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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colbgcolor=#dc143c><colcolor=#fff> 崔浩 | 최호 | |
시호 | 없음 |
작호 | 무성자(武城子) → 백마공(白馬公) → 동군공(東郡公) |
성 | 최(崔) |
이름 | 호(浩) |
자 | 백연(伯淵) |
생몰 | 381년 ~ |
부친 | 최굉(崔宏) |
출신 |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
형제자매 | 3남 중 장남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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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초기의 한족 책사이자 명신. 북위의 화북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책사로, 명문 청하(清河) 최씨 출신이다. 백마문정공 최굉의 장남. 동생으로 최간과 최념이 있다.2. 생애
2.1. 초기
최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였고, 천문학과 음양(陰陽) 이론, 제자백가의 학설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뜻과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당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최호는 약관의 나이에 직랑(直郎)으로 임명되었고, 천흥 연간(398년 ~ 404년)에는 비서성(秘書省)에서 근무하다가 저작랑(著作郎)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황제인 도무제 탁발규는 그의 글씨 솜씨를 높이 사 항상 곁에 두었다.천사 6년(409년), 도무제가 엄준하게 관리들을 다스리면서 궁성과 관청에서 작은 잘못으로도 죄를 받는 이가 많아 대부분이 눈앞의 화를 피하려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그러나 최호는 홀로 공손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때로는 하루 종일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를 안 도무제는 최호에게 어죽(禦粥)을 하사하여 그의 수고를 위로하였다. 그의 강직함과 맡은 직분에 대한 성실함은 궁하거나 영달하더라도 바뀌지 않았는데, 이러한 행동이 모두 그러한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2.2. 명원제 재위기
명원제 탁발사 재위 초기, 최호는 박사좨주(博士祭酒)로 임명되었고, 무성자(武城子)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는 항상 명원제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쳤고, 매번 교외에서 제사 지낼 시기가 되면 아버지 최굉과 함께 수레에 올라탔으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또, 명원제는 음양술수(陰陽術數)를 좋아하여, 최호가 《역경(易經)》과 《홍범(洪範)》의 오행(五行)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이를 훌륭히 여겼다. 이에 명원제는 최호에게 길흉을 점치고, 천문(天文)을 관찰하며, 의혹을 검토하고 판단하게 하였다. 최호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연구하고, 그 질서를 밝혀냈으며, 그가 결정한 여러 일들이 종종 맞아떨어졌다. 그는 군사와 국가의 중요한 논의에 자주 참여하였고, 매우 신임을 받으며 중하게 여겨졌다.한번은 후궁(後宮)에 토끼가 나타났는데, 문지기를 조사해 보아도 토끼가 들어온 경로를 알 수 없었다. 명원제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최호에게 그 징조를 추측하게 하니, 최호는 이웃나라에서 미녀를 공물로 바칠 징조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과연 후진의 황제 요흥이 여자를 바쳤다고 한다.
신서 2년(415년) 9월, 운중(雲中)과 대(代) 일대에서 가을에 곡식이 익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 태사령 왕량(王亮)과 시청자 소탄(蘇坦)은 화음공주(華陰公主) 등의 말을 인용하여, 도참서에 "국가를 업(鄴)에서 다스리면 장차 50년은 크게 번영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며, 명원제에게 도읍을 옮길 것을 권하였다. 이에 대해 최호와 특진 주담(周澹)이 명원제에게 아뢰었다.
"지금 국가가 도읍을 업(鄴)으로 옮긴다면 금년의 기근을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장기적인 대책이 되지 못합니다. 동주(東州)의 사람들은 항상 그 국가가 광막한 땅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백성과 가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그 수가 소털처럼 많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옛 지역에 그들 일부를 남겨두고, 나머지를 나누어 남쪽으로 옮기게 된다면, 여러 주(州)의 땅을 채우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군현(郡縣)에 나누어 거주하며 가시나무 숲과 같은 황폐한 땅에 처하게 된다면, 수토(水土)에 맞지 않아 질병과 죽음이 발생할 것이고, 그 상황이 드러나면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꺾일 것입니다. 사방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는 우리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굴개(屈丐)와 연연(蠕蠕)이 반드시 기세를 몰아 쳐들어올 것이며, 운중(雲中)과 평성(平城)은 위태로워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때 항대(恆代)의 천 리 험준한 지형이 가로막혀 있어, 비록 우리가 구원하고자 하더라도 도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되면 명성과 실질이 모두 손상될 것입니다. 지금 북방에 거주한다면, 가령 산동(山東)에서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경기병을 남쪽으로 출동시켜 그 위세를 고향 내에서 떨치면 되는 것이고, 이리하면 우리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이를 보고 먼지만 일어나도 두려워하며 복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가 위엄으로 제하(諸夏)를 제압하는 장기적인 계책입니다. 또한, 봄이 되어 풀이 자라면 젖과 유제품이 생산될 것이며, 채소와 과일도 곁들여지니 다음 가을까지 충분히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곡식이 중간 정도라도 익게 된다면, 지금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명원제는 이를 듣고 심히 그러하다 여기고 말했다."오직 이 두 사람만이 짐의 뜻과 같도다."
그리고는 나중에 다시 내시를 보내어 최호와 주담에게 물었다."지금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여 오는 가을까지는 버틸 수 있겠으나, 만약 오는 가을에도 다시 곡식이 익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최호 등이 대답하였다."가난하고 어려운 가구를 선별하여 여러 주(州)로 보내 곡식을 얻을 수 있게 하면 됩니다. 만약 오는 가을에도 흉년이 든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새로 방책을 도모하십시오. 다만, 도읍을 옮기는 것은 불가합니다."
명원제는 이를 채택하여, 백성들을 나누어 산동(山東)의 세 주(州)로 보내 식량을 구하게 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지급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마침내 풍년이 들어 곡식이 풍부하게 익었다. 명원제는 최호와 주담에게 각각 첩 한 명, 어의(御衣) 한 벌, 비단 50필, 솜 50근을 하사하였다.처음 요흥이 죽기 전 해에 태사(太史)가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포과성(匏瓜星) 가운데에 있다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라져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는데, 혹자는 "형혹성이 아래로 내려가 위태롭고 멸망할 나라로 들어가서 동요(童謠)나 요언(妖言)을 퍼뜨린 뒤 재앙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명원제는 이를 듣고 크게 놀라, 여러 명망있는 유학자 10여 명을 소집하여 사관(史官)들과 함께 형혹성의 행방을 찾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최호가 말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신(神)이 신(莘)나라 땅에 강림하였을 때, 그 도착한 날에 각자의 물건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날짜와 시간을 근거로 추측하건대, 경오일(庚午日)의 저녁이나 신미일(辛未日)의 아침에 하늘에 음운(陰雲)이 있었으니, 형혹성이 사라진 날은 위 이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여기서 경(庚)과 미(未)는 모두 진(秦)을 주관하며, 신(辛)은 서이(西夷)를 의미합니다. 지금 요흥이 함양(咸陽)을 점거하고 있으니, 이는 형혹성이 진(秦)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하늘에서 별이 사라졌는데, 사람이 어찌 그 별의 행방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증거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옳지 않소."
하지만 최호는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80여 일이 지난 후, 형혹성이 과연 동정성(東井星)에서 나타나 머물며 맴돌았다. 그 무렵에 후진에서는 큰 가뭄이 들어 땅이 메마르고, 곤명지(昆明池)의 물이 말랐다. 아이들의 노래에 요언(訛言)이 섞여 퍼지며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이듬해, 후진의 황제 요흥이 죽고 그의 두 아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으며, 3년 만에 나라가 멸망하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말했다."이는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경지다."
태상 2년(417년) 3월, 동진의 장군 유유가 후진의 황제 요홍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때 동진의 수군이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따라 청수(清水)로 들어가 황하(黃河)의 서쪽으로 올라가려 하였는데, 이를 위해 북위에 길을 빌리고자 하였다. 이 안건에 대해 명원제는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외조(外朝)의 공경(公卿)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곡관(函谷關)은 천험(天險)의 요새라 불립니다. 한 사람이 창을 메고 지키면 설령 만 명이라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유유가 배와 보병으로 어찌 서쪽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뒤를 타고 대응하려 한다 해도, 귀환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북쪽으로 황하 강변을 따라 올라온다면, 그 행로는 용이할 것입니다. 또, 그들은 요씨(姚氏)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그 의도를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수로를 빌려주는 것은 곧 적을 방치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땅히 먼저 군대를 보내 강의 상류를 차단하여 그들이 서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이 문제를 내조(內朝)에서도 논의하였으며, 모두 외조의 의견과 같았다. 명원제가 이 의견을 따르려 하자, 최호가 나서서 아뢰었다."이는 최상의 계책이 아닙니다. 사마휴지 등의 무리가 형주(荊州)를 어지럽혔으니, 유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분개하며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지금 유유는 요흥의 아들이 무능함을 틈타 그들의 위태롭고 멸망 직전의 상황을 이용해 그들을 정벌하려는 것입니다. 신(臣)이 보건대, 그의 뜻은 반드시 관중(關中)에 들어가려는 데 있습니다. 유유는 성급하고 과격한 사람으로, 뒤에 닥칠 재앙은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유유의 서쪽 길을 막는다면, 유유는 반드시 강을 건너 북쪽으로 침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요씨는 무사하고 우리가 되려 적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유연이 안에서 침입해 오고, 백성들의 식량도 부족하여 군대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군대를 남쪽으로 보내면 북쪽의 침략자가 공격해 올 것이고, 북쪽을 구원하면 동주(東州)의 안위가 다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수로를 빌려 서쪽으로 들어가게 한 뒤에, 군대를 일으켜 그들의 동쪽 귀로를 차단함이 낫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변장자호(卞莊刺虎)'로, 일거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는 형세입니다.
