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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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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두헌 등즐 경보 양상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양기 두무 하진 한섬
제9대 제10대 제11대
조조 원소 하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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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후(酇侯) 유후(留侯) 회음후(淮陰侯)
소하 장량 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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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회음후
한신 | 韓信
파일:한신 초상.jpg
한신 상상화 (만소당화전)
출생 연대 미상
회음현
(現 장쑤성 화이안시)
사망 기원전 196년 (향년 불명)
전한 장안 장락궁(長樂宮)
(現 산시성 시안시)
재위 기간 제왕(齊王)
기원전 203년 ~ 기원전 202년
전한의 초왕(楚王)
기원전 202년 ~ 기원전 201년
전한의 회음후(淮陰侯)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6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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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信)
작위 제왕(齊王)
→ 초왕(楚王)
→ 회음후(淮陰侯)
최종 직위 대장군(大將軍) 겸 좌승상(左丞相)
시호 없음
}}}}}}}}} ||
1. 개요2. 생애3. 평가
3.1.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3.2. 너무나도 허술한 처세술3.3. 역사서의 평가
4. 기타5. 대중문화에서6. 둘러보기

1. 개요

국사무쌍(國士無雙)
전한의 무장으로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의 초대 대장군(大將軍)이다. 진(秦)나라 멸망 이후 무수한 군공을 세워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자신은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괴철의 의견처럼 한신이 점령한 조나라와 제나라는 유방에게서 독립하여 천하삼분을 노려볼 법한 큰 나라였다. 유방과 여후가 한신을 견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천하를 삼분하거나 유방에게 절대 충성하거나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해야 했는데 애매모호하게 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당대의 군사적 상식을 파격적으로 뒤집고 연전연승했던 천재적 명장으로 중국사 전체에서도 명장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신/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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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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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신/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3.1.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이좌거,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또한 신(臣)이 듣건대, "용기와 지략이 주인을 놀라게 하면 몸은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족하(足下)는 주인을 놀라게 한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상을 받을 수 없는 정도의 공로를 끼고 있으니 초(楚)에 귀부하면 초인(楚人)들이 믿지를 않고, 한(漢)에 귀부하여도 한인(漢人)들이 두려워 떱니다. 족하(足下)는 이것을 가지고 어디로 돌아가려 합니까?
괴철,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기록상 전공(戰功)과 초한전쟁에서의 활약상을 보면 한신은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전설적인 명장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승리를 항우의 군대를 상대로 거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해하 전투 이전까지는 항우가 파견한 지휘관들과 대결했고 항우와 직접적으로 붙은 적은 없으나, 개인의 용력이나 용병술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역사상 손에 꼽는 무장인 항우가 키우고 선별한 명장들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해하전투에서는 결국 그 항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안겨주었다.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므로 일괄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가장 뛰어난 명장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수많은 병사를 자신의 수족처럼 지휘하는 화려한 군사적 역량으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항우를 무너뜨리고 유방에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안겨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마찬가지로 책사로서의 재능은 역대 최강이라고 불리는 장량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현장에서 이를 용병술로 승화시킨 한신이 없었다면 통일은 어려웠을 것이라는게 세간의 평가다.[1] 항우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항우는 당대 제일이라고 평가받았던 일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용병술에 있어서도 역대 최고를 다투는 지휘관이었기에, 아무리 그가 여러가지 실책을 하더라도 한신이 없었다면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전쟁은 상대의 군대를 제압하고 군세를 꺾어야 승리하는데, 항우가 전쟁 이외의 여러 측면에서 자격미달의 모습을 보여주었어도 그 누구도 항우와 맞서는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사 최강의 용장을 상대로 본인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한신은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신은 팽성대전의 참패 이후, 열악한 한나라의 상황 속에서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군세를 시작하였는데, 수 년만에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여섯 개의 나라(六國)를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과정에서 우회 공격, 배수진, 수공, 망치와 모루 등 온갖 방식의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고,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또한 당시 중국의 지배자[2]이자 군사적 능력으로는 역시 역대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항우를 참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군사와 전투에 관련해서는 같은 시대의 그 어떤 인물도 따라오지 못할 업적을 세웠기에, 그의 군사적 능력과 전공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당대에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았는데, 사기에서는 그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는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시작했던 군세가 유방과 항우의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서술한다. 용저[3]를 참살한 이후에는 그 이전까지 회유라는 개념을 가지지 못했던 항우조차도 전투를 이길 수 없다는 두려움에 사신으로 무섭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 했을 정도이니, 한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한신의 진가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모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 예로 정보 수집을 통해 적군의 동향을 읽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안읍 전투, 적장 진여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상황에 맞는 전술을 사용해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를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전략적 배수진'의 정의를 만들어 낸 정형 전투, 지형지물과 부하 지휘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제(齊)와 초(楚) 두 나라의 연합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초한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유수 전투 등이 있다.

