성씨와 가문의 계통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하였는데, 노현이 이를 말리며 말했다.
"무릇 제도를 만들고 일을 세우는 데에는 각각 알맞은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마땅히 거듭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호는 따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위나라의 전신인 대나라의 왕 탁발십익건이 처음으로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사부대인(四部大人)이 함께 왕정(王庭)에 앉아 송사와 소송을 판결하였으므로, 감옥에 가두어 심문하거나 연루된 사람까지 잇달아 체포하는 고통이 없었다. 경내의 백성들은 이를 편안하게 여겼다. 도무제는 중원을 차지한 뒤에는 전대의 율령이 지나치게 엄하고 세밀한 것을 걱정하여 삼공랑 왕덕(王德)에게 명해 이를 산정하게 하였으며, 되도록 간략하고 쉽게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도무제가 말년에는 병을 앓으면서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여 잔혹해졌다. 명원제가 이를 이어받은 뒤에는 관리들이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 또한 가혹해졌다.

신가 4년(431년) 10월 1일[105], 탁발도가 최호에게 명하여 율령을 다시 정하게 하였다. 최호는 5년형과 4년형을 없애고 1년형을 새로 두었으며, 무고(巫蠱)를 행한 자는 숫양을 등에 지고 개를 품에 안은 채 깊은 물에 빠뜨려 죽이게 하였다. 또, 처음으로 관직의 품계가 9품(九品)에 이른 자는 관직과 작위를 면하게 하는 대신에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게 하였고, 여자가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임신 중이면 출산한 뒤 100일이 지나서야 형을 집행하게 하였다. 궁궐 문 왼쪽에는 등문고(登聞鼓)를 달아 두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자신의 사정을 위에 알릴 수 있게 하였다.

이달에 탁발도는 막남(漠南)으로 행차하였다.

신가 4년(431년) 11월 10일[106], 북부 칙륵족 막불(莫弗) 고약우(庫若於)가 자기 부락의 기병 수만 기를 거느리고 사슴 수백만 마리를 몰아 탁발도가 머무는 행재소(行在所)로 왔다. 탁발도는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사냥을 벌여 수행한 사람들에게 사냥한 짐승을 하사하고, 막남에 돌을 세워 글을 새겨 공덕을 기록하였다.

이달에 해근은 안동장군으로 복직하였으나, 본래 작위인 의성왕이 강등되어 공(公)이 되었다.

신가 4년(431년) 12월 1일[107],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연화 원년(432년) 정월 초하루[108], 보태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고, 혁련씨를 황후로 세웠으며, 황자 탁발황을 황태자로 세웠다. 태묘에 배알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연화(延和)'로 고쳤다.

정월 24일[109], 탁발도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보잘것없는 몸으로 종묘(宗廟)를 받들게 되었으니, 큰 왕업의 기초를 넓히고 천하를 깨끗이 평정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쇠퇴한 세운을 만나 천하가 갈라지고 무너졌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정벌하여 잠시도 편안히 쉴 수 없었으며, 시광(始光) 연간부터 지금까지 9년 동안 군대를 10차례나 출동시켰다. 문무의 여러 장수는 창을 메고 갑옷을 입은 채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로 몸을 씻듯 온갖 풍우를 무릅썼으며, 칼날을 밟고 다니면서 짐과 수고를 함께하였다. 신령의 도움에 힘입고 장병들이 힘을 다한 덕분에 강한 적들을 꺾고 크고 악한 적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군대가 무력을 끝까지 다 쓰지도 않았는데 두 적이 모두 멸망하였고, 군대가 법도를 어기지 않았는데 먼 지방까지 평안해졌다. 더구나 계절의 기운이 화평하고 상서로운 징조가 함께 내려 군국(郡國) 곳곳에 두루 나타났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찌 짐 한 사람만이 홀로 이러한 복을 받은 것이겠는가. 이것 역시 여러 신하가 한마음으로 협력한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공경(公卿)들은 이를 근거로 하늘과 사람의 뜻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때를 살펴 황태자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무릇 경사에 상을 내리는 것은 공을 세운 옛 신하들을 높여 포상하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표창하여 드러냄으로써 끝없는 복을 길이 이어 가기 위한 것이다. 왕공(王公)과 장군 이하에게 두루 작위와 품계를 올려 주고, 나라를 열어 봉작을 잇게 하며, 폐지된 관직을 다시 정비하고, 뛰어나 숨어 있는 인재를 천거하라. 번거롭고 가혹한 제도를 없애고 법규와 제도를 다시 정하되, 되도록 가볍고 간략하게 하라. 옛 폐단을 없애고 새롭게 고쳐 천하의 통일된 질서를 바로잡도록 하라. 여러 관청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성과를 내고, 곧은 도리를 지키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말아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연화 원년(432년) 2월 1일[110], 탁발도가 남궁(南宮)에 행차하였다.

연화 원년(432년) 3월 26일[111], 부인 하씨를 추증하여 황후로 삼았다.

3월 28일[112], 서진왕 토욕한모괴가 혁련정을 평성으로 압송하자, 탁발도가 그를 죽였다. 토욕혼모괴가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신(臣)이 흉악한 역적을 사로잡아 왕부(王府)에 승전의 성과를 바쳤습니다. 작위와 품계는 비록 높아졌으나 영토는 더 넓어지지 않았고, 수레와 깃발은 이미 화려하게 갖추어졌으나 재물은 상을 내리기에 넉넉하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굽어 살펴 주십시오."
탁발도는 이 일을 아래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공경들이 아뢰었다.
"토욕혼모괴가 세운 공은 혁련정을 사로잡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새외(塞外)의 백성은 모두 이미 자기 소유가 되었는데도 탐욕스럽게 요구하여 만족할 줄 모르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탁발도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서진왕(西秦王)이 얻은 금성(金城), 부한(枹罕), 농서(隴西)의 땅은 짐이 곧 그에게 준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영토를 떼어 준 것이다. 어찌 다시 더 넓혀 줄 필요가 있겠는가? 서진(西秦)이 정성을 다해 귀부해 오는 데 대해서는, 사신이 오는 횟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명주와 비단을 그때그때 더하여 하사할 것이니, 한 번의 하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때부터 토욕혼에서 위나라에 보내는 조공은 점차 뜸해졌다.

방사(方士) 기섬(祁纖)이 대(代)의 이름을 만년(萬年)으로 고치고, 대윤(代尹)을 만년윤(萬年尹)으로, 대현령(代縣令)을 만년현령(萬年縣令)으로 고칠 것을 아뢰었다. 최호가 말했다.
"옛날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여 천명을 받으시고, 은(殷)·상(商)을 본받아 대(代)와 위(魏)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셨습니다. 국가가 덕을 쌓아 왔으니 마땅히 억만 년토록 이어질 것으로, 굳이 이름을 빌려 보탬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섬이 들었다는 것은 모두 올바른 뜻이 아니니, 마땅히 옛 명칭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탁발도는 이를 따랐다.

2.10. 화북 통일

2.10.1. 화룡(和龍) 정벌

연화 원년(432년) 5월, 태무제 탁발도가 남교(南郊)에서 수레와 병졸을 대대적으로 선발하여 북연을 정벌하려 하였다.

이달에 송나라에서 조도생(趙道生)을 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연화 원년(432년) 6월 17일[113], 탁발도가 직접 북연의 수도 화룡(和龍)을 정벌하러 나섰다. 아울러 조서를 내려 상서좌복야 안원 등을 막남(漠南)에 주둔시켜 유연에 대비하게 하였다.

6월 18일[114], 겸산기상시 등영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연화 원년(432년) 7월 17일[115], 탁발도가 유수(濡水)에 이르렀다.

7월 18일[116], 안동장군 해근을 보내 유주(幽州)의 백성과 밀운(密雲)의 정령족 10,000여 명을 징발하여 공성 기구를 운반하게 하고, 남쪽 길로 나아가 모두 화룡에서 집결하게 하였다. 곧이어 탁발도가 요서(遼西)에 이르자 북연의 천왕 풍홍이 시어사 최빙(崔聘)을 보내 소와 술을 바쳤다.

7월 27일[117], 탁발도가 화룡에 이르러 그 성에 임하자, 북연의 석성태수(石城太守) 이숭(李崇)과 건덕태수(建德太守) 왕융(王融) 등 10여 군(郡)이 와서 항복하였다. 탁발도는 그 지역 백성 30,000명을 징발하여 포위 진지를 둘러싼 참호를 파게 하고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달, 동궁(東宮)을 지었다.

연화 원년(432년) 8월 2일[118], 풍홍이 수만 명을 성 밖으로 내보내 싸움을 걸게 하였다. 창려공 탁발구(拓跋丘)와 하간공 탁발제가 이들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죽은 사람이 10,000여 명이었다.

8월 7일[119], 당시 북연의 상서 고소(高紹)는 10,000여 호를 거느리고 강호고(羌胡固)를 지켰는데, 탁발도가 친히 고소를 토벌하러 나섰다.

8월 9일[120], 탁발도가 강호고를 무너뜨리고 고소를 참수하였다. 이후 조서를 내려 평동장군 하다라(賀多羅)에게 후고(猴固)에 있는 북연의 대방태수(帶方太守) 모용현(慕容玄)을 공격하게 하고,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에게 건덕(建德)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표기대장군 · 낙평왕 탁발비에게 기양(冀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위나라군은 모두 이를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포로로 얻었으며, 탁발도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차등을 두어 나누어 포상하였다.

탁발도가 화룡을 포위할 당시, 숙위 병사들 가운데 많은 수가 전투 대열에 나가 있어, 행궁(行宮)에 남아 있는 사람이 적었다. 운중진장 주수지는 남쪽 출신 사람들과 함께 탁발도를 습격하여 죽이고, 이어 화룡으로 들어간 뒤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도모하였다. 이 일을 관군장군 모수지에게 알렸으나 모수지가 따르지 않자 그만두었고, 얼마 뒤 일이 누설되자 주수지는 도망하여 북연으로 들어갔다. 이후로 위나라군이 화룡성을 포위한 채 여러 차례 공격하자, 풍홍은 주수지를 남쪽으로 돌려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연화 원년(432년) 9월 14일[121], 탁발도가 서쪽으로 돌아갔다. 아울러 영구(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菟) 6군의 백성 30,000호를 유주(幽州)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이때 연나라의 상서 곽연(郭淵)이 천왕 풍홍에게 위나라에 귀순의 뜻을 밝히고 딸을 바쳐 속국이 되기를 청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풍홍은 거절하며 말했다.
"앞서 이미 죄를 지은 일이 있고 원한도 깊이 맺혔다. 이제 와서 항복하고 귀부한다면 죽음을 자초할 뿐이니, 뜻을 굳게 지키면서 다시 다른 방도를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

연화 원년(432년) 10월 2일[122], 탁발도가 유수(濡水)에 이르렀을 때, 토욕혼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연화 원년(432년) 11월 4일[123],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연화 원년(432년) 12월 19일[124], 북연의 장락공 풍숭(馮崇)과 그의 동복아우 풍랑(馮朗), 풍랑의 아우 풍막(馮邈)이 요서(遼西)를 가지고 위나라에 귀부하였다. 풍홍은 장수 봉우(封羽)를 보내 요서를 포위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탁발도는 현명하고 어진 사람들을 불러 등용하였는데, 주(州)와 군(郡)에서 강제로 사람을 잡아다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거짓된 세력을 제거하고 난폭한 자들을 평정하느라 여러 해 동안 정벌을 계속하였다. 뛰어난 현인을 얻어 정치를 밝고 훌륭하게 하고 다스리는 도리를 닦고자 하였으므로, 주와 군에 조서를 내려 숨어 지내는 인재를 찾아 드러내고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옛날의 군자는 누추한 집에서 뜻을 기르다가 덕이 이루어지고 업적을 이룰 만하게 된 뒤 그 재능을 세상에 쓰이게 하였다. 어떤 이는 여유롭고 품위 있게 처신하여 세 차례나 부름을 받은 뒤에야 나아갔고, 어떤 이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솥을 등에 지고 스스로 나아가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비록 추구하고 숭상하는 바는 서로 달랐지만, 시대를 구제하려 한 점은 같았다. 불러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마땅히 예를 갖추어 뜻을 잘 설명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그들의 뜻에 맡겨야 한다. 어찌 강제로 보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자사(刺史)와 수재(守宰)들이 짐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것이니, 어찌 다시 빛을 더하는 일이겠는가. 도리어 짐에게 덕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각기 향리에서 인재를 추천하게 하고, 수재들은 다만 짐이 마음을 비우고 현인을 구한다는 뜻만을 알리도록 하라. 그들이 도착하면 곧 차례에 얽매이지 않고 특별히 발탁하여, 문무의 재능에 따라 정사에 맡길 것이다. 이 명령을 분명히 널리 알려 모두가 듣고 알게 하라."

이해에 멸망한 남량왕 독발녹단의 아들 독발보주(禿發保周)가 저거몽손을 버리고 위나라로 귀부해 오자, 탁발도는 독발보주를 장액공(張掖公)으로 삼았다. 또, 북량에 사신으로 갔던 이순이 돌아왔는데, 탁발도가 북량의 사정을 물으니 이순이 답하였다.
"저거몽손은 하우(河右)를 장악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략 임기응변의 이치를 알게 되었고, 변방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모았으므로 아랫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손을 위한 계책을 남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한평생을 마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禮)는 덕을 싣는 수레이고, 공경은 몸을 세우는 근본입니다. 저거몽손은 예가 없고 공경하지 않으니, 신이 보기에 한 해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탁발도가 다시 물었다.
"그가 죽고 세대가 바뀐 뒤에는 언제쯤 멸망하겠는가?"
이순이 답하였다.
"저거몽손의 여러 아들을 신(臣)이 대략 보았는데, 모두 평범한 재주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듣건대 돈황태수(敦煌太守) 저거목건(沮渠牧犍)은 재능과 성품이 그런대로 갖추어졌다고 하니, 저거몽손을 계승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와 비교하면 모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아마 하늘이 성명하신 폐하를 돕기 위해 마련해 둔 기회일 것입니다."
탁발도가 말했다.
"짐은 지금 동쪽에 일이 있어, 서쪽을 공략할 겨를이 없다. 경의 말과 같다면 불과 몇 년 뒤의 일이니, 그때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계빈(罽賓)의 승려 담무참(曇無讖)이 스스로 귀신을 부려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비술(秘術)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북량의 양왕 저거몽손은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겨 '성인(聖人)'이라 불렀고, 그의 여러 딸과 며느리들도 모두 담무참에게 가서 그 술법을 전수받았다. 탁발도는 이 소식을 듣고 이순을 보내 담무참을 불러오게 하였으나,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붙잡아 보내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살해하였다. 탁발도는 이 일로 북량에 노하였다.

2.10.2. 휴도족의 난

연화 2년(433년) 정월 15일[125],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이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요서(遼西)를 구원하였다.

정월 26일[126], 낙안왕 탁발범을 가절 · 시중 · 도독진·옹·경·량·익5주제군사(都督秦雍涇梁益五州諸軍事) · 위대장군 · 의동삼사를 더하여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연화 2년(433년) 2월 1일[127], 조서를 내려 겸홍려경 이계(李繼)에게 절(節)을 지니게 하고, 풍숭에게로 가서 그를 거기대장군 · 요서왕(遼西王) 관직과 작위를 임시로 수여하게 하였다. 또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상서(尚書) 이하의 관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풍숭의 공신들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작위와 품계를 하사하였다.

당시 평량의 도각족인 정서장군 금애(金崖)가 있었는데, 경주자사(涇州刺史) 적자옥(狄子玉)이 안정진장 연보와 서로 권력을 다투어 틈이 생긴 것을 이용해, 군사를 일으켜 적자옥과 함께 연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호공곡(胡空谷)을 지키면서 평민들을 몰아 약탈하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다. 이에 태무제 탁발도가 산기상시 · 평서장군 육사에게 토벌하게 하여 금애 등을 모두 사로잡았다.

2월 13일[128], 탁발도가 하서(河西)에 행차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겸산기상시 송선(宋宣)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2월 27일[129], 풍숭의 동복아우 풍랑이 위나라 조정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연화 2년(433년) 3월,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 시기 회계왕세자 사마원현의 아들 사마천조가 와서 항복하였다.

3월 13일[130],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연화 2년(433년) 5월 1일[131], 탁발도가 무주산(武周山) 북쪽으로 행차하였다.

연화 2년(433년) 6월,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과 상서좌복야 안원을 보내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화룡을 토벌하게 하는 동시에 장군 누발(樓勃)은 별도로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범성(凡城)을 포위하였다. 누발이 성을 지키던 장수 봉우와 내통하자, 봉우가 곧 성을 들어 항복하였고, 그곳 백성 3,000여 호를 거두었다.

6월 14일[132], 조서를 내려 낙안왕 탁발범에게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병사 10,000명을 징발하여 장안성 안에 소성(小城)을 쌓게 하였다.

연화 2년(433년) 8월, 요서왕 풍숭이 표문을 올려 자신의 아버지 풍홍을 설득하여 항복시키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다.

연화 2년(433년) 9월, 송나라에서 문제 유의륭이 사신을 보내어 길들인 코끼리를 선물하였다.

9월 22일[133], 조서를 내려 겸대홍려경 최색에게 절(節)을 지니게 하고, 후구지의 저족 양난당(楊難當)을 정남대장군 · 의동삼사로 삼고 남진왕(南秦王)에 봉하였다.

연화 2년(433년) 10월, 남진왕 양난당이 군사를 거느리고 송나라의 영토인 한중(漢中)을 포위하였다.

연화 2년(433년) 11월 19일[134], 탁발도가 무주산 북쪽에서 평성으로 돌아왔다.

연화 2년(433년) 12월 5일[135],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12월 7일[136], 탁발도가 음산(陰山) 북쪽에 행차하였다. 이때 농서의 휴도족 왕홍조(王弘祖)가 무리를 거느리고 귀부하였다. 한편 금애가 죽은 뒤, 그 부하들이 금애의 사촌동생 금당천(金當川)을 세워 그 무리를 거느렸다.

이달에 조서를 내려 겸산기상시 노현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해에 저거몽손이 죽자 그의 아들 저거목건을 거기대장군으로 삼고, 작위를 바꾸어 하서왕(河西王)에 봉하였다.

연화 3년(434년) 정월 초하루[137], 탁발도가 여수(女水)에 머물러 여러 신하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였다.

정월 4일[138], 풍홍이 급사황문시랑 이신(伊臣)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다.

정월 22일[139], 금당천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양난당이 한중(漢中)을 함락하고, 옹주(雍州)의 유민 7,000호를 장안으로 보냈다.

연화 3년(434년) 2월, 탁발도는 서해공주(西海公主)를 유연의 칙련가한에게 시집보냈다. 또 칙련가한의 누이를 맞아들여 부인(夫人)으로 삼고, 영천왕 탁발제를 보내 그녀를 맞이해 오게 하였다.

2월 4일[140], 칙련가한은 이복형 욱구려독록괴(郁久閭禿鹿傀)와 측근 수백 명을 보내 누이를 호송하게 하고, 아울러 말 2,000필을 바쳤다. 탁발도는 칙련가한의 누이를 좌소의(左昭儀)로 삼았다.

2월 15일[141], 탁발도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이 황통을 이어받은 처음에는 여러 흉악한 무리가 제멋대로 날뛰고 사방이 아직 복종하지 않았으며, 곳곳에서 역적들이 참람하게 스스로 지위를 높였다. 연연(蠕蠕)은 막북(漠北)에서 제멋대로 날뛰었고, 철불(鐵弗)은 삼진(三秦)에서 포악한 짓을 자행하였다. 이 때문에 해가 저물도록 먹는 것도 미루고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손바닥을 치고 손목을 움켜쥐며 달아나 남은 적들을 깨끗이 쓸어 없애고 온 천하를 평안하게 구제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해 동안 거듭 정벌하여 서쪽과 북쪽에서 전쟁을 치렀고, 물자를 운송하는 부역으로 백성들이 수고하여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수해와 가뭄까지 겪어 백성들의 빈부가 고르지 못하게 되었고, 아직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한 형편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춥고 궁핍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도 있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긴다. 이제 사방이 법도에 따르고 전쟁도 점차 그쳤으니, 마땅히 요역과 조세를 줄여 백성들이 쉬게 해야 한다. 주(州)·군(郡)·현(縣)에 명하여 백성들의 빈부를 조사해 세 등급으로 나누도록 하라. 부유한 자는 평소와 같이 조세와 부역을 부담하게 하고, 중간 정도인 자는 2년 동안 면제하며, 가장 가난한 자는 3년 동안 면제하라. 자사(刺史)와 수재(守宰)는 마땅히 힘써 지극히 공평하고 합당하게 처리해야 하며, 사사로이 두둔하거나 봐주어 정사를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명령을 분명히 널리 알려 모두가 듣고 알게 하라."

2월 28일[142],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연화 3년(434년) 3월 21일[143], 탁발도가 하서(河西)에 행차하였다.

연화 3년(434년) 윤달 3월 11일[144], 진왕 혁련창이 배반하여 달아났다.

윤달 3월 13일[145], 하서에서 장수 후장(候將)이 그를 공격하여 죽였다. 탁발도는 그의 모반 사실을 조사하여 확인한 뒤, 여러 아우도 모두 처형하였다.

윤달 3월 16일[146],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팽성공 탁발속의 작위를 올려 왕(王)으로 삼았다.

윤달 3월 18일[147], 북연의 천왕 풍홍이 상서 고옹(高顒)을 보내 표문을 올려 번국이 되겠다고 하고, 막내딸을 위나라의 액정(掖庭)에 들여보내 황제를 모시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탁발도는 이를 허락하고, 조서를 내려 북연의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입조시키도록 하였다. 이후 풍홍은 그동안 억류하고 있던 위나라의 사신인 우십문(于什門)을 평성으로 돌려보냈다. 우십문은 북연에 21년 동안 있으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기에,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우십문을 포상하고 칭찬하면서 그를 소무에 견주었으며, 치서어사(治書御史)에 임명하였다. 또, 양 1,000마리와 비단 1,000필을 하사하고, 책문을 올려 종묘에 이 일을 고한 뒤 천하에 널리 반포하여 알렸다.

윤달 3월 25일[148], 금당천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음밀(陰密)에서 서천후 팽문휘(彭文暉)를 포위하였다.

연화 3년(434년) 4월 3일[149], 정서대장군 · 상산왕 탁발소을 보내 금당천을 토벌하게 하였다.

4월 15일[150], 탁발도가 또 하서에 행차하였다.

4월 30일[151], 상산왕 탁발소가 금당천을 사로잡아 장안에서 참수하고 여러 사람에게 본보기로 보였다.

연화 3년(434년) 6월 13일[152],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한편 북연의 천왕 풍홍은 태자를 위나라에 인질로 보내지 않았다. 이에 산기상시 유자(劉滋)가 간하였다.
"옛날 유선(劉禪)은 겹겹의 산이라는 험준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고, 손호(孫皓)는 장강(長江)이라는 천연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진(晉)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강하고 약한 형세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오(吳)와 촉(蜀)보다 약하고, 위나라는 당시의 진나라보다 강합니다. 그런데도 위나라가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장차 위태롭게 되어 멸망하는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바라건대 속히 태자를 보내고, 정사를 닦으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흩어진 사람들을 거두어들이며,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며, 조세와 부역을 줄이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사직을 그래도 보전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풍홍은 노하여 유자를 죽였다.

6월 20일[153], 북연에서 인질을 보내오지 않자, 탁발도가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 사공 · 여음공 장손도생, 시중 고필에게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화룡을 공격하게 하였다. 탁발건 등은 그곳의 곡식을 거두고 백성들을 이주시킨 뒤 돌아왔다.

2.10.3. 산호 백룡 토벌

연화 3년(434년) 7월 20일[154], 동궁(東宮)이 완성되자 주둔군과 호위병을 모두 갖추어 두었으며, 서궁(西宮)의 3분의 1을 나누어 동궁에 배속하였다.

7월 21일[155], 태무제 탁발도가 미직(美稷)에 행차하고 이어 습성(隰城)에 이르렀다. 그리고 양평왕 탁발타에게 명하여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서하(西河)에서 산호(山胡)의 추장 백룡(白龍)을 토벌하게 하였다.

산호는 곧 계호(稽胡)이며, 일명 보락계(步落稽)라고도 한다. 대체로 흉노족의 별종으로서 옛날 전조의 개국군주인 광문제 유연이 거느렸던 오부(五部)의 후예이다. 혹자는 산융(山戎)과 적적(赤狄)의 후손이라고도 하는데, 이석(離石) 서쪽에서 안정(安定) 동쪽까지 사방 7~800리에 걸쳐 산골짜기 사이에 살았으며, 종족과 부락이 매우 번성하였다. 하지만 탁발도는 산호를 가벼이 여기고 날마다 직접 기병 10기만 거느리고 산에 올라 그들을 내려다보며 살펴보았다. 이에 백룡은 건장한 병사들을 10여 곳에 매복시켜 탁발도를 기습하게 하였다. 탁발도는 말에서 떨어져 거의 사로잡힐 뻔하였으나, 내입행장(內入行長)인 진건이 몸으로 탁발도를 막아 지켰다.[156] 진건은 크게 소리치며 힘껏 싸워 산호인 여러 명을 죽였고, 자신은 10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그 덕분에 탁발도는 마침내 위기를 벗어났다.

연화 3년(434년) 9월 28일[157], 산호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고 백룡과 그의 장수들을 참수하였으며, 그 성의 사람들을 도륙하였다.

연화 3년(434년) 10월 4일[158], 유연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0월 5일[159], 위나라군이 오원(五原)에서 백룡의 잔당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으며, 그들의 처자들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조서를 내려 백룡에게 핍박을 받았던 산호(山胡)와 귀순하여 항복한 자들은 평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연화 3년(434년) 11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연화 3년(434년) 12월 16일[160], 탁발도가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

연화 4년(435년) 정월 24일[161], 사형 이하의 수형자들을 각각 한 등급씩 감해 주었다.

정월 25일[162], 명원제의 궁녀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 혼인할 수 있게 하였다.

태연 원년(435년) 정월 26일[163], 탁발도가 대대적으로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태연(太延)'으로 고쳤다.

태연 원년(435년) 2월 13일[164], 유연국, 언기국, 차사국이 등 여러 나라가 각각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조서를 내려 장안(長安)과 평량(平涼)의 백성 가운데 평성으로 옮겨 와 있던 사람들 중 외롭고 늙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2월 20일[165],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연 원년(435년) 3월 6일[166], 북연에서 대장 갈촉통(渴燭通)을 보내 입조하여 조공하게 하고, 아들이 병들었다는 이유를 대었다.

태연 원년(435년) 5월 4일[167], 의도공 목수(穆壽)의 작위를 올려 의도왕(宜都王)으로 삼고, 여음공 장손도생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의성공 해근을 항농왕(恆農王)으로, 광릉공 누복련을 광릉왕(廣陵王)으로 삼았다. 본래의 관직은 각각 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다만 이때 목수에게 정동대장군의 관직을 더하였는데, 목수가 사양하며 아뢰었다.
"신(臣)의 조부 목숭(穆崇)이 앞선 조정에서 공을 세우고 그 복을 후손에게까지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양권(梁眷)의 충성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권의 큰 공은 아직 기록되어 포상되지 않았는데, 신만 대대로 상을 받고 있으니 마음속으로 실로 부끄럽습니다."
탁발도는 기뻐하여 양권의 후손을 찾게 하였고, 그의 손자를 찾아내 군공(郡公)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또, 구자(龜茲), 소륵(疏勒), 오손(烏孫), 열반(悅般), 갈반질(渴盤妷), 선선(鄯善), 언기, 차사, 속지(粟持) 아홉 나라가 위나라에 조공하였다. 탁발도는 한나라 대에도 비록 서역(西域)과 왕래하였지만, 중국에 바라는 것이 있을 때에는 말을 낮추어 와서 복종하고, 바라는 것이 없으면 교만하고 방자하여 복종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는 아마 자신들이 중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대군이 그곳까지 이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서로 답례 사신을 왕래시켜 보아야 헛되이 수고와 비용만 들 뿐 끝내 아무런 이익이 없으므로, 사신을 보내지 않으려 하였으나 담당 관리들이 거듭 청하며 아뢰었다.
"아홉 나라가 험하고 먼 길도 꺼리지 않고 의로움을 사모하여 조공하러 왔으니, 마땅히 그들을 거절하여 앞으로 올 사람들까지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사자 왕은생(王恩生) 등 20개 조를 짜서 서역으로 보냈다. 왕은생 등이 처음 유사(流沙)를 건너자 유연국에서 그를 억류했는데, 왕은생은 칙련가한 앞에서도 위나라의 절(節)을 지닌 채 굴복하지 않았다. 위나라가 이 소식을 듣고 칙련가한을 엄하게 책망하자, 칙련가한은 마침내 왕은생 등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서역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5월 18일[168], 탁발도가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

태연 원년(435년) 6월 8일[169], 태무제 탁발도는 계절이 순조롭고 풍년이 들며 상서로운 징조가 잇달아 나타나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근래 역적들이 제거되고 사방의 변경이 점차 평안해졌으므로, 정사와 교화를 높이고 훌륭한 다스림의 도리를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담당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은혜로운 뜻을 널리 선포하고 온갖 정무를 잘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러 공경(公卿)과 관리, 사윤(師尹)과 목수(牧守) 가운데 혹 짐의 뜻을 충분히 이끌어 펴지 못한 자가 있어 음양의 질서가 어그러지고 조화로운 기운이 고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지난봄에는 작은 가뭄이 들어 봄농사가 무성하지 못하였다. 근심하며 부지런히 스스로를 삼가고 신령들에게 기도하여 위아래의 모든 신에게 빠짐없이 제사를 올렸다. 짐의 정성과 진실한 마음이 신령을 감동시킨 것인가? 어찌하여 그 응답이 이토록 빠른가? 구름이 모이고 비가 세차게 내려 은택이 흘러 두루 흠뻑 적셨다. 어느 시골 부인이 사방 한 치 크기의 옥새를 가지고 노현(潞縣)의 후손(侯孫) 집에 찾아왔다가, 얼마 뒤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옥의 빛깔은 선명하고 희었으며, 광채가 안쪽까지 비추었다. 인장에는 세 글자가 있었는데 용과 새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정교하고 기묘하기가 사람의 솜씨 같지 않았으며, 그 글귀는 '가뭄과 역병이 평정된다(旱疫平)'고 쓰여 있었다. 그 이치를 미루어 살펴보면 아마 신령이 응답하여 내린 징조일 것이다. 짐은 이를 기쁘게 여긴다.

근래 들어 상서로운 징조가 잇달아 나타났다. 여러 곳에서 감로(甘露)가 흘러내렸고 궁전 안에도 내렸으며, 꼭지가 하나로 붙은 상서로운 참외가 중산(中山)에서 자랐다. 들의 나무들이 가지를 서로 이어 연리(連理)를 이루어 위군(魏郡)에서 자랐고, 선후(先后)가 태어난 고향에서는 흰 제비가 성락(盛樂)의 옛 도읍에 모였으며 검은 새들이 뒤따라 왔는데, 그 수가 무려 천 마리에 이르렀다. 상서로운 벼는 여러 해에 걸쳐 항농(恆農)에서 이삭이 서로 합쳐져 자랐고, 흰 꿩과 흰 토끼가 함께 발해(勃海)에 나타났으며, 흰 꿩 세 마리가 또 평양(平陽)에 있는 태조(太祖)의 사당에 모였다. 하늘이 이처럼 아름다운 복을 내려 주었으니, 무슨 덕으로 이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놀라고 두려워하고,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마음에 든다. 천하에 명하여 닷새 동안 크게 잔치를 벌이게 하고, 모든 신에게 예를 갖추어 보답하게 하라. 수재(守宰)들은 관할 지역 안의 이름난 산과 큰 강에 제사를 지내 위로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복록을 구하도록 하라."
이후 닷새 동안 크게 잔치를 벌이게 하였다.

6월 20일[170], 고구려와 선선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조공하였다.

6월 22일[171], 조서를 내려 표기대장군 · 낙평왕 탁발비, 진동대장군 굴원 등 다섯 장수에게 기병 40,000기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북연을 정벌하게 하였다.

태연 원년(435년) 7월, 탁발도가 고양(棝楊)에서 사냥하였다.

7월 4일[172], 탁발비 등이 화룡(和龍)에 이르러 남녀 6,000명을 이주시킨 뒤 돌아왔다.

태연 원년(435년) 8월 1일[173], 탁발도가 이어 하서(河西)에 행차하였다. 이때 속특국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조공하였다.

태연 원년(435년) 9월 20일[174],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연 원년(435년) 10월 19일[175], 상서좌복야 안원은 탁발도의 총애를 받아 교만하였는데, 누군가가 그가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하자 처형되었다.

10월 20일[176], 탁발도가 정주(定州)에 행차하여 신성궁(新城宮)에 머물렀다.

태연 원년(435년) 11월 12일[177], 탁발도가 기주(冀州)에 행차하였다.

11월 16일[178], 광천(廣川)에서 사냥하였다.