만약 유유가 승리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길을 빌려준 은혜를 덕으로 여길 것이고, 요씨가 승리한다면 이웃을 도운 명분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또, 유유가 관중(關中)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곳은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키기가 어려우니, 그가 끝내 지키지 못하면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며, 두 호랑이를 싸우게 한 뒤 장기적인 이익을 거두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계책입니다. 무릇 나라를 위한 계책이란 이익이 되는 방도를 선택하여 실행하는 것이지, 어찌 양가의 혼인 관계를 고려하여 일개 여인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국가가 항산(恆山) 이남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유유는 결코 오월(吳越)의 군대를 동원하여 관군(官軍)과 함께 하북(河北)을 다투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논하는 이들은 여전히 이렇게 주장하였다.만약 유유가 승리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길을 빌려준 은혜를 덕으로 여길 것이고, 요씨가 승리한다면 이웃을 도운 명분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또, 유유가 관중(關中)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곳은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키기가 어려우니, 그가 끝내 지키지 못하면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며, 두 호랑이를 싸우게 한 뒤 장기적인 이익을 거두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계책입니다. 무릇 나라를 위한 계책이란 이익이 되는 방도를 선택하여 실행하는 것이지, 어찌 양가의 혼인 관계를 고려하여 일개 여인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국가가 항산(恆山) 이남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유유는 결코 오월(吳越)의 군대를 동원하여 관군(官軍)과 함께 하북(河北)을 다투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유유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에 들어간다면, 진퇴로가 막히고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북쪽으로 강을 건너 올라간다면 요씨의 군대는 반드시 관중에서 나와 우리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유유는 서쪽으로 간다는 소문을 내지만 실제 의도는 북쪽으로 진격하려는 데 있으며, 그 형세가 이 사실을 뒷바침하고 있습니다."
명원제는 결국 여러 신하의 의견을 따랐고, 장손숭 등을 보내 군대를 출동시켜 동진군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북위군은 반성(畔城)에서 유유의 장수 주초석에게 패배하였고, 군사들이 많이 다쳤다. 명원제는 이 소식을 듣고, 최호의 계책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태상 2년(417년) 5월, 동진의 제군(齊郡) 태수 왕의(王懿)가 귀순하여, 북위 조정에 상소를 올리며 계책을 진언하였다. 그는 "유유가 낙양(洛陽)에 있으니, 국가에서 군사를 동원해 그의 후방을 차단한다면 유유의 군대는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원제는 왕의의 상소문을 읽고, 이를 좋게 여겼다. 이때 마침 최호가 앞에 나와 경서와 주석을 강론하고 있었기에, 명원제가 최호에게 물었다.
유유가 서쪽으로 요홍을 정벌하러 갔으며, 그의 선봉이 이미 동관(潼關)에 이르렀는데, 이 일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경(卿)이 보기에는 유유가 성공할 수 있겠는가?"
최호가 대답하였다."옛날 요흥은 허명(虛名)을 좋아할 뿐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것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 요홍은 또 무능하고 병약하여, 무리가 배반하고 가까운 이들마저 등을 돌렸습니다. 유유는 그들의 위태로운 상황을 틈타 정예병과 용맹한 장수를 이끌고 있으니, 신이 보건대 유유가 그들을 이기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명원제가 다시 물었다."유유의 무예는 무용수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최호가 대답하였다."유유가 더 뛰어납니다."
명원제가 말했다."그 근거를 말해보라."
최호가 대답하였다."모용수는 그의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이어진 군주의 자산을 물려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존귀함을 누렸기에, 같은 부족의 사람들이 자연히 그에게 귀부하였으니, 이는 마치 밤나방이 불로 몰려드는 것과 같았고, 약간의 지원만으로도 충분히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유유는 미천한 신분에서 홀로 일어서, 한 치의 땅도 물려받은 바 없고, 한 명의 병사조차 의지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외치며 환현을 평정하였고, 북쪽으로는 모용초를 사로잡았으며, 남쪽으로는 노순등을 격파하였습니다. 이미 환현의 찬탈 이전부터 진(晉)나라는 오래도록 흔들렸으니, 결국 유유가 국가의 정권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유유가 만약 요씨를 평정하고 돌아간다면, 반드시 그는 임금 자리를 찬탈할 것으로, 그 형세가 그러합니다. 풍속이 다르고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교화를 삼진(三秦) 지역에서 시행하려 한다면 이는 날개 없이 날고자 하며, 발 없이 달리고자 하는 것과 같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유유가 병력을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한다면, 이는 반드시 적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 년 동안 지속하면, 혹여 잔혹함을 이기고 살육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과 같이 진(秦) 일대를 다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찌 유유가 1 ~ 2년 사이에 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선 군대를 정비하고 갑옷을 벗겨 백성을 쉬게 하며, 국경을 방비하여 그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린다면 진(秦) 땅은 결국 우리나라의 소유가 될 것이고, 앉아서 지키기만 해도 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명원제가 말했다.유유가 만약 요씨를 평정하고 돌아간다면, 반드시 그는 임금 자리를 찬탈할 것으로, 그 형세가 그러합니다. 풍속이 다르고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교화를 삼진(三秦) 지역에서 시행하려 한다면 이는 날개 없이 날고자 하며, 발 없이 달리고자 하는 것과 같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유유가 병력을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한다면, 이는 반드시 적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 년 동안 지속하면, 혹여 잔혹함을 이기고 살육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과 같이 진(秦) 일대를 다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찌 유유가 1 ~ 2년 사이에 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선 군대를 정비하고 갑옷을 벗겨 백성을 쉬게 하며, 국경을 방비하여 그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린다면 진(秦) 땅은 결국 우리나라의 소유가 될 것이고, 앉아서 지키기만 해도 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유는 이미 관중에 들어갔으나, 앞으로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처지에 있다. 짐이 정예 기병을 보내어 남쪽으로 팽성(彭城)과 수춘(壽春)을 공격한다면, 유유가 능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최호가 대답하였다."지금 서북쪽의 두 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폐하께서 친히 육군(六師)을 이끄시는 것은 불가합니다. 병력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한신과 백기 같은 장수가 없으니 문제입니다. 장손숭은 나라를 다스릴 재능은 있으나, 공격적으로 진격하여 적을 제압할 능력은 없으므로, 유유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신은 이를 기다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명원제가 웃으며 말했다."경이 이미 그것을 정확히 헤아렸구려."
최호가 말했다."신이 일찍이 가까운 시대의 인물들에 대해 사사로이 논평한 바 있으니, 감히 이를 폐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왕맹이 나라를 다스림은 부견의 관중이라 할 수 있고, 모용각이 어린 임금을 보필함은 모용위의 곽광이라 할 수 있으며, 유유가 반란을 평정함은 사마덕종의 조조라 할 수 있습니다."
명원제가 또 물었다."경은 선제(先帝, 도무제)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최호가 대답하였다."소인은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듯 좁은 시야를 가졌으니, 어찌 하늘의 광대함을 볼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태조(太祖)께서는 막북(漠北)의 순박한 사람들을 남쪽 중원(中地)에 들어가게 하여, 그들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교화를 이루시어, 그 덕의 교화가 사해(四海)에 미치게 하셨습니다. 이는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에 비견될 만한 업적이니, 신이 어찌 감히 그 높은 이름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명원제가 이어서 물었다."혁련발발은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최호가 대답하였다."혁련발발은 그의 가문과 나라가 멸망하여 외로이 몸을 의탁하였다가, 요씨에 의해 봉지를 받았습니다. 무리를 모아 강한 이웃과 연합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유연과 원한을 맺고, 요흥의 은덕을 저버렸으며, 소인배 같은 태도로 대의를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잔혹하고 포악한 행동만을 일삼았을 뿐이니, 결국 다른 이에게 멸망당할 운명입니다."
명원제는 크게 기뻐하며 밤늦게까지 최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명원제는 최호에게 어울리는 황제의 표료(縹醪) 10잔, 수정(水精)과 융염(戎鹽) 1량을 하사하며 말했다.짐은 경의 말을 들으면서 마치 이 소금과 술처럼 경과 그 뜻을 함께 나누고 싶다."
태상 3년(418년), 혜성이 천진(天津)에서 나타나 태미(太微)를 지나 북두(北斗)를 경유하고, 자미(紫微)와 교차하면서 천봉(天棓)을 건드렸다. 이 혜성은 80여 일 동안 나타났다가 한수(漢水)에서 사라졌다. 명원제는 다시 여러 유학자들을 소집하여 물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사방에 산이 우뚝 서 있는 상황으로, 재앙과 불행의 조짐이 있는데, 그 일이 장차 어느 나라에서 일어날 것인가? 짐은 이 일을 매우 두려워하니, 경들은 모두 마음을 다해 말하고, 숨김 없이 이야기하라."