사실 한신이 무너트린 여섯 개의 나라들은 이름만 국가지, 전국시대 열국의 후예나 군벌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된 정권들이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아주 명료하게 정립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보다 국가 체제 자체가 미비했고, 국가의 동원력은 물론 군사의 질 같은 수준도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의 질이 낮은 것은 한신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으며, 거기에 더해 한신의 세력은 병력의 숫자도 밀리고, 원정군이었으므로 대체로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대체로 상대보다 유리할 게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략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무패의 군단이 되어 천하를 평정한 것은 한신의 능력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4][5] 다만 중요한 것은 하향평준화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상대는 항우였고 한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항우와 맞대결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가 천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유방을 비롯한 제후들은 항우의 눈치만 보기 바빴고 항우에게 덤빌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유방이 항우를 상대로 반격을 시작한 시점도 다름아닌 한신이 대장군으로 한군에 합류한 이후다.[6]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다니고 아낙네에게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무능한 사내로 평가받았고,[7]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의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대군은 커녕 부하를 다루는 위치도 못 됐던 사람[8][9]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현대의 일반기업에서도 낙하산 인사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조직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한 상황인데, 병사들을 이끌고 중국 대륙의 반을 종단하는 대원정을 성공시킨 것은 상상하기 힘든 영역이라 할 것이다.[10] 거기에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타고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우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후, 유방이 직접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라고까지 언급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활약만 엄청난 게 아니라, 이좌거의 조언에 따라 연나라를 싸움 없이 항복시키는 등 전략적인 식견도 출중했다. 정치적인 판단력에서 항우와 마찬가지로 미진하였으나 단순히 전투뿐만 아니라 큰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며 지휘하는 능력도 매우 출중했다. 요컨대, 항우가 돌격대장이 및 선봉 혹은 대규모의 부대를 이끄는 야전지휘관으로 최고라면 한신은 그러한 항우의 능력에 더하여 전세나 형세 판단 및 전투를 하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등에 대해서도 빠삭한 그야말로 군주 밑의 원수로써의 능력이 출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군략을 제외한 부분에서 너무 능력치가 떨어졌다는 것이지만.

3.2. 너무나도 허술한 처세술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렀다. 번쾌는 한신을 대왕이라 칭하고, 한신을 대접하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났다.
한신이 번쾌의 집을 나서며 혼잣말하였다.
"내가 살아서 번쾌와 같은 반열에 서는구나."
한서
(괴철) "대체로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허물을 받고, 때가 이르렀는데 시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족하(足下)는 이를 깊이 고려하십시오."
한신이 말했다. "한왕이 나에게 아주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내가 어찌 이익을 향하여 의(義)를 배반할 수 있겠소?"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신은 군대를 통솔하는 영역에서 만큼은 동시대의 또다른 명장이자 한나라의 숙적 항우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11] 신들린 전략과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정 반대로 본인의 주 분야인 전투, 전략 이외의 영역에서는 많이 모자란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특히 왕이나 신하로서 국가의 수성기 및 안정기에 보여준 행태는 부족함이 많았다. 한신은 일평생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태로 악명을 쌓았다.

한신의 행보를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중간함이다. 한신은 열렬한 충신[12]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모략가도 아니었다. 한신은 끝까지 유방의 충신으로 남던가, 아니면 확실하게 배신해서 자신만의 기반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가장 위험한 중간 지점에서 오래 서 있던 결과 결국 비극을 맞았다.

다만 한신이 작정하고 독립하려고 했어도 그게 말처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신이 제나라 왕에 오른 후에도, 한신의 기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방이 보내준 사람들을 지휘하는 자리였으며, 유방이나 항우와는 달리 한신은 창업 군주로 홀로 서기에는 정치적으로 기반이 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배신하지 않은 것보다, 차라리 배신하느니만 못한 행동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다.

유방의 입장에서 보면, 천하 최고 수준의 군재를 지녔고 숱한 전공을 올린 개국공신인 한신은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한신은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면 하루빨리 군권을 반납하고 자신에게 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처세했어야 했다. 반대로 배신할 생각이 있었다면, 제왕에 오른 뒤 하루빨리 제를 장악한 후 괴철의 책략을 받아들여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올라섰어야 했다. 배신의 길은 당연히 위험했겠지만, 적어도 실제 역사처럼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다 제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는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한신은 제나라 왕위를 요구할 정도로 야심은 있었지만 완전히 독립할 결심은 하지 못했고, 괴철이 그를 꼬드길 때에도 유방에게 입은 은혜를 의식할 정도로 충성심은 있었지만 완전한 복종도 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위치를 고수하여 의심받는 공신으로 남았고, 결국 전쟁이 끝나자 숙청 대상이 되었다.

주군인 유방과 다른 신하들 입장에서 보면[13] 한신은 심히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여 동료의 목숨을 해하고 국가의 대전략을 어그러 뜨리는 위험한 짓을 벌였고, 막바지에는 진짜 배신에 가까운 명령불복종을 해대는 잠재적 반란분자나 다름없었다. 당대의 모두가 두려워했던 항우를 제압하고 그 항우마저 두려워했던 자가 한신이었는데 그런 한신이 명령을 거부하는 짓을 하고 있었으니 유방의 두려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생각대로 판단했다. 자기 감정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고 결정적인 순간에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성적이고 이기적으로 판단했다. 항우가 보낸 무섭천하삼분지계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다른 인물들이 그랬듯 정치적인 고려를 통해 내린 게 아니라 그저 "항우는 나를 형편없이 대했으나 유방은 나를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다."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한 시점에서 한신은 유방이 세운 제나라 화친책을 그저 공적을 세우고 싶다는 이유로 자기 멋대로 어그러뜨려 최측근 참모 역이기를 죽게 만든데다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요구한 전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역이기의 사망은 고제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었고 더불어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만들고 서로 원수나 다름없던 제와 초가 연합한다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용저의 삽질 덕분에[14] 결과적으로는 한신이 이겼으니 망정이지 잘못하여 패배했다면 한신 본인도 죽거나 하북이 평정되고 항우가 최후의 반전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눈엣가시 같은 팽월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되고[15] 자칫하면 제후들이 또 다시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간을 보는 상황이 만들어져 유방에게 불리한 일만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고제가 위급할 때 무려 2년씩이나 원군을 보내지도 않으면서 반란을 핑계삼아[16] 왕위를 요구한 것은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신 본인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상사의 명령에 거래를 시도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거래를 시도하라도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걸어야 하는데도 한신은 초대형 사고를 친 직후에 유방이 한신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흥정을 걸어서 고제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공적 세우겠다고 제나라를 친 것도 근시안적이었는데 제나라를 역이기가 회유한다고 해서 한신의 공적이 가려질 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초나라와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최후의 결전인 해하 전투까지 남아있었기에 한신이 활약할 기회는 많았다. 제나라 회유건으로 역이기에게 공적을 뺏긴다고 해도 한신이 공신이 되지 못할 가능성은 0이라서[17]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괜히 유방 뿐만 아니라 유방 휘하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린 꼴이 됐다.