11월 23일[179], 탁발도가 업(鄴)에 행차하여 밀태후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아울러 지나가는 곳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안부를 묻고,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포상하고 예우하였다.

태연 원년(435년) 12월 1일[180], 조서를 내려 말했다.
"여섯 가지 통치 권한을 관장하는 것은 임금이 천하를 통솔하기 위해 필요할 것이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고 송사를 처리하는 것은 공경(公卿)이 맡아야 할 일이며, 농사를 권장하고 조세를 공평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고, 봄, 여름, 가을의 농사철에 힘을 다하는 것은 백성이 능히 해야 할 일이다. 각자가 자신의 직분을 닦는 것을 질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자신의 직분을 넘어 남의 관할을 침범하여 기강을 어지럽히고, 위에서는 일정한 명령이 없으니 백성들이 무엇을 따라야 하겠는가? 지금부터 도망하여 숨어 있거나 난을 피해 다른 고향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옛 거처로 돌아가게 하고, 이전의 죄는 묻지 말라. 백성들 사이에 서로 죽이고 해치는 일이 있으면 목수(牧守)는 법에 따라 공평하게 판결하고, 사사로이 함부로 보복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 감히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종족까지 처형하며, 이웃의 오(伍)가 이를 도와준 경우에도 같은 죄로 다스려라.

주(州)·군(郡)·현(縣)은 함부로 관리와 병졸을 보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혀서는 안 된다. 만약 징발하거나 부과할 일이 있으면 현령은 향읍(鄉邑)의 삼로(三老)를 모아 재산을 헤아려 부담액을 정하게 하라. 많은 곳에서 덜어 적은 곳에 보태고, 아홉 등급 전체를 서로 통하게 하여 조정하되, 부유한 자를 내버려 두고 가난한 자만 독촉하거나, 강한 자를 피하여 약한 자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태수(太守)는 다시 관리들의 유능함과 무능함을 조사하여 그 성적의 우열을 살피고, 이를 소속된 주에 열거하여 보고하라. 자사(刺史)는 그 우열을 분명히 심사하여 간사한 관리를 물리치고 충실하고 선량한 관리를 승진시키며, 해가 끝나면 그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중앙 조정에 올려라. 목수(牧守)는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은혜로운 교화를 널리 펴고 법과 제도를 받들어 따르며 나라와 함께 근심해야 한다. 올바른 도리를 지키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엄숙하게 관직을 수행한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는가?"

12월 20일[181], 사신을 보내 태뢰(太牢)의 제물로 북악(北嶽)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달에 진주자사(秦州刺史) 설근이 토몰골(吐沒骨)을 공격해 무찔렀다.

2.10.4. 북연의 몰락

태연 2년(436년) 정월 2일[182], 태무제 탁발도가 평성 궁궐로 돌아왔다.

태연 2년(436년) 2월 6일[183], 북연의 천왕 풍홍은 아직까지도 태자를 보내지 않고 있었는데, 다시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인질로 둘 다른 아들을 보내겠다고 청하였으나,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다.

2월 20일[184], 탁발도는 장차 군사를 일으켜 북연을 토벌할 결심을 품고, 사신단 10여 개를 동쪽으로 보내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에 보내 조서를 내려 이 일을 알렸다. 이는 북연과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고, 혹 북연에서 도망쳐 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태연 2년(436년) 3월 5일[185], 송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

3월 20일[186], 평동장군 아청과 안서장군 고필이 정예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북연을 정벌하였다. 건덕공 탁발영문도 요서(遼西)에서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이들과 합류하였다. 천왕 풍홍은 다급해지자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였고, 고구려의 장수왕은 대장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주어 북연의 사신인 양이(陽伊)를 따라 화룡으로 가서 풍홍을 맞이하게 하였다.

3월 23일[187], 탁발도가 ○○를 호뢰에 주둔시켰다.[188]

태연 2년(436년) 4월 3일[189], 황자 탁발소아(拓跋小兒)와 탁발묘아(拓跋苗兒)가 모두 죽었다.

이달에 아청과 고필은 북연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북연에 도착하여 임천(臨川)에 주둔하였다. 북연의 상서령 곽생(郭生)은 백성들이 고구려로 옮겨 가는 것을 꺼리는 틈을 이용하여 화룡의 성문을 열고 위나라군을 받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위나라군이 이를 의심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곽생은 마침내 군사를 정돈하여 천왕 풍홍을 습격하였다. 풍홍은 고구려군을 인도하여 동문(東門)으로 들어오게 하고 궁궐 문 아래에서 곽생과 싸웠는데, 곽생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어 갈로와 맹광은 성 안으로 들어가 군사들에게 해지고 낡은 옷을 벗게 하고, 북연의 무기고에서 좋은 무기와 장비를 꺼내 그들에게 지급한 뒤에 성 안을 크게 약탈하였다.

태연 2년(436년) 5월 5일[190], 천왕 풍홍은 화룡의 현재 호적에 올라 있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때 궁전을 불태우니 불길이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부녀자들에게 갑옷을 입혀 행렬 가운데에 있게 하고, 양이 등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바깥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를 지켰다. 북연의 무리가 대열을 나란히 맞추어 전진하였는데, 행렬의 앞뒤 길이가 80여 리에 이르렀다. 고필의 부장 고구자(高苟子)가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으려 하였으나, 고필이 술에 취한 채 칼을 뽑아 그를 제지하였다. 이 때문에 천왕 풍홍은 도망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탁발도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고필과 아청을 죄인처럼 압송하여 평성으로 불러들였고, 두 사람을 모두 강등하여 문지기로 삼았다.

5월 8일[191], 조서를 내려 산기상시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풍홍을 넘겨보내라고 요구하게 하였다.

5월 17일[192], 탁발도가 하서(河西)에 행차하였다. 이때 후구지의 저족 왕 양난당이 혁련정이 패망한 이후로 비어있던 상규(上邽)를 점거하였다.

태연 2년(436년) 7월 1일[193], 조서를 내려 표기대장군 · 낙평왕 탁발비 등에게 하서(河西)와 고평(高平)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양난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산기시랑 유아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태연 2년(436년) 8월 8일[194], 여섯 무리의 사신단을 서역에 보내고 하서에서 사냥하였다. 이후 조서를 내려 광평공 장려에게 정주(定州) 7군의 백성 12,000명을 징발하여 사천도(莎泉道)를 개통하게 하였다.

8월 25일[195], 고차국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조공하였다.

태연 2년(436년) 9월 2일[196], 낙평왕 탁발비 등이 약양(略陽)에 이르자, 양난당은 두려워하여 조서를 받들겠다고 청하고, 상규의 수비 병력을 거두어 구지(仇池)로 돌아갔다. 여러 장수가 의논하여 말했다.
"그 우두머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대군이 돌아간 뒤 반드시 다시 서로 모여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또 대군이 멀리 출정하고도 약탈하여 얻는 것이 없다면 군수 물자를 채우고 장수와 병사들에게 상을 줄 수 없습니다."
탁발비가 그 의견을 따르려 하였다. 당시 중서시랑 고윤이 탁발비의 군대에 종군하고 있었는데, 간하며 말했다.
"여러 장수의 계책대로 한다면 이는 저들이 교화에 귀의하려는 마음을 해치는 것입니다. 대군이 돌아간 뒤에는 오히려 반란이 더욱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이에 탁발비가 그만두고 새로 귀부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않으니, 진(秦)과 농(隴) 지역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천왕 풍홍을 위나라로 보내지 않고,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했다.
"풍홍과 함께 왕의 교화를 받들겠습니다."
탁발도는 고구려가 조서를 어긴 것 때문에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의논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징발하려 하였다. 이때 상서 유결이 아뢰었다.
"진(秦)·농(隴)의 새로 귀부한 백성들은 우선 후하게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넉넉하고 충실해지기를 기다린 뒤에야 병력으로 써야 합니다."
낙평왕 탁발비가 아뢰었다.
"화룡(和龍)이 새로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농사와 양잠을 널리 장려하여 군수 물자를 풍족하게 한 뒤에 진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고구려는 한 차례의 공격으로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탁발도는 고구려를 공격하려던 일을 그만두었다.

태연 2년(436년) 11월 1일[197], 탁발도가 고양(棝楊)에 행차하여 운중(雲中)에서 야생마를 몰아 모으고 야마원(野馬苑)을 설치하였다.

태연 2년(436년) 윤달 12월 5일[198],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연 2년(436년) 윤달 12월 18일[199], 영창왕 탁발제를 무창왕(武昌王)으로 개봉하였다.

이해에 유연국이 위나라와의 화친을 어기고 다시 변방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2.11. 서역과의 통교

태연 3년(437년) 정월 7일[200], 정동대장군 · 중산왕 탁발찬이 사망하였다.

정월 12일[201], 태위 · 북평왕 장손숭이 사망하였다.

정월 29일[202], 진남대장군 · 단양왕 숙손건이 사망하였다.

태연 3년(437년) 2월 9일[203], 태무제 탁발도가 유주(幽州)에 행차하여 의지할 곳 없는 사람과 노인들을 위로하고 구휼하며,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상곡(上谷)에 행차하고, 이어 대(代)에 이르렀다. 지나가는 곳마다 전조(田租)의 절반을 면제해 주었다. 이때 고구려와 거란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조공하였다.

태연 3년(437년) 3월 2일[204], 남평왕 탁발혼을 진동대장군 · 의동삼사로 삼아 화룡을 지키게 하였다.

3월 4일[205],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3월 18일[206], 구자, 열반, 언기, 차사, 속특, 소륵, 오손, 갈반타, 선선 등 여러 나라가 각각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조공하였다.

3월 22일[207], 송나라에서 산기상시 유희백(劉熙伯)을 사신으로 보냈다.

태연 3년(437년) 5월 15일[208],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지금 역적들이 소멸되어 천하가 점차 평안해지고 있어, 근래 여러 해 동안 담당 관리들에게 거듭 조서를 내려 은혜로운 정사를 널리 펴고 백성들과 함께 편안히 쉬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팎의 여러 관리와 목수(牧守)·영장(令長)들은 맡은 일을 근심하며 부지런히 처리하지 못하고, 법에 어긋나는 일을 바로잡아 살피지도 않으며, 공적인 일을 버리고 사사로운 일을 끼워 넣고, 서로의 잘못을 감추어 주며, 뇌물로 관직을 더럽히고 정사는 그저 눈앞의 일만 대충 처리하는 데 그치고 있다. 무릇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 있는 자들이 먼저 그것을 어기기 때문이다.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명하여, 법대로 하지 않는 수령(守令)을 누구든 들어 고발할 수 있게 하라."

5월 22일[209], 탁발도가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

태연 3년(437년) 7월 15일[210],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과 사공 · 상당왕 장손도생을 보내 서하(西河)에서 산호 백룡의 남은 무리를 토벌하게 하여 멸망시켰다.

태연 3년(437년) 8월 1일[211], 탁발도가 황하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태연 3년(437년) 9월 12일[212], 탁발도가 궁궐로 돌아왔다.

9월 25일[213], 사신을 보내 서진왕 토욕혼모괴의 아우 토욕혼모리연(吐谷渾慕利延)을 진서대장군 · 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작위를 바꾸어 서평왕(西平王)에 봉하였다.

태연 3년(437년) 10월 1일[214], 탁발도가 운중(雲中)에 행차하였다.

태연 3년(437년) 11월 1일[215], 탁발도가 궁궐로 돌아왔다.

11월 13일[216], 탁발도는 다시 산기시랑 동완(董琬)과 고명(高明) 등에게 많은 금과 비단을 가지고 서역에 사신으로 가서 아홉 나라를 불러 회유하게 하였다. 동완 등이 오손(烏孫)에 이르자 그 왕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파락나(破落那)와 자설(者舌) 두 나라도 모두 위(魏)에 신하를 칭하고 조공하고자 하지만, 스스로 올 수 있는 길이 없을 뿐입니다. 지금 사군(使君)께서는 마땅히 그곳을 지나가 그들을 회유하셔야 합니다."
이에 길잡이와 통역을 보내 동완을 파락나로, 고명을 자설로 안내하게 하였다. 주변 나라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사신을 보내 동완 등을 따라 위에 들어와 조공하였는데, 모두 16개국이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조회하고 조공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해, 탁발도는 자신의 누이 무위공주(武威公主)를 하서왕 저거목건에게 시집보냈다. 저거목건은 송요를 보내 표문을 받들고 평성(平城)에 가서 사례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공주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물었다. 탁발도는 여러 신하에게 이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어머니는 아들로 인해 존귀해지고, 아내는 남편의 작위를 따릅니다. 저거목건의 어머니는 마땅히 하서국태후(河西國太后)라고 불려야 하고, 공주는 하서국에서는 왕후(王後)라고 불리며, 경사(京師)에서는 공주(公主)라고 일컬어야 합니다."
라 하니, 탁발도는 이를 따랐다. 이후 저거목건은 장군 저거방주(沮渠旁周)를 보내 위나라에 조공하게 하였다. 탁발도는 시중 고필과 상서 이순을 보내 저거목건의 시신(侍臣)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게 하고, 아울러 저거목건의 세자 저거봉단(沮渠封壇)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다. 이에 저거목건은 저거봉단을 위나라에 보냈다.

얼마 뒤, 이순이 북량에서 돌아오자, 탁발도가 그에게 물었다.
"경이 지난해 양주(涼州)를 취할 계책을 말하였으나, 짐은 동쪽에 일이 있어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화룡(和龍)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짐은 바로 올해 서쪽을 정벌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이순이 대답하였다.
"신이 지난날 말씀드린 것은 지금의 형세로 보아도 사사로이 생각건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여러 차례 군대를 움직여 병사와 말이 피로해졌으니, 서쪽 정벌에 대한 논의는 청컨대 다른 해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탁발도는 이에 그만두었다.

태연 4년(438년) 3월 10일[217], 선선왕의 아우 소연기(素延耆)가 와서 조회하였다.

3월 13일[218], 50세 이하의 승려를 모두 환속시키게 하였다. 이달, 강양왕 탁발근이 사망하였고, 고구려로 망명했던 북연의 천왕 풍홍이 장수왕에 의해 죽임당했다.

2.12. 제3차 북위-유연 전쟁

2.12.1. 막북 원정의 실패

태연 4년(438년) 5월 9일[219],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5월 27일[220], 태무제 탁발도가 오원(五原)에 행차하였다.

태연 4년(438년) 7월 14일[221], 탁발도가 그대로 오원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유연을 정벌하였다. 낙평왕 탁발비와 하동공 하다라가 15명의 장수를 지휘하여 동쪽 길로 나아가고, 영창왕 탁발건과 의도왕 목수가 15명의 장수를 지휘하여 서쪽 길로 나아갔으며, 탁발도는 가운데 길로 나아갔다. 이후 탁발도는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러 가운데 길을 다시 두 갈래로 나누었다. 진류왕 탁발숭은 대택(大澤)에서 탁야산(涿邪山)을 향해 나아가고, 탁발도는 준계산에서 북쪽으로 천산(天山)을 향해 나아갔다. 이어 서쪽으로 백부(白阜)에 올라 돌에 글을 새겨 행군한 일을 기록하였으나, 끝내 유연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당시 막북(漠北)에 큰 가뭄이 드는 바람에 물과 풀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군마가 많이 죽었다.

태연 4년(438년) 10월 29일[222], 육군(六軍)에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연 4년(438년) 12월 22일[223], 탁발도가 북벌에서 돌아왔다. 이후 조서를 내려 겸산기상시 고아(高雅)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해, 상락(上洛)의 파족, 천전족(泉蕇族) 등이 서로 이끌어 귀부하였다.

태연 5년(439년) 1월 25일[224], 탁발도가 정주(定州)에 행차하였다.

태연 5년(439년) 3월 3일[225], 조서를 내려 위대장군 · 낙안왕 탁발범에게 명하여 옹주자사(雍州刺史) 갈나(葛那)를 보내 상락을 취하게 하였다. 송나라의 상락태수 심장생(鐔長生)은 군(郡)을 버리고 달아났다.

3월 7일[226],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3월 26일[227], 옛 남진왕 양현의 세자 양보종(楊保宗)이 형 양보현(楊保顯)과 함께 동정(童亭)에서 위나라로 망명해오자, 탁발도는 양보종을 정남대장군 · 진주목(秦州牧) · 무도왕(武都王)으로 삼아 상규(上邽)에 주둔하게 하고,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또, 양보현은 진서장군 · 진수공(晉壽公)으로 삼았다.

태연 5년(439년) 4월 4일[228], 선선, 구자, 소륵, 언기 등 여러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조공하였다.

2.12.2. 태무제의 북량 정벌

당시 북량의 하서왕 저거목건은 자신의 형수 이씨(李氏)와 사통하였으며, 그의 형제 세 사람이 번갈아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얼마 뒤, 이씨는 저거목건의 누이와 함께 무위공주에게 독을 먹였는데, 태무제 탁발도가 해독을 잘하는 의원을 역마를 이용해 급히 보내 공주를 치료하게 하였고, 공주는 병이 나았다. 탁발도는 이씨를 위나라로 보내라고 요구하였으나, 저거목건은 보내지 않고 그녀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주천(酒泉)에 살게 하였다.

또, 탁발도는 매번 사신을 서역에 보낼 때마다 항상 저거목건에게 조서를 사신이 유사(流沙)를 지날 때까지 길잡이와 호위병을 지원하여 호송하게 하였다. 한번은 사신이 서역에서 돌아와 무위(武威)에 이르렀을 때, 저거목건의 측근 가운데 어떤 사람이 위나라 사신에게 고하였다.
"우리 주군께서 연연(蠕蠕)의 가한(可汗)이 망령되어 퍼뜨린 소문을 들었는데, 그 말은 이러합니다. '지난해 위(魏) 천자가 직접 와서 나를 공격했으나 병사와 말이 전염병으로 죽어 크게 패하고 돌아갔고, 나는 그의 아우 낙평왕 탁발비를 사로잡았다.' 우리 주군께서는 이를 크게 기뻐하여 나라 안에 널리 알렸습니다. 또 들으니 가한이 사신을 보내 서역의 여러 나라에 알리기를, '위나라는 이미 쇠약해졌고 지금 천하에서 오직 나만이 강하다. 다시 위나라의 사신이 오더라도 더 이상 물자를 대어 받들지 말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역의 여러 나라 가운데 상당수가 두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신이 돌아와 이러한 상황을 모두 자세히 보고하자, 탁발도는 상서 하다라를 양주(涼州)에 사신으로 보내 사실인지 거짓인지 살펴보게 하였다. 하다라가 역시 돌아와서, 저거목건은 겉으로는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치에 어긋난 마음을 품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탁발도가 마침내 저거목건을 토벌하려 하여 최호에게 의견을 물으니, 최호가 대답하였다.
"저거목건의 반역하려는 마음이 이미 드러났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군(官軍)이 지난해 북쪽을 정벌할 때 비록 적을 붙잡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입은 손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전투에 동원된 군마가 30만 필이었고, 계산해 보면 길에서 죽거나 다친 말이 8,000필도 되지 않았는데, 평상시에 해마다 쇠약해져 죽는 말은 10,000필을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먼 지방에서는 우리의 빈틈을 틈타 갑자기 위나라가 쇠약해지고 소모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뜻하지 못한 틈을 타 갑자기 대군을 들이닥치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놀라고 혼란스러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니, 저거목건을 사로잡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탁발도가 말했다.
"좋다! 내 생각도 역시 그러하다."
이에 공경을 대거 모아 서당(西堂)에서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홍농왕 해근 등 30여 명이 모두 입을 모아 아뢰었다.
"저거목건은 서쪽 변경의 작은 나라 군주로서 비록 마음으로 온전히 신하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아비의 지위를 계승한 이래 맡은 조공을 빠뜨린 적은 없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그를 번신(藩臣)으로 대우하고 공주(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지금 그의 죄악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막 연연(蠕蠕)을 정벌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지치고 쇠약해져 아직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또 듣건대 그 땅은 소금기가 많고 척박하여 물과 풀을 얻기가 어렵다고 하며, 대군이 도착하면 저들은 반드시 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킬 것입니다.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들판에서도 약탈하여 얻을 것이 없다면 이는 위험한 길입니다."
또, 이순과 상서 고필이 아뢰었다.
"온어수(溫圉水) 서쪽에서 고장(姑臧)에 이르기까지 땅이 모두 메마른 돌밭이라 물과 풀이 전혀 없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장성 남쪽 천제산(天梯山) 위에는 겨울마다 눈이 쌓여 깊이가 한 자가 넘는데, 봄과 여름이 되면 녹아 흘러내려 시내를 이루고, 주민들이 그 물을 끌어다 농토에 물을 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우리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들으면 이 수로의 입구를 터 버릴 것이니, 반드시 물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성 둘레 100리 안에는 풀이 자라지 않으므로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목말라 오래 머무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해근 등의 의견이 옳습니다."
이에 탁발도는 최호에게 명하여 해근 등과 서로 따져 논박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최호에게 다시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다만 "그곳에는 물과 풀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최호가 말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양주(涼州)의 가축은 천하에서 가장 풍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물과 풀이 없다면 가축이 어떻게 번성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漢)나라 사람들이 끝내 물과 풀이 없는 곳에 성곽을 쌓고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이라면 겨우 먼지를 가라앉힐 정도일 뿐인데, 어떻게 수로를 통해 농토에 물을 댈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고 거짓으로 꾸민 것입니다."
이순이 말했다.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 못합니다. 나는 일찍이 사신으로 가서 직접 보았으니, 어찌 함께 논쟁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 최호는 북하 정벌 때의 논의 이래로 이순과 틈이 생겼고, 그 뒤로 이순이 12차례 북량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탁발도의 총애와 신임을 받자 결국 그를 미워하였다. 그때 당시 북량의 하서왕 저거몽손은 여러 차례 이순과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었는데, 자기 신하들 앞에서 때때로 교만하고 방자한 말을 하였다. 그러고는 이순이 그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 곧바로 금과 보물을 이순의 품속에 넣어 주었고, 이순도 그를 위해 이를 숨겨 주었다. 최호가 이 사실을 알고 몰래 탁발도에게 일렀으나, 탁발도는 아직 믿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북량 정벌을 그와 논의하게 되니, 최호가 그의 면전에서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남의 금전을 받고 그를 위해 유세하려 하는데,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해서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탁발도는 숨어서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해근 등을 만났는데 말투와 얼굴빛이 매우 엄하고 사나웠다. 여러 신하는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그저 "예, 예"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여러 신하가 이미 물러난 뒤, 진위장군 이여(伊與)가 탁발도에게 아뢰었다.
"양주(涼州)에 정말로 물과 풀이 없다면, 저들이 어떻게 그곳에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 사람의 의견은 모두 납득할 수 없으니, 마땅히 최호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탁발도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태연 5년(439년) 5월 14일[229], 탁발도가 서교(西郊)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훈련하였다.

5월 20일[230], 차일국(遮逸國)에서 한혈마를 바쳤다.[231]

태연 5년(439년) 6월 11일[232], 탁발도가 평성에서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시중 · 의도왕 목수에게 태자 탁발황을 보좌하여 수도에서 유대(留臺)의 정사를 처리하게 하였으며, 조정 안팎에서 모두 그 명을 따르게 하였다. 아울러 대장군 · 장락왕 혜경(嵇敬)과 보국대장군 · 건녕왕 탁발숭에게 20,000명을 거느리고 막남(漠南)에 주둔하여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한 뒤, 공경들에게 명하여 하서왕 저거목건을 꾸짖는 글을 짓게 하고 그의 12가지 죄를 열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만약 직접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물을 내려놓은 채 멀리까지 나와 영접하고, 짐의 말 앞에 나아와 알현하고 절한다면 이것이 최선책이다. 육군(六軍)이 이미 이르렀을 때 두 손을 뒤로 묶고 관을 수레에 싣고 나와 항복한다면 그것이 차선책이다. 그러나 만약 궁지에 몰린 성을 지키면서도 계속 미혹되어 제때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 자신은 죽고 일족은 멸망하여 세상에 큰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마땅히 이 가운데 어느 길을 택할지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이후 친히 운중(雲中)에 이르러서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태연 5년(439년) 7월 7일[233], 탁발도가 상군(上郡)의 속국성(屬國城)에 이르러 여러 신하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고, 무예를 강습하며 말 위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7월 20일[234], 탁발도가 속국성에 치중을 남겨 두고 여러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이후 다시 서쪽으로 출발하였고,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과 상서령 · 거록공 유결이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상산왕 탁발소와 함께 두 갈래 길로 나아가 선봉이 되었다. 표기대장군 · 낙평왕 탁발비와 태재 · 양평왕 두초는 평량(平涼)과 부성(鄜城)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뒤를 이었다. 이때 평서장군 원하가 길잡이가 되었는데, 탁발도가 원하에게 양주(涼州)를 취할 방략을 물으니, 원하가 대답하였다.
"고장성(姑臧城) 주변에는 선비(鮮卑)족 4개의 부락이 있는데, 모두 신(臣)의 조부 때부터 다스리던 옛 백성들입니다. 신이 바라건대 군대의 선두에 서서 우리나라의 위엄과 신의를 널리 알리고, 화와 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 준다면 반드시 서로 이끌고 와서 귀순할 것입니다. 외부의 지원 세력이 이미 복종한 뒤에 고립된 성을 취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뿐입니다."
탁발도가 말했다.
"좋다!"

태연 5년(439년) 8월 2일[235], 영창왕 탁발건이 북량의 소와 말 등 가축 20여 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하서왕 저거목건은 위나라 군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며 말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그러나 좌승 요정국(姚定國)의 계책을 따라 밖으로 나가 위나라 군대를 영접하려 하지 않고, 유연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아우인 정남대장군 저거동래(沮渠董來)에게 10,000여 명의 병력을 주어 고장성 남쪽에서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저거동래는 위나라 군대가 일으킨 먼지만 바라보고도 물러나 달아났다. 하지만 유결이 점쟁이의 말을 따라 그날의 운세가 불리하다고 여겨 군사를 거두고 추격하지 않았고, 이 덕분에 저거동래는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탁발도는 이를 듣고 노하였다.

8월 4일[236], 탁발도의 본대가 고장성에 이르자, 탁발도는 사신을 보내 저거목건을 타일러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저거목건 유연이 위나라의 변경으로 들어와 침입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탁발도가 혹시라도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여 마침내 성벽에 의지해 굳게 지켰다. 그때 저거목건의 조카 저거조(沮渠祖)가 성벽을 넘어와 항복하였고, 그를 통해서 저거목건의 속셈을 자세히 알게 되자, 곧 군대를 나누어 고장성을 포위하였다. 마침 원하는 군사를 이끌고 여러 선비족 부락을 불러 회유하여 30,000여 호를 항복시켰고, 이 때문에 탁발도는 더 이상 외부를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고장성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다.

탁발도는 고장성 밖에 물과 풀이 풍부한 것을 보고, 이순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호에게 말했다.
"경이 전에 했던 말이 이제 보니 과연 맞았구나."
최호가 대답하였다.
"신(臣)은 감히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대체로 모두 이와 같습니다."
당초 탁발도가 장차 북량을 정벌하려 할 때, 태자 탁발황 또한 이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탁발도는 태자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장성(姑臧城) 서문(西門) 밖에서 샘물이 솟아나 성 북쪽에서 합쳐지는데, 그 크기가 강과 같다. 그 밖의 여러 도랑과 수로도 사막 안으로 흘러 들어가니, 그 사이에는 마른 땅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조서를 내려 네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다."

태연 5년(439년) 9월 25일[237], 저거목건의 조카 저거만년(沮渠萬年)이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날 저거목건도 좌우의 문무 관원 5,000명과 함께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위나라의 군문(軍門) 앞에 나와 항복하니, 탁발도는 그 결박을 풀어 주고 번신의 예로 대우하였다. 이후 고장성 안의 호구 20여 만을 거두었으며, 창고에 있던 진귀한 보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어 탁발도는 장액공 독발보주의 작위를 올려 왕(王)으로 삼고, 용양장군 목비(穆羆), 안원장군 원하와 함께 군대를 나누어 아직 항복하지 않은 북량의 여러 군(郡)을 공략하게 하였는데, 여러 호족 가운데 항복한 자가 또 수십만에 이르렀다.

한편, 고장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저거목건의 아우 장액태수(張掖太守) 저거의득(沮渠宜得)은 창고를 불태우고 서쪽으로 주천(酒泉)에 달아났고, 낙도태수(樂都太守) 저거안주(沮渠安周)는 남쪽으로 토욕혼에게 달아났다. 이에 탁발도는 진남장군 해권을 보내 장액(張掖)을 접수하게 하였고, 해권은 장액을 점거한 뒤에 그대로 주천까지 진격하였다. 저거목건의 아우 주천태수 저거무휘와 저거의득은 다시 진창(晉昌)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돈황(敦煌)으로 달아나 저거목건의 사촌동생 돈황태수 저거당아(沮渠唐兒)에게 의지하였다. 탁발도는 익양공 탁발결(拓跋潔)에게 주천을 지키게 하고, 무위(武威)와 장액에도 모두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진군장군 봉답(封沓)은 낙도(樂都)를 공격하여 수천 호를 약탈해 데리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북량의 영토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되니, 탁발도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하사하였다.

북량을 멸망시킨 탁발도가 고장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최공(崔公)은 지혜와 계략이 넉넉하니, 나는 이제 그것을 더 이상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여(伊與)는 활 쏘고 말 타는 무사인데도, 그가 내다본 바가 최공과 같았으니 참으로 매우 기이하구나."
이여는 활을 잘 쏘았고, 소를 끌어당기면서 뒤로 걸어가게 할 만큼 힘이 셌으며, 달리면 달리는 말과 나란히 갈 정도였다. 또한 성품이 충성스럽고 신중하였으므로 탁발도는 그를 특별히 아꼈다. 이에 그를 상서로 삼고 군공(郡公)에 봉하려 하였는데, 이여가 사양하며 아뢰었다.
"상서(尚書)의 업무는 매우 많고, 공(公)의 작위는 지극히 중하니, 신(臣)처럼 나이가 젊고 어리석으며 식견이 얕은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탁발도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이여가 대답하였다.
"중서성(中書省)과 비서성(秘書省)에는 문사(文士)가 많습니다. 만일 은혜를 베푸시는 마음을 그치지 않으신다면, 청컨대 그 가운데 말석에 참여하게 해 주십시오."
탁발도는 그 말을 좋게 여겨 이여를 중호군장군 · 비서감으로 삼았다.

2.12.3. 칙련가한의 평성 침공

태무제 탁발도가 서쪽을 정벌하러 갈 때 목수가 황하 가까지 전송하였는데, 탁발도가 목수에게 명하여 말했다.
"욱구려오제와 저거목건은 본래 서로 결탁한 지 오래되었다. 짐이 저거목건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욱구려오제는 반드시 변경을 침범할 것이다. 그러므로 짐이 일부러 건장한 병사와 살찐 말을 남겨 두어 경이 태자를 보좌하게 한 것이다. 농작물을 거두는 일이 끝나면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막남(漠南)으로 가라. 군사를 나누어 요충지에 매복시키고 오랑캐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유인하여 공격하게 하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양주(涼州)는 길이 멀어 짐이 구원할 수 없으니, 절대로 짐의 말을 어기지 말라!"
목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받았다. 그러나 목수는 평소 중서박사 공손질을 신임하여 그를 계책을 세우는 핵심 참모로 삼았다. 목수와 공손질은 모두 점술을 믿었는데, 유연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이에 대비하지 않았다.

한편, 유연의 칙련가한 욱구려오제는 탁발도가 고장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빈틈을 타 침입하였다. 그는 형 욱구려걸렬귀(郁久閭乞列歸)를 남겨 장락왕 혜경, 건녕왕 탁발숭의 군대와 북진(北鎮)에서 맞서게 한 뒤,[238] 그 자신은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깊숙이 들어와 선무(善無)의 칠개산(七介山)에 이르렀다. 이에 평성은 크게 놀랐고, 백성들은 앞다투어 중성(中城)으로 달아났다. 당시 목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곽문(西郭門)을 막으려 하였으며, 태자 탁발황에게 남산(南山)으로 피하여 들어가 지킬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보태후가 허락하지 않아 그만두었고, 사공 장손도생과 정북대장군 장려를 보내 토퇴산(吐頹山)에서 이를 막게 하였다. 마침 혜경과 탁발숭이 음산(陰山) 북쪽에서 욱구려걸렬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백부 타오무려호(他吾無麗胡)와 장수 500명을 사로잡고, 10,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욱구려걸렬귀가 탄식하며 말했다.
"저거씨(沮渠氏)가 나를 함정에 빠뜨렸구나."
칙련가한은 이 소식을 듣고 달아났고, 장손도생은 그를 막남(漠南)까지 추격한 뒤 돌아왔다.

태연 5년(439년) 10월 1일[239], 탁발도가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낙평왕 탁발비와 정서대장군 하다라를 남겨 양주(涼州)를 진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저거목건의 종족과 관리, 백성 30,000호를 평성으로 옮겼다.