이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최호를 추천하여 그에게 대답을 하게 하였다. 최호가 말했다."옛사람의 말에 의하면, 무릇 재앙과 변화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못이 없다면, 괴이한 일이 스스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래에서 잘못을 범하면, 그 변화가 하늘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하늘의 일은 항상 일정한 법칙을 따르고, 백 대에 걸쳐 변하지 않습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왕망이 찬탈하기 전에도 혜성이 나타났으며, 그때의 상황이 현재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위(魏)나라를 찬탈한 진(晋)나라는 세력이 낮고 약하며, 임금은 힘이 없고 신하가 강한 상태였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왕조가 쇠퇴하였기 때문에, 환현에게 핍박당하기도 했고, 지금은 유유가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혜성의 꼬리는 나쁜 기운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이는 진(晋)이 멸망하고 유유가 찬탈할 징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최호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고, 명원제는 이를 깊이 옳게 여겼다.태상 5년(420년) 6월, 유유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유송을 건국하였다. 이때 명원제는 예독산(翳犢山)에 새 사냥을 나갔다가 풍로지(馮滷池)에 이르러 유유가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역참을 통해 최호를 불러 말했다.
"지난해 경이 말한 혜성의 예언이 맞았으니, 오늘에 이르러 짐이 하늘의 도리를 믿게 되었소."
당초 아버지 최굉이 중병에 걸리자, 최호는 손톱을 자르고 머리를 깎아, 밤에는 정원에서 북극성을 향해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몸으로 대신할 것을 청하면서 머리 숙여 피를 흘리며 계속 기도하였다. 이 기도는 1년이 넘게 이어졌으며, 집안 사람들 중에서도 이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결국 부친은 사망하였고, 최호가 상례를 철저히 이행하며 그 예를 다하니, 당시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였다. 그 후, 최호는 아버지의 백마공(白馬公) 작위를 계승하였다.
조정에서는 예법과 의례, 문책(文策)과 군국의 서기(書記) 업무를 모두 최호에게 맡겼다. 최호는 다양한 분야의 논의를 잘 할 수 있었으며, 문장을 길게 늘어뜨리지 않았고, 제도와 법률, 그리고 경전의 학문에 더 집중하였다. 그는 가정의 제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제사의 순서와 증상(蒸嘗)의 예, 풍검(豐儉)의 절도, 의리 등을 규명하여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최호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매번 읽어보았지만 몇십 행을 넘기지 않고 곧바로 덮어버렸다. 그는 노자와 장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책들은 지나치게 꾸며진 말로,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으며, 필시 노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닐 것이다. 노자는 예법을 익혔고, 중니(仲尼, 공자)의 제자였는데, 어찌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기 위해 잘못된 법을 세운 책을 썼겠는가? 원생(袁生)은 이른 바, 집안의 광협(筐篋) 속 물건을 왕의 궁정에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태상 7년(422년) 5월, 명원제는 한식산 복용의 부작용으로 인해 항상 미세한 병환을 앓고 있었고, 이상한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이에 명원제는 내시를 통해 최호에게 몰래 물었다.
《춘추(春秋)》에 의하면, 별이 북두(北斗)를 지날 때, 7국(七國)의 군주들이 모두 재앙을 겪게 된다고 하였소. 오늘날 위앙(胃昂)에서 일식이 일어나 조(趙)와 대(代)의 경계가 모두 어두워졌고, 짐의 병은 한 해가 지나도록 낫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할까 두려운 마당에, 아들들은 모두 어리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소? 그대가 나를 위해 후일에 대비할 계획을 세워주시오."
최호가 대답하였다."폐하께서는 이미 연륜이 깊으시고, 성스러운 업적을 번창하셨으며, 덕을 쌓아 재앙을 제거하시어, 다행히도 국가가 평온해졌습니다. 또한, 천도(天道)는 멀리 떨어져 있어, 때로는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응답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송경(宋景)은 재앙을 보고 덕을 수양하여, 결국 형혹성을 물러가게 한 적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떨쳐내시고, 마음을 평온히 하여 조화를 이루십시오. 또한 복을 모아 기쁘고 아름다운 일들이 가득하도록 하시되, 어둡고 미혹되는 말에 휘둘려 성스러운 생각을 해치지 않도록 하소서.
필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말이라도 올리겠습니다. 성화(聖化)와 용흥(龍興) 이후, 황태자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영흥(永興)의 시작에서 나라의 기틀이 거의 위태로웠습니다. 지금 마땅히 동궁(東宮)을 일찍이 세우시고, 공경(公卿) 중에서 폐하께서 평소에 믿고 의지했던 충성스럽고 어진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또, 좌우 신하 중에서 폐하의 마음을 잘 아는 믿을 만한 신하들을 태자의 벗으로 삼게 하고, 모든 일을 총괄하게 하고 군사를 통솔할 수 있도록 하여, 국정을 맡고 군사를 다스릴 수 있도록 그에게 모든 권한을 손에 쥐어주십시오. 이와 같이 되면, 폐하께서는 마음 편히 쉴 수 있고, 무위(無為)로 살아가면서 정신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며, 의약으로 건강을 돌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세(萬歲) 이후에 나라에는 훌륭한 군주가 있고,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생긴다면, 불순한 음모와 간사한 욕망은 사라지고, 외부의 위협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를 위한 법령이자, 재앙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대비책입니다. 지금 장황자(長皇子)이신 탁발도께서는 나이가 점차 일주(一周)에 이르고, 밝고 지혜로우며 온화한 성품을 지녀, 그 덕행이 모두의 마음을 모으고 있으니, 후계자로 오르게 된다면, 천하가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후계자는 장자로 세우는 것이 예의의 큰 법칙입니다. 만약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선택한다면, 이는 천륜(天倫)을 어지럽히는 것이며, 결국 서리 위에 얼음이 굳는 재앙을 초래할 것입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책들에 따르면, 나라의 흥쇠(興衰)와 존망(存亡)은 모두 이로 인해 결정되었습니다."
명원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최호는 명을 받아 종묘에 명원제의 조서를 전하였고, 탁발도는 국가의 부주(副主)로 올라, 정전(正殿)에서 조정을 직접 다스렸다. 사도 장손숭, 산양공 해근, 북신공 안동은 좌보(左辅)로 임명되어 동쪽 평상에 앉았고, 최호와 태위 목관(穆觀), 산기상시 구퇴은 우필(右弼)로 임명되어 서쪽 평상에 앉았다. 모든 관리들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업무를 보고하고 결정을 기다렸다. 명원제는 서궁(西宮)에서 요양하며, 때때로 숨어서 조정이 돌아가는 것을 살펴보고는 매우 기쁘게 여겼다. 명원제가 좌우의 시신(侍臣)들에게 말했다.필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말이라도 올리겠습니다. 성화(聖化)와 용흥(龍興) 이후, 황태자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영흥(永興)의 시작에서 나라의 기틀이 거의 위태로웠습니다. 지금 마땅히 동궁(東宮)을 일찍이 세우시고, 공경(公卿) 중에서 폐하께서 평소에 믿고 의지했던 충성스럽고 어진 자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또, 좌우 신하 중에서 폐하의 마음을 잘 아는 믿을 만한 신하들을 태자의 벗으로 삼게 하고, 모든 일을 총괄하게 하고 군사를 통솔할 수 있도록 하여, 국정을 맡고 군사를 다스릴 수 있도록 그에게 모든 권한을 손에 쥐어주십시오. 이와 같이 되면, 폐하께서는 마음 편히 쉴 수 있고, 무위(無為)로 살아가면서 정신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며, 의약으로 건강을 돌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세(萬歲) 이후에 나라에는 훌륭한 군주가 있고,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생긴다면, 불순한 음모와 간사한 욕망은 사라지고, 외부의 위협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를 위한 법령이자, 재앙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대비책입니다. 지금 장황자(長皇子)이신 탁발도께서는 나이가 점차 일주(一周)에 이르고, 밝고 지혜로우며 온화한 성품을 지녀, 그 덕행이 모두의 마음을 모으고 있으니, 후계자로 오르게 된다면, 천하가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후계자는 장자로 세우는 것이 예의의 큰 법칙입니다. 만약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선택한다면, 이는 천륜(天倫)을 어지럽히는 것이며, 결국 서리 위에 얼음이 굳는 재앙을 초래할 것입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책들에 따르면, 나라의 흥쇠(興衰)와 존망(存亡)은 모두 이로 인해 결정되었습니다."
"장손숭은 오래도록 덕망이 높은 옛 신하로, 4대에 걸쳐 나라를 섬겼고, 그 공적은 국가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해근은 말을 잘하고, 민첩하며, 지혜와 계책이 뛰어나, 그의 명성은 멀리까지 알려져 있다. 안동은 민심을 잘 이해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목관은 정치의 요점을 잘 파악하여, 짐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다. 최호는 학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구퇴는 비록 큰 공적은 없으나, 국가의 일에 전념하며 신중히 행동한다. 이 여섯 사람이 국정을 돕는다면, 내가 너희와 함께 사방을 돌며 반란을 진압하고, 무리들을 순순히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며, 천하를 뜻대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신하들이 모르는 일을 상주할 때마다 명원제가 말했다."이 문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바이니, 이는 마땅히 너희, 국가의 주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태상 7년(422년) 9월, 명원제는 유송의 무제 유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양(洛陽), 호뢰(虎牢), 활대(滑臺)를 차지하려 하였다. 이때 최호가 말했다.