군주인 유방에게 단단히 밉보여 언제 토사구팽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 만큼 그때라도 정신 차리고 자기가 살 길을 찾았어야 했지만[18] 한신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 건지 이미 찍힌 상태에서 유일한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는 항우와의 연대를 유방과의 개인적인 의리 때문에 거부했고, 이는 항우의 몰락과 죽음은 물론 본인의 죽음에도 일조했다. 물론 가왕이니 제왕이니 한들 당시 한신은 한나라 소속이었으며 한신의 제나라 왕 작위와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서 받은 것이고, 유방의 충신인 조참 등 한신 주변의 인재들은 한신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한신을 감시했기 때문에, 유방을 적으로 돌리고 거병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항우가 마냥 믿을 만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항우는 한신을 홀대해 떠나게 만들었고, 유방이 먼저 관중을 점령했음에도 의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관중의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려 들며 신뢰도를 땅에 떨어뜨렸다. 거기다 원래는 의제가 해야 했던 제후들의 분봉도 자기가 해버리고, 의제가 거슬린답시고 죽여버렸으니 항우의 악명과 더불어 항우가 믿을만한 놈이 못 된다는 시각은 당대 중국에 퍼져 있었다. 게다가 천하삼분지계를 권유한 것도 이이제이를 노려서 유방과 한신이 둘다 자멸하거나, 한신이 유방과 척을 치게 만들 속셈이었으니 한신 입장에서 무작정 신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당시 상황은 누가 봐도 유방이 더 유리했으니, 굳이 한신이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항우를 편들 이유도 없었다. 거기다 그 항우를 위기에 빠뜨린 게 한신 본인이었으니, 설령 항우와 손을 잡고 유방을 치더라도 곧바로 항우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은 이런 점들을 고려하며 신중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한 뒤에 항우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항우는 날 홀대했는데 유방은 내게 잘해줬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거기다 항우의 제안을 물리친 건 둘째치더라도 정작 본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쟁이 끝나면 유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같은 건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내가 이만큼 공을 세웠는데 설마 폐하가 날 죽이겠어? 라며 안일하게 생각했을 뿐이고 결국 토사구팽과 본인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한신이 마냥 인정 없고 냉혹한 면모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충분한 기반과 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방과의 의리를 이유로 괴철의 반란 제안을 거듭 거절했다거나, 자신이 밥을 빌어먹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렸다거나 자신을 찾아온 종리말을 내치지 않고 숨겨준 일, 일개 패전국의 신하에 불과한 이좌거를 스승으로 모시고 거듭 예를 표하며 자문을 구한 일 등 한신은 형식상이나마 의리있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의리와 겸손한 태도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발휘되었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항상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당장 처음 한나라로 들어갔을 때부터 죽을 뻔한 상황에서 하후영과 소하가 목숨도 살려주고 치속도위라는 중책을 맡겼지만[19] 길어야 3달 정도 만에 유방이 크게 쓰지 않는다며 탈영했으며,[20] 괴철의 말에 넘어가 동료인 역이기를 죽게 만들고 적국을 멋대로 늘려버린 행태나 공적이나 상하관계가 명확하기는 했어도 한때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전우 번쾌관영을 두고 "내가 저 따위 놈이랑 어떻게 동급이란 말이냐?"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21] 특히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번쾌 홀대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번쾌는 여후 집안의 사람이라 정치적 입지와 발언권이 매우 뛰어나 한신을 구명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유방에게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한나라 수도에 포로처럼 잡혀있는 한신을 번쾌는 왕처럼 깍듯하게 배려하고 존중하며 대접했다. 한신에게 있어 번쾌는 말 그대로 제 발로 그물에 뛰어든 물고기였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하기만 했어도 다시 왕으로 복귀하는 것은 무리더라도 말년을 편하게 보낼 수도 있었음에도, 제 손으로 관계를 파토냈다. 이쯤 되면 토끼가 죽어서 사냥개가 삶아진 게 아니라 사냥개가 자기 몸에 된장 바르고 삶아달라 시위하는 수준이다.

또 본인은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이 자신을 돌보는 것을 그만두자 군자가 아니라고 꾸짖었으면서[22] 자신의 보전을 위해 의탁하던 종리말을 죽게 했고,[23][24] 죽기 직전에 괴철이 자신에게 반란을 사주했다고 불어버려서 괴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25] 이는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도우려 한 사람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신이 끝끝내 거병을 하지 않았고 유방이 잡으러 왔을 때도 무장조차 안 하고 순순히 포박된 것을 근거로 충신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한신이 충신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자신이 공을 세운만큼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하긴 하지만, 공을 세우려고 아군의 죽음을 방관하고 군주가 위기의 상황인데 왕위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충신의 개념하곤 거리가 엄청 멀다.[26]

애초에 유방은 통일 이후 이성왕을 숙청하는 등 공신들을 견제하는 작업을 했고 그 결과 팽월 등이 숙청당했고 소하, 번쾌 같은 최측근들까지 의심하여 죽이려는 면모를 보였다.[27] 때문에 이 같은 행동은 유방이 토사구팽의 대명사가 되는데 일조하기도 했고 팽월 등을 숙청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본다.[28]

