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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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폐왕(廢王)[1] |
성 | 희(姬) |
휘 | 대(帶) |
아버지 | 혜왕 |
생몰 기간 | 기원전 672년 ~ 기원전 635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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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나라의 비정통 왕. 혜왕의 아들이며, 양왕(襄王)은 혜후의 소생이 아닌 다른 여자 소생.[2] 양왕(襄王)의 이복 동생. 태숙대(太叔帶)라고도 한다.2. 생애
2.1. 반역아 희대(姬帶)
양왕은 제환공과 제후들의 도움으로 즉위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 혜왕이 양왕이 아닌 젊은 후처 소생인 왕자 대를 총애했으므로 양왕의 입장에서는 지위가 여전히 불안정해 왕자 대가 눈의 가시였다.양왕 3년(기원전 649년), 양왕이 왕자 대의 부름을 받고 온 융적 때문에 낙읍(洛邑)이 침범 당해 도성에 진입해 도성의 동문을 파괴했다. 그러나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군사를 몰아 주나라를 도와 융적들을 격퇴했다. 그 해 가을, 진혜공은 유인과 양왕이 강화하라고 요청했다.
양왕 4년(기원전 648년) 여름, 주양왕은 왕자 대가 융적들을 끌어들였으므로 병사를 몰아 왕자 대를 쳤다. 가을에, 왕자 대는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양왕 5년(기원전 647년) 봄, 제환공이 중손추를 보내 주나라에 입조해 왕자 대의 사정을 말했다. 중손추는 양왕을 알현한 후 돌아와 양왕이 왕자 대에게 분노가 식지 않아 돌아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양왕 14년(기원전 638년), 양왕은 대신 부진(富辰)의 말에 따라 제나라에서 희조를 불러왔다.
2.2. 두번 반란 끝에 죽다
애초에 왕자 대는 어머니 혜후의 총애를 받아 혜후는 혜왕의 유지에 따라 왕자 대를 잇게 하고자 했다. 왕자 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양왕이 융족 여자인 외후와 혼인했는데, 부부 금슬이 좋지 못했는지 외후는 왕자 대와 사통했다.양왕 16년(기원전 636년), 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외후를 내쳤다. 당시 대신 퇴숙, 도자 증 등이 양왕의 명을 받들어 융족을 이끌고 정나라를 쳤다. 두 사람이 융적들에게 외후를 내친 한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할까 두려워 그들은 융적과 함께 왕자 대를 따라 양왕을 쳤다. 양왕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가을, 퇴숙, 도자봉은 왕자 대를 모시고 융적들과 함께 주나라를 쳐서 주나라 병사들은 대패했다. 그리하여 주공기보, 원백, 모백, 부진 등이 포로로 잡혔다. 양왕은 정나라로 달아나 정나라의 사 땅에 이르렀다. 왕자 대는 왕을 칭하고, 외후와 함께 온 땅에 머물렀다.
양왕 17년(기원전 635년), 양왕은 진(晉)나라에 그 일을 알리자 진문공(晉文公)은 양왕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진목공(秦穆公)은 황하 변에 이르러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것은 양왕을 모시기 위함이었다. 진 문공은 대신 호언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秦)군에게 퇴군하게 하고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3월 19일, 군대를 양번 땅에 주둔했다. 우군은 온 땅을 포위했고 좌군은 양왕을 맞이했다. 4월 3일, 양왕은 왕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온 땅의 왕자 대는 습성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을 왕자 대의 난 혹은 자대의 난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