10월 3일[240], 서쪽의 여러 선비족 부락을 타이르라고 보낸 장액왕 독발보주는 탁발도가 동쪽으로 간 것을 기회로 삼아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장액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태연 5년(439년) 11월 15일[241], 송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위나라 조정에 예물과 함께 길들일 코끼리 한 마리도 함께 선물하였다.

이달에 고구려, 속특, 갈반타, 파락나, 실거반(悉居半) 등 여러 나라가 각각 사신을 보내 조정에 조공을 바쳤다.

태연 5년(439년) 12월 23일[242], 탁발도가 서쪽 정벌을 마치고 평성으로 돌아와 개선 의식을 거행하고 공훈을 기록한 뒤 종묘에 이를 고하였다. 또, 유연이 침입하였으나 크게 잃거나 죽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목수 등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탁발도는 사로잡은 저거목건을 여전히 누이의 남편으로서 대우하였으며, 정서대장군 · 하서왕의 지위도 전과 같게 하였다. 또, 저거목건의 어머니가 죽자 태비(太妃)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무선왕 저거몽손의 묘를 지키도록 30호를 두었다.

이달에 후구지의 양난당이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상규를 침범하자, 진주(秦州) 사람들이 많이 이에 호응하였다. 동평(東平) 사람 여나한이 진장(鎮將) 탁발의두(拓跋意頭)에게 말했다.
"양난당의 군세가 강성합니다. 지금 나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 쪽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고 기세가 꺾여 지켜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탁발의두는 여나한에게 정예 기병 1,000여 기를 거느리고 나가 양난당의 진영을 돌격하게 하였다. 여나한의 군대가 향하는 곳마다 적군이 무너졌고, 양난당을 좌우에서 호위하던 여덟 기의 기병마저 죽으니 양난당은 크게 놀랐다. 마침 탁발도가 새서(璽書)를 내려 양난당을 꾸짖자, 양난당은 본거지인 구지로 돌아갔다.

양주(涼州)는 전량 시기 이래로 인재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났다. 북량이 멸망하기 전, 저거목건은 특히 문학을 좋아하여, 돈황 사람 감인(闞駰)을 고장태수(姑臧太守)로 삼고, 장담(張湛)을 병부상서로 삼았으며, 유병, 삭창, 음흥(陰興)을 국사조교(國師助教)로 삼고, 금성(金城) 사람 송흠을 세자선마로 삼았으며, 조유를 금부랑(金部郎)으로 삼고, 광평(廣平) 사람 정준과 정준의 사촌동생 정홍(程弘)을 세자시강(世子侍講)으로 삼았다. 탁발도가 북량을 평정한 뒤에는 이들을 모두 예우하여 등용하였고, 감인과 유병을 낙평왕 탁발비의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안정 사람 호수 또한 젊어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는 저거목건에게 가서 의탁하였으나, 저거목건은 그를 그다지 중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호수가 정홍에게 말했다.
"그대의 주군은 외지고 보잘것없는 나라에 있으면서 분수에 넘치는 명호를 함부로 쓰고 예법을 참람하게 행하며,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면서도 마음이 한결같지 않소.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숭상하지만 실제로는 도덕이 없으니, 그가 망하는 것은 발돋움하고 기다려도 될 만큼 머지않았소. 나는 장차 나무를 골라 깃들 것으로, 먼저 위(魏)에 가서 깃들겠네. 그대와 잠시 헤어질 뿐, 오래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위나라로 갔고,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나 저거목건이 패망하였다. 이에 탁발도는 호수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여겨, 그를 호위장군으로 임명하고 시복남(始複男)에 봉하였다. 또, 하내 사람 상상(常爽)은 대대로 양주에 거주하였는데, 저거몽손과 저거목건이 예를 갖추어 벼슬을 내리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탁발도가 그를 불러 선위장군으로 삼았다. 다만, 북량의 우승상 송요는 탁발도를 따라 평성으로 들어갔다가 등용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탁발도는 삭창을 중서박사로 삼았다. 당시 위나라 조정은 바야흐로 무공(武功)을 숭상하고 있었으므로, 왕공과 귀족의 자제들은 학문을 익히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삭창은 박사로 10여 년 동안 있으면서 부지런히 가르치고 이끌었으며, 엄숙하면서도 예의가 있었다. 귀족 자제들은 모두 그를 엄하게 여기고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아 제대로 성장한 사람이 많았다. 전후로 높은 지위에 올라 상서(尚書)나 주목(州牧), 태수(太守)가 된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또, 상상은 온수(溫水)의 바위가 있는 곳에 학관을 세우고, 700여 명을 가르쳤다. 상상은 상벌에 관한 규정을 세웠으며, 제자들은 그를 엄한 아버지를 섬기듯 섬겼다. 중서시랑 고윤은 늘 상상이 사람을 가르치고 단련하는 데 방법이 있다고 칭찬하며 말했다.
"문옹(文翁)은 부드러움으로 이겼고, 선생은 엄격함으로 이루어 냈다. 가르치는 방법은 비록 달랐지만, 사람을 훌륭하게 길러 냈다는 점은 같았다."[243]
이외에도 진류(陳留) 사람 강강(江強)이 양주에서 거주하면서 경전과 서적, 역사서 등 1,000권과 서법(書法)을 바쳤고, 탁발도는 그 역시 중서박사로 임명하였다.

이해, 탁발도는 최호에게 비서성(秘書省)의 일을 감독하게 하여, 사관의 업무를 종합하여 처리하게 하였고, 중서시랑 고윤과 산기시랑 장위에게는 저작(著作)의 일을 함께 맡게 하였다. 최호가 상주하여 아뢰었다.
"음중규(陰仲逵)와 단승근(段承根)은 양주(涼州)의 뛰어난 인재이니, 함께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에 탁발도는 두 사람을 모두 저작랑으로 임명하였다. 음중규는 무위(武威) 사람이고, 단승근은 단휘의 아들이었다.

당시 위나라는 좋은 농지를 많이 봉쇄하여 백성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고윤이 이를 상주하자 탁발도는 받아들여 농지에 대한 금지 조치를 모두 없애고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한편, 토욕혼왕 토욕혼모리연은 위나라가 북량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아나 사막을 넘어갔다. 탁발도는 토욕혼모리연의 형 토욕혼모괴가 혁련정을 사로잡은 공로를 생각해 사신을 보내 그를 위무하고 타일렀고, 토욕혼모리연은 이에 옛 땅으로 돌아왔다.

2.13. 저거무휘의 발호

태연 6년(440년) 정월 20일[244], 저거무휘가 주천(酒泉)을 침범하였다.

정월 22일[245], 시신(侍臣)들을 나누어 보내 여러 주군(州郡)을 순행하게 하여 풍속을 살피고 백성의 고충을 물어보게 하였다.

정월 23일[246], 주천을 진수하던 익양공 탁발결은 저거무휘를 얕보고 성 밖으로 나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그에게 사로잡혔다. 저거무휘는 곧바로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태연 6년(440년) 2월 11일[247], 조서를 내려 가통직산기상시 형영(邢穎)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장안(長安)에서 5,000명을 동원하여 곤명지(昆明池)를 준설하게 하였다.

태연 6년(440년) 3월, 저거무휘가 주천을 함락시켰다.

태연 6년(440년) 4월 23일[248], 저거무휘가 장액(張掖)을 침범하였고, 독발보주는 산단(刪丹)에 주둔하였다.

4월 29일[249], 조서를 내려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을 보내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태연 6년(440년) 5월 4일[250], 태무제 탁발도가 북부(北部)에 행차하였다.

5월 18일[251], 저거무휘가 장액을 포위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나 임송(臨松)을 지켰다. 탁발도는 다시 군사를 보내 토벌하지 않고, 다만 조서를 내려 저거무휘를 타일렀다.

5월 29일[252],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평진군 원년(440년) 6월 21일[253], 황손 탁발준이 태어나자, 탁발도는 대사면령을 내리고 '태평진군(太平真君)'으로 개원하였다. 이는 구겸지의 신서(神書)에 "북방의 태평진군(太平真君)을 보좌한다."라고 한 데서 취한 것이었다.

태평진군 원년(440년) 7월, 탁발도가 음산(陰山)에 행차하였다.

7월 3일[254], 영창왕 탁발건이 번화(番禾)에 이르러 독발보주를 격파하였다. 독발보주가 달아나니, 탁발건은 안남장군 울권을 보내 그를 추격하게 하였다.

7월 10일[255], 보태후 두씨가 음산의 행궁(行宮)에서 사망하였다.

7월 27일[256], 독발보주가 도주하던 중에 자결하였고, 탁발건은 그의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태평진군 원년(440년) 8월 29일[257], 저거무휘는 중위 양위(梁偉)를 영창왕 탁발건에게 보내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주천군을 돌려주고, 사로잡았던 익양공 탁발결을 비롯한 장수와 병사들을 돌려보냈다. 이후 탁발도는 울권을 남겨 양주(涼州)를 진수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원년(440년) 11월 3일[258], 탁발도가 산북(山北)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원년(440년) 12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이달에 영남장군 왕혜룡이 사망하였다.

이해에 15개 주진(州鎮)의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다. 또, 하남왕 탁발요의 아들 탁발갈아를 하간왕(河間王)으로 삼았으며, 뒤에 봉호를 바꾸어 약양왕(略陽王)으로 삼았다.

태평진군 2년(441년) 1월 20일[259], 탁발도가 저거무휘를 정서대장군 · 양주목(涼州牧) · 주천왕(酒泉王)으로 삼았다.

1월 21일[260], 탁발도가 온천(溫泉)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2월 9일[261],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평진군 2년(441년) 3월 9일[262], 탁발도가 보태후를 '혜태후(惠太后)'로 추시하고 곽산(崞山)에 장사 지냈다.

3월 28일[263], 신흥왕 탁발준은 방탕하고 음란하며 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약양왕 탁발갈아와 함께 죄를 지어 둘은 나란히 공(公)으로 작위가 강등되었다. 탁발준의 어머니도 이전에 죄를 지어 탁발도에게 죽임당했기에, 탁발준은 결국 오랫동안 품고있던 원망과 불만이 터져 반역을 꾀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사사되었다.

3월 29일[264], 포로로 잡혔다가 위나라로 귀순한 욱구려걸렬귀를 삭방왕(朔方王)에 봉하고, 저거만년을 장액왕(張掖王)에 봉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4월 5일[265], 송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이달에 저거당아가 돈황에서 저거무휘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저거무휘는 사촌동생 저거천주를 주천에 남겨 지키게 하고, 아우 저거의득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저거당아를 공격하니 저거당아는 패하여 전사하였다.

4월 28일[266], 탁발도는 저거무휘가 끝내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여겨, 진남장군 해권을 보내 주천의 저거무휘 세력을 공격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5월 10일[267], 탁발도가 산북(山北)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8월 1일[268],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산기시랑 장위 등을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뒤, 황하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9월 19일[269], 무군대장군 · 영창왕 탁발건이 병환도 없었는데 급사하고, 그 아들 탁발인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11월 22일[270], 주천성이 포위당하고 성 안의 식량이 모두 떨어져 10,000명이 아사할 때에 저거천주는 자신의 아내를 죽여 병사들에게 먹이면서까지 분투하였으나, 결국 해권의 공격을 버티지 못해 성이 함락되었다. 해권은 주천을 평정하고, 저거천주, 장차(臧嗟), 굴덕(屈德)을 사로잡았으며, 남녀 4,000명을 약취하여 수도로 보냈다.

본거지를 잃은 저거무휘는 식량이 부족한 데다 위나라 군사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서쪽으로 유사(流沙)를 건너갈 계획을 세우고 아우 저거안주를 보내 서쪽의 선선(鄯善)을 침략하게 하였다. 선선왕 비룡(比龍)이 항복하려 하였는데, 천축국과 계빈국을 내빙하고 귀국 중이었던 위나라 사신단이 때마침 선선에 방문하여 저거안주에 맞서 싸우도록 권하였고, 저거안주는 선선을 함락하지 못한 채 물러나 동성(東城)을 지켰다.

태평진군 2년(441년) 12월 26일[271],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와 사로잡혀 온 저거천주를 처형하였다.

태평진군 2년(441년) 12월 28일[272], 송나라에서 또 사신을 보내왔다.

이달에 구겸지가 탁발도에게 아뢰었다.
"지금 폐하께서는 진군(真君)의 자격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정륜천궁(靜輪天宮)의 법을 세우셨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마땅히 올라가 부서(符書)를 받들어 성덕(聖德)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탁발도가 이를 따랐다.

태평진군 3년(442년) 정월 7일[273], 탁발도는 법가(法駕)를 갖추고 도단(道壇)에 나아가 부록(符籙)을 받았으며, 깃발은 모두 푸른색으로 하였으니, 이는 도교에서 숭상하는 색을 따른 것이었다. 그 뒤로 여러 황제는 즉위할 때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구겸지는 또 정륜궁(靜輪宮)을 지을 것을 아뢰어, 반드시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게 짓게 하여, 그곳을 통해 위로 천신(天神)에게 이르고자 하였다. 최호 역시 탁발도에게 이를 짓도록 권하였고, 그로부터 공사에 들어간 비용이 만 단위로 헤아릴 만큼 막대하였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완성되지 않았다. 이에 태자 탁발황이 간언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도리는 서로 다르고, 낮고 높음에는 정해진 구분이 있으므로, 서로 접할 수 없다는 것은 이치상 반드시 그러합니다. 지금 국고를 헛되이 소모하고 백성을 지치게 하면서 아무런 이익도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반드시 구겸지의 말대로 해야 한다면, 청컨대 동산(東山)의 만 길이나 되는 높은 지세를 이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공사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입니다."
탁발도는 탁발황의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다만 최호가 이 일을 적극 찬성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고,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나 역시 이것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300 ~ 500명 정도의 공역을 아끼겠는가?"

태평진군 3년(442년) 3월 25일[274], 북평선왕 장손숭의 아들인 북평왕 장손퇴(長孫頹)가 죄를 지어 작위를 깎아 후(侯)로 삼았다.

태평진군 3년(442년) 4월, 저거무휘는 10,000여 호를 거느리고 돈황을 버린 뒤 서쪽으로 가서 저거안주에게로 향하였다. 그가 아직 도착하기 전에 선선왕 비룡이 이를 두려워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고 차말(且末)로 달아났고, 선선왕의 세자는 저거안주에게 항복하였다. 저거무휘는 이로써 선선을 점거하였으나, 그의 병사들은 유사(流沙)를 건너는 동안 목이 말라 죽은 사람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

한편, 멸망한 서량의 초대 국왕 이고의 손자 이보는 이오(伊吾)에서 무리 2,00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돈황을 점거한 뒤, 성곽과 관청을 수리하고 정비하였으며, 옛 백성들을 안정시켜 모아들였다. 이때 이보의 외삼촌 당화도 서량의 잔존 세력을 이끌어 당시 저거안주가 주둔 중이던 횡절성(橫截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저거안주의 조카 저거수(沮渠樹)를 참수하였으며, 이어 고녕(高寧)과 백력(白力) 두 성도 함락시킨 뒤에 사신을 보내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2.14. 구지 쟁탈전

태평진군 3년(442년) 5월, 태무제 탁발도가 음산(陰山) 북쪽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3년(442년) 윤달 5월, 송나라가 후구지를 공격해 평정하자, 중산왕 탁발진(拓拔辰)을 보내 남진왕 양난당을 맞이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3년(442년) 6월 11일[275], 양난당이 행궁(行宮)에 나아가 탁발도를 알현하였다. 이보다 앞서 음산 북쪽에 궁전을 짓고 있었는데, 궁전이 막 완성되었을 때 양난당이 도착하였다. 이 때문에 그 궁전을 광덕전(廣德殿)이라 이름하였다.

태평진군 3년(442년) 7월 22일[276], 조서를 내려 안서장군 · 건흥공 고필에게 농우(隴右)의 여러 군대와 전중호분(殿中虎賁)을 지휘하여 무도왕 양보종 등과 함께 기산(祁山)에서 남쪽으로 진입하게 하였다. 아울러 정서장군 · 회양공 피표자는 낭야왕 사마초지 등과 함께 관중(關中)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산관(散關)에서 서쪽으로 진입하게 하였으며, 모두 구지(仇池)에서 합류하게 하였다. 또, 울림공 사마문사를 정남대장군으로 삼고 작위를 올려 초왕(譙王)으로 봉하여, 낙주(洛州)와 예주(豫州)의 여러 군사를 지휘해 남쪽으로 양양(襄陽)을 향하게 하였고, 정남장군 · 동안공 조옹은 동쪽으로 광릉(廣陵)을 향하게 하여 송나라의 구지 정벌군을 이끄는 배방명(裴方明)이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주(徐州)에 격문을 보내, 양난당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태평진군 3년(442년) 10월 6일[277], 황자 탁발복라를 진왕(晉王)에 봉하고, 탁발한을 진왕(秦王), 탁발담을 연왕(燕王), 탁발건을 초왕(楚王), 탁발여를 오왕(吳王)에 봉하였다.

태평진군 3년(442년) 12월 9일[278], 시중 · 태보 · 양성공 노노원이 사망하였다.

12월 25일[279],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보가 아우 이회달(李懷達)과 아들 이승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평성으로 가게 하니, 탁발도는 이보를 도독서수제군사(都督西垂諸軍事) · 진서대장군 · 개부의동삼사 · 사주목(沙州牧) · 돈황공(敦煌公)으로 삼았다. 또 4품 이하의 관직은 이보가 황제의 명을 받든 형식으로 임시 임명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해에 탁발도는 상서 이순에게 여러 신하의 공적과 자격을 차례로 평가하게 하고, 그에 따라 작위와 관직을 내려 주게 하였다. 그러나 이순은 뇌물을 받고 평가의 등급을 공평하지 않게 정하였고, 양주(涼州) 사람 서걸(徐桀)이 이 일을 고발하였다. 탁발도는 크게 노하였고, 또 이전에 이순이 저거씨(沮渠氏)를 감싸 비호하면서 황제를 면전에서 속이고 나라의 일을 그르쳤다고 여겨, 이순을 사사하였다.

태평진군 4년(443년) 정월 28일[280], 정서장군 피표자 등이 낙향(樂鄉)에서 송나라 군대를 공격하자, 송나라의 장수 왕환지(王奐之)가 패하여 전사하였고 왕장경(王長卿) 등은 사로잡혔다. 송나라의 장수 강현명(強玄明)과 신백분(辛伯奮)은 하변(下辨)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피표자 등은 계속 추격하여 마침내 그들의 목을 베었으며 그 무리를 모두 포로로 잡았다.

정월 29일[281], 탁발도가 중산(中山)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4년(443년) 2월, 송나라의 북진주자사(北秦州刺史) 호숭지(胡崇之)가 탁수(濁水)에서 위나라군과 싸웠으나, 위나라군에게 사로잡혔고 남은 무리는 달아나 한중(漢中)으로 돌아갔다. 송나라의 장군 강도조(姜道祖)는 호숭지가 패하자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위나라는 마침내 구지를 차지하였고, 송나라 조정이 임명한 구지의 군주 양보치(楊保熾)는 달아났다.

2월 5일[282], 탁발도가 항산(恆山) 남쪽에 이르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돌에 글을 새겨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4년(443년) 3월 20일[283], 탁발도가 궁궐로 돌아왔다.

3월 22일[284], 오락후국(烏洛侯國)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당초 위나라가 북쪽의 황량한 땅에 살던 때, 돌을 파서 높이는 70척이고 깊이는 90보인 사당을 만들었는데, 오락후의 서북쪽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조상을 제사하였다. 오락후의 사신이 위나라에 도착하여 그 석묘(石廟)가 온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자, 탁발도는 중시랑 이창(李敞)을 석묘로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이창은 축문(祝文)을 벽에 새기고 돌아왔는데, 그곳은 평성에서 4,000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 하간공 탁발제와 무도공 양보종은 낙곡(雒穀)에 서로 마주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양보종의 아우 양문덕(楊文德)이 양보종을 설득하여, 험준한 곳을 막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위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 일을 탁발제에게 고발하였다.

태평진군 4년(443년) 4월, 탁발제는 양보종을 유인하여 사로잡은 뒤 평성으로 압송하였고, 탁발도는 양보종을 처형하였다. 이에 전(前) 진동장군 사마 부달(符達)과 정서장군 종사중랑 임비(任朏) 등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양문덕을 군주로 추대하고 백애(白崖)를 점거하였다. 이어 양문종은 군사를 나누어 여러 수비 거점을 점령하고, 진격하여 구지를 포위하였으며, 스스로 정서장군 · 구지공(仇池公)이라 칭하였다.

4월 27일[285],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4월 29일[286], 탁발도가 음산(陰山)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4년(443년) 5월, 안서장군 고필이 상규(上邽), 고평(高平), 병성(洴城)의 여러 군대를 동원하여 양문덕을 공격하자, 양문덕은 물러나 달아났다. 이때 피표자는 구지를 구원하기 위해 관중(關中)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하변에 이르렀다가, 이미 구지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려 하였다. 고필이 사람을 보내 피표자에게 말했다.
"송(宋)의 사람들은 패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니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 군대가 돌아간 뒤에 다시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니, 지금 병사를 훈련시키고 힘을 비축하여 이곳을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가을이나 겨울을 넘기기 전에 송나라 군대가 반드시 올 것이니, 편안히 쉬고 있는 군대로 지친 적을 기다린다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피표자는 그의 말을 따랐고, 탁발도는 피표자를 구지진장(仇池鎮將)으로 삼았다.

태평진군 4년(443년) 6월 21일[287],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고 만국을 잘 다스릴 것을 근심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예의가 흥성하게 하고자 한다. 그런데 주목(州牧)·태수(太守)·현령(縣令)·현장(縣長)들은 짐을 도와 은덕을 널리 펴고 백성의 고충을 부지런히 돌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잔혹하게 학대하기까지 하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다. 이제 백성의 재산에 부과하는 세금과 부역을 3년 동안 면제한다. 다만 전조(田租)는 해마다 종전과 같이 바치도록 한다. 주목과 태수들은 각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감독하되 함부로 징발해서는 안 된다. 담당 관청은 이를 탄핵하고 단속하여 조금도 눈감아 주지 말라."

6월 24일[288], 서교(西郊)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2.15. 제4차 북위-유연 전쟁

태평진군 4년(443년) 9월 3일[289], 태무제 탁발도가 막남(漠南)에 행차하였다.

9월 6일[290], 탁발도는 치중을 남겨 두고 경기병으로 유연을 급습하였으며, 군대를 네 갈래로 나누었다. 낙안왕 탁발범과 건녕왕 탁발숭은 각각 장수 15명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나아갔으며, 낙평왕 탁발비는 장수 15명을 지휘하여 서쪽 길로 나아갔고, 탁발도는 가운데 길로 나아갔다. 중산왕 탁발진은 장수 15명을 지휘하여 그 뒤를 이었다.

당초 상서령 유결은 오랫동안 국가의 중요한 기밀 업무를 맡아 왔다. 그러나 유결은 탁발도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탁발도는 마음속으로 그를 싫어하였다. 탁발도가 유연을 공격하려 할 때 유결은 반대하였으나, 최호는 탁발도에게 반드시 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하였고, 탁발도는 최호의 말을 따랐다. 유결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위나라군을 패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탁발도는 여러 장수와 녹혼곡(鹿渾谷)에서 만나기로 날짜를 정하였는데, 유결은 황제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그 날짜를 바꾸었다. 탁발도는 칙련가한의 무리가 있는 녹혼곡에 이르렀으나, 엿새가 지나도록 여러 장수가 도착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 탁발황이 탁발도에게 아뢰었다.
"적은 대군이 갑자기 이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들이 대비하지 못한 틈을 덮쳐 신속히 진격하여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서령 유결이 강하게 간하여 아뢰었다.
"적의 진영 안에서 먼지가 크게 일어나고 있으니, 그 병력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평지로 나가면 적에게 포위될까 두렵습니다. 여러 군대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탁발도는 역시 이를 의심하여 서둘러 공격하지 않았다. 결국 칙련가한은 달아났고, 위나라군은 석수(石水)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유연의 정찰 기병을 사로잡았는데, 그가 보고하였다.
"우리는 위군(魏軍)이 온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 위아래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무리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엿새나 이레가 지나도록 추격하는 군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탁발도는 이를 몹시 한스러워하였고, 이때부터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일은 모두 태자와 상의하였다.

당시 사마초지는 별도로 병사를 거느리고 보급을 감독하였다. 그때 진북장군 봉답이 달아나 유연에 항복한 뒤, 유연을 설득하여 사마초지를 공격해 군량 보급을 끊게 하였다. 곧이어 군중에서 어떤 사람이 나귀의 귀를 잃었다고 보고하였고, 여러 장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사마초지가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적이 간자를 보내 우리 진영에 들어와 몰래 엿보게 한 것으로, 나귀의 귀를 잘라 증표로 삼은 것일 뿐이다. 적이 오는 것이 머지않았으니, 마땅히 서둘러 대비해야 한다."
이에 버드나무를 베어 성책을 만들고, 그 위에 물을 부어 얼게 하였다. 성책이 완성되자 유연군이 도착하였으나, 얼음이 단단하고 미끄러워 공격할 수 없었기에 흩어져 달아났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결국 보급에 차질이 생겼고, 탁발도가 이끄는 정벌군은 돌아오는 길에 사막을 지나다가 식량이 떨어져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이때 유결은 몰래 사람을 시켜 위나라 군사들을 놀라게 하고, 탁발도에게 군대를 버려둔 채 가벼운 차림으로 먼저 돌아가라고 권하였으나 탁발도는 따르지 않았다.

태평진군 4년(443년) 11월, 송나라의 장군 강도성(姜道盛)이 양문덕과 병력을 합쳐 20,000명으로 탁수수(濁水戍)를 공격하였다. 피표자와 탁발제가 이를 구원하였고, 강도성은 패하여 전사하였다.

11월 27일[291], 탁발도가 삭방(朔方)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조종(祖宗)이 거듭 빛낸 대업을 이어받아 큰 기반을 더욱 넓히고 만세토록 융성하게 하고자 하였다. 천하를 경영하여 포악한 자를 평정하고 난리를 제거하며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깨끗이 쓸어버린 지 이제 20년이 되었다. 무릇 음양에는 가고 돌아옴이 있고, 사계절에는 서로 바뀌는 때가 있다. 아들에게 일을 맡기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휴식을 얻기 위한 것이며, 공신을 넉넉하고 높게 대우하여 오래도록 보전하고자 하는 것은 고금에 변함없는 훌륭한 법도이다. 황태자(皇太子)에게 명하여 짐을 도와 모든 정무를 처리하고 백관의 일을 총괄하게 하라. 짐의 여러 공신은 오랫동안 수고하였으니, 모두 작위를 지닌 채 자기 집으로 돌아가 때에 따라 조정에 나와 알현하고, 짐 앞에서 연회를 함께하며 도리를 논하고 계책을 아뢰는 일만 하게 하라. 다시 번거롭고 힘든 직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 새로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천거하여 백관을 채우도록 하라. 담당 관청은 이를 분명한 규정으로 만들어 짐의 뜻에 맞게 하라."

태평진군 4년(443년) 12월 1일[292], 탁발도가 북쪽 정벌을 마치고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평진군 5년(444년) 정월 6일[293], 황태자 탁발황이 비로소 백관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때 시중 · 중서감 · 의도왕 목수, 사도 · 동군공 최호, 광평공 장려, 시중 · 건흥공 고필이 태자를 보좌하여 여러 정무를 결정하게 하였다. 황태자에게 상서(上書)를 올리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게 하였으며, 상소(上疏)의 절차는 표문(表文)을 올리는 것과 같게 하였다.

태자 탁발황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힘쓰게 하여, 소가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소를 빌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고, 그 대가로 소를 빌려준 사람의 밭에서 김을 매게 하였다. 대체로 밭 22무(畝)를 갈아 씨를 뿌렸으면 7무의 밭에서 김을 매게 하였으며, 대략 이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또 백성들에게 각자 밭머리에 자신의 성명을 표시하게 하여 누가 부지런하고 누가 게으른지를 알 수 있게 하였고, 술을 마시거나 놀이를 하며 노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개간된 농지가 크게 늘어났다.

정월 12일[294], 탁발도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는 것이 없어 요사스럽고 사악한 것에 미혹되어 믿으며, 사사로이 무당과 주술사를 두고 참기(讖記)·음양(陰陽)·도위(圖緯)·방기(方伎)에 관한 책을 숨겨 가지고 있다. 또 사문(沙門, 승려)의 무리는 서융(西戎)의 허황되고 망령된 말을 빌려 요사스럽게 폐해를 끼치고 있다. 이는 정사와 교화를 하나로 통일하고 순박한 덕을 천하에 펴는 방법이 아니다. 이제 왕공(王公) 이하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이 사문이나 무당과 주술사 및 금은을 다루는 장인과 기술자를 집에 두고 있는 자는 모두 관청으로 보내고 숨겨 두어서는 안 된다. 금년 2월 15일까지로 기한을 정한다. 기한이 지나도록 내보내지 않으면 무당, 주술사와 사문은 그들을 숨겨 둔 집의 사람들도 함께 처형할 것이다. 분명하게 서로 선포하여 모두가 이 사실을 듣고 알게 하라."

정월 14일[295], 또 조서를 내려 말했다.
"근래 들어 군사와 국가에 일이 많아 문교(文教)를 널리 펴지 못하였으니, 이는 풍속을 바로잡고 천하에 법도를 보여 주는 방법이 아니다. 이제 왕공 이하 경사(卿士)에 이르기까지 그 자식들은 모두 태학(太學)에 나아가게 한다. 각종 장인과 기술자 및 말 모는 하급 병졸의 자식들은 마땅히 그 아비나 형이 하던 일을 익히게 하고, 사사로이 학교를 세우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가르친 사람은 처형하고, 그 학교를 둔 집의 사람들도 함께 처형할 것이다."

태평진군 5년(444년) 2월 6일[296], 중산왕 탁발진, 내도좌대관 설변, 상서 해권 등 장수 8명이 유연 정벌 때 정해진 기한보다 늦게 도착한 죄로 평성 남쪽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이 일의 원흉인 유결이 정벌 실패의 책임을 최호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탁발도가 말했다.
"여러 장수들이 약속된 시기를 어겨 적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장수들의 잘못이지, 어찌 최호의 잘못이겠는가?"
그러자 최호가 유결이 조서를 위조한 일을 상세히 아뢰었고, 탁발도는 오원(五原)에 이르러 유결을 체포하여 가두었다. 또, 탁발도가 출정했을 때, 유결은 은밀히 측근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만약 이번 출정이 성과 없이 끝나고 황제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낙평왕(樂平王)을 옹립할 것이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결은 자신의 부하인 상서우승 장숭(張嵩)에게 도참(圖讖)을 구하며 물었다.
"도참에 따르면 유씨(劉氏)가 왕위에 오르고 국가를 계승한다고 하였는데, 나도 과연 그 이름과 성씨에 포함되는지 확인해 주겠는가?"
장숭은 유결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성씨는 있으나 이름은 없습니다."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조사를 진행하고 장숭의 집을 수색한 결과, 실제로 도참서가 발견되었다. 이후 탁발도는 유결, 남강공 적린(狄鄰), 그리고 장숭 등을 포함한 관련자들 모두 삼족을 멸족시켰으며, 이로 인해 처형된 사람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2월 8일[297], 표기대장군 · 낙평왕 탁발비가 유결의 사건에 연루될 것을 근심하다가 이내 사망하였다.

2월 15일[298], 탁발도가 여(廬)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5년(444년) 3월 3일[299], 나남지(那南池)에서 크게 회합하고, 사신을 4개의 무리로 나누어 서역에 보냈다.

3월 9일[300],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3월 18일[301], 조서를 내려 정서대장군 · 사공 · 상당왕 장손도생에게 통만(統萬)에 주둔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5년(444년) 4월 11일[302], 시중 · 태재 · 양평왕 두초가 자신의 막하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2.16. 토욕혼 정복

태평진군 5년(444년) 5월 3일[303], 태무제 탁발도가 음산(陰山) 북쪽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5년(444년) 6월, 북부(北部)의 백성들이 입의장군 · 형양공 막고(莫孤)를 죽이고 5,000여 부락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탁발도는 군대를 보내 막남(漠南)까지 추격하여 그 우두머리들을 죽였고, 나머지는 기주(冀州), 상주(相州), 정주(定州)의 세 주로 옮겨 군영에 소속된 호(戶)로 살게 하였다.

토욕혼의 시평왕 토욕혼모리연이 조카 토욕혼위세(吐谷渾緯世)가 위나라 사신과 더불어 위나라에 항복하려는 낌새를 알고 그를 죽였는데, 이달에 토욕혼위대의 아우 토욕혼질력연(吐谷渾叱力延) 등이 위나라로 망명하며 군사를 보내 구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탁발도는 토욕혼질력연을 귀의왕(歸義王)으로 삼았다.

위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이래, 비록 옛 한족의 예법을 상당히 사용하여 천지(天地), 종묘(宗廟), 백신(百神)에 제사를 지냈으나, 여전히 옛 북쪽의 풍속을 따라 제사 지내며 호신(胡神)을 섬기는 경우 역시 매우 많았다. 이달에 최호는 제사를 지내기 합당한 57곳은 남겨 두고, 그 밖에 중복되는 제사와 자잘한 신에 대한 제사는 모두 없앨 것을 청하였고, 탁발도는 이를 받아들였다.