그런데 이들과 한신을 동일하게 묶기 어려운 것이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고제가 견제했고, 소하가 협력했고, 여후가 제거했고, 장량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신을 변호하거나 소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귀띔해준 사람이 전혀 없었다.[29] 즉, 황제는 물론 대신들에게도 단단히 찍힌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나 현대에나 팽월 등을 숙청하거나 영포가 위기감을 느껴 거병하게 만들고 측근까지 숙청하려던 유방의 행태에 대해서 비판하는 경우는 있어도 한신의 경우에 관해서 만큼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누가 봐도 한신의 잘못이 명확하기 때문.[30]

거듭 서술하지만 한신은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부족했다. 조, 위, 연, 제 4개의 나라를 무찌를 정도의 공을 세웠으면 분명히 한신의 아래에도 여러 인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인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게 고제이다. 고제는 형식상 초나라의 밑에서 성장했지만, 원정 도중에 장량, 역이기, 관영 등을 직속 수하로 얻으며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31] 이좌거나 괴철의 사례를 보면 한신이 인재를 포섭하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방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신에게는 신하로 삼을 만큼 능력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괴철과 이좌거 등 일부 참모진이 전부고 부장급 인물들은 대부분 유방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다 지휘관급들도 조참, 관영 등 유방의 최측근들 뿐이었다. 그래서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들이 합류할 가능성은 없었다.[32] 그 와중에 이좌거도 유방의 지시로 산둥성 일대에 둔전을 개척하는 임무로 빠진 뒤 그곳에서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고제는 한신을 그나마 도와줄 사람까지도 빼낼 정도로 눈이 좋았고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 줄 조언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기껏 있다 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다. 단순히 인재복이 없어서 주변에 훌륭한 사람이 없이 쓸데없이 아첨만 하는 사람만 붙었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권력자 옆에는 항상 저절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능력있는 인재도 있겠지만 아첨만 해서 득만 보려는 소인배도 많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속에서 인재를 골라내어 중용하고 소인배는 내쳐버리는 것이야말로 권력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사람 잘 쓰기로 유명한 유방의 곁이라고 충신들만 몰려들고 소인배들이 없었겠는가? 유방은 소인배를 알아보고 쓰지 않았고, 한신은 소인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날뛰게 놔둔 것에서 둘의 용인술의 역량 차이는 이미 천지 차이였다.[33][34]

또한, 제후왕 자리, 그것도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가진 제왕과 초왕의 작위를 한신은 겉으로 내세울 명분이나 혈통도 없이 손에 넣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적절하기 짝이 없었고, 단순히 가치관 문제 이전에 한신의 무리한 제나라 정벌로 초한전쟁이 1~2년은 더 연장되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인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35] 이러니 유방 입장에선 한신에 대해 악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번쾌의 일화에서 보듯이 한신은 시종일관 공신들을 무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의 공훈을 믿고 교만해진 탓에 자신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애초에 그 졌다면 공훈이고 뭐고 당장 목부터 날아갔을 판에 공훈에 집착하여 전쟁을 일으켜놓고 자기가 공신이라고 광고하고, 거기에 자신의 보전을 위해서 종리말에게 죽어달라고 말한 것부터가 상황 판단도 문제지만 인망이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종리말을 어설프고 수상하게 거둔 탓에 본인의 왕 자리까지 뺏긴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차라리 처음부터 종리말을 붙잡아서 고제에게 바치던가 끝까지 지켜주든지 아니면 차라리 모른 척하고 풀어주는 것이 상책이었음에도 기껏 보호할 때는 언제고 고제가 종리말을 잡으려 들자 뒤통수를 친 것이다. 종리말이 격분해서 자살할 정도로 이기적인 짓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36][37]

제나라 왕을 탐한 것처럼 야심도 있었지만 막상 지금이 최적의 기회니 거병을 하라는 괴철의 제안을 거부하는 등 본인이 살 길을 찾아봐야 함에도 손을 쓰는 건 거부했고, 종리말을 숨겨주듯 자잘한 인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하후영처럼 막상 그를 끝까지 보호해준 것도 아니라서 자신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종리말을 죽게 했으니 인정을 위해 한몸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도발적인 행보를 보이며 여러 사람들의 부아만 돋구고 말았다. 즉 열렬한 충신도, 극단적인 모략가도, 대단한 선인도, 지독한 악인도 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데, 능력은 천하를 뒤흔든 천하대장군이자 영웅에 걸맞는 반면 정작 사람됨은 소인배스러웠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소인배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이중성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38]

결론적으로 한신은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군공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해졌으며 군사적 재능에 비해 정치적으로 사람을 부릴 줄 모르며 처세술의 부재로 인해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인망을 잃어갔다. 군사적 재능 하나만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어 왕의 자리까지 오른 그가 그 능력 때문에 토사구팽당해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점은 항우와 매우 비슷하다. 그나마 항우는 본인이 실권자이기라도 했지 한신은 유방의 수하이면서도 처신을 잘못해 본인의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

3.3. 역사서의 평가

진평이 말하였다. "폐하의 제장들 중 용병술이 한신을 뛰어넘는 인물이 있습니까?"