"폐하께서 유유가 갑자기 떨쳐 일어났던 것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그가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공물을 바치게 하셨다면, 유유 또한 폐하를 존경하여 섬겼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가 지금 죽었으니, 그의 죽음을 틈타 정벌하려 한다면, 비록 그 땅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춘추》에 따르면, 진(晉)나라의 사개(士丐)가 군대를 이끌고 제(齊)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제후(齊侯)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군대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군자(君子)가 큰 일을 도모할 때 상(喪)을 틈타 정벌하지 않으며, 그 은혜로 효자들을 감동시키고, 의리로 제후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에도 교화가 미치게 되어, 남쪽의 금, 상아, 깃털과 같은 진귀한 보배가 저절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유유가 죽은 이후로 그 무리가 아직 흩어지지 않았는데, 우리의 병력이 그의 영토에 이미 다가가고 있으니, 반드시 그들은 서로를 이끌어 저항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공을 얻는 것은 보장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정벌의 시기를 늦추어 그들의 악행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그 나라의 강성한 신하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면, 변란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그때 명령을 내려 위세를 떨친다면, 군사들을 소모하지 않고도 회북(淮北) 지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원제는 이미 남쪽으로 정벌할 결심을 굳히고, 최호에게 반문하였다."유유는 요흥의 죽음을 틈타 그 나라를 멸망시켰건만, 어찌하여 유유가 죽었을 때 내가 그를 정벌하는 것이 불가한가?"
최호는 굳게 주장하였다."요흥이 죽고, 그의 두 아들이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유유가 그들을 정벌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명원제는 크게 화를 내며, 최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결국 해근을 남쪽으로 정벌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명원제가 친히 국정을 감독할 때,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먼저 성을 공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먼저 땅을 정복해야 하는가?"
해근이 말했다."청컨대, 먼저 성을 공격하겠습니다."
최호가 대답하였다."남쪽 사람들은 성을 지키는 데 능하여, 부씨(苻氏)가 양양(襄陽)을 공격했을 때, 일 년이 넘도록 성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국(大國)의 힘으로 그 작은 성을 공격하였다가, 적절한 시기에 성을 함락하지 못한다면, 군대의 기세가 꺾일 것이고, 적은 천천히 준비를 갖추어 올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나태해지고 적이 날카롭게 대비하게 되니, 이는 위험한 방식입니다. 차라리 군대를 나누어 땅을 점령하고, 회수(淮水)를 경계로 삼아 점령지에 수재(守宰)를 두어, 조세와 곡식을 거두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냥터 안의 사냥감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공손표도 해근과 마찬가지로 먼저 성을 공격하기를 청하여, 결국 북위군은 성을 공략하는 방식을 택하였다.태상 7년(422년) 10월, 해근 등이 황하를 건너 먼저 활대를 공격하였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공손표가 지원군을 요청하자, 명원제는 분노하여 친히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이때 명원제는 최호를 상주자사(相州刺史)로 임명하고,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직책을 더해준 뒤, 자신과 함께 종군하게 하여 모주(謀主)로 삼았다.
태상 8년(423년) 5월, 명원제가 수도 평성(平城)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하(西河)와 태원(太原)을 순행하였다. 이때 최호는 명원제를 수행하면서 고릉(高陵)의 정상에 올라 휴식하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았고, 주변의 하천과 영토를 바라보며 크게 감회를 느꼈다. 그는 여기서 동료들과 함께 오등작과 군현제의 장단점을 논의하고, 진시황과 한무제의 잘못과 실책을 검토하였다. 최호는 고대의 것을 좋아하였으며, 다스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는 최호와 자주 대화하면서 그로부터 고대의 치란(治亂)의 궤적에 대한 논의를 듣곤 하였다. 두 사람은 밤부터 새벽까지 논의하였는데, 구겸지는 마음을 다잡고 태도를 단정히 하며 한순간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난 후, 구겸지는 최호를 칭찬하며 말했다.
"이 말들은 모두 지혜롭고 실천할 만하며, 최호는 오늘날의 고요(皋繇)와 같은 사람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먼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것을 천하게 여겨, 이를 깊이 살피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나서 구겸지 최호에게 말했다."나는 도(道)를 행하면서 은거하여 세속의 일을 도모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신(神)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유교(儒教)를 겸하여 닦고, 태평진군(泰平真君)을 보좌하며, 천 년 동안 끊어진 계통을 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 그러나 내가 옛것을 깊이 연구하지 않아, 이를 마주하면 어리석고 어두워진다오. 경이 나를 위해 나라를 다스렸던 열왕(列王)들의 법전을 편찬하고, 그 요점을 논해 주시오."
이에 최호는 20여 편의 책을 저술하였고, 위로는 태초(太初)부터 아래로는 진(秦)과 한(漢) 시대의 변화와 폐단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기록하였다. 그의 책의 주요 취지는 오등제(五等制)를 복원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2.3. 태무제 재위기
태상 8년(423년) 11월, 태무제 탁발도가 즉위하자, 좌우 신하들이 최호의 정직함을 시기하여 그를 비방하고 모함하였다. 태무제는 최호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나,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공(公)의 신분으로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의문이나 논의할 일이 생기면 최호를 불러 물었다.최호는 외모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아름다워 마치 미인과 같았고, 성격은 민첩하고 이치에 통달하여 계책을 세우는 데 뛰어났다. 그는 자신을 늘 한나라의 장량과 비교하며, 자신의 옛 학문에 대한 연구가 장량을 능가한다고 여겼다. 관직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온 최호는, 복식(服食)과 양성(養性)의 도를 닦고자 하였다. 당시 천사 구겸지는 《신중록도신경(神中錄圖新經)》을 지니고 있었는데, 최호는 이를 배우기 위해 구겸지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시광 연간(424년 ~ 428년)에 최호는 동군공(東郡公)으로 고쳐 봉해졌고, 태상경(太常卿)으로 임명되었다.
시광 3년(426년) 6월, 태무제는 공경(公卿)들을 소집하고 물었다.이때 장손숭은 평양왕 장손한, 사공 해근 등과 함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혁련(赫連)은 땅에 정착하고 있음에도 아직 큰 위협이 되지 못하나, 연연(蠕蠕)은 대대로 국경을 침범하며 피해를 끼쳐 왔으니, 먼저 대단(大檀)[1]을 토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에 맞춰 그들의 가축과 자원을 거두어 들이면 나라를 부유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산(陰山)에서 사냥을 하며 짐승들을 더 많이 죽이고 가죽, 고기, 힘줄, 뿔 등을 얻어 군수 물자로 충당해야 하니, 역시 소국(小國, 북하) 하나를 무찌르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태상 최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대단(大檀)은 거처를 옮기는 것이 마치 새가 날아가듯 유동적이니, 신속히 추격하면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다면 그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혁련굴개는 영토가 천 리를 넘지 않고, 그 형정(刑政)은 잔혹하여 사람과 신령으로부터 버림받았으니, 그를 먼저 토벌함이 마땅합니다."
또, 상서 유결과 무정후 안원은 북연의 풍발을 먼저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대신들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태무제는 결국 서쪽의 순시를 결정하였다시광 3년(426년) 9월, 북하에서 혁련발발이 죽고 관중이 혼란에 빠지자, 태무제는 다시 북하 정벌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이를 어렵다고 여겼으나, 오직 최호만이 이렇게 말했다.
"작년부터 형혹(熒惑)이 두 번이나 우림(羽林)에 머물렀는데, 이 징조는 이미 모든 것이 성취되어 그 결과로 진나라(西秦)가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올해 다섯 개의 행성이 동방에 함께 나타났으니, 서쪽을 정벌하는 데 이로울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하늘의 징조와 인간의 마음이 모두 모였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태무제는 이에 사공 해근 등을 보내 포판(蒲阪)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친히 경기병을 이끌고 북하의 도성 통만성(統萬城)을 습격하여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시광 4년(427년) 6월, 태무제가 다시 북하를 정벌하러 가서, 통만성 아래에 진을 치고, 군대를 모은 뒤 거짓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혁련창은 북을 울리며 소란을 피우고 나와, 진형을 늘려 양익(兩翼)을 펼쳤다. 그때 마침 동남쪽에서 비바람이 불어오며 모래바람이 일어나 하늘이 어두워지니, 환관 조예(趙倪)가 태무제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지금 바람과 비가 적의 뒤에서 우리 쪽으로 불어와, 적이 바람을 등지고 있는 형국이니,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듯합니다. 또한 장수들과 병사들은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로, 폐하께서 기병을 거두어 이를 피하시고, 다음 날을 기다리시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최호가 이를 꾸짖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천 리를 달려 하루 만에 승부를 결정하려는 마당에 어찌 계획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폐하, 적군은 탐욕스럽게 계속 전진하며 후방과 이미 연결이 끊어졌으니, 우리는 병력을 나누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바람의 방향이 사람에게만 고정된 법은 없으니, 이런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무제가 말했다."좋은 계책이다."