태평진군 5년(444년) 7월 10일[304], 동옹주자사(東雍州刺史) 저거병(沮渠秉)이 반란을 꾀하다가 일이 드러나 처형되었다.

태평진군 5년(444년) 8월 3일[305], 탁발도가 하서(河西)에서 사냥하였고, 상서령 고필이 남아서 수도를 지켰다. 이때 탁발도가 살찐 말을 사냥에 동원될 기병들에게 지급하라고 명하였는데, 고필은 모두 약한 말만 골라 지급하였다. 탁발도가 사냥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붓대가리 종놈이 감히 짐의 일을 제멋대로 헤아려 결정하는가! 짐이 관청으로 돌아가면 먼저 이 종놈부터 목을 베겠다!"
고필은 머리끝이 뾰족하였으므로 탁발도가 평소 그를 붓에 빗대어 불렀던 것이다. 고필의 관속들은 두려워하여 자신들까지 연좌되어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였으나, 고필이 말했다.
"신하 된 내가 임금으로 하여금 사냥을 즐기는 데 심취하지 못하게 한 죄는 작다. 그러나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아 군사와 국가에 쓸 물자를 부족하게 만드는 죄는 크다. 더구나 지금 연연(蠕蠕)은 한창 강성하고 남쪽의 적도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내가 살찐 말은 군대에 공급하고 약한 말은 사냥에 쓰게 한 것은 나라를 위해 멀리 내다본 것이다. 비록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또 이 일은 내 스스로 한 것이니, 너희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탁발도가 이 말을 전해듣고 감탄하며 말했다.
"이러한 신하가 있으니 나라의 보배로다."
이에 옷 한 벌, 말 두 필과 사슴 열 마리를 하사하였다.

8월 20일[306],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상시 고제(高濟)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게 하였다.

이달에 탁발도의 아들 진왕 탁발복라는 고평(高平)과 양주(涼州)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토욕혼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태평진군 5년(444년) 9월, 탁발도가 하서에서 마읍(馬邑)에 이르러 곽천(崞川)을 둘러보았다.

9월 7일[307],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9월 15일[308], 탁발도가 막남(漠南)으로 가서 장차 유연을 습격하려 했으나, 유연의 칙련가한이 멀리 달아났으므로 그만두었다. 칙련가한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아들 욱구려토하진(郁久閭吐賀真)이 즉위하여 '처라가한(處羅可汗)'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처라(處羅)'는 유연어 발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으로, 그 뜻은 '유일한' 혹은 '참된'이다.[309]

태평진군 5년(444년) 10월 21일[310], 진왕 탁발복라가 낙도(樂都)에 이르러, 군사를 이끌고 샛길을 따라 토욕혼을 기습하여 대모교(大母橋)에 이르렀다. 토욕혼왕 토욕혼모리연은 크게 놀라 백란(白蘭)으로 달아났고, 토욕혼모리연의 조카 토욕혼습인(吐谷渾拾寅)은 하서(河西)로 달아났다. 탁발복라가 이를 추격하여 5,000여 명의 목을 베니, 토욕혼모리연의 사촌동생 토욕혼복념(伏念), 장사 국구리(鵴鳩梨), 부대(部大) 숭아(崇娥) 등이 자신들의 부락 13,000명을 거느리고 귀부하였다.[311]

태평진군 5년(444년) 11월, 송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하였다.

태평진군 5년(444년) 12월, 속특국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25일[312],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이해에 돈황공 이보가 위나라에 입조하니, 탁발도는 그를 머물게 하고 외도대관으로 삼았다.

태평진군 6년(445년) 정월 21일[313], 탁발도가 정주(定州)에 행차하여 장로들을 불러 만나 보고 안부를 물었다. 또, 겸원외산기상시 송음(宋愔)에게 명하여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2월, 탁발도는 이어 서쪽으로 상당(上黨)에 행차하여 현지(泫氏)에서 연리수(連理樹)를 구경하였다.[314] 이후 서쪽으로 토경(吐京)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킨 호인(胡人)들을 토벌하고, 그들을 옮겨 여러 군현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3월 1일[315],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의심스러운 옥사는 모두 중서성(中書省)에 맡겨 경전의 뜻에 따라 헤아려 판결하게 하였다.

이달에 주천공 학온(郝溫)이 행성(杏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수장(守將) 왕번(王幡)을 죽이자, 현리(縣吏) 갑선(蓋鮮)이 종족을 거느리고 학온을 토벌하였다. 학온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자살하였고, 그 가족은 처형되었다.

태평진군 6년(445년) 4월 22일[316], 정서대장군 · 고량왕 탁발나가 등이 음평(陰平)과 백란(白蘭)에서 토욕혼을 토벌하였다. 또,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진주자사(秦州刺史) · 천수공 봉칙문과 안원장군 을오두(乙烏頭)에게 토욕혼모리연의 조카 토욕혼십귀(什歸)를 부한(桴罕)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당초 북량이 패망하자 선선국의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위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된 것을 크게 두려워하며 말했다.
"위(魏)의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왕래하게 하면 우리나라의 허실을 알게 될 것이니, 우리를 취하여 멸망시키는 일이 반드시 빨라질 것이다."
이에 위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아 끊고, 사신들이 오갈 때마다 번번이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서역과의 교통이 여러 해 동안 끊겼다. 탁발도는 산기상시 · 성주공 만도귀(萬度歸)에게는 역마를 타고 가서 양주(涼州) 서쪽의 병력을 징발하여 선선(鄯善)을 기습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6월 5일[317], 탁발도가 북쪽을 순행하였다. 토욕혼십귀는 위나라군이 장차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밤에 달아났다.

태평진군 6년(445년) 8월 1일[318], 봉칙문이 부한에 들어가 1,000호를 나누어 옮겨 상규(上邽)로 돌아갔다.

8월 6일[319], 만도귀가 경기병을 거느리고 선선에 이르러 그 왕 진달(真達)을 사로잡아 도성 평성으로 돌아갔다. 탁발도는 크게 기뻐하여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얼마 뒤, 탁발도가 음산(陰山) 북쪽에 행차하여 광덕궁(廣德宮)에 머물렀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병력을 징발하되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뽑게 하고, 각각 경계 태세를 갖추어 뒤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후 여러 종족이 뒤섞여 사는 지역에서 5,000여 호를 북쪽 변경으로 옮겼고, 백성들에게 북쪽으로 옮겨 가 광막(廣漠)에 이르기까지 가축을 기르게 하여 유연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게 하였다.

8월 16일[320], 고량왕 탁발나의 군대가 영두성(寧頭城)에 이르자, 토욕혼모리연은 자기 부락을 몰고 서쪽으로 유사(流沙)를 건넜고, 탁발나는 급히 추격하였다. 옛 서진왕 토욕혼모괴의 세자 토욕혼피낭(被囊)이 군대를 맞아 싸우며 저항하였으나, 탁발나가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토욕혼피낭은 패하여 경기병을 거느리고 달아났고, 중산공 두풍(杜豐)이 정예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였다. 삼위(三危)를 넘어 설산(雪山)에 이르러 토욕혼피낭과 토욕혼십귀, 그리고 걸복치반의 아들 걸복성룡(乞伏成龍)을 산 채로 사로잡아 경사로 보냈다. 다만, 토욕혼모리연은 무사히 도망쳐 우전국에 들어가 그 왕을 죽이고 그 땅을 점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2.17. 갑오의 반란

2.17.1. 거병

태평진군 6년(445년) 9월, 당시 위나라의 민간에 "위(魏)를 멸할 자는 오(吳)일 것이다."라는 잘못된 소문이 떠돌았다. 노수호족 갑오(蓋吳)가 이를 이용해 무리를 모아 행성(杏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 수가 10여 만에 이르자 부하인 조관(趙綰)을 송나라로 보내 투항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10월 3일[321], 장안진(長安鎮)의 부장(副將) 탁발흘(拓跋紇)이 무리를 거느리고 갑오를 토벌하였으나, 탁발흘은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갑오의 무리는 더욱 강성해졌고, 백성들은 모두 위수(渭水)를 건너 남산(南山)으로 달아났다. 이에 태무제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고평(高平)의 칙륵족 기병을 징발하여 장안으로 달려가게 하고, 장군 숙손발(叔孫拔)에게 병주(幷州), 진주(秦州), 옹주(雍州) 세 주의 군대를 임시로 통솔하여 위수 북쪽에 주둔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11월, 고량왕 탁발나가 군대를 정돈하여 평성으로 돌아왔다.

11월 4일[322], 탁발도는 고량왕 탁발나와 전중상서 · 안정공 한무를 보내 기병을 거느리고 상주(相州)의 양평군(陽平郡)에 주둔하게 하였다. 또 기주(冀州)의 백성을 동원하여 확오진(確磝津)에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다.

한편, 갑오가 자신을 따르는 여러 부락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백광평(白廣平)을 보내 서쪽으로 신평(新平)을 약탈하게 하니, 안정(安定)의 여러 이민족 우두머리도 모두 무리를 모아 여기에 호응하여 견성(汧城)의 수장(守將)을 죽였다. 갑오는 이어서 이윤보(李閏堡)로 진군하고, 병력을 나누어 임진(臨晉)과 파동(巴東)을 약탈하게 하였는데, 장군 장직(章直)이 이들과 싸워 크게 격파하였으며, 황하에 빠져 죽은 적군이 30,000여 명에 달하였다. 갑오는 또 군사를 보내 서쪽으로 약탈하여 장안까지 이르게 하였으나, 장군 숙손발이 위수 북쪽에서 이들과 싸워 크게 격파하고 30,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5일[323], 요동왕 두루두(竇漏頭)가 사망하였다.[324]

이때 하동(河東)에서 촉(蜀) 출신 유민 설영종(薛永宗)이 무리를 모아 관청의 말 수천 필을 훔치고, 3,000여 명을 몰아 분곡(汾曲)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갑오와 통하니, 갑오가 그에게 관직과 칭호를 내렸다. 진주자사(秦州刺史) · 금성공 주관이 무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에 탁발도는 설근의 아들 설발(薛拔)에게 명하여, 종족과 고향 사람들을 규합하여 황하 가에 보루를 세우고 갑오와 설영종 두 세력이 서로 왕래하는 길을 끊게 하였다.

11월 15일[325], 조서를 내려 전중상서 · 부풍공 탁발처진과 상서 · 평양공 모용숭(慕容嵩)에게 기병 20,000기를 거느리고 설영종을 토벌하게 하였다. 또, 전중상서 을발(乙拔)에게 장수 5명과 기병 30,000기를 거느리고 갑오를 토벌하게 하고, 서평공 구제(寇提)[326]에게 장수 3명과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갑오의 무리인 백광평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갑오는 스스로 '천태왕(天台王)'이라 칭하고 백관을 설치하여 임명하였다.

11월 16일[327], 탁발도가 광덕궁에서 평성의 궁궐로 돌아왔다. 이후 탁발도는 여섯 주(州)의 병사 가운데 용맹한 자 20,000명을 선발하여 영창왕 탁발인과 고량왕 탁발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두 갈래로 나누어 각각 기병 10,000기씩 거느리고 남쪽으로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이북을 공략하게 하였으며,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백성을 옮겨 황하 이북을 충실히 하게 하였다.

11월 28일[328], 탁발도가 서쪽을 순행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12월, 위나라의 안남장군부와 평남장군부가 연주(兗州)에 공문을 보내, 남조가 임의로 설치한 여러 주(州) 가운데 북쪽 지역의 지명을 함부로 가져다 쓴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구구(具區)에 가서 사냥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329] 연주에서는 이에 답하는 공문을 보내 말했다.
"반드시 그 땅에 근거하여 주(州)를 설치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쪽에서 서주(徐州)와 양주(揚州)를 설치한 것은 과연 그 땅을 실제로 가지고 있어서인가? 또 구구(具區)에 와서 사냥하며 남국(南國)의 교화를 살펴보고 싶다는 뜻도 잘 알겠다. 우리는 객관을 열고 숙소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 따로 있다.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漢)나라에 들어왔을 때의 의례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손님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규정에 따라 언제나 넉넉하게 대접하겠다."
과거 흉노의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직접 입조하여 의례상 자신을 번신(藩臣)으로 칭했는데, 이때 한나라는 그를 일반 제후왕보다 위에 두고 상당히 후하게 대접한 적이 있었다. 위 답서는 곧 송나라 측에서 호한야선우를 끌어와 위나라를 자신들에게 입조하는 존재에 빗대어 도발에 응한 것이다.

태평진군 7년(446년) 정월 14일[330], 탁발도가 동옹주(東雍州)에 머물렀다.

정월 16일[331], 탁발도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설영종의 보루를 포위하자, 설영종이 무리를 거느리고 출격하여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탁발도는 기세를 타고 군사들을 몰아 맹렬히 공격하였고, 설영종의 무리는 하루만에 무너져 흩어졌다. 설영종과 그 집안에 속한 남녀는 나이가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전부 분수(汾水)로 뛰어들어 죽었다. 당시 설영종의 종족인 설안도는 홍농(弘農)을 점거하여 반란에 호응하였는데, 설영종이 패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송나라로 달아났다.

정월 17일[332], 탁발도가 남쪽으로 분음(汾陰)에 가서 황하를 건너 낙수교(洛水橋)에 이르렀다. 이때 갑오가 장안 북쪽에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탁발도는 위수(渭水) 북쪽 땅에는 곡식과 풀이 없다고 여겨 위수 남쪽으로 건너간 뒤 위수를 따라 서쪽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최호에게 의견을 묻자, 최호가 대답하였다.
"무릇 뱀을 공격하는 자는 먼저 그 머리 부분을 공격합니다. 머리가 깨지면 꼬리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금 갑오의 진영은 여기에서 60리 떨어져 있으니, 경기병으로 급히 나아가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고, 도착하기만 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갑오를 격파한 뒤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가는 데에도 하루를 넘기지 않을 것이니, 하루 동안 군량과 말먹이가 부족한 정도로는 아직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남쪽 길을 따른다면 갑오는 천천히 북산(北山)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방 평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탁발도는 따르지 않고 위수 남쪽에서 장안을 향해 나아갔다.

정월 26일[333], 탁발도의 군대가 희수(戲水)에 이르자, 과연 최호의 예측대로 갑오의 무리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져 북산(北山)으로 들어갔으므로, 위나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그제서야 탁발도는 이를 후회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2월 2일[334], 탁발도가 장안에 행차하여 그 지역에서 덕망 있는 노인들을 만나 안부를 물었다.

2월 3일[335], 곤명지(昆明池)에 행차하였다.

2월 12일[336], 이어서 주질(盩厔)에 행차하여 갑오와 서로 반란을 모의한 백성 경청(耿青), 손온(孫溫)의 두 보루에 속한 사람들을 도륙하였다. 이후 군대가 진창(陳倉)에 머물렀을 때, 산관(散關)에서 갑오에게 호응해 수장(守將)을 살해한 저족들을 주살하고, 돌아와 옹성(雍城)에 행차하고 기산(岐山)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이때 북쪽 길로 나아간 을발 등의 여러 군대가 행성(杏城)에서 갑오를 크게 격파하자, 갑오는 말을 버리고 북지(北地)로 달아났다. 갑오가 다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구원을 요청하였고, 송나라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갑오에게 관직과 작위를 내려주었다. 아울러 송나라의 옹주(雍州)와 양주(梁州) 두 주에 명하여 병력을 출동시켜 변경에 주둔하게 하고, 갑오를 지원하여 그 기세를 돋우게 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사신을 보내 갑오에게 인장 121개를 내려 주고, 갑오가 상황에 따라 적절히 사람들에게 임시로 관직을 제수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남쪽으로 송나라를 침략한 영창왕 탁발인은 고평(高平)에 이르러 송나라의 장수 왕장(王章)을 사로잡고, 금향(金鄉)과 방여(方與)를 공략하여 그 백성 5,000호를 약취해 황하 이북으로 이주시켰다. 고량왕 탁발나는 제남(濟南)의 동평릉(東平陵)에 이르러 그 백성 6,000호를 황하 이북으로 옮겼다.

2.17.2. 태무제의 멸불

태무제 탁발도와 최호는 모두 도사 구겸지를 신임하고 중하게 여겨 그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심지어 최호는 평소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늘 탁발도에게 말하기를, 불교는 허황되고 망령되어 세상에 비용만 들게 하고 해를 끼치므로 마땅히 모두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이후 탁발도가 갑오를 토벌하여 장안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장안의 승려들이 절 안에 보리를 심어 놓았는데, 황제의 말을 돌보는 사람이 그 보리밭에서 말을 먹이고 있었다. 이에 탁발도는 그 절에 들어가 말을 살펴보았다. 이때 승려는 수행한 관리들에게 술을 대접하여 마시게 하였고, 수행한 관리가 그들의 방에 들어가 보니 활과 화살, 창과 방패가 매우 많이 있었다. 이를 가지고 나와 탁발도에게 아뢰자, 탁발도가 노하여 말했다.
"이것들은 사문(沙門)이 쓰는 물건이 아니다. 마땅히 갑오와 서로 모의하여 사람을 해치려 한 것이 틀림없다!"
이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그 절 하나를 조사해 승려들을 죽이게 하고, 그 재산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술을 빚는 도구를 많이 발견하였고, 주·군(州郡)의 주목(州牧), 태수(太守)와 부유한 사람들이 맡겨 숨겨 둔 물건도 대략 만 단위로 헤아릴 만큼 많았다. 또 따로 굴방을 마련하여 귀한 집안의 여자들을 두고, 그곳에서 몰래 음란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탁발도는 이미 승려들이 법을 어기는 데 분노하고 있었고, 최호도 당시 황제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이 기회에 천하의 승려들을 전부 죽이고 여러 불경과 불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밀어붙였다. 탁발도는 마침내 최호의 말을 채택하였다.

처음에 구겸지는 최호와 함께 정벌에 따라나가 황제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최호의 멸불에 반대하여 힘써 다투었으나 최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구겸지가 최호에게 말했다.
"경은 이제 머지않아 죽임을 당하고 집안까지 멸망하게 될 것이오."
결국 탁발도는 갑오 정벌에 동원된 군사들을 풀어 먼저 장안의 승려들을 모조리 죽이고, 불경과 불상을 불태워 없앴으며, 아울러 유대(留臺)[337]에 명하여 사방에 명령을 내려 모두 장안에서 시행한 방법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말했다.
"저 사문(沙門)이라는 자들은 서융(西戎)의 허황되고 망령된 말을 빌려 함부로 요사스러운 폐단을 만들어 내니, 정사와 교화를 하나로 통일하고 순박한 덕을 천하에 펴는 방법이 아니다. 왕공(王公) 이하로 사사로이 사문을 집에 두고 있는 자는 모두 관청으로 보내고 숨겨서는 안 된다. 금년 2월 15일까지를 기한으로 한다. 기한이 지나도록 내보내지 않으면 사문은 죽이고, 그들을 숨겨 받아들인 집안은 한 집안 전체를 죽이겠다."
평성에 남아있던 태자 탁발황은 평소 불법을 좋아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표문을 올려 승려를 형벌로 죽이는 일이 지나치다고 아뢰었고, 또 불상 자체에는 죄가 없다고 간하였다.
"지금 그 가르침을 금하고 여러 사찰의 문을 닫아 세상 사람들이 받들어 수행하지 못하게 하면, 흙과 나무로 만들고 채색한 것들은 자연스레 훼손되어 없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세 차례 거듭 아뢰었으나,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에 탁발도는 장안의 기술자와 장인 2,000호를 평성으로 옮겼다. 돌아오는 길에 낙수(洛水)에 이르러 군대를 나누어 이윤(李閏)에서 반란한 강족을 토벌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3월, 탁발도가 또다시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옛날 후한(後漢)의 어리석은 임금이 사악하고 거짓된 것에 미혹되어 믿고, 함부로 꿈을 빌미로 삼아 오랑캐의 요사스러운 귀신을 섬김으로써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혔다. 예로부터 구주(九州) 안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과장되고 허황된 큰소리를 외치면서 사람의 실제 올바른 이치에 근거하지 않으니, 쇠퇴한 시대의 암군과 혼군들 중 여기에 현혹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사와 교화가 시행되지 못하고 예법이 크게 무너졌으며, 귀신을 섬기는 도리가 몹시 성행하여 왕자(王者)의 법을 하찮게 여겼다. 그 뒤로 대대로 난리와 재앙을 겪었고 하늘의 벌이 거듭 내려 백성들이 거의 다 죽어 없어졌으며, 오복(五服)의 안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천 리에 걸쳐 쓸쓸하여 사람의 자취조차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다.

짐은 하늘이 이어 준 대업을 계승하였으나 마침 운세가 다하여 폐단이 극심한 때를 만났다. 거짓을 없애고 참된 것을 바로잡아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의 정치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니 오랑캐의 귀신을 모조리 쓸어 없애 그 자취를 없애라. 그렇게 하여 바라건대 풍씨(風氏, 복희)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감히 오랑캐의 귀신을 섬기거나 진흙이나 청동으로 그 형상을 만드는 자는 그 집안을 함께 죽인다. 비록 오랑캐의 귀신이라고 말하지만, 지금의 호인(胡人)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두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옛날 한인(漢人) 무뢰한의 자제인 유원진(劉元真)이나 여백강(呂伯強) 같은 무리가 호인에게서 허황된 말을 빌려 오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허황된 설을 가져다가 거기에 덧붙이고 보탠 것이니, 모두 진실한 것이 아니다. 마침내 왕법(王法)이 폐지되어 시행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큰 간악함의 극치이다. 비범한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비범한 일을 행할 수 있다. 짐이 아니면 누가 대대로 내려온 이 요물들을 없앨 수 있겠는가! 담당 관리는 여러 정벌군과 주둔군 및 자사(刺史)들에게 널리 알리라. 불도(佛圖)의 형상과 호경(胡經)이 있는 곳은 모두 남김없이 깨뜨리고 불태우며, 사문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가리지 말고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라."
탁발황의 말은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서를 선포하는 일을 늦추었으므로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모두 미리 그 사실을 듣고 각자 살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방의 승려들은 많이 달아나 숨어 화를 면하였고, 경읍(京邑)에 있던 자들도 또한 온전히 구제받았다. 금과 은으로 만든 사치스러운 불상과 여러 경전, 논서(論書)도 은밀히 숨겨 많이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흙과 나무로 지은 사찰과 불탑은 조정의 명령과 교화가 미치는 곳이면 어디든 모두 남김없이 파괴되었다.이후로 태자 탁발황은 몰래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불교가 쇠퇴하여 폐지된 상태는 태무제가 죽을 때까지 이어져 7~8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금령은 점차 느슨해져, 독실하게 믿는 집안에서는 몰래 불교를 받들어 섬길 수 있었다. 불교에 전념하는 승려들도 여전히 몰래 법복(法服)을 입고 경전을 외우며 익혔는데, 다만 평성에서는 공개적으로 행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태무제의 이 같은 멸불을 단순히 도교에 심취한 황제와 반불교 성향의 재상 최호가 일으킨 종교 탄압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태무제가 신임했던 도사 구겸지는 오히려 최호의 멸불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였는데, 이 사건을 단순한 '도교 대 불교'의 충돌로 설명하면 정작 구겸지의 태도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태무제와 최호의 종교적 성향은 분명 멸불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배경이었지만, 그것만으로 446년에 갑작스럽게 전국적인 승려 처형과 불상·불경 파괴로까지 정책이 확대된 이유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특히 대만의 중국 중세사 연구자 유숙분(劉淑芬)은 태무제의 멸불을 이해하려면 갑오의 반란과 노수호족의 문제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갑오는 노수호 계통의 인물이었고, 노수호가 세운 북량은 불교가 매우 성행한 국가였다. 북량에서는 대규모 역경 사업이 이루어졌고, 그 왕실 역시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439년 태무제가 북량을 멸망시키면서 양주(涼州)의 주민과 승려들이 대거 북위의 수도권으로 옮겨졌는데, 불과 몇 년 뒤 갑오가 관중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유숙분은 이런 배경 때문에 태무제에게 불교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 정복한 서북 지역의 인적 및 정치적 네트워크와 연결된 문제로 보였을 가능성을 강조하였다.[338]

태무제가 불교에 대해 품은 의심은 장안의 사찰에서 병기가 발견되면서 극단적인 형태로 폭발하였다. 전쟁 중인 황제의 입장에서 사찰에서 활과 화살, 창과 방패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승려의 계율 위반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태무제가 곧바로 갑오와의 내통을 의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만 실제로 그 사찰이 갑오와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사료만으로 확인할 수 없다. 《위서》가 보여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태무제가 그 병기들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찰이 실제로 반란의 근거지였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반란 중 발견된 병기가 기존에 쌓여 있던 불교에 대한 불신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또, 승단의 지나친 팽창에 대한 국가의 경계도 이미 멸불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태무제가 북량을 평정한 뒤, 양주의 승려와 불교 문화가 평성으로 대거 유입되자, 북위 조정은 앞서 보았듯이 444년 1월에 최초로 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50세 이하의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조치가 뒤따랐다. 최호가 불교를 두고 "세상에 비용만 들게 하고 해를 끼친다"고 평한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승려와 사찰의 증가는 국가가 직접 파악하고 동원할 수 있는 호구와 세역의 범위를 줄이는 한편, 사찰이 독자적으로 재물과 인력을 축적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446년의 멸불은 새로운 종교에 대해 품는 반발심뿐 아니라 국가가 승단의 인구와 재산을 어디까지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태무제의 명령이 문자 그대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조서 자체는 "사문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가리지 말고 모두 구덩이에 묻으라"고 할 정도로 표현이 극단적이었지만, 태자 탁발황이 조서의 선포를 늦춘 덕분에 상당수 승려들이 미리 피신할 수 있었고, 불상과 경전 역시 숨겨져 보존되었다. 반면 이동시킬 수 없는 사찰과 불탑은 훨씬 큰 피해를 입어 조정의 명령이 미치는 곳에서 토목으로 만든 사찰과 불탑이 모두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북위의 승려가 모두 학살된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지만, 반대로 실제 피해가 미미했다고 보는 것 역시 사료와 맞지 않는다. 사람과 경전은 상당수가 숨어 살아남았지만, 공공연히 활동하던 승단 조직과 사찰이라는 물리적 기반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하지만 이 멸불은 북위에서 불교를 뿌리 뽑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였다. 태무제가 죽은 452년, 즉 멸불이 시작된 지 불과 6년 만에 태무제의 황손 문성제가 즉위하면서 정책은 곧바로 뒤집혔다. 문성제는 복불 조서를 내리면서 태무제를 직접 비판하기보다는, 이전에 일부 사찰에서 범죄자가 발견되어 죄 있는 자들을 처벌한 것인데 담당 관리들이 태무제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모두 금지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각 주·군·현에서 다시 불탑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출가도 다시 인정하였다. 《위서》는 조서가 내려지자 과거 파괴된 사찰이 빠르게 복구되고 불상과 경전도 다시 공개되었다고 기록한다. 다만, 복구된 불교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는데, 문성제는 큰 주에는 50명, 작은 주에는 40명,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군에는 10명 정도의 출가를 허용한다는 식으로 승려의 수를 제한하였다. 즉 태무제의 방식처럼 불교를 완전히 없애는 대신, 국가가 인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불교를 다시 조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멸불 이후의 북위 불교는 이전보다 황제권과 국가 행정의 통제 속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불상 제작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문성제는 불교를 복구한 바로 그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황제 자신의 모습을 본뜬 석불을 만들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도무제 이하 북위의 앞선 다섯 황제를 위해 각각 석가모니 입상 다섯 구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황제와 부처의 형상을 의도적으로 겹쳐 놓은 셈이다. 사실 북위에서는 이미 도무제 때 승려 법과(法果)가 황제를 '당금여래(當今如來)', 즉 현세의 여래라고 부르며 황제에게 절하는 것이 곧 부처에게 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전례가 있었다. 다만 멸불 이후 이러한 황제와 부처의 결합은 훨씬 거대한 국가 사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339]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태무제의 멸불기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담요(曇曜)였다. 담요는 이후 사문통(沙門統)이 되어 문성제의 후원을 받았고, 평성 서쪽 무주새(武州塞)의 산을 깎아 다섯 개의 거대한 석굴을 조성하도록 건의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운강석굴 초기의 핵심을 이루는 이른바 '담요오굴(曇曜五窟)'이다. 《위서》는 각 굴마다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70척에 달했다고 기록한다. 운강석굴을 연구한 사토 치스이(佐藤智水) 등은 이러한 조영 사업을 북위에서 황제권과 불교가 강하게 결합하는 국가불교의 성립 과정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다.[340]

담요가 마련한 승기호(僧祇戶)와 불도호(佛圖戶) 역시 중요한 변화였다. 일정량의 곡식을 승단에 납부하는 가구를 승기호로 삼고, 중죄인이나 관노 가운데 일부를 사찰의 노동을 담당하는 불도호로 편입시켰다. 문성제는 이를 허가했고, 《위서》는 이후 승기호와 사찰 소속 가구가 여러 주와 진에 널리 퍼졌다고 기록한다. 결국 태무제가 문제 삼았던 승단의 경제적·인적 기반은 멸불 이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감독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 결과 북위의 불교는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하였다. 《위서》에 따르면 태화(太和) 원년 무렵에는 수도의 신구 사찰이 약 100곳, 승려 및 비구니가 2,000여 명이었으며, 전국에는 사찰 6,478곳과 승니 77,258명이 존재하였다. 이 숫자를 현대적인 통계처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북위 조정이 파악한 불교 세력이 멸불 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다시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음을 보여 준다. 이후 북위 조정은 다시 승려의 자격, 사찰 건립, 승려 명부 등을 끊임없이 규제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태무제의 멸불은 북위 불교의 장기적인 쇠퇴를 초래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단기적으로는 사찰과 승단을 파괴했지만, 그 실패 이후 북위 조정은 불교를 제거하는 대신 황제의 보호와 국가의 관리 아래에 두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다만 이것을 멸불 이후에 북위의 '국가불교'가 처음 생겨났다고 표현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도무제 때부터 이미 황실의 적극적인 불교 후원과 '당금여래'라는 관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태무제의 멸불과 문성제의 복불을 거치면서, 기존에 존재하던 황실과 불교의 결합이 보다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형태로 재편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341]

그래서 태무제의 멸불이 남긴 가장 큰 역설은, 불교를 없애려 했던 사건이 결과적으로 북위 불교를 황제권과 더욱 강하게 결합시키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태무제가 제거하려 했던 불교는 그가 죽은 뒤 다시 살아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모습을 닮은 불상과 거대한 운강석굴, 국가가 승인한 승단 경제조직까지 갖추게 되었다. 446년의 멸불은 북위 불교사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이후 북위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국가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크게 바꾸어 놓은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2.17.3. 양회의 난

태평진군 7년(446년) 3월, 금성(金城) 사람 변고(邊固)와 천수(天水) 사람 양회(梁會)가 진주(秦州), 익주(益州)의 여러 백성 10,000여 호와 함께 상규(上邽)의 동성(東城)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서성(西城)을 공격하며 압박하였다. 이에 진·익2주자사(秦益二州刺史) 봉칙문이 이를 막아 물리쳤다. 그때 저족과 강족 10,000여 명, 흉노 계통인 휴관(休官)과 도각(屠各)의 부족 20,000여 명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 변고와 양회에 호응하였다. 봉칙문은 변고를 공격하여 참수하였으나, 남은 무리가 양회를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봉칙문과 서로 공격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4월 1일[342], 태무제 탁발도가 장안에서 평성으로 돌아왔다.

