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92em; letter-spacing: -.4px" | 황하 문명 하(夏) | ||||||||
상(商) | |||||||||
서주(西周) | |||||||||
동주(東周) | 춘추전국시대 ( 춘추 | 전국 ) 춘추오패 | 전국칠웅 | ||||||||
초한쟁패기 후초(後楚) | 서초(西楚) | 십팔제후국 | |||||||||
전한(前漢) | |||||||||
신(新)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삼국 | 위(魏) | 촉(蜀) | 오(吳) |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환초(桓楚) | 오호십육국 전진(前秦) | ||||||||
남북조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후량(後梁) | |||||||||
수(隋) | |||||||||
당(唐) 무주(武周) | 위연(僞燕) | 황제(黃齊) | |||||||||
오대십국 | 여러 민족들 | ||||||||
요(遼) 서요(西遼) | |||||||||
북송(北宋) | |||||||||
남송 (南宋) | 금(金) | ||||||||
몽골 제국 | |||||||||
원(元) 북원(北元) | |||||||||
명(明) 순(順) | 남명(南明) | 후금(後金) | |||||||||
오주(吳周) | 동녕(東寧) 청(淸) 태평천국(太平天國) | |||||||||
중화민국 (中華民國) 군벌세력 | 청황실 소조정 |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 호법정부(護法政府) | ||||||||
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 }}}}}}}}} |
춘추전국시대 왕조
|
[clearfix]
1. 개요
중국사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지금의 산둥 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춘추오패/전국칠웅 국가 중 하나다.작위는 후작이었다. 수도는 임치, 현재의 산동성 쯔보 시이다.
2. 역사
제 왕조는 크게 춘추시대의 강제(姜齊)/전국시대의 전제(田齊)로 구분한다.2.1. 춘추시대의 제나라(강제)
자세한 내용은 제(춘추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전국시대의 제나라(전제)
자세한 내용은 제(전국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3. 수도 임치
임치는 춘추전국시대 굴지의 크고 아름다운 대도시로[1][2] 중간에 단 두 번, 그것도 잠시 천도를 제외하고 강제, 전제 시대까지 계속 수도로 사용되었다. 그 두 번이란 다음과 같은데 처음에는 영구였다가 강제의 호공 때 박고로 옮겼으며 호공을 죽인 헌공이 다시 영구로 옮겨 임치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또 전국시대 전제의 민왕 때 연나라와 그 연합군의 침략을 받자 임치를 버리고 거(莒)[3]로 잠시 수도를 옮긴 것을 제외한다.4. 문화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서 꾸준히 강국이었고 물산이 풍부했던만큼 제나라는 문화와 사상 면에서 매우 발전했던 나라였다.춘추전국시대가 숱한 인재들이 넘쳐났던 시대이지만 특히 유명한 명군, 명재상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다. 명군으로는 일단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 제환공이 있고 이 나라에서 배출된 명재상들이 세 명 있는데 바로 주나라의 재상 강태공, 관중과 안영.
병법가로는 역시 육도삼략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4]
전국시대에는 수도 임치에 직하 학당을 세워서 많은 사상가들을 모아 자유롭게 사상을 펼치도록 후원하였다. 그 가운데 맹자가 유명하며, 맹자와 논쟁을 나눴던 사상가들도 제나라에 근거를 두었다.
전반기인 강제 시대는 묘하게 저질스러운
4.1. 직하학궁
상술한 것처럼 역사에서 허무하게 퇴장했지만 제나라는 전국시대에 학문적으로도 중요한 역할도 했었다. 당시 중원의 명문학교였던 직하학궁이 제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걸출한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배출되었으며 명저들이 저술되기도 했다. 과거 이 학교가 있었던 장소인 쯔보에 21세기 직하학궁을 목표로 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는 사극 대진제국 4부인 대진부 61화, 62화에서 다음과 같은 이사와 직하학궁 학자들 사이의 토론에서도 언급된다.좨주 [6]: 이 자는 초나라 말단 관리 출신으로 직하학궁에 와서 제왕학을 익혔다고 우쭐댔지. 초왕은 능력이 부족하고 육국은 모두 약하니 진나라에 가서 공명을 얻으려 했으나 실은 갈 곳이 없어 여불위의 집에 문객으로 있다가 어떤 수단을 썼는지 진나라 왕궁에 들어갔지. 그러다 어린 진왕의 믿음을 얻었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네. 이사, 내 소개가 마음에 드는가?
이사 : 애써 뜻을 세우지 않으면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없고 애써 실천하지 않으면 큰 공을 이룰 수 없다지요. 저는 말단 출신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건데 치욕은 비천하기 때문이고 비천함은 가난함 때문이니 비천한 상태에서 분발하지 않고 스스로를 높여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면 재주부리는 원숭이와 같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했고 순자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 한 권을 깊이 파지도 않았고 다양한 책을 읽지도 않았지만 진왕의 믿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학식은 저 못지 않으니 진나라에 가면 왕께서 중용할 것입니다.