그리하여 태무제는 기병을 나누어 맹렬히 공격하였고, 혁련창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다. 많은 군사를 잃은 혁련창은 통만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실패하여 그대로 상규(上邽)로 도주하였고, 통만성은 이튿날 북위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때 태무제는 통만성에서 저작랑 조일(趙逸)의 혁련창을 칭찬하는 글을 발견하고 무척 노하였으나, 최호가 말려서 조일을 처벌하지 않았다.당초 도무제는 상서랑 등연에게 《국기(國記)》 10여 권을 저술하게 하여 연대순으로 사건을 배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등연이 도무제에게 미움받아 처형되었고, 그 과업은 명원제에게 계승되었으나,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태무제는 조서를 내려, 여러 문인들을 소집하여 《국서(國書)》를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에 최호와 그의 동생 최간, 고당(高讜), 등영, 황계(晃繼), 범형(範亨), 황보(黃輔) 등이 함께 저술에 참여하여, 신가 2년(429년) 4월에 《국서》 30권을 완성하였다.
신가 2년(429년) 4월, 태무제가 유연을 공격할 것을 논의했으나, 조정 안팎의 대신들은 모두 출병을 원하지 않았다. 태무제의 유모인 보태후(保太后) 또한 태무제를 강력히 만류했지만, 태무제는 이를 듣지 않았다. 오직 최호만이 태무제의 유연 정벌을 찬성하며 지지하였다. 그러자 상서령 유결, 상서좌복야 안원 등이 황문시랑 구제(仇齊)를 보내, 북하에서 태사를 지낸 바 있던 장연(張淵)과 서변(徐辯)으로 하여금 태무제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금년은 기사년(己巳年)으로, 삼음(三陰)의 해입니다.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고, 태백성(太白星)이 서쪽에 있으니, 병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북벌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며, 설령 승리하더라도 국가에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여러 신하들 또한 모두 장연과 서변의 의견에 동의하며, 장연이 부견을 섬기던 시절, 그가 부견에게 남쪽을 정벌하지 말 것을 간언했으나, 부견이 듣지 않고 패배한 일을 예로 들었다. 이후 장연이 다시"지금은 하늘의 징조와 인간사의 조화가 모두 맞지 않으니, 어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라며 강력히 주장하자, 태무제는 이 말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최호를 소환하여 장연 등과 변론하게 하였다.최호가 장연에게 반박하며 말했다.
양(陽)은 덕(德)이고, 음(陰)은 형(刑)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이지러지면 덕을 닦아야 하고, 달이 가려지면 형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릇 왕자(王者)가 형벌을 사용할 때, 큰 형벌은 들판에서 집행하여 본보기를 보이고, 작은 형벌은 시장과 조정에서 집행합니다. 전쟁과 정벌은 형벌을 사용하는 가장 큰 사례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삼음(三陰)의 해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이러한 형벌의 본질과 일치하며, 형벌을 시행하는 도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고, 해마다 흉년이 들며, 백성들이 떠도는 징조는 다른 나라에 해당하며, 그것은 12년 후에야 나타날 것입니다. 태백성(太白星)이 창룡성(蒼龍宿)을 지나가는 것은 천문학적으로 동쪽에 해당하니, 북벌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장연 등은 속된 삶을 살아 그 뜻과 지혜가 얕고 근시안적이며, 작은 계산에 얽매여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니, 먼 미래를 도모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천문을 살펴보니, 몇 해 전부터 달이 묘성(昴星)을 가리는 현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점괘에 따르면, '3년 안에 천자(天子)가 모두(旄頭)의 나라를 크게 격파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유연과 고차가 바로 모두(旄頭)의 무리입니다. 무릇 성군(聖君)은 시대를 다스림에 있어 능히 비범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비범한 조치는 백성들이 처음에는 두려워하나, 그것이 성공하면 천하가 편안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에 장연 등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신이 천문을 살펴보니, 몇 해 전부터 달이 묘성(昴星)을 가리는 현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점괘에 따르면, '3년 안에 천자(天子)가 모두(旄頭)의 나라를 크게 격파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유연과 고차가 바로 모두(旄頭)의 무리입니다. 무릇 성군(聖君)은 시대를 다스림에 있어 능히 비범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비범한 조치는 백성들이 처음에는 두려워하나, 그것이 성공하면 천하가 편안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유연은 변방의 쓸모없는 존재로, 그들의 땅을 차지한다 해도 농사를 지어 먹을 수 없고, 그들의 백성을 얻는다 해도 신하로 삼아 부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경박하고 변덕스러워 다스리기 어려운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며 병사와 말들을 고생시켜야 합니까?"
최호가 다시 말했다."장연이 천시(天時)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직분에 속한 일이지만, 형세(形勢)를 논하는 것은 그가 알 바가 아닙니다. 그의 말도 곧 한나라 시대의 옛말로, 흔히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지, 이를 지금의 상황에 적용하려 한다면, 사리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연은 본래 우리나라의 북쪽 변경에서 배반한 속민(屬民)입니다. 이제 그들의 수괴를 처벌하고, 선량한 백성을 거두어 다시 옛 의무를 복원하게 하려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닙니다. 또, 막북(漠北)은 기후가 서늘하여 모기와 등에가 생기지 않으며, 물과 풀이 풍부하고 아름다우니, 여름이 되면 북쪽으로 이동하여 지내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그 땅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한다면, 결코 먹을 것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귀순한 유연의 자제들 중 귀한 자는 공주와 혼인하고, 천한 자는 장군이나 대부가 되어 조정의 관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차 역시 말이 좋기로 알려져 있으니, 결코 신하로 삼아 길러 쓸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남방의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면 그들의 가볍고 빠른 움직임이 문제가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병사들로 대응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들이 멀리 도망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멀리 추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과 진퇴를 함께하며 대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더구나 유연은 여러 차례 나라를 침입하여 백성과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지금 여름에 그들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멸망시키지 않는다면, 가을에 그들이 다시 침략해 올 것이고 우리는 편히 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태종(太宗, 명원제)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해도 경계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급히 대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장연과 서변이 숫자와 점술에 통달하고, 승패를 밝히는 데 능하다고 말합니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충(不忠)한 것이고, 만약 정말로 알지 못한다면 이는 무능한 것입니다."
그때 사로잡힌 북하의 황제 혁련창도 그 자리에 있었고, 장연 등은 혁련창이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러워하며 얼굴이 붉어졌으나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최호가 논쟁에서 승리하자, 태무제는 크게 기뻐하며 공경들에게 말했다.남방의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면 그들의 가볍고 빠른 움직임이 문제가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병사들로 대응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들이 멀리 도망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멀리 추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과 진퇴를 함께하며 대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더구나 유연은 여러 차례 나라를 침입하여 백성과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지금 여름에 그들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멸망시키지 않는다면, 가을에 그들이 다시 침략해 올 것이고 우리는 편히 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태종(太宗, 명원제)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해도 경계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급히 대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장연과 서변이 숫자와 점술에 통달하고, 승패를 밝히는 데 능하다고 말합니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충(不忠)한 것이고, 만약 정말로 알지 못한다면 이는 무능한 것입니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망국(亡國)의 신하와는 일을 도모할 수 없겠구나."
그러나 보태후는 여전히 이를 어렵게 여겼고, 다시 여러 신하들이 보태후 앞에서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태무제는 최호에게 말했다."이들이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으니, 경이 잘 설명하여 그들을 깨닫게 하라."
조정이 파한 뒤, 어떤 사람이 최호를 책망하며 말했다.
"지금 오(吳) 땅의 적이 남쪽에서 침략하고 있는데도 이를 제쳐두고 북벌을 감행하다니, 군대를 천 리나 출정시키는 것을 그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유연이 멀리 도망가 버린다면, 앞에서는 얻는 것이 없고 뒤로는 남쪽의 적을 걱정해야 하니, 이는 위험한 방책입니다."
최호가 말했다."그렇지 않습니다. 올해 유연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남쪽 적을 막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서쪽의 나라들을 병합한 이후, 남쪽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군사를 일으켜 회북(淮北)을 방어하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들이 북쪽으로 오면 우리는 남쪽으로 가고, 그들이 지치면 우리는 휴식하니,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유연을 격파하기 위해 우리가 왕래하는 동안, 남쪽의 적들은 우리의 영역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유가 관중(關中)을 차지한 후,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정예병 수만 명,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굳게 지키지 못하여 군대 전체가 몰락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통곡 소리는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가 평화롭고 밝은 시대를 맞이하여 병력과 군마가 강성한 이때에, 어찌하여 송아지와 망아지를 가지고 호랑이의 입에 넣으려는 것입니까? 가령 우리가 그들에게 하남(河南)을 내준다 하더라도, 그들은 반드시 이를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혹여나 그들이 병력을 동원한다 해도, 이는 단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무릇 항아리 속의 얼어붙은 물을 보면 천하의 추위를 짐작할 수 있고, 고기 한 점을 맛보면 그 가마솥 속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에는 그 모양새가 있으니, 이를 유추해 나가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유연은 자신들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우리 국가의 힘이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오랫동안 스스로를 안심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무리를 흩어 가축을 방목하고, 가을에 살이 찌면 다시 집결하여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향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 습격하여 대비하지 못한 틈을 공격한다면, 대군이 갑자기 도착했을 때 그들은 반드시 크게 놀라 흩어질 것이며, 먼지가 일어나는 것만 보고도 도망칠 것입니다. 수말은 무리를 보호하려 하고, 암말은 새끼를 그리워할 것이니, 말들을 아무리 몰아쳐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과 풀이 없으면 며칠도 지나지 않아 흩어지고 피폐해질 것으로, 한 번의 공격으로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잠깐의 노력을 들여 영원한 평화를 얻는 것은 장기적인 이익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폐하께서 이러한 뜻을 품지 않으시는 것이었으나, 이제 성스러운 생각이 이미 결단되었고, 세상에 드문 계책을 내놓으셨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추하구나, 공경(公卿)들이여!"