황상(유방)이 말하였다.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소."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등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마천,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漢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代)를 빼앗았으며, 조나라(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나라(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그가 괴철(蒯徹)의 유세를 거절하고 고조를 진구(陳丘)에서 환영한 것을 보면, 어찌 반란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직책을 잃어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드디어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입니다. 무릇 노관(盧綰) 같은 자는 고조와 같은 고향이라는 옛날의 정리(情理)를 가지고 연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한신은 열후가 되어 조회에나 참석하니 이것은 고조가 한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사마광은 그런 한신을 고조가 속이는 꾀를 써서 진구에서 사로잡았으니, 이것은 고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신 역시도 죄를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이 초나라(楚)와 형양(衡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한신은 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에 한이 초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는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사마광, 자치통감(資治通鑑)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한신의 힘인데, 만약 한신으로 하여금 괴철의 꾀를 들어 써서 제(齊)나라의 강함을 근거삼아 솥발처럼 세 곳에 할거하여 서로 대치하였다면 고조가 비록 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니, 역시 반드시 곤궁(困窮)한 뒤에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은 본디 배반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고조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분격(憤激)하여 반모(反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한신의 공은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집에 살아남은 이가 없게 하였으니, 고조는 진실로 한신을 저버림이 있습니다.
이맹현, 성종실록, 5년(1474) 8월 10일(임진) 5번째 기사
한 고조가 공신을 대우함을 있어 처음에는 옳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천하를 취하려고만 했을 뿐 잘 어거하는 도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가왕(假王)되기를 청한 것은 참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함을 면치 못하였고, 고제(高帝) 역시 마지못해 그의 청을 들어주고는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상하가 서로 의심한 끝에 결국은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도 쓸모가 없게 됐다.'는 탄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안처성, 중종실록, 2년(1507 2월 13일(정해) 2번째 기사
한신은 이미 재능 때문에 고제가 꺼렸고 여후(呂后) 또한 총애하는 심이기(審食其)와 더불어 한신과 팽월(彭越)을 죽이려고 도모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팽월에 있어서는 사인(舍人)을 시켜 무고하게 하여 죽였고 한신에 있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 소위 '진희(陳豨)를 시켜 모반하게 했다.'는 것은 곧 사인의 아우 사공(謝公)이란 자가 고발한 말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신의 반역은 나타난 증거가 없다.'고 했고, 여조겸(呂祖謙)이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대사기(大事記)》를 편수할 적에 모두 한신이 모반하려다가 주벌당했다는 것으로 말하자 주자는 '사람을 잘못 죄에 빠뜨린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진희가 대(代)의 정승으로 부임할 적에 따라간 빈객(賓客)의 수레가 1천 승(乘)이었는데 주창(周昌)이 빈객이 불법인지를 조사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진희에게까지 걸리게 되자 진희가 주벌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반한 것이니, 한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님이 매우 분명합니다. 주자가 지극히 은미한 내용을 추찰해 보고서 《강목》에 '여후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고 특서한 것입니다.

여후와 심이기는 평소에 제장들을 없애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제가 붕(崩)했을 적에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노관(盧綰)에게 붙어 연(燕)에 있었고 관영(灌嬰) 또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역상(酈商)이 심이기를 달래어 '만일 제장들을 족주(族誅)한다면 주발관영이 회군하여 그대들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므로 이에 발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서》 형법지(刑法志)를 고찰해보면 '한신과 팽월을 벨 적에 여후가 우선 혀를 모두 베도록 했다.' 했으니, 이는 자신의 추잡한 행실을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외람하게 형벌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희춘(柳希春)
한신이 어찌 군신의 의리를 안 사람이겠습니까. 한왕(漢王)과 함께 초나라(楚)를 치기로 기약해놓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우옹(金宇顒)의 반박
초래(草萊)에서 서로 의탁한 사이는 평상시의 군신 사이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한나라 신하들이 한왕을 족하라고 불렀으나 이것이 어찌 평상시 군신의 예이겠습니까. 한신이 기약을 어기고 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일입니다마는, 제(齊)나라 전부를 차지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한 형세가 되었을 적에 괴철(蒯徹)이 거듭 꾀었는데도 '내 어찌 이득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하고 잘라서 말했으니, 이는 그의 늠름한 대절(大節)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또, 항우를 처음 패배시켰을 때 한왕이 시급히 제왕(齊王)의 성으로 들어가 정예병을 모조리 빼앗고 다시 초왕(楚王)으로 봉했지만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그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서 사로잡았으니 이는 진실로 한왕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한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곧바로 쓰지 못한 것이고, 뒷날의 사마공과 대계(戴溪) 또한 그가 모반하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온공(溫公: 사마광)은 성격이 순후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리에 밝지는 못하여 평상시의 군신의 예를 고집하여 초래에서 서로 의탁한 사람을 책망한 것입니다. 한신이 죄없이 사로잡혀서 열후(列侯)로 강등되어 번쾌(樊噲)와 같은 서열에 든 것이 부끄러워서 불만스럽고 무료해 한 적은 있었겠지만, 모반했다고 한다면 심하게 무함한 것입니다.
유희춘의 재반박, 선조실록 8권, 7년(1574 2월 5일(경술) 1번째 기사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효종, 효종실록 4권, 1년(1650 7년) 7월 28일(기묘) 2번째 기사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순조, 순조실록 11권, 8년(1808 11월 19일(경진) 1번째 기사
무릎을 꿇었다고 한신을 겁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무릎을 꿇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정신이 멍해져서 털퍼덕 하고 무릎을 꿇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겁쟁이다. 다른 하나는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다. 나중에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분명 영웅이다. 화가 치민다고 덥썩 깨물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보양(栢楊)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곤경을 버티고 일어나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전백승하여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혹자는 한신의 모반이 (날조된 혐의라)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고, 혹자는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그가 핍박을 당해 최후의 발악으로 모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신은 영웅 시대의 영웅으로서 치욕을 참았으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가끔씩 우유부단하고 이해득실에 노심초사했지만, 후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음미할수록 깊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음미하는 이를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70 中

4. 기타


"장군,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병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자 한신은 마침내 그에게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병졸과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어 넣었다.[40]