4월 5일[343], 업성(鄴城)에서 5층 불탑을 허물다가 진흙으로 만든 불상 안에서 옥새 두 개를 얻었다. 그 글에는 모두 "하늘의 명을 받았으니, 수명이 길고 영원히 번창하리라(受命於天,既壽永昌)"라고 새겨져 있었고, 그중 하나의 옆면에는 "위(魏)가 한(漢)으로부터 받은 전국옥새이다(魏所受漢傳國璽)"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때 송나라 태원(太原)[344]의 백성 안백록(顏白鹿)이 몰래 위나라 경내로 들어갔다가, 위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자, 거짓으로 "청주자사(青州刺史) 두기(杜驥)가 나를 보내 귀순 의사를 전하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이후 사람들이 안백록을 평성으로 보내니, 탁발도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외가 사람이구나."[345]
이내 최호에게 두기에게 보낼 글을 짓게 하고, 또 영창왕 탁발인과 고량왕 탁발나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두기를 맞이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역성(歷城)에 있는 송나라의 기주자사(冀州刺史) 신념(申恬)을 공격하게 하였다. 애초에 항복할 생각이 없던 두기는 그 부(府)의 사마 하후조환(夏侯祖歡) 등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역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위나라 군대는 마침내 송나라의 연주(兗州), 청주(青州), 기주(冀州) 세 주를 침범하여 청동(清東)에 이르렀다가 돌아갔는데, 죽이고 노략질한 사람이 매우 많아 북쪽 변경이 크게 동요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5월 11일[346], 안풍공 여근(閭根)이 기병을 이끌고 상규로 가서 봉칙문과 함께 양회를 토벌하였다. 하지만 그가 아직 도착하기 전에 양회가 상규의 동성(東城)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봉칙문은 성 밖에 여러 겹의 참호를 파 놓고, 병사들을 엄중히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밤부터 아침까지 서로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때 봉칙문이 말했다.
"적들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목숨을 걸고 덤비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병졸들이 많이 죽거나 다칠 것이어서 쉽게 이기기 어렵다."
이에 백호번(白虎幡)을 내걸고 양회의 무리에게 항복하는 자는 사면하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양회의 무리가 무너져 흩어지니, 군사를 나누어 추격해 토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그 수괴인 양회는 한중(漢中)으로 달아났다. 또, 약양(略陽) 사람 왕원달(王元達)이 무리를 모아 송다천(松多川)에 주둔하자, 봉칙문이 이 또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당시 갑오는 다시 행성(杏城) 북산에서 무리를 모으고 스스로 '진지왕(秦地王)'이라 칭하며, 산 속 백성들에게 임의로 관직과 지위를 내려 임명하니, 그 무리는 곧 다시 기세를 회복하였다. 이에 영창왕 탁발인과 고량왕 탁발나를 보내 북쪽 길로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함께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6월 2일[347], 탁발도는 정주(定州), 기주(冀州), 상주(相州) 세 주에서 20,000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장안 남산(南山)의 여러 골짜기에 주둔시키고, 갑오의 무리가 도망쳐 빠져나가는 것을 막게 하였다.

6월 4일[348], 사주(司州), 유주(幽州), 정주(定州), 기주(冀州) 네 주에서 10만 명을 징발하여 수도권 북쪽에 요새와 방어선을 쌓게 하였는데, 상곡(上谷)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황하(河)에 이르렀으며,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모두 천 리에 달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8월, 고량왕 탁발나 등이 갑오를 격파하고 그의 두 숙부를 사로잡았다. 여러 장수가 이들을 평성으로 압송하려 하자, 장안진장(長安鎮將) 육사가 말했다.
"장안(長安)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하며, 이곳 사람들의 기풍도 강하고 사납습니다. 평상시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인데, 하물며 전란으로 황폐해진 뒤는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갑오를 죽이지 못한다면 장안의 변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갑오 한 명이 몰래 숨어 달아났으니, 그의 가까운 친족이나 심복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를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10만의 군사를 그대로 머물게 하면서 한 사람을 추격한다면, 이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차라리 갑오의 숙부들에게 은밀히 약속하여 그들의 처자를 사면해 주고, 스스로 갑오를 추격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장수가 모두 말했다.
"지금 도적의 무리는 이미 흩어졌고 오직 갑오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가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육사가 말했다.
"여러분은 독사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 머리를 끊어 버리지 않으면 여전히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갑오는 천성이 흉악하고 교활합니다. 지금 만약 빠져나가게 된다면 반드시 스스로 '왕이 된 자는 죽지 않는다'고 떠벌려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할 것이니, 그때에는 화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여러 장수가 물었다.
"공(公)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도적을 붙잡고도 죽이지 않고 도리어 풀어 보냈다가, 만약 그대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죄를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육사가 답하였다.
"그 죄는 제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감당하겠습니다."
고량왕 탁발나 역시 육사의 계책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개오의 두 숙부를 사면하고 기한을 정하여 풀어 보냈다. 기한이 되었는데도 갑오의 숙부들이 오지 않자 여러 장수가 모두 육사를 탓하였으나, 육사가 말했다.
"그들이 아직 기회를 엿보다가 알맞은 때를 얻지 못했을 뿐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며칠 뒤 갑오의 숙부가 과연 갑오의 머리를 가지고 왔고, 그 머리는 평성으로 보내졌다. 이후 영창왕 탁발인이 갑오의 잔당인 백광평과 도각족 노나라(路那羅)를 토벌하여 모두 평정하였고, 노나라를 사로잡혀 평성에서 참수되었다. 육사는 이 일로 탁발도의 눈에 들어 내도대관으로 임명되었다.

2.17.4. 유초의 난

때마침 안정의 노수호족 유초(劉超) 등이 무리 10,000여 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태무제 탁발도는 육사가 관중(關中)에서 은혜를 베푼 바가 있었으므로, 다시 육사에게 도독진·옹2주제군사(都督秦雍二州諸軍事)를 더하여 장안을 진수하게 하였다. 이때 탁발도가 육사에게 말했다.
"관중(關中)이 우리의 교화를 받들게 된 지 아직 오래되지 않았고, 은혜와 신의도 아직 두루 미치지 못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 짐이 그대에게 많은 군사를 맡기면 유초(劉超) 등은 반드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험한 곳을 차지하고 굳게 지킬 것이니, 쉽게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군사가 적으면 도적을 제압할 수 없다. 그대가 스스로 계략을 써서 그들을 제압해야 한다."
이에 육사는 홀로 말을 타고 부임지로 갔다. 유초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육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육사가 도착한 뒤, 성공과 실패의 이치를 들어 유초를 타이르고, 유초의 딸을 맞아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초는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여전히 항복할 뜻이 없었다. 이에 육사가 휘하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직접 유초를 만나러 갔다. 유초는 사람을 보내 육사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따르는 사람이 300명을 넘으면 활과 말을 갖추고 상대할 것이고, 300명에 미치지 않으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겠다."
이에 육사는 기병 200기를 거느리고 유초에게 갔다. 유초는 방비를 매우 엄중하게 하였으나, 육사는 마음껏 술을 마셔 완전히 취한 뒤 돌아왔다.

얼마 뒤, 육사는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병사 500명을 뽑아 사냥을 나갔다가 그대로 유초의 군영으로 갔다. 이때 병사들과 미리 약속하기를,
"행동을 개시하는 것은 내가 취하는 것을 신호로 삼아라."
라고 하였다. 술을 마신 뒤 육사는 일부러 취한 척하다가 말에 올라 큰 소리로 외치며 손수 유초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그 외침에 호응하여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1,000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였고, 마침내 모두 평정하였다. 탁발도는 육사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외도대관으로 삼았다.

태평진군 8년(447년) 정월, 토경호(吐京胡)가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여 도적질을 하니,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정동장군 · 무창왕 탁발제와 정남장군 · 회남왕 탁발타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평정하지 못하였다. 이후 산호(山胡) 조복혼(曹僕渾) 등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가서 산을 지키며 스스로 방어를 굳히고, 삭방(朔方)의 여러 호인(胡人)을 불러들였다. 이에 탁발제 등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조복혼을 토벌하였다.

태평진군 8년(447년) 2월 1일[349], 고량왕 탁발나 등이 안정(安定)에서 출발하여 삭방(朔方)의 호인들을 토벌해 평정하고, 이어 탁발제 등의 군대와 합류하여 함께 조복혼을 공격해 참수하였다. 그 무리 가운데 험준한 곳으로 달아나다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2월 5일[350], 탁발도가 중산(中山)에 행차하여 수행한 문무 관리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 주었다. 고양군(高陽郡) 역현(易縣)의 백성들이 관아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토벌하여 평정하고, 살아남은 무리를 북지(北地)로 옮겼다.

당초 위나라 군대가 고장(姑臧)을 함락하고 북량을 멸망시켰을 때, 하서왕 저거목건은 사람을 시켜 부고(府庫)를 쪼개어 열게 하고 금과 옥 및 보물과 귀중한 기물을 꺼낸 뒤 다시 닫지 않았다. 그러자 일반 백성들이 앞다투어 들어가 훔쳐 갔는데, 담당 관리들이 도둑을 수색하였으나 붙잡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저거목건의 측근과 창고지기들이 그 일을 고발하고, 또 저거목건 부자가 독약을 많이 비축해 두고 몰래 사람을 죽여 온 것이 전후로 백 명을 헤아렸으며, 게다가 그 누이와 여동생들도 모두 좌도(左道)[351]를 배웠다고 말하였다. 담당 관리들이 저거목건의 집을 수색하여 숨겨 둔 물건들을 찾아내자, 탁발도는 크게 노하여 소의 저거씨를 사사하고, 아울러 그 종족을 주살하였다. 다만 저거조는 일찍 항복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태평진군 8년(447년) 3월, 하서왕 저거목건이 여전히 옛 신하와 백성들과 몰래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한 자가 있었다. 탁발도는 최호를 보내 저거목건의 저택으로 가서 사약을 내리게 하였고, 그의 시호를 '애왕(哀王)'이라 하였다.

태평진군 8년(447년) 5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평진군 8년(447년) 6월, 서쪽을 정벌했던 여러 장수 가운데 부풍공 탁발처진 등 여덟 장수가 군수 물자를 빼돌려 착복하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약탈한 죄로 처벌을 받았다. 그들이 부정하게 취한 재물은 각기 천만을 헤아렸으며, 모두 참수되었다.

태평진군 8년(447년) 8월, 위대장군 · 낙안왕 탁발범이 사망하였다.

태평진군 8년(447년) 10월, 시중 · 중서감 · 의도왕 목수가 사망하였다.

태평진군 8년(447년) 12월, 선선국과 차일국의 왕들이 모두 아들을 보내 조정에 나아가 공물을 바쳤다. 이달에 진왕 탁발복라가 요절하였다.

2.18. 서역 장악

태평진군 9년(448년) 정월, 일전에 반란했던 저족의 수령 양문덕이 송나라로부터 관직과 작호를 받고 가로성(葭蘆城)을 지키면서 무도(武都)와 음평(陰平)의 다섯 저족 부락 사람들을 불러들여 회유하였다. 태무제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구지진장 피표자에게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양문덕은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으며, 그의 처자와 관속들은 곧 피표자에게 사로잡혔다. 송나라의 백수태수(白水太守) 낭계현(郎啟玄)이 무리를 거느리고 양문덕을 구원하러 오자, 피표자가 영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낭계현과 양문덕은 달아나 한중(漢中)으로 돌아가자, 탕창 강족 추장 양근자(梁瑾慈)가 사신을 보내 귀순하고, 아울러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쳤다.

태평진군 9년(448년) 2월 1일[352], 탁발도가 정주(定州)로 행차하였다. 이때 산동(山東)의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고, 수도 북쪽의 장성을 쌓는 공사를 중지하였다.[353] 이어 서쪽으로 상당(上黨)에 행차하여 노(潞)에서 반란한 백성 2,000여 호를 처벌해 죽이고, 서하(西河) 이석(離石)의 백성 5,000여 호를 평성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조서를 내려 호관(壺關) 동북쪽 대왕산(大王山)에 돌을 쌓아 세 개의 봉분을 만들게 하고, 또 그 북쪽 봉황산(鳳皇山)의 남쪽 산기슭을 깎아 끊어 놓게 하였다.

태평진군 9년(448년) 3월, 탁발도가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평진군 9년(448년) 5월 4일[354], 교지공 한발(韓拔)을 가절 · 정서장군 · 영호서융교위(領護西戎校尉) · 선선왕(鄯善王)으로 삼아 선선(鄯善)에 주둔하게 하고, 그 백성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여 군현(郡縣)과 같은 방식으로 다스렸다.

태평진군 9년(448년) 6월 21일[355], 탁발도가 광덕궁(廣德宮)에 행차하였다.

6월 27일[356], 열반국(悅般國)이 사신을 보내 위나라와 동서에서 함께 유연을 공격하기를 청하자, 탁발도가 이를 수락하였다.

태평진군 9년(448년) 8월, 조서를 내려 조정 안팎의 모든 군대에 계엄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태평진군 9년(448년) 9월 16일[357], 서교(西郊)에서 군사를 훈련하였다.

9월 17일[358], 탁발도가 음산(陰山)에 행차하였다.

이달에 성주공 만도귀가 언기국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자, 언기의 왕 구시비나(鳩尸卑那)가 구자국으로 달아났다.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당화와 전부왕 차이락에게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만도귀와 합류하여 서역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당화는 유려(柳驢) 등 여섯 성을 설득하여 항복시켰고, 이어 만도귀와 합류해 파거라성(波居羅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태평진군 9년(448년) 10월 3일[359], 홍농왕 해근이 사망하고, 아들 해타관(奚它觀)이 작위를 이었다. 그러나 탁발도가 말했다.
"해근이 관서(關西)에서 패전한 것은 그 죄로 보건대 본래 죽어 마땅하였다. 그러나 짐은 해근이 선조(先朝)를 도와 천명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그의 작위와 봉읍을 회복시켜 천수를 다하게 하였다. 이 정도면 임금과 신하 사이의 도리도 충분히 다한 것이다."
이에 해타관의 작위를 낮추어 공(公)으로 삼았다.

10월 5일[360], 혼인에서 사치가 지나치고 상장(喪葬)에서도 정도를 넘는 일이 있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담당 관청에서 다시 기준과 제한을 정하게 하였다.

10월 25일[361],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평진군 9년(448년) 12월, 조서를 내려 성주공 만도귀에게 언기(焉耆)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구자(龜茲)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만도귀는 당화를 남겨 언기를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구자를 정벌하였다. 이때 유려성의 수비대장 을직가(乙直伽)가 반란을 꾀하자, 당화가 공격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호인(胡人)이 모두 복종하였고, 서역이 다시 평정되었다.

황태자 탁발황이 행궁(行宮)에 나아가 조회하고, 이어 탁발도를 따라서 북쪽 정벌을 수행하였다. 수항성(受降城)에 이르렀으나 유연을 만나지 못하자, 성 안에 군량을 쌓아 두고 수비병을 남긴 뒤 돌아왔다.

이달에 북평왕 장손돈(長孫敦)은 일에 연루되어 작위가 공(公)으로 강등되었다.

2.19. 제4차 북위-유연 전쟁

태평진군 10년(449년) 정월 초하루[362], 태무제 탁발도는 막남(漠南)에서 백관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내려 주었다.

정월 7일[363], 탁발도가 친히 북쪽으로 유연을 정벌하였다. 고창왕 탁발나는 동쪽 길로 나아가고, 약양왕 탁발갈아는 서쪽 길로 나아갔으며, 탁발도 자신은 태자 탁발황과 함께 가운데 길로 나가 탁야산(涿邪山)[364]에 이르렀다. 처라가한 아래에서 별도로 부락을 이끄는 추장 이미타발(爾綿他拔) 등이 1,000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에 귀순하였다. 이때 군대가 수천 리를 행군하였는데, 처라가한은 새로 즉위한 터라 두려워하여 멀리 달아났다.

태평진군 10년(449년) 3월, 탁발도가 하서(河西)에서 사냥을 벌였다.

태평진군 10년(449년) 3월 24일[365], 북벌을 중단하고 평성으로 돌아왔다.

태평진군 10년(449년) 5월 25일[366], 탁발도가 음산(陰山)에 행차하였다.

태평진군 10년(449년) 7월, 부도사국(浮圖沙國)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태평진군 10년(449년) 9월, 탁발도가 북벌을 재개하였다. 고창왕 탁발나는 동쪽 길로 진군하고, 약양왕 탁발갈아는 가운데 길로 진군하여 여러 군대와 지불지(地弗池)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처라가한은 나라의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였고 군수 물자도 매우 풍부하였는데, 그가 탁발나를 수십 겹으로 포위하자, 탁발나는 긴 방어 참호를 파고 굳게 지키며 며칠 동안 서로 대치하였다. 처라가한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번번이 전세가 불리하였고, 탁발나가 병력이 적으면서도 굳게 버티는 것을 보고 대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포위를 풀고 밤중에 달아났다. 탁발나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9일 동안 밤낮으로 뒤쫓자, 처라가한은 더욱 두려워하여 치중을 버리고 궁륭령(穹隆嶺)을 넘어 멀리 달아났다. 탁발나는 그 치중을 거두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광택(廣澤)에서 탁발도와 합류하였다.

약양왕 탁발갈아는 유연의 백성과 가축을 모두 거두었는데, 100여 만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처라가한의 세력은 마침내 고립되고 약해져 멀리 달아나 숨었으며, 변경의 경계를 침략하던 일도 그치게 되었다.

태평진군 10년(449년) 10월 8일[367], 태자 탁발황과 여러 관리가 행궁(行宮)으로 나아가 탁발도를 영접하였다. 탁발도는 크게 연회를 베풀고 전쟁에서 노획한 물품과 비단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태평진군 10년(449년) 11월, 구자, 소륵, 파락나, 원활(員闊) 서역의 네 나라가 각각 사신을 보내 조정에 나아가 공물을 바쳤다.

태평진군 10년(449년) 12월 17일[368], 탁발도가 북벌을 마치고 평성으로 돌아왔다.

12월 18일[369], 평창공 탁발탁진(拓跋託真)을 중산왕(中山王)으로 삼았다. 탁발탁진은 위왕 탁발의의 손자이자 중산간왕 탁발찬의 아들로, 이때에 이르러서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2.20. 현호 전투

태평진군 11년(450년) 정월 24일[370], 태무제 탁발도가 낙양(洛陽)에 행차하였다. 지나가는 군현(郡縣)마다 탁발도는 직접 노인들을 만나고, 고아와 홀몸이 된 사람들을 돌보아 구휼하였다. 이때 고량왕 탁발나를 의동삼사로 임명하였다.

태평진군 11년(450년) 2월 3일[371], 양천(梁川)에서 대대적으로 사냥하였다.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이 이 소식을 듣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일대 송나라 소속의 여러 군(郡)에 명령하였다.
"위(魏)의 적군이 소규모로 쳐들어오면 각자 성을 굳게 지키되, 대규모로 쳐들어오면 백성들을 철수시켜 수양(壽陽)으로 돌아오라."

2월 20일[372], 송나라 변경 수비대의 정찰과 첩보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탁발도가 100만 대군을 칭하며 직접 보병과 기병 100,000명을 거느리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송나라의 남돈태수(南頓太守) 정곤(鄭琨)과 영천태수(潁川太守) 정도은(鄭道隱)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당시 송나라의 남평왕 유삭은 수양(壽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좌군행참군 진헌(陳憲)을 보내 여남군(汝南郡)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 현호(懸瓠)를 지키게 하였다. 현호성 안의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탁발도가 현호를 포위하였다.

이달에 궁실(宮室)을 크게 수리하고 지었으며, 태자 탁발황은 북궁(北宮)에 거처하였다. 또, 황자 탁발진(拓跋真)이 사망하였다.

태평진군 11년(450년) 3월, 탁발도는 군사를 몰아 밤낮으로 현호를 공격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이 높은 누각을 많이 세워 성을 내려다보며 화살을 쏘니,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성 안에서는 문짝을 등에 지고 물을 길으러 다녔다. 또, 위나라 군대는 충차 끝에 큰 갈고리를 달아 성가퀴를 잡아당겨 남쪽 성벽을 무너뜨렸다. 이에 진헌은 안쪽에 낮은 방어벽을 설치하고 바깥에는 나무 울타리를 세워 이를 막았다. 이어 위나라 군사들이 참호를 메우고 몸을 맞대다시피 하며 성벽에 올라오자, 진헌은 장병들을 독려하여 필사적으로 싸우게 하였고, 시체가 쌓여 성벽 높이와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위나라 군사들은 그 시체를 밟고 성 위로 올라왔고, 마침내 서로 짧은 병기를 들고 맞붙어 싸웠다. 그러나 진헌의 기세는 더욱 치솟았고, 그 병사들은 모두 한 사람이 백 명을 상대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싸웠다. 이때 위나라 측은 죽거나 다친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으며, 성 안에서도 죽은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현호가 예상 외로 오래 버티자, 탁발도는 영창왕 탁발인에게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주어, 노략질하여 사로잡은 여섯 군(郡)의 백성들을 몰아 북쪽으로 가서 여양(汝陽)에 주둔하게 하였다. 당시 송나라의 무릉왕 유준은 팽성(彭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문제 유의륭은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 유준에게 기병을 출동시켜 사흘치 군량을 가지고 탁발인의 군대를 기습하게 하였다. 무릉왕 유준은 사방 100리 안에서 말을 징발하여 1,500필을 얻고, 병력을 다섯 부대로 나누었다. 이때 유준은 참군 유태지(劉泰之)를 선봉으로 삼아 기병행참군 원겸지(垣謙之), 전조행참군 장조지(臧肇之), 집조행참군 윤정(尹定), 무릉국좌상시 두유문(杜幼文)를 거느리고 곧바로 여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한편, 탁발인은 송나라의 구원군이 수양에서 올 것만 염려하고 팽성 쪽은 대비하지 않았다. 유태지가 기습하여 위나라 군사 3,000여 명을 죽이고 그 치중을 전부 불태웠다. 탁발인은 잠시 동쪽으로 군대를 물렸다가 정찰을 통해 유태지 등의 군대에 뒤따르는 지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원겸지가 겁을 먹고 먼저 물러나자, 송나라의 병사들이 놀라 혼란에 빠져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들의 지휘관인 유태지는 위나라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장조지는 물에 빠져 죽었으며, 정천조는 위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원겸지, 윤정, 두유문을 비롯하여 살아서 돌아간 송나라 군사는 900여 명이었고, 무사히 돌아온 말은 400필이었다.

탁발도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는 42일 동안 현호를 공격하였는데,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남평내사(南平內史) 장질(臧質)을 수양으로 보내 안만교위부의 사마 유강조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현호를 구원하게 하였다. 탁발도는 전중상서 · 임성공 탁발걸지진(拓跋乞地真)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들을 막게 하였으나, 장질 등이 탁발걸지진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이에 탁발도는 하는 수 없이 현호를 포기하고 퇴각을 결정하였다.

태평진군(450년) 4월 13일[373], 탁발도가 평성에 도착하였다. 이후 송나라에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전에 갑오(蓋吳)가 도리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고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일대를 선동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또 사람을 그에게 보내 회유하면서, 남자들에게는 활과 화살을 주고 여자들에게는 팔찌를 주었다. 저들은 그저 그대를 속여 재물을 얻어내려 했을 뿐인데, 어찌 멀리서 진심으로 그대에게 복종했겠는가! 대장부라면 어찌 직접 와서 취하지 않고, 재물로 우리 변경의 백성들을 꾀는가? 그곳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자를 모집하면서 다시 7년 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준다니, 이는 간악한 자들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이곳에 와서 얻은 것이, 그대가 그동안 우리 백성을 얻은 것과 견주어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2.21. 국사필화(國史筆禍)

사도 최호는 자신의 재주와 지략을 믿고, 또 태무제 탁발도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것을 믿어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일찍이 기주(冀州), 정주(定州), 상주(相州), 유주(幽州), 병주(幷州) 5주의 선비 수십 명을 천거하여, 모두 처음 벼슬길에 나서면서 곧바로 한 군(郡)의 태수가 되게 하였다. 이에 태자 탁발황이 말했다.
"앞서 불러들인 사람들 역시 주군(州郡)에서 선발된 인재들입니다.[374] 이들은 관직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그동안의 노고에 아직 보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이들을 먼저 군현(郡縣)의 관직에 임명하고, 새로 불러들인 사람들로 그들이 맡고 있던 낭관(郎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야 합니다. 또 태수와 현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이니, 마땅히 일을 겪어 경험이 있는 사람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최호는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기가 천거한 사람들을 그대로 지방에 부임시켰다. 중서시랑 · 영저작랑 고윤이 이 일을 듣고 동궁박사 관념(管恬)에게 말했다.
"최공(崔公)은 아마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이고 윗사람을 상대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드니, 장차 그 결과를 어찌 감당하겠소!"

얼마 뒤, 탁발도는 최호에게 비서성(秘書省)의 일을 감독하게 하여, 고윤 등과 함께 《국기(國記)》를 편찬하게 하면서 말했다.
"반드시 사실대로 기록하라."
이때 저작령사 민담(閔湛)과 희표(郗標)는 성품이 아첨을 잘하고 남의 환심을 사는 데 능하여 최호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또, 최호는 일찍이 《역(易)》과 《논어(論語)》, 《시(詩)》, 《서(書)》에 주석을 달았는데, 한번은 민담과 희표가 상소하여 아뢴 적이 있었다.
"마융, 정현, 왕숙, 가규의 주석도 최호의 정밀하고 깊은 해석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청컨대 나라 안의 여러 책을 거두고 최호가 주석한 책을 반포하여 천하 사람들이 이를 익히고 배우게 하십시오. 아울러 최호에게 《예전(禮傳)》에도 주석을 달도록 명하여 후학들이 올바른 뜻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최호 역시 민담과 희표에게 저술의 재능이 있다고 천거하였다. 민담과 희표는 한술 더 떠서 최호에게 그 자신이 편찬한 국사(國史)를 돌에 새겨, 사실을 숨김없이 기록했음을 드러내라고 권하였다. 고윤이 이 말을 듣고 저작랑 종흠에게 말했다.
"민담과 희표가 꾸미는 이 일이 자칫하면 최씨 집안에 만대의 화가 될 것이오. 우리조차도 살아남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러나 최호는 끝내 민담과 희표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사를 돌에 새기고 교단(郊壇) 동쪽에 세웠고, 그 규모는 사방 100보에 이르렀다. 이 공사에는 30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당시 최호가 기록한 위나라 선대의 일은 모두 상세하고 사실에 충실하였는데, 이를 큰길가에 늘어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보고 저마다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에 북쪽에서 내려온 선비족 출신 사람들은 모두 분노하였다. 그들은 함께 탁발도에게 최호를 모함하여, 나라의 치부를 세상에 드러냈다고 하였고, 탁발도 또한 크게 노하여 담당 관청에 최호와 비서성 관리들의 사적인 죄상까지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고윤은 태자 탁발황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일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최호가 체포되었을 때, 탁발황은 고윤을 동궁으로 불러 그대로 머물러 자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함께 조정에 들어가다가 궁문에 이르러 고윤에게 말했다.
"들어가 주상을 뵙게 되면 내가 그대를 위해 말해 주겠소. 혹 주상께서 물으시는 일이 있거든 그저 내가 말한 대로 대답하시오."
고윤이 물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탁발황이 말했다.
"들어가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오."
이후 탁발황이 탁발도를 뵙고 아뢰었다.
"고윤은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지위도 낮고 보잘것없습니다. 모든 결정은 최호가 내린 것이니, 청컨대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십시오."
탁발도가 고윤을 불러 물었다.
"국서(國書)는 모두 최호가 지은 것이냐?"
고윤이 대답하였다.
"〈태조기(太祖記)〉는 전(前) 저작랑 등연(鄧淵)이 지었고, 〈선제기(先帝記)〉와 〈금기(今記)〉는 신(臣)과 최호가 함께 지었습니다. 그러나 최호는 맡은 일이 많아 전체의 큰 줄기를 정하고 내용을 가려 결정했을 뿐이며, 실제 글을 쓴 것은 신이 최호보다 많습니다."
탁발도가 노하여 말했다.
"고윤의 죄가 최호보다 더 무거운데, 어찌 살려 둘 수 있겠느냐!"
탁발황이 두려워하며 말했다.
"천자의 위엄이 너무도 엄중하여, 고윤 같은 미천한 신하가 두려움에 정신이 흐려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신(臣)이 조금 전에 물었을 때에는 모두 최호가 한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탁발도가 고윤에게 물었다.
"정말 동궁(東宮)이 말한 것과 같으냐?"
고윤이 대답하였다.
"신(臣)의 죄는 멸족을 당해 마땅하니 감히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이 오랫동안 곁에서 경전을 강론해 온 것을 생각하여 가엾게 여기시고, 신의 목숨을 살려 주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신에게 물으신 적도 없고, 신 또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감히 사실을 어지럽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탁발도가 탁발황을 돌아보며 말했다.
"곧구나! 이는 사람이라면 하기 어려운 일인데 고윤은 해내는구나! 죽음을 앞두고도 말을 바꾸지 않으니 믿음직스럽고,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지 않으니 올곧다. 특별히 그 죄를 면해 주어 이를 드러내어 표창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고윤을 사면하였다.

이후 탁발도는 최호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직접 따져 물었으나, 최호는 당황하여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반면 고윤은 사건마다 하나하나 분명하게 설명하였는데, 모두 조리가 있었다. 이에 탁발도는 고윤에게 조서를 작성하게 하여 최호와 그의 측근인 종흠과 단승근 등부터 아래로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128명을 죽이고, 그들의 오족(五族)까지 멸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윤은 주저하며 조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탁발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다그치자, 고윤은 조서를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황제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탁발도가 그를 앞으로 불러들이자 고윤이 아뢰었다.
"최호가 죄를 받은 데 이 밖에 다른 죄상이 더 있다면 신(臣)이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단지 거리낌 없이 사실을 기록한 것 때문이라면 죽을 죄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결국 탁발도가 노하여 무사들에게 고윤을 붙잡으라고 명하였다. 태자 탁발황이 고윤을 위해 절하며 살려 달라고 청하자, 탁발도는 마침내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이 자가 없었더라면 수천 명이 죽었을 것이다."

태평진군(450년) 6월 10일[375], 조서를 내려 청하 최씨 가운데 최호와 같은 종족인 자는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이게 하였으며, 최호와 혼인 관계를 맺은 범양 노씨(盧氏), 태원 곽씨(郭氏), 하동 유씨(柳氏)도 모두 그 일족을 멸하게 하였다.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본인만 죽였다. 최호는 결박당한 채 함거(檻車) 안에 갇혀 성 남쪽으로 보내졌는데, 호위병 수십 명이 그 위에 오줌을 누었고, 최호가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렸다. 종흠은 처형을 앞두고 탄식하며 말했다.
"고윤은 거의 성인(聖人)에 가깝구나!"

6월 12일[376], 탁발도가 북쪽으로 음산(陰山)을 순행하였다. 탁발도는 최호를 죽인 뒤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마침 북부상서 이효백이 병이 위중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잘못 전하였다. 탁발도가 슬퍼하며 말했다.
"선성공 이효백은 참으로 아깝구나!"
그러다가 다시 말했다.
"짐이 말을 잘못했구나. 사도 최호가 아까운 사람이고, 선성공 이효백은 가엾은 사람이다!"
이효백은 일전에 죽은 상서 이순의 사촌동생으로, 최호가 처형된 뒤부터 군사와 국정에 관한 논의는 모두 이효백에게서 나왔으며, 탁발도의 총애와 신임도 최호에 버금갔다.

당초 차사국에서 나름 큰 부락을 거느리는 추장이었던 차이락은 대대로 위나라에 복종하였다. 이에 탁발도는 일찍이 차이락을 평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전부왕에 봉하였다. 차이락이 조정에 들어가 조회하려 하자 저거무휘가 그 길을 끊었고, 차이락은 여러 차례 저거무휘와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 이어 저거무휘가 죽고 그 아우 저거안주가 저거무휘의 아들 저거건수(沮渠乾壽)의 군대를 빼앗았다. 차이락이 사람을 보내 저거건수를 설득하자, 저거건수는 마침내 자신의 백성 500여 호를 거느리고 위나라로 망명하였다. 차이락은 또 이보의 아우 이흠(李欽) 등 50여 명을 설득하여 항복시키고, 모두 위나라로 보냈다. 이후 차이락이 서쪽으로 언기(焉耆)를 공격하면서 아들 차헐(車歇)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였다. 저거안주가 유연의 군사를 이끌고 샛길로 들어와 기습하여 그 성을 함락하였다. 차헐은 달아나 차이락에게로 갔고, 함께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언기진(焉耆鎮)을 지켰다. 이때 차이락은 사신을 보내 탁발도에게 글을 올려 아뢰었다.
"저거씨(沮渠氏)의 공격을 받은 지 전후로 8년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궁핍하여 스스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신(臣)은 이제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은 겨우 3분의 1뿐입니다. 이미 언기(焉耆)의 동쪽 경계에 이르렀으니, 바라건대 구휼하여 구해 주십시오."
이에 탁발도는 조서를 내려 언기(焉耆)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2.22. 제2차 원가 북벌 방어전

2.22.1. 송나라의 북진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이 위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송나라의 단양윤 서담지, 이부상서 강담, 팽성태수 왕현모 등이 여기에 찬성하였으나, 좌군장군 유강조가 반대하여 아뢰었다.
"이미 때가 늦었으니, 청컨대 내년을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유의륭이 말했다.
"북방의 백성들은 오랑캐의 가혹한 정사에 시달리고 있고, 의로운 뜻을 품고 일어난 무리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군사를 1년이나 묶어 둔다면 우리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뜻을 꺾게 될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
이때 태자 유소, 태자보병교위 심경지, 호군장군 소사화도 북벌에 반대하여 거듭 간언하였으나, 유의륭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웃어 넘겼다. 한편, 태무제 탁발도는 송나라에서 북벌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 글을 보내 말했다.
"우리 두 나라가 화친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그대의 욕심은 끝이 없어 우리 변경의 백성들을 꾀어내고 있다. 올봄에 내가 남쪽을 순행한 것도 그저 우리 백성들을 살펴보고 그들을 몰아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게 한 것뿐이다. 이제 듣자 하니 그대가 직접 온다는데, 정 중산(中山)이나 상건천(桑乾川)까지 올 수 있다면 마음대로 해 보라. 와도 맞이하지 않을 것이고, 돌아가도 전송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자기 땅에 사는 것이 싫증 났다면 평성(平城)으로 와서 살라. 나도 양주(揚州)로 갈 테니 서로 땅을 바꾸어 살면 될 것이다. 그대는 나이가 이미 쉰으로 아직 집 밖으로 나와 본 적도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이곳까지 온다 해도 세 살배기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을 터인데, 어려서부터 말 위에서 자란 우리 선비인(鮮卑人)을 상대로 과연 어찌하겠는가! 달리 그대에게 줄 만한 물건도 없으니, 지금 사냥에 쓸 수 있는 말 12필과 모전(毛氈), 약 등의 물품을 보내겠다. 그대가 먼 길을 오다가 타고 온 말이 지치면 이 말을 타면 되고, 혹 물과 풍토가 맞지 않아 병이 나면 이 약으로 스스로 치료하면 될 것이다."