결국 유연을 정벌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태무제는 친히 동쪽 길로 나아가 흑산(黑山)으로 진격하였고, 장손한은 서쪽 길로 나아가 대아산(大娥山)으로 진격하였다. 이로써 군대가 마침내 출정하자, 천사(天師)가 최호에게 물었다.무릇 항아리 속의 얼어붙은 물을 보면 천하의 추위를 짐작할 수 있고, 고기 한 점을 맛보면 그 가마솥 속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에는 그 모양새가 있으니, 이를 유추해 나가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유연은 자신들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우리 국가의 힘이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오랫동안 스스로를 안심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무리를 흩어 가축을 방목하고, 가을에 살이 찌면 다시 집결하여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향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 습격하여 대비하지 못한 틈을 공격한다면, 대군이 갑자기 도착했을 때 그들은 반드시 크게 놀라 흩어질 것이며, 먼지가 일어나는 것만 보고도 도망칠 것입니다. 수말은 무리를 보호하려 하고, 암말은 새끼를 그리워할 것이니, 말들을 아무리 몰아쳐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과 풀이 없으면 며칠도 지나지 않아 흩어지고 피폐해질 것으로, 한 번의 공격으로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잠깐의 노력을 들여 영원한 평화를 얻는 것은 장기적인 이익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폐하께서 이러한 뜻을 품지 않으시는 것이었으나, 이제 성스러운 생각이 이미 결단되었고, 세상에 드문 계책을 내놓으셨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추하구나, 공경(公卿)들이여!"
"이번 출정은 어떠할 것 같소? 과연 성공할 수 있겠소?"
최호가 대답하였다."천시(天時)와 형세(形勢)로 보아,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이는 의심할 바가 없소. 다만 여러 장수들이 소소한 일에 얽매이고, 앞뒤를 지나치게 염려하여 승세를 타고 깊이 들어가지 못하다가, 결국 완전히 성공하지 못할까 두렵구려."
신가 2년(429년) 5월, 군대가 유연의 영토에 들어가자, 유연은 미리 대비하지 못하여 그 백성과 가축이 들판에 흩어져 있었는데, 유연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크게 놀라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서로를 수습하지 못하였다. 이에 태무제는 군대를 나누어 수색하고 토벌하였으며, 동서로 5,000리, 남북으로 3,000리에 걸쳐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히고 노획한 가축, 수레, 천막은 산과 늪에 넘쳐났으며, 그 수가 수백만에 달하였다. 고차에서 도망쳐온 유연의 무리를 죽인 뒤 북위에 귀순하니, 귀순한 자가 30만 호를 넘었다. 유연 세력은 결국 흩어지고 혼란에 빠졌다.
신가 2년(429년) 7월, 태무제가 약수(弱水)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여 탁아산(涿邪山)에 이르렀다. 이때 여러 장수들은 적이 깊은 곳에 매복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여 태무제에게 더 이상 추격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천사(天師)는 태무제에게 최호의 이전 주장을 상기시키며 강력히 추격을 권했으나, 태무제는 이를 듣지 않았다. 이후 귀순한 유연의 사람이 말하기를,
"유연의 추장인 대단(大檀)은 병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궁려(穹廬)를 태운 뒤, 짐을 수레에 싣고 몇백 명과 함께 산남(山南)으로 도망쳤습니다. 백성과 가축은 궁지에 몰려 한곳에 모였는데, 그 너비가 60여 리에 달했지만 이를 이끄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우리와 추격군의 거리는 80리에 불과하였으나, 추격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들은 서쪽으로 천천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나중에 양주(涼州)에서 온 상인들도 전하기를, "만약 이틀만 더 진군했더라면 유연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태무제는 이에 대해 깊이 후회하였다. 북위군이 유연의 영역에서 철수할 때까지도 남쪽의 적들은 결국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는 최호의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최호는 천문에 밝고 별의 변화를 관측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종종 금, 은, 동으로 만든 덩이를 식초 담긴 그릇에 담가 푸르게 산화시킨 후, 밤에 관찰한 별의 이변을 기록하기 위해 그 덩이로 종이에 푸른 글자를 써서 기록해 두었다. 태무제는 자주 최호의 집을 친히 방문하여 기이한 일들에 대해 물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찾아와서 최호가 옷을 제대로 차려 입을 겨를도 없었고, 간단한 음식을 올려도 정교하고 아름답게 준비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태무제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맛보거나, 서서 간단히 먹고 곧 돌아갔다. 그의 총애와 사랑이 이와 같았다. 여기에 더해서 태무제는 최호에게 침실 안까지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에게 시중(侍中)•특진(特進)•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의 직위를 더하며, 전략과 계책으로 세운 공을 포상하였다.
한번은 태무제가 한가로운 자리에서 최호에게 말했다.
"경은 재주와 지혜가 깊고 넓으며, 짐의 할아버지 세대부터 3세대에 걸쳐 충성을 드러냈기에, 짐이 특별히 경을 가까이 두고 함께 하고 있는 것이오. 경은 모든 생각을 다하여 간언하면서 짐을 바로잡고 도와주며, 마음속에 숨기는 바가 없도록 하시오. 짐이 비록 그때 분노를 표하거나, 혹은 경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경의 말을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이후 태무제는 가인(歌人)들에게 명하여 신하들의 공적을 노래하게 하였는데, 이때 가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지혜는 최호와 같고, 청렴함은 장손도생과 같다."
또 한번은, 태무제가 새로 귀순한 고차의 추장 수백 명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그때 태무제는 최호를 가리켜 그들에게 보이며 말했다."너희들은 이 사람을 보아라. 이 자는 몸이 왜소하고 연약하여 손으로 활을 당기거나 창을 들지도 못할 듯하나, 그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지혜와 계책은 갑옷과 병기보다 뛰어난 것이다. 짐이 처음에는 비록 정벌하려는 뜻은 있었으나,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전후(前後)의 모든 승리는 이 자가 짐을 이끌어 여기까지 오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태무제는 여러 상서(尚書)들에게 명하여 말했다."모든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계책은 경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할 경우, 반드시 먼저 최호와 상의한 뒤에 실행하라."
신가 3년(430년) 3월, 유송의 문제 유의륭이 장사왕 유의흔(劉義欣)을 팽성에 진수시켜, 유격장군 호번을 광릉(廣陵)으로 보내 그곳에 수자리를 놓게 하였다. 이에 남쪽 변경을 수비하는 여러 장수들이 보고하기를,
"유의륭이 군사를 크게 사열하여 하남(河南)을 침범하려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병사 30,000명으로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경계 지역에 있는 하북(河北)의 유민들을 처벌하여, 그들이 길잡이 역할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기세를 꺾고 감히 깊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라 하였다. 이에 태무제는 조서를 내려 공경들에게 논의하게 하였고, 모두 이를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호는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이것은 따를 수 없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유연을 크게 격파한 이래로 말의 힘이 아직 충분하고, 남쪽 적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들은 늘 경병(輕兵)이 갑작스럽게 다가올까 염려하여 눕지도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소문을 내어 사람들을 움직여 대비할 뿐, 결코 먼저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남쪽 땅은 낮고 습하며, 여름철에는 무더운 증기가 가득하고, 홍수가 자주 발생합니다. 풀과 나무가 울창하여 질병과 역병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지금은 군사를 동원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군사를 정비하고 대비를 마쳤으니, 반드시 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할 것입니다. 군대를 주둔시켜 성을 공격하면 양식이 부족해질 것이고, 병력을 나누어 토벌에 나선다면 적을 상대할 방법이 없을 것으로, 이로써 이익이 될 만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피로하고 지치기를 기다린 후, 가을의 시원한 기운과 말이 살찐 시기를 이용하여, 적의 식량을 빼앗아 천천히 나아가 공격한다면 이는 완벽한 계책이 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들과 서북(西北) 지역을 지키는 장수들은 폐하와 함께 정벌에 나서면서 서쪽에서는 북하를 멸망시키고, 북쪽에서는 유연을 격파하여 많은 미녀와 진귀한 보물을 얻었으며, 말과 가축이 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남쪽을 지키는 장수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부러움을 느껴, 자신들도 남쪽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얻어 자산을 불리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 털을 헤집어 흠을 찾듯 적의 세력을 과장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자주 적의 동태를 말하며 조정을 위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공익을 저버리고 사익을 추구하며, 나라에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충신(忠臣)의 도리가 아닙니다."
태무제는 최호의 의견을 따랐다.조정의 신하들과 서북(西北) 지역을 지키는 장수들은 폐하와 함께 정벌에 나서면서 서쪽에서는 북하를 멸망시키고, 북쪽에서는 유연을 격파하여 많은 미녀와 진귀한 보물을 얻었으며, 말과 가축이 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남쪽을 지키는 장수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부러움을 느껴, 자신들도 남쪽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얻어 자산을 불리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 털을 헤집어 흠을 찾듯 적의 세력을 과장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자주 적의 동태를 말하며 조정을 위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공익을 저버리고 사익을 추구하며, 나라에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충신(忠臣)의 도리가 아닙니다."