또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炮),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장(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炮),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 모습을 본 병졸은 갸우뚱하며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 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병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뒤 병졸은 공직을 사양하고 병법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 조각 대신 나무조각을 깎아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 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5.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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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량본인도 유방에게 항우를 이기려면 팽월, 영포, 한신 이 세명을 반드시 기용해야 가능하다고 언급하며 유방의 가장 중요한 전력으로 평가할 정도였다.[2]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에 등재시키며, 그가 중국의 지배자였음을 확고히 했다. 그 항우를 꺾고 중국을 지배한 유방의 후손인 한나라에서 역사책을 쓰면서 상당히 용기있는 행동을 한 셈. 충언을 했다고 자신을 궁형에 처한 나라였으니 충성심이 남아있었을리가...[3] 용저항우가 항상 중요한 전선을 맡겼고 훗날 자신을 죽인 공로로 이 된 여마동과 더불어 항우의 소꿉친구였을 정도로 항우가 중히 여겼던 장수다.[4] 역으로 보면 모든 세력이 공평하게 국가체제와 병력의 질이 낮았던 초한쟁패기 당시의 상황 덕분에 한신의 환상적인 활약이 가능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데 체계적으로 훈련된 병력과 숙련된 지휘관을 갖춘 질 높은 군대가 주류이던 시대였다면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더라도 개인의 역량으로 전장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훨씬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재적인 개인이 활약하기에는 공평하게 우세한 환경보다는 공평하게 열악한 환경이 더 유리하다는 것. 또한 아래에서도 거론된 내용이지만 이렇게 급조된 열악한 군대였기에 거의 경력 없는 한신 같은 이가 그저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짐작만으로 지휘권을 받는 것도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 다만 애당초 한신의 군대는 고제로부터 받은 것인데 고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아왔으므로 한신의 군대 자체는 꽤 숙련된 군대였을 가능성도 사실 적지 않은 편이다. 무엇보다 배수진을 걸었을 때 잠시나마 버텨준 것만 해도 급조되고 열악한 군대가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당장 강물로 뛰어들지 않고 몇 번이나 진여의 군대를 막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고.[6]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이후 항우를 상대할 방법이라도 있나 싶어서 한신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신은 유방의 말에 막힘 없이 방법을 제시하면서 유방의 신뢰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을 움직여 항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7] 이 평판은 심각할 정도로 한신을 저평가하게 만들었다.[8]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본래 다른 세력의 군대에 있었다가 탈영하여 새 군대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일개 젊은 하사가 갑자기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나라와의 전쟁들을 모조리 이기고 나라 몇개를 무너뜨린 셈인데, 경력상 정말 말도 안되는 압도적 업적이며 상상만으로도 혀를 내둘러야 할 지경이다. 더구나 그 육군참모총장이 불과 몇 년 전엔 자기 밥벌이도 못 벌어 먹고 동네방네 손가락질을 받던 한량 백수 처지였으니. 요즘 말로 소설로 이런 인생사를 써내면 핍진성이 없다고 욕먹기 딱 좋은데, 한신은 이런 인생사를 현실에서 살았던 셈이다.[9] 다만 하사와 비교될 정도로 낮은 직책은 항우 아래에서 일했을 때 창잡이였던 집극랑과 비교했던 것이고, 유방군에 합류했던 시점에서는 그가 받은 직책이 군량을 총괄하는 직책인 치속도위인데 이는 현대의 육군 하사보다는 훨씬 높은 직책이 맞고, 그의 악평을 생각하면 꽤나 준수한 수준의 대우였다. 한신이 이제 막 유방군에 합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낮은 지위는 아닌 셈.[10] 한신에 관련된 정사의 기록 중 한신은 행군 이후 시간이 날 때 행군 중 보았던 지형들을 복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초군에 입영했을 때부터 온갖 중원을 행군하고 전투를 복기했던 경험이 대장군이 되어서 6개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보여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만개했다.[11] 항우는 일신의 무력이 당대 최강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전투에 참여해 적들을 베어넘기면서 직접 불리했던 전투의 판도를 본인의 전투력으로 유리하게 뒤집은 적도 많았던 데 반해, 한신은 직접 창칼을 휘두르며 전투 선봉에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싸움 맨 뒤에서 전술적인 지휘에 매진했기 때문에 순수한 지휘 역량만 놓고 보면 항우를 충분히 상회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냉병기의 시대였기에 부대를 지휘하는 총대장의 무예 솜씨가 병사들의 사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시기임에도 굳이 자신의 무력적인 부분을 병사들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마치 현대전처럼 전술 지시만으로 신출귀몰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 자존심 높던 항우도 결국 한신의 전략적 식견을 인정하며 한신이 적 지휘관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 걸 보면 당대 최고라 해도 과하지 않다.[12] 비록 여후는 공신을 숙청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유방이 전쟁이 종결된 후 공신들을 이런저런 명분으로 제거했기에 모를 일이긴 하지만, 열렬한 충심이라도 보였다면 유방은 전후에도 한신을 믿고 기용했을 테니 어쩌면 토사구팽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소하처럼 적당히 압박만 좀 하다가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신의 말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초한전쟁에서 생사대적인 항우를 잡아내기는 했으나 여전히 중원 전역에서는 소규모의 반란이 지속되고 있었고 약해진 중원을 노리는 유목제국 흉노의 지배자 묵돌선우라는 강적이 있었으니 오히려 계속 공적을 세우며 승승장구했을 수도 있었다. 