태평진군 11년(450년) 7월 12일[377], 문제 유의륭이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키고, 조서를 내려 보국장군 소빈(蕭斌)에게 녕삭장군 왕현모, 태자보병교위 심경지 등과 함께 병사 60,000명을 거느리고 제주(濟州)를 침공하게 하였다. 소빈은 먼저 건무장군 사마 신원길(申元吉)에게 군사를 주어 확오(碻磝)로 진군하게 하였다.[378]

7월 17일[379], 제주자사(濟州刺史) 왕매덕(王買德)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곧이어 소빈이 확오성에 입성하였다. 소빈이 다시 장군 최맹(崔猛)을 보내 낙안(樂安)을 공격하게 하니, 청주자사(青州刺史) 장회지(張淮之)도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후 소빈과 심경지는 확오에 남아 지키고, 왕현모에게 진군하여 활대(滑臺)를 포위하게 하였고, 수왕 유탄, 중병참군 유원경(柳元景), 진위장군 윤현조(尹顯祖), 분위장군 증방평(曾方平), 건무장군 설안도, 약양태수(略陽太守) 방법기(龐法起)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홍농(弘農)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또, 관중(關中)의 유력한 집안 출신인 후군외병참군 방계명(龐季明)은 자곡(貲谷)에서 노씨현(盧氏縣)으로 들어가, 노씨현 사람 조난(趙難)의 도움으로 선비와 백성들을 설득하여 호응하게 하였는데,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설안도 등은 이를 이용하여 웅이산(熊耳山)에서 나왔고, 유원경이 군사를 이끌고 뒤이어 진군하였다.

한편, 송나라의 남평왕 유삭은 중병참군 호성지(胡盛之)를 여남(汝南) 방면으로 내보내고, 양탄(梁坦)을 상채(上蔡)에서 출발시켜 장사(長社)로 향하게 하였다.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 노상이 장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송나라군이 다가오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어 송나라의 당주(幢主) 왕양아(王陽兒)가 예주자사(豫州刺史) 복란(僕蘭)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복란은 호뢰(虎牢)로 달아났다. 유삭은 또 사마 유강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양탄을 돕게 하였고, 둘은 함께 진군하여 호뢰를 압박하였다.

위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처음 송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탁발도에게 아뢰어, 황하 연안에 비축해 둔 곡식과 비단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보내자고 탁발도에게 청하였다. 하지만 탁발도가 거절하며 말했다.
"지금은 말이 아직 살찌지 않았고 날씨도 여전히 덥다. 서둘러 출병해 보아야 분명 성과가 없을 것이다. 만약 적군이 계속 진격해 온다면 우선 음산(陰山)으로 물러나 피하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래 양가죽 옷을 입고 사는데 비단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저 10월까지 늦추어 버티기만 하면,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그리고는 오직 평남장군 두도준(杜道俊)을 보내 활대의 수비를 돕게 하였다.

태평진군 11년(450년) 8월 6일[380], 탁발도가 하서(河西)에서 사냥하였다.

태평진군 11년(450년) 8월 26일[381], 서쪽 교외에서 군사를 훈련하였다.

2.22.2. 태무제의 남벌

태평진군 11년(450년) 9월 4일[382], 태무제 탁발도가 친히 남쪽을 정벌하러 나섰다.

9월 6일[383], 황태자 탁발황이 북쪽 유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막남(漠南)에 주둔하였고, 오왕 탁발여는 수도에 남아 지켰다.

9월 13일[384], 정주(定州)·기주(冀州)·상주(相州) 세 주에 한하여 사형 이하의 죄를 특별히 사면하고, 이 주와 군에서 병사 50,000명을 징발하여 여러 군대에 나누어 배속하였다.

왕현모의 군대는 매우 성대하였고 무기와 장비도 정예롭고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왕현모는 탐욕스럽고 고집이 세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처음 그가 활대를 포위하였을 때 성 안에는 초가집이 많았다. 여러 사람이 화전(火箭)으로 불태우자고 청하자, 왕현모가 거절하며 말했다.
"저것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재산인데, 어찌 서둘러 불태우겠는가!"
그러자 성 안에서는 곧바로 초가집을 철거하고 땅에 굴을 파서 그 안에서 지냈다. 또, 당시 황하와 낙수(洛水) 일대의 백성들은 앞다투어 군량을 내고 무기를 들고 와서 송나라의 북벌군에 호응하였는데, 하루에도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현모는 그들을 본래의 우두머리에게 맡겨 지휘하게 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나누어 배속하였다. 또 집집마다 베 한 필을 주고는 그 대가로 큰 배 800개를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돌아섰고, 몇 달 동안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탁발도의 구원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자 여러 사람이 수레를 동원해 진영의 방벽으로 삼자고 청하였으나, 왕현모는 따르지 않았다.

태평진군 11년(450년) 10월 7일[385], 탁발도가 방두(枋頭)에 이르러, 관내후 육진에게 밤중에 몇 사람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몰래 활대로 들어가게 하였다. 육진은 성 안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킨 뒤, 성 위에 올라 왕현모의 진영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방두로 돌아와 보고하였다. 이에 탁발도는 진군할 준비를 마치고, 전중상서 장손진에게 기병 5,000기를 주어 석제(石濟)에서 황하를 건너 왕현모가 달아나는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10월 9일[386], 탁발도가 직접 황하를 건넜다. 이때 군사의 수를 백만이라 일컬었으며, 북과 군악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결국 왕현모가 싸우기도 전에 크게 두려워하여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니, 송나라 군사들은 제각기 무너져 흩어졌고, 위나라 군사들이 뒤쫓아 공격하여 10,00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버리고 간 군수 물자와 무기가 산처럼 쌓였다.

이보다 앞서 왕현모는 종리태수(鍾離太守) 원호지(垣護之)에게 전선 100척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활대에서 서남쪽으로 120리 떨어져 있는 석제를 점거하게 하였다. 이때 탁발도의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글을 보내 왕현모에게 서둘러 공격하라고 권하며 말했다.
"옛날 무황제(武皇帝)께서 광고(廣固)를 공격했을 때에도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형세는 그때보다 더 다급한데, 어찌 병사들이 죽고 지치는 것을 하나하나 따질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을 도륙해서라도 서둘러 함락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십시오."
하지만 왕현모는 따르지 않았다. 이후 왕현모가 패하여 물러날 때에는 원호지에게 알릴 겨를도 없었다. 위나라 군대는 왕현모에게서 빼앗은 전함들을 쇠사슬로 세 겹이나 연결하여 황하를 가로막고 원호지가 돌아갈 길을 끊었다. 그러나 황하의 물살이 매우 빨랐으므로 원호지는 강 한가운데를 따라 내려가다가 쇠사슬이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자루가 긴 도끼로 그것을 끊었다. 위나라 군사들은 이를 막지 못하였고, 원호지는 전선 한 척만 잃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온전히 돌아왔다. 이후 왕현모 등은 확오에서 소빈과 합류하였고, 소빈은 다시 심경지의 말을 따라 확오를 굳게 지키라는 송나라 조정의 말을 무시하고 여러 군대를 거느려 역성(歷城)으로 돌아갔다. 이에 탁발도는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나란히 진군하게 하였다. 정서대장군 · 영창왕 탁발인은 낙양에서 출발하여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고, 전중상서 장손진은 마두(馬頭)로 향하게 하였으며, 초왕 탁발건은 종리(鐘離)로 향하게 하고, 고량왕 탁발나는 청주(青州)에서 출발하여 하비(下邳)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탁발도 자신은 그 가운데 길로 진군하였다.

한편, 서쪽 전선에서는 송나라의 약양태수 방법기 등의 여러 군대가 노씨(盧氏)로 들어가 노씨현령 이봉(李封)을 참수하고, 조난을 노씨현령으로 삼아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 유원경은 백장애(百丈崖)에서 출발하여 노씨에서 방법기 등과 합류하였다. 이어 방법기 등이 진군하여 홍농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홍농태수 이초고발(李初古拔)을 사로잡았다. 이후 설안도가 남아서 홍농을 지키고, 방법기는 진군하여 동관(潼關)으로 향하였다.

태평진군 11년(450년) 11월 5일[387], 탁발도가 추산(鄒山)에 이르러 송나라의 노군태수(魯郡太守) 최사리(崔邪利)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태뢰(太牢)의 제물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 초왕 탁발건은 청수(清水) 서쪽에서 진군하여 소성(蕭城)에 주둔하였고, 보니공(步尼公)은 청수 동쪽에서 진군하여 유성(留城)에 주둔하였다. 이에 송나라의 무릉왕 유준은 참군 마문공(馬文恭)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소성으로 향하게 하였고, 강하왕 유의공은 군주(軍主) 혜현경(嵇玄敬)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유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초왕 탁발건은 마문공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보니공은 혜현경과 맞닥뜨리자 군사를 이끌고 포교(苞橋)로 급히 향하여 청수 서쪽으로 건너가려 하였다. 그때 패현(沛縣)의 백성들이 포교를 불태우고 밤에 숲속에서 북을 치자, 위나라 군사들은 송나라의 대군이 도착한 것으로 생각하여 앞다투어 포수(苞水)를 건넜다. 이로 인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한편, 송나라 조정은 조서를 내려 유원경을 홍농태수로 삼았다. 유원경은 설안도, 윤현조에게 먼저 군사를 이끌고 섬(陝)으로 가서 방법기 등과 합류하게 하고, 자신은 뒤에 남아 군량으로 쓸 조세 곡식을 거두는 일을 감독하였다. 섬성(陝城)은 험준하고 견고하여 송나라의 여러 군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때 낙주자사(洛州刺史) 장시련제(張是連提)가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효산(崤山)을 넘어 섬성을 구원하러 왔다. 장시련제는 섬성 남쪽에서 설안도 등과 싸워, 돌격 기병대를 내보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러자 적장 설안도는 격분하여 투구를 벗고 갑옷도 벗어 던진 채 붉은 누비옷과 양당삼(兩當衫)만 입었다. 말에게 씌운 갑옷도 벗긴 뒤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들고 홀로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하였는데,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장시련제의 군사들은 양쪽에서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이처럼 설안도가 여러 차례 적진을 드나들며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 날이 저물 무렵 송나라의 장수 노원보(魯元保)가 별동대를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에서 도착하자, 장시련제는 비로소 군사를 물렸다.

유원경은 부장 유원호(柳元怙)에게 보병과 기병 2,000명을 주어 설안도 등을 돕게 하였다. 유원호는 밤에 도착하였는데 장시련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다음 날 설안도 등이 섬성 서남쪽에 진을 쳤고, 마침내 양군이 맞붙었다. 그때 유원호가 군사를 이끌고 남문에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곧장 뛰쳐나왔는데, 깃발이 매우 성대하여 장시련제의 군사들은 크게 놀랐다. 설안도는 몸을 내던져 맹렬히 싸웠고, 흘러내린 피가 팔꿈치에 엉겨 붙을 정도였다. 창이 부러지면 다른 창으로 바꾸어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송나라의 여러 군사들도 일제히 힘을 내어 공격하였다. 새벽부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싸운 끝에 장시련제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장시련제를 비롯한 장수와 병사 2,000여 명이 참수되었고, 나머지 가운데 강이나 참호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으며, 살아서 송나라에 투항한 사람도 2,000여 명이었다.

11월 8일[388], 섬성이 송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어 방법기 등이 진군하여 동관을 공격하자, 수비대장 누수(婁須)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방법기 등이 마침내 동관을 점거하였다. 이로 인해 관중(關中)의 호걸들은 곳곳에서 잇달아 위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사방 산지에 살던 강족 등 이민족들이 송나라에 앞다투어 투항하였다.

이때 영창왕 탁발인이 이끄는 군대가 현호(懸瓠)와 항성(項城)을 공격하여 연이어 함락시켰다.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위나라 군대가 수양(壽陽)에 이를 것을 염려하여 유강조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11월 17일[389], 탁발인이 기병 80,000기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위무(尉武)에서 유강조를 따라잡았다. 유강조에게는 병사 8,000명 밖에 없었는데, 부장 호성지는 산의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샛길로 가서 수양에 도착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강조가 노하며 말했다.
"황하까지 나아가 적을 찾았는데 끝내 만나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저들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어찌 피하겠는가!"
이에 수레를 연결하여 진을 만들고 전진하면서 군중에 명령하였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목을 베고, 발걸음을 돌리는 자는 발을 베겠다!"
이후 탁발인이 사방에서 공격하자 송나라의 장병들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싸워 탁발인의 군사 10,000여 명을 죽였고, 흘러내린 피가 발목까지 잠길 정도였다. 유강조 자신도 열 군데나 상처를 입었으나 기세는 오히려 더욱 맹렬해졌다. 이에 탁발인은 병력을 세 무리로 나누어 번갈아 쉬면서 싸우게 하였다. 때마침 해가 저물고 바람이 세차게 불자, 탁발인은 기병에게 마른 풀을 지게 하여 유강조의 진영에 불을 질렀다. 유강조는 진영이 무너지는 곳이 생길 때마다 곧바로 병력을 보내 메웠다. 그때 날아온 화살 하나가 유강조의 목에 맞아, 유강조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남은 유강조의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마침내 무너져 흩어졌는데, 탁발인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덮쳐 거의 모두 죽였다.

당시 송나라의 남평왕 유삭은 좌군행참군 왕나한(王羅漢)에게 300명을 거느리고 위무를 지키게 하였는데, 탁발인이 유강조를 처치한 후에 위무까지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의 목에 쇠사슬을 채운 뒤, 두 명의 낭장(郎將)에게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나한은 밤에 두 낭장의 목을 베고, 목에 쇠사슬을 찬 채 달아나 우이(盱眙)로 향하였다. 이후 탁발인은 진군하여 수양을 압박하고, 마두와 종리를 불태우며 약탈하였으나, 유삭은 성문을 닫고 수양을 굳게 지킬 뿐이었다.

11월 26일[390], 탁발도는 팽성(彭城)에 이르러 희마대(戲馬臺)에 모전으로 만든 천막을 세우고 성 안을 바라보았다.

초왕 탁발건이 마문공을 격파하였을 때, 송나라의 장수 괴응(蒯應)을 사로잡아 탁발도에게 보냈다. 탁발도는 괴응을 팽성의 소시문(小市門)으로 보내 술과 사탕수수를 요구하게 하였는데, 무릉왕 유준은 이를 내주고, 그 자리에서 낙타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음 날 탁발도는 상서 이효백을 다시 소시문으로 보내 강하왕 유의공에게는 담비 갖옷을, 유준에게는 낙타와 노새를 선물하게 하고는 말했다.
"우리 황제께서 안북장군(安北將軍)에게 안부를 전하시며, 잠시 성 밖으로 나와 직접 나를 만나 보라고 하셨소. 나 역시 북성(北城)을 공격하지도 않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장병들을 고생시키면서 이처럼 삼엄하게 지키는 것이오!"
이에 유준은 패군태수(沛郡太守) 장창(張暢)을 보내 성문을 열고 나가 이효백을 만나게 하였다. 장창이 말했다.
"안북장군께서 위주(魏主)께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늘 직접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기를 바라셨지만 신하는 국경 밖의 사람과 사사로이 교제할 수 없으므로, 잠시라도 속마음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여기십니다. 방비를 갖추는 것은 변경의 군대에서 늘 하는 일입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사람을 부리면 수고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때 탁발도는 감귤을 요구하고 놀이에 쓰이는 도구를 빌려 달라고 하였는데, 장창은 이를 모두 이효백을 통해 전달하였다. 탁발도 역시 모전과 아홉 종류의 소금, 콩을 발효해 만든 호인(胡人)의 조미료를 보내 답례하였다. 또, 이효백을 보내 이번에는 악기를 빌려 달라고 하자 유의공이 다시 장창을 보내 대답하였다.
"전쟁터에 나와 있는 터라 악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소."
이효백이 장창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토록 서둘러 성문을 닫고 다리까지 끊어 버렸소?"
장창이 대답하였다.
"두 왕께서는 위주(魏主)의 진영이 아직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고 장병들도 지쳐 있는 것을 보셨소. 이 성에는 정예 갑병 10만이 있으니, 자칫 그 틈을 타 함부로 침범하게 될까 염려하여 성문을 닫았을 뿐이오. 위군의 병사와 말이 충분히 쉰 다음에 함께 싸울 터를 정비하고 날짜를 정해 승부를 겨루도록 합시다."
이효백이 말했다.
"손님이 예를 갖추면 주인도 그에 맞게 대접하는 법이오."
장창이 말했다.
"어제 여러 손님이 성문까지 온 것을 보니, 그다지 예를 갖춘 것 같지는 않더군요."
이후 탁발도가 다시 이효백을 보내 말했다.
"태위와 안북장군에게 안부를 전하라.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지 않는가? 서로의 속마음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람을 보내 내가 몸집이 어떠한지, 나이가 많고 적은지,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좌리(佐吏)를 보낼 수 없다면 심부름하는 하인이라도 보내면 된다."
장창은 두 왕의 명을 받아 대답하였다.
"위주(魏主)의 생김새와 능력이 어떠한지는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 상서(李尚書)께서 몸소 명을 받아 오셨으니 서로의 뜻을 충분히 전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따로 사신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효백이 또 말했다.
"왕현모(王玄謨)도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일 뿐인데, 남쪽에서는 어찌 그런 사람에게 이토록 큰 일을 맡겨 결국 패하여 달아나게 만들었소?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온 뒤 700여 리를 지나는 동안 이 땅의 주인인 그대들은 끝내 한 번도 제대로 맞서지 못하였소. 추산(鄒山)의 험준함은 그대들이 의지하던 곳인데, 우리의 선봉이 막 맞붙자 최사리(崔邪利)는 황급히 굴속으로 숨어 버렸고 여러 장수가 그를 거꾸로 끌어내었소. 우리 폐하께서 그의 목숨은 살려 주셨으므로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기 있소."
장창이 말했다.
"왕현모는 남쪽의 한 방면을 맡은 장수일 뿐, 특별히 재능 있는 인물이라고 여긴 것도 아니오. 그저 선봉으로 삼았을 뿐이오. 대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황하가 곧 얼어붙으려 하였으므로 왕현모가 밤을 틈타 군사를 돌렸고, 그 과정에서 병사와 말이 조금 혼란해졌을 뿐이오. 최사리가 사로잡혔다 한들 우리나라에 무슨 손해가 있겠소! 위주께서 수십만 군사를 가지고 최사리 한 사람을 제압한 것이 과연 입에 올릴 만한 일이오? 그대들이 우리 땅 700리를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막지 않았다는 것도 모두 태위의 신묘한 계산과 진군장군(鎭軍將軍)의 뛰어난 계략에 따른 것이오.[391] 군사를 쓰는 데에는 시기가 있는 법이니 그대에게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소."
이효백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 성을 포위하지 않고 직접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곧장 과보(瓜步)로 가실 것이오. 남쪽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팽성은 굳이 포위할 필요도 없고, 설령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팽성은 우리가 굳이 차지해야 할 곳이 아니오. 우리는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호수의 물을 마시며 갈증이나 풀 생각이오."
장창이 말했다.
"떠나고 머무는 것은 그쪽 마음대로 할 일이오. 그러나 오랑캐의 말이 끝내 장강의 물을 마시게 된다면 이제 세상에는 하늘의 이치도 없다고 해야겠지요."[392]
장창은 목소리와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으므로 이효백과 그 좌우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효백 또한 말솜씨가 뛰어나고 말이 풍부하였다. 그는 떠나려 하면서 장창에게 말했다.
"장사(長史)께서는 부디 몸을 아끼시오. 서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손을 맞잡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려."
장창이 말했다.
"그대도 몸을 잘 돌보시오. 전란이 평정될 날이 있기를 바라니, 다시 만날 날도 멀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훗날 송(宋) 조정에 귀순해 오게 된다면, 오늘을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날로 삼읍시다."
이후로 탁발도는 군사를 몰아 팽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알순국(頞盾國)에서 사자 한 마리를 선물하였다.[393]

2.22.3. 과보 진격

태평진군 11년(450년) 12월 1일[394], 태무제 탁발도는 팽성 공략을 미뤄둔 채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중서랑 노수에게 광릉(廣陵)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고, 고량왕 탁발나에게 산양(山陽) 방면으로, 영창왕 탁발인에게 횡강(橫江) 방면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참혹하게 파괴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송나라의 성읍들은 그 기세만 바라보고도 모두 달아나 무너졌다.

12월 4일[395], 탁발도의 군대가 회수(淮水)를 건넜다.

처음에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위나라 군대가 팽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국장군 장질에게 1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팽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질이 우이(盱眙)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탁발도가 회수를 건넌 뒤였다. 장질은 용종복야 호숭지와 적노장군 장징지(臧澄之)에게 동산(東山)에 진을 치게 하고, 건위장군 모희조(毛熙祚)에게 전포(前浦)를 점거하게 하였으며, 장질 자신은 성 남쪽에 진을 쳤다.

12월 10일[396], 탁발도가 연왕 탁발담을 보내 호숭지 등의 군대를 공격하자, 호숭지, 장징지, 모희조 세 진영이 죄다 전멸하였다. 장질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은 채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으나, 그날 밤에 장질의 군대마저 무너졌다. 장질은 치중과 병장기를 전부 버리고, 겨우 700명만 거느린 채 우이성으로 달려 들어갔다.

당초 우이태수 심박(沈璞)이 부임했을 때에는 왕현모가 아직 활대를 공략 중이었고, 강수(江水)와 회수(淮水) 일대에는 아무런 전쟁의 기미가 없었다. 그러나 심박은 우이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있다고 생각하여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깊이 파며, 재물과 곡식을 쌓고 화살과 돌을 비축하여 성을 지킬 준비를 하였다. 부하 관리들은 모두 이를 옳지 않게 여겼고, 송나라 조정에서도 지나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위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오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어떤 사람이 심박에게 송나라 수도 건강(建康)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자 심박이 말했다.
"오랑캐가 이 성을 작다고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만약 성벽에 몸을 붙일 만큼 바싹 다가와 공격한다면, 바로 지금이 내가 나라에 보답할 때이고 그대들이 제후에 봉해질 날이오. 그런데 어찌 이곳을 떠나겠소! 그대들은 수십만 대군이 작은 성 아래에 몰려들었다가 패하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있소? 곤양(昆陽)과 합비(合肥)가 옛일의 분명한 증거요."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이후 심박은 병사들을 모아 정예병 2,000명을 얻고는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뒤이어 장질이 우이성으로 다가오자, 사람들이 심박에게 말했다.
"오랑캐가 성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을 공격한다면 성 안에는 지금 있는 병력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땅은 좁은데 사람이 많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게다가 적은 많고 우리는 적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장질의 병력까지 받아들여 적을 물리치고 성을 온전히 지킨다면 그 공을 모두 우리가 세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반대로 장질이 패전의 죄를 피하여 도성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라면 배를 마련하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서로 짓밟고 뒤엉키게 될 것입니다. 저 자는 그저 골칫거리만 될 뿐이니, 차라리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심박이 탄식하며 말했다.
"오랑캐는 반드시 이 성벽을 오르지 못할 것이오. 내가 그대들에게 장담하겠소. 배를 타고 달아나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소. 오랑캐가 사람들을 해치는 잔혹함은 예나 지금이나 유례가 없소.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며 겪게 하는 고통은 모두가 직접 보았소. 그 가운데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조차 북쪽으로 끌려가 노비가 되는 데 지나지 않소. 장질의 병사들이 비록 갑자기 모인 오합지졸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런 일을 두려워하지 않겠소! 이것이 이른바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면 호인(胡人)과 월인(越人)도 한마음이 된다'[397]는 것이오. 지금 우리 병력이 많아지면 오랑캐가 더 빨리 물러날 것이고, 병력이 적으면 더 늦게 물러날 것이오. 내가 어찌 공을 혼자 차지하고 싶다는 이유로 오랑캐를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소!"
이에 심박은 성문을 열어 장질을 받아들였다. 장질은 성 안에 식량과 물자가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만세를 외쳤다. 그리하여 장질은 심박과 함께 우이성을 지켰다.

위나라 군대가 남쪽을 침공할 때에는 군량과 필요한 물자를 따로 가지고 오지 않고, 오직 약탈한 것으로 군수품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회수를 건너고 나자 백성들이 대부분 숨어 버렸으므로 약탈해도 얻을 것이 없었고,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지쳤다. 탁발도는 우이에 곡식이 많이 비축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북쪽으로 돌아갈 때 필요한 군량으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호숭지 등의 군대를 격파한 뒤 한 차례 우이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장수 한원흥(韓元興)을 남겨 수천 명의 병력으로 우이를 감시하게 하고, 탁발도는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로 인해 우이성은 오히려 방어 태세를 더욱 완비할 시간을 얻게 되었다.

12월 15일[398], 탁발도가 과보(瓜步)에 이르러 백성들의 집을 허물고 갈대를 베어 뗏목을 만들면서 장강을 건너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송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건강의 백성들은 모두 짐을 짊어진 채 서서 언제든 달아날 준비를 하였다.

12월 27일[399], 송나라 조정에서 도성 안팎에 계엄을 내렸다. 단양(丹楊) 관할 지역에서는 모든 집에서 장정을 모조리 징발하였고, 왕공(王公) 이하의 자제들까지 모두 군역에 동원되었다. 송나라의 영군장군 유준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루와 요충지를 나누어 지켰다. 송나라의 순찰선은 상류로는 우호(于湖)까지, 하류로는 채주(蔡洲)까지 이어졌고, 군선을 늘어놓고 진영을 설치하여 강가를 따라 길게 연결하였는데, 채석(採石)에서 기양(暨陽)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가 6~700리에 달하였다. 또, 송나라의 태자 유소는 석두(石頭)로 나가 주둔하면서 수군을 총지휘하였다. 단양윤 서담지는 석두의 창성(倉城)을 지켰고, 이부상서 강담이 군사에 관한 조치를 모두 도맡아 처리하였다.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석두성에 올라 근심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이부상서 강담에게 말했다.
"북벌 계획에 찬성한 사람은 적었다. 오늘날 군사와 백성들이 고생하며 원망하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없도다. 그대들에게 이런 걱정을 끼친 것은 짐의 과오로다. 단도제(檀道濟)가 살아 있었다면 어찌 호인(胡人)의 기병이 여기까지 오게 했겠는가!"
유의륭은 다시 막부산(幕府山)에 올라 지형과 형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탁발도와 위나라 왕공(王公)들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고, 이를 베어 오는 사람에게 작위와 금, 비단 등을 하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사람을 모집하여 야갈(野葛)을 탄 술을 빈 마을에 가져다 놓게 하여 위나라 군사들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끝내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였다.[400]

12월 28일[401], 탁발도는 과보산을 깎아 빙 둘러 올라가는 길을 만들고, 그 꼭대기에 모전으로 만든 천막을 세웠다. 당시 탁발도는 황하 남쪽의 물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낙타에 황하 북쪽의 물을 싣고 다니며 마셨다. 탁발도는 문제 유의륭에게 낙타와 명마를 선물하고, 아울러 화친을 청하며 사돈을 맺자고 요청하였다. 유의륭은 봉조청 전기(田奇)를 보내 진귀한 음식과 남방의 특산품을 답례로 보냈다. 탁발도는 누런 감귤을 받자 곧바로 먹었고, 영주(酃酒)[402]도 아주 많이 마셨다. 좌우의 신하 가운데 누군가가 탁발도의 귀에 대고 몰래 말하며,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탁발도는 대꾸하지 않고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 뒤, 자신의 황손을 전기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내가 멀리서 여기까지 온 것은 공명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오. 참으로 우호 관계를 이어 백성들을 쉬게 하고, 길이 혼인으로 인연을 맺고자 해서 온 것이오. 송나라가 딸을 이 손자에게 시집보낼 수 있다면, 나도 내 딸을 무릉왕 유준(劉駿)에게 시집보내겠소. 그렇게 한다면 오늘 이후로는 말 한 필조차 다시 남쪽을 돌아보는 일이 없을 것이오."
전기가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자, 유의륭은 태자 유소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혼인을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나, 강담이 말했다.
"융적(戎狄)은 믿을 만한 친교가 없으니, 이를 허락해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에 유소가 노하여 강담에게 말했다.
"지금 두 왕이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거늘, 어찌 다른 의견을 고집하는 것이 마땅하겠소!"
이때 유소의 말투와 표정이 매우 사나웠다. 회의가 끝나 모두 함께 밖으로 나오자, 유소는 호위병인 반검(班劍)들과 좌우의 시종들에게 강담을 밀치게 하였고, 강담은 거의 넘어져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유소는 또 유의륭에게 글을 올려 아뢰었다.
"북벌이 실패하여 치욕을 당했고 여러 주(州)가 함락되어 황폐해졌으니, 강담(江湛)과 서담지(徐湛之)를 베는 것만이 천하에 사죄하는 길입니다."
유의륭이 말했다.
"북벌은 본래 내 뜻이었고, 강담과 서담지는 단지 내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위나라와 송나라의 혼인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2.22.4. 우이 공성전

태평진군 12년(451년) 정월 초하루[403], 태무제 탁발도는 과보산 위에서 여러 신하들을 크게 모아 놓고, 공로에 따라 작위를 내리고 상을 주었다. 이때 문무 관리 가운데 작위를 받은 사람이 200여 명이었다. 위나라 군대는 장강 연안을 따라 불을 피웠는데, 송나라의 태자좌위솔 윤홍(尹弘)이 문제 유의륭에게 아뢰었다.
"북방 오랑캐들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물러날 것입니다."
탁발도는 철수하려 하면서 송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퇴로를 끊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불을 피워 위세를 보인 것이다.

정월 2일[404], 탁발도가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은 주민들을 약탈하고 민가를 불태운 뒤 철수하였다.

이때 송나라의 강하왕 유의공은 확오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왕현모를 불러 역성(歷城)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위나라 군대가 이를 추격하여 왕현모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침내 확오를 탈환하였다.

당초 송나라의 문제 유의륭은 위나라 군대가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광릉태수(廣陵太守) 유회지(劉懷之)에게 성과 관아, 배와 수레를 미리 불태우고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 산양태수(山陽太守) 소승진(蕭僧珍) 또한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못의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가 위나라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 둑을 터뜨려 물을 쏟아붓게 하자, 탁발도는 산양을 지나면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우이로 진격해 공격하였다.

탁발도가 우이성 앞에 이르러 장질에게 술을 요구하자, 장질은 오줌을 봉하여 보내 주었다. 탁발도는 크게 노하여 우이성 둘레에 긴 포위망을 쌓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완성하였다. 또 동산(東山)의 흙과 돌을 날라 해자를 메우고, 군산(君山)에 부교를 놓아 수로와 육로를 모두 끊었다. 이후 탁발도가 장질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내가 지금 싸움에 내보내는 병사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성 동북쪽에는 정령(丁零)과 호인(胡人)이 있고, 남쪽에는 저인(氐人)과 강인(羌人)이 있다. 설령 정령이 죽는다 해도 상산(常山)과 조군(趙郡)의 도적이 줄어드는 것에 불과하고, 호인이 죽는다 해도 병주(幷州)의 도적이 줄어드는 것에 불과하며, 저인과 강인이 죽는 다 해도 관중(關中)의 도적이 줄어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대가 이들을 죽여 준다면 우리에게 이롭지 않은 것이 없겠다."
이에 장질이 답장을 보내 말했다.
"보내온 글을 읽어 보니, 네놈의 간사한 속셈을 남김없이 알겠구나. 너는 말 네 발의 힘을 믿고 여러 차례 우리 변경을 침범했다. 왕현모(王玄謨)는 동쪽에서 물러났고, 신탄(申坦)은 서쪽에서 흩어졌다. 한데 너는 그들이 그렇게 된 까닭을 알고 있는가? 너만 그 동요의 말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아직 묘년(卯年)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두 군대가 네게 장강 물을 마실 길을 열어 준 것뿐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일이 아니다. 나는 너를 멸하라는 명을 받았다. 본래 백등(白登)까지 쳐들어갈 생각이었으나, 군대가 아직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네가 스스로 죽으러 찾아왔구나. 어찌 다시 너를 온전히 살아 돌아가게 하여 상건(桑乾) 땅을 누비게 하겠는가! 네가 운이 좋다면 난병(亂兵)에게 죽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산 채로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인 뒤 나귀 한 마리에 실려 곧바로 도성의 시장으로 보내질 것이다. 나 역시 본래 살아남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하늘과 땅의 신령이 없어 힘이 네게 굴복하게 된다면, 너가 나를 잘게 다지고 가루로 만들고, 죽이고 찢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내가 본조(本朝)에 지은 죄를 씻기에 부족할 것이다. 네녀석의 지략과 병력으로 어찌 부견(苻堅)보다 강할 수 있겠는가! 이제 봄비도 이미 내렸고 우리 군사도 사방에서 모이고 있으니, 너는 그저 마음 놓고 성이나 공격하고 서둘러 달아나지나 말거라! 식량이 부족하다면 내게 말하라. 내가 창고를 열어 보내 주겠다. 네가 보내 준 칼도 잘 받았다. 혹시 내가 그 칼을 휘둘러 너의 몸을 베라는 뜻이냐?"
이를 읽은 탁발도는 크게 노하여 쇠로 만든 평상을 만들고, 그 위에 쇠꼬챙이를 설치한 뒤 말했다.
"성을 함락하여 장질(臧質)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 위에 앉히겠다."
장질은 또 위나라 군대의 병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그대들은 오랑캐 군영의 여러 군사와 백성에게 전하시오. 불리(佛狸)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병사들을 이렇게 대하고 있소. 그대들은 본래 중화의 정삭(正朔)을 받들던 백성들인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오? 어찌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줄 모르겠소!"
그리고는 송나라 조정에서 정한 현상금을 베껴 함께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불리(佛狸)의 머리를 베어 오는 자는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고, 베와 비단을 각각 10,000필씩 내리겠다."