얼마 후, 남쪽을 지키는 장수들이 다시 보고하기를,
"적이 이르렀으나 우리의 병력이 부족하니, 유주(幽州) 이남의 수비 병력을 간추려 지원해 주십시오. 또한 장수(漳水)에서 배를 만들어 철저히 대비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공경들이 논의한 결과, "기병 5,000기를 보내고, 사마초지, 노궤, 한연지 등에게 임시로 직책을 부여하여 변방의 백성들을 유도하자"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자 최호가 또 반대하며 말했다."이는 상책이 아닙니다. 적들이 우리가 유주 이남의 정예 병력을 모두 동원하고, 대규모로 배를 제작하며, 경기병을 후방에 주둔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사마(司馬)를 세우고 유씨(劉氏)를 제거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그들의 나라 전체를 놀라게 하고 혼란에 빠뜨릴 것으로, 그들은 멸망을 두려워하며 정예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자신들의 북쪽 국경을 방어하려 할 것입니다. 이후 적들이 관군(官軍)이 소문만 요란하고 실제로는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선집결된 병력을 믿고 기뻐하며 진격할 것입니다. 이들이 곧바로 황하에 이르러 침략을 마음껏 자행하게 되면, 우리의 장수들은 이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공경들이 위력으로 적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적을 재촉하여 빨리 이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됩니다. 허울뿐인 소문을 퍼뜨려 실제로 해를 불러들이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신이 지금 그곳에 있는데, 4월 이전에 돌아오도록 기약하였습니다.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상황을 신중히 살핀 후에 행동해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마초지와 같은 무리는 적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그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면 적들이 어찌 가만히 앉아 이를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마초지가 움직이면 적도 출동할 것이며, 그가 멈추면 적도 멈출 것인데, 이는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마초지 등은 소소한 재능만 있을 뿐이어서 경박하고 무뢰한 자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능하나, 큰 공을 이루는 데는 능하지 못합니다. 나라에 문제를 일으켜 군대를 끊임없이 동원되게 하고, 재앙에 얽히게 만드는 것은 틀림없이 이 무리들 때문일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노궤에서 듣기로, 요흥이 형주(荊州)로 들어가기를 구했으나, 그의 병력은 도착하자마자 흩어지고 패배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만적(蠻賊)의 약탈과 노예 매매를 면하지 못하여, 결국 재앙이 요홍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이는 이전의 교훈입니다."
이어서 최호는 다시 천시(天時)가 적에게 불리함을 설명하며 말했다.우리의 사신이 지금 그곳에 있는데, 4월 이전에 돌아오도록 기약하였습니다.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상황을 신중히 살핀 후에 행동해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마초지와 같은 무리는 적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그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면 적들이 어찌 가만히 앉아 이를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마초지가 움직이면 적도 출동할 것이며, 그가 멈추면 적도 멈출 것인데, 이는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마초지 등은 소소한 재능만 있을 뿐이어서 경박하고 무뢰한 자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능하나, 큰 공을 이루는 데는 능하지 못합니다. 나라에 문제를 일으켜 군대를 끊임없이 동원되게 하고, 재앙에 얽히게 만드는 것은 틀림없이 이 무리들 때문일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노궤에서 듣기로, 요흥이 형주(荊州)로 들어가기를 구했으나, 그의 병력은 도착하자마자 흩어지고 패배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만적(蠻賊)의 약탈과 노예 매매를 면하지 못하여, 결국 재앙이 요홍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이는 이전의 교훈입니다."
"올해는 해로운 기운이 양주(揚州)에 있으니, 먼저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적이 우리를 공격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오년(午年)은 자형(自刑)의 해로, 먼저 공격을 시작하는 쪽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두번째 이유입니다. 일식으로 빛이 사라지고, 별이 낮에 나타났으며, 날아다니던 새들이 떨어졌습니다. 별자리가 북두성과 견우성에 머물러있으니, 이는 위험과 멸망을 뜻합니다. 이것이 세번째 이유입니다. 형혹성이 익(翼)과 진(軫) 사이에 숨어있으니, 이는 혼란과 죽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번째 이유입니다. 태백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군사를 진격시키면 패배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번째 이유입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먼저 인사(人事)를 바로잡고, 다음으로 지리적 이점을 다하며, 마지막으로 천시(天時)를 살펴야 합니다. 이로써 만 번 행동해도 만 번 모두 안전하며, 나라는 평안하고 신체는 성할 것입니다. 지금 유의륭의 나라는 새롭게 세워졌으므로, 인사(人事)가 아직 완비되지 않았습니다. 재해와 이변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천시(天時)가 맞지 않기 때문이고, 배로 이동하는데 물이 마른 것은 지리적 이점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한 것이 없으니, 스스로를 지키는 것조차 불안할 수밖에 없건만, 어찌 먼저 공격하여 다른 이를 침략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틀림없이 우리의 헛된 소문을 듣고 대비를 강화할 것이고, 우리 또한 그들의 강화된 대비를 보고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적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병법에 따르면, 재앙을 분산시킨 후에 해로운 기운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지금은 행동을 개시할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태무제는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결국 공경들의 논의를 따랐다. 최호는 다시 강력히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은 양평왕 두초(杜超)를 업(鄴)에 주둔하게 하고, 낭야왕 사마초지 등을 영천(潁川)에 주둔하게 하였다.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먼저 인사(人事)를 바로잡고, 다음으로 지리적 이점을 다하며, 마지막으로 천시(天時)를 살펴야 합니다. 이로써 만 번 행동해도 만 번 모두 안전하며, 나라는 평안하고 신체는 성할 것입니다. 지금 유의륭의 나라는 새롭게 세워졌으므로, 인사(人事)가 아직 완비되지 않았습니다. 재해와 이변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천시(天時)가 맞지 않기 때문이고, 배로 이동하는데 물이 마른 것은 지리적 이점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한 것이 없으니, 스스로를 지키는 것조차 불안할 수밖에 없건만, 어찌 먼저 공격하여 다른 이를 침략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틀림없이 우리의 헛된 소문을 듣고 대비를 강화할 것이고, 우리 또한 그들의 강화된 대비를 보고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적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병법에 따르면, 재앙을 분산시킨 후에 해로운 기운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지금은 행동을 개시할 때가 아닙니다."
신가 3년(430년) 7월, 유송의 우장군 도언지가 수군을 이끌고 청수(清水)에서 황하로 들어가 물길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 적은 병력을 나누어 남쪽 강가를 따라 배치하며, 서쪽으로 동관(潼關)까지 이르렀다.
신가 3년(430년) 9월, 태무제는 북하의 잔여 무리를 통솔하는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이 유송과 연합하여 하북(河北)을 나누어 점령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정비하여 먼저 혁련정을 치고자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말했다.
"유의륭의 군대가 아직 황하 중간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간다면 앞선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며, 유의륭이 만약 허점을 틈타면 동주(東州)를 잃게 될 것입니다."
태무제는 이에 대해 의심하며 최호에게 계책을 물었다. 최호가 대답하였다."유의륭과 혁련정은 같은 악행을 꾀하며 서로 끌어들이고, 풍발과 연합하고, 유연을 끌어들여 반역의 마음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나, 이는 허세로 서로 소리를 맞추는 것일 뿐입니다. 유의륭은 혁련정의 진격을 기다리고, 혁련정은 유의륭이 먼저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누구도 감히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보기에 이는 서로 묶인 닭과 같아, 함께 날아오를 수 없으므로, 이 둘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처음에 유의륭의 군대가 황하 중간에 주둔하며, 두 갈래로 북상하여 동쪽 길로는 기주(冀州)를 향하고, 서쪽 길로는 업(鄴)을 돌파하려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폐하께서 친히 정벌에 나서야 하며, 천천히 움직일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동서로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그 범위가 2,000리에 이르고, 한 곳에 모인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하여, 병력이 분산되고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그들의 의도는 뻔합니다. 그들은 황하를 지키며 방어에만 신경쓰고, 죽음을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북쪽으로 강을 건널 뜻은 없습니다. 혁련정은 남은 세력이 미약하여 쉽게 무너뜨릴 수 있으니, 공격하면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혁련정을 격파한 뒤, 동쪽으로 동관(潼關)에서부터 몰아쳐 나아가면, 위세가 남쪽 끝까지 떨칠 것이며, 강회(江淮) 이북에는 서 있을 풀조차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성스러운 계책은 홀로 발휘되는 것으로,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자들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서쪽으로 진군하시되,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에 태무제는 최호의 말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여 평량(平涼)을 함락시킴으로써 혁련정의 세력을 멸하였다.신은 처음에 유의륭의 군대가 황하 중간에 주둔하며, 두 갈래로 북상하여 동쪽 길로는 기주(冀州)를 향하고, 서쪽 길로는 업(鄴)을 돌파하려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폐하께서 친히 정벌에 나서야 하며, 천천히 움직일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동서로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그 범위가 2,000리에 이르고, 한 곳에 모인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하여, 병력이 분산되고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그들의 의도는 뻔합니다. 그들은 황하를 지키며 방어에만 신경쓰고, 죽음을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북쪽으로 강을 건널 뜻은 없습니다. 혁련정은 남은 세력이 미약하여 쉽게 무너뜨릴 수 있으니, 공격하면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혁련정을 격파한 뒤, 동쪽으로 동관(潼關)에서부터 몰아쳐 나아가면, 위세가 남쪽 끝까지 떨칠 것이며, 강회(江淮) 이북에는 서 있을 풀조차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성스러운 계책은 홀로 발휘되는 것으로,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자들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서쪽으로 진군하시되, 의심하지 마십시오."