또한 유방의 말년에는 여후를 중심으로 여씨의 권력장악이 가시화되었을 시점인데 한신이 유방의 신뢰를 받으며 살아있었다면 여후를 견제할 기둥으로 밀어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방 사후 한신이 살아 있었다면 한신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공신으로서 강력한 군권을 쥐고 있었을 테고 여후와 여씨 일족이 견제 없이 날뛰는 상황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신은 정확한 생년은 불명이지만 유방과 기존 신하들보다 나잇대가 어렸을 것으로 보이는 지라 그들에 비해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만큼 앞날도 창창했다. 결국 한신은 초한대전이 끝난 뒤에도 자기가 맡을수 있는 역할이 많았고 능력을 계속 뽐낼 기회도 많았으나 본인 처신과 어중간함 때문에 허사가 됐다.[13] 훗날 한신이 초왕 작위를 박탈당할 때나 처형당할 때의 일화를 보면, 한나라의 신하들 대부분은 한신의 실각과 처형을 진심으로 쌍수들고 환영할 정도로 한신을 싫어했다. 오히려 유방이 자기 휘하 신하들보다 온건하게 한신을 대해준 편이었다.[14] 정확히는 분봉을 인색하게 하여 용저를 조급하게 만든 항우에게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할수 있다.[15] 팽월이 날뛰던 양나라 지역은 제나라 접경지역으로 초한전쟁 초반기 팽월이 본격적으로 항우를 괴롭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나라 전영이 팽월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지원해줘서 가능했다. 이 인연 때문에 제나라 멸망후 실권자이자 전영의 동생인 전횡도 팽월에게 의탁한다.[16] 거기다 애당초 이 반란도 사실 한신이 역이기를 통수친 것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17] 애당초 역이기가 제를 설득하러 갈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한신이 조와 대, 연을 평정했기 때문이었다. 역이기의 공적조차 한신의 덕을 본지라 어찌보면 역이기의 공적조차 한신의 공적이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8] 단단히 찍힌 상태에서 왕이 좌천은 커녕 진급시켜주면, 배신을 할려고 각을 재던가 적당히 사리면서 신뢰를 되찾는 것 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은 처신이다. 보통 이 경우 어차피 오래 볼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장 소하의 경우는 이상하게 포상이 많이 오자, 의심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가족들을 다 입대시켜서 무사히 넘어갔다.[19] 한신의 행태 때문에 치속도위가 엄청난 한직으로 여겨지지만 도위는 당시 상당한 중책으로 이전 진나라 장한 군대의 3인자로 적왕까지 오른 동예도 도위 직책이었으며 분봉 직후 유방 세력에서 도위직에 올랐던 인물은 따로 거병해서 활동하던 역상(농서도위)말고는 없었다. 친인척이던 번쾌도 당시에는 낭중에 불과했다.[20] 흔히 한신이 제나라 정벌 전후로 지위가 올라가면서 교만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신의 행태는 유방 진영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다. 항우 휘하에 있다가 자기 꾀를 써주지 않는다고 도망쳐 나온 것도 항우가 한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한신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인물이었다는 방증이었다.[21] 한신이 대놓고 비하한 번쾌와 관영은 한신만큼은 아니었다고 해도 고제 휘하 중 최상위권의 장수들이였으며 고제가 거병했던 시절부터 함께한 패현 친구들이었던지라 고제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다. 연공서열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군주의 최측근을 모욕한 것이다.[22] 한신이 뻔뻔스러운게 아니다. 당시 관념상 한번 식객으로 받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게 도의였기에 정장이 잘못한 건 맞긴 맞다. 문제는 그래놓고선 한신 본인은 정장보다 더 심하게 군자의 도의를 어겼다는게 문제.[23] 하후영만 봐도 적장이었던 계포가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자 그를 숨겨주고 고제에게 그의 사면을 청하는 의리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고제도 계포한테 욕 한 사발 퍼붓는 정도로 용서했다. 그렇기에 만약 한신이 하후영처럼 종리말의 사면을 청하였다면 이미 항우도 죽었겠다 고제도 그를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리거나 사면해주었을 가능성이 컸다.[24] 사기에는 종리말이 유방을 곤경에 자주 처하게 만들어서 그랬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같은 이유로 체포 명령이 떨어지고 초에서 활약했던 계포는 하후영의 변호가 있었다 하더라도 항복하자마자 벼슬까지 내려줘서 중용했다. 그 외에도 항백 등의 항씨 일족들도 열후에 3명을 봉했을 정도로 대접받았다. 유방과 적대했거나 싸워봤던 인물들이 한둘이 아닌데 전부 다 잡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실제로 정공 정도를 제외하면 유방이 항장을 무자비하게 죽인 적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한신조차 여후가 죽인 것이지 유방은 죽이려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한신에게 독립을 권유한 괴철도 그가 당당하게 행동하자 사면해줬다. 이를 보면 종리말은 차라리 유방에게 귀순했더라면 벼슬을 받거나 벼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면받아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25] 그럼에도 괴철은 한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빠져나오려 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하게 행동했고, 그 덕에 고제에게 사면받았다.[26] 더구나 한신은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요구할때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라고 언급했는데 유방과 당시 유수구 전투에서 이미 죽은 전광이 들었다면 기가 찰 일이었다. 애초에 제가 초와 손을 잡은 것은 한신이 역이기의 변설에 넘어가 항복한 제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한신은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는지 제나라는 신용할 만한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한 듯하나 이미 항복한 군대를 공격한 시점에서 거짓과 속임수로 명분을 잃은 건 한신이었다.[27] 하지만 이 둘은 나름대로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하는 유방과 기타 신하들이 전부 항우를 상대하기 위해 수도인 관중 밖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라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근거지를 잃고 인질까지 잡힐 우려가 있었다. 