곧이어 탁발도는 군사를 몰아 우이성을 향해 총공격을 가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은 구차(鉤車)를 이용해 성루를 갈고리로 걸어 당기려 하였다. 성 안에서는 고리가 달린 굵은 밧줄로 그 갈고리를 붙잡아 매고, 수백 명이 고함을 지르며 한꺼번에 잡아당겼다. 그러자 위나라 군대의 구차는 뒤로 물러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우이성에서는 병사들을 나무통에 매달아 성 밖으로 내려보냈고, 병사들은 구차의 갈고리를 잘라 내고 그것을 빼앗았다. 다음 날 아침, 위나라 군대는 다시 충차(衝車)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벽의 흙이 매우 단단하고 촘촘하게 다져져 있어, 충차가 성벽에 부딪칠 때마다 무너져 떨어지는 흙은 몇 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자 위나라 군사들은 성벽에 바싹 붙어 직접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탁발도는 병사들을 여러 조로 나누어 번갈아 공격하게 하였는데, 성에서 떨어지면 다시 올라갔고 물러나는 자가 없었다. 죽거나 다친 사람이 만 단위에 이르렀으며, 시체가 쌓여 성벽 높이에 이를 정도였다. 이렇게 무릇 30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탁발도는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위나라군 진영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또 어떤 사람이 건강(建康)에서 수군을 보내 바다를 거쳐 회수(淮水)로 들어오게 하였다고 알렸고, 다시 팽성의 군대에도 위나라군의 귀로를 끊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달에 파락나국, 계빈국, 미밀국(迷密國)에서 각각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평진군 12년(451년) 2월 1일[405], 탁발도는 마침내 공성 장비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우이 사람들이 위나라 군대를 추격하려 하자, 우이태수 심박이 말했다.
"지금 우리 병력은 많지 않아,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밖으로 나가 싸울 수는 없소. 다만 배들을 정비하여 마치 회수를 건너 북쪽으로 추격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시오. 그렇게 해서 저들이 더 빨리 달아나게 만들면 될 뿐, 실제로 추격할 필요는 없소."
이후 탁발도가 팽성을 지나가자, 송나라의 강하왕 유의공은 두려움에 떨며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보고하였다.
"오랑캐가 남쪽에서 사로잡은 사람 10,000여 명을 몰고 가고 있는데, 오늘 저녁 안왕피(安王陂)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팽성에서 수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지금 추격하면 모두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여러 송나라 장수들이 모두 출격을 청하였으나, 유의공은 이를 금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에 송나라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역마를 타고 팽성에 도착하여, 유의공에게 전력을 다해 서둘러 추격하라는 문제 유의륭의 명령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위나라 군대는 멀리 떠난 뒤였다. 그제야 유의공은 진군장군 사마 단화지(檀和之)를 보내 소성(蕭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하지만 탁발도는 이미 이 소식을 먼저 듣고 있었으므로, 끌고 가던 남쪽 사람들을 모두 죽인 뒤 떠났고, 이전에 사로잡혔던 정천조만이 위나라 군대에서 빠져나와 송나라로 달아났다.

탁발도는 이 남벌로 송나라의 남연주(南兗州)·서주(徐州)·연주(兗州)·예주(豫州)·청주(青州)·기주(冀州) 여섯 주를 휩쓸어 파괴하였고, 죽거나 다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위나라 군사들은 장정은 붙잡는 즉시 베어 죽였고, 갓난아이들은 창끝에 꿰어 올린 뒤 창을 휘두르며 놀이로 삼았다. 위나라 군대가 지나간 군현은 모두 황폐해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봄이 되어 제비들이 돌아왔으나 집들이 사라져 숲의 나무에 둥지를 틀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위나라 역시 병사와 말의 사상자가 절반을 넘었고, 위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 원정을 탓하였다.

2월 24일[406], 탁발도가 황하를 건넜다.

2월 29일[407], 노구(魯口)에 주둔하자, 태자 탁발황이 행궁(行宮)으로 와 탁발도를 알현하였다.

태평진군 12년(451년) 3월 15일[408], 탁발도가 남벌에서 돌아와 수도 평성에 도착하여, 원정에서 돌아온 의식을 거행하고 장병들의 공훈을 기록하여 종묘에 아뢰었다. 아울러 항복한 백성 50,000여 호를 수도 부근 여러 곳에 나누어 정착시켰으며, 원정한 동안 수도에 남아 있던 문무 관리들에게 노획한 군수품과 포로를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 노종지가 위나라로 귀순했을 때, 그의 아들 노궤는 장사(長社)에 주둔하며 비록 높은 관직과 양양공 작위를 받았지만 늘 남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전에 유강조의 아버지인 유건지(劉虔之)와 서담지의 아버지 서달지(徐達之)를 죽인 일이 있었으므로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후 노궤가 사망하자 아들 노상이 아버지의 관직과 작위를 이어받았다. 노상은 젊어서부터 무예와 군사적 재능이 있었으며, 아우 노수(魯秀)와 함께 탁발도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뒤에 형제가 각각 죄를 지어 탁발도로부터 문책을 받으니, 노상과 노수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탁발도를 따라 과보에서 돌아오다가 호릉(湖陵)에 이르러 청하였다.
"저희는 남쪽과 원한이 있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늘 화가 조상의 무덤에 미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청컨대 함께 가서 유골을 모셔 와 평성(平城)에 다시 장사지내게 해 주십시오."
탁발도는 이를 허락하였다. 하지만 노상이 장사(長社)에 이르자 위의 수비병 수백 명을 죽이고, 자신의 부곡(部曲)과 함께 가기를 원하는 사람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여남(汝南)으로 달아났다.

태평진군 12년(451년) 4월, 노상은 노수를 수양(壽陽)으로 보내 송나라의 남평왕 유삭에게 글을 올리고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문제 유의륭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노상을 사주자사(司州刺史)로 삼고 의양(義陽)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노수는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었다. 그 밖의 아우와 조카들에게도 모두 관직과 작위를 내렸으며, 상도 매우 후하게 주었다. 이에 탁발도는 노상 집안의 무덤을 파괴하였다.

2.23. 태자 탁발황의 사망

태평진군 12년(451년) 5월 19일[409], 대사면령을 내렸다.

정평 원년(451년) 6월 9일[410], 태무제 탁발도가 연호를 고쳐 '정평(正平)'이라 하였다. 이때 차사국의 왕이 아들을 보내 위나라 조정에서 황제를 모시게 하였다. 이후 탁발도가 조서를 내렸다.
"형벌의 법망이 너무 촘촘하여 법을 어기는 사람이 도리어 더욱 많아지고 있으니, 짐이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긴다. 담당 관리들은 율령을 살펴 그 적절한 기준을 찾도록 하라. 그 밖에도 백성에게 불편한 조항이 있으면 비슷한 조문과 전례를 참작하여 더하거나 덜어 고치도록 하라."
이어 태자소부 유아와 중서시랑 호방회 등에게 명하여 법률 제도를 다시 고쳐 정하게 하니, 무릇 조항이 391조가 되었다.

이달에 약양왕 탁발갈아와 의동삼사 · 고량왕 탁발나가 죄를 지어 사사되었다.

태자 탁발황이 탁발도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좌우의 측근들을 상당히 신임하였고, 또 전원(田園)을 경영하여 그 이익을 거두었다. 이에 고윤이 탁발황에게 간하였다.
"하늘과 땅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만물을 덮고 실을 수 있으며, 왕자(王者)는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백성을 품어 기를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나라의 후계자이시며 온 천하가 본받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논밭을 경영하고 닭과 개를 길러 이익을 취하며, 심지어 시장에서 술과 물건을 팔아 백성과 이익을 다투기까지 하시니, 비난하는 말이 이미 널리 퍼져 이제 뒤늦게 덮을 수도 없습니다. 천하는 곧 전하의 천하입니다. 사해(四海)를 모두 가진 부귀한 분께서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장사꾼 남녀와 이 조그만 이익을 다투십니까! 옛날 괵(虢)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신령이 토지를 내려 주었고, 한(漢)나라의 영제(靈帝)는 사사로이 재물을 쌓아 두는 창고를 만들었다가 모두 나라가 뒤집혀 망하는 화를 입었습니다. 앞선 사례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일입니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필공(畢公)을 아꼈기 때문에 천하의 임금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비렴(飛廉)과 악래(惡來)를 아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지금 동궁(東宮)에는 뛰어난 인재가 적지 않은데, 요사이 전하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자들은 아마 조정에서 제대로 뽑힌 사람들이 아닌 듯합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아첨하고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가까이하십시오. 지금 소유하고 있는 전원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고팔던 물품도 때에 맞추어 거두거나 풀어 주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좋은 평판이 날로 높아지고 비난하는 여론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탁발황은 듣지 않았다.

태자 탁발황은 정사를 처리할 때 세밀하게 살피고 엄격하게 판단하였다. 그런데 중상시 종애는 성품이 음험하고 사나웠으며 법을 어기는 일이 많았으므로, 탁발황이 그를 미워하였다. 당시 급사중 구니도성(仇尼道盛)과 급사황문시랑 임평성(任平城)은 탁발황의 총애를 받아 상당한 권세를 행사하였으며, 모두 종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종애는 구니도성 등이 자신의 잘못을 탄핵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꾸며 고발하였다. 탁발도는 크게 노하여 구니도성 등을 도성의 거리에서 참수하였고, 동궁(東宮)의 관리들도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6월 15일[411], 종애의 참소 사건으로 탁발도가 무척이나 노여워하자, 태자 탁발황은 근심에 시달리다가 24세에 요절하였다.

6월 19일[412], 탁발도는 뒤늦게 태자에게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후회하였다. 이에 탁발황을 금릉(金陵)에 장사지내고, 시호는 '경목태자(景穆太子)'라 하였다.

정평 원년(451년) 7월 5일[413], 탁발도가 음산(陰山)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여러 관청의 정원을 3분의 1 줄였다.

정평 원년(451년) 9월 12일[414], 평성으로 돌아왔다.

정평 원년(451년) 10월 9일[415], 탁발도가 또 음산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송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조서를 내려 전중장군 낭법우(郎法祐)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여 우호를 다졌다.

10월 18일[416], 사공 · 상당왕 장손도생이 사망하였다.

정평 원년(451년) 12월 27일[417], 탁발도가 궁궐로 돌아와 황손 탁발준을 고양왕(高陽王)에 봉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황손이 대를 이을 적통이므로 번왕으로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그 봉작을 취소하였다. 당시 탁발준은 4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총명하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기에, 탁발도는 그를 사랑하여 늘 곁에 두었다. 이후 진왕 탁발한을 동평왕(東平王)에, 연왕 탁발담을 임회왕(臨淮王)에, 초왕 탁발건을 광양왕(廣陽王)에, 오왕 탁발여를 남안왕(南安王)에 각각 고쳐 봉하였다.

이달에 만도귀를 도와 서역을 평정했던 당화가 평성으로 와서 입조하니, 탁발도는 그를 후하게 예우하였다.

2.24. 종애의 정변

정평 2년(452년) 정월 초하루[418], 남쪽에서 귀순해 온 백성 5,000여 호가 중산(中山)에서 반란을 꾀하자, 정주(定州)의 관군이 이들을 토벌하였다. 이후 기주자사(冀州刺史) · 장액왕 저거만년은 이 백성들과 반란을 공모한 죄로 사사되었다.

정평 2년(452년) 2월 5일[419], 태무제 탁발도는 당시 경목태자 탁발황을 추모하며 슬픔을 그치지 못하였다. 중상시 종애는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영안궁(永安宮)에서 탁발도를 시해하였다. 이때 상서좌복야 난연(蘭延), 시중 화필(和疋),설제 등은 태무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쳐 상을 알리지 않았다.

화필은 황손 탁발준이 너무 어리므로 나이가 많은 자를 황제로 세우려 하였으나, 설제는 탁발준이 적통 황손이므로 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둘의 논의가 오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종애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종애는 자신이 경목태자에게 죄를 지은 데다 평소 진왕 탁발한을 미워하고 남안왕 탁발여와는 사이가 좋았으므로, 몰래 탁발여를 맞아들여 중궁(中宮)의 옆문으로 궁궐 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황후 혁련씨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난연 등을 불러들였다. 난연은 종애가 본래 신분이 낮은 자였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모두 그를 따라 들어갔다. 종애는 미리 환관 30명에게 무기를 들려 궁궐 안에 매복시켜 두었다. 난연 등이 들어오자 차례로 붙잡아 결박한 뒤 목을 베어 죽였으며, 진왕 탁발한도 수항(水巷)에서 죽이고 탁발여를 황제로 세웠다. 이후로 연호를 개원하고 스스로 대사마 · 대장군 · 태사 · 도독중외제군사 자리를 차지하면서 위나라 정치는 훗날 황손인 문성제 탁발준이 즉위할 때까지 혼란에 빠진다.

흥안 원년(452년) 3월 13일[420], 문성제 탁발준이 탁발도의 시호를 '태무황제(太武皇帝)'라 하고, 운중(雲中)의 금릉(金陵)에 장사지냈으며,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였다.

탁발도는 사람됨이 건장하고 사납도록 용맹하였다. 성을 공격하거나 적의 진형과 맞설 때에는, 친히 화살과 돌이 날아드는 곳으로 뛰어들었으며, 좌우의 사람들이 잇달아 죽거나 다쳐도 얼굴빛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장수와 병사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복종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성품은 검소하고 소박하여 의복과 수레, 음식은 필요한 만큼만 갖추었을 뿐이었다. 한번은 여러 신하가 도읍 평성의 성벽을 더욱 높고 견고하게 하고 궁실도 수리할 것을 청하며 아뢰었다.
"《주역(周易)》에 '왕공(王公)은 험한 지세를 마련하여 나라를 지킨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소하(蕭何)는 '천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으니, 웅장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높일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탁발도가 말했다.
"옛사람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덕(德)에 달려 있지 험고한 지형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혁련발발은 흙을 다져 성을 쌓았지만 내가 그를 멸망시켰으니, 어찌 성에 달린 일이겠는가?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바야흐로 백성의 힘이 필요한 때이니, 토목 공사는 내가 아직 할 일이 아니다. 소하의 대답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
이처럼 탁발도는 언제나 재물이 군사와 국가 운영의 근본이므로 가볍게 써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상과 하사품을 내릴 때에는 모두 전쟁에서 죽거나 공훈을 세운 사람들의 집안에 돌아가게 하였으며, 친척이나 총애받는 귀족에게 까닭 없이 돌아가게 한 적이 없었다.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정시킬 때에는 작전 방침과 지휘 방법을 직접 일러 주었는데, 이를 어긴 자들은 대부분 패배하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아서 때로는 일반 병졸 가운데서도 인재를 발탁하였다. 오직 그 재능을 보고 장점을 알맞게 썼으며, 출신이나 신분은 따지지 않았다. 사정을 듣고 살피는 것이 정밀하고 민첩하여 아래에서는 실정을 숨길 수 없었다. 상을 줄 때에는 신분이 낮다고 지나치지 않았고, 벌을 줄 때에는 신분이 귀하다고 피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매우 아끼는 사람이라도 끝내 너그럽게 봐주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법은 짐이 천하 사람들과 함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어찌 감히 가볍게 여기겠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종종 이미 죽이고 난 뒤에 다시 후회하기도 하였다.

3. 평가

세조(世祖)는 총명하고 영특하며 결단력이 뛰어났고, 위엄과 영명함으로 우뚝 솟았다. 앞선 두 대가 쌓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정벌의 기세를 떨쳐 마침내 군사를 사방으로 출동시키고, 험한 곳과 평탄한 곳을 두루 누볐다. 통만성(統萬城)을 쓸어버리고 진(秦)·농(隴) 지역을 평정하였으며, 요해(遼海)를 제압하고 하원(河源)을 휩쓸었다. 남쪽 오랑캐들은 짐을 지고 달아났고, 북쪽의 연연(蠕蠕)은 자취를 감추었다. 사방을 널리 평정하고 융(戎)과 화(華)를 하나로 합쳤으니, 그 공이 실로 지대하다. 그리하여 위(魏)의 국업이 역대 수많은 왕조를 뛰어넘어 빛나게 하였으니, 어찌 신묘한 지혜로 천하를 경륜하여 한 시대를 맡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겠는가? 그러나 처음에는 태자가 끝내 제명을 누리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소홀히 여긴 데서 변란이 일어났다.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고 뒤날의 우환을 막는 일을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위수(魏收), 《위서(魏書)》 권4 〈세조기 하(世祖紀下)〉
불리벌(佛狸伐, 탁발도)에 이르러 위세가 더욱 거세졌는데, 그의 원대한 계책과 군사적 지략은 옛 시대를 넘어설 정도였다. 비록 묵돌선우의 사나운 용맹과 단석괴의 강대한 군사력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서쪽으로 하서(河西)를 병합하고 동쪽으로 용갈(龍碣)을 차지하여 북방의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고 영토가 만 리에 걸쳤다. 영토의 구획만으로는 옛 위·진에 미치지 못했지만, 한족 백성과 북방의 여러 부락을 함께 거느려 그 인구는 오히려 배나 되었다. 마침내 백만 기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해 중화의 땅을 위협하니, 오랑캐의 깃발이 장강에 비치고 둥근 천막이 강가를 따라 늘어섰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짐을 짊어진 채 달아날 준비를 하고 남녀가 모두 두려움에 술렁였다
심약(沈約), 《송서(宋書)》 권95 〈삭로전(索虜傳)〉

도무제 탁발규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명원제 탁발사가 그 기반을 안정시켰다면, 태무제는 북하, 북량, 북연 등 북방에 남아 있던 십육국 정권들을 차례로 멸망시켜 439년 북방 통일을 완성한 군주였다. 이후에도 유연 제국을 반복해서 공격하고, 서역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으며, 만년에는 군대가 회수(淮水)를 넘어 장강 북쪽 과보(瓜步)에까지 이르렀다.이러한 태무제의 정복은 영토 확대 이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도무제 때까지만 하더라도 북위는 후연을 비롯한 여러 세력과 하북의 패권을 다투는 나라 가운데 하나였고, 명원제 시기에도 그 구도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무제가 북하와 북연을 무너뜨리고 마지막으로 439년 북량까지 병합하면서 이 구도는 사실상 끝났다. 북위와 맞서 독자적인 왕조를 유지하던 북방의 주요 정권들이 사라지면서, 탁발씨 정권은 더 이상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북방의 광대한 지역과 서로 다른 출신의 주민들을 하나의 황제 아래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 위수(魏收)가 태무제를 두고 "사방을 널리 평정하고 융(戎)과 화(華)를 하나로 합쳤으니, 그 공이 실로 지대하다"고 평하였다. 물론 위수의 논평에는 태무제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북조 중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439년을 전후하여 북위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북위의 역사를 연구해 온 웨스턴워싱턴대학교의 역사학자 스콧 피어스(Scott Pearce)는 위수와 마찬가지로 태무제의 정복을 중요하게 평가하면서도, 정복이 끝난 뒤 북위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지에 더 주목했다. 그는 태무제를 "실로 인상적인 군사 지도자"라고 평가하면서, 그가 여러 세대에 걸쳐 황하 평원의 비옥한 농경지를 둘러싸고 이어져 온 전쟁을 끝냄으로써 그동안 북위 왕조가 수행해 온 핵심적인 과업을 완수했다고 보았다. 이어 439년 이후를 두고 "군대를 조직하고 운용하는 데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었던 북위 역사의 첫 번째 주요 단계는 끝났다"고 표현했다. 이제 북위는 정복한 넓은 영토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서로 다른 출신과 생활방식을 가진 민족들을 어떻게 하나의 질서 안에 묶을 것인지, 나아가 정권의 지배를 어떻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것인지라는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생산한 재화를 국가가 더 효율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일 또한 이전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태무제의 정치는 정복전쟁에서 형성된 방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정복에는 대단히 능숙했지만, 새로 얻은 지역을 다스릴 때에도 군사 작전과 인구 이동, 군공에 따른 포상, 황제의 직접 지휘와 같은 방식을 자주 활용했다. 태무제 자신도 전투에서 병사들과 함께 화살과 돌이 날아드는 곳에 있었고, 장수를 파견할 때에는 작전의 방향까지 직접 지시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서고 군대를 지휘하는 모습은 탁발 황실과 선비계 군사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데 유리했고, 새로 편입된 세력에게도 황제의 권위를 분명하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북방 통일 이후에는 전쟁에서 효과적이었던 이러한 방식만으로 넓어진 영토와 복잡해진 사회를 계속 다스리기 어려웠다.

당시 북위는 화북의 농경지대와 수많은 한족 주민, 옛 오호십육국의 지배층, 하서 지역의 호한(胡漢) 세력과 여러 부족 집단을 모두 하나의 왕조 아래에서 통치해야 했다. 이들을 다루는 데 사용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대규모 인구 이동과 재배치였다. 북연을 멸망시킨 뒤에는 요서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새로 얻은 지역의 행정구역을 재편했으며, 하북에서도 주민들을 평성과 그 주변으로 옮기는 한편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다시 하북에 배치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주는 주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강제적인 조치였다. 동시에 북위 조정에게는 새로 편입한 주민을 보다 가까이에서 관리하고 수도와 주요 지역에 필요한 인력과 생산 기반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태무제의 통치를 군사적인 측면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의 재위기에는 한인 사족과 문인 관료의 진출이 확대되었고, 북방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정복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문서 행정과 관료 조직의 중요성도 이전보다 커졌다. 설해파(薛海波)는 태무제 재위기에 한족 사대부들이 중서성·비서성 등 문서 행정의 주요 관서에 다수 진출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를 북위 정치에서 이른바 '언무수문(偃武修文)'의 경향이 나타나는 과정과 연결해 설명한다. 태무제 역시 최호, 고윤, 이효백 등 한족 관료를 중용했고, 황태자 탁발황에게도 상당한 정무를 맡겼다. 훗날 효문제 시기에 더욱 두드러지는 북위의 문치화 역시 갑자기 시작된 변화라기보다, 태무제 시대부터 이어져 온 흐름 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태무제 시대에 안정된 제도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지만, 그렇게 성장한 관료 세력과 황제의 권력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개념은 아직 불안정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호였다. 최호는 태무제의 군사적 판단과 국가 정책에서 오랫동안 핵심적인 조언자였고, 태무제 역시 다른 대신들에게 중대한 군국의 일을 먼저 최호와 상의하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그러나 450년 국사필화 사건이 일어나자 최호뿐 아니라 청하 최씨와 그 혼인 관계에 있던 여러 사족까지 대규모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선비족과 한족 사이의 갈등이나, 최호가 탁발 황실의 과거를 공개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설해파는 여기에 당시의 권력관계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호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사족 관료집단과 종실·선비계 공신세력, 태자 탁발황의 감국 체제, 그리고 태무제 자신의 권력이 서로 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국사필화 사건은 단순한 호한갈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북위 조정 안에서 황제와 종실, 기존의 공신, 새롭게 성장한 한인 관료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일어난 정치적 충돌로 볼 수 있다.

태무제의 대외전쟁에서도 그의 군사적 장점과 한계는 함께 드러난다. 북량까지의 정복전에서 그의 판단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고장(姑臧)에는 물과 풀이 없어 대군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순 등의 반대에도 출병하여 북량을 멸망시킨 일이나, 유연 제국을 상대로 반복해서 원정을 감행한 것은 태무제가 대신들의 신중론에 얽매이기보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군사를 움직이는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반면 450~451년 유송에 대한 대규모 남정에서는 북위군이 가진 한계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북위군은 팽성(彭城)을 지나 회수를 건너 장강 북안까지 단기간에 진격했고, 유송 조정은 호기롭게 북벌을 단행하며 북위에 도전했다가 역으로 털려 건강(建康)에서 장정과 왕공의 자제까지 동원하여 방어에 나설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북위에서는 이러한 태무제의 진격을 장기간 뒷받침할 안정적인 보급 체계는 갖추지 못했다. 북위의 남정군은 상당 부분 현지에서 약탈한 물자에 의존했기에, 회수를 건넌 뒤 주민들이 숨어 버리자 사람과 말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귀환길에는 우이(盱眙)를 30일가량 공격하고도 함락하지 못했으며, 전투와 질병으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이 원정은 북위군이 빠른 속도로 먼 거리를 돌파하는 데에는 매우 강했지만, 장강 유역에서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거나 점령지를 유지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태무제 정치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는 말년의 후계 과정에서 드러났다. 태자 탁발황은 어린 시절부터 감국(監國)에 참여했고, 장성한 뒤에는 농업을 장려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등 내정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러나 태자가 오랫동안 실질적인 정무를 맡으면서 그를 둘러싼 세력도 점차 커졌고, 황제와 태자 사이의 권한 관계 역시 복잡해졌다. 북위 초창기의 감국은 단순히 황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태자가 잠시 정무를 대신하는 것과는 달랐다. 태자가 장기간 정무를 맡는 한편 황제는 군사와 인사에 관한 최종 권한을 계속 쥐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해질 여지가 있었다. 여기에 태자의 측근 세력과 종애의 갈등까지 겹쳤고, 결국 종애의 참소를 받아들인 태무제는 태자의 측근들을 대거 처형하였다. 그 충격으로 태자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태무제는 말년에 안정적인 후계 구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맞았다. 이는 그의 통치가 지닌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였다.

태자의 죽음과 뒤이은 후계 혼란은 태무제가 말년에 맞닥뜨린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처럼 그는 북방 통일을 완성하고 북위를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강대한 국가로 성장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문제를 모두 안정된 질서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넓어진 영토와 다양한 주민을 다스리는 문제, 새롭게 성장한 관료 세력과 황권의 관계, 그리고 후계 질서까지 상당 부분 다음 시대의 과제로 남았다. 그런 점에서 태무제의 치세는 북위가 정복을 통해 크게 성장한 시기인 동시에, 그 성장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이기도 했다.