신가 3년(430년) 12월, 평량이 함락된 날, 태무제는 연회 자리에서 최호의 손을 잡고, 저거몽손의 사신인 종서(宗舒)에게 보이며 말했다.[2]
"그대가 궁금해 하던 최공(崔公)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의 재주와 지략의 훌륭함은 당대에 견줄 자가 없다. 짐은 모든 행동을 결정할 때 반드시 그에게 물었고, 성패를 판단하고 결정하였는데, 그의 계책은 마치 부계(符契)가 맞아 떨어지듯이 정확하여 처음부터 어긋남이 없다."
후에 관군장군 안힐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유송의 군대에서 잡은 포로들을 바쳤다. 이와 함께 남쪽 적들의 말을 전하며 말했다."유의륭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기를, 북국(北國, 혁련정의 북하 세력)의 병력이 움직이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황하를 건너 진격하고, 만약 움직이지 않으면 팽성에 머물며 진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최호의 예측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에 태무제는 공경들에게 말했다."경들은 전에 내가 최호의 계책을 따르는 것이 잘못되었다 여기고, 놀라 두려워하며 강력히 간언하였소. 항상 승리하는 집안은 처음에는 스스로 남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여기나, 결국에는 끝에 이르러 남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법이오."
신가 4년(431년) 9월, 최호는 사도(司徒)로 승진하였다.
신가 4년(431년) 10월,
연화 원년(432년) 4월, 방사(方士) 기섬(祁纖)이 상주하여, 동·서·남·북 네 방향의 왕(王)을 세우고, 왕작을 네 방위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길조를 불러오고 재앙과 이변을 없애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태무제는 조서를 내려 최호와 학자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최호가 말했다.
"선왕(先王)들께서는 나라를 세우면서 병풍과도 같은 번국들을 두었으나, 단순히 이름만을 빌려 복을 얻으려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해와 달은 운행하며 사방을 두루 비추고, 도읍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4방의 왕이라는 명칭은 사실상 수도 주변의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것입니다. 이를 명명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전에도 기섬은 대군(代郡)의 이름을 만년군(萬年郡)으로 바꾸자고 상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도 최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옛날 태조 도무황제께서는 하늘의 명을 받아 대업을 열고 크게 확장하셨으며, 도무황제께서 제정하고 배치한 모든 것들 중 고대의 전통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대(代) 땅에서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이를 위(魏)라고 칭하였으니, 대와 위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마치 옛날 은(殷)과 상(商)을 겸하여 부른 것과 같습니다. 어차피 국가는 덕을 쌓아 그 공적이 이미 기록과 역사에 뚜렷이 남아 있으니, 만억 년의 번영을 누릴 것으로, 구태여 이름을 바꾸어 이익을 더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섬이 말한 바는 모두 정당한 이치가 아닙니다."
태무제는 최호의 의견을 따랐다.태연 5년(439년) 3월, 북량의 하서왕 저거목건은 내심에 두 가지 뜻을 품고 있었다. 태무제는 이를 알고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먼저 최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최호가 대답하였다.
"저거목건의 악한 마음은 이미 드러났으니, 반드시 처벌해야 합니다. 관군(官軍)이 지난해에 북벌을 진행하여 비록 승리하지 못했으나, 사실상 큰 손해는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 군마(軍馬)는 내외를 합쳐 30여 만 필이 있었는데, 북벌에서 죽거나 다친 말은 8,000여 필에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년 말들이 피로해져 항상 수천 필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지만, 결코 그 숫자가 10,000필을 넘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빈틈을 틈타 이를 큰 손실로 간주하고, 회복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상과 달리 우리의 대군이 진격한다면, 그들은 내심 크게 놀라 혼란에 빠져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포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저거목건은 유악하고, 그의 형제들은 자만하여 방자하게 권력을 다투니, 백성들의 마음은 분열되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 몇 년간의 천재지변은 모두 진(秦)과 양(涼) 지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는 곧 그 나라의 흥성함이 끊어질 징조입니다."
그러다가 449년에 북위의 국사 편찬 작업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 작업은 한족 관료들이 주관한 편찬 사업이었다. 사서의 편찬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최호가 완성한 북위의 국사 30권은 그 형식상 편년체에다가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따랐으며, 국사를 편찬할 때 가감없이하여 북위의 창업 과정에서부터 태무제 당대까지의 내용을 숨김없이 표현하고, 여기에 선비계 탁발씨 황실이 중화문명을 받아들이기 이전 가지고 있었던 이민족으로서의 야만적인 풍습과 신조들을 서슴없이 기록했다. 이렇게 다 적은 것 자체는 나라의 역사를 가감없이 상세히 적었다는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로에 돌로 된 비석을 세우고, 여기에 떡하니 새겨서 북위 선비족 탁발씨 황실의 치부를 일반 백성들이 길가에서 대놓고 그냥 볼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 것이었다... 당시 황제인 세조 태무제 탁발도와 선비족 귀족들이 이를 좋게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3] 결국 최호의 일족과 내외손 관계에 있었던 화북의 한족 귀족 128명이 함께 숙청되었으며 최호의 집안인 청하 최씨뿐만 아니라 범양 노씨, 태원 곽씨, 하동 유씨 등 최호의 친척 한인 사족들이 죄다 큰 화를 입었다.[4] 이를 일명 국사필화사건이라고 한다. 중국 국내에서 자국사(중국사)에 대해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중국사 블로그 중 한 글에 따르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에 병사들 수십명이 오줌을 누었다고 한다.(...)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하로서의 처세를 초한지의 한신처럼 거의 신경을 안 써서 죽을 짓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안 그래도 최호는 황태자와 관원 문제로 다투기도 하는 등 신하로서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또한 남조의 한족 왕조인 유송을 정벌하는걸 반대하고, 오로지 흉노족의 북하, 선비계의 유연 등 호족 국가만 정복하길 주장한 것 등 그가 냈던 계책들은 전부 한족의 입장에서 한족의 안위만을 살피는 계책이었다.
또 최호는 북방의 사족대성(士族大姓)으로 성족문제(姓族門第)를 구별할 것을 주장하면서 5등 봉작의 회복을 기도하여 한인 사족 세력을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이것이 북위 선비족 고위층들과 충돌을 야기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북위 탁발씨 황실 입장에선 이들이 한인 명문 귀족이랍시고 겉으로만 충성하고, 속으로는 지배층인 황실과 선비족들을 더러운 오랑캐로 깔보며 대역죄로서 능멸하려 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호를 비롯한 북위 최고의 한인 문벌사족들이 주살되었던 이 사건의 이면엔 호족과 한족 관료들 사이의 종족적인 대립, 불교와 도교 간의 사상적인 투쟁, 통치계급 내부의 권력투쟁 등이 깔려 있었다는 시각이 있다.
다만 최호의 주장은 단순 한족의 안위만이 아닌 북위의 안위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먼저 화북내 이민족 문제보다 장강 이남의 동진에 더 관심을 쏟았다가 망한 나라가 바로 전진이었다. 북위의 탁발부 또한 전진이 망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혼란을 틈타 독립할 수 있었던 만큼 북위가 제2의 전진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원인은 부견의 재상 왕맹의 유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왕맹은 부견에게 화북의 한족들은 아직도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동진은 일치단결하고 있으니 동진을 공격해선 안되고 대신 내부의 적인 선비족과 강족을 경계하고 기회를 틈타 제거할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 전진은 막 화북이 통일되긴 했지만 그 안에는 선비족, 강족 같은 정복된 이민족들이 있었으며 그보다 더 많은 한족들이 있었다. 실제로도 부견이 동진을 정복하고자 벌인 비수대전에서 한족 출신들이 동진에 투신해버린 점, 전진 패배 후 왕맹이 경계하던 선비족과 강족이 전진에게서 독립하고 끝내 강족의 후진이 전진을 멸망시킨걸 감안하면 왕맹의 판단은 옳았다. 특히 이 때 유송은 개국군주 유유가 많은 땅을 수복한 상태였으며 당시 유송의 황제인 유의륭은 유송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인지라 비수대전 시기의 동진, 혹은 그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정말로 괜히 유송에 올인했다가 제2의 전진이 되는 것보단 내실을 다지는게 더 나았다.
한편 태무제는 최호를 죽이고 나서 유송을 정벌하러 갔으나 군량 부족으로 후퇴했고, 도중에 유송의 대신인 장질이 지키고 있었던 우이성을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남정에서 군사의 절반을 잃는 등 큰 손실을 보았다. 이전까지 최호의 조언을 듣고 싸워서 연전연승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결과였고 이는 최호의 군사적 식견이 매우 뛰어났다는 걸 방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