좨주 : 자네의 말솜씨가 뛰어나 반박을 못하겠군. 하지만 우리 직하학궁은 삼백년의 역사를 지녔고 법가, 유가, 명가, 병가, 농가, 음양가 등 제자백가 천여 명을 배출했고[7] 맹자, 추연, 신도, 신불해, 노중연, 순자 등이 이름을 빛냈으며 맹자, 송자, 전자, 와자, 안씨춘추, 순자 등의 명저가 저술되었네. 이사, 그대의 재주가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나?
이사 : 비교할 수도 없지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대진제국 4부 대진부 61, 62화 중에서-
이사 : 애써 뜻을 세우지 않으면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없고 애써 실천하지 않으면 큰 공을 이룰 수 없다지요. 저는 말단 출신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건데 치욕은 비천하기 때문이고 비천함은 가난함 때문이니 비천한 상태에서 분발하지 않고 스스로를 높여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면 재주부리는 원숭이와 같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했고 순자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 한 권을 깊이 파지도 않았고 다양한 책을 읽지도 않았지만 진왕의 믿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학식은 저 못지 않으니 진나라에 가면 왕께서 중용할 것입니다.
좨주 : 자네의 말솜씨가 뛰어나 반박을 못하겠군. 하지만 우리 직하학궁은 삼백년의 역사를 지녔고 법가, 유가, 명가, 병가, 농가, 음양가 등 제자백가 천여 명을 배출했고[7] 맹자, 추연, 신도, 신불해, 노중연, 순자 등이 이름을 빛냈으며 맹자, 송자, 전자, 와자, 안씨춘추, 순자 등의 명저가 저술되었네. 이사, 그대의 재주가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나?
이사 : 비교할 수도 없지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대진제국 4부 대진부 61, 62화 중에서-
5. 한국사와의 관련
연나라와 함께 고조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나라인데 육지로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고조선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덕택에 유물도 출토되곤 한다. 연나라만큼은 아니었지만 지리적으로 가깝다보니 동시에 분쟁도 간혹 있었다.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간의 거리는 100km 밖에 안 되며, 그 100km 중에 60km 정도는 꽤 큰 섬, 작은 섬들이 20여 개 주욱 늘어져 있어서 더욱 가깝다.[8]제나라가 발(發)[9]과 조선(朝鮮)에서 물품을 수입하는 기록이 있으나[10]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무역이 이루어진 만큼 정치적인 관계도 가졌을 수도 있지만 분서갱유로 인한 제나라 사서의 소실로 인해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역시 의문점이 많다. 그래도 여러 사서들을 보면 진나라와 초한쟁패기 시절에 제나라 출신 주민들이 고조선으로 많이 이주하기는 한 듯하다.[11]
6. 기타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가 현 산동을 처음으로 통일한 산동 지역의 장기 왕조였기에 전근대에는 제가 산동의 대표적 별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12][1] 《사기》의 <소진 열전>에는 임치의 가호수가 70,000호로, 대략 한 호에 3명의 남자를 징발할 수 있으니 임치 한 도시만으로도 200,000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언급된다. 기원전 4세기 기준 한 도시의 인구가 수십만 명이었다는 것이다.[2] 실제 일본의 고고학자 세키노 다케시(關野雄)의 연구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 때의 임치성은 성벽 둘레만 20km에 달하였고, 도로의 폭이 20m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정도면 중국은 물론이고 당대 세계에서도 최대급의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3] 초나라에게 멸망한 거나라 영토였다.[4] 육도삼략 자체는 강태공의 명성을 차용한 후대의 위서라는 설이 중론이다.[5] 그래도 공자는 제환공과 관중이 아니었다면 중원은 이적의 차지가 되었을 거라면서, 이들이 사치를 부리거나 도덕적 흠결이 있는 것은 맞지만 공이 더 크다고 보아 그 정도면 어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래놓고 관중이 예를 안다면 세상에 예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 까기는 했다.[6] 학궁의 학교장으로서 지금으로 치면 실질적 교육부장관.[7] 진나라에 시집간 오추 공주도 이걸 거론하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외에도 수도인 임치의 술이 중원에서 알아주는 미주라는 언급, 병법서도 상당수가 제나라에서 저술되었다면서 문화 수준은 일곱 국가들 중 제일이라고 언급된다.[8] 참고로 부산 ~ 대마도 거리가 55km.[9] 맥(貊), 번(番), 불여, 부여, 부리, 벌 등 맥족과 연관짓는 설이 있다.[10] 다만 이때는 직접적인 교역보다는 내이(萊夷)족을 통해서 중계교역을 거친 다음에 비싼 값에 수입했을 가능성이 크다.[11] 기원전 170년대 여씨 반란과 제후왕들의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너 낙랑군에 자리잡은 왕중(王仲) 같은 인물이 있다.[12] 다만 현재 산동성의 정식 별칭은 노(魯)가 되었다.