번쾌는 여씨와 너무 가까웠다는 게 문제였는데, 특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여씨 집안에 부족한 준재를 채워줄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소하는 주변의 도움 덕에 자기 자신이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자기 친척들을 군대에 보내는 등 알아서 뜻이 없음을 피력하는 조치를 잘 취했고, 번쾌의 경우 처음부터 의심했던 것은 아니고 번쾌를 체포한 것 자체가 고제 말년에 벌어진 일이라 고제 사후에는 진평 등의 협조도 있어서 더 이상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28] 다만 팽월도 한신 정도로 유명하지 않을 뿐 해하 전투 당시 왕 자리를 탐내 왕위를 준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왔고 또, 왕이 되고 나서도 중앙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등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숙청한 게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거기다 팽월은 아랫사람 관리도 잘 한 편이 아니라서 스스로 약점을 만든 거나 마찬가지였다.[29] 사실 다른 이성왕과 다르게 유방은 한신을 살려주려고 했다. 유방은 한신을 제왕에서 초왕으로 쫓아냈을 때,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했을 때 모두 한신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군략을 지녔기에 한신이 이성왕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이었고 팽월과 영포 등은 비슷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숙청했음에도 유방은 한신에게는 유독 물렀고, 심지어 한신이 죽기 직전에도 원정길에 데려가서 자기 곁에 두려고 했다. 그 마지막 동앗줄마저도 좌천을 이유로 심사가 꼬인 한신이 꾀병을 이유로 기어코 걷어찼다. 결국 한신을 위험하다고 여긴 여후와 공신들이 협력하여 숙청해버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갔다.[30] 다만 팽월과 영포에 대해서도 후대에는 그들을 숙청한 것에 대해 비판했을지 몰라도 당대에도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영포는 사실 유방이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가 먼저 반란을 일으킨 것이고 팽월은 황제에게 바쳐야 할 공물을 자주 빼먹었다. 이는 반란의 의심을 받기 충분한 사유다. 사실 유방 입장에서는 그래도 원래 자기 부하이기는 했던 한신보다 오히려 팽월을 더 수상쩍게 여겼을 지도 몰랐을 일이다.[31] 특히 장량은 원래 한나라 재상 가문 출신이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고, 유방이 날건달이던 시절부터 시황제 암살을 시도한 대선배님인데, 평민에 산적 두목 출신인 유방이 이런 거물의 호감을 사 휘하로 영입한 것이다. 유방도 이전부터 장량에게 공을 들였고 그의 호감을 사긴 했지만 한왕 성이 죽고 나서야 장량을 정식으로 수하로 들일 수 있었다.[32] 고제 주위의 인물들은 대개 세 부류인데 고향 동기면서 고제가 거병하자 따라 나선 인물들(소하, 조참, 하후영, 주발, 주창, 번쾌, 노관 등 동네 친구들)과 원래 외부 세력이었지만 고제에게 은혜를 입어서 넘어온 인물들(장이, 장오, 팽월, 영포 등 제후들), 그리고 일부러 고제의 신하가 되기 위해 찾아온 인물들(관영, 역이기, 역상, 근홉 등의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한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33] 다만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이다. 당장 유방 휘하에 있었던 유학자 숙손통의 말만 들어봐도 알 수 있지만 그 시절은 난세였기 때문에 애시당초 소인배든 뭐든 도움이 된다면 누구라도 써야 했다. 다만 유방은 그런 소인배들을 적재적소에 잘 갖다 썼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옹치다. 반면 한신은 오만한 성격이라 주변에 인재가 없었는데 실제로 한신이 높이 산 인물은 이좌거 뿐이었다. 당장 번쾌나 관영만 봐도 그렇게 폄하될 만한 인물들도 아닌데 한신의 평은 박하기 짝이 없다. 인재가 안 모였다기보단 분명 있었을 법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그 오만한 성정 때문에 안쓴 인재와 못 쓴 인재가 쌍방으로 많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34] 당장 이좌거를 데려온 것도 이좌거가 자기 이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좋지만 결국 따지고보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자기보다 못한 인재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듯 한신은 생각 이상으로 오만한 인물이었다.[35] 당장 제나라의 항전 때문에 한신이 제왕에 오른 뒤에도 1년 가까이 제나라 저항세력과 전투를 벌여야 했으며 조참을 비롯한 상당수의 한나라 군대가 해하 전투에 참전도 못하고 제나라에 묶여서 저항세력과 싸워야 했다.[36] 자신의 욕망과 보신을 위해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파촉에서 소하와 하후영을 버리려고 시도한 것과 역이기에게 공적을 뺏기기 싫다는 이유로 역이기를 죽게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한신은 원래부터 이런 자였다는 것. 종리말에게만 이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이런 식이라는 게 괴철에게 의리를 거론한 것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의 근거가 되고 있다.[37] 한신이 괴철에게 항우와 손을 잡으라는 말을 듣고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도 의리보다는 유방으로부터 받은 보상이 항우보다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38] 특히 이러한 모습을 보인 또 다른 예시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서 뛰어난 전술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추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경계에 반란을 계획했을 때 인망이 없다보니 따르는 병사가 없어 도망친 경우다. 요시츠네와 한신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한신도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39] 희신이라고 쓰는 이유는 주나라 왕족의 성이 희이며,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주나라의 동성 제후국진(晉)나라의 희성 진씨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공족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은 성과 씨(족명)의 차이가 남아 있었던 시절이며 남자는 씨, 여자는 성을 따랐기 때문에 회음후 한신과의 구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한왕 신을 굳이 씨가 아닌 성을 붙인 희신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그저 후세의 현대인들이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쓴다는 것이다.[40] 중국 장기는 우리와 달리 중간에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41] 보통 유방은 딱히 한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며 한신의 죽음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는 의견의 우세하다.[42] 토사구팽의 유래는 범려(范蠡)이다. 다만 범려는 토사구팽을 피해 잘 먹고 잘 살다 죽었고, 워낙 이쪽이 임팩트가 강하고 널리 알려져 한신과 유방의 일을 가리킨다.[43] 범려의 일화에서 월왕 구천에게 토사구팽당한 건 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과거 동료 문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