4. 참고 문헌

5. 둘러보기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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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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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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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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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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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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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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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윈강석굴의 대불이 그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교도 불교였고, 남북조 시대 내에서도 가장 불교를 숭배한 국가가 북위였으니.[2] 왕즉불(=왕이 곧 부처) 사상에 의거하여 불상의 얼굴 모델을 당대 통치자에서 따오는 것은 이 시대의 트렌드였다. 이와 비슷하게 룽먼석굴의 노사나불은 무측천의 얼굴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3] 임술년 을사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4월 2일이고, 양력으로 5월 8일이다.[4] 계해년 갑자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11월 9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7일이다.[5] 계해년 을축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423년 12월 8일이고, 양력으로 424년 1월 24일이다.[6] 여기의 유고인은 또 다른 유고인으로, 독고부의 수령 유고인이 아니다.[7] 갑자년 병인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2월 16일이다.[8] 갑자년 병인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1월 4일이고, 양력으로 2월 19일이다.[9] 갑자년 기사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4월 14일이고, 양력으로 5월 27일이다.[10] 작산은 평성(平城) 서쪽, 대하(大河) 동쪽에 위치해 있다.[11] 을축년 무인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1월 23일이고, 양력으로 2월 26일이다.[12] 을축년 경진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3월 1일이고, 양력으로 4월 4일이다.[13] 을축년 경진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3월 2일이고, 양력으로 4월 5일이다.[14] 을축년 경진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3월 5일이고, 양력으로 4월 8일이다.[15] 을축년 정해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10월 2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7일이다.[16] 병인년 경인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 2월 14일이다.[17] 병인년 갑오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5월 13일이고, 양력으로 7월 3일이다.[18] 태무제가 유연족이 무지하여 모습이 벌레와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명칭을 고쳐 '연연(蠕蠕)'이라 하였다. 반면 남조에서는 유연을 '예예(芮芮)'라고 불렀다.[19] 병인년 기해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10월 1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6일이다.[20] 병인년 경자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11월 3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7일이다.[21] 병인년 경자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11월 7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1일이다.[22] 병인년 경자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11월 8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2일이다.[23] 정묘년 임인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1월 11일이고, 양력으로 2월 22일이다.[24] 정묘년 임인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1월 25일이고, 양력으로 3월 8일이다.[25] 정묘년 갑진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3월 3일이고, 양력으로 4월 14일이다.[26] 정묘년 갑진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3월 4일이고, 양력으로 4월 15일이다.[27] 정묘년 을사월 정미일. 음력으로는 4월 4일이고, 양력으로 5월 15일이다.[28] 정묘년 병오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5월 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8일이다.[29] 정묘년 병오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5월 26일이고, 양력으로 7월 5일이다.[30] 정묘년 정미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6월 1일이고, 양력으로 7월 10일이다.[31] 정묘년 정미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6월 2일이고, 양력으로 7월 11일이다.[32] 문(問)은 성씨이고 지(至)는 이름이다.[33] 정묘년 정미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6월 3일이고, 양력으로 7월 12일이다.[34] 정묘년 정미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6월 19일이고, 양력으로 7월 28일이다.[35] 정묘년 무신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6월 1일이고, 양력으로 7월 10일이다.[36] 정묘년 기유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8월 11일이고, 양력으로 9월 17일이다.[37] 정묘년 경술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9월 26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일이다.[38] 무진년 갑인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1월 2일이고, 양력으로 2월 3일이다.[39] 무진년 병진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3월 5일이고, 양력으로 4월 5일이다.[40] 무진년 병진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3월 13일이고, 양력으로 4월 13일이다.[41] 무진년 정사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4월 15일이고, 양력으로 5월 14일이다.[42] 무진년 정사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4월 21일이고, 양력으로 5월 20일이다.[43] 무진년 기미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6월 1일이고, 양력으로 6월 28일이다.[44] 무진년 기미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6월 18일이고, 양력으로 7월 15일이다.[45] 무진년 계해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10월 10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일이다.[46] 무진년 계해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10월 18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0일이다.[47] 무진년 윤달 신사일. 음력으로는 윤달 10월 17일이고, 양력으로 12월 9일이다.[48] 무진년 을축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428년 12월 21일이고, 양력으로 429년 2월 10일이다.[49] 천간에서는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을 양(陽)으로 하고, 을(乙)·정(丁)·기(己)·신(辛)·계(癸)를 음(陰)으로 한다. 지지에서는 자(子)·인(寅)·진(辰)·오(午)·신(申)·술(戌)을 양으로 하고, 축(丑)·묘(卯)·사(巳)·미(未)·유(酉)·해(亥)를 음으로 한다. 기(己)와 사(巳)가 모두 음이고, 간지가 기사(己巳)로 합쳐지므로 이를 삼음의 해라고 한다.[50] 기사년 기사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4월 2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6일이다.[51] 기사년 경오월 정미일. 음력으로는 5월 16일이고, 양력으로 7월 3일이다.[52] '칙련(敕連)'이란 유연족 언어를 한자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본래는 '신성(神聖)하다'는 뜻이다.[53] 경오년 무인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1월 13일이고, 양력으로 2월 21일이다.[54] 경오년 무인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2월 23일이다.[55] 경오년 무인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1월 16일이고, 양력으로 2월 24일이다.[56] 경오년 경진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2월 10일이고, 양력으로 3월 20일이다.[57] 경오년 경진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2월 11일이고, 양력으로 3월 21일이다.[58] 경오년 경진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3월 16일이고, 양력으로 4월 24일이다.[59] 경오년 경진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3월 17일이고, 양력으로 4월 25일이다.[60] 경오년 신사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4월 8일이고, 양력으로 5월 16일이다.[61] 경오년 임오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5월 13일이고, 양력으로 6월 19일이다.[62] 경오년 갑신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7월 4일이고, 양력으로 8월 8일이다.[63] 경오년 갑신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7월 14일이고, 양력으로 8월 18일이다.[64] 경오년 갑신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7월 15일이고, 양력으로 8월 19일이다.[65] 경오년 갑신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7월 16일이고, 양력으로 8월 20일이다.[66] 경오년 갑신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7월 26일이고, 양력으로 8월 30일이다.[67] 경오년 을유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8월 12일이고, 양력으로 9월 15일이다.[68] 경오년 을유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고, 양력으로 9월 23일이다.[69] 경오년 을유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8월 24일이고, 양력으로 9월 27일이다.[70] 경오년 병술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9월 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8일이다.[71] 경오년 병술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9월 20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2일이다.[72] 경오년 병술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9월 21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3일이다.[73] 경오년 정해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0월 7일이고, 양력으로 11월 8일이다.[74] 경오년 정해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10월 22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3일이다.[75] 경오년 정해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10월 2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4일이다.[76] 경오년 정해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10월 28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9일이다.[77] 경오년 무자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11월 3일이고, 양력으로 12월 3일이다.[78] 경오년 무자월 임진일. 음력으로는 11월 10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0일이다.[79] 경오년 무자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11월 12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2일이다.[80] 경오년 무자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1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5일이다.[81] 경오년 무자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11월 16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6일이다.[82] 경오년 무자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11월 17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7일이다.[83] 경오년 무자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11월 18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8일이다.[84] 경오년 무자월 신축일. 음력으로는 11월 19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9일이다.[85] 경오년 기축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430년 12월 15일이고, 양력으로 431년 1월 14일이다.[86] 북위에서는 100명을 1당(幢)으로 삼고 당에는 장수가 있었다. 북위의 당장(幢將)은 삼랑(三郎)과 위사(衛士)를 관장하였으며, 궁중에서 숙직하는 자들 가운데 시중(侍中) 이하, 중산(中散) 이상의 사람들도 모두 그 지휘를 받았다.[87] 경오년 기축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430년 12월 20일이고, 양력으로 431년 1월 19일이다.[88] 재사(宰士)는 음식과 술을 맡는 직책이다. 해근이 군대를 패하게 하고 자신까지 적에게 사로잡혔으므로 그를 욕보인 것이다. 당시 북위에는 재관상서(宰官尚書)가 있었으니, 재사는 아마 그에 딸린 관속이었을 것이다.[89] 신미년 경인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1월 29일이다.[90] 신미년 경인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2월 12일이다.[91] 신미년 경인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1월 16일이고, 양력으로 2월 13일이다.[92] 신미년 경인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2월 10일이고, 양력으로 3월 9일이다.[93] 신미년 경인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2월 22일이고, 양력으로 3월 21일이다.[94] 신미년 경인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2월 26일이고, 양력으로 3월 25일이다.[95] 신미년 임진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3월 30일이고, 양력으로 4월 27일이다.[96] 신미년 갑오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5월 11일이고, 양력으로 6월 6일이다.[97] 신미년 윤달 을미일. 음력으로는 윤달 6월 16일이고, 양력으로 8월 10일이다.[98] 신미년 병신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7월 1일이고, 양력으로 8월 24일이다.[99] 신미년 정유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8월 7일이고, 양력으로 9월 29일이다.[100] 신미년 정유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8월 11일이고, 양력으로 10월 3일이다.[101] 신미년 무술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9월 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7일이다.[102] 신미년 무술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9월 1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3일이다.[103] 신미년 무술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9월 16일이고, 양력으로 11월 6일이다.[104] 신미년 무술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9월 25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5일이다.[105] 신미년 기해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10월 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1일이다.[106] 신미년 경자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11월 10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9일이다.[107] 신미년 신축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431년 12월 11일이고, 양력으로 432년 1월 19일이다.[108] 임신년 임인월 병오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2월 17일이다.[109] 임신년 임인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1월 24일이고, 양력으로 3월 11일이다.[110] 임신년 계묘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 3월 18일이다.[111] 임신년 갑진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3월 26일이고, 양력으로 5월 11일이다.[112] 임신년 갑진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3월 28일이고, 양력으로 5월 13일이다.[113] 임신년 정미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6월 17일이고, 양력으로 7월 30일이다.[114] 임신년 정미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6월 18일이고, 양력으로 7월 31일이다.[115] 임신년 무신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7월 17일이고, 양력으로 8월 28일이다.[116] 임신년 무신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7월 18일이고, 양력으로 8월 29일이다.[117] 임신년 무신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7월 27일이고, 양력으로 9월 7일이다.[118] 임신년 기유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8월 2일이고, 양력으로 9월 12일이다.[119] 임신년 기유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8월 7일이고, 양력으로 9월 17일이다.[120] 임신년 기유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8월 9일이고, 양력으로 9월 19일이다.[121] 임신년 경술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9월 14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3일이다.[122] 임신년 신해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10월 2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0일이다.[123] 임신년 임자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11월 4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2일이다.[124] 임신년 임자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11월 4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2일이다.[125] 계유년 갑인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2월 20일이다.[126] 계유년 갑인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1월 26일이고, 양력으로 3월 3일이다.[127] 계유년 을묘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 3월 7일이다.[128] 계유년 을묘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2월 13일이고, 양력으로 3월 19일이다.[129] 계유년 을묘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2월 27일이고, 양력으로 4월 2일이다.[130] 계유년 병진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3월 13일이고, 양력으로 4월 18일이다.[131] 계유년 무오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5월 1일이고, 양력으로 6월 4일이다.[132] 계유년 기미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6월 14일이고, 양력으로 7월 16일이다.[133] 계유년 임술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9월 22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1일이다.[134] 계유년 갑자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11월 19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6일이다.[135] 계유년 을축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12월 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31일이다.[136] 계유년 을축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433년 12월 7일이고, 양력으로 434년 1월 2일이다.[137] 갑술년 병인월 을미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1월 26일이다.[138] 갑술년 병인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1월 4일이고, 양력으로 1월 29일이다.[139] 갑술년 병인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 2월 16일이다.[140] 갑술년 정묘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2월 4일이고, 양력으로 2월 27일이다.[141] 갑술년 정묘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2월 15일이고, 양력으로 3월 10일이다.[142] 갑술년 정묘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2월 28일이고, 양력으로 3월 23일이다.[143] 갑술년 무진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3월 21일이고, 양력으로 4월 15일이다.[144] 갑술년 윤달 갑술일. 음력으로는 윤달 3월 11일이고, 양력으로 5월 5일이다.[145] 갑술년 윤달 병자일. 음력으로는 윤달 3월 13일이고, 양력으로 5월 7일이다.[146] 갑술년 윤달 기묘일. 음력으로는 윤달 3월 16일이고, 양력으로 5월 10일이다.[147] 갑술년 윤달 신사일. 음력으로는 윤달 3월 18일이고, 양력으로 5월 12일이다.[148] 갑술년 윤달 무자일. 음력으로는 윤달 3월 25일이고, 양력으로 5월 19일이다.[149] 갑술년 기사월 을미일. 음력으로는 4월 3일이고, 양력으로 5월 26일이다.[150] 갑술년 기사월 정미일. 음력으로는 4월 15일이고, 양력으로 6월 7일이다.[151] 갑술년 기사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4월 30일이고, 양력으로 6월 22일이다.[152] 갑술년 신미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6월 13일이고, 양력으로 8월 3일이다.[153] 갑술년 신미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6월 20일이고, 양력으로 8월 10일이다.[154] 갑술년 임신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7월 20일이고, 양력으로 9월 9일이다.[155] 갑술년 임신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7월 21일이고, 양력으로 9월 10일이다.[156] 내입행장(內入行長)은 북위의 관직이다. 아마 용맹하고 힘센 사람들을 선발하여 궁중에 들어가 숙직하게 하였는데, 행장(行長)은 그들을 거느리는 우두머리였던 듯하다.[157] 갑술년 갑술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9월 28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5일이다.[158] 갑술년 을해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10월 4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0일이다.[159] 갑술년 을해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10월 5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1일이다.[160] 갑술년 정축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434년 12월 16일이고, 양력으로 435년 1월 30일이다.[161] 을해년 무인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1월 24일이고, 양력으로 3월 9일이다.[162] 을해년 무인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1월 25일이고, 양력으로 3월 10일이다.[163] 을해년 무인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월 26일이고, 양력으로 3월 11일이다.[164] 을해년 기묘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2월 13일이고, 양력으로 3월 27일이다.[165] 을해년 기묘월 정미일. 음력으로는 2월 20일이고, 양력으로 4월 3일이다.[166] 을해년 기묘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3월 6일이고, 양력으로 4월 19일이다.[167] 을해년 임오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5월 4일이고, 양력으로 6월 15일이다.[168] 을해년 임오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5월 18일이고, 양력으로 6월 29일이다.[169] 을해년 계미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6월 8일이고, 양력으로 7월 19일이다.[170] 을해년 계미월 병오일. 음력으로는 6월 20일이고, 양력으로 7월 31일이다.[171] 을해년 계미월 무신일. 음력으로는 6월 22일이고, 양력으로 8월 2일이다.[172] 을해년 갑신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7월 4일이고, 양력으로 8월 13일이다.[173] 을해년 을유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8월 1일이고, 양력으로 9월 9일이다.[174] 을해년 병술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9월 20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7일이다.[175] 을해년 정해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10월 19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5일이다.[176] 을해년 정해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0월 20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6일이다.[177] 을해년 무자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11월 12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7일이다.[178] 을해년 무자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11월 16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1일이다.[179] 을해년 무자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11월 23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8일이다.[180] 을해년 기축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435년 12월 1일이고, 양력으로 436년 1월 5일이다.[181] 을해년 기축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435년 12월 20일이고, 양력으로 436년 1월 24일이다.[182] 병자년 경인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1월 2일이고, 양력으로 2월 4일이다.[183] 병자년 신묘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2월 6일이고, 양력으로 3월 9일이다.[184] 병자년 신묘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2월 20일이고, 양력으로 3월 23일이다.[185] 병자년 임진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3월 5일이고, 양력으로 4월 6일이다.[186] 병자년 임진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3월 20일이고, 양력으로 4월 21일이다.[187] 병자년 임진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3월 23일이고, 양력으로 4월 24일이다.[188] 기록에서 이름이 유실되었다.[189] 병자년 계사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4월 3일이고, 양력으로 5월 4일이다.[190] 병자년 갑오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5월 5일이고, 양력으로 6월 4일이다.[191] 병자년 갑오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5월 8일이고, 양력으로 6월 7일이다.[192] 병자년 갑오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5월 17일이고, 양력으로 6월 16일이다.[193] 병자년 병신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7월 1일이고, 양력으로 7월 29일이다.[194] 병자년 정유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8월 8일이고, 양력으로 9월 4일이다.[195] 병자년 정유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8월 25일이고, 양력으로 9월 21일이다.[196] 병자년 무술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9월 2일이고, 양력으로 9월 27일이다.[197] 병자년 경자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11월 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5일이다.[198] 병자년 윤달 임자일. 음력으로는 436년 윤달 12월 5일이고, 양력으로 437년 1월 27일이다.[199] 병자년 윤달 을축일. 음력으로는 436년 윤달 12월 18일이고, 양력으로 437년 2월 9일이다.[200] 정축년 임인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 2월 27일이다.[201] 정축년 임인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1월 12일이고, 양력으로 3월 4일이다.[202] 정축년 임인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1월 29일이고, 양력으로 3월 21일이다.[203] 정축년 계묘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2월 9일이고, 양력으로 3월 31일이다.[204] 정축년 갑진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3월 2일이고, 양력으로 4월 22일이다.[205] 정축년 갑진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3월 4일이고, 양력으로 4월 24일이다.[206] 정축년 갑진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3월 18일이고, 양력으로 5월 8일이다.[207] 정축년 갑진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3월 22일이고, 양력으로 5월 12일이다.[208] 정축년 병오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5월 15일이고, 양력으로 7월 3일이다.[209] 정축년 병오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5월 22일이고, 양력으로 7월 10일이다.[210] 정축년 무신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7월 15일이고, 양력으로 8월 31일이다.[211] 정축년 기유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8월 1일이고, 양력으로 9월 16일이다.[212] 정축년 경술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9월 12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6일이다.[213] 정축년 경술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9월 25일이고, 양력으로 11월 8일이다.[214] 정축년 신해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10월 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4일이다.[215] 정축년 임자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11월 1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3일이다.[216] 정축년 임자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1월 13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5일이다.[217] 무인년 병진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3월 10일이고, 양력으로 4월 20일이다.[218] 무인년 병진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3월 13이고, 양력으로 4월 23일이다.[219] 무인년 무오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5월 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7일이다.[220] 무인년 무오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5월 27일이고, 양력으로 7월 5일이다.[221] 무인년 경신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7월 14일이고, 양력으로 8월 20일이다.[222] 무인년 계해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10월 29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일이다.[223] 무인년 을축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438년 12월 22일이고, 양력으로 439년 1월 22일이다.[224] 기묘년 병인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1월 25일이고, 양력으로 2월 24일이다.[225] 기묘년 무진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3월 3일이고, 양력으로 4월 2일이다.[226] 기묘년 무진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3월 7일이고, 양력으로 4월 6일이다.[227] 기묘년 무진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3월 26일이고, 양력으로 4월 25일이다.[228] 기묘년 기사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4월 4일이고, 양력으로 5월 2일이다.[229] 기묘년 경오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5월 14일이고, 양력으로 6월 11일이다.[230] 기묘년 경오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5월 20일이고, 양력으로 6월 17일이다.[231] 기록에서는 명칭을 달리해서 표기했지만, 대체로 앞서 나온 자설국(者舌國)과 같은 나라로 본다. 지리적으로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일대의 차치(Chach)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232] 기묘년 신미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6월 11일이고, 양력으로 7월 8일이다.[233] 기묘년 임신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7월 7일이고, 양력으로 8월 2일이다.[234] 기묘년 임신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7월 20일이고, 양력으로 8월 15일이다.[235] 기묘년 계유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8월 2일이고, 양력으로 8월 27일이다.[236] 기묘년 계유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8월 4일이고, 양력으로 8월 29일이다.[237] 기묘년 갑술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9월 25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8일이다.[238] 여기서 북진(北鎮)은 곧 태무제가 고차를 격파하여 항복시킨 뒤 설치한 육진(六鎮)이다. 평성(平城)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진이라고 하였다. 혹자는 북진이 평성의 바로 북쪽에 있었으니 곧 회삭진(懷朔鎮)이라고 한다.[239] 기묘년 을해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10월 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2일이다.[240] 기묘년 을해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4일이다.[241] 기묘년 병자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439년 1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440년 1월 5일이다.[242] 기묘년 정축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439년 12월 23일이고, 양력으로 440년 2월 11일이다.[243] 문옹(文翁)은 전한의 경제 말기에 촉군태수(蜀郡太守)를 지낸 사람이다.[244] 경진년 무인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1월 20일이고, 양력으로 3월 9일이다.[245] 경진년 무인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1월 22일이고, 양력으로 3월 11일이다.[246] 경진년 무인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1월 23일이고, 양력으로 3월 12일이다.[247] 경진년 기묘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2월 11일이고, 양력으로 3월 29일이다.[248] 경진년 신사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4월 23일이고, 양력으로 6월 8일이다.[249] 경진년 신사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4월 2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4일이다.[250] 경진년 임오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5월 4일이고, 양력으로 6월 19일이다.[251] 경진년 임오월 을사일. 음력으로는 5월 18일이고, 양력으로 7월 3일이다.[252] 경진년 임오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5월 29일이고, 양력으로 7월 14일이다.[253] 경진년 계미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6월 21일이고, 양력으로 8월 4일이다.[254] 경진년 갑신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7월 3일이고, 양력으로 8월 16일이다.[255] 경진년 갑신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7월 10일이고, 양력으로 8월 23일이다.[256] 경진년 갑신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7월 27일이고, 양력으로 9월 9일이다.[257] 경진년 을유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8월 29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0일이다.[258] 경진년 을유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1월 3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2일이다.[259] 신사년 경인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1월 20일이고, 양력으로 2월 26일이다.[260] 신사년 경인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월 21일이고, 양력으로 2월 27일이다.[261] 신사년 신묘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2월 9일이고, 양력으로 3월 17일이다.[262] 신사년 임진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3월 9일이고, 양력으로 4월 15일이다.[263] 신사년 임진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3월 28일이고, 양력으로 5월 4일이다.[264] 신사년 임진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3월 29일이고, 양력으로 5월 5일이다.[265] 신사년 계사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4월 5일이고, 양력으로 5월 11일이다.[266] 신사년 계사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4월 28일이고, 양력으로 6월 3일이다.[267] 신사년 갑오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5월 10일이고, 양력으로 6월 14일이다.[268] 신사년 정유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8월 1일이고, 양력으로 9월 2일이다.[269] 신사년 무술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9월 19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9일이다.[270] 신사년 경자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11월 22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0일이다.[271] 신사년 신축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441년 12월 26일이고, 양력으로 442년 1월 23일이다.[272] 신사년 신축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441년 12월 28일이고, 양력으로 442년 1월 25일이다.[273] 임오년 임인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 2월 2일이다.[274] 임오년 갑진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3월 25일이고, 양력으로 4월 21일이다.[275] 임오년 정미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6월 11일이고, 양력으로 8월 3일이다.[276] 임오년 무신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7월 22일이고, 양력으로 9월 12일이다.[277] 임오년 신해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10월 6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4일이다.[278] 임오년 계축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442년 12월 9일이고, 양력으로 443년 1월 25일이다.[279] 임오년 계축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442년 12월 25일이고, 양력으로 443년 2월 10일이다.[280] 계미년 갑인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1월 28일이고, 양력으로 3월 14일이다.[281] 계미년 갑인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1월 29일이고, 양력으로 3월 15일이다.[282] 계미년 을묘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2월 5일이고, 양력으로 3월 21일이다.[283] 계미년 병진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3월 20일이고, 양력으로 5월 4일이다.[284] 계미년 병진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3월 22일이고, 양력으로 5월 6일이다.[285] 계미년 정사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4월 27일이고, 양력으로 6월 10일이다.[286] 계미년 정사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4월 2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2일이다.[287] 계미년 기미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6월 21일이고, 양력으로 8월 2일이다.[288] 계미년 기미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6월 24일이고, 양력으로 8월 5일이다.[289] 계미년 임술월 신축일. 음력으로는 9월 3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2일이다.[290] 계미년 임술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9월 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5일이다.[291] 계미년 갑자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443년 11월 27일이고, 양력으로 444년 1월 3일이다.[292] 계미년 을축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443년 12월 1일이고, 양력으로 444년 1월 6일이다.[293] 갑신년 병인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1월 6일이고, 양력으로 2월 10일이다.[294] 갑신년 병인월 무신일. 음력으로는 1월 12일이고, 양력으로 2월 16일이다.[295] 갑신년 병인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1월 14일이고, 양력으로 2월 18일이다.[296] 갑신년 정묘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2월 6일이고, 양력으로 3월 10일이다.[297] 갑신년 정묘월 계유일. 음력으로는 2월 8일이고, 양력으로 3월 12일이다.[298] 갑신년 정묘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2월 15일이고, 양력으로 3월 19일이다.[299] 갑신년 무진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3월 3일이고, 양력으로 4월 6일이다.[300] 갑신년 무진월 갑진일. 음력으로는 3월 9일이고, 양력으로 4월 12일이다.[301] 갑신년 무진월 계축일. 음력으로는 3월 18일이고, 양력으로 4월 21일이다.[302] 갑신년 기사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4월 11일이고, 양력으로 5월 13일이다.[303] 갑신년 경오월 정유일. 음력으로는 5월 3일이고, 양력으로 6월 4일이다.[304] 갑신년 임신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7월 10일이고, 양력으로 8월 9일이다.[305] 갑신년 계유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8월 3일이고, 양력으로 8월 31일이다.[306] 갑신년 계유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고, 양력으로 9월 17일이다.[307] 갑신년 갑술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9월 7일이고, 양력으로 10월 4일이다.[308] 갑신년 갑술월 정미일. 음력으로는 9월 15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2일이다.[309] 《위서》와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석은 그 뜻이 '唯'이라고 했는데, 여기의 唯는 단순한 부사 '오직'이라기보다 '유일하다' 혹은 '참되다'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다만 원래 유연어의 정확한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다.[310] 갑신년 을해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10월 21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7일이다.[311] 《자치통감》에서는 이 일이 9월 기사 뒤에 배치하여, 《위서》와 《자치통감》의 편년 배치가 어긋나 있다. 사마광이 〈세조기〉의 날짜를 그대로 채택한 것이 아니라, 날짜 없는 〈토욕혼전〉의 서술을 사건 흐름에 맞춰 9월 기사 뒤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나, 〈고이(考異)〉가 별도로 붙어 있지 않아서, 왜 본기의 10월 계미일을 버렸는지에 대한 사마광의 명시적인 설명은 없다. 따라서 본 문서는 본기의 기록을 따른다.[312] 갑신년 정축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444년 12월 25일이고, 양력으로 445년 1월 19일이다.[313] 을유년 무인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1월 21일이고, 양력으로 2월 13일이다.[314] 연리수(連理樹)는 서로 가까이 자라던 두 나무의 가지나 줄기가 맞닿아 붙어서 하나처럼 이어진 나무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이런 나무를 자연적으로 나타난 상서로운 징조로 여겼다.[315] 갑신년 경진월 경인일. 북위력으로는 3월 1일이고, 양력으로 4월 23일이다. 445년에 북위력은 윤달을 정월에 두었기에 5월에 윤달을 둔 유송력과 차이가 생긴다. 양력으로는 445년 2월 23일부터 7월 19일까지 차이가 있다.[316] 갑신년 경진월 경술일. 북위력으로는 4월 22일이고, 양력으로 6월 12일이다.[317] 갑신년 계미월 임진일. 북위력으로는 6월 5일이고, 양력으로 7월 24일이다.[318] 갑신년 을유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8월 1일이고, 양력으로 9월 17일이다.[319] 갑신년 을유월 임진일. 음력으로는 8월 6일이고, 양력으로 9월 22일이다.[320] 갑신년 을유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8월 1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일이다.[321] 갑신년 정해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7일이다.[322] 갑신년 무자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11월 4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8일이다.[323] 갑신년 무자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1월 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9일이다.[324] 태무제의 보모인 혜태후 두씨의 친동생이다. 두씨가 황태후에 책봉되면서 요동왕에 봉해졌는데, 이 왕 작위는 순전히 누나 덕분에 얻은 것이기에, 행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비중은 전무하다.[325] 갑신년 무자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11월 1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9일이다.[326] 요미원 교수는 《북조호성고》에서 이 구제가 구겸지(寇謙之)처럼 한족 구씨라기 보다는, 북방 이민족 성씨인 약구인씨(若口引氏)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대북(代北) 이민족 출신의 성씨 가운데 약구인씨는 훗날 한화 정책으로 인해 구씨(寇氏)로 바뀐 바 있다.[327] 갑신년 무자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445년 11월 16일이고, 양력으로 12월 30일이다.[328] 갑신년 무자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445년 11월 28일이고, 양력으로 446년 1월 11일이다.[329] 《주관(周官)》에 따르면 '양주(揚州)의 큰 늪을 구구(具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구구(具區)는 오늘날 태호(太湖) 일대로, 당시 유송 깊숙히 위치한 오(吳) 지역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진짜 사냥하고 싶다는 내용이 아니라 노골적인 외교적 도발로 봐야 한다.[330] 병술년 경인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1월 14일이고, 양력으로 2월 25일이다.[331] 병술년 경인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1월 16일이고, 양력으로 2월 27일이다.[332] 병술년 경인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1월 17일이고, 양력으로 2월 28일이다.[333] 병술년 경인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1월 26일이고, 양력으로 3월 9일이다.[334] 병술년 신묘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2월 2일이고, 양력으로 3월 15일이다.[335] 병술년 신묘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2월 3일이고, 양력으로 3월 16일이다.[336] 병술년 신묘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2월 12일이고, 양력으로 3월 25일이다.[337] 태무제가 출정하면 태자 탁발황이 수도에 남아 지켰으므로, 평성(平城)의 조정을 유대(留臺)라고 지칭하였다.[338] 劉淑芬, 〈從民族史的角度看太武滅佛〉,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集刊》 72.1, 2001, 1-48쪽.[339] 石松日奈子, 《北魏仏教造像史の研究》, ブリュッケ, 2005.[340] 佐藤智水, 〈雲岡仏教の性格―北魏国家仏教成立の一考察〉, 《東洋学報》 59-1·2, 1977, 27-66쪽.[341] 문무왕, 〈운강석굴을 통해 본 초기 북위석굴조영의 사회적 배경〉, 《불교학보》 70, 2015, 143-169쪽.[342] 병술년 계사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4월 1일이고, 양력으로 5월 12일이다.[343] 병술년 계사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4월 5일이고, 양력으로 5월 16일이다.[344] 태원군(太原郡)은 본래 병주(幷州)에 속하였으나, 남조에서는 태원군 사람들이 남쪽으로 옮겨 온 뒤 그들을 위해 태원군을 교치(僑置)하였다. 동진 시기 재상이었던 유유가 추진한 의희토단을 시행하면서 태원현(太原縣)을 별도로 설치하여 태산군(泰山郡)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송나라가 세워지자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제남(濟南)과 태산(泰山)의 일부를 떼어 태원군의 영역으로 삼아 청주(青州)에 소속시켰다.[345] 태무제의 생모인 밀황후 두씨(杜氏)와 송나라의 청주자사 두기(杜驥)의 성씨가 같아 외가라고 한 것이다.[346] 병술년 갑오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5월 11일이고, 양력으로 6월 20일이다.[347] 병술년 을미월 갑신일. 음력으로는 6월 2일이고, 양력으로 7월 11일이다.[348] 병술년 을미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6월 4일이고, 양력으로 7월 13일이다.[349] 정해년 계묘월 기묘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 3월 3일이다.[350] 정해년 계묘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2월 5일이고, 양력으로 3월 7일이다.[351] 승려 담무참(曇無讖)의 술법을 배웠다는 말이다.[352] 무자년 을묘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 3월 21일이다.[353] 446년 6월 4일에 백성 10만 명을 징발하여 착수에 들어간 방어선 공사를 말한다.[354] 무자년 무오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5월 4일이고, 양력으로 6월 20일이다.[355] 무자년 기미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6월 21일이고, 양력으로 8월 6일이다.[356] 무자년 기미월 정묘일. 음력으로는 6월 27일이고, 양력으로 8월 12일이다.[357] 무자년 임술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9월 1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9일이다.[358] 무자년 임술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9월 17일이고, 양력으로 10월 30일이다.[359] 무자년 계해월 신축일.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4일이다.[360] 무자년 계해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10월 5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6일이다.[361] 무자년 계해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10월 2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6일이다.[362] 기축년 병인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2월 9일이다.[363] 기축년 병인월 갑술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 2월 15일이다.[364] 본래 '邪'는 '간사할 사'자이지만, 고대의 지명을 음역할 때에는 '야'라는 이독(異讀)도 존재한다. 애초에 '涿邪'가 한자의 뜻을 조합해서 만든 이름이 아니라 북방계 언어로 지명을 말할 때의 소리를 한자로 옮긴 표기이다.[365] 기축년 무진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3월 24일이고, 양력으로 5월 2일이다.[366] 기축년 경오월 경인일. 음력으로는 5월 25일이고, 양력으로 7월 1일이다.[367] 기축년 을해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10월 8일이고, 양력으로 11월 8일이다.[368] 기축년 정축월 무신일. 음력으로는 449년 12월 17일이고, 양력으로 450년 1월 15일이다.[369] 기축년 정축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449년 12월 18일이고, 양력으로 450년 1월 16일이다.[370] 경인년 무인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1월 24일이고, 양력으로 2월 21일이다.[371] 경인년 기묘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2월 3일이고, 양력으로 3월 2일이다.[372] 경인년 기묘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2월 20일이고, 양력으로 3월 19일이다.[373] 경인년 신사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4월 13일이고, 양력으로 5월 10일이다.[374] 앞서 불러들인 사람들이란 유아, 이령, 고윤 등을 말한다.[375] 경인년 계미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6월 10일이고, 양력으로 7월 5일이다.[376] 경인년 계미월 신축일. 음력으로는 6월 12일이고, 양력으로 7월 7일이다.[377] 경인년 갑신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7월 12일이고, 양력으로 8월 5일이다.[378] 명원제 재위, 태상 8년(423년)에 북위는 확오성(碻磝城)에 제주(濟州)를 설치하였다.[379] 경인년 갑신월 을해일. 음력으로는 7월 17일이고, 양력으로 8월 10일이다.[380] 북위력 경인년 을유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8월 6일이고, 양력으로 9월 27일이다.[381] 북위력 경인년 을유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8월 2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17일이다.[382] 북위력 경인년 병술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9월 4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5일이다.[383] 북위력 경인년 병술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9월 6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7일이다.[384] 북위력 경인년 병술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9월 1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3일이다.[385] 북위력 경인년 정해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10월 7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6일이다.[386] 북위력 경인년 정해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10월 9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8일이다.[387] 경인년 무자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11월 5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4일이다.[388] 경인년 무자월 갑오일. 음력으로는 11월 8일이고, 양력으로 12월 27일이다.[389] 경인년 무자월 계묘일. 음력으로는 450년 11월 17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1월 5일이다.[390] 경인년 무자월 임자일. 음력으로는 450년 11월 26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정월 14일이다.[391] 이 무렵 무릉왕 유준은 관호가 낮아져 진군장군(鎭軍將軍)이 되었다.[392] 이 일이 있기 전에 "오랑캐 말이 장강 물을 마시면, 불리(佛狸)는 묘년(卯年)에 죽으리라."라는 동요가 있었기에 장창이 이 말을 한 것이다.[393] 이 알순국(頞盾國)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확정하기 어려운 서역 국가로, 중앙아시아 계통 국가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추정만 한다. 국호도 단지 《위서》에서만 언급되고, '알순국'을 언급하는 후대의 기록들도 모두 《위서》를 인용하는 구조라 지리적인 위치에 대한 설명도 없다.[394] 경인년 기축월 병진일. 음력으로는 450년 12월 1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1월 18일이다.[395] 경인년 기축월 기미일. 음력으로는 450년 12월 4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1월 21일이다.[396] 경인년 기축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450년 12월 10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1월 27일이다.[397] 조위의 유학자 왕필이 《주역》에 단 주석 '同舟而濟,則胡、越何患乎異心'을 인용한 말이다.[398] 경인년 기축월 경오일. 음력으로는 450년 12월 15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2월 1일이다.[399] 경인년 기축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450년 12월 27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2월 13일이다.[400] 《본초강목》에서는 야갈을 맹독성 덩굴식물인 '구문(鉤吻)'의 다른 이름으로 명시하였다. 학명은 'Gelsemium elegans'로, 겔세미움속 식물로 분류되며, 중국 남부와 동남아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관목에 노란 꽃을 피우는데, 끝부분이 5갈래로 벌어지는 나팔꽃과 비슷한 형태이다. 인돌알칼로이드 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중독되면 대체로 어지럼, 구토, 복통, 근력 저하,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다만, 전승되는 식물의 형태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을 지적하며 구문과 야갈을 별개의 식물로 본 도홍경(陶弘景) 등의 견해도 있다.[401] 경인년 기축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450년 12월 28일이고, 양력으로 451년 2월 14일이다.[402] 《형주기(荊州記)》에 따르면 '장사군(長沙郡) 영현(酃縣)에 영호(酃湖)가 있는데, 둘레가 2리이다. 그 호수의 물로 술을 빚는데 맛이 매우 달고 좋다.'라고 하였다.[403] 신묘년 경인월 병술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2월 17일이다.[404] 신묘년 경인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1월 2일이고, 양력으로 2월 18일이다.[405] 신묘년 신묘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2월 1일이고, 양력으로 3월 18일이다.[406] 신묘년 신묘월 무인일. 음력으로는 2월 24일이고, 양력으로 4월 10일이다.[407] 신묘년 신묘월 계미일. 음력으로는 2월 29일이고, 양력으로 4월 15일이다.[408] 신묘년 임진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3월 15일이고, 양력으로 5월 1일이다.[409] 신묘년 갑오월 임인일. 음력으로는 3월 15일이고, 양력으로 7월 3일이다.[410] 신묘년 을미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6월 9일이고, 양력으로 7월 23일이다.[411] 신묘년 을미월 무진일. 음력으로는 6월 15일이고, 양력으로 7월 29일이다.[412] 신묘년 을미월 임신일. 음력으로는 6월 19일이고, 양력으로 8월 2일이다.[413] 신묘년 병신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7월 5일이고, 양력으로 8월 17일이다.[414] 신묘년 무술월 계사일. 음력으로는 9월 12일이고, 양력으로 10월 22일이다.[415] 신묘년 기해월 경신일. 음력으로는 10월 9일이고, 양력으로 11월 18일이다.[416] 신묘년 기해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10월 18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7일이다.[417] 신묘년 신축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451년 12월 27일이고, 양력으로 452년 2월 3일이다.[418] 임진년 임인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1월 1일이고, 양력으로 2월 6일이다.[419] 임진년 계묘월 갑인일. 음력으로는 2월 5일이고, 양력으로 3월 11일이다.[420] 임진년 갑진월 신묘일. 음력으로는 3월 13일이고, 양력으로 4월 1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